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 상반기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빈센조>에서 배우 송중기는 극중 주인공인 이탈리아 마피아의 전담 변호사 콘실리에리로 분했다. 어린 시절 친모에게 버림받고 입양된 전력을 가진 빈센조, 하지만 그를 입양한 양부모는 강도의 손에 살해당하고 이탈리아 마피아 손에 길러지게 된다.

죽은 마피아의 돈을 찾기 위해 돌아온 고국, 하지만 그는 돈 대신, 자신을 품어 준 변호사 홍유찬의 죽음 앞에서 예의 마피아 콘실리에리의 능력을 발휘해 법의 비호를 받는 재벌가를 징벌한다. '악은 악으로 응징한다', 친모에게서, 그리고 고국에게서 버림받은, 마피아 출신 변호사라는 그의 배경이, '안티 히어로'로서의 빈센조라는 존재 이유가 된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법과 상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정의에 대한 갈증을 마피아 식으로 풀어내는 콘실리에리 빈센조에게 열광했다. 

 

 

윤현우의 이생망? 
그로부터 1년 여, 배우 송중기는 또 다른 안티 히어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미 웹툰으로 화제가 되었던 <재벌집 막내아들>이다. 자신을 죽이려던 마피아에게 잔혹하게 복수를 하고, 거대한 포도밭을 태우는 장면으로 시선을 잡아 끌었던 <빈센조>의 첫 회와는 정반대로, 대를 이은 재벌가 순양의 기획조정본부 산하 미래자산 관리팀장으로 등장한 현재 윤현우의 삶은 척박하다. 

동료 직원들이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대상인 윤현우, 하지만 말이 관리 팀장이지 '재벌가의 미래'인 재벌가 식구들을 위해 그는 변기 뚜껑을 직접 갈고, 감정 조절못해 휘두른 골프채에 피를 보는 처지이다. 그래도 '거절도, 판단도, 질문도'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그에게 '동앗줄'이 내려온다. 처음으로 한 '판단'으로 새로 취임한 진성준 회장에게 보고한 페이퍼컴퍼니에 관련된 사안, 그 자리에서 진성준은 그를 재무팀장으로 발령하고 그 자산을 찾아오라는 명을 내린다. 홀홀단신 해외로 날아간 윤현우, 여유롭게 돈을 찾았지만 누구하나 도울 사람없는 그곳에서 벼랑 끝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가난한 집안의 사연있는 장남, 고생만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무능한 아버지와 고시생 동생을 부양해온 윤현우, 흙수저 출신으로 자신을 갈아 겨우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이 어이없는 죽음이라니, 말 그대로 '이생망!'

 

 

1987년의 재벌가 자제로 인생 2회차 
그런데 '이생망'이었던 윤현우의 의식이 깨어난다. 가난한 집안 흙수저였던 그가 깨어난 것은 사라진 순양가 3남, 진윤기의 둘째 아들로였다.  윤현우이던 시절, 쓰러진 진영기의 병실에 찾아와 자신의 사라진 둘째 아들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면 지분을 주겠다던 진윤기의 처 이해인, 그런데 이제 윤현우가 그녀의 아들 1987년의 진도준이 되어있었다. 

기존 드라마와는 다르게 금토일, 매주 3회 편성을 한 <재벌집 막내아들>은 이번 생에서 죽임을 당한  '이생망'의 주인공을 과거로 소환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온 주인공, 언제나 그렇듯 '과거의 역사'를 아는 주인공은 그곳에서 이미 강자이다. 그런데 하물며 비록 서자지만 순양가 3남의 자제라니. 비록 순양가에 발도 못붙이게 하지만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인생 2회차가 우선 <재벌집 막내아들>의 관전 포인트이다. 

과거로 소환된 윤현우, 아니 이제 진도준은 그렇다면 무얼 하고 싶을까? 당연히 우선 그에게 최우선 목표가 된 건, 현재의 시절 윤현우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범인'을 찾고 싶을 것이다. 그가 비밀 문서를 진성준에게 준 것을 안 비서실장 허정도의 배후가 누구일까? 

 

 

그런데 배후를 알기 위한 진도준의 행보는 좀 다른 궤도를 그린다. 이미 현재에서 자격이 없음에도 순양가의 '미래'로 등극한 진성준, 그를 넘어 자기 외에는 그 누구도 믿지 않고,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진양철 순양 그룹 회장의 눈에 들고자 한다. 바로 이미 살아본 자로써의 '어드밴티지'를 이용해. 

<재벌집 막내아들>은 '순양'이라는 불특정한 재벌가를 등장시켰지만, 역시나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머릿 속에 그 누가 떠오르는 현대사의 재벌가를 배경으로 '아는 자'가 되어 돌아온 현재의 흙수저 진도준의 복수를 넘어선 야망을 통해 ,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양 김 통합이라던가, 다음 대통령이라던가, 지나온 역사의 순간에 던져진 진도준이 그걸 '치트키'로 이용해 진양철의 사람이 되어가는 장면이 아는 이야기임에도, 아니 아는 이야기라 더욱 흥미를 배가시킨다. 진도준과 함께 역사를 아는 시청자들이 그 한 치 앞을 모르는 미래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과거의 재벌을 굽어보는 묘미를 드라마는 한껏 보여준다. 

또한 그에 더해 칼기 피격사건에서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저쪽 경기도 짜투리 '분당 땅'을 얻은 진도준이 시세차익으로 거대한 자금을 손에 넣고 그를 이용해 진양철- 진영기 - 진성준으로 이어지는 장자 상속의 룰을 헤집고자 하는 거대한 구상은 <빈센조>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복수물'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물론 드라마는 그저 진도준의 야심과 복수만으로만 펼쳐지지는 않는다. 1987년이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서태지의 은퇴를 둘러싼 현재의 적이었지만, 이제는 '연인'의 인연을 풀어가는  서민영과의 만남, 영화 수입업을 하는 아버지에게 <타이타닉>에 투자하고, <나홀로 집에>를 수입하라는 진도준의 조언은 마치 <응답하라 1987>을 보는 듯하다. 

거기에 <빈센조>가 송중기에 전적으로 의지한 드라마였다면 <재벌집 막내아들>은 순양가 회장 진양철에 이성민에, 진영기에 윤제문 등 연기파 배우의 다수 포진으로마치 현대 재벌가판 <용의 눈물>을 보는 듯 쟁쟁한 연기 경합의 장을 펼친다. 식구들 모두 눈도 못마주치는 진양철 앞에 말간 눈으로 그를 휘두르는 진도준이라니, 이미 그의 복수는 '성공' 중이다. 

물론 그런 보여진 진도준의 광폭 횡보 아래, 과연 윤현우는 왜 진도준으로 깨어났을까 라는 기본적인 의문을 드라마는 제기한다. 사라졌다는 진도준, 그리고 친아들이 아닌듯했던 윤현우, 윤현우가 진도준이 된 건 필연이었을까 라는 물음표, 출생의 비밀이라는 우리 드라마의 가장 흥미로운 요소마저 <재벌집 막내 아들>을 내포하고 있다. 

<빈센조>에 이어 또 새로운 장르물로 <재벌집 막내 아들>이 배우 송중기의 빛나는 필모그래피가 될까? 무엇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신선한 플롯과, 배우들의 열연이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드라마의 입성이 기대되고 반갑다. 



by meditator 2022. 11. 25. 20:31

지난 11년간 비만 인구가 6.6%나 증가했다. 고도 비만은 물론, 초고도 비만도 3.3%나 증가했다. 어느새 다이어트는 산업이 되었다. 365일 다이어트를 한다는 사람들, 과연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라, 이 다이어트 보편의 법칙이 모두에게 통용될까? 다이어트라는 말만큼 '요요현상'이라는 용어 역시 일상이 되어간다. 무엇보다  마르고 날씬한 몸이 사회적 몸의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살이 찐다는 건 게으르거나 자기 관리를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살찐 사람들은 자책하고 우울해 한다. 11월 21일에서 23일 방영된 3부작 <다이어트 혁명 0.5%의 비밀은 통용되고 있는 다이어트 방식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통해 비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자 한다. 

