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의 2015년작 <헤이트 풀8>은 19세 관람불가의 등급답게 유혈이 낭자하고, 죽음이 널브러지는 살육의 현장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면, 그 '살해'의 잔인함보다는, 영화를 내내 감쌌던 엔리오 모리꼬네의 장중한 오케스트라처럼, 미국역사를 조감한 한 편의 서사 소동극을 본듯한 감흥에 젖어든다. 





눈보라 속 산장에 모인 증오의 역사
영화의 시작은 눈쌓인 산속이다.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에 흠씬 젖어들어가는 산중, 거기에 몇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한 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마차의 앞길을 막아서는 한 사람, 그의 뒤에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얼어버린 살덩이들이 몇몇 쌓여있다. 하지만 그렇게 식겁할 만한 시체 덩어리를 보는 마부나, 마차 속 승객들의 반응은 마치 사냥한 동물을 보듯 심드렁한데서, 이 영화적 상황의 심각성은 역설적으로 전달되어 온다. 즉, 인간을 사냥하는 '현금 사냥꾼 워렌 소령(샤무엘 ㅣL 잭슨 분)'을 맞이하는 또 다른 '인간 데이지 도머그(제니퍼 제이슨 리 분)'을 산 채로 사냥해가는 '교수형 집행인 존 루스(커트 러셀 분)'와 그를 나르는 마부에서, '살육' 위에 쌓아진 이른바 '서부시대'가 감지되는 것이다. 

서로가 총을 들이밀며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은 밀려오는 눈보라 속에서 생명을 건사하기 위해 자신을 지키는 총을 포기하며 현금사냥꾼은 교수형 집행인과 여죄수의 일행이 된다. 그리고 눈 속을 힘겹게 나아가는 말들의 걸음처럼 느리게 그들의 소개가 진행된다. 그리고 일행의 소개가 마무리될 즈음, 또 한 사람의 동행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들이 사냥한 죽은 자와 산 자의 대가를 치뤄줄 자칭 레드롹의 보안관 후보자( 크리스 매닉스(윌튼 고긴스 분)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장황한 마차 속 수다를 통해, 우연치않게 마차에 동승한 이들 네 명의 아이러니한 관계는 점점 드러난다. 서부 영화의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현금 사냥꾼은 '흑인'이며, 남북 전쟁에서 참전 경험이 있는 무려 링컨의 자필 편지를 가지고 있는 '소령'이다. 하지만, 그녀를 잡아가는 교수형 집행인조차 저어하는 링컨의 칭애를 받는 흑인 북군 소령을  백인인 여죄수는 그의 소중한 링컨이 자필 편지에 침을 뱉으며 조롱한다. 그런가 하면, 마지막 동승한, 그들의 성과를 증명해줄 신임 보안관이란 자는, 과거 악명이 자자한 남부군 무리의 아들이다. 하지만 과거 북군의 소령이 이제 남군이었던 보안관에게 죄수를 넘기고 전과를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듯, 전쟁 후의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그 아이러니와 상관없이 그들 속에 쌓인 증오심은 여전하다. 

그렇게 아이러니한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도착한 산장에서 더 극대화된다. 언제 가더라도 정다웠던 미니의 산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걸쇠가 사라진 산장의 문처럼 주인 내외가 사라진 수상한 사람들로 그득한 산장이다. 하지만 눈보라에 베겨내지 못하는 산장의 문을 못질을 하고 닫듯이 그들은 눈보라 속에서 삶을 건사하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한 자리에 모여 든다. 


하지만, 처음 들어설 때부터 산장의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워렌 소령의 촉이 틀리지 않았듯, 산장 속 인물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는 수면 위로 떠오른다. 산장에 머물던 오래된 손님 샌포드 스미더스 (브루스 던 분)과, 산장을 대신 맡은 멕시콘 인 밥(데미안 비쉬어 분) , 그리고 역시나 눈을 피해 들어온 카우보이 조 게이지(마이클 매드슨 분), 그리고 진짜 교수형 집행인 오스왈도 모브레이(팀 로스 분)처럼, 그저 산장의 손님이었던 이들이, 새로 합류한 네 명의 손님들과 합쳐져, 결국 중간의 식탁을 경계로 '남과 북'의 경계로 나누어 지듯, 남북 전쟁이 끝난 시점이지만, 여전히 마무리 되지 않는 전선을 이룬다. 

그리고 그 전선을 기점으로 쏟아부어지는 각자의 전사, 속내, 그저 역사 속 남북 전쟁이 있었다. 라는 단 한 줄에 담겨져 있는 남군과, 북군, 그리고 북군에 참가한 흑인과, 패배한 남군의 극복될 수 없는 자존심,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상흔들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수위를 높여간다. 애초에 산 속의 마차에서 부터 긴장감을 쌓아올리던 남과 북, 흑과 백의 갈등은 결국 워렌 소령의 도발로 총을 들 수 밖에 없게 된 샌포드 스미더스 장교의 발사로 그 팽팽한 경계가 흩어진다. 산자는 워렌 소령이고, 죽은 자는 이제는 갈 곳도 없어진 듯한 한 때 남군의 장교지만, 퍼붙듯이 쏟아낸 그들의 속내에서, 전쟁은 그들의 가족도, 자존도, 동지도 모든 것을 앗아 갔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눈쌓인 산장 속에서 드러난 미국의 민낯, 그리고 
하지만 남과 북의 전선은 그저 <헤이트 풀8>의 한 장이었을 뿐이다. 마치 개신교의 목사와도 같은 옷차림으로 여덟, 아니 이젠 일곱 명의 군중을 상대로 자신이 미니의 산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수상했던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한 워렌 소령의 추리가 어긋나지 않게, 영화는 커피 주전자 속에 든 독약으로 인한 독살로 본격적인 2막이 시작된다. 그리고 2막의 주제는, 데이지 도머그와 그녀의 조력자들이다. 워렌 소령의 독무대 뒤에서 은밀하게 벌어진 독살 음모는 어이없이 마부와 그토록 집요하게 하지만 때로는 애틋하게 그리고 결국은 잔인하게 여죄수를 산 채로 호송해 가던 존루스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하지만 거기서 살아남은 자들이 의기양양하게 데이지 도머그의 조력자들을 색출해 내려하기가 무색하게, <헤이트풀8>이 무색하게 뜻밖의 등장인물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조력자와, 조력자가 아닌 인물들이 서로 핏빛 실랑이를 벌이며, 결국은 '헤이트 풀'은 시체의 풀로 남겨지게 된다. 



영화는 인간의 사냥이 용인되는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남북 전쟁의 전사를 훑으며, 결국은 범죄 집단과의 육탄전으로 막을 내린다. 주인이 이미 제거된 산장은, 흡사, [리바이어던]에서 홉스가 말한 바 있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떠오르게 한다. 처음 눈 쌓인 산 속에서 존 루스와 워렌 소령이 만났을 그 순간부터, 그들은 때론 마차 속 생존을 두고, 혹은 남인가 북인가, 혹은 누가 먼저 총을 잡는가, 누가 조력자인가를 두고 이합집산을 시도하지만, 결국은 서로가 죽고 죽였을 뿐이다. 마치 '총'으로 흥한자, '총'으로 망하듯이, 하지만, 그 결국은 죽고 죽이는 치킨 게임이 되어버린 증오의 산장은, 미국 역사의 상징처럼 선명하다. 총 한자루에 의지해 생명을 건사했던, 서로의 생존을 위해, 대의를 위해 남과 북이 나뉘었던 시간, 그리고 범죄와의 전쟁 속에서 서로가 자멸해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쩌면 그리 길지 않은 미국의 전사가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그 길지않은 장황한 역사는, 때론 서로의 실체를 더듬는 '아가사 크리스티'식 추리로,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다른 영화같은 총부림으로 결코 짧지 않은 168분의 런닝 타임을 흠씬 채운다. 

세계 1위의 국가, 하지만, 그 한 꺼풀을 벗겨내고 보면, 168분의 시간 동안 죽고, 죽이는 핏빛의 '증오'로 흥건한 시간처럼, 지난 역사는 '증오'를 그럴 듯하게 위장해온 역사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 속 내내 등장인물들이 그리도 궁금해 했던 워렌 대령이 소지한 링컨의 편지처럼, 그 증오를 덮어 '하나의 공동체'로 위장할 수 있는, 아니 증오를 덮을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증오심에 어쩔 줄 몰라하는 공신력 없는 보안관이 아니라, 남군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조차 죽어가며 그리워하는 편지로만으로 존재감이 컸던 링컨과 같은 '국가'라는 아이러니다. 


by meditator 2016. 1. 21. 16:04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셜록의 '잘생김'을 연기하고, 마틴 프리먼이 왓슨의 '어수룩한 똘망함'을 연기하는 bbc의 시리즈 <셜록>이 올해는 극장판으로 찾아왔다. 극장에서 만나는 셜록의 반가움도 잠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2010년 꼴랑 3부작짜리 시리즈 1로 전세계의 셜록매니아를 만들어 놓고, 셜록을 보기 위해서는 명이 길어야 한다는 농담이 생길 정도로, 그 다음 해는 거르고 2012년에야 다시 3부작 시리즈 2를 선보였던 셜록은, 팬들의 애타는 성화에 못이긴다는 듯 2014년에야 시즌3를 선보였다. 허긴 시즌2의 마지막 빌딩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날려 죽음을 택한 셜록을 다시 살아나게 했으니 어디 2년이 문제이겠는가? 시즌3의 화려한 극중 퍼포먼스와 달리, 팬들을 매료시켰던 바 '추리'의 엉성함에 대한 논란을 뒤로하고, 그저 '죽음'에서 셜록을 건져 시리즈를 건재시켰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시 1년, <셜록; 유령신부> 마지막 특별 상영 영상에서 마틴 프리먼이 '볼멘 소리'로 또 겨울이냐고 하듯, <셜록>은 모처럼 1년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웬걸, 3부작도 아까운 듯 115분 극장판이다. 하지만, 이 극장판 <유령신부>는 어쨋든 셜록매니아들에게, 다음 시리즈의 셜록을 기다릴 소중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이렇게, '포탈 사이트'에 올라온 앞선 셜록 시리즈를 보지 않고 개봉한 영화 <셜록;유령 신부>를 봐도 되겠냐는 질문이 무색하게, 영화 자체를 어떻게 보고 즐기느냐와 상관없이, 개봉한 <셜록;유령신부>는 이런 셜록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또한, 전작을 보지 않고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린 채 극장을 나서게 만드는 것은, <유령 신부>가 일관되게 이전 셜록 시리즈의 시선을 유지하며,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질펀한 농담처럼, 영화 내내 흐르는 '은유'와 '상징'들은, 이전 작품들을 보지 않아도 그 나름 묘미를 찾을 수는 있지만, 이미 전작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한층 풍성하게 <셜록;유령신부>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든다.

