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세계적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 80여 편의 작품 중 자신이 뽑은 10개의 작품에 들어가는 수작이다. 장편으로는 14번 째, 프와로 탐정 시리즈로 8번 째인 이 작품은 1932년에 실제로 있었던 찰스 린드버그 아들의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으로, 크리스티 스스로 '새로운 플롯의 아이디어'를 선택의 이유로 삼았을 만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함께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이런 신선한 플롯 덕분에, 크리스티 자신은 물론 작품이 출간된 이후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아왔고, 일찌기 1974년 시드니 루멧 감독이 영화화한 이래, 1989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한 영국 드라마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 시리즈 중 한 편으로 2010년 방영되었으며, 2015년 후지 tv  개국 기념으로 2부작 만들어진 바 있다. 안타깝게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 작품을 함께 하진 못했지만 1978년 <나일 살인 사건> 등 5편의 장편 영화, 그리고 다수의 tv 시리즈에서 포와로로 활약하여 '포와로' 전문 배우로 기억되는 피터 유스티노프도 있다. 그리고 이제 2017년 케네스 브래너 감독, 주연의 신작이 찾아왔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201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소설을 읽은 독자를 비롯하여, 전작의 영화와 tv 시리즈를 본 사람, 그리고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아니지만 포와로를 연기했던 배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보며 '비교' 대상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포와로
개인적으로  tv 시리즈를 통해 피터 유스티노프의 익살스런 포와로에 익숙해 있었기에, <덩케르크>에서 신념의 해군 제독으로 각인되어있던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하는 에르큘 포와로는 좀 낯설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스타일스 저택의 살인 사건>을 통해 처음 등장하는 포와로는 벨기에의 전직 경찰로 은퇴 뒤 영국으로 건너와 탐정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로 그를 본 사람들이 '프랑스인'인가 헷갈릴 때마다 벨기에 인이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노신사는, 그의 친구 헤이스팅스 대위에 따르면 5피트 4인치가 되지 않는 왜소한 체구에 콧수염을 뻣뻣하게 잘 관리하며 달걀 모양의 머리를 한 외양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그래서 영화마다 포와로 역의 배우들은 하나같이 그 뻣뻣한 수염을 내세우며 등장하는데, 아마 풍성함과 예술성에 있어서는 2017년판 포와로가 압도적인 듯하다. (물론 풍성하고 예술적인 것이 가장 포와로답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포와로를 뻣뻣한 수염만으로 '특정'하는 건 일면적이다. 오히려 '약간의(?) 결벽증과 노골적인 자기애로 포장된 그의 예리한 '회색 뇌세포'야 말로 셜록 홈즈못지 않은 매니아 층을 형성한 매력의 정점이다. 2017년판 포와로 역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달걀을 등장하여 예의 포와로의 결벽증을 알렸고,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배경으로 통쾌한 사건 해결로 이 '회색 뇌세포'의 등장을 열었다. 

익살스러웠던 피터 유스티노프와, 날카로운 눈매의 예리하면서도 통찰력깊은 데이빗 서쳇에 비하면 케네스 브래너의 포와로는 영화 중 등장하는 '에르큘'과 '헤라클레스'의 언어적 착각처럼, 꽃중년의 풍모는 한결 우월했지만, 아가사 크리스티스러운 '포와로'였는가에 대해서는 '넥타이'에 대한 집착 이상의 개성을 아쉽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어쩌면 포와로 탐정 자체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과연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아가사 크리스티다웠는가라는 그 기본으로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서 부터 시작하여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유럽을 횡단하는 오리엔트 특급, 그 열차와 행로의 볼거리로 시선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을 끄는 건, 주인공 케네스 브래너를 비롯하여 조니 뎁, 주디 덴치, 페넬로페 크루즈, 윌렘 데포, 미셜 파이퍼 등 쟁쟁한 출연진이다. 이런 쟁쟁한 출연진은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비교된다. 1974년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역시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하여 숀 코너리, 바네사 레드그리에브 등 그 출연진의 면면만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그렇게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포진시킨 영화는, 원작처럼 기차가 출발하자 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 주요 인물이라 여겨지던 한 배우, 아니 등장인물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눈사태로 인해 기차 역시 아슬아슬한 철교 위에 멈춰 서게 되고.

셜록 홈즈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추리물 매니아라고 하면 셜록 홈즈보다 더 한 수 위로 치는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말 그대로, 탐정과 함께 등장 인물의 대화나 행적 등을 살펴보며 '뇌세포'를 풀가동하여 '추리'를 해나가는 묘미에 있다. 대부분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특정한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을 배경으로 유력한 용의자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드러내 보이는 바, 그리고 드러내 보이는 면 이면의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비밀들이 하나씩 벗겨지며, 심리전의 양상을 띠며 '추리'의 과정은 깊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전혀 뜻밖의 인물이 범인이듯,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이면, 도덕에 대한 생각할 꺼리를 던지는 것이 아가사 크리티 작품의 매력이다.

그렇듯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에서도 포와로를 제외한 열차에 탑승한 11명의 승객이 용의자로 등장한다. 평범한 승객인 줄 알았지만, 모두들 한 겹을 벗겨내고 나면 수상한 면이 하나 둘씩 드러나는 상황, 거기에 피해자의 상흔 조차 의심스러운데. 특히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은 피해자의 서로 다른 찔린 상처와 용의자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막판 극적 반전을 통해, 그리고 결과에 따른 도덕적, 혹은 법적 판단의 잣대를 놓고 끝까지 독자, 혹은 관객들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작품이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자평하듯 이런 신선한 플롯의 전개에 대해, 데이빗 서쳇 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열차를 타기 전 포와로가 해결한 사건 과정에서, 사건은 해결하지만 그 사건의 범인이 자살을 함으로써, '어떤 경우에도 진실은 왜곡될 수 없다'는 포와로의 신념에 물음표를 던지고, 그 물음표를 12명의 배심원에 의한 직접 심판이라는 본 사건의 결론과 맞물려 수미상관으로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그렇게 영드 특유의 깊이를 더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까지는 아니지만, 케네스 브래너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은 분명 조니뎁의 등장도 흥미 진진하고, 미셸 파이퍼의 카리스마는 여전했으며, 페넬로페 크루즈의 반전이나 월렘 데포의 건재는 반가웠지만, 11명의 승객과 1인의 승무원이 서로 엇물리며 벌이는 심리전의 긴장감이 반전 추리의 결말로 순조롭게 이어졌는가 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는다. 하지만, 셜록 홈즈가 액션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버전의 셜록 홈즈 시리즈 정도의 무리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컴버배치 베네딕프 버전만큼 신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는 아는 만큼 달라진다. 아마도,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 그대로 신선한 결말 자체만으로도 쟁쟁한 배우진들,화려한 풍광과 함께 볼만한 영화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혹은 원작과 함께 다른 배우가 연기한 포와로를 맛본 사람이라면, 그 맛본 정도에 따라 아쉬움의 농도는 짙어질 지도 모르는 것이, 2017년판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층위가 다른 감상평이다. 하지만, 아쉬워도, 아마 나일 살인 사건이 또 다시 영화화된다면 보러 갈 것 같으니, 아쉽다 하면서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관객이 되듯, 아마도 이는 아가사 작품이 가진 근원적 매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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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2.06 20:10

홍콩 영화하면 느와르라는 말이 딱 떠오를 만큼 어둠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 대세를 이룬다. 그 '대세'로 인해 이제는 노년줄에 들어가는 한때 청춘들에게 '로망'의 대상이었던 홍콩 영화는 뜨고, 져버렸다. 그리고, 최근 '범죄물' 중심의 우리 영화를 두고, 홍콩 영화를 빗대 우려를 표명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지난 주 <전체 관람가>를 통해 선보인 이명세 감독의 <그대없이는 못살아>를 보면 상업 영화, 그 중에서도 스토리 중심의 이야기에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가가반증된다. 하지만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이 그 스스로 한번도 현역을 떠난 적이 없다 하지만10년만에야 tv 예능 프로그램이 마련한 단편 영화를 통해 신작을 선보일 수 있듯이, 최근 박스 오피스에서도 보여지듯, 작품성있는 영화라 평해져도, 화끈한 오락적 요소를 가미한 범죄 영화의 아성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 용감하게 플레이어로 등장한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기억의 밤>의 장항준 감독이다. 




이게 도대체 몇년 만인가? 감독 장항준!
이명세 감독이 10년만이라지만, 영화감독 장항준은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의 필모를 검색하면 2008년작 <전투의 매너>와 <음란한 사회>가 등장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감독 장항준은 2002년 <라이터를 켜라>와 2003년 <불어라 봄바람>의, 그리고 <북경반점(1999)>, <박봉곤 가출 사건(1996)>의 각본 그 기발한 상상력의장항준이다. 그 이후로 아내 김은희 작가와 2011년작 <싸인>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으나, 불운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2012년작 <드라마의 제왕>으로 그의 작품을 tv에서도 보기 힘들어졌다. 예능 프로그램과 특별 출연은 빈번했지만, 감독으로서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무한도전>을 통해서였다. 그런 그가 '정말' 오랜만에 작품을 들고 감독으로서 돌아왔다.

