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개의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일본 영화는 굵직굵직한 현재사의 궤적을 다루거나,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우리 나라 영화에 비하면 '미시적'이다. 대부분 단막극 정도의 소재로 한 개인사의 문제에 천착해 들어간다. 그래서 '심심하다(?)'. 그런데 그 '심심한 영화 속에 빠져들다 보면 묘하게도 사람 사는 맛이 느껴진다. 두 시간 여의 상영 시간이 종료되고 나면, 괜시리 '사는 게 뭘까?'란 자문을 하게 된다. 


아쿠타가와 상에 5번이나 노미네이트되었던 소설가 사토 야스시는 전업작가로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인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새로운 모색을 하기 위해 직업 훈련 학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전직은 실패했다. 그가 새 직업을 구하는 대신, 당시의 경험을 소설 <황금의 옷>으로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토 야스시는 <카이탄 시의 풍경>, <그곳에만 빛난다>에 이어 <황금의 옷>으로 하코다테 3부작을 완성했다. 그리고 전작들이 영화화된 것처럼 <황금의 옷>도 영화화되었다. 현재 개봉중인 <오버 더 펜스>가 그것이다. 

이 3부작은 그저 하코다테가 배경이라는 이유만이라면 아쉽다. 카이탄 조선소가 축소되면서 일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 사람들을 그린 <카이탄 시의 풍경>, 자신에게 닥친 뜻하지 않은 뜻하지 않은 운명으로 헤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곳에서만 빛난다>처럼, 모두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을 놓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상실'과 '치유'의 3부작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정의다 싶다. 

무심한 남자와 이상한 여자의 만남
그렇듯 <오버 더 펜스>도 가족과도 인연을 끊은 채 도시에서 돌아와 직업 훈련 학교를 다니는 한 남자 시라이와(오다기리 죠 분)로 시작된다. 직업 훈련 학교에 다니지만 그가 딱히 정말 직업 훈련에 열의를 가지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렇다고 딱히 대놓고 훈련 과정을 방기하지도 않는다. 마치 공기처럼 학교를 흘러다니다, 학교가 마치고 동료들의 한 잔도 마다하고 도시락과 맥주를 사서, 느릿하게 자전거로 짐도 풀지 않은 그의 집에 돌아와 검은 바다를 보며 밤을 보낸다. 

그렇게 그 어느 것에도 무심하던 그가 웃었다. 도시락을 사들고 나오다 마주친 남녀, 여자는 남자에게 '애정'을 운운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타조의 모습을 흉내낸다. 대로에서 마치 전위 예술같은 동작으로 실감나는 새의 소리까지 구현하며. 동행한 남자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질겁하지만, 시라이와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그의 미소를 그녀가 보았다. 

무심한 남자 시라이와와 이상한 여자 사토시(아오이 유우 분)의 인연은 뜻밖의 곳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뜻밖의 인연은 더 뜻밖의 하룻밤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관심과 끌림으로 시작된 하룻밤은 뜻밖의 봉변과 당혹스러움으로 마무리된다. 세상에 가장 무심한 남자 시라이와가 만난 여자는 남들이 쉬운 여자란 평판과 달리 여리디 여린 유리같은 여자였던 것이다. 

'다중'이 아니라 홀로 고립되어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경영자의 고독이 오늘날의 생산 양식을 특징짓는다. (중략) 신자유주의 성과 사회에서는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의 의문을 제기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풀꽃같은 사람들
시라이와는 돜쿄에서 대기업까지 다니던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아내와 아이도 있었다. 단지 그에게 부족한 것이라면 '시간'뿐. 일에 너무 바빴던 그는 미처 가정을 돌볼 새가 없었다. 그 부족한 '시간'이 그와 그의 가족에게 뜻밖의 '사건'을 안겼고, 그 '사건'은 그로 하여금 도시에서 일군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마치 세상과 창을 하나 사이에 둔 것처럼 그렇게 직업 훈련 학교를 핑계로 '시간'을 흘러 떠다니고 있었다. 

차마 가족조차도 조심스러워 하는 그에게 다짜고짜 욕을 하며 니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한 술 더 뜬다. 그가 잘못했는데 자기가 더 펄펄 날뛰질 않나, 달려간 그의 앞에서 동물원을 한바탕 뒤집으며 소란을 피우질않나. 가장 정신없이, 가장 자신을 놓고 살아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녀는 '삶의 과민증' 환자였다. 마치 햇빛만 비춰도 벌개지는 햇빛 알레르기처럼 그녀는 삶의 사소한 자극조차도 버거워하며 자신을 '가학'한다. 영화는 시라이와와 달리 사토시가 남자 이름을 가지고 낮에는 유원지 알바에 밤엔 술집 여종원업원으로 일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쉽게 자신을 못견뎌하는 그녀의 행동만으로도 지나온 그녀의 삶이 순탄치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에 벽을 친 남자와 세상을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여자가 '남자'와 '여자'로 만나게 되며, 두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을 두르고 있던 '펜스'를 넘을 용기를 얻고 결국 자신을 두른 그것을 넘는다. 남자는 상처받았다며 웅크리고 있던 자신의 삶을 직시하게 되고, 여자는 그런 남자로부터 '최악이 아니라'는 위로를 얻는다. '사랑'이다. 

<오버 더 펜스>에는 시라이와만이 아니라, 그가 거리를 두었던 직업 훈련 학교 동료들의 삶도 등장한다. 그저 교관의 잔소리 대상이었던 그들, 하지만 시라이와와 사토시의 사랑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가듯, 그저 멀뚱멀뚱 서로를 '관전'하던 이들이 '소프트볼' 시합 준비를 하며 '돈독'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를 형성해 가며, 아니 그 관계에서 튕겨져나간 인물마저, 무채색의 배경이었던 그들 역시 '시라이와'와 '사토시'처럼 저마다의 '색채'가 있는 '존중받아야 할' 삶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영화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떠올리게 한다. 시라이와도 사토시도,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핑계로 직업 훈련 학교에 모인 모두는 어쩌면 '성공'과 '경쟁'이 된 사회에서는 밀려났다 치부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이들을 결국 사랑스런 풀꽃으로 그려내며, 존재와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마치 나태주 시인의 또 다른 <풀꽃>처럼. 

풀꽃 2
이름을 알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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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3.26 00:12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작 영화 <토니 에드만>을 보고 난 후 문득 장 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이 떠올려졌다. 소설 속 챕터를 드골에서부터 시라크까지 주인공이 살아온 시대의 대통령 이름으로 대신했던 책, 그래서 주인공 폴 빌릭은 드골 시대로부터 시라크 시대까지 나고 자라고 가족을 이루며 나이들어 갔지만, 그의 삶이 그 대통령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야기. 

마치 영화 속 토니 에드만은 독일 버전의 나이든 폴 빌릭 같았다. 오랫동안 외도를 했던 아내가 헬리콥터 사고로 죽고 그의 딸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그런 상황에 대해 '속수무책'인 아버지 폴 빌릭, 물론 <토니 에드만> 속 딸은 자폐증도, 정신병원도 아니지만, 아버지인 토니 에드만이 보기엔 그에 버금가게 심각해 보이고, 그런 딸의 모습에 폴 빌릭만큼 '망연자실'해 한다. 하지만 그런 무능력해져 버린 노쇄한 가장의 모습을 넘어 <프랑스적인 삶>을 떠올리게 하는 건 바로 영화 속 아버지와 딸이라는 부녀의 갈등이 결국 아버지의 세대와 딸의 세대라는 시대적 충돌을 영화가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 개인의 삶이라는 것조차도 결국은 '시대'라는 배경 속에서만 그 형상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암묵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피동적으로 규정되어진다면 '인간'이겠는가? <토니 에드만>의 미덕은 그런 '피동성'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어설픈 토니 에드만의 부정(父情)에서 비롯된, '그럼에도'에 있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폴 블릭과 달리, <토니 에드만>의 아버지는 대책없이 적극적으로 딸의 인생에 뛰어들고, 그것이 '페이소스'가 담뿍 담긴 이 시대의 불랙코미디가 되었다. 그리고 토니 에드만의  '그럼에도'는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 함몰되어가는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이기도 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 놓고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기보다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살짝 이상한 아버지 토니와, 너무나도 멀쩡해서 문제인 딸 이네스 
영화가 시작되고 아버지 빈프리드 의 집에 찾아온 택배 기사, 하지만 그 택배 기사를 맞은 아버지의 행동은 어딘가 영 '정상적'이지 않다. 다짜고짜 틀니를 끼고 가발에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한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척하며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퇴임하는 교장 선생님을 위한 아버지의 지도 아래 마련된 학생들의 공연을 보면 그런 의심은 한결 짙어진다. 

굳이 이상한 가발이나 틀니를 끼지 않아도 종종 가슴에 찬 심장 박동기가 울리는 소리, 다듬어지지 않은 추레한 외모,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유용함'이 사라진 듯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가 이혼한 아내의 집에서 오랜만에 딸과 조우한다. 

그런데 아프신 할머니를 보러 갈 시간조차 없다는 딸은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눈도 마주칠 시간이 없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다. 그런 딸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버지,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 아버지가 그 '지그시'의 선을 넘어 서면서 부터이다. 

