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은 2005년 이미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여성'에의한 '남성' 세계에 대한 조롱과 '복수'를 신랄하게 펼쳐낸 바 있다. 그런 박찬욱 감독이 동성애 소설로 이미 널리 알려진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각색하여 <아가씨>로 돌아왔다. 



왜 일제시대였을까?
21세기인 현재에도 여전한 여성 차별과 '여혐'이 논란이 되는 이즈음,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를 통해 보여준 여성 간의 사랑과 연대, 그리고 남성 지배적 문화에 대한 비판과 조롱은 시의적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 속 배경은 현재가 아닌 일제시대다. 왜 하필 그 시대가 배경이 됐을까? 



박찬욱 감독이 일제 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데는 아마도 이 영화의 원작인 <핑거 스미스>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핑거 스미스>는 대영제국의 황금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837년에서 1901년까지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이 시대는 대외적으로 거침없는 식민지 확장을 기반으로 하여, 국내적으로는 산업 혁명의 성공과 함께 '해가 지지않는'번영의 시대를 뜻한다. 하지만, 그런 황금기의 이면에는, 소설 속 여주인공인 모드의 탄생지인 정신병원으로 상징되는 정신적 아노미를 겪는 지배 계급과 또 다른 여주인공 수잔의 근거지가 되는 빈민굴로 대변되는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존재한다.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도입된 히데코(김민희 분)의 이모부(조진웅 분)가 탐닉하고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되는 음란 소설은, 역시나 소설 속 삼촌의 주업을 본딴 것으로 당시 영국을 지배하는 계급의 부도덕성을 상징한다. 영화는 겉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악취가 풀풀 풍기는 시대로, 절묘하게 일제 시대를 치환한다. 한국인이지만 일본인 귀족처럼 행세하며, 가장 교양있는 척하며 사실은 음란 소설에 탐닉하고, 일본인 귀족들을 불러모아 그를 파는 낭독회를 여는 이모부는 '친일파'의 부도덕성을 가장 절묘하게 상징해 낸다. 이미 우리가 익히 공감하고 있는 바이기에 덧대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가씨>의 친일파는 우리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적대적 의식을 갖게된 그들이라기 보다는, 감독이 '여성 연대'의 주제를 위해 편의적으로 불러온 영화적 장치의 느낌이 강해보인다. 즉, <암살>의 친일파와, <아가씨>의 친일파는 동일한 캐릭터임에도 우리에게 전달되는 뉘앙스가 달라진다. 심지어 소설 속 빅토리아 시대의 귀족보다도 덜하다. 즉 소설 속에서 두드러진 계급 구도는 오히려 영화 <아가씨>로 오면 히데코 개인을 억압하는 '남성성'의 상징으로 더 두드러진다.

부도덕한 남성 지배의 상징으로 도입된 일제 시대라는 영화적 장치,  그 속의 상징적 인물인 이모부의 캐릭터, 그리고 그에 의한 이모의 죽음과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히데코에 대한 학대는 소설 속 복잡했던 인간들의 관계를 '남성'과 '여성'의 구도로 단순, 혹은 명확하게 구분짓는다.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 <핑거 스미스> 였듯이 수잔이라는 빈민굴 출신의 소매치기를 중심으로 풀어냈던 젠더와 계급의 이중적 갈등은 선뜻 이쁜 히데코에 무장해제되어버린 숙희(김태리 분)를 통해 단선화된다. 

적나라한 사랑에 기반한 여성의 연대?
또한 번역 이후 800여 페이지를 넘는 복잡다단한 서사의 소설과 그 서사를 따라 요동쳤던 주인공들의 희노애락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결론은 3부의 스릴러적 구조를 통해, 통쾌한 여성 연대를 통한 결국은 찌질한 남성 일군에 대한 복수로 마무리된다. 박찬욱 감독은 숙희에서 히데코로, 그리고 마지막 반전을 통해 두 여인의 운명에 대해 허를 찌르며 한 편의 통쾌한 복수극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1부의 숙희의 화법이, 2부 히데코로 넘어오며 나름 반전의 묘미를 마련했지만, 이미 2부 마지막 죽으려는 척을 하는 히데코를 숙희가 애닮아 구하려 하면서, 영화의 결말에 대한 긴장감은 풀어지고 만다. 



그런데 나름 화자를 바꾸어 가며 1, 2부를 나누어 결국은 통쾌한 복수극을 벌인 두 여성의 행보, 그 기저에는 '사랑'이 있다. 소설 속 핑거 스미스(소매치기) 수잔은 귀족 모드를 사랑함에도 자신이 떠나온 '가난'의 유혹 혹은 존재론적 계급 의식에 따라 모드 대신 '돈'을 쫓는다. 모드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히데코가 숙희를 정신병원에 넣는 것은 잘 짜여진 각본의 일부였지만, 소설 속 모드는 자신의 생존을 우선한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들의 '이기적'인 선택이 단선적일 뻔한 러브 스토리에 인간적 고뇌를 얹어, 소설을 풍부하게 만든다. 사랑에의 미혹과 존재론적인 고뇌를 겪고, 그 이후에 만난 두 사람은 비로소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아가씨>는 두 시간 반여의 짧은(?) 상영 시간의 제약으로 그런 복잡다단한 서사 대신, 미혹되어 가는 두 사람의 표정과, 적나라한 합일의 과정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대신, '스릴러'로서의 관객의 흥미를 끌기위한 화자를 바꾸어 가는 서사로 대신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영화적 재미가 정작 <아가씨>라는 이야기의 본질이 되는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다.

영화 속 히데코와 숙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감독은 공들인(?) 섹스신으로 그려내지만, 그걸 통해 관객은 적나라한 두 배우의 몸과 함께, '학습 도감'과 같은 성애를 보게 된다. 감독이 애써 적나라하게 두 배우를 통해 그들의 사랑에 접근하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랑'을 설명하려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 해방된 두 여인의 섹스신에서도 마찬가지다. 굳이 일전에 히데코가 소설을 통해 등장시켰던 '구슬'을 올라가기도 힘든 테이블 위에서 시연을 펼치는 장면은, 두 여성의 해방감 이전에,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흔히 여성 동성애를 다뤘다는 면에서 <아가씨>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나, <캐롤>과 비교되곤 한다. 이미 빈번하게 언급된 두 영화를 차치하고, 오히려 여성 동성애는 아니지만, 최근 여성간의 동지애를 다룬 노희경 작가의 <마이 디어 프렌드>와 비유해 보고 싶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동성애가 아닌, 오랜 여성 친구들의 이야기다. 드라마 속 정아(나문희 분)가 교통사고를 냈을 때 친구 희자(김혜자 분)는 선뜻 자신이 그 죄를 대신하려 한다. 오랜 두 친구가 까페에서 마지막 찻잔을 나누고 함께 손을 잡고 경찰서로 향하는 모습은 비록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오랜 세월 우정을 기반한 '연대'의 감정을 충분히 전달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사랑'을 기반으로 '연대'를 하고, 그 '연대'에 의지하여 그들을 압박한 '남성'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선사한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은 적나라한 '미혹'을 보이지만, 어쩐지 '선언'적이고 '설명'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먹인 '한 방'은 통쾌하고 신랄하지만, 마치 각론이 부실한 이론서처럼,  한 편의 성명서를 읽은 느낌이 든다. 

더욱이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의 주제 의식은 선언문처럼 이성적인데 반해, 영화를 풀어가는 화법은 지극히 탐미적이다.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도, 그리고 부도덕한 이모부의 문화 생활도 '관음적'이다. 물론 원작이 되는 <핑거 스미스>에서도 두 여인의 사랑만큼, 음란 서적에 대한 궁금즉이 들만큼 '탐닉'은 집요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계몽적인 주제 의식을 가진 <아가씨>의 화법으론 이율배반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by meditator 2016. 6. 10. 05:50

ebs 다큐 <민주주의>는 2부 민주주의의 엔진, 갈등 편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드러나고 있는 세대 갈등을 다룬다. 지난 2012년 선거를 통해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투표 성향은 세대 별로 삼등분된다는 것이다. 즉 억압적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한 세대와 민주화 세대, 그리고 imf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를 몸으로 겪어낸 세대는 시대 경험이 고스란히 정치적 입장으로 드러나고, 이는 곧 세대 갈등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앞서 살아온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낸 고달픈 삶에 대한 존경은 커녕, '꼰대'취급을 한다며 불만을 드러내지만, 그런 어른들에게 존경을 보내기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물려받은 사회적 유산은 아버지 세대들이 이루어 놓은 경제적 부에 대한 체감을 하기도 전에 '헬조선'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듯 너무도 열악하기에 차마 존중조차도 하기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바다 건너 애증의 이웃 일본은 어떨까? 그들에게도 '세대 갈등'이 있을까? 최근 개봉한 미시마 유키코의 영화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을 통해 내연화된 일본의 세대 갈등을 엿볼 수 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앙>의 지켜야할 소중한 유산
최근 우리 나라에 개봉한 일본 영화들 <바닷마을 다이어리>, <앙> 등에서 보여지듯이, 영화 속 일본 젊은이들은 그들보다 앞선 세대가 남겨놓은 유산을 계승한다. <바닷 마을 다이어리>의 세 자매는 엄마가 집을 나가 버려도 할머니가 남겨주신 지네가 나오는 오래된 집에 깃들어 서로 의지하며 산다. 큰언니 사치(아야세 하루카 분)는 함께 외국으로 나가자는 애인 대신 오래된 집을 지키며 자신이 다니는 병원에서 호스피스 간호사로서의 보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아빠가 남긴 엄마가 다른 동생까지 챙기며. 아마도 그녀가 동생들과 그곳에 남게 된 가장 큰 동인 중 하나를 고르라면, 오래된 나무에서 매실이 매년 열리는 할머니의 낡은 집을 빼놓을 수 없다. 동생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할머니의 오래된 집은 그녀들을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어주는 문화적 울타리가 된다. 

