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이 늘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적당히 견딜만한 햇살, 온기, 심지어 겨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쨍쨍한 햇살 아래 그늘 아래에서 숨을 돌려봤던 이라면 쉬이 그 곳의 안식을 잊을 수는 없다. 하물며, 사랑의 그늘이라면, 더더욱. 여기 사랑의 그늘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있다. 늘 자신이 편하게 쉴 그늘을 잃어버린 남자, 그는 그늘을 잃어버린 이후에야 자신의 안식처를 잃어버렸음을 세상의 땡볕 아래서 서서히 절감한다. 심지어, 그저 자신을 편히(?) 쉬어갈 곳이라 생각했던 그 그늘이 사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자신만큼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이었음을 곱씹는다. 영화 <아주 긴 변명>은 바로 그 그늘을 잃어버린 남자의 오랜 방황이다. 




대지진 이후의 상실을 다룬 또 한 편의 영화 
일본 영화계는 2011. 3.11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나뉘어진다. 3.11 대지진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에서 부터 최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너의 이름은>과 같은 애니메이션까지 일본 사회가 겪은 '사회적 상실'에 천착한다. 2016 부산 국제 영화제를 비롯하여, 벤쿠버 영화제 등에 초청된 <아주 긴 변명> 역시 이 '상실'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부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모토키 마사하루 분)이 출연한 방송을 틀어놓고 남편의 머리를 다듬어 주는 아내. 이 여유로운 일상은 곧 자기 비하를 시작으로 무례하다싶을 정도로 감정을 토해놓는 남편의 언어로 인해 파열음을 낸다. 심지어 아내가 웃으며 보던 tv까지 꺼버리는 남편.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남편이 토해놓은 감정에 눈빛은 동요하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않고 남편의 머리를 매만진다. 남편에게 둘러놓은 미용용 덮개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길을 떠나는 아내. 그런 아내가 떠나자마자 서둘러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남편, 그리고 그의 집에 찾아온 여자. 아내가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겨울 산을 오를 때 남편은 아내와 함께 있던 그 짜증스럽던 남편이 아닌, 가장 로맨틱한 남성이 되어 밀애를 즐긴다. 그리고, 그 밀애의 끝에 걸려온 전화, 아내가 죽었다. 



영화는 그렇게 엇갈리는 부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엇물렸던 일상처럼, 남편은 사고 후 만난 조사관에게 '아내'에 대해 엇박자를 짚는다. 아내의 옷차림, 행선지는 물론, 아내가 동행했던 친구의 존재조차 '무심'했던 남편, 하지만 미디어에 알려진 유명 작가답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코스프레를 그럴 듯하게 하며 장례를 치뤄낸다. 틈틈이 자신의 상실이 얼마나 세간에 관심 대상이 되는가를 확인하며. 하지만 사고 이후 가증스러울만큼 천연덕스러웠던 남편의 삶은 아내가 없이는 세탁기 하나, 전자렌지 하나 돌리지 못하는 일상으로 돌아오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서 빨리 아내를 보내고 연하의 애인과의 정사에 맘이 도망가있던 그는 정작 돌아오지 않는 아내가 돌보지 않는 일상은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무너져가는 그에게 아내의 친구 남편(다케하라 피스톨 분)이 찾아오고 그는 덥석 그의 아이들을 돌보겠다 선심을 쓴다. 

영화는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전작 <유레루(2006)>나 <우리 의사 선생님(2009)>처럼 전혀 다른 모습의 두 남자를 대비시킨다. 틈틈이 아내가 남긴 메시지를 반복 청취하며 시도때도 없이 아내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요이치, 그와 달리 아내의 사고 이후 한번도 울 수 없었던 사치오, 그 두사람이 요이치의 아이들을 매개로 '상실'을 살아낸다. 

나의 사랑하는 플라타너스여
아름답고 무성한 잎이여 
그대를 위한 운명은 반짝인다
천둥, 번개, 태풍이라 할 지라도 
그대의 아늑한 평화를 범하지 말라
사나운 갈바람도 다가와 그대를 욕하지 말라
그립고 사랑스러운 나무 그늘도 
지난 날 이렇듯 아늑하지는 않았다.


늘 사랑하는 이를 사랑했던 건 아니다. 
영화는 결혼 20년 여전히 이기적이기만 한 남편 사치오를 통해, 상실의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당신은 어땠습니까? 가족이라는 관계, 혹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얽혀진 인간 군상, 하지만 늘 그 관계가 교과서적 전형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교과서적이지 않는 인간 관계를 <아주 긴 변명>은 들여다 본다. 아내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다른 여자를 안고 있던 남자는 아내를 추모하러 간 호수에서, 자신을 남기고 죽어버린 것이 바로 형벌이라며 하늘의 아내에게 소리를 높일 정도로 차마 자신이 저지레해버린 파열된 관계를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아내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리는 요이치는 여전히 쉬이 눈물이 흐르지 않는 그에겐 또 다른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에게 '공감'의 여지를 준 건 요이치의 아들이다. 감정을 쏟아놓은 아버지, 철없는 동생 사이에서 애어른처럼 의젓한 그의 아들, 아버지에게 차마 말하지 않는 감정, 심지어 눈물을 보이는 그 아이를 보며 사치오는 자신이 둘러친 상실의 벽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돌보는 한 줄의 글을 쓰기도 힘든 일상, 어느덧 어린 여자 아이의 지시에 따라 밥도 하고, 빨래도 개는 그 일상에 사치오는 빠져드는데, 그의 매니저는 그런 그를 두고 '도피'란다. 

요이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숨가쁘게 달려가는 사치오의 그 순간 흘러나오는 '라르고'처럼 사치오가 자신의 죄책감, 자신의 상실을 들여다보는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사치오라는 인물을 '느리게' 들여다 본다. 아내의 부재를 자신에게 벌주는 것이라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아내의 털끝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문자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그의 상실은 쉬이 자신을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 '쉬이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않는 상실은,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와 그 관계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오랜 고찰로, 그리고 치유에 대한 반문으로 귀결된다. 



정작 아내 이야기만 나오던 요이치가 뻔뻔하리만치 천연덕스러웠던 사치오와 달리 시간이 흐르자 아내의 메시지를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하자, 사치오는 아내의 죽음의 그때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요이치 가족과의 시간은 사치오에게 아내의 부재를 대신할 그늘이었으며, 비겁했던 자신을 인정할 '연옥'이었던 것이다. 자신과 같았던 요이치의 아들을 돌보며, 어린 딸아이의 엄마 노릇을 하는 그 '외면'의 시간 사치오는 천천히 아내와 자신을 돌아볼 '짬'을 낸 것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쩌면 '치유'가 아닐 지도 모른다. 오히려 다친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 상처를 말끔히 낫게 만들려는 인간 세상의 조급증에 대한 반문일 수도 있다. 사치오와 아이들과 함께 바다에 간 요이치는 말한다. 아내만 있다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어쩌면 도망이고, 어쩌면 상실의 과정일지도 모를, 그 시간이 요이치와 사치오에겐 또 다른 삶의 과정이다. 그 오랜 삶의 여정을 통해, 변명에 변명을 하며 아내의 죽음과 함께 하겠다던 사치오는 비로소 자신과 아내를 들여다 보고, 그때서야 사치오 자신으로 돌아와 작가로 선다. 하지만, 그건 비로소 자신의 머리를 자를 용기를 낸 것처럼, 진짜 이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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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21 18:43

유명해져서 손석희의 <jtbc 뉴스룸>에 출연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변호사가 있다. 하지만 이미 그는 꽤 유명해져서 우리는 그를 jtbc의 <말하는 대로> 등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있다. 바로 박준영 변호사이다. 우리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피해자가 10년간 복역했던 '약촌 오거리 사건'의 재심을 성공시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부터다. 재심의 과정은<그것이 알고싶다> 등에서 이미 다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이미 알려진 사건 '영화'를 통해 더 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지만 영화 <재심>은 신문 지면의 보도, 혹은 다큐를 통해 드러난 사실의 행간 속에 깊은 진실의 울림이 있음을, '재심의 성공'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고통과 부조리한 사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하나의, 억울한 가족을 위한 재판 이야기 
<재심>은 2013년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김경미 씨의 이야기를 다룬 <또 하나의 가족>을 감독했던 김태윤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제목 '또 하나의 가족'은 대기업 삼성이 자사의 이미미메이킹을 위한 '광고'의 캐치프레이즈였다. 하지만, 영화는 전국민의 가족같은 삼성이 드리운 그늘, 반도체 산업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산재에 대해 인정보다 하지 않고 있는 비감한 현실은 김경미 씨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곡진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가족>은 영화 상영 자체가 또 하나의 '투쟁'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어둠의 한 자락을 언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든 싸움이었던 김태윤 감독은 자신을 찾아온 기막힌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의 진실을 접하고 다시 '실화'를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살인 누명을 썼다'는 억울한 진실을 '영화가 넘어서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김태윤 감독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은 <또 하나의 가족>처럼 최군 가족에게 닥친 '누명' 이상의 억울함이었다.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 최군, 하지만 최군의 감옥 생활동안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조차 잃어가는 어머니와 최군에게 근로복지 공단이 구상권을 청구했던 것이다. 살해 피해자에게 근로 복지공단이 피해자가에게 애초 청구한 금액은 4000만원이었지만 투옥된 동안 이자가 붙어 1억 4천만원으로 불어난 빛. 그리고 그런 최군의 억울한 사연에 함께 하게 된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는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김태윤 감독은 <또 하나의 가족>에서 그랬듯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국민적, 법적 권리로부터 배척된 가족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동네 다방에서 심부름이나 하며 지내는 이른바 '동네 양아치' 현우(강하늘 분)와 어머니(김해숙 분)의 억울한 가족사를 전면에 내세운다. 

