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드라마의 액션씬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싸움박질하기에 충분히 넓은 공간, 주인공을 둘러싸고, 주인공을 상대할 적, 혹은 적들이 주인공과 대치하고, 싸움이 시작되면, 카메라는 주인공의 거친 몸짓을 가장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뽑아내기 위하여, 때론 스피디하게, 혹은 때론 느리게 호흡을 조절해가며, 주인공과 상대방의 싸움을 멋있게 그려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종영한 <쓰리데이즈>는, 이런 전형적인 액션씬을 뛰어넘은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액션씬하면 암만해도 기억에 떠오르는 건 드라마보다는 영화다. 많고 많은 빼어난 액션씬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의 액션씬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영화 <도둑들>에서, 김윤석이, 부산의 허름한 아파트 벽을 타잔처럼 타고 다니며 벌였던 총격씬이 떠오른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로 그 아파트라는 현실적 공간을 가장 절묘하게 활용했던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액션씬이라면 흔히 떠오르는 부둣가, 낡은 공장터 그런 전형적인 장소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공간이 아파트와, 그 아파트에 붙어있는 에어컨 박스들, 그리고 낡은 아파트에 늘어져 있는 전선줄들이 액션의 도구로서 제 몫을 해내고, 그것을 지형지물로, 때로는 수단으로 이용하여 이리저리 아파트 벽을 옮겨다니며 총격을 벌이는 액션 장면에서, 한국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만 가능한 현실적 액션을 보여주었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영화 <도둑들>의 액션씬처럼, <쓰리데이즈>의 액션씬 역시 영화 못지 않게 공간의 활용에서 진일보한 성취를 보인다. 
4회 대통령 암살범으로 오해를 받고 쫓기던 한태경은 대통령을 찾아 탄 기차에서 역시나 대통령을 찾아 기차에 탄 동료 경호관들과 마주치게 된다. 동료들을 노려보는 것도 잠시,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긴 것과 동시에, 한태경은 기차 통로라는 협소한 공간을 배경으로 양쪽에서 자신을 옭죄어 오는 동료 경호관들과 대결을 벌인다. 이 장면의 묘미는, 분명 여러 명의 경호관들이 한태경을 잡기 위해 몰려들었음에도, 기차 객실 통로라는 공간이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기 때문에, 마치 줄을 서서 차례로 기다리는 듯이 한태경과 양쪽에서 차례로 대결을 벌이는 묘미에 있다. 게임처럼,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쪽의 한 사람이, 그 사람이 쓰러지면, 양쪽에서 함께, 그리고 한태경은 그런 유리한, 하지만, 협소한 공간이라는 기차 통로를 양쪽의 좌석까지 이용하며 다수의 경호관과 액션의 합을 보인다. 이 장면의 묘미는, 같은 경호관 신분으로, 상위 1%의 경호관 한태경이지만, 결국은 떼로 몰려드는 경호관 동료들에게 제압당하는 현실성에 있다. 주인공이기에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경호관과 경호관들의 싸움에서 결국은 지고마는, 주인공의 현실적 모습이 이 장면의 액션에 현실감을 더해준다. 

(사진; 한국일보)

<쓰리데이즈>는 요즘 드라마로는 비교적 짧은 16임에도 불구하고, 액션씬으로는 드라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차량을 활용하여 조그만 승용차가 자신보다 배나 더 큰 트럭을 단번에 전복시키는 2억이 들었다는 카 체이싱은 <쓰리데이즈>가 자신만만하게 내보인 볼거리였다. 진짜 대통령 암살범 함봉수와 한태경의 최후의 몸의 담판이 벌어진 장소는 뜻밖에도 함봉수의 총격을 받고 앰블런스가 쑤셔박힌 책방이었다. 거기서 함봉수와 한태경은 책이 꼽혀진 책장을 사이에 두고, 총과 몸을 이용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어디 그뿐인가, 박보원을 향해 총구를 겨눈 킬러를 향해 몸을 던진 한태경은 킬러와 함께 2층 높이의 유리창을 부수면서 아래로 나동그라지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총을 사이에 둔 혈투를 벌인다. 액션의 장소도 다양하다. 엘리베이터 안이라는 협소한 공간, 병원 복도, 폭발한 자동차 앞, 자동차 안, 모텔 복도, 모니터실 그리고 16부 갤러리까지 다양한 공간이 액션의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다양한 공간이 활용되는 만큼, 그 공간을 살린 지형지물들이 액션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 역시 <쓰리데이즈>의 묘미였다. 때로는 부서진 자동차 유리가, 복도의 문이, 그리고 손에 유일하게 남겨진 핸드폰이, 벽에 걸린 액자가 한태경의 무기가 되었고, <쓰리데이즈> 액션의 진가를 살려냈다. 

<쓰리데이즈> 액션씬의 특징은 그저 다양한 장소, 다양한 소도구의 활용에만 있지 않다. 결코 단 한번도 전형적인 액션씬의 클리셰인 슬로우 모션없이 자칫 눈 한번이라도 깜짝 해버리면 지나칠 정도의 빠른 호흡으로, 액션씬의 강도를 전달한 것 또한 <쓰리데이즈> 액션의 묘미이다. 
또한 그런 급박한 호흡 속에, 싸움을 벌이는 한태경의 감정 또한 고스란히 전달시켜주는 특징을 가진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이 보인 액션적 성취라고 하면, 짜인 합으로서의 액션이 아니라, 싸움박질의 날 것 그대로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고독한 스파이라는 면에서 <본 시리즈>에 비교되었지만, 그것과 다른 차별성을 <본시리즈>가 가진 고도의 짜여진 액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그 파열음에 집중한데서 <베를린>의 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쓰리데이즈>의 액션씬은 바로 <베를린>의 그것에 필적할 만하다 하겠다. 

자신이 처한 절박한 위치와 분노를 고스란히 그의 액션에서 표출한 하정우처럼, 한태경의 액션에선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자신이 존경했던 함봉수와의 대결에서, 서로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었기에, 단 한 방의 가격으로 상대방을 절멸시킬 수도 있지만, 치명적인 급소를 피하면서, 상대방을 이 싸움에서 밀어내고 싶어하는 안타까움이 그들의 액션의 합에 담겨있다. 그렇게 경호실장과의 싸움에서 머뭇거리던 한태경이 상대가 킬러가 되면 달라진다. 봐주지 않는다. 막상막하였던 경호실장과 달리, 킬러는 한태경의 발차기, 혹은 단호한 가격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 액션에 분노가 실린다. 그래도 경호관이기에 적들을 제압하거나, 기절한다는 목적 하에 언제나 절제하던 한태경이지만, 윤보원을 차량 폭파로 죽이려고 했던 킬러를 향한 그의 주먹엔 절제란 없다. 그저 선배였던 황윤재가 자신과 한태경을 빼돌린 윤보원의 경찰차 안에서 한태경에서 총까지 들이대며 분노했던 모습은, 이후 그가 함봉수의 조력자라는 것이 밝혀지며 그의 절박함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16회 갤러리에서 두 명의 킬러들에게 밀리던 한태경은 문 뒤에 누워있는 동료 경호관들을 발견하고, 마치 게임에서 파워업을 하듯, 분노의 액션을 보인다. 배우 박유천의 거친 호흡, 단말마적인 비명, 그리고 단호한 얼굴 표정에서 느껴지는 정서들은 고스란히 액션의 감정이 되어 전달된다. 

<쓰리데이즈>의 액션은 이야기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든 장르물의 묘미, 혹은 장식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런 형식적 틀을 넘어, 액션을 통해 감정을 분출하고, 호소하는 묘한 효과를 낳는다. 드라마의 액션씬이라면 언제나 그러려니 하고 봤던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집중하며 액션의 호흡과, 거기에 담긴 분노에 빠져들게 만든다. 드라마의 종속적 요소로서의 액션이 대등하게, 드라마의 흐름에 간여하며 제 몫을 다함으로써, <쓰리데이즈>의 긴박한 호흡에 추진력이 되었다. 


by meditator 2014. 5. 2. 17:15

16부작의 <쓰리데이즈>가 마무리되었다.

김도진을 향해 폭탄이 실린 차를 몰고 갔던 이동휘 대통령, 하지만 차에 실린 폭탄은 김도진만을 산화시킨 채 이동휘 대통령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를 구하려 총을 맞은 채 달려간 한태경도 간발의 차이로 함께 살아남았다. 

