매주 월요일 밤 11시면 입맛이 씁쓸했다. 왜 우리는 월요일 밤부터 '예능'을 보아야 할까?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도 온통 '예능'뿐이다. 도대체 왜 월요일부터? 라는 힐난에, 월요병엔 예능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할 말이 없지만, 드라마와 예능의 범람에 한숨이 쉬어질 뿐이다. 그런데 그런 월요일의 가벼움을 타개해 줄 묘책이 등장했다. 오랫동안 이리저리 치이던 <mbc스페셜>이 돌아왔다. 그렇다. 이게 원래, <mbc 스페셜>의 자리였다. 한 주의 시작, 세상사 좀 진지하게 바라보며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진심어린 시선들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돌아온 <mbc스페셜>, 4월 9일 방영분에는 다수의 '이재용'들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vip 이재용 
우리가 아는 이재용은 그 사람이다. 맞다. 삼성전자 부회장, 얼마전 1년 만에 은근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교도소 문을 나서던 그 사람이다. 그가 감옥에서 즐겨 보았다던 드라마 속 재벌가의 자제는 결국 자기 삶의 모토였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 위해, 족벌 경영 체제를 일소하고, 그 자신은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재벌가를 나왔다. 하지만, '재산이나 지분, 자리 욕심이 없다'던, 그가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눌 수 있는 참된 기업인이 되겠다'던 부회장님은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스물 일곱 삼성전자 평사원으로 출발한 그, 그는 아버지로부터 단돈 60억(?)억을 증여받았다. 물론 이 돈에 대해서는 증여세 16억원의 증여세를 당당하게 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워렌 버핏도 울고갈 이재용의 귀신같은 투자 전략은 단 2년만에 에스원과 삼성 엔지니어링 주식을 사고 팔아 수익률 1300% 563억원을 남겼다. 심지어 그의 투자 전략을 따르지 못한 세법까지 개정시키며 투자에 투자를 거듭하여 증식된 그의 자산은 2018년 기준 9조원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 사람'이 아닌 이재용들도 있다. 학창 시절 벌을 받기 위해 복도에 서있으면 선생님들이 지나가며 '아니 왜 회장님이 여기 서계세요?'라 놀렸던 이름, '보험 관리사'로 명함에 이재용을 새겨넣으면 한번이라도 더 봐주던 이름, 그 이름들을 가진 또 다른 이재용들이 있다. <mbc스페셜>은 이 땅에 살아가는 '평범한(?) 이재용을 통해 무사히 감옥 밖으로 탈출에 성공한 '이재용'을 '논박'한다.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거저 준 60억은 없었다. 대신 16살부터 식당 알바부터 시작해서 안해본 일이 없이 도달한 이십대 중반의 청춘이 있었다. 음악적 재능은 있었지만, 음악적 재능을 버텨줄 집안이 없어서,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꿈이 있었다. 



이재용들로 이재용을 논박하다. 
다큐는 우리가 '이혁'으로 알고 있는 전 '노라조의 멤버'였던 이재용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이재용이었기에, 지난 촛불로 광장을 뜨겁게 만들었던데 기꺼이 일조한 이재용에 유독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던 그는, 그가 지켜본 이재용 재판 과정을 노래로 만들었다. '시발남아'(時發男娥)'

다 까고 말해 넌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처음과는 다른 말로
또 소설을 쳐 써대지
주어진 시간 정확한
사실만을 모두 얘기해
소설은 그만 쳐 쓰고
뉴스를 얘기해 우리가 원하는
너 제일 잘 알잖아 뭘 잘못한 건 지

그리고 그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활동했던 '노라조'에서 나와 조금은 배고플지도 하고자 했던 음악의 길에 섰다. 자신의 길에 선 또 다른 이재용도 있다. 서른 중반, 포크레인 시험장에 선 그는 아직 이 기계가 서툴다. 이번까지하면 열 번째 직업, 이재용이란 이름을 새겨넣은 보험 외판원에서 부터, 자동차 영업 등등 아이 둘의 아버지가 되어서도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한 채 여전히 또 새로운 길에 선 그는 이 일이 마지막 선택이기를 바래본다.  스물 다섯이라고 다를까. 16살부터 온갖 안해본 일이 없이 돈을 모으던 이재용은 스물 중반 '돈'이 아닌 자신이 하고픈 걸 하기 위해 공연 예술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현실은 유치원 아이들을 상대로 한 계약직, 꿈은 그의 통장을, 그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 결국 한 달 뒤, 그와 그의 동료는 대구의 근거지를 떠난 안성에서 일당이 아까워 고향가는 돈도 아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 '이재용'이 아닌 '이재용'들에겐 삶의 고비고비마다 '돈'이 발목을 잡는다. 역사학도가 되고 싶지만, 가족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다. 좋아하는 연극을 하며 살고 싶지만, 현실은 하루 종일 음식점 주방과 홀을 왔다갔다 하는 알바에, 밤 공연이 끝난 뒤 홀로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건축 설계사 시험 준비다. 음악적 재능이 있던 이재용은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음대에 갔지만, 학과 친구들이 음악적 재능을 펼칠 준비를 하는 동안 일찌감치 선생님의 길을 걸었다. 


