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한산성>이 지난 6월 5일 100쇄를 찍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와 함께 김훈 작가의 역사 3부작으로 불리우는 이 작품은 2007년 출간 이래 꾸준한 스테디셀러로 무려 100쇄, 총 누적 판매수 59만부에 이르렀다. 우리 소설계에서는 진귀하고도 소중한 성과다. 하지만 영화로 온 <남한산성>은 그와 달리 고전 중이다. 손익분기점 500만이 무색하게 액션 영화 <범죄도시>에 추격을 당하며 11일 현재 누적 관객수 331만으로 초반의 흥행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장고한 스테디셀러 소설 <남한산성>과 영화 <남한산성> 사이에 이 갭, 그건 그저 만듬새나 지루함의 문제일까? 과연, 59만부가 팔린 소설 <남한산성>을 산 사람들은 김훈의 필설을 다 마무리했을까? 혹 김훈의 명망에 기대어 샀다가 서가에서 먼지를 맞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100쇄 출간에도 불구하고 실용서가 아니고서는 쪼그라져만 들어가는 우리의 독서 시장의 현실과 맞물려 비유하는 것이 더 적확할 듯 싶다. 영화를 통한 '사유', 아니 '사유' 그 자체가 낯설어가는 세상에서 어쩌면 애초에 영화 <남한산성>은 무모한 도전이었을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영화 <남한산성>에는 그저 김훈 원작 이상 2017년의 황동혁의 '언어'가 유려하게 담겨있으니, 그저 손익분기점을 못넘은 영화로 기억되기엔 안타깝다. 



소설<남한산성> 그리고 영화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대군을 피해 인조와 신하들이 머문 47일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속 자막에서도 알려주다시피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았던 그 겨울, 어쩌자고 퇴로가 막히면 도망갈 곳도 없는 산성으로 살자고 도망온 왕과 군주들의 행보에서부터 소설은 탄식을 이어간다. 그리고 채워가는 살아감의 엄정함, 그 속에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지속되는 하던대도 지속되는 정사. 이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아무런 결론도 없는 소설'이라 정의한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조건들, 인간의 야만성, 인간의 삶이 빚어내는 풍경들을 묘사하려 했을 뿐'이라 한다. 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장군의 언어로 전쟁터의 풍경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간략하게 전한 <칼의 노래>를 통해 그래서 더 비감하게 임진왜란을 실감했듯, 가감없이 묘사해 내려간 47일 피폐해져만가는 배수진 남한산성 역시, 병자호란 풍전등화 속 조선의 모습을 절실하게 전한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의 그 기조를 이어받아, 1636년 남한산성의 풍경과 인간들을 그려나간다.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그 과거를 기억하는 주체가 오늘의 사람이라, 언제나 거기엔 오늘의 색채가 덧칠해 질 수 밖에 없다. 트럼프의 미국과 김정은의 북한 사이에서, 입지가 좁은 우리의 처지는 절묘하게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없는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처지와 오버랩되며 회자될 수 밖에 없는 시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안타깝다. 영화 <남한산성>이 저어가는 사유의 깊이는 이미 우리가 배워서 알고 익힌 역사, 남한산성에 갇혀 주화파나 주전파냐를 놓고 싸우고, 결론 내려진 그 뻔한 역사의 결론을 한 발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안다. 당시 조선이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서 얼마나 무지했는지, 최명길이 제시한 청과의 휴전이 얼마나 자명한 결론이었는지. 하지만 이미 '안 자', 혹은, 방관자, 혹은 목격자의 관점을 넘어, 황동혁 감독이 애써 그려낸 1636년 남한산성에 있다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 되돌려 질문을 던져보면 과연 그때도 그럴까?

소설이 '남한산성'이라는 지역성을 배경으로 그 속에 담겨진 인간들을 수사를 아낀 문장으로 담백하게, 그래서 서늘하게 묘사해 나갔다면, 영화는 그런 원작의 묘사에 더해, 인조를 중심으로 그들 앞에서 조선의 운명을 둔 '인간군상'들에 조금 더 방점을 찍는다. 걸출한 두 배우, 김윤석, 이병헌이 분한 김상헌과 최명길,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고뇌하는 인조 박해일, 그리고 사실은 그 못지않게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을 분노케한 영상 김류의 송영창, 이들의 설전과 팽팽한 긴장감이, 마치 한 편의 연극 무대를 보듯 관객을 끌어들인다. 
 
경계에 선 자들에게 그 해 겨울은 냉혹했다. 조선 강토를 짓밟으며 청병이 다가오고 있었고 조선의 임금은 두려워 도망가는 백성들 사이를 뚫고 남한산성에 다다랐다. 성벽을 두고 대치하는 것들의 성격은 명백했다. 조선과 청이 대치하고 있었고 조선의 임금 인조와 청의 황제 칸이 대치하고 있었고 조선의 병사와 청의 병사가 대치하고 있었다. 쫓겨온 자와 쫓아온 자의 대치였고 굶주린 자와 배부른 자의 대치였고 말과 말, 문장과 문장의 대치였다.......대치는 성벽을 사이에 둔, 성 밖와 성 안의 것이 아니었다. 성 안에서 군과 신이 대치하고 있었고, 병과 병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병들의 목숨과 성첩을 덮는 추위가 대치하고 있었다......어디도 대치를 피할 곳은 없었다. 


<남한산성>, 국가를 묻다. 
아마도 영화 <남한산성>이 지루했던 이들이라면, 그 이유의 상당수가 이들의 사실은 '절체절명'의 설전 그 행간 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에는 너무도 분명한 결론이지만, 김훈이 그러했듯, 감독 황동혁 역시, 애써 그 결론에 의거치 않고, 그 시대를 산 그들의 입장 각각에 힘을 실어준다. 사대의 나라 조선, 이미 그렇게 몇 백년을 이끌어 온 조정에서, 적페가 되어가며 기득권이 된 영상과, 적폐는 아니지만 여전히 유교의 국가 조선의 신하가 자신의 정체성인 김상헌, 그리고 그럼에도 국가의 생존을 우선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주장은 각각 명징하게 자신의 길을 갖는다.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각자의 입장에서 쟁투하는 오늘날의 인간들에 굳이 비교할 것도 없다. 

'경계에 선 인간들',  김훈은 그리 표현했다. 하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는게, 지구가 멸망해도 희망을 심고자 해서가 아니라,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걸 알지 못해서이듯, 과연, 몇 백년을 사대의 유교 국가로 살아온 조선에게, 청과의 화친이 '수긍'될 수 있을까?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압록강 주변까지 도망쳐, 명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했다 하는 인식을 가질 지도 모르는 사대부들에게, 최명길의 '혜안'은 얼마나 멀고도 아득한 이야기일지. 

보름달이 뜨면 봉화가 올려질 것이라 기대하는 김상헌과, 보름달이 뜨기 전 항복을 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절박한 설득은 바로 그런 경계에 대한 공감에서부터 절절해진다. 하지만 이미 역사적 혜안의 최명길과, 역사적 고집불통의 대명사가 된 김상헌이란 결론을 알고 있는 후대의 관객들에겐 싱거운 선택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안 자'가 되어 그 '선택'의 감별사가 되어버린 관객이 영화 <남한산성>의 손익 분기점을 위협할 것이다.



소설은 그 답을 그들이 아닌 조선의 백성들에게서 찾았다. 영화 역시 김상헌의 눈에 밟힌 산성의 군인들과 서날쇠, 소녀 나루에게서 찾는다. 영화는 최명길을 청과의 경계에 서게 한 반면, 뜻밖에도 고루한 김상헌을 나룻터에서 부터 산성에 이르기까지 그들 진짜 조선의 주인들과 접점을 가지도록 만든다. 그래서일까? 분명 이병헌과, 김윤석 두 배우의 백중지세로 이어지는 영화 속 두 인물의 입장에서 결코 그 저울이 흔들리지 않지만, 그 접점에서 오늘날 역사가 '남한산성 그 치욕의 공범자'로 기록하고 있는 김상헌의 처지와 생각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심지어 굳이 역사적 사실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이, 김상헌의 마지막을 사실과 다르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다른 선택이 오히려 묻는다. 과연, 1636년 조선이 그 치욕을 감당하면서 지킬 가치가 있는 국가인가? 라고. 소설은 남한산성의 그 피할 곳없는 풍경에서 자명한 진실에서 비껴간 정사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드러냈다면, 영화는 오히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의 존속을 묻는다. 그렇게 많은 백성을 희생하고, 삼전도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켜낸 조선이 그 이후에 어땠던가?, 돌아온 인조는 어땠던가? 과연, 그 곳에서 조선이 살아돌아올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사료와 달리, 최명길은 김상헌에게 자기 대신 돌아가 조선을 책임져 달라 하지만, 그 가치와 명분을 가지고 조정을 지키고자 애쓰던 김상헌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거의 '혁명적'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이 던진 진짜 질문은 이것일 지도 모른다. 1636년 청 앞에서 풍전등화의 조선, 굴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쩌자고 임진왜란에도 그랬듯이 백성은 내팽개쳐두고 그 산성으로 도망친 것에서 부터, 그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도 왕조, 아니 왕의 운신만이 여전했던 그 국가, 과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존립할 가치가 있는가 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이다. 여전히 '국가'의 존재가 크고도 엄정한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이 질문은 그래서 낯설고, 도발적이다. 그리고 이 묵직할 질문이 바로 영화 <남한산성>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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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0.11 17:22

<남한산성>, 이어 <범죄 도시>로 그 흥행세가 주춤하고 있지만, 엇갓린 평에도 불구하고 <킹스맨; 골든 서클>은 청불 최단 기간 400만을 돌파하며 우리나라에서 1편에 이어 흥행의 호조를 보이고 있다. 