<앙>도 그리 다르지 않다. 도리야키 가게 점장(나가세마 사토 분) 앞에 나타난 도쿠에 할머니(키키 키린 분), 그는 그 할머니를 통해 그저 잘 팔아야 하는 대상에 불과했던 도리야키와 그 재료가 되는 팥이 '마음'의 매개가 되는 과정을 배우게 된다. 비록 할머니가 본의 아니게 숨겼던 병으로 결국 함께 하지 못하지만, 그는 '마음을 다해' 팥을 다루는 할머니를 통해 '장인 정신'을 배워간다. 

이렇듯, 똑같이 2015년에 만들어진 두 영화는, 젊은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영화 속 시간은 영화 속에서 그들이 이어받은 유산 속 그 시대로부터 그리 흘러가지 않는다. 도리야키 점장은 결국 할머니처럼 마음을 다해 팔을 삶아 도리야키를 만들게 되고, 사치 자매는 여전히 늙은 나무에서 해마다 매실을 따며 낡은 집을 지켜낸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 그 누구라도 공감하듯, 영화 속 젊은이들의 그런 선택은 설득력을 지닌다. 해외로의 도전보다도, 오래되었지만 푸근한 낡은 집이, 그리고 많이 팔리는 대신 하나를 팔더라도 감탄을 자아내는 도리야키는, 21세기의 빠른 문명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소중한 문화적 유산이다. 그리고 두 영화에서 젊은 이들은 이를 계승하며 시대와 시대를 잇는다.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은? 
오히려 앞선 두 영화보다 1년 먼저 만들어진 <미나니 양장점의 비밀> 속 미나미 양장점도 시작은 같다. 할머니 시노의 장례식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옷을 입고 '추도'를 할 정도로 훌륭했던 할머니, 그녀의 남겨진 유일한 손녀 미나미 이치에(나카티니 미키 분)는 그런 할머니의 유업을 계승하고자 한다. 그녀가 만든 옷을 보고 단번에 반해 그녀에게 브랜드를 런칭하자고 찾아온 후지이(미우라 타카히로 분)의 제안도 단번에 거절한다. 심지어 할머니가 만드신 옷의 수선만으론 유지할 수 없어 만들어 판 옷조차도 할머니의 패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옷이라며 자신만의 디자인을 만들 수 없다 외면한다. 

영화 속 미나미 할머니가 만든 옷은 양장이다. 그저 양장이 아니라, 세탁소 아줌마, 야구 중계를 보며 실랑이를 벌이는 부부를 딴 사람으로 만들어 줄만한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들이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 시노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고, 일상에서 벗어나 일년에 한번 '연회'를 벌이며 어른들의 축제를 즐긴다. 마치 서양의 19세가 무도회장이 연상되는 듯한 연회, 그 속에서 우아하게 '댄스'를 즐기는 선남선녀들. 21세기라기엔 생뚱맞게도 보이는, 이 고풍스러운 복식들은, 마치 전통의 일본이 서슴지 않고 받아들인 그래서 서양의 문화를 연상시킨다. 서양의 빵이 일본이라는 문화를 만나 카스테라가 되고, 소보루가 되듯이, 시노라는 장인을 통해 그녀만의 패턴과 무늬를 통해, 일상의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축제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복식들은 오늘날 일본이 이룬 화려한 문화 유산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리고 시노의 손녀, 미나미는 바늘 한 땀도 완벽한 할머니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여전히 그것을 애용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그녀의 빈틈없는 일상에 후지이가 등장하며,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니, 이미 그녀가 인정하지 않았을 뿐, 할머니의 유산이 주는 중압감에 견디지 못할 때면 동네 찾집을 찾아 치즈 케익을 과식함으로써 자신만의 욕망을 제어해 왔기에, 후지이로 인한 파문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미나미의 쉽게 흔들리지 않는 표정처럼 흐름을 이어가는 영화는, 연회에서 결국 미나미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후지이가 떠난 그 지점에서, 여전히 강고한 유산의 무게로 남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후지이가 떠난 후 찾아간 찾집의 치즈 케잌맛이 예전과 다르듯, 그토록 완강했던 미나미는 어느새 자신이 예전 그렸던 패턴을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나미는 할머니 시노를 앞지르고자 한다. 하지만 그건 지난 시간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곧 할머니의 유산을 외면하는 것이란 부담이 아니다. 여전히 할머니의 유산은 훌륭하지만, 이제 더는 그 할머니의 유산이 현재형으로 남아있을 여지가 많은 상황을 시인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작품을 할 수 있는 '시간'으로 할머니를 미나미는 이겨낸다. 

미나미의 오랫동안 뜸을 들인 선택은, 마치 일본이라는 화려한 문명적 성취을 이훈 앞선 세대를 둔 현 세대의 지난한 고민처럼 받아들여진다. 쉽게 부정할 수 없는, 그래서 여전히 낡았음에도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는 집이나, 장인 정신이 담긴 '앙꼬'와 같은 선조들의 그것을, 그저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삶'으로서의 현세대의 당대성을 '옷'이라는 적절한 소재를 통해 영화는 풀어낸다. 낡은 집이난 팥소는 전통으로 지킬 수 있지만, 옷은 새로이 만들어 져야 하는 것이니. 

by meditator 2016. 6. 7. 05:38

또 한 편의 존 카니 감독의 영화 <싱스트리트>가 개봉되었다. 다음 작품이 또 다시 음악 영화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원스(once)>, <비긴 어게인(begin again)>, 이어 <싱 스트리트(sing street)>로 이른바 3부작이 되었다. 이들 세 작품이 3부작의 울타리로 함께 어우러 질 수 있는 것은 세 작품이 모두 '음악'을 다루는 음악 영화라는 점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임에도 모두 공통적인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기도 하다. 




신드롬이 된 <원스>와 대중적인 <비긴 어게인>, 그리고 자전적 <싱스트리트>
2006년 몇몇 예술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했던 <원스>. 영화 중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뮤지션처럼 실제 영국 인디밴드 리더인 글렌 한사드가 연기하는 그(the guys)와 역시나 영화처럼 동유럽 출신인 마르게타 이글로바가 연기하는 그녀(the girl)가 보여주는 진정성, 그리고 그들의 다큐같은 설정에 빛을 발하게 해주는 <falling slowly> 등은 동심원처럼 우리 사회에 <원스> 신드롬을 일으켰다. 백수 취급을 받는 뮤지션과, 이민을 와서 음악 대신 가정부로 생계를 이끄는 그녀가, 피아노 판매점에서 양해를 구해, 함께 목소리를 맞추던 <falling slowly>는 그 어떤 세레나데보다 아름다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if you want me> 등을 비롯하여 영화 속 상황에 맞추어 등장하는 음악들이, 다큐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살을 붙여 감동을 전했다. 

그렇게 노래 좀 분위기 있단 한다하면 <falling slowly>가 등장하게 만들었던 <원스>가 남긴 파문을 이어 우리에게도 익숙한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와 그룹 '마룬 5'로 잘 알려진 애덤 리바인이 합류한 <비긴 어게인>이 2013년 찾아왔다. 비록 스타가 된 애인 뒤에 남겨진 불운의 싱어 송 라이터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분), 한때는 스타 프로듀서였지만 이젠 알콜 중독자 수준인 댄(마크 러파로 분이)라지만, 이미 <어벤져스>나 <캐리비안의 해적> 등으로 익숙한 배우들, 그 보다 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뉴욕'이란 미국 문화와 그만큼이나 대중적인 마룬 5 애덤 리바인의 노래 등은, 꿈을 찾아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성장담'이란 역시나 익숙한 성공담으로 <원스>보다 편하고 대중적인 호응을 성취했다. 




이젠 익숙한 감독이 된 존 카니가 2016년 들고 온 영화는 <싱 스트리트>. 1980년대의 아일랜드 더불린을 배경으로  카톨릭 학교의 소년 밴드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아일랜드 태생인 존 카니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실제 존 카니 감독은 <원스>의 주인공이었던 글랜 한사드가 이끄는 그룹 더 프레임즈(the frames)에서 91년부터 약 2년간 베이시스트로 활동한 뮤지션 출신이다. <싱스트리트>는 실제 인디 밴드 출신 뮤지션과 동유럽 뮤지션을 기용하여 다큐적 성격을 강화시킨 <원스>, 그에 반해 이미 익숙한 기성 배우들과 스타급 뮤지션을 기용한 <비긴 어게인>는 중간쯤의 성격을 띤다. 존 카니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인 만큼 아일랜드 더블린의 1980년대라는 배경에 기대어, 음악판 <빌리 엘리어트>와 같은 익숙한 성장담을 그려낸다. 