이재용 부회장이 그의 길지 않은 생애동안 자신의 재산 축적으로 전력질주하며 전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과 달리, 음악 선생님 이재용은 인기쟁이다. 그가 만든 합창반에는 '특권'이 없다. 심지어 노래 실력 보다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다. 파트도 자기 선택이다. 그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음대에 진학했듯이, 선생님이 된 이재용은 그 시절 선생님처럼 가정 형편때문에 꿈을 접으려는 아이들의 꿈 도우미를 자청한다. 
다큐는 이재용 부회장과 평범한 이재용의 삶을 교차한다. 이재용 부회장이 60억을 받아 대번에 재계 순위에 오르는 동안, 평범한 이재용들은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없는 형편'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저 교차하여 보여줬을 뿐인데, 다시금 이재용 부회장이 우리 사회에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똑같은 이름의 대한민국 국민인데, 누군가는 평범한 이재용이 말하듯, '금수저'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짓고도 감옥 밖을 유유자적하게 나오는 이 대한민국은 같은 이름이라 해서 같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이재용이 '삼성'이라는 왕국에서 자신의 부를 축적해 가는 동안, 이제 60이된 한때 삼성 중공업의 노동자였던 이재용은 여전히 직장으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삼성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이제 이재용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무노조'의 정책을 이어오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말하는 '그가 받은 혜택을 사회와 나누는' 그 말에 '노조'의 자리는 없다. 

노조만이 아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으로 뇌종양을 앓아 시력, 언어능력, 운동 능력을 잃은 채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시위에 참가하는 전직 노동자도 있다. 삼성이니까 당연히 산재를 인정해 줄꺼라는 희망은 무참히 짓밟혔다. 동료들은 세상을 떠났다. 재판을 이어가는 한혜경씨에게 삼성은 10억을 주며 회유했다. 그러나 한혜경씨는 말한다. 차마 죽어간 사람들이 떠올라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강남역 8번 출구 앞 초라한 비닐 천막, 그곳엔 한혜경씨처럼 삼성에서 직업병을 얻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제 3월 그들이 거리로 나선지 900일이 됐다. 


평범한 이재용들과 60억으로 외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삼성의 왕좌를 차지한 이재용, 그 비유를 통해 다큐는 묻는다. 여전히 유전무죄의 대한민국, 과연 이재용은 죄가 없는 것이냐고. 그리고 그가 전 정권, 그 배후, 그리고 심지어 그 딸을 위해 퍼부은 돈들과, 산재조차 인정되지 않은 재판때문에 거기로 선 노동자들을 대비하며, 이재용, 그리고 삼성의 길을 묻는다. 물론 이재용에 촛점을 맞춘 다큐에서 '삼성'이라는 구조에 대한 조명은 아쉽다. 하지만, 이재용으로 상징되는 삼성과 평범한 사람들의 대비는 그 어느 때보다 극명했다. 그렇게 비로소 <mbc스페셜>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by meditator 2018. 4. 10. 15:43

프랑스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것일까? 2015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처럼>이란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한 관객들 중 여러 명이 결국엔 다음과 같은 자충수에 도달하고 만다. 그래서 도대체 '프랑스 영화'란 것이 무엇이냐고? 미적인 화면, 모호한 줄거리, 거기서 난해한 수학 공식보다 더 어렵게 찾아야 하는 철학적 명제? 아마, 1895년 이래 가장 일찌기 뤼미에르 형제 이래 영화라는 문화적 장르를 구축한 프랑스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내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듯 싶다. 하지만, 적어도 2018년에 '프랑스'의 영화를 본다는 건, 지금, 우리가 여기서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만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 확실한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 작품이 지난 4월 5일 개봉했다. 바로 브루노 뒤몽 감독의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하 슬랙 베이)>이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보는 바와 같이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다. 하지만, 이 제목에 낚여서 혹은 이 제목에서 연상되는 '스릴러'의 장르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 영화를 접한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난감할 듯하다. 영화가 열리면서 벌어진 살인 사건, 혹은 연쇄 실종 사건에 집중하고 싶지만, 정작 영화는 한 눈을 너무 많이 판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브루노 뒤몽 감독의 장기와도 같은 것이다. 



살인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이 브루노 감독의 작품에서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4년 <릴퀸퀸>이란 선례가 있다. <릴 퀸퀸>에서도 <슬랙 베이>에서 처럼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사건을 두 형사가 추격한다. 단지 차이라면 1910년의 바닷가 마을, 그리고 현재 어느 시골 마을, 하지만 그곳에서는 똑같이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두 명의 형사가 그 사건을 조사한다. 그런데, <릴 퀸퀸>에서나, <슬랙 베이>에서나, 살인 사건을 조사하려 하지만, 형사의 시선 안에 드는 건, 그리고 영화가 주목하는 건 '사건'이 아니다. 외려 사건은 곁등으로 제쳐지며,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을 통해, '사건' 보다 더 '심각한 상징적 현실'과 관객들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제목이 아닌 원제 <Ma loute>이다. loute는 속어로 loulou, 젊은 처녀라는 뜻이다. 하지만 <슬랙 베이> 속 뱃사공 네 큰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이중적 의미는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해안을 지닌 바닷가 마을, 그곳은 척박한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의 마을인 동시에, 1910년 한참 부를 누리는 프랑스 중상층들의 여름 휴가지이다. 그곳 바닷가 절경이 보이는 언덕 위에는 매년 그곳에서 여름을 지내는 앙드레(파브리스 루치니 분)의 저택이 있다.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은 앙드레와 그의 아내 이사벨, 그리고 그의 두 딸과 조카가 그곳에서 지내고 있다. 아직 활동적인 아이들은 연쇄 살인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마을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고, 그러다 한때는 마을에서 가장 유능한 어부였지만, 이제는 바닷가를 건네주는 나룻배 뱃사공으로 20센트씩을 받으며 살아가는 가난한 어부와 그의 아들 마루트를 만나게 된다. 

