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울 것이 없는 청춘 남녀의 성 바꾸기, 그 '므흣'한 설정이 알콩달콩하게 풀어내지던 영화가 중반 이후, 그 설정의 비밀을 풀어가기 시작하면서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결국 영화의 클라이막스 '사라짐'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재와 과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눈물을 쏟게만든 건 에니메이션이었지만, 그리고 그 에니메이션이 있도록 만든 건 타국의 재난이었지만, 결국 내 눈물의 의미는 지금 현재 여전히 우리 땅에서 풀어내지 못한 '세월호'라는 그 날의 슬픔때문이다. 이국의 재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물밀듯이 끌어올리고 만다. 천 일 여전히 학부모들을, 그리고 힘들게 생존 학생들을 차가운 거리로 불러모으고 있는 것은 바로 <너의 이름은>이 하고 있는 그것때문이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홍보 기간 중에 배려없는 아저씨의 행태로 물의를 빚는 바람에 배우 김윤석의 홍보는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런 아쉬운 행보에 묻힌 것 중에 그의 진심어린 한 마디도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윤석은 답한다. 2014년으로 돌아가 '타지 마라, 그 배에 타지 마라'라고 할 것이라고. 이 간단 명료한 소망, 그 소망을 <너의 이름은>은 들어준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와 <너의 이름은>은 똑같이 과거로 돌아가 죽음에 이른 연인을 구하는 드라마이다. 심지어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기욤 뮈소의 동명 원작 소설의 리메이크로 익숙한 서사다. 하지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달리, <너의 이름은>은 정유년 새해 벽두부터 블록버스터 급 한국 영화들을 밀어내고 박스 오피스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청춘 로맨스로부터 환타지 재난 블록버스터로 
무엇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풋풋한 청춘 남녀의 성 바꾸기로 시작된 '청춘 로맨스'의 외양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흔한 성 바꾸기의 설정조차도 <너의 이름은> 버전이 되면 신선하고 새로워진다. 이야기의 테이프를 끊은 것은 시골 마을의 미츠하. 신사 의식과 개발이라는 발전과 전통의 과도기를 겪고 있는 시골 마을, 어머니가 죽은 후 집을 떠난 아버지 대신 신사 의식을 수행하며 도시에의 꿈을 품고 사는 소녀 미츠하에게 벌어진 이상한 사건으로 영화는 서두를 뗀다. 

영화는 미츠하의 시선으로 시작하며, 관객을 오롯이 미츠하와 미츠하가 사는 마을,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시선은 일종의 트릭이자, <너의 이름은>의 후반부 감동을 가져오는 주요한 장치가 된다. 관객들은 타키와 함께 '현재'에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시공간의 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채 대뜸 미츠하에게 벌어진 이상한 해프닝과 함께 이 소녀가 사는 시공간으로 관객을 흡인하면서 이후 벌어질 사건의 중심에 관객들을 놓이게 만든다. 

그저 미츠하에게, 그리고 타키에게 벌어진 이상한 일, 두 청춘 남녀에게 벌어진 '므흣'한 해프닝에 정신없이 흐뭇하게 빠져들던 관객들, 하지만 그저 도쿄와 외진 시골 마을의 공간적 격차가 벌이는 해프닝인 줄 알았던 에피소드가 중반 그 비밀의 열쇠가 풀어지며 거기에 '시간'의 격차가 더해짐을 깨달으며 충격에 빠진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소녀와 소녀 동네 사람들이 알고보니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 그 충격은 영화 속 타키의 충격과 그리 다르지 않는다. 


왜? 이미 영화 초반부터 우리는 미츠하와 그녀의 동네를 동시대의 삶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어린 나리에 고사리 손으로 매듭을 만들고, 신사의 제례 행사를 받들고, 동급생의 조소를 이겨내며 씹던 쌀을 뱉어 술을 빚는 등의 미츠하가 살았던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거 같던 유물의 삶이, 그리고 이제 막 청소년들에 들어선 미츠하가 타키와의 해프닝을 통해 때론 당황하고 설레이던 그 청춘의 열기를, 그리고 소소하게 일상을 메워가는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의 삶이. 그 모든 일상과 꿈, 그리고 갈등조차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한 상실, 설득한 상실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지만 영화를 통해 공유했던 시간을 관객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설정을 통해 <너의 이름은>은 '상실'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실의 공유, 상실의 환기 
아마도 <너의 이름은>이 설정하고 있는 상실은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 상실의 감정에서 이곳에서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피해갈 수 없이 우리 시대의 숙제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그렇게 영화는 '상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상실이 '역사' 혹은 '사건'의 저편으로 잊혀질 수 없는 동시대성을 불러낸다.

그리고 애초에 미츠하와 타키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몸이 바뀌는 환타지답게 '사실'을 알아버린타키는 시간을 돌이키기 위하여 죽음의 강조차 건너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던진다. 마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저승행을 감행하듯. 물론 타키의 헌신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타키가 자신을 던지듯, 시간 속의 미츠하 역시 '난 안되는 걸까?'라는 소극적인 자아를 딛고, 마을을 구해낸다. 두 소년 소녀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방관자적이었던 자신을 던지고, 보다 적극적인 자아로 한 단계 성장하는 통과 의례와 함께, 역사속 사건이 되었던 마을은 '현재'로 돌아온다. 



물론 환타지인 만큼 영화를 보고,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환타지를 넘어, <너의 이름은>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를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남의 일, 다른 시간, 다른 곳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면 나와 관계를 맺을, 같은 공간의 '소중한 인연'임을 상기시킨다. 애써 주장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공존의 울림은 강하고, 상실의 아픔은 진해진다. 우리 무속 신앙 중에 바다에서 죽은 이를 보내는 신례 중에 넋 건지기라는 방식이 있다. 죽은 이의 바다에 가서 죽은 이의가 사용하던 그릇에 끈을 연결하여 혼을 불러내 억울함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편히 보내주는 방식이다. <너의 이름은>은 흡사 그 무속과도 같다. 과거의 미츠하와 타키가 연결된 끈, 그 끈을 통해 타키는 억울하게 죽을 뻔한 미츠하를 불러내고, 결국 억울한 죽음에서 건져냈다는. 그 의식은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동시에, 산자의 가슴 속 상실의 고통도 풀어낸다. 아마도 <너의 이름은>이 흥행을 이어가는 것은 저 무속의 넋건지기 의식처럼 청춘 로맨스를 넘어, 우리 시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억울한 죽음의 상흔을 불러내어 위무했기 때문이 아닐까. 


by meditator 2017. 1. 9. 16:14

우리 시대 '꿈'은 희망 고문이다. 남들과 다른 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평범함으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고, '꿈'을 가진 사람은 사회와 꿈의 부조화로 인해 고통받기 십상이다. 꿈은 날개같지만 마치 태양에 다가가면 녹아버리는 이카루스의 날개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우선 그 꿈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쯤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이 시대 젊은이들을 있어도, 없어도 괴롭히는 꿈이라는 것 자체가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근대 이전 신분제 사회에서 '꿈'이라는 것은 불온한 상상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즉 이미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삶이 정해진 사회에서 개인의 여지란 한정적이었을테니, 그 말은 즉 꿈은 곧 '근대 이후 신분으로 부터 떨어져 나온 개인의 탄생과 맞물린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대를 이어 주어진 책무가 없는 사회에서 원자화된 개개인은 자신의 미래를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그 과정에서 유토피아로서 꿈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꿈이란 것이 애초에 인간 본연의 품성인 양 자기 어깨에 짊어진다. 굳이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태양을 향해 날은 이카루스 부자처럼 인간은 늘 자신의 조건과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지만, 그것이 가진 무한대의 조건은 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물론 그 조차도 후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 들어서며 새로운 세습 계층이 등장하고, 그런 과정에서 선택지가 줄어들거나, 선택의 여지가 넉넉치 않은 젊은 계층의 딜레마가 바로 이 시대 꿈의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흔한 자본주의적 성공이 아닌 꿈의 이야기 
그렇게 꿈이 희망 고문이 된 시대, 한 감독이 만든 두 편의 꿈에 대한 영화를 통해 정유년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바로 데미언 채즐 감독의 <라라랜드>와 <위플래쉬>가 그것이다. 

2015년 '교육'에 대한 충격적 담론으로 등장했던 <위플래쉬>에 이어 데미언 채즐 감독은 그와는 정반대로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음악극인 듯한 <라라랜드>를 들고 와 한국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위플래쉬 1,589,048 명, 라라랜드 12월 31일 기준 2,358,457 영진위 기준)

음악이라는 매개를 제외하고는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편의 영화 하지만 뜯어보면 두 영화는 놀랍도록 유사한 면면이 제법 발견된다. 무엇보다 우선 두 편 모두 다루고 있는 음악이라는 것이 '재즈'라는 점이다. 

