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아이들과 매달 책 한 권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도 학원에 가는 아이들에겐 '이야기 책' 한 권도 만리장성같다. 덕분에 겨우 앞에 몇 장이라도 들여다본 것이 감지덕지한 상황, 어쩐다, 찾아보니 동명의 영화가 있다. 책을 일고 토론해야 할 시간에 함께 본 영화, 나쁘지 않았다. 15세 관람가의 영국 영화는 가끔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민망'함을 배려한 듯 적절한 필터 처리가 되었고, 무엇보다 늘 6월이면 '전쟁'이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이벤트하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전쟁이란 것에 대해 청소년의 시선에서 진지하게 접근해 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던 것같다. (이 영화를 선정한 선생의 일방적인 시각만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맥 소로프의 베스트 셀러가 영화화된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는 맥 소로프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맥 소로프는 이 작품 <내가 사는 이유>가 그녀의 뒤늦은 데뷔작이자, 데뷔와 동시에 그녀를 미국, 독일, 영국의 상을 수상하게 만들고 '청소년 소설의 여왕'으로 등극케 한 작품이다. 그런 화려한 수상 실적과 함께 미국과 영국에서는 학교 도서실에 구비된 필독 도서이자, 이미 영화화되기 전에 드라마화된 바 있는 청소년 소설계의 베스트 셀러이다. 그러기에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이하 하우 아이 리브)>만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좀 더 재미있게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맥 소로프의 원작을 읽고 비교해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소설, 영화를 막론하고 이 두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든 첫 번째의 요인은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브루클린의 에일리스로 우리에게 알려진 시얼사 로넌이 분한 여주인공 엘리자벳(하지만 그녀는 극구 자신을 데이지라 불러달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데이지라 불러주자)의 캐릭터이다.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셋을 끼고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킨 15살의 데이지는 이제 막 아버지가 사는 미국을 떠나 이모가 사는 영국으로 온 이방인이다. 자신을 가리는 듯한 짙은 화장, 주렁주렁 매달린 귀걸이며 목걸이 팔찌가 버거워 보이는 마른 몸매, 그런데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녀게 웬만해서는 입에 음식을 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데이지에게 더 거부감을 주는 건 음식보다 사람인 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이들에게 '레이저'를 쏘며 '접근'을 거부한다. 

이런 소개만으로도 데이지가 대략 어떤 소녀일 것이라는 게 감지된다.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이유는 갖가지 병원 치료와 상담으로 아버지 돈 축내기, 아버지의 여자 열 받게 하기, 그리고 이제 새로 태어날 아버지와 그 여자 사이의 아이 저주하기. 그리고 그 부산물로 그녀가 얻은 건 '거식증'과 갖가기 알레르기, 자기 혐오 등등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이모에게 구원을 요청한 건지, 아니면 이모의 자발적 호응이었는지 이제 그녀는 영국에 와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맞이한 건 뜻밖에도 이제 우리에겐 스파이더 맨이라 하는게 더 익숙한 어린 톰 홀랜드가 분한 사촌 동생이다. 보기에도 분명히 열 다섯 그녀보다 어린 사촌 동생이 모는 트럭을 타고 구비구비 찾아간 이모네 집. 대책없는 데이지보다 어쩐지 더 대책없어 보이는 곳이다. 이미 데이지가 도착한 공항에서 부터 심상찮은 기색이 역력한 비상시국의 기운, 이모는 마치 그 '비상시국의 전위대'인 양 온통 해외 각국에서 쏟아져오는 전화 통화를 하고 국제 회의에 참여하느라 아이들을 미처 돌볼 사이가 없고, 그 사이 이모네 아이들은 심하게 자유롭게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하여튼 그런 대책없는 이모네 식구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사촌 에드워드(조지 맥케이, 얼마전 캡틴 판타스틱의 주인공 보 역을 맡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는 듯한 그가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 과정처럼 처음엔 거슬리고, 그 다음엔 다투고, 결국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무려 사촌이랑. 



전쟁에 휩쓸린 열 다섯 살 소녀의 사랑
하지만 이 사촌간의 비정상적 로맨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채 내리기도 전에 영화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소설 속 전쟁이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와 적의 경계가 모호한 채 영국의 시설들이 테러를 당하고, 마을들이 점령을 당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막연한' 전쟁이라면, 시각적 장치가 분명해야 할 영화는 그 설정은 세계 제 3차대전이자, 핵전쟁으로 명확하게 설정한다. 무엇보다, 이 전쟁이 무서운 것은 그 '적'이 '우리'와 구분되지 않은 그 누군가이며 내부로 부터 시작된 테러는 핵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을 휘쓸어 가고 사람들의 삶은 거기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테러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을 기초로 하여 내부의 그 적으로부터 시작된 3차 대전이라는 '전쟁'은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 나면 저렇게 될 것이라는 '학습' 효과를 작품은 철저하게 한다. 

그렇게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호자도 없이 전쟁에 휩쓸린 데이지와 이모네 아이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집이 징집되고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 '소개(적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된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킴'된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리고 이제 막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고 '가족'으로 섞여들기 시작한 아이들, 그 아이들은 '꼭 다시 만나자, 이곳에서'란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을 뒤로 하고 각각의 캠프로 떠난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는 커녕, 자신을 낳다 죽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애정 결핍으로 늘 '반항'을 삶의 모토로 살아왔던 데이지는 뜻하지 않게 에드워드의 어린 여동생까지 책임지는 건 물론,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전쟁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생존'이라는 임무까지 짊어지게 된다. 그들의 동네 친구가 적에 의해 무참히 사상되는 상황에서 데이지는 더 이상 자신들이 머무는 이곳이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침반 등 몇 가지를 챙긴 채 이모네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영화는 철저히 데이지란 소녀의 성장담에 집중한다. 3차 대전의 상황을 극적으로 구현한 핵이 터진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자신은 물론, 아홉 살 어린 사촌 동생까지 책임지며 살육과 기아가 점철된 행로를 용감하게 전진하여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되는 서사는 그 어떤 성장 소설보다 극적이다. 반면 소설로 가면 보다 다양한 인물군에 대한 재미가 더해진다. 영화에서는 데이지란 주인공을 위해 생략되거나 왜곡된 이모네 형제들의 캐릭터가 소설의 맛을 더한다. 그저 이모네 아이들이 아니라, 진보적 의식을 가진 엄마 밑에서 그리고 영국의 자연에서 동물과 교감하게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낸 아이들의 면면은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적인 청소년 상이다. 영화 속 데이지가 아홉 살 철부지에 대한 보호자란 극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면, 소설은 오히려 에드워드네 아이들이 가진 남다른 자연적 친화력이 데이지를 변화시키고 그녀를 끌어주는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하며,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성찰적 서사가 깊다. 

어쩌면 이제 우리의 십대들에겐 67년이 된 6.25전쟁 보다는 날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테러 사건이 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에겐 자신들이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는 게 미래의 입시와 정해진 삶의 스케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실에서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멀고, 일상은 쳇바퀴라도 마찬가지의 질풍노도 시기, 자신의 그 모든 푸념을 한참 부모에게 풀어댈 나이, 아이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며, 진지하게 살아가야 이유를 모색해 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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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23 15:17

시작은 고양이의 시선과 그 시선이 향한 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뜻하지 않은 강간을 당하고 만 미셸(이자벨 위페르 분)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해자 미셸은 자신을 피가 흐르는 자신을 돌보는 대신에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 떨어져 깨진 그릇을 먼저 치운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조용히 목욕으로 흔적을 지운다.




그녀가 강간을 당했다.
한 여인의 강간 사건, 하지만 영화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한때는 출판사를 경영했지만 시대적 트렌드에 맞춰 게임 회사 ceo가 된 여자, 그런 사회적 지위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덮게 만들었을까? 명망이 치뤄야 할, 그러기에 어쩌면 더 깊숙한 상처가 될 수 있을 것같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미셸을 따라가는데 뜻밖에도 패스트 푸드 점에서 그녀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녀에게 자신이 먹고 난 음식물 쓰레기를 쏟아 붓는다. 하지만 미셸은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강간 사건'으로 시작된 영화는 미셸이라는 인물의 가족사를 들추며 '인간 존재의 그 모호함'에 대한 질문으로 번져간다. 피해자였던 미셸은 그와는 반대로 게임 속 피해자인 여성에게 '오르가즘'의 절정을 보다 '자극적'으로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이웃에 이사온 잘 생긴 남의 남편을훔쳐보며 '자위'를 즐기는가 하면,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과는 '성적 파트너쉽'을 유지해왔다. 그러면서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무조건 적대적이고, 이혼한 남편의 여친에게 집적거린다. 자신의 강간 사실을 친지들에게 당당하게 밝히면서도 경찰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패스트푸드 점의 봉변은 알고보니 한 마을 가족과, 동물들을 몰살하다시피 한 그의 아버지의 범죄와 그의 조력자로 봉인된 10살 시절 사이코패스 딸이었던 미셸의 과거로 연결된다. 그 사건 가해자의 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아버지가 30년만에 가석방 신청을 하자 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가는 그녀, 하지만 이제 자신이 어렵게 일궈온 현실의 성취를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고 싶지 않다. 