하지만 <기억의 밤>이 반가운 것은 장항준의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범죄 영화가 주류를 이룬, 혹은 역사물이라 하면 역사적 사실을 복기해내는 정도에 머무르는 제작 환경에서 모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창작물' 본연의 가치를 살린 작품의 등장이라는 의의가 <기억의 밤>을 돋보이게 만든다. 

영화는 흔히 우리 영화계에서 빈번하게 차용되는 원인과 결과가 '기승전결'의 형태로 연결된 서사의 방식을 뒤집는다. 서사의 시작은 21살의 삼수생 진석(강하늘 분)의 악몽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문의 장면으로 연상되는 악몽을 꾸다 깨어나는 진석, 그런 그를 맞이한 건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를 하려고 하는 그의 가족, 아버지(문성근 분)와, 어머니(나영희 분), 그리고 형 유석(김무열 분))이다. 

그런데 새로 이사온 집이 낯설지 않다. 더군다나 먼저 집주인이 짐을 남기고 간 방이 자꾸 진석의 신경을 거스른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어느날 형이 납치되고, 19일 만에 돌아온 형은 어쩐지 진석이 알던 그 형이 아닌 거 같은데.
그의 전작을 통해, 그리고 외모의 분위기를 통해 선한 인상이 각인된 강하늘이라는 배우가 진석으로 등장하고, 그 주변의 인물과 상황이 '의심'을 더해가며 당연히 관객은 진석과 함께, 이 '호러'인지, '스릴러'인지 헷갈리는 영화 속으로 흡인되어진다. 






스릴러를 통해 현대사의 비극을 설득하다
하지만, 이 영리하고 교묘한 전략은, 이 이후 진행되는 반전을 통해, 애초에 장항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1997년 imf가 한국 사회에 끼친 상흔을 설명하는 가장 절묘한 장치로 작동한다. 결국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뜻밖의 위기, 그리고 그 위기 속에서 전혀 사회 안전망 없이 '가족'의 단위로 그 파고를 맞닦뜨리며 극단적으로 해체되어 가는 가족, 그 속에서 파멸을 맞게 되는 개인을 영화는 가슴아프게 설득해 낸다. 

초반부의 한 치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스릴러의 모양새가 후반부에 가서 장황한 부연설명으로 이 뒤엉킨 사태를 설명해 내는 아쉬움은 남지만, 애초에 이 영화의 방점이 그 시대의 아픔을 표현해 내고자 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 것이기에 불가피하지만 충분히 여운이 남는 사족으로 인정될만 하다. 

무엇보다 <기억의 밤>이 돋보이는 건, 마치 나비 한 마리의 몸짓이 불러오는 토네이도처럼, 한 국가, 한 사회의 위기가, '금모으기' 따위의 운동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미담'으로 치부될 수 없는, 그 사회 소속 개인들의 몇 십년이 지난 삶에까지 비극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묵시록적 주제 의식이다. 그러나 이 묵직한 주제 의식을 그간 한국 영화가 해오듯 직설적이고 선언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마치 이미 맞춰진 퍼즐의 판을 새로이 뒤집어 하나하나 맞추어 가듯, 장항준이라는 각인이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기발한 창의력'에 기반을 둔 트릭과 설정으로 풀어가려 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렇게 선후가 바뀌어진 이야기에, 퍼즐 맞추기식 스릴러가 빠질 수 있는 삼천포를 한국 사회 자체의 질을 변화시킨 분명한 시대적 사건에 발을 딛은 굳건한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제대로 영화다운 영화 한 편을 봤다는 쾌감과 함께, 현대사에 대한 회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양 손에 쥐고 뿌듯하게 돌아오게 만든다. 역시 장항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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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2.03 02:54

100세 시대다. 예전의 오래 살았다고 했던 환갑 잔치가 이젠 무색해지는 시절이다. 그러나 오래삶이 꼭 영광만은 아닌 시절이 되었다. 철지난 시절을 '부흥'하려 했던 독재자의 딸과 그 세력들이 '적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듯, 우리 시대 나이듦은 '철 지난 유행가'처럼 현실과 조우하지 못한 채 '트렌드의 낙오자'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오래 살지만, 그래서 늙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세상이다. 한편에서 꼰대가 되어버린 노인에 대한 '혐오'와, 또 다른 편에선 안정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not old'한 왕성한 활동력으로 존재감을 증명하는 '나오미족', '레옹족'의 대두라는 엇물린 이중주를 배태한다. 그런 이질적인 두 현상을 배경으로, 꼰대 노인들의 활약상을 그린 <반드시 잡는다>가 설 자리가 마련된다. 


인기 웹툰이었던 <아리동 라스트 카우보이>를 원작으로 한 <반드시 잡는다>는  tv 드라마 <시그널>, <터널>이나,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 이제는 범죄 수사물에서 익숙한 소재인 장기 미제 사건을 다룬다.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형사의 30년 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장기 미제 사건이 200 건이 넘는 현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시대의 한계 앞에 주저 앉은 형사 박두만의 회한, 그 시대적 한계와 '꼭 잡고 싶다'던 열망을 드라마 <시그널>과 <터널>은 시공간을 뛰어넘은 환타지 스릴러로 화답했다. 그 시절 열정적인 형사는 그대로 시간을 거슬러 자신이 현재로 뛰어들거나, 혹은 현재의 동료와 소통하며 장기 미제 사건의 그 '포한'을 풀어낸다. 

그런데 <반드시 잡는다>의 시작은 보다 현실적이다. 30년 전 아리동 일대에서 연달아 벌어진 노인들의 죽음과 여성의 실종 사건, 당시 형사였던 박평달(성동일 분)과 최씨는 그 사건들이 연쇄 살인임을 자각했지만, 88올림픽 등의 국가적 행사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각자의 회한으로 남겨둔 채 세월을 보내고 이제는 월세방을 전전하며 세 독촉을 받거나, 병원 신세를 지는 처지의 노인네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이제 30년이 흘러, 하지만 시간은 여전히 그들에게서 그 사건의 기억을 봉인해제 해주지 않는다. 월세방 처지에서도, 기억을 놓쳐가면서도 그 '과거'에 사로잡힌 과거 미제 사건의 형사는, 이제 '노인'이 되어 다시 과거의 그날에 마주한다. 



꼰대의 이면
이렇게 영화는 마치 후일담처럼 그 시절 장기 미제 사건의 주역들을 불러 온다. 하지만, 그저 그 주역들을 다시금 사건의 현장에 서게 만들지 않는다. 외려 그 시절 주역들을 둘러리로 만드는 대신,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꼰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이 이야기를 '꼰대 액션 스릴러'로써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변두리 동네 아리동, 그곳에 터줏대감인 심덕수씨(백윤식 분). 홀홀단신 월남하여 열쇠 수리공으로 아리동 근처에 집을 열 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는 이 노인네의 하루 일과는 열쇠 수리와 집세 독촉으로 채워진다. 이른바 '수전노'라 손가락질을 받던 노인, 근데 그 노인이 월세 독촉을 하고 간 다음 날, 그 '최씨'가 스스로 목을 맨 채 죽자, 동네 사람들은 심씨 노인이 죽였다며 원망을 한다. 

졸지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자가 된 노인은, 그 와중에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윗방 세입자 아가씨의 동정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안위가 걱정되어 그 집을 찾아가다 만난 의문의 청년의 뒤를 쫓다 그를 도와준 최씨의 과거 동료 박평달씨를 만나게 되고, 최근 아리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30년전 미제 사건과 동일하다 주장하는 그와 함께 2017 아리동 연쇄 살인 사건 해결의 주역으로 거듭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노인네'라 하는 그 세대의 이면이다. 정신나간 노인네 박평달은 그 정신을 놓는 와중에서도 트라우마가 된 30년 전의 미제 사건에 대한 책임감을 놓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심덕수 씨 역시 돈만 아는 꼰대인 줄 알았더니, 알고보면 월세 독촉은 하지만 내쫓지는 않는 너그러운 집주인이라거나, 세입자의 처지를 '측은지심'으로 돌보는 훈훈한 이면을 가졌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 왜 그토록 자신의 행방을 애타게 찾았냐는 지은의 질문에 대한 심덕수 씨의 답은, 우리 시대의 기성 세대가 '후안무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영화는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책임감과 연민, 그리고 뜻밖의 이타심, 이제는 '꼰대'라 치부되며 온갖 시대착오적 결점으로 도배된 세대의 이면, 심지어 여전한 로맨틱함까지 설파하고자 하는 영화는, 그 반면에 그들이 합동작전으로 추격해 낸 30년묵은 연쇄 살임범의 끊이지 않는 욕망과, 그 계보에도 주목한다. 인간의 양면과도 같은 세대의 양면이다. 