<위플래쉬>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기 위해 음악 학교에 들어간 앤드류(마일스 텔러 분)가 폭군과도 같은 플랫처 선생(j.k 시몬스 분)를 만나 겪는 우여곡절을 다룬다. 또한 <라라랜드>는 고집스런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이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 분)을 만나 겪게 되는 사랑과 꿈의 사계를 다룬다. 

그런데 두 영화 속 주인공인 앤드류와 세바스찬은 모두 '재즈'에 홀린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재즈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위플래쉬> 상영 당시 성공과 그를 위한 지옥 훈련과도 같은 플래쳐 선생의 교습법이 화제가 되었지만, 그에 앞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토록 학생들을 죽어라 교육하는 플래처 선생조차도 재즈가 죽어가는 장르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이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더 이상 젊은이들은 흥미를 가지지 않는 장르, 신기에 가까운 장인들은 존재했지만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 장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두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홀린 것은 마치 현재의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판소리에 홀린 듯한 어쩌면 트렌디하지 않은 꿈의 선택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막연한 꿈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트렌디하지 않은 것에 빠져든 시대 착오적인 젊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꿈에의 헌신'이라는 것이 정확한 포인트다. 

그리고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하다못해 3류 미식축구 팀의 사촌보다도 못한 존재감을 가진 재즈, 이젠 함께 하던 동료들 조차 철 지난 장르라 여기며 새로운 트렌드로 앞서 따라가는 그 장르에 미친 주인공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에의 여정은 그것이 꿈인 한에서 여전히 질곡의 계절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 편의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드럼에 피가 튀고, 재즈를 잘하고 싶었으나 플랫처 선생의 학대에 가까운 교습법에 견디다 못한 선배가 결국 우울증을 못이겨 자살을 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교습법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선생과 그런 선생에 못지않은 제자의 기 싸움의 결과물인 마지막 연주 시퀀스가 보여준 재즈 연주 실연의 백미는, 절창을 위해 자식의 눈멈을 방조한 <서편제>의 위악에 맞먹는다. 단지 그것이 화려한 연주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토핑, 그리고 무엇보다 이국의 음악이라는 장식이 우리에게 와 재즈라는 소외된 장르보다 '성공'에 방점이 찍힌 채 다가온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한 꿈의 여정 
이 두 편의 영화는 공교롭게도 제목에서 중의적 의미를 띤다. <위플래쉬>가 영화 속 삽입된 연주곡 제목임과 동시에 채찍질이라는 영화 속 교수법을 상징하고 있듯이, <라라랜드>는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두 젊은이의 꿈이 펼쳐지는 지리적 장소인 LA와 헐리우드로 상징되는 꿈의 나라라는 역시나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영화 속 직접적인 소재이자, 동시에 영화 구성의 특징을 제목으로 한 두 영화는 '꿈의 여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재즈 드러머로서의 선망으로 꿈에 부풀었던 신입생 앤드류가 플랫처 선생의 눈에 띠어 졸지에 월반을 하며 재즈 드러머로서 짧은 인정과 그 짧은 성공보다 더 큰 낙차를 겪으면서도 결국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 선생을 이겨먹으며 결국은 그토록 선생이 원하던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장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재즈 드러머로서 LA를 전전하다 자신처럼 꿈을 가진 엠마를 만나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윤색하고 왜곡하던 세바스찬이 마치 거울 앞에서 선 누이처럼 비로소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는 과정은 비록 과정은 다르지만 질곡어린 꿈의 여정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그들은 자신이 원하던 꿈은 이루었지만 사랑까진 얻을 수는 없었다.

그건 엠마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 영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의 사랑은 언해피엔딩이겠지만, 꿈의 동지로서 보자면 영화는 각자의 삶에서 해피엔딩이다. 뒤늦게 니콜을 챙길 여유가 생긴 마일스가 니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니콜에겐 함께 할 애인이 있듯이, 단지 그들이 함께 하는 여정의 궤도가 달랐을 뿐. 영화는 말한다. C'est la vie



흔하디 흔단 일상적인 성공과 꿈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달된 <위플래쉬>와 <라라랜드>가 던진 기본적인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당신이 원하는 꿈은 무엇입니까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마일스와 세바스찬이 도달한 그곳은 자본주의 사회 속 성공의 그것과는 분명 류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비록 세상이 외면하는 그 꿈이라도 당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냐고 덧붙인다. 바로 그런 고집스런 재즈에 대한 열망을 담은 데미언 채즐 감독의 질문을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할 정유년의 시작에 공유해 본다. 
by meditator 2017. 1. 1. 16:46
2012년 한겨레 기자 김규원은 영국에 특파원으로 머물었던 경험을 <마인드 더 갭>이란 책으로 응축시켰다. 제목에서 부터 드러나듯이 이 책은 정치, 사회, 문화 등에서 영국와 한국의 다른 점에 주목했다. 김규원이 주목했던 다른 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여러가지 문제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함께 살'고자 노력하는 나라였다. 하루 종일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중계되고, 총리와 야당 대표가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유롭게 겨룰 수 있는 나라, 차별없는 무상 의료 서비스가 이뤄지고, 보행자가 우선이며, 밀어주고 당겨주며 사람이 우선이었던 나라. 김규원 기자는 그런 영국의 장점을 받아들인다면 한국 사회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란 희망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영국은 2016년 6월 브렉시트 투표를 통해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였다. 이 투표 결과를 놓고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 중 유력한 해석은 '가난'에 시달린 노동자 계층 분노의 표출이란 지적이 유효하다. 오래된 제도 속에서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던 영국, 그 영국을 불과 몇 년 사이에 뒤집어 버린 현실은 도대체 어디로 부터 기인한 것일까? 그 해답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 암전의 스크린 위로 자막과 함께 들려오는 건 다니엘(데이브 존스 분)과 복지 상담원 사이의 실랑이이다. 늙은 목수 다니엘, 일하다 쓰러져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의사 소견을 받은 다니엘, 영국의 의료 복지 시스템에서 다니엘은 질병과 관련된 실업 급여를 받고자 하지만, 경직화된 시스템으로 인해 다니엘의 급여는 좌절되고 만다는 내용. 

불통의 복지와 인간 상실
영화 속 설정은 상징적이다. 다수의 직원이 일대일 상담을 하는 의료 복지 시스템, 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은 '인터넷의 서류 작성'과 메뉴얼에 의거한다. 상담원은 있지만,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메뉴얼의 복사본들이다. 정해진 질문을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메뉴얼을 벗어나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배려라도 보이면 당장 상급자에 의해 지적을 받게 되는 상황이다. 그런 지극히 관료적이고 경직된 복지 상담 시스템은 현재 영국 복지 시스템의 헛점을 단번에 설득하고, 빚좋은 개살구로서의 복지 사회 영국을 보여준다. 

당연히 그런 상황 속에서 마우스를 올리라 하니 진짜 마우스를 들고 올리는, 커서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늙은 목수 다니엘의 대답은 상담원에게 동문서답이 되고, 제재 대상이 되고 탈락자가 당연한 수순이다. 심장이 나빠 일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 따위는 배제가 된 채 메뉴얼에 따라 정상인이 된 다니엘에게는 다시 장황스런 항고 절차나 구차스런 구직 급여 신청 과정이 남을 뿐이다. 다니엘이 우연히 마주친 싱글맘 케이티 역시 마찬가지다. 런던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다 겨우 집을 구해 생소한 뉴캐슬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케이티 가족의 생활 급여 역시 약속 시간을 핑계로 보장되지 않는다. 당장 아이들을 학교를 보내야 하고 먹고 살 것이 없는 사정 따위 아랑곳없다. 

결국 인간적 배려가 없는, 즉 '인간'이 없는 시스템화된 복지 불통 아래 다니엘은 졸지에 구직 활동을 하러 전전하고, 생전 사용한 적이 없는 인터넷 사용을 하기 위해 고전을 거듭한다. 케이티 역시 생활 보호 대상자를 위한 급식소를 이용하면서도 어떻게든 아이들과 새로운 집에서 살아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 결과 돌아온 것은 평생을 성실하게 일했던 목수 다니엘의 뜻하지 않은 구직 활동 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이나, 번번이 그를 무능하고 불통으로 만드는 시스템뿐이다. 단지 심장이 나빠 일을 쉬라는 의사의 권고를 따랐을 뿐인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다니엘을 구직을 핑계로 사기치는 사람이 되거나, 나이답지 않게 복지 시스템의 응석받이거나 반항아로 낙인찍혀갈 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급여를 받아보려 구직 활동도 해보고, 인터넷 서류도 접수해 보았지만 다니엘에게 돌아온 건 그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집의 집기를 몽땅 내다 팔아야 하는 궁색한 처지이다. 

