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이란 고운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을의 유래는 슬프다. 장마가 지면 하수 처리 시설이 잘 안된 저지대 이곳까지 한강 물이 들어와 '수색(水色)'이 되었단다. 그 고운 이름이건, 그 이름에 담겨진 슬픈 지리사이건, 이제 이 동네는 '역사'의 한 장을 넘기고 있는 중이다. 2005년 뉴타운 개발에 합류했지만 지지부진했던 수색, 최근 들어 재개발이 활기를 띠며 이주가 개시되고, 철거가 진행중이다. 이제 그 사라질 과거, 수색을 사라져버린 여인 예리와 그녀의 주변을 떠도는 세 명의 남자들을 통해 장율 감독이 기억한다. 




우리와 이방인을 가르는 것이 코스모폴리스(cosmopolis) 서울,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겠느마는, 아이러니하게도 '개발'과 '경제'라는 이름표만 달면 간이라도 담싹 들어내어 줄 거 같은, 그리고 그런 토착민과 달리, 경계인인 장율 감독은 그의 작품을 통해 꾸준히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곳'을 영화로 살려내고 기억한다. 일찌기 2008년 <이리>이래, 다큐였던 <풍경(2013)>, <이방인들;디지털 삼인삼색(2013)>, <경주(2014)>에 이르기까지. 이리와 경주란 지명이 곧 영화 제목이었듯, 영화 속 '그곳'은 그곳에 터를 잡아 살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과 어우러져 한 편의 작품을 이룬다. 아마도 토착민인 우리가 미처 잡아내지 못한, '곳'에 대한 예민한 정서가 경계인 장율의 섬세한 시각 속에 뒤늦은 깨닮음으로 다가온다. 이제 봄날의 꿈처럼 찾아왔다 사라질 <춘몽>도 마찬가지다. 

경계인 장율이 살려낸 물빛 마을 
재개발이 진행될 수색의 한 골목, 거기에 드리워사는 사람들이 있다. 재개발 예정이기에 천정이 무너져도 집주인이 책임지지 않는, 하지만 7,80년대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모던한 양옥집 앞엔 비닐 포장이 생뚱맞게도 '고향 주막'이 덜컥 들어앉아 있다. 그 '주막'의 주모는 중국에 와서 잠시 바람을 핀 결과물로 자신을 낳고 한국으로 도망치듯 들어온,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아버지를 부양하는 젊은 예리(한예리 분)다. 북간도 등 종종 책을 뒤적이고, 영상자료원에 가서 무료 영화를 보며, 몸에 흘러 넘치는 리듬을 타는 예리, 하지만 현실은 자신의 운명을 역학자에게 기대어야 하는 '포장마차'와 '아버지'에 의해 묶여 오도가도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그런 예리 주변을 맴도는 세 사람, 그녀가 들어사는 집주인 아들이라는 어리버리한 간질 환자인 종빈(윤종빈 분), 밀린 월급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탈북자 정법(박정범 분), 한물 간 건달 익준(양익준 분)이 그들이다. 아, 그리고 또 한 명이 있다. 수색 산길을 오프로드식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축구공을 자신의 몸처럼 부리는 소년(이주영 분)까지. 그들은 예리와, 예리의 주막을 빛을 찾아드는 나방처럼 드나든다. 

사라질 수색과 사람들을 향한 헌사이자, 추도사 
흑백의 영화처럼, 그 안에 웅크린 변전소처럼 좀처럼 삶의 환희를 찾을 길 없는 수색의 삶, 그리고 탈북자와, 건달과 찌질한 백수 청년의 어울리지 않은 조합은 때로는 연적으로, 때로는 동지애를 발휘하며, 아버지에 묶여 오도가도 못하는 예리와 함께 그들은 잠시 봄날 꿈같은 시절을 맞본다. 물론 그 봄날의 꿈은, 이제는 봄이란 단어가 무색해진 세월처럼 그랬던 적이 있었는가 싶게 스쳐간다. 마치 이제 사라져 우리의 기억 속에 '수색'이란 단어만이 문명화된 도시 저변에 아르라이 남겨질 기억처럼. 



영화 속 예리가 영화 종반부 주막을 찾아온 '몸도 마음도 건강해 보이는' 남자 앞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나풀거릴 때, 모처럼 입은 그녀의 하얀 치마와 함께, 그녀의 한 마리 나비와 같다. 그리고 곧 그것은 '호접몽'을 떠올린다.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꿈속에서 한 마리 나비가 되어 노닐었는데, 꿈을 깨고 보니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신의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던, 그 나비의 꿈. 영화는 내내 예리의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막판 한 장의 영정 사진으로 남긴 그녀를 보니, 그녀가 잠시 이 세상에 왔다 머물러 간 건지, 수색에 버림받은 이 시대의 세 '아웃사이더'가 잠시 예리라는 '꿈'을 꾼 건지 모호하다. 

꿈은 쓸쓸했지만 따스했고, 이제 꿈에서 깨서 돌아와 색을 찾은 수색에 남겨진 그들의 삶은 비루하다. 하지만 잠시 꿈을 꾼 동안구구절절 그들의 삶을 설명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충분히 인간적이며, 심지어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수색에 살았을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금수저라는 집주인 아들도, 밀린 월급은 받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또 북에 남겨진 사랑하는 가족을 짊어진 탈북자의 삶도, 그리고 위태로운 건달의 삶도. 예리와 함께한 시절은 그저 꿈으로 흘러가고, 수색보다 '상암 디지털 미디어 시티'라는 지명으로 기억되는 도시의 '고향'은 재개발 속에 '수몰'될 예정이다. 잃어버릴 고향에 대한 마지막 헌사이자, 갈 곳없는 아웃사이더를 향한 추모사이다. 
by meditator 2016. 10. 19. 17:23

되돌아 보면 1998년 <정사>로 떠들썩하니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이래, 이재용 감독만큼 그의 작품 세계가 '파란만장'한 감독이 있을까? 세상은 최근 1000만이란 숫자로 기록되지 않은 그의 이름이 낯설지 몰라도, 그의 이름을 따라 작품을 쫓아온 관객이라면 최근 그의 인터뷰 제목처럼, 그의 다음 작품이 더욱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궁금함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삶과 고뇌의 이력으로 그의 다음 여정에 대한 궁금증이다. 마치 투명한 유리창처럼 그의 생각이 온전히 작품으로 드러나는 감독, 그래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이 삶을 나눌 수 있는 감독, 이재용 감독이 2016년 들고 온 작품은 <죽여주는 여자>이다. 


이재용과 그의 그녀들
이재용 감독 영화에서 '여성'은 대부분 영화의 중심에 놓여있곤 한다. 98년 <정사>는 2016년에도 '불륜'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에서 일찌기 '바람난 유부녀 서현(이미숙 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 적나라함은 2003년 <조선 남녀 상열지사>에서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숙부인(전도연 분)에 이르르면 극에 달한다. 세련된 미장센으로 가두어지지 않는 여성의 욕망을 통해, 닫힌 사회에 대한 냉소를 퍼부었던 이재용 감독, 하지만 그의 다음 행보는 전혀 예상치 못한 '도발'과 '파격'이란 수식어가 달리는 <다세포 소녀>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그가 관심을 보인 대상은 여성, 단지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던 '부인'에서, 상식 밖의 10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세포 소녀>는 대세 감독이었던 이재용을 아웃사이더로 만들었고, 이후 그의 행보는 <다세포 소녀>의 서사 못지 않게 파격적으로 이어진다. 



2009년 <여배우들>은 말이 고현정, 김민희, 최지우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이름을 올렸을 뿐이지, 막상 그녀들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은 다큐인지, 픽션인지 모호한 영화를 통해 이재용에 대한 혼돈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그 혼돈을 통해 그 어떤 스타 다큐보다도 진솔하게 인간으로서 여배우들의 삶을 통찰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이재용 감독은 <감독이 미쳤어요>란 파격적 실험을 통해 보여주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를 넘나든다. 과연 이 감독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시점, 뜻밖에도 2015년 그가 들고 온 작품은 가장 평범한 극영화 <두근두근 내인생>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의 여성에 대한 천착은 멈추질 않았으니, 부인과 10대 소녀, 여배우를 경유한 그가 관심을 준 것은 자기보다 늙어가는 자식을 둔 엄마였다. 그렇게 '죽음'과 '엄마',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던 그가, 2016년 그 '고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껴안은 것은 '죽음 앞에 선 여성'이다. 

그렇게 <죽여주는 여자>는 삼팔 따라지로 의지가지없이 남한으로 흘러들어 공장 직공 등 안해본 일 없이 하다가, 돈이 된다 하여 '양공주'를 하다 이젠 나이들어 먹고 살기 위해 '박카스 아줌마'가 된 소영(윤여정 분)의 이야기이다. 즉 이재용의 여성에 대한 서사가 이어진 것은 여성성에의 천착이라기 보다는, 조선이래 이 한국 사회에서 제도화된 도덕이 가장 강고하게 요구되는 대상이자, 그러기에 가장 직접적인 희생자였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절녀, '가족'이 최우선이 된 산업사회, 그리고 고도의 산업 사회에서 그 꽃이 된 여배우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고비에서 만나게 된 '박카스 아줌마'는 우리 현대사가 토해놓은 가장 적나라한 결과물이다. 