노인 액션 스릴러답게 영화 속 추격전은 노인의 템포에 걸맞게 다리 다친 도망자를 배치한다. 한번은 애교지만, 두번에 이르면 실소가 나오지만, 사실 어쩌면 이게 현실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이미 <끝까지 간다>에서도 그랬지만, 영화가 끝날 듯 하면서, 정말 끝을 보아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 구성의 방식은, <반드시 잡는다>에서도 이어지지만, 안타깝게도 <끝까지 간다>의 조진웅과 같은 존재감의 부재가 영화의 호흡을 늘어지게 만든다. 또한 차라리 노인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음악도 좀 어울리게 '트롯'은 아니더라도 아리동과 그 세대에 걸맞는 분위기를 내세웠다면 어땠을까 싶게, 앞서나가는 장중한 배경 음악이 오히려 실버 액션 스릴러의 분위기를 흐트러 뜨린다. 대신 그 행간을 채우는 건 어색한 사투리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극을 끌고가는 심덕수 역의 백윤식과, 반전 매력 박평달의 성동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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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2.01 16:50

고흐와 박수근, 19세기와 20세기, 두 사람이 머물던 시대와, 그들의 화풍은 달라도 두 사람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인물들이다. 두 사람의 작품은 여전히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 전해지며, 두 사람과 관련된 전시회는 문전 성시를 이룬다. 두 사람은 생존하던 시절, 동시대인들에게 조명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궁핍의 극한을 경험했다는 점에선 또한 공통점을 이룬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생전의 불우한 삶은 그들의 사후 작품의 예술적 경지를 고고하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여전히 두 사람을 사랑하고 추앙하지만, 그들은 몰랐고, 모른다. 


제 아무리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궁핍으로 죽음에 이른 두 예술가의 생애와 화려한 부활은 매번 그래서 두 예술가에 대한 상념을 더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상념은 이제는 먼 과거의 고인이 된 인물에 대한 경의의 현재성을 부추기는데, 박수근에게는, 이제는 박수근만큼이나 우리의 기억에 남을 사람이 된 고 박완서 작가가 길어올린 <나목>이 있다. 그저 푸근한 그림을 그렸던 잘 팔리는 화가였던 박수근은 박완서를 통해 6.25라는 상흔을 온몸으로 겪어낸 예술가이자, 가장의 모습으로 재탄생되었다. 



고흐라고 다를까,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른 그의 기행에서 부터, 권총 자살로 마무리된 굴곡지고 극적인 인생사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삶이 소재가 됨은 물론, 그와 그의 동생이 나눈 편지글은 회자되었고, 그의 작품과 인생에 대한 동서양의 숱한 해설서들이 등장했다. 거기에 또 무엇을 보탤 게 있을까 싶었는데, 그 장고한 고흐에 대한 경의의 행렬에 화룡점정이 등장했다. 무려 10년의 기간, 전 세계에서 선발된 107명의 화가들이 스크린에 재현한 제목 그대로 <러빙 빈센트>가 그 주인공이다. 

107명의 예술가가 재현해낸 예술가 고흐
고흐가 잠시 머물렀던 아를, 그곳의 젊은 청년 아르망, 그는 우체국장이었던 아버지의 번거로운 부탁을 받고 고흐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가족을 찾아 떠난다. 청년 아르망에게 고흐나 아버지는 그저 인생에서 저만치 밀려난 주정뱅이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부탁아니 부탁으로 길을 떠난 아르망, 그 원치않는 행보에서 그는 의도치 않게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밝히는 추적자가 되고 만다. 

영화는 고흐에게 아니 고희의 가족에게 전할 편지를 가지고 한참을 주저하는 아를의 아르망을 그린다. 주인공은 고흐인데, 하지만 아직 떠나지도 않은 아르망이지만 전혀 갈증이 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아를의 별의 빛나는 밤>을 비롯하여, 고흐가 그린 명화들이 화면에서 살아움직이기 시작하니까.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전혀 다른 붓터치로 오늘날 현대 미술의 단초가 되었지만, 동시대인들에겐 인정받을 수 없었던 고흐의 그 생동감넘치는 화면은 그대로 유화 에니메이션이 되어 살아난다. 정확하게 '살아난다'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듯, 고흐가 그려낸 그 터치 그대로 당시의 아를이 재현된 화면은, 고흐의 화풍이 왜 '모던'한가를 증명해 낸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그 색색이 결을 이루어 채워진 스크린은 그대로 고흐의 전시회가 되고, 그가 그려놓은 풍경은 고스란히 당시의 아를과 오베르를 생동감있게 재현한다. 

유화 에니메니션과 미스터리 스릴러의 조합으로 살려낸 인간 고흐 
하지만 <러빙 빈센트>의 가치를 그저 화면에 채워넣은 고흐의 작품이라고만 하면 일면적이다. 오히려 그렇게 펄펄 살아 움직이는 고흐의 그림을 바탕으로,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건, 광인이거나, 기인이거나, 천재이거나 등등 '위인'으로 기억된 한 예술가의 진솔한 생애다. 

그 생애의 결을 살려내기 위해 독특하게도 영화는 '미스테리 스릴러'의 형태를 취한다. 유화 에니메이션과 고흐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스릴러의 이 어색한 조합은 오히려 '전시회'가 될 뻔한 영화를 역동적으로 살려낸다. 우체국장인 아버지가 마땅치 않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아직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한 청년 아르망이, 타의에 의해, 그리고 결국은 자의로 죽은 고흐를 살려내는 그 행보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서사를 이루며 영화의 맛을 살려낸다.

 

동생 테오를 찾아가 편지를 전하려던 애초의 의도가 테오의 죽음으로 인해 좌절되고, 그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오베르로 행보를 옮긴 아르망. 그곳에서 그는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봉착한다. 심신이 미약한 소년을 괴롭히는 동네 부호 청년들과 거침없이 맞짱을 뜨는 청년 아르망은 석연치 않은 고흐의 죽음에 파고들며 오베르에서 고흐 주변인물인, 폴 가세 박사와 그의 딸, 여관집 딸 아들린, 뱃사공들을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나 고흐의 죽음, 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미스터리 형식을 취했던 영화의 종착점에서 만나게 되는 건, 목사였던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데 실패한 선교사도, 자신의 귀를 자른 광인도 아닌, 오히려 뒤늦게 그림을 시작했지만 8년의 시간 동안 약 8000 점이라는 숫자로 남겨진 한 예술가의 열정이다. 또한 세상과 불의한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어떻게든 세상과 화합하고 소통하고자 애썼던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이 팔린 가난해서 어쩌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할 수 밖에 없었던 불우한 예술가의 생애이다. 죽음을 통해 길어낸 고흐의 삶, 그 어떤 연대기나 위인전보다, 그의 작품이 배경이 되어 그려진 이 작품은 인간 고흐, 예술가 고흐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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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1.30 04:27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미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수의 열연으로 <미옥>이어야 할 이유를 설득함과 동시에, 김혜수의 캐릭터가 가진 태생적 한계로 인해 <미옥>이라서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게 된 영화인 듯 싶다. 


모성적 수동성으로 소모되는 여성
<미옥>은 지난 6월에 개봉한 <악녀>에 뒤이어 다시 한번 여성 캐릭터를 원톱으로 내세운 느와르 액션 스릴러 영화의 계보에 놓여있다. 두 영화 모두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19금이라는 장르 영화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악녀>가 현란한 살상씬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의 존재를 증며하려 였다면, <미옥>은 언더보스 나현정의 주도 아래 호텔의 cctv 아래에서 벌어지는 범죄 조직이 배후가 된 '성접대'의 적나라한 행위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을 드러낸다. <악녀>에 홀로 건물 몇 층에 포진해 있는 양아치 무리들을 피칠겁을 하며 홀로 싸워내며 주인공임을 드러내는 숙희(김옥빈 분)가 있다면, <미옥>에는 그와는 정반대로 화면으로 벌어지는 그 '성의 항연'을 지휘하는 마스터로서의 미옥, 아니 나현정이 있다. 캐릭터의 활약상 그 양상은 다르지만, 영화는 그렇게 여주인공의 대단한 능력을 전면에 드러내며 존재감을 설명한다. 



하지만 그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들은 결국 영화의 중반 이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황을 주도해가던 능력이 무색하게 자신에게 닥친 '모성성'의 한계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킬러로 거듭난 숙희가 자신의 목숨 대신 선택한 아이와의 안온한 삶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거두어 살며 '사랑하는 이와의 가정'을 꿈꾸듯이, 나현정 역시 자신이 잉태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적진에 뛰어들어 조직을 살리고, 그 조직의 언더보스로 성장해, 이제 범죄 조직에서 재계 유력 기업으로의 마지막 관문만을 남긴 상태이다. 하지만, 범죄 조직의 성공적인 전향은 언제나 그렇듯 성공적일 수가 없다. 정작 누수는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부터 시작되어, '어머니'로서의 그녀를 도발하고 '어머니'로서 그녀를 파멸과 최후로 이끈다. 