쉽게 그녀의 편이 될 수 없는 그녀 
'편'이라는 개념이 익숙한 우리에게,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한때는 사이코패스 조력자였을 지도 모르며, 이제 그 과거로 부터 떨어져 나온 현재에서 게임의 판매에 눈이 벌개 성의 상품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녀 자신의 '성적' 태도 역시 그다지 '도덕적'이어 보이지 않는 그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이 미셸의 '강간'을 희석화시킨다. 그녀를 '피해자'의 편에 세워 두둔하자니, 미셸이 보이는 행태들 역시 '돌맞을 짓', 딜레마다. 

<엘르>는 노장 폴 베호벤 감독의 16번 째 영화이다. 그의 작품이 늘 '폭력'과 '섹스'라는 화두를 피하지 않고 '직진'해왔듯이 <엘르>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그가 등장시킨 주인공은 <포스맨(1983)>이래, <원초적 본능(1992)>, <블랙북(2006)>, <트릭(2012)>의 그의 전작 속 주인공들 처럼 쉽게 '우리'라 얼싸안기 쉽지 않은, 도덕적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 자신이 이미 어린 시절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호한 사건의 트라우마를 가진 존재, 그리고 이제 그 '과거'를 애써 지운 채 '냉혈한' 처럼 사업에 매진하며 그녀 스스로 도덕적이라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벌어진 범죄. 심지어 그 범죄자는 알고보니 그녀 자신이 '유혹'한 대상이며, 위기의 상황에서 종종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제공했던 인물. 과연 이런 부도덕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아왔던 그녀는, 그런 그녀를 보는 관객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결국 이러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고 서로 엇물리며 얽힌 사건들을 통해 폴 베호벤 감독은 부조리한 인간 세상에서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그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가 그 속셈과 결말이 뻔해보이는 재혼을 선택했을 때, 어머니를 죽이겠단 장담처럼 결국 동일한 결과를 맞이하고 만다. 모녀라는 형식적 경계에서 한 치도 넘어서지 않으려는 그녀를 도발이라도 하듯, 끝까지 재혼이라는 해프닝을 벌이며 그녀의 '부담'이었던 어머니, 하지만 그 어머니의 병실에서 조차 자신에게 딸로써 끝까지 한 치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냉정했다 힐난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되새기는 대신 원망과 tv에 집중했던 그녀는 이별 인사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어머니를 보내다. 장례식조차 그녀의 식대로. 



엘르를 통해 드러난 부조리한 가족사 혹은 인간사 
하지만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바램대로는 아니지만, 그토록 어머니가 원했던 아버지를 찾아간다. 30년만의 가석방에 실패한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침을 뱉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스스로 생을 버린다. 어머니를 잃고, 그리고 아버지를 잃고 그녀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웃집 남자 앞에서 사실은 과거 사건의 피해자였을 지도 모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을 때처럼.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지만 더는 '자위'로 혹은 '불륜'으로, 심지어 '도발'이나, '위악'으로 자신을 달래던 미셸의 삶을 지속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유골을 되는대로 뿌렸지만,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은, 이제 미셸 자신의 삶에 뜻하지 않은 '이정표'가 된다. 돈으로 남편을 산다 퍼부었지만, 결국 반추해보니 남자가 그리워 절친의 남친을, 이웃집 남편을, 그리고 강간범과의 정사를 허용했던 그녀의 삶 역시 그녀가 그리도 '거역'해왔던 부모 세대의 삶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비로소 그녀는 '과거'로 부터 자유로워진 대신, 어느덧 어머니가 되어 자식의 세대까지 책임져야 할 위치가 '아들의 욕'과 함께 절실하게 다가온다. 

언뜻 보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무표정하게 도발해 가는 미셸, 그러나 자신을 채워왔던 그 '부조리한 관계'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간다. 게임 성공 축하 파티에서 절친에게 그녀 남편의 섹스 파트너가 자기였음을 고백하는 방식으로. 

과거 아버지 사건 이후, 자신을 세상 속에 10살 짜리 사이코패스로 던져준 이래 미셸은 '법'의 도움을 거부했다. 그들은 늘 자신의 진실에 귀기울여 준 대신, 자신들의 편의 대로 그녀를 요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가 부른 건, '법의 도움'이 아니라, 어쩌면 30년만에 '법'에 대한 복수이자, 또 다른 결자해지일 지도.  진실 대신 '이슈'를 원한 법에게 가장 적절한 먹이를 공급하며. 

아버지 때처럼 똑같이 머리가 일그러져서 죽어나간 그녀의 강간범, 그는 그녀를 '사랑'으로 기억하고 싶었지만, 미셸은 그의 '강간'을 용인할 수 없다.  자신이 친구 앞에 불륜을 고백하듯, 그런, 하지만 보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의 '범죄'를 '처단'한다. '법'의 도움 없이 살아온 그녀만의 '재판'이요, '판결'이며, 범법자의 처리이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의 도움을 빈, 당시 그녀를 기만했던 법을 '기만'한 복수이다. 열 살 사이코패스로 세상에 던져서 그 누구의 도움없이, 그러나 세상 속에 번듯하게 한 자리 차지하며 견뎌냈던 미셸 식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부조리한 현대사의 '극단적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30년전 아버지와 그녀가 그 사건으로 내내 꽁꽁 묶여있듯이 이제 그녀는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아들을 그렇게 자신의 곁에 묶는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젖'을 양보했던, 그래서 늘 '가정'을 그리워하던 아들에게 '가장'의 지위를 '선물'하며 남보다도 못한 모자 관계를 청산한다. 얼굴 색이 다른 아기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며느리, 그리고 번듯한 차와 그럴듯한 직업적 전망, 그리고 미셸의 커다란 집, 그리고 이제 피를 나눈 어머니와 아들은 그에 더해 '피의 공모자'로 거듭난다. 무위도식하며 어머니의 재산에 기대어 철부지였던 아들이 받아든 '가장'이라는 혹은 '아버지'라는 선물의 댓가는 10살 시절 그녀가 그랬듯이 가혹하다. 10살 무렵 미셸은 아버지가 저지른 종교라는 이름의 범죄 공모자가 되었고, 이제 아들은 미셸이 재단한 성범죄의 공모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가혹한 가족사'의 승계자로 '죄책감'을 짊어지고, 그렇게 미셸 일가의 잔혹한 역사는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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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22 18:23

영화 <원더 우먼>을 봤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건 새로나온 볼만한 영화라던가, dc코믹스의 새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라던가 하는 요건보다는 지극히 사적인 '추억 여행'때문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그리고 그 시절 '린다 카터'의 원더 우먼이 아닌데도 극장으로 향한 내 발길을 보면, 어린 시절 슈퍼맨과 배트맨을 보던 아이들이 자라 극장판 히어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향하는 그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70년대 그 시절의 <원더 우먼> 
<원더 우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tv에서 <원더 우먼>을 방영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아야 겠다. 1979년부터 tbc를 통해 방영되었던 <원더 우먼> 시리즈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육백만불 사나이>에서 부터, <소머즈>, <전격 z작전> 등 인기있는 외화 시리즈의 흐름 속에 등장했던 '미드'이다. 그저 '미드'여서 인기가 있었던 것일까? 70년대는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로 상징할 수 있는 시대다. 이 여배우들은 그녀들의 대표작이자, 70년대 드라마의 상징적 작품이라 할 <청실홍실(1977)>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전도유망한 능력남을 놓고 순애보의 경쟁을 벌이는 두 여인, 그들이 부잣집 딸이건, 가난한 직업인이건, 화려하건, 순수하건, 그들의 삶의 결정적 요소는 '사랑'이고, '결혼'이었다. 그런 순종적이고, 여전히 현모양처를 지향하는 여성들이 드라마를 점령하고, 그로부터 배제된 여인들은 슬픈 운명의 서사를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되풀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황금 팔찌를 두르고 총알을 막아내고,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을 올가미로 대번에 굴복하게 만드는 여성 히어로라던가, '뚜뚜뚜뚜' 거리며 저 먼곳의 소리를 듣고, 대번에 달려가 적들을 제압하는 그녀들은 '획기적인 여성상'이었다. 맨날 tv에서 '지고지순'하게 울며 불며 사랑을 위해 매달리던 여성들만 보던 그 시절 아이들에게, 대놓고 온몸의 라인이 드러내는 '섹슈얼'한 미스 아메리카 출신의 미녀라던가, 정돈되지 않은 듯 날리는 머릿결에, 자연스러운 옷차림으로 어떤 미션도 척척 수행해 내는 '이지적'인 분위기의 이방인은 당시 소녀들에겐 신선하고 매력적인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진취적'인 그녀들의 캐릭터만이 매력적인 건 아니었다. 당시 소녀들에게 <원더우먼>이나, <소머즈>는 또 다른 버전의 '로맨스' 담이기도 했다. 아마존의 공주였던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와, 안경만 쓰면 못알아보는 비서로 불철주야 그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원작이 참조했다는 '마가렛 생어의 페미니즘'과는 별개로, 현대판 '인어공주'와도 같은 '로맨틱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서사로 다가왔다. '소머즈'와 육백만불 사나이의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도 마찬가지로. 그녀들의 캐릭터는 진취적이었지만, 동시에 지고지순한 순애보의 주인공들이었다. 