다른 배경, 하지만 같은 주제 의식의 3부작 
비록 그 배경은 미국의 뉴욕, 그리고 아일랜드의 더불린으로 달라졌지만, <원스>, <비긴 어게인>, <싱 스트리트>는 모두 사회적으로 도태된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이다. <원스>, 백수와 다름없는 거리의 음악가 그, <비긴 어게인>의 그레타도, 댄, <싱스트리트>의 코너(페리다 윌시-펠로 분)도 그들은 음악에 기대어, 혹은 음악을 배경으로 살아가지만, 도시, 혹은 오늘날의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적 삶에서 배제된 그들은 '음악'에서 즐거움을 얻는 대신, '성공'하지 못한 혹은 배려받지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한 상처로 쭈끄러져 있다. 

영화 속 그들의 사회적 '배제'는 구체적이다. 200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리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 공산주의가 무너진 유럽의 가난한 나라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민을 와 생계 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이라는 제약으로 인해 자신의 재능이 배제된 사람, 스타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온 프로듀서, 그리고 불황기의 아일랜드 가정의 소년, 소녀 까지. 이들 중 <비긴 어게인>이 보다 영화적이라면, 그에 반해 <원스>와 <싱 스트리트>는 아일랜드 출신 존 카니 감독의 배경에 얹혀져 그 리얼리티가 배가된다. 

그런 그들이 그녀(마르게리타 이글로바)와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분), 그리고 모델 지망생 라피나(루시 보닝턴 분)이라는 뮤즈를 만나 '음악'을 통한 구원을 찾아간다. 사실, <비긴 어게인>이 키이라 나이틀리와 라크 러팔로라는 배우들의 연기의 맛이 곁들여져서 그렇지, <원스>나, <비긴 어게인>, <싱 스트리트>까지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단순하다. 

하지만 존 카니 감독의 영화를 스토리의 단순성만으로 폄하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단순한 스토리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그 스토리의 빈 공간을 채우는 구체적 사연이 깃든 음악들이다. <원스>의 <falling slowly>가 그랬고, <비긴 어게인>의 <lost star> 그랬듯이, tv에서 등장하는 듀란 듀란 등의 음악에 따라, 마치 커버 밴드처럼 밴드의 풍조차 변해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the riddle of model> 등이다. 특히 카톨릭 학교의 강압적인 교육에 대적하는 영화 클라이막스 <brawn shoes>는 통쾌하고, <go now>를 통해 거친 바닷 속을 헤쳐가는 작은 보트에 실린 소년, 소녀의 의지를 상승시킨다. 



존 카니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재능은 다른 성장 영화와 달리 이미 전제로 한다. <싱 스트리트>의 코너는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처럼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데 시간을 투여하는 대신, 모델 지망생 라피나의 환심을 얻기 위해 시작한 밴드가 커버 밴드같은 모습을 통해 자신만의 색을 찾아가는 모습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세세한 영화적 장치 대신 그들의 음악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원스>가 두 남녀의 음악적 사랑이 아일랜드의 고즈적한 정취를 풍미있게 만들고, 도시의 아웃사이더 두 주인공의 배회가 뉴욕이라는 도시를 화려한 불빛 이상의 정서를 배가하게 만든 반면, <싱 스트리트>는 80년대 불안한 아일랜드를 통해 21세기의 현재를 복기하게 만든다. 세 영화는 모두 아웃사이더들의 음악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시대 탓일까? 2006년의 가난한 뮤지션 그와 그녀, 그리고 2013년의 뉴욕의 아웃사이더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거나 되찾는 것으로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듯 보였다면, 거친 바닷 속의 일엽편주로 아일랜드를 떠나는 코너와 라피나의 미래는 'go now'만으론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노동조합의 욕을 들어 먹으면서까지 아들의 발레 학교 입학을 후원하는 아버지 대신, 이혼하고 집을 팔아버린 부모들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불투명한 소년과 소녀의 미래에의 'go now'가 역설적으로 이전 작품보다, 음악을 통한 '구원'이라는 면을 진지하게 천착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싱 스트리트>의 불온한 소년의 미래를 위로하는 건, 정작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서둘러 나간 후 어른이 된 코너로 짐작되는 성인 밴드들의 여유로운 <the riddle of model>이다. 


by meditator 2016. 5. 26. 16:24

<동네 변호사 조들호>는 최근 클리셰가 되다시피한 사회정의에 눈을 뜬 영웅적 주인공이 우리 사회 권력의 카르텔 재벌과 검찰, 법무법인을 상대로 '정의'를 실현하는 '카타르시스'넘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기왕의 이야기들과 이 드라마가 다른 점이 있다. 드라마는 검찰에서 버림받은 변호사 조들호의 활약상을 주로 다루지만, 그 갈등의 변곡점에 존재론적 고민에 휩싸인 검찰과 법무법인의 상속자들이 등장한다. 


상속들의 딜레마 
현실적으로야 법학 전문 대학원 입학 원서에 당당하게 자신의 친인척이 '법조계'에 있다는 걸 '스펙'으로 내세우는 세상이라지만, 현실의 불온함을 홍길동같은 조들호의 환타지로 다룬 <동네 변호사> 속 상속자 중앙지검 검사장 신영일(김갑수 분)의 아들 신지욱(류수영 분)과 법무법인 금산의 대표 변호사 장신우(강신일 분)의 딸 장해경(박솔미 분)은 자신의 어깨를 짖누르는 부도덕한 유산으로 인해 고뇌한다. 



신지욱은 아버지가 대화 그룹 정회장(정원중 분)과의 커넥션으로 차기 검찰 총장 선발 과정에서 흠집이 생기자 아버지를 설득하여 대화 그룹과 결별 수순을 밟고자 한다. 그런가 하면 장해경은 어린 딸이 금산의 자신보다도 아버지를 더 자랑스러워하자 마음이 변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설득한다. 재벌 그룹의 뒤치닥거리나 하는 금산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진정한 대한민국 최고의 법무법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자고. 16회 큰 형님처럼 생각했었다는 조들호의 표현이나, 회상 장면에서 보여지듯 이제는 변심한(?) 조들호조차도 신영일의 정신적 상속자였다. 

하지만, 이런 상속자들의 '도덕성 회복'을 통한 거듭남은 쉽지 않다. 드라마 속 악의 축은 '대화'라는 재벌에서 이제 그런 재벌조차 손아귀에 쥐고 쥐락펴락하는 검찰과 법무범인이라는 숨은 실세로 옮겨간다. 아들조차 속아넘기며 대화 회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신영일과 딸을 보호하려 애쓰지만 자신이 손에 쥔 대화라는 패를 포기할 수 없는 장신우는 그저 '이익'을 넘어 내면화된 부도덕의 주체이다. 그저 '재벌'에 이용당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들, 하지만 사건이 드러날 수록 '몸통'이 되어가는 그 '유산'에 자식들은 우유부단하게 고뇌한다. 그들의 고뇌는 그저 부자, 부녀 사이의 혈연 문제만이 아니다. 아버지에 이어 대를 이거 '가업'을 계승한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가진 기득권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동네 변호사 조들호>가 만화같은 해결방식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드리워진 권력의 카르텔 그 내면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이 준 '대화'라는 패를 포기하지 않는, 아니 포기할 생각조차 없는 '법' 권력의 민낯은 이제는 구조화된 우리 사회 '갑'의 실체이다. 그들은 결코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모면하려 머리를 쓸 뿐. 



푸치오 일가의 가업, '납치'
그리고 이런 <동네 변호사 조들호>속 권력의 얼굴은 클랜 속 아버지의 얼굴에 겹쳐진다. 씨족, 한패거리라는 뜻의 'CLAN'을 제목으로 한 파블로 트라베로 감독의 아르헨티나 영화 <클랜>은 '납치'를 업으로 삼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직을 하는 부인과의 사이에 3남2녀를 둔 아르키메데스 푸치오(길예르모 푸란셀라 분)는 겉보기엔 자영업자이지만, 사실 군사 정권시절부터 비밀 경찰로 활약해(?) 왔으며 이제 군사 정권이 종식된 이후 자신의 일을 '사영화'하여 가업화시킨 인물이다. 

그가 가업으로 삼은 일은 다름아닌, 1976년 군사 정권이 시작되고 1983년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이 패배하기 까지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 시절 3만 여명에 달했던 '납치, 감금, 고문, 살해'의 그 업이다. 푸치오는 두 명의 조력자와 거기에 자신의 아들을 합류시켜 이제 지역 유지나 그 자제를 납치해 돈벌이를 한다. 영화 속 등장하지 않지만 뉴질랜드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큰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가업'으로 인해 가출한 듯 보인다. 잘 나가는 럭비 선수인 둘째 아들은 자신의 친구가 아버지의 납치로 인해 살해 당하자 잠시 방황하지만 아버지가 제공한 부에 곧 죄의식이 마비된다. 막내 아들은 가업을 눈치채고 큰 형처럼 뉴질랜드로 도망가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이 여의치 않았던 듯 돌아와 기꺼이 가업에 합류한다. 선생인 아내도, 두 딸들도 눈치채고 자책감을 느끼는 듯하지만 결국 진실을 외면한 채 일상에 매몰된다. 

