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개과천선>이 종영되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종영과 함께 상반기 드라마 계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던 이른바 '장르물'의 약진도 함께 마무리 된 듯하다. sbs는 5월 1일 <쓰리데이즈> 종영 이후 형사물 <너희들은 포위됐다>를 방영중이지만, 형사물의 외피를 쓴 <너희들은 포위됐다>의 경우는 장르물이기 보다는, 신참 형사들의 성장기와, 늘 그렇듯이 경찰서에서 연애하기에 촛점이 맞춰진 양상이다. kbs2의 월화 드라마<빅맨>의 후속극은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운 <트로트의 연인>이고, 수목 드라마<빅맨>의 후속 <조선 총잡이>는 개화기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기반해 있긴 하지만, <공주의 남자>와 비슷한 무협복수극에 가깝다. mbc <개과천선>의 후속은 <운명처럼 널 사랑해>, tvn<갑동이>의 후속은 <연애말고 결혼>처럼 로맨스물로, 마치 그간 장르물로 찌푸려진 미간을 달달한 사랑이야기로 달래주겠다는 듯이 약속이나 한 듯 익숙한 사랑 이야기들이 포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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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로만 설명할 수 없는 성취
되돌아 보면 동시간대에 서로 시청률 경쟁까지 벌이며 장르물이 시청률 파이를 나눠가지던 2014년 상반기와 같은 때가 있었던가 싶다. 덕분에, 장르물에 목말라 했던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축제'와도 같은 시간이었고, 반면, 겹치는 장르의 드라마가 동시에 반영되는 바람에, 갈리게 된 시청층은, 안그래도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던 장르물의 시청률을 깍아먹어, 장르물 자체의 대중성을 폄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표절도 불사하고, 개연성 따위는 제껴둔 채, 배우들의 개인기에 의존하여, 한류붐에 편승하여, 막장의 전개조차도 마다하지 않던 우리나라 드라마 계에서, 2014년 상반기의 궤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하고 공공 자산으로서의 방송의 책임을 다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장르물의 첫 포문은 3월 5일 <쓰리데이즈>가 열었다. 
<싸인>의 김은희 작가와, <뿌리깊은 나무>의 신경수 피디, <추적자>의 손현주, 그리고 20대의 대표적 배우인 박유천의 조합만으로도 관심을 이끌었던 <쓰리데이즈>는 걸고 넘어진 것은 도발적으로도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재벌 기업의 컨설턴트라는 과거를 가진 대통령(손현주 분)은, 과거 자신이 공모자가 되었던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인한 양진리 양민 학살의 진실을 한태경의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면서, 진실을 알리고자 나선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당장의 먹고 사는 나라 경제에 일말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측근의 만류에도, 대통령은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라는 '당위성'을 내세우며 나라를 지키는 대통령으로써의 진실된 본문에 매달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이 밝히고자 하는 진실을 둘러싼 집단과, 직책에 따른 이해 관계가 엇갈린다.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경호실장임에도, 양진리 학살 현장에서 동료들을 잃었던 함봉수(장현성 분)는 대통령의 저격에 나섰고, 대통령의 오랜 지기이자 최측근이던 신규진(윤제문 분) 그의 국가관에 따라 대통령에 맞서 김도진의(최원영 분) 편에 서지만, 결국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그렇게, <쓰리데이즈>는 이제는 그 단어 조차도 생경한 '정의'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 그 정의가 피상적인 글 속의 문구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살아가는 대한민국,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직업, 일의 문제라는 것을 제기한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그저 밥을 벌어먹기 위한 호구지책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래서, <쓰리데이즈>를 통해 돋보인 것은, 대한민국의 얼굴인 대통령의 강직한 모습뿐만 아니라, 주인공 한태경(한태경)을 비롯한 그저 대통령을 지키는 일개 경호관일 뿐이었던 '갑남을녀'들의 사명감넘치는 헌신이다. 

공교롭게도, <쓰리데이즈>가 드라마를 통해 지금 대한민국에서의 직업적 사명감과 정의에 대해 논하던 시기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드라마가 제기한 문제들은 현실의 가장 절박한 문제 제기가 되었고, 드라마 이상의 공감을 자아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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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물이 바라본 2014년의 대한민국
이렇게, 2014년 상반기의 장르물들은, 막연한 가상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얼마 전, 혹은 바로 지금 맞부닦치는 현실의 사건들을 길어올린다. 세월호 사건을 두고 회자되는 수많은 음모론들이, <쓰리데이즈>의 그것과 낯설지 않다. <빅맨>에서 자신의 아들을 위해 애꿏은 젊은이의 생명을 엿보는 재벌가의 실상은, 그들이 자신의 상권을 위해 시장 바닥에 목숨을 건 상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과정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골든 크로스>의 상위 1% 가 벌이는 은행 합병과 침탈, 그리고 <개과천선>을 통해 그려진 부실 환율 상품 사태, 재벌 그룹 경영권 싸움, 해외 비자금을 이용한 부당 파산 선고 등은 우리가 이미 사회면을 통해 익숙해진 사건들의 복기였다. 

이렇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건들을 드라마를 통해 불러들인 상반기 장르물이 바라본 대한민국 사회는 어땠을까? 그 이전의 장르물이나 사회물들이 드라마의 극적 모순 고리를, 억압적 사회, 국가 체제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2014년 상반기 장르물이 바라본 대한민국은 부도덕한 자본의 자기 증식 과정에 짓밟힌 사회이다. 
즉 8,90년대 고도 성장기의 대한민국의 구조적 모순이, 자본의 성장을 부추키는 억압적 체제의 국가, 즉, 국가 자본주의 형태였다면, 이제 2014년의 대한민국은, 국가조차도 자본에 복무하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된 사회라는 것이, 이들 드라마의 공통적 문제 의식이다. 
그래서, 드라마의 절대 악은 자본(쓰리데이즈의 김도진, 빅맨의 강동석)이거나,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상위 !%의 화이트 칼라군(개과천선 차영우, 골든 크로스 서동하)이다. 

이들 장르물과는 약간의 궤를 달리하며 <갑동이>는 십여년 전에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현재로 끌어온다. 하지만 과거의 연쇄 살인범과, 그를 흠모하는 현재의 카피캣을 '사이코 패스'로 설정하고, 그들의 심리를 그려내는데 천착했던 이 드라마의 사이코패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여'를 내뱉는 <쓰리데이즈>의 김도진과, '니가 감히 나를'를 되풀이 하는 <빅맨>의 강동석  등 여타 장르물의 악인들과 연결된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수습을 먼저 고려하는 차영우나, 불리한 위치에 놓이면 '멸사봉공'을 부르짖다가도 돌아서서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서동하의 성정도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즉, 2014년 상반기의 장르물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보이는 '사이코패스'들은 엄밀히 뇌의 이상에서 비롯된 정신병리학적 증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의식이 결여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의 부재한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고도 성장기에 배태한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사회적 의식은 바로 이들 장르물의 악인들을 양산해 내었다는 것을, 이들 드라마들은 공들여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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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물의 주인공들이 선택한 삶
그래서 드라마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방향을 취한다. <쓰리데이즈>의 이동휘나, <개과천선>의 김석주처럼, 자본의 '개'가 되어 살아가던 자신을 반성하며, 자신이 했던 과오를 바로 잡으려 하거나, <쓰리데이즈>의 한태경, <빅맨>의 김지혁, <골든 크로스>의 강도윤, <갑동이>의 하무염처럼, 자신이나, 자기 가족들의 복수로 부터 행동의 동기를 가진다.
그렇게 자기 반성이나, '복수'에서 시작된 이들 주인공들의 소극적 동기는, 극이 진행되면서, 그들이 마주한 거대한 음모를 경험하며, 사회적 각성과 자각을 거치며 대승적 자아의 실현으로 귀결된다. 아버지의 죽음을 해명하려 했던 한태경은 대통령을 지키는, 즉 진정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고, 동생과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던 강도윤은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던 상위 1%로의 경제 커넥션 골든 크로스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친다. 일개 시장판 일용직에 불과했던 김지혁은 거대 기업의 오너가 되어 상생 경영의 새 장을 연다. 