아마도 <악녀>도 그렇고, <미옥>도 영화의 만듬새나, 배우의 열연보다 더 '폄하'되는 이유에는 그 도발적인 등장의 여주인공들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 허무하게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끌려들어가고 파멸에 이르른다는 점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본질은 어쩌면 '모성'보다는 '수동성'에 더 방점이 찍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이 모성이거나, 사랑을 한다는 것이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는 아니다. '낙태가 허용되는 세상'이라고 해서 모든 여성이 모성이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편견처럼. 오히려 문제는 '사랑'을 하고, '어머니'가 된 여성이, 그 상황에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끌려들어가 '휘발'되어 버린다는 점이 본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애초에,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으면서도, 여성이 느와르, 혹은 액션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는 것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만든 이의 편견이, 멋들어지게 여성으로 부터 시작된 영화를, 여성의 운명적 비극으로 막을 내리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원초적 의심을 갖게 만든다. 

충돌하는 세 욕망의 치킨 게임
그런 면에서 더욱 <미옥>은 아쉽다. 김회장이라는 보스가 있지만 실직적 '언더 보스'로서 범죄 조직을 재계 유력 기업으로 '성접대'를 매개로 '전향'을 조직적으로 이끌어내는 보스 나현정을 그렇게 밖에 소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애초에 자신의 아이로 인해 보스에 절대 충성을 바치는 조직의 2인자라는 캐릭터도 그렇지만, 보스의 유고 이후 오로지 자신의 아이만을 위해 치달리는 모성으로서의 그 향배가, 캐릭터의 입지를 축소시킨다. 



그럼에도 <미옥>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각자 자신의 욕망이 구체적인 세 인물들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치킨 게임이다. 도대체 왜 이선균이 조폭을? 했지만, 왜 이선균이어야 했는지가 설명되는 이선균이 분한 상훈의 비극적 순애보라 쓰고 '소유욕'이라 해석되는 사랑. 그런 이선균의 사랑을 도발한 이희준이 분한 최대식의 폭력적인 자기 보신욕, 그리고 이런 이들의 욕망이 도화선이 된 나현정이 된 미옥의 '안락한 전향욕구'라 쓰고 위장된 모성이라 읽일 수 있는 이 세 욕망의 접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조직'의 일원이지만, 막상 그들의 '행동'의 동인에 '조직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인적 욕망으로 추돌한다. 당연히 그들의 욕망 앞에 조직은 소모적으로 소용될 뿐이다. 

그래서 차라리 어설픈 모성에의 헌사 대신, 이 최대식과 상훈을 그리듯이 나현정 역시 어설픈 모성에의 헌사 대신, 그녀의 액션만큼이나 그간 언더보스로 닦여온 범죄 조직의 2인자 다운 생존과 보존과 안위, 그 욕망의 발현이었다면 오히려 <미옥>은 좀 더 치열한 느와르로서의 성취를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남겨진 고민들. 
그간 김혜수의 전작이었던 <차이나타운>, 그리고 <악녀>, 그리고 <미옥>은 여성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던 느와르 장르에서 여성을 앞세운 차별성으로 관객들을 공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전면'에 내세웠다는 홍보성을 뛰어넘어, 여성의 자기 주도성을 내적으로 이해하는데 한계를 보인다. 저 정도를 '주체적'인 여성이라 생각하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그 누구 한 사람의 오류나 오인이라기 보다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여성'에 대한 시대적 이해가 부족한 지점의 소산이라 보는 게 맞을 듯싶다. 그런 면에서 이들 영화가 흥행에 부진을 겪는 지점 역시 과연 그런 전면에 내세운 여성의 캐릭터에 대한 일천한 이해때문인지, 아니면 어쩌면 아직도 사람들에게 여성이 전면에 나선 느와르에 대한 이질적임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고민해볼 여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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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1.12 02:06

<토르> 시리즈가 첫 선을 보였을 때 미국 등지의 인기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반응이 저조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망치를 휘두르는 토르'신에 대한 낯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필독 도서처럼 우리나라 신화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에서부터 섭렵하며 자란 세대에서 북유럽의 망치를 휘두르는 신은 이질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인문학적 탐구열과 함께 북유럽 신화가 소개되기 시작하고, <반지의 제왕> 등의 붐과 함께 북유럽 정서에 대한 전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유럽의 신은 생소했다. 


오히려 '토르'을 익숙하게 만든 건, 이미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아이언맨'을 필두로 한 슈퍼 히어로 군단의 활약을 그린 <어벤져스(2012)>로 부터라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 흔하디 흔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태생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주신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 지구를 침공하려는 로키(톰 히들스턴 분), 그리고 그런 동생, 사실은 의붓 동생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어벤져스 군단에 합류한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분)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일견 코믹하면서도 좌충우돌 끊임없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막장'드라마에서 익숙한 그 캐릭터에 관객들은 매력을 느꼈을 터이다. 그리고 이제 토르 시리즈는 2편 <다크 월드>에 이어, 3편 <라그나로크>로 아이언맨 못지 않은 인기 캐릭터가 되어 극장가를 섭렵한다. 



히어로물에 등장한 신들의 종말; 라그나로크 
그런데 이번 3편의 <토르; 라그나로크(이하 토르)>가 주목할 만한 점은 이미 1편에서부터 차용되어온 토르와 로키를 탄생시킨 북유럽 신화를 절묘하게 버무려 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아예 부제를 '라그나로크'라고 한 3편은 북유럽 신화의 종결, 세계의 종말 전쟁을 다루고 있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북부 동일 등지에 살던 노르드 인들을 비롯한 북게르만 민족들의 신화를 통칭하는 북유럽 신화는 영생으로  신들의 세상이 이어지는 다른 지역의 신화와 달리, '라그나로크'라 불리는 신들의 멸망을 다룬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이는 겨울이 1년의 반을 넘는 척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지리적 환경에 힘입은 바 신조차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비극적 운명의 서사를 신화의 내용으로 수용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 처럼 다양한 신들이 저마다의 '능력'을 활용하는 다신론에 기반하되, 그럼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제우스라는 확고한 가부장적 권위 체계의 규율에 의해 그 질서가 유지되는 것과 달리, 북유럽 신화는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가 곰을 토템으로 섬겼던 부족과 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섬겼던 부족간의 쟁투 과정을 신화화 하였듯이 신화의 역사 속에 부상했던 다양한 민족이 섬기는 신을 북유럽 신화의 근간 속에 수용해 내면서 '티르', '토르', '오딘' 등의 여러 우두머리 신의 집단 중심 체제를 골격으로 삼는다. 그래서 오딘이 신들의 제왕이라 칭해지면서도 정작 천둥의 신 토르가 대중적으로나 그 힘에 있어서 압도적인 등 북유럽 신화에서는 그 권력이 일원적이지 않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오딘과 토르, 로키의 부자 관계 역시 다르다. 오딘과 토르가 부자 사이, 때로는 형제 사이로 전해지는 것과 달리, 로키는 오딘이 데려온 아들이라는 영화적 설정과 달리 거인족 출신으로 오딘과 의형제를 맺은 것으로 신화에서는 그려진다. 하지만 아들이건 형제건을 떠나 오딘과 토르가 제휴 관계인 것과 달리, 신들의 종말 그 시작이 된 로키는 애초부터 신들과는 다른 종족 다른 이해 관계를 가진 존재였다는 것이다. 
영화 속 로키가 적자가 아니라는 자신의 열등감을 끊임없이 사건 사고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다 토르를 어둠의 세계에 가두고, 오딘을 무력하게 만들며 지하 세계의 헬라가 그 힘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듯, 신화에서 역시 아내와 딸을 잃은 로키의 복수로 부터 종말, 라그나로크는 시작된다. 