현대사의 마돈나, 소영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먹고사는 것'이 보상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몸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온 소영,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모성의 상실과 여전히 자신의 몸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막다른 삶이다. 



영화는 소영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그 이전 영화에서 이재용이 실험했던 바 '다큐'와 같은 방식으로 그녀가 깃들어 사는 도시를 지그시 바라본다. 영화의 시선은 천천히 여전히 여성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녀가 신은 높은 굽의 신발로 걷는 느릿한 걸음을 따라 도시를 경유한다. 그녀의 일터인 탑골 공원 등과 그녀의 주거지인 이태원 등, 불야성을 이룬 메가 폴리스 서울이 숨긴, 그림자 서울의 모습을. 영화 속 서울은 즐비한 도심의 빌딩 대신, 노인네들이 하릴없이 죽치고 있는 공원과 스산한 등산로, 이방인이 낯설지 않은 거리와 속살같은 골목을 비춘다. 그리고 도시는 재개발을 거쳐 번쩍번쩍 현대화되지만, 재개발되는 과정에서 스러져간 구도심처럼 변화되는 세상에서 재개발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먹고 살기 위해 흑인 병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도 안된 아이를 미국으로 입양보낸 소영, 하지만 사회가 거세한 그녀의 모성은 쉬이 잠재워지지 않는다. 나이든 몸을 돌보기 위해 호구지책으로 '박카스'를 들고 거리에 나서는 그녀이지만, 병원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코피노 민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의사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가 내뱉은 소년에게서 자신이 젊은 시절 보살피지 못한 채 입양시켜버린 아들을 떠올리며 부등켜안은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만큼이나 도시에 깃들어 살지만 도시가 돌보지 않은 노년의 인생을 구제(?)한다. 이방의 어린 소년과 죽음을 앞둔 보살펴줄 이 없는 노년들, 현대화된 도시가 품지 않고 뱉어버린 '생'을 모성을 잃고도 모성을 놓치지 않은 소영을 통해 보살핀다. 그녀는 '죽여주는 박카스 아줌마'에서 도시가 쓰레기치우듯 내뱉어버릴 노년의 삶을 '구원해 주는' 마지막 보호자가 된다. 도시의 마돈나처럼. 



하지만 '성모'가 된 마돈나와 달리, 도시의 마돈나의 삶은 가차없다. 늙은 그녀에게 사회가 베풀어 준 '양로원'은 차가운 감옥, 그리고 찾아가는 이 없는 무연고의 죽음이다. 그녀가 잡혀갈 때 '언니'라며 울부짖던 동거인들의 슬픔이 무색하게, 영화는 그 흔한 '신파'의 미련마저 떨친 채 끝까지 냉철함을 잊지 않고, 박카스 아줌마로써 소영의 삶을 직시하며 여운을 짙게 남긴다. 

by meditator 2016. 10. 14. 20:05

모든 일본 영화가 그렇다고 '보편적'으로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고레에다 다카에즈 감독의 <태풍이 지나가고>라던가,  다케 마사하루 감독의 <백엔의 사랑>이 가지는 공통적 화두는 '변화하는 세상'의 '자존'이다. 이제 색다른 '멜로'의 장르로 찾아온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립반윙클의 신부>도 그 일련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은 그 어떤 일본의 감독보다 압도적이다. 그 이유는 첫사랑을 겪은 성인이라면 한번쯤은 보거나 들어봤을 '오겡끼데스까?'라는 그 한 마디로 설명되는 <러브레터>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련한 첫사랑의 전설로 회자되는 <러브레터>,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사실 그리 아름답기만한 내용은 아니다. 애인이 죽은 지 2년이 다 되도록 그를 잊지못한 히로코, 그 여자가 애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후지이 이츠키를 만나며 순애보였던 사랑의 뒷면을 알게되고 비로소 사랑을 마무리지는 '이별사'이자, 담담한 인생의 서사이다. 그런 어찌보면 쓸쓸한 삶의 서사가 아련하고 애틋한 이와이 슌지의 정서와 만나며 잊지못할 첫사랑의 명작이 된 것이다.

그렇듯 <립반윙클>의 신부도 한 여성의 수난사, 그리고 혹은 사랑이란 서사가 역시나 이와이 슌지의 정서를 통해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어디에?
첫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편지'라는 고전적 매개체를 등장시켰던 <러브레터>처럼 <립반윙클의 신부>의 매개체가 된 것은 'sns' 플래닛이다. 
임시교사로 재직중인 미나가와 나나미 (구로키 하루}가 의지하는 것은 그녀의 플래닛과 플래닛의 이웃들이다. 남편을 맞선사이트에서 고르고 그와 거리에서 만나 서로의 조건에 맞추어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가는 과정, 그 과정 속의 혼란과 의아심을 남편대신 플래닛의 이웃과 소통한다. 심지어 그런 그녀를 의심하는 남편에 플래닛을 없애는 대신 새 계정을 만들며 .

하지만 그럴듯한 직업도 여의치않듯이, 그럴듯한 결혼 생활도 그녀에겐 역시나 여의치않다. 플래닛 친구를 빙자한 마스유키(아야노 고)의 사업적 이용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거짓'으로 채워진 그녀와 남편의 결혼 때문이었는지, 결국 그녀는 한밤중에 낯모를 거리를 헤매는 처지에 이른다. 영화는 결국 거리에 내던져진 나나미의 처지를 통해 '가족'과 '결혼'이라는 구 제도, 그리고 '플래닛'이라는 새로운 문물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쉬이 확립할 수 없는 오늘날의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면 아마도 <립반윙클의 신부>는 그저 현대 사회의 적나라한 비판서로 마무리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감독임에랴.



행복은 어디에나 있어
그렇게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확인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다시 관객이 보기엔 가장 믿지못할 인물인 마스유키에게 전화를 하는 어리석은 행보를 걷는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아르바이트 소개, 자신의 결혼을 파멸로 빠뜨렸던 그 결혼식장 알바 자리에 앉아 천진난만하게 웃던 그녀에게 찾아온 거액의 아르바이트, 그리고 거기서 다시 만난 사로나카 마시로(코코 분).

첫 번 째 결혼이 파탄나는 과정에서 가장 답답한 것은 여주인공 나나미의 비주도성이다. 결혼을 하는 과정도, 그것이 파탄나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끌려다닌다. 심지어 홀로 나와 사는 삶에서 조차도 그리 주체적이지 않아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영화 속에서 했던 유일한 주체적 언어는 '같이 죽겠어요'다. 그녀가 행복한 웃음을 띤 결혼식은 마시로와 함께 한 장난같은 결혼 코스프레이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한 한 마디의 언어가. 천진난만하게 행복해하던 결혼식이 그녀를 살린다. 그녀와 그녀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심지어 그녀와 함께 죽으려던 마시로도, 늘 그녀를 이용해 먹기만 하던 마스유키도 그녀의 천진한 교감 앞에 손을 든다. 사랑이든, 연민이든. 



그녀를 이용하려했던 사람들, 그녀 앞에서 끝까지 진실하지 못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삶을 움켜쥔 그녀에게 그건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 나나미를 만났던 마츠유키는 초콜릿을 건네주며 당신의 마음이 문제라고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sns 시대이건 구시대의 유물같은 결혼이건. 동성애의 결혼이건, 그게 문제가 아닐지도. 연인의 숨은 첫사랑을 찾아내며 비로소 자신의 연애사를 직시하고 정리할 수 있었던 <러브레터>의 히로코처럼, 나나미도 연인의 죽음을 겪고 담담하게 자신을 마주본다. 동화같은 레스토랑에서 살아남은 건 립반윙클 대신 그의 아내 나나미다. 

나가지마 미호가 있었기에 <러브레터>의 감성이 가능했듯, <립반윙클의 신부>는 때로는 답답하고, 하지만 그 천치같은 순수함으로 결국 자신을 살린 구로키 하루란 배우의 존재감에 의지한다. 거기에 때로는 sns 시대의 삶을 감각적으로, 혹은 몽환적으로 그려낸 이와이 슌지 감독의 감성이 더해져 신선한 멜로 한 편이 탄생되었다. 멜로라기엔 어패가 있어보이는, 하지만 본의 아니게 멜로가 되어버린 나나미의 순애보를 통해 시대와 사회라는 조건 속에서 사람과 사랑의 문제를 짚어보게된다.
by meditator 2016. 10. 6. 20:27

9월 29일 개봉한 영화 <다가오는 것들> 이 영화의 원제는 해석한 그대로 Things to come, 그리고  L'avenir이다. 이 중 avenir 은 영어로 future 즉 미래이다. 이 희망 가득할 것같은 단어로 이름표를 붙인 영화, 하지만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맞이할 미래는 그녀를 원치않는 일상의 파괴로 밀어넣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건 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의 장황한 철학적 담론이다. 68세대로 한때는 소련까지 가면서 급진적 흐름에 몸을 맡겼던 나탈리는 이제 파리의 한 고등학교의 철학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전히 '급진적'인 내용의 책을 읽으며 출근하는 그녀를 막아서는 건 경찰이 아니라, 노동자와 학생의 권리를 내세우며 교문을 봉쇄한 '급진적 주장'을 하는 학생들이다. 나탈리는 그 학생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대신 선생님으로 수업권을 주장하며 막아선 학생들을 제치고, 심지어 본의아니게 시위대에 발이 묶인 학생들을 설전을 하며 시위대로부터 '구출'해오기까지 한다. 그런가하면 급진적인 제자를 아들의 자조적인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편애하고, 여전히 철학 교사, 혹은 저자로서, 그리고 남편과의 대화 속 그녀는 '레디칼radical'한 진보적 지식인이다. 이런 자신의 삶을 '원칙'과 '행동'이 일치한 일관된 삶이라 자부하며. 

