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아이들과 매달 책 한 권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도 학원에 가는 아이들에겐 '이야기 책' 한 권도 만리장성같다. 덕분에 겨우 앞에 몇 장이라도 들여다본 것이 감지덕지한 상황, 어쩐다, 찾아보니 동명의 영화가 있다. 책을 일고 토론해야 할 시간에 함께 본 영화, 나쁘지 않았다. 15세 관람가의 영국 영화는 가끔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민망'함을 배려한 듯 적절한 필터 처리가 되었고, 무엇보다 늘 6월이면 '전쟁'이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이벤트하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전쟁이란 것에 대해 청소년의 시선에서 진지하게 접근해 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던 것같다. (이 영화를 선정한 선생의 일방적인 시각만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맥 소로프의 베스트 셀러가 영화화된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는 맥 소로프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맥 소로프는 이 작품 <내가 사는 이유>가 그녀의 뒤늦은 데뷔작이자, 데뷔와 동시에 그녀를 미국, 독일, 영국의 상을 수상하게 만들고 '청소년 소설의 여왕'으로 등극케 한 작품이다. 그런 화려한 수상 실적과 함께 미국과 영국에서는 학교 도서실에 구비된 필독 도서이자, 이미 영화화되기 전에 드라마화된 바 있는 청소년 소설계의 베스트 셀러이다. 그러기에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이하 하우 아이 리브)>만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좀 더 재미있게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맥 소로프의 원작을 읽고 비교해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소설, 영화를 막론하고 이 두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든 첫 번째의 요인은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브루클린의 에일리스로 우리에게 알려진 시얼사 로넌이 분한 여주인공 엘리자벳(하지만 그녀는 극구 자신을 데이지라 불러달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데이지라 불러주자)의 캐릭터이다.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셋을 끼고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킨 15살의 데이지는 이제 막 아버지가 사는 미국을 떠나 이모가 사는 영국으로 온 이방인이다. 자신을 가리는 듯한 짙은 화장, 주렁주렁 매달린 귀걸이며 목걸이 팔찌가 버거워 보이는 마른 몸매, 그런데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녀게 웬만해서는 입에 음식을 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데이지에게 더 거부감을 주는 건 음식보다 사람인 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이들에게 '레이저'를 쏘며 '접근'을 거부한다. 

이런 소개만으로도 데이지가 대략 어떤 소녀일 것이라는 게 감지된다.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이유는 갖가지 병원 치료와 상담으로 아버지 돈 축내기, 아버지의 여자 열 받게 하기, 그리고 이제 새로 태어날 아버지와 그 여자 사이의 아이 저주하기. 그리고 그 부산물로 그녀가 얻은 건 '거식증'과 갖가기 알레르기, 자기 혐오 등등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이모에게 구원을 요청한 건지, 아니면 이모의 자발적 호응이었는지 이제 그녀는 영국에 와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맞이한 건 뜻밖에도 이제 우리에겐 스파이더 맨이라 하는게 더 익숙한 어린 톰 홀랜드가 분한 사촌 동생이다. 보기에도 분명히 열 다섯 그녀보다 어린 사촌 동생이 모는 트럭을 타고 구비구비 찾아간 이모네 집. 대책없는 데이지보다 어쩐지 더 대책없어 보이는 곳이다. 이미 데이지가 도착한 공항에서 부터 심상찮은 기색이 역력한 비상시국의 기운, 이모는 마치 그 '비상시국의 전위대'인 양 온통 해외 각국에서 쏟아져오는 전화 통화를 하고 국제 회의에 참여하느라 아이들을 미처 돌볼 사이가 없고, 그 사이 이모네 아이들은 심하게 자유롭게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하여튼 그런 대책없는 이모네 식구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사촌 에드워드(조지 맥케이, 얼마전 캡틴 판타스틱의 주인공 보 역을 맡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는 듯한 그가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 과정처럼 처음엔 거슬리고, 그 다음엔 다투고, 결국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무려 사촌이랑. 



전쟁에 휩쓸린 열 다섯 살 소녀의 사랑
하지만 이 사촌간의 비정상적 로맨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채 내리기도 전에 영화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소설 속 전쟁이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와 적의 경계가 모호한 채 영국의 시설들이 테러를 당하고, 마을들이 점령을 당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막연한' 전쟁이라면, 시각적 장치가 분명해야 할 영화는 그 설정은 세계 제 3차대전이자, 핵전쟁으로 명확하게 설정한다. 무엇보다, 이 전쟁이 무서운 것은 그 '적'이 '우리'와 구분되지 않은 그 누군가이며 내부로 부터 시작된 테러는 핵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을 휘쓸어 가고 사람들의 삶은 거기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테러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을 기초로 하여 내부의 그 적으로부터 시작된 3차 대전이라는 '전쟁'은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 나면 저렇게 될 것이라는 '학습' 효과를 작품은 철저하게 한다. 

그렇게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호자도 없이 전쟁에 휩쓸린 데이지와 이모네 아이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집이 징집되고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 '소개(적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된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킴'된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리고 이제 막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고 '가족'으로 섞여들기 시작한 아이들, 그 아이들은 '꼭 다시 만나자, 이곳에서'란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을 뒤로 하고 각각의 캠프로 떠난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는 커녕, 자신을 낳다 죽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애정 결핍으로 늘 '반항'을 삶의 모토로 살아왔던 데이지는 뜻하지 않게 에드워드의 어린 여동생까지 책임지는 건 물론,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전쟁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생존'이라는 임무까지 짊어지게 된다. 그들의 동네 친구가 적에 의해 무참히 사상되는 상황에서 데이지는 더 이상 자신들이 머무는 이곳이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침반 등 몇 가지를 챙긴 채 이모네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영화는 철저히 데이지란 소녀의 성장담에 집중한다. 3차 대전의 상황을 극적으로 구현한 핵이 터진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자신은 물론, 아홉 살 어린 사촌 동생까지 책임지며 살육과 기아가 점철된 행로를 용감하게 전진하여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되는 서사는 그 어떤 성장 소설보다 극적이다. 반면 소설로 가면 보다 다양한 인물군에 대한 재미가 더해진다. 영화에서는 데이지란 주인공을 위해 생략되거나 왜곡된 이모네 형제들의 캐릭터가 소설의 맛을 더한다. 그저 이모네 아이들이 아니라, 진보적 의식을 가진 엄마 밑에서 그리고 영국의 자연에서 동물과 교감하게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낸 아이들의 면면은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적인 청소년 상이다. 영화 속 데이지가 아홉 살 철부지에 대한 보호자란 극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면, 소설은 오히려 에드워드네 아이들이 가진 남다른 자연적 친화력이 데이지를 변화시키고 그녀를 끌어주는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하며,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성찰적 서사가 깊다. 

어쩌면 이제 우리의 십대들에겐 67년이 된 6.25전쟁 보다는 날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테러 사건이 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에겐 자신들이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는 게 미래의 입시와 정해진 삶의 스케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실에서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멀고, 일상은 쳇바퀴라도 마찬가지의 질풍노도 시기, 자신의 그 모든 푸념을 한참 부모에게 풀어댈 나이, 아이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며, 진지하게 살아가야 이유를 모색해 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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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23 15:17

시작은 고양이의 시선과 그 시선이 향한 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뜻하지 않은 강간을 당하고 만 미셸(이자벨 위페르 분)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해자 미셸은 자신을 피가 흐르는 자신을 돌보는 대신에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 떨어져 깨진 그릇을 먼저 치운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조용히 목욕으로 흔적을 지운다.




그녀가 강간을 당했다.
한 여인의 강간 사건, 하지만 영화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한때는 출판사를 경영했지만 시대적 트렌드에 맞춰 게임 회사 ceo가 된 여자, 그런 사회적 지위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덮게 만들었을까? 명망이 치뤄야 할, 그러기에 어쩌면 더 깊숙한 상처가 될 수 있을 것같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미셸을 따라가는데 뜻밖에도 패스트 푸드 점에서 그녀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녀에게 자신이 먹고 난 음식물 쓰레기를 쏟아 붓는다. 하지만 미셸은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강간 사건'으로 시작된 영화는 미셸이라는 인물의 가족사를 들추며 '인간 존재의 그 모호함'에 대한 질문으로 번져간다. 피해자였던 미셸은 그와는 반대로 게임 속 피해자인 여성에게 '오르가즘'의 절정을 보다 '자극적'으로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이웃에 이사온 잘 생긴 남의 남편을훔쳐보며 '자위'를 즐기는가 하면,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과는 '성적 파트너쉽'을 유지해왔다. 그러면서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무조건 적대적이고, 이혼한 남편의 여친에게 집적거린다. 자신의 강간 사실을 친지들에게 당당하게 밝히면서도 경찰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패스트푸드 점의 봉변은 알고보니 한 마을 가족과, 동물들을 몰살하다시피 한 그의 아버지의 범죄와 그의 조력자로 봉인된 10살 시절 사이코패스 딸이었던 미셸의 과거로 연결된다. 그 사건 가해자의 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아버지가 30년만에 가석방 신청을 하자 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가는 그녀, 하지만 이제 자신이 어렵게 일궈온 현실의 성취를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고 싶지 않다. 



쉽게 그녀의 편이 될 수 없는 그녀 
'편'이라는 개념이 익숙한 우리에게,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한때는 사이코패스 조력자였을 지도 모르며, 이제 그 과거로 부터 떨어져 나온 현재에서 게임의 판매에 눈이 벌개 성의 상품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녀 자신의 '성적' 태도 역시 그다지 '도덕적'이어 보이지 않는 그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이 미셸의 '강간'을 희석화시킨다. 그녀를 '피해자'의 편에 세워 두둔하자니, 미셸이 보이는 행태들 역시 '돌맞을 짓', 딜레마다. 