한 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앙드레의 조카 빌리와 어부의 아들 마루트, 영화는 '살인 사건'은 차치하고, 이 '소나기'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두 청춘과 두 사람의 가족들의 이야기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결국은 '비극'이 되어버린, 되어버릴 수 밖에 없는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의 '아이러니함'이야말로 바로 브루노 뒤몽 감독이 주목하는 바이다. 



마루트 혹은 나의 그녀, 빌리, 그들의 엇갈린 만남 
마루트와 빌리의 사랑은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만큼이나 어우러지지 않는다. 우선 자신을 찾아온 형사들에게 한껏 무슨 무슨 양식을 읊조리며 자신들의 여름 별장의 고급스러움을 거들먹거리지만, 결국 시멘트를 쳐바른 구조물에 불과한 저택에 사는 전통있다는(?) 부르조아 가문의 빌리와, 썰물이 빠진 바닷가를 단 돈 20센트에 손님을 날라주는 제 아무리 정성들여 써봐도 꼬질꼬질한 선원 모자를 쓴 마루트의 환경은 이질적이다. 

엄마 오드(앙드레의 누나, 줄리엣 비노쉬 분)에게서 야단을 맞고 뛰쳐나와 마루트와 함께 바다로 나갔다 죽을 뻔한 빌리를 구해준 마루트네에게 오드와 앙드레 가족이 감사를 표명하지만, 정작 빌리가 마루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자 대번에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빌리의 친구라며 마루트를 식사에 초대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 한 마디에 가족들은 대놓고 조롱한다. 

운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의 생업의 터 앞에서 잔뜩 겉멋을 부린 채 외식을 즐기는 앙드레 부부가 날리는 진심이라고 1도 없는 허세 가득한 삶의 찬가는 바로, 이들 '시멘트 덧칠하듯 '돈'으로 떡칠한 졸부, 그러나 자신들은 전통깊은 가문이라는 '부르조아지'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그들의 가식과 허세와 자비는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가 유지될 때뿐, 빌리의 사랑 고백처럼 그곳에 금이라도 갈 양이면 언제든 태세 전환을 하며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변하며, 성모상 앞의 오드의 장광설 하소연처럼 오로지 자신들 중심의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여, 정작 두 형사의 범죄 수사보다, 빌리의 가족들은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하는 영화는, '고어'한 살인 사건의 전모보다도 어쩌면 외양에서부터 기괴한 앙드레네 가족을 샅샅이 관찰하는 데 더 집중한다. 

앙드레 가족의 외양은 이른바 '정상적'이지 않다. 두 팔을 휘적이며 하지만 자신의 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앙드레와, 자전거 하나 제대로 타기 힘든 그의 처남이자, 매제인 크리스티앙의 신체도 정상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두 집안의 갈등을 초래한 주인공, 빌리의 비정상 역시 만만치 않다. 마루트가 한 눈에 반해버린 빌리, 그러나 형사들은 그녀(?)의 정체성에 헷갈려한다. 빌리라는 남자 아이의 이름, 짧은 머리의 소년의 복식으로 나타나는 싶던 빌리는 마루트 앞에서는 가발까지 쓴 천상 소녀의 모습이다. 당연히 이 곱디 고운, 심지어 계급적 선입견없이 자신에게 빠져든 상류 계급의 소녀에게 마루트 역시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녀를 안아, 그 몸을 확인할 때까지. 

그리고 이들의 '비정상적'인 신체는 그들의 위선적 도덕의 상징이자 결과이다. 영화는 <릴 퀸퀸>이 살인 사건을 매개로 여전히 프랑스에서 지속되는 종교적 갈등, 그리고 거기서 드러나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완고한 사람들의 아이러니함을 다루었듯이, 역시나 살인 사건을 매개로 아니 어쩌면 불가피했을 살인이라는 생존 행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부르조아 계급의 '부도덕'을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신랄하게 꼬집는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등장하듯, 신의 계시에 의해 공중 부양을 하듯, '그들'은 허공에 둥둥 떠있다. 그들의 세상은 시멘트로 덧칠했지만 우아한 양식의 저택이며, 갖은 미사여구를 붙이지만 사실은 속물들의 세상이고, 심지어 그들의 기괴한 신체는 그들이 지난 날 행했던 도덕적 파탄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아한 척, 심지어 신의 계시라 칭송하지만 현실에 발 붙이지 않은 채 바람처럼 바닷가 마을을 부유하다 바람처럼 떠날 것이다. 