 

 

비만은 유전적 질환이다 
117kg의 도주원 씨는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식단도 운동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배고픔과 식욕과의 싸움은 끝이 없었다.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다음 날 발목 등 관절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다. body mass index, 체질량 지수(BMI), 자신의 몸무게를 키의 제곱으로 나눈 값으로 세계 보건기구(WHO)에서는 체질량 지수 25~29까지를 과체중, 30 이상을 비만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체질량 지수 25~30 정도까지는 식단과 운동을 통해 체중의 감소가 가능하다고 보는 반면, 30이 넘으면 이른바 통상적인 다이어트로는 체중조절이 쉽지 않은 상태로 보고 있다. 

0.5%, 다이어트를 해서 성공할 확률이다. 21일 방영된 <요요와의 전쟁>은 이런 속설을 검증한다. 무려 일년의 기록, 참여한 이들은 다이어트를 할 수록 살이 찌는 '요요'에 시달린다. 다이어트를 꾸준히 열심히 하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 22일 방영된 <내 몸 사용 설명서>는 극단적 마름을 추구하는 프로아나를 주목한다. 최근 우리 사회 10대에서 10대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극단적 마름이다. 찬성'을 뜻하는 Pro-와 '거식증(Anorexia)'에서 딴 Ana를 합성한 단어 프로아나, 체중 감량 성공! 이라는 자랑스러운 용어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자기 학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체중이 정말 바람직할까? 

 

 

요요 현상과 프로아나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 사회의 다이어트 열풍, 그런데 캠브리지 대학 분자유전학자이자 <왜 칼로리는 계산되지 않는가>의 저자 자일스 여 교수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유전자'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즉 비만은 '유전적 질환'이라는 것이다. 

다큐는 구석기 시대인들이 만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소환한다. 풍요, 다산, 생산력의 상징, 늘 먹을 것이 부족했고 그래서 극하느이 굶주림을 견뎌야 했던 인류에게 살찜은 축복이었다. 굷주림을 견뎌야 했던 인류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 가능하면 많이 먹고, 그 먹은 걸 축적시키는 비만 유전자가 발현되었다. 즉 더 많이 먹게끔하는 비만의 유전자는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든 축복의 상징이었다. 

문제는 그 구석기 시대의 유전자를 가지고 풍요를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인류에게서 발생한다. 풍족한 먹거리의 시대, 하지만 비만 유전자를 가진 인류는 여전히 계속 먹고 다이어트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가 가진 비만 유전자는 얼마나 될까? 연구진에 따르면 인류에게는 천 개가 넘는 비만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한국형 비만 유전자 게놈 지도를 만들어 보니 20개 정도가 등장한다.

 

 
'비만'에 대한 시각을 제고하자 
모두에게 존재하는 비만 유전자, 하지만 주요한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따라 개개인 비만도에 차이를 낳는다. 161kg에서 무려 80kg을 감량했지만 박민석 씨는 요요에 시달렸다고 한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비만이 되기 시작해서 중학교 졸업할 때에는 초고도 비만이 된 민석 씨, 그런데 민석 씨네 집은 어머니를 비롯해 3형제가 모두 비만이다. 

민석 씨의 유전자를 검사해 보니 지방을 더 많이 빠르게 축적하는 FTO 유전자와 , 지방을 좋아하고, 식욕이 폭발하는 MC4R 유전자가 나타났다. 즉 더 많이 먹고, 쉽게 찌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전자만이 문제는 아니다. 타고난 유전자와 식품 환경이 만나 비만이 형성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함께 요가 학원을 운영하는 쌍둥이 자매, 일란성 쌍둥이로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몸매를 가지고 있다. 요가 강사를 하는 동생이 날씬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언니는 비만과 전쟁 중이다. 무엇이 다를까.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한 동생과, 탄수화물 위주이 식사를 한 언니, 오랜 시간 서로의 다른 식습관이 장내 미생물, 마이크로바이옴의 차이를 낳고 이것이 비만을 초래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즉 내가 먹는 음식에 따라 좋은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기도 하고, 나쁜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요요현상에 시달리는 박보영 씨, 이른바 저탄고지 식사를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유전자 검사 결과, 보영 씨는 지방만 제한하는 식사가 어울린다는 처방을 받았다. 김용철 씨는 지방 분해를 위해 근력 운동이 필요했다. 박형제 씨는 2000 칼로리 이하의 식사와 유산소 운동이 권장됐다. 즉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각자에 맞는 방식을 찾아가야 되풀이되는 요요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 질환으로서의 비만을 접근하자는 다큐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비만을 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비만을 개인의 의지로 보는 사회적 시각, 게으르거나 자기 관리를 못해서 그렇다는 편견에 대해 시야를 터준다. 대부분 오랜 기간 비만과 반복된 다이어트와 요요 현상에 시달린 사람들은 낮아진 자존감과 우울감에 시달린다. 다큐는 '나의 잘못'이라는 족쇄를 풀어주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획일적인 다이어트 신화 역시 또 다른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내 몸을 인정하고 사랑하자 말한다. 프로아나가 젊은 층에 열풍처럼 번질 정도로 마른 몸에 대한 갈증, 날씬하고 마른 몸이 가져온 사회적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장상균 씨는 121kg의 체중을 20kg 감량하여 100kg대가 되었다. 의사는 지금 그의 상태가 좋다고 말한다. 표준 체중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내가 가장 편안한 자기 몸의 상태를 찾아가라 다큐는 권한다.  바디포지티브, 자기 몸 긍정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사이즈가 아니라, 내 자신에 맞는 몸을 찾아갈 때라는 것이다. 


by meditator 2022. 11. 24. 20:12

셜록에게 셜록만큼 똑똑한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가정으로 <에놀라 홈즈>는 시작된다. 그런데 왜 하필 여동생이어야 할까? 이건 영국을 중심으로 그간 백인 남성 중심의 고전들을 성과 인종적 평등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문화적 시도의 일환이다.

 

 

당대 최고의 탐정 셜록, 그를 키운 어머니는 아직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선각자로서 참정권 운동에 나선 패미니스트 유도리아(헬레나 본햄 카터 분)였다. 일찌기 오빠들이 집을 떠나고 어머니와 남겨진 막내 여동생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 분), 어머니는 딸에게 격투기를 가르치는 등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가르쳤다. <에놀라 홈즈 1> 은 에놀라가 전적으로 의지하던 진보적인 어머니가 사라지고 그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탐정 에놀라의 서막을 연다. 

이제 <에놀라 홈즈 2>는 어머니를 찾는 과정에서 탐정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에놀라 홈즈가 본격적으로 '탐정'일에 나서게 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아직 여성에게 투표권도 허용되지 않던 빅토리아 시대 그런 시대에 여성이 탐정 사무소 문을 열었다고 '문전성시'를 이루겠나. 탐정 사무소라고 들어와 여성이 탐정이라니 질색을 하고 나가는 사람들, 에놀라를 찾아와 오빠 셜록에게 부탁 좀 해달라는 사람들, 이대로 문을 닫아야 하는가 싶은데 소녀 베시가 탐정 에볼라를 찾는다. 성냥 공장에 다니는 자기 언니를 찾아달라는 사건이었다. 

언니 세라는 베시와 함께 성냥 공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기꺼이 맡은 에놀라는 수사를 위해 성냥 공장 직공으로 들어간다. 모든 직공이 다 여성인 공장,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것같은 미성년 베시에서 부터 아줌마들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나무판자를 쪼개 여기에 인을 입혀 성냥을 만든다. 베시와 세라가 함께 살던 집을 조사하던 중 성냥 공장과 세라의 실종에 일련의 관계가 있었다는 걸 눈치 챈 에놀라는 공장 사무실에 잠입 장부 중 일부분이 뜯겨져 나갔음을 알아낸다. 장부를 뜯어낸 건 세라였을까? 

 

 

성냥 공장으로 간 에놀라 
<에볼라 홈즈 2>에서 실종된 여성은 세라 채프먼, 그녀는 1088년 매치걸스 스트라이크((Match Girls’ Strike 성냥 공장 여성 노동자 파업)를 주도한 실존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처음 에볼라가 공장에 간 날, 공장 입구에서 남자 직원이 직원들의 얼굴을 살피며 이상 증상이 있는 사람들을 돌려보낸다. '리프스'라면서. 전염병이라며 돌려보낸 이 증상은 사실, 공장 측이 원료를 아끼기 위해 독성이 강한 백린을 성냥 원료로 쓰면서 '아래턱 부분에서 괴사가 일어나며 턱이 주저앉는 인턱(phossy jaw)증상'이었다. 

