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서스펜스 스릴러가 칭해지는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이 <석조 저택 살인 사건>으로 돌아왔다. 고전적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영화는 1950년대 뉴욕 대신 1945년 경성을 배경으로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어내려가듯 '고전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진행된다. <시카고 타자>가 과거로 돌아가 일제 시대 그 암흑을 '환락'으로 밝히는 경성의 유흥가를 그 시대 젊은이들의 피난처로 그려내듯 <석조저택 살인 사건>은 원작 1950년대 뉴욕의 불야성을 일본은 패망하고 새로운 시대의 흥청거림에 불을 밝히는 경성의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두 젊은이의 뜻하지 않은 만남과 사랑으로 연다. 


 

 


순애보의 씨실 위로, 법정 공방전의 날실이
돈이 없어 택시 운전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하연(임화영 분)을 자신의 특기인 마술로 구해준 가난한 마술사 이석진(고수 분)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그녀와 방을 나누어 쓰는 사이가 되다 결국 방을 함께 쓰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풍운의 꿈을 안고 떠난 부산 공연에서 아내는 그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호텔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경성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선남선녀의 순애보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석진과 임화영의 비극적 순애보가 씨실이라면 그 러브 스토리 사이를 '날실'처럼  노회한 변호사 윤영환(문성근 분)과 서릿발같은 검사 송태석(박성웅 분)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법정 공방전이 채워간다. 원작의 서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은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처럼 러브 스토리와 법정 서사를 한 장, 한 장 엇물리며 '범인'에 대한 긴장감을 높여가는 방식을 그대로 채택한다. 


 한 편의 추리 소설같다는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안타깝게도 '찬사'가 아니다. 아직 가해자가 드러나지 않은 법정, 증거를 가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벌어지는 법정 공방전과 최승만의 순애보는 서로 엇갈리며, 비극적 순애보의 여정을 달군다. 하지만 그건 소설의 경우다. 소설은 '시각'을 통해 수용되지만, 그 시각을 메우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문자라는 '기호'이고 그 '기호'는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통해 '독해'되어, 뇌에서 '이미지화'한다. 그러기에 범인을 드러내지 않은 재판과 그 행간의 순애보는 범인을 추리하고, 그의 만행을, 그리고 최후의 복수의 방식에 대해 한껏 '뇌'를 달군다.

반면,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를 전제로하여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들은 의아하다. 도대체 최승만의 아내가 죽음에 이르는 저 비극적 순애보와 이 법정의 살인 사건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기에.  '석조 저택'이 '추리'하라 내놓은 여정에 대해 마치 양 손 모두를 뒤로 감춘 채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패를 가지고 희롱하는 게임의 술래가 된 양 당황스럽다. 한 시간 여의 과정은  '불친절'이나, '장황함' 혹은 '답답함'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느낌처럼. 그러기에 과연 원작의 서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각색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베스트 셀러가 곧 좋은 영화를 보장해 주는 건 역시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한 시간여, 아내를 잃은 이석진은 자신을 아는 그 모든 이를 죽였다는 위조 지폐범을 잡기 위해, 이빨을 뽑고, 얼굴에 칼집을 내며 자신을 지운 채 '최승만'이 되어 경성의 택시 운전사로 전전한다. 경성에서는 드문 외국어를 하는 그를 찾기 위해 택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깔개의 떡밥을 던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빗속에서 드디어 최승만은 그, 남도진을 만난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 법정에 드디어 살해 혐의를 받은 이가 등장한다. 남도진이다.  


 


한 편의 추리 소설 같다서 아쉬움 
안타깝게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지 도통 알 수 없던 영화는 그 빗속에 등장하는 남도진, 그리고 법정에 등장하는 남도진으로 단번에 명확해 진다. 이 '명확함'은 그리고 그 한 시간 여의 사랑꾼을 고군분투했던 고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도진으로 분한 '김주혁'의 존재함에 상당히 의지한다.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모두 목숨을 거두었다는 위폐범이자,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성 밤 거리의 부호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그러기에 이런 '개연성'이 되는 '존재감'의 배우를 굳이 한 시간 여 장황한 설명을 해가며 아낄 필요가 있었을까란 물음이 던져진다. 머리로 추리하여 만들어 가는 캐릭터와, 배우의 존재감이 주는 '갭'에 대한 제작진의 '판단 미스'의 지점이다. <비밀은 없다(2015)>, <나의 절친 악당들(2015)>, <공조(2016)>을 통해 '악역'의 카리스마가 한껏 고양된 김주혁을 '캐스팅'해놓고, 사전 정지 작업에 시간을 끌어버린 영화는 이후 남도진의 악행을 '비바체'로 풀어낸다. 영화 초반 '복선'처럼 등장한  '보이는 것을 숨기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이석진의 마술 방식을 활용한 '복수'에 대한 감탄은 찰라다. 

그러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과연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반문하게 된다.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이라는 명확한 '스릴러' 장르의 이름표를 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은 이 영화를 다보고 난 후 관객들의 잔상에 오래오래 기억되는 건,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관없이,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던져 '이석진 식의 사랑'이었을까? 그렇다면 애초에 제목부터 다시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와 손톱>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제치고,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제시되었을 때 관객은 '그 살인 사건' 자체에, 그리고 그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기대를 가지고 극장을 찾는다. 하지만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은 원작의 '손가락'을 둘러싼 불꽃튀는,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모호한 법정 공방으로 자신들은 알지만 '관객들은 모르는 이야기로 시간을 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뜻밖의 반전과 함께 영화는 이걸 몰랐지 라며 의기양양하겠지만, 관객은 그 의기양양함에 탄복하기엔 너무 지루한 여정을 달려왔고, 고대했던 남도진의 활약은 단편적이었다. 

물론 이런 안이한 '각색', 그로 인해 불친절한 전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경성 기담>의 그 분위기를 그리워했던 사람이라면 1945년 경성을 재현해낸 이 영화에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악인으로 등장한 그 존재만으로도 발군이었던 김주혁을 비롯하여, 문성근의 노회한 친일 변호사의 연기 역시 여운이 길다. 



 





by meditator 2017. 5. 25. 0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