빈부 격차가 심했던 1910년 프랑스, 그곳 슬랙베이에선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맞은 편에 그들을 오로지 먹고사니즘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루트'네가 있다. 영화는 살인 사건을 논외로 제쳤지만, 본 관객들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벌인 '사건'에 대한 개운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도덕과 범죄?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이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우리가 배운 서양사에서 서구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그 산업적 발전이 곧 모든 이들의 부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 전통있는 부르조아 가문이라는 앙드레네 가문 같은 집안은 여름 휴가를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에서 하녀를 두며 지낼 정도가 되었겠지만, 마루트네와 같은 하층민들에겐 여전히 먹고 사는 것이 요원한 과제인 시기였다. 19세기 중반 까지도 서구인의 수명이 45세에서 50세 정도였다. 아일랜드에서 감자 파동으로 인해 1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 19세기 중반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전히 잘 산다고 하는 유럽은 '기근'과 싸웠다. 그리고 <슬랙 베이> 속 마루트 네의 범죄는 바로 이런 '기근' 속에서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20센트(지금으로 250원)를 받으며 손님을 실어나르며 살아가는 가난한 가족의 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이젠 그저 '고어'할 뿐이지만, 당시에는 어쩌면 '선택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던. 

<소나기>처럼 만났던 부르조아 가문의 빌리와 가난한 어부네 마루트의 풋사랑은, 정작 마루트 네의 숨겨진 비밀 때문이 아니라, 빌리의 숨겨진 진실 때문에 파탄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핏물이 든 옷을 입고 묻어달라던 소녀처럼, 배반당했다고 분노했던 마루트의 순정은 빌리를 구한다. 바람처럼 빌리네는 바닷가 마을을 떠돌아 떠날 것이고, 마루트는 남겨질 것이다. 해프닝이 된 사건, 사건보다 더한 부르조아 가문의 부도덕, 그것이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 도달한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8. 4. 9. 16:09

대낮에 잘 차려입고 손 꼭 잡고 등산하는 중년의 남녀들이 있다면 십중팔구 '바람'이라는 속설이 있다. 이런 '어불성설'이 난무하는 만큼 이미 우리 사회에서 '바람', 혹은 '불륜'은 사실 보편적이다. 멀리 갈 꺼 뭐 있겠는가? '바람'과 '불륜'이 없다면 대부분의 아침 드라마가 소재 고갈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현상은 말 그대로 '윤리'를 벗어난 문제 이기에 언제나 '도덕적 논란'의 기준이 되곤 한다. 이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사이에서 이 소재를 이야기한다는 건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러운 줄타기와도 같다. 바로 그런 줄타기를 절묘하게 하려 애쓴 작품이 개봉했다, 바로 <스물>의 이십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루었다 평가받았던 이병헌 감독의 신작 <바람바람바람>이다. 




'동(動)'하였느냐? 
<바람바람바람>은 프롤로그와도 같은 씬으로 시작된다. 모범 택시를 모는 석근(이성민 분)의 차에 중년의 여성이 승차해 앞의 자가용을 미행할 것을 요구한다. '미행'을 거부하는 석근에게 그녀는 그 자가용에 바람을 피는 남편과 내연녀가 타고 있다며 다시 부탁을 한다. 기꺼이 그녀의 청을 들어 그 자가용을 미행한 석근의 차는 어느 호텔 앞에 이르고, 차에서 내린 중년의 여성은 호텔로 향하던 두 남녀의 사이에 끼어들어 여성의 머리채를 잡는다. 그리고 뒤늦게 차에서 내린 석근이 그런 그녀를 '잡으려면 남편을 잡지 왜 여자를 잡느냐'는 궁시렁거림과 함께 적극적으로 말리는데, 그때부터 상황이 묘해진다. 바로 내연녀의 머리채를 잡던 중년의 여성이 자신을 백허그하다시피 말리는 석근때문에 애초에 하려던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머뭇거리던 여성은 결국 잡았던 머리채를 놓고 휭 하니 돌아서서 석근의 차로 향한다. 그녀와 함께 사라진 석근의 모범 택시, 그들이 떠난 자리에 그녀의 남편과 내연녀가 망연자실 서있다. 

뜻밖에도 영화 <바람바람바람>을 보고 난 후 기억에 남는 장면은 봉수(신하균 분)와 제니(이엘 분)의 바람도, 반전의 미영(송지효 분)과 효봉(고준 분)도 아닌 이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이병헌 감독이 <바람바람바람(이하 바람)>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두 시간 여의 이야기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남편의 바람을 단죄해야 하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몸에 밀착한 석근에게 '동(動)'하는 여성의 변화야 말로 '바람'을 가장 잘 '정의'내린다. 그리고 그 '정의'에 따라 노골적인 추파에도 흔들림없었던, 바람같이 택시를 타고 이 여자, 저 여자를 자유롭게 떠도는 석근을 비웃던 봉수가 '바람'이 나며 영화 <바람>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을 장악한 남자, 남편들, 봉수와 석근의 바람은 초반 프롤로그에서처럼, 그들의 아내 미영과 석근의 아내(장영남 분)의 바람으로 바톤 터치되며 결혼의 행간을 메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에 대한 불온한 '농담'으로 채워간 이병헌 감독의 <바람>을 보다보면 2000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만교의 작품을 유하 감독이 영화화 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떠오른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제목에서 지적하듯, '결혼'이라는 이미 사회적으로 유효기간이 지난, 그럼에도 그 제도적 편의에 타협하는 젊은 세대의 아이러니함을 대학 강사인 준영과 연희의 적나라한 만남을 통해 그려간다. 그리고 그들의 편의가 자초한 딜레마를 통해, 과연 2001년, 혹은 2002년이라는 시대에 사랑을 담아낼 수 없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부실함을 질문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야한 영화로 소문났던 영화 속 결혼할 수 없는 애잔한 연인이 풀어낸 그 직설적인 담론에 친구와 함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아직 '결혼'에 대한 로망이 남았던 시절의 '이불킥'같은 추억이다. 