그냥 모르는 척하며 살 순 없었어? 
이제는 그녀가 쓴 교재의 재출간조차 여의치않은 한 물간 철학 교사,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사상이 정도를 걷고 있다 자부심을 느끼는 그녀에게 삶은 '자존'을 허락치 않는다. 25년을 서로의 사상을 배척하면서도 '부부'로서의 사랑으로 엮어져 있다 생각했던 남편은 그녀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그리고 이제 그 여자와 살겠다 선언한다. 한밤중에도 전화를 걸며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며 그녀에게 의지했던 홀어머니는 억지로 요양원에 모시자 그 삶의 일탈을 견디지 못해 그녀의 곁을 떠난다. 표지를 바꾸는 것에도 허락할까말까 했었던 그녀의 철학 교재는 상업적 승산이 없어 재간 계획 자체가 무산된다. 늘 그녀를 종종걸음치게 만들었던 그녀의 삶이 이제 그녀의 곁을 떠나며 그녀를 공포스런 '미래'로 밀어넣는다. 



남편의 외도 고백에 대한 나탈리의 반응은 '왜 그걸 말해? 그냥 모르는 척하며 살 순없었어?'이다. 이 말의 뉘앙스로 보건대, 아마도 아내 나탈리는 굳이 남편이 '고백'이 아니라도 그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녀들 앞에서 이들 부부의 대화는 신랄한 사상 투쟁 같아 보이지만, 그 '말'의 형식을 벗겨놓고 보면, '권태기'조차 지나버려 '애'보다는 '증'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한 부부란 이름의 '남의 편'들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편의 외도 고백에 그녀는 25년을 이리 살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줄 알았다며 배신감을 피력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아쉬워하는 건, 남편과의 별거로 인해 그가 가져가 버린 자신의 손때묻은 책과, 역시나 그녀의 손길이 닿은 여름 휴가지의 별장이다. 즉 '양심적 지식인'이라 자부했던 그녀의 일상들은 한꺼풀 벗겨놓고 보니 누군가의 아내, 자녀 그리고 풍족한 중산층의 안온한 삶이었을 뿐이다. 

젊은이에게 '미래'는 '꿈'과 함께 찾아오는 '희망'이지만, 굳어져가는 일상에 자족하며 사는 나이듦의 '미래'는 악몽과도 같다. 그녀는 이제 꿈을 희망이라 말하지 않고, 욕망의 환타지라 정의 내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외도를 고백하는 남편에게 왜 나를 배신했냐 대신, 왜 그런 말을 하냐 반문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같던 결혼 생활은 사랑하는 남편에 의해, 올곧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사상적 삶은 애틋하게 여겼던 남제자에 의해 산산조각난다. 

버리면 채워지는 삶 
영화 속 나탈리는 어머니로 인한 울음 외에 두 번을 운다. 남편과의 이별? 혹은 자신의 손때묻은 별장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밤, 홀로 운다. 그리고 남편의 차를 타고 가는 나탈리의 눈빛은 그녀에게 닥친, '미래'란 이름의 상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실천적 삶이었다는 자신에 대해, 서명 따위나 하는게 무슨 실천이냐는 제자의 냉혹한 평가가 내려진 그 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그 제자와 애인의 흥건한 물놀이를 목격한 그 밤 그녀는 서럽게 오열한다. 그 서럽게 오열하는 그녀의 품에는 알레르기때문에 맡기 싫다는 어머니의 고양이 한 마리뿐이다. 마흔 넘은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며 스스로 말했던 그녀가 화려한 원색의 드레스로, 나이든 몸을 한껏 드러내었던 그 곳에서, 어쩌면 그 일말의 가능성마저 잃은 양 서럽게 운다. 

하지만 그렇게 잃어버리고 놓치고 버려지며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아니 삶도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남편의 별장에서 몰래 울고, 다시 남제자의 시골 집에서 다시 한번 서럽게 고양이를 끌어안고 울었던, 하지만 의연했던 그녀는 버릴 것은 버리고, 그 버린 자리 시간을 방패삼아 미래를 메꿔간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그 서럽게 오열하며 이별했던 그 제자의 시골집에 다시 방문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어머니의 부재 이후 어디를 가든 낑낑거리며 끌고 다녔던 검은 고양이를 방면하기 위해. 그리고 관객에게 물음표 혹은 느낌표를 선사하는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을 역시나 가차없이 '방면'한다. 잠시 후에 찾아올 손주와 자녀들의 식사 준비를 서두르며. 

아마도 나탈리 또래의 우리네 어머니를 그린 영화라면 어땠을까? 어머니가 남긴 고양이를 애지중기 키우며, 은근슬쩍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선물을 들고 찾아든 남편에게 궁시렁거리며 모처럼 온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가족애'와 '모성애'로 마무리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탈리는 늘 어머니의 집에서 움직이지 않아 들기조차 버거웠던, 하지만 시골집에 가자 그 하룻밤에 야생의 본능이 살아난 고양이를 자유로울 수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준다. 그리고 그 본능이 살아난 고양이처럼 하룻밤을 보낸듯한(?) 모습으로 서둘러 돌아온 집에서, 은근슬쩍 끼어든 남편을 거침없이 돌려보낸다. 대신 자녀들과 식사를 하며, 새로 생긴 손주를 달랜다. 그녀에게 닥쳤던 '미래'란 이름의 원치않는 자유는 이제 그녀의 다른 '현재'가 되어 그녀에게 새롭게 안착한다. 그것이 이자벨 위페르의 생생한 연기로 구현된 삶의 연속성이다.  

영화는 지난 2005년 출간된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의 여성편같다. 68세대로 진보적인 세대를 자부했던 남자가 세상이란 물결에 휩쓸려가던 이야기가, 이제 2016년 나이듦에 떠밀려 버린 68세대 여성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굳이 프랑스나, 68세대라는 수식어를 떼고 보면, 한때 '개혁'의 흐름에 앞장섰던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모르게(?) 나이들고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이른바 386으로 상징되었던 이들의 자화상을 대신 그려주는 듯하다. 아니 뭐 굳이 한때 진보란 수식어를 떼어놓고, 그저 나이듦이란 주제만 놓고 봐도 감상 요건은 충분하다. 아쉽다면 현재의 우리가 반추할 이런 내용들이 외국 영화를 통해, 그것도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것뿐. 
by meditator 2016. 10. 2. 12:00

2010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그만의 '환타지 월드'를 펼쳐보였던 팀 버튼은 그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 연출을 제임스 보빈 감독에게 양보한 대신,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을 들고 돌아왔다. 과연 '앨리스'와 '모자 장수'를 비롯한 그녀의 친구들보다 더한 매력이 무엇이었기에, 무엇보다 조디뎁이 등장하지 않고도 '기괴한 팀버튼월드'를 구현할 소재가 무엇이었길래 팀 버튼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 답은 '이상한 아이들'이 등장하는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시간' 속에 숨은 이상한 아이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미스 페레그린', 이들의 신묘한 조합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팀버튼스러움'을 담뿍 드러내고 있으니까. 


타임 루프, 인내심을 요하는 여정 
하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고 이들 신묘한 미스 페레그린과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아직 어린 나이이지만 또래들과 어울리는 대신 마트에서 일하며 사는 제이크(아사 버터필드 분), 두 눈을 잃은 채 죽은 할아버지로 인해 상심에 빠진다. 그 치료를 위해 찾은 할아버지가 알려준 섬에서 시간의 문을 통해 어릴 적 할아버지가 들려준 동화 속 주인공들을 만나게 된다. 