딸은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조차 시간이 없다며 비서를 대신해 응대할 정도로 사무적이다. 그러던 딸이 아버지가 보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는 반응을 한다. 마치 사람이 죽어나가도 무심히 거리를 지나는 현대인들이 몸개그에 관심을 보이듯. 더구나 그 아버지의 해프닝은 이제 막 체결을 앞두고 거기에 온 신경을 쏟는 딸의 빈틈없는 일상을 자꾸 헤집고 들어오며 불편하게 한다. 심지어 한바탕 퍼부은 딸과 헤어진 그가 예의 틀니와 가발을 뒤집어 쓰고 토니 에드만이라며 그녀의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영화 처음부터 보여준 아버지의 '코미디'는 사실 하나도 웃기지 않는다. 오히려 보고 있노라면 그의 코믹한 설정은 어쩐지 불편하다. 심지어 그가 줏어섬기는 거짓말들은 어처구니없다. 그런데 그 기묘한 설정과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틈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딸과도, 딸이 계약하고자 했던 대표와도, 딸의 주변 사람들과도. 영화 속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이젠 뒤켠으로 밀쳐진 세대이고, 그 중에서도 외양으로 보면 가장 뒤쳐져있어 보이지만, 그런 자신의 처지를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꼰대'스러움 대신에, 마치 파티에 온 피에로처럼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세상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 모습이 우리나라의 일부 어르신들이 보이는 '어처구니'없음과 다르게 또 다른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런 아버지가 애써 거짓말까지 해대며 만들어 내는 '실소의 공간'을 빽빽히 채워가는 건 오늘날 현대인의 전형이라고도 할 딸의 삶이다. 현대적 거간꾼이라고도 하는 루마니아와 독일 기업간의 체결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인 이네스는 계약의 성공을 위해서 루마니아 기업의 집단 해고 정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과 계약하면 자신들이 나서서 '해고'를 해주니 좋다는 식이다. 가족간의 관계도, 동료나 부하 직원들과의 문제도,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루마니아 라는 나라의 처지도 그 모든 것은 그녀의 '계약 성공'이라는 블랙홀 안에 무기력하게 빨려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헤집어 놓은 틈은 이런 '성공'만을 향해 다친 발톱을 치료하는 대신 기꺼이 그 고통조차 이겨내며 하이힐을 신는 딸의 삶이다. 아버지의 해프닝은 영화 중반까지는 내내 불편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해프닝은 철갑을 두른 듯한 딸의 일상에 조금씩 틈을 만들어 간다. 아버지를 보낸 딸은 그녀에게도 '눈물'이 아직 존재함을 스스로 시인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아버지와 함께 간 낯선 루마니아 가정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The greatest of all'을 열창하고 만다. 이제는 잊혀진 어린 시절 그 언젠가 아버지의 반주에 맞춰 불렀던 그때처럼. 그리고, 자신을 옭죄였던 그 꽉조인 옷과 신발을 훌훌 벗어던진 채 동료들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모두 영웅을 찾고 있죠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 필요한거예요
전 저를 채워줄 사람을 찾지 못했죠
세상이란 외로운 곳이에요
그래서 전 저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 맹세했죠
누군가의 그림자 속을 걷진 않겠다고
(중략)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예요

성공적인 삶, 그리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질문
이네스가 절규하듯 부른 ''The greatest of all'은 이네스 세대의 절규다. 아버지 세대가 일구어 놓았다는 세상이 그녀들에게 물려준 건, '성공,과 경쟁, 자신들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북받침을 참지 못했듯이, 자신의 삶을 살아왔다던 난, 과연 내 자신을 사랑하는 걸까? 라는 질문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퇴물같은 아버지가 던진 질문도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가 딸에게로 여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오랫동안 키워오던 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늙어서 움직이기조차 힘든 개, 그 개를 보고 어머니는 이제 그만 안락사를 시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어머니도 개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 아버지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처치 곤란 아버지와 함께 한 딸과의 여정에서 비로소 그 진의가 드러난다. 정리 해고를 위해 방문한 루마니아의 공장, '경영 합리화'를 고민하기 위해 방문한 그곳에서 아버지는 살아숨쉬는 인간으로서의 루마니아 노동자와 그들의 삶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을 발견하듯, 아버지는 딸에게서도 그런 걸 되찾아주고자 역부족인 노력을 시도한 것이다. 



토니 에드만이 된 아버지는 마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정의를 되묻는 듯하다. 일찌기 요한 하위징하는 '시계'의 발명과 함께 중세의 시간 속에서 자유롭게 놀이하던 인간은 '인간적 삶'을 빼앗기고 '시간'이 지배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가속도'가 붙어, 인간에게 그나마 남겨져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미덕' 조차도 '합리'와 '산업'이라는 미명 하에 빼앗아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영화는 질문한다. 털북숭이 루마니아 괴물이 된 아버지와 딸의 포옹이 뭉클했다면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얻었다.  


영화를 보고나니 문득 저런 아버지를 가진다는 것이 부러웠다. 이제는 세상이 퇴물이라 불러도 자신이 살아온 세상과 가치관에 대한 믿음이 당당한, 아,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 당당한 어르신들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반문하게 된다. 그 분들은 진정 당당해서 저러는 것일까? 오히려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 아닐까?라고. 자신의 세대를 허투로 살아오지 않은 아버지 세대의 당당함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토니 에드만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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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3.21 16:00

14일 영화 <해빙>이 누적 관객수 총 116만4966명으로 손익 분기점을 돌파했다. 꾸준히 박스 오피스 3위를 유지해왔던 소기의 성과다. 무엇보다 반가운 점은 '반성'와 '회의'의 기조를 가진 '스릴러' 장르 영화가 모처럼 '손익 분기점'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2016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그리고 2017의 <싱글 라이더>까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반전'을 곁들인 '스릴러', '미스터리'를 통해 접근해 봤지만 결국 모두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는데 실패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실험적인 장르적 접근이 주제를 괴리시켰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지배적인 타자에 대한 백안시가 아예 접근조차 봉쇄하기도 했다. 그리고 '반전'이라는 떡밥이 영화를 집어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핑계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의 부진을 낳은 가장 기본적인 요인은 <어쩌다 어른>에서 사회심리학자 하태균씨가 지적한 이른바 '비현실적 낙관주의'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가능성이나 현실과 상관없이 '낙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픈 심리가 현실을 냉정히 재단하고 비판하며 되돌아보는 '실존'적 기조의 영화들에 대한 '저어'하는 기조를 형성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그래서 현실은 불가능해도 '통쾌하게' '한 방' 치고 보는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흥행'의 순위를 달린다. 덕분에 평론가들이 보기엔 작품적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영화들이 인기를 얻는다. 마치 시청률 30%의 고지를 넘보는 (닐슨 코리아 수도권 기준 화요일 27.1%) <피고인>처럼 현실적으로 따지면 엉성한 구성이지만 탈옥까지 감행하며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의 속시원한 활약을 대체적으로 선호하는 것이다. 

<해빙>과 <싱글 라이더>의 같고도 다른 길 
그런 '지배적인 한국인의 사회심리'에도 불구하고 <해빙>이 꾸준히 박스 오피스 3위를 지키며 손익 분기점을 넘었다는 지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렇다면 <해빙>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해빙>과 얼마전 개봉한 <싱글 라이더>는 공교롭게도 '가장의 몰락'을 다룬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반전'을 통해 '가장'의 실체를 폭로한다. 그런 점에서 두 영화는 모두 '반성'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반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두 영화의 길은 달라진다. 



<싱글 라이더>가 한국에서 출세와 성공에 독주하던 가장 강재훈(이병훈 분)이 이제 그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 홀로 호주에 남은 아내와 아이의 삶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며 영화는 철저히 삶을 반추하는 자세를 지닌다. 그리고 그 '반추'하는 시선은 '반전'을 통해 경악과 충격 대신, 안타까움으로, 그리고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진짜 이 영화에서 아쉬운 것은 '반전'의 용도이다. '반전'이 남긴 문제 의식이 해프닝으로 덮여버렸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해빙>의 반전은 이 영화의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다. 영화 <해빙>은 홀로 아직 개발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신도시로 대중 교통 수단인 버스를 이용해서 떠나는 가장 승훈(조진웅 분)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한때는 강남에서 병원을 개업했지만 이제는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도시의 의원에서 하루 종일 내시경 검사나 해야 하는 처지의 '고용'인이 된 의사. 하지만 영화는 미처 그의 추레한 처지에 이입하기도 전에 그가 세든 빌라 1층의 정육점 식당 주인 성근(김대명 분)과 그의 아버지 정노인(신구 분)의 이상한 행동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승훈과 성근, 두 가장의 섬뜩한 대결 
내시경 수술 중에 자신의 살인 행적을 고백한 정노인, 그 노인의 말에 홀려 승훈은 정육점 냉동고에 있을지도 모를 시신의 '머리'에 집착한다. 그리고 영화는 중반까지 의심하는 승훈과 그런 승훈을 더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성근의 대결 구도로 진행된다. 이런 주된 갈등으로 인해 승훈의 이혼이나, 아들의 양육, 그리고 그를 찾아온 아내의 실종 등 주인공의 실종적 문제들은이 갈등의 회오리 안에 휩쓸려 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실종되고 의심이 가는 성근 부자 대신 승훈이 경찰의 의심을 받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은 '승훈'의 관점이 되어 영화를 따라간다. 덕분에 그의 몰락과 이후에 드러나는 진실은 충격을 완화시킨다. 심지어 마지막 추가 영상같은 마무리까지. 영화는 승훈이 의심을 받는 지점에 이르러 승훈의 의심을 밀고가는 대신, 암전의 효과를 환기시킨다. 문득 그의 방문 앞에서 멈춰지면 어두어지는 화면을 통해 관객은 문득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것의 진실을 되짚게 된다. 그리고 드러나는 진실, 하지만 관객은 충격보다는 보여지는 진실이 '프레임'의 문제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폭발하는 무너진 중산층 가장을 열연하는 조진웅의 연기, 그리고 새로운 프레임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설명'하는 영화로 인해 허겁지겁 다시 새로운 서사 속으로 빠져든다. 