 

 


거대한 농담, 셜록

더글라스 매키넌 감독의 <셜록> 시리즈는 아서 코난 도일 원작의 셜록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하지만, 가이 리치 감독이 만들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셜록을 연기한 액션 블록버스터 <셜록 홈즈> 시리즈와는 궤를 달리한다. 이름만 셜록 홈즈일 뿐 '추리'보다는 '액션'에 치중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셜록과는 달리, 원작을 '리메이크' 했지만, 추리 소설인 원작의 맛을 살리는데 치중한다. 비록 시즌을 거듭할 수록 국회 의사당 폭발처럼 '추리'보다는 '사건'으로 인한 해프닝의 여파가 커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드라마 <셜록>의 매력은 셜록의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는 '추리'에 있다.

 

하지만 더글라스 매키넌 감독의 <셜록>은 그저 '추리'를 잘했던 소설 속의 명탐정 셜록 홈즈를 현대로 불러온 것만이 아니다. 고전 추리 소설 속 인물 셜록을 오늘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아서 코난 도일이 무덤에서 나오면 기함을 할 만큼 셜록을 '기만'하기도 한다. 그래서, 엄밀하게 시리즈 <셜록>은 '리메이크'보다는, '패러디'라 정의내리는게 어울리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꼬마들은 영국의 명탐정 셜록 홈즈와 프랑스의 괴도 루팡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다. 똑같이 '추리'를 기반으로 한 작품임에도 전혀 다른 맛을 내는 두 작품이, 그래서 심지어 모리스 르불랑이 <기암성>이라는 작품을 통해 두 사람의 대결 구도를 설정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두 인물은 대척점에 놓여있다. 굳이 <기암성>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명탐정 셜록 홈즈는 '추리'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무심한 '추리 기계'같은 인물이다. 여성을 배려하는 '신사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것은 '영국 신사'로서의 '에티듀드'를 넘어서지 않고, 여성은 물론, 그저 가끔 바이얼린을 켜는 외에 '줄담배'을 피우며, 머릿속으로 '추리'에 '추리'만 거듭하는 재미없는 인물일 뿐이다.

 

이렇게 19세기의 무미건조한 인물 셜록을 21세기의 현대로 불러온 시리즈 <셜록>은 그에게 새로운 주석을 덧댄다. 범죄에만 '홀릭'하는 그의 성격에는 범죄에 희열을 느끼는 '소시오패스'라는 해석이 붙여졌고, 줄담배를 피우며 추리에 골몰하는 그의 취향은, 추리의 상상력을 위해 '마약'에 빠진 나약한 존재로 거듭난다. 심지어, 왓슨 말고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던 그에게 여자도 등장하고, 숙적인 모리아티와의 '애증'은 묘한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그런 21세기의 문제적 인물 '셜록'의 전제 하에, 빅토리아 시대 여성 참정권 운동에 거부감없이 뛰어드는 셜록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영국의 국영 방송 bbc의 드라마는 <닥터 후>를 통해 대영제국의 여왕을 외계인으로 묘사하며 희롱한(?) 전력을 이어받아, 오랜 세월 대중들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해온 완벽한 인물이었던 셜록을 인간적인 약점의 결집체로 그려낸다. 그런 '인간적인' 약점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그 약점들을 가졌음에도 '추리'에 출중한 새로운 캐릭터 셜록이 21세기형 인간으로 21세기의 추리 매니아들을 신선하게 매료시킨다.

 

 


크리스마스 특별판, <유령신부>

그리고, 크리스마스 특별판으로 만들어진 <셜록;유령 신부>는 바로 이런 셜록의 아이러니한 지점을 극대화시킨 작품이며, 매니아들을 여러 선물적 장치가 마련된 작품이다. 영화는 더글러스 매키넌 감독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21세기를 배경으로 했던 셜록을 빅토리아 시대로 끌고 간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셜록>은 이것이, 셜록 이란 시리즈 위에 그려진 액자 소설 같은 형태의 작품이란 걸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이후 영화의 전개 속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현대씬들의 이물감을 자연스레 이해시킨다. 빅토리아 시대의 유령 신부 사건을 수사하던 셜록과 왓슨은, 아니 셜록은 사건의 클라이막스에서 느닷없이 현대로 돌아오며,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건이 셜록의 마약으로 인한 '환각'상태였음을 알린다. 하지만, 그 '환각'이 그저 상상이 아니라, 역사 속 실제 사건임을 무덤을 파서 증명함으로써, 마치 장자가 꾼 나비의 꿈처럼, 내가 나인지, 나비인지, 헷갈리게 하며, 역사와 현실을 오가는 '혼돈'의 재미를 극대화한다. '혼돈'의 재미는 이것만이 아니다. <유령 신부>에서 왓슨의 작품 속 셜록과 실제 셜록 사이의 충돌 역시 빈번하게 등장한다. 즉, 관객이 마주하고 있는 셜록이 실제 셜록의 아이덴티인지, 아니면 왓슨이 그려낸 작품 속 완벽한 탐정 셜록인지의 낯섬이 영화 <유령 신부>의 노림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영화 내내 빈번하게 등장하는 작품 속 셜록과 실제 셜록의 충돌, 그리고 현대의 셜록과 빅토리아 시대의 셜록의 헷갈림이 유령 신부 사건의 종착점에서, 느닷없이 모리아티로 변하는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다. 유령 신부 자체로만 보면, 여성 참정권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숨죽여 살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 미국의 kkk단을 모방하여 스스로 단죄에 나선다는 사건의 형식이지만, 결국은 숙적 셜록과 모리아티와 귀결되고 마는 셜록 시리즈의 구심력을 확인하는 허무한(?) 결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즉, 빅토리아 시대가 되었건, 현대가 되었건, 여전히 셜록은 심지어 죽었다는 모리아티를 상대로 '고전(苦戰)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기승전 모리아티의 숙명이란 것을 부연 설명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허무하고, 또 누군가는 흥미진진하게 다음 대결을 기다리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6. 1. 7. 15:34

2015년 마지막 12월 30일자 한겨레 칼럼,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5년의 한국 사회의 '공통의 감정을 꼽아보라면 '혐오'로 택할 것'이라고 정의내린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물을 심리적 여유조차 사라진 사회에서, 종편은 늘 그랬듯이 '북한'을 혐오하고, 일베, 소라넷 등의 일부 사이트를 중심으로, '여성', '호남', '민주당'의 혐오가 판을 쳤다고 분석한다. 또한, 그렇게 왜곡된 '인정시스템'이 혐오를 매개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 시킬 때, 그에 대한 저항은 '여혐혐'의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혐오'를 혐오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여성들의 움직임뿐인가, 우리들 역시 사회에서 돌출되는 각종 정치적, 사회적 혐오 현상에 대해 '더러운 똥'보듯이 '피하고 보는' 소극적 '혐오주의'로 맞서온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혐오주의'사회에 대해 김종엽 교수가 내린 처방은, '혐오'가 아닌 '분노'를 촉구함이다. '타자의 행위는 존중받을 만한 것이 못되는 '질'이 되고, 그런 인간은 '벌레'가 되는 사회에서, '혐오'를 '혐오'하지 말고, 그런 '혐오'에 대한 '분노'를 각성할 수 있는 '공통된 감각(common sense)', 상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혐오의 대상이 된 여성들이 즉자적 저항으로 '혐오'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절박함 속에서, 또한 김종엽 교수의 지적처럼 고착되어가는 갑을 관계의 견고함과 촘촘함이 어떤 경지를 넘어서가는 세상에서, 그가 말하는 '분노'는 아득하다. 우선 이른바 '상식'이란 것의 '소통'조차 막연한 사회에서 어떤 공통의 분노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란 돌부리가 발을 건다.

 

 


 

혐오주의 세상에 필요한 건 넉넉한 유머

그런 현실에서 프랑스의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어쩌면 2016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넉넉한 유머'를 담뿍 담은 영화로 보인다. '혐오주의'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은, '혐오'에 대한 '혐오'나, '혐오'에 대한 날선 분노에 앞선 마음이 넉넉해지는 '풍자'와 유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잠옷 바람으로 자신의 바깥 일을 코에 걸고 집에서 '진따'같이 구는 아버지(부루와 뽀엘 부르드 분)와, 그런 아버지에게 꼼짝못하고 가사 일에 매몰되어 있는 엄마(욜랜드 모로 분), 그리고 그런 집안이 싫어 가출했다는 큰 아들과, 그런 아비가 싫지만 아직은 어려서 그 무엇도 해볼 수 없는 어린 딸(필리 그로인 분)로 이루어진 가정이 등장한다. 그런데, 웃프게도 바로 이 가정이 하느님네 가정이란다. 즉, 하느님, 신은 가부장적인 그의 태도와 시각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세상을 조정한다. 자신의 집무실이라고 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컴퓨터 한 대와 인간사의 정보로 가득찬 외딴 방에서 그가 하는 짓은, 흔히 우리가 '혐오하는' 남성혐오주의자들, 혹은 남성우월주의자들의 행태 바로 그것이다. 그런 '남성'인 신이 만든 세상은 당연히 그의 따분한 일상의 재미를 위해 끝없는 전쟁과 재해로 이어진다. 그리고 신은 마치 어덜트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인간 세상의 재앙을 소일거리로 즐긴다.