김은희 작가의 전작 <싸인>에서처럼, 이동휘 대통령이 김도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면, 혹은 이동휘 대통령을 구하고 대신 한태경이 죽었다면, <쓰리데이즈>는 진실을 향한 묵직한 메시지만 남긴 드라마로 끝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쓰리데이즈>는 둔중한 운명론 대신에, 희망을 택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동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말한다.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겠다고. 그의 이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양진리가 위기에 빠지고 홀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한태경은 말한다. 청와대로 가시라고, 하지만 이동휘는 거절한다. 김도진이 대통령의 목숨을 놓고 딜을 할 때, 다시 한태경은 대통령을 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동휘는 말한다. 사람 목숨은 다 똑같다고. 대통령의 목숨과 국민의 목숨이 다르지 않다고. 대통령은 국민이 있어야 존재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은 홀로 폭탄이 실린 차를 몰고 김도진에게 간다. 한태경도 마찬가지다. 사라진 대통령을 찾기 위해 차를 몰고 질주하다, 폭탄이 실린 듯한 주민들이 탄 트럭을 몰고, 대통령의 뜻을 기억하며 차를 돌린다.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경호관이지만, 대통령의 목숨만큼, 그의 뜻이, 그리고 국민이 있어야 대통령도 존재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의중을 기억하며 양진리 주민들의 목숨을 구한다. 

(사진; osen)


역사는 늘 승자의 이야기를 하고, 그 승리를 거머쥔 영웅의 이야기에 골몰한다. 하지만, 정작 역사의 현장을 가득 채운 것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그려낸, 그 강고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기어올라가고, 또 기어올라가고, 또 기어올라가던 그 사람들처럼. 실제 역사를 이룬 것은, 그 작전을 지시한 누군가가 아니라, 그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쓰리데이즈>는 진짜 이 사회의, 이 권력의 주인이 누군인가를 밝힌다. 

그리고, 세상에 지친 그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쓰리데이즈>는 첫 회부터, 16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출연자들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드라마에서 그저 스쳐지나가는 많은 단역, 조역들이 그저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간과되어 지는 반면에,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에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눈에 들어온다. 마치 애초에 제작진이 그럴 의도인 양, 한 장면, 한 장면에서 등장했던 그 어느 인물 하나, 하나의 연기가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15회 김도진의 수하들의 총격에 스러져가는 경호관들이 안타까웠던 것은, 그 시간까지 진행되어 온 드라마의 흐름 속에서, 그들이 어느새 또 한 사람의 주인공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치 애초에,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이 대통령이 말한, 국민, 그들인 것처럼. 그래서 비로소, 16부에 이르러, 왜 이 드라마가 대통령을 지키는 음지의 직업인 경호관을 주인공으로 했는지 이해가 된다. 바로,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직분을 위해 충실히 살아가는 그 사람 각각이,그들의 삶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래서, 16부 마지막 취조실 씬에서 감동이 더해진다. 김도진의 수하들은 저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 돈을 위해서, 혹은 애국을 한다는 아이러니한 신념을, 혹은 그래봐야, 언제나 세상은 힘있는 자본이 지배한다는 논리를. 그건 그들이 새삼 부언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맞닦뜨린 세상의 지배 논리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쓰리데이즈>는 그들을 취조하는 검찰관의 입을 빌어 말한다. 설사 세상이 그렇다 해도,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다하지 못하면 그 누군가가, 그것을 대항해 싸워가겠다고. 그리고, 이동휘가 살아있어서, 한태경이 살아있어서 고마운 마음과 함께, 어디선가 세상의 불의를 향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1%의 그들이 있음에 내가 서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비록 1%라도 세상을 위해 싸워보겠다는 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 어느때보다도 마음이 든든해 진다.

<쓰리데이즈>는 전무후무한 드라마였다. 한 눈 팔지 않고, 소신있게 포기하지 않는 1%가 세상을 바꿔나가겠다는 주제를 한 치의 흔들림없이 전하고자 노력했고, 거기에 도달했다. 드라마의 경직된 공기를 바꾸고자 쓰이는 그 흔한 말랑말랑한 대사, 웃기는 말 한 마디없이, 1회 대통령의 암살 시도에서 부터, 서로 다른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뚝심있게 전달했다.  거친 액션씬조차,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고뇌와 분노의 장치로 승화될 수 있다는 걸 <쓰리데이즈>는 보여준다. 이동휘란 대통령을, 그의 지지율 10%로 설명할 수 없듯이, 그저 몇 %의 시청률로 이 드라마를 평가하기에 <쓰리데이즈>가 전해준 메시지는 2014년의 우리 삶의 시금석이자, 위로이다.




그래서 <쓰리데이즈>를 함께 해준 배우들이 대단하고 고맙다. 단 한 장면, 한 마디의 대사만으로도 이동휘라는 고립무원의 대통령의 진심을 전해준 손현주씨는 물론, 이십대의 젊은 배우임에도 흔한 러브씬하나 없이 묵직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드라마를 선택하여, 한태경이라는 캐릭터에 생기와 열정을 살려내 준 박유천이란 배우가 고맙다.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분장을 포기한 채, 남자 주인공보다도 적은 의상으로, 고군분투하여 기존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주체적 여성 캐릭터를 실현해준 소이현, 박하선 배우도 감사한다. 

<쓰리데이즈>란 드라마의 16부작을 이동휘, 한태경이라는 양대 산맥의 줄기가 버티어 갔다면, 그 산맥의 거목이 된 것은, 장현성이 분한 함봉수 실장, 윤제문의 비서실장, 그리고 안길강의 김상희 비서실장의 신념이었다. 그들이 자기 자리에서 겪는 혼돈과 고뇌와 결심들이, 우리 삶의 구체적 문제로 다가오며 <쓰리데이즈>의 신념을 생생히 우리들에게 제기했다. 그들만이 아니다.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서슴지않고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경호관들처럼 16부를 채워갔던 수많은 조연, 단역들의 흐트러지지 않는 진심들이, <쓰리데이즈>라는 숲을 채워갔다. 물론, 거기에는, 그런 그들의 진심을 돋보이게 해준 최원영을 비롯한 악역들의 호연도 빠질 수 없다. 

그저 실종된 대통령을 찾아가는 흔한 장르물인가 싶었는데, 우리 시대의 정의를 향한 신념에 대한 담론이 된 <쓰리데이즈>의 여정은 달달한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익숙치 않은 과정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고된 여정의 끝에 이 드라마는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진실한 위로를 전한다. 고맙다. 


by meditator 2014. 5. 2. 01:45

공교롭게도 이틀 연속 드라마 속에서 두 분의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했다.


4월22일, <신의 선물-14일> 마지막 회, 자신의 비서실장과 부인이 아들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덮기 위해 지난 10년간 기동찬의 형 기동호를 범인으로 몰고, 그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거나,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그것도 부족해 이제 어린 샛별이까지 유괴하여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통령 김남준(강신일 분)은 스스로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다. 그간 용의자 중 한 사람으로 몰렸던 대통령이었고, 그간 벌어진 모든 사건이 대통령의 결심 하나로 해결되어 버리는 허무한 결론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신의 선물-14일> 속 이 나라의 최고 책임자는 그 진흙탕같은 권력의 비리에 발을 담그지 않은 채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보영이 국가의 의무에 대해 물으며 대통령과 면담을 요청하고 있다./SBS 신의 선물-14일 방송 캡처
(사진; 스포츠 서울)

그에 이어, 4월 23일, <쓰리데이즈>에서 대통령 이동휘는 경호관 한태경에게 하야 선언이 담긴 usb를 남긴다. 더 이상 자신때문에 죽는 사람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하야이다. 팔콘의 앞잡이가 되어 협조한 양진리 사건을 시작으로, 그리고 16년이 지나, 그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또 그 사건으로 인해 김도진의 농간에 휘말려 죽어간 사람들이 이동휘의 뇌리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이제, 김도진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면, 이동휘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차영 경호관은 납치가 되었고, 윤보원 순경은 부상을 입었다. 이동휘를 지키려는 이유만으로 한태경도, 그리고 다른 경호관들도 위험하다. 그래서 이동휘는 결심한다. 자신이 나서기로.(물론 그의 하야 선언이 진짜 하야로 곧바로 이어질 지는 마지막 회까지 두고 볼일이다. 하지만, 하야라는 선언 속에 담긴 이동휘의 책임 의식은 하야를 하든, 하지 않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똑같이 하야를 선언했다는 공통점 외에, <신의 선물-14일>의 김남준과 <쓰리데이즈>의 이동휘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책임이다. 아니 '하야'라는 외형적 형식이 담보해내는 본질이 책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야는 책임의 극단적 상징이다. 
물론, 그 책임의 성격은 다르다. <신의 선물-14일>의 김남준의 경우, 자신의 아들이 살인범이요, 자신의 비서실장과 부인이 그 살해 사건을 덮기 위해 국가 권력을 이용한 측근 비리에 연루된 사례다. 
그에 반해, <쓰리데이즈>의 담론은 거창하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다국적 기업의 컨설턴트로 일하는 과정에서, 다국적 기업과 국내 기업이 이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선량한 시민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대통령의 결자해지이다. 그리고 그 결자해지의 과정은 결국 더 많은 돈을 위해 이 나라를 쥐고 흔드는 자본과 그에 결탁한 정관계 세력과의 전쟁이 된다. 