시즌을 '스타일'이 이어가다. 
<킹스맨>은 등장은 그 유래부터 007과는 다르다. 영국 정보부라는 국가 조직의 관리 하에 첩보원이 아닌, 영국 테일러 산업의 이익을 환원하기 위한 조직으로, 테이러 산업이 만들어낸 슈트를 '갑옷'처럼 입은 '원탁의 기사'들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가장 '신사적'인 것이 요구되는 훈련 과정은 '왕실에 의한 작위'가 아니라, 그 '신사복'을 만드는 협회에 의해 주도된다는 '장인적 설정'이 이 '시리즈'의 관건이다. 그러기에 원작이 없는 2편에서 미국의 위스키 협회, '스테이츠맨'이 그들의 동지로 등장한 건 시리즈의 연장 선상에서 개연성을 갖는다. 



이렇게 협회가 만들어 낸 '킹스맨'에 1편을 본 사람들은 알다시피 온갖 신사 가문의 자제들이 지원한다. 하지만 정작 '킹스맨'이 된 건, '동지애'를 실천한 사투리를 쓰는 하층민 에거시(태런 에저튼 분)이다. 취지야 진정으로 '신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킹스맨'의 자격이 있다는 말로써 '문화'의 본질을 짚는다. 

하지만 해학적으로 해석하되, 테일러 협회 수장과 재단사, 그리고알고보니 '나비 연구가',  뒷골목 소년에 의해 완성된 킹스맨은 그 어떤 '신사'보다 더 '신사스러운' 정서와 스타일을 선보인다. 안경, 우산, 가방을 활용한 무기하며, 007보다 더 007스러운 신사들이다. 2편에서 신사복을 벗은 에거시가 동네 친구들과 예의 사투리같은 자신의 언어를 쓰다가도, 킹스맨의 복장을 장착하면 어엿한 '신사'로 전투에 임하는 장면은 본투비 신사였던 007과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한 편에서 '신사'들이 무게 중심을 잡고 있는 가운데, 1편에서는 그런 '신사'의 반대 편에 지구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바이러스같은' 인간들을 절멸시키겠다는 야욕을 가진 발렌타인(샤무엘 L잭슨 분이 등장한다. 그런데 '인간의 뇌'에 칩을 작동시키는 천재적 발상의 과학자 악인의 모습이 반전이다. 힙합 보이 복장에, 힙합스러운 어투로 '맥도널드' 햄버거를 대접하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2편에서 캄보디아 정글 속에 자신만의 '포피랜드'를 포진한 빌런 포피 역시 발렌타인에서 시대를 거슬러 7,80년대 미국 팝음악을 배경으로 현란한 색채를 덧입혀 그 시절 미국 거리를 재현한다. 거기에 그녀가 오만불손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살려준 인질이 바로 그 시절 대표적 팝스타 '엘튼 존'의 등장이 화룡점정이 된다. 

이렇게 1편에 이은 2편에서 <킹스맨>은 '전통적 영국의 신사 문화'에 힙합 문화와, 7,80년대의 파퓰러한 미국의 대중 문화를 대비시키며 '스타일'의 격전지로서 시리즈를 이어간다. 2편에서도 영화의 정점이라 하면 뜻밖에도 장엄한 '존던버'의 노래가 울려퍼진 가운데 멀린의 장렬한 죽음이었다. 영화 시작부터 빈번하게 에거시의 현란한 액션이 이어지지만 정작 공을 들여 보여주는 건 '스타일'의 전시이며, 그 '스타일'의 활용에 관객 역시 <킹스맨>을 다른 스파이물과 다르게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작품의 호불호, 혹은 성패와 상관없이 적어도 <킹스맨>은 1편에 이어, 2편까지 '스타일'의 계보를 순조롭게 이어갔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며, 그런 의미에서 과연 3편의 '스타일'은? 이라는 궁금증을 덧붙이게 만든다. 

그리고 남겨진 질문들
1편의 클라이막스에서 벌어진 인간 폭발의 '카니발'은 두고 두고 회자되었다. 심지어 가장 잔혹스런 장면에서 울려퍼진 위풍당당 행진곡은 이후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의 차용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될 만큼,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다. 

그런 '충격파'에 대한 부담이었을까? 마치 1편만큼 쇼킹한 '인간 살육'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의 소산이기라도 하듯, '인간 분쇄기'가 2편에 등장한다. 1편과 같은 화려한 배경 음악도, 연출도 없이 가감없이 '인간'을 '햄버거 패티'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 심지어 꼭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인증이라도 하듯, 두 다리는 남겨두는 그 처단에 눈을 질끈 감은 관객들이 많을 듯하다. 

'가감없이 잔혹하다', 이런 평가에서 어쩌면 우리는 1편에서 간과했던 질문을 이제 다시 해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1편의 발렌타인의 방식이나, 2편의 포피의 방식이나, 사실 보여주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생명에의 경시'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2편에서 그것이 전면적으로 드러남으로써, 1편의 그 '잔혹했던 살상'을 오버랩하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1편에서 각국의 지도층 인사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안위 이상 지도자로서의 책임 의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 살상에 대한 살인에 대한 묘한 대리만족과 그럼에도 정당한가라는 질문은, 이제 2편에서 애꿏게도 그 대상이 된 '약물중독'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은 정작 포피를 제거하자, 등장하여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킹스맨 일행이 해독제 버튼을 누르는 걸 저지하려고 했던 스테이츠맨이나, 미국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이처럼 <킹스맨>이 내세운 '정의'는 모호하다. 

마치 제국주의 시대 '신사'복을 입고 제국주의 영국의 첨병이 되었던 그들이 이제 영국 문화의 전통이 된 것처럼, 1편에서 인간 카니발의 제물이 된 각국 수뇌부의 목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야 하는 임무나, 이제 2편에서 걷잡을 수 없는 필요악이 되어가는 약물 중독자에 대한 구급 버튼의 수호처럼, 현대의 신사들의 임무는 그 자체에 '딜레마'를 안고있다. 하지만, 그건 햄버거 패티가 되는 인간에 대한 반작용이 곧 '정의'가 되는 임무에서 '킹스맨'의 고민은 깊지 않다. 나비 연구가가 되는 대신 나라를 위한 길을 선택했던 해리의 고민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처럼. 

이런 식이다. 신사복을 입은 에거시에게 주어진 임무는 뜻밖에도 상대편 여성의 질 속에 첩보용 칩을 이식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가 고민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반응을 보인 '여성의 도구화'가 아니라, 자신의 약혼자에 대한 순결 여부이다. 어쩌면 가장 신사입네 하면서 그 신사적인 면을 숱한 '여성 편력'을 증명하는 007 시리즈와 차별성은 에거시의 결혼으로 마무리지은 소박한 순애보라 영화는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영화는 '아이러니한' 설정들의 집합체이다. 전통을 가진 문화의 수혜자가 된 청년은 이제 신사의 제복을 입고 정의의 사도가 되어, 하지만 여느 스파이물 못지 않은 혹은 더 적나라한 액션과 살극을 펼친다. 그의 정의는 분명하지만, 그 결을 따지고 들어가면, 어쩌면 우리 시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투성이다. 이 모호한 시대 속에서 '정의'을 외치는 시도 자체가 가진 본원적 딜레마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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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10.08 02:01

영화를 보고 나면 알게 된다. 도발적이게도 이 영화는 이미 <인비저블 게스트>라는 제목을 통해 관객에게 모든 패를 다 보여주었다는 것을. 하지만, 오리올 파올로 감독이 보여준 그 반전의 패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 한 편의 종주는 필수적이다. 


