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스 11(2001)>과 <오션스 12(2004)>, <오션스 13(2007)>이 그랬다. 대니 오션이라는 사기꾼을 중심으로 범죄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라스베거스를 터는 이 영화들은 시리즈를 거듭하며 시리즈의 서사도, 재미도 반감되었지만, 그럼에도 조지 클루니를 비롯하여 브래드 피트, 멧 데이먼, 앤디 가르지아 등의 배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던 영화들이다. 그로부터 다시 십여 년 <오션스> 시리즈를 만들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다시 시리즈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앞선 시리즈의 주역이었던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 분)을 납골당에 모셔둔 채, 그의 여동생을 소환했다. 그 오빠의 그 여동생 아니랄까봐, 가석방된 데비 오션(산드라 블록 분)은 출소하자 마자 동지들을 규합한다. 단, 규합하는 동지들에게는 조건이 있다. 오로지 '여성'이어야 한다는 것. 2018년의 <오션스8>은 그렇게 '아마조네스' 군단으로 돌아왔다., 




아마조네스 오션스 8
<오션스> 시리즈 대니에게 참모 러스티 라이언(브래드 피트 분)이 있듯이, 가석방되어 예의 실력(?)으로 쇼핑을 하고, 하룻밤을 호텔에서 보낸 데비를 맞이한 건 '반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청혼을 할 수도 있다는 동료 루(케이트 블란쳇 분)이다. 가짜 위스키 제조로 살아가던 루에게 데비는 그의 오빠가 그랬듯 5년간 감옥에서 '시뮬레이션' 해본 1천 5백억원 짜리 목걸이 절도의 공모를 제의한다. 그리고 의기투합한 이들은 자신의 작전에 가장 걸맞는 동지들을 규합하는데, '살상은 금물, 평민들의 재산에 눈독들이지 말 것, 그리고 게임처럼 즐길 것'이라는 대니의 원칙과 달리, '남자'가 섞이면 '관계'와 '상황'이 복잡해진다는 이유로 '오로지 여성들'만의 규합을 단 하나의 원칙으로 삼는다. 

그 원칙에 따라, 2000년대 초반에 라스베이거스에서 1억 5천만 달러를 훔치기 위해 오빠가 '카드의 달인 러스티(브래드 피트 분), 소매치기 라이너스(맷 데이먼 분), 폭파 전문가 배셔(돈 치들 분), 중국인 곡예사 등을 불러들였다면, 2018년의 동생은 수장고 안에 모셔져있던 그 천 배나 되는 1천5백억 짜리 목걸이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패션 갈라 행사에서 '납치'하기 위해 3d 프린터를 동원해 짝퉁을 만들어 내는 전업 주부(?) 태미(사라 폴슨 분), 천재 해커 나인 벨(리한나 분), 보석 전문가 아미타 (민디 캘링 분), 그리고 소매치기 콘스탄스(이콰피나 분), 디자이너 로즈(헬레나 본햄 카터 분)를 불러 모은다. 그렇게 영화는 2001년에도, 그리고 2004년에도, 그리고 2007년에도 남성들, 혹은 한 명 정도의 조력자 여성으로 꾸려졌던 '남성 중심'의 작전을 온전히 '여성'들만의 힘으로 이루어 낸다. 

그들이 한 팀이 되는 이유는 제 각각이다. 오랜 동지와 벗으로, 혹은 연인으로, 여전히 가족의 그늘과 어려운 형편을 벗어나기 위해, 남편에게 이베이에서 샀다 거짓을 할 수 밖에 없는 '범죄에의 숨길 수 없는 욕망'때문에, 그리고 어린 동생이 필요로 하는 게 가짜 신분증인 어려운 처지 때문에, 그리고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디자이너지만 조만간 감옥에 갈 지도 모를 경제적 위기때문에, 혹은 외로움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사랑에 대한 복수 때문에. 하지만 저마다 제 각각의 이유로 모인 그녀들은 한 팀이 된 순간, 일고의 의심도 없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헌신한다. 그 흔한 작전 가운데의 흔들림이나, 회유, 배신은 2018년판 <오션스> 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영화는 '여성들'이 모이면 흔히 벌어지는 '시기'와 질투'의 관행이 여성들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듯 영화 전편에서 그녀들의 동지애는 진득하게 유지된다. 심지어, 영화 후반, 그들의 '이용 대상'이었던 데프네(앤 해서웨이 분) 조차 그들이 자신을 이용한 줄 알았음에도 그들을 '고발'하는 대신, '우정'의 대상으로 삼는다. 



여자들이 모이면~?
기존의 오션스 시리즈가 당대의 대표적 배우들의 '멋짐'을 한껏 소비하는데 주력했듯이, 2018년 여성 버전으로 돌아온 오션 시리즈 역시 '비싼 목걸이'을 훔치는 과정에서의 박진감이나 스릴 대신 각각의 캐릭터로 등장한 여성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작전에 주력한다. <오션스 11> 시리즈에서 조지 클루니가 26번, 브래드 피트가 24번의 의상을 갈아입으며 '눈호강'을 시켰듯이, 데비가 감옥을 출소하는 그 장면에서 부터 시작하여, 케이티 홈즈, 킴 카사디안, 다코타 패닝 등의 까메오 군단이 등장하는 갈라 파티와 베르사이유 궁전을 연상케하는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의 배경, 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데비, 다프네의 화려한 드레스 의상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화려한 드레스만이 여성을 돋보이게 하는 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러 간 이유가 바로 루 역의 케이트 블란쳇의 출연이었듯, 이미 <토르; 라그나로크>를 통해 압도적 존재감을 선보인 케리트 블란쳇이 빚어낸 기획자 루의 보이시한 캐릭터와 해커다움을 발휘한 리한나의 자유로운 스타일, 그리고 팀 버튼 감독의 영화에 출연 중인 그녀를 잠시 빌려온 듯한 분위기의 헬레나 본 햄 카터의 독특한 분위기가 그녀들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낸다. 

시작은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대비의 실연이자, 사기 사건이었다. 사기를 쳐야 할 그녀가 외려 사기를 당하여 감옥에 가고, 그 동안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 그 '억울한 사연'이 '작전'의 시작이자, 마무리이다. 하지만, 그런 대비의 '보복 작전'만으로 <오션스>를 제껴버리기엔 그녀들의 엔딩이 무색하다. 원래 함께 하려 했던 목걸이 외에, 어부지리, 혹은 애초에 그림자 작전으로 계획된 성과로 인해 약속된 이상의 보상을 얻게 된 그녀들은 백인 명사들이나 활보하는 그 메트로폴리탄 레드 카펫을 당당하게 우아한 블랙 드레스로 활보한 그 당당함으로 <오션스8>을 정의내린다. 감독의 선택을 받는 대신, 스스로 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들고, 다시 한번 디자이너로 재기를 하며, 남편의 눈치따위 보지 않는 사업가가 되고, 사랑을 찾고, 가족과의 화목을 찾고, 여유를 누린다. 비록 '목걸이 납치 사건'의 범죄 행위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전문적 능력'을 통해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체적인 삶을 누리는 것으로 아마조네스 작전을 영화는 마무리한다. 



영화는 남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동지애적 동성의 사랑으로 치유하는 과정으로, 그리고 오로지 여성들만으로 능력으로 성공한 작전으로, 또한 무엇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전 과정에서 다양한 인종의 융화, 이질적이며 차별적인 계급 사이의 조화를, 또한 그 결과로 신분과 인종을 상관없이 주체적 삶의 실현으로 전세계적으로 열기를 더해가지만 한편에서는 쉬이 해소되지 않는 각종 논쟁의 대상이 되는 '페미니즘' 흐름 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무리없이 담아내고자 한다. 

앞서 <오션스> 시리즈가 그랬듯이, 이 작전에 개연성이나, 장르 영화로서의 스릴 등을 기대한다면 아마도 역시나 <오션스 8>도 '미흡'한 면이 많은 영화이다. 하지만, 산드라 블록, 케이트 블란쳇, 앤 해서웨이, 리한나 등 당대 그 존재감만으로 보고 싶어지는 이 배우들이 한 영화에서 큰 고생없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션스8>는  어쩌면 그 값을 제법했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리 아깝지 않은 영화가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8.06.17 12:16

<탐정; 리턴즈>는 <탐정; 더 비기닝>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시리즈 영화다. 첫 번째 시리즈가 2015년이었으니 햇수로 3년 꽤난 적조했던 시리즈이다. 그런데 웬걸, <탐정;리턴즈> 속  주인공 권상우와 성동일이 한 열 번째 시리즈로 만난 것처럼 친숙하다. 그건 전작 '더 비기닝' 때문이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맡아왔던 두 배우 덕분이다. 드라마에서 매번 '카리스마' 넘치던 김명민 배우가 영화 <조선 명탐정>으로 오면 코믹한 캐릭터로 변신하는 것과는 달리. 권상우는 '그' 권상우 같고, 성동일은 '그' 성동일인 게 적어도 '리턴즈'까지 <탐정> 시리즈엔 '친밀감'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 '친밀감'이 다음 시리즈까지 이어질 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두 번째 시리즈인 <탐정; 리턴즈>에서 권상우와 성동일은 친숙해서 반갑다. 




권상우와 성동일의 <탐정> 
<탐정; 리턴즈(이하 탐정)> 속 권상우는 그 권상우다. 관객들에게 '권상우'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던 시절 그가 연기했던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말죽거리 잔혹사(2004)>, <청춘 만화(2006)> 속 그 '권상우'말이다. 그리고 가깝게는 얼마전 역시나 두 번째 시리즈를 마친 <추리의 여왕 시즌2> 속의 하완승으로 분했던 그 '권상우'이기도 하다. 마치 고등학생이었던 권상우가 나이가 들어, ''김하늘'과 연애도 좀 하고, 나이가 좀 더 먹어서는 형사가 되어 '최강희'와 함께 탐정을 하다, '서영희'와 결혼을 해서 아이가 딿린 유부남이 되어 돌아온 듯하다. 그는 지나간 시간 동안 다른 역할 속 다른 연기를 했지만, 관객들이 기억하는 바, 껄렁껄렁하고, 시덥지않은 농담을 던지며, 소심하게 여자들을 비롯한 남들의 눈치를 보며, 그 무슨 일을 해도 그다지 누군가에게 해를 주지 않는, 어눌한 말투의 착한 남자, 그 '권상우'란 트레이드 마크로 '강대만'이란 옷을 입고 돌아왔다. 