영화는 묘하다. <해빙>을 통해 드러나는 건, 성공이란 환상이 풀려난 중산층 가장의 처절한 몰락의 생태계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몰락'의 생태계에 던져진 가장의 추레한 모습을, 그와 대비되는 또 다른 외국인 아내를 맞이하는 등 그와는 다른 계급의, 또 다른 가장의 모습을 통해 장식한다. 어쩌면 싱글라이더의 강재훈과 승훈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보인 몰락의 행로가 주는 심리적 충격파는 중산층 가장 전체의 대변자인듯한 강재훈과 그로 부터 파기된 한 비정상적 인물처럼 보이는 승훈을 통해 다른 색채를 가지고 전달된다. 또한 그의 처절한 몰락조차 마지막 성근 부자의 에필로그 등을 통해 한 줄기 '구원' 하지만 그 '구원'마저 봉쇄된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페이소스'의 여지를 남긴다. 

사실 영화 초반 이미 보여지듯이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조건에 놓인 것은 몰락한 승훈이다. 하지만 관객은 그가 여전히 번듯한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그의 의심에 동조한다. 영화 초반 간호사는 늘 긴 팔만 입는 그의 행색을 지적하지만, 그런 힌트조차도 성근의 초라한 행색에 덮여버린다. 그러면서 영화는 조진웅과 김대명의, 가장과 가장의 섬뜩한 심리 대결로 나아간다. 승훈의 처지는 난감하지만, 아버지 대에서 부터 아내를 갈아치우는 수상한 부자의 '핏빛' 직업은 더더욱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다. 이런 관객들의 '속물적' 편견에 힘입어, 영화는 순조롭게 감독이 펼쳐놓은 그물 사이로 나아간다. 

승훈의 의심조차도 유의미해지는 결말, 결국 이는 몰락한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사회의 주도적 계층이라 자부하는 화이트 칼라 계층과 그런 그들을 비웃는듯한 '전근대적인 폭력적 가부장제'의 대결이지만, 결국 이런 저런 가장들의 행태가 귀결되는 궁극적 지점은 언제든 편의적으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우리 사회 '남성주의'이다.  <싱글 라이더>와는 또 다른 방식의 '실존'에 대한 반성이자, 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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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3.15 15:49

스포'를 밟았다. 마치 <식스센스>처럼 <싱글 라이더>는 스포가 다했다며 유포됐다. 그래서일까? 고전 중이다. (영진위 추산 2월 27일 기준 287,987 명) 하지만 이 낮은 관객 수치를 놓고 과연 이 영화를 망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런(?) 영화에 대해 여전히 높은 장벽을 가진 우리의 영화적 관람 문화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싱글 라이더가 있어서 다행이야 
<싱글 라이더>의 감독은 이주영이다. 이 감독은 2012년 미쟝센 단편 영화제를 통해 화려하게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베스트 무빙 셀프 포트레이트상) 그리고 <싱글 라이더>가 이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그런데 이 첫 장편 영화가 완성되기 까지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8개월간 이창동 감독과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의 최신 작은 2010년 <시>이다. <시>는 영진위 추산 최종 관객 수가 218,898 명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 관을 내리지 않은 <싱글 라이더>의 이주영 감독이 스승인 이창동 감독을 관객수로 넘어선 셈이다. 우리는 이창동 감독의 <시>를 두고, 그 누구도 쉽게 '망한' 영화라 말하지 않는다. 분명 관객 수로 보면 '처참'할 지경이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2010년 그 해 한국 영화계가 이 영화를 가질 수 있어 영광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다. <싱글 라이더>는 '영광'까지는 아니지만, 2017년 그래도 한국 영화계가 이런 영화를 가질 수 있어 다행이라 말하고 싶다. 



최근 그래도 선전하고 있는 <재심>은 10년간 억울하게 감옥 생활을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내내 분명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적나라한 진실'은 그래도 마지막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 '재심' 법정을 통해 '보상'을 받는다. 대부분의 한국 영화들이 그렇다. 2016년 <곡성>이 예외적일 정도로 대분분의 우리 영화들은 통쾌하고 속시원하게 관객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의 흥행은 동시에 '영화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안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기존 한국 영화들이 해왔던 답의 정반대 편에 <싱글 라이더>가 있다.  tv 드라마도 골치아픈 것은 딱 질색인 시대, 그 누가 돈을 내고 극장까지 와서 이 '골치아픈 이야기'를 보려 하겠는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 문화가 가진 대책없는 낙관에의 회귀라는 지배적인 조류 사이에서 '되돌아보고', '내려옴'을 이야기하는 <싱글 라이더>는 무식하게도 용감하다. 

대한민국의 그림자를 말하다 
그렇다. 영화는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화합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그토록 봉합하고 싶은 '가족'의 뒷면을, 여전히 부추키고 싶은 '청춘의 꿈' 그 이면을 서늘하게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이 길게 늘어뜨린 그림자이다. 

<싱글 라이더>에는 두 명의 방황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증권회사 지점장이었다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강재훈(이병헌 분)과 워킹 홀리데이를 온 지나(안소희 분)가 그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의 캐릭터는 상징적이다. 금권 사회 대한민국의 첨병이었던 증권회사, 그 선봉에 섰던 지점장의 중년. 그리고 청춘의 꿈을 찾아 호주로 온 젊은이. 우리 사회 대표적 두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전형적인 상징적 존재인 두 사람들을 처절하게 무너뜨린다. 부실 채권을 마구잡이로 팔아넘긴 증권회사는 그 손실을 고스란히 고객들에게 전가한다. 그리고 그 '전가'하는데 지점장인 재훈이 앞장섰다. 따지고 드는 재훈에게 던진 사장의 말, 사실은 자네도 그런 줄알면서 한 거잖아. 그저 믿고 싶지 않았을 뿐. 이 한 마디는 '돈'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말이 된다. '부도덕'한 줄 내심 알면서도, '돈'이 돤다기에 눈 질끈 감고 덤벼들었던 사람들, 그 중에서 재훈은 '운나쁘게도' 그 대열에서 탈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탈락'은 그저 직장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가진 재산, 그리고 그의 인맥 등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송두리채 날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운나쁜 사람이 있다. 지나,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88만원 세대에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에, 이제 눈을 밖으로 돌리라며 독려하는 세상, 그 독려에 걸맞에 지나는 호주로 일하러 왔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녀가 새벽부터 눈도 못뜨고 일을 하며 번 돈은 그녀가 호주에 온 동안 변화한 환율로 인해 '헐값'이 될지도 모른다. 그 한 푼이 아까워 무모한 시도를 했던 그녀, 그 청춘의 꿈은 결국 흙무더기가 되고 만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성장'과 '성공'을 담론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낳은 그림자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다하고자 했던 재훈에게 돌아온 것은 '인간적 모멸'이 담긴 따귀 세례였다. 그는 결국 '인간'으로서 자존의 한계를 견뎌내지 못한다. 호주로 아이와 함께 어학 연수를 떠난 아내가 보내온 메시지는 그에게 남겨진 어쩌면 유일한 출구조차 봉쇄한다. 

그렇게 삶에서 봉쇄된 그는 하지만 미련을 접지 못해 아내와 아이가 있는 호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만난 가족. 지난 2년동안 아내와 아이를 염두에 조차 두지 않았던 재훈, 그런 그의 무관심 속에 호주로 떠났던 아내, 아내는 그곳에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이를 만났다. 하지만 비로소 내려놓고 나서야 가족이 떠올려졌던 재훈처럼, 아내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으면서도 재훈을 염려해 이민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런 아내를 여전히 오해했던 재훈. 