<엘르>는 노장 폴 베호벤 감독의 16번 째 영화이다. 그의 작품이 늘 '폭력'과 '섹스'라는 화두를 피하지 않고 '직진'해왔듯이 <엘르>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그가 등장시킨 주인공은 <포스맨(1983)>이래, <원초적 본능(1992)>, <블랙북(2006)>, <트릭(2012)>의 그의 전작 속 주인공들 처럼 쉽게 '우리'라 얼싸안기 쉽지 않은, 도덕적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 자신이 이미 어린 시절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호한 사건의 트라우마를 가진 존재, 그리고 이제 그 '과거'를 애써 지운 채 '냉혈한' 처럼 사업에 매진하며 그녀 스스로 도덕적이라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벌어진 범죄. 심지어 그 범죄자는 알고보니 그녀 자신이 '유혹'한 대상이며, 위기의 상황에서 종종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제공했던 인물. 과연 이런 부도덕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아왔던 그녀는, 그런 그녀를 보는 관객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결국 이러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고 서로 엇물리며 얽힌 사건들을 통해 폴 베호벤 감독은 부조리한 인간 세상에서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그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가 그 속셈과 결말이 뻔해보이는 재혼을 선택했을 때, 어머니를 죽이겠단 장담처럼 결국 동일한 결과를 맞이하고 만다. 모녀라는 형식적 경계에서 한 치도 넘어서지 않으려는 그녀를 도발이라도 하듯, 끝까지 재혼이라는 해프닝을 벌이며 그녀의 '부담'이었던 어머니, 하지만 그 어머니의 병실에서 조차 자신에게 딸로써 끝까지 한 치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냉정했다 힐난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되새기는 대신 원망과 tv에 집중했던 그녀는 이별 인사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어머니를 보내다. 장례식조차 그녀의 식대로. 



엘르를 통해 드러난 부조리한 가족사 혹은 인간사 
하지만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바램대로는 아니지만, 그토록 어머니가 원했던 아버지를 찾아간다. 30년만의 가석방에 실패한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침을 뱉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스스로 생을 버린다. 어머니를 잃고, 그리고 아버지를 잃고 그녀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웃집 남자 앞에서 사실은 과거 사건의 피해자였을 지도 모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을 때처럼.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지만 더는 '자위'로 혹은 '불륜'으로, 심지어 '도발'이나, '위악'으로 자신을 달래던 미셸의 삶을 지속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유골을 되는대로 뿌렸지만,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은, 이제 미셸 자신의 삶에 뜻하지 않은 '이정표'가 된다. 돈으로 남편을 산다 퍼부었지만, 결국 반추해보니 남자가 그리워 절친의 남친을, 이웃집 남편을, 그리고 강간범과의 정사를 허용했던 그녀의 삶 역시 그녀가 그리도 '거역'해왔던 부모 세대의 삶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비로소 그녀는 '과거'로 부터 자유로워진 대신, 어느덧 어머니가 되어 자식의 세대까지 책임져야 할 위치가 '아들의 욕'과 함께 절실하게 다가온다. 

언뜻 보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무표정하게 도발해 가는 미셸, 그러나 자신을 채워왔던 그 '부조리한 관계'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간다. 게임 성공 축하 파티에서 절친에게 그녀 남편의 섹스 파트너가 자기였음을 고백하는 방식으로. 

과거 아버지 사건 이후, 자신을 세상 속에 10살 짜리 사이코패스로 던져준 이래 미셸은 '법'의 도움을 거부했다. 그들은 늘 자신의 진실에 귀기울여 준 대신, 자신들의 편의 대로 그녀를 요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가 부른 건, '법의 도움'이 아니라, 어쩌면 30년만에 '법'에 대한 복수이자, 또 다른 결자해지일 지도.  진실 대신 '이슈'를 원한 법에게 가장 적절한 먹이를 공급하며. 

아버지 때처럼 똑같이 머리가 일그러져서 죽어나간 그녀의 강간범, 그는 그녀를 '사랑'으로 기억하고 싶었지만, 미셸은 그의 '강간'을 용인할 수 없다.  자신이 친구 앞에 불륜을 고백하듯, 그런, 하지만 보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의 '범죄'를 '처단'한다. '법'의 도움 없이 살아온 그녀만의 '재판'이요, '판결'이며, 범법자의 처리이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의 도움을 빈, 당시 그녀를 기만했던 법을 '기만'한 복수이다. 열 살 사이코패스로 세상에 던져서 그 누구의 도움없이, 그러나 세상 속에 번듯하게 한 자리 차지하며 견뎌냈던 미셸 식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부조리한 현대사의 '극단적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30년전 아버지와 그녀가 그 사건으로 내내 꽁꽁 묶여있듯이 이제 그녀는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아들을 그렇게 자신의 곁에 묶는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젖'을 양보했던, 그래서 늘 '가정'을 그리워하던 아들에게 '가장'의 지위를 '선물'하며 남보다도 못한 모자 관계를 청산한다. 얼굴 색이 다른 아기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며느리, 그리고 번듯한 차와 그럴듯한 직업적 전망, 그리고 미셸의 커다란 집, 그리고 이제 피를 나눈 어머니와 아들은 그에 더해 '피의 공모자'로 거듭난다. 무위도식하며 어머니의 재산에 기대어 철부지였던 아들이 받아든 '가장'이라는 혹은 '아버지'라는 선물의 댓가는 10살 시절 그녀가 그랬듯이 가혹하다. 10살 무렵 미셸은 아버지가 저지른 종교라는 이름의 범죄 공모자가 되었고, 이제 아들은 미셸이 재단한 성범죄의 공모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가혹한 가족사'의 승계자로 '죄책감'을 짊어지고, 그렇게 미셸 일가의 잔혹한 역사는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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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22 18:23



남자들은 일찌기 길을 떠났다. 아재들은 뭉쳐서, 혹은 따로 또같이, '욜로'니, '싱글 라이프'니, '오지 여행'이니 주어진 돈을 가지고든, 아니면 벌어서든, 때론 묻고 따지지도 않고 패키지로든 갖가지 명목을 갖춰 떠났었다. 리모컨의 향배를 쥐고 있는 것이 여성들이기에 그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 tv 예능은 '남자들' 판이었다. 혼자도 떠나고, 홀로도 떠나고 이젠 더 떠날 사람이 없을까 싶은데, <싱글 와이프>가 등장했다. 아내들이 나선다. 이젠 우리들 차례라고. 그렇게 6월 21일 아내들이 길을 떠난다. 




아내들 휴가를 떠나다
결혼 후 가사와 육아에 매진하느라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린 아내들, 그녀들에게 남편들이 '방송을 빙자해서', 휴가를 주는 것으로 프로그램은 시작된다. 아니 그 전에 아내들의 이야기가, 왜 아내들에게 '휴가'가 주어져야 하는지 '당위성'의 인터뷰가 먼저다.

남희석의 잘 나가는 치과 의사 아내로 유명한 이경민, 하지만 서울대 출신의 그 돈 잘 번다는 직업 여성이자 아내, 그리고 엄마인 이경민의 삶은 어쩐지 측은하다. 일찌기 우수한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던 그 학창 시절처럼, 이경민씨는 대학을 졸업하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단다. 더구나 기복있는 연예계 생활을 하던 남편 덕에 '가장'의 무게까지 짊어진 그녀는 둘째를 낳는 그 날 저녁까지 일을 하고 낳은 후에도 몸조리라는 걸 해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마흔이 될 무렵 지하철에서 쓰러진 후, '고갈'된 에너지에 눈물을 달고 살았지만 출근 때마다 '파이팅'을 외치는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한번 없이 그 세월을 그런 거려니 하고 살아왔다. 

남희석이라는 남편의 이름을 지우고, 치과 의사라는 전문 직업인을 지워버린 이경민 씨의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나라의 대다수 일을 하고 가정을 꾸려가는 여성들의 공통된 경험일 것이다. 힘들고 지치지만 자신이 아니면 안될 것같은 가정과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칠 수 없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오늘도 삶에 자신을 밀어넣는. 오늘의 젊은 여성들 중 상당수가 결혼을 미루거나 기꺼이 비혼을 선택하는 세태에는 결국 여전히 우리 어머니 세대와 다르다지만 다르지 않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잔혹사'가 전제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여행 프로그램인가 했던 <싱글 와이프>는 그렇게 아내로, 엄마로 살아오느라 자신을 돌볼 사이가 없던 이경민 씨를 비롯한 장채희, 전혜진, 정재은 씨의 인터뷰를 통해, 여행의 당위, 아니 엄마와 아내로 어쩌면 이제 '번아웃'이 된 그녀들의 '휴식'에 대한 공감으로 프로그램을 펼쳐나간다. 



그렇게 당위를 설득한 그녀들의 여행은 그래도 명색이 남편들이 보내주는 것으로 구색을 맞춘다. 아내에게 휴가를 주기 위해 짐을 싸주는 남편들, 그 '구색'의 장면은 하지만 뜻밖에도 아내를 홀로 보내는 남편들의 '강짜섞인' 노심초사도 빠질 수 없지만, 결정적인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늘 '아내의 수발'에 익숙한 남편들, 그러나 정작 아내의 여행 가방을 싸주려 하자, 아내의 물건, 그리고 아내의 라이프 스타일, 결국 아내의 삶에 대한 '무지'로 귀결된다. 동반자라며 살아오지만, 정작 아내의 휴가 짐조차 꾸리는데 쩔쩔 매는 남편들, 그들은 토를 달 것도 없이 '한국 남자들'이다. 