그래도 홀로 생활하는 다니엘은 나은 편이다. 노숙자 쉼터를 벗어나 이제 방송통신대학이라도 다녀보겠다고 꿈에 부풀었던 싱글맘 케이티는 자신의 꿈은 커녕 아이들 밥 한 끼을 먹이기 위해 과일 한 쪽으로 허기를 달래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무엇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자존권인 생리대 하나를 구하기 힘들어 극단의 선택을 하고야 만다.

 

'인간' 그리고 인간을 품지 않는 체재
복지 상담 센터의 벽에 나, 다이엘 블레이크라 대문짝만하게 쓰며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주장했던 다니엘, 영화를 보며 관객이 도달하게 되는 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의 두 가지 물음이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다니엘이 주장하는 바, '인간으로서의 존엄'. 영화 속 다니엘과 케이티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은 너무도 기본적인 인간의 정의라 그래서 관객을 당혹스럽게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은 끄집어 내지 않아도, 성실하게 일했던 사람으로서의 노년의 권리, 그리고 엄마로서, 여성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에 대한 선언을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엄정하게 세운다. 

하지만 그런 선언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딛고 사는 이 세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성실하게 일했던 노동자, 두 아이의 엄마, 꿈을 가진 여성을 전혀 품어내지 않는 '인간적이지 않는'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 속 불통의 시스템으로 드러낸 복지의 축소와 왜곡으로 결과된 영국 사회를 통해 드러난 신자유주의라는 제도의 비인간성이다. 영화는 산업사회의 직종인 목수가, 고도로 체계화된 시스템을 지닌 현재 사회 시스템에 적응치 못하는 모습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무용화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속 현실은 현재 영국에서 진행중인 복지의 축소와 그로 인한 복지 사각 지대에서 가난에 몰린 노동자와 도시 빈민들의 삶이지만, 결국 그 본질은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 논리가 국가를 통해 시스템화되어 드러나며 인간의 기본권조차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 체제이다. 즉 다니엘의 무너져버린 자존감, 빼앗긴 케이티의 꿈과 생존권은 그저 '인간'이라는 보편적 정의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신자유주의 체제 속 국가가 인간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고발'로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즉 다니엘의 체제 밖 방기는 그가 벽에 자신의 주장을 알릴 때 강력하게 호응했던 거리의 사람들에게 보여지듯이 영국이란 사회 일반의 현실이며, 이는 다니엘이란 사람의 부적응이나 케이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체제 하 영국 사회에서 보편화된 '인간 상실'의 현실이며, 그 체재가 인간을 다루고 있는 방식의 보편성을 그려내고 있다는 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 예전 <빌리 엘리어트> 속 노동 운동을 하던 아버지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복지 수당조차 빼앗기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산업 사회 속 노동 역군으로 그들의 한 표가 소중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커서와 마우스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제재 대상으로 치부되어진다. 시스템은 메뉴얼이란 이름으로 '복지'란 미명아래, 그들의 '생존권'을 말살하고 있는 현장이다. 그들은 애써 노력하여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란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도록 봉사해지만, 정작 이제 늙은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체제 부적응이란 빨간 줄이다. 이민자인듯한 케이티와 그들의 자녀에 대한 냉혹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발전이나, 발달이란 미명하에 벌어지는 '노동'과 '인간'의 방기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다니엘의 처지를 안타까워할 깜냥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최소한의 자존을 위해 노력했던 다니엘에게는 그의 심장 이상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진단서를 끊어주는 무상 의료 시스템조차 우리에게는 없으며, 그 불통의 복지 시스템조차 감지덕지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도 케이티는 찾아갈 무료 급식소라도 있지 않던가. 영화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전율은 체제와 자본 사이 그 어디선가 잃어가던 우리 자신 인간적 자존의 부끄러운 확인이다. 

by meditator 2016. 12. 15. 16:27

내내 영화를 지배했던 두 명의 엄마, 하지만 결국 한 명의 엄마를 우리 사회는 품지 못했다. 그 엄마가 '낙화'처럼 져버리고, 남은 또 한 명의 엄마, 힘겨운 걸음걸이를 재촉하여 아이를 만나러 간다. 혹시나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아이 앞에서 '엄마야'라고 울먹이는 엄마, 다행히 아기는 엄마를 잊지 않았다. '엄마~'라며 달려오는 아이. 그런데 서비스 영상같은 장면을 보며 던져지는 물음, 저 엄마는 과연 이후 자신의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사건이 나기 전에도 '엄마의 무능력'을 들어 엄마로부터 아이를 뺏으려했던 법과 시집이 과연 저 애처로운 모녀를 이후에 용인할까? 보장할 수 없다. 영화에서 사라진 건 한 명의 엄마였지만, 남은 한 명의 엄마조차 그 '모성'을 보존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미씽; 사라진 여자>가 그리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출산 장려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자', 한 지역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에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국가 경쟁력이 되는 현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예산을 짤 때마다 지하철의 임부 보호용 분홍빛 좌석처럼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출산과 관련된 정책들, 그리고 모모 시와 군이 '우수'한 정책을 펼쳤고, 출산율이 1위를 했다는 홍보성 기사 뒤로, 실제 대한민국 모성의 현실 <미씽; 사라진 여자>는 그려낸다. 




우리 아가, 
항상 고운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엄마가 지켜줄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가로 만들어 줄게.
엄마가 그렇게 할거야. -한매의 자장가 

엄마가 지켜줄게.
집에 뛰어들어와 허겁지겁 컴퓨터를 켜고 못다한 작업을 마저 하는 지선(엄지원 분), 이혼 후 아이 양육과 생계를 위한 그녀의 일때문에 정작 자신의 아이 다은이와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아이를 돌보는 건 전적으로 조선족 유모 한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아이를 시댁으로 보내라는 법원의 명령.

법원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관객은 지선의 정신없는 생활을 보며, '얘가 니가 엄마인 줄은 아니?'라는 남편의 다그침이 아니더라도 지선의 모성 자격에 의문이 간다. 과연 저렇게 바쁜데 아이를 돌볼 수가 있어? 라고. 그리고 그런 관객의 의혹에 답이라도 하듯, 지선은 아이가 없어지고 난 그 밤이 지나서야 아이와 보모 한매의 부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관객은 냉정한 시선처럼 지선에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법과 사회를 상대로 엄마 지선의 아이찾기 추격전. 

지선이 다인과 한매를 찾아나선 그 순간부터 드러나는 한매의 진짜 모습, 이름부터 알 수 없는 조선족 여인, 아파트 단지에서 알게된 한매는 먼저 보모를 내쫓고, 아이에게 상해를 입힌 의문의 여인이며, 조선족 거리에서 찾아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한 어리숙한 조선족 여자, 그리고 충청도 시골에서 돈을 받고 팔려와 씨받이가 된 보호받지 못한 이주 여성이자, 결국은 아픈 자신의 아이를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써도 지켜내지 못한 엄마였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병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다 잠들 수 있는 자장가, 엄마가 지켜줄게를 끊임없이 불러대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 대신 남의 아이에게 그 노래를 불러줘야 하는 슬프고도 잔인한 모성. 또 한 명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범죄자가 되기를 서슴치 않고, 기꺼이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치않는 지선의 물불가리지 않는 행보와 겹쳐지며, 영화는 적나라하게 우리 사회 '보호받지 못한 모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보호받지 못하는 모성, 그래서 무모해지는 모성
지선은 엘리트 여성이다. 방송국 외주업체에서 일하는 남보기에는 그럴 듯한 직업을 가진. 하지만 그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이혼'이라는 제도로 통과하는 순간, 그녀의 모성은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무관심한 남편과 핏줄에 집착하는 시어머니는 아이를 보살필 수 없는 그녀의 경제적 능력과 현실적 상황을 들어 아이를 빼앗아 오려고 할 뿐이다. 그녀가 하는 일 속에서 그녀는 '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일 뿐, 엄마인 존재는 거추장스럽고 무능력에 방점을 찍은 캐릭터로 작동할 뿐이다. 그런 무배려의 사회적 조건에서 맹목적으로 그래서 더더욱 모성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궁색하게 만들면서 지선은 아이를 지키려 말 그래도 '애쓴다'.

