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든 사람이 보여준 행보가 영화적 서사를 넘어섰을 때, 그가 만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 특히나, 그 영화가 현실에 그가 봉착한 질문과 연관되어졌을 때. 그런데 영화 <그후>를 보니, 오히려 어쩌면 그런 영화를 만든 이의 행보가, 또 하나의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담론을 두텁게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 홍상수의 행보로 인해, <그후>의 이야기는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사랑은 질병과도 같다. 누군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질병이 예고도 없이 우리 몸을 침공하듯이, 사랑도 그러하다. 거기엔 '제도'도, '처지'도, '존재'도 무기력하다. 결국 남겨지는 것은 그 '사랑'에 임하는 자의 '자세'이고, '선택'이다. 자유로운 싱글들이야 '사랑무한주의'겠지만, 만약에 그 '사랑의 질병'에 걸린 존재가 이미 그 누군가의 파트너로 공인된 사람이라면? 



질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진 남자, 그 후 
영화 <그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런 '인간 감정의 불가피성'에 대한 전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게 이른바 최근 지탄받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행보에 대한 '용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질병'에 걸린 '인간'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 일찌기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영화 속 등장인물이었던 유부남 감독의 '바람끼'라 하루 이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늘 홍상수 감독 영화 속 남자들은 여자라면 환장을 했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듯 갖은 해프닝을 벌이며 구질구질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걸 홍상수 감독은 '인간'이라 정의하곤 했다. 

하지만, 그저 만든 이의 입장에서 바람끼 다분한 남자 인간을 정의하는 것과 이제 그 자신이 스스로 그것을 '실천(?)' 보인 입장에서 그의 주장은 궤를 달리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실천 이후 그의 이야기들은 '발정'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같은 해프닝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사건'으로 빠져든다. 2016년 김민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유부남과 사귄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이제 2017년 <그후>는 그 반대편, 그 '유부남'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평론가이자 작은 출판사 사장인 봉완(권해효 분)의 뜻하지 않은 사랑, 혹은 바람으로 벌어진 그의 처지로부터 시작된다. 잠도 못이루고, 입맛도 없으며, 달려도 시원하지 않는 그 질병을 그는 그만 아내에게 들키고 만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그녀도 가정과 자신과의 풋사랑을 놓지 않는 그의 '비겁한' 행보에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런 가운데 새롭게 출판사의 직원으로 등장한 아름(김민희 분). 그녀와의 첫 식사 자리는 뜻하지 않은 '실존적 논쟁'으로 이어진다. 

왜 사느냐고 묻는 당돌한 아름, 그런 그녀에게 봉완은 그 질문 자체를 부정한다. 세상의 삶이란 실체를 몇 마디의 말로 정의내릴 수 있냐고. 그런 그에게 아름은 그런 정의의 회피가 또 하나의 비겁함 아니겠냐고 반박한다. 장황한 두 사람의 논쟁, 이 장면은 하지만 상징적이다. 아름의 구구절절 몇 가지 존재의 정의를 차치하고, 그 삶의 실체에 대한 정의는 곧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결혼이라던가, 가정이라던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왜 결혼을 하는가. 그리고 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가. 결혼을 할 당시에는 그 분명한 것같은 결정과 선택이 살아가는 해를 거듭할 수록 불명확해지고 모호해진다. 아니, 봉완이 답을 애써 피하듯, 오히려 답을 말하고 나면 낯부끄러워지는 상황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아니, 몇 마디의 정의로 퉁치기엔 이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유는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답을 피해간 봉완은, 그가 맞닦뜨린 상황에서도 그렇다. 당신 바람피니? 라는 아내의 질문에 대해서도, 비겁하다며 그의 곁을 떠나간 출판사 여직원에 대해서도, 그는 하냥 그 상황의 바깥에 서있다. 심지어 돌아온 그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다시 안고, 그녀의 뜻대로 아름을 내쫓고, 그녀의 뜻대로 아름을 이용하는 그 상황에 그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출판사에 쳐들어온 아내에게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니야'다. 그녀를 끌고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포옹을 하던 그 유일한 적극적 행위 외에 봉완의 태도는 늘 수동적이고 자기 보호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다. 늘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이 대부분 그래왔듯이 편의적이다. 

뜻밖에도 그런 봉완이 적극적이었던 지점은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찾아온 아름과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돌아온 출판사 직원의 책략대로 아름을 핑계로 양 다리를 자연스럽게 하려고 들어갔던 가정에서 봉완은 뛰쳐나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한동안 지냈단다. 하지만, 늦은 시간 아내가 딸 아이를 잘 차려 입히고 찾아오자, 봉완은 뒤도 안돌아보고 가정을 택하고, 그의 사랑인지 바람인지는 거기서 마무리된다. 다시 찾아온 아름은 봉완이 한결 편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자 봉완은 그렇게 자신이 풋사랑이 마무리되자, 마치 보상처럼 상도 받았다며 헛헛하게 말한다. 편해진 남자, 그가 겪은 '사랑'의 질병을 영화는 그렇게 표현한다. 

영화 그 이상의 질문, 홍상수 
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런 봉완의 결정으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 속 주인공인 봉완이 그 잠시의 사랑을 '바람'으로 마무리한 것과 달리, 감독 홍상수는 다른 결정을 내렸으니까. 오히려 영화의 질문은 거기서 시작된다. 감독 홍상수가 내린 결정과 영화 속 주인공 봉완의 결정 사이에서. 심지어 홍상수 감독도 봉완과 다른 결정을 내렸음에도 상도 받았다.(물론 여주인공이었던 김민희가 받은 상이지만) 하지만 그 상이 무색하게 그와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욕'을 먹는다. 다른 선택이 낳은 다른 결과다. 



영화 속 봉완은 이제는 편하게 '가정'을 위해 살아갈 거라고 말한다. 그 봉완의 말은, 어쩌면 홍상수 감독이 그런 편한 종결점으로 가는 여정 속에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혹은, 마치 늙으막 노인정에서 사랑을 위해서는 머리끄댕이 잡기를 마다하지 않은  그 상황처럼 아이도 다 성장한 내 인생 마지막의 사랑을 위한 장렬한 최후의 헌신이라는 자기 변명이 숨어있을 수도 있겠다. 혹은 영화 속 아직 어린 딸아이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던 봉완은 젊은 날 홍상수 감독일 수도. 마치 자신들을 부도덕하다 손가락질하는 세상을 위한 서비스 컷처럼 출판사에 찾아온 아내에 의해 아름으로 분한 김민희에게 퍼부어진 통렬한 따귀 세례처럼 영화 <그후> 자체가 홍상수 감독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자기 자신에게 준 '따귀'세례일 수도 있겠다. 아니, 그 반대로 제도로서의 결혼, 자신보다는 가정을 위한 희생 대신, 여전히 자신을 놓을 수 없는 자기 중심적인 감독의 숨겨진 변호일 수도 있겠다. 어쨋든 관객들은 <그후>를 통해 감독과 다른 이율배반적인 영화적 서사를 통해 다양한 생각의 갈래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영화 <그 후>가 서있는 곳이다. 

이 모든 가능태로서의 생각들을 통해, 마음이 열어 도달하는 곳은 다시 처음, 그 '실체'에 대한 질문이다. 존재하지만 쉬이 답할 수 없는, 제도로서의 결혼과 가정이라는, 하지만 변덕스러운 인간을 다 품어낼 수 없는 아이러니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구구절절 변명 대신, 가능할 수 있는 수많은 질문을 품고 돌아온 홍상수는 그래서, 그가 내린 부도덕한 결정과 달리, 여전히 그가 해왔던 수많은 작품들처럼 유의미하다.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실존적으로 터놓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희귀한 감독으로서 말이다. 

by meditator 2017. 7. 13. 15:19

'그럼 그렇지', '어쩔 수가 없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일에 대해 이 말만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을까? '냄비 근성'이니, '속물 근성'이니 하는 갖은 수식어들이 결국은 우리를 '그럼 그런' 속성으로 귀결시키는 결론에 우리는 거부감없이 동조하고, 스스럼없이 인용한다. 이렇게 우리를, 우리 민족을 편의적으로 예단하는 우리의 '관성'에 대해, EBS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은 '식민지'적 경험의 부작용, 혹은 6.25와 같은 동족 상잔 전쟁의 소산이라 지적한 바 있다. 이런 문제 의식은 도올에서 그치지 않는다. 얼마전 출간된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유선영 씨는 '피식민지 민족은 힘의 격차가 불러온 폭력적 사태들에 직면해 열등감, 히스테리와 공격성, 수치와 죄의식 등에 휘둘리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이 감정, 정신의 상흔들이 민족의 심연에 그리고 역사의 심연에 켜켜이 쌓여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역사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에게 사실 우리는 이렇게나 자부심을 가질만한 민족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동주>와 <박열>의 이준익 감독이다. 