2017년의 원더우먼
이제 2017년에 돌아온 <원더 우먼>은 그 시절, '사랑'의 기억을 모티브로 삼는다. 하지만 원더우먼이 하는 2017년의 사랑은 1970년대의 그녀와 또 다르다.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다이애너 공주,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공주의 신분으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사'로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제 왕국의 그 누구도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을 무렵, 데키스키라 왕국을 지키는 버뮤다 삼각지대가 뚫리고 '트레버 소령'이 등장한다. 

그의 등장과 그를 통해 전해들은 전쟁은 다이애너에겐 '하네스'의 귀환으로 전해졌고, 의기가 충천한 그녀는 그를 따라 '하네스'를 제압하기 위해 '인간들의 세상'으로 떠난다. 하네스에 대한 전의가 충만한 다이애너와 역시나 휴전 회담을 앞두고 스파이로서 적의 위기를 감지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의 음모를 막으려는 트레버 소령은 다른 듯 같은 모습이다. 인간 세상의 실상을 모른 채 하네스만을 향해 맹목적인 다이애너나, 자신이 손에 넣은 적의 음모를 막기 위해 군율과는 상관없는 작전을 계획하는 트레버 소령의 고지식한 애국심은 궤를 같이한다. 마치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보기 전의 순수한 열정을 가진 미성년들처럼. 그런 그들이 자연스레 서로에게 공감하고 의지하며, 나아가 남자와 여자로서 '사랑'의 감정까지 전개해 나가는 것에 이물감이 없다. 

하지만 시리즈 물로서 미드 속 다이애너가 트레버 소령의 비서로 자신을 감추며 그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들의 무리를 제거하는데 매진하는 것과 달리, <원더 우먼> 속 다이애너는 이제 세상을 구할 '히어로'로서 '업그레이드'될 사명을 부여받는 존재이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은 '자각'의 매개체이지만, '동반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기에 트레버 소령은, 가장 불가능한 평화의 조건을 가지고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 패트릭 장관의 모습을 한 하네스로 인해 '인간 세상'의 부조리함에 좌절하는 원더 우먼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존재로 '산화'한다. 인간은 부조리하나, 그럼에도 그 '부조리함'을 넘어서는 '희망' 역시 인간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인간 세상에 온 히어로'의 명제'를 풀이해주는 존재로 그 역할을 다한 채, '영원한 하지만 이승에선 그 운명을 다한 사랑'으로 그녀를 인간 세상에 머물게 한다. 2017년의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원더우먼과 트레버 소령의 이별 그 순간이었다. 그 어떤 사랑 영화보다도 극적이었고, 슬펐던. 그리고 그 슬픔은 곧 히어로 원더우먼의 동력이 된다. 

1970년의 다이애너가 영웅이지만, 매번 트레버를 구해줌에도 그의 그늘 속 여성으로 남겨진 것과 달리, 2017년의 다이애너는 트래버를 통해 '남녀간의 사랑'을 이루지만, 동시에 동지인 그를 통해 '히어로'로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한다. 그리고 이제 '사랑'의 온기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얻고 '히어로'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해나간다. 2017년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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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09 16:49

<캐리비안의 해적> 네 번 째 시즌이 돌아왔다. 개봉된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전세계 박스 오피스 1위라는 왕년의 기록에는 못미치는 아쉬운 성적을 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네버엔딩 스토리'를 기대하는 오랜 팬들에게는 시리즈의 종말이 아닌 '연속'을 기대해 볼 여운을 남기며 순항하고 있다. 무엇보다 분장을 통해 빛을 발하는 배우 조니 뎁, 예전만 못하다 해도 그의 잭 스패로우가 돌아와 반갑다. 




시즌 4, 시리즈의 연속성을 상기해 내는 방식
dead men tell no tales, 죽은 자는 말이 없다란 부재를 가지도 돌아온 시즌 4, 이 부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시즌1을 상기해야만 한다. 

2003년 개봉한 시리즈의 1편 <블랙 펄의 저주>에서 잭 스패로우(조니 뎁 분)는 헥터 바르보사(제프리 러쉬 분)와 함께 '블랙 펄'을 타고 카리브 해에서 보물을 약탈한다. 하지만 바르보사는 잭을 배신 그를 외딴 섬에 가둔다. 그러나 바르보사는 밤이 되면 '해골'이 되는 저주에 갇힌다. 영원히 죽을 수 없는 저주에 걸렸던 그, 물론 그의 '저주'는 1편 마지막 절묘한 승기의 트릭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4편의 부재인 '죽은 자는 말이 없다 dead men tell no tales는 대사는 바로 이 시리즈의 주요 등장 인물이 되어버린 앵무새의 입을 통해 '발언'된다. 

이렇게 죽을 수 없는 자들의 저주로 시작되었던 1편, 오랜만에 어렵사리 돌아온 4편은 그 1편의 '죽은 자에게 내려진 저주'를 다시 불러온다. 잭 스패로우를 배신하고 저주에 걸린 보물을 약탈한 이유로 '죽을 수 없는 해골'이 되었던 바르보사 대신, 해적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다 젊은 잭 스패로우의 덫에 걸려 마의 삼각지대에서 몰살한 캡틴 살라자르(하비에르 바르뎀 분)가 '죽음'의 저주를 받은 자로 등장한다. 



서로가 적이 되어 싸우는 '해적'과 '해군', 그들의 승리는 언뜻 눈에 보이는 '보물'인 듯하지만 결국은 '죽지 않'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 하지만 '저주'는 바로 그런 그들을 영원히 '죽음'의 덫에 가두어 버린다. 영원한 안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연옥'의 덫에서 이를 갈며 '복수'를 꿈꾸는 캡틴 살라자르와 그의 부하들은 1편의 '저주'에 걸린 바르보사보다 '죽음'의 덫이 업그레이드 된 셈이다. 

늘 시리즈가 그래왔듯이 '죽음'과 연관된 적의 캐릭터를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그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인 배우를 통해 버전 업하며 등장한 시리즈 4편은 그저 시리즈의 연속만이 아니라, 바르보사의 뜻밖의 운명을 통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란 부재를 새롭게 해석해 낸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언제나 그렇듯 <캐리비안의 해적>하면 떠오르는 건 조니 뎁의 잭 스패로우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그의 활약이란 언제나 '삽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적의 캡틴 살라자르를 마의 삼각 지대에 가둔 젊은 잭의 기지처럼, 잭의 활약상이란건 '정공법'이라기 보단, 나비처럼 날다, 벌처럼 한 방 콕하고 쏘아서 적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식이니 언제나 그가 '나비'처럼 나는 동안 앞서 고군분투하는 고지식한 동료들이 필요한 것이다. 

시리즈 4편 역시 마찬가지다. 마의 삼각지대에서 바르보사가 자기 앞을 거스르는 그 모든 것들을 '아귀'처럼 삼켜버리며 잭을 향해 돌진하는 동안, 잭의 꼬락서니라고는 온 도시를 휩쓸다시피한 금고 탈취 작전조차 땡전 한 푼만(?)  건지고, 그의 수호자인 나침반마저 술 한 병에 거간하다, 결국 처형장에 서는 처지가 되고 만다. 또 그래야 잭 스패로우답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그를 닮아 그에 대한 배신을 밥먹듯하듯 하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는 것이 역시나 또 잭 스패로우 다운 '시즌 4의 입장'이다. 






그렇게 잭 스패로우가 우여곡절 죽음의 사투를 벌일 때 '우연'처럼 그 행로에 동행한 두 젊은이가 있었으니, 뜻밖에도 우연 치고는 깊은 인연을 가진 카리나(카야 스코델라리오 분)와 헨리(브렌든 스웨이츠 분)다. 아버지를 찾아서, 혹은 아버지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모험'에 나선 두 젊은이들은 잭과 뜻을 같이 하여 항로에 존재하지 않는 섬을 향해 떠난다. 

그 예전 시리즈에서 총독의 딸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 분)의 캐릭터를 이어받은 키이나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마녀'로 오해받은 하지만 실은 진보적인 여성 과학자로, 당연히 터너가 연상되는 헨리는 역시나 그처럼 재기넘치는 거기에 저주에 걸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신화'에 통달한 이야기꾼의 재능를 탑재해 과학과 신화의 '콜라보'로서 4편의 동력이 된다.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뱃사람의 아들 터너와 비슷하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과학'과 '신화'를 통합해 새로운 시리즈의 구색을 맞추려 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여성의 캐릭터는 최근 '디즈니 영화'의 조류를 성실하게 이어받고 있다. 