그것이 왜곡된 국가 권력의 행사였든지, 혹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국민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 과거사였던지, 드라마 속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물론, 따지고 보면 <신의 선물-14일>의 김남준이 하야까지 할 일일까 되묻게 될 수도 있다. 왜? 그가 한 일은 아니니까, 그는 지난 10년간의 일을 몰랐으니까. 하지만, 김남준은 책임지겠다고 한다. 
<쓰리데이즈>에서 죽은 신규진 비서실장은 이동휘 대통령을 설득한다. 지금에 와서 16년전 일을 밝힌다고 누가 알아줄 거 같냐고, 그런다고 경제가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끄집어 내서 밝히려고 하냐고. 하지만 이동휘는 반문한다.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그게 옳은 일이잖아요? 라고.

그리고 그걸 보는 시청자들은 울컥한다. 왜?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유치원을 다니기도 이전에 배웠던 사람들이, 그저 한 나라의 대표자가 책임을 지겠다는 그 말 한 마디에 감동을 받는다. 

<신의 선물-14일> 속 대통령이나, <쓰리데이즈>의 대통령은 청와대에 살지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그들도 대통령이라는 직을 수행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 그래서 그들도 우리처럼 자신들이 잘못을 하면 책임을 지는 보통 시민의 한 사람으로 드라마에서 표현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지도자들은 다르다. 늘 대부분의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책임지지 않았다. 잠시 책임 지는 척 눈가리고 아웅하고서는 몇 수십년이 지나도 국가가 부과한 벌금조차 내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쓴다. 혹은 한 나라를 책임지는 대표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나라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잘못들은 다 아래 사람탓이라고 한다. 아랫 사람 몇 사람 쳐내면, 다 해결된 듯, 여전히 청와대 안의 그 분은 국민 위에 군림해 왔다. 사과 한번 받아보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멀리 청와대까지 갈 것도 없다. 크고 작은 집단을 가릴 것없이, 우리가 만나는 지도자들은 늘 그래왔었고,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늘 사람들은 지도자에 대한 결핍을 차곡차곡 쌓아왔고, 그런 현실 속 결핍을 해소해 주는 드라마 속 지도자들에게 울컥 마음이 울린다. 최근 빈번하게 지도자에 담론을 그려내는 tv는 결국 고이 접어둔 환타지이자, 억눌린 소망의 참을 수 없는 발설이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참담한 시간들 속에서, <신의 선물-14일>든 <쓰리데이즈> 든 사적이든, 공적이든, 현재의 사건이든, 과거사든 책임을 다하는 그 누군가를 드라마에서라도 본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by meditator 2014. 4. 24. 01:40

2년 여의 기다림 끝에 역시나 단 3부작으로 단촐하게 끝낸 영드<셜록> 시즌3에서 가장 무시무시했던 장면은 첫 회 셜록과 그의 조력자 왓슨이 엄청난 폭탄이 설치된 지하철에 갇혔을 때도, 왓슨이 불더미에 휩싸여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도 아니었다. 정작 <셜록> 시즌3의 백미는 마지막 회, 모든 사건이 끝난 후, 지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등장한 모리아티의 재등장이었다. 그런데, 셜록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던 모리아티가 다시 살아올 수 있을까? 시즌2 마지막에 왓슨이 보는 앞에서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던 셜록의 모습이 결국 적들을 속이기 위한 셜록의 한 수였다는 걸 보여준 마당에, <셜록>의 시청자들은 모리아티의 환생(?)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게 되었다. 절대악의 귀환, 결국 시즌3는 시즌4에 대한 기대감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 막강 탐정, 셜록을 늘 모험에 빠뜨리는 절대 악 모리아티의 귀환만으로,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가 마구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처럼,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도, 모리아티 못지 않은 절대악들의 활약이 빈번하다.

(사진; OSEN)

셜록의 주인공 셜록이 자신을 소시오패스라 규정하여, 그 용어가 사람들 관심을 끌기 시작했는데, 또 한 사람의 소시오패스가 우리 앞에 등장했다. 바로 <별에서 온 그대>에서 신성록이 분한 이재경이 바로 그 또 한 사람의 소시오패스다. 카카오 톡의 으르렁거리는 모습의 개를 닮았다 하여, '카톡개'란 별명으로 친근해진 이재경이지만, 드라마 속 그는 정말 화가 난 개처럼, 늘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에 으르렁 거리며 물어뜯어 버리고자 한다. 

그런데, 이재경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종반부를 향해 가는 <쓰리데이즈>에서 또 한 사람의 절대악이 등장한다. 바로 재신 그룹의 사장 김도진이다. 자신의 가는 길을 막는 그 누구라도 설사 그게 대통령이라도, 그가 장난감 머리를 메스로 베어버리듯이 가볍게, '죽여' 해버리고 마는 악의 화신이다. 

그리고 거기에 새롭게 도전장을 내민 인물이 있다. 바로 <골든 크로스>의 마이클 장(엄기준 분)이다. 이제 2회를 마친 <골든 크로스>에서 악의 중심으로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은 경제 기획부 금융 정책 국장 서동하(정보석 분)이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은행과 은행 직원들의 밥줄을 주무르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젊은 여성을 능욕하고, 그녀의 배신에 분노하여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파렴치범이다. 그런데, 그런 서동하를 말 한 마디로 꼼짝못하게 만드는 마이클 장은 다가올 이 드라마의 악의 실세로 보인다. '쌤'이라며 친근하며 불러주며, 하지만, 자신이 아직도 당신이 가르치던 과외 학생인 줄 아느냐며 이기죽거리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다하지 못하면 재미없을거라는 협박은, 그가, 그 누구보다 이 드라마에서 강력한 악의 포스를 지닐 것을 예견한다. 

이렇게 드라마 속 절대악으로 등장한 이재경, 김도진, 그리고 마이클 장 사이에는 묘하게도 공통점이 있다. 

(사진; 스포츠 경향)


우선은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들 모두가 자본을 휘두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아버지의 회사 S&C의 후계자인 이재경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형조차 기꺼이 죽인 사람이다. 자신의 친 혈육조차 자신이 가는 길에 방해가 되어 제거한 그에게 더 이상 무서울 그 누구도 없다. 자신이 가진 힘과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는 그 누구라도 거침없이 밟아버린다. 

이재경이 로맨틱 코미디 속 악역이라는 범주에 갇혀, 자신의 첫 아내와, 내연녀, 그리고 자신의 범죄 행위를 목격한 사람들을 제거하는 쪼잔한(?) 짓을 저지르는 것과 달리, <쓰리데이즈> 김도진의 행동 반경은 가히 상상 이상이다. 합참의장을 사주하여, 대통령의 경호실장으로 하여금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종용하고, 그를 위해 EMP탄 몇 기 정도 터트리는 건 예사다. 이익을 위해 팔콘의 개가 되었지만, 수가 틀리면, 팔콘의 하수인조차 매수하고, 자기 뜻에 거스르는 국정원장, 여당 대표의 목숨도 그의 앞에서 가랑잎보다 못하다.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건 그의 목적 자체가, '아빠'가 가르쳐 준 대로 손해보는 짓은 하지 말라던, 바로 그 유지를 실천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는 북한과 손을 잡고 남한을 위기에 빠뜨리고, 제2의 IMF와 같은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국가는 망하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겠다는 자본주이다. 