일상의 삶에서 '존중'받지 못한 삶을 살던 어린 소년이 뜻밖에도 자신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 들어간 곳에서 신비로운 존재들을 만나게 되는 이 장면 매우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이모네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살던 어린 소년이 뜻밖의 사건으로 자신이 인간 '머글'이 아니라, 마법사라는 것을 알게되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도입부와 유사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난하거나, 일상의 삶에 도피한 주인공이 '환타지'월드에 빠져든다는 점에서는 <챨리와 초콜릿 공장>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비슷하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돌연변이들이 그들의 보호자를 만나 함께 어울려 지낸다는 면에서는 <엑스맨>의 설정과도 비슷하다. 착한 돌연변이와 그렇지 못한 돌연변이의 충돌이라는 지점에서는 더더욱.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을 비롯한 주인공 주변의 캐릭터들이 한데 힘을 모아, 여기서 중요한 건 물론 그들의 비범한 능력이다. 그 남다른 능력으로 '악'을 징벌한다는 지점에서는 마블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물의 얼개를 고스란히 이어간다. 랜섬 릭스의 원작 소설을 <엑스 맨;퍼스트 클래스>와 <킹스맨>의 제인 골드만이 '각본'을 맡았다니, 굳이 다른게 이상할 지경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어디서 본듯한 슈퍼 히어로물의 얼개들이 팀 버튼이란 감독을 만나면 그 색채가 달라진다. 제이크가 '타임 루프'에 들어섬과 동시에 팀 버튼월드도 만개하기 시작한다. 대번에 집채만한 당근을 자라게 하는 피오나(조지아 펨버튼 분)도, 그 피오나가 키운 거대한 당근을 번쩍 들어올리는 브론윈(픽시 데이비스 분)도, 투명인간 말라드(카메룬 킹 분)도, 공기보다 가벼운 엠마 블룸(엘라 퍼넬 분)도, 두 손만으로 찻물을 끓여내는 올리브(로렌 맥크로스티 분), 벌을 키우는 소년(마일로 파커 분)도, 생명을 불어넣는 에녹(핀레이 맥밀란 분)도 팀 버튼의 세계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 인형이 살아 칼춤을 추고, 바닷 속에 수장되어있던 배가 엠마의 날숨과 올리브의 화력으로 다시 항해를 시작하는 장면은 팀버튼다웠다. 무엇보다 <유령 신부>이래 팀버튼의 시그니처였던 해골이 다시 에녹의 도움으로 다시 한번 활약을 보이는 모습은 반갑기까지 했다. 

뻔한 히어로물도 팀버튼을 만나면
영화는 해리 포터처럼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몰랐거나, 혹은 알았다 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평범한 제이크가, 아이들을 노리는 할로게스트 사냥꾼이라는 자신의 숨겨진 돌연변이 능력을 수용하고, 리더가 되어가는 성장물의 형태를 띤다. 이를 위해 극 초반 제이크의 캐릭터에 집중하고, 그에 집중하는 반면, 이미 '특이한' 이상한 아이들의 캐릭터는 그저 소개만으로도 충분한 깜짝쇼가 될 것이란 자부심을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된 제이크가 페레그린의 부재 이후 아이들과 힘을 합쳐 혹은 심지어 그들의 리더인 양 '사냥꾼'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하는 과정의 '개연성'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툭 건너 뛰어버린다. 눈알을 쌓아놓고 서로 마음껏 드시라며 기괴함을 설파하고, 페레그린까지 잡아가며 기세등등하던 하얀 눈의 바론(샤무엘 잭슨 분)과 할로게스트들은 아이들의 연합 작전 속에 무기력하게 희화화되어 처단된다. 설득력대신 초반 설명식으로 나열되었던 능력을 한편의 게임처럼 진기명기식으로 보여준 작전으로 '이상한 아이들'의 소임을 설명한다. 





영화는 팀버튼스러움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여전히 건재한 팀버튼스러움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어쩐지 익숙한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을 나선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 여전히 영화 곳곳에서 팀버튼스러운 색채는 진한데, 어쩐지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도 그건, 원작을 소화하는 팀버튼의 방식이거나, 채 소화를 해내지 못하는 미진함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챨리와 초콜릿 공장>은 로얄드 달의 동화이다. 영원한 유년에 대한 찬가와도 같은 이 이야기가, 또 다른 엉뚱한 소년같은 팀버튼을 만나, 원작 이상의 분위기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에 반해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그 보다는 좀 더 복잡한 성장기의 소설이다. 물론 원작 자체가 이미 슈퍼 히어로물의 성격을 띠지만 초등용 동화와는 다른 '중층적 서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보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퍼즐같은 소설이라지만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동화로 편역된 작품이니, <미스 페레그린과 아이들>이 가는 낯선 행보와는 비교할 바가 다르다. 그래서일까, 감독은 제이크가 타임 루프에 들어서기까지의 개연성에 집중한다. 또한 타임 루프의 한계와 선택에 문제를 엠마의 입을 통해 구구히 설명한다. 그저 툭 떨어지면 다 해결되었던 '이상한 나라'대신 매일을 되풀이 하는, 전세계에 숨겨져 있다는 타임 루프라는 새로운 소재를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하려다 보니 '설명'이 늘어진다. 반면에 제이크나 아이들의 반전이나 성장은 성장 소설이 천착하는 그 고민의 과정을 축약하고 앞서나간다. 제목에 앞선 미스 페레그린이 생각보다 존재감이 적었던 반면, 소심하던 제이크, 그리고 페레그린의 보호 속에서만 살던 아이들이 영화 후반 속시원한 활약을 보이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어쩐지 뜬금없다는 생각이 뒤미처 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언제나 팀버튼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개연성은 에녹의 손길 한번에 칼출음 추는 해골처럼, 듣고보도못한 신묘한 캐릭터가 아니었나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캐릭터와 신기한 세계가 상대적으로 내적 개연성이 필요한 성장 소설과의 충돌로인해 어쩌지 못한 빈틈이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이 가진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 또 새로운 신기하고 희한한 팀버튼 표 이상한 세계에 만족스럽다면 영화가 만족스러울 것이고, 개연성있는 서사를 기대한다면 어쩐지 완급 조절이 안된 아쉬움이 남는, 그런 이중적 감상을 영화는 남긴다.과연 캐릭터의 소개와도 같았던 이 영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거울나라처럼 시리즈의 서막이 될지, 단편이 될지는 이 영화의 성과가 답해줄 것이다. 
  

그런 서사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해, 평범했던 소년의 성장, 전쟁 중에 보호받지 못하는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각성'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챨리와 초콜릿 공장>이래 여전히 팀버튼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를 '환타지'를 통해 풀어간다. 무능력한 아버지대신 일을 하느라 친구 하나도 사귀지 못하던 소년은 이제 '환타지' 세게에서 아이들의 리더가 되고, 할아버지를 구하고, 나쁜 괴물들을 물리치는 슈퍼 히어로로 거듭난다. 그런가 하면 미스 페레그린에 의해 일분 일초까지 과잉 보호(?)받던 아이들은 이제 자기 자신은 물론, 자신들의 기괴한 능력으로 죽을 위기에 몰린 미스 페레그린과 자신들의 타임루프까지 구하는 히어로집단으로 거듭난다. 마치 '똥' 이야기라면 그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재밌어 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에게는 기괴함으로 보일 페레그린네 아이들의 신기한 능력은 그저 엑스맨급의 흥미로운 환타지일 뿐이지 않을까. 여전한 팀버튼스러움이 반갑고, 아쉬웠던 페레그린네 아이들의 활약상이다. 


by meditator 2016. 9. 30. 07:12

가장 핫한 두 남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제시 아이젠버그가 로맨틱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홍보되는 <카페 소사이어티>는 81세의 거장 우디 앨런 감독의 74번째 영화이다. 한동안 파리(미드나잇 인 파리)로, 로마(로마 위드 러브)로, 바르셀로나(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로 외유했던 감독이 그의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와 만든 영화이자, 그의 또 다른 정서적 고향인 1930년대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젊은 두 연인의 사랑을 배경으로, 급격하게 발전하던 미국의 1930년대를 배경으로 노장 감독의 '인생관'이 관조적으로 드러난 영화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답게 영화는 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덕분에 관객은 1930년대라는 시간, 공간적 격차에 편안하게 접근해 들어간다. 동시에 이는 '냉소적' 혹은 '블랙 코미디'처럼 전개되는 바비(제시 아이젠버그 분)와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의 사랑 이야기에 타자로서의 시각을 정립하게 만든다. 

뉴욕에서 헐리웃으로 상경(?)한 청년
헐리웃에서 제일 잘 나가는 에이전시 대표 필(스티브 카렐 분)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목소리도 알아차리기 힘든 그 전화의 주인공은 뉴욕의 누이에게 걸려온 것, 그 내용은 다름아닌 조카 바비가 헐리웃에 간다하니 이른바 일자리 청탁을 한 것이다. 그 누이의 전화에 이어 필을 찾아온 바비, 하지만 그가 정작 필을 만나게 된 건 몇 주의 시간이 흐른 후, 그래도 조카라니 필은 직원 보니를 시켜 헐리웃 구경을 시켜주고, 잔심부름부터 일거리를 준다. 

오늘날의 뉴욕이라는 도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1930년대의 뉴욕에서 헐리웃으로 상경(?)한 청년, 그리고 그런 청년을 '우리가 남이가?'이라는 이유만으로 '측근'으로 들이는 삼촌, 이 촌스러운 관계로 풀어지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바로 19030년대를 상징한다. 이른바 '황금시대'라고 불리워졌던 1930년대의 헐리웃은 아직 그런 '꿈'을 꾸는 것이 가능했던 시대라고 감독은 바비의 '홀홀단신 상경'을 들어 설명하는 듯하다. 