아내들의  '일탈기' 아니, 그녀들의 '인간성 회복기'
그렇게 무엇을 싸놨는지조차 모르는 무게만 잔뜩 나가는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는 그녀들, 그런데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부재를 걱정하고, 울먹이는 아이를 챙기던 아내들이, 집을 나선 순간부터 표정이 달라진다. 집에서는 볼 수 없던 표정의 아내, 5분 단위로 일정을 체크하던 아내는 이경민씨는 아이의 1교시가 끝날 무렵 맥주 한 캔을 비웠고, 아침 8시 아이를 깨우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집안 일로 하루가 지던 전혜진 씨는 '비글'같은 쾌활함을 발산한다. 

<싱글 라이프>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며 선언한다. 그저 남편들이 보내주는 아내들의 여행에서 머무르지 않고 일주일에 하루, 아내도, 엄마도 아닌 자기 자신 본연의 삶을 주는 '아내day'를 지향한다고.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의 목적은 아내와 엄마의 삶에 여유가 없던 그녀들이 가족을 벗어난 그 짧은 여행에서 보여준 밝은 미소와 웃음만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싱글 와이프>는 <미운 우리 새끼>의 또 다른 버전과도 같은 프로그램이다. 장가를 못간, 아니 이제 어쩌면 갈 수 없을 지도 모를 아니 지긋한 노총각 아들들의 싱글 라이프를 그들의 어머니가 지켜보며, 깨달음과 발견, 심지어 경이와 경악을 오가며 '예능적 재미'를 뽑아내던 그 방식을 고스란히 끌어온다. 아내와 엄마로서 주어진 삶에 틀에 맞춰 가던 그녀들이 그 '규격화된 삶'의 틀에서 벗어낫을 때 느끼는 해방감, 일탈이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보며 노총각들의 어머니들이 느끼는 놀라움과 깨달음의 몫은 스튜디오에 남겨진 남편들의 몫이다. 그들은 아내들의 짐을 싸서 여행을 보냈지만 그녀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저 프로그램 당일 아내의 '내가 너무 미친x같을 거란' 걱정을 등에 짊어지고 그 어머니들처럼 '내 꺼'인 줄 알았던 그녀들이 사실은 '내 꺼'라기엔 너무도 자유로울 수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이라는 깨닫고 놀랄 시간만이 남을 뿐.



첫 방송의 <싱글 라이프>는 이미 너무도 알려져 더 무엇을 보여줄 것이 있을까 싶은 모범생 이경민 씨의 반전 여행으로 부터 시작하여, 다소곳하고 순정의 여성상으로 기억되는 전혜진 씨의 익스트림 휴가를 넘어 이미 <라디오 스타>를 통해 방송 출연 전부터 유명세를 탔던 정재은 씨의 '블록버스터'급 일본 여행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래도 어쩌면 그저 아내들의 일탈 여행으로 마무리 될 뻔한 여행은 그저 비행기 타고 지하철 갈아타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흥건하게 만든 정재은 씨의 일본 도착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출발 전부터 핸드폰 밧데리의 사용법조차 몰라 남편을 한숨쉬게 했던 정재은 씨, 그 남편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 도착에서 부터 숙소에 이르기까지 '사고'의 연발이다. 남편이 가르쳐 준 핸드폰의 번역기는 일찌기 '안드로메다'행이고, 익숙한 우리 말로 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길을 묻는다. 지하철을 한번에 제대로 타는 일도 없다. 거기에 남편이 싸준 가방은 어찌나 무겁고, 가는 길 곳곳에 계단은 그리 많은지. 하지만 그저 눈물겨운 일본 도착기를 감동 스토리로 만든 건 정재은 씨 본인이다. 

결국 도착과 함께 눈물이 터져버리고야 만 정재은 씨, 보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너무 고생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아니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그 순간, 순간 기적처럼 자신을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동이었다. 남편의 타박에도, 길을 잘못 가르쳐준 일행에게도 늘 웃음과 긍정을 발사하던 그녀가 보여준 반전 매력, 그것이 <싱글 라이프>를 그저 아내들의 일탈기 이상 매력적인 인간 탐사기로 기대를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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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22 15:44

1인 미디어의 시대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독립 출판', 기존의 '상업적 목적'을 벗어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는 나만의 콘텐츠 창작 역시 2,30대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문화적 트렌드이다. 그리고 그 '트렌드'을 발빠르게 '예능'이 담아낸다. 바로 지난 6월 6일부터 새로인 선보인 kbs2의 예능 <냄비 받침>이다. 


제목부터 역설적 의욕이 넘친다. 흔히 보지 않는 책의 효용이 '냄비 받침'으로의 전락을 빗대어, 야심차게 '냄비 받침'이 되지 않을 '출판 콘텐츠'를 '예능'의 그릇에 담겠다는 의도다. 그리고 그 '냄비 받침'이 되지 않을 '출판'의 당사자로 이경규, 안재욱, 김희철, 트와이스, 이용대가 등장했다. 



독립 출판 예능이 되다 
이미 유승민이 등장하기 전부터 '낙선 정치인'에 대한 책을 쓰겠다는 포부만으로 홍준표 후보의 등장 여부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던 <냄비 받침>은 이미 방영 초반 뜨거운 '신고식'을 치뤘다. 그리고 이제 유승민 의원을 시작으로 이경규가 원하던 바 '낙선 정치인'에 대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경규가 '큰 그림'을 그리는 사이, 애기 아빠가 된 이용대는 '육아 일기'를, 애주가 안재욱은 전국의 '건배사' 모음집을, 그리고 이젠 '삼촌'이 된 김희철은 그의 사심 가득한 '걸그룹 입문기'를, 트와이스는 20대 초반답게 '신상 탐험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채운 책이 0번에서 시작해서 900번대 까지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아우르듯 '책을 매개로 한 예능 <냄비 받침> 역시 펼쳐논 포석이 야무지다. 출연자 각자의 개성과 기획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선 <마이 리틀 텔레비젼>이 연상된다. 특히 이경규에서 안재욱, 이용대, 김희철, 트와이스 등 출연자의 면면을 보면, <냄비 받침>을 통해 전 연령대를 아우르겠다는 의도 역시 다분히 노골적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들고 나온 콘텐츠 역시 50대 이상의 '정치', 40대의 '술 자리', 30대의 '가정'과 '취미', 그리고 20대의 '신상'처럼, 연령 별 선호 품목을 정확히 주목하고 있다. 이런 것은 최근 프로그램 전체가 아니라, 짤막한 동영상으로 '소모'되고 있는 예능의 트렌드에 맞춘 절묘한 기획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절묘한 기획'이 정작 '본방'의 <냄비 받침>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마이 리틀 텔레비젼>은 한 공간에 모여든 여러 스튜디오 각각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진 다양한 콘텐츠들의 반응에 따른 '경연'이란 점이 이 이질적 콘텐츠들의 '어색한 조합'을 무마시켰다. 하지만, 막상 이제 3회를 맞이한 <냄비 받침>은 그런 세대별 전혀 다른 관심사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적절하게 수용하고 있는가란 질문에 물음표가 뒤따른다. 

시끌벅적한 화제를 이끌고 이경규의 낙선 정치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첫 테이프를 끊은 건 대선 과정에서 비록 낮은 지지율을 보였지만, 그 사람이 여당이라 안타까웠다는 유승민 바른 정당 후보다. 

'정치 과정'으로서 '목적 의식적' 방송이 아닌 예능에, 이제 자연인으로 등장한 유승민 전 의원은 자신의 방송 출연만큼이나 이경규를 실제로 맞이한다는 사실을 신기해 하며 방송은 시작되었다. 역시나 노련한 이경규는 틀에 박힌 질문의 행간 너머로 곧 유승민이란 인물이 그간 선거 과정을 통해 '홍보성'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예리하게 살펴간다. 뿐만 아니라, 유시민의 지적처럼 이제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처지의 유승민 의원은 선거 과정 이면의 뒷담화 역시 허심탄회하게 전해주어 '정치적 목적'없는 정치인의 소탈한 모습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유승민 의원에 대한 인터뷰가 무르익을 무렵, 방송은 느닷없이 트와이스의 합숙소로 시선을 돌린다. 유승민과 이경규, 두 사람의 이야기에 몰입할 만하니, 갑자기 젊은 걸그룹이 단체로 나와 '신상' 체험기를 벌인다. 그게 또 저런 건가 보다 하고 보려니, 김희철이 등장해서 '아이돌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난리다. 그런데 그 책을 쓰는 방식이 방송국 앞 까페에 앉아서 매니저들에게 읍소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과연 이수만 사장님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그가, '잔혹사'에 가까운 아이돌의 역사를 제대로 서술할 수 있을까?싶은데, 이젠 또 아니라 그러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그룹 숙소를 찾아 '걸그룹 입문기'를 쓰겠단다. 그러더니 마무리는 안재욱이 등장하여 이경구가 함께 했던 대선 기간 '마크맨' 기자들과의 '건배사'로 마무리한다. 



한 지붕 어색한 여러 가족 
패널들 각자가 하고자 하는 '출판'의 기획은 참신했다. 논란이 되었지만 유승민 의원이 보인 소탈한 모습을 통해 '정치'적 목적에서 한결 자유로워진 그들의 후일담이 충분한 들을 거리가 되었다. 젊은 트와이스의 신상 탐험기도 괜찮았고, 시행 착오를 했지만 요즘 걸그룹 입문기를 빙자한 걸그룹 함께 하기도 '걸그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환호'할만한 소재다. '건배사' 혹은 술자리를 통해 엿보는 우리 시대 사람 사는 이야기도 그 자체로 충분히 다가갈 만 하다. 