스릴러 영화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평범한 한 시민이 뜻하지 않은 범죄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 비저블 게스트> 역시 그렇게 시작된다. 유망한 젊은 사업가 아드리안(마리오 카사스 분)은 고립된 호텔 방에서 살해당한 내연의 애인과 함께 발견되었다. 동절기 추위를 피하기 위해 아예 걸쇠를 제거한 창문들, 보조 잠금 장치까지 잠궈진 채 안으로 잠궈진 방,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아드리안과 그의 연인 로라(바바라 레니 분)뿐,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온 경찰은 아드리안을 로라의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밀실 범죄의 트릭 속에 갇힌 주인공
에니메이션의 고전이 된 <명탐정 코난>에서 부터 최신 트렌드 추리물 영드 <셜록>까지, 살인 사건이 난 장소가 '밀실'이라 하면, 마치 '게임이 끝났다'는 말처럼 가장 완전 범죄의 필요 조건이 갖추어 진다. 아드리안과 로라가 있던 밀실, 그곳의 살인 사건,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아드리안에게 불리한 증인으로 인한 검찰 소환까지의 3시간이란 제한된 시간을 앞두고 승소 확률 100%의 변호사 버지니아와 아드리안의 숨막히는 '진실 찾기' 게임으로 뻗어나간다. 

승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숨김없는 진실을 털어놓아야만 아드리안을 위한 승소의 계획을 짤 수 있다며 아드리안을 압박하는 은퇴를 앞둔 은발의 여 변호사 버지니아. 그녀의 다그침에 아드리안은 자신이 말려들어가 버린 이 범죄의 트릭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뜻밖의 또 하나의 범죄 아닌 범죄, 각자 아내와 남편이 있었던 두 사람은 은밀하게 만나 밀회를 즐기고 서둘러 돌아가던 중, 뛰어드는 사슴을 피하느라 핸들을 돌리고 그 과정에서 맞은 편에 오던 차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황급히 사고 차량을 살펴보니 이미 운전자는 숨을 거두고, 그의 사고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부터 아드리안과 로라의 이해 관계는 얽혀 들어간다. 

아드리안은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로라의 제지 때문이었다고. 신고를 하려던 자신을 제지하고, 자신들의 밀회와 사회적 위치를 보존하기 위해 아드리안에게 사고 차량과 운전자의 '수장'을 지시했으며, 이후 그들을 추적해오는 경찰과 협박범에 대한 모든 대응은 오로지 '팜므 파탈'같은 로라의 의도였다고. 

영화는 로라의 살인 사건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뜻밖의 교통 사고와, 그 우연한 사고를 덮기 위해 아드리안과 로라가 벌이는 고군분투(?)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과 존재를 알 수 없는 협박범과, 그리고 아드리안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장시킨 사고 차량 운전자의 시신만이라도 알려달라 애걸하는 그 부모 가리도 씨 등과의 접점을 로라 살해범 아드리안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재구성 과정으로 다각도로 접근해 들어간다. 



'고통없는 구원은 없다'
그 '밀실'에 자신들 두 사람말고 그 누군가가 또 있었다고 주장하는 아드리안, 그 주장만큼 아드리안은 그 일련의 두 사건 사이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그런 아드리안을 제한된 시간과 그가 내뱉는 진술의 헛점을 지적하며, '진실'을 파고든다. 

올해의 기업인 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아드리안, 그는 자신은 그저 로라의 함정에 걸린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야만 너를 도울 수 있다는 버지니아의 압력은 시간이 갈수록 결백했던 아드리안의 진술, 그 이면의 것들을 드러내도록 만든다. 

2017 전주 국제 영화제 초청 작품으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국내 영화사를 통해 '리메이크'가 결정된 <인비저블 게스트>는 바람난 사업가와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사건이라는 어찌보면 가장 통속적이며 대중적인 서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통속적'인 이야기를 한 건의 실종 사건과 또 한 건의 밀실 살인 사건이라는 두 건의 사건과 그 사건과 사건 사이에 벌어진 모든 변수를 놓고 벌이는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피 말리는 두뇌 게임을 통해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듯 추리의 향연을 벌인다. 



진실을 다그치는 변호사, 그 변호사의 다그침을 피해 어떻게든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두 개의 사건 사이를 피해 가보려던 아드리안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검찰의 소환과 '고통없는 구원은 없다'는 변호사의 압박 사이에서 자신에게 덜 피해가 가는 변수를 제시해 간다. 그리고 그 변수의 과정은 바로 우리가 이 영화가 제시한 두 개의 사건에 대해 '추리'해볼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이다. 똑같은 사건이 '프레임'을 어떤 각도로 잡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한껏 내보인다. 그렇게 변수에 변수를 돌다리를 두드리듯 건너간 변호사와 관객들은 결국 그 어떤 가능성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의 지점에 도달하게 되고, 영화는  범죄의 늪에 빠진 주인공에게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 대신, '반전'을 선사한다. 

그 '반전'은 관객으로 하여금 복기하도록 만든다. 애초에 자신이 밀실 살인 사건을 목도하고 했던 의심을, 아드리안의 최초 진술에 대한 의혹을, 그리고 애초에 감독이 그 모든 진실을 다 흘뿌려놓았음에도 아드리안의 그 초조한 '평범한 이의 억울한 누명'이라는 결정적 복선 앞에 가장 분명한 의심 대신 자신 역시 갈짓자를 걸었음을, 그리고 바로 이 갈짓자의 걸음이 바로 <인비저블 게스트>의 묘미였음을. 추리 소설의 진짜 묘미는 드러난 진실도 진실이지만, 그 진실을 글쓴이와 함께 고민하고 모색하고 추적해 가는 과정의 매력이다. 사건의 진실 만큼이나, 그 진실을 찾아가는 갈짓자 걸음의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인비저블 게스트>는 밤을 세워 손에 땀을 쥐고 읽은 한 편의 추리 소설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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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9.25 16:40
'동심을 바탕으로 하여 어린이를 위해 쓴 산문 문학의 한 갈래', 이 정의의 문학이 바로 '동화'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동심'이란 무엇인가? 생뚱맞지만, 일본의 에니메이션 <짱구>를 예를 들어보겠다. 아이들을 한참 키우던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 에니메이션 <짱구>를 못보게 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인 기억을 가진 부모들이 있을 터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매번 못보게 하는데 어린이 채널만 틀면 자주 나올 뿐더러,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어른들이 보기엔 종종 '선정적(?)이기 까지한 그 내용을 아이들은 재밌어 했다. 이런 식이다. 어른들이 자라던 시절 가장 즐겨보던 백설공주니, 신데렐라를 이제는 좋은 동화라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용어까지 생겨날 지경이다.

가치 판단을 제쳐두고,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되새겨 보면, 굳이 '잔혹 동화'란 범주를 따로 둘 필요가 없을 만큼 적나라했다. 왕비는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의붓 딸을 죽이려 했고, 심지어 요리를 해서 먹고자 했다. 그런 왕비에게 주어진 벌은 뜨겁게 달군 무쇠 신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주는 것이었으니, 요즘 웬만한 형벌 저리 가라다. 자신의 저주 걸린 발을 스스로 자른 '분홍 신을 신은 소녀'는 어떻고. 그 반대도 있다. 착하게 잘 지내니, 굴러 들어온 호박이 황금 마차로 변하기도 한다. 아니 왕자와 결혼을 꿈꾸던 바닷 속 공주는 허망하게 물방울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예전 사람들이 요즘의 사람들에 비해 '속물'이라서 저런 동화가 오래도록 '회자'되었던 것일까? 오늘날 출판물의 형태로 정화된 동화보다 훨씬 '잔혹'했던 원형질의 동화가 오래도록 '스테디셀러'였던 의미는 어쩌면 가장 본원적인 '인간의 욕망과 그 가감없는 구현의 결과물을 적나라하게 반영'해 주었다는데 있지 않았을까? 백설 공주와 신데렐라를 부정하는 어른들은 정작 여전히 tv를 통해 변종된 '동화'의 형태로 이 시대의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드라마들에 매료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인기 작가 김은숙의 드라마는 바로 저 '동화적 욕망'의 가장 충실한 구현이 아닐까? 바로 그 가장 '솔직한 인간의 원형'을 통해 '성장의 치유제'가 된 이 시대의 동화 한 편이 찾아왔다. 바로 <몬스터 콜>이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몬스터가 들려 준 동화
말기 암에 걸린 엄마와 사는 소년 코너, 그에게 학교는 '폭력'이라는 통과 의례를 거쳐야먄 하루 일과가 끝나는 곳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밤, 그의 방에서 바라보이던 언덕 위의 느릎 나무가 '몬스터'가 되어 찾아왔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형색과 다르게 그에게 '동화'를 들려주겠다는 몬스터, 하지만 그냥은 아니다. 언제나 동화 속 '이종의 존재'들이 그러하듯, 몬스터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맞추라거나, 혹은 비밀의 보화 대신, 소년이 만든 동화를 요구한다.

