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는 이제 우리에게는 마치 우리의 작가처럼 익숙하다. 그의 새 작품이 출간되면 바로 베스트 셀러에 등극할 뿐만 아니라, 이전에 출간한 작품들도 언제나 베스트 셀러 수위를 차지하곤 한다. 


왜 히가시노 게이고 일까? 우선은 1885년 <방과후> 이후 2018년 <연애의 행방>까지 밥 먹고 글만 쓰지 않았을까란 의문이 들 정도의 데뷔 후 20년의 기간 동안 35편의 작품을 쏟아낸 작가의 성실한 작품 활동에 기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영화화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백야행>이나 <용의자 x의 헌신>과도 같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범죄 스릴러'에서 일가견이 있는 건 물론, 2018년작 <연애의 행방>처럼 '설산'시리즈로 대변되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야기나 <그대 눈동자에 건배> 등의 단편 작품집에서 보여지는 sf, 블랙 코미디, 심리 서스펜스 등 '만물상'처럼 다양한 장르에서 독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작가이다. 사회비판적인 시선이 견지되는 진지한 주제 의식을 견지하는 본격 사회파 소설에서 부터 '팝콘 무비'와도 같은 소소한 흥미 위주의 작품까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종횡무진'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우리에게 기억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범죄 스릴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히가시노 게이고를 이젠 다르게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이 등장했으니 바로 다수의 독자가 '인생 책'이라 평했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다. 



물론 <나미야 잡화점>에도 '범죄'가 등장한다. 한밤 중 어느 집에서 가방을 훔쳐 나온 듯한 세 소년, 추적을 피해 차를 타고 도망치려던 소년들은 낡은 차의 고장으로 우선은 몸을 피할 곳을 찾다 이제는 주인도 없이 폐점한 '나미야 잡화점'으로 피신한다. 이렇게 '범죄 스릴러'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 이야기에 바톤을 이어 받는 건 '환타지'.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잡화점, 그곳에서 소년들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전 주인의 낡은 물건들을 뒤적거리다 이곳이 손님들에게 무료 상담을 했었다는 기사를 접하는데, 그때 낡은 상점의 문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생각지도 못한 사연 한 장이 도착한다. 

나미야 잡화점에서 만난 과거와 미래의 청춘들
이렇게 세 소년이 살던 2012년과 나미야 씨가 상담 편지를 써주던 1980년(소설 속에서는 1979년)은 이렇게 만난다. 그리고 그 열려진 시간의 행간 속에서 1980년의 청춘들과 2012년의 청춘들이 만난다. 그리고 또 늙수그레한 잡화점 아저씨였던 나미야 씨와 아키코 아가씨의 청춘이 엇물린다. 

원작에서 아키코 아가씨네 공장의 기계공이었던 나미야 씨, 소설 속 아키코 씨네 일꾼으로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를 하기로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의 도피는 실패로 끝난다. 또한 미래에서 온 세 청년에게 편지를 보낸 생선가게 뮤지션, 그는 대학마저 포기하고 '음악'의 길을 걸으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음악의 길은 쉬이 열리지 않고, 생선가게를 홀로 짊어진 아버지의 건강마저 위태롭다. 그린 리버의 사정도 막막하다. 아이를 가졌지만 홀로 어렵게 아이를 낳아서 키워나갈 자신이 없다. 또 다른 여성 길잃은 강아지 하루미는 자신을 키워준 은인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낮엔 직장에 나가고 밤엔 술집 여급으로 일하지만, 더 많은 돈을 위해 '현실'과의 타협을 고민한다. 또 마루코헨의 세 청년들은 '부모가 없어서, 혹은 부모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현실에 대한 좌절을 겪고 있는 중이다. 

영화와 소설은 이렇게, 젊은 나미야 씨를 비롯하여 1980년의 청춘, 그리고 2012년의 청춘들을 '나미야 잡화점'을 통해 조우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이제 좌절한 청춘의 시대를 사는 현재 일본으로 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청춘 비망록'이기도 하다. 저성장 시대를 통과하며 가장 큰 희생을 겪은 일본의 청춘들은 자신의 꿈을 접은 채 '프리터족'과 '니트족'으로 살아가며 사회적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런데 작품은 역설적으로 그 꿈을 잃은 오늘의 젊은이를 '위무'하기 위해 언제나 어느 시대에나 자기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했던 청춘들을 불러온다. 그리고 '나미야 잡화점'이란 환타지적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벌어진 시공을 건넨 '상담'을 통해 청춘들의 '절망'을 다독인다. 사랑을 위해 함께 떠나려 했던 나미야 씨와 아키코 아가씨, 그들의 '야반도주'는 실패한다. 하지만 그 '청춘'의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흔한 자기 계발서의 '꿈'을 가져라가 아니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독임에는 과정상의 좌절과 실패라는 통과 의례가 역설적으로 작용한다. 



삶과 죽음을 건너 뛴 '인연'을 통한 청춘의 위로 
사랑을 잃었던 두 사람 나미야 씨와 아키코 씨, 죽음을 앞둔 나미야 씨는 그의 앞에 나타난 아키코 씨에게 잡화점을 운영하며 사람들의 상담을 하며 '유명세'까지 겪었던 그의 인생이 '보람'되었다고 말한다. 아키코 씨 역시 사랑에는 실패했지만 그 좌절을 '마루코헨'을 통해 극복한다. 생선가게 뮤지션의 삶은 그의 생애로만 보면 '실패'였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생선 가게를 돕지도 못했고, 뮤지션으로 그의 생애 내에서 성공하지도 못했다. 초라한 음악가로 '마루코헨'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청된 이름없는 가수로서 뜻밖의 사건으로 마무리된 그의 삶은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 '안타까운 죽음'은 그의 음악의 발자욱으로 승화된다. 

나미야 잡화점이란 환타지적 공간을 통한 현재와 과거의 조우는, 바로 그런 청춘의 승화로 귀결된다. 생선 가게 뮤지션의 생애는 비극이지만, 그 존재의 비극은 그의 죽음 뒤에 남겨진 음악으로 길이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한 사람의 짧은 생애로 다할 수 없는 '인생의 비밀'처럼, 영화는, 그리고 소설은 '청춘'을 고무시킨다. 불교의 '인연설'에 의거한 듯  나미야 잡화점을 통해 만난 과거와 현재의 청춘들은 그렇게 삶의 한정적 시간을 넘어, 그 존재를 확장시킨다. 