문제는 이들을 한 시간 여의 예능에 쑤셔 넣었다는 지점이다. 진득하게 이경규의 인터뷰에 집중을 하던가, 걸그룹의 시끌벅적한 리얼 예능을 하던가, 술자리를 빌어 살펴 본 일반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던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인다. 

이런 공중파 예능의 모아놓고 하나만 반응 있어라는 식의 '백화점식' 혹은 '편집식' 구성은 이제 새로울 것이 없다. 공중파에서 예능이라면 대부분 이런 방식을 택한다. 여러 '노총각'들을 모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미운 우리 새끼>부터, 싱글들의 <나혼자 산다> 등 다 이런 식이다. 이는 '시즌제'가 아닌 '영원'을 지향하는 공중파 예능의 숙명이라 할 수도 있다. 또한 담론과 화두, 혹은 주제 의식이 없는 이른바 '영혼없는 예능'의 한계이기도 하다. 왜 우리에게는 나영석이 없는가라는 고민을 하기 전에, 왜 우리는 '예능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없는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니 맨날 새로운 예능이라면서 결국은 트렌디한 아이템을 내걸고 결국 하는 건 뻔한 예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톤'과 베이스'의 적정선이 있다. 그런 면에서 <냄비 받침>은 스스로 본방 사수 하는 이들에게 '리모컨'을 쥐어 주는 셈이다. 유승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은 트와이스의 시끌벅적한 신상 탐험기가 어이없고, 걸그룹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정치니 건배사니는 생뚱맞다. 과연 이런 콘텐츠의 상충되는 면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지, 차라리 이럴 바에는 <냄비 받침> 내의 시즌제를 하던가, 모처럼 신선한 콘텐츠로 등장한 '독립 출판'이라는 아이디어가 잘 안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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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21 15:04

정권이 바뀌고 기대되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그 중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이미 경기도를 비롯하여 그간 수능 체제에서 '기득권' 세력이 되고만 '외고, 자사고' 체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바 있다. '외고, 자사고'를 없애고 기존의 '일반고' 체제로 돌아가면 우리 교육의 악순환이 해결될까? 과연 '일반고'를 보내던 학부모들이 '유치원' 시절부터 아이를 조련하며 기를 쓰고 '특별한 과정'에 끼워넣으려 애썼을까? 이런 부모들의 '욕구'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면 새로운 교육적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란 '교육학자'의 섣부른 지적이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거기에 4차 산업 혁명이 우리를 휘감아 도는 세상에서 과연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그 답을 '예능'이 먼저 구한다. 바로 지난 5월 18일 시작된 tvn의 <수업을 바꿔라>가 그것이다. 


첫 회 핀란드를 시작으로, 4회 스웨덴까지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자타공인' 선망의 대상인 북유럽 교육을 살펴보았다. '가만히', '조용히'가 일상화된 우리 학교와 달리, '학생들의 동선을 최대화'하는 것이 목표인 '움직이는 학교'는 그 자체로 '교육적 충격'이었다. '숲'이 곧 학교가 되는 스웨덴의 신개념 통합 프로젝트나, 보기엔 공장같은 네모난 상자 건물 속에서 무한하게 펼쳐지는 창의력 개발 수업 역시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이미 '북유럽'으로 교육 이민을 떠날 만큼, 그리고 이미 북유럽 식의 '숲'학교 모델이 우리 대안 교육에 도입될 만큼, 핀란드와 스웨덴의 교육은 '선진 교육'의 롤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수업을 바꿔라>는 그런 북유럽 교육의 '신선함'을 학부모인 패널들의 공감 십분 활용하며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했다. 특히 학부모인 이적의 현장 실습은 그 공감을 극대화하는데 적절했다. 



이제 5회, 프로그램은 북유럽에서 '미국'으로 방향을 튼다. 일찌기 '교육'을 위한 이산가족의 단초가 되었던 곳, 유학의 대명사였던 미국의 교육은 이제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그런데 5회에 소개된 학교는 하고많은 미국의 학교 중에 '실리콘 밸리'의 <모건힐 차터 스쿨>이었다. 패널로 등장한 타일러의 소개에 따르면 '학부모, 교사, 지역 단체'들이 함께 위원회를 결성하여 만든 일종의 '대안 교육' 학교이다. '주 정부'의 경제적 지원은 받지만 교육 과정은 온전히 '학교 재량'에 맡기는 학교, 그 중에서도 '실리콘 밸리' 학부모들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 해야 하는 <모건힐 차터 스쿨>은 아마도 4차 산업 혁명을 맞이할 '미래 교육'의 현장 답사 성격을 띠고 있다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미국의 앞서가는 대안 교육'은 무엇을 가르칠까? 놀랍게도 <모건힐 차터 스쿨>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미국 편 게스트로 등장한 성동일, 그리고 이미 <아빠 어디가>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그의 아들 성준이 하루 동안 참여한 <모건힐 차터 스쿨>은 21세기 교육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보여주는 시금석과도 같았다. 

21세기 교육의 시금석
아빠의 걱정과 새로운 환경, 친구들과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부담에 가방조차 내려놓을 생각조차 잠시 잊었던 성준이 맞이한 첫 수업은 여러나라의 지폐를 가지고 '연구'하는 프로젝트 수업이었다. 

우선 이 학교 수업의 놀라운 점을 발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우리나라 5학년 수업에 이런 교육 과정을 맛본 적이 없는 외국의 학생이 참여한다면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이미 초등 4학년만 되도, 학교 교육 과정에 조금의 '지체'가 생기면 '공부'를 포기하는 아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한 우리의 교육 과정에서 다짜고짜 5학년 수업 참관이라니, 하루 종일 눈만 껌벅거리다 하교를 하고 말 일이다. 그건 그저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5학년 교과 과정은 어른이 그 과정에 해당하는 문제집을 봐도 풀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낯선 학교, 낯선 환경, 낯선 친구들을 만난 성준의 첫 수업은? 놀랍게도 성공적이었다. 선생님은 여러 나라의 지폐를 나누어주고 지폐를 살펴보라고 주문한다. 어느 나라 지폐인지 조차 모르고 마치 예술 작품을 보듯 가까이도, 멀리도 살펴보기 시작한 학생들. 

과연 이 '지폐 수업'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선생님이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은 뜻밖에도 '생각하기'였다. 우리 시대의 대부분 지식들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검색'하면 나오는 지식을 굳이 학교에서 되풀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학교의 지론. 그래서 선생님은 이방의 지폐를 통해 '사고'하는 힘을 키워주려 한다. 각자 모둠에서 지폐를 통해 알아낸 것을 적어보고, 그 다음에야 노트북을 열고, '검색'을 하여 어느 나라 지폐인지, 얼마짜린지, 그리고 지폐 속 인물과 그림들은 무슨 의미인지 스스로 알아간다. 그리고 선생님이 제시한 환율을 계산하여, 미국 달러와 비교한 이 지폐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보고서로 작성한다.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니 '경제적'인 가치를 '돈'을 통해 배우게 하려나보다는 mc 김성주의 예측은 보기 좋게 무산되고, 이제 실리콘 밸리의 학교는 더 이상 '검색'을 통해 배우는 지식이 아닌 '생각하는 힘'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하는 힘은 '배경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방의 친구 성준 역시 거뜬히, 심지어 우수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토록 애닳아 하는 '창의력'과 '사고력'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점심 식사 후 수준을 맞춰 들어간 2학년 코딩 수업, 코딩(하나 이상의 관련된 추상 알고리즘을 특정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용해 구체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기술)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의 걱정과 달리, 친구와 선생님의 도움으로 성준은 곧 '코딩'로봇을 자신이 만든 선위를 달리게 할 수 있었다. 우리 학제에서 '코딩'을 가르쳐야 한다는 논의 조차 전체적인 공론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모건힐 차터 스쿨>의 아이들은 스스로 코딩한 로봇을 자신이 입력한 값에 의거한 선 위로 작동하는 수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수업에서 놀라운 것은 초등 2학년 아이들이 '코딩'을 할 줄 안다는 '첨단 기술'의 습득 여부가 아니었다. 각자 만들던 코딩 로봇과 그 로봇이 달리던 선, 그 선들이 수업의 마지막 반 전체 아이들의 공동 작품이 되어, 카운트 다운과 함께 완결된 하나의 동심원으로 작동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공동 작품의 마무리에 선생님이 한 말이다. '코딩'을 잘 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즈니 랜드'도, 학교도, 그 모든 것들이 서로 함께 힘을 모아 오랜 시간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며 수업을 닫았다. 기술이 아니라, '모두 함께, 그리고 오랜 시간 노력'에 방점이 찍힌 수업은 그 어떤 '지식'과 '기술'의 전수보다 감동적이다. 

아마도 <모건힐 차터 스쿨>의 의도대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라면 '생각하며 자신의 앞에 닥친 문제'를 풀어가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며, 그리고 그 과정을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다. 이제 4차 산업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힘은 바로 이런 '새로운 교육, 하지만 기본에 방점이 찍힌 교육'으로 비롯되고 있는 것이란 실감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다. 


성준을 통해 드러난 우리, 우리 교육
하지만 이런 교육 과정에의 감동과 달리, 이 프로그램을 끌어가는 진행 방식, 아니 근본적으로 선진 교육 과정을 답사하는 '기특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여전한 한국적 교육관으로 인해 낯부끄러워 졌다. 