엄마 손에 이끌려 남들처럼 학교를 다녀야 해서 입은 교복 옷깃을 세우고, 팔뚝의 문신을 드러내려는 현우, 하지만 그런 세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양아치스러움' 이면에 숨겨진 15살 소년의 순박함과 의리를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그런 현우의 진솔한 캐릭터는 곧 목격자였던 그를 폭력적으로 겁박했던 당시 공권력과 사법부의 비리와 무능, 혹은 협잡에 대한 분노를 상승시키는 가장 적절한 동인이 된다. 

강하늘과 정우가 그려낸 진심의 '버디 무비' 
그리고 10년 '양아치스러울려고'했지만 순박했던 소년은 이제 '독기'와 '절망'을 품은 청년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자식의 일이라면 '악다구니'밖엔 할 수 없는 앞이 안보이는 어미와 함께. 그리고 그런 현우 모자 앞에 나타난 벼랑 끝에 몰린 변호사 준영(정우 분)이 '속물스럽게' 등장한다. 

영화는 그렇게 10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고 절망을 아로새긴 현우와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부추켜 자신의 입신양명을 노리는 준영을 '버디 무비'처럼 그려간다. 이 기묘한 조합의 '버디'들은 감독의 그 어떤 상상을 뛰어넘는 진실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대한민국 그 누구라도 공감하는 공권력과 사법 제도가 만들어 낸 '탈법 사회' 대한민국이란 장애를 '스펙타클'하게 겪어내려간다. 모텔, 혹은 폐모텔을 배역으로 암약하는 공권력은 그 어떤 조폭 못지 않은 공포의 대상이며, 재심 앞에 '이익'을 위해 변절하는 동료, 심지어 진범을 잡고도 일신의 이해 관계를 위해 협잡하는 공권력과 사법부 등은 그 어떤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버디무비보다 극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그런 현실 속에 때론 좌절하고, 의심하던 두 사람이 약촌 오거리을 배경으로 한 판 뜨려다, 순식간에 사건 재연의 동지로 '둔갑'하는 씬은 아마도 <재심> 속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지 않을까. 



제도 교육, 아니 지역 사회에서 내팽개쳐진 15살 질풍노도의 청소년에서, 감옥 생활 10년후 절망에 잠긴 청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15살 시절의 그 '순박한 진심'을 한 구석에 간직한 현우를 배우 강하늘은 우직하게 표현한다. <세시봉(2015)>의 윤형주도, <동주(2015)>도 그의 연기로 빚여낸 실존 인물들이었지만, <재심>의 현우로써의 강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배우 강하늘의 매력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15살 소년의 불량스러운 외모에 숨길 수 없는 순박함도, 이제 10년이 지난 절망에 자신을 던졌지만 어찌할 수 없는 진심도, 강하늘의 눈빛을 통해 설득력을 얻어간다. 

이런 빛을 발한 강하늘의 곁에 모처럼 반가웠던 건 정우다. 지잡대 전공과 출신의, 변호사의 목적이 '돈'이라고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설파하다, 현우와 현우 어머니의 진심에 방향을 돌려세운 준영은 <응답하라 1994> 이후 정우를 기억할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가 될 듯하다. 속물과 진심 사이, 믿음과 의혹 사이, 그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혼선'의 연기를 정우는 <응답하라 1994>츤데레 쓰레기 못지않게 매끄럽게 소화해 낸다. 

투박하지만 진솔한 청년 현우의 강하늘과 그런 현우를 얼르고, 때론 의심하며, 그리고 결국 그의 손을 놓치지 않는 속물 변호사 준영의 정우의 '호모 사케르' 식 '버디 무비', <재심>은 그 어떤 액션 '버디 무비'보다도 배우들의 연기와 합을 보는 맛을 충족시켜준다. 거기에 단 한 장면만으로도 관객들의 누선을 풀어헤치고 마는 김해숙의 '모성 연기'야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요, 이동휘의 반전 연기 역시 신선했다. 



이런 배우들의 호연 덕분일까? 아니, 또 하나의 가족인 척하는 진정한 권력 대기업이 등장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 '권력의 농단'을 체감하는 시절 덕분일까? <또 하나의 가족>을 완성시키고도 개봉관을 잡지못해 동분서주하던 김태운 감독에게 <재심>은 박스 오피스 1위의 영광을 안긴다. (2월 15일 기준, 735,469명, 예매 33.9%) <재심>의 1위는 또한 이제는 슬슬 클리셰가 되어가는 부도덕한 권력과 재력의 콜라보레이션을 다룬 사회물, 혹은 작품성은 낮지만 대중성은 좋은 '액션'과 '유머'를 앞세우 흥행작의 딜레마에서 <변호사> 이후 모처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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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9 18:27

'씨앗은 부처님도 돌아앉는다'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다. 모 감독의 늦은 연애가 전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가 '아내가 있다'라는 이유다. 그런데 남편의 애인이 생겼다는 전언에 담담하게 '같이 살자'는 아내가 있다. 그러나 역시 '이성적 판단'은 무리였을까? 결국 아내는 이 '혼돈'의 공동체를 견뎌내지 못하고 직장도 잃고 집을 떠나야 할 처지다. 한 남자와 두 여자의 통속적 막장 스토리, 그런데 이 스토리가 사회민주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덴마크'에서라면? 지난 2일 개봉하여 근근히 상영을 이어가고 있는, <사랑의 시대>는 바로 1970년대 덴마크판 사랑과 전쟁을 다룬다. 






유산으로 남겨진 저택, 공동체가 되다
건축학과 교수 에릭(울리히 톰센 분)에게 대저택이 상속되었다. 아름다운 정경을 지닌 층층이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저택, 어릴 적 추억이 고이고이 간직된 곳이지만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에릭에겐 그저 어서 빨리 팔아버려야 할 부담일 뿐이다. 아내 안나(트리히 홀름 분)와 딸 프레야(마샤 소피 발스트룀 한센 분)과 함께 저택을 보러 간 날 팔 궁리를 하는 에릭에게 안나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여기서 '공동체'를 일구자고. 

안나의 변은 이렇다. 늘 에릭의 말만 듣고 살아야 하는 결혼 생활이 권태롭다고, 이젠 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살고 싶다고. 그녀가 떠올린 첫 번 째 사람은 이들 부부의 젊은 시절 친구인 올레(라스 란데 분), 단촐하게 비닐 봉지 두 개를 들고 이들의 집을 찾아온 올레를 시작으로 다섯 남자와 다섯 여자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집의 소유조차 야심차게 '공동'으로 등기하고자 하며 '공동체'를 이룬 이들은 식사는 물론, 여가까지 함께 즐기며 '공동'의 삶을 유쾌하게 꾸려간다. 

그러나 늘 '공동'의 삶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공동체 면접에서 부터 '집세'에 연연하던 에릭의 의도와 달리, 직장조차 알론까지 합류한 이들의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은 교수인 에릭과 유명 아나운서 안나이다. 외국인 알론을 못마땅해하며 그의 짐을 호시탐탐 태우는 올레처럼 함께 사는 삶의 불협화음은 늘 '토론'과 '거수'로 진행되는 공동체의 삶을 달군다. 

그래도 그럭저럭 서로 맞춰가며 사는 삶, 정작 위기는 그 공동체를 발의한 '에릭-안나 부부에게서 시작된다. 늘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안나, 그런 아내에게서 에릭은 소외감을 느끼고, 그런 그에게 학생인 엠마(헬렌 레인가드 뉴먼 분)이 다가온다. 엠마와의 밀회를 즐기던 에릭, 아내가 공동체 식구들과 놀러 간 날, 집으로 온 엠마를 딸 프레야에게 들키고 만다. 결국 아내에게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고 집주인 에릭이 집을 나가게 되지만, 그도 잠시 거처가 마땅치않은 에릭과 엠마의 처지를 배려한 안나의 결정으로 '엠마'가 공동체 식구로 합류하기에 이른다. 



