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간다>로 흥행은 물론, 2015 올해의 영화상, 감독상을 거머쥔 김성훈 감독이 새 영화 <터널>을 개봉했다. <터널>은 터널에 갇힌 주인공 이정수 역의 하정우의 고군분투를 그렸다는 점에서, 하정우의 2013년 작품 <더 테러 라이브>와 흡사하다. 더구나, <더 테러 라이브>가 방송국을 폭파하려는 범인을 통해 '대한민국'의 그림자를 그렸다면, <터널> 역시 무너진 터널과 거기에 갇힌 한 사람, 그 사람의 구조를 둘러싼 대한민국 각 집단의 이해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2016년판 대한민국의 상징물이 된다. 2013년의 폭파된 방송국, 그리고 이제 2016년의 무너진 터널, 그렇게 대한민국은 부서지고, 무너져 간다. 



웃픈 재난극
하지만 시시각각 조여오는 방송국 폭파범의 협박에 핏대를 올리던 <더 테러 라이브> 속의 앵커 윤영화였던 하정우와 무너진 <터널>에 갇힌 자동차 딜러 이정수인 하정우는 다르다. 영화 초반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기가 바쁘게 길을 떠났던 그는 곧 전화 속 업무조차도 터널이 끝난 이후로 미루었지만, 곧 무너진 터널을 그를 가두고 만다. 하지만, 생활력 강한 남편이자 아빠 이정수는 무너진 터널 잔해에 깔린 상태에서도 곧 정신을 차리고 119에 신고를 하고, 곧 자신을 구하려 올 거라는 응답에 재난 메뉴얼에 따라 차분히 터널 속 생활의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포기하는 그 순간까지도.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다짜고짜 터널에 갇힌 주인공, 그 대강의 줄거리만 보면 '재난' 영화로서 특별한 사건이 없을 듯한 이 딜레마를 뜻밖에도 구하는 건, 웃음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웃음은 '기쁘거나 즐거울 때 나는 표정이나 소리'의 그 웃음이 아니다. 첫 장면 주유소에서 귀가 안들리는 노인 주유원과의 해프닝에서 부터 시작된 '삐져나오는 실소'는 지루한 터널 속 이정수의 고전 내내, 그리고 마지막까지 영화를 관통한다. 무너진 터널에 갇혀 겨우 정신을 차려 가까스로 신호가 잡히는 차 뒤편에 손을 한껏 뻣어 119에 신고를 한 이정수, 하지만 그런 그의 절박함에, 119 교환원은 '메뉴얼' 대로 가장 형식적인 응대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메뉴얼에 따른 형식적'인 응대로 부터 시작하여, 영화 내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상황들은 바로 한 사람의 목숨을 도롱뇽만큼, 아니, 도롱뇽이나, 사람이나, 생명을 생명으로 존중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적 현실이 순간순간 삐져나오는 그 순간들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그 어이없는 상황이 너무도 현실적이라 삐져나오는 헛웃음, 어쩌면 그게 바로 영화 <터널>이 가닿는 주제 의식일 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덧댄 설명이 아니더라도, 아니 굳이 세월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들은, 이제 구구히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너무도 잘 아는, 그래서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메뉴얼'을 따지는 공무원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사진'찍는 것이 더 중요한 듯, 자신의 처신이 더 우선인 그 윗급들, 그들못지않은 이정수가 빨리 나올까봐 우려하는 '생명'을 '기사꺼리'취급하는 '언론'들, 그리고 '생명'에 대해 무뎌지고 이해타산적인 '여론'이란 이름의 우리들. 그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각자들은 각자 맡은 바의 자리에서,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공범'들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우리는 그것들을 실감나게 확인하며 씁쓸한 공범 의식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 <터널>이 빛나는 건, 세월호도 대변되는 대한민국 호의 부정과 부실, 그리고 부도덕을 이정수가 갇힌 무너진 터널이라는 재난 상황을 통해 기가 막히게 모사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부산행>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들이 대한민국을 빗대어 말하고 있지만, <터널>만큼 그 누구라도 면죄부를 운운하기 힘들게, 너나 가릴 것없이 대한민국 호의 각계 각층의 부도덕한 면면을 실랄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는 없었던 듯하다. 

너무도 '인간적인' 김성훈식의 재난 영화 
온 나라가 이정수 구하기에 나선 듯 호들갑을 떨어대던 세상은 그가 터널에 갇힌 뒤 시간이 흐르자, '도롱뇽'을 운운하며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경제적 손실을 들먹이며 살아있는 이정수를 죽은 사람으로 호도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인명 손실조차 고스란히 이정수의 몫으로 돌리며, 한때는 전국민적 성원이었던 사람들이, '여론'의 질타 대상으로 둔갑시켜 버리며. 그래서 결국 그의 아내에게 제 2터널 공사 시작에 대한 서명까지 강요하는. 

이정수가 즐겨듣던 클래식 방송을 찾아가, 어쩌면 살아있을 지도 모를 이정수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구하러 가지 않을테니 기다리지 말라며 오열하는 아내, 거기까지, 영화는 계속 가지만, 영화가 절묘하게 묘사해 내는 현실은 거기까지다. 지금까지 신랄하게 현실을 모사해온 대로라면, 세월호가 그랬듯, 이정수는 결국 그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는 터널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맞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터널>은 잠시 주춤거리지만, 그래도 이정수를 구한다. 



하지만 <터널>에서 이정수가 살아 세상을 맞이하는 방식은 예의 재난 영화 속 그것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그 좌절과 절망의 상황에서, '인간적인 의지'로 모든 역경과 어려움을 이기고 '인간 승리'의 역전극을 써내려가지만, 물론, 모두가 포기한 이정수를 단 한 사람, 그와 함께 그가 마셨던 오줌까지 '동참'하려 했던 구조대장 대경(오달수 분)에 의해, 포기했던 가능성의 돌파구를 열었지만, 그것이 천만 영화 <부산행>의 감동과 신파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마지막, '다 꺼져, 이 새끼들아'라는 이정수를 대변했던 대경의 그 한 마디처럼, 오히려 이정수의 생존은 대한민국을 무안케 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이정수를 살린 것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도리를 저버리지 못한 대경의 시도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성훈 식의 '인간주의'이고,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며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김성훈이 그려내는 '인간'은, 흔한 재난 영화의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영웅이라기 보다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도덕적 양심에 가깝다. 그리고 그건 그의 전작 <끝까지 간다>에서의 인간상과 일맥 상통한다. 

<끝까지 간다>에서 주인공 고건수(이선균 분)는 결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날 뜻하지 않게 저지른 교통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어머니의 시신조차 유기하는 파렴치범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진짜 '도덕'따위는 밥말아먹은 박창민(조진웅 분)을 상대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예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찬가지다.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는, 자신처럼 갇힌 미나를 독려하면서도, 그녀와 물을 나누는데 주춤거린다. 자신의 생명줄을 나누어 주는 그 순간에 주저하던 그,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의 저승길에 매마르지 않게 자신의 생명수를 나누어 준다. 

바로 그 지점, 그것이 김성훈이 말하는 '인간'이다. 대경도 마찬가지다. 내내 대책반의 구조 대장이었지만, 정부의 보여주기 식 구조 대책에 휩쓸려 다니던 그가, 그저 하는 것이라곤 기자들을 상대로 목소리나 높이던 그가, 그래도 갇힌 이정수에 공감하기 위해 자신의 오줌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최소한의 '역지사지', 그리고 모두가, 그리고 심지어 아내조차도 여론에 떠밀려 이정수의 죽음을 시인해야 했던 그 상황에서,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바로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 <터널>을 통해, 김성훈은 멋진 영웅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무너진 터널같은 대한민국에서 포기해서든 안될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를 물으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덕분에, 영화는 흔한 재난 영화로서의 통쾌한 역전 블록버스터는 되지 못했다. 감동과 신파의 도가니도 선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터널 속에서 구해진 이정수의 '꺼져 이 새끼들아!'만으로도 충분히 현실적으로 통쾌했고, 그랬기에, 우리 모두가 고민할 수 있는 진솔한 주제 의식을 남긴다. 세월호를 비롯한 무너진 대한민국, 다수의 영화들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꺼리로 삼는다. 과연, 이 사회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어야 할까, <터널>은 그 고민의 깊이가 진솔하게 와닿은 영화다. 


by meditator 2016. 8. 12. 18:02

온 몸에 진흙을 묻힌 채 뒹굴며 느긋하게 휴양지의 일상을 보내는 두 남녀가 있다. 그 때 문득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지금 곧 공항에 도착한단다. 그는 바로, 여자의 전 애인, 당연히 두 남녀와 불청객 그 사이엔 긴장감이 돌고, 한 술 더 떠서 그의 딸이란 여자인지 소녀인지 모를 그녀는 그녀의 현재 남자에게 대놓고 어필하기 시작한다. 이 뒤얽힌 사각 관계의 결말은, 그 얽힌 관계답게 '치정'으로 인한 '사고'로 귀결된다.


poster #1




<수영장> 그리고 두 번의 리메이크,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현재의 애인과 전 애인 사이의 여자, 거기에 끼어든 전 애인의 딸, 이런 '막장' 스토리의 주인공은 한 편이 아니다. 일찌기 알랭 들롱이 현 애인으로 등장하여, 당시 연인이었던 로미 슈나이더와 젊은 제이 버킨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폴을 연기했던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 la piscine>가 제일 첫 번째 작품이다. 그리고 2003년 프랑스와 오종 감독은 <수영장>을 오마주한 <스위밍 풀>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육감적인 로미 슈나이더 대신, 선병질적인 중년의 작가로 셜롯 샘플링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네 남녀의 서스펜스 스릴러는, 작가인 셜롯 샘플링과 편집장의 딸로 수영장이 딸린 외딴 별장을 찾은 줄리(뤼디빈 사니에르)의 숨막기는 심리극, 그리고 뒤통수를 맞은 듯한 반전의 결말로 변주된다. 그리고 이제 2011년 <아 엠 러브>에서 틸다 스윈튼과 함께 했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비거 스플래쉬>란 제목으로 새롭게 리메이크 하여 돌아왔다.