아직은 신비에 가린 <골든 크로스>의 마이클 장은, 대한민국 상위  1% 그룹의 핵심 멤버로 소개가 된다. 공홈에 실린 그의 소개에 따르면, 펀드 매니저로서, 이미 멕시코민들의 살점을 발라내어 자신의 이익을 챙긴 전례가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그 멕시코인들의 살점을 발라내던 솜씨가 대한민국민들의 경우로 이전될 것임은 거의 확실시되어진다. 이미 <골든 크로스>는 그의 본격적인 활동 이전에, 강주완이라는 한 가정을 딸이 그녀의 스폰서였던 서동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서동하의 활동에 방해가 되었던 아버지는 아내 가게의 폭파 위협이라는 협박에 못이겨 딸의 살인범으로 자수하는 과정을 통해 철저히 짓밟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 서동하의 배후에서 그의 목을 조르는, 마이클 장의 잠재적 능력이야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군가의 목숨, 누군가의 가정, 그리고 누군가의 직장 쯤이 문제가 되지 않는 자본의 무한이기주의를 <골든 크로스>라는 대한민국 상위 1%의 그룹을 통해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재경, 김도진, 마이클 장의 공통점이 단지 자본을 움직이는 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드라마 속 이재경으로 분한 신성록, 김도진으로 분한 최원영, 마이클 장으로 분한 엄기준의 면면을 보자. 
모두 훤칠하고, 잘 생기고, 게다가 드라마 속 그들은,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전지현 분)와, 그녀의 엄마가 '오빠'라 부르며 속사정을 의논하고, 나아가 자신들을 믿고 의탁할 만큼, 멀쩡하다. 심지어, 꼬박꼬박 존댓말까지 써가며, 매너까지 완벽하다. 
그런데, 그 멀쩡한 그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여'라며 누군가의 목숨을 거둔다. 악의 축인줄 알았던 이들이 그들의 말 한 마디에 몸서리를 친다. 
이재경의 극 중 설명처럼, 그들은 모두 소시오패스이다. 즉,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책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 죄책감, 슬픔 등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당연히 타인에 대한 동점심 따위조차 없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이다. 
김도진의 방 안에 있는 조립식 장난감 팔 다리을 싹뚝 자르는 것과, 실제 사람을 죽이는 것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장난감을 조립하거나, 게임을 즐기는 마이클 장의 모습을 자주 비춰주는 것은 세상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듯한 이들의 심정을 단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연출적 장치들이다. 

(사진; 뉴스엔)

이렇게 가장 멀쩡해 보이는 이들이 기실은 가장 반사회적인 인격 장애를 가진, 피도 눈물도 없는 자기 이익만 탐하는 인물로 그려낸 드라마적 묘사는, 바로 우리 사회 자본주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가장 선의의 포장을 하지만, 가장 추악하게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이 시대 자본의 모습을 드라마는 이런 소시오패스적인 절대악을 그려내는 것으로 설명해 내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젼을 틀면 나오는 대대적인 기업의 이미지 광고 뒤에, <또 하나의 가족> 속의 횡포를 부리는 자본이 존재한다는 걸, 드라마는 상징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시대 상황에 따라 드라마 속 악인 들은 변화한다. 한때는 지역 유지가 가장 최종 보스였는가 싶던 때가 있는가 싶더니, 정치적 실권자가 모든 악의 축으로 규정받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 속 절대악은 무한 이기주의의 자본주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대통령의 암살조차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시도한다. 원칙도 없고, 논리도 없고, 자비란 더더욱 없다.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라면 한 나라의 운명 따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쓰리데이즈> 속 김도진이 처음 경호관 한태경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듯이, 그저 평범한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노는 체스판의 말 취급도 받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멀쩡한 모습을 하고, 가장 비이성적인 모습을 횡행한다. 그래서 그 번듯한 미친놈들이 더 공포스럽다. 그리고 그 공포는 바로 우리들 삶의 공포로 전이된다. 모리아티는 영드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드라마는 충실히 그려내고 있다. 


by meditator 2014. 4. 15. 16:51

자, 문제 하나 풀어보시라.

얼마전 종영한 kbs2<태양은 가득히>, 현재 방영중인 sbs의 <쓰리데이즈>, 그리고 새로이 시작한 kbs2의 <골든 크로스> 의 공통점은?
바로 배우 이대연이다. 극 중 이대연은 <태양은 가득히>에서 정세로의 아버지, <쓰리데이즈>의 한태경의 아버지, 그리고 이제 <골든 크로스>에서 김강우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그것도 보통 아버지가 아니다. 남자 주인공의 인생의 궤도를 바꿔버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사진; 리뷰스타)

<태양은 가득히>에서 배우 이대연이 분한 정도준(이대연 분)은 다이아몬드를 빼돌린 사기꾼으로 그로 인해 자신은 목숨을 잃고 고시에 합격한 아들 정세로(윤계상)마저 살인 누명을 쓰고 복수에 칼을 가는 인물로 변모시켜 버린다. 
<쓰리데이즈>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경제 수석이던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이대연 분)은 드라마가 시작되자 마자 거대한 트럭에 부딪혀 비명횡사한다. 그리고 청와대 경호관이었던 그의 아들 한태경은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밝혀가면서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들게 된다. 
그리고 <골든 크로스>의 오프닝에서 강도윤(김강우 분)의 아버지 강주완(이대연 분)은 친딸의 살해범으로 체포되어 예비 검사인 아들의 삶을 180도 급전락시키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태양은 가득히>와 달리, <쓰리데이즈>와 <골든 크로스>에서 이대연의 역할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청와대 경제 수석이던 <쓰리데이즈>의 한기준 수석과, <골든 크로스>의 강주완은 이 두 드라마가 딛고 있는 우리나라 경제 현실의 모순을 그 자신이 고스란히 품어 안은 캐릭터라는 점에 있다.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시작된 <쓰리데이즈>는 이제 11회를 맞이하면서, 이야기의 폭과 깊이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그저 대통령의 암살범을 찾으면 되는 줄 알았던 이야기는 과거 대통령이 개입된 양진리 주민 학살 사건이라는 과거사의 잔상이 드라마를 뒤덮고, 거기에 이어, 이제 다시 오늘에 다시 그 양진리 사건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제 2의 양진리 사건이 벌어질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극중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은 과거 양진리 사건 당시 의도치 않게 자금 전달책을 맡았던 인물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16년 동안 줄기차게 매달린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던 그가 대통령의 특검 발표를 앞에 두고, 그간 작성한 조작되지 않은 진짜, '기밀 서류 98'을 특검에 전하려다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이제 11회 드라마는 그저 남북의 협잡으로 인한 양진리 사건이, 사실은 김도진이라는 재벌과 그와 결탁한 팔콘 등이 무지막지한 이익을 만들어 내기 위해 획책한 사건이라는 것을 밝힌다. 드라마는 밝힌다. 전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을 하며 나라를 구하려고 애썼던 IMF와 같은 경제 위기가 상위 1%의 가진 자들에게 무한 배팅의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드라마에서처럼 다시 언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울 한복판에서 폭발물을 터트리는 테러 정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시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밝힌다. 즉 한 나라의 위기가, 그 나라의 국민이지만, 그 나라를 그저 이용가치만으로 판단하는 소수의 누군가에겐 그저 굴려먹을 판돈 정도로 취급된다는 것을 우리는 <쓰리데이즈>를 통해 단순명쾌하게 학습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극중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재벌 개혁을 주창하던 청와대 경제 수석이던 한기준이 당연히 과거의 양진리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런 일이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의 재연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 했을 지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쓰리데이즈>가  IMF를 다루었다면, <골든 크로스>가 딛고 있는 현실은 그보다 조금 더 2014년에 가깝다. 
극 중 이대연이 분한 강주완은 과거 은행에 근무하다, 정부의 부실 은행 정리 과정에서 해고된 아버지다. 그로 인해 가족에게서는 무능력한 가장으로 대우받는다. 하지만, 상고 출신임에도 회계 전문가로 대접받는 그는 우직하게 자신의 삶에 대한 성실성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아들은 어머니의 가게를 위해 25억만 대출해 오라고 닥달하고, 은행에선 눈 한번 감아주면 50억짜리 집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골든 크로스> 역시 한 나라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것은 바로 드라마 속 경제 기획부 금융 정책국장 서동하(정보석 분) 등 상위 1%의 그들이라고 규정한다. 그들의 입맛에 따라멀쩡하던 은행도 하루 아침에 부실 은행이 되어 그 은행에 근무하던 직원들의 밥그릇이 날아가고, 또 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서류를 조작하여 그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배경으로 삼는다. 
극중 이대연이 분한 강주완 캐릭터는 상징적이다. 허구헌 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성실한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가장 무능한 가장으로 대접받고, 심지어 아들에게 그깟 돈 하나 못구해 오냐며 대놓고 다그침을 당하는 처지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호구지책이 누군가에게 가장 만만한 미끼로 여겨질 뿐이다. 그는 자신이 무단횡단 한번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다 하나, 그에게 돌아오는 건 비웃음이요, 기만이다. 

