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길거리'를 검색하면 어떤 것들이 뜰까? 영어(street)나 일어(‘通り)로 검색하면 일반적인 길거리 사진들이 뜬다. 하지만 한국어로 '길거리'를 검색하면, '맙소사!', 거리의 풍경 대신 짧은 치마나 반바지, 스키니를 입은 여성들의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촬영한 '몰카'사진들이 대거 뜬다( 10, 16일 여성신문 보도)


이는 대한민국이 몰카의 왕국임을 증명한다고 '여성신문'은 결론내린다. 이에 덧붙여, 더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관음적 행위'의 결과물인 '몰카'에 대해 대다수의 남성들이 범죄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우스개처럼 혹은 마치 훈장인 양 여성을 훔쳐보는 것을 관행화시킨다. 그래서 수영 선수로 부터 의대생, 의사, 경찰 등 평범한 사람들이 몰카를 찍은 혐의로 법적인 수사 대상이 된다. 



관음이 일상화된 대한민국 
이러한 우리 사회의 '관행적'인 관음적 범죄를 통해 드러난 것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공간 '길거리'가 사실은 여성들에게는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요, 심지어 그녀들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범법 장소'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0월 30일 방영된 <sbs스페셜-불안한 나라의 앨리스>는 바로 여성들이 안심할 수 없는 '일상의 공간'에 시선을 돌린다. 

여성 중 70%가 넘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잠재적으로 범죄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한다. 왜? 남성과는 다른 생물학적 조건 때문에? 혹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받은 교육때문에. 하지만 다큐는 바로 그 여성들의 공포의 근원은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 공간의 공포로 부터 비롯된 바 크다고 주장한다.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치안의 질서가 안정되어 있다는 대한민국, 그러나 그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실존은 드러난 치안율의 수치와 다르다. 실제 강력 범죄 희생자 중 84%가 여성, 전세계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살해되는 몇몇 나라에 속하는 대한민국, 그것이 바로 여성들이 안심하고 '거리'를 나다닐 수 없다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공포가 된 일상적 공간 
이런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다큐는 실제 사례로 접근한다. 바쁜 일과에 틈을 내어 자신의 몸을 단련하는 여성, 그러나 그 여성의 속내는 복잡하다.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잠시 찾아간 화장실, 거기서 만난 취객은 다짜고짜 그녀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다행히 동료들의 제지로 더 이상 폭력은 없었다지만, 그녀에게 그 남성의 억센 손길과, 폭력적인 태도와 눈빛은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다. 가장 대중적인 장소인 화장실, 하지만 여성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곳은 여기 뿐만이 아니다. 

이 글의 처음에서 등장한 길거리는 '몰카'를 넘어 여성들에게는 언제라도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이다. 해가 진 거리에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으슥한 골목에서 여성들은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같은 장소를 향해 가는 오빠와 누이 동생, 하지만 그들의 행보는 다르다. 지름길이라는 이유로 일직선상의 어두운 골목을 덤덤하게 향하는 오빠와 달리, 여동생은 큰 길을 에돌라 약속 장소로 온다. 외향적인 성격임에도 늦은 밤 귀가가 두려워 일찍일찍 집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여동생은 퇴근 후 집에 들어오는 거리에 식구들의 마중을 받는다. 

거리만이 아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이동수단이 된 지하철, 그리고 건물 내의 이동수단이 엘리베이터에서도 늘 여성은 '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홀로 탄 엘리베이터, 그리고 사람으로 붐비는 지하철에서 늘 여성은 긴장하고 두려움에 떤다. 

그렇다고 집이라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홑가구가 대세가 되어가는 세상, 홀로 사는 여성들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너무나도 많다. 집앞에 몰래 달아놓은 몰카를 통해 비밀 번호를 알아내, 늦은 밤 도어락을 여는 검은 손, 그리고 혹시나 거리에서 부터 쫓아온 괴한이 혹시라도 집까지 쫓아올까 집에 들어서도 한 동안 불을 켜지 못하는 안슬픈 상황이 우리 여성들의 현실이다. 



이렇게 일상의 공포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공포심은 실제 공포 영화를 볼 때보다도 더 극심했다. 더욱이 언젠가 단 한번이라도 겪은데서 잠재되어 있는 트라우마는 언제나 비슷한 상황이면 공포를 되살려 낸다. 

여성학자들은 인류 역사의 지난 2000여년간을 남성 지배의 역사라 규정한다.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에서 약자로서, 을로써 언제나 그 존재를 보장받기 힘들었던, 그래서 자존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 그나마 당당해졌던 여성. 거기에 한국 사회가 가진 전근대성은 그런 남성 중심 사회의 퇴행적 모습을 강화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관행화되었던 '성적인 관례'들이 앞다투어 고발되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들은 여전히 육체적 약자로서, 그런 여성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사회적 분노를 투영하거나, 여성을 성적 대상화시키는 남성들에 의해 여전히 삶의 공간 곳곳에서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을 다큐는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여성들의 존재론적 공포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 
by meditator 2016. 10. 31. 05:48

100세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100세 시대라는 것은 그저 100세 까지 오래 산다는 것을 우리 사회 전반에,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삶에 대해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즉, 오래 산다는 것은, 오래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고, 거기엔 오래 활동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가 따라붙는다. 그래서, 100세 시대를 맞이한 나이들어가는 삶은 그래서 녹록치 않다. 중년을 넘긴, 혹은 초로의 나이들어 가는 이들에게 이 후의 삶은 안락한 노후가 아니라, 또 다른 선택과 고민의 시간이 된다. 바로 이런 나이들어 가는 삶에 대한 선택에 대해 공교롭게도 7월 10일 밤 두 다큐가 길을 제시한다. 바로 kbs1의 <다큐 공감>과 <sbs스페셜>이다.


하루는 혜화동 고갯마루에 앉아있는데 마을 버스가 그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오고 있는 거예요. 평생을 혜화 전철 역에서 대학로 거리만을 오가며 쳇바퀴처럼 살아왔던 은수나 저희나 황혼기에 접어들도록 삶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았습니다. 충분히 뛸 수 있는데도 은퇴 위기에 놓인 마을 버스의 모습이 저희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마을 버스와 세 남자, 세계를 가다
7월 10일 <다큐 공감>은 '은수 교통' 출신의 마을 버스 '은수'를 타고 2014년부터 지난 2년간 페루에서 출발하여 중남미를 거쳐, 유럽을 지나, 이제 아시아 일주 중인 '중년'의 세 남자를 만난다. 

평생을 가장으로 '일벌레'임을 자임하며 살아왔던 임택(57세)씨, 그는 자신과 같은 운명이라 느껴진 마을 버스 은수와 함께 평생의 버킷리스트인 세계 일주를 계획한다. 그런 임택씨와 동행한 것은 IT회사에서 23년간 우직하게 일해왔던, 가정과 일밖에 몰랐던 정인수(47세), 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아랑곳없이 2년 전 회사는 문을 닫았다. 하루 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 그는 '여행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고, 여행작가 모임에서 만난 임택씨와 함께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이제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하는 위태로운 아시아 지역을 일주하기 위해, 그들의 '페친'이자 팬인 호주에서 온 실업자 총각 임성택(40세)가 합류했다. 

꿈을 찾아 떠난 여행이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9년6개월을 대학로를 오가면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늙은 버스 은수는 종종 불협화음을 냈고, 이제는 여유롭게 빨래를 하지 않고 오래 옷을 입을 수 있는 노하우를 전파하기까지 여정은 험란했다. '쌀이 떨어졌다'던 아내의 말을 접어두고, 은수에서 자고, 밥을 해먹으로 한 달에 60여만으로 유럽을 일주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당장 가장으로 호구지책 대신 꿈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선택했다. 규정속도 60KM에 묶여있던 은수는 그 속도를 처음 넘어섰을 때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제 고속도로에서 유유히 화물트럭을 앞지를 정도로 능력자가 되었다. 사람으로 치면 70 정도의 은수가 해내었듯이, 세 사람의 여정도 그렇다. 돈을 벌어다 주는 가장 대신, 세계 곳곳에서 만난 우리의, 혹은 이방의 젊은이들이 그들을 '아부지'라 부르며, 그들을 통해자신의 꿈에 대한 의지를 얻는다. 이제 마지막 여정, 그들은 말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도전과 도전을 하려는 의지가 살아있고, 실행에만 옮긴다면 아직 청춘이다.'