'이성'으론 감당할 수 없는 '사랑'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가족이란 울타리를 넘어 공동체로 해소하려 시도한 안나는 남편의 외도에 조차 이성적으로 대응한다. 남편의 외도를 '가정을 깨뜨리는 비도덕적 행위'로 지탄하는 대신, 순순히 감정의 진실을 직시하며 그의 다른 사랑을 수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덴마크'에서 살면 사랑하는 이의 외도도 저렇게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나? 라는 의아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남편의 진심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던 안나, 하지만 그가 부재한 결혼 생활은 조금씩 안나를 무너뜨려 간다. '대인배'적으로 엠마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정작 공동체 식구들이 그녀를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자 혼란스러워 한다. 그리고 밤마다 들려오는 엠마와 남편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는 그녀를 불면의 밤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거리에서 사인을 해줄 정도의 명성을 일궜던 그녀의 직업조차 무너뜨린다. 공동체의 식탁에서 술에 취해 어디서 넘어진 듯 흙을 묻힌 차림새로 엠마에게 남편을 다시 나누어 주기를 간청하는 듯한 꿈 이야기를 하는 안나는 이제 더 이상 '공동체'를 주도하던 당당한 그녀가 아니다. 심지어 에릭과 안나를 집에 거주하는 문제를 놓고 '니가 나가라'며 언성을 높이는 상태에 이른다. 

결국 이런 안나와 에릭의 집 쟁탈전을 둔 설전의 결론을 내린 것은 딸 프레야다. 딸은 엄마가 이 집에 머무는 것은 엄마를 망칠 뿐이라며 엄마가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결국 안나는 집을 떠난다. 아마 우리네 통속극이었다면 어떻게 딸이 그럴 수 있어?라는 공분을 일으킬 장면이지만, 프레야의 선택을 통해 감독은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결국 '건강한 개인'이라는 것을 짚는다. 



결국 안나는 실패한 것일까? 남편 한 사람을 두고 아내와 정인이 한 집에 머무는 양상을 보면, 예전 우리 조상들의 첩을 거드린 가족 형태가 떠올려진다. 그 시절 부처님도 돌아앉을 씨앗을 '인고하며' 대가족을 일구며 어머니들은 살아왔고, 그 '인고'의 세월을 '한'이라 지칭되며, 희생하는 어머니상, 가족의 대들보 어머니 상의 한 부분을 구성했다. 그런 면에서 안나는 '집'을 잃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며 '한'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탄생시킨 우리의 '어머니들'과 안나는 다르다. 

안나는 분명 그녀가 가진 것들 남편과 공동체와 직업, 그리고 집마저 잃었지만, 어쩐지 가방을 들고 나서는 그녀가 홀가분해 보인다. 그녀를 보내고, 그리고 마치 그녀를 따라나서듯 사랑하는 이를 따라나선 딸 프레야를 보내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 에릭이 집에 남아있지만 진짜 실패자처럼 보인다. '사랑'의 시대는 갔지만, 그렇다고 안나의 삶이 끝난 건 아니다. 안나는 얼마전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던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진짜 자신을 찾아나설 용기를 낸 첫 걸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시대>가 주는 감동은 바로 그 단촐하게 떠나는 안나로부터 시작된다. 

공동체와 개인의 딜레마 
<사랑의 시대>는 7살부터 19세까지 공동체 생활을 했던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경험에 기초한다. 수상이 나서서 덴마크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며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명을 할 정도로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이 강한 덴마크, 2차 대전이 종전 된 후 집권하여 1982년까지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아래 남녀간 성평등과 사회 경제적 복지 국가를 이루어 내던 그 시기의 정점에 있는 70년대의 덴마크 사회를 떼어놓고서는 이 영화를 말할 수 없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사회주의자, 직업이 없는 외국인,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까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공동체는 에릭-안나가 이룬 대저택의 공동체를 넘어 마치 70년대의 덴마크 사회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런 그들이 에릭과 안나의 경제적 기반 위에 공동으로 살아가며 때론 에릭이 '내집이야' 다 나가라는 위기를 견뎌내며 과정은 '자본주의' 체제 위에 선 사회민주적 실험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감독이 생각하는 위기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에릭과 안나의 갈등처럼,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론적 갈등이다. 무직이었던 외국인 알론이 식기세척기를 사들일 정도로 공동체의 틀은 견고해지지만 정작 위기는 그 공동체를 일구는 사람 개개인의 자존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권태로운 결혼 생활의 위기를 친구같은 이들과의 공동체로 해결하려 했던 안나가 정작 남편의 외도라는 문제에서 무너지듯, 그리고 자신의 집인데 공동체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쫓겨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에릭이 '다 나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듯, 결국 파국은 '욕망'과 '자존'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하다. 

공동체 2부작이라 칭해지듯, <더 헌트(2012)>에 이어 공동체와 개인의 갈등을 다룬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은 <더 헌트>에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로 부터 배제되는 주인공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비감하여 인간의 편협한 도덕성을 회의하게 만들었던 <더 헌트>와 달리, <사랑의 시대>는 '그 또한 지나가리니'처럼 '시대'라는 연속성으로 인해 보다 여운을 남긴다. 딸이 자라는 걸 보고 싶었던 에릭은 결국 딸조차 나간 집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9살을 넘기지 못한 꼬마의 장례식에서 함께 하듯이 그들이 일궜던 공동체는 여전하다. 아마도 언젠가 자신을 일으켜세운 안나가 또 다른 사랑하는 이와 다시 공동체의 면접을 볼 날이 올 지도 모를 희망까지 갖게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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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6 18:45

어느날 갑자기 전 세계 하늘에 12개의 우주 비행체, 쉘이 나타났다. 혼비백산한 지구인들, 18시간마다 열리는 쉘의 문을 통해 그들과 '접선'한 지구인들은 그들이 온 이유를 알아내려 한다. 하지만 도무지 그들이 보내온 외계의 '신호'를 해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 분)가 차출되는데.


2월 2일 개봉한 <컨택트>는 마치 영화 속 외계인들의 정체를 가려주는 뿌연 안개와도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외계의 실체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조차 뿌연 안개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다. 하지만 그 모호한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저 멀리서 두 곳의 등대가 반짝인다. 



첫 번째; '언어' 소통의 도구?
<컨텍트> 속 '셀'을 타고 온 외계인들은 마치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그 어떤 것'(everything else)와도 같다.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소통'하려 하지만, 지구와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그들과 늘 '불통'의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지구 위의 인간들이 '언어'라는 도구로 '소통'을 체계화했기에, 당연히 지구인들은 자신이 했던, 아니 자신들이 '약속'했던 바의 방식으로 다시 '외계인'들과 소통에 이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인간들 사이의 '약속'이라 했다. 하지만 그 스스로 훗날 그 '약속' 조차도 규명되지 않는 행간을 지녔다 '회의'하고야 만다. 그 '인간'의 약속된 언어, 12개의 셀의 등장한 지구 곳곳의 나라는 그들이 이뤄낸 문명의 성과로, 미디어와 과학 문명의 도움을 받아, 외계인의 도래, 그 이유를 해석하고자 한다. 

<컨택트>의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클리셰가 된 외계인들은 어떤가. 비행접시라 하는 그 외계의 물체를 타고 인간 세상의 상공에 느닷없이 등장하여,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마구 쏘아대며 '침공'하는 식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비행접시가 모로 선 모양부터, '왜곡'된 형상으로 혼돈을 준 셀은 셀의 입구를 18시간마다 기꺼이 개방하며 '소통'을 도모한다. 

하지만 '침공'하지 않는 외계인들에 대해 지구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외계의 셀이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세상으로 '아노미'에 빠졌고, '폭동'과 '파괴'가 범람하며, 그 통제되지 않는 위기가 오히려 '외계인'에 대한 무력적 대응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정말 '언어'가 소통이 될까? 루이스를 찾아온 군 관계자가 언어학자인 그녀가 도움을 준 미군의 작전은 '소통'대신, 전멸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외계인과의 '소통'을 소란스럽게 다루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건 '언어'가 소통이 되지만, 불통인 인간의 관계이다. 외계인이 그 어떤 '침공'의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이미 '알량한' 인간 사회는 통제 불능이요, '소통'을 도모하기 보다는 '무기'를 앞세운(물론 그 '무기'를 앞세운 측이 군인이 지배하는 중국이요, 러시아, 쿠바이라는 빛바랜 반공주의적 선입견이 아쉽지만, 심지어 여주인공이 전해준 아내의 유언 한 마디에 결정이 뒤집히는 일인 독재 사회의 설정이라니!) 진압 작전은 '외계'라는 '이방'을 빗댄 현실 인간 세상의 아이러니한 상징이다. 마치 우리 안에 던져진 이물질에 대해 철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물원의 원숭이들처럼,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편협하고, 배타적인 존재인가를 <컨택트>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명한다. 그러기에 영화 <컨택트>은 외계와의 조우를 통한 '인간'의 투영이다. 

두 번째; 우리가 혹은 내가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어쩌면 이 문제를 위해서 먼저 '양자 물리학과 평행 우주론' 등의 물리학 이론을 접하며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외계인이 주인공인 영국 드라마 <닥터 후>를 보면 차원이 겹쳐지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는데 현재의 세상에서 과거의 세상으로 이동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3차원의 세계를 살아온 우리에게 시간은 일련의 서열이지만, 그것이 양자 물리학 세계로 들어가면 차원이 확장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겹쳐지면, 마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과거'가 있듯이 그렇게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열린 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면 안갯 속의 등대가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루이스와 딸의 일련의 시간적 인연이 풀어내진다. 그를 통해 관객들은 그녀에게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으며,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딸과의 인연이 그리 길지 않았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 아빠는? 그 스멀스멀 솟은 의심인지, 질문인지에 대한 답은 영화 마지막에 설명된다. 