몬스터가  들려준 첫 번 째 동화, 우리가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었을 법한 계모 왕비와 왕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이와 도망을 친 왕자는 그녀를 잃고,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마녀 왕비를 물리치고 왕국의 계승자가 되었단다.
그런데,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치 100년의 잠에서 깨어난 숲 속의 공주가 뜻밖의 식성을 보이듯, 왕좌를 차지하고 훌륭한 성군이 된 왕자의 뒷담화에는 뜻밖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두 번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신실한 목사와 그를 시험에 빠뜨리는 마법사같은 약사의 이야기 역시 숨겨진 진실을 가지고 있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우리는 언제 '성장'할까?
어릴 적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은 '흥부'처럼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곧이 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머리가 좀 더 커지고 단단해 지는 그 언젠가부터, '흥부'가 좀 '바보'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식이다. 어린 시절 전달된 '이야기의 교훈'들을 곧이 곧대로 '수용'하던 소극적 수용자'들은 조금 커지자,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몬스터'의 힘을 빌어 '사고'를 친 코너는 한결같이 어른들에게 묻는다. 저에게 벌을 주지 않나요? 저를 야단치지 않아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복선'이 될 대사이다.

어른들은 코너를 그저 엄마가 아픈 불쌍한 아이로만 '대상화'시킨다. 하지만, 정작 '몬스터'에 의해 결국 드러난 코너의 속내는 그보다 복잡하다. 왕국을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왕자나, 한밤중 약사를 찾아간 목사처럼. 그리고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증거이다. 어른들이 단순하게 생각하듯 코너는 그저 엄마를 잃는 것만을 생각하는 단순한 아이만이 아닌 경계선에 서있었던 것이다.

몬스터의 동화는 그래서 마치 옷의 겉감과 안감처럼 두 개의 전혀 다른 질감의 속살을 가진다. 세상에 알려지는 이야기와, 미처 드러낼 수 없었던 속사정이라는, 그리고 코너는 그 이면의 속살을 가진 이야기들을 발판 삼아, '폭력'으로 밖에 표출 할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용기를 얻는다. 그 '용기'의 관건은 가장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진솔한 모습은 비겁하고 때로는 용렬하며, 심지어 '도덕'이라는 잣대에서는 한참 비켜 선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이다. 소년은 질타하지만, 몬스터는 그가 들려준 동화 속 주인공 그 누구도 힐난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속사정을 지니고 살아가는게 인간이라는 듯. 마치 조금은 머리 커져버린 우리가 '놀부전'을 탐닉하게 되듯이 말이다.

소년은 무시하지만 어느 덧, 스스로 용기를 내어, 자신이 외면했던 악몽을 직시한다. 그리고 그 악몽 속에 숨겨진 용납할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소년에게 '몬스터'는 자기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몬스터 콜>은  꼬리에 꼬리를 문 '동화'이다. 소년 앞에 나타난 몬스터, 그 설정 자체가 동화적이지만, 한 술 더 떠서 몬스터는 나타나서 '동화'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 동화 속에는 또 다른 잔혹 동화가 숨겨져 있고, 그 동화와 잔혹 동화의 과정은 일그러진 욕망으로 표출된 소년의 해프닝과 궤를 같이 한다. 누군가에게 맞는 걸 넘어서 스스로 '파괴자'가 되어가던 소년의 파국을 '몬스터'와 '동화'는 욕망의 배출이자, 정화의 동화가 되어, 소년을 이끈다. 할머니가 꽁꽁 잠궈놓았던 엄마의 방에서 만난 스케치들, 그리고 마지막 엄마와 눈을 맞추던 몬스터까지. 영화는 충실하게 또 한편의 동화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우여곡절의 동화를 통해 그저 엄마와의 이별이 싫고, 엄마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소년은, 이제 엄마를 보낼 수 있게 '성장'한다. 그렇게 거대한 성장의 담론은 소년은 슬프지만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라는 성숙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몬스터'라니 정말 괴물 영환줄 알고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온 부모들은 내내 칭얼거리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코너라는 소년의 이야기지만, 오히려 영화는 아직도 tv 속 동화에 위로를 얻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몬스터 동화이다. 자신을 다져넣고 욕망을 거세하며 사는 것이 '어른'이란 여기며 사는 이 시대의 '어른이'들에게, 솔직담론으로서의 <몬스터 콜>은 결국 눈시울이 붉어질 수 밖에 없는 어른을 위한 찐한 동화 한 편으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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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9.23 17:39

개봉 5일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살인자의 기억법>이 박스 오피스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설경구, 김남일의 강렬한 연기에 원신연 감독의 절묘한 연출에 힘입은 바 크지만, 최근 <알쓸신잡>에서 다시 한번 존재감을 확인시킨 김영하 작가의 원작이라는 '뒷배'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김영하 작가는 애써 원신연 감독의 연출과 자신의 원작의 거리를 두고자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부터 시작하여 이미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베스트 셀러였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은 사람이라면 과연 이 작품이 스크린에서 어떻게 구현이 될 지에 대한 궁금증이 극장으로 향하는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같은 소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구분이겠지만, 마치 80년대 운동권이 추억을 90년대 2000년대의 한국 소설이 '후일담'의 형식으로 다루어 한 장르화 되었듯이, <살인자의 기억법>은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번져나갔던 '기억'에 대한 장르에 속하는 듯 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어패'가 있는 게 세월호 사건은 2014년인데 반해,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 보다 한 해 전인 2013년에 출간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치 '선견지명'이라도 되듯이, 작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이코패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기억'과 '존재'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펼쳐놓으며 세월호 사건 이후, '망각'이란 사회적 정서에 대응하여 애썼던 일련의 흐름에 마중물인 듯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기억을 잃어가는 사이코패스 노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기억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가운데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실체를 '폭로'하고야 만다. 애쓰면 애쓸 수록 헷갈리는 자신의 존재, 자신이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인 건 알았지만, 결국 시간이 다한 모래 시계처럼, 그의 기억이 다한 곳에서 만난 그의 존재는 원신연 감독이 그려낸 딸을 살려내기 위해 애쓰는 최소한의 인간적 미덕을 지닌 아버지 따위도 없이 참담하다. 그저 '살인'의 기회를 얻은 그때 이래로, 죽이고 또 죽여왔던, 한 연쇄 살인범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참담한 목도의 과정을, 김영하 작가는 영화 속 병수가 자신의 흐트러진 기억을 녹음기에 담는 그 장면부터 스크린 위에 펼쳐진 스릴러 영화처럼 구성하여 결론에 도달한다. 

일찌기 <주홍 글씨(2004)>, <오빠가 돌아왔다(2010)> 등 김영하의 작품 다수가 영화화 된 것은 한국에서 드문 그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전작 작가 중 한 사람이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늘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던 베스트 셀러 작가였다는 점이 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김영하 작가의 작품의 영화화를 설명하는 건 부족하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각색으로 2005년 대종상 각색상 수상처럼, 김영하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소설보다 머릿 속에 자연스레 그려지는 영상적 서사에 공감한다는 점이 '영화같은 소설'로서의 김영하 를 손꼽을 수 있다는 점이 된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176페이지, 장편 소설이라기엔 짧은 분량이다. 내용 역시 '기억'과 '존재'에 대한 구구절절 작가의 사상 대신, 기억을 잃어가는 병수가 헤집고 다니는 기억의 편린들이 '이미지화'되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나는 건, 그 어떤 합리화로도 해명할 길없는 존재의 허무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가 그토록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그 '기억'의 존재가치를 일찌기 김영하는 설파했다. 흐트러지고 흩어지는 기억의 편린을 잡아 결국 도달한 그 '허무'의 기록을 통해 묻는다. 당신은 기억할 만한 존재인가? 그것은 2013년 허황되고 허무했던 한국 사회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소설같은 영화 
그렇게 휘발되고 마는 허무한 존재의 이야기를 영화로 빌어오며 원신연 감독은 그 포문을 뜻밖에도 주연 설경구의 대표작 <오아시스>의 오마주로 연다.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 철교 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나 돌아갈래를 외치던 그 설경구는 이제 기억을 잃은 노인이 되어, 역시나 굴 앞에 서서 당혹스러워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 '당혹'의 근원을 찾아 설경구, 영화 속 병수의 기억의 터널 속으로 들어선다. 