똑같은 장르물이지만 <추리의 여왕> 속 권상우가 분한 하완승이란 캐릭터가 경찰대 출신 엘리트로 탁월한 추리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 유설옥을 도와주며 로맨스로 엮이는 몸짱 얼짱에 격투력이 뛰어난 형사인 반면, <탐정>에서는 유설옥이 했던 역할인 '탁월한 추리 능력'을 강대만이 선보이며 하던 만화가게를 엎고 탐정 사무소를 차릴 만큼 추리 능력은 뛰어나지만 현장에서 싸움 능력은 젬병인 소시민이지만 두 작품을 공히 본 시청자,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대사'나 '설정'의 차이 외에 <탐정>과 <추리의 여왕> 속 두 권상우에 대해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둘 다 '허허실실' 그 권상우가 나오는 작품이다. 그러기에 <메디컬 탑팀(2013)>이나 <야왕(2013)> 속 캐릭터에 대한 호평을 할 수 없듯이 이제 마흔 줄의 배우로서 권상우란 배우의 연기 변신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질 수는 없지만 지나간 시간 속에 그가 쌓아왔던 예의 '권상우'란 캐릭터에 대한 시간의 내공은 여전히 시청자, 혹은 관객에게 익숙한 친밀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탐정; 리턴즈>는 그 익숙함을 능숙하게 활용한다. 

성동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함께 했던 이일화가 영화 속 아내로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말투는 거칠고, 배려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가족에 대한,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그득한 아버지, 심지어 영화 속 그의 쌍둥이 딸들은 미처 자라지 않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개딸'들 같다. 거기에 더해 '형사' 성동일 또한 익숙하다. <라이브(2018)> 속 지구 대장이 승전하여, <청년 경찰(2017)>의 경찰대 교수가 되기도 하는 등 여러 보직을 거치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자신이 놓친 범인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해 치매가 걸린 상황에서도 그 추격의 끈을 놓지 않는 <반드시 잡는다> 퇴직 경찰의 지나온 한 시절이<탐정> 속 노태수로 찾아온 듯하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탐정;리턴즈>는 첫 시리즈 <탐정; 더 비기닝>에 대한 기억보다, 배우 권상우, 성동일에 대한 친숙한 기억을 가지고 관객을 소환한다. 거기에, 언제나 그가 '여치'였던 듯 역시나 제 몸에 맞는 캐릭터로 돌아온 이광수의 '조미료'같은 합류로 시리즈의 재미를 확장한다. 



가장이 된 권상우와 성동일, 그래서 인간미 넘치고, 그래서 아쉬운 
의기 투합하여 개업한 탐정 사무소, 하지만 우리 사회 '탐정'에 대한 생소한 인식처럼 사무소는 파리를 날린다. 결국 그로 인해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각자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고, 그러던 중 경찰서에 우연히 만나게 된 '약혼자 실종 사건'은 뜻밖에도 거대한 음모의 실마리가 되는데.....라는 영화 속 사건은 '신선'하지는 않다. 장르물을 조금만 본 사람이라면 한 눈에 약혼자의 출신 보육원이 문제가 있을 거란 걸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건이지만, 전직 형사이지만 까칠한 새 팀장의 방해를 받는 노태수의 내공과 어설프지만 순간순간 빛나는 추리 능력을 가진 강대만 콤비에 여치 이광수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아들이었던 최성원 등이 분한 동료 형사의 '인간미' 넘치는 협업이 '뻔한' 서사를 채워간다. 

<탐정>을 엮어가는 건, 권상우와 성동일, 그리고 조력자들의 '인간미' 넘치는 활약과, 그들의 생활인으로서의 '애환'이다. 의논도 없이 만화 가게를 팔고 탐정 사무소를 차린 남편 때문에 아이를 내버려두고 나가버린 아내 때문에 아이를 띠로 메고 쩔쩔매는 아빠 권상우와, 서슬퍼런 아내의 칼질 앞에 입을 닫을 수 밖에 없는 워커홀릭 아빠 성동일의 고뇌가 시리즈의 행간을 메운다. 

그래서 아쉬운 장면들이 있다. <탐정> 속 뜻밖에도 빛나는 장면은 권상우, 성동일 콤비와 여치의 합이 맞는 활약상들 가운데에서도, 아이를 납치당할 뻔한 장면에서 빛의 속도로 등장하여 납치범을 제쳐버린 강대만의 아내 서영희의 존재감이다. 영화 속 서영희가 등장하는 장면은 마치 '스타카토'처럼 통통 튄다. <미씬; 사라진 여자(2016)> 로 여성의 이야기를 잘 그려냈던 이언희 감독에게 바란다면, 만약 다음 시리즈가 가능하다면, 이 '강대만의 아내'의 활약을 좀 더 늘려, 가장 탐정극의 확장 버전인 '가족 탐정극'으로 시리즈를 변주시켜 보면 어떨까 싶을 만큼 아내 서영희의 존재감은 빛났다. 그에 덧붙여 뜻밖의 복병이었던 손담비 캐릭터의 활용이 장르물의 전례를 넘어서지 못한 점이 역시나 아쉬움을 남긴다. 이처럼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활용은 '스테레오' 타입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은 그저 영화가 '남성중심적'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그래서 캐릭터의 해석과 서사의 측면에서 뻔하게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점에서 <탐정>이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으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8.06.15 16:04

인도 영화하면 불현듯 화려한 음악이 흐르고 영화 속 인물들이 뛰쳐나와 어울려 군무를 추며 노래를 부르는 '발리우드'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화 <바라나시>를 보면 그런 인도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인가를 깨닫게 된다. '발리우드'와 <바라나시>라는 영화를 품은 인도는 마치 한 쪽에서 그 물을 떠마시고, 목욕을 하며, 다른 쪽에서 그 물에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갠지스 강'과도 같다. <바라나시>를 통해 그 갠지스 강처럼 유장한 인도 문화의 한 지류를 맛본다. 하지만 그 '누런' 흙탕물의 맛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건 '인간 보편 존재와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 
유대교와 기독교 심지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생에 한번은 꼭 가봐야 할 성지로 '예루살렘'을 든다. 밤 하늘에 붉게 수놓는 십자가만큼 기독교 문화가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그러기에 성지 예루살렘은 익숙한 곳이다. 하지만, 인도와 힌두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바라나시'는 생소한 지명이다. 갠지스 강이라면 그래도 사회나 지리를 통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하지만. 우타르프라데시, 비하르, 서뱅골에 걸쳐있는 갠지스 평원을 가로질러 남동쪽으로 2,510km를 흐르는 갠지스 강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에게는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비슈바나타, 산카트모차나 사원 등이 있는 이 2010 km의 강 줄기 가운데에서도 인도인들은 굳이 바라나시를 '예루살렘'처럼 평생에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로망'한다.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여전히 이곳을 방문한다. 

힌두교를 믿지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엔 그저 누런 흙탕물의 냄새나는 강일 뿐이지만, 인도인들은 그 강으로 '순례'를 떠나 그곳에 몸을 담고, 그 물을 떠마시며, 꽃불인 '디아'를 띄워 소원을 빌고, 화장을 하고 그를 띠워 보낸다. 결국은 하나로 흐르는 강물에 어우러지는 삶과 죽음, 이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혼돈', 그러나 인도인의 종교적 소망의 집결체가 바로 '바라나시'이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인도에서도 이 '종교적 로망'이 예전같지 않다. 영화 <바라나시>에서 아들 라지브(아딜 후세인 분)가 일하는 직장의 사장은 아버지의 순례 길에 동반하려는 라지브가 못마땅하다. 2510km 그 갠지스가 그 갠지스일 텐데 굳이 바라나시일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고, 그 질문에 아들 라지브는 대답을 찾지 못한다. 그저 '아버지'가 가시니 어쩔 수 없다할 뿐. 그런 아들이기에 라지브가 바라보는 바라니시의 갠지스 강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냄새나는 모순 덩어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여전히 바라나시를 종교적 성지로 바라보는 세대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든 세대 간의 간극, 그곳에 영화 <바라나시>가 자리잡는다. 영화 속 70대의 아버지 다야(랄리트 벨 분), 그의 아들이자 딸의 아버지인 끼인 세대의 52세 가장 라지브, 그리고 그의 딸 25살의 수니타(팔로미 고시 분), 이 세 세대의 갈등과 화해가 바라나시라는 공간을 통해 흘러간다. 



아버지의 죽음맞이를 따라온 아들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장 라지브,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은 그의 70대 아버지가 바라나시로 순례 여행을 떠나시겠단다. 아니 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그곳으로 죽으러 가시겠단다. 힌두교도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그곳에 대한 로망을 말릴 수는 없지만, 그곳에 건강도 안좋은 아버지가 죽으러 가겠다니, 입장이 난처한 아들 말려보지만 아버지는 완강하다. 결국 혼자라도 길을 떠나겠다는 아버지로 인해 아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죽음에의 순례 여행에 동행자가 된다. 

15일을 예정하고 떠난 바라나시 행, 하지만 택시를 타고 다시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바라나시의 골목을 인력거를 타고 내리며 도착한 호텔 샐베이션(영화의 원제), 그곳에는 라지브의 아버지처럼 죽음을 맞이하러 위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동생에게 눈물의 이별까지 하고 온 죽음에의 여행이지만, 막상 호텔 샐베이션에서 맞이한 건 삶의 과정이다. 집안 일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아들이 만든 식사를 못먹겠다는 아버지, 혼자서 떠나오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손 하나 까닥않고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는 말 그대로 휴가온 여행자이다. 덕분에 아버지는 잠시 건강 상의 위기를 넘기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린 할머니를 비롯한 주변 투숙객들이랑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반면 사장의 눈치를 받으며 아버지를 모시고 울며 겨자먹기로 떠나온 아들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고생길'이다. 아버지 음식 봉양에서부터, 낯선 호텔과 바라나시의 생활을 책임지는 한편,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통해 이어지는 직장 일은 그를 매순간 '시험'에 들게 만들어 아버지와의 이별을 슬퍼하면서도,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딸, 그 인연의 '묵티(mukti 구원)'
하지만 그런 일상의 번거로운 잡음을 타고 드러나는 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쉬이 풀어내지 못하는 부자의 애증이다. 작가이자 선생님으로 존경받아왔던 아버지는 이제서야 '문재'가 있었던 아들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은 어릴 적부터 유독 자신에게만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다. 그러기에 아들은 뒤늦은 아버지의 칭찬에 부아를 낸다. 