 

 

네 남녀의 숨막히는 심리극이 걸출했던 1969년작이건, 그녀의 범죄가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숨막히는 눈빛의 셜롯 램플링에 의한 욕망 심리극이건, 그리고 이제 틸다 스윈튼에, 수식어가 필요없는 랄프 파인즈, <대니쉬 걸>의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그리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다코타 존슨까지 합류한 <비거 스플래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휴양'이라는 미묘한 목적으로 고립된 공간에 머물게 되며, 드러나는 '인간'의 맨 얼굴, 즉 욕망이다.

 

 

 

 

 

결국 파국이 되고 만 욕망의 파문

2015년작 <비거 스플래쉬>에서 틸다 스윈튼이 맡고 있는 마리안은 한때 무대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연호를 받았던 '스타'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과도한 성대 혹사로 인한 수술이후, 판탈레리아 외딴 별장에 애인 폴과 함께 머물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전나의 몸으로 관객을 맞이한 마리안과 폴, 하지만 무안한 관객과 달리, 관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마리안은 이제 그 누구의 시선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만끽한다. 그런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녀가 허겁지겁 달려간 공항에 도착한 것은 한때 그녀의 사랑이었던 해리와 그가 1년 전에 알게 된 22살 먹었다는 딸이다.

 

 

로마에 자주 왔다는 폴은 대뜸 그들을 판탈레리아 언덕의 기묘한 식당으로 안내하며, 고즈넉한 폴과 마리안의 일상에 파열음을 빚어낸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그들의 빌라에 얹히고, 손님까지 초대하며 주도권을 쥐어간다. 그런 해리가 잔뜩 못마땅한 폴과 달리, 마리안은 폴과는 전혀 다른, 해리가 빚어낸 일상의 소란스러움이 그리 싫지 않은 듯 합류한다. 그렇게 해리가, 그리고 그런 해리와 자연스레 어울리는 마리안과 겉도는 폴, 그런 그에게 해리의 딸 페넬로페가 도발적으로 접근한다.

 

 

마치 로마와 왔다 자연스레 들린 듯했던 해리의 속내는 영화가 진행되며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리안과 자신의 추구하는 음악이 달라, 마리안을 폴에게 넘겼다던 해리는 마리안에게, 그리고 폴에게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를 노골적으로 표명하다 못해, 이젠 대놓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 속 욕망은 거의 '주접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해리'나, 알고보니 10대의 거침없는 도발이었던 페넬로페만이 아니다. 대놓고 부담스러워하는 폴의 의사를 사뿐히 즈려밟고 전 애인을 집에 들이는 마리안이나, 그런 마리안에게 전전긍긍하며 어쩌지 못하다 결국 폭발하고 마는 폴 역시 '욕망'이란 '전차의 탑승객이다.

 

 

 

일찌기 네 남녀의 '육욕' 혹은 '소유욕'에 집중했던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을 새롭게 각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저 이탈리아 명문가의 며느라의 불륜을 넘어 '삶의 존재' 양식에 대한 반문으로 이어졌던 <아 엠 러브>에서 처럼, <비거 스플래쉬>를 통해 '욕망'에 서사를 부여한다. 한때 수만의 관중에 주목을 받았던 마리안은 이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조차 숨기며 자신의 삶을 조용히 살아가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해리는 그 예전처럼, 자신이라면 다시 마리안을 거뜬히 무대 위의 스타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손님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프로듀싱했던 장황한 후일담처럼. 그의 사랑이라면. 당연히 그런 해리가 한때는 카메라 감독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작품을 할 기약조차 불투명한, 마리안의 종속물같은 폴은 하찮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불과 1년 전에 해리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지만 그런 뒤늦은 부녀 관계가 무색하게 어머니에 의해 내처지다 싶게 해리에게 떠맡겨진 페넬로페의 의지가지없음은 아버지 해리와 폴 사이에서 묘한 도발로 드러나고. 그렇게 영화는 '욕망'의 심리는 넘어서 '존재'를 묻는다.

 

 

그렇게 불안정한 혹은 정처없는 각자의 존재들은, 판타레리아라는 휴양지라기엔 모랫바람이 불어오는 삭막한 공간 속에서 '남'과 '여'의, 그리고, '확정되었지만, 불투명한' 관계들 속에서 '파문'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그 '파문'은 '사건'이 되는 대신, '락'의 정신 대신 비겁하게 불법 이주민들을 핑계대는 스타 마리안의 처신으로 덮어지고, 물 속에 잠겨버린 채 야무진 꿈조차 수장시켜 버린 한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간다.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은 우리나라에 알랭 들롱의 작품답게 <태양은 알고 있다>로 번안되어 개봉되었었다. <비거 스플래쉬>의 태양은 아쉽게도 사건이 일어나던 그 날 밤의 일을 알 수는 없다. 폴은 페넬로페에게 질문하지만, 관객은 그 답을 듣지 못한다. 폴과 페넬로페가 함께 간 짧은 도보 여행의 내막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사건의 내막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대신, 관객 각자가 품고 있는 '욕망'에 따라 답하기를 원한다. 마찬가지다. '막장'으로 보이는 이 네 남녀의 '욕망'이 빚어낸 파국에 대한 '해석'도.

by meditator 2016. 8. 11. 06:54

얼마전 개봉한 그의 극영화 입봉작 <환상의 빛(1995)>이래로, 2016년작 <태풍이 지나가고>까지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은 매우 다른 상황의 다른 이야기를 해오면서도, 막상 영화를 보고 나면, 결국은 기승전 고레에다가 되는 고레에다 식의 세계관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곤 한다. 하지만, 막상 <태풍이 지나가고>를 보고 나면, 이렇게 '직설적'으로 '인생'에 대해 질문을 던진 영화가 있는가 싶으니, 그런 면에서 <태풍이 지나가고>는 고레에다 식이면서도 기존 고레에다 영화가 우회적으로 접근했던 질문이 표면화된, 고레에다 월드의 결절점인 영화이다. 




여전한 '상실'-모두가 되고 싶은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언제나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에서 그래왔듯, 변함없이 <태풍이 지나가고>에도 '죽음'이 등장한다. 료타의 평생 무능력했던 아버지가 반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드리운 상실은 깊지 않다. 어머니(키키 키린 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물건을 다 정리해서 버렸고,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인 료타(아베 히로시 분)가 어떻게 평생을 같이 살았는데 그럴 수 있냐고 묻자, 50년을 같이 살았으니 그럴 수 있다고 명쾌하게 대답할 그런 관계들이다. 

평생을 무능력해서 어머니가 숨겨놓은 돈을 찾아내는데 신통한 능력을 지녔던 아버지, 심지어 어릴 적 아들이 모았던 우표책마저 전당포에 맡기는 아버지, 그래서 평생을 산 아내가 단번에 그의 흔적을 지워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아버지, 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아버지이지만, 이제는 중년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료타에게 사랑받지 못해 불편한 존재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료타 아버지의 부재'가 아니다. 그런 이전 세대 아버지가 '죽음'으로 '부재'한 것과 달리, 이젠 '이혼'으로 인해 '부재'당할 위기에 처한 현재의 아버지 료타이다. 

영화 속 상실은 중층적이다. 료타의 아버지가 죽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아버지는 죽음 이전에도 료타에겐 '부재'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가 미웠음에도, 아버지가 자신의 직업인 소설가를 인정해 주지 않아 늘 불만이면서, 그래서 어쩐지 자신이 없는 료타는 이제, 그 자신이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상실'의 대상이 되고, 동시에 그 자신에게는 이혼한 이후에야 새록새록 소중해 지는 '가족'을 상실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인생?- 행복은 무언가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다. 
한때는 촉망받았던 소설가였지만 이젠 흥신소 일이나 하며, 그나마 생긴 돈도 경륜으로 날려버리는 '루저'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이면에는 세대를 막론한 '아버지'에 대한 존재론과, 인간 혹은 협소하게는 가족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채우는 '상실', 나아가 인생에 대한 질문을 영화는 하고 있다. 

여전히 글을 씁네 하며 인상적인 고객의 말을 적은 메모로 한 벽을 가득 채우고, 시간만 나면 책상에 앉지만, 쓰레기통 같은 방에, 혹시나 전기나 가스 요금 집달리가 올까 숨죽이는 처지, 아들에게 미즈노 글러브를 사주고 싶지만, 돈이 생기면 차곡차곡 모으는 대신 경륜장으로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소설'에 목숨을 걸고 '가족'마저 잃은 그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시대 탓을 하며 무능력으로 일관했듯, 그 역시 때를 기다리며 그 때를 위해 어머니의 집을 뒤져 아버지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거나, 누이에게 손을 벌리며 궁여지책으로 삶을 때운다.  