바비가 살았던 뉴욕은 어떤 곳이었을까? 보석상을 하지만 술독에 빠져살며 어머니에게 무능력의 상징으로 구박받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직업이 전망이 보이지 않자, 큰아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나선다. 당시 뉴욕에서 그가 선택한 일은 동네 투전판에서 부터 해결사, 살인 청부까지, 그렇게 스스로 몸집을 불려나간다. 그런 아버지나 형의 삶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바비는 당시 떠오르는 꿈의 도시 헐리웃을 향해 자신의 꿈을 일군다. 

하지만 정작 헐리웃에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헐리웃이라는 거대한 '꿈'의 도시가 아니라, 보니라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한때 영화배우를 꿈꿨다지만, 일찌기 그 허상을 깨닫고 현실에 적응했다는 그녀, 재즈를 좋아하고, 헐리웃을 구경시켜주지만, 그 '황금의 문화'의 천박성을 비판하는 그녀에게 바비는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인생이 늘 그렇듯, 보니를 좋아했던 사람은 바비만이 아니었으니,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어 그를 불러낸 삼촌 필이 바로 바비의 연적이었던 것이다. 이미 필과 오랜 시간 만나온 보니, 하지만 여전히 필은 '이혼'에 주저하고, 그런 가운데 바비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어필한다. 야망을 품고 상경한 헐리웃 하지만 바비가 만난 건 꿈의 도시가 아니라, 천박한 욕망의 도시, 그곳에 시들해진 바비는 보니와 함께 고향 뉴욕으로 돌아가 누나처럼 소박한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데, 그런 그의 꿈을 알게된 필과, 필과 바비 사이에서 갈짓자를 그린 보니의 어긋난 선택이 그를 홀로 뉴욕으로 향하게 한다. 

헐리웃에서 필을 도왔던 바비는 이번에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클럽을 인수하여 뒷골목에서 나온 형을 돕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환멸'을 느꼈던 헐리웃의 경험이 클럽을 리뉴얼하는 촉매제가 되어 그와 형의 클럽은 뉴욕 제일의 사교 클럽 '카페 소사이어티'가 되었다. 더불어 보니는 아니지만 또 다른 베로니카와 가정도 꾸리고, 잠시 들른 보니와 못다이룬 로맨스도 잠시 즐기고, 비록 형은 사형을 당하지만 날마다 바비의 클럽은 승승장구하지만, 새해를 맏이하는 바비의 눈은 '회한'에 잠긴다. 

꿈은 꿈일뿐
영화는 1930년대를 살아낸 한 청년의 입지전전 성공 스토리이자, 개츠비처럼 실패한 연애사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바비는 물론, 그의 인생사 행간에서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마치 일장춘몽같은 삶이다.

바비가 찾아간 필, 그는 헐리웃 최고의 에이전시 대표로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정작 사랑과 가정 앞에 소심해서 기회를 놓쳐버린 인생이다. 보니를 아내로 얻었으니 되지 않았냐고, 그가 사랑했던 보니와, 그가 결혼했던 보니는 동일인물이지만, 바비를 알고 난 이후의 보니는 더 이상 예전에 그에게 매료된 그녀가 아니다. 그녀는 사랑 대신, 앞날이 불투명한 사랑꾼 바비와, 안정된 부를 이룬 필 사이에서 '황금'을 선택한 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바비 앞에서 드러난 그녀의 두 얼굴이 그걸 증명한다. 그저 양 다리의 나쁜 년이라기엔 마지막 장면 보니의 눈빛이 보여준 공허함은 인생의 댓가를 처연하게 설명해 낸다.



바비의 형은 어떤가, 일찌기 청소년 시절 거리에서 주먹, 그리고 힘으로, 세력으로, 불법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이제 동생과 함께 클럽 소사이어티를 통해 비로소 그림자의 세계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그간 그가 저지른 범죄가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런 형에 비해 누나는 낫다고? 이웃집의 소음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편두통이 이웃집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 장면은, 우디 앨런이 그려낸 미국 중산층의 잔인한 전사다. 자신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 암흑가의 동생과 어떤 결과가 될 지 알면서도 넌즈시 손을 잡는, 그리고 시치미 뚝 떼는 그 중산층의 속물성, 혹은 대담성을 우디 앨런은 놓치지 않는다. 형의 죽음 앞에 무기력한 유태교와 카톨릭이라는 종교의 아이러니는 또 어떻고. 그저 꿈을 꾸었던 청년이 그가 혐오해 마지 않았던 방법으로 부를 이루고, 사랑을 잃고, 그럼에도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어쩌면 바로 미국이 살아낸 모습이기도 하다. 

번창하는 자본주의 사회 미국, 황금시대의 문화를 구가하는 1930년대의 미국에서 영화 속 그들은 '운이 좋아' 모두들 그 번창과 부흥의 파도에 올라타 넘실거린다. 하지만, 들여다 보면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공허한 바비와 보니의 눈빛처럼 그들은 가지되 가진 것이 없다. 꿈을 꾸었지만, 꿈은 꿈일뿐이었다. 현실은 휘황하되, 공허하다. 81세 뉴욕으로 돌아온 노장이 짚은 어메리칸 드림이다.


by meditator 2016. 9. 23. 17:44

이렇다할 경쟁작이 없었던 추석 연휴, 9월 7일 개봉한 영화 <밀정>은 순조롭게 600만(의 고지를 넘겼다. 그리고 이 여세라면 역시나 당분간 흥행 호조를 이어갈 듯하다. 하지만 흥행 호조와 다르게 <밀정>을 보고 난 소감들은 엇갈린다. 충분히 감동적이다부터, 지루했다까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민이 절절히 다가왔다에서 상투적이다까지. 어쩌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다양한 결의 생각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기에 <밀정>은 볼만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다양한 생각들 속에 몇 가지 질문을 더해보고자 한다. 




올해 영화를 개봉한 <아가씨>의 박찬욱 감독, <덕혜옹주>의 허진호 감독, 그리고 <밀정>의 김지운 감독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2000년대 화려한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감독들이다. 그리고 그간 헐리웃이나 중국 등에서 작품을 하는 등 국내 활동이 뜸했던 감독들이기도 하다. 이 감독들이 공교롭게도 2016년 동시에 역시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신의 작품을 들고 '고국'을 찾아왔다. 그런데 역시나 공교롭게도 모두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다. <아가씨>야 장르나, 주제 면에서 다른 두 작품들과 차별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덕혜옹주>나, <밀정>은 그 주제면에서 일맥상통하게 '민족주의'의 계열에 놓여있다. 이 감독들의 영화에서 '악'은 '일제시대'라는 배경으로 너무도 선명하다. 성도착적이거나 파렴치하거나 사이코패스적 친일파나, 교묘하거나 잔인한 일본군이다. 최근 '건국절' 논란과 함께 일제 시대에 대한 왜곡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는 즈음에서, 이러한 분명한 일제를 배경으로 한 '악'은 주목받고 대중의 공분을 얻기에 충분하다. 의도하건, 의도치 않았건 박평식 평론가의 정의처럼, 2016년 영화계에 '민족주의'라는 트렌드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명량>을 시작으로, <국제시장>, 그리고 2015년 <베테랑>과 <내부자들>로 잠시 현실로 돌아왔던 영화계는 2016년들어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그리고 <밀정>까지 조선시대에서부터, 6.25를 거쳐 일제시대까지, 일관된 주제 의식을 가지고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거기에 모처럼 돌아온 중견 감독들이 그 흐름의 불을 꾸준히 지펴간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삼시세끼>의 차승원을 앞세워 역시나 '민족'이라는 화두를 내세운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부진을 보면, '민족주의'라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트렌드에 한 발 거치고 있다는 지점을 피해갈 순 없는 것이다. 

황옥, 그리고 왜 이정출
<밀정>의 첫 장면은 미륵반가상을 들고 친일파를 찾아간 김장옥(박휘순 분)이 그의 밀고로 인해 일본 경찰에 쫓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결국 일본 경찰에 포위된 김장옥, 그는 포위된 상황에서 총에 맞은 자신의 발가락을 절단한다. 이 '뜬금없는' 발가락 절단 장면에 대한 의문과 호불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한 눈밝은 관객이 말한,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삶을 생각한다. 죽겠다는 행위 대신 삶과 자신의 의지에 대한 결단으로 발가락을 잘랐을 것이다라는 해석이 우문현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김장옥의 결단, 혹은 의지는 하지만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채, 그 죽음을 말리려고 했던 주인공 이정출에게 '서사'의 바톤을 넘겨준다. 한때 임시정부에서 김장옥과 호형호제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이정출, 하지만 이제 그는 일본의 녹을 받으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본 경찰이다. 그에게 일본 경찰은 정채산을 비롯한 김우진 등의 의열단 체포의 명령이 떨어지고, 동시에 그런 그에게 김우진이 접근한다. 



<밀정>은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송강호가 연기하는 이정출만이 도드라진 부조와 같은 작품이다. 몇 장면 등장하지 않는 정채산(이병헌 분)이 존재감을 빛내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후인물'일 뿐이다. 일본 경찰이지만 한때 동지였던 김장옥을 살리려고 애썼던 이정출,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었던 일본 경찰과, 이제 그 일본 경찰의 모호한 태도 속에서 새롭게 자신을 알아봐주는 의열단 사이에서 인간적으로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결국 영웅적 결단을 내리는 이정출의 일대기와도 같은 영화이다. 