핀란드와 스웨덴에 학부모인 이적이 간 것과 달리,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하루 동안의 학교 생활을 거뜬히 수행해낸 성준은 기특하고 대견했다. 하지만 그 기특하고 대견한 성준을 바라보는 프로그램의 시선은 어쩐지 불편했다. 아니 불편했다기 보다는 우리 교육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해야 할까. 

우리의 학교 교실이 벌써 초등학교만 되도 안경 쓴 친구들이 상당수인 것과 달리, <모건힐 차터 스쿨>에서 성준을 만나 친구들은 안경쓴 친구들이 없었다. 심지어 그중에 성준이 가장 똑똑했다. 아이들은 '간디'가 누군지도 몰랐고, 우리 지폐의 이황에 대해 잘못 검색하여 이상한 외국 래퍼를 이황이라 검색했다. 심지어 5학년인데도 성준이 소수점 곱하기에서 자리수를 쉽게 옮기는 것에 대해 경이롭게 여기기까지 했다. 

정작 <모건힐 차터 스쿨>을 통해 검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지식의 무용함, 그리고 사고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프로그램이 성준에게 가서는 성준이 그 아이들보다 많은 지식이 있는 것, 책벌레라는 것, 더 수학을 잘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과연 <모건힐 차터 스쿨>까지 가서 이게 자부심을 가질 일일까? 오히려 그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무지할 동안, 유창한 영어에, 많은 지식과 능숙한 수학적 능력을 가지기 까지 성준이란 아이가 '공부'에 매진했어야 하는 시간에 대해 '반성'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프로그램은 그저 여전히 우리 식으로 아이고 우리 애가 더 똑똑하네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런 '한국적'방식은 <모건힐 차터 스쿨> 아이들을 데리고 '한류' 자랑을 하는 지점에 이르면 낯이 부끄러워진다. 마치 우리나라에 내한한 외국 배우에게 꼭 빠지지 않고 김치를 아느냐, 한류를 아느냐고 묻듯이, 새로운 교육관을 배우러 간 그곳에서 한국의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학생과 방탄 소년단의 영상 통화까지 성공시키고야 만다. 배우러 간 곳에서 내 자식 잘 났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명함 내보이듯 한 자랑 하고야 마는 그 '관행'을 보며 과연 이 새로운 교육 역시 '인간다운' 방향보다는 또 하나의 선진 문물의 습득에의 '갈구'가 아닐까란 회의가 드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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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17 05:47

영화는 현란하고 신선한 액션신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의 시각에서 맞닦뜨려지는 살육에 가까운 대결 장면은 분명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씬임에 분명하지만, 그 시선을 달리하며 '감탄'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동시에,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홀로 저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 것일까란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그 의문은 쉬이 풀려지지 않는다. 거의 '자살 테러'에 가까운 살육을 벌였던 주인공은, 알고보니 여자였고, 그녀는 그 살육의 마지막 거구의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그를 이용해 그 건물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오지만, 그녀를 기다린 건 포위망을 좁힌 경찰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생사 여탈권을 가진 '십자가'로 자신을 위장한 국가기관은 그녀에게 생명과 봉사를 딜한다. 그리고 그녀는 애초에 살육의 현장에 자신을 내던진 채 들어갔던 그 마음 그대로 자신을 내던지지만, 뜻밖의 생명이 그녀를 구한다. 악녀의 주인공 숙희(김옥빈 분)은 그렇게 삶을 유지한다. 



대단한 볼거리, 그러나 알고보면 비극적 순애보? 
영화 속 액션씬은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살육의 현장에 뛰어든 주인공의 시선을 시점으로 벌어지는 액션씬에서, 그리고 이후 국가기관의 훈련 과정과 테스트 과정에서 숙희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것을 숙희의 '무림 고수' 수준의 액션 스킬의 개연성으로 설득해 낸다. 독방에 갇힌 그녀의 마취는 중상과의 훈련과정에서 보인 잠수 능력으로, 역시나 훈련 과정에서부터 적과의 대결 과정에서 단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준비된 킬러로서의 자세는 역시나 중상(신하균 분)으로부터의 배움이다. 영화는 그렇게 숙희의 존재를 그녀의 과거로 설명하고, 그 과거는 동시에 그녀의 아픔이자, 사랑이요, 파국에 대한 복선으로 작동한다. 결혼식에서 단 한 방의 주저함이 있기 전까지 한번도 혼돈스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던 킬러 숙희의 모습은 <악녀>라는 영화의 볼거리와 캐릭터의 개연성을 설명한다. 영화의 외연은 액션이지만, 실제 영화를 끌어가는건 숙희라는 여성의 비극적 순애보이다. 그게 단지 아버지, 중상, 딸, 현수로 대상이 바뀔 뿐. 

하지만 그 현란한 도입부와 국가기관을 통해 다시 삶을 건진 그녀의 활약(?), 그리고 끝내 그녀를 이용한 순애보적 사랑과 결혼, 그리고 마지막 그 현란한 도입부의 개연성이 된 중상과의 관계와 파국은 결국 '씁쓰레한 뒷맛'을 남기고 만다. 

결국 순진한 연변 처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복수극'에 자신을 내던졌고, 그녀의 복수극은 다시 사랑하는 이의 복수로 이어졌으며, 그 복수에 내던져진 그 생명은 '모성'을 통해 거두어 졌고, 그 '모성'은 다시 '순애보적 사랑'으로 막연한 '행복'에의 기대로 연명하고, 그 모든 것은 '그녀'를 이용하기만 한 국가기관과 중상에 대한 자기 파멸로 끝을 맺는다. 혹자는 이것을 순진했던 한 소녀의 비극사라 칭할 지 모르겠지만, 그곳에 과연 '숙희'는 '존재'할까?



숙희라는 인간은 없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살육의 기계가 된 여성, 그리고 그 '살육'의 훈련자였던, 심지어 알고보니 그 대상이었던 이를 사랑해서 '복수'에 자신을 내던진 여성, 그리고 '어머니'란 이름으로 생존하고, 또 다시 사랑의 이름으로 파멸에 이른 그녀를, '비극적 사랑'에 희생되었다 말할 수 있겠지만, 영화 속 '숙희'는 그저 '복수'나 '모성'의 이름으로만 불리워졌을 뿐, 누구의 딸, 누구의 엄마, 혹은 그 누군가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대상적 존재 외에, 인간 '숙희로서 사고하고 판단하고 자각하고 반성하지 않는다. 마치 이전 세대 우리가 여성들을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의 이름으로만 불러왔던 것처럼. '킬러'로서 살아간 '사람' 숙희는 없다. 

그런 면에서 첫 장면의 도입은 이 영화 속 '대상적 존재'로서의 그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첫 장면은 낯선데 익숙하다. 싸움을 주제로 한 게임에서 흔하게 접했던 장면이다. 게임 속 살육의 현장에서, 게임이기에 그 상대방을 죽이고 피를 내는 것에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감각하다. 숙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그 숱한 사람들을 죽여버렸다는데 일말의 후회를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자신이 그가 사랑할 만한 그런 순결한 인물이 아니라는 자기 연민 외에는. 하지만 그 연민의 유효치 역시 현수의 순애보를 넘어서지 못한다. 마치 미션 수행을 마친 캐릭터가 생명을 다하듯 자신을 접었던 그녀는 아이를 통해, 새로운 사랑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하지만, 거기엔 자신이 해왔던 '킬러'로서의 삶에 대한 반추는 미흡하다. 자신의 사랑마저 이용했던 국가 기관에 대해서도, 그리고 중광에 대한 '자각' 이후에 보인 그녀의 대응 역시 '즉자'적일 뿐이다. 그녀의 삶이 '복수'로 점철되었던 것처럼. 

숙희만이 아니다. 언뜻 매력적이지만 역시나 국가 기관의 수동적 수행자 역할을 넘어서지 못한 권숙(김서형 분)이나, 단선적 캐릭터로 소모적으로 쓰여진 김선(조은지 분)과 민주(손은지 분) 역시 안타깝다. 영화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정작 여성의 캐릭터는 '편편'한 반면, 남성들은 '사고'하는 복잡한 속내를 지닌 중층적 캐릭터로 그려낸다. 



그런 면에서 의심스럽다. '연변'이라는 이 사회에서 '이방인'이자, 종종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그 지역성이 숙희라는 전근대적 여성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감히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를,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대상적 존재로서의 여성 캐릭터를 끌어낼 수 없으니,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 

하지만 그 '순진한 연변 처녀'에 대한 편견조차 지극히 편협하다. 순진한 연변 처녀가 끝까지 중상을 의심하지 못한 채 이용당한 것과 달리, 연변 주먹이었던 중상은 그런 순진한 숙희를 자신의 죽음으로 위장해 버리는 '고도'의 작전을 펼치더니, 세련된 대한민국의 어둠의 세력으로 승승장구하느라 딸조차 거뜬히 제거하는 '자존적 범죄자'로 그려내는 걸 보면, '연변'이라는 지역적 출신에 대한 편견조차 '여성'과 '남성'의 경우 그 결론이 다르다는데 다시 한번 이 영화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안이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반증한다. 