가족의 주변을 떠도는 재훈과 그런 재훈의 오해와 깨달음 사이에서 보여진 가족의 모습은 '가족애'라는 말로 봉합되기에는 처연한, 그래도 '가족'이다. 이미 그들은 배우자로서 서로에 대한 '감정적 연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집착과 애착을 가진 불가사의한 존재. 재훈과 함께 떠나는 대신 자신을 찾으러 올 엄마를 기다리는 지나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내려올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라는 고은의 짧은 시로 시작된다. 그리고 재훈이 호주를 홀로 헤매이며 찾은 것은 '가족주의'라는 주제로 메꾸기에는 이미 서로 멀리 가버린 대한민국의 가족이다. 마치 재훈을 배려하여 이민을 준비했지만, 이제 이민의 배우자 란이 비워져 버린 현실처럼. 뒤늦게서야 아들이 보내온 동영상 속의 그 바닷가 절벽 위에 선 재훈은 그래서 '가족'을 내세우면서, 그걸 빌미로 각자도생에 바쁜 대한민국의 참회록이다. 그리고 느린 선율에 얹혀, 배우 이병헌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섬세하게 천착해 가는 이 참회록에 마음을 여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창동 감독의 <시>때처럼 역시나 드물다. <초록 물고기><박하사탕>과 <오아시스>가 지금이라면 흥행이 될까? 대한민국은 어디로 흘러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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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3.01 17:13

분명 '박유천'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졌을 때 '출연료'없는 '특별 출연'이라는 기사를 접했었다. 하지만 웬걸 정작 '박유천'을 내세워 늦은 개봉을 핑계댔던 <루시드 드림>은 개봉 이후에 '특별 출연'인 박유천과 관련된 기사를 쏟아냈다. 검찰에 출두했던 그 어떤 정치 경제적 인물보다 더 많은 언론이 달려갔던 박유천이기 때문이었을까? 여전히 한류 스타 박유천은 그토록 언론이 많이 오래도록 기사를 퍼부어 연예계에서 멸종을 시키려해도 '핫'해서 여전히 <루시드 드림>과 관련된 화제성이 높기 때문이었을까? 심지어 주연 배우 인터뷰 기사 제목에 조차 '박유천'이 언급되는 이 이상한 마케팅은 막상 영화를보면 이해가 된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인지'하는 설정만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이란 비교가 되었던 <루시드 드림>, 하지만 그 '어마무시한' 설정의 영화는 10만의 고지조차 버겁다(2월 27일 영진위 기준, 92672명) 물론 막상 본 영화는 그간 영화의 질적 내용과 상관없이 흥행했던 작품들에 비하면 별 하나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싶다. 아쉬운 것은 그래도 한국 영화에서 '신선한' 설정을 다룬 영화에 '홍보'와'배급'이 도와주지 않은 점이다. 막상 '망했다'고 소문난 데 비해 찾아간 영화관은 남성 관객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본 사람들은 '볼만했다'했으니까. 아니다 싶으면 재빨리 '관'이 빠져버리는 현 실정에서 '실험'이나 그냥저냑 볼만한 영화의 설 자리는 점점 더 없어질 듯하다. 

영화 <인셉션>은 타인의 머리에 들어가, 그의 꿈을 훔쳐온다는 설정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영화적 담론으로 제시한다. 그냥 쉽게 남의 머리에 들어가 꿈을 훔쳐오는 것으로 생각했던 작전은 정작 그 무의식인 '꿈'의 세계에서 자신의 무의식이 결부되며, '의식'과 '이성, '무의식'와 '감정'이란 인간의 '뇌내 세계'의 문제를 전면으로 끌어낸다. 그래서 섣부르게 <매트릭스>와 비교되었던 영화. 덕분에 '봐도 모르겠다는' 난독증의 트라우마를 남겼던 영화. 

아쉬움이 남는 한 시간 
하지만 <루시드 드림>은 지레 또 <인셉션>처럼 꿈의 미로에 빠져들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영화는 그저 아들을 잃어버린 대호(고수 분)가 아들을 잃어버린 그 날을 상기시켜 '수사'에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 충실히 작동한다. 혹시나 <인셉션>처럼 관객들이 '꿈의 미로'에 빠질까, 디스맨의 존재에서부터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두 명의 악인에 대해 의사인 소현(강혜정 분)에서부터 그 긴급한 상황의 대호까지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전혀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루시드 드림'과 관련된 설정들은 소현이 안된다고 하자, 컵 하나 깨뜨린 대호가 단박에 루시드 드림에 성공하고, 그것도 무색하게 형사에, 매점 주인까지 줄줄이 잠에 빠지며 설정의 딜레마를 쉽게 극복해 버린다. 그리고 바로 이런 '쉬운' 루시드 드림으로의 진입은 이후 수사의 딜레마와 달리, '꿈길 밖에 길이 없어'를 기대하고 들어간 관객의 김을 빠지게 하는 첫 번째 요소가 된다. 



그렇게 '쉬운 꿈길'과 함께 관객의 맥을 빠지게 만든 것은 뜻밖에도 주연들의 연기다. 주인공 대호 역을 맡은 고수는 아이를 잃기 전과 잃은 후 십 여키로의 살을 빼며 '변신'의 고군분투를 했지만, 그런 외적 변화와 상관없이 관객의 눈에 들어온 건 '언제나 그렇듯' 진지한 고수 표 연기다. 대호의 캐릭터야 그럴 수 밖에 없다 치는 상황에서 아쉬운 것은 대호의 조력자로 등장한 송방섭 형사 역의 설경구와 친구이자 의사인 소현 역의 강혜정이다. 내리 진지하고, 우직한 이들 세 사람의 연기로 채워진 전반부 한 시간여는 덕분에 유괴범의 실마리를 밝혀가는 수사 진전 과정을 단조롭고 무겁게 짖누르며 간다. '유해진'이름만으로 영화 브랜드 평판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시대에 후반 반전을 고려한 설정이라 했더라도, 차라리 설경구가, '연기로 말하자면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설경구이기에 '강철중'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악'해보이는 캐릭이 아니라, 조금 더 유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다. 그와 함께 굳이 강혜정 정도의 배우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설명'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 긴장감없는 조력자 소현의 캐릭터 역시 영화의 맥을 빠지게 만든다. 

디스 맨 박유천과 노익장 강성필 등 조연들의 활약
이렇게 답답하게 진행되던 영화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영화 개봉 후 기사의 주인공이 된 박유천이다. 그리고 박유천만큼 '특별한 출연'인 박인환이다. 



영화 초반 의문의 남자로 등장했던 디스맨, 하지만 그 의문은 친절한 소현 박사의 설명으로 주저앉는다. 하지만 뜻밖에도 굳어있던 영화가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조명철 회장을 따라간 백화점에서 마주친 꿈 속의 디스맨과의 조우이다. 덕분에 수사 드라마의 한계에 부딪쳤던 영화는 듣도보도 못한 기발한 디스맨 권용현의 존재와 캐릭터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레베루가 다르다며' 지금까지 등장한 시종일관 진지한 캐릭터들과 달리, 말많고 하지만 능력 하나는 확실하고, 비록 두 다리는 못쓰지만 자기 하나는 확실히 챙기려는 '덕후'의 캐릭터는 기존의 영화에서 보던 '덕후'와는 신선한 존재로 극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 팔딱거리는 캐릭과 함께, 그가 시도했돈 공유몽 역시 초반 디스맨의 등장만큼 비로소 '꿈길'을 따라온 맛을 느끼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실버 심부름 센터의 강성필 소장과 그 똘마니들의 등장 역시 재미를 더한다. 영화 속 가장 흥미진진했던 격투씬은 대호나 송반장이 아닌 노익장을 과시한 강성필의 한판이었다. 차라리 애초에 영화를 루시드 드림을 소재주의적으로 끌고간 유괴범 찾기가 아니라, 조력자인 척 하지만 무기력한 송반장을 중심으로 한 경찰 수사와 절차 따윈 필요없는 내공 '만랩' 실버 심부름 센터의 재야 수사 인력의 대결, 그리고 역시나 몇 장면 아닌데도 무시무시했던 조명철 회장의 비호 아래 루시드 드림 연구 센터와 덕후인 디스맨의 공유몽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갔더라면 한결 더 흥미진진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을 남기게 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절정에서 인셉션 못지 않은 cg로 꿈의 세계를 재연하며 영화를 인내해왔던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꿈 속에서 벌어지는 혈투와, 그 혈투의 결과가 꿈에 갇히는 절체절명의 상황 역시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신인 감독에게는 버거웠던 주연급 배우들의 존재감때문인지, 그저 '루시드 드림'이란 소재에 빠진 패착인지, 영화는 '루시드 드림'이란 한국 영화로썬 드문 소재를 바람이 좀 빠져버린 풍선처럼 다루고 마는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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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28 16:53

그늘'이 늘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적당히 견딜만한 햇살, 온기, 심지어 겨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쨍쨍한 햇살 아래 그늘 아래에서 숨을 돌려봤던 이라면 쉬이 그 곳의 안식을 잊을 수는 없다. 하물며, 사랑의 그늘이라면, 더더욱. 여기 사랑의 그늘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있다. 늘 자신이 편하게 쉴 그늘을 잃어버린 남자, 그는 그늘을 잃어버린 이후에야 자신의 안식처를 잃어버렸음을 세상의 땡볕 아래서 서서히 절감한다. 심지어, 그저 자신을 편히(?) 쉬어갈 곳이라 생각했던 그 그늘이 사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자신만큼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이었음을 곱씹는다. 영화 <아주 긴 변명>은 바로 그 그늘을 잃어버린 남자의 오랜 방황이다. 