과연 외계의 등장과 함께 혼돈스러운 인간 세상과,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동시에 진행되는 루이스의 병적인 혼돈, 고통은 영화 말미에서야, 영화 초반 보여준 스포의 진실을 드러낸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루이스는 언어학자로서 18시간마다 셀로 들어간다. 혹시라도 있을 지도 모를 외계와의 조우를 우려한 '인간 세상' 방식의 멸균 상태로, 갖가지 보호복으로 중무장한 그녀, 하지만 외계인과의 만남 과정에서 그녀는 '소통'은 그저 '언어'를 학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보호복을 벗어제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와 외계인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소통'은 무엇이었을까? 훗날 중국의 장군이 그녀를 보러왔다고 했던 그 리셉션에 걸린 외계의 언어, 그것이었을까? 지구인들은 그녀가 해독한 외계의 언어에서 '무기를 주러 왔다'는 말에 당장 '전투 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무기'의 다른 의미가 '선물'임을 재해석한다. '무기'로도, '선물'로도 해석된 마치 산타 할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던 외계의 방문, 그 방문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건 '루이스'고 그건 바로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러기에 그건 '선물'이자, '무기'가 되는 것, 하지만, 그녀는 고통스러운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외계와의 소통에 자신을 기꺼이 열었듯, 그 외계가 준 '운명'의 선물에 역시나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연다. 



하지만 루이스 개인이 받은 '선물'과 앞서 인간 세상의 한계를 보여준 '소통'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결국 그 모든 것이 가르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인식이라는 풀 안에서 규정지어놓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열린 마음이다. 혹시나 언젠가 영화 속 외계인들처럼, 그들이 정말 선물을 들고 소통하기를 바라고 왔을 때, 아니 먼 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세계 안의 이방인들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을 둘러싼, 심지어 당연한 흐름인 시간에 대해조차, 예단과 편견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깜빡깜빡 안갯속 등대불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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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0 00:12

2010년 밀입국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얼어붙은 땅>으로 63회 칸 영화제 시네마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바다, 최연소 칸 영화제 진출의 영예를 안고, 이어 2014년 <거인>으로 36회 청룡영화제, 35회 한국 영화평론가 협의회 신인 감독상을 받았던 김태용 감독이 2017년 새해 첫 영화로 <여교사>를 들고 왔다. 


김하늘이라는 당대 최고 여배우를 타이틀롤로 내세운 <여교사>는 하지만 김태용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라는, 그리고 배우 김하늘의 모처럼 영화 출연이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107,685명(영진위 추산)의 미진한 흥행 성적과 작품성에 있어서도 물음표를 남기며 사라져가는 중이다. 



욕망과 윤리의 경계, 그 연장선
김태용 감독의 신작 <여교사>는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전작들과 동일한 주제의 연장 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밀입국 소년들'(얼어붙은 땅)에서 '이삭의 집 영재'(거인)으로 그리고 이제 다시 계약직 교사 효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속일 것같았던 이들은 결국 끝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조차도 동일하다. 

비굴할 정도로 이삭의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부까지 되겠다며 착한 아이인 양 했던 영재는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데리고 온 동생으로 인해 자신이 썼던 생존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만다. 효주도 다르지 않다. 계약직 교사로 임신 포기 각서까지 썼던 효주이지만, 자신의 자리라 생각했던 과학 정교사 자리를 치고 들어온 이사장 딸에 대한 감정을 결국은 숨겨내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이 다를까? <거인>이 김태용 감독에게 올해의 신인 감독이라는 상찬을 안긴 것과 달리 똑같은 주제를 다룬 <여교사>에 대한 평이 엇갈리는 것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라 해야 할까? <여교사>를 보는 내내 어쩌면 애초의 시나리오는 어쩌면 화면상에 옮겨진 평범하고 둔탁해진 이야기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정'과 '욕망'의 부딪침이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배려(?)' 혹은 이른바 궁예(?)는 보는 이의 생각일 뿐, 어쨋든 감독은 화면에 펼쳐놓은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계약직 여교사로서의 효주(김하늘 분)가 겪어야 하는 부당한 갖가지 대우를 나열하며 영화는 여주인공의 곤란한 처지를 사회적으로 풀어낸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랫동안 동거해 왔던 남자 친구와의 관계도 아슬아슬하다. 그렇게 사회적, 개인적 위기로 <여교사>는 주인공 효주를 벼랑 끝으로 밀고 간다. 

그렇게 위기의 상황에서 도화선으로 등장한 것은 이사장 딸 혜영(유인영 분),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다짜고짜 처음 찾아온 효주에게 술 김에 입을 맞춘 재하(이원근 분)다. 그 이후의 상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예측가능하다. 단지 그 폭발력과 방식의 차이일 뿐. 



사회적 존재의 파열을 욕망을 통해 펼쳐내는 것은 <B사감과 러브레터> 이래 이젠 고전이 된 방식이다. 초반의 계약직 여교사의 부당한 존재를 잔뜩 나열하며 주인공의 사회적 존재를 부각하던 영화는 혜영과 재하의 등장 이후 그 문제 의식을 갑자기 지극히 사적으로 끌어내린다. 분명 효주의 존재론적 문제는 사회적이지만, 혜영과 재하의 등장 이후 효주 자신의 문제 의식과 그 분출은 혜영과 재하라는 삼각 관계에 갖혀 지극히 사적이고, 그래서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이어진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지만, 그 사회적 존재가 살아가는 공간은 지극히 사적이며, 거기서 분출되는 감정들은 개인적이다. 하지만, <여교사>에서는 마치 사회적 존재가 이후 개인적 폭발의 물적 토대라기보다는 도구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임신 포기 각서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도장을 찍는 계약직 교사가 과연 이사장 딸에게 그리도 도발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이건 <거인>의 영재와 범태의 관계가 아니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었다 할지라도 이사장 딸인데 과연 그렇게 용감할 수 있는 계약직 여교사가 현실에 가능할까? 

혜영의 응석같은 친절에 대항한 효주의 냉담 혹은 무시는 그래서 효주의 절박함을 드러내기 보다, 그조차도 효주란 사회적 존재의 비현실성을 강화시킨다. <거인>의 영재는 아니라도, 효주같은 강심장의 계약직 교사가 가능할까? 아니 효주의 냉랭함은 <여교사>라는 영화를 따라가는데 내내 그녀의 감정을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 처음엔 그것이 의도된 감독의 새로운 캐릭터인가 싶다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리 뻣뻣한 그 캐릭터에 배우의 해석 부재인가 하며 의문 부호를 남긴다. 

현실에서 생존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희생이 강요된 여자, 그 여자가 삶의 위기에서 붙잡은 뜻밖의 열정, 하지만 그것조차도 부도수표라는 그 '클리셰'와 같은 이야기를 설득해 내기에 <여교사>는 내내 무덤덤하고, 그래서 클라이막스만 도발적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내내 냉담했던 그녀라면 마지막까지 '사랑'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철저히 혜영과 재하를 가지고 놀 만큼 일관되게 '냉혈한'이었음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교사>는 치명적인 척 하지만 상투적이고, 편의적이었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성 영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한계
바로 그 지점이다. 왜? 저토록 사회적, 개인적으로 절망에 빠진 효주가 마지막 건 희망이 '사랑'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만약에 이 영화의 주인공이 여선생인 효주가 아니라, 남자인 선생이었다면 똑같이 사랑으로 스스로 자멸하는 설정으로 가져갔을까? 왜 여교사는, 시작은 어떤 의도에서였건 그 남자 아이의 바람같은 '사랑'이라는 한 마디에 낚여서 스스로를 파멸에 빠지는 존재로 그려져야 할까? 

영화는 효주의 사적 복수로 마감하지만, 그 자해에 가까운 복수극은 마치 온 기숙사생들이 다 듣는 가운데 애절하게 러브레터를 낭송하는 B 사감의 애절한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분명 영화는 효주라는 계약직 여교사가 처한 사회적 문제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으로 사회적 의식을 고양시키며 시작하지만, 그 끝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복수로 마감한다. 물론 이것이 고립된 사회적 존재 거개가 맞게될 파국의 양상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여성은 하고많은 해결책 중에 하필 '사랑'에 발에 걸려 자멸하고 마는가에 대해 아쉬움을 남긴다. 



그토록 냉정했던 효주라면, 혜영에게 조차 앙칼질 수 있었던 효주라면, 재하라는 존재, 사랑에 걸려 넘어지는 대신 좀 더 냉정한 복수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효주란 사회적 존재를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적인 존재로 치환해 버린 영화는, 마찬가지로 남성 영화에서 여성을 성적 존재로 소모하듯 재하란 대상을 성적 존재로 소모해 버린다. 결국 재하의 속내가 드러나지만 그건 그의 대사를 통해서지, 효주와의 만남 과정에서 재하는 그저 효주의 사랑바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효주의 감정선이 불친절하듯, 재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불친절한 것이다. 과연 이것이 마지막 폭주를 위한 감정의 숨김인지, 아니면, 애초에 의도된 구도로 끌고나가기 위한 편의적 장치였는지, 의문에 의문만이 꼬리를 잇는다. 