그런 면에서 <악녀>는 오히려 또 한편의 전근대적인 여성 잔혹사에 가깝다. '자신'을 돌아보기도 전에 마치 '삼종지도'의 현대판처럼,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를, 그리고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야 했던 여성의 비극사이다. 차라리 진정한 '악녀'이고, 자기 파멸이라면 좀 더 자신을 악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중상은 물론, 역시나 중상과 다를 바 없이 이용만 한 국가 기관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복수'를 매개로 했지만 살인 기계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그녀만의 '입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끝까지 숙희는 배신당한 사랑으로 몸부림치다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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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14 18:08

90년대 무렵이던가 '민주화 운동'의 물결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시절에, 이른바 '후일담 문학'이란 것이 유행이었다. 너도 나도 '내가 한때 민주화 운동을 했었는데~'로 시작했던 문학 서사들. 한참 꽃봉오리처럼 피어나야 할 스무 살 젊은 시절에 청년들은 그 젊음을 '시대'의 아픔을 짊어지느라 저마다 '고행'의 시간을 겪었었고, 그 '경험'은 고스란히 '문학'이 되어 한 시대를 상징한다. 이제 어쩌면 훗날 2014년 이래 한국의 상당수 '콘텐츠'물들을 두고 '세월호 기억 콘텐츠'라 명명할 지도 모른다. '자각'이 있는 자라면 모두 그해 4월 벌어진 그 일을 그저 눈감고 지나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sf 로 시작되었던 <서클; 이어진 두 세계(이하 서클)>마저 '기억 조작'이란 미래 사회의 인간 통제 문제를 들고 돌아돌아 '기억'과 '인간'의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 나쁜 기억에 대한 인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망각이 나쁜 기억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런 질문에서 굳이 토를 달지 않아도 '잊지 않겠습니다'로 대변되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시대적 상흔의 또 다른 기록이다. 





'나쁜 기억도 기억할 만한 기억인가?
두 편으로 나뉘어 진행된 서사도 서사지만, 도대체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모호했던 <서클> 4편에 들어서 비로소 이 드라마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해 졌다. 그리고 주제 의식이 명확해지니, 그동안 나열되었던 사건들조차 한 줄에 꿰어진다. 

사건1>
쌍둥이 형제 우진(여진구 분)과 범균(안우연 분), 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그들 앞에 불현듯 나타난 외계인 별이, 그녀와의 추억이 다 채워지기도 전에 아버지와 그녀는 그들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남겨진 형제, 우진이 그 기억을 지우려 애쓴 채 고학생으로 그리고 한 집안의 가난한 가장으로 현실의 삶에 버둥거릴 때 형인 범균은 그 기억의 노예가 되어 아버지를, 그리고 외계인을 찾아 떠돌다 정신병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린다. 

사건2>
형사 김준혁(김강우 분)을 불러들인 스마트 시티의 살인 사건, 딸이 아버지를 살해 시도한 존속 상해 사건은 아버지의 기억을 되찾으며 과거 유괴범이었던 아버지와 유괴당한 피해자였던 딸의 뜻밖의 고통스런 과거 기억으로 환치된다. 블루 버드에 의해 기억을 찾은 딸은 그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남기고자 스스로 자해를 한다. 

사건3>
스마트 지구 시청 보안과 공무원이었던 이호수(이기광 분)는 김준혁을 케어하는 것으로 시작한 그의 임무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잃었던 기억을 되찾아 가며 고통스러워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도망치고자 기억 통제를 요청하며 기꺼이 휴먼비의 스파이 노릇까지 자처했던 그는 이제 되살려진 기억을 통해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이 입양된 어린 시절 성적 학대를 받고, 그 트라우마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음을 깨닫고 '기억'의 존재를 절감한다. 

사건 4>
형을 찾아 20여년을 헤맸던 김준혁 형사, 알고보니 자신이 바로 그 형, 그리고 이제 그는 동생이 어쩌면 스마트 시티 기억 조작의 주체인 휴먼비의 회장일 수도 있다는 의혹에 맞부닥친다. 심지어 그 휴먼비의 기억 조작이 과거 아버지를 잃고 외계인을 찾아다녔던 자신의 고통 스러운 기억이 모티브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집념어린 추적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기억, 인간의 존재 이유
보여지듯이 지금까지 <써클>을 통해 과거와 현재에 맞물리면서 등장했던 4가지 사건들, 이들은 모두 '당사자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주는 나쁜 기억'에 대한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제 진실을 찾아 헤매던 주인공 김준혁은 자신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동생이 어쩌면 자신으로 인해 나쁜 기억을 치유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으로 '망각'이라는 기억 조작의 주체가 돠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추격의 동인을 잃고 만다. 과연 나쁜 기억도 기억해야할 가치가 있는가? 과거의 자신도 그렇고,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잊고 있던 과거의 나쁜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회의에 빠진 그에게 나타난 이호수, 그는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휴먼비의 스파이로 자진납세했던 사람, 그런 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그를 찾아온다. 처음 얼핏 돌아온 기억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사실에 괴로워만 하던 그, 하지만 그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지만 정작 그 아버지는 이제 통제된 기억으로 과거의 그 사실을 잊은 채 지금의 딸과 희희낙락한 모습을 보고, 절규한다. 그리고 김준혁에게 기억은 취사 선택이나, 기호가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의무이고, 도리'임을 선언한다. 역시나 어린 시절 유괴당했던 기억을 되찾아 자해를 한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억'이 없어 죄채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지금의 아버지 앞에, 자신을 버려 기억을 만들어 그의 악행을 단죄하고자 한다. 

그렇게 드라마는 '인간의 존재'를 묻는다. 2030년 '행복추구권'만이 넘실되는'스마트'한 미래 도시, 그곳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그 '원죄'를 묻은 채 살아가고 있다. 과연 그것이 행복일까? 드라마는 묻는다. 나쁜 기억을 가지고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 진실을 찾으려 자신을 내던진 사람들, 그들의 고통은 무의미한 것일까? 

그리고 이제 드라마는 답한다. 기억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도 무의미한 것이라고. '기억'을 통해 인간은 기억되고, 인간의 존재는 의미가 있어 지는 것이라고. 나쁜 기억은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기억해주고, 해결해주어야 할 '과제'이자, '의무'라고. 형 찾기와 아버지 찾기를 통해 에돌아 왔던 <써클>은 이제 8회를 넘어서며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바, '기억'의 문제를 떠올린다. 인간이 인간다움, 바로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의무'로 부터 시작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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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13 14:30

'yolo(욜로)'족이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했다. you only live once(한번 뿐인 인생), carpe diem(까르페디엠, 인생을 즐겨라)!! 2010년 래퍼 드레이크의 <the motto>속 노래 가사로 등장한 '욜로'는 어느덧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2,30대 젊은이들 삶의 모토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한번뿐인 인생 즐기고 싶은데, 밥벌이가 발목을 잡네! 그래서 'tvn이 새로이 선보인 <주말엔 숲으로>라는 예능에 등장한 욜로족들은 기꺼이 그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밥벌이'의 고달픈 일상에서 뛰쳐나와 자신이 원하는 자연의 삶을 기꺼이 보여준다. 




<퇴사하겠습니다>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사회 
일본이라고 다를까, <퇴사하겠습니다>가 연신 베스트 셀러로 등극하고 있는 건 바로 그런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리고 <sbs스페셜-퇴사하겠습니다>는 바로 그 책의 주인공 이나가키 에미코로부터 시작된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아사히 신문사의 기자였던 에미코 51살이 되던 해 스스로 직장을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퇴직 이후의 삶을 걱정하기도 전에 쓴 <퇴사하겠습니다>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녀는 직장 대신 몰려드는 인터뷰니 강연 요청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녀를 베스트 셀러 작가로 만든 퇴사, 그게 하루 아침에 때려 치운 일이었을까? 아니 그것만이었다면 아마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에미코는 '퇴사'를 하기 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처음 '퇴사'의 고민이 시작된 건 잘 나가던 승진에서 밀려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이다. 밀려났다는 자괴감과 승진 등에서 배제된 공포감에 휩싸였던 그녀는 '퇴사'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대번에 사표를 내던진 대신, 그 이후로 10년의 시간을 두고, '회사적 인간'이었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자신이 중심에 선 삶으로 재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회사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삶에 준비가 되었을 때 그녀는 '퇴사'를 하였고, 그 경험을 책으로 써, 전 일본인이 공감하는 베스트 셀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쓴 책의 내용을 씨줄로, 우리 현실의 이야기로 다큐는 접근해 들어간다. 잘 나가는 it 기업의 매니저 김상기 씨, 그는 이제 마흔 줄에 접어들었다. it기업 평균 퇴직 연령 48.2세, 그 멀지않은 은퇴의 시기를 자기 주도적으로 맞이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에 아내는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 양육비가 한 달에 150만원이나 든다며 펄쩍 뛴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는 '견디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상기씨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퇴사' 이후의 삶을 고려해 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퇴사'를 결정했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무엇일까? 아내가 아이들 교육비를 들고 나오듯이 경제적인 생활의 유지가 우선일 듯하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아니라도 나와 내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그 무엇, 그리고 단지 먹고 사는 이상, '한번뿐인 인생'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 그 무엇. 