김영하 작가가 원작과 영화의 거리감을 유지하고자 하듯, 기억의 편린 속을 헤매다, 겨우 추스려 붙잡은 존재가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을 감독 원신연은 뒤집어 버린다. 결국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가 그려낸 서사의 구성은 빌려 왔으되, 원신연의 각색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 한국적 정서에서 가장 익숙한 '아버지'의 역사가 된다. 

역시나 사이코패스지만, 이제 알츠하이머를 앓아 잃어가는 기억을 녹음기에 의존하여 붙들어 두려는 병수, 하지만 그에게는 소설과 다르게 진짜, 딸(?) 은희와 그의 앞에 나타난 태주라는 그와 같은 연쇄 살인범이라 추정되는 인물이 있다. 소설은 그 모든 것을 병수에게 나타난 병증으로 휘발시켜 버리지만, 영화는 그들을 실존으로 끌어들이며 사이코패스 병수의 존재에 부피를 더한다. 



그러기에 결국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이코패스 병수를 통해 또 한 편의 아버지의 고군분투기로 귀결된다. 또한 실존하지 않은 누나의 존재를 끌어들여, 사이코패스란 그의 연쇄 범죄 행각의 근원을 추적하고, 그 끝에서 핏빛 폭력으로 얼룩진 우리의 가족사를 끄집어 내어온다. 

즉, 소설이 알츠하이머가 심해진 병수 앞에 나타난 자신과 같은 연쇄 살인범과 딸 은희의 존재조차 그의 병적 기억의 산물로 만들며, 사이코패스란 존재론를 허무하게 설파했다면, 영화는 그 존재론을 수용하되, 사이코패스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인간 병수의 생애를 덧칠한다. 오히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명징한 한 장면에 집중한 단편 같다면, 원신연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비록 여전한 아버지의 활극이지만, 그 서사로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깊이를 가진 장편 소설과도 같이 다가온다. 특히 영화의 앞과 뒤편, 오마주한 <오아시스>의 장면들이 김영하가 소설 속에서 인용했던 숱한 '시간'에 대한 인용구처럼, 병수란 사람이 불가항력으로 맞닿은 시간에의 허무를 설명하며 영화의 문학적 색채를 더한다. 

그 누군가에겐 원작이 말하는 바, 사이코패스조차 무기력한 '기억'과 '시간'의 주제가, 실존의 가족을 가진 병수를 통해 윤색되었다고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반대로, 작가가 드러낸 편린의 상념이, 아버지 병수를 통해 '회한의 기억'들로 설득력있게 구현될 거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좋았던 것은 원작의 덕택이든, 모처럼 어설프지 않은, 상투적이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설경구라는 대체 불가한 배우의 호연, 그리고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던 김남길의 존재감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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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9.16 15:27

공교롭게도 코폴가 가문 모녀의 영화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얼마전 코폴라 감독의 아내인 엘레노어 코폴라가 81세의 감독 데뷔작 <파리로 가는 길>에 이어, 그녀의 딸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엘레노어 감독의 <파리로 가는 길>이야 데뷔작이고 남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원 아래 배우들을 섭외했다 하여 그렇다 치지만, 소피아 코폴라 감독을 그저 '코폴라'란 가문의 이름 아래 두기엔 소피아 코폴라란 이름의 그늘이 무성하다. 엄마와 딸의 영화, 두 모녀는 모두 '여성'에, 그리고 그들의 숨겨진 혹은 억눌린 이면에 촛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엄마의 <파리로 가는 길>이 보다 로맨틱하고 데뷔작임에도 연륜의 깊이가 담겨있다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여성,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담겨질 수 없는 끈끈한 욕망과 생존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담고자 한다. 그리고 칸 영화제는 그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손을 들어, '감독상'을 수여했다. 




2017년판 <매혹당한 사람들> 
<매혹당한 사람들>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토머스 컬리넌이 1966년 발표한 그의 첫 소설이(<The Beguilled>)다. 그리고 이 소설은 1971년 <더티 해리>의 돈 시겔 감독에 의해 클린트 이스트우스를 남자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로 이미 만들어진 바 있다. 그리고 이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2017년 다시 한번 영화화한다. 

1966년 발표와 함께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받았던 <매혹당한 사람들>은 남북 전쟁이 한참이던 시절, 남부연합 소속의 버지니아 주 마사 판스워스 신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말이 학교지, 전쟁으로 인해 학생과 교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교장과 또 한 명의 선생님,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학교에 남는 것이 처지가 나은 다섯 명의 소녀, 그리고 한 명의 흑인 노예만이 남아 덩그러니 큰 남부의 저택을 북군의 공격과 남군의 침탈로 부터 지켜가며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처지이다.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이슥한 숲으로 버섯을 따러 간 소녀 아멜리아는 숲 속에 부상을 입고 낙오된 북부의 병사 존 맥버니를 발견하고 학교로 부축하여 돌아온다. 전쟁으로인해 고립된 공간에 남겨진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 그리고 거기에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한 남성, 이 폐쇄적 공간에서 극단적으로 편파적인 성비의 만남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빚어낸다. 

그 설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진진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는,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 주인공에 촛점을 맞추어 그 애증의 서사를 펼쳐나간다. 그렇다면 2017년 칸이 감독상을 수여한 소피아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달랐을까?

존 역의 콜린 파렐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지만, 마사 교장 역의 니콜 키드먼, 선생 역의 커스틴 던스트, 그리고 학생 엘르 패닝 등으로 가면 남성과 여성의 성비만큼이나, 그 존재감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또한 2003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2006년 <마리 앙투와네트>, 2013년 <블링 링>까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여성'에 방점이 찍힌 영화의 주제 의식이 미루어 짐작된다. 



전쟁이란 시간과 공간 속의 여성들
아멜리아가 부상을 입은 존 맥너니를 데리고 온 마사 신학교, 말이 남부 연합이지, 교장 마사는 남부 연합의 군인들이 자신들이 몰래 키우고 있는 소와 밭 작물을 '공출'해 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처지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북군'은 자신들의 가족을 전쟁터로 내몬 성경 속 악마와 같은 '적', 그렇게 생존에 몰린 여성들의 공동체에, '적'이나 그녀들과 다른 성인 북군 존이 들이닥친다. 

파편이 박혀 부상이 심한 다리로 인해 그대로 남군에 넘기면 죽을 것이 뻔한 상황, 기독교 인도주의 정신을 내세워 존의 부상을 치료해주기로 선생과 학생들은 마음을 모은다. 자신의 가족을 전쟁터로 내몰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 그리고 자신들에게도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적'이라는 적개심은, 그러나 방어 불능의 부상자이자, 그녀들과 다른 남성이라는 요소로 인해 잔뜩 동여맸던 교장과 학생들의 적대감과 경계심을 허물어 뜨린다. 물론 그 층위는 각자 다르다.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똘똘 뭉친 교장 마사는 존의 몸을 닥아주며 달아오른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곧 냉정한 교장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한다. 오빠보다 무거운 존을 이끌며 학교로 데려온 아멜리아는 그를 자신의 친구라 여긴다. 마사 학교의 이방인, 도시로부터 이곳으로 온 에드위나는 처음부터 이방인인 그에게 별다른 경계심이 없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감정적으로 저항하던 캐롤 등등.

영화는 원작에서 등장하던 여자 흑인 노예의 설정을 없애고, 성애의 전면적인 등장 대신, '교장이 존을 좋아한다'던가 하는 식의 뒷담화와 교장과 선생, 학생들간의 묘한 심리적 변화를 통해 작품을 이끌어 간다. 전쟁 속에서 여성들만의 공간을 지켜가야 한다는 절박감, 방어심이, 자신들의 공간으로 들어온 무방비한 남성을 통해, 여성성을 회복하고 도발하며 만개하는 과정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자연스레' 그려나간다. 회복 정도에 따라, 괴물과 같은 적이 아니라, 북군이지만 충분히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신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 마사 학교 여성들은 그와의 만찬날 한껏 차려입은 각자의 드레스만큼이나 급격하게 각자의 여성성을 회복해 나간다. 

그러나 애초에 일곱 명의 고립된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라는 불공정한 성비는 '비극'을 잉태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에게 어필하던 그녀들, 그리고 그녀들에 맞추어 그녀들을 대하던 존은 그의 '추방(?)'을 앞둔 어느 날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비극'으로 향한다. 일곱 명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이 가지는 불안하지만 도발적이었던 동거는, 선의였던 의도적이었던 존의 '실족'으로 불행을 향해 달려가고. 결국 생존 공동체이자, 운명 공동체였던 마사 학교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른다.