젊음도 성형할 수 있나요?
이렇게 쳇바퀴같은 삶의 공간을 박차고, 새로운 도전을 한 '중년들이 있는가 하면, 7월 10일 방영한 <SBS스페셜>의 중, 노년들이 '젊음'을 추구하는 방법은 젊어지는 인위적 방식을 통해서이다. 

”젊었을 땐 사는 게 바빠서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는 게 돈 벌어야 되고 애들 길러야 되고, 나라는 존재가 나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딱 보니까 내가 너무 늙어가지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 우울하고 마음이, 이거 아닌데. 나 10년만 좀 약간만 댕겨가지고 10년만 즐겁게 해피하게 (살고 싶어요)“ (석현자씨 대화 中)

다큐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수술대위에 눞는 '어르신'들을 찾는다. 2008년 서울시에서 4만8천 명의 가구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40대 이상의 가구원들 중 40%가 성형 수술에 대해 긍정했다. 33.4%, 24.1%의 2,30대에 비해 높은 수치이다. 과연 나이든 사람들에게 성형 수술은 어떤 의미일까?

위의 석현자씨(57세)처럼 가족을 위해 희생한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인 경우가 그 하나다. 이들에겐 '젊음' 자체가 인생의 목표요, 자신을 '사랑'하며, '존재감'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석현자씨의 말처럼 이제는 그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자신을, 앨범 속 젊은 모습을 통해 보상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조금 더 절실한 욕구도 있다. '어르신'이란 소리가 싫었던 최홍선씨(70세)는 눈 성형을 비롯한 몇 번의 성형으로 자신의 평가론 해운대 백사장을 당당하게 활보할 젊음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늙은 자신의 프로필만 보고 외면했던 직장이 성형 수술 이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몇 번을 더 성형 수술을 해서라도 젊음을 유지하여, 80까지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이렇게 최홍선씨처럼, '젊음 예찬 사회'에서 나이 먹음은 곧, 사회적 퇴출로 여기며, 사회적 기회를 얻기 위한 절박한 선택으로 성형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무모한 도전' 역시 생각보다 녹록치 않다. 성형 수술 후 젊어진 자신의 모습에 거울을 놓칠세랴 만족을 표하는 석현자씨와 달리, 그녀의 남편은 주름을 당기기 위해 찢어진 눈매가 낯설다. 그나마 낯설기만 하면 다행, 조금 더 젊어지려는 도전들이 때로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안면 리프팅과 코 수술을 함께 받았던 이윤정씨는 수술 후 차오르는 고름과 함께 '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젠 마스크가 없이는 외출조차 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최근 범람하는 성형외과들로 인해, 이윤정씨 처럼, 애초 의도와 달리, 과도한 성형 권유가 빈번해지며 부작용의 위험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것보다는 젊어지고 싶은 욕구가 컸다는 석현자씨처럼, 2014년 12월 기준 성형 시장의 규모는 7조 5천억에 도달했다. 그 중 주름 제거, 필러, 보톡스 등은 2010년 31.6%에서, 2014년 48.6%로 4년 사이 17%나 증가 추세에 있다. 


더 이상 젊지 않은 나이, 하지만 100세 시대는 젊지 않음을 용인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명퇴를 해도, 살아갈 세월은 창창하고, 부양할 가족은 여전하다. 그 남은 세월을 어떤 삶으로 살 것인가, 우리 시대의 그 방식에 대해, <다큐 공감>과 <SBS 스페셜>은 서로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공통점은 늙음에 안주하지 않고, 청춘에의 욕망에 기꺼이 답한다는 것이다. 답은 쉽지 않다. 쌀이 떨어진 가족을 두고 떠나는 가장의 길도, 기꺼이 수술대에 올라 젊음을 되찾는 방식도. 그들의 꿈에 쉬이 박수를 쳐주기에 우리 사회의 현실은 각박하고, 성형 수술로 젊음을 되찾으려는 노년을 비웃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젊음'을 숭배한다. 노년의 바람직한 문화, 아니 사회 전체적으로 건강한 삶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회에서, 결국은 나이들어가는 각자가 선택할 몫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따라, 우리 사회 중, 노년의 삶, 그리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삶의 질도 달라질 것이다. 

by meditator 2016. 7. 11. 17:32

tv 라는 매체를 통해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들이 만들어 지고 있다. 트렌드리더에 가까운 예능은 당대를 가장 발 빠르게 선도해 간다. 먹방이 유행이다 싶으면 진이 빠질 때까지 먹방을 울궈먹는가 하면, 먹방이 다해간다 싶으면 발 빠르게 '집방'이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내려 애쓰는 식이다. 그에 반해 드라마는 점점 세대 별 구획이 분명해 져간다. 젊은이들은 아예 공중파에는 시선을 돌리려 하지 않지만, 그럴 수록 주말 드라마나 아침, 저녁 시간대 드라마는 중장년 세대를 위한 철저한 '서비스'정신에 투철해진다. 


하지만, tv를 통해 방영되는 프로그램이 이들 예능과 드라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능이나 드라마 만큼이나, '다큐'도 많이 방영된다. 월요일이면 <다큐 스페셜(mbc)>, 화요일에는 <pd수첩(mbc)>, 수요일엔 < 추적 60분(kbs)>,  목요일 <kbs스페셜(kbs1)> , 토요일 <다큐 공감(kbs1)>, <그것이 알고 싶다> 등 거의 매일 여러가지 성격의 다큐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있는가 하면, ebs에서는 <다큐 프라임> 등 거의 매일 한 두 편의 다큐가 편성 방영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지 못하는 '딱딱한' 형식의 다큐는 마치 동네 오래된 빵가게처럼 쉬이 잊혀지곤 한다. 하지만, 묵묵히 고집스런 뚝심으로 자신만의 레시피를 고집하는 쉐프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쉬이 받지 못하는 다큐는, 속물화되고 세상사에 쉬이 타협하는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우직하게 우리 사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쉬지 않는다. 2월 28일 방영된 <sbs스페셜>과 <다큐 3일>도 마찬가지다. 



단원고, 그 멍에가 된 이름을 다시 불러보다. 
2월 28일 방영된 <sbs스페셜>은 '졸업-학교를 떠날 수 없는 아이들'을 방영했다. 졸업 즈음에 해가 바뀌어 졸업생이 된 단원고 박준혁 군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큐의 시작은 아이들이 없는 단원고 교실에서 시작된다. 없는 아이들의 빈 자리를 채운 부모님, 그리고 아이들의 출석부를 부르기 시작하는 선생님, 불러도 대답없는 아이들 대신 부모님들이 대답한다. 하지만 그 대답의 끝은 흐느낌으로, 통곡으로 마무리되면서, 600일이 지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아닌 적극적으로 잊혀져 가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sbs스페셜>은 그저 상기 시키는 것만 하지 않는다. 해가 바뀌고, 다시 해가 바뀌어 어느덧 2학년 준혁이가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이제 홀로 졸업식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본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동네 친구가 곧 학교 친구가 되었던 준혁이, 하지만 이제 준혁이에겐 친구가 없다. 그래서 준혁이는 학교를 다녀 온 후에 밖에 나서지 않는다. 함께 어울릴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종종 교실을 찾아 친구들에게 하고픈 말을 남길 뿐이다. 그런 준혁이가 이제 그렇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긴 학교를 떠날 즈음이 돌아왔다. 