2015년에 이어, 이제 2017년 이준익 감독이 들고 온 인물들은 식민지 일제하를 살아갔던 청춘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준익은 이제는 많이 마모되고 상흔으로 인해 자기 방어 기제만이 강화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한국인', 그 아름다운 인간형의 원형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동주>로 시작된 일제 하 젊은이들의 사상과 실천 
시작은 <동주>였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다. 하지만 흑백의 차분한 톤으로 영화가 나즈막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조국을 일제에 잃고 간도로 이주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거기서 자란 청춘들의 삶에서 부터이다. 고향을 잃고 떠난 사람들,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고향'을 만들어 '이웃'끼리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 일제에 의해 짓밟은 본래의 고향보다 더 고향같은 곳, 하지만 그곳에서 젊은이들은 조국을 잊지 않는다. 그 시대에도 열렬한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그들을 창씨 개명을 피해 일본으로 보내지만, 거기서 그들은 '입신양명' 대신, 시대를 온 몸으로 앓아낸 시인으로, 자신을 내던진 독립 운동가로 성장해 나간다. 

'동주를 만나러 갔는데 몽규를 만나고 왔다'는 평처럼, 영화 <동주>는 그 시대를 '시'로 앓던 동주란 순수 문학 청년못지 않게, 동주만큼 '문학'을 사랑했지만, 조국을 위해 기꺼이 '문학'도 자기 자신도 내던졌던 순수한 송몽규를 조우하게 된다. 영화의 행간을 통해 그가 무장 독립 운동에 뜻을 두었고,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었지만, 우리가 지난 역사 수업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그 '사상'적 수혜가 영화를 보면 무람없이 송몽규란 인물을 통해 설득되어진다. '사상'이 먼저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청춘의 삶과, 그 선택과 실천으로서의 사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대를 순수하게 아파했고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돌아보며 아파했던 그 청춘들을 통해 우리은 일제 시대 사상 운동을 했던 젊은이들에 대한 무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공과 나의 일신상의 이득을 넘어 시대를 아파하고 고뇌하며 거기에 자신을 기꺼이 던지는 이타적인 한국인의 원형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원형은  이제 2017년 <박열>을 통해 조금 더 인식의 폭을 넓히게 된다. 

2017년의 죽비같은 <박열>
<동주>를 통해 서로 다른 방식이었지만 시대를 고스란히 자신을 던져 아파했던 순수의 결정체같던 동주와 몽규를 발견했다면, 이제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식민지라는 시대를 호탕하게 살아냈던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 천왕제의 정부가 위기에 빠지자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방식으로 일제는 그 책임을 한국인에게 몰아 관동 대학살은 방조했고, 그것도 모자라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 운동을 하던 박열 등을 '대역모 사건'의 배후로 조작하고자 한다. 

일제에 의해 설계된 사건의 프레임으로 보면 분명 '피해자'이고 '희생자'가 되어야 할 박열은 하지만, 오히려 자신을 옥죄어 오는 일제의 법망을 기가 막히게 이용하여 '자신만의 프로파간다'로서 황태자 암살 사건을 활용한다. 

조작된 사건을 기꺼이 자신이 했다며 재판 과정을 오히려 이용하기 시작한 박열, 그는 '가장 말을 안듣는', 그리고 가장 버릇없는' 조선인으로 단식 투쟁 등의 갖가지 수단을 활용하며 일제를 당황케 하며 끝까지 재판을 통해 자신의 강고한 의지를 천명해 나간다. 

그런 박열의 모습은 널리 알려지지 안았을 뿐이지, 학생 운동 과정에서 '재판정'을 역시나 자신의 생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장으로, 감옥을 '투쟁'의 장으로, 조서나 항소 이유서를 시대를 대변하는 사상서로 만들었던 학생 운동의 전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운동을 했던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했던 그 '영웅적 모습'을 이제 '박열'이라는 걸출한 한 인물을 통해 영화는 복기해 낸다. 일제의 조작과 회유, 그리고 폭력적 탄압에도 굴종하기는 커녕,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의지와 사상을 널릴 알릴 수 있는 기회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일본의 압제하에서 고통받는 조국의 민중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투쟁'의 장으로 삼았던 박열과 그의 아나키즘은 '을'로서의 삶에 지쳐가는 2017년의 우리에게는 동주와 몽규의 순수함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 속시원한 인간형이다. 

역시나 동주를 보러 갔다가, 몽규를 보고 왔듯이, 박열을 보러 갔다가, 가네코 후미코를 보고 왔다는 평이 나오듯,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가 보이는 동지애적 사랑, 평등한 관계, 그리고 자신들을 겁박하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열렬한 저항 의지로 표현되는 두 사람의 '아나키즘'은 , '독립'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넘어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삶에 길들여진 모든 사람에겐 '죽비'와 같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렇게 그간 우리가 편향된 역사 교육을 통해 '편견'으로 바라보았던 일제하 사회주의는 몽규를 통해, 아나키즘은 박열을 통해 그 시대 청춘들이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장 순수한 독립 의지에 대한 표현으로, 혹은 철저한 일제에 의한 그 모든 제도와 권력에 의한 거부로 그들이 선택했던 사상과 실천 방식들을, 이제 우리는 몽규와 박열이라는 인간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냄비같던', 더 심하게는 '엽전'이라 폄하했던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들의 순수하고 호탕한 원형을 숙제처럼 받아든다. 

by meditator 2017. 7. 5. 18:31

중학교 2학년 아이들과 매달 책 한 권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도 학원에 가는 아이들에겐 '이야기 책' 한 권도 만리장성같다. 덕분에 겨우 앞에 몇 장이라도 들여다본 것이 감지덕지한 상황, 어쩐다, 찾아보니 동명의 영화가 있다. 책을 일고 토론해야 할 시간에 함께 본 영화, 나쁘지 않았다. 15세 관람가의 영국 영화는 가끔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민망'함을 배려한 듯 적절한 필터 처리가 되었고, 무엇보다 늘 6월이면 '전쟁'이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이벤트하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전쟁이란 것에 대해 청소년의 시선에서 진지하게 접근해 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던 것같다. (이 영화를 선정한 선생의 일방적인 시각만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맥 소로프의 베스트 셀러가 영화화된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는 맥 소로프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맥 소로프는 이 작품 <내가 사는 이유>가 그녀의 뒤늦은 데뷔작이자, 데뷔와 동시에 그녀를 미국, 독일, 영국의 상을 수상하게 만들고 '청소년 소설의 여왕'으로 등극케 한 작품이다. 그런 화려한 수상 실적과 함께 미국과 영국에서는 학교 도서실에 구비된 필독 도서이자, 이미 영화화되기 전에 드라마화된 바 있는 청소년 소설계의 베스트 셀러이다. 그러기에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이하 하우 아이 리브)>만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좀 더 재미있게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맥 소로프의 원작을 읽고 비교해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소설, 영화를 막론하고 이 두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든 첫 번째의 요인은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브루클린의 에일리스로 우리에게 알려진 시얼사 로넌이 분한 여주인공 엘리자벳(하지만 그녀는 극구 자신을 데이지라 불러달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데이지라 불러주자)의 캐릭터이다.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셋을 끼고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킨 15살의 데이지는 이제 막 아버지가 사는 미국을 떠나 이모가 사는 영국으로 온 이방인이다. 자신을 가리는 듯한 짙은 화장, 주렁주렁 매달린 귀걸이며 목걸이 팔찌가 버거워 보이는 마른 몸매, 그런데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녀게 웬만해서는 입에 음식을 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데이지에게 더 거부감을 주는 건 음식보다 사람인 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이들에게 '레이저'를 쏘며 '접근'을 거부한다. 

이런 소개만으로도 데이지가 대략 어떤 소녀일 것이라는 게 감지된다.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이유는 갖가지 병원 치료와 상담으로 아버지 돈 축내기, 아버지의 여자 열 받게 하기, 그리고 이제 새로 태어날 아버지와 그 여자 사이의 아이 저주하기. 그리고 그 부산물로 그녀가 얻은 건 '거식증'과 갖가기 알레르기, 자기 혐오 등등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이모에게 구원을 요청한 건지, 아니면 이모의 자발적 호응이었는지 이제 그녀는 영국에 와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맞이한 건 뜻밖에도 이제 우리에겐 스파이더 맨이라 하는게 더 익숙한 어린 톰 홀랜드가 분한 사촌 동생이다. 보기에도 분명히 열 다섯 그녀보다 어린 사촌 동생이 모는 트럭을 타고 구비구비 찾아간 이모네 집. 대책없는 데이지보다 어쩐지 더 대책없어 보이는 곳이다. 이미 데이지가 도착한 공항에서 부터 심상찮은 기색이 역력한 비상시국의 기운, 이모는 마치 그 '비상시국의 전위대'인 양 온통 해외 각국에서 쏟아져오는 전화 통화를 하고 국제 회의에 참여하느라 아이들을 미처 돌볼 사이가 없고, 그 사이 이모네 아이들은 심하게 자유롭게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하여튼 그런 대책없는 이모네 식구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사촌 에드워드(조지 맥케이, 얼마전 캡틴 판타스틱의 주인공 보 역을 맡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는 듯한 그가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 과정처럼 처음엔 거슬리고, 그 다음엔 다투고, 결국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무려 사촌이랑. 