영화는 존이 그들을 자신의 편의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응, 혹은 적극적으로 유도해가는 마사 교장과 에드위나, 캐롤, 아멜리아 등의 욕망과 의지에 주목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며 존을 그곳에 머물게 하는 그 순간에서 부터, 마지막 남군 연합에게 존을 양도할 때까지, 그녀들은 욕망의 공모자이자 생존의 조력자로 서로에게 충실한다. 존이라는 한 남성을 두고 경쟁하지만, 한껏 빼어입고 식사 자리에 앉아, 각자의 매력을 뽐내는 그녀들의 모습은 '위악적 본성'이라기 보다는, 여성성의 가장 자연스런 발로로 소피아 감독은 그려낸다. 하지만 그 여성성이 유약하진 않다. 자신들이 기만당하고 도전받았을 때,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낸다. 전장 속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운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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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9.11 15:19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은 바 있다. 그러기에 과연 이 지적인 소설이 어떻게 스크린 위에 구현되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은 후 다시 처음부터 뒤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반전'이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작가의 전복적 의도 때문이었다. 글의 구성이 곧 소설의 주제 의식이라 말할 수 있었던 그 '역설'을 과연 영화는 어떻게 그려냈을까?


영화를 본 내 처지는 영화 속 토니 웹스터(짐 브로드밴트 분)의 황망함에 비견될 수 없겠지만, 나 역시도 내가 읽었던 책과 내가 본 영화의 갭 사이에서 잠시 혼돈을 느꼈다. 결국은 같은 반전을 가진 것이었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왔던 두 책과 영화, 그 간극에 토니처럼 역시나 나의 자의적 '해석'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소설 그 널찍한 행간
영화는 영국 런던의 거리에서 이제는 '빈티지'가 된 하지만 여전히 가치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토니의 카메라 상점과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토니의 고즈넉한(?) 생활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이혼한 전처와 홀로 새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그의 딸을 등장시키며, 해체된 가족을 지닌 소통불가의 한 가장이었던 사람을 설명한다. 그런 그에게 도착한 첫사랑 베로니카 어머니의 부고, 그리고 그녀의 유언으로 남겨진 고등학교 시절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그렇게 토니는 자신에게 전달된 뒤늦은 과거의 편린을 통해 과거로 흘러들어간다. 

거기엔 시계를 거꾸로 차는 것이 무리의 자랑인 양 으쓱거리던 또래 청소년들의 부풀음이 담겨있는 고등학교 시절과, 전학생 에이드리언이 있다. 평범한 패거리였던 토니와 그 친구들과 달리, 선생님과 대등하게 역사를 논했던 에이드리언(조 알윈 분)은 학창 시절부터 남달랐다. 

영화 속 수업의 한 장면으로 등장한 역사 시간, 소설은 그 시간에 보다 천착한다. E.H.카가 말한 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의 정의를 놓고, 격돌한다. 에이드리언은 여기서 말한 '과거'에 반기를 든다. 허구의 역사학자 라그랑주를 인용하여,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주장을 펴낸다. 즉, 역사라는 것이 기록물에서 건져진 사실들을 기반으로 저술된다 했을 때, 기록물이라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전면적인 대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당사자의 편협된 사상을 문제로 삼았을 때, 역사는 결코 그 어떤 순간에도 객관적인 사실을 구성해 내지 못한다고 에이드리언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이 그것을 기록하는 그 누군가의 자의적인 역사가 될 수 밖에 없는 '상대주의', 거기에 주인공 에이드리언도 작가 줄리언 반스도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에이드리언 자신이 그런 상대주의적 기억 속에 박제되어 사라진다. 



빈티지가 되어가는 세대의 반성
영화는 그의 빈티지한 카메라 상점같은 토니의 삶에 집중한다. 평범하지만 치기어렸던 청소년시절, 거기서 만난 반짝이던 별과 같은 친구 에이드리언, 그리고 60년대의 자유분방했던 대학생 시절, 그곳에서 그가 여전히 카메라를 놓지 못한 이유가 된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가족과 운명적인 만남을 나열한다.  홀로 출산을 앞둔 만삭의 딸과 말도 섞기 힘든 노땅이 된 토니에게 전달된 한 통의 소식으로 그는 망각의 그 역사 속을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현재의 토니와, 그 전처와 딸과의 관계, 즉 해체된 가족과 그 가족에서 놓여난 가장의 모습에 영화는 촛점을 맞춘다. 그에게 배달된 '과거'는 굳은 살이 베겨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꺼내들게 만들고, 자신을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60년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난 베로니카, 하지만 그녀를 따라서 간 그의 집에서 만난 그녀의 가족들, 영화는 식사 자리에서 오가는 '지적인 대화'와 여자 친구의 어머니 그 이상인 분위기의 사라(에밀리 모티머 분)를 통해 청춘의 잔해를 설명한다. 그리고 전해진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교제, 그리고 그의 비극적 결말. 

토니의 기억 속 과거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그에게 전달된 사라의 죽음과 그녀가 그에게 전해주려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통해 토니는 자신의 빠뜨렸던 젊은 날의 역사 속 행간을 더듬어, 비겁하고 치졸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목도하고야 만다. 토니의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가는 영화는 '토니'의 '가족 영화'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비겁했던 과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아버지, 그리고 이제서나마 가족들을 돌아보기 시작한 가장이라는 '가족 영화'의 전형적 구조를 따라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리고 영화와 소설의 범주가 궤를 달리한다. 소설속 청소년 에이드리언이 역사 선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저 다른 역사적 시각이 아니다. 우리가 이른바 상식이라, 객관이라 말해지는 바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그리고 그건, '객관'이 된 세대, 그리고 삶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황망한 반전으로 등장했던 에이드리언의 삶은 그리고 그게 제기했던 그 객관에 대한 도전, 그는 삶조차 의도했던 그러지 않았든 그 시대가 객관적으로 예단한 삶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그런 에이드리언의 맞은 편에 토니가 있다. 영화 속 토니, 그는 노땅이 된 고집불통 할아버지, 하지만 그는 60년대에 청춘을 보내 세대의 전형이다. 자유분장한 사고를 하며, 그못지 않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했던, 하지만 그는 베로니카의 당당함과, 부유하고 지적인 그녀의 가족들 앞에 위축돠고, 그런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에이드리언에게 비겁했던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그 졸렬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행간에 지운 채, 자신의 세대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줄리언 반스가 토니에게 보낸 과거의 기억은, 그저 토니라는 노인이 아니라, 60년대 세대에게 보낸 회한의 반성문이다. 즉 이제는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라며 저물어 가는 기성 세대, 그 행간의 비겁을  토니라는 인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런 작가의 시대적 야심은 하지만 영화로 오면, 같은 이야기인데 개인사, 혹은 가족사의 범주로 국한된다. 무엇보다 토니, 베로니카, 그리고 그의 가족, 에이드리언의 이 복잡 미묘한 우정, 애정,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계급과 사상의 범주를 영화는 '스캔들'의 차원으로 치환시켜 아쉬움을 남긴다. 아버지의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의 반성을 이야기하지만, 소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같지만 다른 범주와 빛깔의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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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9.08 13:14

갑자기 하늘이 높아진 계절에 딱 맞춤한 영화다 싶다. 가을은 그저 높아진 하늘과 서늘한 온도만이 오는 게 아니라, 그 낮아진 기온과 함께 외로움, 쓸쓸함도 함께 온다고 어느 분이 말했던가. 그렇게 아직은 한낯의 볕이 저항을 하지만 계절의 서늘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무는 해와 함께 고꾸라져 버리는 환절기, 아마도 <더 테이블>은 이런 계절의 정서를 함께 하기엔 딱인 영화일 듯 싶다. 




주목하다
<더 테이블>속 시선은 지켜보다라고 하면 좀 아쉬운 느낌이 든다. 그 보다는 주목하다라는 조금더 목적의식적인 술어가 적확하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한 까페를 주목한다. 서울 어느 골목 한 켠의 까페, 그리 세련될 것도, 화려할 것도 없는, 오래된 상들리에와 그 오래된 상들리에만큼 시간의 흔적이 묻은 테이블이 있는, 그래서 찾는 이도 그리 많지 않은 까페, 그곳의 테이블에 물컵에 담긴 흰 꽃 몇 송이가 올려지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손님들을 주목한다. 오전 11시 에스프레소와 맥주를 사이에 두고 앉은 예전의 연인 유진(정유민 분)과 창석(정준원 분), 오후 두 시반 두 잔의 커피와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사이에 둔 채 신경전을 벌이는 경진(정은채 분)과 민호(전성우 분), 오후 다섯 시 두 잔의 라떼를 사이에 둔 채 사업인지 연민인지 모를 은희(한예리 분)와 숙자(감혜옥 분), 저녁 아홉 시 커피와 홍차를 사이에 두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찍을 뻔한 혜경(임수정 분)과 운철(연우진 분)

하룻동안 이 네 커플의 만남은 우리 사회 인간 군상의 단면을 충분히 보여준다. 한때는 연인이었지만, 이제는 속물과 찌라시의 주인공이 된 남녀가 빚어내는 불협화음, 그리고 그 간극의 서늘함. 관계보다 감정이 앞서는 이 시대 연인들의 뒤늦은 사랑 만들기의 어깃장과 그 어깃장의 끝에서야 어렵게 시작된 사랑, 진심조차 포장할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진심을 길어내는 사기 공모자 커플, 그리고 그 흔한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신파의 2017년 자본주의 버전까지. 하룻동안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이들의 사연은 그 하나로 영화가 되고 서사가 됨직한 것들이다. 