결국 푸치오 일가의 가업은 경찰이 그들이 납치한 여성을 찾아 그들의 집에 들이닥칠 때까지 계속된다.  푸치오 일가의 무시무시한 범죄는 결국 군사 정권이 남긴 정신적 유산, 혹은 휴유증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당시 유행하던 킹크스(The Kinks)의 ‘써니 애프터눈(Sunny Afternoon)’,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톰스톤 새도우(Tombstone Shadow)’ 등의 경쾌한 팝송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범죄는 그 일상성으로 인한 잔혹감을 돋게 만든다. 


부도덕의 상속  
<동네 변호사 조들호>에 나오지만 과도한 카페인 음료를 만들어 팔고, 그 음료의 판매를 방조하는 등의 방식으로 무차별적 대중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비해, <클랜> 속 푸치오 일가의 가업은 직접적이며 잔인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죽이거나, 살해를 방조하거나 결국 <클랜> 속 푸치오 일가의 범죄나, <동네 변호사 조들호> 속 법과 재벌간이 카르텔은 모두, 아르헨티나와 대한민국이 성장해온 왜곡된 현대사로 부터 잉태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요인을 납치하는 비밀 경찰로 부터 시작하여 이제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당당히 납치를 한 푸치오나, 법을 수호해야 하는 검찰과 법무법인의 대표적 인물이 '법'위에 자기 권력의 성채를 쌓아가는 모습은 그저 그 정도의 차이일뿐 사회의 도덕적 아노미를 상징한다. 더구나, 아버지에 협조하지 않는 아들의 뺨을 때리며 니가 무슨 돈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아느냐며 기세등등한 아버지 푸치오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과 딸조차 기만하는 신영일이나 장선우나 부도덕한 권력을 내면화, 신념화했다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 

<클랜> 속 암묵적으로 아버지의 등에 기대어 살아왔던 아들 알렉스(피터 란자니 분)는 결국 아버지의 입에서 까발려진 가업과 자신이 파렴치함을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 앞에서 보란듯이 몸을 날린다. 비록 그의 자살은 단번에 성공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의 삶은 거기서 끝나고 만 것이다. '가업'으로 인해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했지만, 알렉스는 그제서야 자신 역시 그 가업에 공범이었음을 시인한 것이다. 과연 <동네 변호사 조들호> 속 아들과 딸은 그저 재벌의 '개'인줄 알았던 아버지가, 결국 우리 사회 어두운 권력의 주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어떤 선택을 할까? 그들의 귀추가, 조들호의 슈퍼맨같은 활약상만큼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6. 5. 18. 20:34

<곡성>이 세상에 그 실체가 드러난 날부터 인터넷 공간에는 이 영화와 관련된 '스포'들이 발에 채였다. 누가 귀신이라는 둥, 누가 악마라는 둥, 누가 범인이라는 둥, 그리고 어떤 것들이 등장한다는 둥,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영화와 관련된 악의적 스포를 날리는 통에, 다수의 인터넷 유저들이 곤혹스러워했다. 심지어, 자신이 채여 걸린 '스포'로 인해 영화 관람을 주저하는 경우조차도 있었다. 그렇다면 <곡성>의 스포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같은 것일까?  만약 <곡성>을 보고 위와 같은 '스포'를 날린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영화 <곡성>의 미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리라. 그는 아직 영화 속 '미혹'의 세계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폭로'한다 생각하고 있다. 영화 속 그들처럼. 




나홍진, 그 집요함의 끝
처음 <곡성> 시사회가 끝나고 평론가들, 그리고 그 이후에 인터뷰를 한 배우들은 감독 나홍진에 대해 '집요하다', '끝까지 간다'라고 이구동성 입을 모았다. 결국 주인공을 비롯한 마을의 몇 가족을 참혹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만 영화 속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 그 보다는 런닝 타임이 마무리되고, 내내 '미혹'되었던 영화 속 내용에서 정신이 들 무렵, 비로소 뒤통수를 치고 들어오는 진실, 결국 거개의 영화가 영화의 클라이막스 즈음에는 진실을 드러내고야 마는 그 지점을 넘어, 심지어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도 깨닫지 못한 그 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미혹'된 그 무엇에 정신이 팔려, 진짜 '곡소리'를 내야 할 것들을 놓칠지도 모를 관객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속 종구(곽도원 분)는 런닝 타임 내내 자신이 맞닦뜨린 뜻밖의 사건에 질문을 던진다. 내게, 우리 가족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하지만, 그가 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사건을 보는 '눈'을 잃었다. 동료 경찰이 하릴 없이 풀어놓은 마을에 온 일본 사람의 이야기를 퉁바리를 주며 치워버렸던 그가, 정작 자신이 사건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자, 그 누구보다 먼저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미끼'를 문 것은 종구만이 아니다. 그가 휩쓸려 들어간 '미혹'의 덫에 관객도 동시에 텀벙 빠져들어, 그와 함께, 미로 속을 헤맨다. 그리고 눈 앞의 여인이냐, 무명의 전화 메시지냐에 갈등에 빠진 그 수간,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빠진 '미혹'의 덫을 깨닫지 못한 종구마냥, 영화를 본 사람들도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종구가 되어 버린다.



종구는 경찰이다. 
종구는 경찰이다. 비록 정전 된 파출소에 나신의 여성이 등장하자 뛸 듯이 놀라 자빠지고, 살해 현장에 제대로 들이닥치지 못한 채 멀찍이 빙빙 도는 '덜 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는 경찰이다. 딸내미에게 '아빠가 경찰이니까 걱정하지마' 라고 자부심을 보였던. 그리고, 동료 경찰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제 먼저 '미혹'의 덫에 걸렸어도, 피부과를 조사해 보라거나, 귀신처럼 등장한 여성이 최근 벌어진 사건 가족의 안주인이었음을 깨닫는 등 제법 촉이 밝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그의 경찰 노릇은. 

자신이 사건의 소용돌이에 빠지자, 자신의 피붙이가 당사자가 된 이후, 그는 한번도 경찰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번연히 드러난 검사 결과조차 제쳐버리고, 자신이 빠져버린 '미혹'의 실체를 쫓아 비합법적 수단을 불사한다. 어디 경찰뿐인가. 종구의 나와바리의 친구들도, 그리고 그를 돕느라 합류했던 '부사제도', 친구의 일이기에, 친척 형의 일이기에, 스스로 '미혹'의 길을 자초한다. 그들이 스스로 한껏 '미혹의 미끼를 물때, 연신 tv에서는 독버섯으로 만든 음료가 시판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하고, 종구의 집 문 앞을 비롯하여, 마을 곳곳에서 해골 모양으로 말라가는 그것들이 주렁주렁 등장해도, 그 누구하나 거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 더 분명해 보이는, '미혹'에 빠져든다. 

무명=미혹
'미혹'의 뜻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하면 뜻밖에도 '무명(無明)'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 영화 속 천우희를 뜻한다. 무명은 불교 용어로 미혹, 어리석음, 무지를 뜻한다. 그리고 미혹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목격자로 부터 시작하여, 무명은 결국 종구를 미혹한다. 

4월 22일 <한겨레 신문>의 정재승 칼럼 제목은 <우리는 왜 설현의 손짓과 송중기의 눈빛에 무너지나?>이다. 정재승 교수는 이 글을 통해, '사바나'에 살던 인류의 조상과 동일한 dna를 가진 인류는 그 조상과 동일한 심리적 기제를 가지고 있다거 밝힌다.  즉 사바나 시절 순간순간 생존을 염려했던 시절, 깊은 사고 대신 순간의 반응이 우선이었던 인류는 1만여년 전의 그 dna를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주도면밀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듯하지만, 설현과 송중기의 매력이라는 순간의 쾌락 중추에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21세기의 마을 주민들은 눈 앞의 검시 보고서보다, 그 눈을 가리고 마을을 떠도는 소문, 가상의 신을 만들어 자신의 소망을 투영한 사바나인들처럼, 자신의 두려움과 절망을 '미혹'된 그 무엇에 투영하고야 만다. 왜 자신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는지, 그 질문에 대한 불가지성을 불가해한 신비의 영역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 게리 마커스는 이런 인간을 두고 서투르지만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이란 의미의 고물 컴퓨터 '클루지(kluge)'라 애교스럽게 부르지만, 그것이 아이돌과 배우의 눈빛에 빠져드는 정도를 넘어, 공익을 담당해야 할 자가 자신의 직무를 방기하고, 돈 1000만원 짜리 굿이란 기복적 행위를 마다하지 않고,  '사적' 처단과 교통사고 피해자 유기를 서슴지 않는 상황이 되면, 사바나의 부작용 수준을 넘어선다. 

거대한 우화 <곡성>
무엇보다, 이런 부작용이 나, 혹은 내 가족의 이익을 전제로, 수단과 방법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곡성>은 '오컬트 무비(occult movie)를 넘어, 그 자체가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징한 '우화'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그 '우화'가 일광과 일본인. 무명의 미묘한 정체를 넘어, 해석의 진실까지 어느 만큼 닿을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미지수는 바로 영화의 난해함이 아니라 종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미혹을 우리 사회 속 부조리한 인간 군상의 모습으로 치환해 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눈밝음 정도와 닿아있다. 