하지만, 단원고의 졸업식은 그저 여느 학교의 졸업식처럼 쉽지 않다. 아이들이 없는 빈교실을 존치하느냐 마냐의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가지로 갈라진 학교와 학부모들간의 이견, 그리고 이제 600일이 된 상황에서 여전히 아이들을 잊을 수 없는 부모와 그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사회의 시선, 거기에 특별전형이라는 '배려(?)'에 대한 따가운 시선 등이, 축하 받아야 할 졸업식을, 따가운 보도 카메라의 세례와, 거기에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듯 학교문을 나서야 하는 학생들의 행렬로 마무리하게 만든다. 그리고 다큐는 그런 소란 가운데 부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낸 준혁이와, 그의 의연함 뒤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덤덤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사태에 집중하는 대신, 졸업을 했지만 아직은 새로운 세상에 나서기가 두려운 준혁이와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한 준혁이의 친구들과 함께, 미처 가보지 못한 제주도 수학 여행을 다녀온다. 물살에 휩쓸려 그만 손을 놓치고 만 아이, 준혁이가 만들어 준 것이면 무엇이든 맛있다 먹어주던 친구, 준혁아 부르던 목소리가 독특해서 지금도 귓가에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친구, 준혁이와 친구들은 그렇게 함께 가지 못한 친구 다섯의 사진을 대신 가지고 추운 제주도의 바람을 맞는다. 



종로구 익선동, 그 오래된, 지켜야 될 골목길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마을이다. 일제 강점기 도시형 한옥 마을로 집단적으로 조성된 이 마을은 2004년 재개발이 무산되는 바람에 유일한 한옥 마을로 잔존하게 되었다. 

<다큐 3일>은 언제난 그렇듯 72시간 동안 이 오래된 한옥 마을을 촘촘히 지켜본다. 하지만, 그저 지켜보는 것만이 아니다. 166번지에 수십년을 살아온 토박이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제 시대 요정과 요릿집등으로 융성했던 이 마을의 역사와, 그리고 이제 세월이 흘러 재개발이 무산되는 바람에 유지될 수 있는 낡은 한옥의 전사를 샅샅이 훑는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저 아직도 버텨내고 있는 한옥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대신,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우려를 담고 지켜본다. 그래서, 그 낡은 골목의 담벼락 하나, 낡은 가구 하나가, 이제 사라지만 다시는 복원하기 힘든 소중한 것임을 문화재 전문 위원의 전문가적 소견을 얹어 명시한다. 애써 동네 주민이 버린 낡은 자개 장롱조차 끌어들이는 그 오래된 한옥 마을을 지키겨 애쓰는 젊은이들의 노력을 그려내며, 전통의 유지를 강조한다. 그리고, 집값이 오르면 버터낼 도리가 없는 오래된 세탁소 주인의 말을 통해, 이곳이 부디 안녕하기를 원하는 소망을 대신한다. 




<sbs스페셜>은 단원고 아이들의 교실을 존치하자고 소리높이지도 않는다. 그저 루시드 폴의 '내 몫까지 살아내 주렴'하는 나즈막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친구들을 잊지 못한 채 힘들어 하던 졸업생이 애써 용기를 내는 모습을 담는다. 특례 입학의 논란 뒤로, 대학을 가는 대신, 친구들을 돌려준다면 그걸 택하겠다는 졸업생의 눈물섞인 토로를 전한다.  특례입학이나, 보상금, 그리고 교실의 유용이란 편협한 잣대 뒤에서 여전히 아이들을 잃은 상처에서 한 발도 나올 수 없는 학부모와, 사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졸업생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저 600일이란 시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노란 리본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다큐3일>도 마찬가지다. 섣부른 젠트리피케이션의 우려 대신, 익선동 166번지의 가치를 부각시킨다. 그곳의 낡은 흙담벼락이, 그리고 동네 주민이 이제는 쓸모 없다 버린 자개 장이 사라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거기에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곳을 훼손시키지 않고 지키려는 젊은이들의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의 거센 물살에 대항해야 할 의미와 가치를 상기시킨다. 

<sbs스페셜>과 <다큐 3일>은 편견과, 무지, 그리고 물질적 이기심에 외로 꼬아진 세상 사람들의 고개를 주물주물, 돌려 놓으려 애쓴다. 

by meditator 2016. 2. 29. 14:53

신년 특집으로 방송된 <sbs스페셜-엄마의 전쟁> 1부, <나는 나쁜 엄마입니까?>는 일요일 밤 11시가 넘어 늦은 시간 방영된 다큐임에도 다음 날 검색어를 오르내리며 화제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엄마라면 느낄 절박한 고민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제성'을 불러 일으키며 시작한 <엄마의 전쟁>은 2부 <캥거루 맘의 비밀>에 이어, 1월 17일 3부 <1m의 기적은 일어날 것인가>로 3부작를 마무리하였다. 




엄마들의 끝나지 않는 전쟁?
시작은 '맘충'으로 불려진다는 이 시대 엄마들의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이른바 '애착 육아'라고, '적어도 3년은 아이를 품 안에서 키워야 하며, 3초도 눈을 떼서는 안된다'라는 아이와 엄마의 '애착 형성'을 아이의 성격 형성에 근간으로 삼는 '육아 방식'이 이 시대 대표적 육아 방식이 되면서 '엄마들의 전쟁'은 시작되었다.는데서 다큐의 문제 의식은 시작된다.

그래서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는데 전력을 투구해야만 하고, 그런 극성스런 엄마들의 육아 방식에 대해 일부에서는 '몰지각한 신인류', '맘충'이라고 모욕적인 표현까지 쓰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정작 들여다 보면, 그 '전쟁'에 휘말린 '엄마'들의 사정도 녹록치 않다는 것이라는데 다큐의 시선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애착 육아'가 중요한 사회에서, 자신의 일과 육아, 그리고 가정이라는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의 토끼를 쫓는 엄마들의 일상은 '분초'를 다투는 말 그대로 '전쟁'이요, 그런 엄마들의 빈 자리에 어김없이 2부에서 등장한 '캥거루맘'이라 지칭되는 '황혼육아'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 의식은 그럴 듯하고, 막상 다큐를 통해 보여진 현실은 적나라한데, 막상 3부까지 마무리된 <엄마의 전쟁>은 어쩐지, 마치 그 예전 대학 역사개론 시간에 한 시간 내내 사건을 쭈욱 나열하고는 그 시대의 역사를 흐뭇하게 쫑내버리는 어떤 역사 교수님이 떠오른다. 이것도 엄마의 전쟁이요, 저것도 엄마의 전쟁이요, 이렇게 엄마들은 '전쟁' 중에 있다. 이상 끝! 뭐 이런 식인 느낌?



엄마들의 중구난방 전쟁
1부 <나는 나쁜 엄마입니까?>가 방영된 이후 화제가 되었던 것은 제목 그대로 다큐에 등장했던 엄마들이 나쁜 엄마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의도한대로 우리 시대의 워킹맘의 '적나라한 가족 사진'이 가감없이 보여졌다. 연세대를 나와 국내 굴지 대기업에 근무하는 워킹맘의 24시간이 모자른 육아하며,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동원된 다섯 명의 '아이 돌보미 어벤져스'군단까지 현실은 절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도움이 안되는 어벤져스 덕에, 발을 동동 구르며 책임을 져야 하는 35살 양정아 씨의 상황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안타까움에 비례하여, 그 다음 등장한 33세 간호사 남궁정아씨는, 그렇게 아이와 육아라는 양 손의 떡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양정아 씨에 비해 마치 '가정'과 '육아'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처럼 보여져 시청자들의 비난을 샀다. 정말 다큐를 보다보면 그녀의 남편 말처럼, 그녀는 가정을, 그리고 아이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은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2부에 등장한 한때 사교계 여왕이었으나, 이제는 딸이 데리고 온 손자들과 씨름을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 황복심씨의 딸 역시 논란이 되었다. 다큐의 시선은 '자고로 얘들은 때리면서 키워야 한다'는 엄마 세대 육아와 그런 엄마와 달리, 아이의 이유식을 위해서는 5만원 어치의 소고기도 아까워 하지 않는 딸 세대의 육아 방식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하였지만 정작 다큐 시선 속에 보여진 것은 어쩐지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딸의 육아 방식이다. 