전쟁에 휩쓸린 열 다섯 살 소녀의 사랑
하지만 이 사촌간의 비정상적 로맨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채 내리기도 전에 영화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소설 속 전쟁이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와 적의 경계가 모호한 채 영국의 시설들이 테러를 당하고, 마을들이 점령을 당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막연한' 전쟁이라면, 시각적 장치가 분명해야 할 영화는 그 설정은 세계 제 3차대전이자, 핵전쟁으로 명확하게 설정한다. 무엇보다, 이 전쟁이 무서운 것은 그 '적'이 '우리'와 구분되지 않은 그 누군가이며 내부로 부터 시작된 테러는 핵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을 휘쓸어 가고 사람들의 삶은 거기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테러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을 기초로 하여 내부의 그 적으로부터 시작된 3차 대전이라는 '전쟁'은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 나면 저렇게 될 것이라는 '학습' 효과를 작품은 철저하게 한다. 

그렇게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호자도 없이 전쟁에 휩쓸린 데이지와 이모네 아이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집이 징집되고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 '소개(적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된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킴'된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리고 이제 막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고 '가족'으로 섞여들기 시작한 아이들, 그 아이들은 '꼭 다시 만나자, 이곳에서'란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을 뒤로 하고 각각의 캠프로 떠난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는 커녕, 자신을 낳다 죽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애정 결핍으로 늘 '반항'을 삶의 모토로 살아왔던 데이지는 뜻하지 않게 에드워드의 어린 여동생까지 책임지는 건 물론,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전쟁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생존'이라는 임무까지 짊어지게 된다. 그들의 동네 친구가 적에 의해 무참히 사상되는 상황에서 데이지는 더 이상 자신들이 머무는 이곳이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침반 등 몇 가지를 챙긴 채 이모네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영화는 철저히 데이지란 소녀의 성장담에 집중한다. 3차 대전의 상황을 극적으로 구현한 핵이 터진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자신은 물론, 아홉 살 어린 사촌 동생까지 책임지며 살육과 기아가 점철된 행로를 용감하게 전진하여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되는 서사는 그 어떤 성장 소설보다 극적이다. 반면 소설로 가면 보다 다양한 인물군에 대한 재미가 더해진다. 영화에서는 데이지란 주인공을 위해 생략되거나 왜곡된 이모네 형제들의 캐릭터가 소설의 맛을 더한다. 그저 이모네 아이들이 아니라, 진보적 의식을 가진 엄마 밑에서 그리고 영국의 자연에서 동물과 교감하게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낸 아이들의 면면은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적인 청소년 상이다. 영화 속 데이지가 아홉 살 철부지에 대한 보호자란 극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면, 소설은 오히려 에드워드네 아이들이 가진 남다른 자연적 친화력이 데이지를 변화시키고 그녀를 끌어주는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하며,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성찰적 서사가 깊다. 

어쩌면 이제 우리의 십대들에겐 67년이 된 6.25전쟁 보다는 날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테러 사건이 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에겐 자신들이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는 게 미래의 입시와 정해진 삶의 스케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실에서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멀고, 일상은 쳇바퀴라도 마찬가지의 질풍노도 시기, 자신의 그 모든 푸념을 한참 부모에게 풀어댈 나이, 아이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며, 진지하게 살아가야 이유를 모색해 보는 건 어떨지. 

by meditator 2017. 6. 23. 15:17

시작은 고양이의 시선과 그 시선이 향한 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뜻하지 않은 강간을 당하고 만 미셸(이자벨 위페르 분)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해자 미셸은 자신을 피가 흐르는 자신을 돌보는 대신에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 떨어져 깨진 그릇을 먼저 치운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조용히 목욕으로 흔적을 지운다.




그녀가 강간을 당했다.
한 여인의 강간 사건, 하지만 영화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한때는 출판사를 경영했지만 시대적 트렌드에 맞춰 게임 회사 ceo가 된 여자, 그런 사회적 지위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덮게 만들었을까? 명망이 치뤄야 할, 그러기에 어쩌면 더 깊숙한 상처가 될 수 있을 것같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미셸을 따라가는데 뜻밖에도 패스트 푸드 점에서 그녀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녀에게 자신이 먹고 난 음식물 쓰레기를 쏟아 붓는다. 하지만 미셸은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강간 사건'으로 시작된 영화는 미셸이라는 인물의 가족사를 들추며 '인간 존재의 그 모호함'에 대한 질문으로 번져간다. 피해자였던 미셸은 그와는 반대로 게임 속 피해자인 여성에게 '오르가즘'의 절정을 보다 '자극적'으로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이웃에 이사온 잘 생긴 남의 남편을훔쳐보며 '자위'를 즐기는가 하면,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과는 '성적 파트너쉽'을 유지해왔다. 그러면서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무조건 적대적이고, 이혼한 남편의 여친에게 집적거린다. 자신의 강간 사실을 친지들에게 당당하게 밝히면서도 경찰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패스트푸드 점의 봉변은 알고보니 한 마을 가족과, 동물들을 몰살하다시피 한 그의 아버지의 범죄와 그의 조력자로 봉인된 10살 시절 사이코패스 딸이었던 미셸의 과거로 연결된다. 그 사건 가해자의 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아버지가 30년만에 가석방 신청을 하자 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가는 그녀, 하지만 이제 자신이 어렵게 일궈온 현실의 성취를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고 싶지 않다. 



쉽게 그녀의 편이 될 수 없는 그녀 
'편'이라는 개념이 익숙한 우리에게,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한때는 사이코패스 조력자였을 지도 모르며, 이제 그 과거로 부터 떨어져 나온 현재에서 게임의 판매에 눈이 벌개 성의 상품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녀 자신의 '성적' 태도 역시 그다지 '도덕적'이어 보이지 않는 그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이 미셸의 '강간'을 희석화시킨다. 그녀를 '피해자'의 편에 세워 두둔하자니, 미셸이 보이는 행태들 역시 '돌맞을 짓', 딜레마다. 

<엘르>는 노장 폴 베호벤 감독의 16번 째 영화이다. 그의 작품이 늘 '폭력'과 '섹스'라는 화두를 피하지 않고 '직진'해왔듯이 <엘르>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그가 등장시킨 주인공은 <포스맨(1983)>이래, <원초적 본능(1992)>, <블랙북(2006)>, <트릭(2012)>의 그의 전작 속 주인공들 처럼 쉽게 '우리'라 얼싸안기 쉽지 않은, 도덕적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 자신이 이미 어린 시절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호한 사건의 트라우마를 가진 존재, 그리고 이제 그 '과거'를 애써 지운 채 '냉혈한' 처럼 사업에 매진하며 그녀 스스로 도덕적이라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벌어진 범죄. 심지어 그 범죄자는 알고보니 그녀 자신이 '유혹'한 대상이며, 위기의 상황에서 종종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제공했던 인물. 과연 이런 부도덕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아왔던 그녀는, 그런 그녀를 보는 관객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결국 이러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고 서로 엇물리며 얽힌 사건들을 통해 폴 베호벤 감독은 부조리한 인간 세상에서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그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가 그 속셈과 결말이 뻔해보이는 재혼을 선택했을 때, 어머니를 죽이겠단 장담처럼 결국 동일한 결과를 맞이하고 만다. 모녀라는 형식적 경계에서 한 치도 넘어서지 않으려는 그녀를 도발이라도 하듯, 끝까지 재혼이라는 해프닝을 벌이며 그녀의 '부담'이었던 어머니, 하지만 그 어머니의 병실에서 조차 자신에게 딸로써 끝까지 한 치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냉정했다 힐난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되새기는 대신 원망과 tv에 집중했던 그녀는 이별 인사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어머니를 보내다. 장례식조차 그녀의 식대로. 



엘르를 통해 드러난 부조리한 가족사 혹은 인간사 
하지만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바램대로는 아니지만, 그토록 어머니가 원했던 아버지를 찾아간다. 30년만의 가석방에 실패한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침을 뱉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스스로 생을 버린다. 어머니를 잃고, 그리고 아버지를 잃고 그녀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웃집 남자 앞에서 사실은 과거 사건의 피해자였을 지도 모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을 때처럼.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지만 더는 '자위'로 혹은 '불륜'으로, 심지어 '도발'이나, '위악'으로 자신을 달래던 미셸의 삶을 지속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유골을 되는대로 뿌렸지만,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은, 이제 미셸 자신의 삶에 뜻하지 않은 '이정표'가 된다. 돈으로 남편을 산다 퍼부었지만, 결국 반추해보니 남자가 그리워 절친의 남친을, 이웃집 남편을, 그리고 강간범과의 정사를 허용했던 그녀의 삶 역시 그녀가 그리도 '거역'해왔던 부모 세대의 삶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비로소 그녀는 '과거'로 부터 자유로워진 대신, 어느덧 어머니가 되어 자식의 세대까지 책임져야 할 위치가 '아들의 욕'과 함께 절실하게 다가온다. 