그렇게 영화가 일제의 밀정이었으나 결국 의열단의 실패할 뻔했던 의거를 실행에 옮긴 이정출에 집중하는 반면, 그와 반대의 길을 걷게 된 의열단이었지만 적의 밀정이 된 조회령(신성록 분)과 주동성(서영주 분)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처단을 선사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의열단 핵심인물인 김우진은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답지 못한 연계순의 사진을 찍는다던가, 연계순이 잡힐 뻔한 상황에서 임무를 방기한 채 연계순을 구하려 물불을 가리지 않는 등 '인간적 실수'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의열단 내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던 유일한 여성 단원 연계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녀의 존재는 잠시 김우진과 애틋한 연모의 사이였다가, 이정출의 '자각'을 위한 대상으로 쓰인다. 대신 의열단이었던 동지였던 이들이 실패했던 길을 '밀정'이었던 이정출의 영웅적 결단과 실천이 대신한다. 

영화 속에서 음악이 도드라지는 장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re smilong'이다. 히가시와 함께 차를 탔던 이정출이 히가시의 협박 혹은 회유에 다시 차문을 열고 경찰서로 들어선 이후 '학살'에 가까운 독립군 검거 장면에서 깔리는 음악이다. 이에 김지운 감독은 1920년대 젊은이들이 즐겨 들었던 음악이라며 그 간극의 아이러니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감독의 의도가 어떻든 그 장면은 독립군이었던 젊은이들의 목숨이 일제에 의해 압살당하는 장면이었고, 그리고 본의든 피치못해서든 이정출은 거기에 '협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가 앞서나가며, 이정출의 개입을, 그리고 젊은이들의 죽음에의 잔학함을 둔화시킨다. '아이러니'로 느끼는 정서와, 직시는 분명 다르다. 뿐만아니라, 이 장면에서 '아이러니'는 느낄 지언정, 거기에 이정출의 참여에 미처 관객의 시선이 돌아가지 않는다. 

또 하나, 마지막 이정출이 설치한 폭탄이 터지는 장면에서는 라벨의 볼레로가 울려퍼진다. 이 장면은 감독에 의해 연출된 환타지다. 실존 인물 황옥으로 추정된 이정출이 '역사' 속에서 그려진 마지막 장면은 김우진, 연계순 등과 함께 한 재판에서였다. 밀정이었으나 독립군으로 잡혀 재판을 받았던 그에 대한 동정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재판정에서 이정출은 김우진등이 상해에서 국내로 폭탄을 들여오는 걸 도왔지만, 그건 김우진 일당을 일만타진하기 위한 미끼였을 뿐, 자신을 일본 경찰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밝히고 있다. 해방 후 경무총감까지 지내며, 국회의원 출마까지 하려했다던 이정출, 아니 황옥의 진실은 그의 납북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두 장면의 음악은 관객의 해석을 앞지르거나, 혹은 저어하며 앞서나간다. 대신 관객은 음악에 홀려, 이 장면에서 생각할 지점을 놓친다. (굳이 킹스맨과의 유사함을 더하진 않겠다)



김장옥의 발가락, 그리고 경계인의 초상 
김지운 감독은 그 모호한 인물에게 의열단 행동대장으로서의 영웅적 행보를 맡긴다. 김우진도 실패하고, 연계순도 실패하고, 다른 인물들이 변절한 가운데, 실제 역사적 평가가 물음표로 남긴 인물이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군에 대한 '테러'를 성공시킨 환타지로 그의 역사적 복권을 의도한다. 과연 이 장면이 최근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진 <덕혜옹주> 속 덕혜옹주가 징요당한 노동자들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란 장면과 다를까? 왜 감독들은 굳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인물들을 불러 그들에게 '민족주의'의 과업을 맡길까? 최동훈 감독의 <암살>에도,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도 공교롭게도 김원봉이 등장한다. 특별출연인 조승우와 이병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단 몇 장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존재감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왜 감독들은 김원봉을 특별출연으로 뒤로하는 대신, 논란의 인물들을 내세울까? 대중적으로 공감받기 쉬운 인물이라서? 그게 아니면 우리 일제 시대 독립 운동사를 들여다보면 자유로울 수 없는 '사상'의 지뢰밭을 피하고 싶어서?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밀정>은 마치 첫 장면 김장옥이 발가락을 자르는 그 결단과도 같은 영화처럼 다가온다. 발가락을 자르는 그 장명은 분명 그의 결단과 의지이지만, 과연 거기서 굳이 그래야 했을까라는 의문표가 따라붙는. 

물론, <밀정>의 미덕은 있다. 오히려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메시지는 '민족주의'라는 트렌드를 넘어, 경계인의 초상이다. 일본이냐, 조국이냐 그 경계에서,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들,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의 그 경계에 선 어찌보면 실존적 질문이다. 그리고 그 미덕은 늘 갑과 을, 혹은 자본과 피고용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론에 고뇌하는 현대인들의 질문에 가닿는다. 송강호라는 배우기에 가능했던 이정출의 고뇌어린 두어 시간에 그래서 관객은 흠씬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by meditator 2016. 9. 19. 16:55

앨리스가 다시 돌아왔다. '이상한 나라'로 갔던 앨리스는 이번엔 '시간' 속으로 여행을 한다. 2010년에 개봉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팀 버튼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 왜 진작에 만나지 않았을까란 반문이 들 정도로, 두 세계의 조우는 기대가 되었다. 그 어떤 작품을 만나도, 그만의 색채로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팀 버튼 감독이 동화라기엔 그 해석의 세계가 무궁무진한 환타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변주한다는 건, 그에게 새로운 날개를 선사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동화 속 '이상한 나라'는 팀 버튼에 의해 가장 화려하게 '시각'화 되었고, 동화가 가지는 가치 전복의 세계는 '팀버튼'월드를 통해, 그 '이상함'이 확장되었다. 물론, 그 팀버튼스러움을 더한 이상함이 잔뜩 분위기를 잡느라, 정작 서사는 '붉은 여왕'vs. '하얀 여왕'이라는 단선적 대결 구도로 뻔한 어드벤처물로 된 듯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상한 나라'의 '이상함'만으로도 뭐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그런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제 '시간' 여행으로 돌아온다니, 과연 팀버튼이 빚어낸 '시간'은 또 어떤 이상함을 선사할까 기대가 되었다. 


물론 역시 팀 버튼이라는 '수식어'를 내세웠듯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곳곳에는 '팀버튼스러운' 분위기들이 여전히 물씬 풍긴다. 하지만, 정작 팀버튼이 제작을 했지만, 제임스 보빈이 감독한 이 영화는 해마다 우리 나라에서 열리는 '명화' 전시회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유명한 화가들을 들먹이며 호객을 하지만 정작 그 전시회에서 만나는 건, 알려진 작품 대신 습작이거나, 그도 아닌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로 채워진 기대와는 다른 전시회를 본 그런 아쉬움을 고스란히 되풀이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캐릭터의 활약이 아쉬운
영화는 여전히 화려하고, 거울 속에 빨려든 앨리스는 죽어가는 모자 장수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에 자신을 내던진다. 앨리스가 돌아간 이상한 나라는 여전하고, 그녀가 뛰어든 시간의 성은 이상한 나라 못지않게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가 하면, 시간을 거스른 거기에는 또 다른 동화 속 세상이 열린다. 하지만 화려한 분위기도, 상상력의 경계를 넘어선 듯한 '시간'의 세상도 신기하지만, 그 뿐이다. 

화려한 색채와 박진감넘치는 언드벤처에도 불구하고 내내 싱겁게 느껴지는 그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팀 버튼의 해석으로 귀결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수학자였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앨리스라는 소녀는 회중 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들어가며 '모험'의 세상에 빠져든다. 이 작품에서 앨리스가 하는 모험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잣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이다.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동물들이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은 물론, 그들의 행동 양식 자체도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것들이다. 제목에서 부터 이상한 세상에선 이상한 것들이 멀쩡한 듯 행동하고,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진다. 그 속에서 '상식'을 지닌 소녀 앨리스의 행보는 당연히 '모험'과 '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언밸러스한 비상식의 세계는, 이미 해골들의 순애보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선사한 바 있는 팀 버튼이라는 비상식적인 감독을 통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다. 당연히 원작 속 토끼며 쌍둥이며, 사냥개들은 저마다 캐릭터를 가지고 활약하며, 팀버튼의 영혼의 단짝인 조니뎁에 의한 '모자 장수'는 감초 그 이상으로 앨리스의 혼을 쏙 빼놓으며 '이상한 나라'를 이상한 나라스럽게 만드는데 공헌을 한다. 