대지진 이후의 상실을 다룬 또 한 편의 영화 
일본 영화계는 2011. 3.11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나뉘어진다. 3.11 대지진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에서 부터 최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너의 이름은>과 같은 애니메이션까지 일본 사회가 겪은 '사회적 상실'에 천착한다. 2016 부산 국제 영화제를 비롯하여, 벤쿠버 영화제 등에 초청된 <아주 긴 변명> 역시 이 '상실'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부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모토키 마사하루 분)이 출연한 방송을 틀어놓고 남편의 머리를 다듬어 주는 아내. 이 여유로운 일상은 곧 자기 비하를 시작으로 무례하다싶을 정도로 감정을 토해놓는 남편의 언어로 인해 파열음을 낸다. 심지어 아내가 웃으며 보던 tv까지 꺼버리는 남편.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남편이 토해놓은 감정에 눈빛은 동요하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않고 남편의 머리를 매만진다. 남편에게 둘러놓은 미용용 덮개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길을 떠나는 아내. 그런 아내가 떠나자마자 서둘러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남편, 그리고 그의 집에 찾아온 여자. 아내가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겨울 산을 오를 때 남편은 아내와 함께 있던 그 짜증스럽던 남편이 아닌, 가장 로맨틱한 남성이 되어 밀애를 즐긴다. 그리고, 그 밀애의 끝에 걸려온 전화, 아내가 죽었다. 



영화는 그렇게 엇갈리는 부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엇물렸던 일상처럼, 남편은 사고 후 만난 조사관에게 '아내'에 대해 엇박자를 짚는다. 아내의 옷차림, 행선지는 물론, 아내가 동행했던 친구의 존재조차 '무심'했던 남편, 하지만 미디어에 알려진 유명 작가답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코스프레를 그럴 듯하게 하며 장례를 치뤄낸다. 틈틈이 자신의 상실이 얼마나 세간에 관심 대상이 되는가를 확인하며. 하지만 사고 이후 가증스러울만큼 천연덕스러웠던 남편의 삶은 아내가 없이는 세탁기 하나, 전자렌지 하나 돌리지 못하는 일상으로 돌아오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서 빨리 아내를 보내고 연하의 애인과의 정사에 맘이 도망가있던 그는 정작 돌아오지 않는 아내가 돌보지 않는 일상은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무너져가는 그에게 아내의 친구 남편(다케하라 피스톨 분)이 찾아오고 그는 덥석 그의 아이들을 돌보겠다 선심을 쓴다. 

영화는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전작 <유레루(2006)>나 <우리 의사 선생님(2009)>처럼 전혀 다른 모습의 두 남자를 대비시킨다. 틈틈이 아내가 남긴 메시지를 반복 청취하며 시도때도 없이 아내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요이치, 그와 달리 아내의 사고 이후 한번도 울 수 없었던 사치오, 그 두사람이 요이치의 아이들을 매개로 '상실'을 살아낸다. 

나의 사랑하는 플라타너스여
아름답고 무성한 잎이여 
그대를 위한 운명은 반짝인다
천둥, 번개, 태풍이라 할 지라도 
그대의 아늑한 평화를 범하지 말라
사나운 갈바람도 다가와 그대를 욕하지 말라
그립고 사랑스러운 나무 그늘도 
지난 날 이렇듯 아늑하지는 않았다.


늘 사랑하는 이를 사랑했던 건 아니다. 
영화는 결혼 20년 여전히 이기적이기만 한 남편 사치오를 통해, 상실의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당신은 어땠습니까? 가족이라는 관계, 혹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얽혀진 인간 군상, 하지만 늘 그 관계가 교과서적 전형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교과서적이지 않는 인간 관계를 <아주 긴 변명>은 들여다 본다. 아내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다른 여자를 안고 있던 남자는 아내를 추모하러 간 호수에서, 자신을 남기고 죽어버린 것이 바로 형벌이라며 하늘의 아내에게 소리를 높일 정도로 차마 자신이 저지레해버린 파열된 관계를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아내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리는 요이치는 여전히 쉬이 눈물이 흐르지 않는 그에겐 또 다른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에게 '공감'의 여지를 준 건 요이치의 아들이다. 감정을 쏟아놓은 아버지, 철없는 동생 사이에서 애어른처럼 의젓한 그의 아들, 아버지에게 차마 말하지 않는 감정, 심지어 눈물을 보이는 그 아이를 보며 사치오는 자신이 둘러친 상실의 벽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돌보는 한 줄의 글을 쓰기도 힘든 일상, 어느덧 어린 여자 아이의 지시에 따라 밥도 하고, 빨래도 개는 그 일상에 사치오는 빠져드는데, 그의 매니저는 그런 그를 두고 '도피'란다. 

요이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숨가쁘게 달려가는 사치오의 그 순간 흘러나오는 '라르고'처럼 사치오가 자신의 죄책감, 자신의 상실을 들여다보는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사치오라는 인물을 '느리게' 들여다 본다. 아내의 부재를 자신에게 벌주는 것이라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아내의 털끝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문자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그의 상실은 쉬이 자신을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 '쉬이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않는 상실은,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와 그 관계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오랜 고찰로, 그리고 치유에 대한 반문으로 귀결된다. 



정작 아내 이야기만 나오던 요이치가 뻔뻔하리만치 천연덕스러웠던 사치오와 달리 시간이 흐르자 아내의 메시지를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하자, 사치오는 아내의 죽음의 그때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요이치 가족과의 시간은 사치오에게 아내의 부재를 대신할 그늘이었으며, 비겁했던 자신을 인정할 '연옥'이었던 것이다. 자신과 같았던 요이치의 아들을 돌보며, 어린 딸아이의 엄마 노릇을 하는 그 '외면'의 시간 사치오는 천천히 아내와 자신을 돌아볼 '짬'을 낸 것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쩌면 '치유'가 아닐 지도 모른다. 오히려 다친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 상처를 말끔히 낫게 만들려는 인간 세상의 조급증에 대한 반문일 수도 있다. 사치오와 아이들과 함께 바다에 간 요이치는 말한다. 아내만 있다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어쩌면 도망이고, 어쩌면 상실의 과정일지도 모를, 그 시간이 요이치와 사치오에겐 또 다른 삶의 과정이다. 그 오랜 삶의 여정을 통해, 변명에 변명을 하며 아내의 죽음과 함께 하겠다던 사치오는 비로소 자신과 아내를 들여다 보고, 그때서야 사치오 자신으로 돌아와 작가로 선다. 하지만, 그건 비로소 자신의 머리를 자를 용기를 낸 것처럼, 진짜 이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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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21 18:43

유명해져서 손석희의 <jtbc 뉴스룸>에 출연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변호사가 있다. 하지만 이미 그는 꽤 유명해져서 우리는 그를 jtbc의 <말하는 대로> 등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있다. 바로 박준영 변호사이다. 우리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피해자가 10년간 복역했던 '약촌 오거리 사건'의 재심을 성공시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부터다. 재심의 과정은<그것이 알고싶다> 등에서 이미 다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이미 알려진 사건 '영화'를 통해 더 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지만 영화 <재심>은 신문 지면의 보도, 혹은 다큐를 통해 드러난 사실의 행간 속에 깊은 진실의 울림이 있음을, '재심의 성공'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고통과 부조리한 사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하나의, 억울한 가족을 위한 재판 이야기 
<재심>은 2013년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김경미 씨의 이야기를 다룬 <또 하나의 가족>을 감독했던 김태윤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제목 '또 하나의 가족'은 대기업 삼성이 자사의 이미미메이킹을 위한 '광고'의 캐치프레이즈였다. 하지만, 영화는 전국민의 가족같은 삼성이 드리운 그늘, 반도체 산업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산재에 대해 인정보다 하지 않고 있는 비감한 현실은 김경미 씨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곡진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가족>은 영화 상영 자체가 또 하나의 '투쟁'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어둠의 한 자락을 언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든 싸움이었던 김태윤 감독은 자신을 찾아온 기막힌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의 진실을 접하고 다시 '실화'를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살인 누명을 썼다'는 억울한 진실을 '영화가 넘어서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김태윤 감독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은 <또 하나의 가족>처럼 최군 가족에게 닥친 '누명' 이상의 억울함이었다.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 최군, 하지만 최군의 감옥 생활동안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조차 잃어가는 어머니와 최군에게 근로복지 공단이 구상권을 청구했던 것이다. 살해 피해자에게 근로 복지공단이 피해자가에게 애초 청구한 금액은 4000만원이었지만 투옥된 동안 이자가 붙어 1억 4천만원으로 불어난 빛. 그리고 그런 최군의 억울한 사연에 함께 하게 된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는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김태윤 감독은 <또 하나의 가족>에서 그랬듯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국민적, 법적 권리로부터 배척된 가족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동네 다방에서 심부름이나 하며 지내는 이른바 '동네 양아치' 현우(강하늘 분)와 어머니(김해숙 분)의 억울한 가족사를 전면에 내세운다. 

