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쌍끌이'라고, 2015년 올 한해에 천만 영화가 두 편이나 탄생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국 영화가 천만의 호황을 누리는 와중에, 소리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작은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조만간 <기적의 피아노>도 그런 영화 중 한 편으로 기록될 것 같다. 

9월 3일 개봉된 <기적의 피아노>는 개봉을 한 지 일주일도 채 안된 시점에서 개봉관을 찾기가 힘들다. 설사 개봉관을 찾는다 하더라도 상영 시간 또한 만만치 않다. 아침 7시 10분, 꼭두 새벽부터 영화를 보러 간다 호들갑을 떨어야만 겨우 볼 수 있다. 거대 배급사인 '롯데'의 배급이라지만, 그 마저도 언제까지 허용될 지 모를 일이다. 이 영화를 보고 아이들과 함께 단체 관람을 마련하려 했던 어른들은 이 '험란한' 상영 시간에 제 풀에 주저앉고 만다. 좋은 영화라 다같이 보고 싶다는데, 볼 수가 없다. 

천재 소녀 예은, 그 누군가는 스타킹 등 예능에 등장했던 앞이 보이지 않은 이 꼬마 소녀를 기억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기억이 밝은 누군가의 몫일 뿐이다. 많은 예능에, 혹은 미디어로 소비되었던 수많은 일반인들처럼, 세간의 관심에 잠시 반짝 빛났다 사라진 소녀, 날 때부터 안구가 없어, 그 어떤 발달된 의학적 시술로도 다시 앞을 볼 가능성이 없는, 하지만 세 살 때부터 스스로 피아노를 익혀 천재 피아니스트라 박수를 받았던 소녀, 이제는 초등학생이 된 천재 소녀 피아니스트의 후일담을 <기적의 피아노>는 담는다. 



천재 소녀 예은이의 이야기를 통해 나지막히 울리는 '좋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법
천재 소녀였던 예은이의 피아노 여정을 담은 <기적의 피아노>는 2015년 제천 국제 음악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듯이, 음악에 대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 예은이의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그저 장애인으로만 살아갈 예은이의 꿈을 길어 올려 준 '어른들'의 모습이다. 

'스타킹'에도 출연해 '천재'라 칭송받았던 예은이, 예은이는 엄마의 노래 소리만을 듣고 피아노를 연주할 만큼의 능력을 지녔다. 그래서 아직도 간간히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를 찾는 곳이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세상의 관심은 점점 무디어져 간다. 그리고 그저 천재였던 예은이가 그녀의 꿈인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소리로 피아노를 익힌 예은이는 당연히 악보를 볼 수 없다. 아직 점자 책도 겨우 더듬거리며 읽는 예은이에게 피아노 악보를 익히는 것은 난망이다. 그러기에 악보에 적힌, 원 작곡자의 의도대로 그대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기본인 피아니스트의 길은, 그 첫 걸음부터 삐걱거린다. 엄마의 회초리를 눈물로 감내하며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래 아이들과의 콩쿨 예선조차 통과가 안된다. 박자의 길이는 제멋대로이고, 자유롭게 건반을 노닐던 손가락은 악보와 따로 논다. 놀이요 꿈이었던 피아노가 현실에 가로막히자 예은이 스스로 피아노 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영화 중 예은이가 홀로 걷는 연습을 한다. 늘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다녔던. 그래서 자기 보다 어린 아이의 손조차 놓기를 두려워 하던 예은이가 걷기 연습을 한다. 휠체어를 타야 움직일 수 있는 아버지는 예은이와 개울에 가서, 물을 좋아하는 예은이가 홀로 개울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엄마는 예은이가 맹인용 지팡이를 써서 혼자 걸을 수 있도록 독려한다. 

예은이의 피아노에 대한 영화인 <기적의 피아노>에서 이렇게 예은이가 홀로 걷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한 동안 등장한다. 그렇게 예은이가 이제 누군가의 손을 놓고 홀로 걷는 연습을 하듯, 천재 소녀라는 명망을 넘어, 진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첫 걸음을 내딛는 모습은 서로 오버랩된다. 엄마의 말처럼, 그저 장애인을 넘어, 스스로 세상에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다. 

그런 첫 걸음에서 예은이는 두려워 한다. 종종 눈물도 흘린다. 그리고 상처를 받고 한없이 자신 속으로 수그러 든다. 예은이의 좌절은 꿈만큼 깊다. 그런 예은이를 깨워 다시 세상으로 돌려세우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그리고 <기적의 피아노>는 그 과정의 이야기이다. 



가끔 예은이는 자신이 세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한다. 하지만, 그런 예은이의 슬픔에 대한 엄마의 반응은 여유롭다. 그저 세상 사람들이 다르듯이, 너도 그렇게 다른 것일 뿐이라고, 스스럼없이 넘어간다. 아빠가 몸을 못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듯이, 엄마가 뚱뚱하고, 니가 날씬하듯이, 그렇게 서로 다름일 뿐이라고 유머러스하게 넘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예은이의 운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짜 엄마'를 궁금해 하는 예은이에게, 같이 사는 엄마가 진짜 엄마라고 말하며. 선생님의 레슨 내용을 제대로 이해못해 슬픈 예은이가 쪼르르 엄마 품으로 매달리면 엄마는 그저 그렇게 아이를 안아주듯이, 예은이의 장애도, 슬픔도 엄마의 품안에선 스르르 풀어져 버린다. 

소리를 듣고 음악을 익힌 예은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음악을 하는 길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첫 발자국처럼 두렵다. 심지어 예은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악보를 쉬이 읽을 수도 없다. 그렇게 세상과의 싸움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진 한때 천재였던 아이, 그런 아이의 좌절에 부모가 먼저 주저앉지 않는다. 내 아이가 남들처럼 할 수 없다는 것에 속상해 하는 대신에, 예은이의 다른 점을 찾아내고 알리고자 애쓴다. 그래서 아버지는 소리를 듣고,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은이의 능력을 알리고자 애쓰고, 그 아버지의 노력이 예은이를 알아본 눈밝은 어른들의 따스한 마음을 통해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라는 창작품으로 완결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또 다른 능력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 예은이는 '피아니스트'라는 여정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기적의 피아노>는 그저 한때 천재였던 소녀 예은이가 이제 어엿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의 꿈과, 좌절에 대한 어른들의 이야기로 승화된다. 아이를 키우는 방법, 방향, 그리고 교육이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 부모로서,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는 세상을 책임지는 어른들에 대한 물음표로 끝을 맺는다. 어쩌면 예은이의 감동 스토리로 마무리 될 수도 있는 이야기가 더 근본적이고 큰 질문으로 향해 갈 수 있었던 것은, 슬픔과 감동을 지그시 누르고, 예은이와 엄마, 아빠, 그리고 주변 어른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바라보았던 영화적 시선에 의지하는 바 크다. 세상 그 어떤 부모의 열혈 후원보다도, 고구마 순을 다듬으면서도 내 아이를 향해 귀를 열고, '다시'를 외치는 엄마의 한 마디가 뭉클하다. '진짜' 엄마를 찾는 아이에게 그럼 난 '진짜 엄마가 아냐'라고 되묻는 엄마의 앙탈이 아름답다. 번듯한 부모와 연습을 반복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늘어진 티를 입고, 아이를 꼬옥 안고, 행복했던 모짜르트를 생각하며 연주하라는 엄마의 당부가 감동적이다. 눈이 보이지도 않는 아이를 고개를 숙여 들여다 보아주는, 소리없이 숨죽여 흐르는 눈물을 알아채주는 부모가 따스하다. 좌절에 호들갑 떠는 대신, 내 아이가 잘 하는 것을 찾아내려 애쓰는 어른들이 미덥다. '내 엄마가 나를 믿어주었듯이 나 역시 예은이를 믿는다'는 엄마의 마지막 말이 울컥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어른들의 배려와 보살핌을 진득하게 담아낸다. 목소리높여 무언가를 전하지도 않고, 애써 감정을 쥐어짜지 않아, 오히려 더 가슴을 울리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를 간간히 채우는 맑은 하늘, 그리고 아름다운 꽃은, 그것을 바라볼 수 없는 예은이의 시선과 대비돠어, 마음을 아득하게 하고, 느닷없이 등장하는 차 소리, 바람 소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느낄 수 없는 '예은이'의 세계를 상상하게 돕는다. 그리고 뭉클한 예은이의 사연 사이담담해서 더 감정을 울컥하게 만드는 재능 기부 박유천의 나레이션, 그리고 예은이의 재능을 창작 음악으로 승화시켜 함께 무대에 세워 준 피아니스트 이진욱의 나즈막하지만 풍부한 음악이, <기적의 피아노>를 평범한 감동극을 넘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와 어른들이 함께 보며 생각해 볼 작품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by meditator 2015. 9. 6. 15:25

최동훈 감독의 영화<암살>을 보았다. 

2004년 <범죄의 재구성> 이후 <전우치>, <타짜>, <도둑들>까지, 그가 개봉했던 영화들은 모두 한국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기에, 새로이 개봉한 <암살>을 두고 평론가들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암살>에 대한 여러가지 평가를 내렸다. 누군가는 그의 전작에 비해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진다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는 감동의 찬사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편향적으로 많은 영화관수를 과점한 가운데 가장 단 시간내에 700만 고지를 점령한 영화 <암살>. 