바로 이 지점,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스러움을 보여주었던 그 등장인물들이 거울 나라에서는 그저 '단역'처럼 스쳐지나가 버린다. 무엇보다, 그 이상스러움에 선봉장 역할을 하던 조니뎁의 무존재라니! 과연 이 사람이 조니 뎁 맞는가 싶게, 거울 나라에서 그는 죽어가는 역할 그 이상을 해내지 못한다. 조니 뎁만의 '미친 모자 장수'의 활약을 끝내 보지 못하고 나선 극장에선 과연 내가 이 영화를 본게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건 앤 헤서웨이의 하얀 여왕도 마찬가지다. 조니 뎁과 앤 헤서웨이라는 쌍두 마차를 제치고, 열렬한 활약을 보인 건 붉은 여왕의 헬레나 본 햄 카터와 '시간'의 사차 바론 코헨이지만, 두 사람이 제 아무리 발군의 노력을 한다 한들, 조니 뎁만 하겠는가. 

원작 속 앨리스는 본의 아니게 토끼 굴로 들어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모든 사건에 끼어들게 된다. 앨리스의 의도와 무관하게 버젓이 '티파티'의 일원이 되는가 하면, 여왕의 재판에 끼어들어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그 '본의 아닌' 사건들에 꿰어져 들어가는 앨리스에 대해, 안타까움과 흥미진진함이 들지언정,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 생고생을 할까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거울 나라'로 가서 '시간 여행'까지 하는 앨리스를 보며, 왜?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앨리스는 죽어가는 모자 장수를 구하기 위한 '고운' 마음으로 '시간'을 멈추거나, 시간을 거스르는 모험을 서슴치 않는데, 물론 죽어가는 모자 장수를 구하기 위한 것인 줄 알면서도 어쩐지 그 모험의 위기에 앨리스의 타자성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앨리스가 알아주지 않아 죽어가는 모자 장수, 정말 자신의 가족이 살아있다는 걸 믿는 모자 장수라면, 그가 스스로 시간 여행에 뛰어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앨리스와 같이 시간 여행에 뛰어 들어야 하는게 아닌가란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지울 수 없다. 



조작된 가족애와 성장 담론
앨리스는 '시간'을 거르스는 금단의 모험으로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의 해원도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모자 장수의 가족이 죽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낸다. 사건의 당사자는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 그리고 모자 장수이지만, 자매, 그리고 모자 장수 가족 간의 난관을 해결해 주는 사람은 앨리스라는 서사의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오래된 자매간의 질시와 그로 인한 세계의 불행도 해결해 내고, 모자 장수 아버지와 아들간의 오해도 풀어주며, 이별했던 가족 간의 해후까지 만들어 주며 '가족'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마치 '선물'처럼 받은 이 '가족애'는 주제로 내걸기도 무색한 것이다. 진정한 '가족애'라면 내 가족은 내가 지켜내야 하고, 내 가족간의 오해는 내가 댓가를 치루더라도 해결해 내야 하는 것이다. '금단'의 시간을 어겼지만, 그 누구도 시간의 금을 넘은 댓가도 치루지 않은 해피엔딩은 무가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무색함을 덜어내기 위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랬듯,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의 모험 후에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약혼을 파했듯, 이제 거울 밖 세상에서 자신이 집착했던 아버지의 배를 포기한다. 하지만 그 조차도 그런 앨리스에 대한 어머니의 감동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앨리스는 모험 이후에 달라진 듯보이지만, 사실 앨리스는 모험을 하기 이전부터 세계를 누비던 용감한 모험가였고, 단지 잠깐 그 모험의 대상을 달리했을 뿐이다. '성장'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배를 호령하는 선장이었다는 환타지에서 시작된 영화는 '성장'조차도 궁색하다. 그저 성장을 위한 요식행위랄까.
by meditator 2016. 9. 10. 06:45

이제 우리나라에서 <어바웃 타임>은 성공한 로맨틱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덕분에 개봉하는 외국 영화 중 종종 <어바웃 타임> 제작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개봉하는 영화들이 눈에 띤다. 2014년에 개봉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그랬고, 이번에 개봉한 <이퀄스>가 그러했고, 9월에 또 개봉할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가 그렇다. <어바웃 타임> 제작진을 믿고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이들 영화에서 <어바웃 타임>에 필적할 만한 잔향깊은 로맨스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 기대가 늘 부합하는 건 아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제목은 사랑을 앞세웠지만 막상 영화를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어바웃타임>과는 다른 질감을 가진 사랑의 생로병사였다. 마찬가지로, <어바웃 타임> 제작진에 젊은 청춘 스타 니콜라스 홀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내세운 <이퀄스>에 대한 반응 역시 호불호에 차이가 있을 듯하다. 




그 호불호의 간격은 니콜라스 홀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사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바웃 타임>의 돔놀 글리슨과 레이첼 맥아담스의 진득한 사랑 저리 가게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은 곡진하며, 그 마무리의 여운 역시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청춘 남녀의 순애보에도 불구하고 <이퀄스>란 영화를 온전히 사랑만으로 완결시키지 않는 건 바로 <이퀄스>란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 두 남녀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와 세계관이 관객들이 온전히 '사랑'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아니, 오히려 <이퀄스>는 <어바웃 타임> 제작진을 내세워 사랑 영화임을 표방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랑의 전제 조건이 되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다. 

사랑이 허용되진 않는 세상에서의 사랑, sos
영화의 배경은 선진국, 인류는 서로간의 전쟁으로 지구 대부분을 파괴시키고, 겨우 피해를 입지 않은 일부의 지역 선진국과 반도국을 남겼다. 그 중 선진국은 인간이 살기에 매우 완벽한 환경과 조건을 갖췄다. 지난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인간의 통제되지 않은 감정'에 있다고 생각한 선진국 사람들은 dna조작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거세시켜, 이퀄(equal)을 만들었다. 감정이 sos(switched- on-syndrome)가 되고, 사랑이 유일한 범죄가 된 '완벽한(?) 사회.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 않고, 쾌적한 환경에서 적절한 케어를 받으며 각자가 원하는 바 노동에 종사하며 살아간다. 



그 선진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 분), 그는 여느 때처럼 일어나 식단에 맞는 식사를 하고 갖춰진 옷을 차려 입고 출근을 해 자신의 업무에 종사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변화가 생겼다. 그의 눈에 이상이 감진된 동료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의 시선은 니아를 쫓는다. 결함인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한 날 주먹을 꼭 쥐며 감정을 짖누르는 니아를 발견한 사일러스, 서로서로가 감정이 생겨난 동료를 감시하고 고발하듯 그렇게 자신도 니아를 바라보는 거라 사일러스는 받아들이려 하지만, 니아에 대한 그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그를 괴롭힌다. 결국 그 감정의 혼돈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일러스는 스스로 병원을 찾고 감정 통제 오류 1기임을 판정받는다. 영화는 '감정'을 맛보지 못한 사일러스가 스토커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통해 그의 감정을,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의 불가항력을 설명한다.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랑 영화의 공식대로 사일러스, 그리고 니아는 결국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마는데...

감정이 느껴지면 스스로 병원에 가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약을 받거나, 그걸 숨기면 끌려가는 세상, 그 속에서 감정을 숨기지 못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들며 동시에 의문에 빠진다. 과연 사랑이 문제일까? 

이들이 사는 '선진국'에서 사랑을 범죄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종사하는 '노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두 남녀 사일러스와 니아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느낀다. 처음 사랑에 빠져들때의 혼란도 잠시, 스스로 병원에 갔던 것을 후회할 만큼 두 사람의 나날은 환희에 차있다. 오히려 방해는 커녕 노동 생산성은 높아진다. 그저 문제가 되는 것은 주변 동료들과, '사랑'을 범죄시하는 사회. 

사랑을 넘어선 존재의 묵시록 
두 스타 배우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에 몰입하는 잦은 클로즈업, 그리고  온전히 두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는 서사,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들이 사는 '선진국'에 대한 질문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인간을 통제하는 사회에 대한 서사는 2003년 크리스찬 베일의 <이퀼리브리엄>을 통해 익숙한 것이다. 단지 <이퀼리브리엄equillibrium>이 영화 후반 '감정 통제'를 둘러싼 '액션'이 백미를 이루었다면, <이퀄스>는 그걸 온전히 두 주연 배우의 금지된 사랑을 통해 설명한다. 

사일러스와 니아가 사는 세상은 '감정'만 제외하면 완벽한 세상이다. 온통 하얀 옷에 하얀 건물의 거세된 감정을 상징하듯 무미건조한 색채의 세상이지만, 그걸 제외하면 생로병사의 모든 것을 사회가 책임져 주는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선사시대 동굴벽에다 '예술'을 했던 인간의 감정은 dna의 조작으로도 거스를 수 없다. 그 완벽한 삶을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곳곳에서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그 감정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스스로 몸을 던지거나, 울부짖으며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dna 조작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인간 감정의 숭고함을 설파하며 두 남녀의 순애보를 설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 그리고 사랑의 숭고함과 함께, 동시에 솟아오르는 의문, 이 가상의 감정 전체주의 선진국이 과연 '가상의 사회'일까? 란 의문이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퍼져가고 있는 3포, 5포의 포기 증후군은 21세기 자본주의에 완벽하게 통제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과연 사랑과 결혼과 연애를 포기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적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을 조장하고 암묵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는 이퀄스 속 하얀 전체주의와 다른 것인가란 의문이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아니 다른 것이 있다면, 영화 속 전제된 환상적인 '물신성'이 이 사회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아니 오히려 주어지지 않았기에 신기루처럼 이 사회 속 인자들을 더 강력하게 포섭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아닐까? 