표면적으로 '귀신'과의 사투로 보이는 영화는 언뜻 2015년의 <검은 사제들>이 떠올려진다. 편견을 넘어 실존하는 귀신과 싸우는 퇴마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표면적 유사성이 보이는 듯 하지만, 오히려 <곡성>의 내면적 유사함은 2014년 바다 안개에 휩싸인 전진호를 통해 한국 사회를 상징한 <해무>에 가닿는다. <해무>가 그 무시무시한 한국호의 진실을 19금이라는 벽을 넘어 세상에 진솔하게 닿지 못한 것과 달리, <곡성>은 절묘하게 15세 관람가로 대중적 접촉면을 넓힌다. 또한 '밀양'지명을 등장시켜, 밀양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거기에 종교적 매개를 얹어 한국 사회를 진단해 냈다는 면에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굳이 '미혹'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황정민, 쿠니무라 준, 천우희의 열연으로 오리무중 오컬트 무비로서의 양면성은 묘하게도 상업영화로써 이 작품의 또 다른 흡인력이 될 가능성을 열어둔다. 하지만 정작 관람객의 뒤통수를 치는 건 끝내 관람객과 함께 어수룩하게 당하고마는 곽도원의 종구 그 자체다. 



by meditator 2016. 5. 13. 06:21

sbs의 주말 드라마 <그래 그런거야>에서 대가족을 이끄는 89세의 유종철 옹(이순재 분)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여자를, 그것도 이쁜 여자를 밝힌다. 심지어 여자가 이쁜 건 선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소싯적에 바람 비슷한 걸로 아내 속을 썩인 바 있고, 집안에 이쁜 손녀들이 없으면 잔소리가 칙칙하다며 불평을 터트리고, 틈만 나면 이쁜 아줌마들과 노래방에서 손을 잡고 노래를 한다. 집에서도 주로 시청하는 tv프로그램은 여자 아이돌이 등장하는 음악 방송이다. 하지만 이런 유종철 옹은 여전한 집안의 기둥으로 그 권위에 흔들림이 없다. 백발이 성성한 그의 자식들은 여전히 그를 존경한다. 그 나이 되도록 해로한 아내는 어떨까? 뻔히 남편이 여자를 만나러 가는 줄 알면서도 추위에 감기나 걸릴까 노심초사하며 옷을 챙겨준다. 심지어 아들은 노래방으로 아버지를 데리러 가서 아줌마들과 손잡고 노래부르는 아버지를 기다려준다. 


이 '콩가루'같은 상황을 김수현 작가는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노년의 사랑, 그 단면으로 그려낸다. 우리네 결혼 생활을 설명하는 단어로 흔히 '정'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 시작은 남녀의 결합이었지만, 함께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다 보니, 남녀간의 사랑보다, 함께 살아가는 동거인으로서의 의리가 강조되면서 부각되는 단어다. 아마도 지금도 대놓고 이쁜 여자랑 살아보는 게 소원이라는 유종철씨의 바람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으로 여전한 존경과 신뢰를 받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의무를 충실히 해냈다는 점에 덧붙여 남편으로서의 그의 주장처럼 결정적 과실(?)은 없었다는 것이라고 드라마는 그려낸다. 그러나, 김수현이라는 대작가의 작품임에도 동시간대 상대작에 비해 영 힘을 못쓰는 시청률은 김수현 작가가 그려내는 여전한 '가족' 혹은 '부부'에 대한 로망이 동시간대 '이혼'이 겹겹이 등장하는 <가화만사성>에 비해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저 '막장'이 아니라서는 핑계보다는, 김수현 작가가 제시하는 대가족, 혹은 가족에 대한 서사가 '황혼 이혼'이 범사가 된 세상에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 45년에 등장한 남편의 죽은 애인 
그렇다면 <45년후>의 케이트(샬롯 램플링 분)는 어떨까? '황혼 이혼'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세상, 하지만 그 한편에서 여전히 <그래 그런거야> 같은 대가족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가 목소리를 꼿꼿이 세우고, 평생 바람을 피며 밖으로 떠돌다 이제 아내가 병이 드니 가정으로 회귀하겠다는 신성일의 이야기가 '사랑'의 미담으로 가정의 달 등장하는 사회에, 남편의 죽은 전 애인(실상 알고보니 전부인)의 등장으로 45년 결혼 생활에 금이가는 케이트와 제프(톰 커트니 분)의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결혼 45주년을 앞둔 케이트와 제프의 가정, 그들 앞에 한 장의 편지가 등장한다. 제프의 옛 애인의 시신이 알프스의 산맥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는 내용의. 그저 흘러간 옛사랑의 에피소드로 지나갈 줄 알았던 이 편지 한 장은, 하지만 그 편지로 인해 변해가는 제프로 인해 케이트-제프 부부의 일상은 균열이 일어난다.

40주년도 아니고 45주년에 '해로'의 파티를 하게 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래서 아내와 산책도 다니지 못했던 제프가 편지 한 장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예전 그녀와 있었던 시간들을 수시로 심지어 잠자리에서까지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고, 무기력해진 자신을 한탄하며, 팔팔했던 심지어 전투적이기까지 했던 젊은 날을 그리워하고 되돌아 가려 애쓴다. 포기했던 책을 읽고, 그녀와의 추억을 아내 몰라 되돌아보고, 무려 스위스까지 가는 여행편까지 알아보고 다니는 식이다. 

그런 남편의 변화에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결국은 불편해하다, 불쾌해하던 케이트는,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는 증명이 되는 결혼 45주년 파티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고 아내와 흥겹게 춤을 추는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만다. 

케이트의 분노와 좌절이 우리에게 시금석이 되는 이유는? 
이런 케이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 그런 거야>의 김숙자 할머니(강부자 분)라면 긍휼히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엄앵란 씨라면 그저 또 하나의 스캔들로 치부할 수 있을까? 

<45년후>가 던지는 질문은 45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아니 45년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한 장의 편지를 통해 케이트가 알게 된 것은 그저 남편에게 한 사람의 전 애인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받아든 것은, 자신과 남편의 결혼의 전제에 대한 '신뢰'의 불신이다. 남편은 아름다운 그녀에게 솔직히 말할 수 없었다지만, 그녀에게 말했던 남편의 이야기는, 45년이 지난 후 남편이 전하는 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아니 오히려 45년이 지나서 이제는 무기력해진 노인을 '회춘'하게 만들 정도의 열망에 가득한 '사랑', 그리고 남편의 변명과 다르게 '실질혼'과 그를 둘러싼 남편의 거짓말이 그녀를 절망에 빠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케이트의 분노, 고통은, 그저 '씨앗은 부처님도 돌아앉게 만든다'는 우리 속담이 전하는 '시기'나, '질투'의 감정과 다르게, 자신이 45년을 믿어왔던 결혼에 대한 '신뢰'의 궤멸이다. 45년을 살아와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파티마저 열었지만, 그래서 더 허망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사상누각'이었던 결혼말이다. 

농경 사회의 전제로서의 대가족이, 자본주의 사회의 핵가족 제도로 변화되면서, 그 핵가족의 근저를 이루는 정서는 '자유로운 연애'에 기초한 남녀의 사랑이다. <그래 그런거야>가 여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쉽게도 이제는 '잔재'도 찾기 힘들어지는 농경적 잔재로서, 물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뿌리가 깊게 드리워진 혈연으로 맺어진 대가족 제도이지만, 현실의 '황혼 이혼'들은 그런 제도로서의 가족의 무기력함을 증명한다. 그런 상황에서, <45년후>는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의 '부부'라는 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sbs스페셜에서 남편 들은 자신이 돈을 못벌게 되자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고 했지만, 아내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했던 바로 그 살아온 시간과 무색하게 동등한 남녀의 '신뢰'로 이루어진 '결혼'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그래서 생뚱맞은 케이트-제프 부부의 결혼 45주년을 앞둔 해프닝이 우리의 부부들에게 시금석이 된다. 

*이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인천까지 달려갔다. 정작 우리네 중장년들이 봐야 할 영화는 돌림노래같은 지나간 시절의 유행가같은 영화가 아니라, 숱한 영화제의 후보가 된 이런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가 많이 상영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제 말하기도 입이 아프다. 

by meditator 2016. 5. 10. 16:25

외람되지만 <크로닉>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우리집 애완견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9살, 다 늙어서 우리집에 첫 발을 들인 녀석은, 첫 건강 검진을 간 병원에서 나이가 있으니 소파에 오르내릴 때 조심하란 말이 무색하게 정말 강아지처럼 종횡무진 우리집을 누볐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녀석은 나이들어 가며 '노견'이라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10여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살다 몇 해전 세상을 떠났다. 그 녀석이 세상과 이별하는 과정에는 우리의 결단이 필요했다. 몹시 고통스러워 보이던 아이를 보며 이제는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간사하게도 오래전 떠나보내드린 혈육보다 첫 인사부터 불쑥 내 이불 속을 파고들던 녀석이 그립다. 그리고 그 그리운 감정과 함께, 늘 과연 녀석을 보냈던 그 순간의 선택이 옳았을까란 '윤리적' 고민이 따라온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녀석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흐릿해 질 수록, 조금 더 시간이 주어져야 하지 않았을까하고 되묻게 된다. 