애니 베전트라는 언론인이 '브라이언트 앤트 메이' 공장에서 벌어지는 여성 노동자의 인중독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폭로한다. 애니 베전트에 대해 공장은 소송 등을 벌이며 대응했지만, '우리가 무엇을 견뎌야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이 말한 것은 진실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1400 여 명의 브라이언트 앤트 메이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선다. 이때 이 파업을 주도한 여성이 세라 채프먼이다. 

<에볼라 홈즈 2>는 이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적 파업을 극중 주요 사건으로 만든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픽션'으로서의 재미를 더한다. 즉, 알고보니 실종된 세라 채프먼은 연인인 공장주 아들 윌리엄과 함께 공장주의 부도덕한 인 사용 사실을 폭로하려 했다는 식이다. 또한 세라는 동료 메이와 함께 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그 댄서로써의 능력을 살려 시슬리라는 여인으로 변장, 이제는 진보적인 의원이 된 에볼라의 남자 친구 듀크스베리(루이스 파트리지 분)에게 접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세라의 연인 윌리엄도, 동지였던 메이도 모두 목숨을 잃고 에놀라는 탐정으로 보다 본격적으로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헨리 카빌이 분한 셜록, <에볼라 홈즈 1>에서는 배우의 존재감에 비해 비중이 적었던 것과 달리, <에볼라 홈즈 2>에서는 에볼라의 성냥 공장 실종 사건과 셜록의 국고 분실 사건이 맞물린다. 두 사건이 만나게 되는 곳, 그곳에서 모든 일의 배후에 드디어 실종 사건의 지도로 '만나서 반가워요 홈즈'라는 기발한 인사를 남기는 '모리아티'가 등장한다. 

 

 

여성 탐정 셜록 시리즈답게 셜록에게 도전장을 내민 모리아티 역시 미라 트로이(그녀의 이름을 재조합하면 모리아티가 된다. 샤론 던컨 브르스터 분)라는 중년의 흑인 여성이다. 에놀라가 가는 곳마다 등장하던 이 흑인 여성,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흑인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그래서 존중받지 못한 흑인이자, 여성이 백인 남성 셜록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를 농락하는 가장 지능적인 악인이라는 설정은 기발함을 넘어 상징적이다. 

또한 첫 번째 시리즈에서 폭약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무력 사용을 마다치 않던 전투적 패미니스트 어머니 유도리아와 그녀의 동지 이지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에놀라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셜록은 자신의 힘으로 동생을 빼낼 수 없게 되자,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한다. 어머니와 이지스는 자신들이 만든 폭탄을 던지며 에볼라를 탈옥시킨다. 

돌아온 에놀라, 그녀는 오빠 셜록과 남자 친구 듀크스베리와 함께 모리아티의 하수인 그레인 경감 등을 무찌르지만 증거가 되는 문서가 불태워지면서 인중독 사실이 덮힐 위기에 놓이게 된다. 문서가 없으면 안될까? 가장 강력한 증거들, 에놀라와 세라는 동료들이 일하는 공장으로 달려가 여공들과 함께 거리로 나선다. 바로 영화로 온 매치걸스 파업이다. 

by meditator 2022. 11. 14. 22:14

1931년 최영숙은 스톡홀름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06년부터 이화학당을 다니던 그녀가 9년 만에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수학자가 되어 귀국했다는 기사가 신문마다 대서 특필되었다. 조선에서 여성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졌던 그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귀국했던 시기는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50%를 육박하던 때였다.

 

 

수학자로서 교수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금의환양을 했다며 반기던 때와 달리 자리는 없었다. 5개 국어를 하던 그녀는 어학교수라도 하고자 했으나 그 조차도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수학자가 궁여지책으로 택한 일은 배추와 콩나물을 파는 일이었다. 귀국한 지 6개월, 1932년 스트레스와 생활고로 인한 영양 실조로 최영숙은 2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최고의 엘리트 최영숙에게 허용되지 않은 '직업', 하지만 1920년대 직업 여성의 수는 약 33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 수학 교수는 허용하지 않던 사회가 많은 여성들을 어떤 분야에 고용했을까? EBS다큐프라임 <여성 백년사 -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2부 직업 부인 순례>는 100년 전 여성들의 일과 삶을 살핀다. 

 

 

330만 명의 직업 여성들 
1920년대에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식민지 산업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무신을 만들고 옷감을 짜는 등 경공업 위주의 산업화에서 '값싼 노동력'은 필수적이었다. 1929년을 기준으로 일본 남성 노동자가 2.32 엔을 받을 때, 조선 남성 노동자들은 1엔을 받았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6.59엔에 불과했다. 당시 330만의 여성들은 '값싼 노동력'으로서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조선인이라,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중차별로 인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산업전선에 내몰렸다고 <여성 백년사>는 말한다. 

당시 여교원들은 35원에서 60원을 받았다. 여기자는 25원에서 60원, 반면 여차창의 월급은 25원에서 30원, 연초 공장 직공은 6원에서 25원을 받았다. 쌀 한 가마니가 12,3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방직 공장 고용주는 여공이 삯이 싸고, 사상이 악화될 우려가 없으며, 결혼하면 자연히 그만두어 승진의 부담이 없고, 애교가 많고 나긋나긋하다며 여성의 고용 이유를 밝힌다. 

또한 늘어나는 '직업 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직업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대했다. '여성의 그림자는 나날이 늘어가' 라는 식으로 여성들의 직업적 참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순종적이지 않고 사치스럽고 반항적이라며 신여성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가정'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부추겼다. 

 

 

그런 환경에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1929년 광주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성추행 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경성의 여학생들도 시위를 벌여 항의하고자 하였다. 경성의 13개 여학교 학생들이 모였던 곳은 다름아닌 경성여자 상업학교에 다니던 송계월의 집이었다. 이 사건으로 수감된 송계월은 다행이 집행유예로 나오게 되었다. 

이후 조지아 백화점에서 근무하던 송계월은 <신여성> 지의 유일한 여성 기자로 특채되었다. 그녀가 쓴 첫 번째 기사는 <내가 신여성이기에>, 남자의 기생충이 아니라 스스로 경제적 독립의 토대를 쌓아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초', 혹은 '유일한'이라는 수식어를 지녔던 당시 여성들처럼 그녀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여성운동을 계급 해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사회주의 패미니스트였던 그녀는 옥살이 하며 얻은 폐결핵과, 아이를 낳으러 갔다는 둥 '사회의 비열한 공격'으로 인한 상심으로 인해 고향으로 떠나게 된다. 나는 꼭 사라야겠다. 엇전 일인지 죽을 마음은 조금도 업다. 할 일은 만치, 나는 젊지' 라며 삶에 의지를 불태웠던 송계월,  결국 23살 약관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직업 전선에 나선 모든 여성들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여자가 운전을 하면 호기심에라도 타볼 거야'라는 택시 운전을 시작했던 이정옥은 집을 담보로 잡아 크라이슬러 자동차 2대를 사서 직접 '운수 회사' CEO로 한 달에 600원에서 1000 원을 버는 성공을 거두었다. 요즘으로 치면 '플렉스'의 대상이었던 당시 택시, 당연히 많은 남성 승객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이정옥은 그걸 참아내며 직업부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알렸다. 

 

 

또한 아직 '미용'이라는 인식이 흔하지 않던 시절, 그리고 대부분 미용실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시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엽주 미용실'을 당시 조선인이 운영하는 화신 백화점에 연 오엽주의 성공도 프로그램은 주목한다. '여성이여, 튼튼하고 건강하라'는 표어를 내건 엽주 미용실은 당대 최고 배우가 찾는 '핫 플레이스'가 되어갔다. 

열악한 사회적 인식과 근무 환경에도 여성들은 직업을 찾기 위해 나섰다. 20명의 여점원을 모집하는데 180명이 모여들었고, 벼스 여차장 30명 모집에 126명이 모였다. 