아키코씨는 마루코헨을 열었고 그 마루코헨은 현재의 청년들에게 도움을 얻어 사업가로 자신을 세운 길잃은 강아지 하루미에게로 이어진다. 그리고 하루미에게 도움을 준 청년들은 '마루코헨'에 자신들을 의탁하고. 청년들에게 상담을 했던 생선가게 뮤지션은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음악은 그가 구한 아이의 누나를 통해 오래도록 남겨진다. 자신의 아이를 구하고 세상을 떠난 그린 리버 엄마처럼. 어쩌면 한 사람의 생애는 보잘 것 없거나, 때론 좌절과 실패로 점철될 지 몰라도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삶은 그 자신이 아니더라도, 세상 속에 '빛'이 될 것이라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강변한다. 

환광원이란 뜻의 마루코헨처럼. 이십 여년 일본이라는 사회를 배경으로 글을 써온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청춘에게 보내는 위로이다. 그리고 그 위로는 히가시노 게이고 답게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폐점된 잡화점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환타지적 장치, 거기에 '상담'이라는 절묘한 '카운셀링'의 장치를 통해 오늘의 청춘을 설득한다. 그저 꿈을 가져라, 포기하지 말아라가 아니라, 어쩌면 일본의 현대사일 수도 있는 지나간 역사의 여정을 통해, 당신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발자욱'은 어디선가 빛을 낼 것이라 작가는 강변하고 있다. 영화는 거기에 더해, 마루코헨의 말썽꾸러기들이었던 세 청년이 이 '환타지'의 경험을 통해 '개과천선'하고 각자 삶의 행로를 제대로 찾아가는 꽉 닫힌 결말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의 멘토링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우리 나라에서 붐을 일으켰던 베스트 셀러의 영화화답게 꽉 찼던 영화관, 환타지적 설정이나 극적인 장치에 취약한 일본 영화답게 영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소설만큼의 짜릿한 절정을 선사하진 못했다. 하지만 소설 속 생선가게 뮤지션의 음악이 스크린에 현현되는 그 '실사'의 장면만으로 소설을 봤던 독자들에게는 소설의 여운을 다시 한번 재연할 수 있었을 듯하다. 



by meditator 2018. 3. 8. 17:44

환절기가 돌아왔다. 날이 차다는데도 공기가 다르다. 겨울의 그 '바람'이 아니다. 그 쌀쌀한 바람 어디선가 느껴지는 봄, 하지만 섣부른 봄마중은 결국 유행처럼 '감기'를 선사하며 혹독한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만든다. 누군가에겐 무거운 겨울 옷을 벗어던지고 싶은 계절, 그 '안온했던' 롱파카가 지겨워지는 계절, 하지만 옛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병약해진 노인들이 새로운 계절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기 쉬운 계절이라고. 아직 덜 늙은 사람들에겐 머리 빠짐이나, 감기 등으로 느껴지는 계절이 어느 나이 드신 분의 '목숨'마저 위협할 수 있는 계절, 그렇게 계절의 변화는 '실감'나게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며 새로운 계절을 선사하는데, 이동은 감독은 미경 모자가 겪어내는 삶의 변화를 '환절기'라는 문학적 은유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영화를 여는 건 수현의 교통 사고. 사고 순간의 처연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뒤늦게 현장에 나타난 구급대의 다급한 행적과 잔해들을 통해 그려내며 이 심상치 않은 사건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이 씬을 통해 <환절기>가 매우 '문학적'인 영화가 될 것임을 예측하게 만든다. 





문학적 감수성으로 설명하는 아들의 동성애 

그리고 그 '예측'은 그다지 틀리지 않게, 102분의 런닝 타임 동안 영화는 마치 감당하지 못할 계절을 겪어내는 환절기처럼 엄마 미경(배종옥 분)과 그녀의 아들 수현(지원호 분), 그리고 수현의 친구 용준(이원근 분)이 겪어내는 삶의 변화를 담아낸다. 


'부재'의 남편, 이제 고3인 아들 수현을 뒷바라지하며 사는 '주부' 미경의 삶은 권태롭다. 함께 살지 않는 남편의 불성실을 드러낼 용기도, 자기 중심적인 아들과의 일상을 변화시킬 강단도 없이, 그저 '주부'로서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는 시간은 하루를 버티다 늦은 밤 앉은 채로 tv를 보며 조는 미경의 모습에서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부재한, 엄마와 아들의 뻔한 일상에 활력소처럼 등장한 건 수현의 친구 용준이다. 까탈스럽고 자기 중심적인 아들 수현의 메신저로, 혹은 무심한 아들 수현의 빈자리를 메워가며 용준은 수현과 엄마 미경의 돈독한 '벗'이 된다. 아니 엄마 미경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엄마가 생각했던 일상, 아들 수현, 그리고 그의 벗 용준이라는 삶의 틀은 수현의 교통사고와 함께 전혀 다른 그림으로 채색되기 시작한다. 


후쿠다 시게오나 앤디 워홀의 팝 아트처럼, 그저 평범한 고 3 수험생과 그의 친밀한 친구를 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라 생각했던 미경의 일상은 남편의 부재 속에서도 그런 그녀를 지탱했던 아들 수현의 교통 사고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금이 가기 시작한 일상을 산산히 부숴버린 건 교통사고 난 아들의 소지품에서 등장한 디카. 디카를 통해 보여진 수현과 용준의 관계는 그저 친한 친구 이상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필리핀으로 돈을 번다는 핑계로 떠나 '별거'를 공식화한 남편과의 관계를 '간과'하고, 아들의 동성애에 '무지'했던 '평범하고 싶었던' 주부 미경에게 다가온 삶의 충격적 변화를 다룬다. 그저 외면하며 버티다 보면 돌아와 다시 자리를 채워주려 했던 남편, 자기 중심적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라 여겼던 아들의 다른 '사랑', 그렇게 그녀가 무지하고 외면했던 삶의 이면들이 아들 수현의 교통 사고를 통해 까발려지고 미경은 기약할 수 없는 아들의 상태와 함께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 내야 하는 처지에 이른다. 


영화는 그런 주부 미경의 망연자실한 충격을,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모성을 배우 배종옥 특유의 담담하고 처연한 분위기의 연기를 통해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배종옥이 연기한 미경의 대척점에 수현의 친구로써 이 가족의 주변을 떠돌았던 용준의 애처로운 사랑을 이원근의 감성 연기를 통해 띄운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엄마의 부재때문이었을까. 자기 중심적인 수현과 달린 늘 미경에게 살가웠던 용준, 하지만 미경은 아들과 함께 타고 가다 교통사고 과정에서 조금 다친, 그리고 디카를 통해 드러난 아들의 '연인'인 용준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하기에 수현이 걱정되고, 미안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수현의 곁에 머무르고 싶은 용준을 애써 떼어놓으려는 미경, 이런 두 사람의 갈등이 영화 <환절기>를 이끌어 가는 주요 동력이다.



