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 음악 좀 틀어줘'의 세상이다. 아이들의 외국어 공부를 걱정하던 엄마들의 귀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자연스런 외국어 발음, 따라나가보니 인공 지능이 선별한 외국어 영상이었다. 원하는 음악에서 부터, 아이 돌보미, 학습 도우미를 넘어 외로운 솔로들의 마음까지 달래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그러니 드라마 남자 주인공 역할을 'AI(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컴퓨터를 통해 구현하는 기술, artificial intelligence)가 맡는다는 게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바로 6월 4일 부터 시작한 kbs2의 미니 시리즈 <너도 인간이니?>의 이야기다. 




아들이 된 AI
하지만 드라마로 온 AI의 시작은 '고전'적이다. 마음씨 좋은 제페토 할아버지가 나무 토막을 깍아 자식삼아 만든 인형 '피노키오'처럼, 아들을 시아버지에게 빼앗긴 인공 지능 로봇 연구자 오로라 박사(김성령 분)는 아들과 똑닮은 '남신1'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따라 그녀의 'AI'도 '남신Ⅱ', '남신Ⅲ'로 변화해 갔다. 그렇게 AI를 아들삼아 지내려던 오로라 박사, 하지만 그녀를 찾아 공항에서 해프닝을 벌이며 체코까지 찾아온 친아들 남신(서강준 분)이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맨다. 아들의 부재가 곧 PK그룹 내 아들의 위치를, PK그룹을 서종길(유오성 분)에 의한 위기로 빠뜨릴 것이란 걸 직감한 엄마는 아들처럼 여겨왔던 '남신Ⅲ'에게 부탁한다. '엄마의 아들을 지켜줘' 

그리고 엄마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엄마 아들의 역할을 해야 하는 남신Ⅲ의 캐릭터는 스필버그의 역작 AI(2001)로 부터 벤치 마킹한다. '천문학적 속도로 발전한 과학 문명 AI 들의 봉사를 받고 살아가는 인간들, 그런 가운데 하비 박사가 만들어 낸 '감정이 있는 AI'는 아이가 없는 인간의 가정에 '입양'되는데....'로 시작한 영화<AI>는 인간을 사랑하게끔 프로그래밍된 소년 로봇 데이빗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너도 인간이니?> 역시 세상에 눈을 뜬 순간, 감정이 없다면서도 엄마바래기인 AI 남신Ⅲ를 등장시킨다.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사들고 오는 길에 엄마가 늘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을 넘어 그리워했던 남신의 교통사고를 목격한 남신Ⅲ는 기꺼이 남신을 대신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
<너도 인간이니?>라는 드라마는 제목처럼 이중적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주인공이 사람이 아닌 남신Ⅲ라는 AI이듯, 인간이 아닌 AI가 벌이는 갖가지 해프닝을 통해, AI의 인간적 딜레마를 재연해 낸다. 아들과 헤어져 위로가 필요했던 어머니가 프로그래밍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안아줘요'라는 제 1원칙에서 부터, 삭제를 시켰음에도 본능적(?)으로 발현한 재난 모드 시 인명 구조 행동 등을 통해 영화 <AI>에서 인간의 아이보다 더 귀엽고 그래서 더 가여웠던 데이비처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남신Ⅲ의 존재론을 묻는다. 

그리고 프로그래밍된 AI주제에 넘치는 인간미를 보이는 남신Ⅲ와 달리, 그를 아들로 여겼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친 아들이 나타나자 그를 기꺼이 아들 대용으로 '사용'하는 어머니에서 부터, 그룹과 자신을 위해 아들과 손자를 독점하려는 할아버지 남건호 회장(박영규 분)과 그의 순종적인 하수인인 척하며 호시탐탐 그룹을 노리는 서종길 이사와 그 측근들은 흔히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에게 낮잡아 쏘아붙이는 '너도 인간이니?"의 구어적 표현을 통해 '인간'의 ;비인간적' 모습을 폭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이 아닌 이종의 존재를 통해 '인간'됨'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은 이미 1818년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래 고전적인 주제이다. 



6%를 넘겼지만(6회 6.3%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너도 인간이니?>는 동시간대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다. 3,4%의 시청률로 고전하던 MBC의 <로봇이 아니야>처럼 역시나 인간이 아닌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의 '난망'함을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또한 여주인공이었던 공승연의 전작인 <써틀; 이어진 두 세계>처럼 대중과 소통하기엔 버거운 SF물의 여정을 되풀이 하고있지는 않은까 우려도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100억 대작이라는 제작진이 내세우는 CG등의 퀄리티에 대한 기대와 함께, '괴작'이었지만, 문명이 낳은 슬픈 동화로 기억되는 김규완 극본, 김용수 연출의 <아이언맨>에 버금가는 또 한편의 '현대적 동화'로 남겨지길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8.06.13 02:22

구악의 상징이었던 전 대통령이 '헌법 재판소'라는 사법적 절차를 통해 '탄핵'이 결정되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는 '개헌'이 논의 되며, 사법 정의 실현이 '적폐 청산'의 시금석으로 여겨지는 세상, 그런 현실의 반영때문일까.  tvn의 <무법 변호사>, mbc의 <검법남녀>, jtbc의 <미스 함무라비>, kbs2의 <슈츠>, 그리고 얼마전 종영한 sbs의 <스위치-세상을 바꿔라(이하 스위치)> 등, 각 방송사, 각 요일대 별로 '법' 관련 드라마들이 포진되어 있다. 적어도 시청자들은 이들 드라마 중 한 드라마를 매일 만날 확률이 높다. 




범람하는 법 관련 드라마들
물론 '법'을 다룬다고 해서 천편일률적이지는 않다. tvn의 <무법 변호사>는 '법'으로 싸우는 변호사라 주인공인 봉상필(이준기 분)이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드라마를 견인하는 건, 그와 다수의 조폭들의 격투씬이요, 법정에서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한 '봉상필'의 '작전'들이다. '법'을 내세우지만, '무법'적 요소가 범람하는 아이러니한 '법' 드라마인 셈이다. 지난 5월 17일 종영한 <스위치>의 경우 '스위치'를 온오프하듯 자유롭게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사칭을 하는 사기꾼이 얼떨결에 검사가 되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무법 변호사>와 같은 변칙 플레이의 궤도에 놓여있다. 미드 원작으로 리메이크 된 kbs2의 <슈츠> 역시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전설적인 변호사와 함께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가짜'를 변호사로 등장시켜 '법정' 드라마를 변주시킨다. 

반면, 서울 동부지방 법원 부장 판사로 이미 동명의 저서를 펴낸바 있는 문유석 판사가 극본을 쓰고 있는 jtbc의 <미스 함무라비>는 앞서 두 드라마와는 정 반대로 '법원'을 무대로 '판사'들의 교과서와 같은 내용을 현장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mbc의 <검법 남녀>는 검사와, 법의관을 파트너쉽 관계로 묶어내고, 검시의 현장과, 그에 뒷받침되는 일선 법 현장을 '메르스 사태', '엄여인 사건' 등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현실감있게 풀어낸다. 

그러나 제 아무리 설정이 다르고, 전개가 다르다 해도 매일 매일 '법' 드라마가 방영되는 현실은 제 아무리 현실을 반영한다 해도 과하다. 그건 곧 그만큼 현재 우리 드라마 계가 '범람하는'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콘텐츠의 빈곤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제 아무리 사법적 정의가 중요하다 해도 대한민국 전체 직업군 중에서 '법' 관련 직업군이 차지하는 비율에 비해 드라마 속 전문직으로 등장하는 '법' 관련 직종은 과도하다. 시대적 흐름이라 해도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드라마계의 현실이다. 사기꾼이던지, 무법 액션가이던지, 혹은 정의로운 판사던지, 법의관이던지, 결국 그 무대는 '법정'이고, 그 '정의'의 실현은 '법'을 통해 판가름나는 이들 드라마는 '법'의 중요성을 '계몽'하는 효과가 극대화되는 반면,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피로도' 역시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제 아무리 이준기가 펄펄 날고, 정재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메스를 휘두르고, 천재 박형식이 술술 법전을 읊어대도 시청자들의 눈에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보이는 '자충수'를 더는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의로운 여성 법관들
그런데, <슈츠>를 제외한 이들 법 관련 드라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바로 여성 법조인들이다. 지난 1월 15일 사법 연수원 수료식, 수료한 연수생 171명 중 여성이 70명으로 40.9%를 차지한다. 지난 해에 비해 29.4%에 비해 그 증가폭이 현격하다. 그런 현실을 반영한 탓일까.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법복'을 입고 활보한다.

또한 이들 '법복'을 입은 여주인공들은 '정의'의 상징이다. 그들은 의로우며, 그 의로움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법'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들이 '자산가'의 자제(검법남녀 은솔 역의 정유미)이거나, 지역 유지 판사의 도움으로 변호사가 된 사진관 집 딸(무법 변호사 하재이 역의 서예지)이거나, 재래 시장통의 친근한 딸(미스 함무라비 박차오름 역의 고아라)이거나 상관없다. 그들은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법원을 꿈꾸며, 무한한 EQ를 작동하여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며,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마다하지 않는 열혈 '법조인'들이다. 