아버지의 유품 중 값나가는 것을 찾아, 혹은 그 옛날 아버지처럼 어머니가 몰래 숨겨놓은 돈을 찾기 위해 아들과 함께 어머니의 집에 들른 날, 태풍이 몰아치고 아들을 데리러 온 아내와 함께 온가족이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혼을 했음에도 여전히 료타와 그의 아내 교코를 한 가족처럼 한 방에 아들을 사이에 둔 이부자리까지 펴주며 '가족'의 회복을 도모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소박한 소망 사이로, 료타와 쿄코는 신경전을 벌이고.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오히려 분명해지는 건, 아내의 뒤를 밟으며 그녀가 만나는 새로운 남자에 집착하던 료코도 이젠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되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아내가 만나는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가 저지레 해놓은 지난 시간이 아내, 그리고 아들과의 '가족'이란 시간의 균열을 분명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어머니의 친절함으로도, 그리고 료코의 은근한 수작으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하지만 그렇게 되돌이 킬 수 없는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내에게 돈을 주지 않아 아들을 못나게 될 지도 모를 처지의 료타, 하지만 그는 아내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아들 싱고의 아버지였다. 한밤 중 그 옛날 아버지와 료타가 그랬듯이, 아들 싱고와 함께 태풍이 몰아치는 놀이터로 숨어든 아버지 료타. 그 시간을 통해, 아내에게 자랑스레 만화 원작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자랑했다가, 아내의 때늦은 지청구를 들은 료타는 뒤늦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런 아들의 질문에 어머니는 담백한 답을 준다. '원하던 모습이 아니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평생 돈만 생기면 들고 나가는 아버지를 피해 돈을 숨겼던 어머니, 겨우 마련한 연립 주택에서 기뻐했던 것도 잠시, 이제 40여년을 살고 조만간 이곳에서 생을 마칠 것이라 생각하는 어머니는 하지만 아들이 쥐어준 만 엔 한 장에 기뻐하고, 오지않는 아들 대신, 아들이 심은 귤나무와 거기에 날아든 나비에 위로를 받고, 오늘도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다. 되돌아 보면 그녀의 인생은 고달팠고, 여전히 연금을 받는 나이에도 딸의 반찬을 해주고, 아들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지만, 그녀의 얼굴엔 그늘이 없다. 이혼한 아들 내외의 이부자리를 한 방에 깔 만큼 귀여운 뻔뻔함이 그녀의 매력이다. 그런 긍정적인 어머니는 료타에게 삶을 '단순'하게 살라고 충고한다.

그 충고는 경륜을 해서라도 일확천금을 모아 아들에게 폼나는 아빠가 되거나, 다시 소설을 써서 되돌릴 수 없는 가정에 연연해 하는 대신, 소설이 안되면 만화 원작이라도 쓰고, 그래서 돈을 벌어 아들을 만나고, 그래서 태풍이 지나가는 그 밤처럼, 아들과 함께 추억을 만드는 그 시간의 소중함을 영화는 삶의 소중함으로 치환한다. 가족도 잃고, 이젠 그가 매달렸던 소설마저 잃었지만, 하지만 삶은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연다. 이런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제 의식은, '가부장제'와 '성장 지상주의'라는 세상의 화두을 뒤엎은 삶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세속의 잣대로 돌아가는 세상 너머의 삶을 살만한 가치에 대한 질문이자 고레에다 식의 해석이다. 





이런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제 의식은 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관통한다. <환상의 빛> 속 남편을 잃은 이유를 몰라 헤매이던 아내는 어느 덧 새로 꾸민 가족 속에서 위안을 얻고, 아버지를 매개로 만난<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네 자매는 오래된 할머니의 저택에서 새로운 가족을 꾸린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버지는 아들을 잃고나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 그들은 살면서 소중한 것을 잃지만, 료타 어머니의 말처럼, 인생은 그렇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한, 또 다른 미래가 열리고, '포기'라지만, 그 '포기'로 인해 다른 소중한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고레에다 감독은 <태풍이 지나가고>를 통해 가장 직설적으로 선언한다. 요시코 할머니를 통해 그간 동심원처럼 퍼져갔던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에 대한 천착이 귀결된 지점이다. 

이런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 이야기들, 다른 의미로 '상실'의 시리즈들은, 가깝게는 '가족'간의 상실이지만, 그 저변에 일본 사회가 겪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로 인한 '상실'에의 위로를 담는다. 그리고 그런 감독의 위로와 상실에 대한 해석이 우리 나라 관객들에게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이유는, 우리 사회도 그와 다르지 않은 상실감에 빠져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기에, '상실'을 겪고서도, 그 속에서 살아갈 '희망'을 찾아내는 감독의 잔잔한 위로는 언제나 반가운 화두였었다. 
by meditator 2016. 8. 6. 22:40

'나쁜 녀석들'도 모자라, 범죄자들로 조직된 자살 특공대라니, 아니, '수어사이드(suicide)'라는 극한의 수식어가 없어도, 할리 퀸9harley quinn)을 비롯하여, 데드 샷(dead shot), 캡틴 부메랑(captain boomerang), 킬러 크록(killer croc), 엘 디아블로(el diablo)에, 반가운(?) 조커까지, 캐릭터의 면면만으로도 <수어사이드 스쿼드(suicide squad)>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온 소감은, '감독님, tvn의 <나쁜 녀석들>이라도 한번 보시죠!'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신선하고 기발한 캐릭터들을 데리고 이렇게나 뻔한 히어로물을 만들다니, 그래서 감독과 각본이 누굴까 찾아보게 되는 작품이다. 




캐릭터만으로도 궁긍즘 유발, 하지만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dc코믹스의 야심작이다. 그에 앞서 올초 기대작으로 관심을 모았던 세기의 두 영웅이 맞부딪쳤던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 리그>가 아쉬움을 남겼기에, 그 후속으로 등장한 '기괴한' 범죄자들의 집합,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전작의 아쉬움에 대한 부담까지 짊어진 채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가 이 시리즈에 대한 관객의 기대에 포인트를 제대로 짚지 못했던 패착을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다시 한번 되풀이 하며, dc코믹스 월드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개봉전부터 흥미를 모았던 것은 등장인물 면면에서 보여진 신선한 캐릭터들 때문이다. 물론 dc코믹스의 독자들이라면 익숙한 캐릭터들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범죄자들의 집합, 심지어 그들이 모인 자살 특공대란 조합은 신선하다 못해 파격적인 구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미 개봉전부터, 마고 로비가 분한 '할리 퀸' 캐릭터를 비롯한 '비정상적인' 인물군은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미 그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이 충분한 윌 스미스가 분한 데드 샷, 슈퍼맨이란 막강 파워를 가진 신인격의 인물이 아니지만, 배트맨에 필적한, 하지만 배트맨에게만 그의 총알이 비껴간 영화적 설명에 따르면 40km 거리에서도 백발백중의 명사수라던가, 정신과 의사라는 지적인 캐리어에서 조커와의 만남으로 그의 연인이자, 조커보다 더 한 수 위의 '정신 착란'의 캐릭터를 선보이는 섹시하지만, 그 섹시함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다 숱한 남자들이 쓰러져 간 할리 퀸, 거기에 마치 끝판왕처럼 주변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엘 디아블로에 악어 인간에 부메랑 사수까지 합체했는데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거기에 히스 로저 사후, 공백기였던 조커의 현신까지. 

하지만, 그 개성강한 캐릭터들을 <수어사이드 스쿼드> 제작진은 그저 말 그대로 '개성이 강한' 히어로들로 하향 평준화시켜 버린다. 원작에서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지만, 어머니와 형이 아버지를 죽이려 하자, 형을 죽이고 범죄의 길로 들어섰던 혈연의 딜레마를 안고 있던 데드샷은, 윌 스미스가 그의 이전 영화에서 종종 해왔던 '부성애'의 인물로 변화한다. 그리고 데드샷의 캐릭터 변화는, 바로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가진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돈을 위해 그 누구도 죽이는 청부 살해업자이지만 딸을 위해 극진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와, 혈연 내 피부림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원작의 데드샷이 가진 도덕적 딜레마는 바로 평범한 히어로 물과, '나쁜 녀석' 데드샷의 갭만큼 고스란히 영화 속에서 드러난다. 



tvn을 통해 방영되었던 <나쁜 녀석들>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범죄를 처단하는, 즉 더 나쁜 녀석들을 처단하는 나쁜 녀석들이라는, 기막힌 딜레마에 있기 때문이다. 분명 감옥에서 몇 십년을 썩어야 하거나, 조만간 사형을 당해야 하는 나쁜 녀석들이지만, 그들이 '감형'이라는 '이해' 관계를 통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도덕적 딜레마가, '선'이란 혹은 '정의'란 무엇인가 대해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현대 사회의 딜레마를 역설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대중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개봉 전부터 매력적이었던 것은, 이미 특수 감옥에서 특별 보호(?)를 받아야 하는 구제 불능 범죄자들이 가장 이기적인 이해 관계를 통해 규합되고,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균열, 혹은 거기서 발생하는 '정의'에 대한 물음, 혹은 확신들이, 제반 가치에 대한 물음표가 난무하는 사회에 대한 대리 만족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개봉 전부터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가치 판단 이전에, 신기한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과 매료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전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나쁜 녀석들'에 대한 현 시대적 의의를 쉽게 간과한다. 대신, 나쁜 녀석들 목에 칩을 박아두고, 그들을 자살 특공대로 내모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 안이하게 그들을 '영웅화' 시킨다. 데드샷을 딸을 위한 부성애로, 팜므 파탈의 매력을 뿜어내던 할리 퀸은 순애보적 사랑꾼으로, 쉽게 가고자 한다. 가장 나쁜 놈들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돌진하다, 그 속에서 빚어지는 전우애와 인간애 속에서 빚어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은, 이미 그 시작 전부터 그들이 몹시도 인간적인 인물이라는 '설명'을 통해, 이미 그 열기가 감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비인간적인 존재로 아만다 월이 등장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속 그의 존재는 그저 무개념 갑질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캐릭터가 아쉬운 그들의 활약 
뭐 그런 캐릭터에 대한 앞서 나간 진화 작전은 그렇다 치고, 각자 최고의 사수에, 누군가의 정신을 쏙 빼놓을 듯한 매력과 능력에, 불바다에, 부메랑에, 수륙 양용의 능력치는 어땠을까? 이런 각 캐릭터에 대한 능력을 발휘하려면, 그들의 능력이 충분히 발휘될만한 상대가 등장했어야 하는데,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첫 편(?)에서 등장한 악의 축은 안타깝게도 핀트가 엇나간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하여 등장한 인챈트리스(카라 델러바인 분)은 그 존재감은 무시무시했지만, 캐릭터 열전으로 그들의 능력치를 한껏 관객들에게 선보여야 할 첫 편의 악으론 너무 인간 외적인 존재와 능력인 것이다. 그 '신'적인 영역의 인챈트리스 앞에 데드샷의 총구도, 할리퀸의 도발도, 엘 디아블로의 화력도, 어쩐지 무색하다. 모든 인간을 빨아들이는 인챈트리스의 신적 능력 앞에, 각 캐릭터의 능력은 매력적으로 분출되는 대신, 그저 전우의 합체로 드러날 뿐이다. 거의 까메오 수준의 조커는 어떻고. 