그래도 1부에서는 현실에서 절박한 워킹맘의 육아 전쟁과, 이어진 2부에서는 요즘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황혼 육아의 가치관 전쟁을 다룬 점에서 일련의 당대성과 시사성을 가진 '엄마의 전쟁'이었다. 그러다, 이 다큐의 마무리가 되어야 할 3부에 와서 다큐는, 정작 1,2부에서 제기한 문제를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튼다. 스물 셋에 시집와서 30년이 넘는 대가족을 건사하느라 일에 파묻혀 사는 일개미 엄마 김미숙씨와, 그녀의 베짱이 남편, 그리고 13명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대식구에 워킹맘까지 하는 함은주씨의 고달픈 일상으로 침전해 버린다. 물론 1부도, 2부도 그리고 3부도 여전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엄마의 전쟁'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전쟁도 전쟁 나름이지, 이렇게 쭈욱 '엄마가 전쟁'을 하고 있다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서로 이해하고 다가가면 다 해결되는가?
전쟁이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어떤 상대를 대상으로 해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3부작 <엄마의 전쟁>이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이유는 바로, 이 다큐는 제작하는 제작진이 이 시대 엄마들이 '전쟁'을 하고 있는 사실에는 공감을 하면서도, 그 전쟁의 '주적'이 누군인지에 대한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데서 비롯된다. 

즉, 간호사이면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싶어서 대학원을 가고자 하는 엄마의 욕구는, 그녀의 모성성의 부재로 욕을 먹을 일이 아니라, 정작 연세대를 나오고 대기업을 다니면서도 직장을 계속 다녀야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엄마의 고민과 동일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여성'도 동등한 인력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며, 그 능력을 펼쳐야 한다고 하면서, 막상 그 현실에서 그런 '욕구'를 가진 엄마를 '나쁜 엄마'의 여론 재판으로 내몰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애착 육아'가 대세라고 하면, '애착 육아'가 가능하게 회사에 놀이방을 마련하고, 엄마가 일을 하며서도 아이를 마음 놓고 키울 수 있게 제도를 마련하면 된다. 한때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엄마를 새삼스레 집에 불러들여, 부모 자식 세대의 가치관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식 둘 데리고 와서 엄마에게 한동안 치대다가, 그 이유가 엄마가 외로워서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핑계댈 것이 아니라. '황혼'에 육아가 짐이 되지 않는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다큐'의 시선과 방향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엄마들의 전쟁'이라는 보이는 현실만 찍다보니, 자기 계발의 욕구를 가진 엄마를 '나쁜 엄마'라 규정짓고, 아이 돌보미 어벤져스나 황혼 육아를 해프닝처럼 그려낼 뿐이다. 



그러니 3부에서 예능처럼 1m의 밧줄이 등장하여, 서로 조금 더 이해하고 친해보자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부추키는 나라, 하지만 정작 아이를 많이 낳은 엄마는 가난에 시달린 아이들에게 죄인이 되고, 하루 종일 그 아이들 뒤치닥거리와 돈벌이에 심신이 지쳐간다. 13명의 아이들도 부족해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나라의 엄마에게 필요한 게 주말의 휴식일까? 

그저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처럼, 조금 더 이해하고 다가가면 해결 될 문제일까? 간호사 엄마와 아빠가 서로 이해하고 다가가면 어떤 해결책이 가능할까? 아이돌봐줄 사람이 없어 동동 거리는 워킹맘에게 이해하고 다가갈 사람은 주변 사람들일까? 국가일까? 사회일까? 그러니 결국 대한민국에서 전쟁에 시달린 엄마가 선택할 길은 '어벤져스'와 같은 돌보미 영웅들이 등장하거나, 그게 아니면 윤현숙씨 처럼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주변의 '인정'과 이해로 마무리한 또 다른 '가족주의'의 전횡이다.  나름 현실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던 <엄마의 전쟁>이 그래서 그 어느때의 sbs스페셜보다 아쉬움이 남는다. 


by meditator 2016. 1. 18. 17:12

얼마전부터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 상에서 '천일염'과 관련된 논쟁이 뜨거웠다. 그건 바로, <수요 미식회> 등을 통해 미식 평론가로 세간에 주목을 받게 된 황교익이 제기한 '천일염의 유해성 문제'때문이었다. 


천일염은 일정한 공간에 바닷물을 가두어 놓고 햇볕과 바람으로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법으로 얻는 소금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 소금 제조 방식으로 알려져, 각종 전통 음식의 맛을 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식품이다. 또한 최근 '건강 열풍'과 맛물려 천연 식품으로서의 천일염의 가치가 부각되면서, 각종 미네랄이 함유된 천일염이 '된장',이나 고추장처럼 우리 전통의 자연 건강 식품으로 대접받아왔던 것이 최근의 실정이다. 황교익 평론가는, 바로 이렇게 그간 우리가 알고있던 '천일염'과 관련된 모든 허상을 무참히 무너뜨린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최근 생산되고 있는 천일염은 외국의 기준에 비추어 한없이 높은 세균 수치로, 그리고 그에 대한 기준치가 없는 정부 가이드 라인으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더러운' 천일염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폭로했다. 그리고 황교익의 주장과 관련하여, 각 매체들, 그리고 천일염과 관련된 이익 단체들의 맞물리는 보도가 연이어지는 가운데, <sbs스페셜>을 발빠르게 그 논쟁의 장을 옮겨온다. 



천일염, 유해성 논란을 정면으로 다루다  
프로그램의 시작은 <sbs스페셜>이 마련한 토론회의 자리였다. 천일염 논란과 관련하여 마련된 카메라 앞의 토론회 자리, 하지만 황교익 평론가를 비롯하여, 서강대 이덕환 교수 등 관계자들이 자리를 다 채운 것에 비해, 단 한 명의 식품 연구가 만이 자리를 채운 그 반대의 입장은 이미, 세간에 불이 붙은 천일염 논쟁의 진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천일염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
논쟁의 내용을 따지기에 앞서, <sbs스페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의 소금'이라던 천일염의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실체는, 천연의 바닷물과 햇빛으로 만들어 지는 줄 알았던 염전 바닥에 깔린 시커먼 플라스틱 성분의(그것이 비닐이든, 비닐이 아니든)장판에서 '천연' 혹은, '자연'의 환상은 산산이 부수어 진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플라스틱 장판이 깔린 염전 바닥을 염부가 득득 긁어 모은 천일염, 소비자들이 천일염을 샀을 때 거기에 간간히 섞여있던 그 검은 입장의 정체는 바로 그 장판의 부스러기였다. 

우리의 전통 소금 생산법에 장판이!! 라는 충격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환상은 다시 한번 무참히 깨어진다. 그간 매스컴을 통해, '전통'의 소금 제조 방식이라 알려졌던 천일염 제조법이, 몇 백년 된 것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도입된 '대만'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대륙을 향한 자신들의 야욕을 다지기 위해, 다량의 공업용 소금이 필요했고, 그 소금 공급의 일환으로 대만의 소금 제조 방식인 천일염 제조 방식을 도입했고, 그것이 매스컴의 윤색을 통해 전통의 소금 제조 방식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일제에 의해 도입된 천일염 제조 방식으로 인해, 진짜 우리 전통의 제조 방식이었던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갯벌의 모래를 통해 소금을 얻는 '자염(紫染)'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의 방식으로 떠받들어 지고 있는 천일염의 제조 방식이 그 유래의 본토인 대만에서는 비위생적이고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거의 소멸 위기에 놓여있고, 그것을 도입한 일본에서는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그 유래의 추적을 통해 밝힌다. 