한매도 마찬가지다. 돈값을 하라는 시어머니, 학대를 일삼는 남편, 아이를 지키려하지만 나지막한 자장가말고는 해줄것이 없다.,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한매의 자장가처럼, 사회 속 그럴싸한 직업군의 여성이든,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여지지 않는 이주 여성이든 그들이 '모성'으로만 존재할 때, 사회는 그녀들에게 냉혹하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모성'이라는 존재만으로 호모 사케르(인간 사회내에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즉 사회는 '출산'을 위해 모성을 장려하지만, 정작 모성으로서의 그들의 존재나, 모성으로서 그들이 자신의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 전혀 배려하거나 보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심지어 그 '모성'이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건. '가정'이라는 울타리조차 허울뿐인 것을 고발한다. 

결국 21세기의 대한민국, 국가 경쟁력을 위해 출산이 장려되고, 해마다 출산율이 늘었네 어쩧네 하며 홍보성 기사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모성은 모성으로서의 자신의 숙명과 자신이 낳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법의 경계를 넘으며 무모해질 수 밖에 없음을 영화는 증명한다. 

물론 그럼에도 모성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보호받지 못한 한매와 달리, 맹목적으로 아이를 찾기 위해 달려들었던 지선의 모성은 법적 구조 속으로 포용된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 구조가 끝내 지선의 모성을 보호할 지는 미지수다. 



모성 연대의 가능성
영화 내내 한매와 자신의 아이를 맹목적으로 찾아나섰던 지선은 한매의 행적 속에서 자신과 같은 모성을 발견하고 흔들린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고향으로 향하던 한매를 향해, 자신이 희생양이 되겠다 자처한다. 두 맹목적 모성이 맞부닥치는 장면, 그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회를 향해 잔인해졌던 한매의 모성은 결국 또 다른 모성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지선은, 한매의 손을 잡지만 끝내 한매는 그 손을 뿌리치고 식탁보을 부여안고 스스로 사라져간다.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한때 놀이터 그네에서 사이좋게 앉아서 한담을 나누었던 시절의 두 사람, 그래서 지선은 기꺼이 한매의 모성을 이해하지만, 이미 모성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한매는 그걸 거부한다. 사회적 보호가 기능하지 않는 상황에서 모성의 연대가 취약할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들의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이 낳은 모성성의 결과를 그 한 장면은 처연하게 상징한다. 


여성 감독에 의한 맹목적 모성, 그리고 주연 배우의 헌신적 열연이라는 점에서 <미씽; 사라진 여자>는 올해 개봉한 손예진 주연의 <비밀은 없다>를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모두 모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배려가 없는가를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그러기에 영화 속 모성들은 스스로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다. 덕분에 두 영화 속 손예진, 엄지원, 공효진은 이 영화를 통해 모성을 열연하여 배우로서의 영역을 확장해 낸다. 다만 <비밀은 없다>가 감독의 스타일로 인해 주제 의식이 산화된 반면, <미씽; 사라진 여자>가 보다 익숙한 설정과 상황에의 집중으로 관객들이 주제에 익숙하게 공감하는 대중적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by meditator 2016. 12. 8. 12:59

글을 쓰기에 앞서 밝혀둘 것이 있다. 제목이 '당신의 그 어떤 모습'에, '박사모'가 사랑하는 그 어떤 분(?)의 '분노가 치밀어오르게 만드는' 모습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일단 그 어떤 분의 모습이 '주체'적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몹시도 낮거니와, 그 어떤 모습으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고통'을 받게 만드는 그런 이기적인 모습은 이 리뷰의 주제 의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모습'이란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내려 하는 노력으로, 그 분(하마터먼 평소 하듯이 ㄴ자로 시작할뻔한)과는 전혀 무관하다. 


일찌기 <아엠샘>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거의 '국민 아역'급으로 등장했던 다코타 패닝의 이쁜 동생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엘르 패닝, 하지만 어느덧 언니보다 더 자주 작품을 들고 우리나라를 찾는 배우가 되었다. 그녀의 2015년작 <어바웃 레이>는 또 한 편의 '퀴어' 영화처럼 소개된다. 하지만, 성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어바웃 레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가족간의 관용과 이해, 나아가 인간의 포용에 대한 것이다. '가족'이 여전히 절대 선으로 자리잡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레이'의 가족들이 부딪치는 문제를 통해 진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볼 만한 영화인 것이다. 



레즈비언 할머니, 싱글맘 엄마, 성전환 손녀?
영화는 제목처럼 '레이(앨르 패닝 분)'의 문제로 시작한다. 아직 보호자의 도움이 필요한 16세 소년? 소녀? 레이 혹은 아만다는 헷갈리는 그녀의 이름처럼 혼돈스런 성 정체성을 가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인 레이는 헷갈리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치마 입기를 부끄러워했고, 지금도 가슴에 브래지어 대신 압박 붕대를 칭칭 감고 다니며 인형 놀이 대신, 카레이서, 우주 비행사를 꿈꿨던 아이는 이제 단호하게 자신의 성을 '남성'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16살 어릴 적 이름이었던 여성성이 분명한 아만다라는 이름 대신 레이임을 주장하는 이 미성년이 성정체성의 변화를 가지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성전환 요법을 위해 함께 상담을 하러 간 사람들은 엄마 매기(나오미 왓츠 분), 할머니 돌리(수잔 서랜든 분), 그리고 할머니의 연인인 또 한 사람의 여성 프란시스(린다 에몬드 분)였다. 할머니의 연인을 제외한 모녀 삼대는 레이를 위해 기꺼이 상담에 응했지만, 막상 동의에 이르러 갈등을 겪는다. 

평생을 레즈비언의 권리를 위해 싸워왔던 할머니지만 막상 여성에서 남성으로 되려는 레이에게 그냥 레즈비언으로 살면 안되냐며 반문한다. 싱글맘인 엄마 매기는 자신의 성을 당당하게 선택하려는 레이가 자랑스럽다 말하지만, 막상 그 동의가 자신의 몫이 되자, 훗날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로 모를 레이가 그 책임을 엄마에게 물으면 어쩔까 고뇌한다. 

레이의 성 선택, 그에 대한 어른들의 동의로 비롯된 문제는 영화의 시선을 레이와 가족의 문제에서, 어쩐지 아직도 레이보다도 덜 주체적이어 보이는 싱글맘 매기로 옮긴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다. 싱글맘이지만 엄마 혼자 레이를 만든 건 아닌 터, 또 다른 보호자인 법적인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레이의 아버지를 찾아나선 매기, 여기서 비로소 <어바웃 레이>의 속살이 드러난다.

어릴 적부터 홀로 자신을 키우는 엄마와 레즈비언인 할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삶의 혼돈을 느꼈던 레이는 그 혼돈으로 부터 스스로 내린 삶의 결단이 서둘러 남성으로 성전환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단호한 결정을 위해 찾아간 생부, 그러나 거기서 마주한 것은 자신의 보호자라 생각했던 엄마의 쉽게 수용할 수 없는 과거, 그로 인한 자신의 탄생과 외로운 성장이다. 이는 성의 결정에 앞선 레이의 숨겨진 분노를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늘 삶 앞에서 도망치듯 살아온 매기가 어쩔 수 없이 도망치고 싶었던 삶을 직시하게 된다. 

정체성의 변화를 요구하는 딸, 지난 과오를 쉽게 수용할 수 없는 엄마, 그리고 한때 그 누구보다 전투적이었지만 이젠 그 모든 것에 '잔소리쟁이'나, '참견꾼'이 되어가는 할머니, 이 평범하지 않은 가족 구성원의 사연은 일찌기 다짜고짜 스무 살 넘은 애인을 집에 데려다 놓은 남동생이 등장하는 우리 영화 <가족의 탄생(2006)>이나, 쪽팔리는 가족 구성원의 사연을 다룬 <좋지 아니한가(2007)>와 콩가루 집안의 더 콩가루같은 스토리였던<고령화 가족(2013)>과  유사한 가족 문제이다.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쉽게 용인되어 지지 않는 성과 관계의 문제들을 '가족'이라는 장을 통해 담론화시키는 것이다. 



가족의 이름으로 
그저 남성이냐 여성이냐 선택의 문제가 심각했던 레이네 가족의 문제는 이제 형과 동거하며 그 동생의 아이를 낳게 되어버린 매기의 문제에 이르면 대책이 없어져 버린다. 하지만 그 대책없음을 다시 보면, 여전히 자신을 마주하기 두려웠다는 매기는 그 상황에서도 스스로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은 레이를 낳은 것이라 하듯, 레이를 낳고 레이의 엄마로 성실히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서야 매기와 레이 모녀를 방출(?)하고자 하는 할머니 돌리 역시 그런 매기를 품으며, 이젠 과보호가 되었을 지언정 이 모녀 삼대의 보호자로 든든하게 자리매김해왔던 것이다. 