 

아들은 그런 아비의 세상에 반기를 들고 집을 나가 자신을 제물로 바쳤지만 세상은 아들, 예수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난폭한 아비를 참다못한 딸이 '세탁기'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 오빠가 하듯이 '사도'들을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 '아비'를 '혐오'한 딸은 그저 '아비'를 '혐오'하는 딸로 사는 대신, 자신이 '신'이 되어 '사도'들과 함께 세상을 구하는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세상을 구하고자 한 딸 에아가 한 첫 번 째 일은 바로 아버지의 '전지전능'의 상징이었던 인간들 죽음의 비밀을 '봉인해제'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인간 세상에 나온 딸은 그저 쓰레기통을 뒤져 고래 고기로 만든 버거를 먹다 토해버리는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어린 소녀에게 '충고'의 말을 건네온 노숙자가 있고, 그는 예수의 행적을 남긴 사도들처럼, 소녀와 소녀가 만날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길 사명을 수여받게 된다. 그리고 소녀는 그와 함께, 어머니가 좋아하는 18의 숫자를 채울 나머지 를 만날 길을 떠난다.

 

소녀가 찾아간 여섯 명의 사람들은 예수가 처음 만난 어부나 세리들처럼, 선뜻 '사도'라는 운명적 명칭이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기록을 남겨야 하지만 난독증이 있어 쉬이 글을 쓰기 힘든 노숙자처럼, 성도착자, 한쪽 팔을 지하철 사고로 잃고 그 누구와도 선뜻 가까와질 수 없는 소녀, 마흔이 넘도록 열심히 일만 하던 사내, 혹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살생' 욕구에 시달리던 중년의 가장, 이제는 나이가 들어 돈을 주고 남자를 사서 '사랑'을 구해야 하는 구차한 처지의 여인이나, 아주 어릴 때부터 병이들어 고통 속에서 죽음마저 무덤덤해진 어린 소년이다. 하지만 '죽음'이 봉인 해제된 세상에서 이들의 삶은, '죽음'을 기약할 길 없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궤도로 접어들게 된다. 또한, 그들을 찾아간 에아는 그들 내부에 흐르는 음악을 듣고, 그들의 본질적 가치를 발견하게 도와준다.

 

 


 


도발적 사도들이 실천한 남성중심 사회의 '사랑'

즉, 가부장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던 성도착자는 알고보니 '외로움'의 왜곡된 표출이었고, '성공지상주의'사회에 자신을 매몰시켰던 남성이 원했던 것은 '자연'이었다는 식이다. '남성'과 '인간' 본위의 사회는 이들의 본연의 욕구를 왜곡시키고 거세시켜 결국은 사회에서 배제된 외롭고 슬픈 삶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에아'의 도움으로 그들은 자기 내부에 귀를 기울이고, 제한된 죽음이 기약된 시간 내에서 정말 자신이 하고싶은 걸 한다. 결국 '기약할 수 없는 죽음'과, '만들어진 사회'가 그들의 삶을 방해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어두운 방에서 헐벗은 여인들로 욕구를 충촉하던 성도착자는 외로움을 넘어 사랑에 도전한다. '살의'는 사랑으로 승화되고, 때론 그 사랑의 귀착점이 '인간'이 아니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저 제 각각이었던 여섯 명의 사도들은 '에아'의 도움으로, 그 시절 예수가 그러하듯이 '사랑'을 실현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으로 실천하려 했던 '사랑'은 이제 에아와, 여섯 사도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그 대체된 사랑은, 십자가에 대속된 예수만큼이나, 아비인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전복시킬 위험한 '도발'이다. 이미 '죽음'에서 '봉인해제'된 인간들은 '아비'인 신의 재미인 '전쟁'을 포기했고, 사도들은, 전쟁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 세상'의 터부를 깨고, 금기를 넘어선다.

 

결국 신은 에아를 잡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려 하지만, 딸을 잡기는 커녕 그의 돼먹지 않은 행동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뿐이다. 영화 마지막까지 세탁기 공장에서 세탁기 통안을 호시탐탐 노리지만, 그가 돌아갈 길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부재한 신의 자리를 집안 일이나 하던 엄마가 대신한다. 그리고 엄마는 찐따같은 아비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이었던 그 존재처럼 꽃무늬의 하늘로 대변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봉합한다. 폭력적인 아비, 무기력한 아들 대신, 도발적으로 사랑을 실현한 딸, 그리고 그 딸이 저질저놓은 세상을 평화로 마무리한 여신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전설이 된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가 고릴라와 사랑을 나누어 아기를 낳고, 신이 성직자에게 멱살을 잡히며, 살인자가 장애인과 사랑을 나누고, 성도착자가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며, 여자 옷을 입은 남자 아이와 신의 딸이 사랑을 하는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풍자하고, 조롱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갑갑한 세상을, '죽음'의 봉인해제처럼,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숱한 규칙과 원칙들을 봉인해제 해 버린다. 그 황당함에 혀를 내두르다, 어느덧 어쩌면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말랑말랑한 머리와 마음이 아닐까란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by meditator 2016. 1. 4. 15:55

12월 5일 어스름이 지는 겨울 오후 4시 신사동 브로드웨이 롯데 시네마, <늦어도 11월에는>의 마지막 하루 전날 상영된 <나의 어머니>에는 역시나 훵덩한 극장을 채운 남긴 몇 명의 관객만이 8월 개봉된 그때처럼 난니 모레티 감독의 이 영화를 만날 뿐이었다. 


이 날 상영된 <나의 어머니>는 특별 상영으로 이 영화제를 기획한 영화 평론가 오동진 씨와 <삼거리 극장>, <러브 픽션>의 전계수 감독이 함께 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마련되었었다. 먼저 대화를 시작한 전계수 감독은 감독의 신분으로 역시나 감독인 영화 속 여주인공이 처한 상황, 그리고 이탈리아의 영화 현장에 대한 십분 공감을 표시했다. 이후 함께 합류한 오동진 평론가와 함께, <나의 어머니>라는 한 편의 영화를 넘어,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조류의 난니 모레티 감독의 영화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우었다. 오동진 평론가는 <나의 어머니>와 그 이전 <아들의 방>, <조용한 혼돈> 까지 상실 3부작의 범주에서 이 영화를 살펴보며, 좌파 감독으로 보수 우파 정권 속 살아가는 감독의 감상이 드러나 있는 면을 지적했다. 또한, 감독으로서 전계수 감독이 짚은 한국의 정서에서 흥행을 보장하기 힘든 난니 모레티 감독의 서사를 놓고 오동진 평론가는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거장의 화법에 대해서도 짚었다. 이런 영화 후의 두 사람의 평 혹은 감상은 <나의 어머니>를 단순히 접한 관객이나, 난니 모레티 감독을 미처 알지 못했던 관객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시간이었다. 



어머니보다 어머니의 죽음이 더 버거운 중년의 딸, 그녀의 삶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지켜보는, 아니 지켜보고 싶지만 자신의 삶에 치어 그 마저도 버거워 하는 마르게리타(마르게리타 부이 분)의 이야기는 '리얼리즘'의 난니 모레티 감독의 서사가 아니더라도 효(孝)와 가족을 중심에 놓는 한국적 정서에서는 애초에 불편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건 한국식의 눈가리고 아웅일 뿐 <나의 어머니> 속 이야기는 몹시도 '리얼'한 상황이다. 

마르게리타는 여성 감독이다. 영화는 점점 무기력하게 노쇄해가는 어머니와 딸, 그리고 아들의 이야기보다 중년 감독으로서 마르게리타의 삶의 현장에 더 주목한다. 즉 아픈 어머니의 자식으로 오빠가 자신의 직업조차 전폐하며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것과 달리, 감독으로 한 영화를 책임져야 하는 마르게리타에게는 어머니와 함께 있을 시간을 내는 것조차 힘겹게 현실의 삶에 치어있다. 이런 마르게리타의 삶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어느덧 현실이 버거워지면서도, 현실에 함께 굴러갈 수 밖에 없는 <화장>의 오정석(안성기 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 이건, 한국이건 그가 대기업의 상무이건, 좌파적 색채의 영화를 오래 만들어 온 감독이건 그리 다르지 않다. 어머니의 간병을 이유로 직장에 휴직을 낸 오빠를 만류하는 직원에게 보이는 오빠의 피로한 눈빛이, 사실은 마르게리타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한 것이다. 

노동 현장의 이야기를 찍어가면서도 영화적 메시지의 투철함에 심혈을 기울이기보다 헐리웃 출신이라는 유세를 하며 매번 엇나가는 주연 배우와의 조합에 골머리를 썪는 현실적인 영화 현장의 상황이나, 감독의 세계관에 대한 질문에 감독 자신 조차도 공허해 하는 중년의 허무함은 곧 어쩌면 곧 돌아가실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막상 어머니와의 시간 조차 내기 힘든 간병의 어쩌지 못한 상황으로 대치된다. 즉 중년 혹은 이제 장년에 들어선 삶은 그녀가 오랜 시절 라틴어 교수로서 살아온 어머니의 인생이, 죽음 앞에 무기력하다 느끼듯, 그런 그녀의 무기력한 감상은 고스란히 그녀 자신의 삶에도 투영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라틴어를 배우기 싫어하는 어린 딸이 라틴어의 존재 의미에 대해 물었을 때 공허한 답을 할 수 밖에 없는 마르게리타의 버벅거림은 곧,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로 관통한다. 그렇게 육친으로서의 어머니의 죽음 앞에, 어머니의 삶에 대한 회한과, 그녀 역시 어머니처럼 나이들어 가는 무기력함에 좌절하며 혼란을 느끼는 중년의 마르게르타의 삶은 묘한 '모전여전'인 것이다. 그렇게 현실에 쓸모없어지는 라틴어처럼, 그녀 자신이 열심히 찍고는 있지만 어쩐지 공허한 그녀의 영화처럼, 어머니와 딸이 해왔던 그것들은, 스케이트 보드를 좋아하고, 연애에 빠져있는 하지만 라틴어 따위의 존재 의미에는 공감을 가지지 못하는 딸에게는 별 의미없는 '과거'가 되어가는 것에 마르게리타는 어쩔 줄 모른다. 그저 육친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 앞에서 무너져 가는 '과거'에 대한 허우적거림이다. 

그런 마르게리타의 혼돈은 자기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한 회한으로 이어진다. 거만한 헐리웃 배우에 대한 불편함은 알고보니 배우의 기억 장애에 대한 오해로 이어지면, 그런 배우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지 못한 자기 중심적인 감독 마르게리타의 방식으로 국면은 전환된다. 어머니의 간병도 어머니보다 그런 어머니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갖춰지지 못한 딸의 입장이 우선한 것처럼. 