개인적으로 최동훈 감독은 그저 흥행이 잘 되는 상업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으로 기억이 되었었다. 하지만, 영화 <암살>은 영화적 완성도나, 재미면에서는 그의 이전 영화에 비해 압도적인 진전이 없거나, 후퇴를 했을 지 몰라도 2015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세대로써, 시대적 책임감을 복기함에 있어, 그의 이전 작품들이 넘볼 수 없는 성취를 보였다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암살>은 최동훈의 또 다른 성취이자, 발전이다. 



아비를 죽여야만 하는 자식들
영화 <암살>의 두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과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은 아비가 존재하되, 아비를 부정하는 존재들이다. 

안옥윤은 상처입고 도망친 염석진을 도와 함께 상해로 피신하던 강인국의 아내가 강인국 수하의 피습을 받고 죽어가는 중 도망친 유모의 품에서 자라 독립군이 되었다. 안옥윤이 어머니라 믿었던 유모는 간도 사변 당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하지만 안옥윤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행이라고 말할 만큼 능욕당하며 죽어간 간도인들의 몰살을 지겨보았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저격수로 조선 주둔 사령관 가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의 저격에 나선다. 하지만 저격 현장에서 마주친 자신과 얼굴이 같은 강인국의 딸 마츠코, 안옥윤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생부 강인국이었다. 

말로만 듣던 쌍둥이 언니와 아버지를 조우하게 된 안옥윤은 당연히 갈등한다. 하지만 혈육의 정으로 인한 그녀의 고뇌를 빨리 종식시켜 준 것은 그녀의 아비였다. 자신의 아내가 '친일'의 길에 거추장스러워지자 단 한번의 주저함도 없이 죽어버리라고 했던 그는, 안옥윤이 자신이 잃어버린 딸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녀가 독립군의 저격수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처단에 나선다. 하지만 처단의 대상이 된 것은 우연히도 같은 시간 그곳을 찾은 자신이 기른 딸 마츠코. 아버지에게 함께 찾아가면 아버지가 다 해결해 줄거라고 안옥윤을 설득하러 온 마츠코는 그렇게 믿고있는 아비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렇게 눈앞에서 막연히 그리워하던 자신의 쌍둥이 언니를 잃고, 어머니마저 아버지가 죽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안옥윤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와, 가와구치를 죽이기 위해 마츠코가 된다. 언니의 결혼식이었던 거사 당일,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에게 총을 겨눈 안옥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는 주저한다. 아버지의 존재가 백발백중인 그녀의 총구를 막는다. 아버지는 가문과, 국가를 들먹이며 자신이 목숨을 구하고, 딸은 '핏줄'로 인해 고뇌한다. 

딸에게 목숨을 구하면서 뒤로 숨긴 손으로 총을 찾던 아비의 얍삽한 구명과, 그 앞에서 혈육의 정으로 총구가 흔들리던 안옥윤의 주저을 끝장낸 것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 하와이 피스톨이었다. 

그런데, 그는 누구인가, 지나가듯 그는 국가를 팔아먹고 남작 작위를 받은 조선의 일곱 대신들, 그리고 그 아비들을 서로 죽이겠다고 살부계를 조직한 아들들의 이야기를 안옥윤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그 살부계의 후일담은 그가 안옥윤의 아비를 대신 죽이고 이어진다. 서로의 아비를 죽이고자 했던 이들, 그들 중 누군가는 실패하고, 미치고, 그리고 하와이 피스톨처럼 청부살해업자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살부(殺父)'를 논해야 하는 대한민국 
공교롭게도 <암살>의 두 남녀 주인공에게 '아비'는 그들을 죽여야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아비들, 그 아비들과 다른 입장에 놓인 아들, 그리고 딸. 그들은 아비를 부정하고 지우지 않고서는 자신들이 살아갈 세상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거기서 아비들은 강인국처럼, 사실은 일신상의 안위를 위하면서, 국가와 가문과 민족을 들먹이며, '나라'를, 그리고 가족을 버리고 살(殺)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식에 의한 아비의 살(殺)은 아비의 원죄로 인한 종속 요인에 불과한 것이다. 강인국와 하와이 피스톨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 사실 숨겨진 주인공인 염석진, 독립 운동으로 시작하여, 밀정으로, 그리고 일본 경찰로, 그리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의 경찰로 끊임없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그 인물은, 영화가 그리고 있는 또 다른 아비 상이다. 그는 안옥윤과 속사포(조진웅 분), 황덕삼(최덕문 분)의 세 사람을 독립군 암살 조직으로 불려낸, 그들이 가장 믿고 따른 '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결국 속사포는 마지막 순간, 그 아비의 목소리로 인해, 그 아비와 같은 자의 총에 맞고 숨을 거둔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긍정적으로 그려졌지만, 이제 와 그 숨겨진 그림자가 드러나고 있는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아버지도 우리 역사의 또 다른 비극적 부(父)의 존재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의 장준환, <해무>의 심성보, 그리고 최근 <차이나타운>의 한준희 감독등은 비록 시대를 달리하고, 특성을 달리하지만, 기성 세대로 상징되는 '아비' 혹은 '어미'의 살부, 살모 스토리를 내세워 한국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최동훈 감독의 <암살> 역시 그런 우리 한국 근, 현대사에서 해결되지 못한 '살부'의 역사를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감독들이 의도적, 혹은 의식적으로 '살부'의 코드를 내세운 것은, 2015년 한국 사회가 여전히 '아비'의 세상에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인식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비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난 자식들, 살부 코드는 신화의 전형적인 성장 코드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세계를 벗어나 자신의 세상으로 떠나간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세계에 발목이 묶어 버리고 마니까. 그래서, 신화 속 아들들은 우연을 가장하여, 혹은 사고로 아비를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그로부터 아들들은 비로소 아비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상을 향해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이덕일을 비롯한 일부 사학자들은 대한민국을 '노론'의 나라로 정의 내린다. 즉, 조선이라는 나라가 '노론'에 의해 정복 당한 이후, 대한민국을, '노론'으로 상징되는 지배계층의 변화가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조선에서는 양반 지배 계층으로,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친일파로,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다시 염석진처럼 정부의 관료와 그들이 뒤를 밀어주는 자본가로 끊임없이 자신을 변신시키며, 여전한 '아비'의 세상을 득세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동훈 감독의 <암살> 속 살부는 그저 몇 십년 전 독립군들의 혈육상잔의 눈물겨운 투쟁이 아니다. 영화 마지막 실패하고만 반민특위 재판처럼, 청산되지 않은 일재 잔재의 복기이다. 중년의 감독이 여전히 '살부'를 논하는 대한민국, 청산되지 않은 일제 잔재가 잔존하다 못해 지배적인 대한민국, <암살>이, 영화적 재미 이상의 유의미를 남긴 이유이다. 
by meditator 2015. 8. 4. 15:50

개의 밤

-‘에스키모 인들은 너무 추운 밤에는 개를 끌어안고 잔대요.’

만약 여주인공 세진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면? 아마도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건 이웃집 깡패가 아니라 재벌 집 아들이나 실장님이었을 테고, 설사 이웃집 깡패라 하더라도 그에게는 출생의 비밀(알고 보니 재벌 집 잃어버린 자식?)이 있었을 지도, 그리고 그들은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 깡패 같은 애인’은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튀어나와 현실로 한 발을 내딛는다. 지방 대학을 나온 취업 재수생에게 손을 내민 것은 이웃집 삼류 깡패요, 그의 도움이라는 게 기껏 의자 휘두르며 깽판 쳐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면접을 미루는 것뿐이다. 그와의 하룻밤을 보낸 세진이 말하듯 ‘개’ 같은 남자요, ‘개’ 같은 상황이다.

이 영화적 선택은 최근 개봉한 ‘하녀’, ‘시’로 이어지는 작품들과 문제의식의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즉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의 심화, 그리고 그로 인해 가지지 못한 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전문 용어로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하던가) 브라운관은 현실을 희석시키거나, 그 고통을 가진 자들과의 조우 혹은 화해라는 환타지로 치유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그것이 절대 화해되거나 희석될 수 없는 관계라는 걸 통렬히 밝히거나(하녀), 사회적 모순에 대한 직시의 과정을 승화시키거나(시), 현실적 연대와 위로의 틀을 제시해(내 깡패같은 애인) 환타지로서의 롤러코스터 한 판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얻어지는 힘과 진정한 위로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는 드라마와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판치는 세상에서 한국 영화가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대안이자 희망이기도 하다.

닫힌 문

-‘우리나라 백수들은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영화는 세진이 반 지하 방에 이사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취직에 성공한 세진이 그 소식을 전하러 돌아왔을 때 동철은 이미 그 곳에 없었다. 그리고 예측컨대 회사에서 승승장구한 세진도 그곳을 떠날 것이다. 세진과 동철이 반 지하 이웃이라는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사건은 시작되었지만, 그들에게 그 공간은 마치 황량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쉼터였을 뿐이다.

즉 동철과 세진은 이른바 자크 아탈리가 말하는 인프라 노마드(사회 조직에서 이탈하여 어쩔 수 없이 떠돌게 된 사람들)들인 것이다. 세진은 동철을 ‘개’처럼 보지만 우수한 성적이라도 지방 대학을 나온 그녀 역시 정상적 사회 구조에 끼어들지 못한 채 떠돌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그녀의 소망은 자크 아탈리 식으로 정착민(사회 구조 내에 소속된 사람들) 되기. 하지만 면접을 보면 볼수록 자신이 이 사회에 끼어들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절망만 커간다. 그런 세진과 달리, 그녀가 얼마나 노력하고 애썼는가를 알게 된 동철은 그녀가 일찍이 공부가 하기 싫었던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 생각하고 도우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열망을 절절하게 이해했다는 건 동철 역시 지금은 삼류 깡패로 살지만 어떻게든 이 사회에 정상적(?)으로 자리 잡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동철의 열망은 그의 난감한 교육 방송(교육이야말로 계층 상승의 전형적 로망 아니겠는가) 시청이나, 이제 막 조폭이 되려는 불량 청소년에 대한 과격한 선도(?)를 통해 절실히 드러난다.