엄마 손에 이끌려 남들처럼 학교를 다녀야 해서 입은 교복 옷깃을 세우고, 팔뚝의 문신을 드러내려는 현우, 하지만 그런 세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양아치스러움' 이면에 숨겨진 15살 소년의 순박함과 의리를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그런 현우의 진솔한 캐릭터는 곧 목격자였던 그를 폭력적으로 겁박했던 당시 공권력과 사법부의 비리와 무능, 혹은 협잡에 대한 분노를 상승시키는 가장 적절한 동인이 된다. 

강하늘과 정우가 그려낸 진심의 '버디 무비' 
그리고 10년 '양아치스러울려고'했지만 순박했던 소년은 이제 '독기'와 '절망'을 품은 청년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자식의 일이라면 '악다구니'밖엔 할 수 없는 앞이 안보이는 어미와 함께. 그리고 그런 현우 모자 앞에 나타난 벼랑 끝에 몰린 변호사 준영(정우 분)이 '속물스럽게' 등장한다. 

영화는 그렇게 10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고 절망을 아로새긴 현우와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부추켜 자신의 입신양명을 노리는 준영을 '버디 무비'처럼 그려간다. 이 기묘한 조합의 '버디'들은 감독의 그 어떤 상상을 뛰어넘는 진실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대한민국 그 누구라도 공감하는 공권력과 사법 제도가 만들어 낸 '탈법 사회' 대한민국이란 장애를 '스펙타클'하게 겪어내려간다. 모텔, 혹은 폐모텔을 배역으로 암약하는 공권력은 그 어떤 조폭 못지 않은 공포의 대상이며, 재심 앞에 '이익'을 위해 변절하는 동료, 심지어 진범을 잡고도 일신의 이해 관계를 위해 협잡하는 공권력과 사법부 등은 그 어떤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버디무비보다 극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그런 현실 속에 때론 좌절하고, 의심하던 두 사람이 약촌 오거리을 배경으로 한 판 뜨려다, 순식간에 사건 재연의 동지로 '둔갑'하는 씬은 아마도 <재심> 속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지 않을까. 



제도 교육, 아니 지역 사회에서 내팽개쳐진 15살 질풍노도의 청소년에서, 감옥 생활 10년후 절망에 잠긴 청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15살 시절의 그 '순박한 진심'을 한 구석에 간직한 현우를 배우 강하늘은 우직하게 표현한다. <세시봉(2015)>의 윤형주도, <동주(2015)>도 그의 연기로 빚여낸 실존 인물들이었지만, <재심>의 현우로써의 강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배우 강하늘의 매력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15살 소년의 불량스러운 외모에 숨길 수 없는 순박함도, 이제 10년이 지난 절망에 자신을 던졌지만 어찌할 수 없는 진심도, 강하늘의 눈빛을 통해 설득력을 얻어간다. 

이런 빛을 발한 강하늘의 곁에 모처럼 반가웠던 건 정우다. 지잡대 전공과 출신의, 변호사의 목적이 '돈'이라고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설파하다, 현우와 현우 어머니의 진심에 방향을 돌려세운 준영은 <응답하라 1994> 이후 정우를 기억할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가 될 듯하다. 속물과 진심 사이, 믿음과 의혹 사이, 그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혼선'의 연기를 정우는 <응답하라 1994>츤데레 쓰레기 못지않게 매끄럽게 소화해 낸다. 

투박하지만 진솔한 청년 현우의 강하늘과 그런 현우를 얼르고, 때론 의심하며, 그리고 결국 그의 손을 놓치지 않는 속물 변호사 준영의 정우의 '호모 사케르' 식 '버디 무비', <재심>은 그 어떤 액션 '버디 무비'보다도 배우들의 연기와 합을 보는 맛을 충족시켜준다. 거기에 단 한 장면만으로도 관객들의 누선을 풀어헤치고 마는 김해숙의 '모성 연기'야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요, 이동휘의 반전 연기 역시 신선했다. 



이런 배우들의 호연 덕분일까? 아니, 또 하나의 가족인 척하는 진정한 권력 대기업이 등장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 '권력의 농단'을 체감하는 시절 덕분일까? <또 하나의 가족>을 완성시키고도 개봉관을 잡지못해 동분서주하던 김태운 감독에게 <재심>은 박스 오피스 1위의 영광을 안긴다. (2월 15일 기준, 735,469명, 예매 33.9%) <재심>의 1위는 또한 이제는 슬슬 클리셰가 되어가는 부도덕한 권력과 재력의 콜라보레이션을 다룬 사회물, 혹은 작품성은 낮지만 대중성은 좋은 '액션'과 '유머'를 앞세우 흥행작의 딜레마에서 <변호사> 이후 모처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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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9 18:27

'씨앗은 부처님도 돌아앉는다'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다. 모 감독의 늦은 연애가 전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가 '아내가 있다'라는 이유다. 그런데 남편의 애인이 생겼다는 전언에 담담하게 '같이 살자'는 아내가 있다. 그러나 역시 '이성적 판단'은 무리였을까? 결국 아내는 이 '혼돈'의 공동체를 견뎌내지 못하고 직장도 잃고 집을 떠나야 할 처지다. 한 남자와 두 여자의 통속적 막장 스토리, 그런데 이 스토리가 사회민주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덴마크'에서라면? 지난 2일 개봉하여 근근히 상영을 이어가고 있는, <사랑의 시대>는 바로 1970년대 덴마크판 사랑과 전쟁을 다룬다. 






유산으로 남겨진 저택, 공동체가 되다
건축학과 교수 에릭(울리히 톰센 분)에게 대저택이 상속되었다. 아름다운 정경을 지닌 층층이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저택, 어릴 적 추억이 고이고이 간직된 곳이지만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에릭에겐 그저 어서 빨리 팔아버려야 할 부담일 뿐이다. 아내 안나(트리히 홀름 분)와 딸 프레야(마샤 소피 발스트룀 한센 분)과 함께 저택을 보러 간 날 팔 궁리를 하는 에릭에게 안나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여기서 '공동체'를 일구자고. 

안나의 변은 이렇다. 늘 에릭의 말만 듣고 살아야 하는 결혼 생활이 권태롭다고, 이젠 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살고 싶다고. 그녀가 떠올린 첫 번 째 사람은 이들 부부의 젊은 시절 친구인 올레(라스 란데 분), 단촐하게 비닐 봉지 두 개를 들고 이들의 집을 찾아온 올레를 시작으로 다섯 남자와 다섯 여자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집의 소유조차 야심차게 '공동'으로 등기하고자 하며 '공동체'를 이룬 이들은 식사는 물론, 여가까지 함께 즐기며 '공동'의 삶을 유쾌하게 꾸려간다. 

그러나 늘 '공동'의 삶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공동체 면접에서 부터 '집세'에 연연하던 에릭의 의도와 달리, 직장조차 알론까지 합류한 이들의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은 교수인 에릭과 유명 아나운서 안나이다. 외국인 알론을 못마땅해하며 그의 짐을 호시탐탐 태우는 올레처럼 함께 사는 삶의 불협화음은 늘 '토론'과 '거수'로 진행되는 공동체의 삶을 달군다. 

그래도 그럭저럭 서로 맞춰가며 사는 삶, 정작 위기는 그 공동체를 발의한 '에릭-안나 부부에게서 시작된다. 늘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안나, 그런 아내에게서 에릭은 소외감을 느끼고, 그런 그에게 학생인 엠마(헬렌 레인가드 뉴먼 분)이 다가온다. 엠마와의 밀회를 즐기던 에릭, 아내가 공동체 식구들과 놀러 간 날, 집으로 온 엠마를 딸 프레야에게 들키고 만다. 결국 아내에게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고 집주인 에릭이 집을 나가게 되지만, 그도 잠시 거처가 마땅치않은 에릭과 엠마의 처지를 배려한 안나의 결정으로 '엠마'가 공동체 식구로 합류하기에 이른다. 



'이성'으론 감당할 수 없는 '사랑'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가족이란 울타리를 넘어 공동체로 해소하려 시도한 안나는 남편의 외도에 조차 이성적으로 대응한다. 남편의 외도를 '가정을 깨뜨리는 비도덕적 행위'로 지탄하는 대신, 순순히 감정의 진실을 직시하며 그의 다른 사랑을 수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덴마크'에서 살면 사랑하는 이의 외도도 저렇게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나? 라는 의아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남편의 진심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던 안나, 하지만 그가 부재한 결혼 생활은 조금씩 안나를 무너뜨려 간다. '대인배'적으로 엠마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정작 공동체 식구들이 그녀를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자 혼란스러워 한다. 그리고 밤마다 들려오는 엠마와 남편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는 그녀를 불면의 밤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거리에서 사인을 해줄 정도의 명성을 일궜던 그녀의 직업조차 무너뜨린다. 공동체의 식탁에서 술에 취해 어디서 넘어진 듯 흙을 묻힌 차림새로 엠마에게 남편을 다시 나누어 주기를 간청하는 듯한 꿈 이야기를 하는 안나는 이제 더 이상 '공동체'를 주도하던 당당한 그녀가 아니다. 심지어 에릭과 안나를 집에 거주하는 문제를 놓고 '니가 나가라'며 언성을 높이는 상태에 이른다. 