배종옥, 이원근의 연기는 좋았지만

그리고 거기까지이다. 평범한 주부가 아들의 교통 사고라는 뜻밖의 사건을 통해 아들의 동성애와 자기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삶의 변화를, 그리고 교통사고를 통해 '이별' 아닌 '이별'을 겪게 된 용준의 사랑을 영화는 '문학적 감성'으로 들여다 본다. 마치 '혹독한 감기'처럼 겪어내듯 영화는 미경과 용준, 그리고 수현이 겪는 삶의 변화를 그려낸다.  


그래서 아쉽다. 이제 우리 영화에서 다른 사랑인 '동성애'의 영화가 더 이상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기에, 이젠 '동성애'를 한다를 넘어 '다른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절기>는 여전히 수현과 용준이 '남다른 사랑'을 한다에 지체되어 있다. 오히려 이 <환절기>에서 신선한 건, 그런 '뜻밖의 사랑'을 목도한 엄마 미경이란 존재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에 들어서며 '용준'이 겪는 '사랑'의 아픔에 경도되면서 '미경'이 겪는 혹독한 변화를 들여다 보는데 게을러 진다. 


아니, 어쩌면 <환절기>는 우리 사회에서 '문학적'이란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작품일 지도 모른다. '감기'처럼 겪는것, '환절기'처럼 한바탕 겪어내고 나는 것, 이상으로 감성적인 접근 그 이상이 아닌 것 말이다. <환절기>를 보면 용준과 미경의 아픔이 다가온다. 그들이 겪는 환절기 같은 삶의 변화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삶의 격변들이 그저 용광로처럼 타다 시간이 흐르면 꺼져 버린다. 그저 평범한 가정의 주부로 안주했던 미경이 아들의 사고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 보고, 기꺼이 남편과의 이혼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반추와 객관화'가 아쉽다. 마찬가지로, 가족에게서도 외면받았던 용준이 그나마 의지했던 수현의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겪는 혼돈의 과정을 통해, 그럼에도 수현과 미경에게로 다가가는 혹은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한 '이성적 설득'이 아쉽다.


문학에 왜 이성이 필요하냐고? 작금의 우리의 베스트 셀러를 채우는 것이 우리의 문학이 아닌 현실을 되돌이켜 보면, '감성'으로 설득해 내는 삶의 역부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숱한 문학적 수사는 난무하지만, 삶에 대한 냉정한 반추가 없는 <환절기>는 그래서 허황하다. <환절기>는 아주 좋은 소재로 시작한다. 자기 스스로 어쩌지 못한 채 삶의 바퀴에 쫓아가던 중년의 엄마, 그런 엄마가 맞딱뜨린 아들의 '다른 사랑', 하지만 영화 <환절기>는 이런 현실적 문제를 '문학적 감수성'으로 대변하려 하다보니, 정작 이 '현실적 문제'가 가닿아야 할 고민의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단막극'에서 쉽게 차용하는 방식으로 미경과 용준의 문제를 '안이하게' 풀어내고 만다.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는 중산층 주부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의 지점들, 그리고 자신의 집안에서 외면 받은 채, 자신과 함께 교통 사고를 겪은 동성의 연인에 맹목적인 사랑, 이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이원근과 배종옥의 연기에 기대어 '안이하게' 넘어가고자 한다. 그래서 예측 가능하게 '행복한(?)' 결말에 도달하여 허허롭다. 


by meditator 2018. 3. 3. 22:27

마블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매 시리즈가 등장할 때마다 우스개 소리로 마블 히어로 사이의 '재력'과 '능력'에 대한 비교하는 '관례'같은 게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결국은 마블 히어로의 본질은 지구를 파괴하는 나쁜 놈을 제압하는 그 '힘'에 있으니 말이다. 바로 그런 '비교'에서 지금까지 압도적 우위를 점했던 건 자신의 사업체와 강력한 아이언 맨을 가진 '토니 스타크'였었다. 하지만, 이제 그 토니 스타크의 재력마저 우습게 되고 마는 '다크 호스'가 등장했다. 아니 '다크 팬서', 바로 지난 2월 14일 개봉한 <블랙 팬서>의 주인공, 와탄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이자, 와칸다에만 존재하는 최강 희귀 금속 '비브라늄'의 소유주이며, 그 '비브라늄'에 기반한 와칸다의 선진 과학 기술력과 신화적 힘을 '합체'한 초인적 힘을 자랑하는 '블랙 팬서'는 토니 스타크보다 '부자'이며, 캡틴 아메리카보다 '힘이 센' 극강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통해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윈터 솔져를 막는데 합류했고, 그에 대한 '복수' 대신 '냉동'으로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와칸다 왕국의 수장, 그게 <블랙 팬서>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지난 14일 개봉한 <블랙 팬서>는 바로 그 '시빌 워'의 과정에서 급작스럽게 아버지를 잃고 조국 와칸다의 왕으로 재위에 오르게 될 티찰라(재드윅 보스만 분)으로 부터 시작한다. 



자원 강국 와칸다의 국왕 블랙 팬서 
아프리카의 최빈국으로 알려진 와칸다 왕국, 하지만 블랙 팬서의 비행선이 타고 들어간 비밀의 도시 와칸다는 지구 최강의 금속 비브라늄 광산을 기반으로 한 최첨단의 도시라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이 '자원'에 기반한 최강의 부를 가진 비밀스런 아프리카 왕국이란 설정은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오늘날 다수의 아프리카를 비롯한 이른바 제 3세계의 국가들이, 그 '천연'의 자원을 가지고도 그것들을 '수탈'을 당함으로써 산업혁명 이후의 부국 대열에서 방치된 상태라는 것을, 영화는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그 누구에게도 '수탈'당하지 않아, 아니 '수탈'당하지 않기 위해 '부유한 국가'가 된 와칸다 왕국은 이른바 제 3세계 운동의 한 방향이었던 '자원 민족주의'의 가장 이상적 '환타지'를 스크린에 구현해 낸다. 