거기에 황교익 평론가가 최근 제기하고 있는 유해성과 관련하여, 염전의 환경은 '유해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덧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있는 천일염보다 맛도 떨어지고, '천연적'이지 않다는 정제염과 관련된 실험은 그간 대중의 인식이 '착각'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천일염 논쟁의 실체는?
마치 한 편의 기막힌 사기극을 보는 듯한 '천일염 신화', 한때는 신문 지상에서 깨끗하지 못한 천일염의 기사들이 비일비재하게 올라오던 시절도 있었던 천일염, 과연 이런 '신화의 왜곡'은 어디로 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거기서 < sbs스페셜>은 미디어 관련 학과 전문가의 입을 빈다. 이정교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천일염뿐만이 아니라 어떤 이슈든 간에 미디어가 반복적으로 보도를 하게 되면 이론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보통 컬티베이션 이론이나 의제설정 이론에 따르면, 미디어가 묘사하거나 보여주는 것들을 현실과 거리감이 있을 지라도 소비자들이나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실제로 묘사된 천일염에 대한 것들을 사람들이 좋게 믿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다. 10년 전의 천일염 조사 자료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관련 단체, 그리고 천일염과 관련하여 대규모의 위조된 신화를 창조해낸 관련 업계와, 그를 확산시킨 미디어, 그 결과 우리나라 국민들은 근거도 없는 '천일염 전통 식품론'을 믿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한 건강 식품'으로 세균에 대한 기준조차 없는, 그래서 외국 기준에 훨 못미치는 3년이 지나도 세균이 없어지지 않는 더러운 천일염을 식용으로 먹고 있게 되는 거라 밝힌다. 



<sbs스페셜>이 다룬 소금 논쟁은 시의적이다. 한 평론가로 부터 시작되어 sns 상을 뜨겁게 달궜고, 여타의 매체들이 정부와 각종 단체들의 입장을 들어, 그 진실을 왜곡하려 들때, 양 자들을 불러 모아 토론회의 형태로 시작하여, 천일염의 역사를 통해, 그 실체를 밝히려고 한 시도는, 그간 천일염의 왜곡된 신화에 일조한 미디어의 제대로 된 '반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형태이다. 그래서, <sbs스페셜>은 황교익의 사과로 마무리된다. '자신이 천일염의 진실을 알기 전에, 천일염을 옹호한 글을 썼고, 그 글을 읽고 천일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지게 된 분들에게 황교익은 사과를 한다. 물론, 황교익은 이후, 자신은 사과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왜곡된 글을 쓰도록 왜곡된 정부를 내놓은 정부와 학자들에 대한 '분노'도 표명했으나, 그 부분은 편집이 되었다고 자신의 sns를 통해 아쉬워한다. 하지만, 분노의 이전에, 황교익이든, 그런 사실의 왜곡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온 미디어든, 자신의 과오에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그것이,진정성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분노'보다, 거짓과, 외면과, 왜곡이 횡행하는 시대 탓일 듯하다. 
by meditator 2015. 9. 14. 15:40

5월 7일과 14일 <sbs스페셜>에는 하얀 가면을 쓴 일군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바로 '의사'였다. '병원의 고백'이라는 2부작을 통해 '의료계'의 현실을 현장의 목소리로 토로했던 '의사'들은 자기 고발적인 프로그램의 내용때문에 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숨기고 낱낱이 의료계의 현실을 들려준 덕분에, <sbs스페셜>은 '의료수가'로 인해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신, 주판알을 튕겨야 살아남는 의료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이제 7월 26일 의사들은 다시 한번 '하얀 가면'을 썼다. 바로 26일 자정을 기해 마지막 남은 메르스 환자가 격리에서 해제된, 사실상 종식된 메르스를 복기하기 위해서이다. 



메르스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중동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신종 베타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는 중동 호흡기 증후군 메르스는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병된 후 3년간 453명의 사망자를 내었지만 백신이 개발되지 않아 공포의 대상이었다. 

<sbs스페셜-메르스의 고백>은 메르스 바이러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바레인에 다녀온 첫 번째 환자를 숙주로 그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가뿐히 대한민국에 입국한 메르스, 그로부터 186명의 확진자와, 6729명에 이르는 격리자, 그리고 36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시설이라 자타의 공인을 받았던 삼성 서울 병원을 비롯하여 몇몇 병원을 '자체 폐쇄'이르는 병원 시스템의 마비를 가져왔다. 과연, 이토록 무방비하게 대한민국이 '메르스'에 당하게 되었는지 jtbc <썰전>의 이철희 소장과 조동찬 의학 전문 기자가 각계 전문가와 현장 의료진, 그리고 보건 당국자들을 만나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메르스 사태'와 관련하여 전 사회가 경악했던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외래의 바이러스 질환에 이토록 무방비하게 무너졌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로 들어본 <sbs스페셜>을 통해, 이전의 '병원의 고백'처럼 시청자들은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접하게 된다. 


평택 성모 병원에서 시작된 메르스, 하지만 첫 번째 감염자가 확진을 받을 때까지의 시기는 늦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현장 의료진의 반응은 뜻밖이다. 고열의 환자를 이름조차 낯선 '메르스'라 의심했던 '의사'를 '의대 시절 공부를 잘 했구나'란 감탄의 반응을 보이고, 확진이 늦어진 상황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란 이유로 확인조차 하러 들지 않은 '질병 감염 관리 본부'의 늦장 대처가 짚어진다. 하지만, 그건 '메뉴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바이러스성 질환에 대한 '메뉴얼'은 있었지만, '메뉴얼'대로 시스템을 가동하여 '긁어부스럼'을 만들려고 하지 않은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메르스 사태를 확산시켰음이 짚어진다. 그저 병원 복도에 잠시만 않아있어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을. 책임질 위치에 있는 그 누구도 '현장'에 나가보지 않는 '안일한' 태도가 결국 '메르스'를 확산시킨 주범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나아가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이! 라는 전국민적 경악을 낳았던 '삼성 서울 병원'의 무능도 짚는다. 원장 위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사장'이라는 존재가 삼성 서울 병원을 '의료'의 공익성보다는 '이윤 집단'으로서의 가치를 우선하게 함으로써 '전염병'대응에 무능하게 대처하도록 했음을 지적한다. 이는 결국 '병원의 고백'의 연장 선상이다. 대한민국의 의료체계가 '공익' 성보다는 '돈벌이'에 우선하는 현실이 다시 한번 까발려진 것이다. 또한 '삼성'이라는 체계가 가진 습성인 '비밀주의'가 현장에서 일하는 의사들 내에서 조차 정보가 공유되지 않도록 하여, 메르스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없는' 체계로서 삼성 서울 병원을 만들었다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결국은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붕괴, 질병 관리 시스템의 무능
'비밀주의'는 삼성의 습성만이 아니었다. 현장의 의사들조차 '메르스'에 대해 알 수 없어 감염자가 마구 돌아다니게 방치했던 상황, 결국 박원순 서울 시장의 한밤 기자 회견을 봇물이 터져버린 메르스 정보 공유의 문제도 다루어 진다. 감염 분야 전문가들의 입장에 바라본 박원순 시장의 정보 공개 기자 회견의 정당성 여부에서 부터 시작하여, '전염병' 대응에 있어 무지하고, 무능력했던 정부의 대처 시스템의 원인도 적나라하게 짚어본다. 결국 '슈퍼 전파자'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내고만 시스템의 무능을 드러낸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 병원의 고백'에서 부터 비판된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 의료 수가배분의 문제가 다시 한번 지적된다. 1인당 감염 관리료 150원인 대한민국의 현실, 그 비용을 가지고 정부는 '음압 병동'을 짓고 '바이러스성 질환'에 대처하라고 한다고 현장의 의료진을 입을 모은다. 이는 결국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고. 