반면 아들에게 그리 엄격했던 아버지는 정작 그 아들의 딸인 손녀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격려한다. 여전히 딸을 위해서라며 대학을 마치자 마자 좋은 남자와 결혼하기를 강제하는 그 아버지의 아들과 달리. 나의 자식이기에 나의 아버지이기에 접어지지 않는 마음들. 이렇게 영화는 죽음의 순례 장소에서 드러나는 세대간의 해묵은, 혹은 현재 진행형의 갈등과 애증을 드러낸다. 

'캥거루'가 되어 주머니에 안경도, 책도 뭐든지 넣고 싶다던 아버지, 이제는 삶이 거추장스러워 죽음의 여정에 올랐지만, 오래전 아들의 재능을 뒤늦게 안타까워하는 아버지가 홀로 죽음을 찾아가는 '코끼리'가 되기까지는 예정된 15일을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아들도 마찬가지다. 책임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왔던 아들은 바라나시라는 본의 아닌 유배의 장소에서 가장과 아들의 존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갈등한다. 그리고 유보된, 아닌 기약할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 이런 이들 각자의 '화두'를 풀어낼 시간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을 따라 바라나시의 죽음도 흘러가는 걸 보며, 아버지는 비로소 캥거루였던 자신의 존재를 놓는다. 그리고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 그 본연의 관계로 아들을 품는다. 아버지로서의 욕심을 놓고 아들을 아들로서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래서 자신의 자식이지만 누군가의 아버지인 아들을 풀어준다. 그리고 아들도 애증으로만 바라보았던 아버지와의 인연에서 풀려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돌아설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 역시 이제는 세속의 틀에서 한결 자유로워져 스쿠터를 타는 딸의 시동을 대신 걸어줄 여유를 찾는다. 

어쩌면 영화는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에서 순례의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 몸을 적시고, 다른 곳에서 그 물을 성수라 떠마시며, 그리고 그 물에 죽은 자들이 길을 떠나는 이 기묘한 '성지'의 공간은 '인연'의 번거러움을 덜어내고, 삶과 인연, 그리고 죽음에 대해 돌아볼 여유를 준다. 가족이기에 놓아버릴 수 없었떤 갈등과 애증은 바라나시라는 '죽음'이 전제된 특별한 공간을 통해 '묵티(구원)'에 이른다. 그리고 <바라나시>를 통해 관객들도 그 '인연의 묵티'라는 화두를 짊어지고 돌아온다.  
by meditator 2018.06.01 17:26

사실 이 리뷰를 쓰는 것이 적잖이 부담스럽다. 글쓴 이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게 리뷰를 적었는데, 칸에서 황금빛 상이라도 타면, 나의 생각이 편협하거나 옹졸했다는 반증이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세계성이 곧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의 생각과 맞물릴 수만은 없다는 뻔뻔함으로, 이 글을 계속하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2018년작 영화 <버닝>은 이 시대를 사는 청춘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승화하고자 한다.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하여 상징적 대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로 살아가야 하는 청춘의 슬픈 운명을 각인시킨다. 또한 영화 속 주인공 해미가 로망으로 여겼던 아프리카의 북소리를 연상케 하는 베이스의 퉁퉁 튕기는 모그(mowg)의 ost는 '파주'라는 지역적 공간을 젊음이 방황하는 세계 그 어느 곳으로 그 정서를 확장한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정작 이곳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 청춘의 당대성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 '상징성'이나 '존재론'이 분명하게 다가올 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대의 청춘들이 너무나 상징적이고 수려해서 우리의 문학적 언어에 귀기울이기 힘들 듯, <버닝>은 그렇게 대중과 교감하기 힘든 '순수 문학'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크다. 



<버닝>, 그리고 <초록 물고기>
영화의 런닝 타임이 흐른 지 어언 한 시간 여,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지금 이창동 감독이 이 만연체로 표현하고 있는 2018년을 살아가는 종수(유아인 분)와 해미(전종서 분)의 삶에 동시대 청춘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문득 이창동 감독을 문제적 감독으로 떠오르게 만든 작품 <초록 물고기>가 떠올랐다. 

느와르의 형식을 띤 영화 <초록 물고기>는 <버닝>과 유사한 관계 구성을 보인다.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청년 막동(한석규 분), 그는 우연히 만난 여인 미애(심혜진 분)을 만나게 되고, 그녀로 인해 그녀가 일하는 나이트 클럽을 중심으로 암약하는 암흑가의 보스 배태곤(문성근 분)과 조우하게 된다. 미애를 소유하고자 하는 배태곤과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막동, 이들의 엇갈린 삼각 관계는 결국 청부 살인의 비극적 결말로 끝맺는다. 

1997년 그 시대의 부도덕한 부의 상징이었던 암흑가의 보스, 그는 시간이 흘러 2018년에 직업조차 모호한 유한남 벤(스티븐 연 분)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1997년에도, 2018년에도 여전히 직업도 마땅치 않은,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청춘의 모습은 이제는 50대가 된 한석규에서 서른 즈음의 유아인으로 변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여전히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남자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성적인 희생양으로 대상화되는 여성의 존재도 대동소이하다. 

16만명으로 흥행 성적만 놓고 보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초록 물고기>는 1997년 올해의 좋은 영화로 선정되며, 평단과 관객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한석규는 그 시대의 젊음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시간이 흘렀지만, 이창동 감독의 다음 작품 <박하 사탕>의 영호와 함께 막동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젊은이라는 점에서 대중은 공감한다.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들였지만 세상 물정을 몰랐던 그, 여전히 일산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한 가족 공동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그는, 배태곤으로 상징되는 '물신'의 세상에 무지했고, 그래서 그의 시도는 그의 생명을 담보한 무모한 실패로 되돌려 졌다. <초록 물고기>를 보지 못한 사람조차도 피흘리며 형에게 전화를 걸다 죽어가는 막동의 모습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그리고 이십 여년, 군대를 제대하고 나이트 클럽에서 일 자리라고 구하려던 청년은 윌리엄 포크너에 자기 동일시는 하는 알바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역시나 온 몸을 드러내고 홍보를 하는 알바생이다. 나이트 클럽 일에 청부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던 청년은 글을 쓰고 싶지만 무엇을 써야겠는지도 모르는, 알바로 돈을 벌고 싶지만 세상의 강제를 견뎌내지 못하는 무기력하지만, 자존심만은 여전한 청년이 되었다. 그가 사랑한 해미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그녀가 사랑한 아프리카만큼이나 그녀의 삶 역시 모호하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2018년의 청춘이 그렇다. 1997년에 그리도 구체적으로 손에 잡혔던 청춘은 2018년이 되서 무기력하고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알바를 하기 위해 갔던 종수가 군대식 호명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모호한 건 감독 자신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여에 걸쳐 장황하게 감독은 젊음을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하려 할 수록 그 젊음은 추상적이었고, 그 '추상'은 동시대의 실존과 어쩐지 '괴리'가 되는 느낌. 크로키로 그려내야 할 대상을 추상적 터치의 정물화로 그려낸 그런 느낌을 <버닝> 속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받는다. 그러기에 <초록 물고기>속 막동에게는 공감했지만, <버닝>의 종수는 2018년에 살지만, 어쩐지 이 시대의 젊은이라기엔 막연하다. 과연 종수가 자기 동일시 했던 윌리엄 포크너, 그 추상적이고 모호한 존재에 공감하는 젊음이 얼마나 될까? 감독은 이 시대의 젊음을 그리려 했지만, 정작 그 젊음들은 이창동 감독이 그려낸 젊은이에 공감할까? 

<버닝> 그리고 <파주>
파주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기력한 젊음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나의 아저씨>를 통해 여운깊은 연기를 보여준 이선균 주연의 2009년작 <파주>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도 의문에 쌓인 한 여인의 죽음이 있고, 무엇인가 하기 위해 파주를 찾았지만 무기력했던 한 남자 중식이 있다. 

박찬옥 감독의 2009년작 <파주>에서 파주는 이제 막 신도시 건설의 끝자락에서 파괴되어 가는 농촌을 그려낸다. 그곳에서 불륜의 관계로 엇물리는 세 남녀의 사랑은 결국 철거민 점거 농성장에서 '결자해지'의 연을 가지게 된다. 영화 <파주>는 흔들리는 청춘과 농촌에서 도시로의 변화되어가는 그 지점에서 해체된 관계를 통해 지역과 동시대의 청춘의 관계를 절묘하게 그려냈다.

그렇게 2009년에도 이미 도시로 진입되어 가던 파주는 하지만, 이제 늘 일산이라는 변두리를 통해 한국사의 그늘을 담아왔던 이창동 감독에 의해, 발전되어 가는 일산에 밀린 폐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쇄락한 농촌의 정경으로 다시금 찾아온다. 쇄락한 농촌, 그곳에서 폐쇄된 관계 속의 부자는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에 방치된 인간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이 시대의 청춘은 <초록 물고기>에서 어떻게든 자본주의 사회에 진입하려 안간힘을 쓰던 이도 아니요, <파주>에서 이제 막 도시로 진입되어 농촌처럼, 자본주의 사회 그늘에서 그 그림자를 직시하려 고군분투하던 이도 아니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2018년의 청춘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는 한층 더 발전했지만, 그 시대의 발전에 방치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이다. 

영화의 제목 <버닝> '태우다'는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흔히 인터넷 상에서 열렬히 어떤 대상에 빠져있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종수는 하던 알바도 놔둔 채, 문창과를 나와 하려던 창작 작업조차 딜레마에 빠진 지리멸렬한 상태다. 뜻밖에도 그런 그가 우연히 만난 고향의 옛 여자 친구에게, 그리고 그녀와 함께 나타난 그녀를 소유한 듯한 의문의 남자에게 빠져듦으로써 자신의 무의미한 삶을 반증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성'은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주제'를 매개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버닝> 역시 마찬가지다. 종수는 빠져들지만 벤은 빠져들지 못하는 그 '여성'이, 무기력했던 종수를 전사로 깨어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의 선택은 폭발적이지만, 동시에 종수란 존재를 증명하기엔, 또한 그의 행동이 벤이라는 대상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정죄로 보기엔 우발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단말마적 그의 버닝이 무기력했던 그의 존재와의 연관성에서 우연히 나타났던 벤만큼이나 피상적이다. 