그리고 10년하고도 훌쩍 시간이 흐른 2018년 이병헌 감독은 마치 2018년판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도 같은 <바람바람바람>을 들고 왔다. 이제 결혼에 대한 '로망' 따위 없어진 나이에 <바람>이 그려내는 바람, 혹은 불륜은 새삼스럽지 조차 않다. 이 영화를 가지고 왜 불륜을 들고 나오냐고 한다는 자체가 사실 '비현실적'인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바람'이 현실적이면 일 수록 세상은 그 바람에 대한 '불륜'으로의 재단은 엄격해졌다. 

'불륜'에 대한 부담때문이었을까? 2018년의 이병헌 감독은 유하 감독처럼 노골적이지 않다. '코믹'하게 철부지 어른들의 이야기라 내세운 영화는 설사 그들이 바람을 피지만, 2002년의 준영과 연희 처럼 결혼이란 제도를 '개떡'같이 여기지 않는다. 바람처럼 떠돌며 수많은 여자를 만나도, 제니에게 영감과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중국집을 열게 되어도, 그들에게는 '인륜지대사' 결혼이란 제도는 고정 불변의 진리값이다. 2002년에 이미 사회적 안정을 위한 안이한 타협처라 낙인찍혔던 결혼, 하지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나고, 다시 또 한번 변해가려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봉수, 미영, 석만에게는 지켜야할 그 무엇이다. 심지어 아이의 아버지를 속이더라도. 세월은 흘렀지만, 외려 결혼이란 제도는 공고해 졌다. 

그리고 영화 <바람>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결혼 8년차 각자 자신의 레고와 sns에 빠져살던 봉수와 미영이, 각자의 바람 파트너에게서 삶의 활력소를 얻었음에도, 그럼에도 그들을 결혼으로 묶어내는 결정적 그 무엇이,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궁금해 진다. 제니의 앞에서도 여전한 아내와의 추억을 애틋하게 말하는 봉수의 변치않는 연정일까? 그러기엔 8년차 그들 부부의 행간은 헐겁다. 그건 바람처럼 여자들에게 떠도는 석근으로 인해 상처받아 그녀 스스로도 탈출구를 찾았음에도 여전히 석근을 애증처럼 놓지 못했던 그녀의 아내가 놓지 못한 '인륜지대사' 혹은 '부부의 정'이었을까. 아내가 좋아하는 게 꽃인지, 가방인지조차 모르는 석근이 그리워하는 조강지처 아내가 끓여주는 보말 칼국수 같은 것일까? 집 밖에 나가면 '남의 편'이라 태연하게 말하는 경지에 이른 중년의 주부들의 '득도'함일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강고한 결혼이란 제도에 갖가지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동의한 <바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결혼'이란 제도에 의문을 남긴다. 바람으로 행간을 메워하고, 헛헛함을 달래준 결혼은 과연 무엇일까 라고. 과연 저들 철부지 중년이라 포장된 이들에게는 '바람'이 본질일까? 결혼이 본질일까?

그렇게 결혼에 대한 아이러니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은 <바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결혼이란 제도를 모호하게 한다. 문득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멀쩡한 척 사는 우리네 삶이 씁쓸해지지만 그런 게 사는 건가 싶다. 그래서 그 모호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 영화가 반갑다. 무엇을 말해서가 아니라, 이런 것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편하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 더 이런 이야기들을 영화관에서 조금 더 솔직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프롤로그의 그녀를 욕할 수만 없었던 <바람>, 그리고 철부지라 포장된 봉수, 석근, 그리고 석근의 아내, 미영, 그리고 제니의 해프닝을 타박할 수 만은 없었던 <바람>, 조금 더 솔직했으면 싶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이야기를 할 수 있어도 어딘가 싶었던 <바람>, 그저 '도덕'으로 치장하며 살다 가끔은 한숨 한번 쉬듯, 우리 삶의 그림자를 들여다 볼 여유를 준 <바람바람바람> 같은 영화가 또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8. 4. 7. 23:51

몇 년 전 어린이 위인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공교롭게도 내가 맡아서 하던 인물이 이번에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돌아온 스피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당시 어린이 위인전으로는 획기적인 시리즈로 기획된 그 작업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나폴레옹', '이이' 등 고전적 위인을 대체할 새 시대의 '위인'이었다. 


