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들어서면서 <쓰리데이즈>, <신의 선물>을 시작으로, <골든 크로스>, <개과천선>, <빅맨> 그리고 케이블의 <갑동이>, <신의 퀴즈 4>까지 다양한 장르물의 드라마들이 선전하고 있는 중이다. 장르물이라는 특성상 시청률면에는 대중성을 타 장르 드라마만큼 확보하지는 못하지만, 뉴스에서도 제대로 알리지 못했던 사회적 시선을 견지하면서, 젊은 층에게는 수치로만 설명할 수 없는 화제성을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위의 드라마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장르물 드라마들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남자들이다. 그것도, <빅맨>의 김지혁을 예외로 하고, 대부분, 청와대 경호관, 전직 형사나 형사 혹은 검시관, 검사시보, 변호사 등의 전문직 남성들이다. 이들은 자기 가족, 혹은 자신이 하고 일의 과정에서 조우한 사회의 부도덕한 면에 맞서 진실을 수호하는 의지의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 드라마에는 모두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경찰관으로 쫓기는 경호관을 돕고, 정신과 의사가 되어 범인의 심리를 파악하고, 피해자의 엄마가 되어 직접 유괴범을 쫓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여성 캐릭터들이, 올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장르물 드라마의 남성 캐릭터들처럼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라고 하면, 드라마마다 형편의 차이가 느껴진다. 때로는 신선한 독립적인 여성상을 구가하는가 하면, 여전히 수동적이며 보조적이며, 때로는 민폐에 가까운 '여성'으로서만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사진; osen)

6월 13일 방영된 <갑동이> 17회는, 지금까지 방영되었던 그 어떤 회차보다도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오마리아(김민정 분)와,마지울(김지원 분)이 그들 앞의 사이코패스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갑동이가 바로 수사반장 차도혁(정인기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마리아, 하지만 공소 시효 만료로 인해 더 이상 그를 벌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의붓 아버지 한상훈(강남길 분)이 희생을 하여 가까스로 갑동이 사건을 검찰 수사선상에 올려놓게 되는 과정에 무기력감을 느낀다. 더구나 48시간을 구금하고 심문을 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가 갑동이라는 알게 된 상황에서도 너무나 태연자약한 차도혁에게 좌절감까지 절망감까지 느끼던 오마리아는 그런 자기 자신의 무기력감의 돌파구를 차도혁의 다중인격에서 찾으려 한다. 즉, 다중인격이라 갑동이가 아닌 차도혁은 죄책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정신적 분석으로, 그가 자신에게 여전히 뻔뻔하게 대하는 그 상황을 설명하고, 피해자인 자신의 고통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울은 한 술 더 뜬다. 무려 여덟 명의 여성을 즐기듯 죽인 사이코패스 류태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명목하에, 류태오를 찾아든 마지울은 그가 가진 분노를 일깨우며, 그 속에 숨겨진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쓴다. 

물론, 피해자로써 자신의 사건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싶어하는 오마리아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와 벌]의 쏘냐처럼, 범죄자의 구제에 연연해 하는 마지울이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게, 그가 아니라, 그녀여야 하는가?

마지울은 그저 우연히 들른 커피숍에서 눈에 띤 류태오를 자신의 만화 속 범인 캐릭터로 그리려고 했고, 그로 인해 그와 면식을 튼 사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17회를 오는 동안, 과연 마지울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감수하며, 류태오와 빈번하게 접촉하는 상황에 개연성이 충분한가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류태오가 마지울을 자신을 구원해줄 여인으로 삼고 싶었다는 말 한 마디에 낚여, 죄책감을 느끼고, 이제 그의 인간성 회복에 앞장서는 마지울은 단면적이다. 그녀는 여전히 하무염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대뜸 연쇄 살인범 류태오를 따라 나서던 자기 중심적인 맹랑한 여고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류태오가 살해했던 여덟 명의 여자들은 마지울의 염두에 없다.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는 류태오와, 그에게 대단한 존재인 것 같은 자신만이 있다. 거기에, 모성성의 발로라 여겨지는 무한한 측은지심이라니!

오마리아는 한 술 더 뜬다. 갑동이를 잡기 위해 치료 감호소의 정신감정의가 되고, 류태오를 갑동이를 잡기 위한 제물로 쓰기 조차 마다치 않던 그녀가, 정작 갑동이 앞에서, 정신과 의사인 그녀의 직분을 망각한 채 흔들린다. 아니, 정신과 의사라는 그녀의 지식이, 그녀의 감정에 노예가 되어, 그녀의 눈을 막게 된다. 