'권위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않는 '깨시민'의 전형같은 이들은 그런 '정의감'으로 인해 사건의 중심에 거침없이 뛰어든다. 하지만, 그녀들의 무한 EQ와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경험은 그들은 때로 그녀들을 직업적 혼돈에 빠뜨린다. 마음이 앞서는 <검법남녀>의 은솔 검사는 그로 인해 '메르스'로 추정되는 검시실에 갇히는가 하면, 사건 현장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은 시장통 사람들의 민원에 귀 기울이다 법원 앞 1인 시위하는 여성의 사건에서 공정성의 잣대를 놓치기도 한다. 어렵사리 공부해 겨우 변호사가 됐지만 법저에서 남편의 학대에 정당방위를 한 여성의 억울한 판결에 분노하여 주먹이 앞서는 바람에 '변호사' 자격에 위기를 겪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들은 '법'의 정의로운 실현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서 그 실현의 과정에서 고뇌하고 성장한다. 그러기에 때로는 그녀들이 벌인 일들이 그녀들을 민폐로 만들기도 하고, 감정적이며 저돌적인 캐릭터의 한계 속에 가두기도 한다. 분명 드라마 속에서 그녀들은 '법복'을 입은 전문적 직업인들이지만, 그녀들의 캐릭터가 빛나는 상황은 그녀들의 '감정'을 통해서인 경우가 아직은 빈번하다. 외려 법복을 입지 않았지만 <슈츠> 속 홍다함(채정안 분)과 김지나(고성희 분)가 전문성에서는 더 빛을 발한다. 

거기에 그녀들이 '성장'하기 위해 '남성'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맹목적인 정의감에 불타던 <무법 변호사>의 하재이는 봉상필(이준기 분)을 통해 어머니 죽음의 비밀을 알고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던 차문숙 판사, 그리고 그녀가 만든 괴물 기성을 향해 법의 칼날을 겨눌 것이다. <검법남녀>의 감정만 앞서던 은솔에게 때론 배신감을 안기기도 하지만, '법'의 길에서 '바로미터'가 되는건, 그 어느 경우에서도 '법'의 진실을 향해 비켜서지 않는 법의관 백범(정재영 분)이다. 의지과 감성이 앞서는 박차오름이 전문적인 판사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노회한 한세상(성동일 분)의 경험과 선배 임바른(김명수 분)의 배려가 전제된다. 
정의로운 여주인공을 내세웠음에도 여전히 '감성적'인 여성'과 '이성적'인 남성의 구도의 드라마들이 서로 다른 드라마인데도 마치 같은 드라마인양 남여 주인공의 성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되풀이 된다는 점이 아쉽다. 
by meditator 2018.06.05 16:14

<미스트리스>는 2008년에서 2010년까지 영국 BBC One에서 방영된 드라마이다. 이걸 2013년 미국 ABC에서 시즌제 드라마로 리메이크, 현재 시즌4까지 방송 완료되었다. 그리고 2018년 OCN을 통해 한국판 <미스트리스>가 6월 3일까지 12부작으로 방영되었다. 현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다룬 '관능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한 이들 드라마는 ABC 드라마의 경우 '미국판 사랑과 전쟁'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몰이를 하였다. 그렇다면 12부작으로 완료된 한국판 <미스트리스>가 어땠을까?




미드와 그리 다르지 않은 설정의 한국판 
한국판 <미스트리스>의 각 캐릭터 상 설정은 흡사했다. 알리사 밀라노가 연기한 사바나 역, 잘 나가는 변호사이며 남편이 쉐프였던 이 캐릭터는 역시나 전문직 여성이었던 한정원(최희서 분)과 역시나 쉐프인 그녀의 남편 황동석(박병은 분)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들 부부는 미드 원작에서처럼 불임으로 고민 중이며 같은 학교 선생님과 한번의 정사로 아빠를 알 수 없는 아이를 가지게 된 것 역시 동일한 설정이다. 

우리나라 배우 김윤진이 연기했던 정신과 의사 카렌 킴 역할은 한국판 <미스트리스>에서도 역시나 같은 정신과 의사이며, 환자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감정적 혼란을 느낀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성관계를 즐기는 부동산 중개업자 조슬린(제이스 맥클리안 분) 캐릭터 역시 비슷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로펌 사무장 캐릭터 도화영(구재이 분)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가인이 분한 장세연은 남편이 죽은 이후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아가는 워킹맘 캐릭터이며, 그런 그녀의 앞에 남편의 여자가, 심지어 그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다는 설정 역시 원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비슷한 설정, 그리고 원작이 표방한 '관능'이라는 방점에 충실하기 위해 드라마의 초반 선정적인 베드씬을 나열하며 이 리메이크 작도 원작처럼 적나라한 성인들의 속살을 드러내는 이야기임을 가감없이 보여주려 했던 <미스트리스>, 하지만 12부작 한국판 <미스트리스>에서 미드의 흥미진진함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왜? 설정도 비슷하고, 서사도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여성들의 이야기란? 
그건, '여성'들의 이야기를 표방했음에도, 그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고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우선 미드 원작에서 드라마의 중심적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 건 성공한 변호사였던 사바나 캐릭터였다. 이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뜻밖의 외도를 통해 가지게 된 아이, 하지만 그녀는 그 아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 같은 설정이지만 한국판 <미스트리스>는 어땠을까? 영화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가 무색하게, 드라마<미스트리스>에서 최희서가 분한 한정원은 '전문직' 여성이었지만 학교에서 그녀는 자신만만하지도 당당하지도 않은 채 늘 불안하고 일에 치이고, 학생들에 치이는 심지어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여성이었다. 

우리나라 배우 김윤진이 연기했던 카렌 킴 역의 정신과 의사는 한국판에서도 같은 직업이지만 드라마 내내 신현빈이 연기한 김은수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에 당당한 여성이라기 보다는 불륜이었던 선생님과 그 아들 사이에서 불안에 떨며 직업정 정체성조차 모호한 캐릭터로 보여졌다.

이렇게 원작과 다르게 직업 여성의 주체적인 당당함 대신 그녀를 둘러싼 사건, 사고에 휩쓸려 어쩔줄 모르는 여성의 불안함과 불안정함이 증폭된 캐릭터들도 캐릭터들이지만, 무엇보다 한국판 <미스트리스>가 '여성'이라는 주체성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건, 미드에서 사바나와 카렌 킴이 주도해가는 서사와 달리, 오랜만의 복귀작이 된 한가인이 분한 장세연이 한국판 <미스트리스> 서사의 중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 아이와 함께 사는 장세연,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모, 그런데 알고보니 남편의 여자, 죽은 줄알았던 남편의 생환, 그리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역시나 정체가 모호한 딸 아이 유치원의 학부모라는 한상훈(이희준 분). 장세연은 12부작 내내 그녀가 원치 않는 사건에 본의 아니게 얽히며 자신과 딸의 운명조차 파국의 상황까지 휩쓸려 가는 인물이다. 

수동적인 캐릭터 장세연이 극의 중심에 놓여지고, 정작 주체적인 한정원과 김은수가 주변 인물로 변형되며 <미스트리스> 전체가 원치 않는 사건에 휘말려 '독안에 든 쥐'가 되어버린 여성들의 양상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결국 절대 악 김영대(오정세 분)의 보험 사기극에 휘말린 여성들의 잔혹사로 귀결되었다.



미스트리스란 단어에는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지배권을 가진 여자라는 뜻과 동시에 다른 여자의 남편과 불륜의 관계를 가진 여성이라는 양 극단의 의미이다. 미드 <미스트리스>는 이 이율배반적인 의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주인공들의 삶을 '관능'이라는 성적 코드를 얹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반면, 한국으로 온 <미스트리스>는 '관능'이라는 코드를 성적 자유분방함이나 주체성이라는 측면보다는 시청자를 위한 눈요기거리로 보여주려 한다. 또한 불륜 등의 관계에서도 주체적인 삶의 방향을 위해 고민하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16부의 엔딩에 이르기까지는 안타깝게도 부각되지 않는다. 대학 동창생 4명의 굳건한 우정은 듬직했지만 함께 몰려다니던 그녀들은 사건의 주도적인 해결보다, 늘 또 다른 사건의 함정 속에 빠지기 십상이니 그녀들의 집단적 의지는 희석되어 버리곤 한다. 