사실 <여교사>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6년에서 2017년까지 여배우들이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들은 모조리 부진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두고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부진이라 말할 수 있을 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부진이라기 보다는, 여성을 내세운 영화들의 주제 의식의 문제가 아닌지. 즉 대부분 박스 오피스에서 높은 순위의 영화들이 사회 구조적 문제와 환타지적이나마 그 해결에 주제를 천착하고 있는 가운데, 대부분의 여배우들을 타이틀롤로 삼은 영화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사회적 문제의 개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점에 대해서는 한번쯤 짚어봐야 할 것이다. 이런 영화도 있어야 하겠지만, 굳이 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이런 문제 의식에 천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편견의 여지가 잠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지점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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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1.14 16:36

새로울 것이 없는 청춘 남녀의 성 바꾸기, 그 '므흣'한 설정이 알콩달콩하게 풀어내지던 영화가 중반 이후, 그 설정의 비밀을 풀어가기 시작하면서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결국 영화의 클라이막스 '사라짐'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재와 과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눈물을 쏟게만든 건 에니메이션이었지만, 그리고 그 에니메이션이 있도록 만든 건 타국의 재난이었지만, 결국 내 눈물의 의미는 지금 현재 여전히 우리 땅에서 풀어내지 못한 '세월호'라는 그 날의 슬픔때문이다. 이국의 재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물밀듯이 끌어올리고 만다. 천 일 여전히 학부모들을, 그리고 힘들게 생존 학생들을 차가운 거리로 불러모으고 있는 것은 바로 <너의 이름은>이 하고 있는 그것때문이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홍보 기간 중에 배려없는 아저씨의 행태로 물의를 빚는 바람에 배우 김윤석의 홍보는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런 아쉬운 행보에 묻힌 것 중에 그의 진심어린 한 마디도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윤석은 답한다. 2014년으로 돌아가 '타지 마라, 그 배에 타지 마라'라고 할 것이라고. 이 간단 명료한 소망, 그 소망을 <너의 이름은>은 들어준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와 <너의 이름은>은 똑같이 과거로 돌아가 죽음에 이른 연인을 구하는 드라마이다. 심지어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기욤 뮈소의 동명 원작 소설의 리메이크로 익숙한 서사다. 하지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달리, <너의 이름은>은 정유년 새해 벽두부터 블록버스터 급 한국 영화들을 밀어내고 박스 오피스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청춘 로맨스로부터 환타지 재난 블록버스터로 
무엇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풋풋한 청춘 남녀의 성 바꾸기로 시작된 '청춘 로맨스'의 외양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흔한 성 바꾸기의 설정조차도 <너의 이름은> 버전이 되면 신선하고 새로워진다. 이야기의 테이프를 끊은 것은 시골 마을의 미츠하. 신사 의식과 개발이라는 발전과 전통의 과도기를 겪고 있는 시골 마을, 어머니가 죽은 후 집을 떠난 아버지 대신 신사 의식을 수행하며 도시에의 꿈을 품고 사는 소녀 미츠하에게 벌어진 이상한 사건으로 영화는 서두를 뗀다. 

영화는 미츠하의 시선으로 시작하며, 관객을 오롯이 미츠하와 미츠하가 사는 마을,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시선은 일종의 트릭이자, <너의 이름은>의 후반부 감동을 가져오는 주요한 장치가 된다. 관객들은 타키와 함께 '현재'에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시공간의 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채 대뜸 미츠하에게 벌어진 이상한 해프닝과 함께 이 소녀가 사는 시공간으로 관객을 흡인하면서 이후 벌어질 사건의 중심에 관객들을 놓이게 만든다. 

그저 미츠하에게, 그리고 타키에게 벌어진 이상한 일, 두 청춘 남녀에게 벌어진 '므흣'한 해프닝에 정신없이 흐뭇하게 빠져들던 관객들, 하지만 그저 도쿄와 외진 시골 마을의 공간적 격차가 벌이는 해프닝인 줄 알았던 에피소드가 중반 그 비밀의 열쇠가 풀어지며 거기에 '시간'의 격차가 더해짐을 깨달으며 충격에 빠진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소녀와 소녀 동네 사람들이 알고보니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 그 충격은 영화 속 타키의 충격과 그리 다르지 않는다. 


왜? 이미 영화 초반부터 우리는 미츠하와 그녀의 동네를 동시대의 삶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어린 나리에 고사리 손으로 매듭을 만들고, 신사의 제례 행사를 받들고, 동급생의 조소를 이겨내며 씹던 쌀을 뱉어 술을 빚는 등의 미츠하가 살았던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거 같던 유물의 삶이, 그리고 이제 막 청소년들에 들어선 미츠하가 타키와의 해프닝을 통해 때론 당황하고 설레이던 그 청춘의 열기를, 그리고 소소하게 일상을 메워가는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의 삶이. 그 모든 일상과 꿈, 그리고 갈등조차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한 상실, 설득한 상실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지만 영화를 통해 공유했던 시간을 관객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설정을 통해 <너의 이름은>은 '상실'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실의 공유, 상실의 환기 
아마도 <너의 이름은>이 설정하고 있는 상실은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 상실의 감정에서 이곳에서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피해갈 수 없이 우리 시대의 숙제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그렇게 영화는 '상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상실이 '역사' 혹은 '사건'의 저편으로 잊혀질 수 없는 동시대성을 불러낸다.

그리고 애초에 미츠하와 타키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몸이 바뀌는 환타지답게 '사실'을 알아버린타키는 시간을 돌이키기 위하여 죽음의 강조차 건너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던진다. 마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저승행을 감행하듯. 물론 타키의 헌신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타키가 자신을 던지듯, 시간 속의 미츠하 역시 '난 안되는 걸까?'라는 소극적인 자아를 딛고, 마을을 구해낸다. 두 소년 소녀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방관자적이었던 자신을 던지고, 보다 적극적인 자아로 한 단계 성장하는 통과 의례와 함께, 역사속 사건이 되었던 마을은 '현재'로 돌아온다. 



물론 환타지인 만큼 영화를 보고,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환타지를 넘어, <너의 이름은>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를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남의 일, 다른 시간, 다른 곳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면 나와 관계를 맺을, 같은 공간의 '소중한 인연'임을 상기시킨다. 애써 주장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공존의 울림은 강하고, 상실의 아픔은 진해진다. 우리 무속 신앙 중에 바다에서 죽은 이를 보내는 신례 중에 넋 건지기라는 방식이 있다. 죽은 이의 바다에 가서 죽은 이의가 사용하던 그릇에 끈을 연결하여 혼을 불러내 억울함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편히 보내주는 방식이다. <너의 이름은>은 흡사 그 무속과도 같다. 과거의 미츠하와 타키가 연결된 끈, 그 끈을 통해 타키는 억울하게 죽을 뻔한 미츠하를 불러내고, 결국 억울한 죽음에서 건져냈다는. 그 의식은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동시에, 산자의 가슴 속 상실의 고통도 풀어낸다. 아마도 <너의 이름은>이 흥행을 이어가는 것은 저 무속의 넋건지기 의식처럼 청춘 로맨스를 넘어, 우리 시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억울한 죽음의 상흔을 불러내어 위무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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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1.09 16:14

우리 시대 '꿈'은 희망 고문이다. 남들과 다른 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평범함으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고, '꿈'을 가진 사람은 사회와 꿈의 부조화로 인해 고통받기 십상이다. 꿈은 날개같지만 마치 태양에 다가가면 녹아버리는 이카루스의 날개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우선 그 꿈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쯤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이 시대 젊은이들을 있어도, 없어도 괴롭히는 꿈이라는 것 자체가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근대 이전 신분제 사회에서 '꿈'이라는 것은 불온한 상상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즉 이미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삶이 정해진 사회에서 개인의 여지란 한정적이었을테니, 그 말은 즉 꿈은 곧 '근대 이후 신분으로 부터 떨어져 나온 개인의 탄생과 맞물린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대를 이어 주어진 책무가 없는 사회에서 원자화된 개개인은 자신의 미래를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그 과정에서 유토피아로서 꿈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꿈이란 것이 애초에 인간 본연의 품성인 양 자기 어깨에 짊어진다. 굳이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태양을 향해 날은 이카루스 부자처럼 인간은 늘 자신의 조건과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지만, 그것이 가진 무한대의 조건은 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물론 그 조차도 후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 들어서며 새로운 세습 계층이 등장하고, 그런 과정에서 선택지가 줄어들거나, 선택의 여지가 넉넉치 않은 젊은 계층의 딜레마가 바로 이 시대 꿈의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흔한 자본주의적 성공이 아닌 꿈의 이야기 
그렇게 꿈이 희망 고문이 된 시대, 한 감독이 만든 두 편의 꿈에 대한 영화를 통해 정유년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바로 데미언 채즐 감독의 <라라랜드>와 <위플래쉬>가 그것이다. 