물론, 그렇다고 <슈어사이드 스쿼드>가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할리 퀸은 그 존재 자체로 흥미롭고, 다시 돌아온 조커는 반가웠으며, 데드 샷을 비롯한 이들 무리의 팀웤과 갈등은 여전히 궁금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슈어사이드 스쿼드>에선 아니다. dc코믹스의 캐릭터들은 이미 그 지면을 통해 선보인 캐릭터만으로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dc코믹스는 그간 마블의 캐릭터들이 선전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한 듯 보인다. '아이언 맨'이 대중의 환호를 받는 것은, 그가 그저 새로운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영웅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받아들여 진 것이다. 슈퍼맨도, 배트맨도, 그리고 아이언맨도, 그들은 각자의 세계관과 그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론을 가지고 등장하여, 새로운 '존재론'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른 옷을 입은 히어로가 아니다. 고담시를 배경으로 '선과 악'의 경계인인 배트맨이나, 가장 부유하지만, 그 부유함의 원죄를 가진, 하지만, 그 해결책조차 자신의 부로부터 시작하는 아이언맨은 그 자체가 이 시대의 새로운 담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잽처럼 보여진 할리 퀸을 비롯한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캐릭터들이 개봉 전부터 대중의 기대를 받는다는 것은, 드라마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나쁜 녀석들>이 여전히 회자되는 현실과 맞물린다. 선과 정의가 모호한 시대, 아니, 돈이 정의와 선이 되는 시대에, '나쁜 녀석들'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대중의 영웅적 설화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적 정서를 가장 평범한 히어로물로 대답한다면, 수어사이드스쿼드를 비롯한 dc코믹스의 영상월드는 그 전망을 밝게 점치기 어려울 듯하다. 
by meditator 2016. 8. 4. 19:18

흔히들 사각의 링을 인생에 비유한다. 홀로 올라서서 승패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내려올 수 없는, 그 극한의 시간들이 아량없는 인생의 레이스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소재로 '권투'는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관객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그저 그 인생과 같은 시합,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각의 링에 올라서기까지, 그리고 그 처절한 싸움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밖에 없는 한 인물의 링 밖 인생으로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울릴 수 있어서이다. 그래서 '사각의 링'을 매개로 삶에 부대끼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는 빈번하게 만들어 지고, <록키>로 부터, <밀리언달러 베이비>에 이르기까지 명작으로 회자되곤 한다. 그리고 또 한 편, <백엔의 사랑>도 그렇게 '사각의 링'을 매개로 감동어린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른 두살 루저 이치코 백엔 샵 알바가 되다
감동스런 이야기라고 했지만, 영화의 시작과 등장한 주인공 이치코(안도 사쿠라 분)는 감동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루저'의 인생이다. 동생과 달리 전문대학까지 나왔다지만 대학 졸업 후 쭈욱 백수, 서른이 된 지금도 도시락 가게를 하는 부모님 집에 얹혀 용돈으로 백엔샵이나 오가며 하릴없이 조카와 함께 tv에 빠져 무위도식하는 처지다. 이혼을 하고 역시나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뜨거운 주방의 열기에 고전하는 여동생은 그런 언니가 한심해하는 걸 지나, 증오한다. 결국, 아침 식탁에서 벌어진 자매의 혈전(?), 어머니는 돈봉투를 쥐어주며, 이치코의 등을 떠민다. 

하루 아침에 '독립'되어버린 이치코, 그런 그녀가 호구지책으로 얻은 직장은, 밤마다 그녀가 몇 푼 안되는 용돈으로 장을 보던 백 엔 샵의 아르바이트 자리이다. 일당이 높단 이유로 심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치코, 그곳에서 그녀는 서른 줄이 되도록 백수로 지냈던 그녀 못지 않은 '루저' 인생들과 조우한다. 깔끔하게 일처리를 해내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는 점장, 마흔이 넘은 홀아비로 쉴새 없이 치근덕거리다 결국 치한이 되어버린 동료, 그리고 한때 이곳에서 일했지만 계산대의 돈을 쓱싹하다 잘려 이젠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의 단골이 된 노숙자 여사님, 그리고 권투를 한답시고 늘 바나나만 사들고 가는 무뚝뚝한 카노(아라이 히로후미 분) 등. 



본의 아니게 백엔샵의 알바가 된 이치코를 중심으로 영화는 성장이 멈춘 일본 사회의 '루저'들을 나열한다. 본의 아니게 라고 했지만, 서른 줄이 되도록 이치코는, 그리고 영화가 한참 진행되도록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사나싶게, 무기력이란 말도 무색하게 그저 떠밀려 살아가는 '루저 인생'은 굴러간다. 이치코 뿐만이 아니다. 백엔샵이라는 일본 사회의 근저에 깔린, 아니 경쟁과 선점을 제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그 밑바닥을 떠받치는 백엔샵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군상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이벤트'란 이치코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더 이상 유효기간 지난 도시락을 가져갈 수 없게 되자 계산대를 턴 수다쟁이 홀아비나 노숙자 여사님처럼, '막장'으로 통하는 또 다른 길목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점장처럼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삶에서 일탈시켜 버리든가. 도무지 긍정적인 삶의 터닝 포인트라곤 없는 현실. 

그렇게 변화의 희망이라고는 없는 이치코의 현실, 그 현실의 틈은 생뚱맞게도 이치코가 지나던 길에서 그녀의 시선을 잡아 끈 '권투'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치코가 권투 글러브를 낚아 챈 것은 아니다. 그저 주저주저 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줄행랑을 치던 그녀가, 바나나맨 카노의 마지막 권투 시합을 참관의 경험 후, 치한 홀애비와의 하룻밤의 상흔과, 이어진 카노와의 역시나 상처를 남긴 짧은 사랑이란 현실에서 다시 한번 나동그라졌을 때, 이치코는 권투 도장을 찾는다. 

이치코, 링 위에 오르다 
왜 권투였을까? 호텔에 가기 싫다던 그녀의 복부를 강타하던 홀애비의 주먹을 이겨보기 위해서? 아니 카노의 권투 시합에서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뜻밖에도 죽자고 싸우던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후, 다가가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자신의 첫 순정을 짓밟은 홀애비를 밟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싸웠다고 등두르려주던 그 '위로'를 이치코는 '권투'를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건 카노와의 사랑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거절당하지 않을 거 같아서라며 그녀에게 접근했던 카노, 그런 그가 갈 곳없이 술에 취해 오바이트를 하며 나동그라졌을 때, 기꺼이 이치코는 그를 집에 들인다. 하지만,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다던 카노는 그녀를 저버리고, 그녀는 치열한 전투라는 댓가를 치뤄야만 얻을 수 있는 등두드림의 위로를 찾고자 권투 도장을 향한다. 

영화는 그녀에게 찾아왔던 카노가 다시 그녀를 버리고 홀연히 사라지듯, 이치코의 현실에 쉬이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녀의 도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관장이 결국 그녀에게 기회를 허용해주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는, '얼굴만은 지키라'는 당부가 무색하게,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든다. 딸랑 3회전의 승부,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조차 그녀가 달라졌다고 말하듯 혹독하게 자신을 담금질해냈던 이치코의 열정은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선 무기력했다. 벌써 첫 번 째 경기에서 부터 그녀는 스텝을 놓치고, 가드는 어느새 풀려 있었다. 그녀의 주무기라는 왼손은 채 써보지도 않은 채. 



16회 일본 아카데미 상 여주 주연상을 비롯하여 일본 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의 21개 부문에서 수상을 한 <백 엔의 사랑>은 32살 백수 이치코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한껏 살을 부풀린 모습에서 마지막 링 위의 날렵한 복서의 모습으로 변화한 안도 사쿠라의 열연에 얹혀 루저 인생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날렵한 복서의 모습으로 변신한 이치코의 모습에서 관객이 감탄사를 자아내는 것도 무색하게, 링 위의 그녀는 무기력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왼 손 펀치가 무색하게 내내 두드려 맞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 마치 이것이 인생이라는 듯, 그 어떤 승리의 드라마가 전하지 못하는 진솔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전한다. 이겨서 인생이 아니라, 이렇게 자신을 던져 싸우는 것이 인생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치코는 두 번 운다. 백엔 샵에, 권투까지 강행하던 그녀가 카노의 감기를 옮아 쓰러졌을 때, 그런 그녀에게 카노가 씹히지도 않는 고기 요리를 해주었을 때, 그리고, 경기에 져서 시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은 얼굴로 경기장을 나서는 그녀에게 다가온 카노의 품에서, 도무지 표정도 없고, 그래서 감정을 파악할 수 조차 없던 그녀가, 백엔 샵에서 만난 카노의 품에서 통곡을 한다. 그리고 다독다독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는 카노. 바로, 그녀가 매료되었던, 그리고 그녀가 갈구했던 사랑, 진정한 위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일본 밴드 크리프하이프(creephyp)의 보컬 오자키 세카이칸의 하이톤 솔로가 울려퍼진다. '아파, 아파, 아파, ....왜 어째서 잘 풀리지 않는 거야. 살거야'라고. 바로 <백엔의 사랑>의 한 줄 요약이랄까. 영화 속 이치코는 끝내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저 링 위의 경기에서 이겨내지 못해을 뿐, 처음 어머니가 들이민 돈 봉투를 받고 '독립' 되어버린 이치코로부터, 이치코는 꽤 멀리왔다. 여전히 아프고, 또 아프지만, 이젠 그녀에겐 '사랑'도 있고, 살아갈 힘도 생겼다. 백엔 샵 야간 알바였던 그녀는 이제 몸이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 여동생과 나란히 도시락 가게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었다. 사랑도 물론. 동생은 링 위에서 한 대도 때리지 못하는 그녀에게 '패배자'라 소리쳤지만, 경기에 졌을 뿐, 이제 그녀는 패배자가 아니다. 
by meditator 2016. 8. 2. 18:18