그렇게 비밀의 국가 와칸다, 비브라늄이란 자원을 기반으로 한 최첨단의 과학 왕국, 하지만 비행접시와도 같은 비행선에서 내린 차기 와칸다의 국왕이 될 티찰라를 맞이한 건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마티스, 그리고 다수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준 부족적 문화가 현란한 색채의 복식 등을 통해 살아난 전통적 아프리카다. 그리고 그 전통적 문화는 이어진 티찰라의 왕위 계승 과정을 통해, '첨단'의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국'이라는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는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콜라보되어 있는 국가 와칸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와칸다의 막강한 존재감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후진성을 그 부족적 정치 체제의 한계로 설득하고자 하는 입장에 대한 환타지적 반격이 된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처럼 아프리카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신화속 짐승 표범은 와칸다의 상징으로 심장 모양의 허브를 통해 와칸다 국왕의 놀라운 능력으로 현현되는 것으로 영화는 표현해 낸다. 앞서 토르 시리즈가 북유럽 신화를 길어 올려 현대로 온 토르의 서사를 풍성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아프리카의 영웅 블랙 팬서는 와칸다라는 나라로 상징되는 아프리카 민족의 신화적 배경에서 탄생된다. 하지만 언제나 마블의 히어로 영화가 그러하듯 블랙 팬서 역시 모든 신화적 영웅이 그러하듯 혹독한 탄생 서사를 거치며 히어로로써의 설득력을 얻어낸다. 

그 첫 번째 관문이 되는 건 바로 와칸다 고유의 즉위식이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부족 연합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살려낸 영화는 그 이질적 부족의 연맹을 타 부족 절멸이라는 끝없는 내전 대신, 가파른 폭포수를 배경으로 한 족장 후보와 그에 이의를 제기한 타 부족장의 죽음을 건 혈투로 대신한다. 전사를 이끄는 무리의 장으로서의 부족장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살려낸 이 '싸움씬'은 와칸다 왕국의 수장의 정당성과 동시에 블랙 팬서의 힘의 배경에 대한 설득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얻어내고자 한다. 

와칸다 왕국의 형성 과정에서 합류하지 않고 산위로 올라간 늑대 부족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난하게 왕좌에 오르게 된 티찰라, 하지만 그는 아직 비브라늄이라는 최강 금속을 가진 와칸다 왕국의 수장으로서 자신에 대한 비젼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이고, 이는 그의 앞에 나타난 사촌 형제의 존재와 함께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흑인 민권 운동의 상징, 블랙 팬서 
<블랙 팬서>에서의 이 티찰라에게 던져진 도전이 절묘한 건 그저 영화 속 히어로의 극적 갈등의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흑백 갈등의 역사를 히어로의 성장 서사로 품어냈다는 점이다. 영화 속 히어로의 이름 블랙 팬서, 이는 흑인 민권 운동 역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티찰라의 원죄로서 그의 아버지가 LA에서 암약하던 동생의 배신을 품는다. 동생을 찾아간 티찰라의 아버지는 조국 와칸다를 지키기 위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이 LA 아파트 비극은 블랙 팬서 당의 궤멸을 가져온 사건과도 맞물린다. 

흑인 민권 운동 지도자 말콤 엑스가 살해된 다음 해 창립된 단체 블랙 팬서는 당시로는 급진적인 맑시즘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는다. 당연히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온건주의에 대립한 이 단체는 전쟁 종식 등의 내용을 담은 강령을 내세우며 경찰들의 부당한 체포에 대항한 폭력 투쟁을 벌였다. 1969년 한 해에만 300명의 블랙 팬서 단체 회원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LA의 아파트를 급습한 14명의 경찰관은 수 백발의 총을 난사하여 두 명의 청년을 살해됐다. 

이렇게 영화는 바로 그 역사적 사건, 역사적 현장의 사실을 영화 속 갈등의 주요소로 복기하며, 그것을 다시 티찰라를 찾아온 킬몽거(마이클 B 조던 분)을 통해 오늘의 갈등으로 재연한다. 아프리카의 국가 와칸다가 가진 비브라늄이라는 재원이자 자원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로 대립하며 블랙 팬서 VS. 블랙 팬서의 대결을 벌이는 티찰라와 킬몽거의 대립은 오늘날 테러리즘이란 이름으로 귀결되는 약소국 민족주의 운동의 현실을 품어낸다. 



마치 그런 식이다. 우리의 역사 행간에서 사라진 약산 김원봉이 영화 <밀정>과 <암살>을 통해 귀환했듯이, 김원봉의 '의열단'처럼,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 속 한 주역이었던 블랙 팬서는, 마블의 히어로 영화로 귀환했다. 가장 전투적이었으며, 비타협적인 운동 단체였던 블랙 팬서가 세계 평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영화 <블랙 팬서>는 그래서 아이러니하면서도, 감격스러운 귀환이 된다. 

마블의 야심찬 기획 <블랙 팬서>는 기껏 한 편의 히어로 물을 통해 문화 콘텐츠가 풀어낼 수 있는 신화와 예술과 그리고 역사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물론 누군가는 멋진 슈트의 영웅 블랙 팬서에 열광하겠지만, 누군가는 마치 박물관을 방문하듯 영화 속 아프리카의 색감에 홀렸을 것이요, 또 다른 누군가는 티찰라의 원죄가 된 그 LA의 아파트를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타지로 복원한 와칸다로도 위로되지 않는 방대한 자원과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도 슬픈 부족으로 남은 아프리카를 기억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화관에 가서 '문화'와 '역사'를 배운다. 
by meditator 2018. 2. 23. 23:58

<올 더 머니>는 2월 13일 현재 6만이 겨우 넘은 상태다. 다양성 영화의 흥행 성적으로만 보아도 그리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2월 12일 영진위 기준, 62,294명) 다양성 영화라도 몇 십만을 넘는 상황에서 심지어 감독이 '리들리 스콧'이라면 더더욱 아쉬운 실적이다. 하지만, <올 더 머니>는 오히려 그래서 더 주목해야만 할 영화이다. 리들리 스콧은 최근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의 제작자로, 그리고 그 이전에 일찌기 <블레이드 러너(1982)>, <에어리언(1979)>을 비롯하여, <글래디에이터(2000)>, <아메리칸 갱스터(2001)>, <마션(2015)>에 이르기까지 sf, 갱스터, 역사물까지 장르 불문 명장이다. 그 덕분에 2017년 미국 감독 조합에서 수여한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올 더 머니>는 바로 그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평생' 영화 감독으로 '공로'를 쌓은 명장 리들리 스콧이 '정의'를 내린 '미국', 잊지말아야 할 '자본주의 미국의 역사'이다. 공로상에 갈음하는 가장 멋진 노감독의 수상 소감과도 같은 작품이다. 




공로상 수상 소감과도 같은 <올더 머니> 
<올 더 머니>의 개봉 당시 화제가 된 건 애초에 주인공으로 분했던 '캐빈 스페이시'가 '성추행 스캔들이었다. 불과 개봉을 한 달 앞둔 상황, 그 '험로'를 리들리 스콧 감독은 '한 사람의 행동이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한 결과물에 영향을 주게 해선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에 따라 크리스토퍼 플러머로 교체 결정을 내린다. 이후 한 달 여의 강행군, <올 더 머니>는 그런 잡음이 떠올리지 않을 만큼 명장의 명작으로 미국의 역사를 기억해 낸다. 