언뜻 보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무표정하게 도발해 가는 미셸, 그러나 자신을 채워왔던 그 '부조리한 관계'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간다. 게임 성공 축하 파티에서 절친에게 그녀 남편의 섹스 파트너가 자기였음을 고백하는 방식으로. 

과거 아버지 사건 이후, 자신을 세상 속에 10살 짜리 사이코패스로 던져준 이래 미셸은 '법'의 도움을 거부했다. 그들은 늘 자신의 진실에 귀기울여 준 대신, 자신들의 편의 대로 그녀를 요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가 부른 건, '법의 도움'이 아니라, 어쩌면 30년만에 '법'에 대한 복수이자, 또 다른 결자해지일 지도.  진실 대신 '이슈'를 원한 법에게 가장 적절한 먹이를 공급하며. 

아버지 때처럼 똑같이 머리가 일그러져서 죽어나간 그녀의 강간범, 그는 그녀를 '사랑'으로 기억하고 싶었지만, 미셸은 그의 '강간'을 용인할 수 없다.  자신이 친구 앞에 불륜을 고백하듯, 그런, 하지만 보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의 '범죄'를 '처단'한다. '법'의 도움 없이 살아온 그녀만의 '재판'이요, '판결'이며, 범법자의 처리이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의 도움을 빈, 당시 그녀를 기만했던 법을 '기만'한 복수이다. 열 살 사이코패스로 세상에 던져서 그 누구의 도움없이, 그러나 세상 속에 번듯하게 한 자리 차지하며 견뎌냈던 미셸 식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부조리한 현대사의 '극단적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30년전 아버지와 그녀가 그 사건으로 내내 꽁꽁 묶여있듯이 이제 그녀는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아들을 그렇게 자신의 곁에 묶는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젖'을 양보했던, 그래서 늘 '가정'을 그리워하던 아들에게 '가장'의 지위를 '선물'하며 남보다도 못한 모자 관계를 청산한다. 얼굴 색이 다른 아기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며느리, 그리고 번듯한 차와 그럴듯한 직업적 전망, 그리고 미셸의 커다란 집, 그리고 이제 피를 나눈 어머니와 아들은 그에 더해 '피의 공모자'로 거듭난다. 무위도식하며 어머니의 재산에 기대어 철부지였던 아들이 받아든 '가장'이라는 혹은 '아버지'라는 선물의 댓가는 10살 시절 그녀가 그랬듯이 가혹하다. 10살 무렵 미셸은 아버지가 저지른 종교라는 이름의 범죄 공모자가 되었고, 이제 아들은 미셸이 재단한 성범죄의 공모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가혹한 가족사'의 승계자로 '죄책감'을 짊어지고, 그렇게 미셸 일가의 잔혹한 역사는 계승된다. 

by meditator 2017. 6. 22. 18:23

영화 <원더 우먼>을 봤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건 새로나온 볼만한 영화라던가, dc코믹스의 새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라던가 하는 요건보다는 지극히 사적인 '추억 여행'때문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그리고 그 시절 '린다 카터'의 원더 우먼이 아닌데도 극장으로 향한 내 발길을 보면, 어린 시절 슈퍼맨과 배트맨을 보던 아이들이 자라 극장판 히어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향하는 그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70년대 그 시절의 <원더 우먼> 
<원더 우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tv에서 <원더 우먼>을 방영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아야 겠다. 1979년부터 tbc를 통해 방영되었던 <원더 우먼> 시리즈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육백만불 사나이>에서 부터, <소머즈>, <전격 z작전> 등 인기있는 외화 시리즈의 흐름 속에 등장했던 '미드'이다. 그저 '미드'여서 인기가 있었던 것일까? 70년대는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로 상징할 수 있는 시대다. 이 여배우들은 그녀들의 대표작이자, 70년대 드라마의 상징적 작품이라 할 <청실홍실(1977)>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전도유망한 능력남을 놓고 순애보의 경쟁을 벌이는 두 여인, 그들이 부잣집 딸이건, 가난한 직업인이건, 화려하건, 순수하건, 그들의 삶의 결정적 요소는 '사랑'이고, '결혼'이었다. 그런 순종적이고, 여전히 현모양처를 지향하는 여성들이 드라마를 점령하고, 그로부터 배제된 여인들은 슬픈 운명의 서사를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되풀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황금 팔찌를 두르고 총알을 막아내고,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을 올가미로 대번에 굴복하게 만드는 여성 히어로라던가, '뚜뚜뚜뚜' 거리며 저 먼곳의 소리를 듣고, 대번에 달려가 적들을 제압하는 그녀들은 '획기적인 여성상'이었다. 맨날 tv에서 '지고지순'하게 울며 불며 사랑을 위해 매달리던 여성들만 보던 그 시절 아이들에게, 대놓고 온몸의 라인이 드러내는 '섹슈얼'한 미스 아메리카 출신의 미녀라던가, 정돈되지 않은 듯 날리는 머릿결에, 자연스러운 옷차림으로 어떤 미션도 척척 수행해 내는 '이지적'인 분위기의 이방인은 당시 소녀들에겐 신선하고 매력적인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진취적'인 그녀들의 캐릭터만이 매력적인 건 아니었다. 당시 소녀들에게 <원더우먼>이나, <소머즈>는 또 다른 버전의 '로맨스' 담이기도 했다. 아마존의 공주였던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와, 안경만 쓰면 못알아보는 비서로 불철주야 그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원작이 참조했다는 '마가렛 생어의 페미니즘'과는 별개로, 현대판 '인어공주'와도 같은 '로맨틱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서사로 다가왔다. '소머즈'와 육백만불 사나이의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도 마찬가지로. 그녀들의 캐릭터는 진취적이었지만, 동시에 지고지순한 순애보의 주인공들이었다. 



2017년의 원더우먼
이제 2017년에 돌아온 <원더 우먼>은 그 시절, '사랑'의 기억을 모티브로 삼는다. 하지만 원더우먼이 하는 2017년의 사랑은 1970년대의 그녀와 또 다르다.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다이애너 공주,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공주의 신분으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사'로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제 왕국의 그 누구도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을 무렵, 데키스키라 왕국을 지키는 버뮤다 삼각지대가 뚫리고 '트레버 소령'이 등장한다. 

그의 등장과 그를 통해 전해들은 전쟁은 다이애너에겐 '하네스'의 귀환으로 전해졌고, 의기가 충천한 그녀는 그를 따라 '하네스'를 제압하기 위해 '인간들의 세상'으로 떠난다. 하네스에 대한 전의가 충만한 다이애너와 역시나 휴전 회담을 앞두고 스파이로서 적의 위기를 감지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의 음모를 막으려는 트레버 소령은 다른 듯 같은 모습이다. 인간 세상의 실상을 모른 채 하네스만을 향해 맹목적인 다이애너나, 자신이 손에 넣은 적의 음모를 막기 위해 군율과는 상관없는 작전을 계획하는 트레버 소령의 고지식한 애국심은 궤를 같이한다. 마치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보기 전의 순수한 열정을 가진 미성년들처럼. 그런 그들이 자연스레 서로에게 공감하고 의지하며, 나아가 남자와 여자로서 '사랑'의 감정까지 전개해 나가는 것에 이물감이 없다. 

하지만 시리즈 물로서 미드 속 다이애너가 트레버 소령의 비서로 자신을 감추며 그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들의 무리를 제거하는데 매진하는 것과 달리, <원더 우먼> 속 다이애너는 이제 세상을 구할 '히어로'로서 '업그레이드'될 사명을 부여받는 존재이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은 '자각'의 매개체이지만, '동반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기에 트레버 소령은, 가장 불가능한 평화의 조건을 가지고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 패트릭 장관의 모습을 한 하네스로 인해 '인간 세상'의 부조리함에 좌절하는 원더 우먼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존재로 '산화'한다. 인간은 부조리하나, 그럼에도 그 '부조리함'을 넘어서는 '희망' 역시 인간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인간 세상에 온 히어로'의 명제'를 풀이해주는 존재로 그 역할을 다한 채, '영원한 하지만 이승에선 그 운명을 다한 사랑'으로 그녀를 인간 세상에 머물게 한다. 2017년의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원더우먼과 트레버 소령의 이별 그 순간이었다. 그 어떤 사랑 영화보다도 극적이었고, 슬펐던. 그리고 그 슬픔은 곧 히어로 원더우먼의 동력이 된다. 

1970년의 다이애너가 영웅이지만, 매번 트레버를 구해줌에도 그의 그늘 속 여성으로 남겨진 것과 달리, 2017년의 다이애너는 트래버를 통해 '남녀간의 사랑'을 이루지만, 동시에 동지인 그를 통해 '히어로'로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한다. 그리고 이제 '사랑'의 온기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얻고 '히어로'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해나간다. 2017년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by meditator 2017. 6. 9. 16:49

<캐리비안의 해적> 네 번 째 시즌이 돌아왔다. 개봉된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전세계 박스 오피스 1위라는 왕년의 기록에는 못미치는 아쉬운 성적을 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네버엔딩 스토리'를 기대하는 오랜 팬들에게는 시리즈의 종말이 아닌 '연속'을 기대해 볼 여운을 남기며 순항하고 있다. 무엇보다 분장을 통해 빛을 발하는 배우 조니 뎁, 예전만 못하다 해도 그의 잭 스패로우가 돌아와 반갑다. 