2015년 '교육'에 대한 충격적 담론으로 등장했던 <위플래쉬>에 이어 데미언 채즐 감독은 그와는 정반대로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음악극인 듯한 <라라랜드>를 들고 와 한국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위플래쉬 1,589,048 명, 라라랜드 12월 31일 기준 2,358,457 영진위 기준)

음악이라는 매개를 제외하고는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편의 영화 하지만 뜯어보면 두 영화는 놀랍도록 유사한 면면이 제법 발견된다. 무엇보다 우선 두 편 모두 다루고 있는 음악이라는 것이 '재즈'라는 점이다. 

<위플래쉬>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기 위해 음악 학교에 들어간 앤드류(마일스 텔러 분)가 폭군과도 같은 플랫처 선생(j.k 시몬스 분)를 만나 겪는 우여곡절을 다룬다. 또한 <라라랜드>는 고집스런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이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 분)을 만나 겪게 되는 사랑과 꿈의 사계를 다룬다. 

그런데 두 영화 속 주인공인 앤드류와 세바스찬은 모두 '재즈'에 홀린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재즈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위플래쉬> 상영 당시 성공과 그를 위한 지옥 훈련과도 같은 플래쳐 선생의 교습법이 화제가 되었지만, 그에 앞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토록 학생들을 죽어라 교육하는 플래처 선생조차도 재즈가 죽어가는 장르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이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더 이상 젊은이들은 흥미를 가지지 않는 장르, 신기에 가까운 장인들은 존재했지만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 장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두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홀린 것은 마치 현재의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판소리에 홀린 듯한 어쩌면 트렌디하지 않은 꿈의 선택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막연한 꿈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트렌디하지 않은 것에 빠져든 시대 착오적인 젊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꿈에의 헌신'이라는 것이 정확한 포인트다. 

그리고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하다못해 3류 미식축구 팀의 사촌보다도 못한 존재감을 가진 재즈, 이젠 함께 하던 동료들 조차 철 지난 장르라 여기며 새로운 트렌드로 앞서 따라가는 그 장르에 미친 주인공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에의 여정은 그것이 꿈인 한에서 여전히 질곡의 계절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 편의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드럼에 피가 튀고, 재즈를 잘하고 싶었으나 플랫처 선생의 학대에 가까운 교습법에 견디다 못한 선배가 결국 우울증을 못이겨 자살을 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교습법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선생과 그런 선생에 못지않은 제자의 기 싸움의 결과물인 마지막 연주 시퀀스가 보여준 재즈 연주 실연의 백미는, 절창을 위해 자식의 눈멈을 방조한 <서편제>의 위악에 맞먹는다. 단지 그것이 화려한 연주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토핑, 그리고 무엇보다 이국의 음악이라는 장식이 우리에게 와 재즈라는 소외된 장르보다 '성공'에 방점이 찍힌 채 다가온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한 꿈의 여정 
이 두 편의 영화는 공교롭게도 제목에서 중의적 의미를 띤다. <위플래쉬>가 영화 속 삽입된 연주곡 제목임과 동시에 채찍질이라는 영화 속 교수법을 상징하고 있듯이, <라라랜드>는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두 젊은이의 꿈이 펼쳐지는 지리적 장소인 LA와 헐리우드로 상징되는 꿈의 나라라는 역시나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영화 속 직접적인 소재이자, 동시에 영화 구성의 특징을 제목으로 한 두 영화는 '꿈의 여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재즈 드러머로서의 선망으로 꿈에 부풀었던 신입생 앤드류가 플랫처 선생의 눈에 띠어 졸지에 월반을 하며 재즈 드러머로서 짧은 인정과 그 짧은 성공보다 더 큰 낙차를 겪으면서도 결국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 선생을 이겨먹으며 결국은 그토록 선생이 원하던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장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재즈 드러머로서 LA를 전전하다 자신처럼 꿈을 가진 엠마를 만나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윤색하고 왜곡하던 세바스찬이 마치 거울 앞에서 선 누이처럼 비로소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는 과정은 비록 과정은 다르지만 질곡어린 꿈의 여정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그들은 자신이 원하던 꿈은 이루었지만 사랑까진 얻을 수는 없었다.

그건 엠마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 영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의 사랑은 언해피엔딩이겠지만, 꿈의 동지로서 보자면 영화는 각자의 삶에서 해피엔딩이다. 뒤늦게 니콜을 챙길 여유가 생긴 마일스가 니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니콜에겐 함께 할 애인이 있듯이, 단지 그들이 함께 하는 여정의 궤도가 달랐을 뿐. 영화는 말한다. C'est la vie



흔하디 흔단 일상적인 성공과 꿈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달된 <위플래쉬>와 <라라랜드>가 던진 기본적인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당신이 원하는 꿈은 무엇입니까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마일스와 세바스찬이 도달한 그곳은 자본주의 사회 속 성공의 그것과는 분명 류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비록 세상이 외면하는 그 꿈이라도 당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냐고 덧붙인다. 바로 그런 고집스런 재즈에 대한 열망을 담은 데미언 채즐 감독의 질문을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할 정유년의 시작에 공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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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1.01 16:46
2012년 한겨레 기자 김규원은 영국에 특파원으로 머물었던 경험을 <마인드 더 갭>이란 책으로 응축시켰다. 제목에서 부터 드러나듯이 이 책은 정치, 사회, 문화 등에서 영국와 한국의 다른 점에 주목했다. 김규원이 주목했던 다른 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여러가지 문제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함께 살'고자 노력하는 나라였다. 하루 종일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중계되고, 총리와 야당 대표가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유롭게 겨룰 수 있는 나라, 차별없는 무상 의료 서비스가 이뤄지고, 보행자가 우선이며, 밀어주고 당겨주며 사람이 우선이었던 나라. 김규원 기자는 그런 영국의 장점을 받아들인다면 한국 사회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란 희망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영국은 2016년 6월 브렉시트 투표를 통해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였다. 이 투표 결과를 놓고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 중 유력한 해석은 '가난'에 시달린 노동자 계층 분노의 표출이란 지적이 유효하다. 오래된 제도 속에서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던 영국, 그 영국을 불과 몇 년 사이에 뒤집어 버린 현실은 도대체 어디로 부터 기인한 것일까? 그 해답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 암전의 스크린 위로 자막과 함께 들려오는 건 다니엘(데이브 존스 분)과 복지 상담원 사이의 실랑이이다. 늙은 목수 다니엘, 일하다 쓰러져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의사 소견을 받은 다니엘, 영국의 의료 복지 시스템에서 다니엘은 질병과 관련된 실업 급여를 받고자 하지만, 경직화된 시스템으로 인해 다니엘의 급여는 좌절되고 만다는 내용. 

불통의 복지와 인간 상실
영화 속 설정은 상징적이다. 다수의 직원이 일대일 상담을 하는 의료 복지 시스템, 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은 '인터넷의 서류 작성'과 메뉴얼에 의거한다. 상담원은 있지만,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메뉴얼의 복사본들이다. 정해진 질문을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메뉴얼을 벗어나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배려라도 보이면 당장 상급자에 의해 지적을 받게 되는 상황이다. 그런 지극히 관료적이고 경직된 복지 상담 시스템은 현재 영국 복지 시스템의 헛점을 단번에 설득하고, 빚좋은 개살구로서의 복지 사회 영국을 보여준다. 

당연히 그런 상황 속에서 마우스를 올리라 하니 진짜 마우스를 들고 올리는, 커서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늙은 목수 다니엘의 대답은 상담원에게 동문서답이 되고, 제재 대상이 되고 탈락자가 당연한 수순이다. 심장이 나빠 일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 따위는 배제가 된 채 메뉴얼에 따라 정상인이 된 다니엘에게는 다시 장황스런 항고 절차나 구차스런 구직 급여 신청 과정이 남을 뿐이다. 다니엘이 우연히 마주친 싱글맘 케이티 역시 마찬가지다. 런던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 겨우 집을 구해 생소한 뉴캐슬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케이티 가족의 생활 급여 역시 약속 시간을 핑계로 보장되지 않는다. 당장 아이들을 학교를 보내야 하고 먹고 살 것이 없는 사정 따위 아랑곳없다. 

결국 인간적 배려가 없는, 즉 '인간'이 없는 시스템화된 복지 불통 아래 다니엘은 졸지에 구직 활동을 하러 전전하고, 생전 사용한 적이 없는 인터넷 사용을 하기 위해 고전을 거듭한다. 케이티 역시 생활 보호 대상자를 위한 급식소를 이용하면서도 어떻게든 아이들과 새로운 집에서 살아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 결과 돌아온 것은 평생을 성실하게 일했던 목수 다니엘의 뜻하지 않은 구직 활동 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이나, 번번이 그를 무능하고 불통으로 만드는 시스템뿐이다. 단지 심장이 나빠 일을 쉬라는 의사의 권고를 따랐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다니엘을 구직을 핑계로 사기치는 사람이 되거나, 나이답지 않게 복지 시스템의 응석받이거나 반항아로 낙인찍혀갈 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급여를 받아보려 구직 활동도 해보고, 인터넷 서류도 접수해 보았지만 다니엘에게 돌아온 건 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집의 집기를 몽땅 내다 팔아야 하는 궁색한 처지이다. 