<올 더 머니>의 리들리 스콧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전작들 <마션>이라던가, <에러리언>, <글래디에이터> 등의 흥행작들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방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1968년 미국이 암흑가를 실감나게 그려냈던 <아메리칸 갱스터(2007)>의 배경에, 최근 그가 제작하거나 기획하고 있는 <마크 펠트; 더 맨 후 브로트 다운 더 화이트 하우스(2017)(이하 마크 펠트)>나, <클라이브 데이비스; 더 사운드 트랙 오브 아워 라이브스(2017)>와 같은 '다큐'적 성격이 짙은 작품의 서사를 얹는다. <마크 펠트>는 2005년에서야 밝혀진 역사의 행간, 워터게이트 사건의 딥스로트(비밀 정보원) 마크 펠트를 통해 1972년에서 4년간의 미국 현대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에 반해, <올 더 머니>는 같은 시기였던 1973년에 벌어진 미국 최대 갑부 j폴 게티의 손자 유괴 사건을 그려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작품은 같은 시기이지만, 전혀 다른 '미국'을 다룬다. 한편에서 미 연방 수사 요원이었던 마크 펠트를 통해 '정의'가 실현되는 미국이 있다면, 또 따른 한쪽에서는 '오로지 돈' 이외에는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물신의 세계를 j 폴 게티를 통해 그려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자신이 제작하고, 직접 감독한 두 작품을 통해 이 양면성을 가진 미국을 실사화시켜낸다. 

이미 석유 재벌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석유 임차권 매매'를 시작한 j 폴 게티(크리스토퍼 플러머 분), 그는 당시로서는 불가능해보였던 중동의 석유 임차권 매매를 성공시키며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영화는 그렇게 j 폴 게티가 부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 그래서 그 재산을 헤아릴 길 없는 최고의 갑부에 등극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한편, 아버지의 그늘에서 튕겨져 나와 뉴욕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네 자녀와 함께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그의 아들네 가정을 대비시킨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이 화기애애한 가정, 그곳에 단 한 가지가 없다면, 세계 최고의 부호를 아버지로 두었음에도 '돈'. 경제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아들의 아내 게일 해리스(미셀 윌리암스 분)는 남편에게 아버지에게 의탁할 것을 청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착한 답신, 그 답신과 함께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들의 삶은 달라졌다. 


내가 도달한 일반적 결론, 그리고 일단 도달한 이상 나 자신의 연구에 계속해서 지도적 실마리로 쓰인 일반적 결론은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이 영위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의지와는 독립된 특정의 관계들 속에 들어간다. 즉,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에 들어간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구조를 형성한다. 이것이 실제적인 기초인 바, 이 기초위에 하나의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또한 이 기초에 대응하여 일정한 사회의식들의 형태가 존재하게 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및 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제약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 칼 맑스, 자본론 



물신화된 돈에 헌신한 j 폴 게티 
할아버지의 서류를 대신 읽어주고 답신을 써주기를 즐겨했던 소년 존 폴 게티 3세가 이탈리아의 사창가를 헤매일 정도로 커가는 시간, 그 시간은 j  폴 게티의 돈에 의탁한 덕분(?)에 게일의 가정이 파괴되어 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이미 그 전부터 알콜에 의존적이었던 아들은 자신에게 버거웠던 게티 집안의 사업에서 소외된 채 약에 젖어 살고, 그런 아버지에게 젖어들어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내 게일은 '이혼'의 조건으로 오로지 아이들의 양육권만을 겨우 얻어냈다. 하지만 그녀가 폴 게티의 돈으로부터 구제하고 싶었던 아이들마저, 그녀의 아들 존의 유괴 사건으로 흔들려 버린다. 

아이들을 품 안에 키우기 위해 '위자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던 게일은 게티 집안의 손자로 유괴된 아들의 몸값 1700만 달러를 구하기 위해 할아버지 j 폴 게티를 찾는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마다하지 않는 모성, 그 맞은 편에 손주의 몸값보다, 보장된 한 작품의 명화에 기꺼이 투자하는 할아버지가 있다. 자신의 손자임에도, '이미 자신에게는 14명의 손주들이 있으며, 존의 몸값을 지불하면, 나머지 손녀들도 유괴될' 것이라는 논리로 몸값 지불을 거절하는 할아버지. 대신 전직 cia 요원을 고용하여 '협상'을 시도한다. 



영화는 '피보다 진한 돈'에 헌신하는 자본가 j 폴 게티를 통해 석유 호황기의 미국의 자본주의를 그린다. 사막에서 석유를 시추하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그 '협상'력은 자신의 혈육의 경우에도 예외가 없다. 손주의 귀가 배달되어 올 때까지 이어진 협상, 아니, 영화는 '협상'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노골적인 j 폴 게티의 방기를 묵묵하게 그려낸다. 그렇다고 손주마저 포기한 그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모든 시간을 차지한 석유 유가, 그리고 생명이 넘치는 손주 대신 돈으로 산 차가운 명화를 품에 안은 그의 마지막은 자본주의의 '비애'이다. 차라리 유괴범의 연민이 더 갸륵할 정도로. 자식들을 얻기 위해 기꺼이 폴 게티 가문의 돈을 포기했던 엄마지만, 폴 게티 가문의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지막지한 돈을 요구하는 유괴범들 앞에 모성은 무기력했다. 

손주의 목숨조차 시간을 끌며, 협상을 통해 '에누리'했던 부호, 손주가 유괴됐다는 소식보다 오늘의 석유 시세가 더 중요했던 부호의 돈, 하지만 손주에게 사기를 친 건지, 그 자신이 사기를 당한 건지 모를 손주에게 전해준 이탈리아 조각상의 허상을 통해 영화는 '돈'의 헐값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평생에 매달렸던 돈, 그 돈으로 손주보다 먼저 달려가 영접했던 미술품들, 그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선 그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j 폴 게티는 가고 돈은 남았다. 석유를 판 중동의 부족장은 석유를 팔았지만 그 석유를 판 돈이 자손들을 타락시켰다고 했듯이, 폴의 아들도, 그리고 영화 속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후일담으로 전해진 손자 존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뉴욕의 가난했던 가족은 화목했지만, 돈만 있었으면 더 행복할 것이라던 그들의 꿈은 할아버지의 부 앞에 산산조각났다. 흔히 우리나라 속담에서 죽을 때 짚어지고 가지도 못할 그 '부'의 주체는 과연 j 폴 게티였을까? 물신화된 돈에 눈이 먼 j 폴 게티는 현대의 또 다른 '미다스'이다. 과연 j 폴 게티가 벌어들인 돈은 누구를 이롭게 했는가? 영화 속 그 누구도 j  폴 게티의 돈으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돈만이 확장하고 증식할 뿐. 인간의 문명은 진보했지만, 그 문명의 혜택이 개인을 영화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피언스> 유발 하라리의 진단과도 일맥상통한다. 거장 리들리 스콧이 1970년대의 j 폴 게티를 통해 조감한 '미국의 자본주의', 그곳에 '인간'은 없다. 