보다 전문적으로 우리 사회 현실을 해부하기 위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피치 못하게 전문직 종사자가 되어 등장한다. 거대 로펌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개과천선>은 바로 그 핵심에 서서 비자금을 관리하던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삼았고, 대통령의 암살을 다룬 <쓰리데이즈>는 상위 1%의 청와대 경호관을 등장시켰다. <골든 크로스> 역시 우리 나라를 주무르는 경제 커넥션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검사보와, 그 검사보가 변신한 외국계 펀드 매니저가 극을 이끈다. <빅맨>으로 가면 한 술 더 뜬다. 시장 바닥 양아치같던 주인공은 하루 아침에 대기업 회장의 숨겨진 아들로 둔갑하는가 싶더니, 유통 그룹의 오너를 거쳐 에너지 계열사까지 거느린 회장이 되어야 했다. <갑동이>에서 연쇄 살인 사건의 해결을 형사가 맡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해결책은 이상적이다. <쓰리데이즈>의 대통령은 스스로 과거사를 밝히고, 그 과거의 최종 책임자인 재벌, 외국 자본에 대항하며,  책임을 지고 하야를 결정한다. <빅맨>과 <개과천선>, <골든 크로스>에서 노동자들은 당당히 주인이 되어, 기업의 경영에 한 몫을 차지한다. 
물론 그런 이상만이 있는 건 아니다. <개과천선>의 마지막 여전히 거대 로펌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으며, 감옥을 나온, <골든 크로스>의 서동하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한다. 
하지만, 2014년의 장르물들은 한태경, 김지혁, 김석주, 강도윤, 하무염 등순수한 정의의 인물들을 고지식하게 그려냄으로써 사회적 갈등이 극대화된 우리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만이 희망'이란 불굴의 진리로 귀결한다. 

때로는 키쓰신이 있기도 하고, 안타까운 밀땅도 있었지만, 대부분, 2014년의 핍박한 현실을 그려내기 위해, 이들 장르물은, 인기를 추구한 드라마들이 노린 웃음기와, 개인기와 사랑 놀음조차 마다한 채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무뚝뚝하게 전달한다. 덕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이전 드라마들에 비해 낮은 시청률로 비교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살기 퍽퍽했던 2014년의 상반기에, 이들 드라마들이 전해주었던 진실의 공감과 위로는, 그 어떤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로 설명할 길이 없다. 덕분에, 드라마를 멀리했던 젊은 층조차, 새삼스레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쓰리데이즈>처럼, 뻔한 한류 드라마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부디, 하반기, 그리고 2015년에도, 현실의 고통을 '망각'이나, 환타지'가 아닌 진실로 위로하는 장르물의 행보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6. 27. 18:34

공소 시효가 지나버린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었던 <갑동이>가 마무리 되었다.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결국 잡을 수 없었던 연쇄 살인 사건이 드라마<갑동이>에서는 해결되었다. 형사가 되어 연쇄 살인범의 낙인을 피했던 갑동이(정인기 분)도 잡혔고, 갑동이를 흠모했던 카피캣 갑동이(이준 분)는 죽었다. 그리고 갑동이로 인해 마음의 짐에 짖눌렸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것을 풀어내었다. 


처음 '반갑다, 갑동이'로 공소시효가 지난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갈 때만 해도, <갑동이>는 연쇄 살인범을 다룬 서스펜스 스릴러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20회로 마무리된 지금, 오히려 <갑동이>는 범죄물이나, 공포물이기 보다는 '심리물'에 가까운 드라마가가 아니었나 싶다. 

극중 웹툰 작가로 나온 마지울(김지원 분)이 연쇄 살인범을 그려낸 웹툰의 제목이 '짐슴의 길'이었다. 마치 그 웹툰의 제목처럼, 드라마 <갑동이>는 20회에 이르는 동안, 류태오라는 갑동이의 카피캣의 연쇄 살인을 재현해 내면서, 그리고, 갑동이와, 갑동이 카피캣,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얼크러짐을 통해, 우리 사회 연쇄 살인범이 선택한(?) 혹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짐슴의 길'을 밝히고자 하였다. 

초중반 갑동이의 카피캣 류태오를 통해 갑동이 연쇄 살인을 재현해 낼 때만 해도, 드라마는 그저 파렴치한 연쇄 살인범을 그려내는데 치중하는 듯했다. 하지만, 갑동이 카피캣 류태오에 대한 하무염(윤상현 분), 오마리아(김민정 분), 마지울의 애증으로 극이 혼란스러워 지면서, 거기에 더해, 진짜 갑동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작 갑동이를 자신의 인생을 걸고 추적하던 형사 양철곤(성동일 분)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갑동이가 되고, 정작 가장 신뢰를 받던 수사반 반장이던 차도혁이 진짜 갑동이임이 밝혀지고, 그의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갑동이>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저 누가 옳다 그르다라는 식의 사지선다 형 답을 구할 수 없게 오묘해 졌고, 그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심오한 고뇌를 자아냈다. 

(사진; osen)

사법부조차 정신병의 트릭을 통해 피해가려던 갑동이를, 정작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사이코패스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이라는, 류태오를 통한 힌트로 여죄를 밝혀내 공소시효를 무색하게 만든 하무염, 그래서 갑동이와 갑동이의 카피캣은 법원의 심판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형이 구형되었지만, 최근 들어 사형대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진 대한민국에서, 사형의 의미는 무색하다. 아니, 그가 저지른 무수한 살인과 피해자,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비해, 법의 처벌은 하염없이 가볍게 느껴질 뿐이다. 정작, 처벌은 감옥에 갇혀 매일 밤 꾸는 악몽이 대신한다. 그런 악몽조차 피해가고 싶은 갑동이는 하무염에게 영원한 안식을 요구한다. 

류태오가 갑동이의 카피캣을 자처한 이유는 바로 연쇄 살인범이었던 갑동이가 스스로 자신의 살인을 멈추었던 '위대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지울이 그린 웹툰의 제목이 '짐승의 길'이었던 것처럼 류태오도, 갑동이도 멈출 수 없었다. 외국으로 피해가던 류태오는 어쩌지 못한 욕망을 주체못해 스튜어디스를 충동적으로 살해했고, 멈추었다, 그래서 공소시효를 피해갔다 여겨졌던 갑동이는 단지 세상의 눈을 피했을 뿐이었다. 

바로 드라마는 여기에 방점을 찍는다. 사이코패스와 인간이 갈리는 길, 짐승과 인간이 달라지는 길, 거기에 주목한다. 
죄의 댓가를 받아 감옥에 갇힌 갑동이는 악몽조차 못견디어 영원한 안식을 꾀하고, 류태오의 죽음을 사주한다. 멈추기를 갈망했던 류태오도 그리 다르지 않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사죄나 죄과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했던 류태오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오마리아에게 자신과 함께 외국으로 가달라고 요구했으며, 사형대에 오르는 대신, 자신의 재산을 도모해 법의 그물망을 피하고자 한다. 
결국 <갑동이>가 말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 짐승의 정의가, 진짜 갑동이와 갑동이의 카피캣의 선택을 통해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짐승의 반대편에 인간이 있다.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인 줄 알면서도, 그런 사람들에 대해 연민을 감출 수 없었던 하무염, 마지울, 그리고 사이코패스일 망정 그를 이용했다는 죄책감에 혼돈스러웠던 오마리아, 그리고, 결국 자신이 피치못했건 어떻건 한 사람의 갑동이였음을 시인한 양철곤, 그를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갑동이를 자처한 한상훈(강남길 분)의 선택이 바로 인간의 그것이다. 또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명감 역시 빠질 수 없다. 그렇게 지리하도록 갑동이와, 갑동이 카피캣을 두고 주변 사람들이 겪는 혼돈과 갈등, 자책을 통해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마음이, 우리 사회를 사이코패스로부터 우리의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갑동이>는 어렵게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이코패스라는 범죄자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사람으로써, 인간다운 선택이 무엇이어야 하는 가를 드라마 <갑동이>는 말하고자 한다.