17회에 이른 <갑동이>의 여성 캐릭터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눈 앞에 있는 상황에 대해, 이성보다는 '감성', 냉정한 판단, 보다는 충동적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르물에서 이렇게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캐릭터의 몫은 대개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개과천선>에서 여주인공에 해당하는 이지윤(박민영 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의협심이 강한 법학 전문 대학원 출신의 로펌 인턴 사원이 된 이지윤은 늘 그녀의 정의감이 그녀를 앞선다. 대형 로펌의 인턴 사원이지만, 사사건건 대응은 감정적이기 일쑤고, 늘 사건을 앞에두고 그녀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건, 그녀의 감성이다. 결국, 청소년 범죄자를 두고 연민에 사로잡힌 그녀는 사건의 진실에  눈 감은 채, 그를 변호하다, 뒤늦게 진실을 알고 자책한다. 물론 이런 사건은 변호사로서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장르 드라마에서 유독 여성 캐릭터에게는 이렇게 감정으로 인해 사건을 망가뜨리는 상황이 주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화제를 안고 시작했던 <신의 선물>에서 납치된 딸 샛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엄마 김수현(이보영 분)은 번번히 민폐적 상황을 만든다. 딸을 찾기 위한 맹목적인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앞뒤 안 가리고 상황을 위험하게 만들고, 정작 그 상황을 해결해 주는 건, 남자 주인공이나, 주변 남자들의 몫이라, 욕을 먹게 되었다. 심지어, 그토록 사랑하는 딸임에도 불구하고, 딸의 납치범을 찾겠다고, 정작 딸을 방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시청자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골든 크로스>에서도 다르지 않다. 정의감이 투철한 검사 서이레(이시영 분)와 아버지 기업을 망가뜨린 골든 크로스 멤버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골든 크로스 대표가 된 홍사라(한은정 분)이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녀들이 주로 하는 일은 사랑에 눈물 흘리고, 가슴아파하는 역할이다. 그녀들이 하는 일은 복수이거나, 정의 실현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 '사랑'이다. 

즉, 2014년의 장르물은, 시스템을 갖춰 진 미드를 뺨칠 정도는 아니지만, 2014년의 한국 사회를 냉정하게 재단하는 사회 비평의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중이지만, 정작 그 드라마 속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수동적이고, 정적이며, 전근대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다. 꼭 여성을 섹스어필한 존재로만 쓰는 것이 소모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오로지 감성이나, 모성, 혹은 연민이라는 특정한 감정적 기제로서만 여성을 소비하는 것 역시, 편견에 사로잡힌 방식에 다름아니다. 

(사진; 뉴스엔)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다. 웃음기 하나 없니, 사랑 타령도 없이, 건조하게 묵묵히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론을 다룬 <쓰리데이즈>는, 여성 캐릭터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었다. <쓰리데이즈> 속 여성들은 감정적이지도 충동적이지도, 사랑에 휩쓸리지도 않는다. 경찰이면, 경찰, 청와대 경호관이면 경호관으로서의 사회적 삶에 충실하다. 여성이기에 앞서, 사람이다. 위기에 빠져도 거의 누가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빠져나온다. 온 몸이 묶인 채 갇힌 이차영(소이현 분)은 스스로 악을 쓰며 묶인 것을 풀고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공중회전을 하며 차에 치일 뻔하고서도, 동료 경호관 한태경(박유천 분)에게 나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 뿐이며, 내가 나의 일을 하듯,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또 다른 여성 캐릭터 윤보원 순경(박하선 분)은 한 술 더 뜬다. emp 탄을 맞고,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끄덕없고, 남자 세 명 정도는 거뜬히 쓰러뜨린다. 남자 주인공의 도움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적극적인 조력자로,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다. <쓰리데이즈>의 여성 캐릭터들을 보면, 얼마든지, 작가의 의지만 있다면 여성 캐릭터들도, 보다 진일보한 이성적인 인물로써 드라마 내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까지 2014년의 대부분의 장르물은, 여성을 '여성'으로 소비하고, 소모하는데 진력하는 편이다. 덕분에, 늘 여성들은 문제를 만들고, 헤매고, 흔들리며, 그녀를 그렇게 만든 남성들의 잿밥이 되거나, 그녀들을 잡아주고, 이끌어 주는 멋진 남성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데 봉사한다.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사회적 시선의 성취만큼,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취가 아쉽다. 여성을 여성이기에 앞서, 사람으로서의 보편적 존재로서,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객관적으로 조명해 주는 노력이 좀 더 필요하다. 


by meditator 2014. 6. 14. 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