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개봉한 <해무>가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장벽을 뚫고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1000만 관객의 기록을 수립하고도 여전히 파죽지세의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명량>과 전체 관람가의 <해적>의 흥행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작품성만을 믿고 연령제한가를 감수한 고진감래의 성취다. 

이런 <해무>의 성과는 같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던 <신의 한 수>나 <아저씨>에 비해서도 빨리 달성됐고, 자체 배급망을 가진 CJ와 롯데를 상대로 한 투자배급사 NEW의 고군분투의 결과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청소년 관람 불가의 영화로 이 정도 기록이라면 무난하게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을 거라 예상되지만, 극장 체인을 가지지 않은 뉴의 <해무>는 다른 영화들의 상영관 과점을 넘지 못하고, 상영관이 축소되는 처지에 있다. 보고 싶어도 마음 놓고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19금 스릴러 최고의 흥행작 <추적자>보다 2일 빠르게 100만 관객을 돌파했음에도 이 상태라면 200만 고지는 물론, 손익분기점은 언감생심이 될 수도 있다.

<해무>에서 선장 역할을 맡은 배우 김윤석이 이 영화를 두고 '용감한 선택'이라고 표현한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심의 과정에서 15세 관람가 버전까지 마련했던 영화는 원래 작품이 하고자 했던 바를 포기하지 않고자 '19금'을 감수했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만난 사람들 중에는 <해무>가 보여준 선상 잔혹사를 이겨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그런 와중에서도 피어나는 선원 동식과 조선족 홍매(한예리 분) 두 남녀의 적나라한 사랑에 대한 호불호도 갈린다. 초반에 막내 선원 동식(박유천 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배에 도끼를 댔던 사람들이 해무가 드리워진 전진호 안에서 아비규환의 대립을 보이는 것에 대한 급격한 온도차에 대해서도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리얼리티'로서의 이야기를 넘어서, '묵직하게 은유의 그물을 치고 은밀하게 생각의 미끼를 던진다'는 영화 평론가 심영섭의 평처럼,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전진호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으로서 전진호 선원들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 <해무>는 달리보인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과 함께 배를 탄 호랑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순간, 영화가 무궁무진한 철학적 담론의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해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영화의 묘미에 빠질 수 있다. 우선은 이 영화의 제작자가 봉준호 감독임을 전제로, 그가 <설국열차>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적 계급 관계를 열차의 나뉜 칸을 통해 설명해 냈듯이, <해무>는 '바다로 간 <설국열차>'라고 해석하는 관객들이 있다. 선장 철주는 기성세대를 대변하고 그들의 질서를 옹호하는 지배 계급을 상징하며, 기관장이나 그의 결정에 호응하는 선원들은 기성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들로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밀항을 하기 위해 올라탄 조선족들의 해석 또한 다른 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 중 밀항의 와중에서도 책을 들여다보는 조선족 선생은 지식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선장이 난폭하게 밀항자들을 몰아붙일 때 가장 앞장서서 조선족들을 독려하여 어창으로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상징되어진다는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진호를 '바다로 간 설국열차'로 해석하면, 동식의 사랑은 그저 사랑이 아니다. 돈과 권력에 순응하는 기성세대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젊은 세대의 열정이요, 순수함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전진호를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장 철주를 향해 질주하는 동식은 또 한 사람의 꼬리칸 승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뭍으로 걸어 나온 동식과 홍매는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 하얀 설원 위에 던져진 요나(고아성 분)의 '막막함'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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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본 <해무>를 보다 폭넓게 신화적 영역으로 확장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신화 속 젊은이들이 아비 세대를 극복하기 위해 아비를 죽이는 '살부'의 형식적 과정을 건너듯이, 동식이의 사랑은 바로 그런 아비 세대를 극복하기 위한 서사적 형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배에 여신이 상징물로 담기고 여성의 이름을 붙이듯이, 신화적 상징으로 배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아비 세대는 자신들의 여성인 전진호에 또 다른 여성 홍매 등이 타는 것을 불온한 징조로 여긴다. 그리고 당연히 젊은 세대는 아비 세대의 여성이 아닌 젊은 여성에게 매료되어 아비의 세계를 파괴한다. 