우디 앨런은 미국의 홍상수라고 할까? 아니, 홍상수가 한국의 우디 앨런인가? 이제는 나이가 지긋한 두 감독의 끊임없는 행보는, 최근 불거진 홍상수 감독의 '스캔들'과 함께 더더욱 두 감독의 행보 사이에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연예인 걱정만 내려놓아도 한결 편해진다'는 박명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대적 서비스'처럼 불거져 나온 스캔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매년 꾸준히 마치 일기를 쓰듯 또박또박 작품을 생산해 내는 두 '노장' 감독의 성실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우디 앨런을 우리의 홍상수에 빗대는게 어쩐지 어패가 있게 느껴지는 건,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지역적 협소성, 혹은 문화적 열패감, 그런 것의 소산만은 아닐 것이다. 두 감독이 매년 성실하게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홍상수 감독이 평생을 한 화두에 매달린 '선승'과 같다한다면, 우디 앨런의 궤적은, 때론 깊게, 때론 넓게, 그 세계의 품과 깊이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울 만큼 포괄적이며, 여전히 당돌하다. 나이가 들수록 그의 궤적은 넓어지지만, 여전히 그가 가진 뒷통수를 치는 듯한 문제 의식은 날카롭고, 그 제기 방식은 신선하다. 2015년작 <이레셔널 맨> 역시 다르지 않다. 



2013년작 <her>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를 넓힌 호아킨 피닉스가 인기 철학 교수 '에이브'로 분한 <이레셔널 맨>의 시작은 그가 여름학기를 맞아 로드 아일랜드의 대학에 오기로 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소란스러워지는' 대학 사회로 부터이다. 저마다의 기대를 갖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운전 중 거침없이 '알콜'을 섭취하며, 에이브는 칸트는 명구를 읊조린다. 

'인간 이성은 거부할 수도, 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 할 운명이다'
마치 그런 칸트 '정언'의 현신인양, 교수 에이브는 자신이 추구해 왔던 '이성적 삶'을 배반한 현실로 인해 처절한 무기력에 빠져있다. 강의는 심드렁하고, 집필 활동은 도무지 진전이 없으며, 뭇 여성들의 추파도 그에게는 불가항력이다. 심지어, 학생들의 모임에 등장한 호기심어린 '룰렛'게임을 직접 실현하며, 무기력한 일상을 탈출해 보고자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삶에 환멸을 느끼며 자신을 마구잡이로 내던질 수록, 그런 그에게 역시나 단조로운 삶에 환멸을 느낀 그 대학의 화학과 교수와, 그에게 '로맨틱'한 매력을 발견한 '질(엠마 스톤 분)은 그에게 매료된다. 

질과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로 이어지는 나날, 그 중 하루 에이브와 질은 식당에서 들른 뒷 좌석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한 판결의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뒷담화처럼 에이브와 질은 그 소문의 주인공인 '판사'가 '죽어마땅한 사람'이라는 데 공감한다. 

그날 이후, 질은 에이브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세상 그 무엇이라도 그가 빠진 삶의 권태를 구해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에이브 스스로 삶의 활기를 찾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달뜬' 채, 무기력했던 화학과 여교수와의 '성생활'에도 활기를 찾았으며, 수세적이었던 '질'과의 관계도, 이제 '헌정시'를 바칠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해간다. 질은 그런 그가 이상했지만, 그것이 '자신과의 사랑'으로 인한 변화로 받아들이며, 그와의 관계를 진전시켜가는데, 뜻밖에도 그들이 '뒷담화'했던 그 판사의 죽음이 전해진다. 



에이브는 이성적 삶을 실천해 왔던 인물이다. 그는 평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그의 친구는 그런 그와 뜻을 같이 하다 '중동'에서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현실 참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아내는 그의 또 다른 친구와 바람이 나 그를 버렸다. 그의 현실 참여는 '보상'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그를 배반한다. 어쩌면 에이브의 무기력과 권태는 당연하다. 그는 노력했지만, 현실에게 그의 의지가 가닿을 수 있는 곳은 '허무'와 '알콜' 뿐이었다. 그런 그가, '죽어 마땅한' 판사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무력하게 했던 '정의 구현'의 의지가, 불쑥 솟아난다. 그를 좌절케 했던, 그 '정의'를 이제 스스로 직접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이런 '소영웅주의적' 욕망이 꿈틀댐과 동시에, 잦아들었던 삶의 욕구가 동시에 발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심드렁했던 '성생활'도, 그리고, '사랑'까지도. '시'에 침을 뱉었던 그가, 사랑의 헌정시를 쓰게 될 정도로. 

동시에 영화는, 질과 에이브의 나레이션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에이브가 몰입해 있는 상황에 관객들조차 '시험'에 들게 한다. 등장 전부터 화제가 된 매력남, 하지만, 권태와 무기력에, 수시로 알콜을 섭취하는 그, 그리고 판사의 소문을 통해, 활기를 되찾는 그를 통해, 엉뚱한 그 삶의 활력에 저마다, '혹'한 물음표를 던지게 만드는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발군의 연기에 휘말려, 저도 모르게, 에이브의 선택에 휘말려드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윤리적 미혹'을 당돌하게 일으켰던 에이브 교수의 비밀은, 마지막 순간 뜻밖의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뜻밖의 파국을 인도한 건, 그에게 '로맨틱하게 미혹되었던' 순진한 질의 선택이다. 

미혹된 인간에 대한 해학적 질문
에이브가 등장하면서 읊조렸던 칸트의 명구는 시사적이다. 동시에, 그 불가항력의 인간 운명에 대해 안타까워하기 전에, 그 명구의 근저를 살펴볼 일이다. 영화 속 에이브는 '철학 교수'다, 하지만 그는 강의 시간에, 칸트의 형이상학에 대해, 현실과 괴리된 머릿 속 말장난이란 식으로 치부한다. 그가 '철학'을 가르치지만, 그가 가르치는 '철학자'들의 정언은 '현실'을 벗어났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중세의 끝자락과 근대의 새벽을 가로지른 칸트의 고민은, '신의 존재 유무'등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인간의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인가 였다. 그런 칸트, 혹은 철학의 고민들을 현실 바깥의 머릿 속 상념으로 치부해 버린 철학 교수 에이브의 결론은, 이미 그가 이후 저지르는 사건들의 전조 증상이 된다. 또한 칸트의 철학이, 중세의 '신'을 대신하는 근세 인간 이성주의의 서막이자, 근간이라 한다면, 에이브로 상징되는 '광기'는 그 이성의 근대에 도발하는 탈 근대적 도발의 단편적 징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성의 힘으로 세상의 불합리를 해결하려 했던 지난 세기의 시도들이 무력화되었을 때, 거기에 파괴적으로 실현되는 비이성의 '정의'들. 그리고 그것이 에이브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마주하고 있는 광기들이요, 한때 이성적인 기준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려 했던 지식인 에이브조차 '미혹'되고마는 현실의 세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무기력해진 우리 시대의 실천 이성에 대한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런 에이브의 도발적 판단, 혹은 결단에 대한 '우디 앨런'식의 대답은 가장 원론적인 '도덕률'로 귀착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한껏 호아킨 피닉스가 분한 에이브에 질과 함께 매료되게 만든 우디 앨런은, 언제나 그가 종종 그래왔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평형이 귀착되는 곳은 평범한 도덕률이라는 것을 일깨우며 마무리짓는다. 그간 에이브와 함께 잠시 격동했던 관객들의 마음조차 머쓱하게. 에이브의 광기에 천착했던 영화는 마지막 질의 나레이션과 함께, 퍼뜩 그간 놓쳤던 혹은 방기했던 '이성'의 세계로 돌아온다. 칸트가 그러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임을 영화적으로 설득한다. 

따지고 보면, 굳이 <이레셔널 맨>만이 아니라, 지난 우디 앨런의 영화는 '거부할 수도 없고, 답할 수도 없는 인간의 운명'을 해학적으로 다루어 왔다. 물론, <블루 자스민>처럼 예외적으로 일관되게 처절할 수도 있었지만. 우디 앨런이 대단한 것은, '거부할 수도 없고, 답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다루었고, 그런 것이 '인간'이라는 점에 시인하지만, 결코 그렇다고, 그 운명에 쉬이 동조하거나, 휘말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여전히 꼿꼿하게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 댓가조차 냉정하게 '해학적'혹은 '관조적'으로 그려내는 것, 바로 그 점이, 우디 앨런 영화의 가치이다.  특히나, 되돌아 보면, 에이브의 일탈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던진 질문같은 <이레셔널맨>은 두고 두고 곱씹어 볼만한 영화다. 




by meditator 2016. 7. 29. 15:24

소설을 쓰고 싶었던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청년을 매료시킨 건, '이미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미지'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청년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청년, 그는 이들의 이야기를 '서사'가 있는 영화로 제작하고자 결심한다. 33세, 이젠 청년이라기엔 머쓱한 나이가 된 그는 처음으로 장편의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그 영화는, 1995년 베니스 영화제 촬영상(황금오셀리오니 상), 카톨릭 협회상, 이탈리아 영화 산업 협의회 상을 수상하고,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을 받으며, 그에게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수식어를 남겼다. 바로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이다. 