질병 관리 본부 등 정부 측 관계자는 이 정도면 '메르스'라는 바이러스 성 질환에 대해 '양호하게' 대처한 것이 아니냐고 정부측은 자부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작 '메르스의 고백'을 통해 밝혀진 대한민국 질병 관리 체계의 현실은 '메르스'가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병원, 150원의 감염 관리료를 측정한 정부, 그리고 언제라도 다시 발생할 수 있는 '메르스'와 같은 감염성 질환에 대해, '이 정도면'하며 자부하며 '박원순 사태'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정보 공개'조차 했을까 의심스러운 관료들, 심지어 정부의 발표 그 순간에조차, 국민들의 건강보다, 그 누군가의 이해가 우선되는 시스템은 결국 또 다른 '메르스'의 발병과' 또 다른 '슈퍼 전파자'라는 희생양은 필요충분 조건이 됨을 자연스레 이해시킨다. 

<sbs스페셜-메르스의 고백>은 몇 달간 겪었던 메르스 사태, 그리고 그로 인한 다수의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이 그저 '메르스'라는 우연적 요소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데 주력한다. 이미 '병원의 고백'을 통해 고발하려고 했던  영리 산업이 되어버린 '의료계의 현실'과 그것을 방조하는 정부 정책의 연장 선상에서 이번 '메르스' 사태를 다루고자 한다. 달라지지 않을 현실, 여전한 시스템의 무능, 그 속에서 환자 0명, 마지막 격리자의 해제로 '메르스 사태' 종식을 선포하려는 정부의 발표는 그저 무수한 지뢰 중 하나를 누군가의 희생으로 제거한 것에 불과하다. 

by meditator 2015. 7. 27. 07:02

6월 15일 sbs의 <힐링 캠프>의 초대 손님은 요즘 대세 쉐프인 이연복, 최현석 두 명의 쉐프이다. 중식과 양식의 대표적 쉐프테이너인 두 사람은 각자 자기 분야의 요리를 다양하며 선보이며, 자신들이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 mbc다큐 스페셜 <별에서 온 쉐프>에도 두 사람이 출연한다. 쿡방(cook과 방송의 합성어) 전성시대 그 중심에 놓인 남자 쉐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게 격돌을 벌인 두 방송중 굳이 한 쪽의 손을 들어준다면, 사람좋은 미소로 일관했던 <힐링 캠프>에 비해, 아내를 따라 유기견 보호소를 들렀다 오랫동안 길렀던 반려견을 잃고 힘들어 했던 아내의 속내를 그제서야 깨닫고 눈물을 쏟아버린 이연복 쉐프의 뜻밖의 순간을 다룬 <mbc다큐 스페셜>에 한 표를 던진다. 준비된 토크의 초대손님보다, 민낯의 쉐프들이 더 진솔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다큐의 맛이다. 6월 14일, 15일 sbs와 mbc의 두 '스페셜'한 다큐는 요즘 대세라는 '요리하는 남자'를 다뤘다. <sbs스페셜>이 '요리하는 남자'가 트렌드가 된 시대에, 요리와 남자라는 주제에 대해 고민해 본다면, <mbc다큐 스페셜>은 그 트렌드의 중심의 민낯을 그려보고자 한다. 




남자, 요리를 만나다- <sbs스페셜-요리, 남자를 바꾸다>
쿡방 전성시대, 그리고 그 흐름을 이끌고 있는 훈남 쉐프 전성시대에 이 시대 남자들에게 '요리'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에 대해 <sbs스페셜>은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70이 넘도록 요리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심지어 자기 집 주방 불조차 제대로 켤 줄 모르는 조영남을 내세운다. 또한 현역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펄펄 날던 공직 생활 30년 이후 여전히 아내가 매 끼니를 챙겨줘야 하는 윤건중씨에게 요리를 배우도록 한다. 

소설가 최인호 등 또래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후배들은 그 조차 떠날까 우려하며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는 조영남, 그는 그렇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후배와 친구들을 위해 한 상을 차리기 위해 요리를 배운다. 늘 누군가 해주는 요리를 먹거나, 그게 안되면 시켜 먹거나, 사먹으며 요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그, 고기를 굽고, 거기에 맞는 스스로 만들어 곁들이며 새로운 세계를 맛본기 시작한다. 윤건중씨도 마찬가지다. 쌀도 씻을 줄 모르던 그가 아내의 친구들을 위해 한 상 차림을 마련하게 되면서, 요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남자들에게 요리란 어떤 존재로 다가오게 되는 것일까? 남편과 단 둘이 사는 윤건중씨의 아내는, 주변에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아가며 음식을 할 줄 몰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혹시나 있을 상황을 걱정한다. 그렇게 현실적 필요에서 시작된 요리지만, 다큐 중 등장한 샘킴의 확언처럼, '누군가를 생각하며 요리를 하고, 그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요리의 맛을 느끼는 순간, 이들 남자들에게 요리는 그들이 맛보지 못한 희열의 세계를 선사한다. 

아내의 친구들에게 요리를 해주고 그 친구들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진 윤건중씨에서부터, 요리 교실에서 배워 온 요리를 통해 사춘기 자녀와의 사이가 한결 가까워졌다는 김승용 요리 교실의 수강자, 그리고 아들 은규의 거센 사춘기 반항을 매 끼니 소박하게 차려내는 밥상으로 순화시킨 이충노씨의 요리는 변화 이상의 그 무엇이다. 특히, 잘 나가던 건축업계 ceo를 접고 아들과 단 둘이 아들이 전학해온 양평으로 내려 와 오로지 매 끼니 밥상을 차리며 튕겨져 나갈 아들을 품으로 끌어들인 이충노씨의 밥상은, 사랑의 상징이다. 그렇게, 이 시대 남자들은, 비록 전문 쉐프는 아니지만, 멋들어진 상차림 속에 숨겨진 진짜 요리의 맛과 멋을 체득해 가는 중이다. 



엔터테이너가 된 쉐프들의 민낯-<mbc다큐 스페셜-별에서 온 쉐프>
mbc다큐 스페셜은 쉐프전성시대를 직시한다. 그리고, 이제는 쉐프테이너가 된 그늘의 명과 암을 찬찬히 그려나간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이른바 '쿡방'의 시대사로 부터 시작된다. 이제는 국민 엄마가 된 고두심씨가 진행하던 요리 프로에서 부터 시작하여, 방송사와 함께 명맥을 이어가던 요리 프로그램, 한때는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여성들에게 요리를 가르쳐주던 여성 요리사가 인기가 있던 시절이 무색하게, 이제 tv 속 요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연복, 최현석, 샘킴들의 쉐프테이너들이 있다. 

<별에서 온 쉐프>는 요리 평론가 황교익, 요리하는 기자 박준우를 등장시켜 현 쉐프 전성시대를 진단한다. 한때 우리 방송가의 대세였던 운동선수들처럼, 그렇게 트렌드로서 '끝물'로 쉐프 전성시대를 진단하는 박준우와 달리, 황교익은 불황의 늪이 깊은 현 시대, 대리 먹방은 오래 지속될 것이라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린다. 그렇게 냉정한 분석에서 시작된 쉐프 전성시대, 거기에 '맹기용쉐프논란'과 같은 잡음에 대해서도, 겨우 4년차의 쉐프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부추기게 되는 '방송이기에' 만들어 지는 해프닝을 짚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짜 쉐프들의 삶은 어떨까?