이렇게 새로이 등장한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의 배후인지, 조력잔지, 아니면 따로국밥인지 결국 한 배를 타고만 잭 스패로우의 조합은 엘리자베스와 터너와의 그 파트너 쉽의 연장이자 다른 버전으로 시즌 4를 익숙하게, 그리고 신선하게 끌어간다. 




이런 조합이 끌고가는 시즌4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헐리웃의 아버지 서사'이다. 아버지를 찾아나선, 혹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젊은이들, 그들은 마치 적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버지였다는 <스타워즈> 식의 아버지 찾기를 극적으로 반복한다. 대신 그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 노회한 해적과 과학으로 무장한 젊은 여성 과학자로 대신할 뿐이다. 부녀는 무시하고 적대하고 갈등하고 결국 서로를 알아보지만, 그건 결국 아버지의 희생을 통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란 '이별' 공식을 순탄하게 반복한다. 아버지는 불가능하다 했지만 자신만의 신념으로 결국 아버지를 구해낸 아들의 성공 역시 또 다른 아버지의 '극복'이다. 그런 부녀의 극적인 상봉기와 이별기의 사이에서 잭 스패로우는 마치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처럼 거들 뿐. 

그러기에 어쩌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1편에서 가장 비열하게 등장했던 바르보사라는 저무는 해적의 장렬한 연대기에 대한 '경의'라 해도 어폐가 없을 듯하다. 그토록 궁금케 했던 '블랙 펄'의 저주조차 그가 단번에 허무하게 풀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캡틴 살리자르가 부하들과 무시무시하게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가운데 '죽음'의 저주를 풀기위해 고심했으며 황금의 부귀까지 누리던 바르보사는 기꺼이 죽음을 통해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유언을 남기고 퇴장한다. 죽어가는 자의 가장 명예로운 한 마디이다. 그 명예로운 해적의 연대기에 환타스틱한 캐리비안의 해적선 모험은 가장 멋드러진 토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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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02 16:12

20세기 최고의 서스펜스 스릴러가 칭해지는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이 <석조 저택 살인 사건>으로 돌아왔다. 고전적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영화는 1950년대 뉴욕 대신 1945년 경성을 배경으로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어내려가듯 '고전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진행된다. <시카고 타자>가 과거로 돌아가 일제 시대 그 암흑을 '환락'으로 밝히는 경성의 유흥가를 그 시대 젊은이들의 피난처로 그려내듯 <석조저택 살인 사건>은 원작 1950년대 뉴욕의 불야성을 일본은 패망하고 새로운 시대의 흥청거림에 불을 밝히는 경성의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두 젊은이의 뜻하지 않은 만남과 사랑으로 연다. 


 

 


순애보의 씨실 위로, 법정 공방전의 날실이
돈이 없어 택시 운전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하연(임화영 분)을 자신의 특기인 마술로 구해준 가난한 마술사 이석진(고수 분)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그녀와 방을 나누어 쓰는 사이가 되다 결국 방을 함께 쓰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풍운의 꿈을 안고 떠난 부산 공연에서 아내는 그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호텔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경성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선남선녀의 순애보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석진과 임화영의 비극적 순애보가 씨실이라면 그 러브 스토리 사이를 '날실'처럼  노회한 변호사 윤영환(문성근 분)과 서릿발같은 검사 송태석(박성웅 분)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법정 공방전이 채워간다. 원작의 서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은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처럼 러브 스토리와 법정 서사를 한 장, 한 장 엇물리며 '범인'에 대한 긴장감을 높여가는 방식을 그대로 채택한다. 


 한 편의 추리 소설같다는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안타깝게도 '찬사'가 아니다. 아직 가해자가 드러나지 않은 법정, 증거를 가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벌어지는 법정 공방전과 최승만의 순애보는 서로 엇갈리며, 비극적 순애보의 여정을 달군다. 하지만 그건 소설의 경우다. 소설은 '시각'을 통해 수용되지만, 그 시각을 메우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문자라는 '기호'이고 그 '기호'는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통해 '독해'되어, 뇌에서 '이미지화'한다. 그러기에 범인을 드러내지 않은 재판과 그 행간의 순애보는 범인을 추리하고, 그의 만행을, 그리고 최후의 복수의 방식에 대해 한껏 '뇌'를 달군다.

반면,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를 전제로하여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들은 의아하다. 도대체 최승만의 아내가 죽음에 이르는 저 비극적 순애보와 이 법정의 살인 사건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기에.  '석조 저택'이 '추리'하라 내놓은 여정에 대해 마치 양 손 모두를 뒤로 감춘 채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패를 가지고 희롱하는 게임의 술래가 된 양 당황스럽다. 한 시간 여의 과정은  '불친절'이나, '장황함' 혹은 '답답함'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느낌처럼. 그러기에 과연 원작의 서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각색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베스트 셀러가 곧 좋은 영화를 보장해 주는 건 역시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한 시간여, 아내를 잃은 이석진은 자신을 아는 그 모든 이를 죽였다는 위조 지폐범을 잡기 위해, 이빨을 뽑고, 얼굴에 칼집을 내며 자신을 지운 채 '최승만'이 되어 경성의 택시 운전사로 전전한다. 경성에서는 드문 외국어를 하는 그를 찾기 위해 택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깔개의 떡밥을 던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빗속에서 드디어 최승만은 그, 남도진을 만난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 법정에 드디어 살해 혐의를 받은 이가 등장한다. 남도진이다.  


 


한 편의 추리 소설 같다서 아쉬움 
안타깝게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지 도통 알 수 없던 영화는 그 빗속에 등장하는 남도진, 그리고 법정에 등장하는 남도진으로 단번에 명확해 진다. 이 '명확함'은 그리고 그 한 시간 여의 사랑꾼을 고군분투했던 고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도진으로 분한 '김주혁'의 존재함에 상당히 의지한다.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모두 목숨을 거두었다는 위폐범이자,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성 밤 거리의 부호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그러기에 이런 '개연성'이 되는 '존재감'의 배우를 굳이 한 시간 여 장황한 설명을 해가며 아낄 필요가 있었을까란 물음이 던져진다. 머리로 추리하여 만들어 가는 캐릭터와, 배우의 존재감이 주는 '갭'에 대한 제작진의 '판단 미스'의 지점이다. <비밀은 없다(2015)>, <나의 절친 악당들(2015)>, <공조(2016)>을 통해 '악역'의 카리스마가 한껏 고양된 김주혁을 '캐스팅'해놓고, 사전 정지 작업에 시간을 끌어버린 영화는 이후 남도진의 악행을 '비바체'로 풀어낸다. 영화 초반 '복선'처럼 등장한  '보이는 것을 숨기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이석진의 마술 방식을 활용한 '복수'에 대한 감탄은 찰라다. 

그러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과연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반문하게 된다.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이라는 명확한 '스릴러' 장르의 이름표를 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은 이 영화를 다보고 난 후 관객들의 잔상에 오래오래 기억되는 건,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관없이,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던져 '이석진 식의 사랑'이었을까? 그렇다면 애초에 제목부터 다시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와 손톱>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제치고,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제시되었을 때 관객은 '그 살인 사건' 자체에, 그리고 그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기대를 가지고 극장을 찾는다. 하지만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은 원작의 '손가락'을 둘러싼 불꽃튀는,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모호한 법정 공방으로 자신들은 알지만 '관객들은 모르는 이야기로 시간을 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뜻밖의 반전과 함께 영화는 이걸 몰랐지 라며 의기양양하겠지만, 관객은 그 의기양양함에 탄복하기엔 너무 지루한 여정을 달려왔고, 고대했던 남도진의 활약은 단편적이었다. 

물론 이런 안이한 '각색', 그로 인해 불친절한 전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경성 기담>의 그 분위기를 그리워했던 사람이라면 1945년 경성을 재현해낸 이 영화에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악인으로 등장한 그 존재만으로도 발군이었던 김주혁을 비롯하여, 문성근의 노회한 친일 변호사의 연기 역시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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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5.25 04:47

<에어리언;커버넌트>에 이어 2위를 수성하고 있는 <보안관>은 무난히 100만 고지를 넘으며 순항하고 있는 중이다. (5월 3일 영진위 기준 1,176,647명) 그런데 예의 '사나이 픽쳐스'의 작품답게 '사나이'들의 '거친' 이야기를 펼쳐보이고 있는 이 영화의 제목은 조금은 생뚱맞게도 그 서부 영화에서 등장했던 '보안관'이다. 고개를 갸웃해 보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보안관'이란 제목만큼 이 영화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수긍이 가고야 만다. 그렇듯 영화< 보안관>은 부산 기장을 배경으로 서부 영화의 보안관처럼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왕년의 형사 대호(이성민 분)의 활약상을 그린다.  