상실의 서사
<환상의 빛>이라는 제목과 달리,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영화를 압도하는 건, 흑백의 정서다. 아니, '어둠'이 더 정확할까. 도시의 다리 밑 웅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궁색한 삶으로 시작된다. 마당 대신 집앞 어두운 골목에서 많은 것이 이루어지는 도시의 한 구석, 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뽑아 온 곳의 분명한 지명이 아직 남아있는 시간에서, 결국 할머니는 그 어두운 시간을 견디는 대신 정처없이 자신의 고향을 향한 길을 떠난다. 어린 손녀는 그런 할머니를 차마 말리지 못하고, 아들 내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노인의 가출이 일상이라 치부하며, 자신들의 일상을 지속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할머니의 실종은 손녀 유미코(에스미 마키코 분)의 꿈 속에 각인된다. 

그렇게 아픔을 꿈 속에 숨긴 채, 손녀를 비롯한 도시에 머무른 이들은 그 공간 속에서 다시 가정을 이루고, 그곳이 고향인 양 깃들어 산다. 여전히 할머니의 꿈에 가위 눌리는 손녀는, 그것을 악몽으로 치부한 채 갓 태어난 아이와, 그 옛날 자전거를 타던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자기 곁에 머무는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 분)'와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꾸려간다. 하지만, 단 하루 저녁 아이를 맡긴 채 남편의 공장을 찾아 남편과 찻집을 찾는 행복에도 웃음이 마냥 퍼져나갔던 유미코의 행복은 그저 그렇게 다리 저 너머로 슬며시 사라져 버렸던 할머니처럼, 찾아온다. 자전거를 두고 나갔던 남편이, 기찻길 위에서 자살한 것이다. 



아이의 울음조차 달래지 않고 망연자실했던 유미코, 하지만 시간은 그녀를 추스리게 만든다. 남편과 함께 했던 그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몇 년을 더 보낸 유미코는 도시를 떠나, 바닷바람이 거센 새로운 지방에서 새로운 가족을 꾸린다. 처음 오랜 여행을 마친 유미코 모자가 타미오(나이토 타카시 분)를 만났을 때 서먹서먹했던 분위기는 그들의 충실한 일상과 함께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든다. 유미코는 충실한 아내, 공손한 며느리, 따순 엄마였고, 타미오 역시 든든한 남편에, 자상한 아버지로. 그리고 타미오의 일가도 유미코에겐 울타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은 마치 균열을 가진 유리 구슬처럼 조심스레 흘러간다. 이쿠오 앞에서 천진난만한 소녀같던 유미코는 이제 그저 슬며시 미소 한 자락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그림자를 지닌 여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그림자는 일상 속에서 슬며시 나타났다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다시 '도시'로 갔다온 후, 그리고 할머니의 꿈을 다시 꾸고, 타미오의 친척이 태풍으로 돌아오지 않는 날을 경과하며, 더 이상 그림자로 숨겨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큐를 찍어왔던 감독의 첫 데뷔작답게, <환상의 빛>에서 보여진 유미코가 겪은 상실의 서사는 담담하게 진행된다. 할머니의 실종도, 남편의 자살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미코의 슬픔도 시종일관 덤덤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한 치도 덜어냄이 없는 자연 다큐를 통해, 그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한 삶을 그려내듯이, 여전히 덤덤하게 진행되는 일상의 묘사, 그리고 그 일상을 벗어난 바다를 통해, 유미코의 그럼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삶을 그려낸다. 



상실, 그 이후의 삶
할머니에 이어, 남편을 잃은 여인, 그 여인의 슬픔을 그린 <환상의 빛>은 마야모토 테루의 소설집 속 단편이다. 그중 <환상의 빛>은 죽은 남편에게 보낸 독백체의 편지글이다.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영화에서도 끝내 밝혀지지 않듯이, 유미코는 자신과 어린 아들을 두고 '자살'을 택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끝내 접어두지 못한다. '죽으려는 그 마음의 정체'를 놓지 못한다. 7년이 지난 후 새 남편과의 평안한 일상 속에서도. 이런 독백의 서간체 소설이,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라는 다큐를 찍으며 홀로 남겨진 미망인을 통해 죽음과 상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나 영화로 탄생된다. 유미코가 겪는 상실과, 그 일상, 그리고 변화를 영상을 통해 표현해 냄으로써, 죽음과 상실에 대한 끝없는 질문으로 이어진 독백의 서간체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해 낸다.



그리고 첫 작품으로서의 '상실'은 그저 첫 작품의 특징을 넘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주제 의식으로 성장해 간다. <환상의 빛> 이후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에는 늘 '상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이 주목하는 건 그저 상실이 아니다. <환상의 빛>에서 사라진 할머니의 행방도, 자살한 남편의 이유도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중요치 않다. 그거 보다는 그 앞서 가버린 사람들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산 사람들의 삶이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그들의 삶은 유미코처럼 늘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한다. 아니 유미코만이 아니다. 도대체 왜 유미코가 도시를 떠나 이 거친 바다까지 왔을까란 의문, 그리고 못내 사랑했던 아내 대신 왜 자기를 택했냐는 유미코의 애꿏은 앙탈에 '무서운 이야기'라는 남편 타미오의 답처럼, 그리고 한때는 바다사람이었지만, 자신을 유혹했던 환상의 빛을 견뎌낸 채 삶을 지속한 시아버지처럼, 죽음이란 공통의 아픔을 함께 한 사람들의 유대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환상의 빛>을 통해 그려내기 시작한 세계이다. 결국 견뎌내지 못하고 전 남편에대한 의문을 토해 냈을 때, 마치 예전부터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던 사람처럼 덤덤하게 아버지의 경험을 말하는 타키오의 모습은, 상실의 아픔을 터트리는 스즈를 품는 큰 언니 사치를 연상케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레에다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상실이 여사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주목'일 터이다. 삶이라지만, 따지고 보면 삶은 여사로 죽음과 맞물린다. 그런 경계가 불분명한 삶에 대해 고레에다 감독의 천착, 그 시작이 <환상의 빛>이다. 바다로 나간 유미코의 시아버지를 매료시켰던 그 빛처럼, 유미코가 찾아간 그 바닷 마을, 터널을 지나 저머리에서부터 환하게 빛나는 그 마을의 빛은 죽음에 침잠되어 있는 유미코에겐 삶의 환상의 빛이 된다. 일용할 양식을 주는 바다와, 풍랑으로 해녀를 삼킬 수 있는 바다가 다르지 않듯. 우리 삶 속에 삶과 죽음은 늘 혼재되어 있고, 그 죽음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깃들여 보듬는다. 

by meditator 2016. 7. 19. 15:54

자신을 뛰어넘는 극한적 상황을 통해 '치유'의 길을 여는 또 한 편의 영화가 찾아왔다. 제이크 질렌할의 <데몰리션>이다. 아니, 장 자크 발레의 <데몰리션>이라야 이해가 빠르겠다. 장 자크 발레 감독은 2014년 <와일드>를 통해 2014 할리우드 필름 어워드 주목할 만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다. 아니 수상 이전에, 그의 영화는 매튜 매커너히에게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안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4)>을 통해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바 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와일드>, 그리고 이제 <데몰리션>까지, 장 자크 발레 감독은 극한의 지난한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는 주인공들의 처절한 '전투'를 올곧이 내세운다. 그런가 하면, 제이크 질렌할은 <사우스포(2015)>에 이어 또 다시 '상실'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시작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권태기에 빠진 듯한 부부의 출근 길, 아내는 남편에게 연신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기 위한 어떤 질문을 던지고, 남편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이제 아내는 그런 남편의 반문조차, 자신에 대한 무관심을 포장하려는 면피라는 걸 간파하고, 하지만 아내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매일 열어보는 냉장고의 이상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부부의 일상에 무뎌져 있다. 하지만 그 무디고 날선 일상은 순식간에 '아내의 죽음'으로 파괴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표현, 파괴
하지만, 파괴된 부부의 삶에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이상하리 만치 일상을 지속해 나간다. 아내가 죽은 병원에서 자판기에서 나오지 않는 쵸코바를 태연히 뽑으려 한다든가, 회사에 출근을 한다던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이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였음은 이후 데이비스의 이상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는 한국 사회에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고 후의 후유증이다.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자신의 품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고, 그저 자신은 구두에 피가 묻을 정도로 멀쩡한 데이비스는 그 스트레스 반응으로 '무감각'을 보인다.  하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무감각과 달리, 그의 의식 속에서 그는 아직도 일상을 늘 '아내와 함께 한다'. 그가 샤워를 할 때부터 그 어떤 순간에도 늘 그의 시선 한 켠에 아내가 여전히 있다. 

그의 이상 행동의 시작은 걸린 초쿄바 자판기 회사를 향한 그의 장문의 편지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저 나오지 않는 초쿄바에 대해 여느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자판기를 향해 분통을 터트리는 대신, 그는 차분하게 아내의 추도식이 열리는 방 한 쪽에서 초쿄바를 뽑게 되기 까지 자신의 여정을 적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기 전 아내가 말했던 냉장고에서 새는 물을 견디지 못하고, 역시나 죽기 전 아내가 말했던 크리스마스에 아버지로 부터 받았던 공구함으로 냉장고를 고치는 대신, '파괴'해버린 데이비스는, 그때부터 자신의 '무감각'한 일상들을 절단내기 시작한다. 마치 '마이더스의 손'처럼 장인 투자 회사의 잘 나가던 투자 분석가는 '투자' 기획 대신, 그 '기획'에 씌이는 컴퓨터를 해체하고, 장인과의 상담 중에 그 방에 있는 시계의 분해를 꿈꾼다. 그것도 모자라, 회사의 화장실 문을 바닥에 늘어놓고,  그것도 성에 안 차, 오히려 자신이 돈을 지불하고 철거 현장으로 뛰어든다. 