<버닝>, 그리고 <리턴>
<초록 물고기>라는 작품을 오래도록 회자되도록 만든 건, 막동이란 청춘을 더욱 안타깝게 조폭 보스 배태곤의 존재다.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거침없이 제거해 버리는 이 존재의 무참한 악이 그 맞은 편에 있는 선량한 막동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버닝>에서 그 역할을 하는 건 스티븐 연이 분한 벤이다. 그는 직업조차 알 수 없지만, 강남의 빌라에 살며,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대마초를 스스럼없이 피우고, 폐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가진, 이 시대 '부도덕, 혹은 탈도덕의 상징'. 그런데 어쩐지 벤으로 그려진 이 '악의 축'이 새삼스럽지 않다. 파괴적이지도 않다. 

얼마전 종영한 sbs의 <리턴>에서 벤 저리 가라할 재벌가 혹은 유력 명문가 자제들의 도덕적 아노미가 '진수성찬'으로 나열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리턴>을 들 것도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tv 드라마, 그리고 종수를 연기한 유아인이 영화 <베테랑>에서 연기했던 조태오를 대표로 하여 빈번하게 등장했던 캐릭터들의 '연장'이다. 그런 면에서 <버닝>은 우리 사회에서는 새롭지 않은 부도덕한 가진 자와, 그 가진 자에 의해 농락당하는 여자와, 그녀를 사랑했던 순진한 남성의 삼각 관계의 재연이라는 점에서 '서사'적 신선함을 접고 들어간다. 



<버닝>, 그리고 <시>
하지만 서사의 신선함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의 빼어남으로 얼마든지 상충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부도덕한 가진 자들을 악의 축으로 한 작품들이 계속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창동 감독은 어쩌면 뻔한 이 사회의 부조리한 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과 청춘의 고뇌를 잘 구현해 냈을까?

그 지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전작 <시>가 떠오른다. 노인의 처지에 버텨내기 힘든 일을 하면서도 손주를 키워가는 할머니 미자(윤정희 분)가 시를 배우게 느끼게 되는 '세상에 대한 자각'이 뜻밖에도 마주하게 된 현실을 영화는 담담하게, 그래서 더 처연하게 승화시켰다. 할머니의 현실, 손주의 상황은 구체적이었기에, 할머니가 만난 시를 통해 깨달은 자각의 세계는 더욱 처절했다. '안다', '깨닫다', '보다'라는 '인문학적 사고'가 만난 '자각'과 '책임'의 묵직함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설명해 낼 수 있었을까. 

한 소도시에서 벌어진 청소년들의 부도덕한 사건으로 비롯된 할머니의 슬픈 결말은 할머니가 처한 상황의 구체성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그러기에 2018년 <버닝>으로 돌아온 이창동 감독이 어쩐지 아쉽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통해 표현해 내고자 했던 상징을 이해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감독이 그려낸 그 상징이 미자 할머니가 살았던 그 현실에 가닿았던 <시>와 달리, 2018년의 청춘의 현실에서는 막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학적'인 우리 문학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쉬이 회자되지 않는 것처럼 상징으로 점철된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낯설지 않은 이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치정극은 그 집요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쉬이 다가서지지 않는다. <시>의 상징이 대중과 잇닿지 못해 안타까웠다면, <버닝>의 상징은 대중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여겨진다. 서른의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이지만, 마치 저기 90년대나, 80년대에서 시간 여행을 온 여행자 같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하루키처럼 사는 건 아니다. 본의 아니게 전투에 떠밀려온 몇 포의 젊은이들에게 종수의 전쟁은 사치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by meditator 2018.05.20 02:23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있다. 아이를 재우려고 자장가를 불러주다, 어릴 적 아무 생각 없이 부르던 동요의 고운 가사에 애틋해지고, 아이의 '독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책을 읽어주다 그 작가의 글과 그림체에 매료되버린다. 레이먼드 브릭스가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년과 눈사람의 우정을 그린 <눈사람>의 작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브릭스는 <눈사람> 외에도 <산타 할아버지>, <곰> 등의 작품으로 아이들은 물론, 동화책 좀 읽어줬다는 엄마들에게도 친숙한 작가이다. 그 레이먼드 브릭스가 자신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작화했던 <에델과 어니스트>가 영화화되어 찾아왔다. 마치 옛벗을 만나듯 레이먼드 브릭스의, 아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로저 메인우드 감독의 <에델과 어니스트>를 만나러 갔다. 




비판적인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c'set la vie'
나와 가까운 사람, 하물며 나를 존재케 해준 부모가 살아온 삶에 대해 '회갑연 상찬'을 넘어선 '조명'이 쉽지 않다. 물론 그 '반대'의 '부정'의 경우도 있지만, '상찬'이던, '부정'이던, 나라는 존재의 감정적 찌거기를 거르고 부모 세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언제나 숙제이다. 그런 면에서, <에델과 어니스트>는 여운이 남는다. 극적이라서가 아니라, 마치 한 장, 한 장, 그림책을 넘기며 한 세대의 삶을 조감하는 심정으로, 그래서 결국에는 나 역시도 이 분들처럼 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사을 뛰어넘지 못한, 한 세대로 인생을 살아가겠구나 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그런데 <에델과 어니스트>에 돌입하기 전에, 레이먼드 브릭스라는 작가에 대해 우선 '배경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즉, 그가 자신의 부모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이다. 흔히 소년과 눈사람의 겨울 한 철에만 존재하는 조금은 쓸쓸한 우정에 대한, 그래서 아름다운 동화책의 작가로만 우리는 기억하지만, 그의 작가적 세계는 생각보다 비판적이다.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먼드 브릭스, 영화 속 그의 부모님들이 전쟁과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마련한 집에서, 그들이 얻었던 직업을 유지하며 나름 평생을 순탄(?)하게 보냈지만, 정작 레이먼드 브릭스는 그 자신에 대해 다르게 설명한다. '세상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해야 했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통해 대체로 난 우울하고 비관적이고 부루퉁해 있다. 언제나 세상 살기 괴롭다고 느껴왔고 나이 들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언제나 뚱해왔고 지금은 더 불만투성이다.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그렇게 불만이 많고 뚱한 그를 통해 표현된 세상은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전래 동요 모음집인 <마더 구스>는 흔히 동요를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현대적인 배경에 노동 계층을 주인공으로 한 해학적인 해석을, 어린이와 작은 사람의 짧은 3일 간의 만남을 그려낸 <작은 사람>은 보는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육아에서 인간의 만남에 대한 상징적 이해로, <바람이 불 때에>에서는 핵전쟁이라는 세기말적 상황과 그에 대해 순진하리만치 성실한 노부부를 통해 '세계사'와 불가항력인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핵'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경고하며 세상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그의 시간이 자신의 부모 세대를 그려낸 <에델과 어니스트>에서도 고스란히 관철된다. 



보수당 지지자 에델과 노동당 지지자 어니스트 부부의 삶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였던 어니스트는 날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가정부였던 에델과 마주친다. 자신을 보며 씩씩하게 인사하는 청년 어니스트에게 호감이 갔지만, 늘 집주인의 닥달로 그와의 눈맞춤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에델, 하지만 용감히 그녀가 일하던 집의 문을 두드린 어니스트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이어질 수 있었다. 

한참 젊은 두 연인의 만남, 하지만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였던 그들의 존재가 그들의 만남과 결혼 마저도 규정한다. 당시 런던의 밤거리를 흥청이게 했던 파티 문화는 그들에게는 '사치'였으며, 결혼을 한 그들을 맞이한 건 흰 천으로 겨우 가림막을 가린 침대 하나 없는 20년 장기 융자의 텅빈 집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각자의 형제를 지난 1차 대전으로 잃은 그들이 살아남아 서로의 짝을 만난 건 다행이며 보장된 어니스트의 직업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어 행복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성실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다 뒤늦게 어니스트를 만나 결혼하게 된 에델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싶다던 어니스트의 소망과 달리 레이먼드 단 한 명을 낳고 단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자른다는 사실 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아들을 귀히 여겼던 에델이었지만, 2차 대전 발발과 히틀러의 런던 공습은 이 부부로 하여금 소중한 아들을 전쟁을 피해 시골로 떨어뜨려 보내야만 하는 '이별'을 겪도록 만든다. 그들이 조금씩 꾸며 가꾸었던 집은 전쟁의 포화 속에 반공호가 되었고, 결국 전쟁의 참화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이어져 갔다. 하늘이 맺어준 그들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이렇게 영화는 평범한 한 부부의 일생이라는 날실과 그 날실의 변화를 주도하는 역사적 사건,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을 통해 변화해 가는 부부의 삶을 관조적으로 그려낸다. 세계를 뒤흔든 전쟁은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키지만, 그럼에도 우유 배달 조합의 성실한 직원이었던 어니스트와 알뜰한 에델은 전후 영국의 복지와 자본주의 발전의 혜택의 '수혜자'가 되어 '안정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격동의 세월 속 객체로서 부부를 그려내지만은 않는다. 가정부 계급 출신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요양 병원에 병문안 온 장발의 아들에게 빗을 건넬 만큼 깔끔했던 어머니 에델은 우유 배달부인 남편에게 왜 당신이 노동 계급이냐며 반문을 할 정돌 처칠을 비롯한 보수당 정부의 일관된 지지를 보였다. 그녀에게 어니스트와의 결혼 생활은 '노동 계급'에서의 계층 상승을 보장해준 삶이었다. 

그에 반해 늘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아던 남편 어니스트는 최저 임금 결정안에 두 팔 벌려 환호할 정도로 노동 계급의 정체성에 충실했다. 때론 그가 지지했던 정책이 그의 신념을 당혹스럽게 할 지라도. 그래도 그는 자전거에서, 카트,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은퇴'할 때까지 '해직'의 위험없이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에델은 '럭비'를 하는 상류층 계급이 다니는 학교에 아들이 입학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고, 아들을 통해 그녀가 소망했던 계층 상승의 꿈을 이루는가 싶었지만, 그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미술 학교를 갔고, 손자를 안겨주는 대신 조현병의 아내와 아이도 없이 살아가야 했다.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이 갸륵했지만, 그 아들은 금세 커서 부부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 부모를 낯설게 했다. 결국 성실하게 살아내며 침대와 소파를 마련하고, 선물로 받던 석탄 한 줌 대신, 보일러와 텔레비젼의 문명을 겪어낸 부부였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병으로 이별을 맞이한다. 젊은 부부의 열의로 가득했던 집은 아들 레이먼드가 얻어온 배의 씨앗이 아름드리 나무가 되도록 그들의 스위트 홈으로 여전했지만, '부부의 인생'은 그 시간을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한 세대의 삶이 마무리되어간다. 