제 2의 인생, 그 이전에 생각해 보아야 할 인생의 화두는
그것을 위해 다큐는 퇴직 이후 제 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난다. 한 명의 퇴직자, 그는 출판 관련 일을 하다 퇴직하여 동네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퇴직 이후의 먹고사니즘'에 대한 질문에 그는 오히려 '먹고사니즘'의 필요충분 조건을 반문한다. 물론 또 다른 케이스도 있다. 회사를 다닐 때부터 차근차근 퇴사를 준비했던 다른 퇴직자의 경우, 현재 식당 두 개를 운영하며 웬만한 대기업 직장인 월급을 훨씬 넘는 수익을 내고 있다. 퇴직 이후 치킨집 =패망의 지름길이라는 자영업자 패망론의 세상에 그는 각자 준비하기 나름이라는 대안을 주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퇴직' = 자영업자의 삶, 혹은 성공적인 아이템이 화두가 되는 트렌드와 달리, 책방 주인아저씨가 된 출판사 퇴직자의 질문처럼, <퇴직하겠습니다>의 이나가키 씨가 주장하는 건 '과연 당신이 먹고사는데 얼마가 필요한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다. 책방을 경영하니 당연히 회사의 월급보다 버는 돈이 적어진 책방 주인, 하지만 그는 오히려 버는 돈에 따라 소비의 규모가 커져가는 우리의 삶을 되살펴 보게 되었다고 한다. 보다 큰 집,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교육비, 여행 등등. 이나가키 씨도 마찬가지다. 베스트 셀러 작가라는 명함이 무색하게 그녀의 삶은 '청빈'하다 못해 궁상스럽다. 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집, 버리는 음식을 최소화하기 위한 식재료, 최소한의 화장품, 목욕 정도는 동네 목욕탕 쿠폰으로 대신한 삶으로 인해 그녀는 오히려 줄지않는 통장의 돈을 고민할 정도다. 

이나가키는 장식장을 다 채우고도 넘쳤던 화장품을 버리는 대신, 그 자리를 그녀가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로 채웠다. 애써 돈을 버는 대신, 그 시간에 그녀가 하고 싶은 동네 주민들을 위한 무료 요가 교실로 채우는 식이다. 그러면서 '소비'를 즐겼던 자신의 삶을 '소비하지 않아' 즐거운 삶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책에 담았다. 

그처럼 김상기 씨도 퇴직을 준비해 본다. 자신의 집을 채웠던 '소비'의 부산물들을 치우는 것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과중한 빚을 안고 얻었던 전셋집 탈출을 도모하며 '경제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정병수 씨네. 극심한 야근과 출장으로 몸에 이상이 왔던 엔지니어 정병수 씨는 무조건 퇴직을 하고 가족과 함께 퇴직금이 떨어질 때까지 여해을 하고 양평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그 과정에서 생겨난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 직장으로 돌아갔단다.

다시 직장으로? 하지만 정병수 씨의 재직장행은 이전의 직장 생활과는 다르다. 직장에 목을 매고 승진과 성공에 자신을 달리게 했다면, 이제 정병수 씨의 직장은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녕을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회사를 위해 일하고 남는 시간에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 보이는 것은 똑같이 회사를 다니는 것이라 해도 정병수 씨는 달라져 있다. 




결국 다큐가 돌고 돌아 찾아낸 결론은 '퇴사'를 해라가 아니다. '욜로'족의 시대, 어차피 피라미드 식의 조직에서 살아남아 생존하는 자의 숫자는 정해진 레이스에 놓인 회사원들이, 그 성공과 승진의 레이스에서 '행복해지는' 방식에 대한 방법 모색이다. 자신을 회사에 일치하는 대신, 회사적 동물이 되는 대신, 자신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면 굳이 퇴사를 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삶을 달리 살 수 있다는 제안이다. 결국 퇴사를 준비했던 김상기 씨 역시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게임을 굉장히 좋아해서 이 회사에 들어왔다는 초심을 살려낸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애를 상기한다. 그래서 그는 퇴직을 하는 대신, 기꺼이 회사에 남기를 택한다. 이나가키 씨의 <퇴사하겠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다. 힘들어, 때려쳐가 아니라, 행복한 직장 생활과, 인생 1막의 졸업으로서의 퇴사다. 그리고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소비'하면서 살아왔던 삶의 반추이다. 결국 조직과 사회에 넘겼던 자기 주도권의 수복이다. 

<퇴직하겠습니다>를 통해 다큐가 제안하고 싶은 건, 성공 중심 사회, 조직 중심 사회 속에서 '자신'을 잃고 상실되어 가는 '개인'의 복구이다. 그리고 이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몸담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다. 회사와 더불어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해진 사회, 조직과 함께 자신의 삶을 일체화할 수 없는 사회, 그 속에서 등장하는 해법은 결국 '한번 뿐인 내 인생'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안긴 '화려한 성취와 소비'의 삶에 대한 질문이다. 그건 회사에 있느냐, 퇴직을 하느냐의 방식이 아니라, 결국 삶의 스타일과 방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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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12 14:56

조승우와 정재영이란 두 배우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새로이 개편을 하며 자리를 옮긴 tvn의 주말 드라마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다. 화제성을 업고 시작하였으나 초라한 성과를 내고만 <시카고 타자기>의 부진을 애매한 시간대 때문이라고 판단했을까? tvn은 금토 8시 30분(때로는 종종 20분부터 시작하기도 했던) 주말 드라마를 토,일 9시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런 자리 배치에 대해 대다수 호청자들은 아쉬움을 전했다. 무엇보다 토,일 9시대는 이미 확고한 절대 강자 kbs의 주말극이 '아성'을 확고하게 고수하고 있으며, 9시 대의 mbc, sbs 드라마 역시 만만찮은 고정층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그간 빈틈을 공략해 오던 tvn의 정면 도전이라는 점에서 였다. 물론 tvn측은 tvn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공중파 주말 드라마의 시청층과 겹치지 않는다거나, 혹은 이제는 tvn에 채널을 고정하는 시청층이 생겼다 자부하며 '진검 승부'를 펼칠 시점이라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jtbc의 <아는 형님>이라는 떠오르는 트렌디한 예능까지 겹친 주말 9시대로 시간을 옮긴 것은 '사생결단'이었다는 점에선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 점이 크다.



tvn주말 9시 드라마의 사생결단
그렇게 자리를 옮긴 tvn의 첫 작품은 오랜만에 tv로 돌아온 조승우, 배두나 주연의 <비밀의 숲>이었다. 그런데 <비밀의 숲>이 끝나갈 무렵, 방송 아래 자막에는 ocn의 <듀얼>이 10시 20분부터 이어진다는 소개가 나온다. 동일한 cj 계열, tvn의 <비밀의 숲>을 보고, 이어서 ocn의 <듀얼>을 봐달라는 낯간지러운 안내 방송이야 그렇다 치지만, 막상 그 소개대로 심지어 의도한 듯 <비밀의 숲>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20분에 시작한 <듀얼>, 두 작품을 이어서 보고 있자니, 앞서 말한 야무지게 두 작품을 이어 보라고 시간대까지 옮긴 듯한 편성이, 오히려 득이 아니라, 실이 된 듯한 느낌이 더 짙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대를 옮긴 첫 작품 <비밀의 숲>이 온 신경과 이성을 집중시키는 법정을 배경으로 사법 비리 장르물인데, 그 다음에 이어진 <듀얼> 역시 복제 인간을 다룬다지만, 그 보다는 장기 밀매와 유괴가 등장하는 '범죄 장르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르물을 불편해 하는 이유를 들 때, 보기 편하지 않다는 점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쉬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없이(?) tv를 시청하고 싶은데 사람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잔인한' 장면이 나와서 부담스럽다는  거에, '머리를 써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점이 더해진다. 그런 '부담스런 장르물'을 연달아 두 편을 이어 보라는 것이 야심차게 주말 9시대로 자리를 옮긴 cj미디어의 전략이라면 그건 어쩐지 '자충수'같아 보인다. 이건 공중파 주말극과 다른 시청의 피로감을 주는 전략이다. 

어쨋든 그렇게 9시, 10시 연달아 두 편의 장르물에서 우리나라에서 연기 좀 한다하는 조승우와 정재영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두 분 모두, 연기에 있어서는 '한 가닥' 하는 분들인데 어째 그 반응이 다르다. <비밀의 숲>을 앞서가며 검색어를 오르내리는 조승우와 달리, 역시나 <어셈브리(2015)>이후 모처럼 tv로 돌아온 정재영은 첫 회 2% 이래 급격하지는 않지만 시청률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정재영 연기의 피로감에 대한 반응이다. 



조승우와 정재영, 그 다른 쓰임새 
조승우는 이미 연극, 영화, tv라는 장르를 오가며 그의 '미친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배우이다. 일찌기 <말아톤(2005)>에서 부터, 연극은 곧 그 자신이 '메이커'가 될 만큼, '연기의 신'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터이다. 그런 그가 최근 출연한 영화 <내부자들(2015)>에서는 연줄없고 빽없이 어떻게든 금의환양을 해보겠다고 악에 받힌 열혈 검사 역을 맡아 영화를 흥행 가도에 올렸다. 그런 조승우가 <비밀의 숲>에서 다시 '검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맡은 검사는 사고로 인해 '감정'을 잃어버린 '감정에 구애받지 않는 성문법이 내 삶의 가이드라인'이라는 캐릭터로 돌아왔다. 첫 회 그는 자식을 잃고 울며 자지지러지는 어머니를 문 밖에 세워 놓고 초연히 범죄 현장으로 들어간다. 역시나 다시 만나 그 어머니는 주저앉는데 그의 눈빛은 변하지 않는다. 법을 마음을 잃은 그의 무기로 삼아 '강직'해진 검사, 하지만 그래서 태연하게 후배 검사에게 '너를 믿지 못해'라고 말할 수 있는 '싸가지'는 지금껏 조승우를 통해 본 캐릭터 중 본 바 없는 새로운 모습이다. 조승우의 연기를 기대했지만, 그가 지금껏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연기에 그래서 보는 이들은 더욱 열광한다. 