그럼에도 빛나는 장면은 있다. 전 남친과의 잠시 모호한 관계에 빠졌던 도화영이, 그와 함께 산성을 오르다, 올라올 때는 너와 함께 였지만, 이제 내려갈 때는 각자 내려가자며 자기 삶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장면이나, 누구의 아이인가 내내 혼돈에 빠져있던 한정원이 남편을 면회한 자리에서 아이의 유전자 검사지를 찢으며 아빠가 누구인가 상관없이 내 아이로 키우겠다는 장면은 내내 운명에 어찌할 줄 모르던 그녀들의 삶에서 반짝인다. 또한 한 남자의 두 아내였던 장세연과 박정심(이상희 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각하고, 특히 박정심이 자신을 옭죄고 있던 김영대의 운명적 결박을 풀어내는 장면은 그럼에도 <미스트리스>의 결정적 장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은 그 표현이 단선적이었지만 <미스트리스>라는 훈훈한 장점이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8.06.04 15:21

아이의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선생님은 졸업장을 나누어 주면서 반에서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에게 말씀하셨다. '사실 네가 최고야, 성실했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착했고, 늘 궃은 학급의 일에 솔선수범했지. 세상에 너같은 사람이 많아져야 하는데', 그 선생님의 찬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 말이 가진 역설 때문이었다. 아들이 다니던 중학교에서 반에서 10등 정도를 하면 대학에 가기 힘들었다. 제 아무리 최선을 다했얻도 우리 사회에서 대학에도 갈 수 없는 정도의 성적을 낸 학생에게 '성실'하다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학생이 보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착함이라던가, 마다하지 않은 궃은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오지랖이라던가, 심지어 '손해보는 짓'이라고 말한다. 결과로 평가하고, 이득을 잘 챙겨야 좋은 사람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건지, 그래서 우리들은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렇게 우리가 잊어버리고 산 '사람 사는 법'에 대해 <나의 아저씨>는 깨우쳐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우리가 묻어 버리고 사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기에 <나의 아저씨>는 이 시대 최고의 환타지일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리뷰'는 객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에 대해 흠씬 마음이 가버려, 콩깍지가 씌워져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아름다워 보이듯, 그런 드라마가 있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내 마음이 너무 깊이 들어가 모든 것이 고와 보인다. 아마도 드라마가 표현한 '아저씨' 세대의 공감 때문에도 그렇다. 그러기에 이 리뷰는 리뷰라기보다는 <나의 아저씨>에 대한 감탄사 같은 것이다.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 여행 대신 할머니의 장례식
동생 기훈(송새벽 분)과 함께 청소 용역업을 하던 형 상훈(박호산 분)은 동생과 어머니 몰래 수익금의 일부를 장판 밑에 숨긴다. 22녀간 다니던 회사에서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아 챙기는 바람에 짤린 그 답게 뒷주머니를 차려는가 했는데, 그 뒷주머니의 소용처가 <나의 아저씨>답다. 동생 기훈이 질색을 하던 말던, 회사를 짤리고 사업을 두 번이나 말아먹고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린 이 아저씨는 맨날 자신의 삶에 대해 먹고 싸기만 했다며 한탄을 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에 '먹고 싼' 것이 아닌 기억을 만들기로 했다. 바로 그 '다른 기억'을 위해 몰래, 아니 사실은 어머니도 알고, 동생도 알게 모아둔 돈, 그 돈을 상훈은 삼형제가 멋들어진 라이방을 쓰고 검은 슈트를 입고,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 상훈의 꿈을 보면서, 그랬다. 아,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저 삼형제의 폼나는(?) 여행이겠구나. 하지만 드라마는 그런 알량한 예측을 집어 던졌다. 물론 삼형제는 검은 라이방을 썼고, 검은 슈트를 입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스위트룸도, 빨간 스포츠카도 없었다. 그들이 입은 건 상복이었고, 그들은 함께 지안이(아이유 분) 할머니를 모시는 납골당행 버스에 올라탔다. 상주라고는 이지안 혼자인 쓸쓸한 상가를 본 상훈은 그 동안 자신이 모은 돈을 털어 상가를 풍성하게 만든다. 동생 동훈이 회사에 짤리게 되자, 너만은 회사에 남아 어머니 돌아가시면 상가를 흥청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라며 탄식했던 그의 '로망'을 지안이 할머니 상에서 실현한 것이다. 즐비한 화한, 그가 불러들인 이웃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격식을 차린 젯상과 절차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모도 잠시, 상훈은 행복해 했다.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 바닷가 스위트룸 호텔 여행과 할머니의 장례식, 이 전혀 다른 선택, 바로 여기에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되어 있다. 박동훈은 그런 사람이었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존재감이 없던 사람. 그래서 회사에서도 자신이 해오던 설계팀에서 밀려 안전진단팀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묵묵히 솔선수범하며 자신의 일을 해오던 사람. 형제 중에 가운데,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내색하지 않고 집안의 궂은 일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사람. 청렴했던 그가 자신의 앞으로 잘못배달되어 온 돈 봉투 앞에서 어머니가 말한 형의 분식집 비용으로 흔들려야 했던 그런 사람. 그래서 야망도 열의도 없어 보여 변호사가 된 아내에게 밀쳐지게 되버린 남편.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공기처럼 꼭 있어야 될 사람이지만, 그 소중함이 당연하게 여겨져 뒤로 밀쳐졌던 사람, <나의 아저씨>는 그런 박동훈을 뜻하지 않게 얽혀진 회사 내 정치와 아내의 불륜이란 사건을 통해 세상 밖으로 길어 올린다. 



가장 불쌍한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행복의 방식 
그렇게 보잘 것없이 하지만 당연하게 흐르던 박동훈의 삶에 빚어진 파열음, 본의 아니게 얽혀진 그 사건으로 인해 박동훈은 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는 그의 삶, 그 바닥을 친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만난 이지안, 그의 말처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애라 생각했던 그 아이가, 박동훈을 불쌍하다고 하자, 그의 서러움이 봇물 터지듯 터져온다. 도저히 위로 받을 수 없는 대상에게서 받는 위로의 공감과 서러움이 두 사람을 세상 밖에 던져진 사람의 '연대'로 묶는다. 그리고 그 세상 밖으로 던져진 두 사람의 공감과 연대는 그들처럼 세상 살기 너무 힘들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누구 하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힘들었던 드라마를 보는 모든 이들을 위로한다. 

본의 아니게 박동훈 아내 강윤희(이지아 분)와 도준영(김영민 분)의 불륜을 알고, 도준영과 얽히게 된 이지안은 자신에게 잘해준 박동훈을 구하기 위해 이지안이 할 수 있는 불법적 방식을 통해 그를 돕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이지안의 방식은 외려 삼안e&c의 사내 정치와 엇물려 박동훈을, 그리고 그녀를 위기에 빠뜨린다. 

드라마는 삼안 e&c의 사내 정치, 그런 사내 정치를 둘러싼 왕전무와 도준영의 갈등, 도준영과 박동훈 아내의 불륜,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에 자의 반 타의반으로 엮인 이지안, 그리고 그런 이지안을 옭죄이는 이광일(장기용 분)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부도덕한 잡음들을 드라마의 한 궤로 하면서, 그런 부도덕한 사건들을 헤치고 나가는 이지안의 저돌적이면서 맹목적인 사랑과, 그런 이지안의 자기 희생적인 헌신을 보다듬으며 결국 그녀를 부도덕한 웅덩이에게 건져내며, 그 자신도 회생한 박동훈의 미련스럽게 우직한 행보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그런 박동훈의, 그리고 박동훈의 주변 사람들의 선택을 통해, 사람의, 어른됨의 자리를 되집는다. 이제는 무색해 졌지만, 마흔, 중년의 나이를 '미혹'이라 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역설적으로 쉽게 혹해지는 시절, 혹은 요즘 세상은 '키덜트'라 하여,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어른답지 않아도 됨을 허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어느덧 누군가를 아니, 무엇보다 나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속절없이 도달한 이들은 '이익'과 '셈'이 앞서는 세상 속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혼란스럽다. 



반갑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하여 
바로 여전히 나이만 들었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잘 모르겠는 어른들을 위해, <나의 아저씨>는 이 시대의 격언을 남긴다. 자신이 애써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몇 번 보지도 않은 이지안의 장례식에 쏟아붓고는 한없이 행복해 하는 박상훈처럼, 세상 젤 불쌍하고 추운 아이를 알아버린 바람에 그 아이를 책임지고자 애쓴 박동훈처럼, 그리고 비록 실수는 했지만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려 했던 박동훈의 아내 강윤희처럼, 그리고 20년의 애증을 도망치지 않고 답했던 겸덕(박해준 분)처럼, 그리고 기꺼이 '우리 사람'이라며 이지안을 반기고 함께 했던 후계동 사람들처럼. 드라마는 사람답게 행복해지는 방식에 대해 진득하게 천착하며 나름의 답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아내보다, 형제가 먼저여서 늘 아내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 것 같던 사람, 하지만 그는 정작 아내의 불륜을 혼자 끝까지 삼키며 가정을 지키려 했다. 늘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 마시는게 낙인 세상 별 하잘 것 없어 보였던 상훈, 기훈, 그리고 후계동 사람들, 그들은 세상 외로운 이지안이 다시 태어나고 싶은 좋은 곳의 인연들이 되었다. 사람을 안다는 것, 그 '인연'의 무게를 '행복'으로 답한다. 살아가며 만났던 인연들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며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그 만큼만의 삶이 어쩌면 우리가 이 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이 아닐까. <나의 아저씨>가 시작할 때 가장 한심했던 사람들이, 드라마의 마지막 좋은 인연이 되어 우리의 삶을 환기시킨다. 혹시 당신 주변에 당신이 하잘 것없다 했던 좋은 인연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당신의 삶, 주변의 삶부터 잘 챙기세요라며. 