동철이 칼로 쑤셔지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장면(여기까지가 현실적 엔딩이 아닐까) 이후 영화는 두 떠돌이들의 조우와 절망을 ‘로맨틱’하게 해결하는 방식으로 우회한다. 그 장면까지가 ‘하녀’나 ‘시’가 가지는 냉철한 현실주의의 선상에 서있다면(거기서 끝났다면 달달하진 않았어도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그 이후 세진의 성공이나, 동철의 변신 그리고 그들의 조우는 마치 피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던 동철이 꿈꾸는 ‘장자의 나비’처럼 황홀하다. 혹시 일찍이 어려운 사람들의 희망 노래에 천착했던 윤제균 감독이 제작자라는 흔적일까. 자크 아탈리는 2050년쯤이면 전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인프라 노마드가 될 것이라며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지만, 그래도 두 남녀의 황홀한 꿈은 절망 속에서 길어 올린 한 가닥 희망인 것 같아 로맨틱 코미디 이상의 뜨뜻함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5. 8. 2. 16:52

영화를 보고 난 후, 함께 본 아들에게 물었다. 애플의 로고인 사과가 앨런 튜링을 상징하는 건 줄 알았냐고. 하지만 아들들은 금시초문이었단다. 

1976년에서 1998년까지 어언 20년 동안 애플의 로고는 무지개 빛의 한 입 베어 문 사과였다. 그리고 그건 <이미테이션 게임>의 주인공 앨런 튜링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적 소수자로 낙인이 찍혀 강제로 화학적 거세 치료를 받던 중 앨런 튜링은 스스로 청산가리를 묻힌 사과를 베어물고 목숨을 끊었다. 사과의 무지개 빛은 성적 소수자의 상징 색이며 게이였던 앨런 튜링을 의미한다.

영화<이미테이션 게임>은 2차 대전 중 암호 해독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전쟁 후 국가에 의해 버림받다시피 방치되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천재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가 종료된 후 자막으로 설명하다시피 영국 정부는 2009년에야 앨런 튜링을 동성애자로 몰아부친 것을 사과했고, 2013년 영국 여왕은 그를 사면했다고 한다. 그 오랜 기간 앨런 튜링은 역사의 바깥에서 쓸쓸히 사라진 한 사람의 천재일 뿐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인공 지능의 창시자와 같은 앨런 튜링을 추모하기 위해 그를 상징하는 한 입 베어 문 사과를 자신이 만든 컴퓨터에 로고로 사용했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낸다.
영화의 시작은 뜻밖에도 전쟁 후 홀로 연구에 몰두하는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베치 분)의 집에 든 도둑을 잡기 위해 들이닥친 경찰들에게서 시작된다. 전후 냉전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교수 출신의 정체모를 앨런 튜링은 스파이 색출에 열성적인 한 경찰의 눈에 걸린다. 그의 지난 흔적을 찾아보지만 찾으면 찾을 수록 의심만 더해져, 결국 앨런 튜링은 경찰서에 잡혀오게 된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의 죄목은 남자를 성매수한 혐의. 자신을 결국 엉뚱한 죄목으로 경찰서로 끌려오게 만든 경찰과 심문 테이블에 앉은 앨런 튜링은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답을 하라고 한다. 

그리고 영화는 2차 대전 중으로, 동시에 앨런 튜링의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독일군의 도발에 고전하고 있는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 세력, 그 이유 중에는 1590억의 10억배의 암호 조합을 가진 독일군의 암호 퍼즐 애니그마에 무기력한 영국군의 정보력에도 있었다. 그 일을 집중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레츨리 파크', 그곳에 앨런 튜링은 스스로 찾아든다. 
하지만 날마다 달라지는 독일군 암호 퍼즐을 풀기 위해 만들어진 정보 해독팀에 합류한 앨런 튜링은 퍼즐을 풀기위해 고심하는 동료들과 달리, 근본적으로 암호 체계를 분석하는 '튜링 머쉰'을 만들고자 하여 갈등을 빚는다. 

단지 해독의 방식을 달리할 뿐만 아니다. 앨런 튜링이 스스로 고백하듯, 그가 바라본 세상 사람들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소통하기에 앨런 튜링은 더더욱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즉, 동료들은 점심 시간이 되자, 앨런 튜링에게 말한다. 우리 샌드위치 먹으러 갈려고 하는데? 이 말의 속뜻은 '함께 점심 먹으로 가지 않을래?'이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대화의 속뜻을 이해할 수 없는 앨런 튜링은 그저 '샌드위치 좋아하지 않는다'며 되풀이 대답할 뿐이다. 그의 그런 담백한 대답을 이해 할 수 없는 동료가 그에게 등을 돌렸을 때 그는 뒷북을 친다. '나 지금 배고픈대.' 

영화는 성적 소수자로서의 앨런 튜링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쉽게 소통할 수 없는 그의 면모를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다름'을 설명하고자 한다. 일찌기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는 잘했지만 다른 학생들과 소통할 수 없어 놀림감이 되곤 했던 앨런 튜링을 그린다. 영화 속에서, 게이로서의 '다름'이나, 학우들 혹은 동료들과의 소통할 수 없는 '다름이나 그리 다르지 않은 다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2차 대전 시 영국에서 여성이라는 존재의 '다름'도 마찬가지다. 

그가 자신이 창안한 기계에 이름을 붙였던 '크리스토프', 그를 인정했던 유일한 친구, 그래서 그가 사랑했던 친구 크리스토프는 앨런 튜링에게 말한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내니까.'라고. 
그리고 그 말을 앨런 튜링은 당시 '지적인 사회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인식되던 사회적 존재였던 여성인 조안 클라크(키이라 나이틀리)에게 똑같이 전한다. 
영화는 일찌기 학창 시절부터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그래서 여전히 사회 생활을 하는 지금까지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존중받을 수 없는 '캐릭터'인 앨런 튜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결국은 동료들조차 설득해내며 크리스토프를 성공시켜 대 독일 암호 해독전에서 승리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또한 그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또 하나의 전쟁'넘어, 성적 소수자들이 벌이는 '또 다른 전쟁'을 묵묵히 그려나간다. 

친구들에게 놀림받던 앨런 튜링을 시한부 생명의 크리스토프가 알아봐주었듯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시험볼 자격조차 얻지 못하는 조안에게 앨런은 기회를 준다. 그리고, 그녀의 탁월한 능력을 살려내기 위해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하고, 심지어 그녀와 결혼까지 감행한다. 
게이이며 도무지 사회적 소통 능력이라곤 없는 그가 끈질긴 연구에 대한 집념으로 동료들을 설득해 내었듯이, 조안 역시 여성이라는 성적 특수성을 넘어 뛰어난 수학자로서 해독팀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독일의 애니그마를 해독하는 기계 크리스토프을 성공시킨다. 



당신이 평범하지 않기에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된 걸요
크리스토프는 성공했지만 그 성공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마치 독일군의 암호 체계에 농락당하는 양 '이미테이션 게임'을 하며 전황을 유리하게 끌어가야 했던 앨런 튜링의 팀은, 전쟁 후 그들이 했던 모든 성과물을 태워 없애 버렸듯이 역사의 행간 속으로 소멸되어져 간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져 버린 개를 삶아 먹듯이, 그 팀의 대표적 인물 앨런 튜링은 간첩 혐의를 받아, 그 조차도 여의치 않으니 남창 혐의를 씌워 화학적 치료를 받는 처지에 이른다. 

앨런 튜링이 합류한 암호 해독 팀에서 스파이 색출 사건이 벌어진다. 알고보니 범인은 뜻밖의 인물이었고, 영국 정보부는 그것을 알면서도 방치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후 뜻밖에도 앨런 튜링이 잡혀간 계기는 스파이 혐의. 이것은 국가를 위협하는 스파이조차, 자신들의 구미에 따라 이용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것이 국가라는 것을 드러내며, 결국 '스파이'라는 국가적 범죄조차도 사실은 자의적 '도그마'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필요에 따르면 게이는 물론, 사회적 부적응자, 여성조차도 이용하던 정부가, 그들이 필요로 되지 않을 때, 얼마든지 소모품 취급하며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그려낸다. 조안이 위해를 당할까 그녀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종용했던 앨런 튜링의 간곡한 부탁은, 결국 앨런 튜링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을 통해, 국가 권력의 두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3월 3일을 기준으로 <킹스맨>에 이어 박스 오피스 2위을 차지하며 120만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여전히 '좌빨'이라는 프레임이 먹히며, '성적 소수자'의 폄하가 비일비재한 한국 사회에서, 앨런 튜링의 업적을 넘은, 사회적 소수자의 비극적 삶을 다룬 실화가 꾸준한 인기를 누린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by meditator 2015. 3. 4. 10:25

전세계 영화제를 돌며 한국 영화의 성취를 널리 알리고 있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조용한 성적을 거두며 사라진 영화 <해무>, 조선족 밀항자들의 떼 죽음과 그 사후 처리 과정에서의 잔인함으로 19금 판정을 받았던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묘하게도 엇갈렸다. 실제 영화에서 보면, 다수의 조선족들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감독은 그 충격파를 우려해 어둡게 스쳐 지나가듯 그린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도, 피가 낭자한 살육의 현장이란 느낌이 들지 않도록 최소화시킨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잔인하다며 그 고통을 호소한 사람들 중에는 보이는 그 장면보다, 그 장면에서 울려퍼지는 음향과 분위기에 더 짖눌리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무>를 보고 그 잔인함에 눌려 영화가 제시하는 내용이고 뭐고 다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던 지인과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를 봤다. 19금에, 영화 마지막 후반부에 생각지도 못한 대규모 인명 살상씬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 괜히 보았다는 평가를 내리면 어떻게 하나 지레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웬걸, 영화를 보고난 지인은 전혀 잔인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단다. 심지어, 영화 클라이막스의 그 부분에서 어떤 경쾌함조차 느꼈다고 하니. 심지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발렌타인데이에(우리가 영화를 본 날이 발렌타인데이였다) 본 영화에 악당이 발렌타인이었다는 아이러니함까지 지적하는 섬세한 관람평을 남겼다. 