by meditator 2018. 2. 13. 19:59

아쉽게도 주제가 상을 <위대한 쇼맨>에게 양보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장편 에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디즈니와 픽사는 2016년 <인사이드 아웃>, 2017년 <주토피아>에 이어 연 3년 성공적으로 골든 글로브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어쩐지 아쉽게도 느껴진다. 내 머릿속, 아니 내 마음의 세계 탐구라는 신비함 그 이상, 치유와 힐링이 되었던 <인사이드 아웃>이나, 최근에서야 우리 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자존의 문제를 비롯하여 성과 인종 평등의 문제를 발빠르게 다루었던 <주토피아>에 비해, 한바탕 축제와도 같았던 <코코>는 '가족주의'의 전통이 유구한 가장 디즈니스러운 픽사의 작품인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라프의 활약을 다룬 단편 에니메이션이 끝나고, 멕시코 버전의 디즈니 로고송이 등장하면서 펼쳐지는 <코코>의 세계는 그저 '가족'의 화합이라는 주제로만 한정하기에는 이야기할 꺼리가 만다. 특히 최근 우리나라에서 거뜬히 1000만을 넘은 <신과 함께>와 함께, 흥행세를 이어가는 <코코>는 비록 '한국'과 '멕시코'로 지역적 배경은 다르지만, '죽은 자의 세계'를 통해 '산 자의 삶'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죽은 자의 세계에서 길어올린 산 자들의 이야기
<코코>와 <신과 함께>는 공교롭게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이야기다. 아이를 구하려다 죽은 소방관 김자홍(차태현 분)은 당연히 저승차사들을 환생시켜줄 의인이라 여겨진 7번의 저승 재판에서 매번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건, 바로 아픈 어머니와 동생을 버리고, 심지어 직계 비속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될 범죄를 저지르다 도망갔던 사실이다. 그리하여 '의인'은 커녕 당장 지옥으로 떨어지게 생겼다. <코코>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은 물론 주인공이 아니다. 죽은 자들의 날에 뜻하지 않게 그 세상에 들어가게 된 미구엘이 위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헥터'라는 보잘 것없는 해골이 그 실질적 주인공이다. 

두 영화는 모두, 그들이 '살아있을 때' 저질렀던 어떤 행위가 지금 죽은 그들의 위기로 작동한다. 그로 인해 김자홍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생겼고, 헥터는 죽은 자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동양의 지옥도와, 영원히 절멸, 물론 그 두 처벌 사이에는 엄청난 고통의 간극이 있지만, 막상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느껴지는 심리적 중압감에서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잊혀진다는 게 더 마음아프게 다가올 수도 있다. 



김자홍과 헥터, 그들은 젊어 죽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억울하게. 그런데 더 억울한 건 죽은 그들의 영혼조차 위기에 빠진다. 죽은 두 사람에게 내려지는 벌의 핵심은 결국, '가족'을 버린 것이다. 자신들이 지켜고 보호했어야 할 가족을 각자의 이기심으로 버렸다는 '오해(?)가 그들을 죽음 이후의 위기에 몰아넣는다. 물론, 영화는 절정의 위기를 극복하며 두 사람이 받게 될 그런 처벌이 오해였음을 풀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사실은 그들이 이승에서 드러났던 그런 결과적 행동들이, 미처 본의를 풀어내지 못한 '한(恨)'이었음을 영화는 풀어낸다. 그리고 그 '한'에는 여전히 그들이 '가족'을 배신하지 않았음을, 혹은 '가족'이란 것으로 상징되는 '관계'에 대해 스스로 외면하지 않았음을 그려내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은 이후에나마 비로소 그들이 그토록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관객들의 누선을 자극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21세기의 가족주의란?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 결국은 눈물을 터트리게 만드는 감동의 가족 상봉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그 '가족'의 장애물들을 살펴보자. 

<신과 함께> 김자홍 모자의 비극은 결국 장애인 어머니와 두 아들의 가난이다. 그들은 가난했고, 나라가 구제해주지 못한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김자홍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승의 두 모자의 삶을 건져냈다. 미처 어머니에게 드릴 밥통도,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솔직하게 밝히는 진심어린 편지도 전할 기회도 없이 그의 생명을 거둔 저승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재판을 하네 어쩠네 하지만, 결국 그 재판의 결과가 '어머니의 용서'일 수 밖에 없는 건 김자홍의 오롯한 희생적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식은 '가족'의 굴레를 씌웠지만 결국 이 사회에서 '먹고사니즘'에 희생된 한 개인에 대한 영화적 제의이다. 사실 불교의 저승관을 수용한 영화라지만, 원래 불교에서 이승에서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가장 큰 보상이 되는 '극락 왕생'대신 '환생'이라는 보상을 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지극히 '현세적'이다. 

가족의 구성원이지만, 사라질 위기에 놓인 헥터는 어떨까? 거기엔 할아버지가 음악이 좋다며 집을 나간 이후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음악을 버리고 '신발'을 택한 마마 이멜다의 또 다른 희생이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남겨진 딸과 함께 살기 위하여 신발 장인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건 그 집안의 전통이 되어 대를 이어 미구엘에게 까지 가족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이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가내 수공업의 원시적 자본주의 방식이지만, 미구엘의 가족들이 택한 삶의 방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할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래서 미구엘의 가족에게서 미구엘이 하고자 하는 '음악'이란 그저 자신은 물론 가족조차 먹여살릴 수 없는 무책임한 행동이며, 이 시대의 정신에 위배되는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는 단지 미구엘 가족의 '신발 사업'에 대해 예술지상주의로 맞서지 않는다. 미구엘이 선택한 음악이란게 가족들이 오해한 헥터처럼 엔터 산업이라는 또 다른 자본주의에의 함몰일 수 있음을 짚어낸다. 그런 미구엘 가족이 선택한 자본주의적 전통에 대해 영화는 영화 속 스타로 나오는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에 대한 이면의 실체, 그리고 헥터의 선택을 통해, 그리고 미구엘과 가족의 화해를 통해, '자본'에 맹목적인 삶에 대한 여유로 귀착한다. 신발 사업 대신 음악이라거나, 가족 대신 개인이라거나, 자본 대신, 예술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관계의 신화를 '멕시코 죽은 자들의 축제'를 배경으로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과 함께>에서 그저 한 개인으로서의 '의인'이었던 김자홍은 7번의 재판을 통해 '가족'이란 관계 속에서 그의 삶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구원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코코> 속 가족의 이단아 미구엘은 헥터를 통해 가족 속에 숨은 '음악적 전통'을 확인받고, 죽은 자들의 축제를 경과하며 가족들에게 승인받으며 또 다른 새로운 가족 관계의 서막을 연다. 21세기에 '가족'은 참으로 진부한 '코드'이지만, 여전히 변주되면 전세계에서 울려퍼진 디즈니의 로고처럼, 과연 지난 시절의 코드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화두를 던진다. 