영화는 레이먼드 브룩스의 부모를 통해 1,2차 대전을 경과하고, 전후의 복지 국가 시대를 살아낸 세대의 삶을 조망한다. 그들은 부부였지만,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은 달랐고, 그 '주관'과 다르게 국가의 정책과 문명의 발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냈다. 그런 그들의 '순응적'인 태도 그 어디에서도 레이먼드 브룩스가 느꼈던 우울하고 비관적이었던 정경은 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건 부모 세대와 그 부모 세대에 대해 '비판적'일 수 밖에 없는 '자식 세대'의 간극일 터이다. 

영화를 보면서 감회가 묵직해진 건, 전쟁을 겪으면서 각자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임에도 '부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낸 그 시간에 대한 다른 공간을 살았던 부모 세대를 둔 자의 회한이다. 우리네 부모들은 에델과 어니스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정치적 입장'이 그들의 생사를 갈랐으며, 그들이 '순응'의 대가로 누렸던 '안정된 삶'을 얻기 위해 처절한 자기 희생과노력을 겯들여야 했다. 이미 '선진국'인 국가의 국민과, '개도국'의 다른 운명이 다른 삶의 길을 걷게 했던 지난 시기에 대한 투영이 <에델과 어니스트>에 대한 감상을 묵직하게 한다. 




by meditator 2018.05.18 04:24

가끔씩 우스개처럼 전해지는 해프닝들이 있다. 공시생 학원에 엄마가 전화해서 우리 아이 학원 왔냐든가, 혹은 대학 수강 신청 관련하여 나서는 모성이라던가, 이 '웃기지도 않는' 다 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실화라는 점에서 우리는 실소한다. 실제 대학 학부모 방담 자리에서 우리 아이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한다는 하소연을 하는 엄마를 목격하기도 했으니, 아마도 사실일 터이다.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엄마'의 품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 그러니 초등생의 경우 오죽할까? 부모들의 지시에 따라 방과 후의 시간을 보내는 건 당연지사가 된 지 오래 되었다. 방과 후 공부를 하기 위해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지쳐 있다. 하루 종일 학교 생활을 했으니 당연,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도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이런 삶에 '이견'이 없다. 힘들고 지쳐도 그러려니 한다. 그래서 더 '요즘 아이들'이 안타깝다. 그렇게 '부모'가 '스케줄 짜준'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이들과 가정의 달 5월에 <원더스 트럭>을 한편 보는 건 어떨까?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성장과 부모의 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의 영화다. 




'시궁창'에서 별을 찾아 떠난 아이들
<원더스 트럭>의 주인공은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 분)과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먼즈 분)이다. 그런데 이 두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는 시공간이 다르다. 하지만 시공간을 달리 하는 이 소년과 소녀를 잇는 공통점이 있다. 소녀가 물가에 띄워 보낸 종이배에 그녀가 쓴 단어 'help',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했던 소년과 소녀, 하지만 그들은 그 '도움'을 찾아 스스로 길을 떠난다.  

미네소타 주 호숫가에 사는 소년 벤이 사는 시간은 1977년, 사서인 엄마 엘레인(미셸 윌리암스 분)와 단 둘이 사는 소년은 여전히 늑대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 꿈 속에서 '벤'을 불러 깨워주던 아빠의 목소리, 하지만 현실의 그를 깨워주는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중에'라며 말하며 미루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나중이라 말하다 기회를 잃을 지도 모른다며 투박하게 농담을 던지던 벤의 말은 교통사고로 진실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그리워 엄마의 방에서 옛날을 추억하던 벤은 <호기심의 방 원더스 트럭> 속 아빠가 보낸 카드에서 찾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다 그만 벼락을 맞아 청력을 잃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청력을 잃어버린 벤은 소녀 로즈와 또 하나의 공통점이 생긴다. 1927년 무성 영화와 같은 흑백의 공간 속 소녀 로즈, 그녀는 듣지 못한다. 그리고 듣지 못하는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기 싫어하는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세상과도 분리시키려 한다. 그런 '답답한 삶'을 견디지 못한 소녀 로즈는 가정교사의 가르침 대신, 긴 머리를 끊어내며 아버지가 만들어준 새장과도 같은 삶을 뛰쳐 나온다. 소녀가 본 영화 속 무성 영화의 시대가 끝나듯, '무성영화'의 세상 속에서 살 수 없는 소녀는 '무성 영화'처럼 자신을 가두려는 '아버지'의 세상을 스스로 떨쳐나온다. 



그렇게 1977년과 1927년 흑백과 총천연색으로 색채마저 달리하는 50년의 시공간을 넘어, 도움이 필요했던 소년과 소녀는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 길을 떠난다. 어머니가 남긴 책 <호기심의 방 원더스 트럭> 속 켄케이드 서점을 찾아 '아버지'의 향방을 찾으려는 소년과 이제는 자리를 잃은 무성 영화 속 주인공인 어머니를 그리워, 여배우인 어머니가 연극 배우로 공연하는 극장을 찾아 온 소녀는 '뉴욕'이라는 공통적 공간으로 향한다. 

순간의 선택이 만들어 낸 기적
길을 떠난 소년과 소녀의 여정은 당연히 순탄하지 않다. 1927년이든, 1977년이든 그 시대의 번화가였던 뉴욕의 번잡한 소음 속에서 여전히 '묵음'의 세계 속에 갇힌 소년과 소녀는 그 '소음'의 세계 속에서 이방인 일수 밖에 없다. 달려오는 마차의 소리는 위기가 되고, 친절한 소년의 한 마디는 무용지물이다. 

소년 자신이 동일시했던 무성 영화 속 흠모했던 주인공인 줄 알았던 여배우는 알고보니 소녀의 어머니 릴리안(줄리안 무어 분)이었다. 하지만 힘들게 자신을 찾아온 딸에 대한 반응은 떠나온 집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혼자서 위험하게 돌아다니냐며 펄쩍 뛰기만 하는 어머니를 두고, 다시 자연사 박물관으로 '모험(?)'을 떠나는 소녀.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았던 뉴욕에서 친절하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던 소년을 따라 역시 무작정 자연사 박물관으로 향한 소년, 그렇게 두 사람의 여정은 시간을 두고 다시 겹친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두 사람의 여정은 쉽지 않다. 수상스런 그녀를 의심하는 박물관 경비원들의 추격,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 친절했던 소년과의 숨바꼭질,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방을 박물관처럼 꾸몄던 벤과, 역시나 자신의 방을 '디오라마(작은 공간 안에 어떤 대상을 설치해놓고 틈을 통해 볼 수 있게 한 입체전시)'처럼 꾸몄던 로즈는 시대를 달리한 자연사 박물관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안식'을 느낀다. 박물관 중앙에 전시된 운석에서 시대를 달리하며 조우하는(?) 두 사람, 하지만 영화는 '환타지 같은 기적' 대신,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선택의 기적을 선물한다. 



1927년에 스스로 부모가 만들어 놓은 새장 같은 세상에서 한 걸음을 내딛은 소녀는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오빠를 만나 자신이 살아갈 새로운 세상을 연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공부와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들까지 얻으며 행복하게 살던 소녀는 이제 50여 년의 시간을 보내고, 오빠와 함게 하는 서점에서, 아빠를 찾아 그곳으로 온 손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1927년의 로즈와 1977년의 벤은 그렇게 시간을 뛰어넘은 인연으로 만나게 된다. 또한 벼락으로 청력을 잃은 상실감에 시달리던 벤은 그 상실감을 공감해줄 동변상련의 동지를 만나게 된다. 로즈가 부모가 만들어 준 새장 같은 집을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벤이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스스로 세상 속으로 한 발을 내딛은 소년과 소녀의 용기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연'의 기적을 만든 것이다. 

1927년의 무성 영화와도 같은 뉴욕, 그리고 1977년 데이빗 보위의 '스페이스 오디티'와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ost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컬러'의 현란함으로 표현된 뉴욕, 동일한 공간이지만 다른 시간대가 가지는 문화적 느낌을 색채감으로 표현해낸 영화는 그 분리된 공간 속에 스스로 한 발을 내딛은 소년과 소녀의 인연을 1977 실제 벌어진 뉴욕 정전 사태를 배경으로 별빛 속의 조우로 기적처럼 그려낸다. 결국 '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선택, 그 선택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영화는 스스로 빛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매우 '영화적인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러기에 아이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부모, 부모가 정해준 울타리에서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는 이 시대의 가족에게 한번쯤 봐야 할 필독서 같은 영화이다. 




by meditator 2018.05.06 17:10
영화의 시작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건 줄리엣 비노쉬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난 남녀의 정사이다. 하지만 그 '나신'의 뒤엉킴이 자아내는 '므흣'한 감상에 빠져들기도 전에 우리는 그 '남녀의 정사'가 마치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듯 살아가는 일상사의 연장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치 설탕을 넣어야 하는 음식에 잘못들어간 소금으로 인한 식사 자리의 고약함처럼, 그렇게 '정사'를 벌이는 두 남녀의 불협화음은 베드씬의 환상을 고르란히 깨어버리고, 그것이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걸 절감케 한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룩스

장황한 언어 뒤의 진실
정사의 매료됨을 깨어버리는 주된 이유는 바로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이자벨의 만족스럽지 못함 때문이었다.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그녀의 언어는 지금 당신이 전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처럼 전해지고, 그 역설의 언어는 파트너인 상대방을 더욱 고전케 만든다. 때로는 생수 한 병으로, 혹은 예정된 약속에 대한 간과나 무시에 대한 장황한 설전으로 번지는 두 사람의 대화, 그러나 '언어'는 솔직한 속내에 대한 예의바른 절차일 뿐, 그 '관례'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건 여전히 결혼 반지를 빼지 않는, 아니 빼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남자 빈센트(자비에 보부아 분)와 그런 남자가 야속한 여성 이자벨이다.