(사진; 뉴스엔)

현실의 우리들을 규정하는 건 바로 우리들의 밥그릇, 먹고사는 문제이다. 그러나, <쓰리데이즈>와 <골든 크로스>는 말한다. 당신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하는 동안, 저 위쪽의 누군가는 그런 당신들을 장기판의 졸로 여기며 당신들의 밥그릇을 가지고 투전판을 벌이고 있다고. 
<쓰리데이즈>에서 대통령의 암살 음모가 궁극적으로 귀결되는 것이 제2의 양진리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해 되풀이 되는 제 2의 IMF라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또한 <골든 크로스>의 악의 축으로 등장하는 서동하의 직책이 경제 기획부 금융 정책 국장이라는 것 역시 정경 유착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결국 우리가 골치 아파하는 정치가 귀결되는 곳은 나의 밥그릇이라고 드라마는 친절하게 가르쳐 주려고 애쓴다. 
덕분에 <쓰리데이즈>는 딱딱한 정치적 설명과 그 배경이 되는 경제적 해석을 논하느라, 드라마가 건조하다. 상위 1%의 협잡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강주완 일가의 몰락을 그리는 <골든 크로스> 역시 어둡기 그지 없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봄날, 재벌가 자녀들의 사랑 놀음과, 외계에서 온 멋진 남자와 아름다운 여배우에 눈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쓰리데이즈>나 <골든 크로스>는 역부족이다. 덕분에 시청률은 낮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두 드라마의 의미를 단지 시청률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시청률이 좋기로 치자면야, 막장 오브 막장의 진수를 보여준 <왕가네 식구들>만한 드라마가 어디 있겠는가. 해외의 인기? 지금 중국에서 실시간으로 방영되고 있는 <쓰리데이즈>에 대해 한국에서 막장이나 로코가 아닌 이런 드라마가 나올 수 있느냐 라는 반응이 등장하고 있다. 그간 한국 드라마가 잘 먹히는 몇몇 장르에 한정된 뻔한 상품이었다면, <쓰리데이즈>를 통해 한국 드라마가 새롭게 재평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많이 보는, 잘 팔리는 것만 하다보면, 결국 매양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누구네집 쌈박질이요, 누구랑 누가 사귀는 이야기 밖에 없다. 그러는 동안, 또 세상은 IMF를 반복할 수도, 은행 부실이 재연되어 이번엔 내 밥 그릇이 날아갈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재미없다 하지말고, 못알아 먹겠다 하지 말고, 성의있게 드라마가 우리 현실에 대해 말을 할 때 좀 귀 기울여 보자. 그깟 결국 떨어지고 말 벚꽃에 미혹되지 말고. 

중국 정법 대학 교수는 <쓰리데이즈>가 만들어 지는 우리나라 상황에 대해 그것이 곧 한국적 정치 상황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이라는 웨이보 멘션을 날렸다.  낯 부끄러운 자긍심이라도, 시청률에 휘돌리지 않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좋은 드라마가 자꾸 만들어 지길 바란다. 막장도 자꾸 보면 중독되듯이, 딱딱한 드라마도 자꾸 보다보면 친근해 진다, 더불어 정신도 번쩍 든다. 금상첨화다. 


by meditator 2014. 4. 10. 15:54

4월 9일 방영된 11회 중반,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아직을 의식을 찾지 못한 채 병실에 누워있는 이차영 경호관을 그의 동료 한태경이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이런 장면에 회상씬 하나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차영과 한태경이 함께 보냈던 지난 시간들, 혹시나 이 둘 사이에 동료 이상의 감정이 생겨났을 지도 모를 과거의 어떤 해프닝들이 한태경의 눈빛 저 너머로 흘러나오기 십상이다. 
하지만 <쓰리데이즈>는 단호하게 그런 장면을 배제한다. 오히려 이차영이 총을 맞은 그 순간, 정신을 잃어가는 그녀를 한태경이 부등켜 안았을 때 등장한 회상씬은 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실수로 대통령에게 가야하는 소중한 서류를 놓쳐서 그것을 찾기 위해 스스로 이중 스파이가 되어야 했던 이차영의 그 순간이 삽입되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병실에서 정신이 돌아온 이차영은 말한다. 나는 나의 신념에 따라 나의 일을 한 것이니, 나에게 미안해 하지 말고,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그래서 더 애닮다. 한참 사랑도 하고, 젊음을 만끽해야 할 나이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저렇게 고군분투하는 것이. 

'쓰리데이즈' 박유천이 손현주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 SBS '쓰리데이즈' 방송화면 캡처


<쓰리데이즈>란 드라마는 보통 드라마와 다르게 없는 것이 많다. 
드라마가 시작된 지 10여 회가 지났는데, 주인공들은 밥 한끼 편하게 먹은 적이 없다. 한태경이 먹은 거라곤, 깡소주에, 겨우 달걀 하나? 그 흔하게 등장하는 멋진 남자 주인공들이 흔히 하는 샤워기 아래에서 고뇌하는 장면 따위도 없다. 며칠이 지났는데, 주인공들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잠은 자는지 걱정이 될만큼. 심지어,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에서, 참모총장, 비서진까지 모두 싱글인 듯 싶다. 함봉수 경호실장은 경호관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일신의 안녕을 포기했고, 신규진 비서실장은 정권을 안녕하게 만들기 위해 워커홀릭이 되었다. 도무지,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꺼리나, 여담으로 덧붙일 재미라곤 없다. 

대신 <쓰리데이즈>에는 다른 드라에는 없는 것이 있다. '신념!'
자기와 자기 가족을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나, 입신양명에 대한 야망 대신, 그 이름도 이젠 생소한 '신념'이란 것이 묵직하게 자리잡는다. 

11회, 그토록 대통령의 반대편에 서서, 대통령을 무너뜨리려고 애쓰던 신규진 비서실장이 죽었다. 
이 정권이 대통령과 자신이 함께 어렵게 이룬 정권이라며 배신에 치를 떨며, 스스로 참모총장을 죽이고, 김도진에게 비밀문서를 갖다 바치던 그가, 결국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명예로인 죽음을 맞았다. 

처음 <쓰리데이즈>란 드라마를 소개할 때, 출연진들이 말했다. 이 드라마는 드라마 속 인물들이 각자의 신념에 따라 서로 이해가 갈리며 또 함께 하게 되는 드라마라고. 
그리고 그런 애초의 의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드라마 속 인물들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또 그렇게 죽어간다. 그래서 묘하게도, 신념을 지키며 죽어간 인물들은, 죽음을 통해 오히려 드라마 속에서 빛을 발하며 살아난다. 함봉수 실장이 그랬듯이, 신규진 비서실장도 그렇다. 

처음, 대통령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야 하는 경호실장이던 함봉수가 대통령을 저격한 것도, 그가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어간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후 자신의 소신에 따라 암살범이 되었었다. 
신규진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까지 신규진을 설득하려고 했던 것이 허사가 아니듯, 그저 대통령이나 되고 싶었던 개인의 욕심이 아니라, 정말 좋은 정치를 하고 싶었던 신념에서 움직였던 인물이라는 것을 죽음으로 증명한다. 이동휘가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를 눈 꾹 감고 대통령이 되어 속죄하려 했듯이, 신규진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조사했던 전국 각지에서 사라진 폭발물의 조사 자료가, 그의 죽음 이후, 대통령과 그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움직일 힘이 된다. 그가 죽어가면 남긴, 자신과 대통령은 다르다는 그 말의 의미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르게 명치를 울린다. 