굳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애완견에 대해서도 내내 해명되지 않는 질문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데, 그 대상이 나의 혈육, 하물며 나보다 더 소중했던 내 자식이라면? 호스피스 간호사가 맞닦뜨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려니 하고 본 <크로닉>에서 마주친 건 뜻밖에도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답을 내릴 수 없는 또 다른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다. 



경계를 넘어선 호스피스 간호사, 그 이면에
에이즈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발레리나를 전처라 소개하고, 뇌졸증의 건축가를 형이라 소개하는, 내내 아와 타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과 자신이 간호하는 말기 환자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데이비드, 정작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그의 삶을 재구성해보게 되는 건, 충격적인 결말 이후, 적막이 감돈 흑백의 스크린 위로 흘러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면서이다. 마치 의도적으로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본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라 강요하기라도 하듯, 그 흔한 ost 하나 없이 묵묵히 알파벳의 자막만이 남겨지고 관객석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침잠한다. 

그리고 문득, 마지막 순간 그 충격적이었던 결말이 새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단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시선을 사로잡은 건 환자와 자신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떻게든 조만간 세상을 등질 환자의 편의를 봐주고자 법적으로 금지된 수단마저 마다하지 않던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였지만, 오히려 다시 되돌려 생각해 낸 데이빗은 마치 막간극처럼 호스피스 간호사로 활동하는 그 사이사이 그 무엇으로도 채울 길 없는 공허한 눈빛을 가진 언제 죽어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영화에서 단편적으로 등장하듯이, 아마도 그는 그의 딸이 그에게 뿌듯하게 자랑하며 의논하듯 그 언젠가는 의사였던 적이 있는 듯했고, 한때는 이제는 가끔 들르는 그 집에서 아내와 아들과 딸과 행복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4년전 그의 아들 댄에게 찾아온 병으로 산산조각나고, 영화 후반 그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 노년의 환자처럼 그는 견뎌내기 힘든 아들의 고통 앞에 윤리적 경계를 넘어섰던 듯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직업적 윤리'로서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의 행위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면, 영화를 다 본 이후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의 행위들은 존재론적 윤리로 그 영역이 확장되게 된다. 아비로서의 결단, 하지만 분명했던 것 같은 그 결단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주는 그 무게가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세상에 무게에 자신을 내맡기듯 휘적휘적 걷던 데이비드의 모습 속에서 온전히 다가온다. 아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날 수 없었던 아비의 고통은, 말기의 환자들과 함께 온전히 하는 것으로도 해소될 길 없는 공허함을 주었고, 결국 충격적 결말 뒤에, 그것이 어쩌면 진작 의식적으로는 세상을 떠난 그에게는 마침표와 같은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혈육으로 맞닦뜨린 존엄사, 그 윤리적 질문 
우리 사회에서 이제 막 문제 제기가 시작된 존엄사의 문제는 서구의 영화 속에선 구체적 고민의 형태로 등장한다. 얼마전 마리 끌레르 영화제를 통해 상영된 파스칼 포자두 감독의 <마지막 레슨>은 존엄사를 선택한 어머니 마들렌의 결정에 이견을 보이는 아들과 딸의 갈등을 다룬다. 어머니는 더 늙어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되기 전에 삶을 마무리하려고 하지만, 아들은 끝내 그런 어머니의 결정을 수긍하지 못한다. 

글로만 보면 한 개인의 존엄한 죽음이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을 방조하는 불효이자, 자신들을 방기한 어머니의 마지막 욕망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 레슨>이 어머니의 존엄사 앞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자식과 부모의 갈등이라면, <크로닉>은 아들의 존엄사를 지켜낸 아버지의 불가항력인 고통을 다룬다. 아들처럼 죽어가는 이들을 자신의 아내나 혈육처럼 지켜내는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삶의 근거지가 붕괴되어가는 그 파멸의 과정으로써. 어머니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찾지 않고 홀로 괴로워하는 아들이나, 아들의 고통을 줄여주고, 자신의 삶마저도 함께 잃어버린 아버지의 고뇌는 법이나, 선택의 영역 속에 가두기 힘든 인간의 세 치 혀로 쉽게 논할 수 없는 존재론의 영역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의 영역에서는 버거운 문제를 통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존엄사의 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된다.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 대한 고민을 한 꺼풀 벗겨내고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
저성장이 깊어지고 젊은이들이 삶의 무게에 짖눌려 이제 극장가는 중장년층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드라마들이 중장년층들의 구미에 맞는 뻔한 통속극으로 채워지듯, 극장가도 중장년층 구미에 맞는(?) 뻔한 기획 영화들이 득세하며 한국 영화계가 암담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그런데, <크로닉>을 상영하던 일요일 오후의 극장 안은 반 넘게 중장년의 관객들로 채워져 있었다. 난 일요일 오후 주변 어느 극장에서도 상영하지 않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한 시간 여를 가야만 했다. <크로닉>은 주변의 그 번다한 멀티 플렉스에서는 참 보기 힘든 영화였다. 새벽 댓바람이나 오밤중이 아니고서는. 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시청률을 올리기 쉬운 막장 드라마를 양산하며 중장년층의 핑계를 대는 방송가처럼, 어쩌면 극장가도 역시나 중장년층의 핑계를 대며 편한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게 어쩌면 이리도 쉽지 않은 건지. 
by meditator 2016. 4. 21. 06:17

해마다 여러 영화제가 개최된다. 그렇게 많은 영화제 중에서 늘 봄과 함께 찾아드는 영화제가 있다. 바로 잡지[마리 끌레르]가 개최하는 [마리 끌레르 영화제]가 그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다섯 번째의 '마리 끌레르 영화제'가 세계 여러 나라의 영화 31편과 함께 찾아왔다. 지난 3월 10일부터 cgv 청담 씨네 씨티에서 16일까지 상영 중이다. 이 영화제에서는 개봉을 앞둔 코엔 형제의 <헤일, 시저>를 시작으로, 부산 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중국 영화 <산이 울다>, 말론 브란드의 일생을 담은 <리슨 투 미 말론>, 재상영되는 명작 <양철북>까지 여러 국가의 다양한 주제 의식을 가진 영화들이 상영된다. 멀티 플레스에서 획일적으로 상영되는 영화에 갈증을 느낀 관객에겐 저렴한 비용(5000원)으로 고품질의 영화를 만나 볼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그 중에서 오늘 소개할 영화는 팀 브레이크 넬슨 감독의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와 파스칼 포자두 감독의 <마지막 레슨>이다. 두 영화는 스릴러와 드라마라는 서로 다른 형식을 띠고,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두 노인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역설적으로 삶의 문제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외면하며 도망치듯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결국 유한한 삶의 완결로써 죽음을 통해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이 영화들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바람처럼 맞이하게 되는 죽음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스릴러라는 영화 장르가 무색하게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를 채우는 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갑남을녀의 지루하리만치 평범한 일상이다. 30여년간 철학 강의를 하는 월터 교수는 여전히 젊은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 암일지도 모를 아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렇게 월터 교수 아들 아담 중년 부부의 일상을 '건강'이 침범하는 것과 달리, 청춘의 시절을 보내는 그의 아들과 딸은 부모의 간섭을 피해 대마를 피우며 청춘 사업과 버거운 학업에 고뇌한다. 그렇다고 월터 교수네 가족 이야기가 중심도 아니다. 뉴저지 교외에 사는 중산층 사라와 샘 가정의 공허함도, 마약 상습범인 시더와 잘 나가는 변호사인 그의 친구의 갈등도 등장한다. 물론 이 영화의 출연으로 홍보한 크리스틴 스튜어트도 고데기 자해로 삶의 의미를 찾는 월터 교수의 제자로 등장한다. 



월터 교수의 강의로 시작한 영화는, 역시나 과학 기술은 발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 의식적 삶에 대한 갈구를 멈출 수 없는 인간의 현존재에 대한 월커 교수의 마지막 강의로 정점을 이룬다. 제자들의 존경어린 박수 소리 뒤로 자신의 다리를 고데기로 지지는 젊은 여학생과, 친구나 의료진의 도움도 소용없이 마약에의 욕구를 참지 못하는 중독자의 모습이 겹쳐지며, 현대 사회 속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30년의 강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는 교수는 마지막 강의를 마친 저녁 아내를 위해 꽃을 사들고 가는 길에, 그를 오해한 노상 강도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맞고, 그 과정에서 그를 구하려 애썼던 마약 중독자는 노교수를 구하려다 죽음을 맞이하고, 외도 중이었던 샘이 그들을 발견한다. 편린과도 같은 일상의 삶이 죽음으로 귀결된다. 

영화는 마치 언뜻 '인생무상'을 다루는 듯하다. 오랫동안 강단에서 인간의 선의와 신념을 주장했던 노교수는 선의를 곡해한 '개죽음'을 당하고, 마약을 끊지 못했던 중독자는, 허무하게 죽어간다. 그런 죽음을 목격한 중년 가장은 그곳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정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의 가정은 이제 그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하지만, 피를 흘리면서도 아내에게 꽃다발을 전해주려 했던, 그리고 양배추 밭에서 바람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유언과도 같은 노교수의 말을 통해, 이 우연한 비극과도 같은 일련의 전개는, 결국 삶과 죽음에 대한 처연한 성찰로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버린 사건은, 두 시간 여 영화를 지루하게 이끌어 왔던 일상의 삶과 대비되며, 삶의 무게와 의미를 전파한다. 굳이 고데기로 지지지 않아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생생한 삶이다. 

