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5일 개봉한 <아이언맨3>는 1000 만 관객을 바라보면 역대 개봉 영화 흥행 8위를 기록하는 파죽지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칸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던 <위대한 개츠비> 역시 주말 박스 오피스 순위 3위를 기록하며 흥행의 호조를 보이고 있다.

철갑을 두르고 미국을 위협하는 적들과 싸우는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와 <위대한 개츠비> 영화화 사상 가장 화려한 대저택에서 결국 정비공의 총에 맞에 숨을 거두는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전혀 다른 시대에 전혀 다른 성격이 두 인물이다. 그런데도, 두 영화를 보고 나면 묘하게 두 사람 사이의 동질감이 느껴진다. 왜?

 

히어로? 그딴 건 없다!는 <아이언 맨3>의 영화 카피처럼,

세번 째 시리즈의 토니 스타크는 철갑 옷을 입고 활약하는 시간보다, 인간 토니 스타크로서 종횡무진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즉, <어벤져스> 활동 이래 히어로로써의 삶에 혼란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생긴 육체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토니 스타크에게는 다시 아이언맨이 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고, 적은 적절하게도 그런 토니에게 개인적 고뇌의 시간을 오히려 벌어주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1편을 복기해 보면, 아이언맨은 영웅이었을지 몰라도 일찌기 토니 스타크는 영웅이라기엔 쫌 그런 인물이다. 그가 아이언맨이 된 계기는 그가 회장으로 있는 방위산업체의 무기들이 테러범들에게 역으로 이용되어 무고한 양민과 미국에 위협이 되었던 데서 비롯된 '시민적 자각'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아이언 맨이 되어 미국을 구하고 다니면서도 토니 스타크란 인물에게 그 '애국적 활동'은 마치 초등학생이 우연찮게 도둑을 잡고 난 뒤의 '소영웅주의'에 물들어 뻐기듯, 일관된 '자뻑 모드'였었다. 겉멋에 들린 영웅이었음에도 순탄하게 영웅놀이를 수행하던 그가 영웅들간의 연합 작전 어벤져스를 겪으며 혼란에 빠진다. 놀이인 줄 알았더니, 알고보니 그게 꽤 심각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놀이동산을 빠져나온 아이가 놀이동산의 잔영에서 벗어나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듯, <아이언맨3>의 초반 토니 스타크는 철갑을 벗어던지지 못한 채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던 토니 스타크를 구한 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페퍼 포츠(기네스 펠트로)와의 오래된 사랑조차도 늘 희화화시키며 진지하게 다가서지 못하던 토니는 그녀가 납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구하고자 달려든다. 부상을 당하고 에너지가 방전된 아이언맨을 놔두고 홀몸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러 적진으로 들어간 토니는 그 과정에서, 철갑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러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자신에게서, 아이언맨의 진정한 정체서을 발견해 내고.

<아이언맨3>는 여전히 여느 영웅물들처럼,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 집단이 나오고, 가공할만한 위력의 적들이 나오지만, 그들의 존재 차체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이 납치를 당하지만, 토니 스타크가 구하려고 한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었을 뿐, 미국 대통령이나, 미국을 절체절명에 빠뜨리는 위기는 곁다리일 뿐이었다. (그래서 애국 군인 로디 역의 돈 치들이 필요했다)

즉, 토니 스타크는 여전한 영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 사회 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라기 보다는, 그와는 별개의 실존주의적 인간으로써의 고민이고, 그런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을 것같은 순정남의 캐릭터의 원조는 바로 위대한 개츠비이다.