신화적 종말에 대한 현대적 해석 
영화에서 신들의 제국 아스가르드와 그 주변에서 오딘이 점령한 9개의 왕국은 신화 속 큰 물푸레 나무, 위드그라실을 중심으로 제일 윗부분에 존재하고, 그 가운데 부분에 인간들의 미드가르드, 그리고 반지의 제왕 등에 등장한 거인과 난쟁이들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나무의 아랫 부분 죽은 자의 세계, 바로 헬라가 돌아온 그곳 저승의 세계가 있는 것으로 북유럽 신화는 그려낸다. 사실 신화 속 헬라는 말썽의 근원인 로키의 딸로 그려지지만 영화는 오딘의 숨겨진 첫 째 딸, 그리고 선한 군주였던 오딘의 지난 날 잔혹했던 정복욕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오딘이 사랑했던 아들 발데르의 죽음으로 초래된 신들간의 갈등, 그것이 극대화하며 라그나로크는 시작되고 결국 저승에 가두어졌던 늑대 펜리르와 뱀 요르문간드가 나타나 신들과 서로 죽고 죽이는 대 멸망이 시작된다. 영화는 그 신들의 전쟁을 저승에서 돌아와 다시금 정복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헬라 여신과 그 수하 늑대로 표현해 낸다. 오딘의 첫 번째 자식으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여신, 그에 대항해야 하는 역부족의 토르. 그를 돕는 문지기 신 해임달과, 오딘의 전사 발키리와, 결국 합류한 로키까지. 선과 악이라 구분할 수도 없이 각자 신들의 욕망이 뒤엉켜 싸우다 모든 것이 불태워져 세상이 끝나 버리는 라그나로크를 영화는 히어로물의 전형적인 선과 악의 싸움으로 치환해 냄과 동시에 제국의 권력욕과 그에 대항하는 선의 영웅 세력으로 대립시켜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딘으로부터 토르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세대 교체도, 그리고 <글래디에이터>의 우주 버전 형식을 통한 아들의 성장사 역시 통과 의례로서 더해진다. 역시나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에 모호했던 중간자 로키의 절묘한 선택 역시 빠질 수 없는 관람 포인트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의 전쟁 이후 아스가르드는 불타고, 인간 세상 역시 종말의 전쟁과 이어진 혹한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겨우 살아남은 인간들로 신들의 세상에 이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인간의 역사를 막강한 힘의 헬라 앞에 아스가르드를 포기한 토르의 결정, 즉 아스가르드의 존재론에 대한 의미심장한 결론으로 이끈다. 즉 헬라에 의해 지배되더라도 아스가르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민들, 즉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진정한 아스라르드라는, 북유럽 신화의 '민주주의적 해석'을 통해 신화적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내며 장대한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신화에서 '신들의 종말'이 '인간의 역사로 대체되는 서사가, 영웅들의 활약상에 힘입어 '정복 군주'의 국가가 아닌,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그곳, 설사 그곳이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이라 하더라도,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국가라는 것을 <토르;라그나로크>는 주장하며 시즌 3를 마친다. 그 흔한 쇠망치를 휘드르는 토르을 차용했던 히어로물은 그저 신화적 인물의 차용을 넘어 세계관의 재해석을 통해 시리즈물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해 낸다. 이렇게 어벤져스로 규합된 히어로들은 각자 아이언맨의 자본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의 국가주의적 세계관에 이어, <토르>의 민주주의적 세계관에까지 다양한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시리즈를 풍성하게 만들며 보는 재미와 함께 생각할 재미를 던져주며 이 시대의 담론을 형성해 간다. 아마도 이 지점에 마블 군단의 독보적인 선점의 또 다른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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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1.07 15:10

2일 개봉한 <침묵>은 1999년 <해피엔드>에 이어 18년만에 정지우 감독과 최민식 배우가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또한 2014년 중국에서 개봉한 곽부성 주연의 <침묵의 목격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기도 하다. 법정을 무대로 재벌 임태의 약혼녀인 유명 가수 양단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의 딸이 유력한 용의자로 구속된 가운데 임태(손홍뢰 분)를 사기 사건으로 기소한 적 있는 동도(곽부성 분)와 변호사 주리(위난 분)가 각자가 믿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법정 공방을 펼치지만, 정작 영화의 결말은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며 반전으로 마무리된다. 




최민식에 방점이 찍힌 리메이크 
그리고 11월 2일 개봉한 <침묵>은 이런 원작의 얼개를 그대로 따른다. 차기 대통령 선출에 간여할 정도의 재계의 실력자 임태산 회장(최민식 분)이 그 주인공이다. 한 음식점에서 정가의 뒷거래를 하는 한편, 그런 그가 마음을 쏟는 또 하나의 '사업'이 있으니 바로 늙으막한 그에게 찾아온 로맨스이다. 그 주인공은 여가수 '유나', 하지만 그 '로맨스 그레이'는 '엄마를 닮지 않았다'며 대뜸 눈물을 보이는 그의 외동딸 미라로 인해 난관을 겪지만, 그에게 모처럼 찾아온 사랑은 쉬이 식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딸 미라를 만나고 오겠다는 유나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역시나 유력한 용의자로 미라가 체포된 가운데, 매번 법망을 빠져나가는 임태산을 벼르던 동성식(박해준 분)이 재빨리 현장을 선점하고, 아버지와의 면회조차 마다하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유일하게 딸과 소통했던 예전 과외 교사 출신의 최희정(박신혜 분)가 변호사로 선임된다. 원작 <침묵의 목격자>가 검사 역인 곽부성에게 방점을 찍은 반면, 한국으로 온 <침묵>은 동일한 플롯과 반전을 취하면서도, 출연진의 비중에서 재벌 회장이자 아버지 역의 최민식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이 압도적인 비중은 왜 정지우 감독이 이 작품을 리메이크했는가를 설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원작의 작품성이나 만듬새를 차치하고, <침묵>의 노선을 미묘하게 만든다. 

영화는 서막에서 부터, 엔딩까지 줄곧 최민식이 분한 임태산의 '순애보'에 집중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순애보'는 '반전'을 품은 스릴러 장르로서의 영화의 매무새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버지의 애인을 살해한 범죄 현장에서 잡힌 재벌가의 딸, 그 범죄를 증명하고자 하는 법정 스릴러의 뼈대를 가진 영화는, 그 사건의 배후에서 암약하는 아버지의 존재감과 충돌한다. <침묵>처럼 뜻밖의 반전이 중요한 영화로 <유주얼 서스펙트>가 있다. 이 영화 역시 줄곧 진행되던 사건의 진실이 마지막 장면에서 뜻밖의 반전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며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던 작품이다. <침묵> 역시 동일한 반전의 트릭과 해석이 필요한 영화인데, 문제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유일한 생존자인 버벌(사실은 카이저 소제)의 진술과 그 진술을 듣는 수사관 데이브가 영화의 본 무대의 주요 등장 인물이었다면, <침묵>의 경우 본 무대가 법정이며, 그 법정에서 주인공은 검사와 변호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법정과 법정 밖의 임태산의 존재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그리고 원작처럼, 최후의 한 방이 되어야 할 임태산은 줄곧 영화에서 지분을 가지고 활약을 하며,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돈이 진실'인 역할에 충실한다. 문제는 이런 임태산의 활약이 그리고 그 역할을 분한 최민식의 존개감이 두드러질 수록 정작 이 영화의 본 게임이 되어야 할 법정의 두 주인공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이 미흡해 진다는 것이다. 이 운영의 묘에서, <침묵>은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 히든 카드를 너무 손쉽게 넘겨주며,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주저앉혀 버리며 임태산의 순애보를 설명하는데 진력한다. 



비극적인 아재들의 순애보 
그렇다면 왜 장르물로서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순애보'에 연연해 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침묵> 한 작품보다는 최민식와 정지우 감독의 첫 만남 <해피엔드>에서 <은교(2012)>, 그리고 이제 <침묵>으로 이어지는 '아재들의 비극적 순애보'에 대한 정지우 감독의 천착에 대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9년작 <해피엔드>에서 실직한 남편 서민기(최민식 분)는 아내 최보라(전도연 분)의 불륜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그래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인고하려 하지만, 자식마저 내팽겨쳐 버린 채 남자를 만나기 위해 허겁지겁 집을 비워버리는 아내를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2012년의 <은교>에서는 70대의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분)가 십대의 은교(김고은 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관능은 생로병사가 없는 모양이다'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존경받는 시인은 그를 찾아온 '노욕 칠정'에 그만 한 평생 자신이 지켜온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만다. 
'아재'라기는 뭐하지만 역시나 박해일이 분한 2008년작 <모던보이>의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은 비밀구락부 댄서 조난실(김혜수 분)에게 '반'해 자신의 인생 궤도를 180도 바꿔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제, 2017년 <침묵>에서 그 비극적 순애보의 주인공은 재벌 회장 임태산이 되었다. 

그들은 남자였고, 그리고 사랑했다. 하지만 늘 그들의 사랑은 '동의'받지 못했다. 가정을 함께 꾸려갈 아내에게, 시대에, 그리고 세월에, 자식에게, 세상에게.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늘 불온했고, 좌절했고, 처절하게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자신이 한 사랑의 대가를 짊어지고자 한다. <침묵>에서 정지우 감독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자신에게 빨대를 꼿는 것일 수도 있는, 심지어 섹스 비디오까지 있는 유나를 사랑한다. 유나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임태산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피엔드>의 명장면이 모든 일을 저지르고 난 이후 최민식의 끝없는 오열이었듯이, 그 오열과도 같은 것이 바로 자신의 사랑으로 부터 비롯된 범죄을 책임지는 것이다. 젊은 서민기는 오열했지만, 늙은 임태산은 '회자정리'의 담담함을 택했다. 임태산의 선택은 <은교>에서 이적요가 택했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했던 그 방식의 또 다른 변형과도 같다. 