2017년 부산 기장 버전의 서부 영화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주윤발이 이쑤시개를 씹어 먹으며 등장하는 홍콩 느와르 영화가 시선을 잡고, 그 영화의 장면, 장면과 대사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는 대호란 '아재'가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 속 영웅과 달리, 용감하게 동료 형사와 함께 마약 사범을 잡으러 쳐들어간 모텔에서 그만 그는 마약 사범을 눈앞에서 놓치는 건 물론, 동료 형사조차 잃고, 결국 형사직에서 물러나고야 만다. 그로부터 3년 그는 형사라는 법적 신분 대신 기장 마을 '수호자'로 동네를 누빈다. 그런 그의 앞에 바로 그 3년전 마약 현장에 있었지만 초범이라는 이유로 대호가 도와줬던 종진(조진웅 분)이 마을에 비치 타운을 세우겠다며 화려하게 입성한다. 

영화는 서부 영화의 공식를 그대로 답습힌다. 마을에서 신망을 받던 보안관, 하지만 마을에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악의 무리 앞에 그는 무기력하다. 그러나 '보안관'이라는 직업 의식에 철저한 그는 모두의 외면을 받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자신을 내던져 악을 소탕한다. 클린트이스트우드, 존 웨인 등등 정의로운 보안관이 등장했던 그 예전 서부 영화들 모두 큰 범주에서 이 '공식'을 벗어나지 않았고, 제목부터 <보안관>인 이 영화 역시 그 공식을 따라간다. 그러기에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대호가 등장한 그 순간부터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는 대부분의 관객이 눈치를 챈다. 

하지만 그 뻔한 구성의 <보안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 흔한 우리나라 아재들의 정서를 '비틀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자타공인 기장 마을 보안관처럼 살아가는 대호의 정서와 그를 둘러싼 이들의 분위기는 이른바 '우리가 남이가'이다. 정수기 사업을 하는 강곤이 음주 운전으로 면허가 정지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동네 이웃들에게 들었을 때 대호의 반응은 그래 내가 그 정도는 해결해 주지가 아니라,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에게 먼저 말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오지랖, 나아가 사명감처럼, 그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를 기반으로 동네 모든 대소사의 중심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그를 형, 아우 하며 떠받드는 종화(김종수 분), 선철(조우진 분), 춘모(배정남 분) 역시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를 기반하여 그에게 의지한다.

그런 그들의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끈끈해 보이는 '로컬 공동체' 앞에 기장 마을의 발전을 내세운 종진이라는 사업가가 등장한다. 처음에 '우리'가 아니라는 이유를 그의 등장을 배척하고 시샘하던 사람들, 하지만 종진이 자신 역시 기장 출신이라며 조기 축구 등의 로컬 커뮤니티를 포석으로 그의 풍부한 재력을 앞세워 다가서자 그 끈끈했던 관계가 하나둘씩 무기력해진다. 정수기와, 소파 등 그들의 먹고사니즘은 결국 대호 대신 종진을 마을의 대표로 뽑기에 이르른다. 



'우리가 남이가'보다 강한 '목구멍이 포도청'
'목구멍이 포도청' 앞에 '우리가 남이가'가 손바닥 뒤짚혀지듯 하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먹고사니즘을 앞세운 로컬 공동체의 변질, 혹은 붕괴에 대응한 대호의 캐릭터다. 그는 전형적인 '아재'로 등장하지만, 그 '아재'는 그의 동료들과 달리, 이미 3년 전에 그만둔 '한번 형사면 영원한 형사'라는 직업 의식으로 종진을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의 제목이 <보안관>인 이유이며, 그 지점에서 '사나이'들을 다룬 한국 영화에서 신선한 자신만의 포지션을 확보한다. 

그 옛날 전성기 서부 영화의 보안관들이 마을을 지키는 과정에서 때로는 자신의 가족과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리면서도 자신의 직업적 사명감을 놓치지 않듯이, 대호는 이제는 거물 사업가가 되어 나타난 종진을 '한번 마약쟁이는 영원한 마약쟁이'라는 형사의 시선으로 대한다. 하지마 그런 대호의 의심은 지역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아재의 '시기'와 '질투'로 오해를 받다 못해 배척받기에 이른다. 처남 덕만(김성균 분)이 그를 돕지만 희순이 없었다면 그 역시 얼굴을 바꾼 동네 아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란 예측하기는 힘들지 않다. 

영화는 이른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지역색이 끈끈하다는 지역의 사투리를 앞세운 지역 공동체를 배경으로 삼으며, 그 강한 지역 연고주의의 허상을 서사의 주요 동원으로 삼는다. 부를 앞세운 종진은 대호가 그랬듯이, 대호를 벤치마킹하며 동네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간다. 대호에게 형, 동생하며 격의없이 굴던 사람들은 이제 오히려 그런 종진을 의심하는 대호를 알고보면 '남'이라며 밀어내며 그 자리에 종진을 앉힌다. 이런 정황은 결국 그들이 지난 시간 대호에게 격의없이 호형호제한 이유 역시 종진과 다르지 않다는 역설적 이해를 하도록 만든다. 그토록 끈끈한 지역 공동체의 얄팍한 바닥을 영화는 절묘하게 극적 갈등의 요소로 활용한다. 

그런 억울하다 못해 결국 짐까지 싸야하는 상황에서 대호는 '프로패셔널한 직업 의식'을 놓지 못한다. 물론 그의 그 '프로패셔널함'에는 종진과 얽힌 동료의 죽음이라던가, 자신의 직업을 잃게 된 '구원'이 원인이 되지만, 영화는 예의 한국 영화들이 그런 '원한'에의 집착에 호소한 것과 달리, 집요한 마약반 형사로서의 본능적 직업 의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하여 '우리가 남이가'를 등에 업은 지역 사업가와 이제 언제나 서부 영화에서 그래왔듯 '외톨이가 되어버린 보안관' 대호의 사생결단이 영화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덕분에 영화는 사나이인 척하지만, 아재인 등장인물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들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그 끈끈한 지역 정서를 뒤집으며 한 마을 사람들 전부가 마약 사범이 될뻔한 사건으로 판을 키운다. 얄팍한 인간 군상은 결정적 장면에서 '마을 공동체'의 힘을 증명해 낸다. 그리고 그 얄팍한 '우리가 남이가'는 본래의 궤도를 회복한다. 하지만 영화 속 엔딩에서 그들이 다시 얼싸안으며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하지만, 이미 서로는 안다. 그들을 감싸주었던 그 공동체라는 것이 그간 얼마나 자의적이었으며, 자기 필요에 의한 것이었던가를. 하지만, '사람사는게 다 그렇지'하며 '눈가리고 아웅'하듯 다시 ' 속물'을 접어둔 채 호형호제'의 관계로 돌아간다. 그렇게 여전히 '지체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지역 정서의 속살을 보여준다. 여전히 전근대적인 척하지만, 결국 그들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그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정의는 '프로패셔널리즘'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며 새 시대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이 영화가 어떤 결말에 이르를 지 예상 가능했던 <보안관>, 하지만 박스 오피스 2위의 저력은 바로 그 뻔한 이야기를 아무려 간 건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보안관' 대호의 활동담이다. 그리고 그걸 채워간 건, 그들의 면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어쩐지 속편이 궁굼해지는 대호및 동네 아재들의 생생한 캐릭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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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5.11 19:46

그는 형사였고, 변호사였고, 그리고 임금님이 되었다. 하지만, 시대를 달리하고 다른 직군에, 때론 가해자였다가, 피해자이고, 정의의 사도로 변화무쌍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그는 이선균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될까? 


드라마에서 그는 스스로 돋보이기 보다, 다른 배우를 돋보이게 해주는 남자 배우라 칭해졌다. <커피 프린스(2007)>에서 그러했고, <골든 타임(2012)>에서도 그의 그런 캐릭터는 어울렸다. 그러던 그가 자신을 두드러지게 어필하기 시작한 건 <파스타(2010)>부터 였다.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언성을 높이며 닥달하며, 짜증스럽지만 이른바 '츤데레'의 전형이라 여겨졌던 속정깊은 쉐프 최현욱은 누군가를 돋보이게만 하던 그를 전면에 내세웠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라 불리던 시절, 그래서 마흔 줄이 되도록 대학생으로 등장하며 여러 여배우들과 '사랑'을 나누던 시절에도, <화차(2012)>에서도,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에서도 그 보다는 같이 출연한 여배우들이 더 회자되었었다. 그러던 그가 사랑꾼 대신 남자 파트너를 선택한 <끝까지 간다(2014)>를 통해 '이선균'을 각인시켰고, 2015년 백상 예술 대상 남자 최우수 연기상을 거머쥐었다. 물론, 그 <끝까지 간다> 역시 최우수상 트로피는 두 개 였고, 함께 출연했던 조진웅과 그 기쁨을 나누어야만 했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을 지나서야 등장하는 조진웅과 달리 영화를 내내  끌어갔던 이선균이란 존재감에 대한 '세상의 인정'이 덜해진 건 아니었다.  