물론, 짐승의 길 혹은 사이코패스와 인간의 길을 장황하게 설명하고자, 지그재그 발걸음을 내딛는 동안, 아쉬운 점도 있다. 왜 그가 사이코패스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과 사이코패스의 경계에 서있는 그 애매모호한 짐승을 설명하기 위해, 때로 드라마는 연쇄 살인범을 옹호한다는 느낌이 들만큼 갑동이와 특히나 갑동이의 카피캣에 천착했다. 마지막, 류태오가 거두어진 절을 방문한 세 사람 하무염, 오마리아, 마지울의 행보는, 그들의 인간다움을 내보인 것지만, 그렇게 갑동이를 통해 연민을 표현하는 방식을 그려낸 이 드라마의 갑갑한 점이기도 하다. 즉, 갑동이가 왜 짐승인가,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인간이 왜 인간인가를 그려내기 위해 양 자가 평행선을 달리는 동안, 오마리아를 제외한 갑동이의 희생자들은 방기된 면이 강하다. 이 두 사람이, 두 부류가 무엇이 다른가를 설명하고자 천착하는 동안, 그에게 희생된 무순한 사람들, 그가 저지른 범죄의 부피는 얇아졌다. 갑동이와 갑동이의 카피캣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서, 그들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갈등에 집중하면서,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사연과 고통과 고뇌는 상대적으로 희박해 진점, 그것이 <갑동이>가 남긴 아쉬움이다. 


by meditator 2014. 6. 22. 14:18

2014년에 들어서면서 <쓰리데이즈>, <신의 선물>을 시작으로, <골든 크로스>, <개과천선>, <빅맨> 그리고 케이블의 <갑동이>, <신의 퀴즈 4>까지 다양한 장르물의 드라마들이 선전하고 있는 중이다. 장르물이라는 특성상 시청률면에는 대중성을 타 장르 드라마만큼 확보하지는 못하지만, 뉴스에서도 제대로 알리지 못했던 사회적 시선을 견지하면서, 젊은 층에게는 수치로만 설명할 수 없는 화제성을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위의 드라마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장르물 드라마들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남자들이다. 그것도, <빅맨>의 김지혁을 예외로 하고, 대부분, 청와대 경호관, 전직 형사나 형사 혹은 검시관, 검사시보, 변호사 등의 전문직 남성들이다. 이들은 자기 가족, 혹은 자신이 하고 일의 과정에서 조우한 사회의 부도덕한 면에 맞서 진실을 수호하는 의지의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 드라마에는 모두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경찰관으로 쫓기는 경호관을 돕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 범인의 심리를 파악하고, 피해자의 엄마가 되어 직접 유괴범을 쫓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여성 캐릭터들이, 올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장르물 드라마의 남성 캐릭터들처럼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라고 하면, 드라마마다 형편의 차이가 느껴진다. 때로는 신선한 독립적인 여성상을 구가하는가 하면, 여전히 수동적이며 보조적이며, 때로는 민폐에 가까운 '여성'으로서만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사진; osen)

6월 13일 방영된 <갑동이> 17회는, 지금까지 방영되었던 그 어떤 회차보다도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오마리아(김민정 분)와,마지울(김지원 분)이 그들 앞의 사이코패스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갑동이가 바로 수사반장 차도혁(정인기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마리아, 하지만 공소 시효 만료로 인해 더 이상 그를 벌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의붓 아버지 한상훈(강남길 분)이 희생을 하여 가까스로 갑동이 사건을 검찰 수사선상에 올려놓게 되는 과정에 무기력감을 느낀다. 더구나 48시간을 구금하고 심문을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가 갑동이라는 알게 된 상황에서도 너무나 태연자약한 차도혁에게 좌절감까지 절망감까지 느끼던 오마리아는 그런 자기 자신의 무기력감의 돌파구를 차도혁의 다중인격에서 찾으려 한다. 즉, 다중인격이라 갑동이가 아닌 차도혁은 죄책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정신적 분석으로, 그가 자신에게 여전히 뻔뻔하게 대하는 그 상황을 설명하고, 피해자인 자신의 고통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울은 한 술 더 뜬다. 무려 여덟 명의 여성을 즐기듯 죽인 사이코패스 류태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명목하에, 류태오를 찾아든 마지울은 그가 가진 분노를 일깨우며, 그 속에 숨겨진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쓴다. 

물론, 피해자로써 자신의 사건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싶어하는 오마리아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와 벌]의 쏘냐처럼, 범죄자의 구제에 연연해 하는 마지울이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게, 그가 아니라, 그녀여야 하는가?

마지울은 그저 우연히 들른 커피숍에서 눈에 띤 류태오를 자신의 만화 속 범인 캐릭터로 그리려고 했고, 그로 인해 그와 면식을 튼 사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17회를 오는 동안, 과연 마지울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감수하며, 류태오와 빈번하게 접촉하는 상황에 개연성이 충분한가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류태오가 마지울을 자신을 구원해줄 여인으로 삼고 싶었다는 말 한 마디에 낚여, 죄책감을 느끼고, 이제 그의 인간성 회복에 앞장서는 마지울은 단면적이다. 그녀는 여전히 하무염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대뜸 연쇄 살인범 류태오를 따라 나서던 자기 중심적인 맹랑한 여고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류태오가 살해했던 여덟 명의 여자들은 마지울의 염두에 없다.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는 류태오와, 그에게 대단한 존재인 것 같은 자신만이 있다. 거기에, 모성성의 발로라 여겨지는 무한한 측은지심이라니!

오마리아는 한 술 더 뜬다. 갑동이를 잡기 위해 치료 감호소의 정신감정의가 되고, 류태오를 갑동이를 잡기 위한 제물로 쓰기 조차 마다치 않던 그녀가, 정작 갑동이 앞에서, 정신과 의사인 그녀의 직분을 망각한 채 흔들린다. 아니, 정신과 의사라는 그녀의 지식이, 그녀의 감정에 노예가 되어, 그녀의 눈을 막게 된다. 

17회에 이른 <갑동이>의 여성 캐릭터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눈 앞에 있는 상황에 대해, 이성보다는 '감성', 냉정한 판단, 보다는 충동적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르물에서 이렇게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캐릭터의 몫은 대개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개과천선>에서 여주인공에 해당하는 이지윤(박민영 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의협심이 강한 법학 전문 대학원 출신의 로펌 인턴 사원이 된 이지윤은 늘 그녀의 정의감이 그녀를 앞선다. 대형 로펌의 인턴 사원이지만, 사사건건 대응은 감정적이기 일쑤고, 늘 사건을 앞에두고 그녀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건, 그녀의 감성이다. 결국, 청소년 범죄자를 두고 연민에 사로잡힌 그녀는 사건의 진실에  눈 감은 채, 그를 변호하다, 뒤늦게 진실을 알고 자책한다. 물론 이런 사건은 변호사로서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장르 드라마에서 유독 여성 캐릭터에게는 이렇게 감정으로 인해 사건을 망가뜨리는 상황이 주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화제를 안고 시작했던 <신의 선물>에서 납치된 딸 샛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엄마 김수현(이보영 분)은 번번히 민폐적 상황을 만든다. 딸을 찾기 위한 맹목적인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앞뒤 안 가리고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고, 정작 그 상황을 해결해 주는 건, 남자 주인공이나, 주변 남자들의 몫이라, 욕을 먹게 되었다. 심지어, 그토록 사랑하는 딸임에도 불구하고, 딸의 납치범을 찾겠다고, 정작 딸을 방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골든 크로스>에서도 다르지 않다. 정의감이 투철한 검사 서이레(이시영 분)와 아버지 기업을 망가뜨린 골든 크로스 멤버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골든 크로스 대표가 된 홍사라(한은정 분)이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녀들이 주로 하는 일은 사랑에 눈물 흘리고, 가슴아파하는 역할이다. 그녀들이 하는 일은 복수이거나, 정의 실현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 '사랑'이다. 

즉, 2014년의 장르물은, 시스템을 갖춰 진 미드를 뺨칠 정도는 아니지만, 2014년의 한국 사회를 냉정하게 재단하는 사회 비평의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중이지만, 정작 그 드라마 속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수동적이고, 정적이며, 전근대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꼭 여성을 섹스어필한 존재로만 쓰는 것이 소모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오로지 감성이나, 모성, 혹은 연민이라는 특정한 감정적 기제로서만 여성을 소비하는 것 역시, 편견에 사로잡힌 방식에 다름아니다. 