보잘 것 없는 집안의 가진 것 없는 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뉴욕 외관 신흥 부자들 의 저택 단지에 불야성의 저택을 이룬 것은 오직 그녀, 그의 집 맞은 편에 사는 데이지를 위해서였다. 그가 울프심의 수하로 들어가 온갖 불법을 일삼으며 그럴 듯한 부를 축적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했던 것도 역시 그녀, 데이지를 얻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물신이 춤추는 1920년대의 뉴욕, 그 누구보다도 거기에 가장 부화뇌동 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세속적 물욕에 찌들지 않고, 그 속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고 했던 개츠비에게 영화 속 저자 닉은 여왕이 선사하는 작위처럼 'The Great'란 수사를 붙여준다. <위대한 개츠비>는 심지어 3D라는 눈을 혹사시키는 첨단의 기법까지 동원해 가며 거대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시간들을 현란하게 재연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개츠비의 순애보를 돋보이고자 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파티가 화려하면 할 수록, 저택이 거대하면 할 수록, 개츠비가 드러내는 부가 거창할 수록, 데이지를 향한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할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가 고전이 되었을 시간에도 여전히 다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는 영화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어느 시즌보다도 철갑맨의 활약이 적었던 <아이언맨3>가 인기를 끄는 것은 무엇일까?

21세기의 실존주의자 토니 스타크와 1920년대의 순정주의자 개츠비가 전혀 다른 시대의 사람임에도 '사랑'을 그들 삶의 동인으로 삼았다는 소박함때문일까? 단지 그들의 운명을 가른 것이 있다면, 토니 스타크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의 저택 아래 숨겨두었던 수십명의 아이언맨을 동원할 정도의 재력이 있다는 것과 호텔방에서 데이지의 남편이 폭로했듯, 그 예전 데이지를 처음 만났을 때나, 그리고 다시 데이지를 만났을 때나, 개츠비에겐 그녀를 얻을 만큼의 '진정한 부' 가 없었다는 사실 아닐까.

 

 

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에서 묘하게도 그 예전에 보았던 서부 영화들이 떠오른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떠도는 총잡이, 그에게는 딱히 삶의 목적도 이유도 없어보이고, 오로지 내 일신의 안위 뿐. 그러던 그에게 사랑하는 누군가가 생기고, 그 때문에 적과의 목숨을 내놓은 일전도 마다하지 않게 되고, 어부지리로 마을도 구하고. 어쩌면, 위대하단 접두사를 붙이고, 여전히 사랑의 화신으로 되살아나는 개츠비나, 사랑을 위해 다시 한번 영웅이 되는 토니 스타크는 미국인들에게는 가장 본원적인 인간 유형이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서 '사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좀 더 깊게 규명해 볼 수도 있겠다. 굳이 진화생물학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사랑은 본원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개츠비에게 사랑이라고 쓰고, 그것을 다른 의미로 집착이라고 읽어도, 그 아래 숨겨진 것은, 그가 사회적 한계를 극복하고 누리고 얻고 싶은 개인적 행복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토니 역시 마찬가지다. 매달린 대통령 따위 무시한채 사랑하는 그녀를 향해 돌진하는 그의 마음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기에 마지막 여전한 미국의 위기에도 일체화된 아이언맨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의 실존주의가 미국으로 건너가, 탈정치적 과정을 겪으며 정치적 자유가 배제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기에 자신 만의 실존을 획득해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실존주의자가 바로 그것이다. 국가도, 민족도, 나의 일도 모두 내 자신의 행복에 우선할 수 없다는 개인주의적 전제가 바로 오늘날 미국적 인간형의 기본에 깔린 게 아닐까 하는. 그러기에,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 할 수 없지만, 대통령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총기 규제안이 통과되지 못하는 정서가 저들에게 여전한 것이다.

 

그러기에, <아이어맨3>가 빠른 시간 안에 좋은 흥행 성적을 보이는 것을 딱히 영화의 만듬새만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거세어지는 시점에, 하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공적인 부조를 얻을 수 없는 실존적 위기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토니 스타크의 실존주의와, 개츠비의 일장춘몽에 공감케 하는 게 아닐까 싶으니 말이다.

by meditator 2013. 5. 20. 14:49

버려진 스파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본' 시리즈이다.