이선균, 전면에 나서다 
그런 자신감과 인정은 2014년 <성난 변호사>에 이어, 얼마전 <임금님의 사건 수첩>의 개봉으로 이어졌다. 드라마 속 그가 2016년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를 통해 익숙한 사랑꾼 이선균의 유부남 버전으로 등장했다면, 형사 이선균의 좌충우돌 어드밴처물이었던 <끝까지 간다>의 캐릭터는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으로 이어진다.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현대와 조선, 그리고 변호사와 임금님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 배경을 가졌지만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하다. 두 작품의 중심엔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있다. 이선균은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그의 캐릭터, 예를 들어 조선시대 예종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등장했지만, 그는 우리가 사극에서 보았던 그 예의 임금님이 하는 말투와 태도를 배제한다. 그의 말투는 그가 현대극에서 썼던 그 말투 그대로이며, 그의 걸음거리, 심지어 왕이라는 존재임에도 늘 상투 바람으로 어전 회의마저 임하는 그의 캐릭터는 이미 '고증'이라는 범주를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알고보면 예종이 왕이 된지 얼마 안되어 불과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역사절 사실을 들먹이는 것자체가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작 <성난 변호사>처럼,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마치 <007> 시리즈처럼 이선균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에 놓고, 그에 맞춰 기획된 이선균표 어드벤처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 방식은 김영민 표 <조선 명탐정> 시리즈와  이제 유해진이라는 캐릭터를 앞세웠던 몇몇 영화를 통해 영화계의 한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조선 명탐정> 시리즈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광산'을 매개로 한 세도가의 이권이 국익을 좀 먹는다는 조선판 '적폐' 는 마치 클리셰처럼 <임금님의 사건 수첩>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성난 변호사>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기는 것이 승소'라 여겼던 승소 확률 100%의 변호성이 역시나 적폐 세력인 거대 로펌의 마수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위기에 빠졌다 살아나며 통쾌한(?) 반전 활약을 선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적폐'가 주는 비감함은 <내부자들> 등의 사회 고발성 영화의 그것과 다르게 그저 오락 영화의 트렌드로서 기능하는 바가 더 크다. 

그런 지점에서 이들 두 영화는 '이선균'에 대한 호감을 전제로 두고 '관람'을 요청한다. 그의 사극 예법에 어긋나는 말투, 그가 이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예의 껄렁껄렁한 태도, 시니컬한 말투에 대한 호감을 전제로 그런 변호사와 임금님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의 궤적은 다르다. 이미 갓 100만을 넘은 채 종영했던 <성난 변호사>와 달리, 이제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2>, <보스 베이비>, 심지어 <보안관>에 이어 4위로 내려 앉았지만, 동시 개봉했던 <특별 시민>을 가볍게 누르며 잠시 박스 오피스 1위조차 넘봤던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그보다는 나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마치 전작를 벤치마킹하듯,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성난 변호사> 개봉 이후 질타에 시달렸던 여배우의 존재감이나 기대에 못미쳤던 사무장 파트너의 활약을 보강이라도 하듯, 신예 안재홍의 맛깔나는 사관 연기와 이선균의 조선 시대 임금님의 연기의 조화를 이루었고, 김희원의 폭넓은 악역 연기를 더했다. 분량은 적었지만 정해인의 비밀 무사도 신선했다. 무엇보다, <성난 변호사>가 미흡했던 서사의 어설픔을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극복하려 애쓴 듯하다. 결국은 뻔하지만, 그래도 헛웃음이 나오지는 않은 적당한 액션 어드벤처물로서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이제 갓 100만을 넘긴 채 순위가 밀려나고 있는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이선균'을 전면에 내세우면 끝까지 갔던 <끝까지 간다>의 영광에는 못미칠 것이 예상된다. 이 상황이면 '이선균'이라는 장르의 미래 역시 불확실하지 않을까?

이선균이란 장르의 불확실한 미래
그렇다면 과연 이선균이라는 장르는 뭘까? 유해진이 그 특유의 해학과 넉살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고, 김명민이 웃기는 장면에서조차 힘이 실려있는 연기로 승부를 본다면, 오히려 이선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연기하되, 연기하지 않는 편안함이랄까? 그가 영화 내내 짜증을 내고, 말도 안되는 어깃장의 '어명'을 내려도 어쩐지 밉지 않은 그 뜻밖의 친화력이다. 이는 다른 말로 '인간적'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그는 영화 내에서 형사가 되었든, 변호사가 되었든, 혹은 심지어 임금이 되어도 그저 '우리 같은 속좁고 불평불만많은 평범한 인간'으로 수용된다. 우스개로 이선균은 당하면 당할 수록 매력적이라고 하듯, <끝까지 간다>에서 끝까지 몰렸던 고건수의 캐릭터가 가장 그를 돋보이게 했다. 그렇듯 <임금님의 사건 수첩>에서도 임금임에도 때론 신입사관 이서(안재홍 분)에게 툭 하고 밀려가는 그 인간적인 여지에 관객들은 '연민'의 정으로 호응한다. 



하지만 그 친화력은 동시에 '긴장감없음'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임금님의 사건 수첩> 마지막 클라이막스, 조선 제일 검으로서 예종의 비장한 등장은 어쩐지 그럴 것이었으면서도 그 긴장이 풀어진다. 그런 면에서 <끝까지 간다>는 그런 이선균의 편안하지만 어쩐지 긴장감없음을 조진웅이라는 센 캐릭터로 맞붙이며 영화의 힘을 밀어 붙인다. 바로 이 지점이다. 어쩌면 그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끝까지 간다>와 이후 두 영화들이 보인 결정적 차이점이.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전작이었던 <성난 변호사>의 단점을 맛깔나는 신예 안재홍으로 보완했지만, 조진웅이 끌어올렸던 역동성에서 힘이 부친다. 

그러나 배우만을 탓할 것도 아니다. <끝까지 간다>가 그해 백상 예술 대상 감독상과 부산 영평상 각본상을 수상했듯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완성도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과 <끝까지 간다>의 간극은 크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이선균이란 장르의 미래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영화 산업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갈 듯하다. 김명민, 유해진이란 배우들이 그 걸출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앞세운 작품들이 '오락적' 성격과 별개로 작품성에서 미흡했던 전례에 대한 아쉬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대중적인 배우를 앞세운다면 그럭저럭 만들어도 대충 관객이 들거라는 그 '안이함'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선균이라느 장르의 미래는 이런 오락적 영화에 대한 좀 더 진지하고 내용성있는 고민에 대한 숙제로 남겨져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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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5.05 16:10

2017년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등지에서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 자국의 자본과 자국의 노동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국가 이익 우선주의'라는 외피를 두르고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국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현상이다. 그 선봉에 선 것은 대선 과정에서 막말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국 우선주의'를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자국의 보호무역주의와 반 이민주의 정책을 위해 '펜스'도 마다하지 않고, '동맹'도 깰 수 있다며 세계를 위협한다. 하지만 미국이 두드러질 뿐 세계 어느 나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이야, '아베' = 일본 국가 주의로 상징되듯 헌법 개정을 전제로 강력한 일본을 구축하여, 다시 한번 '팍스니포니카(PAX-NIPPONICA)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국가주의적인 정책은 일반으로 들어오면 '반한 시위' 등의 민족주의적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세계적인 민족주의의 경향이 도대체 영화 <분노>와 무슨 상관이 있단 것일까?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 전체의 구조화된 질서, 의식, 행동 체계는 개인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이를 아비투스(habitus)로 정의내리고 있다. 즉, 우리 사회의 아비투스가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고 한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분노>는 바로 그 일본판 아비투스의 민낯을 드러낸다. 

일본판 아비투스의 민낯 
자국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막겠다는 트럼트처럼 일본의 거리에서는 종종 '한군인은 물러가라'는 반한 시위가 등장한다. 여기서 일본은 '우리'요, 한국인은 '타자'이며, '외부인'이다. 자신들이 아닌, 우리가 아닌 타자가 바로 현재 일본의 어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며, 자신의 '위기'의 핑계를 '타인'에게 대고 있다. 정말 그럴까?

영화 <분노>의 시작은 무더운 여름 도쿄의 주택가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부부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피로 흥건한 현장에서 발견된 '憤怒(분노)'라는 단어만이 유일한 단서. 살해범은 잡히지 않고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영화는 그 살해범을 잡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용의자의 몽타쥬가 방영되는 시점의 세 이야기를 옵니버스 식으로 엮어간다.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던 딸 아이코(마야자키 아오이 분)를 데리고 돌아온 요헤이(와타나베 켄 분),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딸을 그의 임시직원 타시로(미츠야마 켄이치 분)가 호의를 가지고 대하지만 그런 타시로를 요헤이는 영 미덥지가 않다.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날마다 클럽 파티와 게이바를 전전하며 보내던 유마(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게이바에서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 분)과 '동거'를 하지만 역시나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접지는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키나와로 엄마를 따라 이사온 스즈미(히로세 스즈 분)는 그곳에서 사귄 친구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 분)를 따라 섬에 갔다가 만난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 분)에게 거부감없는 호의를 전한다. 