세월이 흘렀지만 정지우 감독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2017년이 되었다고 해서 '한남'이라 새삼스럽게 지탄받을 필요는 없다. 그건 정지우의 방식이니. 단지, 99년의 서민기 식 역설적 사랑이 IMF에 강타당한 그 시대 가장들의 마음을 공감했고, 2012년의 이적요가 '노모족(NO-MORE-UNCLE)'과 나오미족(NOT OLD IMAGE)의 등장과 함께 실버 세대의 욕망을 대변했다면, 안타깝게도 2017년의 임태산의 사랑과 공감에 대한 '공감의 온도'가 낮다는 것이다.  이 시대엔 '나이든 남자'의 순애보도, 돈이 진심이라는 재벌 회장의 사랑도 체감이 쉽지 않다. 어쩌면 <침묵>의 고전은 작품의 만듬새보다도 바로 그런 '공감'의 원심력 부재에서 찾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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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1.04 14:49

<전체 관람가>와 봉만대, 이 처럼 언밸러스한 조합이 있을까? 하지만, 그 이질적인 조합을 JTBC <전체 관람가>가 해냈다. 영화와 예능의 블록버스터 콜라보를 주창하는 <전체 관람가> 그 두 번째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에게 19금 에로 영화의 대명사로 알려진 봉만대 감독이었다. 




19금 에로 영화 감독이 아닌, 그저 감독 봉만대
그의 앞에 붙여진 수식어답게 동료 감독을 비롯하여, MC 윤종신, 김구라, 문소리를 비롯하여, 단편 영화 제작에 돌입하여 그를 만난 제작진, 배우들은 모두 그에게 '19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MC이자, 그의 친구로써 봉만대 감독의 <떡국열차>에 출연한 바 있는 김구라가 그가 19금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에로의 종착점은 휴머니티'라던가, 사실은 봉만대 감독의 장기는 '19금에 가려진 스토리'라던가 하는 동료 감독의 평가는 그럼에도 호기심어린 그래서 '19금은?'하는 질문에 묻히고 만다. 

그런 자신의 궤적이 이름표가 되어버린 봉만대 감독, 그가 야심차게 '19금'이 아닌 '휴머니즘 전체 관람가'를 위한 '잠정' 에로 영화 은퇴를 선언하지만, 매번 그에게 던져지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숙명은 예능 <전체 관람가>가 보여준 봉만대 감독편의 첫 번째 관전 포인트이다. 

통과 의례처럼 19금의 질문을 넘기자 수월하게 진행된 촬영 일정, 하지만 MC 문소리의 촬영 날씨는 '하늘이 도와야 한다'는 설레발이 뜻밖에 영화 감독 30년(?) 인생에 발목을 잡는다. 지난 주 정윤철 감독 편이 영화 보다 재밌는 메이킹이라는 평을 받았듯이, 이번 주도 어김없이 <양양>의 작명 과정에서, 봉준호의 <설국 열차>를 <떡국열차>로 패러디했던 바 봉만대 감독의 전작을 빗대, 봉창동의 <양양>이라는 작명 과정에서 부터 시작하여, 출연 계약서 등등의 과정에서 즉흥 환상곡의 쇼팽 정윤철 감독만큼이나, 개성있는 봉만대 감독의 영화 촬영 과정이 시청자의 시선을 잡는다. 

특히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하다가도, 촬영을 접어야 하는 악천후 속에서도 빠듯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 흔들림없이 진두지휘하는 봉만대 감독의 의지는 MC 문소리의 지적처럼 왜 그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19금이라는 영역을 고수해 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되었다. 

한 편의 시, <양양>; 봉만대라서 신선했더, 그리고 어쩐지 아쉬웠던
JTBC<전체 관람가>는 주어진 주제 중에 감독들이 하나의 주제를 선택하여 15분 분량의 단편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이다. 그에 따라 봉만대 감독은 '고령화사회의 딜레마'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양양으로 가는 국도, 캐러반을 메단 미니 트럭이 경찰의 속도위반 단속에 걸린다. 규정 속도를 지켰다는 차주 하태(기태영 분)와 실랑이를 벌이다 운전 면허증을 받아들고 캐러반을 살펴보던 경찰, 다짜고짜 캐러반의 창문이 열리며 하태의 부친 상태가 등장하며 예전 방식으로 '수고하는 경찰분에게 돈이라도 몇 푼 쥐어드리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다음 장면, 불법인 캐러반에서 하태의 차로 바꿔탄 부친 상태는 연신 아들의 융통성없음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그 잔소리는 결국 아들의 차 시트에 '실례'로 마무리된다. 이어진 옷을 갈아입히려는 아들과 혼자 하겠다며 어린 아들에게 하듯 아들에게 뭇매를 가하는 아버지의 해프닝은 뇌졸증으로 자기 몸도 못가누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의 힘겨운 부양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비바람이 불어대는 양양에 도착한 부자, 형이 일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서핑샵에서 형의 부재를 확인한 하태는, 형을 기다리는 대신, '잠시 아버지를 돌봐달라'는 쪽지 하나를 남긴 채 캐러반을 분리해버리고 아버지에게 인사도 없이 홀로 길을 떠나버린다. 하지만 국도에서 난리를 치는 아버지가 있는 캐러반의 잠긴 문이 그의 발목을 잡고, 본의 아니게 세 부자는 한 자리에 둘러앉지만 결국 형제는 난투극으로 치닫는다. 

결혼을 하면 후에 자식에게 짐이 될까, 아버지 재산도 안받고 홀가분하게 산다는 형 중태(권오중 분)는 '미니멀 라이프'를 운운하며 아버지와 동생에게 '요양원행'을 강권하며 아버지를 외면하고자 한다. 그런 형에게 지난 1년간 아버지를 모신 고통을 호소하던 동생은 결국 '치사하다'는 말과 함께 뒤엉켜버리고 마는데......

정윤철 감독의 <아버지의 검>이 마지막 장면 게임 속 캐릭터 아버지와 현실 아들과의 만남이란 환타지를 통해 '왕따에 시달린 아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감동을 준 것처럼, <양양> 또한 현대판 고려장인 아버지 떠넘기기의 극한 현실을 사랑했던 아내와 어린 아들들을 따라나선 아버지의 '환타지'를 통해 극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이 영화의 베스트 관객평인 '버릴 수 없는 정'의 딜레마를 환상을 따라 바다로 간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구하러 바다로 뛰어든 현실의 형제를 통해 '누선'을 자극하며 마무리지으며 '휴머니스트 봉만대'를 증명해 낸다.









남겨진 질문
두 번째 영화를 마무리지은 <전체 관람가>는 게임과 현실의 조화, 에로 영화가 만든 전체 관람가 가족 영화라는 신선한 시도로 감독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숙제도 남긴다. 

무엇보다 3000만원이라는 작은 제작비와 짧은 제작 기간을 통해 15분이라는 제한된 '단편'을통해 무엇을 그려내야 하는가라는 원론적 질문이다. 봉만대 감독의 <양양>에서 영화가 마무리되고 던져진 '영화 속 운동화의 상징'이나, 특별 출연인 김구라나 브릿지로서의 김혜나의 등장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처럼, 장편을 줄인 것이 아닌 정윤철 감독의 정의처럼, '한편의 시', 그래서 '서사'보다 '표현'이나 '정서'로서 다가가야 할 단편 영화에 대해 고민을 남긴다. 

또한 정윤철 감독이 시도했던 바 게임과 실사 영화의 결합이나, 에로 영화 감독 봉만대가 만든 전체 관람가같은 시도는 신선하지만, 방식이나 장르의 새로움과 별개로, 이들이 다루고 있는 '가족'에 대하 보다 진전된 '사고'를 다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숙제를 남긴다. 특히 봉만대 감독의 경우, 그가 고집스레 천착해 왔던 '에로'라는 영역이 가진, 우리 사회 속 '솔직한 욕망'의 이야기가 '전체 관람가'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양양>에서는 드리워지지 않은 채 결국 '기승전 인지상정효'로 한정된 것이 아닌가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아마도 그 아쉬움은 전체관람가에서 '에로'가 아니라, 봉만대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진솔한' 그 무엇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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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0.30 16:35

영화는 불에 탄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의 남성, 그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집에서 부터 시작된다. 화재로 인해 전소가 된 그곳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 '회복'되어져 가고, 그곳에서 한 여성(제니퍼 로렌스 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옆의 잠자리의 남편을 찾던 그녀는 남편의 흔적을 찾아 온 집안을 헤매고 현관 앞에서 홀로 자신의 시간을 갖던 남편(하비에르 바르뎀 분)을 조우한다.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1969년 생의 하비에르 바르뎀과 1990년생의 제니퍼 로렌스가 분한, 이 '세월'을 초월한, 그래서 이 집을 방문한 이들이 '아버지'와 '딸'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 부부가 이 집의 주인들이다. 그리고 이 세월을 건너뛴 듯한 오묘한 부부의 조합이 영화 초반 보여진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장면과 함께 영화 <마더>의 거대한 복선이 된다. 