(사진; 뉴스엔)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다. 웃음기 하나 없니, 사랑 타령도 없이, 건조하게 묵묵히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론을 다룬 <쓰리데이즈>는, 여성 캐릭터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었다. <쓰리데이즈> 속 여성들은 감정적이지도 충동적이지도, 사랑에 휩쓸리지도 않는다. 경찰이면, 경찰, 청와대 경호관이면 경호관으로서의 사회적 삶에 충실하다. 여성이기에 앞서, 사람이다. 위기에 빠져도 거의 누가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빠져나온다. 온 몸이 묶인 채 갇힌 이차영(소이현 분)은 스스로 악을 쓰며 묶인 것을 풀고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공중회전을 하며 차에 치일 뻔하고서도, 동료 경호관 한태경(박유천 분)에게 나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 뿐이며, 내가 나의 일을 하듯,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또 다른 여성 캐릭터 윤보원 순경(박하선 분)은 한 술 더 뜬다. emp 탄을 맞고,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끄덕없고, 남자 세 명 정도는 거뜬히 쓰러뜨린다. 남자 주인공의 도움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적극적인 조력자로,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다. <쓰리데이즈>의 여성 캐릭터들을 보면, 얼마든지, 작가의 의지만 있다면 여성 캐릭터들도, 보다 진일보한 이성적인 인물로써 드라마 내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까지 2014년의 대부분의 장르물은, 여성을 '여성'으로 소비하고, 소모하는데 진력하는 편이다. 덕분에, 늘 여성들은 문제를 만들고, 헤매고, 흔들리며, 그녀를 그렇게 만든 남성들의 잿밥이 되거나, 그녀들을 잡아주고, 이끌어 주는 멋진 남성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데 봉사한다.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사회적 시선의 성취만큼,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취가 아쉽다. 여성을 여성이기에 앞서, 사람으로서의 보편적 존재로서,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객관적으로 조명해 주는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 


by meditator 2014. 6. 14. 18:29

16회에 이른 <갑동이>,이젠 누구도 갑동이(차도혁; 정인기 분)가 누구인지 다 안다. 하지만, 갑동이를 잡을 수 없다. 이전에는 갑동이가 누군인지 몰라서 잡을 수 없었다면, 이젠 갑동이가 누구인지 알아도 잡을 수 없다. '미치도록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다' 48시간을 구금해도, 그를 놓아줄 수 밖에 없다. 미제 사건들에 그의 DNA을 가지고 검사를 해봐도, 전산화되지 않은 출입국 관리국 창고를 먼지를 마시며 뒤져 보아도, 48시간 안에 그를 잡아들일 묘책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와 대질 심문을 하던 오마리아, 아니 유일한 생존자 김재희(김민정 분)는 결국 눈물 범벅으로 오열하다 못해 그의 목을 조르고, 그런 그녀를 데리고 나온 하무염(윤상현 분)에게 절규한다. 왜 편법이라도  쓰지 않았냐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프로파일러 한상훈(강남길 분)은 결국 자신이 4차 사건의 진범이라며 자신을 내던진다. 이런 범인을 잡고도 범인을 잡을 수 없는 아비규환, 이게 다 터무니없는 공소시효 때문이다. 


연쇄 살인범의 추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갑동이>는, 카피캣을 통해 연쇄살인을 복기하며 <갑동이>를 복기하며, 하나의 범죄가 가진 사회구조적 얼개를 논하더니, 이제 16회에 이르러, 대한민국 법 질서의 부조리함을 끄집어 낸다. 

결국 갑동이 사건 때문에 아버지와 딸을 잃었던 하무염과 양철곤(성동일 분)의 미망은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카피캣이 되어 갑동이 사건을 환기시킨 류태오, 그리고 그녀를 조여오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약통을 찾아들어야 하는 오마리아, 아니 김재희까지, 여전히 갑동이의 범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데, 정작 갑동이는 수사반장까지 되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보다 더 분통터지는 것은, 이제라도, 갑동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는데, 정작 편의적으로 적용된 15년의 공소시효 때문에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상황에 맞부닦친다. 물론 16회 말미, 한상훈의 희생으로, 그가 4차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하고, 그로인해 범인이 잡히면 그 사건의 공범까지 자동적으로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법령을 이용하여 겨우 갑동이의 공소시효 효력을 정지시키는 '신의 한수' 아니, '희생의 한 수'를 통해 비로소 갑동이 사건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놓을 가능성을 살려내었다. 


하지만 그를 법의 이름으로 심판을 할 수 있느냐 마느냐를 차치하고, 갑동이가 누구인지 드러난 이후 <갑동이>는 이미 충분히 우리 사회의 전근대적인 부조리한 법의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갑동이> 드라마의 시작은 일탄서로 다시 돌아온 양철곤 과장과, 여전히 갑동이 사건에 매어있는 하무염, 그리고 그들이 착잡하게 맞이하는 공소시효 완료일로 시작되었었다. 그때만해도,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눈 앞에서 범인을 놓치는 것도 아니고, 15년이나 지난 사건이 이제와서, 라는 거리감을 시청자들은 느꼈을 것이다. 아니 갑동이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처럼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사회에서, 제 정신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들은 쉽게 잊어야 하는 것을 하나의 비상요법인 양 장착한 채 살아왔었다.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희미해져가는 세월호처럼. 

하지만, 그저 두 사람의 집착으로만 여겨졌던 과거의 연쇄 살인을 과거로 부터 길어올린다. 갑동이를 존경하는 카피캣 류태오가 등장했고, 그를 치료하는 의사로, 과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희생자인 오마리아가 나타나고, 과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과, 현재에 살아가는 또 다른 사건들이, 류태오의 사건을 통해 갑동이 사건에 얽혀들며, 드라마는 정죄되지 않은 과거는 끝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 

16회 드라마 속 검사는 말한다. 법은 그 나라의 인격이라고. 
그렇게 인격이라 정의된 갑동이 속 우리나라의 법은 편의를 앞세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범인을 눈 앞에서 놓아줄 수 밖에 없는 비윤리적인 법이다. 2007년부터 25년으로 그 적용 기간이 늘어났지만, 소급 적용이 되지 않아, 드라마 속 갑동이와 같은 사건은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 흉악한 사회적 범죄의 경우 이미 공소 시효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여 폐지하는 사례가 일반화되고 있으며, 더구나 DNA로만 범인을 알수 있는 사건의 경우엔 공소시효 자체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법원의 편의적 방식에 따라, 갑동이와 같은 사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성범죄 연쇄 살인범의 예를 들었지만, 궁극적으로 한 나라의 인격으로서의 '법'에 귀결된 <갑동이>의 성취는 놀랍다. 일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법은 그저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번거로운 신호등과도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갑동이>를 통해, 그 번거롭다 느껴졌던 신호등이 제대로 신호를 보내지 않을 때, 혹은 신호를 보내기를 멈추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는가를 드라마는 보여준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수의 사건들이, 때로는 법의 비호아래, 혹은 법의 방기 아래, 혹은 부조리한 전근대적인, 심지어는 헌법에 위배되는 법의 판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파업에서 파업 당사자들이 가장 고통받게 되는 사례 역시 이 아이러니한 법의 판결이다. 자신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파업이 겨우 마무미된 후 뒷덜미를 사로잡히는 건, 때아닌 '돈'의 폭탄이다. 파업으로 인해 원할한 생산 과정이 진행되지 못했다 하여, 혹은 파업 과정에서 많은 생산 시설이 파괴되었다 하여, 법원은 회사측의 손을 들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에게 상상조차도 못할 엄청난 피해 보상금을 물게 한다. 얼마전 엔터테이너 이효리가 참여해 사회적 관심을 부각시킨 노란 봉투 프로젝트가 바로, 쌍용차와 철도 노동자들의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였었다. 15년 전의 해결되지 않은 사건 만이 아니라, 법이라는 편의적 도구를 이용해, 사회의 '을'들을 억압하는 우리 나라 인격의 또 다른 민낯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는 중년을 넘어 노년이 되어, 자신이 보수적이 되었다며,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이른바 386 세대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헌법에 위배되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폐지를 위해 벌어지던 그 수많은 시위와, 시위로 인해 잡혀가던 학생들의 역사가 바로 인격이라는 법의 얼굴에 패인 주름의 흔적이다.