임종의 후일담으로 얻어지는 삶의 혜안 
그렇게 길지 않은 어머니의 투병 시간은 마르게리타란 중년의 인물, 자기 자신에 대한 여러 관점에서의 '반추'를 동반한다. 그리고 그런 반추의 시간 끝에 어머니는 자식들의 곁에서 세상을 떠나고, 그 장례의 형식에 휩쓸려가던 자식들은 그 속에서 비로소 어머니의 지난 시간을 만난다. 그저 허무하거나, 어린 딸의 버거운 라틴어 공부로만 남았던 지식의 전수자가 아닌, 그 누군가에게는 '어머니' 같았던 스승으로서 세계를 가진 '역사'가 된 어머니를. 그래서 그 어머니의 존재를 발견한 딸은, 육친의 어머니를 잃었지만 역사로서의 어머니를 만나 눈물젖은 웃음을 보인다. 난니 모레티 감독이 오빠로 비껴선 이 영화에서 이렇게 어머니와 또 다른 어머니인 중년의 딸, 그리고 그녀의 딸로 이어지는 여성 삼대의 삶의 역사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평론가 오동진은 <나의 어머니>를 통해 오래 보수 정권을 겪은 감독의 피로함 혹은 상실을 강조했지만, 그럼에도 결국 영화 <나의 어머니>의 말미에서 빛난 건 마르게리타의 미소이다. 나이들어 가는 삶은 권태와 피로를 누적하지만, 삶이 종착역에 이를 때까지 쉽게 내려놓을 수는 없는 일. 그 쓸모없는 라틴어 선생이라는 형식을 넘어 스승이라는 내적 존재의 의미는, 꾸역꾸역 영화를 이어가는 중년의 감독 마르게리타에게 번민의 끝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니까. 결국 그 싫어하던 라틴어 공부의 재미를 할머니의 자상한 지도 아래 알아가던 딸처럼, 마르게리타의 삶 역시 지금은 현실의 과정 속에 희화화될지라도 그 속에서 베리와의 교감을 가지듯 이해받을 수 있을 날이 있으리니. 난니 모레티 감독이 여전히 영화를 만들듯 말이다. 
by meditator 2015. 12. 6. 17:29

저명한 영화 평론가이자 이론가인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1947년 창간한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지인 까이에 뒤 시네마는 올해의 10대 영화로 다음 작품들을 선정했다고 한다. (osen 12.2 최나영)


1. 나의 어머니(Mia Madre, 난니 모레티 감독)
2. 찬란함의 무덤(Cemeteryof Splendour,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
3.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In the Shadow of Women, 필립 가렐 감독) 
4. 더 스멜 오브 어스(The Smell of Us, 래리 클라크 감독) 
5.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Max: FuryRoad, 조지 밀러 감독) 
6. 도원경(Jauja, 리산드로 알론소 감독)
7. 인히어런트 바이스(Inherent Vice,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8. 천일야화 볼륨1(Arabian Nights, 미겔 고메즈 감독) 
9. 상가일레의 여름(The Summer of Sangaile, 알란테 카바이테 감독)
10. 해안가로의 여행(Journey to the Shore,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이 발표가 난 이후 언론에서는 우리가 지난 여름 열광했던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가 세계 10대 영화에 뽑혔다는 기사가 등장했다. 하지만, 그 열광했던 <매드 맥스> 외에, 나머지 아홉 편의 영화를 비록 프랑스의 영화지 선정이라지만, 올해의 10대 영화라는 그 영화들이 우리 관객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언론은 거의 없었다. 





불공정한 선택에 던지는 달걀; 늦어도 11월에는 
그 중 <찬란함의 무덤>, <인더 새도우 오브 우먼>, <도원경>, <천일야화 볼륨>, <상가일레의 여름>, <해안가로의 여행>은 부산 국제 영화제를 통해, 그리고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전주 국제 영화제를 통해, 영화제를 찾은 일부 매니아 층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 이후 일반 관객을 위한 기회는 얻을 수 없었다. 단지 <나의 어머니>만이 8월 20일 개봉했지만 박스 오피스 만명을 겨우 돌파한 채(?) 조용히 사라져 갔다. (박스 오피스 10131명) 그렇게 세계적은 인정받은 좋은 영화들이 아주 적은 관객들과 만나거나,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사라져 가고, 대신 우리는 멀티 플렉스 시간표를 가득 채운 대기업 유통의 선택권이 거의 없는 몇몇 영화들만을 '선택'한다 생각하며 산다. 

그런 기회의 불평등, 혹은 선택권의 봉쇄에 대한 계란 던지기가 시도되었다. 지난 11월 28일 개막한 <늦어도 11월에는>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제는 영화 평론가 오동진씨가 기획한 것으로 올 한 해 수입되었던 수십 편의 외국 영화들 중 스크린 독점 등 배급 구조의 문제 등으로 충분히 관객과의 만남을 만끽할 수 없었던 영화 들 중 선별하여 다시 한번 상영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올해의 10대 영화로 선정된 <나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미셜 공드리의판타지 멜로<무드 인디고>, <렛미인>의 미국판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평화 행진을 다룬 <셀마>까지 다양한 장르 27편의 영화들이 브로드웨이 신사 롯데 시네마를 통해 12월 6일까지 98회 상영중이다. 

마음같아서는 한 해 동안 게으름을 핀 내 자신을 되돌이키듯 하루 종일 신사동 그 어두컴컴함 공간에 차지하고 싶지만, 늘 삶의 또 다른 핑계가 나를 쉬이 신사동으로 몰지 못했다. 그래도 지난 9월 개봉했을 때부터 보자 마음 먹었던 <이민자>라도 꼭 봐야 하겠다는 의지(?)로 신사동을 향했다. 신사동 번화가가 무색하게  멀티 플렛스라기엔 조촐하고 고즈넉한 극장, 그곳에서 글쓴 이처럼 늦어도 11월 아니, 12월 초라도 미처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물론 낮시간이라는 시간 제약도 있겠지만, 이 영화제를 기획한 오동진씨가 '실패'라고 내놓고 자책할 만큼 영화제는 한산했다. 기회의 불공정을 소리 높여 보지만, 이미 우리 안에 내재화환 문화의 획일화의 뿌리는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어 수위에 점하지 않고서는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힘든 문화의 단선화는, 좋은 의도조차 무기력하게 만드는데 특효약이 아닐까란 회한조차 들었다. 허긴 '국정 교과서'보다, 한 여가수의 불손한 컨셉이 더 화두가 되는 세상에, 애초에 이 시도는 '달걀'이 아니었을까? 그 언젠가 프랑스 문화원을 볶딱거리게 하던 문화적 갈증은 멀티 플레스의 휘황한 척하는 시간표가 덮은 지 오래일 지도 모른다. 


<이민자>; 우리 안의 호모 파베르를 상기 시키다 
조촐한 개막식에서 '삼년하면 천만 상'을 거머쥔 <이민자>는 1921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의 입성하려던 폴란드 여인 에바(마리옹 꼬띠아르 분)의 비극적 운명을 그려낸다. 부모가 전쟁의 와중에서 학살당한 에바는 동생과 함께 어렵사리 뉴욕에 이르렀지만, 그 관문 엘바 섬에서 그만 동생의 병으로 홀로 뉴욕에 떨어지게 된다. 

사고무친(다분히 브루노에 의해 의도된 바이지만)의, 가진 것도 없는 여자 에바의 운명은 역시나 가진 것이 무작정 뉴욕행 배를 탔던 그녀의 배에서의 부도덕한 행위로 귀결되는 그 전례를 고스란히 답습할 수 밖에 없다. 아니 그것은 에바라는 여성의 특수성이 아니라, 전세계, 역사의 고래로 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진 것없이, 도움을 받을 길 없는 여성들의 보편적 행로이기도 하다. 

그렇게 에바는 운명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뚜쟁이 브루노(호아킨 피닉스 분)의 눈에 띄어 뉴욕 뒷골목 스트립바의 일원이 되어간다. 영화는 스트립바를 배경으로 한 만큼 상체를 드러낸 여성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지만, 전혀 야하지 않다. 오히려 그녀들의 나신은 그녀들을 보고 아우성을 치는 남성들의 반응보다 시선을 잡아끌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신은 뉴욕 뒷거리에서 가진 것 없는 여성들의 유일한 대안일 뿐이다. 그 드러낸 젖가슴을 무기로 한 그녀들은 그래서 뚜쟁이 브루노에 의지할 수 밖에 없고 결말의 비극적 상황을 유도한다. 

그렇게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어, 혹은 육체를 팔아 삶을 영위하는 브루노의 사업에 떨어진 에바, 이미 배 위에서 살기 위해 몸을 팔았던 그녀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결과론적 행위를 내면화하지 못한 채 도덕적으로 고뇌한다. 그리고 그 고뇌는 그녀에 대한 '집착'을 어쩌지 못하는 브루노에 대한 거리감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내내 선정적인 브루노 사업 속에 휘말렸음에도 그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놓아버리지 못한 에바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녀의 완강한 거부에 절망하는 브루노의 순애보 역시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도덕저 고뇌와 순애보라는 극단의 감정은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력으로 완성된다. 