그렇다면 100년이 지난 오늘은 어떨까? 기자가 된 송계월은 데파트 걸(백화점 직원)로 일할 당시보다는 훨씬 나은 월급을 받았지만, <신여성>이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잡지사에 그녀는 유일한 여성 기자였다. 프로그램은 OECD 유리천장지수(Glass Ceiling Index ;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별이나 인종 등의 이유로 조직에서 일정한 서열 이상 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 최하위인 한국의 현실을 말한다. 여성의 91.5%가 스스로 차별받는다고 말하는 삶, 지난 10년 동안, 아니 지난 100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by meditator 2022. 11. 13. 20:53

tvn 월화 드라마로 찾아온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는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는 프랑스 원작 드라마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프랑스 시청률 1위 작품으로 시즌 4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작품은 매회 실제 유명 배우인 줄리엣 비노쉬, 모니카 벨루치 등이 극 중 배우로 등장하여 화제가 된 작품이다. 이 작품을 <snl 코리아 시즌 4>와 <쌉니다 천리마마트>의 백승룡 피디와 <회사 가기 싫어>의 박소영 작가 등이 함께 리메이크했다. 

 

 

조여정, 이희준, 진선규가 '고객'
메쏘드 엔터를 이끌던 황태자의 발인 날, 그의 무덤 앞에서 그가 일찌기 눈도장을 찍었던 배우 진선규가 추모사를 한다. 여전히 대표를 '형'이라 부르며 눈물짓는 진선규, 그런 그에게 맞은 편의 이희준이 '분위기 이렇게 만들고 어쩔 거야'라며 일갈한다. 그러자 진선규 배우는 고인이 즐겨부르던 노래로 추도사를 마무리하겠다며 노래를 시작한다.

마이크를 들고 눈물 머금은 목소리로 진심을 다하는 진선규의 열창, 그런데 진선규의 노래 한 소절이 끝나자 이희준이 나선다. 진선규가 들고 있던 마이크를 뺏으려 하고, 진선규는 뺏기지 않으려 하고,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이 마이크를 뺏고 뺏기며 노래를 이어가고, 결국 클라이막스에서 절묘한 이중창의 화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 부등켜 안는 두 사람,  배우로써 데뷔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을 몰아갔던 애증의 시간이 풀어지는 순간이다. 

진선규, 이희준, 두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그들의 연기가 보장되는 두 배우가, 이렇게 아웅다웅하며 이중창을 불러제끼는 이 장면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배우의 수상 소감에서도 등장했던 '코를 높였어야 했어'라는 진선규 배우의 이야기가 에드립인지, 대사인지 모르게 등장하는 이희준 배우와의 애증의 해프닝,  그리고 그 해프닝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오래전 대학로에서 했던 사자 분장으로 등장한 두 배우의 '살신성인'의 카메오를 넘어선 '열연'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이 연기 잘하는 두 배우와 매니저로 등장한 서현우, 곽선영이 어우러진 한바탕 난장의 현장, 모처럼 배우들의 펄떡거리는 연기를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드라마는 엔터업계 1세대 매니저인 왕태자가 이끄는 메쏘드 엔터를 배경으로 이곳을 직장으로 삼은 연예인 매니저들과 그들의 '생업 전선'인 메쏘드 엔터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해프닝을 내용으로 한다. 프랑스 원작에서도 그랬듯이, 첫 화 우아한 한복 차림의 조여정이 그녀의 이름 그대로  김중돈 매니저(서현우 분)의 '고객'으로 등장한다. 

이제는 20대가 아닌 여정,  그래서 그녀와 작품을 하기로 했던 '타란티노 감독'은 그녀와 하기로 했던 영화에서 20대 회상 씬을 그녀가 소화하기 힘들겠다는 이유로 진캐스팅을 취소하려 한다. 이 사실을 전달받은 김중돈, 배우와의 신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지만 차마 그녀에게 나이가 많아서 캐스팅에서 '물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현실에서도 이제는 젊지 않은 조여정이란 배우가 그녀가 배우로서 가진 핸디캡을 그대로 극중 캐릭터로 이입한 1화, 저절로 보는 이들이 극중 매니저 김중돈의 마음이 되고 만다. 중돈이를 찾아다니는 여정, 그런 여정에게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도망다니는 중돈, 눈치없는 신참 소현주(주현영 분)으로 인해 사실을 알게 된 여정은 중돈을 찾아내 자신을 믿지 않는 중돈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수습에 나선 마태오(이서진 분)는 타란티노 감독의 서울 로케에서의 편의를 봐주는 조건으로 여정의 캐스팅을 살려낸다. 그리고 여정에게도 20대의 캐릭터를 위해 '시술'을 강권하는데, 캐릭터를 위해 시술을 하려는 여정과 그런 여정이 안쓰러운 중돈의 동행, 결국 드라마는 두 사람의 신뢰와 의리의 아름다운 하모니로 결말을 맺는다. 

여전히 스타인 조여정이 목제 말에 올라타서 말타기를 배운다는 웃픈 현장, 그리고 선그라스로 가린 채 성형외과 대기실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 배우의 현실적 모습과 극중 캐릭터를 오가는 이 날 것과 가공의 경계선에서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의 묘미가 생겨난다. 

이희준과 진선규 역시 마찬가지다. 연기파인 두 사람이 해묵은 애증으로 인해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황태자의 장례식장에서 두 사람의 오랜 속내를 다 내뱉으며 육박전에 돌입하는 해프닝은 이 드라마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명장면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배우가 자신의 이름으로 실제와 가공의 캐릭터 사이를 오가며 연기를 할 수 있도록 극중 매니저로 등장하는 서현우, 곽선영, 이서진이 저마다의 캐릭터를 가진 매니저로 등장하여 이들의 연기를 유연하게 받쳐준다.

스타라는 존재, 그리고 그들이 존재하도록 뒤에서 고군분투하는 매니저들, 그들의 직장 매쏘드 엔터, 이런 '밥벌이'의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들의 욕망과 열정이 생생하게 맞부딪치며 그들이 불협화음이 한 편의 진솔한 화음으로 보는 이들에게 전달된다. 프랑스에서 시청률 1위를 했던 원작답게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스토리에 날개를 달아준 건 줄리엣 비노쉬, 모니카 벨루치가 부럽지 않을 까메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진솔한 연기를 보여준 조여정, 이희준, 진선규의 열연이다. 그리고 그 못지 않은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이서진, 곽선영, 서형우의 발군의 연기가 정의와 불의가 아니면 드라마가 안되는 듯한 요즘 드라마계에서 모처럼 진솔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드라마볼 재미를 찾아준다. 그래서 궁금해 진다. 다음엔 또 누가 나올까? 또 어떤 배우의 진솔한 모습과 캐릭터의 이중주가 흥미롭게 펼쳐질까. 

by meditator 2022. 11. 9. 20:05

ebs는 11월 7일부터 9일까지 <여성 백년사-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3부작을 방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제목을 비튼 듯한 여성 백년사 3부작의 제목,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이를 통해 다큐는 백년 전 그때 남성 중심 사회 속에 첫 발을 내딛은 여성들의 '잔혹사'를 다루며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에는 고달픈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려 한다. 

 

 

프로그램은 최근 방송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와 같은 토크멘터리 형식을 차용한다. 방송인 안현모, 김현숙, 이승국을 오늘의 패널로 등장시켜, 역사학자 심용환과 함께, 그때와 오늘의 이야기를 견주어 보고자 한다. 

의문의 방에 들어간 김현숙, 안현모, 이승국 세 사람, 그들에게 갑자기 질문이 던져진다. 남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라. 순간 당황했지만, 무사히 세 사람의 독립운동가를 답할 수 있었다. 다음 질문, 여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라. 세 사람 모두, '유관순 열사' 이상 답을 이어가지 못한다. 세 사람의 무지를 탓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들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는 어떨까? 역시나 우리는 근대 소설의 기틀을 마련한  '이광수'는 알아도, 이광수가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칭찬을 아끼지 않은 그 당대의 여성 소설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시간의 문을 열고 들어간 김현숙, 안현모, 이승국 세 사람, 192,30년대의 경성 역 플랫폼을 재현한 듯한 장소에서 이들을 역사학자 심용환이 맞이한다. 그리고, 이들을 찾아온 한 사람, 그 시대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복장의 여성은 이제 부산으로 가서 조선을 떠나려는 김명순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만나려는 김명순은 누구일까?