그렇게, 우리가 자신이 맞닦뜨려서야 아! 하고 비명을 지르게 되는, 하지만, 한 사회의 인격이 되어야 할 '법'의 부조리하고 편의적인 모습을 드라마 <갑동이>는 그 말미에 이르러 주제로 내세운다. 제 아무리 누군가 그로 인해 여전히 고통을 받는다 해도, 명문화되어버린 법은 그 고통을 알아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까발린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그런 법의 부조리함을 없애기 위해 사회적 범죄의 공소 시효를 없애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부조리함을 방기하는 대신, 눈밝게 끄집어 내어 제대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 나라의 인격이 왜곡된다면, 그 나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드라마는 진득하게 설명해 낸다. 


by meditator 2014. 6. 8. 12:22

제 67회 칸 영화제 감독 주간 공식 초청작 <끝까지 간다>와 미드나잇 스크리닝 공식 초청작 <표적>에는 칸 영화제 초청작이라는 공통점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영화 초장부터 긴박하게 쫓고 쫓기는 액션의 진수를 보이는 이들 두 영화에서 중반에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하는 형사 두 명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표적>의 송반장 역의 유준상과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 형사 역의 조진웅이다.


광역 수사대의 송반장으로 등장하는 유준상은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듯이, 표적이란 영화가 개봉될 때까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심지어 영화 속 그가 등장해서, 정영주(김성령 분)가 수사하는 백여훈 사건을 가져갈 때까지, 그저 일련의 수사적 관행처럼 보여질 뿐이다. 유준상이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었던 숱한 선량한 캐릭터들처럼 영화 속 송반장도 어떤 컬러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경찰처럼 보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태훈의 눈 앞에서 그들을 쫓던 킬러들이 사실은 형사였다는 게 알려진 순간 송반장의 총구는 당겨지고, 지금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쉽게 만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악인의 등장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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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간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고건수의 사고부터 보여준다. 경찰서를 덮친 감찰반, 자신의 책상 속에 숨겨진 비밀 장부, 그 열쇠를 가지고 어머니 장례식장으로부터 경찰서를 향해 빗길 속을 달려가던 고건수, 길 한 가운데 있는 강아지를 피하며 가족과 통화를 하며 잠시 잠깐 한 눈을 팔던 그는 그만 사람을 치고 만다. 당황한 끝에 고건수는 사망자를 차에 숨기고, 다시 감찰관의 눈을 피해 그를 어머니와 함께 장례치뤄 버린다. 하지만 사건은 거기서 부터 시작이다. 그에게 걸려온 의문의 전화, 상대방은 그가 저지른 모든 범죄를 줄줄이 다  꿰고 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어디에 묻어버린 것까지. 고건수 역시 자신에게 전화를 걸던 사람을 쫓아가려고 하지만, 놓치고 장면이 바뀌어, 고건수에게 전화를 걸던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등장한다. 하얀 경찰복을 입은 우람한 체격의 박창민. <끝까지 간다> 역시 중반 부 이후 재미를 견인하는 주된 장치 중 하나는, 바로 박창민이 그저 고건수의 목격자가 아니라, 고건수가 재수없이 걸려든 거대한 악의 음모의 주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영화 <표적>과 <끝까지 간다>의 악의 축은 형사들이다. 그들은 직업만 형사일 뿐, 아니 오히려 형사라는 직책은 그들이 저지르는 비리의 배경의 한 요소로,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폭력조직 우두머리 못지 않는 절대적 악의 권능을 뿜어낸다. 
광역 수사대의 반장으로 백여훈 사건을 맡지만, 실제 그의 목적은 백여훈을 없애고, 자신이 결탁한 아니 실제 자신과 자신의 팀이 저지른 사건을 덮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광역 수사대와 그들을 대표하는 반장이지만, 실제 그들이 하는 일은 청부 살해를 비롯한 돈이 되는 그 모든 일이다. 영화는 오히려 법과 정의를 실현하는 광역수사대 반장 백여훈을 상대로,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정체모를 백여훈의 대결로 귀결된다.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 역시 마찬가지다. 마약업자와 결탁한 그는 압수한 마약을 빼돌려 자신만의 마약 제국을 건설한다. 자신의 뜻을 거스른 자는 심장에 총구가 새겨진 교통사고 사망자로부터 고건수까지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는 덜 나쁜 형사대 더 나쁜 형사의 대결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영화 속 형사가 절대 악으로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영화만이 아니다. 드라마 속 형사들도 만만치 않다. <갑동이>에서 갑동이를  십 여년을 그토록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형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골든 크로스>에서 강도윤의 아버지가 대책없이 자기 딸의 살인범이 되어버린 과정에는 바로 권력의 손을 잡은 강력계 형사 곽대수가 있다. 그들은 정의의 편인양 등장해서, 법의 수호자인양 거들먹거리면서, 자신이 모시는 사람들을 위해,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그리고 그런 봉사의 핵심에는 바로 '돈'이 있다. 법률로 보장된직업적 소명은 아랑곳없이, 허울이 되고, 그들은 자신이 지닌 알량한 '권력'에 의지해 타인을 억압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고,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갑동이가 형사가 된 것이 기막힌 반전이라며 무릎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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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 업자와 손을 잡고, 마약을 빼돌리며, 업자들에게 돈을 상납받는 형사들 캐릭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다수의 사건 사고를 통해 그런 비리를 익히 알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로 상징되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권력의 비리와 부도덕에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쩌면, 우리 사회 법과 정의가, 약자들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실을 무기력하게 인정한 우리들은, 그런 사실이 극단적으로 캐릭터화되어 등장하는 영화와 드라마속 형사들이 익숙하다. 우리 사회 관권의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속성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갑동이> 속 연쇄 살인범 갑동이가 형사 반장이 되는 과정은, 결국 이 사회의 많은 범죄들이 가진 권력적 성격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래서, 영화 <표적>과 <끝까지 간다>는 액션이 중심이된 오락적 성격의 영화임에도, 그들이 영화 마지막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법망을 피해 악을 저지르던 조폭을 무찌르는 액션 쾌감과는 또 다른, 타락한 권력이 정죄되는 '정의'의 심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표적>의 백여훈이 바란 것은, 이역만리 외국에서 자신의 목숨을 팔아 번 돈으로 동생과 함께 치킨 집이나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소박한 소망을 손반장은 자신의 편의에 의해 짓밟는다. 비록 고건수는 비리나 저지르고 자신이 친 시체를 숨기는 찌질한 형사이지만, 딸과 함께 살아보려는 소시민의 표상처럼 영화에서 그려진다. 그래서 그렇게 소박한 소망을 가진 보통 사람과, 소시민에의해, 그들보다 부도덕하며 그들보다 권력을 잘 이용해 먹는 악의 축들이 무너졌을 때 묘하게도 관객들은 억눌렸던 감정의 해소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적>과 <끝까지 간다> 속 악인들은 개인일 뿐이다. 그들의 비리는, 영화 속 이들 개인의 비리처럼만 표상화된다. 그래서 그들의 제거로 어떤 여운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신문에서 만나는 다수의 사건에서, 말단의 그 누군가를 제거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부도덕이 끊어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도마뱀의 꼬리처럼 바라볼 뿐이다. <골든 크로스> 곽대수는 거대 로펌 변호사 박희수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리고 박희수의 뒤에는 경제 정책 국장 서동하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우리나라 상위 1% 골든 크로스가 있다. 하지만 액션 오락 영화로서, <표적>과 <끝까지 간다>는 명쾌한 영화 미학을 위해, 감히 그것을 언급하지 조차 않는다. 어찌보면 하수인과 애먼 보통 사람과의 대리전이다. 죽도록 싸우는 강도윤과 곽대수의 결론을 골든 크로스의 지령을 받은 어깨들이 기다리고 있듯이, 본 게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채 한바탕 한풀이로 마무리된다.


by meditator 2014. 6. 3. 15:07

장황하게  갑동이의 카피 캣 류태오가 8차에 이르기까지 연쇄 살인을 하는 과정을 쫓아오며 연쇄 살인 사건으로서의 갑동이 사건과 그에 얽매인 인간 군상들을 세밀화로 그려내던 드라마<갑동이>는 지난 주 12회 마지막 드디어 갑동이(정인기 분)의 얼굴을 밝힘으로써 본 게임에 돌입했다. 