그리고 이자벨의 해프닝은 이어진다. 현대 미술관 관장이자 화가인 이자벨, 그녀와 일 관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던 친구인 연극 배우(니콜라스 뒤보셸 분)와 대화 역시 엇물린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권태로운 친구는 그 삶의 권태로움을 이자벨을 통해 도피하려 하고, 그 친구의 알듯 말듯한 속내는 이자벨과의 장황한 대화를 통해 결국 하룻밤으로 이어지지만, 끝내 결혼을 파기할 수 없다는 친구와 이자벨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그런 식이다. 그녀는 자신의 갤러리로 가지고 있으며 예술가로서 나름의 입지가 있는 듯하지만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전 남편과 딸 한 명을 두고 이혼한 그녀, 아직도 그녀 아파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남편은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열 살 먹은 딸 아이마저 불안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방황에 짜증을 낸다. 영화 전편에 걸쳐 그녀는 자신의 삶을 채워줄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룩스

때론 우연히 여행지에서 충동적으로 만난 남자에게 끌려 함께 지내기도 하지만, 그녀와 계층적 위치가 다른 그가 그녀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매번 거리 생선 가게에서 자신의 별장을 내밀며 그녀의 관심을 구하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그녀가 해법을 찾아나선 '점쟁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그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자신 안의 태양을 찾으라 하지만, 그런 그에게 그녀가 구하는 건,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은 남자들의 구애이다.

결국 영화는 '자존'의 이야기였을까? 영화의 제목에서 등장하는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낸다. 그녀에게 남성적 관심을 보이면서 점쟁이로서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줏어 삼킨 점쟁이(제라르 드 파르디외 분)의 '자신 안에서 스스로 빛을 찾으라'는 그 말이 이 영화의 주제였을까?

당신의 태양은 당신이 빛내라 
이자벨은 '관계'에서 평안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관계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그녀를 만나는 남자들은 푹 파진 티에, 긴 부츠,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그녀의 섹시한 외양만을 보고, 'enjoy'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정작 그녀가 원하는 건, '결혼'마저 파기하며 그녀와 '영속적'이며, '안정적'인, 그리고 심지어 계층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줄 대상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듯 그건 수많은 남자들과의 '편린'과도 같은 관계로 그녀에게 '공허함'을 짙게 만들 뿐이다. 뜻밖에도 은행가든, 연극배우든 결혼을 한 남자들은 그들이 이미 맺은 사회적 관계인 결혼을 깨뜨릴 의지가 없고, 그녀의 마음과 기대는 늘 상대방과 보조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결국 영화는 '관계'를 통해 '자존'의 완성을 구하려는 그녀를 역설적으로 '자존'의 결핍으로 귀결되게 한다. 이는 흔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자존감'에 대한 질문에 도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건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정의이다. 하지만 '집단성'이 해체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각자의 삶을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주체가 된다. 각자가 나면서 부터 소속된 집단에 의탁해서 그 삶이 해결되고 진행되는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현대를 경유하며, 인간은 '삶의 주체성'을 얻은 대신, 그 '주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개인 짊어져야 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집단성'을 상실한 개체의 불안마저 자신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다. 스스로는 빛도 내지 못하는 행성인에게 감히 태양의 정체성을 입힌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 룩스

이자벨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짊어져야 하는 '주체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이혼까지 해서 완벽한 개체로 독립적이다. '남자'로 상징될 뿐 가족도, 친지도 이렇다할 '영속'적인 관계도 없이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자존에 달려있다. 심지어 예술가로서 자신의 일조차 그녀를 독립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관계'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군집적'인 본능은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남자로 상징되는 '소속감'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된다. 이는 이자벨이라는 '헤픈 여자', 혹은 '자존감'이 떨어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자존감'이라는 방패를 무기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겪는 대부분의 딜레마이다. 과연,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자존으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현대의 관계론은 이런 개인의 문제를 영화에서 처럼 '당신 안의 태양을 찾으라'는 식의 '자존감'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내가 '레벨업된 완전체'가 되어야 사랑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얼마전만 해도 다수의 문학 작품은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는 '인간' 군상을 그려왔었다. 오늘날의 해석에 따르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러브 스토리>는 얼척없는 해프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47%라는 경이적 시청률을 보이며 화제 속에 종영한 <황금빛 내 인생> 역시 50부가 넘는 대장정의 과정 속에서, 여주인공의 주체적 사랑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드라마는 사랑 조차도 자신의 자존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시간이 걸려서라도 그녀를 해바라기처럼 기다려 주는 환타지적인 사랑을 그려내는 이 드라마는 오늘날의 입맛에 맞는 현대판 신데렐라 환타지로 대중을 위로했다. 이자벨이 불행하다면 우리의 tv를 장악하고 있는 그런 그녀의 불안한 자존마저 끌어안을 환타지적 대상이 없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만들어줄, 그녀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아줄 수 있는 스펙 좋은 연하남이 없었다.

드라마는 '양수겹장'의 환타지로 자신의 자존감도 챙기고, 관계에서도 성공하는 여주인공을 그리지만, <렛더 선샤인인>은 결국은 쉽지 않은 현대적 인간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자벨은 남자를 통해 '자존'을 구하는 헤픈 여자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행복의 본능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태양마저 스스로 작동시켜야 하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by meditator 2018.05.05 15:34

그 '일'이 있은 후 홍상수 감독과 관련된 기사는 '가쉽성'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의 영화에 대해 별무관심이었던 매체들이 그의 '스캔들'에는 유독 열성이었고 성실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하여 감독은 말을 아꼈다. 여전히 묵묵히 자기의 자리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극장에 걸었다. 그 중 하나가 <클레어의 카메라>이다. 하지만 변해진 세상 인심 때문이었을까? 모처럼 혼자 오붓하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만끽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가쉽'으로 자신을 재단했던 세상에 대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입을 열었다. 그 '일'에 대해? 아니, 그 '일'을 다루는 세상 사람들의 '말'과 '태도'에 대해. 


물론 이번에도 영화의 중심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들은 사랑인지, 바람인지, 모를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로 인해 주변 관계들조차 복잡해 졌다. 더구나, 한국도 아닌 영화를 홍보하러 간 '칸'에서. 



솔직하지 못해서 짤린 전만희 
영화의 축제로 북적이는 칸,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한적하다. 그곳 카페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있는 전만희(김민희 분), 다가온 지인은 바쁜 영화제 기간 중에 영화사 직원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의아해한다. 그런 지인에게 자신이 어제 그 자리에서 대표 남양혜(장미희 분)에게 해고되었다고 전하는 만희. 

홀로 남은 그녀는 자신이 겪은 '해고'를 복기한다. 하루 전날 그 까페의 그 자리에 마주 앉은 남양혜와 전만희, 남양혜는 말을 꺼낸다. 자신이 만희를 고용한 이유에 대해, 솔직하고 진솔한 그녀의 면모가 고용 이유였다고 운을 띄운 남대표, 하지만 언제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듯, 그녀를 고용했던 그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만희를 해고하는 이유로 돌변한다. 알고보니 솔직하지 않다는 밑도 끝도 없는 '평가'로 단칼에 만희를 해고하는 남대표. 하지만 도무지, 제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솔직하지 않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만희는 그간 함께 했던 정으로 사진까지 찍고 헤어졌지만, 고스란히 그녀에게 '상처'로 남는다.

만희에 대한 이유을 알 수 없는 해고는 다음 장면 남대표와 소완수(정진영 분) 감독의 만남을 통해 짚어진다. 단번에 일자리에서 짤려야 할 만큼 솔직하지 않았던 만희의 해고 사유에는 소완수 감독과의 '스캔들'이 있었던 것이다. 술에 취해서라고 변명을 하지만, 결국 남양혜와의 사업 이상의 밀월 관계를 정리하려는 소완수의 태도로 보건데, 그와 만희와의 관계는 하룻밤 술로 인한 실수 이상인 듯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건, 그간 흔히 홍상수의 영화에서 늘상 등장해 왔던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그 속내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소완수라는 남자는 예의 홍상수 영화 속 캐릭터를 연기한다. 남양혜와 사업 이상의 관계를 지니면서, 그녀의 부하 직원인 젊은 만희와 스캔들을 벌인 '찌질한 남자'이다. 심지어 그의 옆자리에 앉은 이방인 클레어에게 수작인지 관심인지 모를 소완수의 행동거지는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다. 



'언어의 폭력'
그런데 홍상수 감독은 늘상 그가 해왔던 그 이야기를 조금 비튼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와 여자의 대화들은, 그간 '사랑하고 싶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고 싶다'의 장황하고도 구차스러운 은유의 난무였다. 그런데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그 노골적인 추파는 생략되었다. 대신, 다른 장황한 은유들이 난무한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전만희와 남양혜 사이의 대화이다. 결국 이후의 장면으로 보건대, 그간 소완수와의 사업 이상의 파트너 쉽을 가져왔던 남양혜는 소완수와 전만희의 해프닝을 눈치채고 그걸로 전만희를 해고한다. 결국 '사적'인 스캔들로 전만희의 밥줄을 자르는 '갑질'의 횡포를 부린 것이다. 물론 소완수와 밀월 관계를 가져온 남양혜 입장에서 전만희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간 자신의 사업체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전만희를 하루 아침에 해고하는 건 '폭거'다. 그리고 영화는 그 '과정'으로 가장 추상적인 '솔직하지 못하다'는 식의 남양혜의 '언어적 폭력'에 주목한다. 

즉, '사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처리하는 그 공정하지 못한 방식,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속보이는 이유를 포장하는 추상적이고도 도덕적인 평가의 언어들, 그것은 그간 우리 사회가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을 대하는 방식의 '치환'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남양혜는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소완수 감독에게, 은근 슬쩍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갑'임을 흘린다. 사적인 관계를 정리해도 사업은 잘 해보자는 감독의 말에, 글쎄라며 여지를 흘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양혜의 태도에, 소완수는 자신이 던졌던 '관계의 정리'를 '이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그런 소완수에게 '남양혜'는 자신을 예전처럼 이뻐해 달라며 여전한 밀월 관계의 지속'을 '요구'한다. 