탄실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기를, 누구든지 퍽 빈곤한 집안에 태어났을 지라도 공부만 잘하고 점잖기만 하면 좋을 줄 알았다
                                                - 김명순, <탄실이와 주영이>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 김명순
1915년 매일신보에  19살 동경 유학 중인 여학생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동경 유학을 가는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던 시절, 그 중에서도 10명도 안되는 여학생들은 당연히 주목의 대상이었다. 실종된 여학생이 바로 김명순이었다. 평양 갑부의 서녀였던 김명순은 일찌기 동경 유학을 떠났다. 재학 중 소개로 만난  해방 후 초대 육참총장이 된 당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며칠 후 학교로 돌아온 김명순, 그녀는 피해자였지만 학교와 사회, 그리고 동료 학우들은 그녀를 '남자를 유혹한 헤픈 여자' 취급을 했다. '여자가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라는 식이었다. 결국 학교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김명순을 그런 처분에 대해 굴복하지 않는다. 귀국을 해서 다시 숙명여고에 졸업한 김명순은 1917년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에 단편 소설 <의심의 소녀>를 응모해 2등으로 당선, 등단을 하게 된다. 이제 막 근대적 소설이 등장하던 시절, '교훈적 주제에서 벗어난 <무정>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이광수의 극찬을 받으며 김명순은 최초의 여성 소설가가 된 것이다. 

이후 김명순은 '쥐같은 남자에게 짐승같은 팔 힘으로......', '창부같은 계집이라...... 일본 남자와 연애한 줄.....',  자신의 성폭행 경험을 낱낱이 고발한 <탄실이와 주영이>를 1924년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하지만, 주변 문인들은 일찌기 자유 연애를 하며 살던 신여성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그녀의 작품이 아닌 사생활을 들어 '협잡'에 가까운 비평을 일삼았다. 

당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비평가였던 김기진은 1924년 신성에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을 싣는다. '착한 처녀인지 보증할 수 없다'라던가, '거친 생활을 한 타락한 여자'라며 그녀의 작품에 대해 '분냄새 나는 시'라고 폄하했다.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노음니다. 
        - 김명순, <생명의 과실> 머리말 중 


이에 대해 김명순은 <김기진 공고문을 무시함>이라는 글을 당시 신여성에 투고했지만, 잡지 광고에서 등장한 김명순의 글은 정작 발간된 잡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1925년 시 24편, 소설 2편, 수필 4편이 실린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발표했다. 또한 5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공채를 거쳐 매일신보에 입사, 이각경, 최은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 번째로 여성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문인들의 비판을 넘어선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조차, '은파리'라는 필명으로 '남편을 다섯이나 갈았다'던가 식의 가십성 기사를 써, 김명순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할 정도였다. 

조선아, 
이 다음에 나갓튼 사람이 나드래도/ 할 수만 잇는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 김명순, 시 <유언> 중에서 


결국 김명순은 더는 조선에서 그녀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생활고와 정신병에 시달리다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방정환, 김기진,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조차 '신여성'이자 능력있는 문인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파렴치한 협잡을 마다하지 않던 시절, 그 시절에 대해 <여성 백년사>는 당시의 한 광고를 들어 말하고자 한다. 전차에 다리를 드러내고 앉은 여성들, 그녀들의 다리에는 '피아노 한 채만 사주면, 문화 주택만 사주면 일흔 살이라도 괜찮아요.' '돈도 없고, 신경질은 많고, 집세 낼 돈도 없어요', 바로 이 광고가 그 시대가 '신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신여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했던 김명순은 결국 조선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고 프로그램은 말한다. 토크멘터리의 형식으로 '미래를 알 수 없다면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살았던 과거의 인물에게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취지에서 기획된 <여성 백년사>, 과연 선각자였던 김명순의 삶을 제대로 조명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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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이 아닌,  주체적 인간상의 조명이 아쉽다
최근 인기를 끄는 토크멘터리 형식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프로그램들에서 우선 눈에 띄는 건, 패널로 등장한 이들의 '감정적인 접근'이다. 당연히 일본 유학 중 성폭행을 당하고, 동료 학생들, 그리고 동료 문인들에게 왕따를 넘어서 발을 못붙일 정도의 수모를 당한 김명순의 삶을 굳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안타까움과 분노가 앞서게 된다. 그런데, 그게 김명순에 대한 제대로 된 조명일까? 외려, 희생양, 사회적 피해자라는 부정적이고 제작진이 말하고 싶은 편의적인 면만이 부각된 것은 아닐까?

실제 김명순은 여전히 가문과 집안에 따라 결혼이 정해지던 당시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유 연애'를 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주장했던 여성이다. 근대 소설의 시발점이 된 이광수의 작품들이 '자유 연애'를 주장한 이유 역시, 근대적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과 의지의 문제를 이를 통해 풀어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은 당시 사회에서 아직 쉬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런 그녀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접근하는 지점도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그녀의 자부심처럼 세 번의 일본 유학을 하고, 진명과 이화 등 당시 신여성들이 다녔던 학교를 섭렵했던 그녀는 애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할 만큼, 뛰어난 외국어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 소설에 있어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광수가 찬탄할 정도로 뛰어난 문인이었다. 여성 백년사의 첫 테이프를 끊은 여성이라면, 아직 근대적 의식이 채 자리잡지 못한 조선 사회에서 희생된 여성으로서만이 아니라, 근대 소설가로서 그녀의 작품의 가치를 조금 더 조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여성 백년사가 한 면만이 부각된 것같아 아쉽다. 언젠가 교과서에 김명순이 실린다면, 그녀의 뛰어난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김명순을 제대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까. 





by meditator 2022. 11. 8. 20:44

지금의 젊은 세대는 모르겠지만, 기자 세대와 그 언저리 세대들이라면 누구나 '쥘 베른'의 작품을 한번쯤 접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꼭 원작은 아니다. 하다못해 고 고우영 화백이 그린 만화로도, 소년소녀 명작 전집의 축약본으로, 그게 아니면 성룡 주연의 영화로,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비롯하여, <해저 2만리>, <15소년 표류기>,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등의 작품을 만났다. 

 

 

그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 작품이라면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아닐까 싶다. 1873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영국의 '신사' 필리어스 포그가 프랑스 하인 장 파스파루투를 데리고 80일 동안 세계 일주를 떠난다는 내용이다. 영국 식민주의 시대, 그리고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증기기관차가 다니고, 기구가 막 세상에 등장하던 시절, 필리어스 포그는 이러한 '문명적 수단'을 활용하여 80일 만에 세계를 일주할 수 있다는 기사를 접하고 클럽 동료들과 내기를 건다.

클럽으로 가는 걸음 수를 정하고, 면도물 온도가 약간 맞지 않는다고 하인을 해고한 필리어스는 자신이 믿는 '과학적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배를 타고 프랑스로 건너가, 이탈리아로 기차를 타고, 다시 거기서 배를 타고 이집트로, 인도로, 그리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필리어스의 여정을 통해 작가 쥘 베른은 자신의 진보적인 세계관을 펼쳐낸다. 

 

 

21세기 버전 80일간의 세계 일주 
그간 고전을 21세기적 세계관에 맞춰 재해석해왔던 영국의 bbc가 <80일 간의 세계 일주>를 작품화했다. 우리에게는 가장 인기있었던 <닥터 후> 시리즈의 주인공이던 데이빗 테넌트가 전형적인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데이빗 테넌트 버전 <80일간의 세계일주>에는 어떤 현대적 해석이 들어가 있을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일행이 한 명 더 늘었다는 점이다. 클럽에서 필리어스의 관심을 끌었던, 80만에 세계 일주가 가능하다는 기사를 쓴 주인공, 애비게일이 합류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기사를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에비게일은 필리어스의 친구였던 아버지의 이름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을 딴 에비게일 픽스로 자신의 길을 떠난다.

또 한 사람 주목해야 할 사람은 흑인 배우 이브라힘 코마가 분한 하인 파스파르투이다. 흑인 루팡과 여성 홈즈가 새로이 해석되는 시대, <80일 간의 세계일주>는 프랑스 출신 하인 파르파르투를 흑인으로 설정한다.  당연히 유색인종 파르파르투는 그가 가는 곳곳마다 편견과 오해를 맞주하게 된다. 드라마는 이런 인종적 갈등을 서사의 씨줄로 삼는다. 싸움을 피해 필리어스 포그의 하인이 된 그는 사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보고 도망치듯 떠난 전세계를 떠돌던 이, 원작에서도 온갖 아력을 자랑하던 캐릭터의 업그레이 버전으로 그는 다양한 외국어 구사에, 도둑질까지 해결사이자, 트러블 메이커가 된다. 