007의 전복? 하지만 여전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
아빠의 뒤를 이어 새로운 비밀요원으로 탄생하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은 19금의 액션 오락 영화이다. 이렇게 웃고 즐기자고 보는 영화를 놓고, 엄정한 사회 의식을 주제로 내걸었던 <해무>와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희석해 전달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마비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는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 않을까.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는 그 영화를 보면 떠올릴 수 밖에 없는 007시리즈를 전복시키는 다수의 코드를 가지고 등장한다. 온 세상을 떠돌며 악의 무리들을 응징하는 한편 아름다운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데 주저하지 않는 007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여왕의 신하이다. 이름에서 부터 '킹스맨'이라 지칭하는 킹스맨 역시 007과 다르지 않는 영국 황실 직속 비밀 첩보 기관의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한껏 귀족적 풍모를 내세우는 007과 달리, 이제 영화 <킹스맨>에서 주인공이 될 소년(태론 애거튼 분)은 힙합 스타일에, 뒷골목 깡패 의붓 아버지를 가진, 빈곤층의 해병대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뭐 하나 제대로 된 스펙을 가지지 못한 청년이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킹스맨의 수장은 귀족 신분만이 참여할 수 있는 이 조직에 해리하트(콜린 퍼스 분)의 무모한 선택이 낳은 필연적 결과인 듯 말한다. 하지만, 그런 수장의 표현에 해리 하트는 그가 있었기에 자신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며 반기를 든다. 그런 해리 하트였기에, 자신의 목숨을 구했던 동지의 아들 애거시가 보낸 구조 요청을 넘어 다시 한번 그를 킹스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언제나 그렇듯 조직과 타인의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킹스맨의 훈련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누군가의 모멸을 견디면서, 결국은 가장 사랑하는 대상조차도 희생시킬 마음가짐의 시간이 된다. 물론, 킹스맨 조직이 바라본 선인관을 넘지 못하고, 애거시는 그가 애지중지 키워왔던 개를 쏘지 못하면서 최종 선발에서 탈락하고 만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하지 못해서 탈락한 애거시는, 그러기에 자신을 그 길로 인도한 해리 하트가 악당 발렌타인(샤무엘 L잭슨)의 농간에 빠져 한껏 피의 향연을 벌인 채 희생당하고마는 과정을 지켜 본 후 그의 복수를 위해 의연하게 히어로의 길로 떨쳐 나선다. 

자신을 킹스맨의 길로 이끈 해리 하트의 죽음, 그 죽음을 보복하기 위해 나선 길이 결국 진정한 킹스맨 요원으로 탄생되는 과정은, 일찌기 신화적 서사에서 등장한 '살부'신화의 전형이다. 아비의 죽음을 딛고, 그 아비의 길을 승화시키는 젊은이, 그렇게,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역시나 영웅의 탄생을 전형적인 신화적 서사를 도용해 이끌어 나간다. 그저 스토리상 히어로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사투리에 가까운 이상한 영어를 쓰던 애거시가, 마지막 해리 하트와 같은 멋진 신사복을 입고 그가 들던 우산으로 무장한 무기를 들고 멋지게 그가 했듯이,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히던 악당과 해리 하트가 했듯이, 다시 한번 펍의 문을 닫고, 매너가 운운하면서 판을 벌이는 과정은 얼굴에 멍이 든 어머니 때문에 분에 못이겨 펍을 향해 킹스맨 수장의 차를 타고 질주하던 그 분위기와는 한결 차이가 난다. 그저 아비로 상징되는 그 길을 같이 걷는 것이 아니라, 아비로 상징되는 세상을 자기 것으로 내화한 성숙한 한 청년의 등장이다. 



<킹스맨;시크릿 에이전>가 조롱하고 폄하하는 것들
이렇게 힙합 스타일의 한 청년이 자신의 가족은 물론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재 탄생되는 과정을 통해 멋진 신사로 거듭나는 것과 달리, 그와 똑같이 힙합 스타일을 고수하던 악당 발렌타인은 결국 스스로 벌여놓은 문명의 이기로 스스로 징벌을 당하고야 만다. 

007시리즈이 고전적인 악당들은 <킹스맨>으로 오면, 전세계 인을 대상으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인구 청소를 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을 내보인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무기는 다름아닌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의존도가 높은 핸드폰이다. 그의 회사가 제공한 무료 칩이 결국 전세계인의 살상 무기가 된다는 설정은,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은 섬뜩함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구약 성서의 소돔 시처럼, 그 누구의 손을 빌지 않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상황을 통해 인간 청소를 하겠다는 발상은 기발하면서도 현실의 거울처럼 느껴져 섬뜩하다. 더구나, 자신들이 봉사해야할 국민들을 저버리고,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에 들떠 웃고 떠들다 내장된 칩이 터져 명멸하는 숱한 세계의 지도자들이라니!

영화 <킹스맨>은 이렇게 이 시대의 보편적 이기를 무기로 둔갑시키며, 과잉 인구로 헐떡이는 지구라는 재앙을 악의 목적으로 삼으며 보편적 공감을 얻는 한편, 그런 악의 일소에 젊은 영웅의 등장에의 개연성을 획득해나간다. 개 한 마디로 죽이지 못하던 젊은이가 자신의 아비와 같은 해리 하트의 죽음을 목격하고, 해리 하트는 물론 역시나 싼 핸드폰에 홀려 무료 칩을 받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 손아귀에 놓인 동생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다수의 인명을 살상하는 작전에 돌입한다는 폭력적 개연성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순조롭게 영웅이 될 주인공의 개연성을 <올드보이>의 오마주를 해가면서 얻어가는 한편, 좀 더 면밀하게 이 영화를 들여다 보면 우리 사회에 여전한 편견, 혹은 편협함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다. 

우선 처음 주인공 애거시가 힙합 스타일에 사투리에 가까운 언어를 쓰며 등장하듯이, 이 영화는 은연 중에 힙합 스타일은 치기어린 것이며, 그에 반해 나중에 그가 착용한 '영국 신사 풍'의 스타일이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어른'이라는 식의 화법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애거시와 같은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다름아닌 악의 축 발렌타인이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허연 힙합 스타일을 고수한다. 또한 그가 해리 하트를 초대해 대접한 음식은 '해피밀'이다. 영화는 소위 힙합으로 대변되는 빈민층의 정서와, 블루 칼라의 음식으로 대변되는 해피밀을 악인으로 설정으로 가져온다. 전 세계인을 죽이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해 가면서도, 막상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발렌타인의 아이러니한 모습등을 통해, 그가 미성숙한 인간임을 한껏 드러낸다. 

어디 스타일뿐인가. 악의 축인 발렌타인이 여전히 흑인이며, 그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최고의 킬러 가젤(소피아 부텔라 분)는 동양인이다. 그에 반해 주인공도, 그를 이끈 해리하트도 전형적인 백인이며, 그들이 주창하는 '매너'가 운운하는 대사는, 결국 해리 하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 영국 귀족 계급의 정신을 대변한다. 마치 '관용'을 내세우면서 한껏 조롱하는 모양새와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영화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폭죽처럼 터지는 수많은 인간들의 머리통들이다. 그들이 다수의 국민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안전만을 구한 채 그곳에서 희희낙락 파티를 벌인 죄과는 엄정하지만, 발렌타인의 도발을 방지하기 위한 영화적 선택으로 숱한 머리통들의 폭죽을 바라보아야 하는 불편함은 어떨지. 더구나, 그것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 쾌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라니 말이다. 결국, 그 누구가 되었건, 개 한 마디도 쏘아 죽이지 못하던 청년은, 자신을 멋진 신사의 길로 인도해준 은인의 복수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을 죽이고도 술잔을 들고 공주의 방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역시나 007과 다르지 않은 살인 기계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비장한 망치씬을 피비린내 한 점 나지 않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씬으로 거듭 재탄생시킨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그런 피 냄새를 제거한 채 경쾌한 오락 액션으로 다가올 뿐이다. 

by meditator 2015. 2. 16. 16:27

8월 13일 개봉한 <해무>가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장벽을 뚫고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1000만 관객의 기록을 수립하고도 여전히 파죽지세의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명량>과 전체 관람가의 <해적>의 흥행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작품성만을 믿고 연령제한가를 감수한 고진감래의 성취다. 