TRAILER


그러나 <이민자>가 마음에 남는 이유는 1921년 운명적 삶에 휘말린 여자 에바의 슬픈 운명 때문이 아니다. 브루노의 이율배반적 순정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1921년의 뉴욕 뒷골목의 비루한 삶이, 21세기의 오늘에도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에바가 가진 것도 없이 뉴욕 행 배에 무작정 동생과 자신을 싣게 된 것은 바로 자신의 나라에서 행해진 무차별 학살 때문이다. 세상은 is의 파리 테러를 '침공'이라 규탄하지만 정작 그 한달 전에 벌어진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다국적군의 예멘의 모카 일반인 131명 학살은 세상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아프가니스칸, 이라크, 시리아 등 나라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민간인 학살에 대해 세상은 외면한다. <21세기 자본론>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르몽드에 기고한 글에서, 중동발 테러의 원인을 석유 자원을 근간으로 해서 축적된 막대한 부가 일부 국가 소수 층에 치중된, 그리고 그것을 방조한 서방 국가들로 인해 벌어진 불평등에서 기인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곳에서 부모를 혹은 삶을 잃은 사람들은 에바처럼 정처없이 자신을 '희망'의 땅으로 던질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온 '엘도라도'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의지할 곳없는 에바가, 결국 브루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듯이, '희망'을 찾아온 '현대'의 이민자들은 유럽의 '호모 파베르'가 되어 버린다. 2015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태를 보고 2005년 프랑스의 전국적 소요 사태를 떠올린 이들도 있다. 즉 감전사로 죽은 두 명의 소년으로 부터 시작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던 데는 그저 시민권 부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프랑스 내 소외, 가난, 불평등 심화의 양극화에 기인했다고 당시 진단했었다. 이민자들은 대를 이어 프랑스 내 도시 근교 열악한 삶의 환경 속에서 실업률 20%의 희망을 기약하기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계는 파리의 사태를 서구와 is라는 이분법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일부에서는 오히려 그보다는 프랑스 내의 사회 모순으로 보고자 하는 시각도 있다는 점에서, 영화 <이민자>는 그저 한낱 에바와 브루노의 이야기로 닫혀지지 않는다. 영화 마지막 브루노는 자신의 위험을 무릎쓰고 에바와 그 동생을 도피시키지만 그녀들이 의지해 가는 일엽편주처럼 그들의 미래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녀들의 위태로움은 이 2015 그럴듯한 부의 겉치레에 속고사는 우리들 허상의 삶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5. 12. 3. 17:47

결국 안상구(이병헌 분)가 우장훈(조승우 분)와 함께 찍으려고 했던 영화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전 국민을 상대로. 미래 자동차 비자금 스캔들은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 장필우를 무너뜨렸으며, 거대 기업 미래 자동차 오너 오현수(김홍파 분)와 유력 신문 논설 주간 이강희에게 검찰 수사를 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내부자들>의 버거운 승리
결국 빽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심지어 신체의 일부분조차 상실한 두 사람의 합작품이 우리 사회의 근간을 쥐락펴락하는 언론, 정치, 경제의 카르텔을 뒤흔들어 버렸다. 가지지 못한 자의 의협심이 가진 자의 성벽을 무너뜨린다는 이 시나리오는 최근 1000만 관객을 돌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26일 청룡 영화제에서 그 주인공 중 한 명에게 남우 주연상을 선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영화 <베테랑>의 설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행동파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과 그를 중심으로 뭉친 특수 강력사건 담당 광역 수사대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가 배후에 있는 사건을 수사한다. 영화의 소개들에 등장하듯 '우리에게 이런 형사 한 명쯤 있는 거 좋잖아'라고 하듯 그런 형사와 그런 형사와 같은 동료들이 갑질 진상을 떠는 재벌 3세를 통쾌하게 쳐부셔준다. <베테랑> 속 공권력은 권력에 눈치를 보지만, 결국 자신에게 맡은 바 공적 기능에 충실한 '정의의 수호자'이다. 그래서 영화 <베테랑>을 보고 나면 속이 다 시원해 진다. 조태오의 패악이 강력하면 할 수록, 그를 패태기쳐버릴 '정의'도 강력하게 작동할 테니까. 그럼에도 <베테랑> 속 대한민국은 순기능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야 만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그 '갑질'을 하던 세력을 축출해 버렸는데, 영화 <내부자들>의 뒷맛은 어쩐지 씁쓸하다.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이나 결국은 따지고 보면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갑질'의 아우토반을 몸으로 막아 저지한 '환타지'인데도,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이 다르다. <베테랑>이 한바탕의 일장춘몽처럼 화끈하게 환타지스럽다면, <내부자들>은 그 버거운 승리만큼 되돌아 오는 현실의 무게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내부자들>의 승리를 꿰어찬 두 사람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베테랑> 속 광역 수사대가 팀원들이 함께 승리의 축배를 나눌 수 있는 반면, 안상구는 그의 손목아지가 날라갔으며, 그가 아끼던 조직의 후배 박사장(배성우 분)은 배신했으며, 그를 돕던 주은혜(이엘 분)는 죽임을 당했다. 우상훈 역시 마찬가지다. 이른바 족보 없는 경찰 출신의 검사로 어떻게든 검찰 조직 안에서 동앗줄을 잡고 승승장구 해보려는 그는 결국 내부자가 되어 검찰을 떠나야만 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버려야만 했던, 그들의 버거운 승리는, 오히려 승리라기 보다는, 손목에서 부터 그들이 가진 것들을 쉬이 잘라버리는 그 사회악의 카르텔의 강고함을 절감하게 만든다. 


영화 속 재벌과 정치와 언론의 카르텔은 강고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재벌의 돈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하수인이자, 또 다른 권력의 점유자 정치인과 언론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영화 내내 벌이는 질펀한 섹스 파티는 그저 영화의 선정성이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붕괴를 상징한다. 도덕적으로 붕괴된, 아니 탈도덕화된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목, 나아가 신체, 생명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권력을 위해, 이강희의 세 치 혀는 그의 손을 통해 교활하게 교묘하게 대중을 조정한다. 영화는 이런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부와 정치, 언론의 카르텔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칼을 가는 안상구와 우장훈은 산꼭대기를 향해 날마다 바위를 힘겹게 올리는 시지프스(sisyphus)와도 같다. 결국은 올려보려 하지만,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보듯, 영화 내내 그들의 실패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영화 마지막 결국 그들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내부자들이었던 안상구가 조폭이란 이유만으로 외면받았던 바로 그 실패의 고리가 그들의 승리의 아이템이 되어, 검찰인 우장훈이 내부자들로써 카르텔의 덜미를 잡아챈 것이다. 이런 그들의 승리를 안상구는 한 편의 영화라 했다. 그렇다 영화 같은 환타지이다. 그래도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검찰이란 조직을 떠나면서도 저격을 멈추지 않는 검사도, 자신의 손목아지가 날아갔다는 울분에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 조폭도, 그들의 말처럼 영화같은 설정이다. 오히려 현실은 박사장이나 문일석처럼 회유되거나 잔뜩 겁에 질려 쫄거나, 까라면 까는 부장검사이거나, 떡고물에 감읍하는 민정 수석, 그리고 내부자의 단 맛에 홀리는 사람이기 십상이다. 그들의 영화 같은 승리는 오히려 그걸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의 비굴함을 연상케 한다. <베테랑>의 몰아치는 한판 싸움에 솔깃했던 관객들은, <내부자들>을 보고서는 오히려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이겨낼 수 없는 그 역설의 승리에서 현실의 막막함을 느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복수'를 하고 싶은 저 악의 카르텔의 비열함을, 갑갑함을 맛보게 된다. 


<베테랑>, <내부자들> 그들의 예봉이 향하는 곳은?
<베테랑>의 통쾌한 한 판 승이던, <내부자들>의 버거운 승리이던 우리 사회의 현실을 기반으로 한 '환타지'같은 영웅담의 예봉은 결국 우리 사회 부조리와 악의 근원이 '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재벌 3세든, 미래 자동차든 '부'를 배경으로, 기반으로 그것을 수단으로 우리 사회의 다른 '갑질'의 카테로리를 주무른다. 재벌 3세 조태오의 하수인은 치밀한 하수인 최상무(유해진 분)의 도움으로 법망을 자유롭게 빠져나간다. <내부자들>은 좀 더 치밀하다. 미래 자동차의 돈줄 앞에 정치인 장필우도, 언론인 이강희도, 대통령을 보필하는 민정 수석도, 부장 검사도 그저 또 하나의 '을'일 뿐이다. 2015년 대한민국에서 1000만을 찍고, 이제 다시 19금으로서 또 다른 흥행 신화를 쓰고 있는 영화는 현실 모순의 고리가 어느 곳에 매어져 있는가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11월 20일자 한겨레 신문을 통해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은 현실을 이렇게 진단한다. '  오늘날 대한민국의 세력 판도는 외환위기 이후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파워그룹의 신질서가 만들어낸 것이다. 관료와 재벌이 패권을 정치가 힘을 잃자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는 시대가 열렸다. 반독재 투쟁보다 반독점 투쟁이 훨씬 어렵다. 가장 힘이 센 자와 가장 자주 보는 자와 가장 분노해야 할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적이 안 보이는 시대다. 반독재 시대가 칼싸움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적이 누구인지, 어디서 공격하는지 알 수 없는 ‘테러의 시대’요 ‘드론의 시대’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모든 엘리트들이 다 포섭되었기 때문에 ‘어용’도 없고 ‘사쿠라’도 없다. 대한민국은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공공성이 결여된 이기적인 사회가 되고 말았다.'<내부자들>이 힘겨운 내부자의 승리를 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엘리트'가 포섭된 현실에 기반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테랑>의 정의가 싱그러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안흔 인간에의 순수한 믿음 때문이다. 

'1990년대가 ‘개혁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개혁의제를 선도했던 ‘시민단체’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2000년 총선에서의 ‘낙천·낙선 운동’ 이후 시민단체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은 전략적으로 개혁의제를 선도할 ‘지적 네트워크’가 경제 규모에 비해 굉장히 취약하다.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그 불행의 시대를 그나마 막아서고 있는 것은, 윤태호를 비롯한 웹툰 등의 날카로운 서사와 그 서사를 대중적으로 설득해 낸 <베테랑>, <내부자들>같은 영화들의 끈질긴 목소리이다. 



by meditator 2015. 11. 27. 16:13

<검은 사제들>을 보고 나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는 느낌은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란 느낌이다. 만듬새에 있어 군더더기 없고, 배우들의 연기가 적절했으며, 감독의 과잉조차도 피해간 삼박자가 잘 갖춰진 영화말이다. 


엑소시즘, <검은 사제들> 표현에 따르면 구마(驅魔)는 귀신을 쫓는 의식 또는 일을 지칭한다. <검은 사제들>에서 다루고 있는 엑소시즘 자체는 1973년에 개봉한 영화 <엑소시스트>를 넘어서지 못한다. 소녀의 몸 속에 들어간 악마를 사명감을 가진 두 사제가 축출한다는 원론적 이야기구조를 그대로 따른다. 