드라마는 끝났지만 여전히 후계동 사람들은 오늘 저녁도 정희네에 모여 술 한 잔을 걸치며 그렇게 훈훈하게 살아갈 것이다. 대표가 된 박동훈도, 가끔은 이지안도, 그리고 어쩌면 이젠 추억이 된 겸덕도, 그리고 드라마를 본 우리도, 최소한 드라마의 여운이 흐려지기 전에 박동훈처럼 사람답게 행복해지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좋은 인연에 애쓸 것이다. 

by meditator 2018.05.18 18:22

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하게 바람, '욕망'의 사전적 정의다. 그런데 이 '간절함'에 대해 사회와 역사는 늘 '양 극단'의 입장을 취해 왔다. 그 중 하나는 심리적 쾌락주의자인 '홉스(Thomas Hobbes)'의 주장으로, 모든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은 자기 쾌락과 자기 보존의 목적을 지향하며, 인간의 심리적 동인은 '쾌락에의 욕망'이며, 그 대상이 곧 인간에게는 '선'이라 정의한다. 그러기엔 그런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긍정을 기초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체제가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한다. 그에 반해,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는 불교에서처럼 인간의 욕망은 '굴레(bondage)'로 보았다. 그러기에 인간의 행복은 이 굴레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통제하여 '체제 내적' 혹은 '사회 내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욕망'은 이 두 가지 의견 중 어느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욕망에 대해.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는 순차가 있지만, 네 명의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욕망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드라마들이 있다. 바로, 5월 12일 시작한 sbs의 <시크릿 마더>와 이제 6회차에 접어든 <미스트리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비록 연배는 조금 다르지만 30대, 40대 우리 시대를 사는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욕망'을 드라마적 갈등의 계기로 삼는다. 과연, 이들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여성의 욕망'은 '홉스'적일까? 아니면 '스피노자' 적일까? 이들을 통해 우리 시대가 바라보고 있는 여성, 그리고 욕망은 또 어떤 것일까? 



엄마들의 욕망; <시크릿 마더> 
sbs 주말극으로 첫 선을 보인 <시크릿 마더>, 그 시작은 '강남', 그곳에서 '아이'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열정을 풀어가는 네 명의 엄마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42세의 전직 의사인 김윤진(송윤아 분), 40세 강혜경(서영희 분), 42세 명화숙(김재화 분), 36세 송지애(오연아 분)가 그들이다. 같은 명문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둔 '강남'엄마인 이들의 하루 스케줄을 아이를 따라 움직이며, 아이들의 보다 좋은 교육 정보와 그 실천이 이들 네 엄마 모임의 근간을 이룬다. 

이렇게 네 명의 열혈 교육 맘을 앞세운 <시크릿 마더>를 보고 있자면, 2013년 방영된 kbs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4부작)이 연상된다. 당시는 초등학교가 아닌 명문 유치원을 배경으로 모여든 역시나 네 명의 교육 맘들의 '욕망'에 집중했던 이 드라마는 하지만, 가장 '명문'이라는 이 '유치원'에 모여든 '명문'이지 않은 엄마들의 비밀이 폭로되며, 아이를 통해 계층 상승의 대리전을 치루는 여성들의 '욕망'을 낱낱이 해부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첫 회 연방으로 4부작을 방영한 드라마는 같은 그룹이지만 성적에서 늘 뒤처지는 아이를 위해, 솔선수범하던 엄마 김윤진이, 더 나은 성적을 위해 '입시 대리모'라는 신종 직종의 여성을 들이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 이혼, 별거, 그리고 과거까지, 그럴듯한 강남 엄마의 속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포문'을 연다. 남 보기엔 '현모양처'이지만, 그들 각자의 속내로 들어가면, 아이를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었지만 딸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전직 정신과 의사에서부터, 지방대 출신이라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위장 이혼까지 감행하고, 남들의 이목때문에 별거 중인 남편을 출퇴근시키는 등,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각자의 문제'를 '아이의 교육'을 통해 해소하고, 자신을 증명해 내고자 한다. 결국 그들 각자의 욕망이 또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30대 여성들의 욕망; <미스트리스> 
<시크릿 마더>가 40대 여성의 욕망을 '엄마'라는 사회적 존재를 통해 풀어가고자 한다면, 미드 원작이 있는 <미스트리스>는 여성 그 '욕망'을 보다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30대 중반, 그 연배의 여성은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드라마는 '그녀들의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는데 꺼리낌이 없다. 그리고 드라마는 마치 30대 여성의 '욕망'에 있어 '관건'이 '성'이라는 듯이, 그녀들의 '성', 혹은 남녀 관계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고자 한다. 극의 중심에 놓여 있는 건 한가인이 분한 장세연이지만, 정작 <미스트리스>란 드라마의 '농염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건, 김은수(신현빈 분), 한정원(최희서 분), 도화영(구재이 분)의 성적 욕망이다. 

'성적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미혹'에 빠진다는 점에서는 장세연도 그리 다르지 않다. 2년전 바다에서 실종된 남편, 그러나 뜬금없이 걸려온 남편으로 연상되는 전화, 그런 혼란스러운 가운데 아이의 유치원 학부형으로 한상훈(이희준 분)이 접근해 오며 그녀를 흔든다. 30대 그녀들이 흔들리는 건, 남편의 유무, 결혼의 유무와 관련이 없다. 아이를 낳기 위한 섹스에 골몰하는 한정원 부부의 관계는 외려, 이 시대의 결혼이라는게 얼마나 위태로운 관계인가를 방증할 뿐이다. 선생님과의 불륜에 빠졌던 김은수나, 결혼한 전남친과의 묘한 비지니스적 관계에 흘러들어가는 도화영이라고 다르지 않다. 결혼이란 제도의 안에 있건, 바깥에 있건 그녀들은 우리 사회를 공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이 제도와 얽혀들며 그녀들의 욕망을 복잡하게 만든다. 




<시크릿 마더>나, <미스트리스>를 통해 전면에 내세운 여성들의 욕망은 극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즉, 욕망은 그녀들로 하여금 위태로운 갈등으로 그녀들을 유도하는 '유인제'의 역할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드라마는 욕망을 다루지만, 즉 언뜻 보면 '욕망'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듯하지만, 그로 인한 '갈등'에 천착하여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통제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욕망'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40대 여성은 '모성'의 존재이며, 30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와 피치 못하게 엮인다는 점에서 '당대'적인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또한 '강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더하여, 엄마가 된 여성들의 '아이를 통한 대리 성취욕' 역시 긍정적이진 않다. 그렇다고 <미스트리스> 속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 역시 불온하거나 불안하다. 

또한, 이들 드라마는 이런 그녀들의 '욕망'이 한편에서 그녀들을 '갈등'으로 이끌어가는 유도제로 작동하는 동시에, 또한 시청자들을 손쉽게 흡인시키는 '도구'로도 작동한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미스트리스>는 극 초반 끊임없어 남녀의 정사 장면을 내세우며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 '눈요기' 혹은 '선정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미스트리스>가 1%에도 못미치는 시청률로 고전하고 있는 점은, 이 시대의 시청자들이 내용성없는 눈요기에 냉정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며, '내용성'없는 욕망의 전시 역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시크릿 마더>나, <미스트리스>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이야기'이다. 강남 엄마들의 지칠줄 모르는 교육열을 내세운 <시크릿 마더>는 김윤진의 집에 들인 입시 대리모를 통해, 김윤진의 숨겨진 과거와 트라우마를 드러내며 '미스터리'한 장르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매회 이렇다할 내용보다 여주인공들의 '욕망'에 집중했던 <미스트리스>도 이제 6회에 들어서며 보험조사원이었던 한상훈의 실체가 드러나고, 김은수, 한정원, 도화영 역시 미스터리한 사건의 중심에 놓여지며 극의 전개가 본격화 되었다. 결국 드러난 욕망을 통해, 그 속에 숨겨진 그녀들의 진짜 사연, 혹은 진솔한 '욕망'에 접근하고자 한다. 과연 이 욕망이라는 '통과 의례'를 통해 우리 시대 3,40대 여주인공이 도달할 곳은 어딘지, 그들 통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시대 여성들의 속내는 무엇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8.05.13 18:52

sbs에도 단막극이 있었구나 싶다.4월 30일과 5월 1일에 걸쳐 방영된 <엑시트>에 대한 첫 소감이다. 지난 주 종영한 <키스 먼저 할까요?>와 다음 주 첫 선을 보일 <기름진 멜로> 사이의 한 주, 그게 sbs 특집극에 허용된 시간이다. 4회 4.6%, 단막극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아님 단막극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허긴 그래도 고전하고 있는 mbc의 주중 미니 시리즈에 비하면 선방했다고 봐야 할까? 하지만 조촐한 시청률과 달리, <엑시트>는 그간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던, 아니 다루기 버거웠던 '가상 현실'을 소재로 하여 sf 장르물이라는 신선한 시도를 선보였다. 