이렇게 <클레어의 카메라> 속 남녀 관계는 그간 '찌질한 속물 남자와 여자'라는 본능의 관계에서, 남녀의 외피를 쓰지만, '갑을'이라는 권력의 관계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그건, 이후에 우연히 건물 옥상에서 만난 소완수와 만희의 관계에서도 연속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관련 모임이 열리는 건물 옥상, 아직 칸을 떠나지 못한 만희가 정장 느낌의 '직원룩'을 벗어난 핫팬츠 차림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으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영화 홍보를 하다 등장한 소완수, 그는 만희의 옷차림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펼쳐 보인다. 

말이야 왜 그렇게 자신을 헐하게 내던지려는가 라는 만희를 아끼는 듯한 어르신의 훈계지만, 결국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등장하는 '쉬운 여자론'의 연장일  뿐이다. 아직도 만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어쩌지 못한 소완수으 찌질한 감정의 배설이지만, 그 '배설'이 '감독님'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만희'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때 그건 '언어'의 외피를 지닌 '감정의 폭력'이다. 

이렇게 <클레어의 카메라>는 여전한 남녀 관계를 가지고, 그 '남녀 관계'를 소비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해석으로 전환된다. 남녀라는 본능적 관계조차도, 그게 영화사 대표와 직원, 영화사 대표와 감독, 나이든 감독과 젊은 홍보사 여직원이라는 사회적 관계로 맞물리게 되면, 그들 사이의 관계는 그저 얽혀진 남녀 사이을 넘어선 '위계'가 되고, 그들 사이의 언어는 '본능'의 포장을 넘어선 '권위'의 억압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다. 즉 이전의 홍상수 감독이 다루었던 언어가 개인적인 '파롤(parole)'에 치중되어 있었다면, <클레어의 카메라> 속 언어들은 사회적인 랑그(langue)'에 집중한다. 소완수가 클레어가 구사하는 이방의 언어에 무조건적인 감탄과 찬사를 더하며 접근하는 그 '방식'도 예외는 아니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이렇게 달라진 관계들 사이에서 그녀의 발걸음처럼 통통 튀며 이야기를 환기시키는 건 영화의 제목인 그녀, 이자벨 위페르가 분한 클레어이다. 그녀는 마치 카메라를 든 철학자처럼, 자신의 사진 한 장의 '마법'을 설파한다. 그녀의 카메라를 통해 '솔직하지 못했다'던 만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칸까지 초청받는 명감독이라던 소완수는 '알콜릭'이 의심되는 칠칠맞은 남자로, 도도한 남양혜는 '이상하고 우스운 여성'이라는 '뜻밖의 진실'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진실'은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누군가에겐 '깨달음'을 준다. 어쩌면 '현학적인 세상의 말'에 현혹되었던 관객에게도. 

<클레어의 카메라>를 여전한 홍상수의 구구절절한 자기 변명으로 볼 지, 그게 아니면 세상에 던진 감독의 일갈로 볼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여전한 해프닝으로 볼 것인지, 그건 '클레어의 카메라' 속 스냅 사진 한 장의 의미와도 같다. 그건 홍상수 감독의 '사적'인 일을 어떻게 '소비'라는가에 대한 , '소비'해왔는가에 대한 각자의 감회에도 잇닿아진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클레어의 카메라>는 홍상수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 만한 가치를 준 작품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세상을 맴돌며 하나의 화두에 천착하던 감독이 본의 아니게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딛은 작품처럼 여겨졌다. 과연 다음엔 그가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건넬지 궁금하다. 거기에 덧붙여, 김민희만큼, 아니 김민희보다도, 이자벨 위페르보다도 아름다웠던 장미희라는 여배우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 홍상수 감독의 다음 뮤즈가 궁금하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8.05.03 21:28

역대의 마블 영웅들이 한데 모여 절대 악 타노스를 대항한 전쟁을 벌인다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티니 워)>의 개봉 소식을 듣고 가장 관심이 갔던 건, 이들 걸출한 영웅들의 집합체인 '어벤져스'를 소모하지 않고 제 몫을 다하여 전쟁을 수행할 것인가였다. 아이언맨에서 토르, 헐크,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등 기존의 어벤져스 팀은 물론, 새로이 합류한 닥터 스트레인지에 블랙 펜서, 스파이더맨, 심지어 <가디언즈 갤럭시> 시리즈의 스타로드, 로켓, 그루트 등까지 이미 한 시리즈를 이끌었던 내노라하는 신진 영웅 그룹까지 이제는 '방만'하다고 할 이들 '히어로'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이 절로 생각나는 면면들이다. 다들 얼굴 한번씩만 비춰주고 나면 영화 반이 훌쩍 지나갈 것같고, 그들이 제 각기 활약을 한다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것만 같은 이 장황한 히어로들의 서사를 과연 <인피니티 워>는 제대로 꿰어낼 것인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론 그들의 활약이 아쉬울 망정, 적어도 구슬 서말이 저마다 나동그라져 가지는 않았다는 소감이 들 것이다. 




'나쁜 정의' 타노스
그리고 그들을 '구슬 서말의 보배'로 만든 중심에는 최강 빌런, 절대 악 '타노스(조쉬 브롤린 분)'가 자리한다. 이미 2012년 <어벤져스>를 통해 그 존재를 알렸던 그는 '소문'답게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겨우 생존한 '아스가르드'의 우주선을 파괴하면서 '진정한 종말'의 서막을 연다.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의 황혼', 세계의 종말이 절묘한 '우주'로의 '항해'를 통해 새로운 희망이 되었는가 싶더니, 그것을 압도하는 '타노스의 심판'이 등장해 버린다. 

타노스, 그 이름에서는 '죽음과 파괴의 본능' 타나토스'가 연상된다. 그리고 그 이름답게, 자신의 출신 별 타이탄에서부터 '자원의 고갈, 인구의 과밀'에 대한 해법으로 무차별적인 '인구 절반의 절멸'을 주장한 이래 '행성' 곳곳을 다니며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과격하게'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의 행보는 이미 예고된 대로 '지구별'을 향하고 있었다. 

'타노스'의 이런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적, 철학적 근원을 가진다. 이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략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인구론을 주장한 바 있는 '멜서스'로 부터 한정된 지구 자원을 압박하는 인구 증가에 대한 해결적 입장들이 등장한 바 있다. 가난한 이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어 인구 증가를 막아야 한다는 멜서스 이래, 나찌의 합목적적 '열등 인자'의 제거를 핑계로 '인종 청소'를 거쳐, 20세기 미국의 '강제적 피임' 사례까지 '역사'는 '의도적이며 합목적적인 인구 조절'의 역사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런 '과밀한 인구의 청소'에 대한 과격한 사상은 <킹스맨1>과 소설과 영화< 인페리노>를 통해 '실행'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합목적적 의도'를 가진 '인종 청소'의 정의를 '타노스'가 들고 나온다. <킹스맨>에서 화학 무기 대신 타노스는 우주의 힘을 지닌 '인피니티 스톤'으로, 심지어, 그는 그저 '인피니티 스톤'을 향한 욕망으로만 여겨졌던 그의 행보가,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녀의 죽음에 '악어의 눈물'이 아닌 눈물을 흘리며 '진정성'을 보이며 그저 파괴의 폭군이 아닌, '나쁜 정의'의 수호자로 영화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렇게 '사공이 많은 배'의 대항마로 '확고한 철학과 세계관'을 설정하며, 어김없이 '마블'은 '히어로의 활약' 이전의 '정립된 세계관'이라는 자신의 '장기'를 통해 다시 한번 마블 월드을 확장해 나간다. 

히어로들의 무차별적 연대
그리고 이런 자신만의 분명하고도 심지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 이유를 지닌 타노스의 광폭한 절멸의 행보에 지구의 위기, 나아가 전 우주의 위기을 막기위한 그 '급박한 목적'만으로, 그리고 멸망을 막아서려는 '순수한 마음'만으로 '히어로'들이 '어벤져스' 군단으로 거듭난다. 

타노스의 합리적,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한 나쁜 정의와, 그에 대항한 '절멸을 막기 위한 열정'의 히어로 군단을 보면 문든, 예전 미드이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난 1977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들과 딸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미드 <eight is enough>는 제목처럼 8명의 아이들 둔 가정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그 중 한 장면, 1977년이라지만 당시도 '인구 증가'가 심각하게 여겨지는 상황, 인구 증가에 우려를 나타내는 학자와 피치 못하게 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아빠는 그곳에서 학자와 논쟁이 벌어진다. 폭발 직전의 지구에서 '몰상식하게' 아이를 8명이나 낳았다는 학자의 비난에, 아버지는 '현답'으로 그 자리를 모면한다. '아버지의 '현답'이란 다름아닌, '생명'의 강제적 '단종' 대신, 혹시나 미래 자신들의 아이 중 하나가 그 '인구 폭발'에 대한 해법을 가지 '희망'일 수도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긍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대체 합리적 이유나, 타당한 설명도 없이, 그저 막연한 '긍정'과 '희망'은 꽤나 설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8명의 자식을 둔 아버지의 긍정적 세계관'은 언제나 '미국'에서 만들어 지는 다수의 '히어로물'에서 관통한 세계관이기도 한다. 청소년의 영웅 심리도, 자기 가족에 대한 복수심도, 그리고 시대를 거스른 국가적 사명감도 혹은 반항심도, 그리고 신화에서 튀어나오거나, 연구실에서 튀어나온 이종의 영웅도, 심지어 '돈' 앞에서 이합집산하던 떠돌이들마저도 자신들이 기반한 존재의 위기 속에서는 언제나 힘을 합쳐 하나가 됨은, 서부 영화, 전쟁 영화를 통해 관통되던  51개의 별이 모인 '성조기'로 상징되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위기 앞에서는 하나가 되자는 '아메리카니즘'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 방만한 캐릭터 군단들이, 서로의 이질감을 접어두고 절반의 절멸을 향해 거침없는 행보를 선보이는 타노스에 대항하여, '시간'의 지배하는 영적인 닥터 스트레인지와, 과학을 지배하는 아이언맨이, 아버지와 같은 아이언맨과 아들과 같은 스파이더맨이, 재벌인 아이언맨과 도적떼인 갤럭시 패거리가 그리고 이전 시리즈에서 서로 배척했던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와 토르가, 그 손을 맞잡아 타노스를 대적해 나가는 그 순간, 영화를 보는 관객의 '카타르시스'는 충족된다. 외려, 그들이 마치 거인 골리앗에 대항하여 돌 하나를 든 채 나선 '다윗'처럼 그 '맹목적 열정'만으로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비록 이번 시리즈에서 그들이 '성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8명의 아버지처럼 '희망'을 접지 않는다. 왜? 그들은 '정의'로우니까. 그리고 '인간을 희생하지 않는, 지키려는 정의는 이길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는 긍정적 세계관의 확신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무엇보다 이들 히어로들의 장황한 '연대'와 '연합'에는 이미 '관객'들에게는 '배경지식'이 된 그들의 '전사'가 있다는 것을. 즉,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압도적 흥행은 마치 영화 속 그들 히어로들의 연대처럼, <토르>, <아이언맨>, <어벤져스>, 그리고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시리즈을 모두, 혹은 개별의 시리즈로 보았던 '과정'의 질적 확산이다. 이미 그들의 '전사'에 대한 이해가, 비록 영화 속 등장과 함께 죽은 '로키'나, 무엇하나도 해보지 못한 채 스러지는 '윈터 솔져'등을 아쉽지만 용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와탄다의 들판에서 조우한 블랙 팬서와 캡틴 아메리카의 이질성에 이의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때 적이었던 이들의 어색한 만남에 미소마저 지어진다. 