두 영화들은 여전히 사회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코드를 '가족'으로부터 열어가고자 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 트라우마로 버거운 개인의 삶을 사는 사람들처럼 가족이란 무게를 짊어진 개인들이 있다. 그리고 개인과 가족을 보다듬어 주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 각자도생의 삶이 있다. 이 전체와 가족, 그리고 개인의 도그마와 그 소통의 신화에 대한 진부하고도 지난한 모색이, 가장 극적인 방식, 그래서 어쩌면 현세에세는 불가능한 '죽음의 제례'를 통해 화해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가, <신과 함께>와 <코코>의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by meditator 2018. 1. 18. 16:25

계절을 잘못 찾아온 작품들이 있다. 분명 같은 겨울이지만, 작년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다르다. 그런데 그 시절이 무색하게 새해 극장가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생뚱맞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친다. 바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와 <코코>가 그 주인공이다. 뒤늦게 찾아온 이들 '크리스마스' 영화, 하지만 시절을 놓친 크리스마스 대신 각자 다른 매력으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그 중에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는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옛날 이야기같은 <크리스마스 캐럴>에 찰스 디킨스라는 작가의 인생이라는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초등 6학년 2학기 국어 나 교과서에 실려있다. 아니 교과서에 실리기 이전부터 '동화'의 세계에 입문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통과 의례'처럼 한번쯤은 읽어보았던 작품이다. 구두쇠의 대명사는 그 이름도 어려운 스쿠루지였으며, 우리 명절 동지에 찾아오는 팥죽을 무서워하는 역질 귀신은 낯설어도 크리스마스 이브 구두쇠 스쿠루지를 찾아온 그의 옛 동료 귀신은 친숙했다. '자린고비'보다 '스쿠루지'가 더 익숙한 게 사실이었다.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 거기에 투영된 찰스 디킨스의 삶 
하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익숙하다 해서 그 작품의 저자인 찰스 디킨스가 익숙한 건 아니다. 어린 시절 흥부 놀부만큼이나, 개과천선의 대명사로 익숙한 스쿠루지를 탄생시킨 찰스 디킨스가 그와는 전혀 다른 <올리버 트위스트>나, <위대한 유산>, <두 도시 이야기>의 작가라는 걸 연관 시켜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당연히 작가의 생애는 더더욱. 바로 그 지점에서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작품이다.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우리에겐 낯선 인물인 찰스 디킨스의 삶을 거기에 투영시키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가 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승화시키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것의 작품화 역시 생소하진 않지만, 굴곡진 어린 시절을 겪은 찰스 디킨스가 희대의 명작 크리스마스 캐럴을 써가면서 그의 비밀 서재가 마치 스쿠루지를 찾아온 말리처럼 작중 인물들과의 모의 장소? 심지어 그들에 의한 찰스 디킨스의 '심리 치료 연극 무대'로 변모하며 그 과정에서 한 편의 작품이 탄생하고, 작가 자신의 치유가 이루어지는 영화적 상상력은 스크린에 펼쳐진 찰스 디킨스, 그 예술가의 생애가 된다. 

영화는 찰스 디킨스라는 인물로 부터 시작된다. <올리버 트위스트> 등으로 일약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그는 그 유명세로 미국에서도 환대를 받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의 부에 맞게 끊임없이 더 많은 공사비를 부르는 그의 저택 등 그에게 손을 내미는 가계 경제와 <올리버 트위스트> 이후 부진했던 그에게 얹힌 새로운 작품에의 요구. 하지만 서재에 앉은 그는 단 한 줄도 새로운 작품에 대한 진척을 보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새로 온 하녀의 아일랜드의 옛날 이야기, 거기서 부터 힌트를 얻어 그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착안해 낸다. 

여기서 영화는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크리스마스'에 대한 새로운 시사점을 제시한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자신과 이전 작품을 출간했던 출판사에 공표한 찰스 디킨스, 하지만 출판사 관계자들은 부정적이다. 이역만리의 대한민국까지 흥청거리며 축제를 즐기던 크리스마스, 그러나 정작 19세기의 크리스마스는 그저 종교 행사일 뿐이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크리스마스 캐롤>의 첫 번째 반전이 있다. 

자신이 쓸, 아니 그 어떤 작품보다 쓰고 싶은 새 작품에 대한 열의로 가득찬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꺼려하는 출판사와의 계약 대신 빛까지 얻어가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출간하려 한다. 당연히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크리스마스 시즌 전에 출간이 되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아직 시작된 안된 작품의 일정은 너무도 빠듯하다. 그때부터 자신의 서재에 틀어박혀 주인공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원맨쇼에 가까운 '산고'를 펼치는 찰스 디킨스의 고난이 시작된다. 



찰스 디킨스,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 스쿠루지와 갈등하다. 
영화의 배경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올리버 트위스트(2005)>, 팀버튼 감독의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2007)>의 배경과 같은 19세기 영국이다. 한 편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자본과 문화를 향유하는 '신사' 계급들이 클럽 등 그들만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한편에서, 이제는 폐허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잔재가 상흔처럼 남아있는 잔혹한 소년 노동의 역사가 항존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바로 이 극과 극의 세계에 바로 주인공 찰스 디킨스가 있다. 