시즌 4, 시리즈의 연속성을 상기해 내는 방식
dead men tell no tales, 죽은 자는 말이 없다란 부재를 가지도 돌아온 시즌 4, 이 부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시즌1을 상기해야만 한다. 

2003년 개봉한 시리즈의 1편 <블랙 펄의 저주>에서 잭 스패로우(조니 뎁 분)는 헥터 바르보사(제프리 러쉬 분)와 함께 '블랙 펄'을 타고 카리브 해에서 보물을 약탈한다. 하지만 바르보사는 잭을 배신 그를 외딴 섬에 가둔다. 그러나 바르보사는 밤이 되면 '해골'이 되는 저주에 갇힌다. 영원히 죽을 수 없는 저주에 걸렸던 그, 물론 그의 '저주'는 1편 마지막 절묘한 승기의 트릭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4편의 부재인 '죽은 자는 말이 없다 dead men tell no tales는 대사는 바로 이 시리즈의 주요 등장 인물이 되어버린 앵무새의 입을 통해 '발언'된다. 

이렇게 죽을 수 없는 자들의 저주로 시작되었던 1편, 오랜만에 어렵사리 돌아온 4편은 그 1편의 '죽은 자에게 내려진 저주'를 다시 불러온다. 잭 스패로우를 배신하고 저주에 걸린 보물을 약탈한 이유로 '죽을 수 없는 해골'이 되었던 바르보사 대신, 해적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다 젊은 잭 스패로우의 덫에 걸려 마의 삼각지대에서 몰살한 캡틴 살라자르(하비에르 바르뎀 분)가 '죽음'의 저주를 받은 자로 등장한다. 



서로가 적이 되어 싸우는 '해적'과 '해군', 그들의 승리는 언뜻 눈에 보이는 '보물'인 듯하지만 결국은 '죽지 않'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 하지만 '저주'는 바로 그런 그들을 영원히 '죽음'의 덫에 가두어 버린다. 영원한 안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연옥'의 덫에서 이를 갈며 '복수'를 꿈꾸는 캡틴 살라자르와 그의 부하들은 1편의 '저주'에 걸린 바르보사보다 '죽음'의 덫이 업그레이드 된 셈이다. 

늘 시리즈가 그래왔듯이 '죽음'과 연관된 적의 캐릭터를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그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인 배우를 통해 버전 업하며 등장한 시리즈 4편은 그저 시리즈의 연속만이 아니라, 바르보사의 뜻밖의 운명을 통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란 부재를 새롭게 해석해 낸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언제나 그렇듯 <캐리비안의 해적>하면 떠오르는 건 조니 뎁의 잭 스패로우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그의 활약이란 언제나 '삽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적의 캡틴 살라자르를 마의 삼각 지대에 가둔 젊은 잭의 기지처럼, 잭의 활약상이란건 '정공법'이라기 보단, 나비처럼 날다, 벌처럼 한 방 콕하고 쏘아서 적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식이니 언제나 그가 '나비'처럼 나는 동안 앞서 고군분투하는 고지식한 동료들이 필요한 것이다. 

시리즈 4편 역시 마찬가지다. 마의 삼각지대에서 바르보사가 자기 앞을 거스르는 그 모든 것들을 '아귀'처럼 삼켜버리며 잭을 향해 돌진하는 동안, 잭의 꼬락서니라고는 온 도시를 휩쓸다시피한 금고 탈취 작전조차 땡전 한 푼만(?)  건지고, 그의 수호자인 나침반마저 술 한 병에 거간하다, 결국 처형장에 서는 처지가 되고 만다. 또 그래야 잭 스패로우답다.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그를 닮아 그에 대한 배신을 밥먹듯하듯 하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는 것이 역시나 또 잭 스패로우 다운 '시즌 4의 입장'이다. 






그렇게 잭 스패로우가 우여곡절 죽음의 사투를 벌일 때 '우연'처럼 그 행로에 동행한 두 젊은이가 있었으니, 뜻밖에도 우연 치고는 깊은 인연을 가진 카리나(카야 스코델라리오 분)와 헨리(브렌든 스웨이츠 분)다. 아버지를 찾아서, 혹은 아버지에게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모험'에 나선 두 젊은이들은 잭과 뜻을 같이 하여 항로에 존재하지 않는 섬을 향해 떠난다. 

그 예전 시리즈에서 총독의 딸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 분)의 캐릭터를 이어받은 키이나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마녀'로 오해받은 하지만 실은 진보적인 여성 과학자로, 당연히 터너가 연상되는 헨리는 역시나 그처럼 재기넘치는 거기에 저주에 걸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신화'에 통달한 이야기꾼의 재능를 탑재해 과학과 신화의 '콜라보'로서 4편의 동력이 된다.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뱃사람의 아들 터너와 비슷하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과학'과 '신화'를 통합해 새로운 시리즈의 구색을 맞추려 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여성의 캐릭터는 최근 '디즈니 영화'의 조류를 성실하게 이어받고 있다. 

이렇게 새로이 등장한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의 배후인지, 조력잔지, 아니면 따로국밥인지 결국 한 배를 타고만 잭 스패로우의 조합은 엘리자베스와 터너와의 그 파트너 쉽의 연장이자 다른 버전으로 시즌 4를 익숙하게, 그리고 신선하게 끌어간다. 




이런 조합이 끌고가는 시즌4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헐리웃의 아버지 서사'이다. 아버지를 찾아나선, 혹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젊은이들, 그들은 마치 적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아버지였다는 <스타워즈> 식의 아버지 찾기를 극적으로 반복한다. 대신 그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 노회한 해적과 과학으로 무장한 젊은 여성 과학자로 대신할 뿐이다. 부녀는 무시하고 적대하고 갈등하고 결국 서로를 알아보지만, 그건 결국 아버지의 희생을 통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란 '이별' 공식을 순탄하게 반복한다. 아버지는 불가능하다 했지만 자신만의 신념으로 결국 아버지를 구해낸 아들의 성공 역시 또 다른 아버지의 '극복'이다. 그런 부녀의 극적인 상봉기와 이별기의 사이에서 잭 스패로우는 마치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처럼 거들 뿐. 

그러기에 어쩌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1편에서 가장 비열하게 등장했던 바르보사라는 저무는 해적의 장렬한 연대기에 대한 '경의'라 해도 어폐가 없을 듯하다. 그토록 궁금케 했던 '블랙 펄'의 저주조차 그가 단번에 허무하게 풀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캡틴 살리자르가 부하들과 무시무시하게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가운데 '죽음'의 저주를 풀기위해 고심했으며 황금의 부귀까지 누리던 바르보사는 기꺼이 죽음을 통해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유언을 남기고 퇴장한다. 죽어가는 자의 가장 명예로운 한 마디이다. 그 명예로운 해적의 연대기에 환타스틱한 캐리비안의 해적선 모험은 가장 멋드러진 토핑이다. 

 
by meditator 2017. 6. 2. 16:12

20세기 최고의 서스펜스 스릴러가 칭해지는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이 <석조 저택 살인 사건>으로 돌아왔다. 고전적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영화는 1950년대 뉴욕 대신 1945년 경성을 배경으로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어내려가듯 '고전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진행된다. <시카고 타자>가 과거로 돌아가 일제 시대 그 암흑을 '환락'으로 밝히는 경성의 유흥가를 그 시대 젊은이들의 피난처로 그려내듯 <석조저택 살인 사건>은 원작 1950년대 뉴욕의 불야성을 일본은 패망하고 새로운 시대의 흥청거림에 불을 밝히는 경성의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두 젊은이의 뜻하지 않은 만남과 사랑으로 연다. 


 

 


순애보의 씨실 위로, 법정 공방전의 날실이
돈이 없어 택시 운전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하연(임화영 분)을 자신의 특기인 마술로 구해준 가난한 마술사 이석진(고수 분)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그녀와 방을 나누어 쓰는 사이가 되다 결국 방을 함께 쓰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풍운의 꿈을 안고 떠난 부산 공연에서 아내는 그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호텔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경성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선남선녀의 순애보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석진과 임화영의 비극적 순애보가 씨실이라면 그 러브 스토리 사이를 '날실'처럼  노회한 변호사 윤영환(문성근 분)과 서릿발같은 검사 송태석(박성웅 분)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법정 공방전이 채워간다. 원작의 서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은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처럼 러브 스토리와 법정 서사를 한 장, 한 장 엇물리며 '범인'에 대한 긴장감을 높여가는 방식을 그대로 채택한다. 