이렇게 세 편의 이야기,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난 부부 살해범의 몽타즈, 별 개로 진행되는 이야기와 상관없이 세 곳에 등장한 세 사람의 '외부인'의 모습은 이미 '관객'의 의심을 산다. 그리고 관객처럼 역시도 자신들 앞에 등장한 외부인에게 같은 외부인인 스즈미를 제외한 나머지 두 이야기의 '내부인'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부부 살해범의 진범이 누구냐는 '추리'와 함께, 세 '곳'의 사람들의 관계가 엇물려가기 시작하고, 그 이야기는 누군가의 '의심' 혹은 순진한 믿음을 통해 뜻밖의 파국으로 전개된다. 

어렵사리 마음을 연 '정체모를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믿음 끝에 그들을 맞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대한 경계와 의심, 심지어 '신고'다.  요헤이가,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자부하던 아이코가, 그리고 유마가 결국 그 '의심의 그물'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이'를 외면한 이후에 드러난 것은 아이너니하게도 '초라한 자신들'이다. 몸을 팔던 딸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없다는 딸에 대한 불신, 그리고 클럽을 전전하는 게이인 자신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불신이 결국은 '사랑하는 이'를 신고하고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믿었어야 했던 것일까? 그 믿음도 의심스럽다. 타나카를 따라갔던 스즈미에게 벌어진 생각지도 못한 '사고', 하지만 그 사고에 스즈미는 자신을 지키기에 연연했고, 타나카는 비겁했다. 그리고 그 '비겁'의 우정을 구걸했다. 하지만, 그 왜곡된 우정은 결국 또 다른 믿음의 파국을 초래하고야 만다. 

보편적 발화로서의 분노 
<분노> 속 이야기는 몸을 더럽힌 딸을 용서할 수 없는 전통적인 아버지, 번듯한 외양의 직장인이지만 성 정체성에 있어 떳떳하지 않은 남성, 그리고 미군에 의해 강간당한 소녀 처럼, 파격적인 사례가 나열된다. 즉, 일본이라는 세계에 호시탐탐 자신을 강대국으로 드려내고 싶어하는 국가의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민낯을 '성'이라는 원초적 매개를 통해 질문한다. 조상신에게 명절마다 감사하다며 정치인들이 순례를 다니는 이 국가의 민낯이 어떤가 묻는다.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 끝내 외면하는 나라, 그 나라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아니 꿀꺽 삼켜지고 있는 '강간'의 현실을 묻는다. 또한 '분노'를 새기며 한낮의 거리에서 미쳐간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묻는다. 

영화는 인간과 인간,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의 경계와 관계에 대한 질문 같지만, 결국 그 질문 너머에 있는 것은 번드르르한 경제 대국이라는 거죽을 벗겨내고 난 '초라한 자화상'이다. 하지만, 그 초라한 일본의 자화상에 '느네들이 그렇지'하면 미소지을 일만은 아니다. 그 세 편의 이야기로 드러난 가족과 인간, 그리고 관계 속에 축적된 '타자에 대한 선긋기'의 아비투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라고 그리 자부할 만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분노>는 보편적으로 고민하고 '분노'해야 할 발화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발화점은 마치 희말라야 정상에 던져지듯 우리 사회에 던져져 불꽃도 내지 못한 채 몇몇의 조기 상영과 심야 상영으로 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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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4.06 19:55

거개의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일본 영화는 굵직굵직한 현재사의 궤적을 다루거나,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우리 나라 영화에 비하면 '미시적'이다. 대부분 단막극 정도의 소재로 한 개인사의 문제에 천착해 들어간다. 그래서 '심심하다(?)'. 그런데 그 '심심한 영화 속에 빠져들다 보면 묘하게도 사람 사는 맛이 느껴진다. 두 시간 여의 상영 시간이 종료되고 나면, 괜시리 '사는 게 뭘까?'란 자문을 하게 된다. 


아쿠타가와 상에 5번이나 노미네이트되었던 소설가 사토 야스시는 전업작가로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인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새로운 모색을 하기 위해 직업 훈련 학교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전직은 실패했다. 그가 새 직업을 구하는 대신, 당시의 경험을 소설 <황금의 옷>으로 써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토 야스시는 <카이탄 시의 풍경>, <그곳에만 빛난다>에 이어 <황금의 옷>으로 하코다테 3부작을 완성했다. 그리고 전작들이 영화화된 것처럼 <황금의 옷>도 영화화되었다. 현재 개봉중인 <오버 더 펜스>가 그것이다. 

이 3부작은 그저 하코다테가 배경이라는 이유만이라면 아쉽다. 카이탄 조선소가 축소되면서 일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 사람들을 그린 <카이탄 시의 풍경>, 자신에게 닥친 뜻하지 않은 뜻하지 않은 운명으로 헤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곳에서만 빛난다>처럼, 모두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을 놓쳐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상실'과 '치유'의 3부작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정의다 싶다. 

무심한 남자와 이상한 여자의 만남
그렇듯 <오버 더 펜스>도 가족과도 인연을 끊은 채 도시에서 돌아와 직업 훈련 학교를 다니는 한 남자 시라이와(오다기리 죠 분)로 시작된다. 직업 훈련 학교에 다니지만 그가 딱히 정말 직업 훈련에 열의를 가지고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렇다고 딱히 대놓고 훈련 과정을 방기하지도 않는다. 마치 공기처럼 학교를 흘러다니다, 학교가 마치고 동료들의 한 잔도 마다하고 도시락과 맥주를 사서, 느릿하게 자전거로 짐도 풀지 않은 그의 집에 돌아와 검은 바다를 보며 밤을 보낸다. 

그렇게 그 어느 것에도 무심하던 그가 웃었다. 도시락을 사들고 나오다 마주친 남녀, 여자는 남자에게 '애정'을 운운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타조의 모습을 흉내낸다. 대로에서 마치 전위 예술같은 동작으로 실감나는 새의 소리까지 구현하며. 동행한 남자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질겁하지만, 시라이와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그의 미소를 그녀가 보았다. 

무심한 남자 시라이와와 이상한 여자 사토시(아오이 유우 분)의 인연은 뜻밖의 곳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뜻밖의 인연은 더 뜻밖의 하룻밤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관심과 끌림으로 시작된 하룻밤은 뜻밖의 봉변과 당혹스러움으로 마무리된다. 세상에 가장 무심한 남자 시라이와가 만난 여자는 남들이 쉬운 여자란 평판과 달리 여리디 여린 유리같은 여자였던 것이다. 

'다중'이 아니라 홀로 고립되어 스스로와 싸우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경영자의 고독이 오늘날의 생산 양식을 특징짓는다. (중략) 신자유주의 성과 사회에서는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의 의문을 제기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풀꽃같은 사람들
시라이와는 돜쿄에서 대기업까지 다니던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아내와 아이도 있었다. 단지 그에게 부족한 것이라면 '시간'뿐. 일에 너무 바빴던 그는 미처 가정을 돌볼 새가 없었다. 그 부족한 '시간'이 그와 그의 가족에게 뜻밖의 '사건'을 안겼고, 그 '사건'은 그로 하여금 도시에서 일군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마치 세상과 창을 하나 사이에 둔 것처럼 그렇게 직업 훈련 학교를 핑계로 '시간'을 흘러 떠다니고 있었다. 

차마 가족조차도 조심스러워 하는 그에게 다짜고짜 욕을 하며 니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한 술 더 뜬다. 그가 잘못했는데 자기가 더 펄펄 날뛰질 않나, 달려간 그의 앞에서 동물원을 한바탕 뒤집으며 소란을 피우질않나. 가장 정신없이, 가장 자신을 놓고 살아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녀는 '삶의 과민증' 환자였다. 마치 햇빛만 비춰도 벌개지는 햇빛 알레르기처럼 그녀는 삶의 사소한 자극조차도 버거워하며 자신을 '가학'한다. 영화는 시라이와와 달리 사토시가 남자 이름을 가지고 낮에는 유원지 알바에 밤엔 술집 여종원업원으로 일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쉽게 자신을 못견뎌하는 그녀의 행동만으로도 지나온 그녀의 삶이 순탄치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에 벽을 친 남자와 세상을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여자가 '남자'와 '여자'로 만나게 되며, 두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을 두르고 있던 '펜스'를 넘을 용기를 얻고 결국 자신을 두른 그것을 넘는다. 남자는 상처받았다며 웅크리고 있던 자신의 삶을 직시하게 되고, 여자는 그런 남자로부터 '최악이 아니라'는 위로를 얻는다. '사랑'이다. 

<오버 더 펜스>에는 시라이와만이 아니라, 그가 거리를 두었던 직업 훈련 학교 동료들의 삶도 등장한다. 그저 교관의 잔소리 대상이었던 그들, 하지만 시라이와와 사토시의 사랑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가듯, 그저 멀뚱멀뚱 서로를 '관전'하던 이들이 '소프트볼' 시합 준비를 하며 '돈독'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를 형성해 가며, 아니 그 관계에서 튕겨져나간 인물마저, 무채색의 배경이었던 그들 역시 '시라이와'와 '사토시'처럼 저마다의 '색채'가 있는 '존중받아야 할' 삶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영화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떠올리게 한다. 시라이와도 사토시도, 그리고 새로운 직업을 핑계로 직업 훈련 학교에 모인 모두는 어쩌면 '성공'과 '경쟁'이 된 사회에서는 밀려났다 치부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이들을 결국 사랑스런 풀꽃으로 그려내며, 존재와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마치 나태주 시인의 또 다른 <풀꽃>처럼. 