당시 위인전 작업은 그의 영문판 평전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 졌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 까지, 그 중에서도 그를 세상에 알리게 된 <죠스>를 만든 과정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죠스>라는 영화가 만들어 지기 이전에도 납럅 특집 용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있었다.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뻔한 피칠겁의 섬머 스릴러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며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바로 우리가 기억하는 죠스의 첫 장면이다. <죠스>라 하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기억하는 그 존 윌리암스의 '빠밤, 빠밤~'하며 시작되는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죠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작 '죠스'가 등장하는 건 영화가 시작하고서도 65분 여가 지나서이다. 대신, 죠스의 시선으로 바닷가에서 한갓지게 유영하는 '먹이들'을 제시하고 그를 향해 돌진하는 바다 괴물의 역동성과 먹이를 향한 집요함을 한껏 드러내 보이며 관객들의 공포심을 극단적으로 몰고간다. <죠스>에 여러 사람들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아가리, jaws인 것처럼, 영화 <죠스>는 바로 그 '상어'가 주인공으로 맹활약한 영화이다. 즉 그 이전에 '무서운 대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공포'를 제공했던 방식의 새로운 해석이었던 것이다. 




스필버그의 창조적 방식 
하지만 당시 위인전 작업을 할 당시만 해도 저런 평전의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평전'이 평가한 스필버그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건, 그로 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2018년 그의 최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나고서이다. 한 화면에서 날뛰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 그리고 그 날뛰는 괴수들의 지면 아래로 차를 몰아 질주하는 주인공, 그 장면에서 왜 스티븐 스필버그가 80년대에도, 그리고 여전히 21세기에도 '명장'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가 여전히, 그리고 늘 명장인 이유는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랴, 어떻게 보여주느냐 라는데 선구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시간적 배경은 2045년 '디스토피아'이다. 발전한 과학 기술은 인간에게 가상 현실의 오아시스를 제공하지만, 그 오아시스를 벗어던진 현실은 기술의 독과점 기업과 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빈민층들뿐이다. 기술과 자본에 주도권을 넘긴 세상에 대한 스필버그 식의 담론이다. 위태로운 그들의 컨테이너 탑을 벗어날 희망은 '오아이스'에 접속하는 것뿐인 암울한 미래이다. 마치 피씨방 스크린과 핸드폰의 액정 불빛에 위로받는 이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암울한 미래를 지배하는 기술은 천재 과학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의 가상 현실 시스템. 

어느 틈에 블록버스타라 하면 이젠 dc와 마블이 아니고서는 발 붙이기 힘들어진 시대, 코믹스의 영웅이, 그들의 이합집산이 어떻게 구현되는가가 블록버스터의 성공 여부가 된 세상에서, 웬만한 '블록버스터' 환타지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바로 그 독점된 블록버스터 환타지의 세계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건, 바로 '죠스'를 통해 영화 산업에  최초 흥행 1억 달러 돌파 '블록버스터'란 장르를 처음 연 스필버그 자신이다. 

그저 흔해빠진 여름철 납량 특집용 상어 영화를 보이지 않는 추적자를 통해 자아내는 서스펜스를 통해 새로운 장르로 업그레이드 시킨 스필버그의 방식은 <미지와의 조우(1977)>의 결정판 <ET(1982)>, <인디애나 존스>시리즈 , <쥐라기 공원(1993)>, <AI(2001)>까지 언제나 대중의 '허'를 찔렀다. 상어도, 모험가도, 공룡도, 인공 지능도 스필버그가 만들어 낸 건 아니지만, 스필버그의 손을 거치면 전혀 새로운 경지의 캐릭터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그랬던 그가 코믹스의 영웅들이 득세하는 블록버스터 시장에 들고 나온 건, 뜻밖에도 '응답하라 1980년대'였다. 2045년의 빈익빈 부익부의 기술 디스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해 가상 현실 오아시스에서 사람들이 '조우'한 것이 스필버그란 이름을 세상에 가장 빛나게 했던 80년대의 복고라는 방식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어찌보면 그 '화려한 시절'을 살아온 스필버그에겐 '사필귀정'같은 선택이다 싶다. 

그렇다. 마치 어르신이 후손들에게 내가 한창 잘 나가던 그때가 좋았었지 하는 후일담의 재기발랄한 버전같은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오아시스 보물 찾기에 뛰어든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분)는 그가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신화가 된 과학자의 삶을 복기한다. 전설이 되어 신봉되는 그의 삶을, 하지만 '천재'라는 신화를 걷어내면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한 평생을 보잰 괴짜 소년과도 같은 한 시대를 살아낸 이의 삶의 방식을 열쇠 찾기를 통해 반추하는 것이다.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란 천재가 자신의 삶을 후대에게 전해주듯. 



스필버그의 '응답하라 1980년대'
기존에 제시된 길을 거꾸로 가보고, 주저했던 그 순간에 다시 도전해 보고,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 처음을 '피시 통신'에 접속하던 그 시절에서 부터 시리즈의 서막을 열듯, 가장 결정적인 열쇠를 괴짜 과학자가 처음 매료되었던 게임을 통해 제시하는 그 '방식'은 그 열쇠를 찾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킹콩과, 티라노 사우르스의 캐릭터 들, 듀란듀란의 음악, 스티븐 킹의 소설과 그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한 스탠리 큐브릭의 서스펜스적 방식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시대에 여전히 던지는 명장의 교훈이 된다. 

하지만 과거를 길어 새로운 블록버스터의 길을 열어내 보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가 된다. 그 이유는 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를 통해 제시한 '콘텐츠'의 구현이 바로 우리 시대 문화적 담론으로 제시되는 '융합'과 '에디톨로지'의 방법론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그의 책 <에디톨로지>에서 '창조는 편집(에디톨로지EDITOLOGY)이다'라 주장한다. 즉, 하늘 아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신의 영역'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김정운 교수의 주장은 일찌기 에드워드 윌슨으로 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최재천 교수를 통해 대두된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통섭(CONSILIENCE)와도 맥락이 닿는다. 