하지만 이 평범한 엑소시즘의 이야기 구조가 장대현 감독이 구현해 낸 '한국 사회'라는 곳에 오면 특별한 구제 장치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사회적 의미를 지닌 엑소시즘 
영화의 시작은 뺑소니 사건으로 시작된다. 12 악령 중 한 악령이 한국으로 잠입(?)했다는 소식을 받아든 로마 교황청은 비밀리에 구마 사제를 한국으로 급파하고 악령를 손에 넣은 채 다급히 한국을 빠져나가려던 교황청의 사제는 그 과정에서 뺑소니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영화는 초반 그저 사제의 차량 충돌 사고로 보여졌던 사고가, 이후 사실은 뺑소니 사고였음을 드러내면서 평범한 엑소시즘의 영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즉, 구마라는 목적을 위해 거리를 거닐던 평범한 여고생을 치고 뺑소니를 치는 교황청의 사제의 행동은 비록 그것이 악령의 의도된 도발이라 할 지라도 자신의 권위와 목적의 정당화를 위해 평범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권력을 상징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악령을 퇴출하는데 실패한 로마 교황청, 그를 대신해  뺑소니 사건의 희생자 소녀의 몸 속에 들어간 악령을 퇴출하고자 나선 것은 김신부이다. 하지만 한국의 기성 카톨릭 교단 및 관계자들은 김신부의 구마 의식에 냉소적이다. 구마와 관련된 회의를 하지만, 대주교는 참석은 하되, 자신은 참석하지 않은 듯, 악령에 대해 그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듯 그 자리를 떠나 버린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12번째 부사제인 최부제를 선택하고 소개시켜주면서도 막상 그에게 김신부의 비리 영상을 찍어오라는 학장 신부나, 어떻게든 김신부의 구마 의식을 무마하려는 수도원장이나 김신부의 엑소시즘에 대한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문제를 어떻게든 최소화시키면서 잡음은 없애려고 하는 무사안일한 권위주의의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런 권위에 대항하는 김신부는 교단의 정통 신부의 모습에서 삐껴선 아웃사이더 그 자체이다. 

이렇게 권위 혹은 기성 권력에 대항하는 엑소시즘은 또한 이성에 대한 대비로서도 스스로를 규정한다. 학장 신부는 최부제에게 한국의 카톨릭에 대해, 모든 미신에 맞서 싸우며 성장한 이성의 종교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며 대주교와의 회의에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였던 수도원장은 정작 정부에 대항하는 반정부적 시위의 배후 인물로서 활약한다. 이렇게 영화 속 엑소시즘은 근대의 산문이었던 이성이 활약했던 제 영역의 모든 것을 그 존재의 상대편으로 자리매김하며, 탈근대적 모습으로 등장한다.  종교성 자체가 이성만의 영역이 아님에도 근대 이래 이성이 세계에서, 역시나 그 호혜를 받아 성장했던 이성의 영역으로서의 종교와, 사회 민주화를 외치지만 한 소녀의 불행에는 둔감한 사회 운동의 영역을 건들면서 한국 사회에서 편협하게 성장한 종교와 시민 운동의 영역을 드러내 보인다. 결국 근대 사회는 '이성'이라는 굳건한 토대를 만들었지만, 영화 속 김신부의 엑소시즘을 어떻게든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그 '이성'만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영화는 주장한다. 

김신부의 구마 의식, 그리고 그보다 강력한 악령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온 최신부가 숨어든 골목, 그 어둠, 그리고 그가 한 발만 내밀면 들어설 수 있는 휘황찬란한 거리는 그가 숨은 어둠과 대비된 허상의 밝음을 절묘하게 대비시킨다. 더구나, 소녀가 악령에 시다리며 죽어가는 소녀의 집은 서울의 중심 명동 한 복판, 그 복잡한 도시의 한 구석이자, 중심의 틈샘라는 걸 통해 영화는, 번듯한 우리 사회가 가진 체계와 권위의 그 허약함과 빈곳을 고스란히 설명해 낸다. 최부제가 한 발짝만 나서면 그 몸의 흉한 흔적마저 사라질 빛의 세계이지만, 역으로 거기서 한 발짝만 내딛으면 소녀가 악령에 휩쓸려 희생되어가는 어둠의 세계란 것을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검은 사제들>의 엑소시즘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엑소시즘을 다룬 어느 영화에서나 등장했던 구마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발전과 성공, 그리고 이성의 체계가 자리잡은 듯한 한국 사회의 어둠, 골목, 그 틈새이다. 

그렇게 기존의 권위와 이성의 영역에서 정당하게 인정받는 그 모든 것을 상대편으로 하며 드러낸 구마 의식이 맞닿아 있는 곳은 뜻밖에도 소녀의 구마 의식에 서로 협업하는 샤머니즘이다. 즉 근대의 이성을 탈피한 엑소시즘이 찾아간 곳은 뜻밖에도 가장 원시적이며 원초적인 종교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신부는 제천 법사와 그의 뒤를 잇는 딸 영주 무당과 함께 영신의 몸속에 들어간 악령을 퇴출하고자 한다. 마치 이성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 탈근대주의자들이 감성과 비논리, 상대주의의 세계에 침잠했듯이. 한국 사회를 이룬 기성의 체계에 대하여, 그 절름발이 이성의 뒤안길같은 구마 의식으로 소녀를 구원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그저 전체를 제쳐버리고 개인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개인적 고뇌에서 신부의 길로 도피한 최부제가 자신의 고뇌를 소녀의 구마 의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구원'의 길을 얻듯이, 결국 개인의 문제 역시 전체의,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밖에 없음을 영화는 제시한다. 




배우들의 호연, 그보다 돋보인 감독의 절묘한 배합 
대부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관람객들의 평은 '강풀의 조조'에서 '강동원이 나왔다. 강동원이 사제복을 입고 나왔다'처럼 배우의 존재감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동일하게 강동원의 존재감을 표명했지만 아쉬움을 제기했던 <군도>와 대비되는 평이기도 하다. 즉, 스타로서의 그 존재감이 강력한 강동원이란 배우가 똑같이 그 우월한 실루엣으로 영화를 휘젓지만, <군도>가 그로 인해 이야기구조를 무너뜨린 것에 비해, <검은 사제들>은 오히려 그것이 득이 된 바, 결국 강동원에 빠져들지 않고 '약'으로 잘 친 장대현 감독의 성과라 할 것이다. 

김윤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영화에서 김윤석은 그가 버려진 고아로 또 다른 아이를 유기하여 자신과 같은 괴물로 키울 때나(화이), 폐선 직전의 배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칠 때나(해무), 언제나 그 무언가와 대적하여 그 스스로 괴물이 되어 싸우는 존재로 등장한다. <검은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부제였던 정신부가 결국 악령의 손아귀에 넘어갔음에도, 그리고 그의 구마 의식을 성폭행이라 폄훼함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악령에 대항하여 싸운다. 그런 김윤석의 연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지만, 동시에 진북하거나, 그 무시무시한 싸움의 기로 인해 영화가 흐트러질 수 있다. 그러나, 강동원이 최부제로 절묘하게 씌였듯, 김신부의 괴물같은 존재감도 <검은 사제들>에서 소모적이지 않다. 

그저 묵직하게 구마의 맥을 놓치지 않을 뿐. 덕분에 영화는 역으로 강동원의 존재감도 살고, 김윤석의 연기도 진중하게 전해진다. 연기뿐만이 아니다. 구마 의식 자체와 적절하게 배합된 거리에서의 악령과의 대치 씬은 블록버스터 영화 못지 않은 흥미를 자아낸다. 덕분에 평이한 엑소시즘은 적절한 의미와 깔끔한 만듬새의 영화로 완성된다. 

by meditator 2015. 11. 20. 16:32

이선균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구속과 구질이 평범한 선발 투수'라 정의내렸다. 하지만, 이 '평범하다는, 그리고 심지어 그의 까칠한 연기가 진부하다는 '이선균'의 '성난' 연기가 이제 스테디 셀러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끝까지 간다>에 이어, 다시 한번 짜증내고 성질내는 연기로 돌아온 이선균의 <성난 변호사>가 <마션>, <인턴>에 이어 한국 영화로는 유일하게 박스 오피스 3위에 안착하며 순항 중이다.




이선균에 의한, 이선균을 위한 <성난 변호사> 
2015년 백상 예술 대상에서는 이변의 장면이 연출됐다. 바로 남자 최우수상에 이선균과 조진웅이 동시에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 맥스 무비 시상식에서 영화에서는 주연이라고 해놓고는 맨날 조연상만 준다고 반 농담, 반 진담을 했던 조진웅은 이선균만 수상을 하는 줄 알고 축하해 주러 기립했다가 자신이 공동 수상인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반적으로는 공동 수상이라고 하면 구설이 따를만도 했건만, <끝까지 간다>로 수상한 이들 두 사람에게는 모두가 마음을 모아 '공감'의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이선균 조진웅이라는 쌍두 마차가 이끌어 영화의제목처럼 집요하게 박스 오피스에서 생존하여 350만의 흥행과, 두 배우는 물론, 감독에게 각종 수상의 영예를 안기며 <끝까지 간다>에 대해 배우 이선균은 평범한 선발 투수 였던 자신과 함께 한 4번 타자같은 조진웅이 만루 홈런을 쳤다며 영화의 공을 조진웅에게 돌렸다. 하지만 이번 <성난 변호사>는 그가 공을 돌릴 4번 타자는 커녕, 대타도 없다. 영화의 예고편에서 그와 콤비처럼 등장한 임원희는 그저 양념에 불과했고, 상대 여배우 김고은은 여전히 불안정했으며, 악역 장현성의 포스는 평범했다. 하지만, 자신을 겸허하게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간다>를 통해 자신의 '까칠' 연기에 자신감이 붙은 이선균은 이제 그 스스로 4번 타자가 되어, 영화를 온전히 이끌고 간다. 

그렇게 제목부터 사람들이 일찌기 <파스타> 이래로 이선균을 통해 연상되는 '까칠'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건 <성난 변호사>는 온전히 이선균을 위한, 이선균의 영화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선균은 이제 진부하다는 그의 예의 '까칠'한 캐릭터를 '스테디셀러'처럼 능수능란하게 펼쳐낸다. 그저 '이기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변호사 변호성이 제약 회사를 상대로 부작용 소송을 건 환자를 상대로 '골뱅이' 통조림까지 등장시켜 역전시키는 장면은 이선균이란 배우의 독무대로서의 <성난 변호사>를 손색없게 만든다. 