2만 파운드를 내기를 걸고 떠난 필리어스, 하지만 그는 원작과 달리, 클럽만 오가는 '샌님'이었다. 심지어 오래 전 사랑하는 여인과 세계 일주를 떠나자 약속해놓고 그녀를 남겨둔 채 도망친 적이 있는 겁쟁이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받은 '시계탑 사진' 뒤의 'coward(겁쟁이)'라는 단어에 뒤늦은 출발을 한다. 

이처럼 드라마는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원작의 행로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리버풀조차 가보지 않은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와 에비게일, 파르파르투 백인 남성, 여성, 그리고 흑인 남성 세 사람의 성장 서사가 된다. 그리고 이들의 여정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진보적 시각을 설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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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과업이 된 세계일주 
'우물 안 개구리'같았던 필리어스 포그, 그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방문 중, 인도인 여주인에게 당당하게(?) 영국이 철도도 놓아주고 인도를 발전시켰다고 말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그가, 때로는 본의 아니게, 때로는 스스로의 의지로 가는 곳마다 여러 사건에 개입하며 그의 편협했던 의식을 변화시켜 나간다. 

인도에서 마치 '세포이 반란'과도 같은 상황에서, 그는 처음에는 무사히 기한 내에 다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였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탈영한 용병을 위해 그의 입장에 서서 변호를 아끼지 않는다. 프랑스로 가는 배 위, 처음 타본 배멀리에 구토를 하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던 그는 증기 기관차의 나무 벽을 떼서 태우며 무너져 가는 다리를 건너는 모험을 앞장서는 모험가로 거듭난다. 

특히 미국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처럼 백인우월주의자를 호송하는 흑인 보안관과 동행한 상황에서, 그는 백인이자 영국인으로서 그간 그가 가져온 신념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부딪친다. 무인도에 떨어지고, 감옥에 갇히고, 목숨이 경각에 이르는 상황을 겪으며 백인 부르조아 필리어스의 세계는 깨져간다. '겁쟁이'였던 그는 이제 하인과 그저 여자 기자였던 파스파르투와 에비게일을 기꺼이 '친구'라 부르는 진정한 '신사'로 성장해나간다. 

필리어스 포그가 백인 부르조아로서의 자기 세계에 갇혀 있었다면 에비게일이 넘어야 할 인생의 산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버지가 하던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약하던 그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지만 여전히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딸이었다. 아버지의 성대신 어머니의 성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향했지만 늘 그녀는 기사를 써서, 그 기사를 아버지가 기사화했는가에 목말랐다. 

하지만 영국 사교계에서 지탄받는 여성에게 사막에서 도움을 받고, 그녀를 통해 뛰어난 기자가 아닌 비겁한 협잡꾼인 아버지의 실체를 알게되며 에비게일의 세상은 무너진다. 이제 진짜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에비게일이라는 존재로 세상에 다시 첫 발을 내딛은 그녀, 필리어스 포그를 따르는 기자가 아니라, 때론 그와 파스파르투의 목숨을 구할 정도로 거침없는 모험의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혁명가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쳤던 파스파르투,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혁명가로 성장한 동생이었다. 그리고 다시 동생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파스파르투, 그는 늘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한 발 비껴선 채,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필리어스 포그의 하인으로 여행의 일원이 된 파스파르투는 위기와 모험을 함께 하지만 하인이라는, 혹은 유색인종으로서의 규정된 존재론적 고민으로 때론 필리어스를 위기로 빠뜨리기도 하고, 여행 자체가 중단될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알고보면 루팡 급의 파르파르투의 능력치는 늘 위기의 세 사람을 구해내며 하인이 아니라 친구가 된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만난 인종 갈등 상황에 자신을 내던지며 늘 도망치기만 하던 그가 비로소 도망자 파스파르투의 딜레마를 극복해 낸다. 



by meditator 2022. 11. 3. 20:40

지난 5월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새롭지 않았다.  이미  2018년 소니 픽처스가 개봉한 에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스페인 히스패닉 혼혈 소년 마일스 모랄레스를 주인공으로 '스파이더햄',  '스파이더 느와르' 등등 평행 세계의 '스파이더맨'들을 소환해 지구를 비롯한 '멀티버스'의 위기를 구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신선했던 설정, 하지만 '멀티버스' 속 히어로의 활약은 곧 <스파이더 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이르면 비록 원작의 설정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어쩐지 히어로물의 생명 연장을 위한 '멀티버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올해 아카데미상에서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라는 장황한 제목을 가진 영화가 '멀티버스'를 배경으로 한다 했을 때 기대치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여전히 서사적 콘텐츠로서 '멀티버스'의 가능성과 확장성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그것이 가능한 건 무엇보다 '모성'과 '가족'이라는 영화 자체가 가진 서사적 설득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영화의 시작은 영수증 더미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중년의 여인, 양자경, 아니 에블린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세대에게는 <예스 마담> 시리즈로, 그리고 <와호장룡>으로 익숙한 배우, 하지만 어느덧 그녀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시어머니 역할을 맡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 양자경이 이제는 미국으로 이민가 세탁소를 운영하며 찌들어 사는 여성이 되어 등장한다. 

위기의 세탁소, 위기의 에블린
하지만 왜 양자경이겠는가. 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한번 그들이 액션씬에 있어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와 <어벤져스> 시리즈의 루소 형제(앤서니& 조)이다. 그들은 미국살이 수십년에도 여전히 미국말이 서툴러 세탁소마저 압류 위기를 맞이한 에블린이란 인물을 매개로, 그녀의 평행우주 속 또 다른 에블린들을 소환하여 양자경이란 배우가 가진 무공의 연기력을 아낌없이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모처런 <예스 마담>이나 <와호장룡> 시절의 그녀를 보는 듯 예리한 그녀의 손매와 날렵한 발품새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반갑다.

또한 역시나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스위스 아미맨>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다니엘 관과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도 마이너하면서도 독특한, 하지만 결국은 따스한 감성의 코미디를 현실적인 중국인 이민 가정사를 배경으로 풀어낸다.  

 

 

영화는 제목의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각각 세 파트 이야기를 이끈다.  우선 everything을 통해 에블린이란 인물이 가진 모든 것, 하지만 그리하여 그녀가 그 나이가 되도록 가지지 못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에블린은 고국에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에드워드(키 호이 콴 분)을 따라 이역만리 미국으로 온다. 영화 속 '멀티버스'의 혼돈 속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 에블린의 기억을 통해 소환되듯, 그저 '사랑'만 믿고 온 미국에서의 생활은 낡고 먼지 투성이인 세탁소의 문을 열 때만 해도 '이 세탁기가 모두 우리꺼야'하면서 기뻐하던 부부는 이제 '이혼 신청서'를 들이밀어도 시선조차 마주치기 힘든 부부가 되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외면했던 아버지는 이제 늙고 병들어 그녀에게로 왔다. 그런 아버지에게 그녀는 번듯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 새해를 맞이하며 벌이는 파티에서 아버지를 환영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 무엇보다 그녀의 단 하나뿐인 딸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그리고 동성의 연인을 할아버지 앞에서 '아주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는 에블린에게 '절연'은 선포한다. 

언어가 능숙한 딸이 도와주기로 한 세무소 행, 당연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런데 남편이 이상하다.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어 이혼 서류를 들이밀어야 할 만큼 소심한 남편이 그녀에게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인다.  중년이 되어도 <구니스>와 <인디애나 존스; 미궁의 사원> 속 그 미소년의 얼굴을 지닌 키 호이 콴이 분한 에드워드가 펄펄 난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한다. 멀티버스 속 에블린의 남편 에드워드라고. 그리고 이제 에블린에게 '붕괴된 멀티버스'를 구할 임무를 부여한다. 

everywhere, 당장 오늘 안에 세금영수증을 제대로 정리해 내야하는데, 멀티버스에서 온 에드워드는 에블린을 자꾸 세무소 속 청소 정리실 안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인다.