당신....행복해지고 싶나요? 
4부작, (일반 드라마 분량으로 하면 2부작)의 드라마 <엑시트>를 연 건, 희망, 행복 등의 단어는 찾아볼 수 없는 청년 사채 일수꾼 도강수(최태준 분)의 나날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가족 사진을 그는 가져갈 수 없었다. 아버지(우현 분)의 폭력에 못견딘 어머니(남기애 분)가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라지자 대신 강수를 때렸다. 그에게는 그 시절 '폭력'의 흔적이 흉터로 남겨져 있다. 술로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가 자식을 제대로 키웠을 리 만무했다. 결국 강수는 사채 일수꾼이 되어 황태복 사장(박호산 분)의 수하로 살아간다. 그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선영(전수진 분)은 황사장의 애인, 도대체 그의 삶에서 '행복'의 기미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암울한 삶'을 살던 그의 눈 앞에 '당신....행복해지고 싶나요?' 전단지가 붙어있다. 그 전단지를 들고 찾아가니, 그곳은 '가상 현실'의 과학을 이용하여 '행복'한 삶을 제공해준다는 연구소이다. 그러나 애증인지, 연민이지 그에겐 폭력의 기억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그의 옆에 있는 아버지, 심지어 이제는 건강마저 좋지 않아 그의 짐이 되는 아버지가 행복으로 가는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해서 돌아온 집에서 그를 맞이하는 건 등돌린 채 그가 사온 '족발'마저 외면하는 아버지이다. 결국 다시 '행복'을 찾아 연구소로 향한 그,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행복해 지기 위한 3억을 요구한다. 결국 모든 것이 '돈'으로 회귀하느냐며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엑시트>는 '가상 현실'을 통한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가장 최악의 수를 풀어놓는다. 주사위의 그 어느 수가 나와도 늘 '행복'이랑은 거리가 먼 도강수의 삶, 경제적으로도, 가족도, 심지어 사랑도 그 어느 것하나 그에게 '행복'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현실의 삶 대신 '가상 현실의 행복'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 그렇게 선택에 의한 가상 현실의 개연성을 부풀리던 드라마는 뜬금없이 그 '행복'을 위한 자금 '3억'이 등장하며 의아함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과연, 지금 이 진행되는 드라마가 '드라마 속 현실'인지, 아니면, 드라마 속 도강수의 가상 현실'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모호한 경계는 황태복의 돈을 빼돌린 채 도망치던 강수를 황태복에게 쫓기다, '제발 죽어버려'란 강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차에 황태복이 치이며, 강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 '가상 현실의 행복'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며 멋들어진 양복에 근사한 사무실, 그보다 더 널찍한 집,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선영과 친절한 아버지, 그리고 한 눈에 그를 알아보는 30년만에 만난 어머니가 그에게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를 실감케 해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건가? 
그 '행복'을 선물한 건 아버지였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강수는 사경을 헤매고 평생 행복이라고는 느껴보지도 못한 채 삶을 마감할 지도 모를 강수가 불쌍했던 아버지가 강수를 그 연구소의 실험 대상으로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약물에 의한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한 강수는 이적의 노래 처럼 '말하는 대로', 행복해지는 삶을 만끽하게 된다. 

하지만 가상 현실의 행복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불행하기만 했던 삶, 그래서 비록 연구실 실험대 위에 누워 맛보는 가상의 행복이지만, 그 선택이 개연성이 있었던 강수의 '행복 회로', 하지만 그 '행복'의 부작용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아버지는 연구소를 찾아가 읍소한다.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그런 아버지의 읍소에 연구소 직원은, 실험에서 나올 수 있는 여부는 결국 '강수의 의지'만이 가능한 것이라 외면당한다. 

하지만 정작 진짜 딜레마는 행복을 만끽하던 가상 현실 속에서 등장한다. 순간 순간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시달리던 강수, 차츰 지금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의심하게 된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을 쫓던 황태복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걸 상기해낸 강수는, 그의 말 한 마디에 만남과 이별에 순응하는 선영의 태도에 '행복한 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맛보는 이 '행복'이 '인스턴트'임을 자각하게 절망하게 되는데. 

약물을 강화해도 여전히 흔들리는 강수에게 우재희(배해선 분) 박사가 선택한 강수는 '행복'을 멈추는 것, '행복한 상태'에서 깨어난 강수를 기다리는 것 황태복과 그 수하들의 추격과 죽어가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 따위는 아랑곳없는 선영이다. 결국 남은 건 강수의 선택, '개똥밭'보다도 못한 암울한 현실인가, 그게 아니면 언제라도 너의 곁에서 행복하다는 가족들이 있는 가상 현실의 행복인가. 



드라마는 애원하는 가족들을 남긴 채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가상 현실의 EXIT'을 나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찾는 강수의 꽉 닫힌 결말로 마무리된다. '가상 현실'이라는 sf적 설정을 차용했지만, 외려 보다 근원적이며 원론적인 '행복'에의 질문에 도달한다. 즉, 흔히 '행복'이라 하면 경제적이든, 관계에서든 모든 것이 충족되고 만족된 상태라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드라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프고 힘들 망정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역사, 당신이 부등켜 안고 있는 그 질곡의 삶이 주는 찐득한 그 감정이 진짜 행복은 아닐까 라고. 하지만 드라마가 도달한 명쾌한 결론에 시청자의 손이 선뜻 들어질까? 각자가 헤매이고 있는 현실이 아득할테니 말이다. 외려 불안정한 가상 현실의 행복이 아쉽지 않을까. 

드라마 속 인스턴트 적인 가상 현실이 주는 행복의 맛은 흡사 얼마 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속 가상 현실 오아시스를 연상케 한다. 그곳에서도 슬럼가의 희망없는 청년들은 가상현실의 오아시스에 탐닉했다. 영화가 '가상 현실'을 매개로 청년들의 진취적인 도전에의 용기를 북돋았다면, <엑시트>는 부자 간의 인정이라는 우리네 정서에 천착하여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영화 속 가상 현실이, 극복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용한 장치였다면 드라마 속 가상 현실은 '부정되어야 할' 문제적 장치이다. 성큼 다가온 '과학의 미래'에 대한 '온도 차'가 분명하다.  

by meditator 2018.05.02 13:14

우리 사회에서 '어른들의 사랑'이라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를까? 이른바 '막장'이란 단어로 축약되는 바람, 불륜, 복수 등등으로 이어지는 '치정'같은 것들이 아닐까. 그래서 '어른'들이 주요 시청층인 아침, 주말 드라마에는 이런 요소들이 들어가야 흥행이 이루어진다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이 '공식'에 충실히 따라 시청률을 견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 '속물 어른'들에 대한 '편견'을 축적시키는데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편견', 혹은 '선입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4월 24일 종영한 <키스 먼저 할까요>이다. 선정적(?)인 제목과 달리 드라마는 '어른됨'의 '사랑'을 논한다. 그리고 '어른'이라도 , 아니 '어른'이라서 '성숙'되고 더 '아름다운'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그래서일까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어른'의 '멜로'에 천착했던 드라마는 주중 1위의 독주를 안타깝게도 동시간대 1위를 타방송사에 내어주며 한 자리 수의 약소한 성취로 종영되었다. 하지만 시청률로만 다 평가할 수 없는 사랑의 '여운'은 <키스 먼저 할까요>을 이 봄, 오랜 여운이 남는 드라마로 이 드라마를 기억되게 할 것이다. 

'연민'인 줄 알았는데,
물론 <키스 먼저 할까요>의 시작도 '바람'인 듯 했다. 빌라의 아래 윗집에 사는 두 남녀, 손무한(감우성 분)과 안순진(김선아 분). 소개팅의 악연으로 시작하여, 고독사 해프닝으로 엮어진 이 남녀, 그런데 에필로그를 통해 이들의 오랜 인연, 그 사연이 풀어진다. 비행기 승무원이었던 안순진과 승객이었던 손무한은 기상 악화로 비행 난조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공감대로 만나지는 듯했다. 바람난 아내 때문에 가족과 이별을 하고 돌아오는 손무한과, 남편의 바람으로 역시나 상처를 입은 듯한 안순진은, 안순진의 자살 시도로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잊고 싶은 '인연의 실타래'로 엮이게 된 듯했다. 



하지만, 그 여느 '막장'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들의 사연은 회를 거듭하면서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다른 각도의 이야기'에는 배유미 작가가 언제나 그래왔듯, 사회적인 해원이 가로놓여 있다. 배유미 작가는 그랬다. 2013년작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에서도, 2015년 <애인있어요> 등에서도 결국 얽히고 섥힌 인간 관계, 남녀 관계, 그 궁극에 부도덕한 구악의 연원을 놓이게 했다. 하지만, 늘상 그랬듯이 배유미 작가는, 그 '악'을 궁극의 모순으로 자리하게 하지만, 그것에 천착하지 않는다. 그 '연원'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해결'에는 복잡한 인간사가 얽혀져, '인간'의 문제로 '치환'시켜내왔다. 

가해자와 피해자, 하지만 그들은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그 '관계'가 모호해지며, 그 '연원'의 해법을 복잡하게 하고, '인간적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마치 작가는 '인간사'가 그리 무 자르듯, 혹은 두부 썰듯 단호하게, 분명하게 설명될 수 없는 '복잡계'라고 늘 항변해 왔던 듯하다. 몇 차원의 함수보다도 복잡하고, 난해한 이 '얽힌 인연'의 '업보', 그래서 배유미 작가의 작품은 때론 '난해하고, '난감하며, 그 실타래를 풀다, 시청자들이 머리에 쥐가 날 정도의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키스 먼저 할까요>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배우자에 대한 배신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를 잃은 공감대에 대한 '연민'인 줄 알았던 사랑은, 손무한의 무조건적인 호혜, 그리고 그런 호혜를 오갈 데 없는 신세의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안순진의 욕망이 화답하며, 대뜸 키스 먼저 하고 동거의 수순을 밟으며 위태로운 동상이몽의 멜로로 전개되는 듯했다. 