데이비스의 무감각과 무표정에선 역시나 시한부 고통에 시달리던 아들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었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크로닉>의 데이비드(팀 로스 분)의 무표정이 오버랩된다.  그런가 하면,  '파괴'라는 극단적 방식을 통해 그의 고통이 뿜어져 나오는 방식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포기하려던 인생을 극한의 공간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걷는 것을 통해 해소한 <와일드>의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 분)이 떠올려진다.  그런가 하면,  오로지 주인공 데이비스에 대한 집중된 클로즈업을 통해, 온전히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배우를 통해 데이비스라는 한 사람의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보자면, 생뚱맞게도 여주인공조차 나레이션으로 등장했던 호아킨 피닉스의 <HER>가 떠올려진다. 

구원, 혹은 공감의 손길
<크로닉>의 데이비드가 아들을 상실한 상처를 타인에 대한 과도한 감정 이입을 통해 해소하려던 방식이 뜻하지 않는 추문 혹은 또 다른 죽음에의 봉사로 귀결되어, '치유'에 이르지 못한 대신, 무감각한 데이비스가 세상을 향해 던진 구원의 신호, 초코바 회사에 보낸 우문에는 현답이 도달했다. 새벽 2시에 그에게 초코바 회사의 고객 상담원이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녀는 바로 아들과 함께, 현재는 초코바 회사 사장과 동거를 하고 있는 캐런(나오미 왓츠 분)이다. 마치 첫 눈에 반한 그 누군가에게 설레임을 전하듯, 캐럴은 그렇게 장문의 편지를 보낸 데이비스에게 연락을 취한다. 

결국 그녀를 찾아낸 데이비스, 다짜고짜 캐롤에게 들이대는 데이비스는 그녀의 남자 친구가 출장으로 부재한 그녀의 집에 살다시피 하는 하고.  캐롤 남자 친구가 결국 데이비스에게 손찌검을 하듯, 혹은 그의 장인이 분노하듯, 그들은 그저 세간의 눈으로 보자면 '남자와 여자'이다. 하지만, 캐롤의 아들, 크리스의 일탈과, 그 일탈의 자락에서 드러난 미군 병사의 죽음을 통해, 이 모자 역시 데이비스처럼 사랑한 이를 잃은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영화는 설핏 보여준다.  그래서 내내 캐롤과 데이비스는 그토록 붙어 있지만, 그들은 '애무' 대신, 퇴행하여, 소파를 뒤집어 시트로 천막을 만들어 손가락으로 그림자 놀이를 한다. 마치 어린 시절의 단짝마냥, 데이비스의 또 다른 단짝은 캐롤의 도발적인 아들 크리스다. 



그렇게 그를 지원하는 두 벗의 존재로 인해, '파괴'의 힘을 얻는 데이비스는 드디어, 크리스와 함께 그간 '파괴'를 통해 쌓은 내공으로, 자신의 집을 부수기 시작한다.  물이 새는 냉장고, 아내가 사들인 200달러 짜리 커피 머쉰 정도가 아니라, 캐롤이 가장 이상적이라 했던 그 집을 '철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데이비스의 '철거'는 아마도 처음엔, 장인의 말대로 그는 의식하지 못했을 지언정, 아내만 죽고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모멸에서 부터, 혹은 샤워를 할 때조차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아내의 환영에 대한 저항에서부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나아가, 그가 자신의 무감각을 10년 전부터라 지칭했듯, 그가 대학 시절부터 '편의적'으로 살아왔던, 심지어 아내의 사랑조차 무심히 받아들였던 지난 시간에 대한 '파괴'이자, 복기이다. 

파괴는 존재고, 망가지는 것은 어떤 완성.
아내가 고쳐주기를 원했던 냉장고를 고치는 대신 부숴버렸던 데이비스, 그런 데이비스의 복장은 기묘하다. 그가 투자 분석가로 일하러 나갈 때 입었던 와이셔츠에, 건설 노동자들이 착용하는 바지와 워커 차림이다. 그의 '파괴' 복식은,  존재를 규정하며, 동시에, 행동 방식을 설명한다. 그 복합적인 드러냄이, 그저 데이비스의 '파괴'가 '파괴'아니라, 자신의 삶을 재구축하기 위한 '통과 의례'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파괴'의 끝에서 수염을 깍고,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아내 유산으로 만들어진 장학금 수여식에 나타난 날, 뜻밖에 그는 오로지 그에게 '자학'만을 남겨주었던 결혼 생활의 또 다른 함의를 깨닫는다. 그리고 그 함의는 그에게 분노대신, 결혼이라는 정의내리기 힘든 여정, 그리고 아내 대신 죽을 수 없어, 아니 아내를 사랑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을 내려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가 존재하지 않는 아내를 대신하여 세상을 향해 햄머를 내휘두르며 도발했던 그의 지난 삶, 그리고 결혼, 그리고 무뎠던 그의 '사랑'이 비로소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초코바 자판기를 향해 발로 차며 슬픔을 표출하는 대신 고객 센터로 장문의 편지를 쓰듯이, 남보기에 번듯한 집처럼, 그럴 듯해 보이지만 공허했던 삶과 결혼을 가진 것들을 마구 때려부수는 방식으로 '복기'하는 <데몰리션>은 몹시도 모던하다. 마치, 인간의 초상이, 해체되어 갈기갈기 저마다의 색채와 구성으로 드러나는 현대 미술처럼, 데이비스의 해체의 여정은 끊임없이 가능하지 않은 인간사에서 무언가를 채우고 쌓으려 하는 현대인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까지 닿는다





by meditator 2016. 7. 14. 16:39

6월 29일 개봉한 <굿바이 싱글>이 7월 8일 영진위 집계 기준 142만을 넘기면서 손익 분기점 15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2016년 상반기 한국 영화가 흥행작이 6편에 불과한 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영화가 무려 27편에 이르는 가운데, 더구나 주목받는 대작이 아니고서는 대중의 선택을 받을 기회조차 여의치 않은 가운데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닌 <굿바이 싱글>의 손익 분기점 돌파는 고무적이다. 




김혜수에 의한 <굿바이 싱글>
제목은 <굿바이 싱글>이라고 했지만, 이 영화 홍보 단계에서 부터 시작하여, 실제 영화 전편을 지배하는 것은 김혜수라는 배우의 독보적 존재감이다. 2012년 <도둑들>의 여전히 파월풀하면서도 애틋했던 펩시로 부터, 2014년 <차이나 타운>의 거친 얼굴로 차이나타운을 지배한 '엄마', 그리고 2013년 <직장의 신>에서 대체불가 미스 김에서, 2016년 <시그널>의 나이 불문 그 순수한 매력이 돋보였던 차수현까지, 최근 몇 년간 김혜수의 필모와 그 필모를 뛰어넘는 연기는 '종횡무진'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폭과 깊이에 있어 앞도적이다. 여배우, 더구나 나이가 들어 가는 여배우의 입지가 좁다는 지점에 공감했음에도, 최근 몇 년사이 배우 김혜수는, 마치 그 한계를 스스로 돌파하겠다는 듯이 다양한 장르와 캐릭의 좌표축을 오간다. 

그리고 그런 김혜수의 '가열찬' 도전의 도정에서 이제 김혜수는 김혜수이기에 가능해진 영화를 만들어 내는 지점에 이르렀다. <굿바이 싱글>의 주연은 가진 게 나이가 무색한 섹시한 몸매 밖에 없는 '백치미'가 철철 넘치는 발연기의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캐릭터지만, 이 '진상' 캐릭터가 최근 몇 년간 다양한 필모를 도전하고 있는 김혜수와 만나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불알 친구'란 말조차 미소를 짓게 만들 정도로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변화한다. 거기에 영화의 서사로 놓고보면, 싱글 노처녀 스타의 임신 스캔들을 둘러싼 해프닝과 대안 가족으로서의 귀결이라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방식이지만, 그 터무니 없는 내 편을 만들기 위해 '임신'을 하겠다는 얼토당토치 않은 주연의 결정이라든가, 대회장 입장을 가로막는 학부모들을 상대로 한 뜻밖의 장황한 '개념 연설' 장면은 김혜수라는 배우에 의존한 바가 절대적이다. 즉 코미디 영화로서 <굿바이 싱글>이 가지는 생뚱맞은 파격을 내공깊은 김혜수를 통해 영화는 온전히 설득해 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김혜수라는 이미 자타공인 매력적인 배우가 아니었다면, <굿바이 싱글>은 그럴 듯은 하지만 꽤나 썰렁할 수 있는 영화가 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굿바이 싱글>을 온전히 김혜수라는 배우에 대한 찬사로만 귀결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다. 왜냐하면 바로 이 작품의 감독이 2013년 젊은이들에게 회자되었던 화제작 <족구왕> 각본과 제작에 참여한 김태곤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태곤 감독은 그에 앞서 2012년 <1999, 면회>를 통해 2013 데살로니키 국제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족구왕>을 이어받은 <굿바이 싱글>
그러기에 <굿바이 싱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김태곤 감독의 전작 <1999, 면회>와 <족구왕>을 가로지는 정서와 주제 의식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제목에서 부터 알수 있듯이 90년대의 젊은이들의 정서와 추억을 두 청년의 군대에 간 친구 면회를 통해 <1999, 면회>에서 풀어냈다. 1박2일의 면회, 거기서 한 여성을 통해 빚어지는 해프닝은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그를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정서를 풀어내는데 있어 김태곤 감독은 각별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젊은이에 대한 각별한 정서는 <1999, 면회>에 출연한 바 있는 안재홍과 다시 한번 만난 <족구왕>을 통해 빛난다. 모두가 '성공'을 위한 디딤돌로 대학을 이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족구'에 빠진 복학생이라는 신선한 설정은, 그 설정이 가진 '성공 사회에 대한 파열음과 유쾌한 해학으로 동시대 젊은이들로 부터 찬사를 받는다. 