그래도 홀로 생활하는 다니엘은 나은 편이다. 노숙자 쉼터를 벗어나 이제 방송통신대학이라도 다녀보겠다고 꿈에 부풀었던 싱글맘 케이티는 자신의 꿈은 커녕 아이들 밥 한 끼을 먹이기 위해 과일 한 쪽으로 허기를 달래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무엇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자존권인 생리대 하나를 구하기 힘들어 극단의 선택을 하고야 만다.

 

'인간' 그리고 인간을 품지 않는 체재
복지 상담 센터의 벽에 나, 다이엘 블레이크라 대문짝만하게 쓰며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주장했던 다니엘, 영화를 보며 관객이 도달하게 되는 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의 두 가지 물음이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다니엘이 주장하는 바, '인간으로서의 존엄'. 영화 속 다니엘과 케이티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은 너무도 기본적인 인간의 정의라 그래서 관객을 당혹스럽게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끄집어 내지 않아도, 성실하게 일했던 사람으로서의 노년의 권리, 그리고 엄마로서, 여성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에 대한 선언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엄정하게 세운다. 

하지만 그런 선언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딛고 사는 이 세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성실하게 일했던 노동자, 두 아이의 엄마, 꿈을 가진 여성을 전혀 품어내지 않는 '인간적이지 않는'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 속 불통의 시스템으로 드러낸 복지의 축소와 왜곡으로 결과된 영국 사회를 통해 드러난 신자유주의라는 제도의 비인간성이다. 영화는 산업사회의 직종인 목수가,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을 지닌 현재 사회 시스템에 적응치 못하는 모습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무용화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속 현실은 현재 영국에서 진행중인 복지의 축소와 그로 인한 복지 사각 지대에서 가난에 몰린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의 삶이지만, 결국 그 본질은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 논리가 국가를 통해 시스템화되어 드러나며 인간의 기본권조차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즉 다니엘의 무너져버린 자존감, 빼앗긴 케이티의 꿈과 생존권은 그저 '인간'이라는 보편적 정의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신자유주의 체제 속 국가가 인간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고발'로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즉 다니엘의 체제 밖 방기는 그가 벽에 자신의 주장을 알릴 때 강력하게 호응했던 거리의 사람들에게 보여지듯이 영국이란 사회 일반의 현실이며, 이는 다니엘이란 사람의 부적응이나 케이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체제 하 영국 사회에서 보편화된 '인간 상실'의 현실이며, 그 체재가 인간을 다루고 있는 방식의 보편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 예전 <빌리 엘리어트> 속 노동 운동을 하던 아버지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복지 수당조차 빼앗기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산업 사회 속 노동 역군으로 그들의 한 표가 소중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커서와 마우스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제재 대상으로 치부되어진다. 시스템은 메뉴얼이란 이름으로 '복지'란 미명아래, 그들의 '생존권'을 말살하고 있는 현장이다. 그들은 애써 노력하여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란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도록 봉사해지만, 정작 이제 늙은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체제 부적응이란 빨간 줄이다. 이민자인듯한 케이티와 그들의 자녀에 대한 냉혹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발전이나, 발달이란 미명하에 벌어지는 '노동'과 '인간'의 방기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다니엘의 처지를 안타까워할 깜냥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최소한의 자존을 위해 노력했던 다니엘에게는 그의 심장 이상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진단서를 끊어주는 무상 의료 시스템조차 우리에게는 없으며, 그 불통의 복지 시스템조차 감지덕지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도 케이티는 찾아갈 무료 급식소라도 있지 않던가. 영화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전율은 체제와 자본 사이 그 어디선가 잃어가던 우리 자신 인간적 자존의 부끄러운 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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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2.15 16:27

내내 영화를 지배했던 두 명의 엄마, 하지만 결국 한 명의 엄마를 우리 사회는 품지 못했다. 그 엄마가 '낙화'처럼 져버리고, 남은 또 한 명의 엄마, 힘겨운 걸음걸이를 재촉하여 아이를 만나러 간다. 혹시나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아이 앞에서 '엄마야'라고 울먹이는 엄마, 다행히 아기는 엄마를 잊지 않았다. '엄마~'라며 달려오는 아이. 그런데 서비스 영상같은 장면을 보며 던져지는 물음, 저 엄마는 과연 이후 자신의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사건이 나기 전에도 '엄마의 무능력'을 들어 엄마로부터 아이를 뺏으려했던 법과 시집이 과연 저 애처로운 모녀를 이후에 용인할까? 보장할 수 없다. 영화에서 사라진 건 한 명의 엄마였지만, 남은 한 명의 엄마조차 그 '모성'을 보존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미씽; 사라진 여자>가 그리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출산 장려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자', 한 지역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에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국가 경쟁력이 되는 현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예산을 짤 때마다 지하철의 임부 보호용 분홍빛 좌석처럼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출산과 관련된 정책들, 그리고 모모 시와 군이 '우수'한 정책을 펼쳤고, 출산율이 1위를 했다는 홍보성 기사 뒤로, 실제 대한민국 모성의 현실 <미씽; 사라진 여자>는 그려낸다. 




우리 아가, 
항상 고운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엄마가 지켜줄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가로 만들어 줄게.
엄마가 그렇게 할거야. -한매의 자장가 

엄마가 지켜줄게.
집에 뛰어들어와 허겁지겁 컴퓨터를 켜고 못다한 작업을 마저 하는 지선(엄지원 분), 이혼 후 아이 양육과 생계를 위한 그녀의 일때문에 정작 자신의 아이 다은이와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아이를 돌보는 건 전적으로 조선족 유모 한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아이를 시댁으로 보내라는 법원의 명령.

법원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관객은 지선의 정신없는 생활을 보며, '얘가 니가 엄마인 줄은 아니?'라는 남편의 다그침이 아니더라도 지선의 모성 자격에 의문이 간다. 과연 저렇게 바쁜데 아이를 돌볼 수가 있어? 라고. 그리고 그런 관객의 의혹에 답이라도 하듯, 지선은 아이가 없어지고 난 그 밤이 지나서야 아이와 보모 한매의 부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관객은 냉정한 시선처럼 지선에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법과 사회를 상대로 엄마 지선의 아이찾기 추격전. 

지선이 다인과 한매를 찾아나선 그 순간부터 드러나는 한매의 진짜 모습, 이름부터 알 수 없는 조선족 여인, 아파트 단지에서 알게된 한매는 먼저 보모를 내쫓고, 아이에게 상해를 입힌 의문의 여인이며, 조선족 거리에서 찾아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한 어리숙한 조선족 여자, 그리고 충청도 시골에서 돈을 받고 팔려와 씨받이가 된 보호받지 못한 이주 여성이자, 결국은 아픈 자신의 아이를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써도 지켜내지 못한 엄마였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병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다 잠들 수 있는 자장가, 엄마가 지켜줄게를 끊임없이 불러대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 대신 남의 아이에게 그 노래를 불러줘야 하는 슬프고도 잔인한 모성. 또 한 명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범죄자가 되기를 서슴치 않고, 기꺼이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치않는 지선의 물불가리지 않는 행보와 겹쳐지며, 영화는 적나라하게 우리 사회 '보호받지 못한 모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보호받지 못하는 모성, 그래서 무모해지는 모성
지선은 엘리트 여성이다. 방송국 외주업체에서 일하는 남보기에는 그럴 듯한 직업을 가진. 하지만 그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이혼'이라는 제도로 통과하는 순간, 그녀의 모성은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무관심한 남편과 핏줄에 집착하는 시어머니는 아이를 보살필 수 없는 그녀의 경제적 능력과 현실적 상황을 들어 아이를 빼앗아 오려고 할 뿐이다. 그녀가 하는 일 속에서 그녀는 '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일 뿐, 엄마인 존재는 거추장스럽고 무능력에 방점을 찍은 캐릭터로 작동할 뿐이다. 그런 무배려의 사회적 조건에서 맹목적으로 그래서 더더욱 모성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궁색하게 만들면서 지선은 아이를 지키려 말 그래도 '애쓴다'.

한매도 마찬가지다. 돈값을 하라는 시어머니, 학대를 일삼는 남편, 아이를 지키려하지만 나지막한 자장가말고는 해줄것이 없다.,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한매의 자장가처럼, 사회 속 그럴싸한 직업군의 여성이든,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여지지 않는 이주 여성이든 그들이 '모성'으로만 존재할 때, 사회는 그녀들에게 냉혹하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모성'이라는 존재만으로 호모 사케르(인간 사회내에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즉 사회는 '출산'을 위해 모성을 장려하지만, 정작 모성으로서의 그들의 존재나, 모성으로서 그들이 자신의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 전혀 배려하거나 보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심지어 그 '모성'이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건. '가정'이라는 울타리조차 허울뿐인 것을 고발한다. 