르 코르동 블루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제는 50대가 넘은 쉐프는 그 나이에도 여전히 현장을 지휘한다. 쉐프의 길이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짐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78세의 냉면의 장인은 냉면 육수의 맛을 내기 위해 여전히 새벽녘 집을 나선다. 쉐프테이너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들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그들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하는 최현석 쉐프의 말처럼 그들은 여전히 전쟁터와 같은 주방을 진두 지휘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제 아무리 바쁘다 한 들 주방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이, 그래서 가족과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고, 아픈 아내의 마음조차 돌아보지 못해 눈물을 쏟고 마는 이들이 쉐프테이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연복 쉐프와 같이 중식 쉐프는 이연복 쉐프에게 감사하단 말을 전한다. 그간 각종 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불량식품'처럼 이미지가 박혀있던 중식에 대해 이연복 쉐프가 이미지 전환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황교익 평론가는 이미 예약 손님들로 꽉 찼던 이연복 쉐프의 식당이었음에도 굳이 방송 출연을 하는 이연복 쉐프를 두고 '심심하셨는가봐요'라고 우스개를 던지지만, 먹고 살기 위해 중식 쉐프가 되고 그 길을 평생 걸어온 이연복 쉐프 자신도 세상 사람들에게 요리 하는 자신을 떳떳이 내세우고픈 인정 욕구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식당들이 파리를 날리는 불황기에도 서로 매상을 비교하며 뿌듯하게 성업 중인 샘킴과 최현석의 레스토랑에서도 보여지듯, 방송 출연이 곧 '매상'이라는 생업의 향상으로 직결되는 현실을 그려낸다. 

하지만 몇 달 후까지 예약이 차있는, 밀려드는 손님, 예정된 방송 활동 가운데, 쉐프테이너들은 지쳐간다. 코스 요리 중심이었던 이연복 쉐프 중식 레스토랑은 매출이 줄어들 정도로, 탕수육 등 단일 품목만이 인기를 끈다. 예능 출연 중에 부상을 입었던 샘킴 쉐프는 결국 병원을 찾고야 만다. 190을 넘는 건장한 체격의 최현석도 체력 충전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도 한 말 또 하고 또 하게 만드는 방송 생리를 잘 몰랐다고 토크쇼 출연을 자제해야 하겠다고 말하는 이연복 쉐프의 말처럼 몇몇 인기 쉐프들 중심으로 돌려막기식의 쉐프 전성 시대는 방송 스스로 '끝물'을 조장한다. 하지만 쉐프테이너건 아니건 여전히 주방을 지키는 남자들은 오늘도 뜨거운 불앞에서 굵은 땀을 흘린다. 
by meditator 2015. 6. 16. 12:04

4월 5일 방영된 <sbs스페셜>은 여성들의 가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가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하겠지만, 여성들 신체의 일부임에도, 가슴은 여성들의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들 '음담패설'의 전용물인 양 여성들 자신의 이야기에서 소외되어 왔었다. 미국의 유명 전도사가 설교를 들으러 온 여성들에게 다리를 꼬고 앉으라고 하고는 '이제 비로소 지옥의 문이 닫혔다'라고 운을 띄웠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의 몸은 여성들의 것임에도 '성 문화의 상징'으로 터부시되거나, 음란한 상징의 대상으로만 전용되어 온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렇게 여성들 자신조차도 자기 신체의 일부임에도 가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노소를 불문하고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이 시대에, <sbs스페셜>은 과감하게 '가슴'에 대해 말문을 연다. 

과감하게 가슴에 대해 말문을 열다. 
< sbs스페셜>의 부제는 장윤주의 가슴 이야기이다. 나레이션을 맡은 장윤주는 그저 이야기 전달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자신의 가슴 이야기로 부터,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가슴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으로 다큐을 풀어간다. 

장윤주가 머리를 하는 과정 주변 지인들과 자연스레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본다. 그런데 마치 남성들이 자신들의 성기 이야기를 하면, 자연스레 그 크기와 성적 기능으로 이야기가 풀어져 가듯이 장윤주 동년배들의 가슴에 대한 이야기는 여성성의 상징으로서 가슴, 그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 들어간다. 

정신분석학자 수지 오바크의 증언대로 이 시대 우리의 몸은 이제 더 이상 타고난 본래의 몸이 별 의미기 지닐 수 없듯이 미디어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로서의 몸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맞추고자 고민한다. 그래서 어느 덧 가슴 확대 수술이 동년배의 대화에 생소하지 않은 소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제대로 된 '브래지어' 착용법의 도움을 받아도 여전히 본연의 작은 사이즐로 인해 여성성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현실적 고민을 거슬러 올라가 그렇다면 과연 가슴이란 무엇인가를 인문학적으로 들여다 본다.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가슴을 가지게 된 인간 여성, 과연 진화론적으로 그런 결과물(?)이 생겨난 이유가 무엇일까? 동물학자들은 그 이유를 원숭이의 엉덩이에서 찾는다. 발정기가 되면 부풀어 오르는 엉덩이, 수컷은 그것을 보고 암컷을 찾아드는데, 직립 보행을 하기 시작하고 거기에 옷까지 입으면서 엉덩이를 가리기 시작한 인간은 더 이상 '발정'의 증거를 널리 알릴 수 없게 되었고, 그 증거물을 대신하기 위해 여성의 가슴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진화학자들의 증언이다. 

성적인 역할에 국한되지 않는 가슴
하지만 가슴의 진화론적인 결과가 어떻든, 동시대 여성들이 큰 가슴을 선호하든 어떻든, 가슴의 역할은 그저 성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창조주'의 심정을 경험하게 되는 '수유'의 행복이 가슴의 잊어서는 안되는 존재론임을 다큐는 짚는다. 하지만, 영국 호텔에서 가슴 노출이 심한 여성에게는 입장을 허용하면서, 모유 수유를 하는 여성에게는 그 모습을 가리라고 하듯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가슴을 대하는 인식은 여전히 차별적이라는 것을 가슴 이야기는 놓치지 않는다. 



또한 가장 숭고한 시간임에도 그러기에 가장 오염된 환경에 노출되기 쉬운 존재임을 다큐는 증명한다. 놀랍게도 미국, 유럽은 물론, 우리 나라 엄마들 모유에서 검출되는 각종 환경 오염을 일으키는 물질들에서, 그저 사명을 넘어선 건강한 모유 수유의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낸다. 

그러나 큰 가슴을 선호하는 사회 풍조든, 아이에게 젖을 주는 창조적 활동이든 그것도 가슴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차별적인 '암'의 공격은 가슴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다른 암과 달리, 가슴을 도려 내어야 하는 유방암의 예후는, 그 암을 겪는 환자들에게 병으로 인한 고통 외에, 여성성의 상실과의 싸움이라는 또 다른 고통을 준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짚는다. 크건 작건 그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가슴으로의 귀결이다. 



가슴을 통해 여성을 생각해 보다
여성주의에 대한 여러 접근 중에,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그려보게 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다수의 여성들은 질색을 한다. 어떻게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들여다 보느냐는 것이다. 수없이 되풀이 되어 공연되는 여성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그래서 그저 여성들의 성기 담론이 아니다.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직시하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 된다. <sbs 스페셜-장윤주의 가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가슴을 통해 여성 자신을 말하고자 한다. 


비록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다루려다 보니, 우리 사회 여성들의 가슴에 대한 인식에서 부터, 모우 수유, 그리고 유방암까지, 마치 가슴의 '생로병사'라도 다루려는 듯이 다소 번잡스러워 졌지만, 가슴학 개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고민이 잘 전달된 시간이었다. 이렇게 개괄적으로 다루었던 여성의 가슴이 다음에 좀 더 각론적으로 접근된 깊이있는 각론의 다큐로 만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특히나, 미디어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에 노예가 된 이 시대의 가슴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많아 보인다. 내 것인데 내 것 같지 않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부인 가슴, 그 개론인 장윤주의 가슴이야기는 여성에 대해 말문을 여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by meditator 2015. 4. 6. 13:27

'트라우마'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이토록 우리 곁에 친근한 단어로 씌여지는 때가 이 시대이다. 더구나, 2014년 4월, 5월, 그리고 6월은 온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과연 이 사회적 트라우마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만 할까? <sbs스페셜>은 <다친 마음의 대물림, 3대를 간다>를 통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의 치유 방식에 대해 고민해 본다. 