<굿바이 싱글>은 그런 <족구왕>의 성공적 전략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성공'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는 대학, 그리고 그런 대학의 확장판인 양, '스타'의 생사 여탈권이 대중과 매스미디어를 통해 결정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족구왕의 24세 복학생 홍만섭(안재홍 분)이나, 발연기에 이제 남은 것은 매력적인 몸매 밖엔 없는 노처녀 스타 주연의 존재는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은 모두 현대 사회의 시스템 안에 놓여졌지만, 애초에 토익 점수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만섭이나, 이젠 주모 역할이나 들어오는 주연은 그저 이 사회의 '루저'들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가 정해놓은 시스템 속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는 이들, 하지만 이들은 그렇게 밀려나는 자신을 위해 생뚱맞은 선택을 하고, 바로 이 지점이 김태곤식 코미디의 변곡점이 된다. 토익 점수 조차 없는 만섭은 자신이 즐기는 족구를 하기 시작하고, 연하와의 사랑(?)마저 배신으로 귀결된 주연은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가지려고 한다. 단지 그 아이를 만들기 위한 방식이 '급진적'(?)일 뿐.

그의 매니저인지 스타일리스트인지 모를 평구(마동석 분)의 지적처럼 마치 새 구두를 사재던 그 모습처럼 주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를 가지려고 하고, 결국 가장 위험한 방식인 '계약'을 통해 어린 미혼모 단지(김현수 분)와 동거를 하기 시작한다. 
대학에 돌아와보니 모두가 취직을 위해 매진하는 그곳에서 할 것이 없어 족구에 매달리던 만섭이 성공 사회의 비수가 되듯, 그저 내편을 만들겠다던 주연의 소박한 해프닝은 원심원을 그리며 그녀를 때론 미디어의 성녀로, 탕녀로 롤러코스터를 타게 만들다, 결국 '대안 가족'을 통한 내 편 만들기라는 이상적 구도로 귀착된다. 



주구장창 족구를 해대던 <족구왕>처럼, <굿바이 싱글>의 서사는 임신 스캔들을 차치하고 보면 그닥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안재홍이라는 배우와 그 주변 배우들이 빚어내는 '역설적인 공기'가 <족구왕>의 정서를 지배하듯, <굿바이 싱글> 역시 김혜수라는 매력적인 배우와 마동석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의 호흡에서 빚어지는 해프닝이 이 영화의 정서를 지배한다. 단지, 아쉬운 것은 때론 그 정서에 천착하려 하다보니,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의 공기에 집중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족구'라는 다이내믹한 액션이 없는 <굿바이 싱글>의 구동력을 종종 느슨하게 만들곤 했다는 점이다. 

족구를 열심히 하다 보니, 성공 괴물이 되어가던 대학 사회를 휘저어 놓게 되어버린 족구왕처럼, 대중과 미디어가 생사 여탈권을 가졌던 섹시 스타는, 때론 '복수'를 위해 그를 이용하다, 철저하게 그에게 내처지는 상태가 되어버리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진정 자신이 원하던 바를 찾아간다. 늘 대중의 시선에 의해 살아왔던 스타를 넘어,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한 무모한 도전이, 주연이라는 한 인물의 삶에 주체성과 주도성을 되살려 낸 것이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오랜 시간 그녀를 소비했던 대중과 미디어, 그 누구도 그녀의 편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돌아온 '스탭'들, 그리고 생면부지의 한 소녀다. 영화는 코믹하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섹시스타 주연의 앞날을 해피엔딩으로 그려내지만, 그 왁자지껄한 웃음 뒤에 남은 것은 운동장에 홀로 남은 만섭에게서 느껴지는 대중 사회의 '페이소스'다. 


by meditator 2016. 7. 9. 15:34

또 한 편의 김명민 표 영화가 찾아왔다. 

영화 출연작이 14편이나 되는 김명민의 필모그래피에는 다양한 영화들이 존재한다. 그에게 청룡 남우 주연상을 안긴 <내 사랑 내 곁에(2009)>와 <페이스메이커(2011)>처럼 극한의 육체적 헌신을 전제로 한 영화가 있는가 하면, <무방비 도시(2007)>이래 <리턴(2007)> 등의 스릴러와 <연가시(2012)>와 같은 재난 영화, 그리고 독특한 소재의 <파괴된 사나이(2010)>와 <간첩(2012)> 등도 있다. 하지만 최근 김명민이란 배우로 연상되는 영화는 무엇보다 400만이 넘는 흥행으로 1편에 이어 2편까지 만들어진 <조선 명탐정> 시리즈이다. 21016년 찾아온 <특별 수사; 사형수의 편지>는 부제 사형수의 편지를 달고 있는 제목에서 부터 여러모로 <조선 명탐정>의 현대판, 혹은 업그레이드 버전인 듯 보여진다. 



<조선 명탐정>의 청출어람, <특별수사>
<조선 명탐정; 각시 투구꽃의 비밀(2011)>과 <조선 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2014)>에서 김명민은 조선 정조 시대 어사 박문수로 연상되는 명탐정 김민으로 분한다. 일찌기 <불멸의 이순신(2004)> 이래 <하얀 거탑(2007)>, <개과천선(2012)>로 그래서 오히려 <육룡이 나르샤(2015)>가 아쉬웠던 정도로 '본좌'의 소리를 들었던 선굵은 연기로 정평이 난 김명민이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펄펄 뛰던 '본좌' 김명민이지만, 영화를 통해 기아 수준으로 살을 깍는 노력 등의 그의 영화 캐릭터는 '노력'은 가상하게 평가되었지만, 박수 갈채는 아쉬웠다.  그러던 그가 <조선 명탐정>을 통해 허당스러운면서도 느물느물한,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그 두뇌가 빛나는 신선한 캐릭터로 관객 몰이에 성공했다. 하지만 성공적인 흥행에 힘입어 2편까지 만들어진 <조선 명탐정> 시리즈는 퓨전이라기에도 실소가 나오는 설정들과 이쁘지만 어설픈 여주인공의 연기 등으로 300만을 넘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으로는 미흡한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 현대판 <조선 명탐정>처럼 돌아온 2016 <특별 수사;사형수의 편지(이하 특별 수사)>는 <조선 명탐정>의 아쉬운 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린 청출어람의 모양새다. <조선 명탐정> 속 허허실실 명탑정이었던 김명민은 한때 형사였지만 이제는 외제 차를 타며 대놓고 '브로커'질을 하는 뻔뻔하지만 능력있는 사무장으로 돌아왔다. 결국은 능력자이고 사건 해결자이지만, 그간 김명민이 드라마에서 해왔던 강직한 캐릭터와 달리, 도덕적으로 하자가 있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조선명탐정>의 계보를 잇는다.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게 사건에 얽혀 해결사가 되는 서사 구조도 유사하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조선 명탐정>의 두 어설펐던 여주인공들이 <특별 수사>에는 없다. 악역인 척하다가 결국은 비련의 주인공이 된 여주인공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악의 현신인 대해재철의 안주인 김영애가 있다. <특별 수사>의 서사는 특별하지 않다. 이제는 한국 영화계 아니 드라마까지 클리셰가 되어가는 재벌가 악행 소탕 작전이다. 하지만, 거기에 여배우라는 수식어로는 가둘 수 없는 본투비 재벌로 등장하여, 꽃미남 재벌의 망나니 짓도 없이, 알몸 추태도 없이 오로지 표정과 나긋나긋한 말투만으로, 그 어떤 재벌보다도 '재벌'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김영애 판 본투비 재벌은, 그 존재만으로 <특별 수사> 속 악의 축을 확고히 세운다. 

거기에 오달수와의 버디 무비와도 같았던 <조선 명탐정>의 콤비는 성동일-김명민의 새로운 콤비로 대체된다. 변호사-사무장 콤비는 2014년 <성난 변호사>를 통해 이미 시도된 바 있지만, 그와 달리 변호사 성동일과 사무장 김명민이라는 보이는 것과 다른 캐릭터의 역전으로 <특별 수사>는 재미를 더한다. 또한 이선균의 독주로 임원희가 아쉬웠던 <성난 변호사>와 달리, <조선 명탐정> 개장수 오달수 못지 않게, 대머리 변호사로 분한 성동일은 때로는 속물스럽게, 때로는 정깊게, 때로는 코믹하게 능수능란한 활약으로 우직한 김명민의 연기에 조미료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평범한 재벌 소탕극, 거기에 화룡점정이 된 배우들
하지만 <특별 수사>의 화룡점정은 뜻밖에도 마지막 단  한 장면에서 김명민과 마주치는 김상호이다. 때로는 김명민 표 영화가 아니라, 김상호가 주인공인 듯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잡혀 들어가 온갖 수난을 당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괴롭히던 교도관조차 마음을 돌리게 만들고, 그런 정황을 공감어린 연기로 설득한 김상호의 딸을 향한 순애보는 어쩌면 뻔한 재벌 소탕극이 되어버릴 <특별 수사>에 감동이란 수식어를 더한다. 

이들 만이 아니다. <특별 수사>의 120분을 채운 건 김명민과 김영애, 성동일, 김상호만이 아니라, 초반 최필재 형사의 옷을 벗게 만든, 사실은 최필재보다 더 나쁜, 그래서 최필재가 사형수 김상호의 사연에 눈을 돌리게 만든 개연성을 실감나게 만들어 준 양형사 박혁권에서부터, 특별출연임에도 그 존재감이 돋보인 검시관 이한위와 빨간 명찰 이문식, 그리고 순사 출신 할아버지 신구 등이 요소요소에서 빛난다. 그런가 하면, 재벌가 개의 다양한 버전 장부장의 최병모와 박소장의 김뢰하, 심지어 그들의 똘마니 해병대 삼총사, 심지어 교도관 오민석까지 개연성있는 캐릭터로 연기의 빈틈이 없이, 영화를 빼곡 채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서사가 이들의 연기로 인해 개연성을 얻는다. 덕분에 <특별 수사>는 뻔한 재벌가 소탕극을 넘어  또 다른 부제를 달고 다시 찾아올 엔진의 여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by meditator 2016. 6. 19. 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