결국 영화는 '훈훈한 가족' 영화처럼 용서와 화해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막판의 급격한 화해 모드가 가능한 것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건 엄마로써, 할머니로써 성실했던 그녀들의 삶으로 인해서이다. 그리고 그 '성실'함에는 아만다가 레이가 되어도, 매기가 막장극의 주인공이 되어도 내 손녀와 내 딸로, 그리고 내 엄마와 할머니로써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관계의 성실함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영화는 우리 영화 속 가정의 남보다 못한 아귀 다툼은 없다. 대신 몸부림치고 혼란스러워할 때도 책임지고 부등켜 안는 '가족'이 대신한다. 그것이 싱글맘이든, 레즈비언 부부이건 말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어바웃 레이>는 '가족'으로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레이의 성 정체성으로 인한 퀴어 영화가 아니라, 평생을 레즈비언으로 살아오며 한 가정의 가장으로 당당했던 그래서 사고친 딸도, 이제 레즈비언 대신 남성을 선택하는 손녀조차 수용하는 돌리와 그녀의 연인이 보여준 노년의 모습으로 '퀴어' 영화이고, 딸의 문제를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이제서야 엄마로써, 한 사람으로 당당해지는 매기의 여성 영화이다. 
by meditator 2016. 12. 3. 17:15

동화, 글자 그대로 아이들이 읽은 이야기 책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동화' 앞에 '잔혹'이란 수식어가 붙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로 알려진 그림 형제의 전래 동화집, 지금은 좀 덜해졌지만 예전에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이 목차의 동화책들이 구비되어 있는 동화전집이 아이들의 서가를 채우곤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동화였던 이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보고'가 등장하며,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잔혹'한 일면을 숨기고 있다는 '잔혹 동화'로서의 버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니 애초에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는 결론의 주술에 눈이 어두워져서 헐리웃을 중심으로 환타지 버전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들 잔혹 동화 버전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름다움을 질시하여 의붓 딸을 죽이려는 등의 끔찍한 설정은 굳이 버전을 운운하지 않아도 잔인한 설정들이다. 실제 언어학자였던 그림 형제는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보다 전해내려온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으며, 기독교 신자로 때론 채록을 하다 분노를 했을 지언정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불문하고, 그리고 나라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들 동화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가장 날것의 '욕망'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 욕망의 서사를 솔직하게 24일 개봉한 <테일 오브 테일즈>가 재연한다. 

욕망의 서사, 그 속살을 드러내다 
이탈리아 시인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설화집 <테일 오브 테일즈Lo cunto de li cunti >를 영화화한 <테일 오브 테일즈>는 말 그대로 '이야기의 이야기'인 셈이다. 나폴리 방언으로 씌여지는 바람에 200년 동안 묻혀 있던 이 책은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후 그림형제, 안데르센, j,r톨킨 등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들의 원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형'의 속살을 감독 마테오 가로네가 가감없이 드러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에서는 그렇다. 착하지만 가난한 노파는 우연히 샘물을 마시고 영원한 젊음을 얻은 후 왕비가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던 왕비는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아이를 낳아 아이와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괴물에 납치되었던 공주는 멋진 기사의 도움으로 괴물을 물리치고 그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테일 오브 테일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해피엔딩'의 신화를 무참히 깨부순다. 세 가지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시작은 아이를 갖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롱트렐리스 여왕(셀마 헤이엑 분)이다. 그녀를 사랑한 왕은 그들을 찾아온 정체모를 검은 두건을 쓴 마법사의 말을 따라 바닷속에 잠자는 괴물을 사냥한다. 사냥 과정에서 괴물의 목숨을 담보한 댓가로 '왕'이 죽고, 아랑곳없이 심장을 아귀아귀 먹어댄 왕비는 단 하루 만에 왕자를 생산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작한다. 바다괴물 심장의 기를 받은 사람은 왕비 단 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리를 한 처녀 역시 왕비와 같은 날, 왕비가 낳은 아이와 쌍둥이라 해도 믿을 똑닮은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또 다른 욕망의 서사는 또 다른 왕국이다. 바다 괴물을 잡으러 갔다 죽음을 당한 왕의 장례식에서 조차도 여색에 빠져있던 스트롱클리프(뱅상 카셀 분) 왕의 왕국, 난잡한 주연에 빠져있던 왕의 귀에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고아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를 찾아 하던 식으로 추파를 던진 왕, 그 추파의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천사의 목소리를 지닌 염색쟁이 노파 자매였다. 오랫동안 갇혀 지내다시피 하며 염색을 하며 살던 언니 도라는 왕이 던진 추파를 기회로 잡고 '인생 역전'의 기회로 노린다. 

마지막을 여는 건 황량한 허허벌판 그 중 한 봉우리에 우뚝 솟아있는 외딴 왕국, 그 왕과 공주의 이야기다. 공주의 연주에도 아랑곳없이 벼룩잡기 놀이에 빠져있던 왕은 결국 벼룩잡기를 벼룩 키우기 취미로 전이시키고, 그 벼룩놀이의 결과는 예상치못하게 괴물에게 공주를 넘겨주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번갈아 진행되는 세 이야기 속 욕망을 추동하는 건, 자손과 생식, 사랑과 결혼, 젊음과 우정 등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들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이런 요소들이 그 '만족'을 위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나타나는 '잔혹한 부작용'들을 영화는 솔직하게 드러낸다. 모성이란 이름의 내 자식만을 위한 끔찍한 집착, 사랑이란 이름으로 씌여지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추악한 욕정과 그 욕정에 화답하는 또 다른 욕망, 그리고 노년의 나이에도 견뎌낼 수 없는 욕망의 사다리.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욕망과 욕망의 결과물들까지. 

욕망을 에스컬레이팅하는 권력
하지만 <테일 오브 테일즈>를 그저 '욕망'에만 방점을 찍으면 설명이 부족하다. 그들이 그렇게 부조리한 욕망을 분출하는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 중세로 여겨지는 시대의, 서로 다른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세 왕국, 그리고 서로 다른 세 명의 통치자들, 하지만 영화 속 그들 누구도 한 왕국의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이 가진 권력은 그들이 뿜어내는 욕망의 '에스컬레이팅(escalating)' 도구이다. 스트롱클리프 왕은 자신이 왕임을 강권하며 노파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러다 하룻밤을 보낸 여인이 추한 늙은이인 것을 확인하자 담박에 창밖으로 던져버릴 것을 명령한다. 이런 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오로지 자신의 자신의 욕망과 집착과 재미를 위해 쓴다. 



그러나 그 왜곡된 욕망이 낳은 결과물은 초라하다. 집착도, 사랑도 , 그 어느 것도 그들이 결국 손에 쥔 것은 없다. 아픈 하이힐스 왕을 치료하는 명목으로 그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그 욕망에 빨릴 뿐이다. 욕망으로 치달았던 당사자들은 사라지거나 물러나고, 그 속에서도 약속을 지키고 신의를 지켰던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것, 어쩌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읽었던 전래 동화가 미처 말해주지 못했던 진짜 해피엔딩일 것이다. 
by meditator 2016. 12. 1. 13:22

국가에서 지원을 받던 저소득층 유급 생활자였던 조앤k롤링은 에딘버러의 카페에서 어린 딸을 달래며 첫 소설을 썼다. 그리고 1997년 세상에 나온 그 소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그이후로 2007년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 이르기까지 '판타지 월드'의 지형을 바꾸며 4억부 이상의 책 판매와 7억 230만 달러의 전 세계적으로 두번 째로 높은 수익률을 달성한 2011년까지 여덟 편의 영화를 통해 마법의 세계를 통해 전 세계인을 매료시켰다. 아이들은 성장하는 마법사 해리와 함께 커나갔고, 어른들을 위한 '점잖은 표지'로 재발간을 할 만큼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독자와 관객층을 형성했다. 하지만, 2007년 <죽음의 성물>을 통해 호그와트로 가는 벽조차 구분하지 못했던 어수룩한 소년 해리는 이제 '어머니'의 보호 마법이 필요하지 않은 어엿한'마법부의 장관'이 되어 '마법'의 세계를 이끌게 될뿐만 아니라, 행복한 가정까지 꾸리게 된다. 동시에 오랜 시간 '해리'의 세계에 발을 묶였던 저자 조앤k 롤링은 더 이상 '해리'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것임을 단언한다. 해리의 세계가 해피엔딩이었어도 그보다 더한 아쉬움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돌아온 조앤k롤링
하지만 영국 여왕보다 더한 부를 지녔어도 '글귀신'을 달랠 수는 없었던가. 2013년 로버트 갤브레이스란 가명으로 <쿠쿠스 콜링>이란 탐정 소설을 통해 다시 세상에 그녀의 글을 드러냈다. 눈밝은 영국 독자들의 추적으로 결국 조앤k롤링은 '커밍 아웃'을 했고, 이어 <실크웜>을 펴낸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라는 '성장'에 촛점을 맞춘 성장 판타지라면, <쿠쿠스 콜링>과 <실크웜>은 치정과 원한이 얽힌 본격 탐정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조앤k롤링은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을 감독한 피터 예이츠 감독과 손잡고 제작 및 각본가로 <신비한 동물 사전>이란 작품을 통해 '마법'의 세계에 복귀한다. 