 

 

왜 에블린이어야 할까? 
왜 에블린이어야 할까? 이게 바로 이 영화적 서사의 이른바 '킥'이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온 꿈의 세상, 하지만 에블린은 이제 파산 위기에, 번아웃 위기에 놓인 중년 여성일 뿐이다. 반면, 또 다른 멀티버스 속 에블린들은 전혀 다르다. ,<쿵푸 팬더>처럼 좋은 스승을 만나 쿵푸의 대가가 되어 있기도 하고, 에드워드를 따라가지 않는 대신 당대의 스타가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에블린을 찾아온 다른 세상의 에드워드는 말한다. 다른 멀티버스 속 에블린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는 이유가 바로 여기 에블린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해서라고. 마치 시이소 게임이라도 되는 듯이, 에블린의 불행한 삶이,  다른 에브린들의 행복이 되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에블린을 찾아온 에드워드 세상에 '조부투파카'가 웜홀 같은 걸 만들어 모든 멀티버스를 다 빨아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부투파카를 막을 사람은 바로 에블린 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조부투파카는 '왜곡되어버린 딸'  조이(스테파니 수 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민 세대 가족이 가지는 세대 간 소통과 세계관의 문제를 멀티버스와 악의 신이라는 설정으로 풀어낸다. 괴물이 되어 모든 것 집어삼키려는 딸, 그런데 딸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다신 보지 말자며 떠나려는 딸에게 엄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내뱉고 만다. '너 살쪘다'고. 이보다 더 모녀 관계의 애증을 대변할 대사가 있을까? 

아버지 앞에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딸, 그래서 아직도 그날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랑하는 이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림자'로 드리우고 있는 여성, '세탁기가 모두 우리 꺼야'라던 희망이 무색하게 가압류될 처지의 오래된 세탁소 카운터를 지키며 늙어가는 엄마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딸에게 퍼붓고 딸은 그 엄마의 열정을 감당하지 못해 '왜곡'되어 버리고 마는 질곡의 모며 관계, 결국 에블린 인생을 짖누르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멀티버스 속 '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에블린은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는 독특한, 하지만 아름다운 두 장면을 통해 어수선한 멀티버스 소동을 감동으로 이끈다. 기괴한 소시지 손가락을 지닌 멀티버스 속 세무소 직원(제이미 리 커티스 분)과 만난 에블린, 하지만 그들은 덜렁거리는 소시지가 무색하게 기꺼이 사랑을 나눈다. '이 아니면 잇몸'이듯이,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손가락이 소시지인게 무슨 문제겠냐는 영화는, 그래서 산 정상 위에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가 되어 버린 조이, 혹은 조부투파키와 에블린에게로 이끈다.

과연,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가 되어버린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 선택의 지렛대는 세상 무능한 남편이라는 에드워드가 세탁물 보따리에 달아놓은 장난감 눈알이다. 삶의 붕괴, 그리고 가족의 붕괴를 막는 무기는 사실 아주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것들이다. 그걸 알아보는 행운이 늘 도래하는 건 아니니 '멀티버스'가 붕괴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다행히도 용감한 엄마 에블린은 더 늦기 전에 그걸 알아보는 '미덕'을 지녔다. 알고보니 그녀는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by meditator 2022. 10. 15. 15:04

ebs다큐 프라임은 10월 10일부터 3부작으로 <게임에 진심인 편>을 방송한다. 그 중 1부, <내 장례식에 틀어줘>는 제목 그대로 한 노인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성당에서 진행된 경건한 장례식, 고인을 추모하며 그가 남긴 영상을 튼다. 그런데 눈물을 훔치던 경건한 분위기가 무색하게 고인이 열렬하게(?)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보여진다. 살아생전 고인이 가장 즐겨했던, 혹은 행복한 순간, 결국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행복한 모습에 함께 웃음을 짓는다. 

 

 
게임이란?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은 50여년동안 일보에 대해 글을 써온 미국 출신 평론가의 글 모음집이다. 일본에 대해 분석한 그의 글들 중 특히 주목을 끄는 건 일본 사람들이 즐겨하는 '파친코'에 대한 분석이다. 온통 시끄럽고 번쩍거리는 기계에 진심으로 매달려 파친코를 즐기는 사람들, 그는 그런 사람들의 '몰아'의 경지를 흡사 종교적 몰입이나 명상의 순간에 견준다. '제한적이고 동원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안전과 확실성에 대한 보장이 없던 자아가 이제 소외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면서 자아로부터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성가시고 불만에 찬 자아는 잠시 파친코 기계에 매달린 소외의 시간을 통해 정화된다는 것이다. 이 심오한 '오락'에 대한 분석, 하지만 그 '심오한 분석'은 이제 ebs 다큐프라임의 <게임의 진심인 편>으로 이어진다. 

다큐는 게임을 '뉴노멀'이라 단정짓는다. 한국인 10명 중 7명이 게임을 한다고 한다. 10대의 93%야 그렇다 치고, 40대의 80.4%가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아이템 구매율은 50대가 20대를 넘어섰단다. 허긴, 지하철에서 핸드폰에 열중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거의 반 정도의 비율이 '고스톱' 게임 삼매경이다. 한때는 지인은 핸드폰 게임에 빠져 눈이 나빠졌다고 토로하기 했다. 그저 아이들이나 하는 거라 치부했던 게임인데 '뉴노멀'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어느새 우리 일상 속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큐는 그런 현실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게임에 대해 무지하다고 질타한다. 중독이나 시간 낭비, 현실 도피이거나, 산업이나 신생 스포츠 장르로 치부하며 게임에 대해 제대로 알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부, <내 장례식에서 틀어줘>는 대표적인 게임케스터 전용준 씨가 '게임의 신'으로 등장, 8년차 게임 개발자이면서도 '겜알못(게임을 알지 못하는 자)'인 서태훈을 게임 속으로 끌어들인다. 1994년 최초의 mmorpg 게임 '바람의 나라'로 부터 시작하여 프린세스 메이커, 리그 오브 레전드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했던 게임 속 캐릭터가 되도록 만들어 '퀘스트(온라인 게임에서 이용자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해결해가며 '게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가간다. 

사람들이 게임을 가장 많이 하는 시간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 8시부터 10시 즈음이란다. 사람들이 즐겨하는 10개 게임의 시간을 더하면 인류가 지구에서 산 시간의 7배나 된단다. 즉 이제 게임은 '취미'를 넘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기에 다큐는 게임을 이해하는 건 곧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러기 위해 다큐가 제시한 게임의 기본 철학을 위해 요한 호이징하가 소환된다. 게임에 진심인 인간, 그 근저에는 호모 루덴스, 즉 놀이를 즐기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놀이가 아니다.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의 개발자 송재경은 게임에는 '숨겨진 원리'가 있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축구가 굳이 잘 쓸 수 있는 손이 아닌 발재간만으로 경기를 운영하듯, 게임은 현실에는 없는, 그런데 활동을 제한하는 '장애물'같은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이 장애물을 감수한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임에도 그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바로 이런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을 즐기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다큐는 짚는다. 

게임의 역사만큼 그 시간동안 명멸한 게임들이 많다. 스타크래프트가 열리는 곳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이 즐기는 게임으로 남았다. 게임의 생로병사, 그걸 '관장'하는 건, 결국 '플레이어', 프린세스메이커의 개발저 아카이 타카미는 그걸 '캐치볼'이라 정의한다. 플레이어의 능동적 개입, 개발자와 플레이어의 상호작용 과정(interaction), 더 나아가,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플레이 룰 아래서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게임을 펼쳐가는 과정은 결국 플레이어에 의해 게임이 실질적으로 창조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게임 세계 내에 나를 '위치'시키고 그곳에서 플레이를 하고 보상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돌아오는 '피드백', 그런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 그리고 마치 다른 존재가 된 듯 몰입의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로 게임을 설명할 수 있다고 다큐는 말한다. 

그런데 하고많은 것들 중에 왜 사람들은 게임을 하며 재미를 느끼는 것일까? '재미 이론'을 주장하는 미국의 게임 개발자 라프 코스터는 인간의 두뇌는 새로운 패턴 학습을 즐긴다고 말한다. 점프를 하고 공간을 뛰어넘고 목적지에 도달해내는 과정에서 기쁨과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꾸 죽어도 또 살아날 수 있는 , 게임이라는 특별한 공감 안에서 사람들은 '난이도'와 '숙련도'를 뛰어넘으며 노련하게 적을 사냥하고, 적을 무찌르며 기쁨을 느낀다. 또한 이제 이 과정은 '개인'만의 만족을 넘어 집단적인 상호작용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성취감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킨다. 