결국 이런 안나와 에릭의 집 쟁탈전을 둔 설전의 결론을 내린 것은 딸 프레야다. 딸은 엄마가 이 집에 머무는 것은 엄마를 망칠 뿐이라며 엄마가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결국 안나는 집을 떠난다. 아마 우리네 통속극이었다면 어떻게 딸이 그럴 수 있어?라는 공분을 일으킬 장면이지만, 프레야의 선택을 통해 감독은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결국 '건강한 개인'이라는 것을 짚는다. 



결국 안나는 실패한 것일까? 남편 한 사람을 두고 아내와 정인이 한 집에 머무는 양상을 보면, 예전 우리 조상들의 첩을 거드린 가족 형태가 떠올려진다. 그 시절 부처님도 돌아앉을 씨앗을 '인고하며' 대가족을 일구며 어머니들은 살아왔고, 그 '인고'의 세월을 '한'이라 지칭되며, 희생하는 어머니상, 가족의 대들보 어머니 상의 한 부분을 구성했다. 그런 면에서 안나는 '집'을 잃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며 '한'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탄생시킨 우리의 '어머니들'과 안나는 다르다. 

안나는 분명 그녀가 가진 것들 남편과 공동체와 직업, 그리고 집마저 잃었지만, 어쩐지 가방을 들고 나서는 그녀가 홀가분해 보인다. 그녀를 보내고, 그리고 마치 그녀를 따라나서듯 사랑하는 이를 따라나선 딸 프레야를 보내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 에릭이 집에 남아있지만 진짜 실패자처럼 보인다. '사랑'의 시대는 갔지만, 그렇다고 안나의 삶이 끝난 건 아니다. 안나는 얼마전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던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진짜 자신을 찾아나설 용기를 낸 첫 걸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시대>가 주는 감동은 바로 그 단촐하게 떠나는 안나로부터 시작된다. 

공동체와 개인의 딜레마 
<사랑의 시대>는 7살부터 19세까지 공동체 생활을 했던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경험에 기초한다. 수상이 나서서 덴마크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며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명을 할 정도로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이 강한 덴마크, 2차 대전이 종전 된 후 집권하여 1982년까지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아래 남녀간 성평등과 사회 경제적 복지 국가를 이루어 내던 그 시기의 정점에 있는 70년대의 덴마크 사회를 떼어놓고서는 이 영화를 말할 수 없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사회주의자, 직업이 없는 외국인,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까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공동체는 에릭-안나가 이룬 대저택의 공동체를 넘어 마치 70년대의 덴마크 사회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런 그들이 에릭과 안나의 경제적 기반 위에 공동으로 살아가며 때론 에릭이 '내집이야' 다 나가라는 위기를 견뎌내며 과정은 '자본주의' 체제 위에 선 사회민주적 실험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감독이 생각하는 위기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에릭과 안나의 갈등처럼,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론적 갈등이다. 무직이었던 외국인 알론이 식기세척기를 사들일 정도로 공동체의 틀은 견고해지지만 정작 위기는 그 공동체를 일구는 사람 개개인의 자존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권태로운 결혼 생활의 위기를 친구같은 이들과의 공동체로 해결하려 했던 안나가 정작 남편의 외도라는 문제에서 무너지듯, 그리고 자신의 집인데 공동체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쫓겨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에릭이 '다 나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듯, 결국 파국은 '욕망'과 '자존'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하다. 

공동체 2부작이라 칭해지듯, <더 헌트(2012)>에 이어 공동체와 개인의 갈등을 다룬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은 <더 헌트>에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로 부터 배제되는 주인공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비감하여 인간의 편협한 도덕성을 회의하게 만들었던 <더 헌트>와 달리, <사랑의 시대>는 '그 또한 지나가리니'처럼 '시대'라는 연속성으로 인해 보다 여운을 남긴다. 딸이 자라는 걸 보고 싶었던 에릭은 결국 딸조차 나간 집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9살을 넘기지 못한 꼬마의 장례식에서 함께 하듯이 그들이 일궜던 공동체는 여전하다. 아마도 언젠가 자신을 일으켜세운 안나가 또 다른 사랑하는 이와 다시 공동체의 면접을 볼 날이 올 지도 모를 희망까지 갖게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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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6 18:45

어느날 갑자기 전 세계 하늘에 12개의 우주 비행체, 쉘이 나타났다. 혼비백산한 지구인들, 18시간마다 열리는 쉘의 문을 통해 그들과 '접선'한 지구인들은 그들이 온 이유를 알아내려 한다. 하지만 도무지 그들이 보내온 외계의 '신호'를 해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 분)가 차출되는데.


2월 2일 개봉한 <컨택트>는 마치 영화 속 외계인들의 정체를 가려주는 뿌연 안개와도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외계의 실체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조차 뿌연 안개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다. 하지만 그 모호한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저 멀리서 두 곳의 등대가 반짝인다. 



첫 번째; '언어' 소통의 도구?
<컨텍트> 속 '셀'을 타고 온 외계인들은 마치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그 어떤 것'(everything else)와도 같다.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소통'하려 하지만, 지구와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그들과 늘 '불통'의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지구 위의 인간들이 '언어'라는 도구로 '소통'을 체계화했기에, 당연히 지구인들은 자신이 했던, 아니 자신들이 '약속'했던 바의 방식으로 다시 '외계인'들과 소통에 이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인간들 사이의 '약속'이라 했다. 하지만 그 스스로 훗날 그 '약속' 조차도 규명되지 않는 행간을 지녔다 '회의'하고야 만다. 그 '인간'의 약속된 언어, 12개의 셀의 등장한 지구 곳곳의 나라는 그들이 이뤄낸 문명의 성과로, 미디어와 과학 문명의 도움을 받아, 외계인의 도래, 그 이유를 해석하고자 한다. 

<컨택트>의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클리셰가 된 외계인들은 어떤가. 비행접시라 하는 그 외계의 물체를 타고 인간 세상의 상공에 느닷없이 등장하여,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마구 쏘아대며 '침공'하는 식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비행접시가 모로 선 모양부터, '왜곡'된 형상으로 혼돈을 준 셀은 셀의 입구를 18시간마다 기꺼이 개방하며 '소통'을 도모한다. 

하지만 '침공'하지 않는 외계인들에 대해 지구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외계의 셀이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세상으로 '아노미'에 빠졌고, '폭동'과 '파괴'가 범람하며, 그 통제되지 않는 위기가 오히려 '외계인'에 대한 무력적 대응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정말 '언어'가 소통이 될까? 루이스를 찾아온 군 관계자가 언어학자인 그녀가 도움을 준 미군의 작전은 '소통'대신, 전멸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외계인과의 '소통'을 소란스럽게 다루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건 '언어'가 소통이 되지만, 불통인 인간의 관계이다. 외계인이 그 어떤 '침공'의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이미 '알량한' 인간 사회는 통제 불능이요, '소통'을 도모하기 보다는 '무기'를 앞세운(물론 그 '무기'를 앞세운 측이 군인이 지배하는 중국이요, 러시아, 쿠바이라는 빛바랜 반공주의적 선입견이 아쉽지만, 심지어 여주인공이 전해준 아내의 유언 한 마디에 결정이 뒤집히는 일인 독재 사회의 설정이라니!) 진압 작전은 '외계'라는 '이방'을 빗댄 현실 인간 세상의 아이러니한 상징이다. 마치 우리 안에 던져진 이물질에 대해 철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물원의 원숭이들처럼,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편협하고, 배타적인 존재인가를 <컨택트>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명한다. 그러기에 영화 <컨택트>은 외계와의 조우를 통한 '인간'의 투영이다. 

두 번째; 우리가 혹은 내가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어쩌면 이 문제를 위해서 먼저 '양자 물리학과 평행 우주론' 등의 물리학 이론을 접하며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외계인이 주인공인 영국 드라마 <닥터 후>를 보면 차원이 겹쳐지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는데 현재의 세상에서 과거의 세상으로 이동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3차원의 세계를 살아온 우리에게 시간은 일련의 서열이지만, 그것이 양자 물리학 세계로 들어가면 차원이 확장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겹쳐지면, 마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과거'가 있듯이 그렇게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열린 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면 안갯 속의 등대가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루이스와 딸의 일련의 시간적 인연이 풀어내진다. 그를 통해 관객들은 그녀에게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으며,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딸과의 인연이 그리 길지 않았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 아빠는? 그 스멀스멀 솟은 의심인지, 질문인지에 대한 답은 영화 마지막에 설명된다. 

과연 외계의 등장과 함께 혼돈스러운 인간 세상과,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동시에 진행되는 루이스의 병적인 혼돈, 고통은 영화 말미에서야, 영화 초반 보여준 스포의 진실을 드러낸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루이스는 언어학자로서 18시간마다 셀로 들어간다. 혹시라도 있을 지도 모를 외계와의 조우를 우려한 '인간 세상' 방식의 멸균 상태로, 갖가지 보호복으로 중무장한 그녀, 하지만 외계인과의 만남 과정에서 그녀는 '소통'은 그저 '언어'를 학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보호복을 벗어제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와 외계인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소통'은 무엇이었을까? 훗날 중국의 장군이 그녀를 보러왔다고 했던 그 리셉션에 걸린 외계의 언어, 그것이었을까? 지구인들은 그녀가 해독한 외계의 언어에서 '무기를 주러 왔다'는 말에 당장 '전투 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무기'의 다른 의미가 '선물'임을 재해석한다. '무기'로도, '선물'로도 해석된 마치 산타 할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던 외계의 방문, 그 방문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건 '루이스'고 그건 바로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러기에 그건 '선물'이자, '무기'가 되는 것, 하지만, 그녀는 고통스러운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외계와의 소통에 자신을 기꺼이 열었듯, 그 외계가 준 '운명'의 선물에 역시나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연다. 