하지만 이 보다 더한 복선은 이 영화가 <블랙 스완>의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 아닐까? 한 줄의 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심하는 남편,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화재가 났던 집의 복구에 헌신하는 아내의 평온한 일상, 하지만 이미 대런 감독이 뉴욕 발레계를 배경으로 '성공'의 세계관을 내면화하여 그로 인해 자신을 '파괴'해 가는 한 여성 니나(나탈리 포트만 분)과 그 여성을 가혹하게 혹은 소모적으로 소용하는 예술 감독 토마스 리로이(뱅상 카셀 분)의 <블랙 스완>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 자체로 <마더> 속 평온한 부부의 일상은 불온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스럴러 아니 그 보다는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외딴 곳의 이 집에 불현듯 찾아온 낯선 중년의 남성(에드 해리스 분), 이 이방인에 대해 경계를 가지는 아내와 달리 그가 자신의 시를 알고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방을 내주고, 과음으로 인해 몸을 추스리는 못하는 그의 시중을 드는 등 과도한 '환대'를 한다. 아내는 남편과 자신이 이룬 평화로운 가정의 일상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을 느끼지만, 남편은 마치 그런 아내가 지켜내려 했던 평화로운 일상이 그의 써지지 않는 시에 대한 강제라도 되었던 양 이 일상을 깨뜨리는 혼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니 보다 솔직하게는 아내와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한 줄도 써지지 않던 시가 이 낯선 손님의 '파격'을 통해 '구원'받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손님'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다짜고짜'식의 방문, 그리고 뜻밖의 사고는 이 집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조차 모호하게 이 '가정'을 '공용'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준 남편과 달리 그 속에서 아내는 혼돈스러워하며 '가정'을 지키려 한다. 



남편의 시, 그리고 아내의 가정
<블랙 스완>에서도 그랬듯이 대런 감독은 <마더>에서도 '현모양처'처럼 순종하며 남편의 처분을 바라는 아내에 대비하여 방문객의 아내(미셀 파이퍼 분)를 등장시킨다. 마치 시바 여신처럼 관능적이고 파괴적인 그녀는 그녀의 '편애'로 말미암아 두 아들을 파멸로 이끌고, 그들이 방문한 집마저 난장판으로 만들고야 마는 그 장례식의 순간까지도 모성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다. <블랙 스완>에서 화이트 스완이었던 나나가 변모하듯이, '현모양처'로 처분만 기다리던 아내는 그 자신의 집을 흔들어 놓았던 그 '모성'에 충동을 받아, 남편을 도발하고 '잉태'를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외부인을 통해 자신의 시를 길어올리려던 남편은 정작 '아내의 잉태'를 통해 샘솟듯 영감이 떠오르고 10년 만에 '신작'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어쨋든 그 낯선 가족의 방문의 결과 '아이'를 얻고, '시'도 얻게 된 부부, 하지만 그 '영광'은 온전히 가정으로 수렴되는 대신, 남편의 분에 넘치는 명망과, 그리고 그 와중에 '가정'을 지키려는 아내와 아이의 처참한 희생을 결과한다. 

영화 속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마치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부부 관계를 보는 듯하다. 마오리 족 남자들은 170cm가 넘는 장신의 이 부족 남자들은 말과 소의 피를 먹으며 전사로써 길러지지만, 정작 그들의 일상을 채우는 건 마오리족 여성들의 '가사 노동'이다. 언젠가 일어날 지 모르는(?) 전쟁에만 대비하며 빈둥거리는 남자들과 달리, 마오리 족 여성들은 가사와 육아, 농삿일까지 전념하며 '가정'을 책임진다. 그렇게 영화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규정짓는다. 마더를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 속 그녀가 엄마가 되는 건 영화가 시작되고서도 한참 지나서이다. 오히려 영화 속 마더는 남성이라는 체제의 보호자로서의 '여성'이다. 

그처럼 남편은 '시'를 위해 아내의 '사랑'을 먹으며 살아간다. 아내는 집을 손보고, 가사를 돌보며, 그를 뒷바라지한다. 그녀의 소망은 남편과 함께 아이를 낳으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지만, 그에게 가정은 그의 '시'를 잉태하는 영감이지만, 배경일 뿐, 그의 관심은 '시'를 매개로 한 세상 속 자신에게로 향한다.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아들을 희생하고, 결국 아내를 제물로 삼아서까지. 

평화로운 한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된 영화는, 서로의 이해 관계를 달리한 부부가 잉태하여 생산한 아이와 시를 계기로 대런 감독이 생각한 '세계'에 대한 담론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가장 추상적인 인간 사고의 산물 '시'를 통해 자신을 '입신양명'하는 남편과, 가장 구체적인 인간의 생산물 '아기'를 통해 남편과 여성의 이해를 엇물린다. 

아내가 집이라는 구체적 공간, 그 속에서 이루어진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기라는 '가족' 단위에 대한 로망을 놓지 못하는 반면, '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남편은, 그 욕망을 '전지전능한 지배욕'으로 펼쳐낸다. 일찌기 아내의 동의 없이 외부인을 기꺼이 집으로 맞이하여 '칭송'을 받았던 그는 자신의 아들조차 강탈하여 '제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한 화답한 바깥 세상은 그를 영감의 지도자로, 나아가 종교적 신망의 대상으로, 이 시대 인간의 정신이 낳는 모든 행태를 드러낸다. 그저 그의 시가 좋다 찾기 시작한 사람들은 극성 열혈 팬이 되었고, 영감의 교도가 되었고, 과격한 극렬 사상 집단으로 변모해 간다. 그리고 그것을 필연적으로 '테러'와 '유혈'과 '진압'을 초래한다. 

'사랑'을 기반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생산하려는 '모성성'은 철저히 '남성'의 세계 속에서 '소모'되고 '희생'된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 중후반부터 벌어지는 난장을 통해 그 '추상'과 '허명'에 집착한 남성의 세계가 도래하는 건 '폭력'밖에 없다고 일갈한다. 심지어, 안타까운 건, 그 폭력의 세계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여성의 '희생'을 통해 끊임없이 '재부팅'되고 있다고 방점을 찍는다. 



인간의 역사라 쓰고 남성의 역사라 읽고팠던 대런 감독 
대런 감독의 <마더!>는 '인간의 역사'라고 쓰고 '남성의 역사'라고 읽어야 하는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 속에서 남편으로 상징되는 남자들은 <블랙 스완>의 리로이만큼이나 여성을 '소비'하고 '소모'하며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이어가고자 한다. 잠시 등장했던 미셸파이퍼의 또 다른 '마더'는 남성의 권력으로 이어진 강고한 위계 질서의 강렬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조력자일 뿐. <차이의 정치와 정의>의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결국 지배와 억압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정의처럼. 마지막 보다 젊은 '마더'로 리뉴얼되는 아내로 마무리되며 '도식적'으로 여성을 희생양으로 폭력으로 귀결되는 남성의 역사를 '담론'화 하였다. 

<마더!>에 대한 호불호는 이 정체모를 영화가 나아가는 궤적에 대한 이해와 대런 감독이 펼쳐보이는 상징적이면서도 도식적인 담론이 21세기에도 유효한가에 대한 공감 여부로 귀결될 것이다. 한 성에 의한 일방적인 또 다른 성에 대한 지배의 역사로 규정지어진 역사로 상징되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성과 여성에 대한 '규정적 역할론'에 매몰되어 있다. '지배'와 '억압'으로 도식화한 인간의 역사는 지난 세기까지는 충분히 그런 성역할로 규정받을 수 있다지만, 21세기의 담론으로 등장한 이 영화는 과연 21세기에도 그 성적 역할론이 여전히 유효한가 라는 질문을 남긴다. 그러기에 오히려 차별의 역사를 논하고자 하는 바가 남성과 여성을 '본투비 외향적 남성성'과 '본투비 사랑순종주의의 여성성'으로 규정하는 역설적 차별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지배와 억압의 도식이 낳은 자충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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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0.24 15:42

소설 <남한산성>이 지난 6월 5일 100쇄를 찍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와 함께 김훈 작가의 역사 3부작으로 불리우는 이 작품은 2007년 출간 이래 꾸준한 스테디셀러로 무려 100쇄, 총 누적 판매수 59만부에 이르렀다. 우리 소설계에서는 진귀하고도 소중한 성과다. 하지만 영화로 온 <남한산성>은 그와 달리 고전 중이다. 손익분기점 500만이 무색하게 액션 영화 <범죄도시>에 추격을 당하며 11일 현재 누적 관객수 331만으로 초반의 흥행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장고한 스테디셀러 소설 <남한산성>과 영화 <남한산성> 사이에 이 갭, 그건 그저 만듬새나 지루함의 문제일까? 과연, 59만부가 팔린 소설 <남한산성>을 산 사람들은 김훈의 필설을 다 마무리했을까? 혹 김훈의 명망에 기대어 샀다가 서가에서 먼지를 맞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100쇄 출간에도 불구하고 실용서가 아니고서는 쪼그라져만 들어가는 우리의 독서 시장의 현실과 맞물려 비유하는 것이 더 적확할 듯 싶다. 영화를 통한 '사유', 아니 '사유' 그 자체가 낯설어가는 세상에서 어쩌면 애초에 영화 <남한산성>은 무모한 도전이었을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영화 <남한산성>에는 그저 김훈 원작 이상 2017년의 황동혁의 '언어'가 유려하게 담겨있으니, 그저 손익분기점을 못넘은 영화로 기억되기엔 안타깝다. 