각각이 한 영화, 한 문화적 콘텐츠의 원형이었던 주인공들이 해체되고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된다. 어쩐지 가상 현실 레이스 속에서 거칠게 날뛰는 킹콩이 반갑기 까지 할 정도로, 고전이 되어버린 <샤이닝>이 활개를 치는 공간은 무섭기보다, 경이롭다. <토요일 밤의 열기>와 듀란듀란의 음악들은 정겹다.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을 위무하는 과거의 콘텐츠들이라니. 마치 지난 몇 년 우리 사회를 휩쓴 <응답하라>의 열풍처럼. 

마블과 디시 코믹스가 범람하는 세상을 보며, 즉 첨단 과학의 산물과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뒤엉켜 현대 세계의 영웅으로 대두된 콘텐츠들을 보며 스필버그는 그렇다면 나도 내가 살아온, 혹은 내가 작업했던 시대들을 '에디톨로지', 혹은 '통섭'해볼까 라고 생각했을까? 이미 그 자신이 한 세대 이상의 '문화'를 창조해 온 주도자로써,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 낸, 혹은 그 자신이 활동했던 그 시대의 주인공들을 불러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란 '도발적 아이디어'를 유츄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건 그가 <죠스>를 비롯하여, <인디애나 존스>, <AI> 등을 통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문화 콘텐츠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 방식적 전통의 활용이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가 가상 현실의 RPG 게임에서 다시 한번 맹활야을 하고, 스티븐 킹과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다시금 조우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그저 '대상화'된 콘텐츠로만 등장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창고 속의 그들이 다시금 '현역'으로 돌아온 반가움이 크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노익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현역'으로 펄펄한 '또 한 명의 괴짜 소년'이다. 여전한 소년은 말한다. 기술과 독점의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구원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일 뿐이라고. 물론 그의 담론과 주장은 소박하고 낭만적일 지로 모른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낭만이 2018년의 새로운 블록버스터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걸 그냥 어르신의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by meditator 2018. 4. 5. 16:45

군주의 시대 군주에 대한 거짓말은 '역모'로 취급되어 '대역죄'로 다스려졌다고 역사학자 전우용은 증언한다. 그렇다면 나라의 주인이 군주에서 국민으로 바뀐 민주주의 사회, 국민에 대한 '거짓'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기군망상죄', 즉 대역죄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 70년, 안타깝게도 그 역사는 권력이 국민들을 기만한 역사였다. 우리의 권력들은 끊임없이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해 왔다.

그런데 왜 지금 '거짓'에 주목해야 하는 걸까? 4월 1일 <sbs스페셜- 권력과 거짓말(부제; 피노키오의 나라)>는 새로운 권력의 시대, 그럼에도 여전히 쉬이 '처단'되기 힘든 권력의 거짓말을 짚고 넘어감으로써 현재 진행중인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세월호의 진실, 그 빙산의 일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명 조끼를 학생들이 입었다던데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며 뒤늦게 나타나 늘어놓았던 그 '거짓말'의 진실말이다. '저는 정상적으로 보고 받고 체크하고 있었다'던 그 4년 전의 거짓말, 국민들은 묻고 또 물었었다. 수백 명의 국민들이 사지에 내몰린 그 시각,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하지만 대통령은 손바닥으로 하늘를 가리듯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었다. 대통령뿐이랴, 그의 조력자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의 퍼레이드를 벌었다. 그리고 그 날의 진실은 4년이 지난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한다. '침실에 있었다고......'

진실의 기회, 그러나 거짓의 향연이 된 국회 청문회
왜 4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는 진실의 장막을 겨우 벗겨내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다큐는 말한다. 기회는 있었다고. 바로 국회 청문회다. 국회 청문회는 국민의 앞에 진실을 말해야 하는 기회이다. 국회에 선 증인은 선서한다. '양심에 따라 숨김이나 보탬이 없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그리고 이것을 어겼을 때는 위증의 죄를 지겠다'고. 그러나 심지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처럼 이 '선서'부터 거부하는 증인이 등장한다.

국민 앞에 선 당시 사건의 관계자들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릅니다', 기억이 없습니다'를 되풀이 했다. 김장수 장관도, 김기춘 비서실장도, 우병우 민정수석도, 조윤선 장관도, 조여옥 대위도, 이영선 비서도, 이임순 교수도. 누구라 가릴 것 없이. 국민을 바보 등신으로 아느냐 국회의원들이 일갈하고 분노해도,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피가 거꾸로 솟아도.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심지어 우병우는 46일이나 잠적했다, 국민들이 현상금을 걸자, 마지못해 참석했다. 그러고는 '별 신경을 안썼단다'며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국민 앞에 선 그들, 하지만 그들은 60일간의 진실 게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안전과 형량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거짓말은 '통'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심에서 위증에 대해 유죄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우병우 전 민정 수석은 위증죄가 공소 자체가 기각되었다. 이임순 순천향대 교수 역시 우병우와 마찬가지다. 이영선 비서 역시 집행 유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지만, 정작 그들이 한 거짓의 대가는 치뤄지지 않았다.