서로를 책임지는 '어른'들의 사랑 
하지만, 그 '멜로'의 색채는 드라마의 중반부에 들어서며 색채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저 자기 처럼 불쌍하고 안됐어서 안순진을 거둔 것인 줄 알았던 손무한의 '베품'은 알고보니, 시한부라는 설정이 등장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안순진으로 하여금 생명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그녀가 빚을 져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딸 아이의 '의문사'가 있었다. 무책임했던 대기업의 분말로 된 어린이 식품, 바로 그 '돈'에 눈이 멀어 이미 외국에서는 판매가 금지된 제품의 유일한 희생자가 안순진의 딸이었으며, 그 대기업의 편에 서서, 아이들의 눈을 현혹시킨 광고를 만든 담당자가 바로 손무한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손무한의 사연이 밝혀지는 순간,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듯했던 손무한의 '사랑'은 결국 죽어가는 자의 속죄 의식으로 변모된다. 그리고 그 '속죄'의 내막을 안순진이 알게 되면서, '사랑'은 급격하게 '애증'으로 변해진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그 과정에서 지친 남편마저 외면했던 재판에 여전히 매달리는 안순진이, 바로 그 '공범'이었던 사람을 이미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 '딜레마'는 이미 그들의 '멜로'에 감정 이입했던 시청자들조차 당혹스럽게 만든다. 

따지고 보면 손무한이 무에 그리 죄될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건을 만든 당사자로 10 여년을 뻐튕기는 시간에, 겨우 아무 것도 모른 채 광고를 만들었다는 이유 만으로. 하지만, 작가는 바로 그런 손무한의 '좌절'을 통해, '도덕'의 범위를 묻는다. 그리고 기업만이 아니라, 그들의 공범자로 인해, 10 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안순진'과 같은 사람들은 지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강변한다. 

그리고 손무한의 '속죄'로 시작된 사랑은 결국 '책임'을 상징한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니가 아니라, 나 역시도 떳떳하지 않았다는 손무한의 책임 의식은, 그 개인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 그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 그 누구에게라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우리 모두가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낸 '공범'이라 작가는 손무한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결국 동시대적 책임론이다. 

하지만 '인간사' 자로 잰듯, 혹은 더하기 빼기로만 이루어 지지 않으니, '사랑'해서는 안되고, '속죄'만 해야 하는 대상을 손무한은 사랑하게 되었고, 증오해야 하는 대상에 이미 안순진은 너무 의지를 하고 말았다. 이런 얽힌 관계를 드라마는 '젖는다'로 표현한다. 10년 전 딸의 무덤에서 통곡하던 안순진, 그리고 다시 6년전 아무도 없는 동물원에서 하염없이 울다 자신의 손목을 그은 안순진, 그리고 다시 6년의 세월이 흘러서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안순진이, 포기할 수 없었던 안순진이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손무한에 젖어들어 그를 변화시켰다고. 



결국 시작은 포기할수 없었던 모성 안순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제 그만하라고, 잊으라고 하는 딸의 죽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안순진은 10여젼이 세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아, 길거리에 나앉게 생기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사랑'은 손무한을 변화시켰고, 결국 그녀의 '해원'을 풀 동지를 얻게 했다. 

<키스 먼저 할까요>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시대 '어른들의 사랑'은 '책임'이다. 어른들은 '키스'도 하고, '포옹'도 하고, '잠도 자는 어른들의 사랑을 한다. 하지만 육체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그들은 '어른'이기에 자신들의 삶을,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하는 이의 삶을 책임지고자 한다. 죽음 앞에 선 손무한이 그랬고, 애증의 고비를 넘은 안순진이 그랬다. 안순진으로 부터 비롯되어 변화한 손무한이, 인간적으로 안순진을 '사랑'의 관계로 거두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는 간접적이었더라도 그가 저지른 '사회적 범죄'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안순진도 마찬가지다. 증오해야 할 대상을 사랑해 버렸다는 자괴감에서 흔들렸던 그녀는 기꺼이 '적과의 동침'을 수용한다.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 속죄하는 손무한을 변화시켰듯, 삶의 끈을 놓아버린 그를 자기 밖에 모르는 '은둔형 도토리'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참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저 시한부 앞에서 육체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더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든다.

그렇게 <키스 먼저 할까요>는 사적인 의도로 시작하여, 애증의 고비를 넘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책임의 용광로가 된 성숙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에 도달한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해 욕을 먹는 세상에서 에돌아 배유미 작가는 '어른됨'을 설파한다. 32부작, 시끌벅적한 사건 대신, 때론 난해하고, 곡해하기 어려웠던 두 남녀의 애증과 사랑을 그 눈빛만으로도 설득이 되는 감우성과 여전히 헌신적인 김선아라는 배우의 연기로 설득해 낸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운치있었던 연출과, 그 연출을 한껏 감성적으로 풀어낸 ost가 오랜 여운이 남는 어른들의 멜로를 완성한다. 모처럼 '어른스러운' 드라마였다.  

by meditator 2018.04.25 05:36

ocn의 장르물 <작은 신의 아이들>이 3.926%, 자체 최고 시청률로 종영했다.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수치 상으로만 보면 그간 ocn 장르물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첫 회 2.54%로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호조를 보인 결과물이다. 시청률의 순조로웠던 상승세는 물론, <작은 신의 아이들>이 시도했던 신선했던 과학과 무속의 콜라보는 어쩐지 이 한 시리즈로 끝내기엔 아쉽단 생각이 든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 중심에 '신',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놓여져 있다. 20년 전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한 종말론자들의 집단 자살극, 그 '원죄'의 현장으로 부터 실타래를 풀어간 드라마는 그 '집단 자살극'을 유도한, 아니 정확하게는 '집단 자살'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들의 범죄의 탈출구를 만든 '종교'를 이용한 세력에 대한 '징죄'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각도에서는 그런 '종교'의 '혹세무민'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의 '해원'의 과정이기도 하다. 



혹세무민, 그 뿌리깊은 연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까지 간청했던 선산까지 팔아먹으며 일확천금을 꿈꾸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망한 예배당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없는 교회는 그에게 '목사님'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고, 어느 틈에 그는 그 자신이 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갈 곳없는 고아들과,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상이 외면한 처지를 거두었던 왕목사(장광 분), 그는 2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어버이'연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그의 온갖 비리를 함께 하며 성장한 백도규 회장(이효정 분)이 있었다. 20년 전에도 그들의 '왕국'은 건실했다. 하지만, 그 '왕국'의 실체를 깨닫게 된 신도들이 투서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때까지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투서'의 목적지가 잘못되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용'이 되고 싶었던 남자, 국한주(이재용 분) 검사, 세상은 그를 가난한 이들의 청원을 들어주는 의로운 사람이라 했지만, 그에게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입신양명'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천인 교회의 투서를 받은 국한주는 억울하게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신도들을 구제하는 대신, 왕목사를 찾아가 '딜'을 한다. 그리고 왕목사와 국한주, 그들의 '협잡'의 결과는 20년전 참혹한 집단 자살극이었다. 

<작은 신의 아이들> 속 왕목사, 백도규, 국한주,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었던 김단의 아빠, 김호기(안길강 분)의 모습은 특정 교파, 특정인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만들어 낸 '괴물 아버지'들의 상징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 가난한 환경을 딛고 '성공'을 하고, '부'을 추구했던 그들은,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기꺼이 자기 자신,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타인'을 제물로 삼았다. 그 결과 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있었지만, 그 성공의 역사는 희생자의 핏빛으로 얼룩져 있다. 



작은 신의 아이들, 그 묵직했던 해원 
이렇게 성공의 신화, 그러나 괴물이 된 아버지들의 세대에 의해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왕목사가 그러모아 신약 개발의 실험 마루타가 되었던 아이들, 하지만 왕목사의 한 마디 말에, 그리고 그 반대였던 백도규와 김집사의 잔혹했던 학대에 길들여 졌던 아이들, 그들 중 누군가는 공범자로 살아남아 오른팔이 되었고, 누군가는 용병처럼 희생되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겨우 도망쳐 살아남아 그 기억을 잃었다. 

그렇게 왕목사가 스스로 신인 연 했던 천인 교회의 고아들은, 이제 그 실체를 파헤치다 동생이 희생된 또 다른 희생자 천재인(강지환 분)과 동료 형사인 김단(김옥분 분)으로, 그의 적인 검사 주하민(심희섭 분)으로 조우하게 된다. 