 한 편의 추리 소설같다는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안타깝게도 '찬사'가 아니다. 아직 가해자가 드러나지 않은 법정, 증거를 가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벌어지는 법정 공방전과 최승만의 순애보는 서로 엇갈리며, 비극적 순애보의 여정을 달군다. 하지만 그건 소설의 경우다. 소설은 '시각'을 통해 수용되지만, 그 시각을 메우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문자라는 '기호'이고 그 '기호'는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통해 '독해'되어, 뇌에서 '이미지화'한다. 그러기에 범인을 드러내지 않은 재판과 그 행간의 순애보는 범인을 추리하고, 그의 만행을, 그리고 최후의 복수의 방식에 대해 한껏 '뇌'를 달군다.

반면,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를 전제로하여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들은 의아하다. 도대체 최승만의 아내가 죽음에 이르는 저 비극적 순애보와 이 법정의 살인 사건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기에.  '석조 저택'이 '추리'하라 내놓은 여정에 대해 마치 양 손 모두를 뒤로 감춘 채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패를 가지고 희롱하는 게임의 술래가 된 양 당황스럽다. 한 시간 여의 과정은  '불친절'이나, '장황함' 혹은 '답답함'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느낌처럼. 그러기에 과연 원작의 서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각색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베스트 셀러가 곧 좋은 영화를 보장해 주는 건 역시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한 시간여, 아내를 잃은 이석진은 자신을 아는 그 모든 이를 죽였다는 위조 지폐범을 잡기 위해, 이빨을 뽑고, 얼굴에 칼집을 내며 자신을 지운 채 '최승만'이 되어 경성의 택시 운전사로 전전한다. 경성에서는 드문 외국어를 하는 그를 찾기 위해 택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깔개의 떡밥을 던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빗속에서 드디어 최승만은 그, 남도진을 만난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 법정에 드디어 살해 혐의를 받은 이가 등장한다. 남도진이다.  


 


한 편의 추리 소설 같다서 아쉬움 
안타깝게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지 도통 알 수 없던 영화는 그 빗속에 등장하는 남도진, 그리고 법정에 등장하는 남도진으로 단번에 명확해 진다. 이 '명확함'은 그리고 그 한 시간 여의 사랑꾼을 고군분투했던 고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도진으로 분한 '김주혁'의 존재함에 상당히 의지한다.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모두 목숨을 거두었다는 위폐범이자,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성 밤 거리의 부호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그러기에 이런 '개연성'이 되는 '존재감'의 배우를 굳이 한 시간 여 장황한 설명을 해가며 아낄 필요가 있었을까란 물음이 던져진다. 머리로 추리하여 만들어 가는 캐릭터와, 배우의 존재감이 주는 '갭'에 대한 제작진의 '판단 미스'의 지점이다. <비밀은 없다(2015)>, <나의 절친 악당들(2015)>, <공조(2016)>을 통해 '악역'의 카리스마가 한껏 고양된 김주혁을 '캐스팅'해놓고, 사전 정지 작업에 시간을 끌어버린 영화는 이후 남도진의 악행을 '비바체'로 풀어낸다. 영화 초반 '복선'처럼 등장한  '보이는 것을 숨기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이석진의 마술 방식을 활용한 '복수'에 대한 감탄은 찰라다. 

그러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과연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반문하게 된다.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이라는 명확한 '스릴러' 장르의 이름표를 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은 이 영화를 다보고 난 후 관객들의 잔상에 오래오래 기억되는 건,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관없이,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던져 '이석진 식의 사랑'이었을까? 그렇다면 애초에 제목부터 다시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와 손톱>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제치고,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제시되었을 때 관객은 '그 살인 사건' 자체에, 그리고 그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기대를 가지고 극장을 찾는다. 하지만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은 원작의 '손가락'을 둘러싼 불꽃튀는,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모호한 법정 공방으로 자신들은 알지만 '관객들은 모르는 이야기로 시간을 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뜻밖의 반전과 함께 영화는 이걸 몰랐지 라며 의기양양하겠지만, 관객은 그 의기양양함에 탄복하기엔 너무 지루한 여정을 달려왔고, 고대했던 남도진의 활약은 단편적이었다. 

물론 이런 안이한 '각색', 그로 인해 불친절한 전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경성 기담>의 그 분위기를 그리워했던 사람이라면 1945년 경성을 재현해낸 이 영화에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악인으로 등장한 그 존재만으로도 발군이었던 김주혁을 비롯하여, 문성근의 노회한 친일 변호사의 연기 역시 여운이 길다. 



 





by meditator 2017. 5. 25. 04:47

<에어리언;커버넌트>에 이어 2위를 수성하고 있는 <보안관>은 무난히 100만 고지를 넘으며 순항하고 있는 중이다. (5월 3일 영진위 기준 1,176,647명) 그런데 예의 '사나이 픽쳐스'의 작품답게 '사나이'들의 '거친' 이야기를 펼쳐보이고 있는 이 영화의 제목은 조금은 생뚱맞게도 그 서부 영화에서 등장했던 '보안관'이다. 고개를 갸웃해 보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보안관'이란 제목만큼 이 영화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수긍이 가고야 만다. 그렇듯 영화< 보안관>은 부산 기장을 배경으로 서부 영화의 보안관처럼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왕년의 형사 대호(이성민 분)의 활약상을 그린다.  




2017년 부산 기장 버전의 서부 영화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주윤발이 이쑤시개를 씹어 먹으며 등장하는 홍콩 느와르 영화가 시선을 잡고, 그 영화의 장면, 장면과 대사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는 대호란 '아재'가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 속 영웅과 달리, 용감하게 동료 형사와 함께 마약 사범을 잡으러 쳐들어간 모텔에서 그만 그는 마약 사범을 눈앞에서 놓치는 건 물론, 동료 형사조차 잃고, 결국 형사직에서 물러나고야 만다. 그로부터 3년 그는 형사라는 법적 신분 대신 기장 마을 '수호자'로 동네를 누빈다. 그런 그의 앞에 바로 그 3년전 마약 현장에 있었지만 초범이라는 이유로 대호가 도와줬던 종진(조진웅 분)이 마을에 비치 타운을 세우겠다며 화려하게 입성한다. 

영화는 서부 영화의 공식를 그대로 답습힌다. 마을에서 신망을 받던 보안관, 하지만 마을에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악의 무리 앞에 그는 무기력하다. 그러나 '보안관'이라는 직업 의식에 철저한 그는 모두의 외면을 받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자신을 내던져 악을 소탕한다. 클린트이스트우드, 존 웨인 등등 정의로운 보안관이 등장했던 그 예전 서부 영화들 모두 큰 범주에서 이 '공식'을 벗어나지 않았고, 제목부터 <보안관>인 이 영화 역시 그 공식을 따라간다. 그러기에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대호가 등장한 그 순간부터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는 대부분의 관객이 눈치를 챈다. 

하지만 그 뻔한 구성의 <보안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 흔한 우리나라 아재들의 정서를 '비틀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자타공인 기장 마을 보안관처럼 살아가는 대호의 정서와 그를 둘러싼 이들의 분위기는 이른바 '우리가 남이가'이다. 정수기 사업을 하는 강곤이 음주 운전으로 면허가 정지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동네 이웃들에게 들었을 때 대호의 반응은 그래 내가 그 정도는 해결해 주지가 아니라,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에게 먼저 말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오지랖, 나아가 사명감처럼, 그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를 기반으로 동네 모든 대소사의 중심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그를 형, 아우 하며 떠받드는 종화(김종수 분), 선철(조우진 분), 춘모(배정남 분) 역시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를 기반하여 그에게 의지한다.

그런 그들의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끈끈해 보이는 '로컬 공동체' 앞에 기장 마을의 발전을 내세운 종진이라는 사업가가 등장한다. 처음에 '우리'가 아니라는 이유를 그의 등장을 배척하고 시샘하던 사람들, 하지만 종진이 자신 역시 기장 출신이라며 조기 축구 등의 로컬 커뮤니티를 포석으로 그의 풍부한 재력을 앞세워 다가서자 그 끈끈했던 관계가 하나둘씩 무기력해진다. 정수기와, 소파 등 그들의 먹고사니즘은 결국 대호 대신 종진을 마을의 대표로 뽑기에 이르른다. 



'우리가 남이가'보다 강한 '목구멍이 포도청'
'목구멍이 포도청' 앞에 '우리가 남이가'가 손바닥 뒤짚혀지듯 하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먹고사니즘을 앞세운 로컬 공동체의 변질, 혹은 붕괴에 대응한 대호의 캐릭터다. 그는 전형적인 '아재'로 등장하지만, 그 '아재'는 그의 동료들과 달리, 이미 3년 전에 그만둔 '한번 형사면 영원한 형사'라는 직업 의식으로 종진을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의 제목이 <보안관>인 이유이며, 그 지점에서 '사나이'들을 다룬 한국 영화에서 신선한 자신만의 포지션을 확보한다. 