장황하게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저자였던 조앤 k롤링의 행보를 서술했던 이유는 바로, 16일 개봉한 <신비한 동물 사전>이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핀오프(spinoff)'이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통독한 독자들에게 <신비한 동물 사전>의 주인공 뉴트 스캐맨더는 낯이 익다. 바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법 학교 학생들의 '동물학 수업'의 교재가 '신비한 동물 사전'이요, 그 저자가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 분)이기 때문이다. 뉴트뿐만이 아니다. 이번 영화에서 선보인 '신비한 동물' 중 '에럼펀트', 즉 외관이 코뿔소를 닮은 이 동물의 코뿔이 '거래 금지 품목'인 것으로 인해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등 동물 들 역시 학생들이 배웠던 그 동물들이다. 



그렇듯 영화는 '새로움'보다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기시감으로 시작된다. 마치 '단종'된 장난감 시리즈의 부활처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익숙하게 들려오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시그널은 향수처럼 관객들을 다시 그 '마법'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익숙한, 하지만 새로운 마법의 세계
하지만 영화는 영리하다. '마법'의 세계는 '마법'의 세계이되, 장소가 달라졌다. '머글'들에 둘러싸였던 영국을 떠나, '노마지'를 피해 자신을 감춘 '미국'의 '마법 세계 MACUSA(미국 마법 의회)'가 새롭게 등장한다. '머글'이란 말이 인터넷 공간에서 익숙한 용어가 될 정도로 만들었던 <해리 포터>, 그 '인간'인 머글과 '마법사'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오되, 그걸 '미국'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변화시켜, '머글' 대신, '노마지'를 등장시키고, 미국의 노마지 사회와 '공존'대신, '언더월드'를 택한 '마법부'의 선택을 등장시켜, 인간과 마법사간의 새로운 갈등의 축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내내 '볼드모트'로 상징되는 악의 마법과 '덤블도어'로 상징되는 공존의 마법사간의 대결은 이제 '인간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마법의회 대통령과 그에 반발하는 마법 안보부 국장의 대결로 이어진다. 콜린 파렐이 분했던 퍼시발 그레이브스는 조니뎁의 그란덴왈드로 변하며 <신비한 동물 사전>의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즉 책을 읽은 독자라면 기억하겠지만 그란덴왈드는 볼드모트 등장 이전의 흑마법사 중 한 명으로 한때 덤블도어의 친구였던 사람이다. 그의 등장으로 영화는 마치 <슈퍼맨 비긴즈>처럼 <해리 포터> 이전의 '마법' 세계로 <신비한 동물 사전>을 확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지만, 그의 가방이라는 '루프'를 통한 신비한 동물의 세계에서는 동물의 수호자로 거듭나는 뉴트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처음 마법 학교에 간 학생들이 마법 모자에 따라 정해지는 각자의 소속, 그 중에서 뉴트는 후플프프였다. 후플프프는 해리가 속해있던 그리핀도르나 그의 적대적 상대였던 알포이가 속해있던 슬리데린보다는 덜 주목받았던 '개성'강한 학생들의 집합체다. 또한 성장 소설이었던 <해리 포터> 대신 <신비한 동물 사전>은 동물학자 뉴트에 마법무 오러(어둠의 마법사를 잡는 직책)인 티나 골드스턴(캐서린 워터스턴 분)을 등장시켜 '청소년물'에서 '성인물'로 극의 중심을 변화시킨다. 



무엇보다 <신비한 동물 사전>인 만큼 새롭게 열린 마법 세계만큼 관심을 잡아끄는 건 '신비한 동물'들이다. 마치 마법사들이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라면, 그 슈트가 동물들이고나 할까? 초반부터 말썽꾸러기 니플러에서 부터 머트랭, 어럼펀트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오캐미, 천둥새, 그리고 옵스큐러스까지 영화 곳곳에서 마법 세계의 느낌을 물씬물씬 풍겨낸다. 새로운 캐릭터의 집요정도 빠질 수 없다. 당연히 이들 마법의 동물들을 부리는 마법에서부터, '노마지'의 기억을 잃게하는 마법 등등 그 '세계'를 꾸려가는 '마법'의 향연이 펼쳐지는 건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신비한 동물 사전>을 통해 새롭게 펼쳐진 미국판 마법의 세계, 하지만 맥락상 이어지는 <해리 포터> 속 마법의 역사, 그리고 펼쳐지는 마법 인물의 세계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조앤k롤링을 통해서 라는 점에서 무궁무진한 <해리포터> 세계의 도래를 알린다. 마치 끝없이 이어지고 확장되어지는 마블월드처럼, 책 속에 단편적으로 등장했던 신비한 동물 사전 하나만으로도 시리즈가 되듯, 앞으로 영화화될 <퀴디치의 역사>나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처럼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시리즈로 풀어질 수 있음을 <신비한 동물 사전>은 보여준다. 책으로 <해리 포터>는 마무리되었지만 스크린에서 그 세계는 무궁할 것이라 <신비한 동물 사전>은 선포한다. 

by meditator 2016. 11. 22. 18:11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이 개봉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열 여덟 번째 작품이고, 올 한 해 뜻하지 않는 스캔들로 주목을 받은 상태이기에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이 궁금즘을 불러 일으킨다. 더구나 당사자 두 사람을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밀어부쳤던 언론과 여론의 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던 홍감독이기에 더더욱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고할까? 그리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어쩌면 그런 일련의 사태에 대한 홍상수 감독다운 '답'이라 해도 그리 '어불성설'이 아닌 영화가 된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말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그런 내가 지금 이렇게 사랑을 하고 있다고. 




감독 홍상수를 안다면
홍상수 감독과 관련된 기사가 연일 언론에 도배되고, 기사화되어서는 안될 개인의 카톡 내용까지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며, 홍상수 감독에 대한 '도덕적 지탄'이 일상화될 때, 사람들은 그가 '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만을 그를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그간 홍상수 감독이 그의 작품을 통해 해왔던, 혹은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안다면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는 사람들이 안다는 '감독'이지만, 정작 홍상수 감독이 누군지는 다들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남자들은 그가 문성근이건, 정재영이건, 유준상이건, 김태우건, 유지태건, 이선균이건 이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의 김주혁이건, 권해효건, 그저 '수컷'이다. 여자, 그것도 이쁜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연애하고, 한번 자보고 싶어하는데 눈이 벌개져있는 본능적 인물들이다. 그들이 '교수'이건, '작가'이건, '영화감독'이건, '학생'이건, 그 직위가 상관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 '직위'로 인해 그들의 '수컷' 본능은 교묘하게 노골적이고, 그래서 결국 더 '찌질하고 치졸해'지기 십상이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90년대의 그의 영화는 '지식인'의 허위 의식을 까발리는 '문제적 영화'가 되었고,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 줄기차게 동일한 남성적 캐릭터로 변주되어 온 그의 영화에서 이젠 감독 스스로가 영화 속 주인공도 해보지 못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에 이르렀다. 현실의 스캔들과 영화 속 캐릭터의 동질성이 감독 홍상수를 '변명'해 주는 그 어떤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지난 20여년간 홍상수 감독이 '사회가 '도덕'이란 잣대로 줄을 대기가 무색하게 줄기차게 별거 아닌 '인간'에 대해 진솔해 왔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나, 그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렇듯 10일 개봉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 등장하는 세 남자 김영수(김주혁 분), 박재영(권해효 분), 이상원(유준상 분)은 한 여성 소민정(이유영 분)에게 매달린다. 그들의 직업이 화가이거나, 영화 감독이거나, 그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진 게 중요하진 않다. 아니 중요할 수도 있다. 마치 다른 화려한 새의 깃털로 자신의 검은 색을 치장하는 까마귀처럼 두 남자는 자신들이 획득한 사회적 지위를 내세우며 자신을 한껏 멋지게 부풀리기에 고심한다. 아마도 영수도 민정을 처음 만났을때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목적은 결국 이쁜 여자 민정의 호감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 목적에서 동질성을 가진 남자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민정을 만난 시간차로 인해, 서로의 입장이 엇갈린다. 먼저 민정을 만난 영수는 '술'과 관련하여 조심성이 없는 민정으로 인해 민정과 갈등을 일으키고, 끝내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민정을 영화 내내 찾아다니는 처지에 이른다. 그런 영수가 애닳아 민정을 찾아다니는 동안, 다른 두 남자들은 '민정'이 아닌 민정(?)과 다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기회를 얻는다. 