이런 <해무>의 성과는 같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던 <신의 한 수>나 <아저씨>에 비해서도 빨리 달성됐고, 자체 배급망을 가진 CJ와 롯데를 상대로 한 투자배급사 NEW의 고군분투의 결과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청소년 관람 불가의 영화로 이 정도 기록이라면 무난하게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을 거라 예상되지만, 극장 체인을 가지지 않은 뉴의 <해무>는 다른 영화들의 상영관 과점을 넘지 못하고, 상영관이 축소되는 처지에 있다. 보고 싶어도 마음 놓고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19금 스릴러 최고의 흥행작 <추적자>보다 2일 빠르게 100만 관객을 돌파했음에도 이 상태라면 200만 고지는 물론, 손익분기점은 언감생심이 될 수도 있다.

<해무>에서 선장 역할을 맡은 배우 김윤석이 이 영화를 두고 '용감한 선택'이라고 표현한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심의 과정에서 15세 관람가 버전까지 마련했던 영화는 원래 작품이 하고자 했던 바를 포기하지 않고자 '19금'을 감수했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만난 사람들 중에는 <해무>가 보여준 선상 잔혹사를 이겨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그런 와중에서도 피어나는 선원 동식과 조선족 홍매(한예리 분) 두 남녀의 적나라한 사랑에 대한 호불호도 갈린다. 초반에 막내 선원 동식(박유천 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배에 도끼를 댔던 사람들이 해무가 드리워진 전진호 안에서 아비규환의 대립을 보이는 것에 대한 급격한 온도차에 대해서도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리얼리티'로서의 이야기를 넘어서, '묵직하게 은유의 그물을 치고 은밀하게 생각의 미끼를 던진다'는 영화 평론가 심영섭의 평처럼,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전진호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으로서 전진호 선원들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 <해무>는 달리보인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과 함께 배를 탄 호랑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순간, 영화가 무궁무진한 철학적 담론의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해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영화의 묘미에 빠질 수 있다. 우선은 이 영화의 제작자가 봉준호 감독임을 전제로, 그가 <설국열차>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적 계급 관계를 열차의 나뉜 칸을 통해 설명해 냈듯이, <해무>는 '바다로 간 <설국열차>'라고 해석하는 관객들이 있다. 선장 철주는 기성세대를 대변하고 그들의 질서를 옹호하는 지배 계급을 상징하며, 기관장이나 그의 결정에 호응하는 선원들은 기성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들로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밀항을 하기 위해 올라탄 조선족들의 해석 또한 다른 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 중 밀항의 와중에서도 책을 들여다보는 조선족 선생은 지식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선장이 난폭하게 밀항자들을 몰아붙일 때 가장 앞장서서 조선족들을 독려하여 어창으로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상징되어진다는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진호를 '바다로 간 설국열차'로 해석하면, 동식의 사랑은 그저 사랑이 아니다. 돈과 권력에 순응하는 기성세대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젊은 세대의 열정이요, 순수함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전진호를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장 철주를 향해 질주하는 동식은 또 한 사람의 꼬리칸 승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뭍으로 걸어 나온 동식과 홍매는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 하얀 설원 위에 던져진 요나(고아성 분)의 '막막함'과 다르지 않다.


DIARY


이런 사회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본 <해무>를 보다 폭넓게 신화적 영역으로 확장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신화 속 젊은이들이 아비 세대를 극복하기 위해 아비를 죽이는 '살부'의 형식적 과정을 건너듯이, 동식이의 사랑은 바로 그런 아비 세대를 극복하기 위한 서사적 형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배에 여신이 상징물로 담기고 여성의 이름을 붙이듯이, 신화적 상징으로 배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아비 세대는 자신들의 여성인 전진호에 또 다른 여성 홍매 등이 타는 것을 불온한 징조로 여긴다. 그리고 당연히 젊은 세대는 아비 세대의 여성이 아닌 젊은 여성에게 매료되어 아비의 세계를 파괴한다. 

하지만 이는 파괴가 아닌, 탄생이다. 동식은 홍매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불 등을 들고 오면서 손에 사과 한 알을 함께 들고 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덴동산의 그 선악과를 상징하는 듯한 사과를 말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나누어 먹은 순간, 더 이상 그들에게 에덴동산이 낙원이 아니듯이, 사랑을 하게 된 동식과 홍매에게 아비 세대의 불온한 공간 전진호는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전진호를 파괴하고 아비들을 죽이지만,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 동식이도 그 대가가 마냥 행복하지 않다. 낙원을 떠난 아담과 이브가 삶의 고난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듯, 동식과 홍매가 만난 건 현실이다. 결국 살부의 죄과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의 눈을 찌른 채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와, 홍매를 구하지만 그녀를 잃은 채 일용직 근로자가 되어 중국인 거리를 전전하는 동식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STILLCUT


동식과 홍매의 도발적 사랑은 마치 <금지된 장난>의 소년과 소녀와도 같다. 부모를 잃은 채 전쟁고아가 된 폴레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종교적 금기를 어긴 소년의 행동은 홍매의 말 한 마디에 몰매를 맞는 조선족 밀항자를 몸으로 막아주는 동식의 맹목성으로 이어진다. 

완호 아제(문성근 분)의 죽음 이후 그들이 벌인 눈물의 정사는 사랑보다는 생존을 향한 절망 속의 몸부림에 가깝다.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잊고자 금지된 장난을 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금지된 장난>의 어리고 나약한 폴레트와 미셸이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함께 할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듯이, 세상 속으로 나온 동식과 홍매는 무기력하게 진짜 세상에 휩쓸려 간다. 


묘하게도 <해무>는 첫 번째 관람할 때는 영화의 자극적 상황에 눈을 빼앗긴다면, 그런 상황을 한번 거르고 본 두 번째 이후의 관람에서는 영화 속 인물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바로 선장 철주의 마지막이다. 배를 살리기 위해 돛을 들어 올리던 그는 그 돛을 매놓은 밧줄에 발이 감긴다.



STILLCUT


아마도 <해무>를 본 다수의 관객들은 철주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상징으로서 공감했을 것이다. 철주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는 각각의 캐릭터로서의 인간 군상이다. 누군가는 집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돈을 위해, 혹은 누군가는 양심을 위해,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습성, 혹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대다수의 그 핵심을 <해무>는 콕 찌른다. 

진짜 <해무>가 불편하다면, 그건 전진호 안에서 벌어진 조선족 몰살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잔혹하리만치 사실적으로 그려낸 인간 군상들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섬에 표류된 25명의 소년들이 보여준 적나라한 인간 본성 <파리 대왕>의 해상판 버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진실을 직시하기가 불편한 것을 겉으로 드러난 잔인한 묘사로 면피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이 내놓은 이러한 여러 해석 중 어느 것이 맞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영화 <해무>의 진짜 묘미다. 지금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고민,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회,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삶에 따라, <해무>는 안개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래서 볼 때마다 다르다는 평도 눈에 띈다. 

물론 극장에 가서 꼭 심각한 영화를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올 한 해 너무나 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우리 사회의 속살을 지켜 본 우리들, 몇 번의 웃음으로 쉽게 잊거나, 맹목적인 지도자에 대한 향수로 그 모든 것들을 지워내는 대신, <해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의 미끼'를 던져보는 건 어떨지. 다시 한번 <해무>를 강추한다. 


(이 글은 디시 인사이드, 기타 드라마 갤러리, 하필시크미랑동 님의 <리뷰> 내가 본 해무는 IMF와 두 남자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였다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by meditator 2014. 8. 26. 12:18

올 여름엔 '바다'를 보고 싶으면 극장에 갈 일이다. 

여름 극장가 4편 중 3편이 바다를 담았다. 그 중 <명량>은 날마다 기록을 갱신하며 천만 관객 몰이를 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해적>이 '의외로 재밌다'는 평을 받고 개봉했고, 다음 주면 올 기대작 중 마지막 영화 <해무>가 개봉할 예정이다. 이렇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세 편을 내리 보고 나면, 아마 올 여름도 지나갈 것이다. 

<명량>이 천만 관객을 추동하는 가장 중심적인 요건은 아마도, '명량 해전'을 통해 구현된,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의 전략적 성공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보듯이, 그에게 남겨진 단 열 두 척의 배, 그것도 그나마 믿었던 거북선마저 불타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 판옥선 열두 척을 가지고 330여척의 위용을 자랑하는 일본을 무참히 패배의 늪으로 빠뜨렸던 '승리'의 역사말이다. 

STILLCUT

하지만 역사를 많이 알지 못했던 사람이라도 안다. 그렇게 '기적'을 만들었던 이순신이지만, 결국, 노량 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전사했다는 것을. 또한 전장에 나서면서, 투구를 벗고 나섰다는', 어쩌면 예정되었을 지도 모르는 죽음이,  이미 영화 <명량> 서막에서도 보여지듯이, 그를 질시하는 임금과 조정 관료들에 대한 그의 비감어린 마지막 선택이었으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역사적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명량>은 그런 후기를 담지 않는다. 오로지, 갖은 고문으로 옥고를 치루어 병을 얻고,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신위조차 모시지 못한 상황에서도, 백성에 대한 '의리'를 다하여 결국 성공하고 마는 지도자 이순신이 성공했던 '순간'을 그려내고, 사람들은 그에 환호한다. 