하지만 루이스 개인이 받은 '선물'과 앞서 인간 세상의 한계를 보여준 '소통'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결국 그 모든 것이 가르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인식이라는 풀 안에서 규정지어놓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열린 마음이다. 혹시나 언젠가 영화 속 외계인들처럼, 그들이 정말 선물을 들고 소통하기를 바라고 왔을 때, 아니 먼 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세계 안의 이방인들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을 둘러싼, 심지어 당연한 흐름인 시간에 대해조차, 예단과 편견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깜빡깜빡 안갯속 등대불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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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0 00:12

2010년 밀입국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얼어붙은 땅>으로 63회 칸 영화제 시네마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바다, 최연소 칸 영화제 진출의 영예를 안고, 이어 2014년 <거인>으로 36회 청룡영화제, 35회 한국 영화평론가 협의회 신인 감독상을 받았던 김태용 감독이 2017년 새해 첫 영화로 <여교사>를 들고 왔다. 


김하늘이라는 당대 최고 여배우를 타이틀롤로 내세운 <여교사>는 하지만 김태용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라는, 그리고 배우 김하늘의 모처럼 영화 출연이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107,685명(영진위 추산)의 미진한 흥행 성적과 작품성에 있어서도 물음표를 남기며 사라져가는 중이다. 



욕망과 윤리의 경계, 그 연장선
김태용 감독의 신작 <여교사>는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전작들과 동일한 주제의 연장 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밀입국 소년들'(얼어붙은 땅)에서 '이삭의 집 영재'(거인)으로 그리고 이제 다시 계약직 교사 효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속일 것같았던 이들은 결국 끝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조차도 동일하다. 

비굴할 정도로 이삭의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부까지 되겠다며 착한 아이인 양 했던 영재는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데리고 온 동생으로 인해 자신이 썼던 생존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만다. 효주도 다르지 않다. 계약직 교사로 임신 포기 각서까지 썼던 효주이지만, 자신의 자리라 생각했던 과학 정교사 자리를 치고 들어온 이사장 딸에 대한 감정을 결국은 숨겨내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이 다를까? <거인>이 김태용 감독에게 올해의 신인 감독이라는 상찬을 안긴 것과 달리 똑같은 주제를 다룬 <여교사>에 대한 평이 엇갈리는 것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라 해야 할까? <여교사>를 보는 내내 어쩌면 애초의 시나리오는 어쩌면 화면상에 옮겨진 평범하고 둔탁해진 이야기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정'과 '욕망'의 부딪침이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배려(?)' 혹은 이른바 궁예(?)는 보는 이의 생각일 뿐, 어쨋든 감독은 화면에 펼쳐놓은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계약직 여교사로서의 효주(김하늘 분)가 겪어야 하는 부당한 갖가지 대우를 나열하며 영화는 여주인공의 곤란한 처지를 사회적으로 풀어낸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랫동안 동거해 왔던 남자 친구와의 관계도 아슬아슬하다. 그렇게 사회적, 개인적 위기로 <여교사>는 주인공 효주를 벼랑 끝으로 밀고 간다. 

그렇게 위기의 상황에서 도화선으로 등장한 것은 이사장 딸 혜영(유인영 분),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다짜고짜 처음 찾아온 효주에게 술 김에 입을 맞춘 재하(이원근 분)다. 그 이후의 상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예측가능하다. 단지 그 폭발력과 방식의 차이일 뿐. 



사회적 존재의 파열을 욕망을 통해 펼쳐내는 것은 <B사감과 러브레터> 이래 이젠 고전이 된 방식이다. 초반의 계약직 여교사의 부당한 존재를 잔뜩 나열하며 주인공의 사회적 존재를 부각하던 영화는 혜영과 재하의 등장 이후 그 문제 의식을 갑자기 지극히 사적으로 끌어내린다. 분명 효주의 존재론적 문제는 사회적이지만, 혜영과 재하의 등장 이후 효주 자신의 문제 의식과 그 분출은 혜영과 재하라는 삼각 관계에 갖혀 지극히 사적이고, 그래서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이어진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지만, 그 사회적 존재가 살아가는 공간은 지극히 사적이며, 거기서 분출되는 감정들은 개인적이다. 하지만, <여교사>에서는 마치 사회적 존재가 이후 개인적 폭발의 물적 토대라기보다는 도구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임신 포기 각서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도장을 찍는 계약직 교사가 과연 이사장 딸에게 그리도 도발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이건 <거인>의 영재와 범태의 관계가 아니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었다 할지라도 이사장 딸인데 과연 그렇게 용감할 수 있는 계약직 여교사가 현실에 가능할까? 

혜영의 응석같은 친절에 대항한 효주의 냉담 혹은 무시는 그래서 효주의 절박함을 드러내기 보다, 그조차도 효주란 사회적 존재의 비현실성을 강화시킨다. <거인>의 영재는 아니라도, 효주같은 강심장의 계약직 교사가 가능할까? 아니 효주의 냉랭함은 <여교사>라는 영화를 따라가는데 내내 그녀의 감정을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 처음엔 그것이 의도된 감독의 새로운 캐릭터인가 싶다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리 뻣뻣한 그 캐릭터에 배우의 해석 부재인가 하며 의문 부호를 남긴다. 

현실에서 생존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희생이 강요된 여자, 그 여자가 삶의 위기에서 붙잡은 뜻밖의 열정, 하지만 그것조차도 부도수표라는 그 '클리셰'와 같은 이야기를 설득해 내기에 <여교사>는 내내 무덤덤하고, 그래서 클라이막스만 도발적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내내 냉담했던 그녀라면 마지막까지 '사랑'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철저히 혜영과 재하를 가지고 놀 만큼 일관되게 '냉혈한'이었음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교사>는 치명적인 척 하지만 상투적이고, 편의적이었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성 영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한계
바로 그 지점이다. 왜? 저토록 사회적, 개인적으로 절망에 빠진 효주가 마지막 건 희망이 '사랑'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만약에 이 영화의 주인공이 여선생인 효주가 아니라, 남자인 선생이었다면 똑같이 사랑으로 스스로 자멸하는 설정으로 가져갔을까? 왜 여교사는, 시작은 어떤 의도에서였건 그 남자 아이의 바람같은 '사랑'이라는 한 마디에 낚여서 스스로를 파멸에 빠지는 존재로 그려져야 할까? 

영화는 효주의 사적 복수로 마감하지만, 그 자해에 가까운 복수극은 마치 온 기숙사생들이 다 듣는 가운데 애절하게 러브레터를 낭송하는 B 사감의 애절한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분명 영화는 효주라는 계약직 여교사가 처한 사회적 문제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으로 사회적 의식을 고양시키며 시작하지만, 그 끝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복수로 마감한다. 물론 이것이 고립된 사회적 존재 거개가 맞게될 파국의 양상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여성은 하고많은 해결책 중에 하필 '사랑'에 발에 걸려 자멸하고 마는가에 대해 아쉬움을 남긴다. 



그토록 냉정했던 효주라면, 혜영에게 조차 앙칼질 수 있었던 효주라면, 재하라는 존재, 사랑에 걸려 넘어지는 대신 좀 더 냉정한 복수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효주란 사회적 존재를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적인 존재로 치환해 버린 영화는, 마찬가지로 남성 영화에서 여성을 성적 존재로 소모하듯 재하란 대상을 성적 존재로 소모해 버린다. 결국 재하의 속내가 드러나지만 그건 그의 대사를 통해서지, 효주와의 만남 과정에서 재하는 그저 효주의 사랑바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효주의 감정선이 불친절하듯, 재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불친절한 것이다. 과연 이것이 마지막 폭주를 위한 감정의 숨김인지, 아니면, 애초에 의도된 구도로 끌고나가기 위한 편의적 장치였는지, 의문에 의문만이 꼬리를 잇는다. 

사실 <여교사>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6년에서 2017년까지 여배우들이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들은 모조리 부진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두고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부진이라 말할 수 있을 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부진이라기 보다는, 여성을 내세운 영화들의 주제 의식의 문제가 아닌지. 즉 대부분 박스 오피스에서 높은 순위의 영화들이 사회 구조적 문제와 환타지적이나마 그 해결에 주제를 천착하고 있는 가운데, 대부분의 여배우들을 타이틀롤로 삼은 영화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사회적 문제의 개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점에 대해서는 한번쯤 짚어봐야 할 것이다. 이런 영화도 있어야 하겠지만, 굳이 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이런 문제 의식에 천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편견의 여지가 잠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지점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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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1.1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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