허종호의 기발한 영화적 장치들로 인한 가속, 하지만
하지만, <성난 변호사>의 미덕은 이선균만은 아니다. 한예종 동기라 잘 되어야 한다는 이선균의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영화 초반 감독 허종호는 기발하게 영화를 이끌어 간다. 분명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한 부작용 사례, 거기에 내막을 모른 채 휩쓸린 일신 영달의 속물 변호사의 반전을 담은 영화는 상투적이다. 하지만, 그 상투적인 틀은, 영화 초반 법정 씬에서 부터, 이어 이선균과 살해당한 여대생이 한 공간에 머무는 듯 현실감을 부여한 수사 장면, 그 뒤의 각종 소소한 반전 씬들로 신선한 영화로 거듭난다. 분명 뻔한 이야기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채운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지 못한 이야기들이 <성난 변호사>를 그저 이선균의 원맨 쇼 이상의 볼 거리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선균에의한을 넘어설 뻔한 영화가 중후반 '반전'을 향해 달려가면서 미덕은 길을 잃고 만다. 오히려 안타깝게도 이선균을 믿고 가야 할 영화는 후반, 이런 범죄를 다루는 영화들이 저지르기 쉬운 '반전'이라는 트릭에 매달려 평범해 지고 만다. 애초에 이 영화의 제목이 '성난 변호사'였던바, 그렇다면 영화는 충실히 '입신양명'에 목매달아 문지훈(장현성 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노심초사하던 변호성이, 그로 인해 뒷통수를 맞고 '성이 나서' '정의'의 심판을 하기 까지의 변화 과정을, 그가 문지훈의 뒷통수를 치는 트릭으로 대신한다. 문지훈의 개인양 굴던 변호성이 막판에 이건 몰랐지 하고 그를 몰아가는 수법은 나름 신선했지만, 예견되었던 바였고, 오히려 그 보다는 변호성이란 인물의 자존심, 그리고 감정 변화에 조금 더 충실했다면, 아마도 마지막까지 신선한 영화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 대신 이런 류의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나름 기발하다 준비된 트릭과 반전으로 후반부를 장식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그 장황한 변호성의 트릭을 보아 넘기며 언제쯤 막판 반전이 등장할까 시계를 들여다 보게 된다. 과연 허종호 감독은 이선균을 믿고 가려던 영화에서 결국 이선균을 믿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준비한 따지고 보면 뻔한 반전과 트릭을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좌석을 채운 관객들에게 마지막 깜짝 쇼를 선물해야 한다는 강박이었을까? 덕분에, '성난' 이선균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시작된 영화는 결국 뻔한 반전 범죄 영화로 귀결된다. 변호성이란 캐릭터를 잊어버릴 정도로.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난' 이선균의 캐릭터는 영화 마지막 사표를 낸 사무장의 말처럼 다음 시즌에 '성난' 탐정으로 돌아올만한 매력을 남긴다. 그렇게 되면 cj가 준비할 버디 무비로서의 탐정 시리즈는 <탐정; 더 비기닝>에 이어 또 한 편이 늘어난 걸까? 다만 다음 시즌이 준비된다면, 이번 '성난 변호사'에서 기대 이하의 활약이 아쉬운 박사무장 임원희를 위한 배려가 좀 더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선균이 말하듯, 그의 짜증이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공감가는 '짜증'이었기에 그렇듯, 뻔한 반전보다는, 박사무장과 변호성의 사람 냄새 나는 '고군분투'가 조금 더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5. 10. 11. 00:05

한때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감탄을 했던 적이 있었다. 모두가 노회해지고, 무덤덤해져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날을 세우고, 그 나이들어 가는 그가 화두로 삼았던 사람들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그 지점 때문이었다. 다른 영화들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게는 <여자는 남자의 미대다>의 그 사람들이, 홍상수의 화두가 되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소위, 그 시절(?) 지식인이라고 불리웠던 사람들, 당대의 지식인의 허위와 위선을 일상 속의 삶의 아이러니를 통해 통렬하게 폭로하던 홍상수는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처럼 그와 동시대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던 다수의 감독들이 이제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기를 멈추거나,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버전만 달리하며 '동어반복'처럼 올곧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왔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결국은 궁극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같음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홍상수가 펼쳐놓는 변설은 고고해졌고, 마치 강태공의 낚시처럼 인생을 낚아 올리는 경지에 이르른 듯 보였다. 그리고 어쩌면 홍상수가 변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대학 강사에서, 영화 감독으로, 혹은 교수로 신분만 달리했을 뿐, 여전히 우리 사회 속 어딘가에서 기생하며, 먹물의 냄새를 풀풀 피우며, 하지만 그 이면의 가장 본능에 철저한 대한민국 표준 남성의 모습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듯하다. 2015년 거꾸로 돌아가고자 애쓰는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변함없는 주제에 천착한 홍상수의 이야기 방식의 혜안이 거꾸로 돋보이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그런 혜안에 대한 지혜가 짧은 이 글쓴이는, 시대가 달라짐에도 여전히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를 하는 홍상수에게 조금은 진저리가 쳐지기 시작했다. 어줍잖게, 우디 앨런을 들먹이며, 홍상수의 진화를 촉구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무식하게도 용감하게 2014년의 신작을 건너뛰어 버렸다. 그리고 <어셈블리>의 '국민 진상' 정재영이 출연했다는 말에 솔깃하여, 다시 찾아보게된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통해, 어쩌면 영영 홍상수 월드의 신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2015년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홍상수 
2015년의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 명명된다. 21세기의 초반을 지나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시계는 거꾸로 '조선'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제는 '음서'라는 제도가 이름을 달리하여 횡행하고 있는 세상에서,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또 다른 본능에 충실하여 그 가진 것을 한껏 응용하는 세상에, 여태까지 줄기차게 같은 곳을 바라보던 홍상수의 목소리가 조금 톤을 달리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그때는 틀리는 함춘수(정재영 분)의 모습은, 지금까지 홍상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재연이다. 말로는 다양한 언설을 구사하지만, 오로지 그의 목적이 하나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그런 인물들말이다. 정작 그의 목적이 분명하기에, 그 목적을 향한 그의 언어들을 장황하고, 들떠있으며, 마치 이리저리 구차하게 꼿은 까마귀가 빌린 깃털처럼, 그의 입에서 말이 나오면 나올 수록, 그를 공허하게만 만드는 언어들이다. 때로는 그래서 '그'가 귀여고, 애처롭지만, 결국, 그의 노림수가 너무 뻔하다는 것이, 홍상수 영화가 보여준 '속물적 주인공'의 모습이다. 그렇게 예의 홍상수 영화 속 주인공과 한 치도 다름이 없이, <지금은>의 주인공 함춘수 역시 윤희정(김민희 분)를 향한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불사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갈구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혹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애초의 그의 의도를 왜곡하고, 결국은 애초의 목적조차 무의미해져 버리게 만들고, 기왕에 한껏 폼을 잡은 그의 위신조차 무너뜨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겨우 여자 하나 어떻게 해보려다가 무너지고 만 그의 위신처럼, 그리고, 평론가의 세치 혀 앞에 무기력해져버린 그의 영화처럼, 결국 그가 거창하게 부풀렸던 그를 감싼 그것들은 알고보면 보잘 것 없는 그의 남성성처럼 역시나 별거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허위'와 '위선'을 제치고 나면 구애조차도 실패한 보잘 것없는 사내일뿐이다. 그렇게 홍상수의 영화는 마치 빚쟁이처럼 영화 속 사내가 가진 것을 짧은 런닝 타임 안에 홀딱 벗겨 거리로 던져 버린다. 

그런데 그렇게 자비없이 홀딱 벗겨버리던 홍상수가 '지금'이라는 토를 달고, 이야기를 달리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이야기 방식의 변화가 생소해, <자유의 언덕>을 찾아보니,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미 카세 료를 동원한 이 이야기에서 기미가 보인다. 권이 놓쳐버린 편지 더미 덕분에, 앞뒤가 뒤죽박죽되고, 계단 참에 흘려버린 한 장 덕분에 심지어 빠져버리기까지 한 이야기에서, 함춘수의 '지금'에 대한 빌미가 있다. 영화 속 모리로 분한 카세 료는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우연치 않은 사건을 통해 영선(문소리 분)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영화는 영선과 그런 사이가 된 이후의 모리의 난감함을 보여주고 그 이후의 정황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지만, 뒤늦게 찾아온 권을 맞이하는 영선의 밝은 모습을 통해, 모리와 영선의 끝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음을 예상하게 된다. 오히려, 그 보여지지 않은 편지 한 장의 후일담을 알 수 있는 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함춘수를 통해서 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같은 상황 속에 다른 대응을 보이는 함춘수의 모습이다. 똑같인 첫 눈에 윤희정이라는 여인에게 반해, 그녀를 단번에 '사랑하게' 된 함춘수라는 인물의 하룻밤의 이야기이지만, 아이 둘을 가진 유부남 감독 함춘수의 윤희정을 향한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가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도록 만든다. 

홍상수 감독이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는 '그때'의 함춘수에 대한 조롱과 폭로였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연민이었더. '천착'이라고 할 만큼 감독은 줄기차게 그 이야기에 매달려 왔다. 주인공과 배우만 달라졌을 뿐, 결국 하고자 이야기는 그것이었다. 오히려, 세월에 따라, 그 이야기는 달관으로까지 보여질만큼, 그런데, 정작 2015년 그랬던 사람들이 가장 무기력해지고, 현실에 무너지려할 때, 정작 홍상수 감독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저 '그때'의 모습 밖에 모르던 함춘수가, '모리'로 부터 시작하여, 궤도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허위'와 '위선'을 폭로하고, 결국 사람이 그 정도라고 자조하던 감독이, 아니,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사람들이 가장 '희망'을 놓쳐버린 바로 그 시점이다. 

'그때'와 ,'지금', 함춘수는 똑같이 윤희정을 사랑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솔직히 다가가는 가, 그 방식에 따라,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윤희정이 받아든 감정의 결과물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함춘수와 같이 한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 확인하게 된 실체를 깨닫게 되면서 변화하는 윤희정의 표정은, '그때'의 슬픈 결론이다. 그런가 하면, 똑같이 '사랑'을 얻지 못하지만, 홀가분하게 눈속을 떠나는 윤희정의 뒷모습은 '아름다운 추억'이다. 



