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이 개봉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열 여덟 번째 작품이고, 올 한 해 뜻하지 않는 스캔들로 주목을 받은 상태이기에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이 궁금즘을 불러 일으킨다. 더구나 당사자 두 사람을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밀어부쳤던 언론과 여론의 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던 홍감독이기에 더더욱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고할까? 그리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어쩌면 그런 일련의 사태에 대한 홍상수 감독다운 '답'이라 해도 그리 '어불성설'이 아닌 영화가 된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말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그런 내가 지금 이렇게 사랑을 하고 있다고. 




감독 홍상수를 안다면
홍상수 감독과 관련된 기사가 연일 언론에 도배되고, 기사화되어서는 안될 개인의 카톡 내용까지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며, 홍상수 감독에 대한 '도덕적 지탄'이 일상화될 때, 사람들은 그가 '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만을 그를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그간 홍상수 감독이 그의 작품을 통해 해왔던, 혹은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안다면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는 사람들이 안다는 '감독'이지만, 정작 홍상수 감독이 누군지는 다들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남자들은 그가 문성근이건, 정재영이건, 유준상이건, 김태우건, 유지태건, 이선균이건 이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의 김주혁이건, 권해효건, 그저 '수컷'이다. 여자, 그것도 이쁜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연애하고, 한번 자보고 싶어하는데 눈이 벌개져있는 본능적 인물들이다. 그들이 '교수'이건, '작가'이건, '영화감독'이건, '학생'이건, 그 직위가 상관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 '직위'로 인해 그들의 '수컷' 본능은 교묘하게 노골적이고, 그래서 결국 더 '찌질하고 치졸해'지기 십상이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90년대의 그의 영화는 '지식인'의 허위 의식을 까발리는 '문제적 영화'가 되었고,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 줄기차게 동일한 남성적 캐릭터로 변주되어 온 그의 영화에서 이젠 감독 스스로가 영화 속 주인공도 해보지 못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에 이르렀다. 현실의 스캔들과 영화 속 캐릭터의 동질성이 감독 홍상수를 '변명'해 주는 그 어떤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지난 20여년간 홍상수 감독이 '사회가 '도덕'이란 잣대로 줄을 대기가 무색하게 줄기차게 별거 아닌 '인간'에 대해 진솔해 왔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나, 그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렇듯 10일 개봉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 등장하는 세 남자 김영수(김주혁 분), 박재영(권해효 분), 이상원(유준상 분)은 한 여성 소민정(이유영 분)에게 매달린다. 그들의 직업이 화가이거나, 영화 감독이거나, 그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진 게 중요하진 않다. 아니 중요할 수도 있다. 마치 다른 화려한 새의 깃털로 자신의 검은 색을 치장하는 까마귀처럼 두 남자는 자신들이 획득한 사회적 지위를 내세우며 자신을 한껏 멋지게 부풀리기에 고심한다. 아마도 영수도 민정을 처음 만났을때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목적은 결국 이쁜 여자 민정의 호감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 목적에서 동질성을 가진 남자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민정을 만난 시간차로 인해, 서로의 입장이 엇갈린다. 먼저 민정을 만난 영수는 '술'과 관련하여 조심성이 없는 민정으로 인해 민정과 갈등을 일으키고, 끝내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민정을 영화 내내 찾아다니는 처지에 이른다. 그런 영수가 애닳아 민정을 찾아다니는 동안, 다른 두 남자들은 '민정'이 아닌 민정(?)과 다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기회를 얻는다. 

'민정'과 '민정'인데 민정이 아니라며, 그럼에도 다시 천연덕스럽게 세 남자를 만나, 여태 아기같거나, 늑대같은 남자만 만나 진정한 사랑에 이르지 못했다며 은근슬쩍 니가 내 진짜 남자가 되어주겠니 라며 청하는 듯한 민정에게 세 남자는 볼모가 된다. 아니 전후가 바뀌었다. 그들은 그녀가 자신이 전에 만났던 '민정'이 아니라는 데도 기어이 결국, 기꺼이 그녀와 함께 술자리를 가지려듯, 사실 그들에게 그녀는 '민정'이건, '민정'이 아니건 중요치가 않다. 중요한 건 이쁜 젊은 여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민정'이 '민정이 아닌 코스프레를 한다고 뭐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민정'이 아니라면서 세 남자와 만나대는 민정인듯한 여자와, 그런 민정이 아니라는 '민정인듯한 여자와 다시 한번 기꺼이 '진정한 사랑'을 이루겠다며 '술'을 마시는 그들이 누가 더 나쁜가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덧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게 무슨 의민가 싶다. 남자들은 하냥 그래왔고, 여자가 '민정'이건, '민정'이 아니건, 그녀가 그 순간만큼, '사랑'을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진실'일지도 모르는데.

영화 속에서 '민정'과 사귀던 영수는 그를 찾아온 중행(김의성 분)을 통해 자신과 술을 조심하겠다는 민정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술 자리에서 외간(?) 남자와 싸움까지 벌였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야 만다. 하지만 그 '화'는 이별을 자초하고 만다. 하지만 이별을 견딜 수 없는 영수는 민정을 찾아다니는 한편, 그런 그를 한심하게 보는 동네 친구들에게 민정을, 아니 민정과의 사랑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멀쩡한 눈으로(?) 보면 민정은 이해하기 힘든 여자다. 영수란 사귀는 걸 온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여전히 동네 주점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고, 이제 영수랑 사귀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영수랑 가던 동네 술집을 찾아 일관성있게 남자와 술을 마신다. 심지어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민정'이 아니란다. 관객조차도 결국 그녀가 제 정신이 아닌 건지, 또 다른 민정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게. 마치 그녀는 지금의 지나가는 찰라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시간의 연속성과 유한함을 그녀 스스로 실천하는 구도자처럼, 신념에 차 자신이 '민정'임을 부인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강력한 부인 속에 '민정'으로 그녀가 벌였던 행태들도 동시에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아니 어쩌면 그 과정을 통해 민정으로 추정되는 그녀가 줄기차게 말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의 절실한 사랑이다.  

영수의 친구들, 그리고 영수처럼 우리는 '과거'의 어떤 행적,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러했다는 소문, 사실 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그리고 '훈수'를 둔다. 너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거기에 휘돌렸던 영수는 민정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리고 민정이 아니라는 여자를 만나고서야 안다. 그저 지금 이렇게 함께 하면 되는 거라고. 현재의 '사랑'에 만족한다. 그 '뻔한 동네'가 영화판이든, 그 헷갈리는 여자가 지금의 그녀인든, 아니든 중요한 건, 감독이 말하는 바 지금 여기 사랑하는 그 진실이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그간 줄곧 '실패담'을 논했던 홍상수 영화와는 달리, 성공한 사랑의 이야기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주춤거리거나 물러섰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완성에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로맨틱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 숭고하고,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시작은 찌질하고, 본능적이며, 헷짓거리같은 짓이다. 그리고 지금 '사랑'의 순간에조차 그 '영원성'을 논하기에 무색한 '관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 영수와 민정은 사랑을 한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간통법'이 사라진 세상에서 '훈수'와 '사회적 지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무색하게. 홍상수 감독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by meditator 2016. 11. 13.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