하지만, 그런 영웅을 거두고 본 <명량>의 바다는 비감하다. 
패전을 거듭하여, 단 열 두 척의 배만이 남은 상황에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의 수군은 '전멸'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았고, 그런 수군에 대해 중앙 정부는, 그나마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 육지의 권율 부대로 합류할 것을 명령한다. 
날마다 전해지는 소식은, 일본에 의해 저질러지는 갖은 만행, 그 결과물로 돌아오는 건, 귀와 코가 베어진 채 죽은 자들의 머리들이다. 일본군은 누가 먼저 한양을 칠 것인가를 두고 내기를 하는 마당에, 갈 곳 없는 백성들은 하지만 믿을 자가 없다. 이순신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지만, 그가 바다에서 외선을 쓰러뜨리는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진정 이순신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파죽지세로 밀려들어오는 왜국의 파고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댈 곳 없는 현실의 비감한 바다는 시대를 달리 하지만, IMF의 파고를 맞은 <해무>의 바다와 그리 다르지 않다. 수리를 필요로 하는 낡은 배, 하지만 선주는 수리비를 주는 대신, 정부 방침이라며 '폐선'을 종용한다. 이름만 전진호일 뿐, 물때를 맞추지도 못한 채 항구로 돌아온 낡은 배와 거기에 몇 명의 선원이 있을 뿐이다. 몇 푼의 보상금으로, 지금까지 뱃놈으로 살아왔던 삶을, 그리고 미래를 날려버리라 한다. 온갖 서류를 내세워도 알량한 돈 몇 푼을 마련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배에는 팔팔하던 그렇지 않던 사람 여섯 명이 있고, 그들의 인생이 있다.  IMF라는 소리없는 전쟁은 조용히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전사시켜 가는 중이다.단지 다르다면, 그런 현실의 비감함을 이순신은 '기적'을 통해 성공적으로 길어올렸고, <해무>는 한 치 앞을 모르는 바다 안개 속에, 배와 함께 뱃사람들의 삶도 방향을 잃는다. 

이순신은 현실의 비감함을 '두려움'이라 정의내린다. 
동료들이 모두 죽어, 자신도 죽을 게 뻔해 도망을 치려던 병사를, 두 말 할 것도 없이 처치해 버린다. 덕분에 사람들은 두려우면서도, 두려움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한다. 자신은 그런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하겠다고. 
물 때를 이용한 유리한 위치 선점, 그리고 거북선의 위용에 가려 그 능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바다에서 일본 배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가졌던 판옥선,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다 절묘한 시기에 발휘되는 기가 막힌 전술을 통해 이순신은 열 두 척, 아니 영화 속에서는 그들 역시 두려움에 떠는 백성에 불과했던 나머지 군장들의 판옥선들 앞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며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순신을 보고, 우리쪽 사람들은 두려움이 '용기'가 되어  쓰러져 가던 이순신의 배를 사람들의 힘으로 살려냈고, 일본군은 공포에 질려 앞다투어 도망을 치게 되었다. 

하지만 배를 살리기 위해 '밀항'이란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는 운명적 리더, 자신이 이 배에선 선장이고, 아버지고, 책임자라며 소리를 높이는 철주와, 죽기를 각오하고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았다며' 싸움에 나서는 이순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서 무척이나 다른 듯 닮았다. 
해전이 성공을 거둔 후, 한적한 길을 여유롭게 거닐며 아들은 아비에게 묻는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섰던 그 전투의 승패가 갈리던 그 순간이 미리 대비해 두었던 것이냐고. 그에 이순신은 담담하게 말한다. 천우신조라고. 즉, 그에게 명량의 회오리 물때를 대비한 전술은 있었지만, 그래도 300여 척이 넘는 역부족의 외선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결국 '두려움이 용기가 되어,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기적이었다. 

덕분에 <명량>에서 리더 이순신의 행간을 채우는 것은, 그런 리더의 고뇌어린 선택에 따라, 때론 방황하고, 저항하며,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가 국제 경기에서 종종 마무쳤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헝그리 정신'과 묘하게도 일치한다. 적진에 첩자로 나갔던 젊은 남편은, 죽어가면서도 아내에게 치마를 휘둘러 자신이 탄 배가 화약고임을 알리게 했고, 주줌거리던 무장들도, 지켜보던 백성들도, 그리고 아비를 잃은 아들들도 신들린 듯, '용기'를 낸다. 어쩌면 이순신이 말했듯이, 기대했지만, 우연이고, 기적이고, 그 기적의 실체는 사실 리더가 아니라,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명량>을 통해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이 비감한 현실에서 다시 한번, 우리들에게 죽음을 불사하고 싸울 용기를 줄 헌신적인 리더이다. 정작 명량 바다에서, 배를 젓고, 배에 기어오르는 적들과 뒤엉켜 싸우고, 쓰러지는 배를 세운 사람들은, 백성 자신들인데, 그런 자신들을 그렇게 이끌어준 이순신에 환호한다. 즉, 열패감에 사로잡혀 현실을 견디기 힘든 자신을 다시 한번 '헝그리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도의 심정이요, 그런 영화를 통해 쏟아지는 환호는, 우리가 매번 선거 등을 통해 확인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POSTER

그렇게 메시아적 열망을 대변하는 <명량>과 달리, <해무>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구원을 약속하는 메시아는 멀고, 현실의 리더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으며, 그 조차도 여의치 않다. 선장이 안겨 준 돈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는 선원들처럼, 부당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듯한 이익은 결국 신기루라는 걸 확인시켜 줄 뿐이다. '환타지'로서의 <명량>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메시아적인 리더와, 그를 따라 기적을 만들었던 역사가, 현실로 내려 앉으면, 사실 이렇다는 걸 <해무>는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당신이 선택한 리더가 철주요, 당신 역시 전진호 선원 중 누구 하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족과 같은 선원들을 저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던 동식의 선택조차 결말을 알 길 없다. 그리하여, <명량>에 이어, <해적>을 걸르고, 뒤이어 개봉하는 <해무>에 대한 대중의 판단이 더더욱 궁금하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기적을 구원하는 대중의 열망이, 현실 속 자신들의 모습을 안개 속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전진호 선원들의 선택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기적처럼 현실의 삶을 구원해줄 거라 믿었던 리더가 선택한 묘수가, 밀항과 같은 무리수이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이 나라를 구원해 주리라 믿으며 젖는 노와, 휘두르는 칼날과도 같은 선택이, 해무 속에 오리무중 갈 길을 잃은 욕망을 향한 몸짓일 수도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8. 7. 18:27

묘하다. 

마치 사귀던 애인에게 느닷없이 이별 선언을 들은 것과 같다. 달콤한 데이트를 기대하며 나갔던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친 이별 선언, 처음엔 이게 뭐지? 얼떨떨하다가,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이별의 아픔이 치고 올라오듯이, 영화가 암전된 후, 극장을 벗어나는 거리가 멀어지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전진호와, 거기에 올라탄 여섯 선원들이 가슴으로 스며 들어온다. 

영화 <해무>에서 전진호는 IMF의 파고 속에 헐떡인다. 이제는 폐기될 고물처럼 여겨지는 배, 그리고 한때는 여주 다방가에 짜한 소문을 내던 돈 잘 쓰는 선장이었지만, 이제는 온갖 서류를 들이대봐도 돈 몇 푼 꾸기도 힘든 처지의 선장 철주, 하지만 여전히 그에겐 포기할 수 없는 배와, 그를 포함한 여섯 선원이 있다. 

그래서 '돌아갈 집'이 없는, 철주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집', 배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믿고 따라오는 '가족같은' 선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독단적으로 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기로 한다. 하지만 처음 해본 '밀항'을 낡은 배는 소화할 수 없었고, 배에 들이친 해무처럼 여섯 선원들은 한 치 앞을 모르는 운명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POSTER

<해무>의 쇼케이스에서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심성보 감독은 뜻하지 않은 상황 속에 놓인 여섯 선원들의 서로 다른 인간적 선택을 주목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 그대로, 여섯 명의 인간들은, 뜻하지 않게 그들에게 닥친 상황 속에서,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하지만 그래서,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선택을 한다. 

올해 들어 유난히도,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그 중에서도, <명량>, <바다로 간 해적>, 그리고 <해무>까지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런데 그 중에서, 현재의 우리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을 고르라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해무>다.  

영화 속 '전진호'는 그 살기 힘들었다던 IMF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제 오늘을 사는 누군가는 말한다. 차라리 그때는 견딜만 했다고. 그렇게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던 IMF 시절에, 선장 철주는, 이제는 한물갔다고, 그래서 보상금이라도 받으라는 낡은 어선을 고집한다. 그의 모습은, IMF 때 한참 우리 사회에서 화자되었던, 바로 그 '무기력한 아버지'상을 다시 한번 재연한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무기력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 세대가 바로 철주다.
그래도 아버지 철주는 어떻게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책임지려고 마지막 까지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이가 든, 기관장 완호에게 가면, 인생은 처참하다. 배에 등록된 선원 명부에도 올라갈 수 없이, 숨어 살아햐 하는 그의 인생의 내력은 그의 허물어진 표정만으로도 짐작 가능하다. 70년대 문학에서 만났던, 산업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몇 켤레의 구두를 남긴 채 사라졌던 인물이, <해무> 속 완호 아재로 버티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래도 전진호에 기대 안간힘을 쓰며 붙들던 그의 삶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진짜 무너져 버린다. 
선장이 '밀항' 흥정을 하는 동안 밖에서 지키고 섰던,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선장이 '밀항'을 하라면, '밀항'을 하고, 그보다 더한 일을 시키면, 더한 일도 해치우는 호영,  또한 자기 자식을 거느리고 살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우직한 어느 집안 가장의 현현이다. 