이렇게 20년전 집단 학살극의 해원을 풀어가기 위해 <작은 신의 아이들>이 차용한 캐릭터는, 대한민국 10대 미제 사건 중 3을 해결한 아이큐 167에 모든 것을 '과학적 지식'을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주의자' 천재인과, 그와 정반대의 무당의 손녀로 그녀에게 나타난 무속의 끼를 피하기 위해 천인 교회 복지원으로 갔던 김단이다. 이 정반대의 캐릭터는 드라마 초반 연쇄 살인마 한상구(김동영 분)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의혹과 불신, 불협화음을 넘어, 가족을 잃었다는 동지애로 뭉쳐,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파트너로 16부의 여정을 통해 도달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성취한 동지애에 기반한 불협화음같으면서도 적재적소에서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는 과학과 무속의 콜라보가 1회성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마치 <엑스맨; 더 퍼스트 클래스>처럼 두 형사 천재인과 김단이 서로를 동지로써 수용하는 과정의 전사를 다룬다. 과학으로 실증되지 않는 현상을 믿지 못하는 형사 천재인이 동료로써, 그리고 무속인으로써 김단을 수용하고, 함께 하는 과정이며, 두 사람 모두가 동생을 잃고, 아버지를 잃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딛고 경찰로서의 자신의 책무와 무속적 능력을 받아들이는 자기 확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캐릭터로서의 '과학'과 '무속'의 만남을 기대하며 
16회, 빌딩의 옥상으로 상대편 대통령 후보의 위협이 되는 노조원들을 모아 20년 전과 같은 집단 투신극을 재연하려는 왕목사와 그의 열혈 광신도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천재인과 김단이 현장으로 간다. 그 과정에서 천재인은 비품 창고에 있던 재료를 끌어모아 임시방편의 폭발물을 만들고, 그 폭발물을 터트리며 빌딩 옥상으로 진입한 김단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예의 무속적 기시감으로 왕목사의 실체를 파헤치며 그의 허를 찌른다. 

엄밀하게 천재인의 캐릭터는 아주 새로운 캐릭터는 아니다. 과학을 신봉하고,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사건을 해결하려 드는 캐릭터의 장르물 주인공은 이전에도 있어왔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과학 신봉주의자와 호흡을 맞춘 상대방은 '감성'이라던가, '공감력'을 무기로 들고 왔던 것과 달리, <작은 신의 아이들>은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 김옥빈의 '접신'이라는 신선한 콘텐츠를 들고 나오며, 기존 캐릭터들과의 변별력을 확실하게 했다. 그러기에, 각자의 전사를 해결하고 비로소 자신의 능력치와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보한 이들의 캐릭터를 한 시리즈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쉽게 여겨진다. 

또한 동지인지, 연민인지, 혹은 가끔은 남여 관계인지 모를 천재인과 김단, 두 사람의 허허실실 파트너 쉽과 긴장 관계를 이룬 어린 시절 친구인지, 첫사랑인지, 생명의 은인인지 모를 검사 주아민의 묘한 모성 본능을 자아내는 캐릭터는 비록 마지막 엔딩에서 흐뭇하게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지만, 여운이 길다. 아니 남녀 관계만이 아니라, 검사로서 형사 천재인에 필적했던 그의 지략 역시 아깝다. 이들 세 사람의 삼각 관계인지, 동지인지, 애증인지 모를 모호한 긴장 관계 역시, 그 다음의 여정이 기다려진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그 제목에 걸맞게 아이들을 희생시켰던 사이비 종교 집단, 아니 종교를 명목으로 입신양명에 몰두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징죄, 그리고 사라진 이들에 대한 복원이라는 그 애초의 주제에 충실하게 마무리되었다. 하늘의 대리인으로 또 다시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나라의 패권마저 넘보던 이들은 '심판'되었다. 그리고 20년전 희생된 31명의 희생자들은 그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았다. 그들과 함께, 자신들의 트라우마에서 주인공들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트라우마'의 해원이 아닌, 그들 각자의 장기를 가진, 천재인의 과학과 김단의 무속, 맛보기가 아닌 그들의 본격적인 활약이 기대된다. 무엇보다 장르물에서 어렵사리 복원된 '무속'의 매력적 활동이 좀 더 펼쳐졌으면 한다. 

by meditator 2018.04.23 15:20

어쩌면 그들도 한때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여유롭게 직장 생활을 하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앞에서 방긋 속없이 웃음을 띠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저 그 '존재' 만으로 '누나'와 '누나'가 아닌 여성들에게 '기쁨'이 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월은 흘러 그들의 몸에 흐르는 남성 호르몬 테르토스테르몬은 존재를 '오욕'으로 물들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때는 '산업 역군'으로 대접받고, '아버지'라 인정받던 시대는 흘러, 이제 '숨만 쉬어도' '위협적인' 존재로 '치부'되는 시대에 머물게 되었다. '주역'이 '민폐'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주역인지도, 민폐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아저씨
그런데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된 시절에 그런 부담을 무릎쓰고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드라마들이 있다. 바로 제목부터 아저씨인 tvn의 <나의 아저씨>와 sbs의 <키스 먼저 할까요>다.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이선균 분)과 <키스할까요>의 손무한(감우성 분), 그들은 외모부터 '남성적 매력'과는 담을 쌓았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에, 심지어 코밑 수염조차 흰 가닥이 잡히는 그런 추레한 외양이다. 외양만 그런가, 번듯한 대기업에 잘 나가던 카피라이터에, 최고 실력의 건축사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스스로는 광고를 만들지 않은 채 아날로그한 소품에 집착한 잔소리꾼에, 한직인 구조기술사로 조직의 그늘을 자처하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키스할까요>의 손무한은 췌장암 말기에 살아갈 날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늙수그레한 박동훈과 손무한, 남성이라기 보다는, 아저씨란 중성적 단어가 더 어울리는 이 연배의 남자들은 공히 그 세대 남자들의 표상과도 같다. 한때는 공부 좀 한다 하여 대학을 잘 갔을 터이고, 그래서 남들 보란듯한 '기업'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꽃이 붉어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던가, 한때는 대학에 입학했다고 빵빠레를 울리던 그 시절도, 혹은 연인의 가슴을 설레하던 그 훈훈했더 매력의 시기도, 그리고 열렬한 사회인으로서의 열정도 이젠 그들에겐 역사가 되고, 그들은 '징역'을 살듯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견뎌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들이 '보신'의 차원으로 자신을 남겨두었던 '조직'이 이제 그들의 목덜미를 잡는다. 대학 후배가 대표 이사 자리에 오르고, 설계팀에서 밀려 그런 후배의 승승장구를 보며 잘 나가는 변호사인 아내는 대놓고 무사안일(?) 한 박동훈에 대해 환멸을 표시하지만, 그래도 박동훈은 그저 '별일 없이 산다'했다. 하지만 그가 '내력'의 증거로 삼아 달리기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뽑은 이지안(아이유 분)과 돈봉투로 인해 얽히고 전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내 정치의 중심으로, 그리고 아내의 불륜에 휘말려 들어가며 그의 삶은 본의 아니게 격전지가 되고 만다. 

트렌디의 상징으로 귀걸이를 하며, 지구 위의 우주인이라며 스스로 자부심이 우주를 향해 치솟을 때까지만 해도, 활자화 된 그 책이 책상 서랍 안에 자물쇠를 잠가 숨겨놓아야 할 오욕의 상징일 줄 몰랐다. 하지만 6년 전 비행기에서 만난 한 여성, 아니 10년이란 세월을 직조하며 얽혀든 안순진(김선아 분)와의 '악연'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온전히 부정하도록 만든다. 

박동훈과 손무한, 두 사람은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성공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나오고, 잘 나가는 직장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는 중산층 남자들의 그러그러한 삶의 모습들이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와 <키스 먼저 할까요> 두 드라마는 우리 시대 성공적인 아저씨의 삶, 그 성공이라 썼지만 신기루처럼 날아가버린 '산업 사회의 성공담'을 해체해 버린다. 

조직의 일원으로,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다하면 자신의 성공은 물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도 번듯하게 살아낼 수 있었을 것 같던 삶, 그러나 '조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듯, 별일 없이 살고 싶었던 박동훈을 변방으로, 변방으로 밀어버린다. 심지어, 사내 정치의 젯밥으로 써버리고, 불륜을 핑계로 희생양을 만들고자 한다. 그의 버팀목이 될 아내도, 부하 직원들도 막상 벼랑 끝에 선 그에겐 등을 돌린다. 

카피라이터로서 그의 성공담의 사례가 된 광고는 그가 저지른 사회적 부도덕의 상징이 되었고, 그 부도덕한 상흔은 그의 몸조차 좀먹어 들어갔다. 광고주는 그에게 협잡의 손길을 내밀었고,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광고쟁이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도피라고는 스스로 직접 광고의 피를 묻히지 않는 소극적 저항정도. 