쓰리데이즈
(사진; 텐아시아)

11회의 <쓰리데이즈>에 대해 드라마의 만듦새를 가지고 역시나 왈가왈부 할 수 있겠다. 하지만, 11회는, 그런 것들이 걸리적거리지 않을 만큼, 깊은 감동을 남긴다. 

특히나, 법과 수호를 지킨다던 대통령이, 이차영을 사지로 몰아넣는 무리수를 썼던 사실을 수긍하기 힘들었던 한태경이, 국무회의실에 홀로 앉아,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대통령을 향해 이제 자신이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아마도 오래오래 회자될, 명장면이 될 것이다. 

뻔히 이차영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무리수를 써가면서도, 다시 팔콘의 개가 되겠다는 속임수를 써가면서도 눈 앞에 닥친 위험을 피해보려 했던 대통령, 하지만, 결국은 홀로 국무회의실을 지켜야 하는, 그래서 그곳을 찾은 특검과 한태경에게 비로소 속내를 비추며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대통령. 그리고 그런 대통령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는 단 두 사람 특검과 한태경. 그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깊은 곳의 그 어떤 것을 상기하게 만든다. 

그저 드라마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먹고 사느라 잊었던,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신념'이란 단어를 떠오르게 만든다. 드라마는 그 어떤 잔재주도 부리지 않고,  1회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단어를 명징하게 드러내기 위해 묵묵히 달려온 것이다. 덕분에, 11회를 통해 드러난 이 주제가,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은 주인공들의 고뇌에 어느덧 보는 시청자들조차  전염되었다. 잊고 살았던 그 단어가 다가온다. 


by meditator 2014. 4. 10. 03:06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란 학생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내는 확신'이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학생 토니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한다. 그것이 어느 것이 되든 결국 역사란 그것을 해석하는 후자들의 몫이라는 의미에서 두 정의는 공통점을 가진다.  


매주 토, 일요일 9시 40분에 방영되는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정도전이 그리는 새로운 국가에 대한 이상의 출발점을 부패한 고려 사회로 짚었다.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 의지를 펴보지 못한 신진사대부 정도전은, 궤도를 틀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대업을 꿈꾸고, 그것을 함께 할 사람으로 이성계를 고른다. 하지만, 그런 정도전의 대업에의 권유에 대해 이성계는 냉정하다. 자신이 고려를 무너뜨릴만한 힘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은 욕심 이상의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그래서 드라마 <정도전>은 당신에게 대업은 하늘이 내린 일이라고 강변하는 정도전과 그에 대해 부정하지만, 결국 회군을 하고, 최영을 제거하고, 왕을 패하며 고려의 멸망에 한 발 한 발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이성계의 고뇌를 담는다. 그의 고뇌가 깊을 수록, 그가 세우는 국가가, 그저 그 자신과 정도전 등 소수의 집단에 의한 쿠데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드라마는 설득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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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성계가 어땠는지, 정도전이 어땠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조선을 건국한 승자들인 그들이 남긴 기록을 가지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부정확한 확신일 수도, 그들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하며 조선의 건국이란 사건이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즉, e.h.카가 말하듯, 역사는 과거와 그 과거를 해석하는 자들의 대화라고 했을 때, 방점은 과거를 해석하는 자들에게 찍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에 와서 다시 해석되는 이성계의 촛점은 무엇일까?

배우 유동근씨가 이성계가 아닌, 그의 아들 이방원 역을 맡았던, 그 당시 화제가 되었던 <용의 눈물>의 경우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자의 난을 거쳐 가는 과정에서 보여진 '왕권 확립'의 과정을 다룬다. 즉 정통성도 있지만, 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지도자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 촛점을 맞추었다. 왕자의 난을 거쳐 아버지를 배신하고 왕이 되는 이방원과, 그에 의해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양녕대군의 모습이 화제를 되었던 이 작품에서 지도자는 한 나라를 카리스마있게 이끌어 가는 강력한 리더쉽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정도전>에서 이성계는 어떤가? 그는 계속 고뇌한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정말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닌가? 혹시 그저 자신의 욕심이 아닌가? 회군이 정말 고려를 위한 일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하며 최영과 맞서는 과정이 정말 옳은 길인가? 정도전은 그에게 대업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이성계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할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협잡과 거짓을 밥먹듯이 했던 이인임과 권력의 자리에 앉자 강직했던 무장의 모습을 잃은 채 명예와 명분에 빠져버린 최영과 더욱 대비된다. 드라마 <정도전>은  무장이지만,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못지 않게 고민하는 인간형인 이성계를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모습을 말한다. 

<정도전>의 이성계에 못지 않게 또 한 사람의 고뇌하는 대통령이 있다. 바로 <쓰리데이즈>의 이동휘 대통령이다. 그는 양진리 사건의 주동자로 특검에 기소되었지만, 사실 그는 양진리 사건이 그렇게 집단 학살극이 될 줄 몰랐던 재벌과 다국적 기업의 개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쉽게 내뱉듯이,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라고 발뺌하면 될 것을, 그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미 대통령인데도, 자신이 불가피하게 그 일원이 되었던 지난 역사적 과오를 밝히고자, 책임지고자 나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법을 수호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원칙을 지키고자 애쓴다.

이동휘가 그를 만류하는 비서실장에게 '그게 옳은 일이잖아요' 라고 반문하듯, <쓰리데이즈>의 이동휘 대통령과, <정도전>의 이성계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권력의 유지가 아니라,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원칙적인 길을 가고자 하는 담백한 목표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담백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이동휘 대통령은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고, 대통령 자신은 탄핵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성계는 피하고자 하지만, 그가 존경했던 최영도, 그가 받들겠다고 했던 왕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원칙을 위해 이동휘는, 대통령으로서의 법과 수호를 지키는 대신에 다시 김도진과 팔콘의 개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되고, 이성계는 역모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정통 사극을 표방한 <정도전>은 당연히 고려말 조선 건국을 다룬 역사 정치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고, 이미 조선이라는 승리의 결과물이 분명한 사건이기에, 그 승자에 감정 이입하며 이성계의 원칙이 승리하는 과정을 흔쾌히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쓰리데이즈>는 불편해 한다. 정작 자신이 몸담고 사는 세상의 정치 이야기는 껄쩍지근하다고 한다. 자신이 백기들고 사는 현실을 소환해내는 드라마가 불편하다고 한다. 역사는 즐길 수 있지만, 현실은 삶의 무게감으로 다가오니, 힘들다고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현실의 정치는 버겁다고 한다.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도, 그리고 불편한 현실이라도, <정도전>과 <쓰리데이즈>를 통해 그려지는 고뇌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바로 이 시대 우리들이 가슴 속에 품고 그리워하는 그것들이다. 21세기 드라마의 햄릿형 지도자들은, 바로 자신의 권력 유지나, 이권이 아니라, 굼민을 위한 지도자가 가는 길을 고민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 속 소망이다. 결국 그것이 몇 백년전의 과거의 사건이듯, 혹은 현실이든, 결국 모든 역사적 결정의 끝에는 지도자의 선택이 있다. 양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뇌하는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을 수록, 드라마는 푸르게 빛난다. 
그래서, 그저 몇 프로의 시청률로 퉁칠 수 없다. 그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지켜봐주고, 함께 그 고민을 나눠주길 바랄 뿐이다. 


by meditator 2014. 4. 7. 16:22

<쓰리 데이즈>는 암살 위기에 몰린 대통령(이동휘 분)과 그를 지키는 경호관(한태경 분)의 이야기라고 서두를 떼었다. 지지율이 급감하다 못해 이제는 탄핵 위기에 몰린 대통령이라, 그의 정치적 포지셔닝은 분명 드라마적 요소가 극명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대통령이 주인공이라고 했을 때, 청와대라는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이는 대통령이 박진감넘치는 스릴러의 주인공의 한 축으로는 너무 정적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고, 경호관인 한태경이 종횡무진 액션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것과 달리, 또 다른 축인 대통령은 역시나 운신의 폭이 적었다. 청수대로 여행을 가고, 특검을 만나러 간 잠행 길에 사고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늘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통령의 특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대통령이 달라졌다. 자신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태경에게 더는 경호관이 아니라며 그를 제지하고 직접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그리고 그는 김도진을 찾아가 말한다. 다시 팔콘의 개가 되겠다고. 