신념으로의 존엄사 - <마지막 레슨>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조각조각 이어 붙여가는 삶과 죽음의 모자이크라면, <마지막 레슨>은 굵직한 글씨로 써내려 간 휘호와도 같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 눈에 늙음이 드러난 노인, 거기에 거리에서 갇혀버린 그녀의 차를 통해, 그 늙음은 더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그리고, 어렵사리 도착한 딸네 집에서 벌어진 그녀의 아흔 두 살 생일 파티. 거기서 마들렌 여사는 두 달 후 10월 17일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마무리할 것임을 선언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 '존엄사', <마지막 레슨>은 이제 더는 스스로 삶을 이끌어 갈 힘이 부치는 아흔 두 살의 마들렌의 결정과, 그에 대한 가족들과의 갈등을 통해 막연한 존엄사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더 이상 일상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겠다는 어머니의 결정이, 그녀의 전 생애를 이끌어 온 신념의 문제와 연결되며, 해묵은 감정에서 비롯된 갈등마저 끄집어 내는 미묘하고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영화는 직시한다. 그리고 거기서 사회라는 체계 속의 한 인간의 죽음이 그저 한 개인의 선택으로 마무리되기엔 너무 버거워져 버린 사회적 존재 인간의 그림자를 촘촘히 살펴나간다. 또한 단호한 마들렌 여사의 결정을 통해, 죽음은 그저 어떤 의료적 행위가 아니라, 삶의 체계를 가진 존재로서, 신념을 가진 의식적 존재로서 인간적 서사의 마무리임라고 영화는 주장한다. 

평생 자신의 신념을 향해 살아온 어머니를 끝내 용납할 수 없는 아들,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료 체계 속에서 고사당하는 삶을 거부하는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딸, 그리고 그런 자식들과의 갈등 속에서 고뇌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키려고 애쓰는 마들렌 여사, 막연했던 존엄사는 이들의 고민과 갈등을 통해 구체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애써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이 마무리되는 날을 자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정한 마들렌 여사, 평생을 세상에 대한 밝은 눈을 가지고, 선의로 지켜왔던 월터 교수의 뜻하지 않는 죽음, 두 노인의 죽음은 극과 극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죽음이 '사건'이건, 주도적인 결정이건, 결국 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존중하고 받아들인 딸이 어머니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마지막 레슨'이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더 이상 죽음 자체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듯이, 죽음은 그저 삶의 완성일 뿐, 결국, 그 마침표를 찍기까지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두 영화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by meditator 2016. 3. 15. 17:01

영화 속 배경은 영화 속 이야기를 보완해 주는 중요한 장치다. 허구인 서사를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실재의 공간들, 그리고 역시나 허구의 인물을 현실로 떠받쳐주는 튼실한 토대가 된다. 그러기에 공간의 왜곡이나, 서사와 인물을 떠받치는 거짓 공간인 cg의 어설픔이 허구인 서사와 인물을 들통내는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속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배경 화면의 어긋남이나 어설픔에 방해받기는 하지만, 거기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결국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물들을 통해 발현되는 서사이니깐. 


그러나 종종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배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서사가 된다. 이 감독의 2007년작 <밀양>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을 찾는 신애를 서둘러 맞는 것은 남편 고향의 햇살이다. 그리고 그 햇살은 영화 내내 중요한 시선이 되어 신애를 따라다닌다. 영화의 제목인 밀양 scret sunshine과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밀양 密陽, 이 의미의 어긋남이 곧 영화의 주제 의식을 대변하고, 그 주제 의식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서두를 나지막히 흐르는 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무심히 흐르는 듯한 강물 위로, 꽃잎처럼 늙고 젊음 생명이 진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흐름. 그 속에 휩쓸려 버린 생명을 통해, 휩쓸려 버릴 삶을 통해, 관객의 처연함은 깊어진다. 그렇게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서사만이 아니라,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빛과 물등 자연의 물성을 통해 그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간다. 


한 폭의 동양화같은 자객 섭은낭
현재 상영되고 있는 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단란한 황실의 가족, 그리고 그 가족을 지켜보는 대들보 위의 섭은낭을 통해 이 이야기가 '자객'인 섭은낭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자객이 되어버린 섭은낭과 그녀를 자객으로 만들어 버린 그녀의 고향 위박의 위태로운 운명을 지켜보다 보면, 조금씩 그 인간사의 이야기를 넘어 차오르는 풍경이 있다. 그리곤 어느덧 그 인간사의 운명마저 부질없게 만들어버리는 한 폭의 동양화를 만난다. 

흔히 동양화를 '여백의 미'라 칭한다. 화폭 가득 자연이 압도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공간이 압도한다. 자연의 풍경을 배경으로 더 많은 공간이, 자연의 풍성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 한 끝에 궁색하게 자리잡은 인물들이 끼어든다. 겨우 고개를 자세히 들이밀면, 그 점같은 인물들의 제각각 사연이 보인다. <자객 섭은낭>도 마찬가지다. 

단란한 황실 가족과 그들을 지켜보는 섭은낭, 그리고 사부를 찾아가 차마 아이때문에 그를 죽일 수 없었다는 섭은낭과, 그런 섭은낭에게 마음의 문제를 언급한 씬처럼, 이후 위박에서의 인물들의 씬은 곧이곧대로 보여진다. 오늘날 영화들이 현란한 카메라 웤을 통해 인물을 다 설명해내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대사와 때론 클로즈업이 등장하지만, 쉽사리 그것만으론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과, 느리게 그들을 잡아가는 화면에서 복잡한 그들의 속내를 짐작할 뿐이다. 



오히려 그들의 위태로운 관계와 운명을 드러내는 것은 드러내는 것은 영화 속 배경이다.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가 쫓겨난 익주의 느낌을 준다. 험준한 산세에 둘러싸인, 그리고 이는 조정과 이웃 지역, 그 어느 곳도 믿을 수 없는 위박의 운명과 사연을 이룬 등장인물들의 존재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영화는 내내 씬과 씬을 가르며, 때론 설명하고 때론 예고하듯 한 폭의 동양화같은 자연을 통해 섭은낭과 주변 인물들의 서사를 그려낸다. 칠흙같은 동굴, 안개가 드리운 길, 평화로운 농촌의 풍경은 그 자체로 영화적 언어가 된다. 

야곰야곰 등장하기 시작한 이 언어는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인물들의 서사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섭은낭과 정혼자였던 전계안, 두 사람의 이별을 만들고 만 전계안의 모친과 그 쌍둥이 사부, 그리고 거기에 협조한 전계안의 친인척이자 고위관료인 섭은낭의 부모, 더 나아가 그런 비극적인 운명을 잉태하게 만든 위박이라는 지역의 운명. 그 급박하게 전개되는 영화적 전개와달리 무심한 듯 흘러내리는 우물의 물처럼, 엄숙하게 등장하는 자연은, 위태로움에도 그 어떤 관리의 말도 믿을 수 없는, 아니 정확하게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위박의 운명처럼, 어쩌면 자연의 숙명 앞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인간사의 숙명을 드러낸다. 

위박은 작은 지역이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도모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누군가는 조정에 잘 보여서 위박의 앞날을 기약하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웃과 손을 잡아 조정에 맞서자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위박의 앞날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위태로움을 조장하는 것은, 위박의 지정학적 위치이지만, 거기에 힘을 보태는 것은 결국 인간들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섭은낭의 사부가, 그 원하지 않은 삶의 포한을 누군가의 삶을 거두는 '복수'를 통해 거두려고 하듯, 전계안의 정비 역시 지아비를 배신하는 삶을 선택한다. 섭은낭의 아비와 어미 역시 뒤늦게 자신들의 딸인 섭은낭이 자객으로 돌아왔음을 알고, 그녀에게 그런 삶을 넘기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지만, 그것이 뒤늦은 후회인 것처럼 지정학적 운명의 위태로움을 치닫게 하는 것은 '인간사의 어리석은 선택'이다. 하지만, 깍아지른 아득한 벼랑 위 자연의 엄숙함 속에 그저 한 마리 새에 불과한 듯한 사부의 모습처럼, 그런 인간의 선택이 자연의 숙명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인간사를 압도하는 무위자연
그렇게 영화는 인간사를 압도한다. 위태로운 위박의 운명 앞에, 기약할 길없는 지도자의 미래 앞에 사랑하는 첩을 끼고 고뇌하는 전계안의 고뇌를 엿보는 것은 섭은낭만이 아니다. 그 대사없는 긴장감의 틈을 비집고 들어서는 것은 뜻밖에 귀뚜라미 소리의 파격(?)이다. 그리고 이런 파격은 활을 맞고 본의 아니게 허름한 농가로 몸을 피한 섭은낭 아비 일행을 맞이한 한가로운 농촌 풍경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구구절절 섭은낭의 갈등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 행간을 채운 엄숙하지만 무심한 자연을 통해, 결국 '복수'의 칼날을 거두고, 그와 동시에 애증의 마음도 풀어낸 채 조용히 길을 떠나는 섭은낭이 내린 결정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동양화는 그저 그림이 아니다. 그 화면을 지배하는 자연과 거기에 곁들여지는 자그마한 인간사를 통해, 무위자연無爲自然, 즉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경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자연의 무기력함이 아니다. 인간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거스를 수 없는 힘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객 섭은낭에서, 인간사의 힘이란, 사부 등의 '인위적으로 도모하고자 하는' 복수'의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그 인간사의 힘이란 영화 전반에서 종종 압도하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무기력하다. 그리고, 사부는 섭은낭에게 인간사 정에 휘둘려 다하지 못한 무공이라 했지만, 오히려 섭은낭은, 그저 애써 인간사의 풍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함으로써 더 높은 무공을 보인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지만, 자연처럼 인간사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무위자연의 경지를 보인 것이다. 