그 옛날 전성기 서부 영화의 보안관들이 마을을 지키는 과정에서 때로는 자신의 가족과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리면서도 자신의 직업적 사명감을 놓치지 않듯이, 대호는 이제는 거물 사업가가 되어 나타난 종진을 '한번 마약쟁이는 영원한 마약쟁이'라는 형사의 시선으로 대한다. 하지마 그런 대호의 의심은 지역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아재의 '시기'와 '질투'로 오해를 받다 못해 배척받기에 이른다. 처남 덕만(김성균 분)이 그를 돕지만 희순이 없었다면 그 역시 얼굴을 바꾼 동네 아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란 예측하기는 힘들지 않다. 

영화는 이른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지역색이 끈끈하다는 지역의 사투리를 앞세운 지역 공동체를 배경으로 삼으며, 그 강한 지역 연고주의의 허상을 서사의 주요 동원으로 삼는다. 부를 앞세운 종진은 대호가 그랬듯이, 대호를 벤치마킹하며 동네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간다. 대호에게 형, 동생하며 격의없이 굴던 사람들은 이제 오히려 그런 종진을 의심하는 대호를 알고보면 '남'이라며 밀어내며 그 자리에 종진을 앉힌다. 이런 정황은 결국 그들이 지난 시간 대호에게 격의없이 호형호제한 이유 역시 종진과 다르지 않다는 역설적 이해를 하도록 만든다. 그토록 끈끈한 지역 공동체의 얄팍한 바닥을 영화는 절묘하게 극적 갈등의 요소로 활용한다. 

그런 억울하다 못해 결국 짐까지 싸야하는 상황에서 대호는 '프로패셔널한 직업 의식'을 놓지 못한다. 물론 그의 그 '프로패셔널함'에는 종진과 얽힌 동료의 죽음이라던가, 자신의 직업을 잃게 된 '구원'이 원인이 되지만, 영화는 예의 한국 영화들이 그런 '원한'에의 집착에 호소한 것과 달리, 집요한 마약반 형사로서의 본능적 직업 의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하여 '우리가 남이가'를 등에 업은 지역 사업가와 이제 언제나 서부 영화에서 그래왔듯 '외톨이가 되어버린 보안관' 대호의 사생결단이 영화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덕분에 영화는 사나이인 척하지만, 아재인 등장인물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들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그 끈끈한 지역 정서를 뒤집으며 한 마을 사람들 전부가 마약 사범이 될뻔한 사건으로 판을 키운다. 얄팍한 인간 군상은 결정적 장면에서 '마을 공동체'의 힘을 증명해 낸다. 그리고 그 얄팍한 '우리가 남이가'는 본래의 궤도를 회복한다. 하지만 영화 속 엔딩에서 그들이 다시 얼싸안으며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하지만, 이미 서로는 안다. 그들을 감싸주었던 그 공동체라는 것이 그간 얼마나 자의적이었으며, 자기 필요에 의한 것이었던가를. 하지만, '사람사는게 다 그렇지'하며 '눈가리고 아웅'하듯 다시 ' 속물'을 접어둔 채 호형호제'의 관계로 돌아간다. 그렇게 여전히 '지체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지역 정서의 속살을 보여준다. 여전히 전근대적인 척하지만, 결국 그들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그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정의는 '프로패셔널리즘'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며 새 시대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이 영화가 어떤 결말에 이르를 지 예상 가능했던 <보안관>, 하지만 박스 오피스 2위의 저력은 바로 그 뻔한 이야기를 아무려 간 건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보안관' 대호의 활동담이다. 그리고 그걸 채워간 건, 그들의 면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어쩐지 속편이 궁굼해지는 대호및 동네 아재들의 생생한 캐릭터이다. 
by meditator 2017. 5. 11. 19:46

그는 형사였고, 변호사였고, 그리고 임금님이 되었다. 하지만, 시대를 달리하고 다른 직군에, 때론 가해자였다가, 피해자이고, 정의의 사도로 변화무쌍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그는 이선균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될까? 


드라마에서 그는 스스로 돋보이기 보다, 다른 배우를 돋보이게 해주는 남자 배우라 칭해졌다. <커피 프린스(2007)>에서 그러했고, <골든 타임(2012)>에서도 그의 그런 캐릭터는 어울렸다. 그러던 그가 자신을 두드러지게 어필하기 시작한 건 <파스타(2010)>부터 였다.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언성을 높이며 닥달하며, 짜증스럽지만 이른바 '츤데레'의 전형이라 여겨졌던 속정깊은 쉐프 최현욱은 누군가를 돋보이게만 하던 그를 전면에 내세웠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라 불리던 시절, 그래서 마흔 줄이 되도록 대학생으로 등장하며 여러 여배우들과 '사랑'을 나누던 시절에도, <화차(2012)>에서도,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에서도 그 보다는 같이 출연한 여배우들이 더 회자되었었다. 그러던 그가 사랑꾼 대신 남자 파트너를 선택한 <끝까지 간다(2014)>를 통해 '이선균'을 각인시켰고, 2015년 백상 예술 대상 남자 최우수 연기상을 거머쥐었다. 물론, 그 <끝까지 간다> 역시 최우수상 트로피는 두 개 였고, 함께 출연했던 조진웅과 그 기쁨을 나누어야만 했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을 지나서야 등장하는 조진웅과 달리 영화를 내내  끌어갔던 이선균이란 존재감에 대한 '세상의 인정'이 덜해진 건 아니었다.  



이선균, 전면에 나서다 
그런 자신감과 인정은 2014년 <성난 변호사>에 이어, 얼마전 <임금님의 사건 수첩>의 개봉으로 이어졌다. 드라마 속 그가 2016년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를 통해 익숙한 사랑꾼 이선균의 유부남 버전으로 등장했다면, 형사 이선균의 좌충우돌 어드밴처물이었던 <끝까지 간다>의 캐릭터는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으로 이어진다.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현대와 조선, 그리고 변호사와 임금님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 배경을 가졌지만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하다. 두 작품의 중심엔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있다. 이선균은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그의 캐릭터, 예를 들어 조선시대 예종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등장했지만, 그는 우리가 사극에서 보았던 그 예의 임금님이 하는 말투와 태도를 배제한다. 그의 말투는 그가 현대극에서 썼던 그 말투 그대로이며, 그의 걸음거리, 심지어 왕이라는 존재임에도 늘 상투 바람으로 어전 회의마저 임하는 그의 캐릭터는 이미 '고증'이라는 범주를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알고보면 예종이 왕이 된지 얼마 안되어 불과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역사절 사실을 들먹이는 것자체가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작 <성난 변호사>처럼,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마치 <007> 시리즈처럼 이선균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에 놓고, 그에 맞춰 기획된 이선균표 어드벤처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 방식은 김영민 표 <조선 명탐정> 시리즈와  이제 유해진이라는 캐릭터를 앞세웠던 몇몇 영화를 통해 영화계의 한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조선 명탐정> 시리즈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광산'을 매개로 한 세도가의 이권이 국익을 좀 먹는다는 조선판 '적폐' 는 마치 클리셰처럼 <임금님의 사건 수첩>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성난 변호사>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기는 것이 승소'라 여겼던 승소 확률 100%의 변호성이 역시나 적폐 세력인 거대 로펌의 마수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위기에 빠졌다 살아나며 통쾌한(?) 반전 활약을 선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적폐'가 주는 비감함은 <내부자들> 등의 사회 고발성 영화의 그것과 다르게 그저 오락 영화의 트렌드로서 기능하는 바가 더 크다. 

그런 지점에서 이들 두 영화는 '이선균'에 대한 호감을 전제로 두고 '관람'을 요청한다. 그의 사극 예법에 어긋나는 말투, 그가 이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예의 껄렁껄렁한 태도, 시니컬한 말투에 대한 호감을 전제로 그런 변호사와 임금님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의 궤적은 다르다. 이미 갓 100만을 넘은 채 종영했던 <성난 변호사>와 달리, 이제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2>, <보스 베이비>, 심지어 <보안관>에 이어 4위로 내려 앉았지만, 동시 개봉했던 <특별 시민>을 가볍게 누르며 잠시 박스 오피스 1위조차 넘봤던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그보다는 나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마치 전작를 벤치마킹하듯,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성난 변호사> 개봉 이후 질타에 시달렸던 여배우의 존재감이나 기대에 못미쳤던 사무장 파트너의 활약을 보강이라도 하듯, 신예 안재홍의 맛깔나는 사관 연기와 이선균의 조선 시대 임금님의 연기의 조화를 이루었고, 김희원의 폭넓은 악역 연기를 더했다. 분량은 적었지만 정해인의 비밀 무사도 신선했다. 무엇보다, <성난 변호사>가 미흡했던 서사의 어설픔을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극복하려 애쓴 듯하다. 결국은 뻔하지만, 그래도 헛웃음이 나오지는 않은 적당한 액션 어드벤처물로서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이제 갓 100만을 넘긴 채 순위가 밀려나고 있는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이선균'을 전면에 내세우면 끝까지 갔던 <끝까지 간다>의 영광에는 못미칠 것이 예상된다. 이 상황이면 '이선균'이라는 장르의 미래 역시 불확실하지 않을까?