하지만 이는 파괴가 아닌, 탄생이다. 동식은 홍매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불 등을 들고 오면서 손에 사과 한 알을 함께 들고 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덴동산의 그 선악과를 상징하는 듯한 사과를 말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나누어 먹은 순간, 더 이상 그들에게 에덴동산이 낙원이 아니듯이, 사랑을 하게 된 동식과 홍매에게 아비 세대의 불온한 공간 전진호는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전진호를 파괴하고 아비들을 죽이지만,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 동식이도 그 대가가 마냥 행복하지 않다. 낙원을 떠난 아담과 이브가 삶의 고난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듯, 동식과 홍매가 만난 건 현실이다. 결국 살부의 죄과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의 눈을 찌른 채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와, 홍매를 구하지만 그녀를 잃은 채 일용직 근로자가 되어 중국인 거리를 전전하는 동식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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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식과 홍매의 도발적 사랑은 마치 <금지된 장난>의 소년과 소녀와도 같다. 부모를 잃은 채 전쟁고아가 된 폴레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종교적 금기를 어긴 소년의 행동은 홍매의 말 한 마디에 몰매를 맞는 조선족 밀항자를 몸으로 막아주는 동식의 맹목성으로 이어진다. 

완호 아제(문성근 분)의 죽음 이후 그들이 벌인 눈물의 정사는 사랑보다는 생존을 향한 절망 속의 몸부림에 가깝다.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잊고자 금지된 장난을 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금지된 장난>의 어리고 나약한 폴레트와 미셸이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함께 할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듯이, 세상 속으로 나온 동식과 홍매는 무기력하게 진짜 세상에 휩쓸려 간다. 


묘하게도 <해무>는 첫 번째 관람할 때는 영화의 자극적 상황에 눈을 빼앗긴다면, 그런 상황을 한번 거르고 본 두 번째 이후의 관람에서는 영화 속 인물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바로 선장 철주의 마지막이다. 배를 살리기 위해 돛을 들어 올리던 그는 그 돛을 매놓은 밧줄에 발이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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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해무>를 본 다수의 관객들은 철주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상징으로서 공감했을 것이다. 철주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는 각각의 캐릭터로서의 인간 군상이다. 누군가는 집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돈을 위해, 혹은 누군가는 양심을 위해,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습성, 혹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대다수의 그 핵심을 <해무>는 콕 찌른다. 

진짜 <해무>가 불편하다면, 그건 전진호 안에서 벌어진 조선족 몰살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잔혹하리만치 사실적으로 그려낸 인간 군상들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섬에 표류된 25명의 소년들이 보여준 적나라한 인간 본성 <파리 대왕>의 해상판 버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진실을 직시하기가 불편한 것을 겉으로 드러난 잔인한 묘사로 면피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이 내놓은 이러한 여러 해석 중 어느 것이 맞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영화 <해무>의 진짜 묘미다. 지금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고민,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회,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삶에 따라, <해무>는 안개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래서 볼 때마다 다르다는 평도 눈에 띈다. 

물론 극장에 가서 꼭 심각한 영화를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올 한 해 너무나 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우리 사회의 속살을 지켜 본 우리들, 몇 번의 웃음으로 쉽게 잊거나, 맹목적인 지도자에 대한 향수로 그 모든 것들을 지워내는 대신, <해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의 미끼'를 던져보는 건 어떨지. 다시 한번 <해무>를 강추한다. 


(이 글은 디시 인사이드, 기타 드라마 갤러리, 하필시크미랑동 님의 <리뷰> 내가 본 해무는 IMF와 두 남자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였다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by meditator 2014. 8. 26.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