최근 제레미 러너의 '본 레거시'로 새로운 버전으로 탈바꿈했지만, 그래도 '본' 하면 뭐니뭐니 해도 멧 데이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본 아이덴티티', 본 슈푸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의 3부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직에 의해 필요가 다한 스파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집단을 향해 복수를 해나가는 극적 구조와 멧 데이먼의 연기가 3편에서 모두 이물감없이 보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또 하나 '본' 시리즈를 '본' 시리즈 답게 만든 것은 바로 액션! 살인 기계로 만들어진 인간이 생존을 위해 빚어내는 타인과의 액션의 합은, 그 무지막지한 액션의 너머에 드리워진 비인간적으로 훈육된,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그것을 다시 꺼내들어야만 하는 본능,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비애같은 것이 그 자체로 버려진 스파이 '제이슨 본'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베를린

 

그리고 이제 '베를린'에서 우리는 다시 액션을 통해 표종성이란 또 한 사람의 버려진 스파이를 읽어낼 수 있다.

누군가는 과연 '베를린'이 액션 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베를린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남과 북이 만들어내는 사건에 대한 설명은 불친절한 반면에, 표종성과 그들 둘러싼 인물들의 몸을 부딪치는 쟁투는 세밀하고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스토리를 이해 못해서 '베를린'이 재미없단 말이 나오기도 할 정도로.

하지만, 남과 북의 세세한 사연, 북한의 정권이 바뀌고, 그 와중에 베를린 지부를 둘러싼 권력의 암투, 그리고 기존의 베를린 세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없애려는 동명수 부자의 음모를 세세히 꼭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본 아이덴티티'를 보고, 그 음모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어도 영화를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듯이, 오히려 '본' 시리즈가 제이슨 본을 둘러싼 권력의 음모를 3편에 걸쳐 풀어 낸 반면, '베를린'은 명약관화하게,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개나 주어버리라는 듯이, 결국은 권력의 생리에 따라 사람을 쓰고 버리는 북(혹은 남)이라는 정치 집단의 속성을 밝히고 있으니 사실 이보다 더 친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 있어서는 '몸짓'이 중요하다.

 

일찌기 성룡을 흠모해 그의 팬클럽의 일원이었던 감독은 배우의 몸짓을 통해 드라마를 말하고자 하는데 천착해 왔다. 그러기에, 동네 주먹들의 이야기를 '동네주먹들만이 하는 몸짓'을 통해 한국적 액션 '미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받은 '짝패'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독의 지향은 '베를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표종성은 21세기에도 조국 공화국에 대한 신념으로 꽉 막힌 인물이다.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은 그저 사진으로만 남은 아이와의 가족 사진처럼, 아마도 가족의 희생을 불러왔을 것이고, 여전히 그의 아내는 그를 위해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이기에, 그가 자신의 편이 아닌 그 누군가를 향한 '몸짓'은 가차없다. 정진수 팀의 일원을 다시는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그런데, 그의 그 가차없는 '몸짓'이 갈 곳을 잃는다.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순정을 바쳤던, 조국이 자신을 버리는 순간, 표종성의 '몸짓'은 분노와 절망으로, 그리고 되돌아 볼 사이도 없이 아내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본' 시리즈에서 아름답다고 느껴졌을 만큼 기계적 합이 절묘했던 액션은 '베를린'으로 돌아오면, 화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올 만큼 거침없고 무자비함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아마도 '제이슨 본'의 비인간적인 훈련과 표종성의 순정어린 애국심에서 빚어낸 액션의 간극이 아닐까 싶게. 그래서, 더더욱 표종성으로 부터 빚어지는 액션들은 비감하고, 절체절명의 그것으로 다가온다.

그저 표종성의 극한 액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념이란 말로 둔갑한 남과 북의 정권 이기주의에 희생된 한 사람의 고통이 충분히 느껴지는 영화, 그것이 바로 '베를린'이다.

by meditator 2013. 2. 8. 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