이선균이란 장르의 불확실한 미래
그렇다면 과연 이선균이라는 장르는 뭘까? 유해진이 그 특유의 해학과 넉살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고, 김명민이 웃기는 장면에서조차 힘이 실려있는 연기로 승부를 본다면, 오히려 이선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연기하되, 연기하지 않는 편안함이랄까? 그가 영화 내내 짜증을 내고, 말도 안되는 어깃장의 '어명'을 내려도 어쩐지 밉지 않은 그 뜻밖의 친화력이다. 이는 다른 말로 '인간적'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그는 영화 내에서 형사가 되었든, 변호사가 되었든, 혹은 심지어 임금이 되어도 그저 '우리 같은 속좁고 불평불만많은 평범한 인간'으로 수용된다. 우스개로 이선균은 당하면 당할 수록 매력적이라고 하듯, <끝까지 간다>에서 끝까지 몰렸던 고건수의 캐릭터가 가장 그를 돋보이게 했다. 그렇듯 <임금님의 사건 수첩>에서도 임금임에도 때론 신입사관 이서(안재홍 분)에게 툭 하고 밀려가는 그 인간적인 여지에 관객들은 '연민'의 정으로 호응한다. 



하지만 그 친화력은 동시에 '긴장감없음'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임금님의 사건 수첩> 마지막 클라이막스, 조선 제일 검으로서 예종의 비장한 등장은 어쩐지 그럴 것이었으면서도 그 긴장이 풀어진다. 그런 면에서 <끝까지 간다>는 그런 이선균의 편안하지만 어쩐지 긴장감없음을 조진웅이라는 센 캐릭터로 맞붙이며 영화의 힘을 밀어 붙인다. 바로 이 지점이다. 어쩌면 그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끝까지 간다>와 이후 두 영화들이 보인 결정적 차이점이.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전작이었던 <성난 변호사>의 단점을 맛깔나는 신예 안재홍으로 보완했지만, 조진웅이 끌어올렸던 역동성에서 힘이 부친다. 

그러나 배우만을 탓할 것도 아니다. <끝까지 간다>가 그해 백상 예술 대상 감독상과 부산 영평상 각본상을 수상했듯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완성도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과 <끝까지 간다>의 간극은 크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이선균이란 장르의 미래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영화 산업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갈 듯하다. 김명민, 유해진이란 배우들이 그 걸출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앞세운 작품들이 '오락적' 성격과 별개로 작품성에서 미흡했던 전례에 대한 아쉬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대중적인 배우를 앞세운다면 그럭저럭 만들어도 대충 관객이 들거라는 그 '안이함'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선균이라느 장르의 미래는 이런 오락적 영화에 대한 좀 더 진지하고 내용성있는 고민에 대한 숙제로 남겨져야 할 듯하다. 

by meditator 2017. 5. 5. 16:10

2017년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등지에서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 자국의 자본과 자국의 노동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국가 이익 우선주의'라는 외피를 두르고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국가주의', 전체주의, 국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현상이다. 그 선봉에 선 것은 대선 과정에서 막말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국 우선주의'를 감정적으로 호소하며 당선된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자국의 보호무역주의와 반 이민주의 정책을 위해 '펜스'도 마다하지 않고, '동맹'도 깰 수 있다며 세계를 위협한다. 하지만 미국이 두드러질 뿐 세계 어느 나라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가까운 일본이야, '아베' = 일본 국가 주의로 상징되듯 헌법 개정을 전제로 강력한 일본을 구축하여, 다시 한번 '팍스니포니카(PAX-NIPPONICA)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국가주의적인 정책은 일반으로 들어오면 '반한 시위' 등의 민족주의적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세계적인 민족주의의 경향이 도대체 영화 <분노>와 무슨 상관이 있단 것일까?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 전체의 구조화된 질서, 의식, 행동 체계는 개인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이를 아비투스(habitus)로 정의내리고 있다. 즉, 우리 사회의 아비투스가 우리의 일상을 규정하고 한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분노>는 바로 그 일본판 아비투스의 민낯을 드러낸다. 

일본판 아비투스의 민낯 
자국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민자들을 막겠다는 트럼트처럼 일본의 거리에서는 종종 '한군인은 물러가라'는 반한 시위가 등장한다. 여기서 일본은 '우리'요, 한국인은 '타자'이며, '외부인'이다. 자신들이 아닌, 우리가 아닌 타자가 바로 현재 일본의 어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며, 자신의 '위기'의 핑계를 '타인'에게 대고 있다. 정말 그럴까?

영화 <분노>의 시작은 무더운 여름 도쿄의 주택가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부부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피로 흥건한 현장에서 발견된 '憤怒(분노)'라는 단어만이 유일한 단서. 살해범은 잡히지 않고 1년의 시간이 흐르고, 영화는 그 살해범을 잡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용의자의 몽타쥬가 방영되는 시점의 세 이야기를 옵니버스 식으로 엮어간다.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던 딸 아이코(마야자키 아오이 분)를 데리고 돌아온 요헤이(와타나베 켄 분),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딸을 그의 임시직원 타시로(미츠야마 켄이치 분)가 호의를 가지고 대하지만 그런 타시로를 요헤이는 영 미덥지가 않다.

요양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날마다 클럽 파티와 게이바를 전전하며 보내던 유마(츠마부키 사토시 분)는 게이바에서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 분)과 '동거'를 하지만 역시나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접지는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키나와로 엄마를 따라 이사온 스즈미(히로세 스즈 분)는 그곳에서 사귄 친구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 분)를 따라 섬에 갔다가 만난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 분)에게 거부감없는 호의를 전한다. 



이렇게 세 편의 이야기,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난 부부 살해범의 몽타즈, 별 개로 진행되는 이야기와 상관없이 세 곳에 등장한 세 사람의 '외부인'의 모습은 이미 '관객'의 의심을 산다. 그리고 관객처럼 역시도 자신들 앞에 등장한 외부인에게 같은 외부인인 스즈미를 제외한 나머지 두 이야기의 '내부인'들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부부 살해범의 진범이 누구냐는 '추리'와 함께, 세 '곳'의 사람들의 관계가 엇물려가기 시작하고, 그 이야기는 누군가의 '의심' 혹은 순진한 믿음을 통해 뜻밖의 파국으로 전개된다. 

어렵사리 마음을 연 '정체모를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믿음 끝에 그들을 맞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대한 경계와 의심, 심지어 '신고'다.  요헤이가,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자부하던 아이코가, 그리고 유마가 결국 그 '의심의 그물'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이'를 외면한 이후에 드러난 것은 아이너니하게도 '초라한 자신들'이다. 몸을 팔던 딸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없다는 딸에 대한 불신, 그리고 클럽을 전전하는 게이인 자신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불신이 결국은 '사랑하는 이'를 신고하고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믿었어야 했던 것일까? 그 믿음도 의심스럽다. 타나카를 따라갔던 스즈미에게 벌어진 생각지도 못한 '사고', 하지만 그 사고에 스즈미는 자신을 지키기에 연연했고, 타나카는 비겁했다. 그리고 그 '비겁'의 우정을 구걸했다. 하지만, 그 왜곡된 우정은 결국 또 다른 믿음의 파국을 초래하고야 만다. 

보편적 발화로서의 분노 
<분노> 속 이야기는 몸을 더럽힌 딸을 용서할 수 없는 전통적인 아버지, 번듯한 외양의 직장인이지만 성 정체성에 있어 떳떳하지 않은 남성, 그리고 미군에 의해 강간당한 소녀 처럼, 파격적인 사례가 나열된다. 즉, 일본이라는 세계에 호시탐탐 자신을 강대국으로 드려내고 싶어하는 국가의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민낯을 '성'이라는 원초적 매개를 통해 질문한다. 조상신에게 명절마다 감사하다며 정치인들이 순례를 다니는 이 국가의 민낯이 어떤가 묻는다.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 끝내 외면하는 나라, 그 나라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아니 꿀꺽 삼켜지고 있는 '강간'의 현실을 묻는다. 또한 '분노'를 새기며 한낮의 거리에서 미쳐간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묻는다. 

영화는 인간과 인간, 우리와 우리 아닌 것의 경계와 관계에 대한 질문 같지만, 결국 그 질문 너머에 있는 것은 번드르르한 경제 대국이라는 거죽을 벗겨내고 난 '초라한 자화상'이다. 하지만, 그 초라한 일본의 자화상에 '느네들이 그렇지'하면 미소지을 일만은 아니다. 그 세 편의 이야기로 드러난 가족과 인간, 그리고 관계 속에 축적된 '타자에 대한 선긋기'의 아비투스는 오늘날 우리 사회라고 그리 자부할 만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분노>는 보편적으로 고민하고 '분노'해야 할 발화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발화점은 마치 희말라야 정상에 던져지듯 우리 사회에 던져져 불꽃도 내지 못한 채 몇몇의 조기 상영과 심야 상영으로 꺼져가고 있다. 



by meditator 2017. 4. 6.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