그래서 점점 더 살기 힘든 세상에, 여태까지 사람이 어쩔 수 없어 라고 이야기를 하던 홍상수 감독이, 아니, 다르게 살 수 있어, 다른 방식이 있어 라고 말을 건네기 시작한 것이, 심지어, '혁명적'이고 '전투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남성성'과 같은 본능에만 충실한 것이 인간이지, 하며 자조적으로 비판하던 감독이, 아니, 꼭 그건 아니야, 같은 상황이라도, 좀 더 솔직하게 담백하게 자신을 인정한다면, 어쩌면 그때의 상황은 지금과 다를 것이야 라고 도전전으로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맞고> 속 '지금'의 함춘수는, <어셈블리> 국민 진상 진상필만큼이나 도발적이다. 편의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등등 툭툭 치며 세상을 향해 떠미는 것 같다. 해학과 풍자 대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세상을 향해 다시 살아봐야 할 분위기다. 

그러니 여전히 홍상수는 우리 시대에 가장 날이 선 청백리이다.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에서 부터, 그가 세상에 말을 전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날선 이야기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정재영', 그리고 언제나 그래왔듯 홍상수는 정재영을 비롯한 배우들을 재발견하게 해준다. 김민희가 가장 이쁜 영화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5. 10. 4. 17:48

<그것이 알고 싶다> 이후 김상중이 맡은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모은 tvn의 새 프로그램 제목은 <어쩌다 어른>이다. 제목처럼, 이제 4회를 맞이한 프로그램은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된 어른들의 푸념이 풍성하다. <어쩌다 어른>이 정의한 어른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어른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즉, 이 시대의 어른이란, 나만 빼고 란다. 즉, 나이가 오십이 되도, 육십이 되도, 그리고 칠십이 되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다수는 아직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자기 인식(?)은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버린 삶'에 대한 회환과 토로로 귀결된다. 마음은 청춘인데 어느새 아버지가 되어 어깨 양쪽에 잔뜩 '책임'만을 짊어진 채, 그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이 쓸쓸하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정서요, 그를 서로 위로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취지이다. 어디 <어쩌다 어른>에 등장한 여전히 철딱서니없는 어른들 뿐이랴, 우리 사회의 모든 세대는 다 저마다 자신이 몰려버린 세대의 위치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쩌다'라는 수식어를 붙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천만의 영화 <국제 시장>은 아버지 세대로 밀려버린 전후 세대를 위로하려 하고, 이제 <사도>를 통해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눈물조차 이해하려 애쓴다. 




'어쩌다 어른'이 된 세상에 '어른'의 이야기
그렇게 '어쩌다 어른'이 된, 하지만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철딱서니의 세상에 <인턴>은 신선하다. 어쩌면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기꺼이 어른이 되고자 하는 어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하는 아까운 것들>, <왓 위민 원트>의 낸시 마이어스가 만든 <인턴>은 그녀의 전작들에게서 연상되는 그 분위기를 이어간다. 아내를 사별하고 직장에서 은퇴한 채 노년의 나날을 무료하게 보내던 70세의 벤(로버트 드 니로 분), 그는 우연히 거리에 붙은 시니어 인턴 모집 광고를 보고 창업 1년만에 220여 명의 직원을 두게 된 줄스(앤 해서웨이 분)의 회사에 노크를 하게 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사람, 벤과 줄스, 그들이 서로 갈등하며 이해해 가는 과정을 영화는 다룬다. 

영화 속 벤, 줄스의 직장이 있던 그 장소에 있었던 전화번호부 회사에서 40여년간 부사장의 자리까지 근속했던 그는 늘 그가 정갈하게 차려입는 양복, 이제는 앤틱한 희귀템이 되어버린 가방, 늘 챙겨두는 손수건에서 보여지듯이, 이제는 그들의 은퇴와 함께, 그리고 경제 위기와 함께 사라져 간 미국의 전형적 중산층을 상징한다. 그런 그를 고용한 줄스는, it 시대를 배경으로 한 아이디어 상품을 매개로 한 홈쇼핑 산업에서 성공한 21세기의 전형적 ceo를 상징한다. 그렇게 영화는 이제는 사라져가는 미국의 이전 세대의 대표적 인물과, 그리고 이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신흥 세대의 대표적 인물을 등장시켜, 그들의 이해와 화해를 그려냄으로써, 암묵적으로 '세대간 화해'를 모색한다. 그런 면에서, <인턴>은 이른바 그간 헐리웃 영화가 전형적으로 그려왔던 세대간 화해의 해피엔딩의 공식을 답습한다. 

하지만 똑같은 주제의 답습이라고 해도, 그것을 답습하는 주체가 '낸시 마이어스'인 한에서는 그 질감과 깊이는 달라진다. 서로 이질적인 세대와 문화의 충돌을 영화 속 주된 설정으로 끌어왔던 낸시 마이어스가 끌어온 세대는 이른바 미국의 전형적 아버지 세대와, 그와는 전혀 다른 삶의 구성을 가진 젊은 여성 ceo이다. 영화 속 벤은 '가부장'으로서 '미국'의 부를 이루어 낸 아버지 세대다. 그의 정갈한 옷차림과 갖춰진 매너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전 세대의 미국의 가치관을 상징한다. 그런 그가, 삶의 '구멍'이 난 노년의 삶을 메꾸기 위해 다시 한번 '인턴'으로 줄스의 회사 생활에 도전하는데, 영화는 노년의 궁상스러움과 추레함 대신에, 그가 가진 경험과 연륜을 내세운다. 

기업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니어 인턴을 받아들인 줄스는 벤이 거추장스럽지만, 그런 그녀의 부담에도 아랑곳없이 벤은 어느새 직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리고 벤이 직장 내 인기인이 될 수 있는 이유에는 그가 '어른'임에도 '어른임'을 내세우지 않고, '어른'의 몫을 다하기 때문인 것이다. 직장 내 사람들은 정장을 잘 갖춰입은 채 등장한 그를 보고 지레 '꼰대'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벤은 전혀 예상과 달랐다. 비록 회사의 컴퓨터를 켜는 것조차 제대로 해내기 힘들었지만, 그 조차도 그의 말대로 시간이 필요했을 뿐, 곧 적응하게 되었고, 오히려 그런 부적응보다, 오랜 사회 생활로 인한 연륜으로 그가 헤아려내는 회사 생활이 곧 그를 줄스 회사의 인기인으로 등극하게 만들어 버린다. 

벤이 늘 지니고 다니는 손수건의 가장 적절한 용도가 우는 여자들에게 건네주기 위해서라는 고리타분한 그의 명제처럼, 그는 고리타분하지만 필요적절한 도움을 회사에 준다. 줄스가 늘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책상 위에 잡다한 물건들을 치우는 것과 같은. 그렇게 지레 헤아려 주는 벤을 엄마의 잔소리에 시달리던 줄스는 부담스러워 했지만, 그녀 역시 어느새 아픈 자신에게 치킨 스프를 챙겨주는 벤의 세심함에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영화 중 줄스는 위기의 인물로 묘사된다. 외적으론 단 1년만에 회사를 키워냈지만, 빠른 시간 안에 부피가 커진 회사는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그런 문제들에 대해 투자자들은 그녀의 리더쉽으로 인한 것이라 판단하고 전문 ceo를 들일 것을 종용하는 한편, 가정 내에서는 일하는 아내로 인해 남편의 불만이 증폭되고, 외도까지 하기에 이르른 인물이다. 그런 쫓김과 스트레는 끊임없이 손 세척제로 손을 닦아대는 강박증과 자신이 말한 것조차 금새 잊어버리는 건망증으로 표현된다. 거기에 늘 일에 쫓겨 주변 사람들과 눈 한번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인간 관계 상실'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경험 많은 어른과, 젊은 어른의 조우, 어른됨의 몫
아버지와 자식 세대가 조우한 영화가 그렇듯이, <인턴> 역시 경험이 많은 아버지 세대와, 위기의 자식 세대가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영화에서 대다수 '보수적'으로 아버지 세대의 경험'에 손을 들어 준 것과 달리, <인턴>의 화법은 좀 다르다. 물론 여전히 벤의 경험이 영화 속 줄스를 위기에서 구해주지만, 그렇게 위기에 빠진 줄스를 바라보는 벤의 태도에서 부터 <인턴>은 다르게 바라본다. 결국 자신의 집에까지 쳐들어 온 회사 직원에게 자신이 '산타클로스'냐며 푸념을 하지만, 그렇다고 벤은 섣부르게 줄스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 줄스가 지레 벤의 오지랖을 오해하지만, 그것이 말 그대로 오해일 만큼, 벤은 지켜보고, 알고 있되,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 더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적절한 도움을 주려고 할 뿐이다. 

무엇보다, 경영권의 위기에 빠진 줄스에 대한 벤의 충고가 인상적이다. '자신은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서두를 뗀 벤은 자신이 한 직장에서 40년을 근속했지만 부사장까지 밖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줄스는 단 1년만에 ceo가 되어 넘어버렸다고 존중한다. 나이도 어리고, 인간 관계에서 어설프고, 매사에 실수 투성이인 삼십대의 젊은 여성 ceo에 대해, 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이루어 놓은 가치는 대단하다고 존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낸시 마이어스가 바라본, 아버지 세대의 미국과, 이제 위태롭지만 또 하나의 성취를 이룬 젊은 세대 미국에 대한 정의와도 같다.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세대가 이룬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성취를 이뤄낸 젊은 세대, 그 세대의 성취를 아버지 세대는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존중'의 입장에서 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자, 줄스 역시 마음을 연다. 문제투성이이지만 그렇다고 줄스는 자기 아버지뻘인 벤의 앞에서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그녀 역시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벤의 존중을 받을 만한, 또 다른 어른으로 영화는 그려낸다. 영화 속 줄스는 말한다. 모처럼 '어른'과 '어른'으로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고. 어른도, 어른이 아니라고,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어른'이 되기 싫다고 부정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른'과 '어른'의 만남인 벤과 줄스의 만남은 그래서 신선하고, 희귀해 보인다. 

더더구나, 한겨레 신문 9월 25일자 문강형준의 칼럼에서도 보여지듯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거나, 여자에게는 '아저씨'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나잇값이라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인턴>은 벤의 가방처럼, 희귀템인 영화일 듯하다. 경험와 연륜을 가진 어른이, 비록 자신보다 경험과 연륜을 가지지 못했지만 또 다른 성취를 보인 젊은 어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긍정적'인 고민을 보여준 영화, <인턴>은  그래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그저 미담 이상의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가 된다. 
by meditator 2015. 10. 2. 1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