국회 증감법은 '선서한 증인 또는 감정인이 허위의 진술이나 감정에 대해 위증을 한 때에는 1년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을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저들은 '법' 앞에서 거짓의 대가를 치루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피해갔을까?

'사실에 반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는 기억이 없다'는 식의 모르쇠 전략, 애초에 상황을 애매하게 증언하거나, 무능함을 자인하는 진술 방식은, 그 자체로 그들의 '위증죄'를 어렵게 한다고 법 관련 전문가들은 안타까워 한다. 우병우 민정 수석이 청와대의 검찰 수사 압력에 대해 증거를 들이대자 마지 못해 인정을 하면서도 의례적이란 관례를 통해 피해가는 식이다.

거기에 국회 청문회 자체가 한시적 특위라는 태생적 존재론의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우병우의 경우, 그가 협박을 한 사실이 윤대진 광주 지검 검사의 진술로 밝혀졌지만 이미 그때는 청문회가 끝난 이후였다. 청문회에서의 위증에 대한 고발은 재적 위원 1/3 이상 연서를 해야 가능한데, 이미 끝난 국회 청문회는 '위증죄 고발'의 효력이 없어진다. 즉 한시적 기구로서의 청문회는 시간이 지나버리면 고발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높은 형략을 내세운 국회 청문회 위증죄, 그러나 현실은 '엄포'만 논 것이 되어 버린다. 출석에서 부터, 선서, 증명할 수 있는 죄명, 그리고 시한까지, 국회 청문회를 통한 위증죄의 처벌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거짓의 역사, 70년- 우리가 용서한 거짓말 
그런데 우리 국민에게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니 우리의 지난 70년 정치사는 곧 국민을 대표하는 리더들의 '거짓의 역사'였다 . 한강 다리가 끊기지 않았다며 북진을 하고 있다던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민을 눈 앞에 두고 다리를 끊어버리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빼버렸다. 그리곤 자신의 거짓을 덮기 위해, 다리가 끊겨 도망치지 못한 피난민들을 '부역자'로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다. 박정희의 거짓말은 그의 정권 연장의 슬로건이 되었다. 민정 이양을 하겠다더니, 총선을 하겠다더니, 더는 집권을 하지 않겠다더니, 다시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더니, 총탄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그는 거짓말을 되풀이 했다. 광주학살의 주모자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나 노태우라고 다를까.




그리고 이들의 거짓말은 안타깝게도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하도록 허용한, 우리가 용서한 거짓말이 되었다. 즉 지난 70년, 우리의 현대사는 바로 우리가 용서한 정치인들의 거짓말의 역사였다. 바로 이 지점을 다큐는 짚는다. 왜, 우리는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관대한 거일까?

전 정치인 전여옥 씨는 그 '용서'의 관습을 우리의 고속 성장에서 찾는다. 즉 과정과 수단이 잘못되어도, 목표를 달성하면 용서가 되었던 고속 성장의 시대, 정치인들의 거짓말 쯤이야 눈 질끈 감고 용서해 주었던 국민들의 전반적 정서가 오늘날 두 대통령의 감독 행을 결과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인간 개인으론 하루에 10번, 많게는 200회 까지 거짓말을 한다. 이렇게 보면 거짓말은 '인간의 속성'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다큐는 주장한다. 그저 인간의 거짓말과 정치인의 거짓말은 다르다고.





거짓을 용서하는 관행에서 부터 
미국의 경우, 클린턴 전 대통령이 탄핵을 받은 이유는 그의 성스캔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회 에서 위증을 한, 그 거짓말이 그를 대통령직의 위기로 몰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국회, 즉 국민 앞에서의 거짓말을 국가 전복, 반란에 준거한 죄로 여긴다. 반면 일반인들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다. 그러나, 부패 범죄, 직권 남용과 관련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용' 대시 '기소'로 다스린다. 특히 '살림의 여왕'이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마사 스튜어트의 사례에서 보여지듯 조사 과정에서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면 기존 형량에 4년을 더하는 등 단호한 처벌이 행해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다. 모르쇠로 일관했던 이영선 비서관에 대해 1심에서 위증을 인정했던 법원은 2심에서 집행 유예를 선고했다. 그의 거짓말을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충성심'으로, 즉 '상사의 지시에 의한 불가피한 이유'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법조인 생활을 오래했기'에, '국가 성장에 이바지했기에' 라는 식으로 그들의 거짓말에 '면죄부'를 준다. 이에 '노회찬 의원'은 반발한다. '오랫동안 노동을 해왔기에 법적으로 처벌을 완화해 준 적이 있냐? '고

다큐는 우리 현대사 비극의 시작을 '그들의 거짓말'로 부터라 본다. 부정 부패가 반복된 역사, 그 베이스가 되는 건 바로 권력자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거짓말'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그러해 왔던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질문이 된다. 과연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사회와 격리시켰던 적이 있는가? 심지어 유죄를 받아도 정치적 탄압이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장하는 사회, 거짓말과 한 배를 탄 권력, 처벌받지 않는 권력, 이제 우리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바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권력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관행에 대한 분명한 '징죄'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 방향을 제시한다. 어쩌면 당연한, 하지만 누구나 그러려니 했던 그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 바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그 '기초'와 시스템에 대한 제언이다.

by meditator 2018. 4. 2. 15:49
|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