갑동이를 쫓는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며 갑동이 카피캣으로서 살인을 즐기던 류태오(이준 분)는 7차를 경과하며 사이코패스로서의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류태오가 철썩같이 믿었던 보호감호소의 갑동이가 사실은 갑동이 사건의 피해자로 그 트라우마로 인해 갑동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태오는 그런 사람을 갑동이라 따르던 자기 자신에 환멸까지 느끼는 듯하다. 결국 갑동이처럼, 자신도 스스로 살인을 끊고 외국으로 떠나려던 류태오는 결국 비행기 안에서 살인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되풀이 하고 송환되어 철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런 그를 면담하는 오마리아(김민정 분)는 류태오가 갑동이 사건의 카피 캣이 된 이유가, 사이코패스로서 자신의 살인 충동을 스스로 조절한 갑동이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류태오가 결국은 자신의 살인 충동을 어찌하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되풀이했던 것처럼, 그런 류태오를 보면서, 하무염(윤상현 분)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어쩌면 갑동이도 류태오처럼 살인 충동을 어쩌지 못하고 여전히 어디선가 살인을 되풀이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결국 에돌아 왔던 <갑동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드러나지 않을 뿐, 하무염이 경찰서 게시판에 빼곡히 붙인 실종된 여자들의 사진들처럼, 잡히지 않은 연쇄 살인범음 여전히 음지에서 암약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범행의 반복이 아니라, 류태오를 두고 그가 사람이기를 바라며 혼란을 느낀 마지율(김지원 분)처럼, 범행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구구절절 사이코패스로서 류태오를 설명하고 그의 권태와 환멸을 통해, 역으로 차근차근 갑동이를 설명해 왔다. 

(사진; 뉴스엔)

그리고 이제, 하무염과, 오마리아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형사가 되어 그걸 즐겨왔던 갑동이는 어떻게 니들이 나를 잡겠어 하는 자만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내적 갈등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더구나, 계획적으로 저질렀던 여타 범죄와 달리, 여경 살인 사건이 자신의 오해, 오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 갑동이는,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르던 세상이 뒤흔들리는 혼란과 더불어, 그렇게 자기를 흔들어 놓은 자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류태오가 갑동이의 카피캣으로 연쇄 살인을 저리르며 하무염을 비롯한 경찰을 주무르고 조롱하며 쾌감을 느끼듯, 형사가 된 갑동이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잡지 못해 피폐해져 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만든 세계 속의 꼭두각시들을 바라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껴왔던 것이다.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그에게서 권력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렇게 피의자의 신분에서 역전하여, 형사라는 '갑'의 신분이 되어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권위를 즐기는 차도혁 형사 반장,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매번 재벌가의 돈의 힘을 통해 범죄자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류태오를 통해, <갑동이>는 우리 사회, 권위와 돈의 힘으로 자행되는 사이코패스적 범죄를 짚어본다. 
드라마는 연쇄 살인범 갑동이를 권위를 가진 형사 반장이라는 직업적 신분으로 전환함으로써, 또한 이제는 하다하다 '부자병'이라는 신종 정신병까지 만들어 내며 법망을 피해가는 류태오를 설정함으로써, 법과 돈의 힘으로 얼마든지 '커버'될 수 있는 사이코패스적 행각을 말하고자 한다. 연쇄 살인범을 쫓는 수사극으로 시작하여  결국 에둘러 제작진이 도달하고자 했던 고지는, 바로 법과 돈의 우산 속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추악한 이면이다.


by meditator 2014. 6. 1. 01:26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10회 말 마지울의 엄마를 끌고 가 어설프게 갑동이처럼 살인을 저지르려던 박호석(정근 분)은 하무염(윤상현 분)에게 잡히고, 그가 진짜 갑동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그가 진짜 갑동이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도, 오히려 그가 과거 양철곤(성동일 분)의 표적 수사로 갑동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직장도 잃고, 자신의 신상이 드러남으로써 더 이상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 갑동이가 아니었지만, 갑동이라는 의심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갑동이가 되어간 '갑동이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 
양철곤이 지켜보는 조사실 유리창을 깨며 절규하는 박호석에게 양철곤은 덤덤하게 '사과가 필요하면 해줄게'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곤 덧붙인다. "근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네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11,12회, 아니 그 이전 10회, 11회를 통해 알려진 것은 갑동이 사건의 진척보다, 갑동이라는 사건을 통해 양철곤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가버린 것인가이다. 멀쩡한 대기업 회사원이었던 박호석이 망상증으로 치료 감호소를 전전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갑동이 코스프레를 하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만큼 갑동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양철곤 역시 자유롭게 사회 속에서 숨을 쉬고 사는 듯하지만, '갑동이'라는 그가 만들어 놓은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한채 십 여년을 보내고 있다. 
갑동이를 잡는 과정에서 하무염의 아버지를 보고 놀라서 낙상한 딸이 식물인간처럼 스물 다섯의 나이에 숨을 거두기까지 아버지로서 양철곤은 며칠을 딸과 함께 보내지도 못했다. 딸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자책과 원망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딸을 지킬 수 없게 만들고 갑동이에게 헤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갑동이를 잡기 위해 정직 중에 홀로 기다리던 제방에서 그를 갑동이로 오해하고 달아나던 중년의 여인을 그 역시 갑동이로 오해하고 쫓다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죽인 여인에게 갑동이가 자신의 표식을 남김으로써 양철곤은 졸지에 일곱 번째의 갑동이가 되어 버렸다. 갑동기를 쫓다, 스스로 갑동이가 되어버렸으니, 더더욱 갑동이를 잡기 전에는 갑동이를 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사진; 뉴스엔)

그러기에 양철곤은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갑동이 잡는 일에서 놓여나라고 하무염에게 말한다. 하지만, 하무염 역시 그럴 수 없다. 아버지를 의심해서 유일한 아버지의 무죄 증거였떤 잠바를 태워버린 하무염은 아버지를 의심했던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듯이, 갑동이에게 놓여날 수 없다. 그런 하무염에게 동정을 하다, 이제 사랑을 하게 된 오마리아(김민정 분) 역시 다르지 않다. 그녀는 말한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다고. 양철곤이든, 하무염이든, 오마리아든 모두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혹은 극복하기 위해서 갑동이를 잡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갑동이는 달랐다. 다른 연쇄 살인범들이 결국 자신의 범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범죄를 거듭하다 잡히고 말았지만, <갑동이>에서 갑동이는 9차를 끝으로 자신의 범죄를 더 이상 번복하지 않는다. 갑동이의 카피 캣인 류태오는 자신 역시 자신의 범죄를 더 이상 번복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들지만, 결국 비행기에서 우발적 범행을 저지름으로써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카피 캣을 그려냄으로써, 갑동이가 '갑'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갑동이를 쫓는 사람들이 그를 쫓는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와 죄의식에 짖눌려 그를 잡기 위해 세월을 팔고 있는데도, 갑동이만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만이 자신의 과거에서 자유롭게, 전혀 다른 얼굴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걸로 드라마는 그리고 있다. 