우리 시대의 미시사
하지만, <더 테이블>에서 그런 네 커플의 사연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를 보다보면, 그들의 사연보다, 그 사연을 오가는 테이블 위에 떨어뜨리고 가는 그들의 감정과 정서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 속 혜경은 홍차를 시킨다. 홍차가 우려지는 티포트, 맑은 물 속에 붉은 빛깔의 차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영화는 집요하게 지켜본다. 이런 식이다. 영화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만나는 두 인물의 감정, 정서를 마치 홍차가 우려내어지는 그 순간을 주목하듯 한 치의 감정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관객은 '이해'를 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 되는 인생사의 그 한 장면, 주인공들의 속내를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찌라시의 주인공이건, 혹은 이제는 과거의 연애사보다 동료들에게 자랑할 사진 한 장이 더 중요한 속물이 됐을 지라도, 미친 짓을 바래는 미친 년이 되었을지라도, '사기'를 직업으로 하다 덜컥 사랑에 발목잡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던 가락으로 결혼조차 이루려 하고, 그 결혼에 '역지사지'로 엮어들어가더라도, 풋사랑에 안달을 하더라도, 세상사 얼마든지 비난과 구설수와 심지어 욕설의 대상이 될 그 사연들이 그 테이블 위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얻고 간다. 

문득 궤를 달리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김종관 감독이 홍상수 감독처럼 오래도록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대의 '미시사'랄까? 늘 무언가 구체적인 꺼리를 가지고 선명한 주제 의식을 전달해야 하는 한국 영화의 흐름 속에서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생소하다. 그래서 소중하다. 서사의 행간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이런 영화를 종종 휴식처럼 만나 이해받고 싶다. 오래도록 우리 시대의 마음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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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9.01 21:49

<파리로 가는 길>을 보러 갔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나이때문일까? 중장년층의 여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극장을 채운다. 영화 속 여주인공 앤(다이안 레인 분)의 프렌치 로드를 자신들이 떠나기라도 하는 듯 어딘가 설레임을 담뿍 담은 표정들, 과연 엔딩 크렛딧이 올라가고 이분들이 원했던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셨을까?


공자께서는 나이 마흔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不惑),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아셨다는데(知天命),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오십이란 '갱년기'라는 신체적 증상만으로는 다 품을 수 없는 막막한 시절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막막한 시절에 <파리로 가는 길> 여주인공 앤이 서있다. 



아내라는 이름표로 살아가는 앤의 뜻하지 않은 일탈
미국 나이로 쉰 두 살. 앤은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알렉 볼드윈 분)의 아내다. 그녀를 소개하는데 마이클의 아내라는 이름표가 가장 앞선 건, 현재 그녀의 존재가 그렇다는 것이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을 따라 영화의 도시 칸으로 휴가를 온 부부. 한때는 의상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젠 그것마저도 손을 놓고, 애지중지하던 딸도 다 커서 그녀의 품을 떠났다. 휴가라고 칸에 왔지만, 바쁜 남편은 업무상 스케줄로 바쁘고, 그녀는 호텔에서 시켜먹은 식사조차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 하지만 샌드위치를 두 개나 시켰다고 잔소리를 하던 남편은 정작 그녀가 없이는 자신의 물건 하나 제대로 찾을 줄 모르는 사람, 거기에 그녀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 속 앤만이 아니라, 오십 줄에 들어선 '아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는 대다수 여성들의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사업차 바쁜 남편이라도 그래도 함께 칸에 온 그 여행조차도 남편의 바쁜 영화 제작 스케줄을 허락치 않는다. 문제가 생겨 당장 부다페스트로 떠나야 하는 부부,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앤의 귀 통증은 그녀의 비행을 허용치 않고, 거기서 등장한 남편의 사업 파트너 자크(아르노 비야르 분)가 그녀에게 자동차를 이용한 파리 행을 제안한다. 

그런데 7시간이면 도착할 것같던 파리 행, 공항 가는 그 잠깐 동안에도 아픈 그녀를 위한 약에서 부터 딸기 등등을 구하느라 차를 멈추던 자크는, 이제 앤과 길을 떠나자 작정을 한듯, 샛길로 빠진다. 하지만 그런 자크의 곁눈질에 이미 남편으로부터 프랑스 남자의 방탕함을 경고받은 바 있는 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파리에 도착해야 한다는 현대 미국을 사는 사람으로서의 강박이 그녀를 재촉한다. 

영화는 그렇게 바쁜 남편 마이클을 제외한 그의 아내 앤과 그의 사업 파트너 자크의 동상이몽을 주된 갈등으로 제시한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여전히 그 나이에도 독신의 삶을 즐기는 남자, 미국식 시간 관념이 내재화된 사람과, 지금이 아니라면 맛볼 수 없는 그것을 위해, 혹은 지금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것들, 혹은 사람을 위해 언제라도 시간을 허용할 수 있는 프랑스 식 삶을 대비시킨다. 또한 부유한 남편을 가졌지만(?)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아니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자신이 없는, 하지만 그 무엇을 해야할 이유조차 없는 사람과, 지금 현재 이곳에서의 삶과 즐거움이 곧 인생이라고 믿는,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사업 일정과 자금에 쫓기는 사람의 만남이다. 

자크는 길을 떠나자 마자 마주친 생 빅트와르 산을 세잔의 명화를 통해 그녀에게 소개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전히 귀는 아프고, 남편의 잔소리에, 파리로 갈 여정만이 가득하고, 이 프랑스인 남자도 부담스럽다. 그런 그녀가 자크의 도발적인 프로방스, 가르동 강, 리옹으로의 여정을 통해 변해간다. 빅트와르 산을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가, 자크와 함께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을 재현하며 마을을 열고, 리옹의 자수 박물관과 베즐레이의 성 막달레나 대성당으로 기꺼이 에돌아 가기를 원하기에 이른다. 



로맨스를 넘은 질문들 
자크는 이 여정에서 그녀에게 '손끝하나 안 대기로 마음을 먹었다'지만, 영화 속 그가 보인 행보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그것이다. 여자가 원하는 장미로 차를 채우고, 여행지의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그녀를 유혹하고, 달콤한 말로 그녀의 귀를 간지른다. 하지만, <파리로의 여행>을 그저 오십 줄 자크와 앤의 연애 이야기로 보면 아쉽다. 오히려 그 보다는 오십줄, 자신의 존재에 길을 잃은 앤에게 자크는 그녀 앞에 얼마든지 열려있는 새로운 길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도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자크는 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건 그저 첫 눈에 이 여자가 이뻐라고 하는 그 남성적 본능이 아니라, 마이클의 사업적 파트너로서 오랜 시간 그녀를 보아오며, 오십이 되도 여전히 매력적인 앤에 대한 '헌사'이다. 남편은 그녀를 자신의 물건을 찾아주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소모하지만, 자크에게 그녀는 늘상 카메라를 달고 살며, 그 카메라를 통해 섬세한 지점을 포착해낼 줄 알고, 그것을 통해 전체를 연상케 만드는 능력자이다. 이제 남편의 도구와, 자식에게마저 지켜볼것만 남겨진 그녀가 자크를 통해, 그와의 여행을 통해 오십 줄에도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본질인 것이다. 

귀가 아프던 그녀는 어느 틈에 귀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여정에 동참했던 관객들조차 자크의 도발적 행보와 그 행보에서 그녀가 보이는 긴장감에 어느덧 그녀의 그 '스트레스성 증후군'을 놓아버린다. <파리로 가는 길>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뻔히 스트레스성 질병인 게 보이는 앤과 함께 여행을 하며, 그녀가 자크의 담배처럼 자신의 초콜릿 중독을 털어놓고, 결국 그 누구에게도 끄집어 낼 수 없었던 오랜 아픔을 고백하기까지, '프랑스 로드'의 여유와 낭만이 주는 일탈을 만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짝짝이 양말을 줬다고 모로코에서도 양말을 찾는 남편과 그녀가 쥐어준 짝짝이 양말을 기꺼이 신어주는 남자, 이 현실적이고도 낭만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그녀는 마지막 자크가 보내준 장미 초콜릿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천명의 시절,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갈 것이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비록 함께 여행하며 유혹해주는 멋진 남자는 없지만,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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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8.10 14:51

위안부'와 관련된 망언으로 질타를 받았지만, 한때 그녀의 책이 베스트 셀러 순위를 점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시오노 나나미다. 그녀의 <로마인 이야기> 정도는 읽어줘야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 대중적 역사가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호소력높은' 작가여왔다. 그런 그녀의 책 중에,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있다. 