'민정'과 '민정'인데 민정이 아니라며, 그럼에도 다시 천연덕스럽게 세 남자를 만나, 여태 아기같거나, 늑대같은 남자만 만나 진정한 사랑에 이르지 못했다며 은근슬쩍 니가 내 진짜 남자가 되어주겠니 라며 청하는 듯한 민정에게 세 남자는 볼모가 된다. 아니 전후가 바뀌었다. 그들은 그녀가 자신이 전에 만났던 '민정'이 아니라는 데도 기어이 결국, 기꺼이 그녀와 함께 술자리를 가지려듯, 사실 그들에게 그녀는 '민정'이건, '민정'이 아니건 중요치가 않다. 중요한 건 이쁜 젊은 여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민정'이 '민정이 아닌 코스프레를 한다고 뭐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민정'이 아니라면서 세 남자와 만나대는 민정인듯한 여자와, 그런 민정이 아니라는 '민정인듯한 여자와 다시 한번 기꺼이 '진정한 사랑'을 이루겠다며 '술'을 마시는 그들이 누가 더 나쁜가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덧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게 무슨 의민가 싶다. 남자들은 하냥 그래왔고, 여자가 '민정'이건, '민정'이 아니건, 그녀가 그 순간만큼, '사랑'을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진실'일지도 모르는데.

영화 속에서 '민정'과 사귀던 영수는 그를 찾아온 중행(김의성 분)을 통해 자신과 술을 조심하겠다는 민정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술 자리에서 외간(?) 남자와 싸움까지 벌였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야 만다. 하지만 그 '화'는 이별을 자초하고 만다. 하지만 이별을 견딜 수 없는 영수는 민정을 찾아다니는 한편, 그런 그를 한심하게 보는 동네 친구들에게 민정을, 아니 민정과의 사랑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멀쩡한 눈으로(?) 보면 민정은 이해하기 힘든 여자다. 영수란 사귀는 걸 온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여전히 동네 주점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고, 이제 영수랑 사귀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영수랑 가던 동네 술집을 찾아 일관성있게 남자와 술을 마신다. 심지어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민정'이 아니란다. 관객조차도 결국 그녀가 제 정신이 아닌 건지, 또 다른 민정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게. 마치 그녀는 지금의 지나가는 찰라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시간의 연속성과 유한함을 그녀 스스로 실천하는 구도자처럼, 신념에 차 자신이 '민정'임을 부인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강력한 부인 속에 '민정'으로 그녀가 벌였던 행태들도 동시에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아니 어쩌면 그 과정을 통해 민정으로 추정되는 그녀가 줄기차게 말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의 절실한 사랑이다.  

영수의 친구들, 그리고 영수처럼 우리는 '과거'의 어떤 행적,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러했다는 소문, 사실 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그리고 '훈수'를 둔다. 너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거기에 휘돌렸던 영수는 민정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리고 민정이 아니라는 여자를 만나고서야 안다. 그저 지금 이렇게 함께 하면 되는 거라고. 현재의 '사랑'에 만족한다. 그 '뻔한 동네'가 영화판이든, 그 헷갈리는 여자가 지금의 그녀인든, 아니든 중요한 건, 감독이 말하는 바 지금 여기 사랑하는 그 진실이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그간 줄곧 '실패담'을 논했던 홍상수 영화와는 달리, 성공한 사랑의 이야기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주춤거리거나 물러섰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완성에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로맨틱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 숭고하고,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시작은 찌질하고, 본능적이며, 헷짓거리같은 짓이다. 그리고 지금 '사랑'의 순간에조차 그 '영원성'을 논하기에 무색한 '관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 영수와 민정은 사랑을 한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간통법'이 사라진 세상에서 '훈수'와 '사회적 지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무색하게. 홍상수 감독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by meditator 2016. 11. 13. 19:40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7개 도시, 8개의 cgv아트하우스에서 열린 '프렌치 시네마 투어 S.T.DUPONT2016', 엄선된 10편의 영화 중 마지막 작품은 2015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 초정되었고, 2016년 상반기 개봉했던 <마지막 레슨>이다. 이 프렌치 시네마 주간 동안 있을 '시네마 톡'을 위해 내한한 파스칼 포자두 감독과 여주인공 마를렌으로 열연한 마르뜨 빌라론가 배우를 만났다. 특히 여주인공 마를렌 역의 마르뜨 빌라론가 배우는 84세의 고령이시고, 이 60년차의 노배우이지만 이 작품을 위해 한국까지 오시는 등 노익장을 보여주셨다. 




1. '존엄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레슨>을 만드신 계기는?
-이 영화는 2003년 출간된 노엘 사틀레의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 한 것이다. 가까운 분이 돌아가시면 남은 사람들은 생전에 조금 더 많은 것을 나눌 것을 하고 후회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까지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취지에서 '마지막 레슨'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2. 2011년 <크루즈>에 이어 계속 작품의 주인공이 노인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속 유럽은 물론 계속 '젊은이'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그들 자체만으로도 무궁한 이야기를 가진 노인, 한 권의 책과 같은 '노인'에 주목하고 싶었다. 

3. 여주인공 마들렌의 존엄사를 어떤 시각에서 다루고 싶으셨는지?
-실존 인물인 마들렌은 일찌기 젊어서부터 임신 중절, 피임할 권리 등 강력한 투쟁의 대열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일반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결단력있는 삶을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가 최후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권', 죽음의 순간까지 의지를 가진 여성을 그려내고 싶었다. 



4. 영화 속에서 그런 어머니의 결정에 대해 아들과 딸은 서로 다른 결정을 한다. 심지어 죽는 수간까지 아들은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다.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다. 존엄사의 결정에 대한 반응에 여러가지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옳고 나쁘고가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가 보이는 반응에 대해 공감해 주기를 원했다. 

5. 굳이 아들이 반대를 하고, 딸이 어머니와 유대를 가진 인물로 설정한 이유가 있는지?
-남자니까(웃음), 몇몇 아들들은 이해할 지 모르겠지만,' 목욕씬'에서 보여지듯 딸과 어머니가 함께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듯, 그런 유대는 어머니와 딸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아들이 그렇게 아픈 어머니와 함께 목욕을 하려 해도 어머니가 불편했을 것이다. 딸에게 벗은 어머니의 몸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저 몸에서 나왔고, 나도 그렇게 늙어갈 테니. 바로 그런 동질성이 유대의 기본이 된다.

6. 그래도 자식인데 어머니의 죽음은 '딜레마'일 듯하다. 
-민감한 문제입니다. 프랑스에서 존엄사는 불법입니다. 만약 합법이 될 예정이라면 영화 속 마들렌도 결정을 미루었겠지요. 얼마전 프랑스에서 두 명의 노인이 호텔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대신 검사에게 존엄사 법적 허용에 대한 편지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자식들은 영화 속 마들렌의 자식들만큼 힘들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들렌처럼 몇일 날 죽을거야 라고 해서 자식 또한 그 선택의 회오리에 휘말리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7. 영화에서는 거울 속에 비춰진 노추의 모습, 그리고 스스로 운전을 하고 나오다 차량들에 휩싸여 오도가도 못하는 장면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는 노년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그립니다. 
-원작에서 이 내용은 딸과 어머니의 대화로 그려집니다. 그저 어머니가 이젠 늙어서 운전을 못하겠다. 차를 팔자라는 식이지요, 하지만 영화적 장면으로 필요하다 생각했븐디ㅏ.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자유로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차를 판다는 건, 경제적 행위 이상, 자유가 사라지는 장면을 상징합니다. 

8.또한 침대에서 실수하는 모습, 병원에 찾아온 딸에게 기저귀를 찬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모습도 존엄사를 설득하는 결정적 장면이었습니다. 
-결정적 장면이죠. 엄마가 기저귀를 찬 모습을 보고 딸은 우리 엄만 저런 사람이 아닌데 라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엔 아들의 입장이었다가, 그 장면에서 딸과 같은 생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종의 '시각적 쇼크'를 노린 연출이었습니다. 