12회 마지막, 범죄 현장이었던 제방길에 수사반의 차도혁(정인기 분)이 얼굴을 드러낸다. '꼭꼭 숨어라'를 휘파람으로 불며. 그가 진짜 갑동이일지도 모른다는 12회의 엔딩에 시청자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철곤을 비롯하여 극중 인물들이 갑동이에 헤어나오지 못한 채 세월을 파먹는 동안, 오로지 갑동이만이 그 예전 양철곤이 7차의 범죄자가 되어가는 동안 몸을 숨기며 그를 지켜보았듯, 그들의 주변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니 차도혁이 아닐 수도 있다. 오마리아에게 진범을 인식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자 안도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갑동이 일 것 같지만 언제나 뒤통수를 치는 드라마<갑동이>는 갑동이가 나올 때까지는 갑동이라 확신할 수 없다. 여전히 <갑동이>는 또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다. 뜻밖에도 '소아성애자'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오마리아의 양아버지 프로파일러 한상훈(강남길 분)도, 가장 인자한 스님의 얼굴을 하지만, 언제나 사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진조(장광 분) 스님도 갑동이일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하지만 그 누가 진짜 갑동이가 되었든 <갑동이>에서, 갑동이가 갑이다. 그만이 홀로 갑동이의 사건에서 쏙 빠져 나가 유유자적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라마 <갑동이>는 갑동이 사건의 유력 용의자에서 갑동이 망상자가 되어 살인까지 저지르려던 박호석처럼, 갑동이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그리고 이제는 갑동이를 잡아야만 거기서 놓여날 수 있는 '미망' 속의 인물들을 그려내는데서 여전히 머물고 있다. 


by meditator 2014. 5. 25. 12:54

tvn의 드라마 <갑동이>는 일탄시 연쇄 살인을 다룬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 속 일탄은 <살인의 추억>처럼, 화성 연쇄 살인이 일어난 화성을 그 모티브로 삼고 있다. 현실에서 화성 연쇄 살인범은 결국 잡히지 못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80년대라는 시대가 가진 수사 현실의 한계가 눈 앞에 범인을 두고도 결국 보내주어야 하는 상황으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의 헤드 카피는 '미치도록 잡고 싶다'이다. 
그렇다면 2014년의 <갑동이>는 어떨까? 드라마 속 2014년의 일탄, 과거의 연쇄 살인을 모방한 범죄자가 그때와 똑같은 살인은 이제 5차까지 저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드라마 속의 범인은 잡힐 깜냥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나, 이때나, '미치도록' 잡고 싶을 뿐이지, 잡을 능력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살인의 추억>속 사건이 일어난 상황은, 80년대 가진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그려내 보이는 것으로 대신한다.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들끓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빈번하게 바뀌는 책임자들, 그때마다 새로이 꾸려지는 수사반은 일관성있는 수사를 할 수 없고, 당장의 성과를 내기 위해 만만한 사람을 데려다가 강압적 수사를 하게 되는 상황, 과학적이라는 말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보기 힘든 관성에 쪄든 수사 현실 등이 당시를 추억하는 내용들이다. 

(사진; 리뷰스타)

그렇다면 2014년의 상황은 좀 달라졌을까?
양철곤(성동일 분)으로 하여금 하무염(윤상현 분)에게 집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 DNA, 하지만 하무염의 DNA를 손에 넣었지만, 양철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과학 수사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던, 그가 그토록 신봉했던, 범인의 DNA를 경찰이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갑동이>는 그런 상황을 통해, 몇 십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수사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그렇다면 수사를 하는 사람들은 좀 달라졌을까?
그것도 마찬가지다. <살인의 추억>의 헤드 카피 '미치도록 잡고 싶다'에서 2014년의 수사진 역시 여전히 그 중 '미치도록'에만 방점이 찍혀 있다. 
양철곤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가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면서 살인범에 집착하고, 하무염은 눈이 까뒤집혀 가며 미쳐 날뛰지만, 정작 그들이 8회에 이르도록 <갑동이>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한 것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드라마는 갑동이와, 갑동이의 카피 캣이 류태오가 주인공인 양, 그들의 합동 작전으로 벌어지는 일탄에서의 연쇄 살인의 재연이 고스란히 벌어진다. 

'미치도록'이란 말에 방점이 찍혀 있는 양철곤과 하무염은 그저 자신의 미망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느라 사건에 제대로 접근조차 못한다. 양철곤은 혹시나 하무염의 아버지가 범인이었듯이, 하무염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그 자신의 미혹됨에, 하무염은 그저 범인을 잡고 싶다는 열망뿐으로, 정작 십 여년 세월 동안 그들이 갑동이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그저 '사로잡힘' 그 자체 뿐이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카피 팻이 나타나 판을 치는데, 십 여년 세월 동안 오로지 갑동이에 매진했던 그들은 매번 카피캣의 방식에 온전히 당한다. 하다못해 시험을 재수만 해도 쉬운 내용을 줄줄 외는 게 인지상정인데, 십수년을 거기에 매달렸다는 그들이 기억하는 건, 단순 수사 내용을 넘지 못한다. 결코 글짜로 된 그 정황을 넘어서지 못하는 단세포적 반응만을 보인다. 양철곤의 포스와, 하무염의 분노가 무색하게. 

그래서 이즈음엔 <갑동이>란 드라마가 의심스러워 지기 시작한다. 
과연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사회적은 물론 각자 개인이 쌓아놓은 자신의 미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것이 이 드라마의 주제 의식이었다면, <갑동이>는 성공적이다. 수사반장과 형사라는 직업적 능력이 무색하게 자신의 집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양철곤과 하무염이란 캐릭터를 아주 실감나게 그려내 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갑동이와 갑동이의 카피 캣이라는 범죄 자체를 그럴 듯하게 그려내 보이기 위해, 그가 5차에 이르는 범죄 과정을 성공적으로 실행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캐릭터들을 소모시킨 것이라면? 심지어, 혹시나 작가나, 제작진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갑동이의 카피 캣 캐릭터에 매료된 것이라면? 이러다, 어이없이 마지막에 가서, 한번에 전세 역전 해놓고 양철곤과 하무염이 이겼어요 할 거라면? 그런데 8회에 이르면서 슬슬 그런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사진; 리뷰스타)

십 수년을 매달린 사람들치고, 양철곤과 하무염은 도무지 수사 과장이나, 형사라기엔 너무 감정적이고, 충동적일 뿐더러, 그에 비해 갑동이나, 갑동이 카피캣 캐릭터는 너무 도드라져 우월하다. 이러다 보니, 정작 이 드라마가 그려내 보이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과정이라기엔, 양철곤, 하무염의 캐릭터들이, 분위기만 그럴 듯하고, 무능력하니까. 영화 <살인의 추억> 속 우격다짐 형사 박두만(송강호 분)도 사건의 해결을 위해 서태윤(김상경 분)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드라마 속 양철곤과 하무염은 어떤가. 그들이 손을 잡았다지만, 여전히 자신의 편집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건에 대해서는 지극히 감상적으로 대처할 뿐이다. 그런 것을 그리고 싶다고 하더라도, 8회에 이르기 까지 너무 일관되게, 두 사람의 캐릭터가 성장이 없다. 줄곧 갑동이와 갑동이 카피캣에서 농락당하고, 드라마는 류태오의 사이코패스적 캐릭터와, 그의 범행을 그려내는데 진력한다. 

최근 우리마라 드라마에 이른바 '사이코패스'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드라마들은 그들이 왜 그런 것인가에 대해, 혹은 그들의 사이코패스스러움을 공들여 설명하고자 한다. 심지어 그들이 사랑까지 하려 한다. 하지만, 제 아무리 공들여 설명해도, 사연이 있어도 그들은 범죄자일 뿐이다. 달라지지 않는다. 극의 균형추가 그쪽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8회에 이른 <갑동이>, 사이코패스 류태오를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 이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다. 


by meditator 2014. 5. 11. 12:34

노르웨이의 작가 한스 올라브 랄룸의 범죄 스릴러 시리즈의 첫 권의 제목은 [파리인간]이다. 왜 하필 파리일까? 작품 중에서 크리스티안센 경감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파트리시아는 파리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파리가 쓰레기더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인간들 중에는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평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런 사람들을 파리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정의에 걸맞게 책 중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협박하고, 무엇인가를 없애려 하며 범죄의 용의자가 된다. 그리고 그 중 살인범은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의 사건을 지우려 살인에 살인을 거듭하고 만다.

그런 한스 올라브 랄룸의 파리인간처럼, <갑동이>의 주인공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처한 상황과 입장은 다르지만 저마다 20여년 전 일탄에서 벌어진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사건에 사로잡혀 오늘을 살아가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위의 책에서 굳이 저자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사는 사는 사람들을 하고 많은 생물 들 중에 굳이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의 파리에 비유한 것은, 바로 그 과거가 결국 그 사람의 현재를 사로잡고 파멸에 이르게 만든다는 주제 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갑동이>의 주인공들도 파리인간이다. 과거의 기억이 그들의 현재를 파먹어 가고 있으니까. 