소설<남한산성> 그리고 영화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대군을 피해 인조와 신하들이 머문 47일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속 자막에서도 알려주다시피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았던 그 겨울, 어쩌자고 퇴로가 막히면 도망갈 곳도 없는 산성으로 살자고 도망온 왕과 군주들의 행보에서부터 소설은 탄식을 이어간다. 그리고 채워가는 살아감의 엄정함, 그 속에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지속되는 하던대도 지속되는 정사. 이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아무런 결론도 없는 소설'이라 정의한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조건들, 인간의 야만성, 인간의 삶이 빚어내는 풍경들을 묘사하려 했을 뿐'이라 한다. 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장군의 언어로 전쟁터의 풍경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간략하게 전한 <칼의 노래>를 통해 그래서 더 비감하게 임진왜란을 실감했듯, 가감없이 묘사해 내려간 47일 피폐해져만가는 배수진 남한산성 역시, 병자호란 풍전등화 속 조선의 모습을 절실하게 전한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의 그 기조를 이어받아, 1636년 남한산성의 풍경과 인간들을 그려나간다.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그 과거를 기억하는 주체가 오늘의 사람이라, 언제나 거기엔 오늘의 색채가 덧칠해 질 수 밖에 없다. 트럼프의 미국과 김정은의 북한 사이에서, 입지가 좁은 우리의 처지는 절묘하게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없는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처지와 오버랩되며 회자될 수 밖에 없는 시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안타깝다. 영화 <남한산성>이 저어가는 사유의 깊이는 이미 우리가 배워서 알고 익힌 역사, 남한산성에 갇혀 주화파나 주전파냐를 놓고 싸우고, 결론 내려진 그 뻔한 역사의 결론을 한 발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안다. 당시 조선이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서 얼마나 무지했는지, 최명길이 제시한 청과의 휴전이 얼마나 자명한 결론이었는지. 하지만 이미 '안 자', 혹은, 방관자, 혹은 목격자의 관점을 넘어, 황동혁 감독이 애써 그려낸 1636년 남한산성에 있다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 되돌려 질문을 던져보면 과연 그때도 그럴까?

소설이 '남한산성'이라는 지역성을 배경으로 그 속에 담겨진 인간들을 수사를 아낀 문장으로 담백하게, 그래서 서늘하게 묘사해 나갔다면, 영화는 그런 원작의 묘사에 더해, 인조를 중심으로 그들 앞에서 조선의 운명을 둔 '인간군상'들에 조금 더 방점을 찍는다. 걸출한 두 배우, 김윤석, 이병헌이 분한 김상헌과 최명길,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고뇌하는 인조 박해일, 그리고 사실은 그 못지않게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을 분노케한 영상 김류의 송영창, 이들의 설전과 팽팽한 긴장감이, 마치 한 편의 연극 무대를 보듯 관객을 끌어들인다. 
 
경계에 선 자들에게 그 해 겨울은 냉혹했다. 조선 강토를 짓밟으며 청병이 다가오고 있었고 조선의 임금은 두려워 도망가는 백성들 사이를 뚫고 남한산성에 다다랐다. 성벽을 두고 대치하는 것들의 성격은 명백했다. 조선과 청이 대치하고 있었고 조선의 임금 인조와 청의 황제 칸이 대치하고 있었고 조선의 병사와 청의 병사가 대치하고 있었다. 쫓겨온 자와 쫓아온 자의 대치였고 굶주린 자와 배부른 자의 대치였고 말과 말, 문장과 문장의 대치였다.......대치는 성벽을 사이에 둔, 성 밖와 성 안의 것이 아니었다. 성 안에서 군과 신이 대치하고 있었고, 병과 병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병들의 목숨과 성첩을 덮는 추위가 대치하고 있었다......어디도 대치를 피할 곳은 없었다. 


<남한산성>, 국가를 묻다. 
아마도 영화 <남한산성>이 지루했던 이들이라면, 그 이유의 상당수가 이들의 사실은 '절체절명'의 설전 그 행간 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에는 너무도 분명한 결론이지만, 김훈이 그러했듯, 감독 황동혁 역시, 애써 그 결론에 의거치 않고, 그 시대를 산 그들의 입장 각각에 힘을 실어준다. 사대의 나라 조선, 이미 그렇게 몇 백년을 이끌어 온 조정에서, 적페가 되어가며 기득권이 된 영상과, 적폐는 아니지만 여전히 유교의 국가 조선의 신하가 자신의 정체성인 김상헌, 그리고 그럼에도 국가의 생존을 우선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주장은 각각 명징하게 자신의 길을 갖는다.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각자의 입장에서 쟁투하는 오늘날의 인간들에 굳이 비교할 것도 없다. 

'경계에 선 인간들',  김훈은 그리 표현했다. 하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는게, 지구가 멸망해도 희망을 심고자 해서가 아니라,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걸 알지 못해서이듯, 과연, 몇 백년을 사대의 유교 국가로 살아온 조선에게, 청과의 화친이 '수긍'될 수 있을까?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압록강 주변까지 도망쳐, 명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했다 하는 인식을 가질 지도 모르는 사대부들에게, 최명길의 '혜안'은 얼마나 멀고도 아득한 이야기일지. 

보름달이 뜨면 봉화가 올려질 것이라 기대하는 김상헌과, 보름달이 뜨기 전 항복을 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절박한 설득은 바로 그런 경계에 대한 공감에서부터 절절해진다. 하지만 이미 역사적 혜안의 최명길과, 역사적 고집불통의 대명사가 된 김상헌이란 결론을 알고 있는 후대의 관객들에겐 싱거운 선택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안 자'가 되어 그 '선택'의 감별사가 되어버린 관객이 영화 <남한산성>의 손익 분기점을 위협할 것이다.



소설은 그 답을 그들이 아닌 조선의 백성들에게서 찾았다. 영화 역시 김상헌의 눈에 밟힌 산성의 군인들과 서날쇠, 소녀 나루에게서 찾는다. 영화는 최명길을 청과의 경계에 서게 한 반면, 뜻밖에도 고루한 김상헌을 나룻터에서 부터 산성에 이르기까지 그들 진짜 조선의 주인들과 접점을 가지도록 만든다. 그래서일까? 분명 이병헌과, 김윤석 두 배우의 백중지세로 이어지는 영화 속 두 인물의 입장에서 결코 그 저울이 흔들리지 않지만, 그 접점에서 오늘날 역사가 '남한산성 그 치욕의 공범자'로 기록하고 있는 김상헌의 처지와 생각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심지어 굳이 역사적 사실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이, 김상헌의 마지막을 사실과 다르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다른 선택이 오히려 묻는다. 과연, 1636년 조선이 그 치욕을 감당하면서 지킬 가치가 있는 국가인가? 라고. 소설은 남한산성의 그 피할 곳없는 풍경에서 자명한 진실에서 비껴간 정사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드러냈다면, 영화는 오히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의 존속을 묻는다. 그렇게 많은 백성을 희생하고, 삼전도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켜낸 조선이 그 이후에 어땠던가?, 돌아온 인조는 어땠던가? 과연, 그 곳에서 조선이 살아돌아올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사료와 달리, 최명길은 김상헌에게 자기 대신 돌아가 조선을 책임져 달라 하지만, 그 가치와 명분을 가지고 조정을 지키고자 애쓰던 김상헌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거의 '혁명적'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이 던진 진짜 질문은 이것일 지도 모른다. 1636년 청 앞에서 풍전등화의 조선, 굴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쩌자고 임진왜란에도 그랬듯이 백성은 내팽개쳐두고 그 산성으로 도망친 것에서 부터, 그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도 왕조, 아니 왕의 운신만이 여전했던 그 국가, 과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존립할 가치가 있는가 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이다. 여전히 '국가'의 존재가 크고도 엄정한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이 질문은 그래서 낯설고, 도발적이다. 그리고 이 묵직할 질문이 바로 영화 <남한산성>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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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0.11 1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