1459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에 오스만 제국의 10만 군대가 몰아닥쳤다. 새벽 1시 시작된 총공세는 날이 밝기도 전에 마무리되었다. 인류 역사의 중세가 마무리 되던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이 역사적 장면을 시오노 나나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베트 2세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 못지않게, 그 역사의 한 획에 참여한 병사, 즉 일반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총공세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을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정예군답게 갖가지 도구와 수단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철옹의 성벽을 거스르는 건 사람들이다. 철옹의 성벽을 무너뜨린건 결국 '인간의 목숨'이었다. 7000 명 남짓한 방어군을 공격하는 10만 대군, 결국 역사에 기록되는 건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라는 역사 속에는 목숨을 던져 성벽을 올랐던 사람들과, 또 그 성벽 위에서 안간힘을 쓰며 수성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 그 역사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역사에 던져진 인간들
영화가 시작하면 아직 앳된 티가 채 벗겨지지 않은 소년이라고 해도 크게 범주에 벗어나지 않을 몇몇 군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총성, 젊은, 아니 어린 군인들은 허겁지겁 뛰기 시작하고, 그들이 골목을 돌 때마다, 지형지물을 피해 몸을 숨길 때마다 그들은 스러져간다. 결국 마지막 아군의 진지를 가까스로 넘은 채 목숨을 구한 이는 단 한 명이다. 하지만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전에 총성은 따라오고, 그를 구한 진지의 군인들도 쓰러져 간다. 그 진지를 지나 겨우 도달한 해변, 엄호해줄 그 무엇도 없는 겨울 해변에 수를 가늠하기 조차 힘든 군인들이 '구출'에 생명을 내맡기고 있다. 그곳이 이제 유럽 대륙에서 밀리고 밀린 영국군의 마지막 배수진, 덩케르크이다. 

원래 배수진의 뜻이라면 자신들을 몰아친 상대로 물을 등지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는 것이지만, 영화 속 <덩케르크>의 군인들은 이제 다가올 독일군의 총공세를 피해 본국의 구원을 기다리는 마지막 동앗줄일 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2차대전은 화려한 연합군의 승리로 기록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 승리의 역사 속, 한  장면 10만 군인들의 생명이 몸을 가릴 곳 하나 없이 생존을 갈구하는 덩케르크 해변에서 '전쟁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엄호할 지형지물하나 없는 해변, 그래서 그들을 공격하는 독일군 비행기의 포격을 그저 몸으로 받아내, 운좋게 살아나면 다시 줄을 지어 탈출을 도모해야 하는 곳에서 미덕이란, 그저 살아남는 것. 그러기에 가까스로 독일군의 공격을 피한 토미가 죽은 영국군의 옷을 입은 깁슨과 죽어가는 병사를 의무병인채 함께 들고 구출선을 향해 달리는 모습에 반감은 커녕 절박한 응원에 동참하게 된다. 그 절망의 생존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물로 뛰어드는 병사의 막막함에 공감하듯이. 

이런 덩케르크의 생존기는 우리나라의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떠올리도록 한다. 이제는 중견을 넘어 노년이 되고, 혹은 돌아가시기 하신 한 작가들, 박완서, 이문열, 이문구,등 전쟁을 겪고, 그 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가들의 글에서는 <덩케르크>의 토미, 깁슨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수난기가 빠짐없이 등장했고, 그 생존의 수난기는 전쟁 세대를 상징하는 세대적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우리의 전세대가 경험했던 그 역사 속에 무기력하게 던져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성'이라 정의내린다. 덩케르크 해변에 뒤늦게 도착한 토미, 10만이 넘는 패잔병과, 하지만 영국 본국에서 구출하고자 하는 3만의 인원 사이의 엄청난 현실적 갭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토미를 몇 번이나 도와주웠던 깁슨이 결국 마지막 성공의 순간에 '영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도움을 받았던 영국군들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다음 차례는 토미 너 라며 울부짖듯 질타하는 그 동료 병사의 생존이 곧 정의라는 잔혹한 단호함이, 어쩌면 거대한 역사 속 인간 생존의 진솔한 목소리이겠다. 



이런 역사와 그 속에 던져진 인간에 대한 놀란 감독의 직관이 보다 긍정적으로 발현한 건 그의 전작 <인터스텔라(2014)>에서 였으며, 늘 역사적 숙명과 그 사이에 낀 자아의 고민은 그의 히어로 물의 주된 주제여왔다. 그리고 이런 놀란 감독의 생각은 뜻밖에도 최근 작년 우리나라에서 필독서가 되다시피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통해서 인문학적 정의에 도달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단언한다.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인류가 자랑스레 펼쳐온 문화를 '정신적 기생충'이라 명명한다. 그 기생충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인간의 희생을 도구로 삼아, 자신을 전파한다. 이 인간을 도구화 한 정의에 불쾌하지만, 그 승리의 2차 대전 전장에서, 덩케르크 해변에 줄을 지어 생명을 도모하는 숱한 인간의 대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탄식과 함께 유발 하라리의 정의가 떠올려진다. 거기엔 2차 대전의 승리 기록에 씌여있는 그 정의의 이데올로기란 없다. 그저 역사란 전장 속에 던져진 숱한 생명들이 있을 뿐. 그렇게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전진하는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생존을 도모하는 것. 그게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알렉스의 부끄러움과 상관없이 살아돌아온 그 자체가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구르고 뜯기고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해도 '생존'의 승리자가 되어 기록을 남겼던 전쟁 후 소설가들처럼. 



류적 존재로서의 동지애 그 이상, 인간을 빛낸 존재들
하지만 감독은 그저 역사의 전파체 '밈'으로서의 도구적 존재 인간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역사는 문명은 그들을 그렇게 수단화하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거기서 빛난다. 그들이 그런 역사라는 전장에서 꿋꿋하게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도모하여 빛나지만, 또한, 그 생명의 도모를 넘어선, 존재 이상의 모습으로 빛난다. 

겨우 도망쳐 나온 해변에서 구출의 희망을 잃은 채 망연자실한 토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깁슨의 몇 번의 동료애가 그랬고, 영국 해협의 거친 파도를 작은 배 하나로 넘으며 덩케르크 해변에 남겨진 자국의 병사들을 구하러 가는 도슨(마크 라이언스 분)을 비롯한  평범한 영국인들이 그랬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무사귀환 대신, 해변의 병사들을 마지막까지 엄호한 유일했던 영국의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 분)가, 병사들을 보내고 뒤에 남은 볼튼(케네스 브래너 분)이 그랬다. 그리고 등장하지 않았지만, 해변의 병사들을 엄호하기 위해 덩케르크 해변을 사수했던 엄호병들이 그랬을 것이다. 

<군함도>와 함께 개봉하는 <덩케르크>의 개봉 초반, 영국의 국뽕 영화란 평가처럼, 이들의 '헌신', '희생'이 조국을 위한 애국심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류적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의에서 그 본질을 찾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인간의 정의 또한  인간의 류적 존재의 생존을 위한 단위로서의 '이타적 본능'으로 귀결되는가 싶기도 한다. <덩케르크>에서 토미 등의 생존기가 빚은 공감의 눈물을, 파리어 등의 존재를 초월하는 행동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 앞질러 가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이타적 감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싶다. 그리고 그 '이타적 감성' 행위에 대한 감동이 곧 어쩌면 생존을 넘어선 인간의 진짜 '생존' 모듈이 아닌가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뭐 구구절절 이론을 들었지만, 결국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주는 감동은 생존을 넘어선다. 



그랬다. 늘, 놀란 감독은, 시간을 다룬 새로운 영화다 해서 보러갔는데, 존재의 형식에 대한 철학적 화두를 받아들었고, 히어로 물을 보러갔는데 사회적 존재와 자아의 문제에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잘 빠진 전쟁 영화(총 소리 하나에서 부터 전쟁을 실감나게 해주었다)라 해서 보러갔는데, 역사와 인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영화로 인문학하기, 이게 바로 덩케르크를 만든 놀란의 진짜 직업인가 보다. 구구절절 우리 영화는 어떤데라고 말하기 조차 구차하다. 그저 당대에 이런 감독과 함께 인간과 역사를 고민할 수 있어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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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8.03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