과거 갑동이의 사건과 흡사한 사건이 다시 20여 년만에 일탄에서 벌어지는 <갑동이>의 이야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캐릭터는, 바로 과장으로 영전했음에도 결국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에 대한 집착으로 일탄으로 돌아온 성동일이 분한 양철곤이다.

하지만,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달리, 그를 지배하는 것은, 과거 자신이 과거 사건의 범인으로 하무염(윤상현 분)의 아버지를 염두에 두었던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 사건 당시 어린 하무염이 아버지의 결정적 증거였던 윗옷을 태워버렸던 일로 인해, 결정적 증거를 놓치게 되었다는 생각이, 결국 자신이 하무염의 아버지를 범인으로 포착했던 그 생각이 옳았을 것이라는 데 대한 신념이, 현재의 하무염을 또 한 사람의 연쇄 살인범으로 몰고가는 집착으로 이어진다. 

(사진; 뉴스엔)

그런 의미에선 하무염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공소 시효가 지난 날, 살 의미조차 잃어버린 듯하던 그가, 다시 과거와 같은 살인이 일어나자, 양철곤이 말하듯, 짐승같은 본능이 되살아 나는 모습은, 그래서 홀로 사건을 해결하려다, 결국 3회 마지막에, 그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려가는 모습은 그 맹목성에 있어 양철곤과 다르지 않다.

또한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면서도, 범인을 찾기 위해 전과자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불사하고, 범행이 예정된 날 가장 범인의 먹이가 될 만한 빨간 색으로 온 몸을 치장한 채 범행 장소에 나타나는, 과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 오마리아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범인을 놓친 자, 아버지가 범인으로 몰린 자, 그리고 범인의 유일한 목격자, 그들은, 입장은 다르지만, 20년 전의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놓여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윤색된 기억 속에서 헤맨다. 

흔히 범죄 스릴러 물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쉽사리 피해자와 범인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협조하는 것과 달리, <갑동이>는 과거 사건에 매어 있으되, 그 사건이 가져다 준 상흔으로 인해, 결국에 있어서는 범인을 잡겠다는 목적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있어서, 극과 극의 처지에서 대립하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양철곤의 손가락과 하무염의 사지가 걸린 얼토당토 않은 두 사람의 대결은,  두 사람이 매어있는 과거의 기억의 대결이요, 자신들이 믿어 온, 믿고 싶은 신념의 대결이다. 불편할 정도로 맹목적으로 하무염을 옭아매려고 하는 양철곤의 집착을 보며, 그것이 불편하면서도, 기실 그것이 우리 사회 어디선가 만나게 되는, 대화도 통하지 않았던 절벽같은 누군가의 민낯 같아 더 섬뜩해진다. 또한 하무염의 맹목성 역시 다르지 않다. 틀리지 않았지만, 스스로을 옭아매고 마는 그의 행보 역시 낯설지 않다. 

인간의 기억이란 것이, 또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얼마만큼 자기 중심적이며, 그로 인해 또 다른 현실의 고통들이 파생되며, 비합리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 군상을 스케치하는데  드라마 <갑동이>는 골몰한다. 그런 면에서 <갑동이>가 포착한 캐릭터들은 예리하며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이 이 드라마의 주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스릴러 <갑동이>의 위상은 그저 단순히 과거의 연쇄 살인범을 잡는 수사 드라마에서,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함께 할 수 없을 것같은 다른 인간들의 조우에 촛점을 맞추며 인간의 존재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드라마가 되어 갈 듯하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나아갈 방향은, 그저 과거의 연쇄 살인범을 잡는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서로 조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지고, 해소해야 하는 인간사의 과제가 더 화두가 되지 않을까도 섣부르게 예측을 해본다. 


by meditator 2014. 4. 26. 01:33

4월 11일  tvn을 통해 또 한 편의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 <갑동이>가 첫 방영되었다. 드라마의 제목 갑동이는, 영국의 연쇄 살인범 '잭 더 리퍼'처럼 드라마 속 가상의 도시 일탄에서 부녀자 연쇄 살인을 저지른 후 사라진 범인을 지칭하는 상징적 이름이다. 


제작발표회를 통해 조수원 감독은 <갑동이>가 영화<살인의 추억>과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드라마 주인공들의 면면을 보면, 흡사 <갑동이>는 영화 <살인의 추억>의 후일담과 같은 영화이다. 

<갑동이>에서 형사 과장으로 등장하는 성동일이 분한 양천곤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로,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분했던 박두만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헤드카피 '미치도록 잡고 싶다'처럼, 17년 전 그때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것을 공소 시효가 지난 지금에 와서라도 다시 해결하겠다는 집념을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 속 송강호의 박두만이 전형적인 소시민이자, 하지만 점점 연쇄 살인 사건에 빠져드는 형사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면, 성동일의 양철곤은 하무염의 아버지를 범인이라 단정짓고, 그와 그의 아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영화 속 박두만과, <갑동이>의 양철곤은 다른 듯하지만, 결국 80년대의 과학적 수사 방식 보다 주먹과 협박이 앞서는 주먹구구식 시대의 수사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박두만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혹은 양철곤이 자기만의 아집에 사로잡혀 동네의 만만한 바보를 범인으로 몰아가버렸다는 점에서, 결국 다르지 않은 그 시대의 우매한 사고 방식을 내재화한 인물들이다. 영화 속 박두만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열패감에 사로잡혀 영화와 함께 사라졌지만, 마치 그가 17년이 지나 되살아 난 듯이, 양철곤이 되어 <갑동이>에서 과거의 범인을 다시 추적한다. 


<갑동이>의 또 한 사람의 주인공 하무염은, 영화<살인의 추억>에서 천진난만했던 동네 바보의 아들이다. 결국 경찰들의 겁박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아픔과, 아버지를 그렇게 몰고 간 형사 양철곤에 대한 복수심으로, 스스로 형사가 되어 갑동이를 찾아나선 인물이다. 

드라마 <갑동이>는 이렇게 쉽게 드라마를 보면서 영화 속 인물이 떠오르는 주인공들 외에, 과거 사건의 목격자이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속이며 정신과 의사로 살아가는 오마리아(김민정 분), 우리가 흔히 미드나, 추리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연쇄 살인범을 흠모하며 범죄를 통해 그를 오마주하는 사이코패스 류태오(이준 분)도 등장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80년대라는 시대가 가진 폭력성과 우매함을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적나라하게 그려나가는 데 치중했다면, 공소 시효가 지난 17년 전의 연쇄 살인 사건의 관련자들이 등장하는 <갑동이>는 여전히 그 사건으로 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상흔에 주목한다. 

단 1회만으로,  형사로써 그 시절의 범인을 잡지 못했던 트라우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어 그것이 아집이 되어 그를 똘똘 감아버린 듯한 양철곤이나, 범인의 아들로써의 낙인에서 결코 헤어나올 수 없어 발버둥치는 하무염, 그리고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지만 누군가의 접촉만으로도 소스라치는 오마리아의 상흔들을 충분히 전달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적과, 이제 그 아들조차 의심스러운 또 한 사람의 가해자라는 극과 극의 존재들이, 새로이 발생하는 과거의 사건을 연상케 하는 사건을 통해, 조우하고 갈등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해원들을 풀어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미 다수의 장르 물을 선보였던, 그리고 공중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청률에 대해 자유로운 케이블이라는 이점을 안고 <갑동이>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다. 또한 이미 공중파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등을 통해 연출력을 인정받은 조수원 피디는 공중파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로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풀어내는 듯 보였다. 거기에, 이미 <로얄 패밀리>를 통해 필력을 인정받은 권음미 작가 역시 1회 만에 <갑동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잘 드러내 보인다. 또한 늘 드라마를 통해서는 친근한 캐릭터로 다가왔던 성동일이 분한 양철곤은 그가 우리가 알고있던 그 배우가 맞나 싶게, 집요하면서도 냉정한 인물로 다가온다. 성동일 만이 아니다. 다. 늘 가벼운 캐릭터로 일관했던 윤상현의 변신도, 김민정의 미묘함도, 이준의 섬뜩함도, <갑동이>를 즐길 또 하나의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될 듯하다.


by meditator 2014. 4. 1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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