액션 스릴러 등의 복합 장르물을 내걸고 있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심리이다. 때로는 설명적이다 싶게, 자신들이 어떤 행동에 이르게 된 입장을 드라마는 나열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드라마적 장치가 미흡해서가 아니다. 2014년의 <쓰리데이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입장, 그래서 극명하게 대립되게 되는 그 서로가 서있는 자리의 차이, 또 그래서 서로가 함께 하게 되는 그 과정을 <쓰리데이즈>는 주목한다. 기꺼이 드라마가 늘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하고자 하는 말을 숨기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여느 장르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게 만드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의 한 특성이다. 

(사진; osen)

9회 말, 기밀 서류를 비밀리에 꺼내오기 위해 비밀리에 윤보원과 함께 재신 그룹에 잠입했던 한태경은 모니터를 보다 자신이 비밀리에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뛰쳐 나간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그 누구보다도 믿었던 동료 이차영(소이현 분)이 재신 그룹 회장 김도진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실장의 암살 음모조차 단번에 간파해 낼 정도로 냉정한 이성을 가졌던 한태경이지만, 자신이 믿었던 동료 이차영의 배신(?)에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런 한태경을 보며 이차영은 고통스러운 눈물을 삼킨다. 

그리고 10회, <쓰리데이즈>는 장황하게 이차영의 배신을 끌고가지 않는다. 한태경의 주변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김도진 선언의 첫 번 째 예라도 되는 듯이, 대통령 기자 회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모험 끝에 어렵게 신규진 비서실장의 비밀 서류를 손에 넣은 이차영을 차로 밀어버린다. 사고롤 사경을 헤매는 이차영, 그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한태경을 배경으로 그간 이차영의 사연이 드러난다. 

법무팀장으로서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던 서류가 잘못되었음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 이차영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기력할 수 없는 대통령의 위치를 알게 된다. 자신이 제대로 직무를 수행했다면 대통령을 그렇게 고립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차영은 자신이 그 서류를 찾아오겠다고 각오를 밝힌다. 그리고 동료 한태경을 속이면서, 그리고 결국 이철규 소좌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대통령의 기자 회견을 무위로 만들면서까지 신규진의 개인 척 이중 스파이 노릇을 했다. 

앞서 <쓰리데이즈>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심리라고 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직업적 사명감과 소명 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모든 어떤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회가 굴러나간다. 하지만, 과연 그 일을 하며 자기가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대다수가 그 일의 목적이 '돈'이라고 자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십상이지 않을까. 

하지만, 김은희 작가는, 바로 그 '직업'과 '일'의 의미를 논한다. 당신이 하루하루 그저 살아가는 그 '일'과 '직업'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통령이든, 일개 경호관이든! <쓰리데이즈>는 정치 드라마가 아니다. 정치가 직업인 사람들의 일 이야기이다. 사람을 지키는 일이 직업인 경호관처럼. 그런데 그 직업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정치가 달라지고, 나라가 뒤짚어 지는 것인 되는 것이다. 

<쓰리데이즈>가 방영되기 전까지 경호관이란 직업은 그저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항상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 그런데 이 드라마를 통해 보니,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직업적 소명 의식이란게 만만치 않다. 만류하는 대통령에게 이차영은 말한다. 자기도 경호관이라고. 하는 일이 법무팀장이란 영역일 뿐이지, 본질은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재신 그룹의, 신규진의 스파이가 되겠다는 각오를 밝힌다. 

그런 이차영의 선택은, 10회 마지막의 이동휘의 선택으로 치환된다. 
이차영의 선택은 그 수를 읽는 김도진에 의해 실패로 끝이 난다. 그런 이차영을 목격한 한태경은 신규진의 방을 엎으며 대통령에게 원망을 쏟아붓는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냐고. 왜 일개 경호관에게 그 모든 짐을 지웠냐고. 하물며 한태경 자신이 도울 수 조차 없도록 만들고. 

그런 한태경에게 대통령 이동휘는 말한다. 자신은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하는 대통령이라고. 법과 질서를 지키는 대통령이기에, 그들과 똑같아 질 수 없다고! 까짓 대한민국에서 법과 질서가 얼마나 우스워질 수 있는 단어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드라마 속 고지식한 대통령은 거기에 매달린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쥐고 놓지 않는다. 

그러던 대통령이 마지막 김도진을 찾아가 딜을 한다. 팔콘의 개가 되겠다고. 대신 탄핵을 면하게 해달라고. 

(사진; tv리포트)

대통령이 그런 과정에 이른 것을 설명하는 장면은, 드라마가 끝나고 덧붙여진 에필로그이다. 대통령 관저의 한 사무실을 가득 메운 채 열렬하게 정책에 대해 토론하던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 신규진, 그리고 다른 비서실장들, 그리고 그의 옆을 거닐며 그를 지키던 함봉수 비서실장과, 그의 부름에 아이처럼 달려오는 한태경. 그의 주변을 메웠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그들을,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동휘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힘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한태경이나, 이차영같은 젊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또한 김도진 일당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시도를 막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니까. 

10회에 이르른 <쓰리데이즈>는 어쩌면 이제 좀 뻔해져 보이기도 한다. 깜짝 쇼인 듯 하다가, 바로 다음 회가 되면, 사실은 이랬어 하는 것이, 결국은 장황한 설명조로 끝나는 드라마적 구조가 때론 지루하기도 하다. 하지만, 행위 그 자체보다, 그것에 이르는 의도가 중요하다고 방점을 찍은 작가의 입장이니 그것도 처분에 맡깉 수 밖에.
겨우 윤보원과 한태경만 함께 했을 뿐, 10회에서 보여지듯이, 아직도 뜻을 같이 할만한 사람들은 저마다 속내가 복잡하다. 대통령에게 까지 악다구니를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인 한태경과 달리,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아들처럼 그를 바라보던, 그래서 그런 그의 희생을 막고싶은 이동휘의 속내는 더더욱 헤아릴 길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기에, 그들의 그 소명이 함께 하는 물줄기는 합쳐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각각의 물줄기가 거친 물살이 되어 비극을 막아내는 그 감동을 위해 조금 더 인내하는 수 밖에. 이것이 <쓰리데이즈> 의 개가 된 자의 숙명이다. 


by meditator 2014. 4. 4. 09:39

그저 드라마로서도 <쓰리데이즈>는 참 재미있다. 

북에서 내려온 리철규 소좌를 자신의 기자 회견장에 세우는 배수의 진을 친 대통령(손현주 분), 하지만, 그런 대통령의 시도는 오히려, 이제 그와, 그를 도운 경호관들조차 사기꾼 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충수가 되어 옮아매어 진다. 더구나, 그 올가미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그 누구보다도 한태경(박유천 분)이 믿었던 한태경의 동료이자, 청와대 법무팀방인 이차영이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래서 매회 작가와 제작진에게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기꺼이 내 뒤통수가 멍이 들도록 거기에 머리를 들이밀게 만드는 재미를 <쓰리데이즈>는 선사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9회를 통해 대통령과 한태경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대사는, 드라마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한번쯤은 새겨들어야 할 명언들이다. 

‘쓰리데이즈’ 박유천, 장동직 무사히 빼돌리는데 ‘성공’

이동휘; 그래야 옳은 거잖아요.
이제 탄핵을 받으면 대통령 관저를 비우라는 통보를 하고 난 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온 정권인데 이렇게 만들 수가 있냐는 신규진 비서실장(윤제문 분)의 원망섞인 힐난에, 이동휘 대통령은 딱 한 마디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래야 옳은 거지 않냐고? 그런 이동휘의 답에 신규진 비서실장은 반문한다. 그런 사실이 우리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냐고? 경제가 좋아지냐고, 정치가 달라지냐고? 사람들은 그걸 몰라도 살아간다고.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살아가고 싶어한다. 골치 아프게 과거의 진실들을 알아서 자기 사는데 머리 아프기만 하다고 생각하며 외면한다. 이동휘 대통령의 사실이지 않냐는 묵직한 한 마디는 그래서 뭉클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외면하고 살아가는 삶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들을 내보이는 것같아서. 

드라마 속 양진리 사건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며 그 결결이 잊고 살았던 진실들이 그 대사 한 마디에 울컥 솟아올라 가슴을 친다. 멀게는 '과거사 진실 위원회'가 밝혔냈던 친일파 인명 사전에 올랐던 사람들의 진실에서 부터, 뒤늦게서야 밝혀졌던 제주도 4.3 사건 등,그리고 가깝게는 지금도 우리 사회 어디에선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진실을 밝히려 애쓰고 있는 제주도에서부터, 쌍용자동차, 그리고 평택, 밀양 송전탑 현장에까지 우리가 잊고 사는 또 다른 양진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드라마 속 신규진 비서실장은 노골적으로 재신과 손을 잡고 대통령을 탄핵하는데 앞장서는 협잡꾼이지만, 사실 현실의 우리들은 또 한 사람의 신규진이 되어 누군가의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사는데 보탬이 되지 않으니깐. 