반면, 비록 자주 출연하지 않았지만, 정재영의 연기는 그의 연기를 봐왔던 사람들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듀얼> 속 그는 불치병에 걸려 이제 줄기 세포 치료만 받으면 살아날 수 있는 딸을 병원 호송 중에 납치 당하고 만다. 당연히 아비이자, 형사인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정재영의 혼을 쏟아부은 열연, 침을 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대사, 그리고 자신을 던진 고군분투는 <어셈블리>에서도 그가 열연했던 진상필의 또 다른 버전같다. 아니 <방황하는 칼날(2014)>의 이상현같기도 하다. 분명 <듀얼>을 보면 정재영이 연기를 참 잘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쩐지 익숙하다. 심지어 그가 쏟아내는 감정과 연기에 '피로감'조차 느껴진다. 그리고 그건 단지, 앞에서 <비밀의 숲>을 보아서, 혹은 <터널>에 이은 장르물이라서 오는 피로감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보다는 제작진이 너무 안이하게 기존의 정재영이란 '메이커'에 의존하는 데서 안이함이다. 





장르물의 고민
<비밀의 숲>과 <듀얼>의 차이점은 그 만이 아니다. <비밀의 숲>도, <듀얼>도 모두 암울한 '범죄'의 세상을 다룬다. 하지만, <비밀의 숲>은 이미 숱하게 되풀이 되는 검사가 주인공인 사법 버리 물임에도 어쩐지 신선하다. 세상에 속하지만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마음을 잃은 검사가 주인공이라서일까, 드라마의 장면, 장면은 배경이 된 겨울처럼, 가라앉아 마음을 흔든다. 무엇을 보여주고 움직이는 대신, 마지막 장면 검은 법원 건물과 그 건물을 걸어나오는 조승우처럼, 그 분위기로 드라마를 설명해 간다. 늘 역동적인 장면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을 여사로 하는 tv에서 <비밀의 숲>이 보인 분위기들은 그래서 독특하게 다가온다. 장르물답게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모호하고 속을 모르겠지만, 그들이 가진 패가 답답하기 보다는 그로 인해 앞으로가 궁금해 진다. 

그에 반해, <듀얼>은 복제 인간이란 신선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끌어가는 방식은 그간 ocn이 해오던 장르물의 방식을 답습한다. ocn 장르물을 시청해왔던 이들이라면 장기 밀매와 납치가 연관된 이 소재 자체가 그리 신선하지 않을 것이며 거기에 동원된 노숙자들 역시 낯설지 않다. 분명 자식을 잃은 오빠이자 형사인 주인공, 그 오빠의 동생이지만 오빠가 자신으로 인해 아내를 잃을 정도로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을 알수 없는 여동생의 대립 구도는 신선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듀얼>은 극 초반 이 구도를 정재영의 뻔한, 반면에 너무도 생소해진 김정은의 연기로 이런 극적 구도를 살려내지 못했다. 물론 아직 희망을 접기엔 이르다. 오히려 <듀얼>을 기대하게 만드는 건 아직은 그 정체가 모호한 양세종이 분한 '선과 악'으로 구분된 두 사람의 서사이다. 자신이 죽이고, 또 다른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이 존재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그가 벌이는 범죄이자 처단의 속내가 드러내 보여진 4회 말미, 가장 <듀얼>은 신선했다. 

비록 '대박'은 아니지만 꾸준히 그리고 빈번하게 장르물이 자신의 자리를 확보해 가고 있는 상황, 어쩌면 뻔하지 않은 장르물이라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만큼 어려운 숙제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과 이성의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 '어려운' 난제를 해결해야만 그 입지를 그나마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숙명'이자, '고행'이다. 부디, 피로감을 이겨내고, 장르물만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기를, <비밀의 숲>과 <듀얼>의 건투를 다시 한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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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11 15:43

영화 <원더 우먼>을 봤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건 새로나온 볼만한 영화라던가, dc코믹스의 새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라던가 하는 요건보다는 지극히 사적인 '추억 여행'때문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그리고 그 시절 '린다 카터'의 원더 우먼이 아닌데도 극장으로 향한 내 발길을 보면, 어린 시절 슈퍼맨과 배트맨을 보던 아이들이 자라 극장판 히어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향하는 그 심정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70년대 그 시절의 <원더 우먼> 
<원더 우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tv에서 <원더 우먼>을 방영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해보아야 겠다. 1979년부터 tbc를 통해 방영되었던 <원더 우먼> 시리즈는 당시 인기를 끌었던 <육백만불 사나이>에서 부터, <소머즈>, <전격 z작전> 등 인기있는 외화 시리즈의 흐름 속에 등장했던 '미드'이다. 그저 '미드'여서 인기가 있었던 것일까? 70년대는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로 상징할 수 있는 시대다. 이 여배우들은 그녀들의 대표작이자, 70년대 드라마의 상징적 작품이라 할 <청실홍실(1977)>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전도유망한 능력남을 놓고 순애보의 경쟁을 벌이는 두 여인, 그들이 부잣집 딸이건, 가난한 직업인이건, 화려하건, 순수하건, 그들의 삶의 결정적 요소는 '사랑'이고, '결혼'이었다. 그런 순종적이고, 여전히 현모양처를 지향하는 여성들이 드라마를 점령하고, 그로부터 배제된 여인들은 슬픈 운명의 서사를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되풀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황금 팔찌를 두르고 총알을 막아내고, 자신을 위협하는 이들을 올가미로 대번에 굴복하게 만드는 여성 히어로라던가, '뚜뚜뚜뚜' 거리며 저 먼곳의 소리를 듣고, 대번에 달려가 적들을 제압하는 그녀들은 '획기적인 여성상'이었다. 맨날 tv에서 '지고지순'하게 울며 불며 사랑을 위해 매달리던 여성들만 보던 그 시절 아이들에게, 대놓고 온몸의 라인이 드러내는 '섹슈얼'한 미스 아메리카 출신의 미녀라던가, 정돈되지 않은 듯 날리는 머릿결에, 자연스러운 옷차림으로 어떤 미션도 척척 수행해 내는 '이지적'인 분위기의 이방인은 당시 소녀들에겐 신선하고 매력적인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진취적'인 그녀들의 캐릭터만이 매력적인 건 아니었다. 당시 소녀들에게 <원더우먼>이나, <소머즈>는 또 다른 버전의 '로맨스' 담이기도 했다. 아마존의 공주였던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와, 안경만 쓰면 못알아보는 비서로 불철주야 그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원작이 참조했다는 '마가렛 생어의 페미니즘'과는 별개로, 현대판 '인어공주'와도 같은 '로맨틱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서사로 다가왔다. '소머즈'와 육백만불 사나이의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도 마찬가지로. 그녀들의 캐릭터는 진취적이었지만, 동시에 지고지순한 순애보의 주인공들이었다. 



2017년의 원더우먼
이제 2017년에 돌아온 <원더 우먼>은 그 시절, '사랑'의 기억을 모티브로 삼는다. 하지만 원더우먼이 하는 2017년의 사랑은 1970년대의 그녀와 또 다르다.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다이애너 공주,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공주의 신분으로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사'로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제 왕국의 그 누구도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을 무렵, 데키스키라 왕국을 지키는 버뮤다 삼각지대가 뚫리고 '트레버 소령'이 등장한다. 

그의 등장과 그를 통해 전해들은 전쟁은 다이애너에겐 '하네스'의 귀환으로 전해졌고, 의기가 충천한 그녀는 그를 따라 '하네스'를 제압하기 위해 '인간들의 세상'으로 떠난다. 하네스에 대한 전의가 충만한 다이애너와 역시나 휴전 회담을 앞두고 스파이로서 적의 위기를 감지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의 음모를 막으려는 트레버 소령은 다른 듯 같은 모습이다. 인간 세상의 실상을 모른 채 하네스만을 향해 맹목적인 다이애너나, 자신이 손에 넣은 적의 음모를 막기 위해 군율과는 상관없는 작전을 계획하는 트레버 소령의 고지식한 애국심은 궤를 같이한다. 마치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보기 전의 순수한 열정을 가진 미성년들처럼. 그런 그들이 자연스레 서로에게 공감하고 의지하며, 나아가 남자와 여자로서 '사랑'의 감정까지 전개해 나가는 것에 이물감이 없다. 

하지만 시리즈 물로서 미드 속 다이애너가 트레버 소령의 비서로 자신을 감추며 그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들의 무리를 제거하는데 매진하는 것과 달리, <원더 우먼> 속 다이애너는 이제 세상을 구할 '히어로'로서 '업그레이드'될 사명을 부여받는 존재이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은 '자각'의 매개체이지만, '동반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기에 트레버 소령은, 가장 불가능한 평화의 조건을 가지고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 패트릭 장관의 모습을 한 하네스로 인해 '인간 세상'의 부조리함에 좌절하는 원더 우먼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존재로 '산화'한다. 인간은 부조리하나, 그럼에도 그 '부조리함'을 넘어서는 '희망' 역시 인간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인간 세상에 온 히어로'의 명제'를 풀이해주는 존재로 그 역할을 다한 채, '영원한 하지만 이승에선 그 운명을 다한 사랑'으로 그녀를 인간 세상에 머물게 한다. 2017년의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원더우먼과 트레버 소령의 이별 그 순간이었다. 그 어떤 사랑 영화보다도 극적이었고, 슬펐던. 그리고 그 슬픔은 곧 히어로 원더우먼의 동력이 된다. 

1970년의 다이애너가 영웅이지만, 매번 트레버를 구해줌에도 그의 그늘 속 여성으로 남겨진 것과 달리, 2017년의 다이애너는 트래버를 통해 '남녀간의 사랑'을 이루지만, 동시에 동지인 그를 통해 '히어로'로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한다. 그리고 이제 '사랑'의 온기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얻고 '히어로'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해나간다. 2017년 그녀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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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6.09 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