그렇게, 허물어져 가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던 아버지 세대와 함께, 그보다 젊은 경구, 창욱, 동식이 있다. 
<해무> 속에서 그들이 어우러지고, 엉클어지는 사건의 중심에, '성'과 '여자'가 놓인 것은, IMF를 이끌던 세대의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장치이다. 약삭빠르게 자기 것은 챙기려는 경구와, 그 누구보다 욕망의 화신같지만 정작 뒷북만 치는 창욱도, 그리고, 첫 눈에 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던 동식은, 아버지 이후 세대, 젊음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대, 서로 다른 삶의 이유를 가진 여섯 명의 선원들의 처음은 '가족'과도 같았다. 동식이 해온 음식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함께 온기를 나누고, 모처럼 만난 병어 떼를 동식이의 다리와 맞바꾸어도 '다행'이라며 동식이를 다독일 줄 아는 가족이었다. '밀항자'를 처리해야 하는 과정에서도 '해양고' 출신이 이럴 때도 통하냐며 이기죽거리면서도 막내는 접어주려던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 '가족'은 그들이 살기 위한 이기적 선택의 풍랑 속에 해체되고, 무너져 간다. IMF 때이후로 끊임없이 해체되어 가는 우리 사회처럼. 
같은 하지만 다른 뉘앙스의 조선족을 '상품'으로 여기며, 그들을 다루는 철주, 그들의 저항에, 그들이 이 살기 힘든 세상에 내 밥그릇을 빼앗아 먹는 '것'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경구, 그리고, 묵묵히 그들을 '상품'답게 뒤탈없이 처리하려는 전진호 선원들의 행태는, 완호의 정신적 아노미가 일탈처럼 여겨질 정도로, 우리 사회의 냉혹한 '민족 이기주의'를 복사한다. 
그리고 그런 '민족적' 이기주의는 상황에 따라, 완호 아재마저 거추장스러워지고, 그가 사라지자, 그의 돈과 물건을 챙기는, '나 하나의', 이기주의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선 인간다움은 끝을 모른 채 추락해 간다. 
영화 속 그들은 뜻하지 않은 운명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전진호와 함께, 혹은 따로 운명이 갈리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그들은 이 시대을 사는 우리들의 선택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아직, '인간적'이라고 믿고, 우리가 탄 이 배가, 아직 침몰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을 뿐,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닻을 포기하지 못한 선장 철주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 군상의 극단적 선택들 속에서, 맹목적인 동식의 '사랑'은 그래서 더 대비된다. 사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가이내 내꺼'라는 창욱과, 내 목숨을 다해 너를 지켜주겠다는 동식의 사랑 사이에, 욕망과 순정의 지수를 논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홍매를 만난 처음 순간부터, 마지막 6년 후까지, 포기할 줄 모르고 자신을 던진 동식의 사랑은, '욕망' 그 이상의 '연민'을 남긴다. 덕분에, <해무>제작 발표회 이후 계속 풍문으로 떠돌던, 홍매와 동식의 베드신은, 아마도 우리 영화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사랑' 그 이상의 공감을 나누는 교감의 나누는 씬으로 회자될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이 몸을 나누는 그 순간의, 절망과, 두려움과, 슬픔,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삶에 대한 갈구의 정서가 '정사'를 뛰어넘는다. 

STILLCUT

영화적 화법을 두고 논하자면, <해무>에 대해 각자의 의견이 갈릴 수도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동안의 영화적 기법에 익숙한 누군가는, 좀 더 스릴있게, 좀 더 서스펜스가 강하게, 좀 더 하나, 하나의 캐릭터를 진하게 라는 아쉬움을 피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처음에 서두를 띄웠듯이 묘하다. 어쩐지 아쉽다고 했던, 그런 것들이, 영화가 끝난 후, 묘하게, '인간적 조심스러움'이나 '존중'처럼 남는다. 그들은, 좀 더 '극악'해질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한 자락, 인간이기에, 라는 연민을 위해, 어쩌면, 그 미진함이, <해무> 전진호의 여섯 선원에 대한 기억을 당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오래 저장시키도록 만드는 건, 김윤석, 박유천, 김상호, 이희준, 유승목, 문성근, 진짜 전진호에 있을 것만 같은 여섯 배우들이다. 결국은 '악의 화신'같은 폭발적 연기력을 보이면서도, 스러져가는 아버지 세대의 허망함을 놓치지 않는 김윤석의 카리스마도, 오랜만에 돌아와 그림자처럼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고 하지만, 그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연민이 울컥 솟아오르게 하는 문성근도, 끝까지 '욕망'에 충실한데, 그게 결코 미워지지 않는 이희준의 창욱에 대한 훌륭한 해석도,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갑판장의 우직함이 드러나는 김상호의 뚝심도, 이제야 유승목이라는 배우가 있었구나 깨달음을 주는 경구 역의 유승목도, 그리고, 그의 사랑이 안쓰럽게 못해 미어지게 만드는 동식 역의 박유천까지, 좋은 배우들의 진솔한 연기의 향연으로 <해무>는 남을 것이다. 


by meditator 2014. 7. 28. 21:35

제 67회 칸 영화제 감독 주간 공식 초청작 <끝까지 간다>와 미드나잇 스크리닝 공식 초청작 <표적>에는 칸 영화제 초청작이라는 공통점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영화 초장부터 긴박하게 쫓고 쫓기는 액션의 진수를 보이는 이들 두 영화에서 중반에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하는 형사 두 명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표적>의 송반장 역의 유준상과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 형사 역의 조진웅이다.


광역 수사대의 송반장으로 등장하는 유준상은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듯이, 표적이란 영화가 개봉될 때까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심지어 영화 속 그가 등장해서, 정영주(김성령 분)가 수사하는 백여훈 사건을 가져갈 때까지, 그저 일련의 수사적 관행처럼 보여질 뿐이다. 유준상이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었던 숱한 선량한 캐릭터들처럼 영화 속 송반장도 어떤 컬러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경찰처럼 보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태훈의 눈 앞에서 그들을 쫓던 킬러들이 사실은 형사였다는 게 알려진 순간 송반장의 총구는 당겨지고, 지금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쉽게 만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악인의 등장을 알린다. 

STILLCUT

<끝까지 간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고건수의 사고부터 보여준다. 경찰서를 덮친 감찰반, 자신의 책상 속에 숨겨진 비밀 장부, 그 열쇠를 가지고 어머니 장례식장으로부터 경찰서를 향해 빗길 속을 달려가던 고건수, 길 한 가운데 있는 강아지를 피하며 가족과 통화를 하며 잠시 잠깐 한 눈을 팔던 그는 그만 사람을 치고 만다. 당황한 끝에 고건수는 사망자를 차에 숨기고, 다시 감찰관의 눈을 피해 그를 어머니와 함께 장례치뤄 버린다. 하지만 사건은 거기서 부터 시작이다. 그에게 걸려온 의문의 전화, 상대방은 그가 저지른 모든 범죄를 줄줄이 다  꿰고 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어디에 묻어버린 것까지. 고건수 역시 자신에게 전화를 걸던 사람을 쫓아가려고 하지만, 놓치고 장면이 바뀌어, 고건수에게 전화를 걸던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등장한다. 하얀 경찰복을 입은 우람한 체격의 박창민. <끝까지 간다> 역시 중반 부 이후 재미를 견인하는 주된 장치 중 하나는, 바로 박창민이 그저 고건수의 목격자가 아니라, 고건수가 재수없이 걸려든 거대한 악의 음모의 주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영화 <표적>과 <끝까지 간다>의 악의 축은 형사들이다. 그들은 직업만 형사일 뿐, 아니 오히려 형사라는 직책은 그들이 저지르는 비리의 배경의 한 요소로,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폭력조직 우두머리 못지 않는 절대적 악의 권능을 뿜어낸다. 
광역 수사대의 반장으로 백여훈 사건을 맡지만, 실제 그의 목적은 백여훈을 없애고, 자신이 결탁한 아니 실제 자신과 자신의 팀이 저지른 사건을 덮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광역 수사대와 그들을 대표하는 반장이지만, 실제 그들이 하는 일은 청부 살해를 비롯한 돈이 되는 그 모든 일이다. 영화는 오히려 법과 정의를 실현하는 광역수사대 반장 백여훈을 상대로,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정체모를 백여훈의 대결로 귀결된다.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 역시 마찬가지다. 마약업자와 결탁한 그는 압수한 마약을 빼돌려 자신만의 마약 제국을 건설한다. 자신의 뜻을 거스른 자는 심장에 총구가 새겨진 교통사고 사망자로부터 고건수까지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는 덜 나쁜 형사대 더 나쁜 형사의 대결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영화 속 형사가 절대 악으로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영화만이 아니다. 드라마 속 형사들도 만만치 않다. <갑동이>에서 갑동이를  십 여년을 그토록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형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골든 크로스>에서 강도윤의 아버지가 대책없이 자기 딸의 살인범이 되어버린 과정에는 바로 권력의 손을 잡은 강력계 형사 곽대수가 있다. 그들은 정의의 편인양 등장해서, 법의 수호자인양 거들먹거리면서, 자신이 모시는 사람들을 위해,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그리고 그런 봉사의 핵심에는 바로 '돈'이 있다. 법률로 보장된직업적 소명은 아랑곳없이, 허울이 되고, 그들은 자신이 지닌 알량한 '권력'에 의지해 타인을 억압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고,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갑동이가 형사가 된 것이 기막힌 반전이라며 무릎을 친다. 