9. 영화 끝부분 딸이 엄마를 업어주는 유대의 상징적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 속 플래시 백 장면에서 소변을 보는 딸을 엄마가 안아서 잡아줍니다. 그런데 이제 딸이 엄마를 업죠. 이를 통해 이것이 인생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마치 사이클처럼요. 그리고 딸과 엄마는 빛이 드는 언덕으로 가지요, 조산사로서 삶을 다루는 일을 했던 엄마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다가오는 것들>은 프랑스에서도 관객과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를 본 후 관객의 대다수가 영화 속 어머니 마들렌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했으며, '너무 좋은 영화'라 극찬했다고 한다, 파스칼 포자두 감독은 이전에 주로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 프랑스 영화 관객들이 선입관을 가진 반면, 부산 국제 영화제를 비롯 해외 유수 영화제의 초청 등 해외 관객들은 그런 선입관없이 이 작품을 감상해줘서 3년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인 이 영화에 대해 자긍심도 느끼고 힘도 얻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청소년기 가족을 다룬 작품을 할 예정인데, 설사 다시 코미디 영화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마지막 레슨>과 같은 심오한 주제를 다룬 바 있어 좀 더 감동적인 내용을 그려낼 것같다고 말했다. 

by meditator 2016. 11. 13. 02:26

또 하나의 마블 표 히어로가 등장했다. 그 이름부터 낯선 '닥터 스트레인지', 닥터라지만 영웅으로써 그가 가져온 세계는 지금까지 영웅물에선 생소한 세계이다. <인셉션>이 '자각몽'을 통해 세계를 확장하고, 변형하며, 시간을 주물렀던 것처럼, 이제 새로인 등장한 영웅 '닥터 스트레인지'는 현상을 넘어, 시간과 공간을 쥐락펴락한다. 또 하나의 세계다. 하지만, 그가 이 새로운 개념의 세계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여전히 '마블'스럽다. 익숙한 듯 신선한 또 하나의 영웅 서사이다. 




<아이언맨>에서 <캡틴 아메리카><토르>까지 세계의 확장 
답답한 현실에 갇힌 사람들은 그들의 불가능한 현실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마치 동굴 속과 같은 그 곳에서, 현실을 돌파해줄 꿈같은 영웅들을 만난다. 그렇게 사람들이 찾아든 극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대표적인 곳은 마블, 마블은 일찍이 2008년 <아이언맨> 이래 거의 해마다 새로운 영웅들을 탄생시키며 자본주의 사회 극장의 영웅군의 선두 주자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극장의 영웅은 여전했다. 반듯한 슈퍼파워 외계인 슈퍼맨이 있었고, 악당인지, 영웅인지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그럼에도 언제나 키다리 아저씨 노릇을 거부하지 못하는 배트맨이 있었다. 하지만 나날이 고도화되어진 문명과 그에 걸맞게 쏟아져 나오는 콘텐츠들에 닳아진 대중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석의 영웅'들은 훈장처럼 시들해져만 갔다. 바로 그때 심기일전하는 마블과 함께 등장한 영웅 <아이언맨>이 있었다. <아이언맨>은 '도덕' 교과서나, '철학' 교과서같은 이전의 영웅들과 달리, 가장 '속물적'인 자본주의적 인간형이다. 그 스스로 '재벌'인 주인공이 자신의 돈으로 맘껏 뿌리며 그 결과물로 만든 '아이언맨'을 통해 '인류 평화'에 기여한다는 설정은 가장 자본주의적이면서, 그러기에 가장 현실에서 길어올리기에 적절한 환타지였다. 결국은 기승전 재벌의 권력인 세상에서, 제 멋대로이지만 착한 재벌의 환타지라니. 

그렇게 현실의 가장 자본주의적 인간인 '아이언맨'이 등장했는가 싶더니, 거기에 2011년 두 명의 히어로를 더 얹는다. ( 물론 아이언맨과 함께 찾아온 자본주의 과학 기술이 낳은 괴물이자, 영웅 헐크도 2008년 <인크레더블 헐크>로 합류한다. 하지만 본격 마블의 헐크로 활동한 것은 에드워드 노튼의 헐크보다는 어벤져스 시리즈에 합류한 마크 러팔로의 헐크이기에 2008년의 헐크에 대한 언급을 더하진 않겠다) 바로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의 캡틴 아메리카와 같은 해 <토르>의 토르이다. 두 영웅은 각각 '역사'와 '전설'을 담당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세계 전쟁을 수행하는 세계의 방위군 역할을 하던 시대의 '미국'을 상징한다. 그 시절 미국의 평범한 청년이 슈퍼 솔져 프로젝트를 통해 영웅이 되듯, 변방의 국가 미국이 몇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쳐 전 세계의 보호국으로 성장하던 그 시대의 가치관과 그 시대의 부도덕, 아이러니를 캡틴 아메리카를 통해 구현한다. 그에 반해 고도화된 문명의 시대에 '망치'란 어불성설의 무기를 들고 설치는 고대 인간이란 자가당착을 절묘하게 설득해낸 토르는 바로 서양 역사의 근간이 된 '설화'적 인물이다.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선 미국과 달리 큰 흥행의 성공을 얻지 못한 것처럼, 토르에 대한 배경 지식에 있어서의 익숙함이 바로 영화 성공의 근간을 이룬다. 마치 우리나라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홍길동이란 영웅을 옛날 이야기처럼 듣고 자라나듯, 서양 문화 속 망치를 든 힘센 거인 토르의 익숙함은 순조롭게 영웅의 세계 안에 '전설'의 자리를 내어준다. 

그렇게 마블은 현실의 자본주의 세계에, 과거 미국과 전설의 영역을 더해가며 영웅들의 수와 함께 세계를 확장해 간다. 즉 그저 새로운 영웅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확장해 가는 식으로 서사의 영역을 넓혀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어벤져스' 군단은 아니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외계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함께 지구를 위협하는 적의 존재가 세계 그 어느 곳을 넘어, 과거, 천상계, 우주, 그리고 이제 시간과 공간 너머 그 어디까지 그 어느 곳에 뛰어나온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구도가 완성되는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새로운 세계와 익숙한 히어로물의 서사 
<닥터 스트레인지>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인지라는 영웅이 우선이 아니라, 그가 품고 올 세계를 앞세운다. 잘 나갔던 외과 의사, 하지만 뜻하지 않았던 교통 사고로 두 손을 잃은 불운의 주인공이 자신의 손을 고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만난 새로운 영적인 세계. 하반신 마비의 환자가 뛰어당기며 농구를 할 수 있지만 그의 신체적 치료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신의 힘이 그것을 가능케 하듯, 여전히 두 손은 떨지만 영적 능력으로 공간을 확장시키고, 차원을 이동하고, 유체를 이탈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공을 들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새로운 세계에만 함몰된 건 아니다. 예의 <아이언맨>이래 히어로물의 익숙한 구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장 섬세해야 할 외과 수술실에서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고, 그 음악의 연대 알아맞추기를 하는 천재적 능력의 외과 의사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분), 그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 못지 않은 자뻑형 인간이다. 무기 사업가 토니 스타크가 부상을 철갑 슈트로 극복하듯, 닥터 스트레인지는 교통 사고로 쓰지 못하는 손을 치료하기 위해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 분)의 수하로 들어간다. 그의 아래서 예의 천재적 능력으로 순조롭게 에인션트 원의 능력을 흡수한 닥터 스트레인지, 하지만 '속물'인 그는 자신의 수술 능력 회복에 관심이 가있고, 하지만 그에게 닥찬 운명은 '세계를 구하는 영웅', 그 영웅의 도정에 수술에 능통한 의사와, 생명을 구하는 영웅 사이의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결국 스트레인지는 까다로운 망토가 선듯 그를 택하듯, 운명적으로 짐지워진 자신의 길을 향해 나선다.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 그 인간적인 캐릭터에게 닥친 절망, 그리고 그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길에서 만난 뜻하지 않은 영웅의 운명, 그리고 선택 등은 그간 히어로 물에서 반복되어 답습되어 온 익숙한 서사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생소한 유체 이탈 등의 공간과 시간의 확장, 변형이라는 '영적 세계'의 난해함을 익숙한 영웅 서사로 채워가며 신선함과 익숙함을 동시에 선사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뻔한 영웅물의 서사를 tv  시리즈 <셜록>과 <이미테이션 게임>을 통해 기괴하고 천재적인 캐릭터로 이미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은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는 배우를 통해 설득하고자 한다.  물론 그래서 익숙해서 지루하고, 신선해서 생경할 위험성도 동시에 내포한다. 그 익숙함이 뻔하게 받아들여지면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저 그런 또 하나의 컨셉을 가진 히어로물이 될 터이고, 그 새로운 세계가 경이롭다면 마블 월드의 확장에 기꺼이 공감하는 것이리라. 
by meditator 2016. 11. 3. 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