<자객 섭은낭>은 익숙치 않은 영화적 화법으로 말한다. 최근 몇 년간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더 이상 우리의 스크린에서 만날 수 없듯이, 빠르게 전개되는 사건, 화끈한 보상처럼 주어진 결말, 분명한 메시지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자객 섭은낭>은 모호한 이미지처럼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습관화된 화법을 내려놓고 영화에 침잠한다면, 이른바 '힐링'이라 말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좋은 영화는 좋은 그림처럼, 영화를 보고 나서도 내내 새롭게 이야기할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다. 그저 위박의 위태로운 운명에 견줘 감독 허우샤우시엔의 고국 대만의 운명이라는 즉자적인 해석을 넘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선택, 그리고 인간사와 자연의 내밀한 철학까지 무궁무진해서 보는 이의 혜량에 따라 그러낼 수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내보인다. 아마도 그래서 이 영화를 본 눈밝은 관객들이 또 이 영화를 보러가고 싶다고 하는가 보다. 

by meditator 2016. 2. 17. 16:54

나이가 지긋해져서 친구들을 만나면 '싱글족'이 무색하게 온통 아이들 얘기뿐이다. 그건 남녀를 가릴 것이 없다. 아이가 잘 되면 잘 돼서 걱정, 잘 안 풀리면 안 풀려서 걱정, 소를 잡아 아이들을 대학을 보내던 우리 부모의 세대랑 전혀 다르지 않은 DNA를 내보이며, 단지 다른 게 있다면 부모들이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소를 열심히 키우는 일이었다면, 이제 부모가 된 자들은 자신들이 그간 나이 먹도록 배워온 갖은 노하우와 인맥을 동원하여 아이들을 추스리려 하는 것일 뿐이다. 강산이 몇 번을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원동력은 '내 새끼는 내가 챙긴다'는 불변의 진리 하에 각 부모들의 각개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부모들의 '전투'가 늘 성공적이지만은 않다. '우골탑'으로 만든 상아탑에서 '민주'을 외치며 부모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던 그때 그 자식들이 다시 부모가 된 지금도 여전히 아비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은 불협화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처럼, '내 자식 잘되기만을 아비의 방식으로 기원하는 아비는 자식들과 '소통'할 수 없거나, 화해 조차도 때늦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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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의 코드, 아버지 
그렇게 여기 하나 밖에 없는 딸 자식과의 '소통'의 기회를 놓친 아버지가 있다. 바로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있던 날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 해관(이성민 분)이 바로 그 사람이다. 지하철 참사의 실종자로 딸을 받아들인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그걸 인정치 못한다. 그리고 영화 <로봇, 소리>는 아버지가 왜 딸의 실종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가를 이후의 전개에서 스멀스멀 밝혀간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 우선 촛점을 맞추는 것은 딸의 실종이 아니다. 어린 시절 엄마 모르게 손가락을 걸고 '비밀 본부'를 만들었던 아버지 해관과 딸 유주(채수빈 분)는 커가는 아이의 키만큼 거리감이 생긴다. 비밀 본부였던 아이스크림 가게를 배경으로 엇갈리는 두 사람의 행보가 영화를 열고, 거기서 당혹감을 느낀 아버지의 시선에서 이 영화가 '아버지'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로봇, 소리>의 해관은 관세청에 다니는  심지어 나랏밥 좀 먹는 평범한 우리 시대의 직장인이다. 그리고 그 '평범함'을 반증하듯,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딸 유주가 자신이 살아왔듯 '평범한' 삶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소탈한 바램은, 아버지의 뜻과 엇나가는 딸로 인해, '불협화음'과 '불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불통'의 클라이막스,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아버지는 자신을, 자신의 뜻을 외면한 딸을 거리에 던져놓고, 딸은 그 이후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실종된 딸을 찾아 헤매던 해관이 굴업도 바닷가에서 줏은 로봇, 소리와 함께 딸의 남겨진 목소리를 따라 도달한 곳은, 전국을 헤매면서도 단 한번도 찾지 않았던 곳, 바로 자신이 딸을 남겨 놓았던 그 거리의 지하철이다. 결국 왜 딸의 실종을 받아들이는 엄마와 달리, 지난 10년 동안 아버지가 딸이 지하철 참사의 실종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가를 에돌아 설명해 온 것이다. 즉, 아비는 딸을 아비의 방식으로 사랑하고자 했으나, 그 아비의 왜곡된 사랑이, 딸을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버지 해관은 지난 10년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성민이 연기한 해관은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투박하고 사랑하는 맘은 깊어도 잔정많게 대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자식을 사랑하는 법만을 실천해온 그래서 자식과 소통할 수 없었던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다. 어쩌면 해관의 그런 모습은 우리 시대의 천만을 누렸던 <국제 시장>의 덕수(황정민 분)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왜곡된 사랑으로 자식을 뜻하지 않은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는 점에서는 <사도> 속 영조(송강호 분)의 모습이 겹쳐진다. 즉,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아버지의 DNA를 충실하게 실현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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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소리> 속 아버지가 하는 반성의 방식
그렇게 우리의 별다를 게 없는 아버지 해관이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딸의 받아들일 수 없는 실종을 마주하고서이다. 그리고 <로봇, 소리>가 그간 우리나라 영화들이 그려내고 있는 '부성'의 다른 지점을 말하기 시작한 것도, 그리고 이 영화가 그간 우리 나라 영화들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자식의 부재'로 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로봇, 소리>가 2016년에 각별하게 다가오는 점은,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대구 지하철 참사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참사로 이 시대가 자식들의 부재를 양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영화가 강조하지 않아도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찾아 헤매는, 아이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비의 모습은 이제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 된 것이다. 한때는 전쟁에 나가, 그리고 또 한 때는 시위에 나가 돌아오지 않던 자식은 이제 사회적으로 벌어진 '참사'라는 운명에 휘말려 부모들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선대의 아비들이 살아왔듯 다르지 않게 자신의 시대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려 했던 해관은 하지만 딸의 실종으로 그 사랑을 배반당한다. 그가 로봇 소리를 통해 도달하기 까지 지난 10년간 찾아다닌 건, 딸이었지만,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버지, 자신의 모습이었다. 즉, 로봇, 소리를 만나서도 여전히 실종 전의 딸을 대하듯 자신만의 방식으로 툭툭거렸던 아버지는 딸을 찾겠다는 간절함으로 로봇, 소리와 동행을 하면서, 지난 시절 자신이 했던 사랑의 방식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었는가를 짚어보게 된다. 결국, 마지막 지하철 입구에서 마주한 것은, 딸의 실종이 아니라, 그토록 자신이 외면했던 자신의 어긋난 사랑이었다. 즉, 여전히 자식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왜곡된 아비의 시대에, 영화는 사랑하려 했지만 왜곡된 방식이 되어버린 '아비'의 반성을 영화는 촉구한다. 그래서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로봇, 소리>가 천만이 되기 힘든 결정적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아비의 사랑에 방점을 찍는 이 시대에, 그 사랑의 방식과 반성을 촉구하는 <로봇, 소리>는 불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신파적'으로 전개되었던 다수의 한국 영화 속에서 아비들의 모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사랑했고 최선의 방식으로 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었다에 방점을 찍었었다면, <로봇, 소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방식이 왜곡되었다라는 지점이다. 아버지가 아버지 세대의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때로는 자식에게는 굴레요,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로봇, 소리>는 말한다. 그리고 그건, '잘못'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아비와 자식의 숙명일지도 모른다고, 국정원에서 출소한 해관을 맞이한 아내의 입을 통해 나즈막하게 읊조린다. 

그러나 영화는 눈물을 쏙 빼면서도 자식과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아비의 숙명적인 운명에 타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비는 딸을 잃어버린 그 지하철에서 잠시 통곡을 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딸의 부재를 시인하는 감상(感傷)과 시인에서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아비의 행보를 걸어가는 해관의 모습에서 <로봇, 소리>의 힘은 이어진다. 비록 그 결말이 환타지일지라도. 자신에게 찾아온 또 다른 딸을 지키기 위해, 그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것이다.  그가 딸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베풀었듯이, 이번에도 변함없이 그렇게, 위태로운 항구의 난간에 매달리고, 바다에 몸을 던져가면서 또 다른 딸을 지키고자 한다. 인공 지능 로봇이라는 존재는 환타지이지만, 혈육으로서 딸을 지켜내지 못한 아버지가, 혈육의 사랑을 넘어, 전쟁터에서 스러진 목소리를 향해 나아가는 로봇, 소리를 지켜냄으로써, 딸의 '진혼곡'을 '인간애'(?)  혹은 인류애, , 보편적 인(仁)으로 승화시켜 내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6. 2. 2.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