STILLCUT

사채 업자와 손을 잡고, 마약을 빼돌리며, 업자들에게 돈을 상납받는 형사들 캐릭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다수의 사건 사고를 통해 그런 비리를 익히 알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로 상징되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권력의 비리와 부도덕에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쩌면, 우리 사회 법과 정의가, 약자들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실을 무기력하게 인정한 우리들은, 그런 사실이 극단적으로 캐릭터화되어 등장하는 영화와 드라마속 형사들이 익숙하다. 우리 사회 관권의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속성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갑동이> 속 연쇄 살인범 갑동이가 형사 반장이 되는 과정은, 결국 이 사회의 많은 범죄들이 가진 권력적 성격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래서, 영화 <표적>과 <끝까지 간다>는 액션이 중심이된 오락적 성격의 영화임에도, 그들이 영화 마지막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법망을 피해 악을 저지르던 조폭을 무찌르는 액션 쾌감과는 또 다른, 타락한 권력이 정죄되는 '정의'의 심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표적>의 백여훈이 바란 것은, 이역만리 외국에서 자신의 목숨을 팔아 번 돈으로 동생과 함께 치킨 집이나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소박한 소망을 손반장은 자신의 편의에 의해 짓밟는다. 비록 고건수는 비리나 저지르고 자신이 친 시체를 숨기는 찌질한 형사이지만, 딸과 함께 살아보려는 소시민의 표상처럼 영화에서 그려진다. 그래서 그렇게 소박한 소망을 가진 보통 사람과, 소시민에의해, 그들보다 부도덕하며 그들보다 권력을 잘 이용해 먹는 악의 축들이 무너졌을 때 묘하게도 관객들은 억눌렸던 감정의 해소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적>과 <끝까지 간다> 속 악인들은 개인일 뿐이다. 그들의 비리는, 영화 속 이들 개인의 비리처럼만 표상화된다. 그래서 그들의 제거로 어떤 여운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신문에서 만나는 다수의 사건에서, 말단의 그 누군가를 제거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부도덕이 끊어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도마뱀의 꼬리처럼 바라볼 뿐이다. <골든 크로스> 곽대수는 거대 로펌 변호사 박희수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리고 박희수의 뒤에는 경제 정책 국장 서동하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우리나라 상위 1% 골든 크로스가 있다. 하지만 액션 오락 영화로서, <표적>과 <끝까지 간다>는 명쾌한 영화 미학을 위해, 감히 그것을 언급하지 조차 않는다. 어찌보면 하수인과 애먼 보통 사람과의 대리전이다. 죽도록 싸우는 강도윤과 곽대수의 결론을 골든 크로스의 지령을 받은 어깨들이 기다리고 있듯이, 본 게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채 한바탕 한풀이로 마무리된다.


by meditator 2014. 6. 3. 15:07

2월 13일 <관능의 법칙>이 개봉했다. 권칠인 감독의 <싱글즈>가 2003년 개봉한 이후로 부터 거의 10년, 마치 그 영화 속 삼십대들이 십년 후의 후일담을 다루듯, <관능의 법칙>은 마흔이 넘은 여자들의 속사정을 들춘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여주인공들의 질펀한 관능의 한 판으로 시작된다. 일주일에 세 번을 하겠다는 약속을 결혼 초부터 굳건하게 지켜오는 미연(문소리), 남편 재호(이성민)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재 안에서 조심스레 비아그라를 털어넣고 아내의 요구를 맞추느라 애쓴다. 다 큰 딸과 사는 싱글맘 해영(조민수)은 딸아이의 눈을 피해 성재(이경영)와의 시간을 갖기위해 궁색하다. 물심양면으로 도와가며 오랫동안 사귀었던 직장의 상사가 어린 여자랑 결혼해버리는 바람에 분노에 떠는 것도 잠시, 그의 어린 연인 못지 않은 연하남의 대쉬에 곧드미스 신혜(엄정화)는 흔들리고. 영화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삶의 욕구를 성욕으로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질펀하게 육체의 향연을 벌인다. 사랑이라 쓰고 '성'이라 오독하듯이. 

하지만 그도 잠시, 동년배의 여자들을 만나면 늘상 하는 얘기라곤 누가 암걸렸네 라는 식의 건강담론 밖에 없어서 재미없다던 미연의 뒷담화가 무색하게,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딸이 '적당히 하라'며 퉁박을 줄 만큼 만끽하며 삶을 누렸던 그녀들에게 삶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녀들이 사실은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삶의 보루들이 흔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금과옥조처럼 믿었던 부부사이의 불문율이 흩어지고, 골드미스로서의 삶을 지탱하던 직장에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결혼에 대한 희망의 무산조차도 무색하게, 싱글맘의 삶을 견인하는 건강이 무너진다. 
그리고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이라도 되는 양 육덕스레 중년의 삶을 묘사하던 영화는 이즈음부터 슬슬 현실에 발을 디디기 시작하고, 남편의 바람난 현장을 목격한 미연, 수술실로 들어가는 해영에 이르러 그들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은 극점에 이르고, 중년의 삶을 묘사하는 영화의 미덕은 이 지점에서 가장 생기가 돋는다. 

[취재파일] 6주차 추천작: 관능의 법칙 관련 이미지

하지만 그도 잠시, 잠깐 숨고르기를 한 영화는, 중년의 신산한 삶을 견딜 수 없었는지, 당의정처럼 아름다운 사랑으로 그걸 포장한다. 결국 관능으로 시작된 그녀들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들을 지켜주고 바라봐주는 순정남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의 원작이 롯데 엔터테인먼트 공모전 1회 수상작인 이수아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서두에 권칠인 감독을 내세운 이유는, 중년의 사랑을 다루었다는 소재적 특수성을 차치하고 보면, 영화의 얼개는 그간 권칠인 감독이 만들어 온 <싱글즈>를 비롯한 <뜨거운 것이 좋아>, <참을 수 없는>와 동일하다. 심지어 신혜에게 등장한 연하남의 설정에서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영미(이미숙> 앞에 나타난 연하남 경수(윤희석)가 오버랩된다. 아니, 다짜고짜 몸부터 맞추고 사랑을 시작하는 방식은 권칠인 감독 영화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랑의 해법이다. 뿐만 아니라, 삼십대 라는 나이에서 오는 현실적 고민을 결국 나난(장진영)과 수헌(김주혁)의 사랑으로 마무리지은 방식처럼, 환타지적 사랑으로 현실의 고민을 무마하는 방식 역시 일관되게 감독의 영화적 스타일(?)이다. 

그래서 늘 권칠인 감독의 영화에서 그래왔듯이, 삼십대든, 그보다 더 나이든 중년이 되었든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듯한 관음의 민망함과, 그걸 지나 현실적 공감의 깊이에 빠져들었가가, 서둘러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 영화를 보고 나면 어쩐지 허무한 것이다. 과연 이 영화가 목적한 것이, 진짜 삼십대, 혹은 중년의 삶과 고민인지, 그게 아니면 그럴듯한 주제 의식으로 포장한 환타지적 사랑과 육욕의 향연이었는지. 

영화는 100일의 말미에도 불구하고 이미 잠시 바람이 난 남편에게 마음이 돌아선 미연을 보여준다. 하지만, 과연 일주일에 세 번 하는 것을 '신봉'하였던 육체적 삶이 중심이었던 미연이라는 여성의 삶에 대한 고민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정'으로 사는 재호와의 삶이 미연에게 의미가 있을지 영화는 고민하지 않는다. 성을 중요시하지만, 정작 한 사람의 삶에 있어 성의 의미를 고뇌하지 않는다. 
자신이 암을 걸렸다는 사실조차 그에게 숨겼던 해영의 자존심은, 그녀의 똥물 묻은 침대 시트조차 닦아주고, 그런 그녀를 보다듬어 주는 성재 앞에서 스르르 사라지고 만다. 이기적이었다는 후회로 결혼을 회피했던 성재의 고민은 서둘러 마무리된다. 
홀로 서기를 한 신혜에게 손을 내밀어 준 현승(이재윤)만 있다면 오케이다. 이모와 조카 정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현승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정말 그녀들의 중년의 삶에 여전히 그녀들을 사랑하는 그들만 있다면 다 해결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건 영화 자체 담론의 한계라기 보다는, 우리 시대 과학적 도움을 받아서라도 여전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중년의 담론에 대한 즉자적 반영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내 곁에 나를 사랑해 주는 누군가만 있다면 나의 중년은 견딜만 한 것일까. 결국, 영화는 관능도, 사랑도, 결국은 중년의 삶도 깊게 들여다 볼 여유가 없다. 

늘 광고에 함께 하듯이 이 영화는 <건축학 개론>을 만들었던 명필름의 작품이다. 영화 <건축학 개론>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결국은 다시 봉합되어질 수 없는 젊은 날의 아픈 추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을 사는 중년에겐 용기와 사랑이 필요하다고 판단 했는지, <관능의 법칙>은 중년의 고민을 좀 더 들여다 보고 여운을 남기는 대신, 서둘러 사랑하는 남자를 쥐어주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덕분에 환타지는 얻었지만, 관능으로 시작된 중년의 문제제기는 휘발된다. 모처럼 몸에 맞춘 캐릭터를 만난듯한 세 여배우의 열연, 그에 못지 않는 이성민의 발군의 연기, 모처럼 만나는 이경영의 멜로가, 그래서 더 아쉬운 영화, <관능의 법칙>이다. 


by meditator 2014. 2. 14.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