풀꽃 2
이름을 알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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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3.26 00:12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작 영화 <토니 에드만>을 보고 난 후 문득 장 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이 떠올려졌다. 소설 속 챕터를 드골에서부터 시라크까지 주인공이 살아온 시대의 대통령 이름으로 대신했던 책, 그래서 주인공 폴 빌릭은 드골 시대로부터 시라크 시대까지 나고 자라고 가족을 이루며 나이들어 갔지만, 그의 삶이 그 대통령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야기. 

마치 영화 속 토니 에드만은 독일 버전의 나이든 폴 빌릭 같았다. 오랫동안 외도를 했던 아내가 헬리콥터 사고로 죽고 그의 딸은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그런 상황에 대해 '속수무책'인 아버지 폴 빌릭, 물론 <토니 에드만> 속 딸은 자폐증도, 정신병원도 아니지만, 아버지인 토니 에드만이 보기엔 그에 버금가게 심각해 보이고, 그런 딸의 모습에 폴 빌릭만큼 '망연자실'해 한다. 하지만 그런 무능력해져 버린 노쇄한 가장의 모습을 넘어 <프랑스적인 삶>을 떠올리게 하는 건 바로 영화 속 아버지와 딸이라는 부녀의 갈등이 결국 아버지의 세대와 딸의 세대라는 시대적 충돌을 영화가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 개인의 삶이라는 것조차도 결국은 '시대'라는 배경 속에서만 그 형상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암묵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피동적으로 규정되어진다면 '인간'이겠는가? <토니 에드만>의 미덕은 그런 '피동성'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어설픈 토니 에드만의 부정(父情)에서 비롯된, '그럼에도'에 있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폴 블릭과 달리, <토니 에드만>의 아버지는 대책없이 적극적으로 딸의 인생에 뛰어들고, 그것이 '페이소스'가 담뿍 담긴 이 시대의 불랙코미디가 되었다. 그리고 토니 에드만의  '그럼에도'는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 함몰되어가는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이기도 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 놓고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기보다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적인 삶>, 장 폴 뒤부아 


살짝 이상한 아버지 토니와, 너무나도 멀쩡해서 문제인 딸 이네스 
영화가 시작되고 아버지 빈프리드 의 집에 찾아온 택배 기사, 하지만 그 택배 기사를 맞은 아버지의 행동은 어딘가 영 '정상적'이지 않다. 다짜고짜 틀니를 끼고 가발에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한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척하며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 퇴임하는 교장 선생님을 위한 아버지의 지도 아래 마련된 학생들의 공연을 보면 그런 의심은 한결 짙어진다. 

굳이 이상한 가발이나 틀니를 끼지 않아도 종종 가슴에 찬 심장 박동기가 울리는 소리, 다듬어지지 않은 추레한 외모,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유용함'이 사라진 듯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가 이혼한 아내의 집에서 오랜만에 딸과 조우한다. 

그런데 아프신 할머니를 보러 갈 시간조차 없다는 딸은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눈도 마주칠 시간이 없이 전화기에 매달려 있다. 그런 딸을 지그시 바라보는 아버지,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 아버지가 그 '지그시'의 선을 넘어 서면서 부터이다. 

딸은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조차 시간이 없다며 비서를 대신해 응대할 정도로 사무적이다. 그러던 딸이 아버지가 보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는 반응을 한다. 마치 사람이 죽어나가도 무심히 거리를 지나는 현대인들이 몸개그에 관심을 보이듯. 더구나 그 아버지의 해프닝은 이제 막 체결을 앞두고 거기에 온 신경을 쏟는 딸의 빈틈없는 일상을 자꾸 헤집고 들어오며 불편하게 한다. 심지어 한바탕 퍼부은 딸과 헤어진 그가 예의 틀니와 가발을 뒤집어 쓰고 토니 에드만이라며 그녀의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영화 처음부터 보여준 아버지의 '코미디'는 사실 하나도 웃기지 않는다. 오히려 보고 있노라면 그의 코믹한 설정은 어쩐지 불편하다. 심지어 그가 줏어섬기는 거짓말들은 어처구니없다. 그런데 그 기묘한 설정과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틈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딸과도, 딸이 계약하고자 했던 대표와도, 딸의 주변 사람들과도. 영화 속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이젠 뒤켠으로 밀쳐진 세대이고, 그 중에서도 외양으로 보면 가장 뒤쳐져있어 보이지만, 그런 자신의 처지를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꼰대'스러움 대신에, 마치 파티에 온 피에로처럼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만들며 세상의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 모습이 우리나라의 일부 어르신들이 보이는 '어처구니'없음과 다르게 또 다른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런 아버지가 애써 거짓말까지 해대며 만들어 내는 '실소의 공간'을 빽빽히 채워가는 건 오늘날 현대인의 전형이라고도 할 딸의 삶이다. 현대적 거간꾼이라고도 하는 루마니아와 독일 기업간의 체결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인 이네스는 계약의 성공을 위해서 루마니아 기업의 집단 해고 정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과 계약하면 자신들이 나서서 '해고'를 해주니 좋다는 식이다. 가족간의 관계도, 동료나 부하 직원들과의 문제도,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루마니아 라는 나라의 처지도 그 모든 것은 그녀의 '계약 성공'이라는 블랙홀 안에 무기력하게 빨려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헤집어 놓은 틈은 이런 '성공'만을 향해 다친 발톱을 치료하는 대신 기꺼이 그 고통조차 이겨내며 하이힐을 신는 딸의 삶이다. 아버지의 해프닝은 영화 중반까지는 내내 불편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해프닝은 철갑을 두른 듯한 딸의 일상에 조금씩 틈을 만들어 간다. 아버지를 보낸 딸은 그녀에게도 '눈물'이 아직 존재함을 스스로 시인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아버지와 함께 간 낯선 루마니아 가정에서 휘트니 휴스턴의 'The greatest of all'을 열창하고 만다. 이제는 잊혀진 어린 시절 그 언젠가 아버지의 반주에 맞춰 불렀던 그때처럼. 그리고, 자신을 옭죄였던 그 꽉조인 옷과 신발을 훌훌 벗어던진 채 동료들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모두 영웅을 찾고 있죠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 필요한거예요
전 저를 채워줄 사람을 찾지 못했죠
세상이란 외로운 곳이에요
그래서 전 저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웠어요
전 맹세했죠
누군가의 그림자 속을 걷진 않겠다고
(중략)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예요

성공적인 삶, 그리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질문
이네스가 절규하듯 부른 ''The greatest of all'은 이네스 세대의 절규다. 아버지 세대가 일구어 놓았다는 세상이 그녀들에게 물려준 건, '성공,과 경쟁, 자신들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북받침을 참지 못했듯이, 자신의 삶을 살아왔다던 난, 과연 내 자신을 사랑하는 걸까? 라는 질문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퇴물같은 아버지가 던진 질문도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가 딸에게로 여정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오랫동안 키워오던 개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늙어서 움직이기조차 힘든 개, 그 개를 보고 어머니는 이제 그만 안락사를 시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어머니도 개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 아버지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처치 곤란 아버지와 함께 한 딸과의 여정에서 비로소 그 진의가 드러난다. 정리 해고를 위해 방문한 루마니아의 공장, '경영 합리화'를 고민하기 위해 방문한 그곳에서 아버지는 살아숨쉬는 인간으로서의 루마니아 노동자와 그들의 삶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을 발견하듯, 아버지는 딸에게서도 그런 걸 되찾아주고자 역부족인 노력을 시도한 것이다. 



토니 에드만이 된 아버지는 마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정의를 되묻는 듯하다. 일찌기 요한 하위징하는 '시계'의 발명과 함께 중세의 시간 속에서 자유롭게 놀이하던 인간은 '인간적 삶'을 빼앗기고 '시간'이 지배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가속도'가 붙어, 인간에게 그나마 남겨져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미덕' 조차도 '합리'와 '산업'이라는 미명 하에 빼앗아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라고 영화는 질문한다. 털북숭이 루마니아 괴물이 된 아버지와 딸의 포옹이 뭉클했다면 당신은 이미 그 답을 얻었다.  


영화를 보고나니 문득 저런 아버지를 가진다는 것이 부러웠다. 이제는 세상이 퇴물이라 불러도 자신이 살아온 세상과 가치관에 대한 믿음이 당당한, 아,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도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 당당한 어르신들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반문하게 된다. 그 분들은 진정 당당해서 저러는 것일까? 오히려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이 아닐까?라고. 자신의 세대를 허투로 살아오지 않은 아버지 세대의 당당함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토니 에드만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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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3.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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