즉 이미 그간의 시리즈를 통해 '마블'의 세계관의 전파가 이미 일정 정도의 수준을 넘어, '필독서'가 되어 기꺼이 관객들이 '타노스'의 침공에 마음을 합쳐 지켜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 어쩌면 파죽지세의 관객 증가세가 말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는 그간 우리의 영화계를 공습했던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거쳐서 빛났던 <스타 워즈>의 콘텐츠적 영향력을 압도한다. 마치 타노스가 하나 하나 끌어모으며 그 힘을 질적으로 승화시킨 인티니티 스톤을 장악한 타노스처럼, 그간 매번 '흥행'을 해왔던 '마블'의 시리즈들이, 그들의 연합군 앞에 우리 관객들을 투항시켜 버린다. 물론 거기엔, 아예 싸울 기세도 없이 손을 들어버린 우리 영화계의 무기력함도 한 몫을 한다. 
by meditator 2018.05.01 17:53

이전에도 썼지만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익숙한 화법과 전혀 다른 '이방의 언어'는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그래서 종종 '난독'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론 모호하고 때론 기괴한 언어들이 도달하는 곳이 결국은 인류 보편의 감성과 주제 의식이라는 걸,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일깨워 준다.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던 추리 소설가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영광의 콩쿠르 상을 안긴 <오르부와르>를 원작으로 한다. 오르부아르au revoir은 영어의 good bye와 같은 프랑스의 또 보자는 뜻의 인삿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제목 '오르부아'에는 보다 처절한 역사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르부아'로 번역된 소설에는 là-haut가 생략되어 있다. au revoir  là-haut는 '천국에서 만나요'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1차 대전 당시 국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라는 군인이 죽기 전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문구에서 인용한 말이다. 

전쟁의 볼모가 된 병사들 
프랑스는 1차 대전 당시 명령 불복종, 자해, 탈주, 비겁 행위, 반란 등의 명목으로 2천 4백 여명의 변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 중 6백 여 명이 실제로 총살되고, 나머지는 강제 노역형을 치뤘다. 과연 사형이 선고된 2천 4백 여명의 병사들은 죄가 있었을까? 아내에게 천국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남기고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의 그 유언과 같은 문구를 100년 뒤 피에르 르메트르는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으며, 전쟁터에서 명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병사들을 '볼모'로 '희생'시킨 국가, 전쟁에 대한 회의적 반문을 한다. 

그리고 그 '반문'을 위해 영화는 1차 대전의 종전을 앞둔 113고지의 전선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장훈 감독의 2011년 영화 <고지전>과 같은 아군의 시체에 난 총상에 대한 의문스런 상황이 벌어진다. 전쟁이 이제 더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병사들은 더는 총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전쟁의 종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잃고 싶지 않은 중위 프라델(로랭 라피테 분)은 가장 나이많은 병사와 가장 어린 병사 두 사람을 척후병으로 내보내고,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의 생명은 종식된 전쟁을 아수라장의 전장으로 복귀시킨다. 

명령에 따라 총검을 들고 참호 밖으로 나와 전진해야 하는 병사들, 그리고 하늘을 뒤덮는 포탄의 세례 속에서 알베르(알베르 뒤퐁텔 분)는 말과 함께 매몰되는 처지에 빠졌고, 말 때문에 겨우 숨을 쉴 수 있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그를 동료 병사였던 에두아르(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가 끌어당겨 구한다. 하지만 동료의 생명을 구명하는 그 에두아르의 행위는 곧 그를 포탄의 저격 대상으로 만들고, 한 발의 포탄과 함께 그는 날라가 버린다. 다시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얼굴의 반을 가린 두건이 피로 흥건한 병원의 침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몰핀을 훔쳐가며 죽어가는, 아니 죽고 싶어하는 그를 간곡하게 간호하는 알베르가 있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파리로 돌아오지만 결코 그들은 전쟁 전의 그들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은행 출납원이었던 알베르에게는 다시 은행의 안정적인 일자리는 보장되지 않았고, 전 애인 마저 외면한 엘리베이터맨에서, 광고 샌드위치 맨으로 신분이 하락세를 탄다. 그래도 알베르에겐 멀쩡한 신체가 있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조잡한 가면과, 보장할 수 없는 재건 수술마저 거부한 에두아르는 알베르가 훔쳐오다시피한 몰핀에 의존하여 버텨가는 절망의 나날만이 있었다. 

세 남자의 끝나지 않는 전쟁
영화는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각자의 의미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세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과 전쟁의 상흔을 '소비'하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통찰이 있다. 전쟁을 도발하면서까지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집착했던 프라델은 '전쟁'의 상흔에 감성팔이하는 사회를 이용하여, 병사들의 이장과 매장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 그렇게 '전쟁'을 통해 '입신양명'을 꿈꾸는 프라델의 맞은 편에는 전쟁터에서 부터 그의 '반국가적, 반인권적 행위'의 목격자가 된,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처지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알베르가 있다. 그리고 '상이용사'로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하거나, 자신을 그런 처지로 만든 국가와 사회에 대해,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재물로 삼으려는 에두아르가 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을 국가를, 그리고 '전쟁'을 감성적으로 소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벌인다. 그들의 의도야 어떻든 그들은 '사기'의 주범이 되고, 하지만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런 사기극에 기꺼이 마음과 돈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을 재목이 아니라며 어릴 적부터 외면해오다, 뒤늦게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 대한 회한으로 거금의 기념비 사업 자금을 낸 에두아르의 아버지 페리쿠르도 있다. 



돈으로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보상하고,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눈먼 돈'을 활용해 자신의 발판으로 삼거나, 궁극의 가난으로 부터 도피하고, 자신을 상이군으로 만든 사회를 징죄하고 도발하고자 하는 세 남자들, 그들이 사기친 돈을 그들을 구제했을까? 사기로 원하던 돈을 받아들고 기뻐하던 알베르, 그런 알베르에게 에두아르는 자기가 돈을 조금 써도 되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네가 번 돈이니 얼마든지 쓰라는 알베르의 답, 조금 후 에두아르는 그의 기막힌 예술적 재능으로 돈다발을 갈기털이 휘날리는 멋들어진 사자 가면으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에두아르에게 돈의 효용은 거기까지였다. 파리의 가장 화려한 호텔에서 벌인 파티도, 알베르가 권유한 돈을 갖고 식민지로의 도피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무엇으로도 회복될 수 없는 트라우마 
한 판의 사기극 이후에 화려한 새의 가면을 쓴 채 공허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에두아르. 그의 심정은 결국 물질적 대가로는 회복되어질 수 없는 '사회적 트라우마'의 명징한 상징이다. 최근 4주기를 맞이한 세월호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재연되고 있는 '지겹다'는 돌림 노래에 대한 삼풍 백화점 참사 피해자의 호소문 속 심정과도 같다. 

나는 이런 종류의 불행과 맞바꿀만한 보상금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나 역시 당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 돈이 그 후의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을 피하고 그 돈을 안 받을 수 있다면, 아니 내가 받은 보상금의 열배를 주고라도 그 일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열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당신들은 모른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런 사건 사고가,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틀어놓는지. 사고 이후로 나는 세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눈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본 후로 나는 세상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고 언제나 죽음은 생의 불안을 잠재울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그깟 돈이 삶의 이유가 되어 줄 수 있을까.-산만언니, 딴지 일보 

어린 소녀의 공감어린 위로도, 알베르의 우정도, 사기를 통해 획득한 일확천금도, 그리고 그 사기의 목적이었던 사회와 국가,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조소와 복수도 에두아르의 삶을 회복하지는 못한다. 원작과 달리, 하지만 원작자인 피에르 르메트르가 감탄할 만큼 외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는 그의 남은 생을 재촉하는 것으로 영화는 전쟁의 트라우마의 강렬함을 극대화시킨다. 알베르의 오랜 숙원이었던 죽어간 전우에 대한 숙제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던 '흙의 매몰'이 대신해 준다. 그리고 뒤늦게 완수한 그의 임무가 식민지에서의 그의 체포에 대한 면죄부가 된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를 불러온 에두아르의 재능은 아름답고, 절묘하고, 때론 기괴하기 까지 한 그의 가면으로 빛난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재능과 삶을 빼앗아 간 프랑스 사회에 대한 대국민 사기극의 수단이 된다. 아름답고 처연한 가면극과 미술적 재능을 군불 삼아 피어난 사기극의 여정이 향하는 건, 결국 '전쟁'에 대한 질문이다. '전쟁'이, 전쟁과 같은 사회적 트라우마를 낳는 사건들이 인간을, 사회를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한, 그럼에도 여전히 그에 대해 무신경한 사회에 대한 냉소이다. 1920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전쟁 후 그 전쟁을 잊어버리고자 요동쳤던 프랑스 사회를 관통한 갖가지 사기극이 도달하는 건, 1차 대전으로 상징된 사회적 참사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왜곡된 세 남자의 생애가 벌인 때론 우스꽝스럽고, 슬프며, 기괴했던 여정이 도달하는 건 가장 원론적인 '인간 사회'의 문제이자, 도덕적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8.04.21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