결국 21세기의 대한민국, 국가 경쟁력을 위해 출산이 장려되고, 해마다 출산율이 늘었네 어쩧네 하며 홍보성 기사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모성은 모성으로서의 자신의 숙명과 자신이 낳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법의 경계를 넘으며 무모해질 수 밖에 없음을 영화는 증명한다. 

물론 그럼에도 모성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보호받지 못한 한매와 달리, 맹목적으로 아이를 찾기 위해 달려들었던 지선의 모성은 법적 구조 속으로 포용된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 구조가 끝내 지선의 모성을 보호할 지는 미지수다. 



모성 연대의 가능성
영화 내내 한매와 자신의 아이를 맹목적으로 찾아나섰던 지선은 한매의 행적 속에서 자신과 같은 모성을 발견하고 흔들린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고향으로 향하던 한매를 향해, 자신이 희생양이 되겠다 자처한다. 두 맹목적 모성이 맞부닥치는 장면, 그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회를 향해 잔인해졌던 한매의 모성은 결국 또 다른 모성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지선은, 한매의 손을 잡지만 끝내 한매는 그 손을 뿌리치고 식탁보을 부여안고 스스로 사라져간다.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한때 놀이터 그네에서 사이좋게 앉아서 한담을 나누었던 시절의 두 사람, 그래서 지선은 기꺼이 한매의 모성을 이해하지만, 이미 모성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한매는 그걸 거부한다. 사회적 보호가 기능하지 않는 상황에서 모성의 연대가 취약할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들의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이 낳은 모성성의 결과를 그 한 장면은 처연하게 상징한다. 


여성 감독에 의한 맹목적 모성, 그리고 주연 배우의 헌신적 열연이라는 점에서 <미씽; 사라진 여자>는 올해 개봉한 손예진 주연의 <비밀은 없다>를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모두 모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배려가 없는가를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그러기에 영화 속 모성들은 스스로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다. 덕분에 두 영화 속 손예진, 엄지원, 공효진은 이 영화를 통해 모성을 열연하여 배우로서의 영역을 확장해 낸다. 다만 <비밀은 없다>가 감독의 스타일로 인해 주제 의식이 산화된 반면, <미씽; 사라진 여자>가 보다 익숙한 설정과 상황에의 집중으로 관객들이 주제에 익숙하게 공감하는 대중적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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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2.08 12:59

글을 쓰기에 앞서 밝혀둘 것이 있다. 제목이 '당신의 그 어떤 모습'에, '박사모'가 사랑하는 그 어떤 분(?)의 '분노가 치밀어오르게 만드는' 모습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일단 그 어떤 분의 모습이 '주체'적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몹시도 낮거니와, 그 어떤 모습으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고통'을 받게 만드는 그런 이기적인 모습은 이 리뷰의 주제 의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모습'이란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내려 하는 노력으로, 그 분(하마터먼 평소 하듯이 ㄴ자로 시작할뻔한)과는 전혀 무관하다. 


일찌기 <아엠샘>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거의 '국민 아역'급으로 등장했던 다코타 패닝의 이쁜 동생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엘르 패닝, 하지만 어느덧 언니보다 더 자주 작품을 들고 우리나라를 찾는 배우가 되었다. 그녀의 2015년작 <어바웃 레이>는 또 한 편의 '퀴어' 영화처럼 소개된다. 하지만, 성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어바웃 레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가족간의 관용과 이해, 나아가 인간의 포용에 대한 것이다. '가족'이 여전히 절대 선으로 자리잡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레이'의 가족들이 부딪치는 문제를 통해 진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볼 만한 영화인 것이다. 



레즈비언 할머니, 싱글맘 엄마, 성전환 손녀?
영화는 제목처럼 '레이(앨르 패닝 분)'의 문제로 시작한다. 아직 보호자의 도움이 필요한 16세 소년? 소녀? 레이 혹은 아만다는 헷갈리는 그녀의 이름처럼 혼돈스런 성 정체성을 가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인 레이는 헷갈리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치마 입기를 부끄러워했고, 지금도 가슴에 브래지어 대신 압박 붕대를 칭칭 감고 다니며 인형 놀이 대신, 카레이서, 우주 비행사를 꿈꿨던 아이는 이제 단호하게 자신의 성을 '남성'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16살 어릴 적 이름이었던 여성성이 분명한 아만다라는 이름 대신 레이임을 주장하는 이 미성년이 성정체성의 변화를 가지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성전환 요법을 위해 함께 상담을 하러 간 사람들은 엄마 매기(나오미 왓츠 분), 할머니 돌리(수잔 서랜든 분), 그리고 할머니의 연인인 또 한 사람의 여성 프란시스(린다 에몬드 분)였다. 할머니의 연인을 제외한 모녀 삼대는 레이를 위해 기꺼이 상담에 응했지만, 막상 동의에 이르러 갈등을 겪는다. 

평생을 레즈비언의 권리를 위해 싸워왔던 할머니지만 막상 여성에서 남성으로 되려는 레이에게 그냥 레즈비언으로 살면 안되냐며 반문한다. 싱글맘인 엄마 매기는 자신의 성을 당당하게 선택하려는 레이가 자랑스럽다 말하지만, 막상 그 동의가 자신의 몫이 되자, 훗날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로 모를 레이가 그 책임을 엄마에게 물으면 어쩔까 고뇌한다. 

레이의 성 선택, 그에 대한 어른들의 동의로 비롯된 문제는 영화의 시선을 레이와 가족의 문제에서, 어쩐지 아직도 레이보다도 덜 주체적이어 보이는 싱글맘 매기로 옮긴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다. 싱글맘이지만 엄마 혼자 레이를 만든 건 아닌 터, 또 다른 보호자인 법적인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레이의 아버지를 찾아나선 매기, 여기서 비로소 <어바웃 레이>의 속살이 드러난다.

어릴 적부터 홀로 자신을 키우는 엄마와 레즈비언인 할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삶의 혼돈을 느꼈던 레이는 그 혼돈으로 부터 스스로 내린 삶의 결단이 서둘러 남성으로 성전환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단호한 결정을 위해 찾아간 생부, 그러나 거기서 마주한 것은 자신의 보호자라 생각했던 엄마의 쉽게 수용할 수 없는 과거, 그로 인한 자신의 탄생과 외로운 성장이다. 이는 성의 결정에 앞선 레이의 숨겨진 분노를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늘 삶 앞에서 도망치듯 살아온 매기가 어쩔 수 없이 도망치고 싶었던 삶을 직시하게 된다. 

정체성의 변화를 요구하는 딸, 지난 과오를 쉽게 수용할 수 없는 엄마, 그리고 한때 그 누구보다 전투적이었지만 이젠 그 모든 것에 '잔소리쟁이'나, '참견꾼'이 되어가는 할머니, 이 평범하지 않은 가족 구성원의 사연은 일찌기 다짜고짜 스무 살 넘은 애인을 집에 데려다 놓은 남동생이 등장하는 우리 영화 <가족의 탄생(2006)>이나, 쪽팔리는 가족 구성원의 사연을 다룬 <좋지 아니한가(2007)>와 콩가루 집안의 더 콩가루같은 스토리였던<고령화 가족(2013)>과  유사한 가족 문제이다.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쉽게 용인되어 지지 않는 성과 관계의 문제들을 '가족'이라는 장을 통해 담론화시키는 것이다. 



가족의 이름으로 
그저 남성이냐 여성이냐 선택의 문제가 심각했던 레이네 가족의 문제는 이제 형과 동거하며 그 동생의 아이를 낳게 되어버린 매기의 문제에 이르면 대책이 없어져 버린다. 하지만 그 대책없음을 다시 보면, 여전히 자신을 마주하기 두려웠다는 매기는 그 상황에서도 스스로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은 레이를 낳은 것이라 하듯, 레이를 낳고 레이의 엄마로 성실히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서야 매기와 레이 모녀를 방출(?)하고자 하는 할머니 돌리 역시 그런 매기를 품으며, 이젠 과보호가 되었을 지언정 이 모녀 삼대의 보호자로 든든하게 자리매김해왔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훈훈한 가족' 영화처럼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막판의 급격한 화해 모드가 가능한 것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건 엄마로써, 할머니로써 성실했던 그녀들의 삶으로 인해서이다. 그리고 그 '성실'함에는 아만다가 레이가 되어도, 매기가 막장극의 주인공이 되어도 내 손녀와 내 딸로, 그리고 내 엄마와 할머니로써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관계의 성실함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영화는 우리 영화 속 가정의 남보다 못한 아귀 다툼은 없다. 대신 몸부림치고 혼란스러워할 때도 책임지고 부등켜 안는 '가족'이 대신한다. 그것이 싱글맘이든, 레즈비언 부부이건 말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어바웃 레이>는 '가족'으로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레이의 성 정체성으로 인한 퀴어 영화가 아니라, 평생을 레즈비언으로 살아오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 당당했던 그래서 사고친 딸도, 이제 레즈비언 대신 남성을 선택하는 손녀조차 수용하는 돌리와 그녀의 연인이 보여준 노년의 모습으로 '퀴어' 영화이고, 딸의 문제를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이제서야 엄마로써, 한 사람으로 당당해지는 매기의 여성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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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2.0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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