아저씨를 통해 던진 산업사회 대한민국에 대한 질문, 그리고 회자정리 
결국 이들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의 논리로 달려온 한국 사회에 대한 질문이 된다. 조직의 일원으로 그 논리를 내재화하여 버텨온 이들이, 성공의 정점에 이를 나이에, 스스로 반문하고, 회의하며, 조직에서 버림받거나, 조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는 이 과정은, 결국 '조직'맨으로 살아왔던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업보'다. 또한 무너진 중산층의 현실에 대한 조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와 <키스 먼저 할까요>는 그저 아저씨들의 한풀이에 머물지 않는다. 드라마는 그들의 '회자정리'에 주목한다. 그 시작은 중반부를 돌아선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손무한이 앞선다. 그저 중년의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던 손무한과 안순진의 사랑 이야기는, 기꺼이 그 '업'을 품에 안은 손무한의 순애보로 전개된다. 손무한은 말한다. 6년전 만났던 안순진의 눈물이, 매번 만날 때마다 울고 있던 그녀가 손무한을 적셔서, 나비의 날개짓처럼 손무한을 변화시켰다고.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카피라이터 손무한은 그의 전재산을 결혼이란 과정을 통해 대기업과의 재판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잃은 안순진에게 의탁하고, 그녀의 재판에 유일한 증인으로 서고자 하는 것으로 자신의 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상무에게 잘못전달된 돈봉투를 보고, 어머니가 말한 형의 사업 자금때문에 잠시 흔들렸던 대가로 혹독한 회사 내 검증을 치웠던 박동훈은, 여전히 아내와의 불륜으로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도준영(김영민 분)의 도발에 응전한다. 비록 그 시작은 비겁한 통화 목록 조회에서 부터이지만, 그는 더 이상 '변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응전은 이제 시작이다. 

그렇게 손무한과 박동훈이라는 아저씨의 회자정리가 된 드라마가 새삼스럽게 우리 사회 아저씨에 대한 미화라 불편할 건 없을 듯하다. 그들은 주역이었지만, 그들 또한 '희생양'이었으니, 그러기에 이지안과 박동훈이 동지가 되고, 손무한과 피해자 안순진은 손을 잡을 수 있다. 아저씨는 불편하지만, 그들 역시 이 사회의 무기수로서 그들의 존재는 갸륵하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는 희생양이었지만 조력자였던 그들의 '책임'에 대해, '도덕'에 대해 천착하고 있으니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볼만하겠다. 부정할 수 없는 한 시대의 표상의 회자정리에 시간을 허락해 줄만도 하지 않은가. 

외려 안타까운 건, 아저씨란 이름으로 복기되는 중산층이란 한정성이다. 이제 우리 드라마에서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바보같은 사랑>의 전상우를, <유나의 거리> 속 창만이 깃들어 살던 다세대 주택의 아저씨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나의 아저씨> 속 이제는 한량이 되어버린 놈팽이 아저씨들도 알고보니 한때는 대학 나와 번듯한 직장에서 한 자리씩 했다던 그 알량한 설정의 계급적 한계야 말로 어쩌면 정말 안타까워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by meditator 2018.04.13 14:30

<미생>의 김원석 감독과 <또 오해영>의 박해영 작가의 만남으로 화제가 되었던 <나의 아저씨>, 하지만 드라마를 열기도 전에 남자 주인공이 '아저씨'인 이선균과, 여자 주인공이 젊은 세대 아이유라는 점에서 <도깨비>에 이어 또 한번 아저씨-젊은 여자 커플의 등장이 아니나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설상가상 첫 회 여주인공 이지안(아이유 분)에게 사채를 받으러 온 이광일(장기용 분)의 무차별 폭행에 이어, 그런 이광일의 폭행에 대응한 이지안의 '너 나 좋아하지?'란 대응이 '왜곡된 성의식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논란을 불지피며 일부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2회를 마친 <나의 아저씨>는 이런 세간의 '아저씨'와 젊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 오히려 반문을 하는 듯하다. 극중 이지안은 나꿔챈 뇌물 5000만원을 다시 휴지통을 통해 돌려놓음으로써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박동훈(이선균 분)을 구해준다. 물론 애초에 이지안은 그 돈을 챙겨 자신의 사채 빛을 갚으려 했지만, 결국 다시 돌려놓는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박동훈의 은인이 된 셈이다. 그런 이지안의 처사에 대해 영문을 몰라하는 박동훈, 그에 대해 그의 형 박상훈(박호산 분)과 동생 박기훈(송새벽 분)은 쉽게 이지안이 박동훈을 좋아해서라 단정한다. '얼래리 꼴래리'라며 놀리는 것까지 덧붙여. 



고정 관념을 뒤짚은 아저씨와 나 
바로 이 지점, 우리 사회가 '아저씨'와 이지안 또래의 젊은 여자에 대해 '상정'할 수 있는 관계다. 이지안이 돈봉투를 가져갔다는 의심을 가진 박동훈이 지안을 따라 지하철을 타고 그녀에게 내릴 것을 종용하다 옆 좌석의 승객에게 내밀려 지하철에 패대기쳐지는 장면 역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 잇닿을 수 없는 세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불편한 성적 관계'가 아니고서는 서로 관계할 수 없는 이 두 세대, 그저 두 세대의 남녀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이 많은 아저씨'와 '젊은 여자'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불평이 새어져 나오는 현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이 두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간극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2회를 마친 드라마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쉽게 생각했던 '아저씨'와 '젊은 여자'가 아닌 것이다. <도깨비>처럼 흔히 이 관계를 다룬 드라마에서 등장하던 '키다리 아저씨'따윈 없다. 키다리는 커녕, 회사 내 권력 투쟁에서 그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뇌물 봉투를 배달받아, 장기판의 '졸'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일개 '사원' 박동훈이 있다. 생긴거 부터 억울하게 생겼다는 그는, 정말 억울하게도 그 순간, 딸의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동생과 함께 빼돌리던 형, 그 형에게 집값을 융자 받아 분식집이라도 내주자는 어머니의 간청을 떠올려, 평소답지 않게 주저했다. 그 '한순간의 주저'함이 그 봉투를 이지안에게 빼앗기는 빌미가 되었고, 회사내 권력 투쟁의 '말'로 한껏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거기엔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하느라 그를 밀어내고 싶은 대표의 사심까지 보태졌으니, '키다리 아저씨'는 커녕, 목구멍이 포도청 신세다. 기껏 그가 선심을 써서 산 '연시'조차 이지안에게 건네지지 못한 채.

반면, 우리가 흔히 고정관념으로 생각해 왔던, 그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이지안은 '밟혀도 밟혀지지 않는 억새'와도 같다. 아마도 이광필의 폭력적 장면을 과하게 설정한 건, 그 상황에서도 포기는 커녕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이지안의 그 억새같은 내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했던 이광필'과의 장면만이 아니라도 '생존' 그 자체인 이지안의 삶은 1,2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겨울 박동훈의 눈을 시리게 한 양말도 신지않은 발은 아랑곳없이, 그녀는 회사에서 한 움큼 가져온 커피를 몇 개씩 타서 마시며 도시를 버텨낸다. 요양원에서 밀린 입원비 대신 기꺼이 할머니를 침대 채 끌고 나오는 객기도, 주방 설겆이를 하며 비닐 봉지에 싸온 음식물로 연명하는 끼니의 궁상스러움도, 그녀의 일상이다. 그렇게 설명된 그녀의 일상에서 박동훈이 받은 뇌물 봉투 정도 슬쩍 해서 자신의 빛을 갚는 것 쯤이야 그녀에겐 그 일상의 연장처럼 여겨질 만큼. 그녀는 이 도시에서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릴라'같은 존재다. 그런 그녀 앞에 박동훈은 새장 속의 새와도 같이 보잘 것없다. 



도시 게릴라 이지안과 새장 속의 새 박동훈 
이지안은 5000만원으로 빚을 갚는 '편한' 길 대신 봉투를 돌려주며 외려 박동훈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었다. 박동훈이 사는 밥 한 끼 따위, 5000 만원에 댈 것도 아니다. 그를 그저 장기판의 말로만 써먹는 이 사회에서, 이지안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구원자'다. 물론, 대표와의 딜에 대한 결과는 미지수지만. 바로 이 전복된 '아저씨'와 '나'의 관계가 <나의 아저씨>가 도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담론'이다. 어설픈 아저씨와 '나'에 대한 로망은 사절이다. 그리고 흔히 생각하는 '키다리 아저씨'는 없다. 나이만 먹었지, 장기판의 말로 회사에서, 가정에서 굴려지는 박동훈은 그저 나이만 먹었지, 세상사 내공으로 보면 이지안의 뒤꿈치 정도이다. 

이런 역설적인 세대의 만남,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을'이다. 제 아무리 '생존'을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도 죽일 것'같은 이지안도, 생긴거 부터 억울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박동훈도, 나이가 많건, 적건, 혹은 세상 경험이 많건, 적건, 그들은 이 사회로부터 '억울'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연대'는 기껏해야 '불륜'의 눈길이나 받는 공감 제로의 관계들이다. <나의 아저씨>는 바로 이 공감 제로 관계의 공감과 연대를 위해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첫 발은 어설픈 '아저씨스런 호혜'가 아니라, '나'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물론 아직 알 수 없다. 나가 아저씨를 이용해 먹을 건지, 동지가 될 건지, 의지가 될 건지. 그러나 중요한 건 무한 경쟁, 이전 투구의 사회의 '게릴라'같은 이지안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왜 굳이 아저씨와 나냐고 발길을 걸면 할 말이 없다. 각자 도생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공감과 화해를 해보자는 손길에 한번쯤은 손을 잡고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 '연대'의 시작이 '나'라는 지점에서 우리는 긍정적으로 이 '아저씨'와 '나'의 향후를 지켜볼 만 하지 싶다. 
by meditator 2018.03.23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