영화에서 사랑은 '노동'에 대적되는 소모적 감정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노동'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랑과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다. 심지어 외모나 인성도 '노동'에 적합한 것으로 바꾸고자 트레이닝을 받거나, 교정하고, 수술대에 오른다. <이퀼리브리엄>이 그 감정을 통제하는 전체 사회에 '액션'으로 저항했지만, <이퀄스> 속 연인들의 도발은 그 중 한 사람의 '투항'으로 실패하고 만다. 2003년과 2016년의 격세지감이다. 사일러스의 투항으로 영화는 비극적 순애보의 여운과 함께, '자본'에 무기력해져버린 현대인을 투영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겨국 영화는 당신들의 존재를 묻는다. 그 존재의 묵시록에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퀄스>가 잔향이 깊을 듯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어쩌면 지루한 감정의 소모로만 남을 가능성도 있다. 
by meditator 2016. 9. 2. 16:09

<범죄의 여왕>을 보러 찾아간 날 그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도심 한 복판 극장가에서 세 명 남짓 영화관을 채웠다. 8월 25일 개봉한 <범죄의 여왕>은 27일 기준으로 가까스로 2만 명의 관객을 넘었다.(22,082명 영진위)




이 초라한 성적표의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우선은 이 영화가 상영되는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듯 '광화문 시네마' 제작, (주) 콘텐츠 판다의 배급이라는 배급과 제작의 불리함을 우선 들 수 밖에 없다. 한국 영화 제작의 독점이 심화되고, 이제 그 독점의 해법을 또 다른 외국 독점 자본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자조적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수평적 무브먼트'를 지향하는 영화 창작 집단 '광화문 시네마'의 시도는 건강하지만, 아직은 그 목소리의 울림은 역부족이다. 또한 new가 설립한 콘텐츠 유통 전문 회사로 독립 영화 배급에 뛰어든 (주)콘텐츠 판다의 배급도 역시나 한계적이다. 거기에 아직까지도 대중적이지 않은 '블랙 코미디'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는 '신선한(?)' 장르도 제한적이다. 스타는 커녕 '엄마'가 주인공으로 범죄자를 잡는다니, 애초에 젊은 층들은 외면하고, 나이든 층들은 낯설어 할 내용이기 십상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범죄의 여왕>이 흥행하기 힘든 이유를 대자면 손가락을 줄줄이 접어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색다른 한국 영화를 선택하고 싶다면 <범죄의 여왕>를 권하고 싶다.

독특한 분위기의 고시촌 스릴러
고시생 아들을 둔 지방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아줌마, 미용실이라지만 동네 장사의 한계성을 돌파하기 위해 아줌마가 요즘 주업으로 삼고 있는 건 '야매 보톡스'이다. '야매' 장사까지 해서 돈을 버는 아줌마에게 고시생 아들의 전갈, 수도요금이 120만원이 나왔으니 돈을 부치라는 것! 아들은 엄마의 '돈'이 필요해서 보낸 전갈이지만, 동네 아줌마들 상대로 '입'이 부르트도록 '보톡스'를 팔아 돈을 버는 엄마는, 그 돈 120만원을 호락호락 보내줄 수 없다. 아들의 수도세를 해결하기 위해 상경한 엄마,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의 시작과 더불어 윗층의 소음에 참다못해 뛰쳐 올라간 고시생의 비명으로 부터 사건은 이미 예고된다. 하지만, 저마다 문을 닫아 걸고 괴괴한 정적만이 맴도는 고시원, 그 철저한 '개인주의'의 무덤 속 사람들은 그 사건마저 불통의 관례로 접어 넘긴다. 하지만, 이미 미용실에서부터 동네 오지랖으로 한 '껀'을 했던 엄마는 예의 그 오지랖으로 아들의 수도요금을 '사건화' 시킨다. 



영화의 서사는 막상 다 보고 뒤돌아 서서 생각해 보면 전형적이다. 굳이 영화화 할 것도 없이, 드라마 스페셜의 한 편 정도로도 그닥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렇지 않다. 뻔히 다음이 어떻게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영화가 마무리되는 지점까지, 흥미를 놓치지 않게 된다. 

그 흥미를 추동하는 첫 번째 요인을 든다면 <범죄의 여왕>이 가지는 독특한 '미장센'을 들 수 있다. 이형곤 감독의 <구미호 가족(2006)>같은 기괴함은 아니지만, 박찬욱 감독의 화려한 퇴폐미도 아니지만, 절망의 늪같은 분위기를 흠씬 자아내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스릴러'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시원'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범죄의 여왕>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분명 흑백 화면이 아닌데도, 흑백보다 더 암울한 분위기의 고시원에 한껏 화려한 색채의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엄마 양미경씨,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미, 고시원이란 공간에 파열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색채의 대비만큼, 엄마는 지금까지 '고시원'이 암묵적으로 지녀왔던 '개인주의'적 규율에 파열음을 일으킨다. 

오지랖 엄마, 소통으로 사건을 해결하다 
고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돈이나 내고 내려가라는 아들의 말에, '엄마가~'를 연발하며 며칠의 말미를 얻은 엄마는 고시원 관리실을 시작으로 과잉 부과된 것이 분명한 수도 요금의 조사를 시작한다. 엄마의 야심찬 수사에도 불구하고 수도 요금 과적은 매번 장애를 만나게 되고, 야무지게 현장을 급습한 창고에서는 엉뚱하게도 합격탕의 실체만 만나게 된 채, 경찰행이 되고 만다. 

엄마의 수사, 그 과정의 포인트는 바로 오랜 미용실 경영으로 단련된, 만나는 사람 그 누구라도 대번에 '아는 사람'을 만들고 보는 '오지랖'이다. 관리실 형님들에게는 맞고 쑤셔박히는 신세지만, 고시생들에게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운 들짐승' 같은 '개태'를 '엄마 해줄까'라며 구워삼는가 하면, 동네 바보 취급당하는 만년 고시생을 '덕구야~'라며 부르며 사람 취급해주는 것도, 히키코모리 게이머 진숙과 소통하는 것도 엄마 특유의 너스레이다. 

그리고 바로 <범죄의 여왕>속 엄마가 '여왕'인 이유는, 고시촌 그 저마다의 섬 속에서, 각자 자신의 입신양명만을 향해 질주를 벌이는 무리들 속에서, 튕겨져 나온 '루저'들의 집합체 같은 고시원이라는 연옥에서, 엄마 특유의 너스레와 붙임성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점으로 이어, 그 '네트워크'로 사건 해결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영화는 그저 엄마의 아줌마 특유의 너스레나 오지랖을 영화적 도구 혹은 그저 아줌마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인'들만의 섬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고시촌에서, 결국엔 '살인 사건'까지 해결할 수 있는 '소통'을 꼭 집어 낸다. 



또한 영화는 '입신양명'의 극한값인 '고시'라는 블랙홀에 휘말린 인간 군상과, 그 '고시'를 위해 영업정지를 당하며 보톡스 시술을 해가며 그것을 지탱하는 엄마를 통해 부도덕한 '성공' 사회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살인'에 귀결되는 십수생과 그런 부도덕한 뒷바라지를 창피해 하면서도, 해준 것이 없으면 조용히라도 있으라며 닥달하는 아들의 뻔뻔함을 통해 '부도덕'이 체화된 사회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영화는 그런 '부도덕' 혹은 '성공'의 늪같은 고시촌이란 배경을 통해 한국 사회를 '냉소'하면서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엄마 양미경을 통해, 그럼에도 '인간적인'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시골에서 보톡스나 해주며 영업 정지나 맞는 엄마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돈이나 내고 내려가라는 아들의 외면에, 마지막 순간 그래도 엄마를 구하러 와줬으니 되었다며 퉁치자는 양미경씨의 낙천성은, 그간 한국의 모성상을 고스란히 이어가는 듯 하면서도 변주된 흔쾌한 넉넉함이다. 모성의 고생을 신파조로 읇조리지도 않고, 그 삶의 노동성을 배경으로 터득된 '오지랖'으로 사건을 해결해 가는 엄마 양미경은 근자에 보기드문 건강한 모성성이다. 이 모성성의 건강함 덕분에, 한껏 기괴했던 고시촌 스릴러의 칙칙함은 쾌활한 블랙 코미디로 전화된다. 물론 거기에는 박지영이라는 배우의 독보적 매력이 전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엄마의 조력자로 양아치 개태에, 동네 바보 취급당하는 만년 고시생 덕구와, 히키코모리 진숙을 배열하며, 인간의 가치를 반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예전 시골 공동체가 건재할 때는 동네 모자른 사람들도 저마다의 몫을 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했던가, 마치 <범죄의 영화>는 2016년 '인간 관계'가 사라진 도시 속에 시골 엄마가 재건해낸 저마다의 자리와 몫이 있는 '인간 네트워크'와도 같다. 


by meditator 2016. 8. 29. 0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