그래서 이동휘의 수식어가 붙지 않은 한 마디는, 그 한 마디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부끄럽게 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 <쓰리데이즈>가 좋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누구도 선뜻 하기 힘든 직언을 우리들에게 해주어서, 그렇게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부끄러운 이 시간이, 마치 고해 성사를 대신 해주는 것처럼 시원하기도 하다. 

(사진; obs)

한태경; 저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밝히려는 대통령의 행보는 쉽지 않다. 재신 김도진 회장(최원영 분)의 예언대로, 대통령은 그가 진실을 밝히려 하면 할 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사람이 죽어간다. 9회에서도 그를 돕고자 기자 회견장에 나선 리철규 소좌가 죽었다. 
그리고 힘들게 그를 기자회견장까지 데리고 온 한태경은 그의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되었다. 그런 한태경을 보고 대통령은 후회한다. 그의 아버지 한기준이 자신의 아들만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의지할 곳이 없었던 대통령은 이제 겨우 3년차 된, 자신을 위해 죽기엔 너무 어린 경호관과 일을 도모하게 된 것이 무겁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에게 한태경은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그저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직업에서 시작하여,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출발점이었고,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이 추진체였다면, 이제 9회에 들어, 한태경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선택으로 이 일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김도진이 한태경에게 한태경에게 이동휘에게와 마찬가지로 네가 무슨 일을 하려 하면 할 수록 네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갈 거라는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당신이 얼마나 미친 사람인지 세상이 알게 하겠다고 자신있게 대꾸할 수 있게 되었다. 어른 세대가 저지른 과거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세대의 임무로 발현되는 과정, 그저 직업 정신이 투철한 한 청년이 자각된 역사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모습을 <쓰리데이즈>는 주인공 한태경을 통해 생생히 그려낸다. 그리고 김도진 일당의 2014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한태경 세대의 결심은 양진리를 되풀이 하지 않는, 즉 역사적 과오을 되풀이 하지 않는 진정한 진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팍팍하다. 이동휘 대통령이 친 배수의 진은 오히려 그의 자작극으로 그를 옭아매고, 진실을 향해 뛰어든 한태경의 용기는, 자기 아버지의 죄를 덮으려고 살인조차 저지르는 파렴치범으로 매도된다. 
하지만 그래서, 더 <쓰리데이즈>를 응원하게 된다. 현실은, 한태경이 만난 검찰처럼, 그리고 그에게 뻔하게 각색된 스토리의 질문을 던지는 언론의 그것이지만, 우리가 만나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만큼은, 그런 바늘 구멍하나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뚫고 진실을 밝히려 하는 주인공들이 승리할 테니까. 그렇게 라도 우리도 왜곡된 현실의 숨통을 튈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조금은 덜 부끄럽게 사는 용기를 얻어 가질 테니까 말이다. 좋은 드라마다.  

그리고 이 좋은 드라마의 훌륭한 대사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이동휘 역의 손현주와, 한태경 역의 박유천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진정성어린 연기가, 대사를 그저 대사가 아닌, 진실이 되어 가슴에 와닿게 해준다. 두 사람이 인터뷰를 통해 밝혔던 진정성이란 각오가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음을 매회 두 사람의 연기를 통해 확인하고 감동받아 행복하다.


by meditator 2014. 4. 3. 01:51

음어집을 외우지 못해 컨닝 페이퍼를 만들던 풋내기 경호관, 당선된 대통령이 나를 위해 죽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대통령이 제가 모실 첫 대통령이라며 주먹을 앙다짐하던 새내기 경호관 한태경(박유천 분), 이제 그는 대통령(이동휘 분)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대통령의 나를 지켜줄 수 있겠습니까' 란 말을 실천하게 되었으며, 그를 우습게 보고 살려보내주었던 재신 그룹 회장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인물로 성장해 버렸다.


그렇게 성장해 가는, 아니 이미 부쩍 성장한 한태경이지만, 7회,8회를 거치며 그를 인도하는 건 이미 죽은 그의 아비들이다. 그의 아버지 한기준, 그리고 또 다른 아비 함봉수가 그에게 지시등이 되어 나타난다. 

(사진; 채널예스)

7회, 경호관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김도진이 있는 재신 호텔 스위트 룸까지 쳐들어 갔지만 눈앞에서 아버지의 기밀문서 98이 타버리는 것을 막지 못해 회한에 쌓여 소줏잔을 앞에 높고 앉아있는 한태경 앞에 경호실장 함봉수가 앉는다.
대통령을 암살하다 한태경의 손에 죽은 함봉수이지만, 지금 그의 앞에 앉은 함봉수는 그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경호관이 된 이래 경호관으로서의 그의 등대가 되어주었던 함봉수이다. 그런 함봉수가 말한다.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지만 자신을 쏘아 죽이던 그날처럼 다시 그런 순간을 맞이한다면 결코 망설이지 말라고 손을 내밀어 준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그 누구하나 믿을 사람이 없는 한태경은 그 어느때보다도 애절하게 자신이 죽인 함봉수 경호실장의 손을 잡는다. 

장례식장에서 장례도 치루지 못한 함봉수 실장의 처지가 거론되자 냉정한 동료들과 달리 한태경은 그건 단 한 번의 실수라고 눌러 못박는다. 비록 동료 경호관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한태경에게 함봉수 경호실장은, 그가 본능처럼 경호관으로서의 감을 되살려 낼 때마다, 그와 함께 등장해 그의 길을 밝혀준다. 비록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지만, 그에게 여전히 함봉수는 스승이다. 경호관으로서 그의 아비다. 그래서 그가 그 누구보다도 의지한 그의 아비가, 누군가에게 이용만 당하다 동료들에게조차 배려받지 못하는 개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한태경은 더 견딜 수 없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한태경은 대통령의 입을 통해 아버지가 16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고 그때부터 줄곧 혼자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자 고군분투하셨다는 사실을 전해듣고도 혼돈스러워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비밀문서 98의 실체를 접하면서 아버지가 미처 밝히지 못한 채 죽은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행보에 유도등이 되는건, 그처럼 사건을 밝히고자 애썼던 아버지의 지난 모습이다. 

하지만 친아버지건, 정신적 아버지건, 그리고 상징적인 아버지 대통령까지, 그 아비들은 자신이 저지른 오류에 짓눌린 인생들이다. 98년 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함봉수는 그리도 냉철하던 경호관으로서의 이성을 저버린 채 그 시절 상관이던 참모총장의 마수에 이용당해 버렸고, 아버지 한기준은 사건의 내막을 모른채 다수의 사람들이 죽어간 사건의 자금 심부름꾼이 되어버렸다. 팔콘의 개라 자처하며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동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젊은 경호관 한태경이 떨쳐 일어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역사적, 사회적 과오를 범한 아버지들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를 반성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록 잘못된 방향이었지만 함봉수의 의도와, 아버지 한기준의 의도는 다르지 않다. 원치 않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고자 한 것이다. 이동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태경은, 시인 서정주가 뒤늦게 그리고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나의 아비는 노비였다 라며 자조하던 것과 달리, 아비들의 과거를 밟으며, 그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경호관의 경험을 상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함봉수, 그리고 이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고자 나선 한태경에 한 걸음 앞서 홀로 움직이던 한기준을 보여주는 <쓰리데이즈>는 상징적이다. 
단지 앞으로 살아갈 세대에 대한 독려가 아니라, 여전히 끝나지 않은 아비 세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아비로써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을 진중하게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지키겠다고 하는 이동휘 대통령은 그래서 현실에 없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살아가는 바로 이 시대, 어른들 우리의 모습이다. 아직은 주저앉아서는 안되는 기성 세대와, 그런 어른들의 독려를 받은 젊은 세대가 힘을 합쳐야 겨우 또 역사의 한 고비를 넘을 수 있다는 게 <쓰리데이즈>가 힘겹게 내뱉고 있는 이야기다. 


by meditator 2014. 3. 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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