당연히 다큐의 시선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향한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부모님을 걱정했다는 착한 딸과,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돌아와 책을 사겠다며 남겨둔 기특한 아들을 '수장시켜버렸다는' 장순복, 유성남씨의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면 흘리는 대로, 혹은 공황상태이면 공황상태인 대로, 심지어는 죽은 언니가 좋은 곳에 가지 못할까봐 울음을 틀어막거나, 형을 따라가고 싶다며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차마 맘놓고 슬퍼하지도 못하는 가족들에게 찾아간 재난 전문가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자, 가슴 속에 응어리들은 조금씩 풀어져 나온다. 

하지만 우리, 우리 사회는 잊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를 덮친 트라우마는 비단 세월호만이 아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도, 성수대교 붕괴 사고도, 그리고 대구 지하철 참사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뿐, 여전히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살아남은 신옥자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사고 이후, 하다못해 자동차 헤드라이트까지 끄고 다녀야 하는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면서, 그녀와 그녀 남편의 일상은 피폐해져갔다. 사고 당시 꿈많은 여고생이던 손미영씨는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자살 시도와 자해를 되풀이해왔다. 


트라우마는 비단 심리적 기제만이 아니다. 뇌단층 촬영을 통해 보면,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편도체가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뇌의 손상을 입는다. 트라우마를 겪으면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는데, 심지어 임신을 하고 있는 엄마가 트라우마를 겪으면, 태어난 아이들 역시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성향을 유전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면서 스트레스에 더 과하게 반응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트라우마의 유전은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3대에 걸쳐 대물림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1년간의  시간을 트라우마의 골든 타임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 동안 잘 치유가 된다면, 유전이 될 정도로 무서운 트라우마는 아물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때 치유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1년후, 혹은 몇년, 심지어는 몇 십년이 지나서도 개인의 삶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911테러 이후 다수의 사람들을 희생한 한 지역에서는 병원 부설 치료 센터를 만들고, 피해자 중 센터장을 뽑아, 지속적으로 911테러 희생자와 유족들의 상처를 돌보아 왔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활동 등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 중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끼지 결연을 맺어 상실의 아픔을 보다듬을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수의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벗어나,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sbs스페셜이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하다. 우리 사회도, 미국 911테러 후속 조치들처럼 사회적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 골든 타임 안에 치유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치유의 방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공동체를 통한 유대감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치료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대구 지하철 참사의 피해자들이 여전히 각자의 트라우마를 각자의 가족이 짊어진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세월호 사건 수습 과정에서 보여진 정부, 해운사, 해경 등의 대응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그 유족과 생존자들의 트라우마까지 챙길 깜냥이 되겠는가 하는 회의가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책을 세우기 보다, 유족들이 들고 일어날까 경찰부터 붙이는 시스템이, 과연 그들의 트라우마 골든 타임을 지켜줄 수 있을까. 해법이 존재하기에 더 가슴이 답답해지는 시간이었다. 


by meditator 2014. 6. 2. 06:33

<sbs스페셜>은 3월 30일과 4월 6일 2주에 걸쳐 <숲으로 간 사람들>을 다루었다. 그 중 1부 '새 생명을 얻다'는 숲을 통해 암 등의 질병을 고친 사례를 들어 숲이 가진 자연 치유력을 증명한다. 그에 이은 2부 '새 인생을 얻다'는 아예 숲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사례를 들어, 삶의 대안으로서의 숲을 제시하고 있다.



낮 시간의 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것 중 하나는 보험 광고 방송이다. 가장 신뢰할 만한 연예인들을 내세우며, 묻고 따지지도 않고 보험을 들어주겠다며, 이 보험을 들면 치료비 걱정은 없다고 꼬신다. 전 국민 의료 보험 시대라 하지만, 막상 암과 같은 질병이 생기면 넉넉한 집이 아니고서는 집안 거덜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되는 것이 지금의 의료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앞날의 병원비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보험을 들어둔다. 하지만 보험을 들어둔다고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제 아무리 돈이 있다 한들, 현대 의학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렇게 현대 의학도 포기한 사람들을 숲이 품어 고쳐주었단다. 

혈액암 말기, 간암 2기, 위암 2기의 환자들이 숲을 걷는다. 물론 처음부터 이들이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숲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겠다고 들어선 숲에서, 신승훈씨는 뜻밖에도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그리고 6년 암과의 전쟁터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백완섭씨의 경우는 아예 작정을 하고 숲에 들어섰다. 위암 수술을 받은 그는 암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살았던 도시의 삶을 버린다. 전기,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숲 속에서 4년 째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실제 검사 결과 이들에게서 암세포는 사라졌고, 면역 상태는 거의 일반인 수준이었다. 그 수많은 장비와 명의가 있는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었던 질병이 그저 숲을 거니는 것으로, 숲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병을 안겨주었던 도시의 삶을 벗어난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 살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일주일에 한 두번이라도, 아니 그게 안되면 한 달에 한번이라도 숲을 다녀오는 것으로 인간의 몸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치유력을 가진다. 말 그대로 생명력 넘치는 숲의 신비다. 

2부 '새 인생을 얻다'는 이렇게 생명력 있는 숲으로 삶의 공간을 옮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부에서도 보여지듯이, '암'등의 병을 가져온 것은 스트레스로 넘쳐나는 도시의 삶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뻔히 암유발적인 생활인 줄 알면서도 도시에서의 삶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전부인 줄 안다. 바로 그런 고정 관념을 벗어던진 이들을 2부, '새 인생을 얻다'는 다루고 있다. 

부부가 하루에 한 마디를 나누기도 힘든 도시의 삶을 살았던 이태인 씨 부부는 전기, 수도, 휴대폰이 없는 깊은 산속에서 살면서 애인처럼 지낸다. 한때 잘 나가던 디자이너였던 이오갑씨는 이제 전국 백수협회 대표가 되어 산속에서 할 수 있는 100가지의 즐거움을 찾아 하루를 보낸다. 

이들이 포기한 것은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편리함과 넉넉함으로 유혹했던 문명의 속도, 경쟁 등이다. 숲으로 들어와 병도 치유하고 삶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게 되었던 1부의 환자들처럼, 숲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이들은, 조금 불편하지만,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행복을 얻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숲에 사는 부부는 매양 얼굴을 마주 보며 웃는다. 혼자 외롭게 살건만 이오갑씨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 


근대 이후 등장한 세계관은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산업 혁명 등의 물질 문명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입장이었다. 즉, 물질 문명이 발전하듯이, 인류의 역사는 그 물질의 발달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이제 더 이상 인류의 진보만을 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으 입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석유라는 한정된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인류 문명의 유한성을 들먹이는 사례가 석유 매장량이 적어지는 것에 반비례하여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지금껏 진보라고, 발전이라고 믿었던 인류의 문명이 가져온 것은 자원의 고갈과 병든 지구라는 반성이 빈번해지고 있다. 

그런 반성은 석유 문명 이후의 삶에 대한 대안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2부작에 걸친 <숲으로 간 사람들>은 바로 그런 문명론적 고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계가 등장한 것은 자연에 의존하던 삶을 사람들을 자본주의 제도하에 몰아넣기 시작한 그 즈음부터라고 한다. <모던 타임즈> 속 사람들은 거대한 시계에 짖눌려 신음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굳이 시계가 없어도, 우리 안에 내장된 속도감에 짖눌려 살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런 속도전에 길들여진 우리 삶의 대안으로, 석유 문명이 가져다 준 이기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대안으로 <sbs스페셜>은 숲을 제시한다. 

굳이 주렁주렁 보험을 들어도 고칠까 말까하는 병원이 아니라도, 매년 올라가는 집세에 시달리는 아파트가 아니라도, 남들보다 밀릴까 조마조마한 경쟁이 아니라도, 조금만 비우고 버리면 행복해 질 수 있는 대안으로 숲이다.  


by meditator 2014. 4. 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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