그러기에 다큐는 정의한다. 게임이란 가장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그러기에 사람들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도, 애써 더 재미있게 게임을 하기 위해 기꺼이 게임 속 '난관'에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변했다. 사람들은 현실보다 더욱 인간적인 활동, 게임'을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본능을 맘껏 발산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뮬레이션'된다. 안전하게 '인간 사회'를 경험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설사 실패를 한다해도, 몇 번이나 죽어도, 다시 몇 번이나 살아날 수 있듯이 '안전한 실패'를 누린다. 가장 인간적인, 하지만 무한 반복될 수있는 삶의 시뮬레이션, 굳이 이걸 마다할 이들이 있을까. 

by meditator 2022. 10. 11. 22:24

<텐트 밖은 유럽>이 9월 28일 9회차 8박 9일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 로마에서 마무리된 여정, <바퀴달린 집>의 강궁 피디가 요즘 인기를 끄는 캠핑의 장소를 '유럽'으로 바꿔놓았다.

 

 

말이 8박 9일이지, 시청자들이야 출연진의 여정에 따라 유유히 물 흐르듯 프로그램을 즐기면 그만이지만 출연자들은 인터라켄으로 부터 시작하여 그린델발트,  푸르카패스, 가르다, 피렌체, 토스카나, 로마에 이르기까지  1,484km의 긴 여정동안 날마다 텐트를 치고 짐을 풀고 싸고를 반복했다.

일찌기 철학자 들뢰즈는 특정한 삶의 가치와 사고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가며 사는 '노마드적 존재'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굳이 철학자의 이론을 들먹일 것도 없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어서 대륙을 건넌 인류의 궤적은 그대로 '노마디즘' 그 자체이다. 머물 수 없음, 혹은 머물지 않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캠핑'이란 '놀이'에 천착하는 건 그런 인간의 류적 본성을 확인하는 행위일지도. 그러기에 매일 매일 짐을 싸고 풀며 유럽의 종주한 <텐트 밖은 유럽>의 고달픈 여정이야말로참으로 '인간적'이다. 

 

 

토스카나를 걷다
피렌체에서 토스카나로 가는 여정, 일행은 차로 우선 캠핑장을 향했다. 하지만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서있는 풍경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다. 잠시 내려 광활한 언덕을 바라보며 걷던 일행, 결국 토스카나 캠핑장에서 다음 날 차 대신 걷기를 택하기로 결정한다. 

마치 사막을 걷듯, 끝없이 펼쳐진 토스카나 평원 위를 걸어가기 시작한 다음 날, 무릎이 좋지 않은 윤균상이 무릎 보호대까지 차며 시작한 길이지만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스위스에 도착한 이래 계속 일행을 시달리게 했던 유럽이 한낮 더위, 마치 우리의 늦여름 날씨처럼 그늘만 들어서면 시원하다지만 그늘마저 만나기 쉽지 않은 여정을 온전히 두 발로 걸어내야 하는 길이 만만치 않다. 

차를 타고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풍경, 하지만 막상 걷고 보니 타는 듯한 땡볕에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 하지만 그걸 두 발로 걸어내야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그 또한 우리 삶의 모습과 참 닮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걸로는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그래서 그 과정의 고통과 아픔을 다 감내해야만 그 뒤에 얻게 되는 삶의 결과들처럼 말이다. 온 얼굴에 수건을 싸매고 걸어내야 하는 행군, 처음엔 활기차던 이들이 하루 온종일을 걷고 보니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그래도 하루를 마치며 진선규는 말한다. 아마도 유럽에 다시 온다 해도, 다시 이 길을 걷게 되기는 쉽지 않을 거라며, 그래서 다시는 올 수 없는 시간이라고. 

 

 

여행도, 삶도 선택이다 
마지막 캠프 로마를 향해 떠나는 날, 일행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사다리 타기로 도시락을 싸고 떠난 길, 차를 타고 가다, 보이는 언덕 위의 도시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이들이 유해진이 싼 김밥을 먹겠다고 들른 곳은 '오르비에토', 광장 중앙에 고풍스런 성당이 자리잡은 중세 도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유명한 도시이다. 아기자기한 골목들 사이에 자리잡은 소품 가게, 거리의 상점들, 그곳을 관광객들이 누빈다. 

성벽을 돌고 돌아 올라가는 길, 벌써 도시가 풍기는 분위기가 남다르다. 하지만 일행은 아랑곳없이 도시락 먹을 곳을 찾느라 분주하다. 고원 위에 자리잡은 오르비에토에서 도시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뒤로하고, 도시락 먹기 좋은 장소를 찾은 일행은 맛있게, 그리고 아쉽게 유해진이 싼 김밥을 나눈다. 도시락을 먹고 나니 더운 유럽 날씨에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생각이 간절한, 하지만 유럽에는 '아아'가 없다. 김치에 물탄 거를 예를 들며 '에스프레소'의 원조로서 자부심을 애써 이해하려하며 일행은 커피집을 찾아 도시를 거닌다. 아기자기한 골목과 상점이 볼만하니 거기를 기웃대기도 하고, 그러다 광장에 자리잡은 거대한 성당을 마주하게 된다. 

오르비에토 성당은 13세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건물 내부와 외부 곳곳에 중세 시대에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 성당을 일행은 커피집을 찾으로 이리저리 헤매던 중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까지 가서 좋은 곳을 더 볼 생각을 안하고, 도시락 먹을 곳이나 찾으러 다니다니?

하지만 어디 오르비에토 뿐인가, 심지어 피렌체는 차장 밖으로 그 유명한 베키오 다리를 '주마간산' 식으로 보고 지나쳤다. 여정의 마지막 날 찾은 로마, 오르비에토에 들러 점심을 먹고 캠핑장에 도착해 밥도 해놓고 이러다 보니 로마를 구경할 여유가 많지 않다. 해지기 전에 캠핑장으로 돌아가려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 

아니 로마까지 가서 그러구 여행을 마무리짓나, 그렇다면 피렌체는? 아니 이들의 여정 곳곳에 알고보면 참 볼 것이 많았다. 스위스는 곳곳이 풍경이 예술이었고, 이탈리아는 발걸음 닿는 곳곳마다 유적지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보려 한다면 8박 9일 아니라 80박 90일이라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다. 

프로그램은 그 발걸음 닿는 곳곳이 다 유명 여행지인 곳들을 섭렵하지 않는다. 유명한 곳이지만 그 모든 걸 다 주워넣는 대신, 오르비에토처럼 우연히 만난 기쁨의 순간으로 남겨둔다. 유명하다고 해서 모든 곳을 다 가보는 대신 캠핑 본연의 취지에 집중한다. 물론 사이프로스 나무 사이를 기꺼이 걷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스위스의 호수에 몸을 담그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유명한 곳을 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8박 9일의 여정을 함께 보고 있노라면 그 어떤 여행보다 스위스와 이탈리아라는 공간에 흠뻑 젖어드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요즘 회자되는 유툽 동영상 중에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 교수의 대학 졸업식 축사가 있다. 남다른 이력을 자랑하는 그답게 그의 축사도 독특하다. 80년의 인생을 날로 치면 3만 일, 그 중 얼마나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은퇴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 듯한 병원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 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한다.

그의 말 속 인생의 정해진 듯한 여정은 마치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남들이 다 보고 간 그곳을 다시 따라가는 여행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의 말처럼 인생은 '변덕스러운 우연'이 모질게 구는 것이다.  답정너처럼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답정너에 매달려 삶을 소모하는 대신, 인생의 여정 끝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쉬움 없이 만나려면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건 <텐트 밖 유럽> 속 유해진, 진선규, 박지환, 윤균상 네 사람이 여행하듯 하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눈 앞의 봐야 할 것에 연연하는 대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러 가다 만나게 되는 오래된, 아름다운 성당처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온전한 경험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말이다. 

<바퀴달린 집>도 특별하지 않았다. 캠핑카를 타고 머물고, 지인들이 찾아와 함께 밥을 해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슴슴한 하루의 시간 속에 사람사는 지혜가 찾아졌었다. <텐트 밖은 유럽>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몸담은 호수와 땀 흘리며 걸은 길과 골목 사이에서 만난 풍경들, 그리고 그곳을 온전히 느끼는 일행들의 시간 속에서 여행의 묘미와, 인생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by meditator 2022. 10. 1. 0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