베스트 셀러가 된 작품으로 인해 프랑스 풍의 최신 인테리어로 공사 중인 그의 집으로 상징되는 갓 신사가 된 그의 현실은 하지만, 그 한 편에서 새로운 작품에 대한 불투명한 미래, 그리고 축적되지 않은 부로 인해 '신기루'처럼 흔들린다. 하지만 어쩌면 그 위태로운 현실보다 더 불안한 건, '신사'연하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 파산한 아버지로 인해 구두약 공장에서 죽은 쥐와 폭력적인 강제를 견디며 버텨야 했던 소년 노동의 트라우마이다. 그로 인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찰스 디킨스는 새 작품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출간 날짜의 촉박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에게 돈을 대어주지만 대신 엄청난 고리대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뜯어내는 변호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의 이름을 어렵사리 호명한 순간 그의 등 뒤에 나타난 소설의 주인공 '스쿠루지', 그리고 너그러운 그의 친구, 실제 아픈 아이를 아낌없이 사랑하는 여동생 내외,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인색한 부호의 장례식 등,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그가 조우한 인물과 상황을 빚어내어 <크리스마스 캐럴>을 써내려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의 한 관전 포인트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흔히 작가들이 자신이 작품을 쓰는 순간 작품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그 '창작의 비밀'이 이 영화의 주된 그리고 '매력적인' 갈등 요소로 작동한다. 찰스 디킨스는 쓰려고 하지만, 정작 작품 속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그의 엔딩을 방해한다. 아니 그 자신이 세 아이, 조만간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나이에도 여전히 평행선을 긋는 그와 그의 아버지의 불화가, 아니 좀 더 솔직하게는 하루 아침에 '신사'였던 아버지가 범죄자가 되어버린, 그래서 평온한 가정의 맏아들이었던 그가 소년 노동자가 되었던 그 '신분 하락'의 트라우마가 스쿠루지라는 인물에 대한 입체적 서술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구두쇠라는 찰스 디킨스라는 예단과 그런 작가의 예단을 냉소하는 소설 속 주인공 스쿠루지의 갈등은, 곧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래서 그 아픔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찰스의 한계로 귀결된다. 

물론 영화는 흔한 가족 영화의 공식, 성장 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불화했던 아버지와 아들은 화해하고 훈훈한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하며, 거기엔 자신의 트라우마를 성숙하게 극복해낸 아들이 있다. 당연히 그 화해와 극복에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성공적인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이 있다. 

덧붙여, 찰스 디킨스란 작가의 영업 비밀을 다룬 <찰스 디킨스의 비밀 서재>의 배경에는 인터넷과 미디어가 주된 문화 컨텐츠가 된 21세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글자 문화의 현장이다. 단 한편의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작가, 희귀 신상 신발도 아니고, 아이돌 그룹 팬미팅도 아닌 작가의 새 소설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 그리고 그 작품으로 인해 그저 하나의 종교 행사였던 크리스마스를 전 세계인의 축제로 변모시킨 위대한 예술의 '간증'이다. 물론 그 간증의 일등 공신은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인 찰스 디킨스 역의 댄 스티븐스이다. 

by meditator 2018. 1. 16. 17:29
영화의 시작과 함께 소방관 김자홍이 '예정대로 무사히 사망한다'. 아직 자신의 죽음을 채 받아들이지도 못한 김자홍(차태현 분) 앞에 여자 아이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한 그가 '의인'이라며 호들갑을 떨며 저승사자 트리오 해원맥(주지훈 분), 덕춘(김향기 분),  그리고 강림(하정우 분)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 저승사자와 함께, 김자홍은 그의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받게 된다. 



화려한 cg와 함께, 두 명의 판관, 그리고 각 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개성있는 수장들로 이루어진 7번의 지옥,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의인이었던 김자홍의 뜻밖의 사연, 그리고 예상 밖의 복병처럼 등장한 악귀로 인해, 관객들은 자연스레 의인 김자홍의 순조로운 재판 성공 여부에 촉각이 곤두서게 된다. 더구나 덕춘의 호들갑이 불안하듯 모든 것이 무사통과일 것이라던 7지옥은 그 어느 것 하나 순조롭게 넘어서는 것이 없으니,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누군가의 말처럼 '착하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의인 김자홍으로 분한 차태현이 그 친숙한 유명세로 이 대중적 영화의 바람을 잡지만 본격적으로 지옥의 수난사가 시작된 영화의 주인공은 어느 틈에 악귀로 등장한 김자홍의 동생 수홍(김동욱 분)의 의문사에 대한 석연찮은 사연이다. 그리고, 죽은 뒤 의인이 된 형 김자홍과 의문사로 죽어 악귀가 되어 의인이 된 형의 앞길을 막아서는 동생 수홍의 굴곡진 사연은 궁극에 그들의 지지리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슬픈 사연으로 절정을 이루더니, 악연인 줄 알았더니 그리움이었던 그 형제애의 대단원은 '어머니의 갸륵한 모정'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덕분에 관객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한 가족애의 현장을 목도하고, 일곱 지옥을 무사히(?) 통과한 자홍에 안도하고, 저승사자들에 의해 의인이 될 수홍에 안심하며, 비록 두 아들을 보냈지만, 그들과 못다한 회포를 꿈속에서나마 푼 어머니에 미련을 덜어내고, 마음 편하게 극장 문을 나선다. 그 어떤 액션 블록버스터 못지 않게 흥미진진했던 49일간의 지옥도 롤러코스터의 재미를 덤으로 느끼며. 



불교의 지옥도를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씻김굿 
<신과 함께>는 마치 씻김굿과도 같다. 영화는 불교에서 전해지고 있는 저승과 7 지옥도를 내용으로 삼고 있지만, 그 7지옥을 거쳐 환생에 이르는 자홍의 통과 의례는 우리 무속 신앙의 씻김굿과도 같다. 죽은 자가 이승에서의 한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 이승을 헤매일까 저어하여 죽은 이의 영혼을 순조롭게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 진행되는 의식이 바로 우리 전통 신앙의 씻김굿이다. 그리고 <신과 함께>는 저승의 7지옥이라는 매개를 통해, 결국은 환생조차 거부했던 김자홍이 살아냈던 이승의 고달픈 삶을,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동생 수홍의 한을 풀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 형제와 그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목도하고 공감한 관객들의 마음을 위무한다. 

따지고 보자. 해피엔딩인 것같지만, 사실 이승에서 두 형제의 삶은 비극이다. 가난때문에 어린 시절 병든 어머니와 철없는 동생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집을 떠난 김자홍의 삶은 내내 고달프다 못해 버거웠다. 소방관이라는 직업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을 그가, 그 낮의 직업이 끝난 밤에도 쉬지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온갖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의인'이란 덕춘의 추켜세움에 '돈'때문이라 답했던 김자홍의 돈은, 그의 죄책감과 의무감의 동의어다. 그런 그가 이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누릉지가 잘 만들어지는 밥솥을 사, 편지까지 써놓고는 이승을 하직했다. 저승사자에 의해 덜컥 저승으로 인도되었지만, 예전 <전설의 고향> 버전이라면 억울해서 이승을 떠돌만한 사연이다. 

동생 수홍은 한 술 더 뜬다. 홀로 된 어머니, 심지어 그토록 기다리던 형마저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온 형편에, 이제 일주일만 더 있으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보살필 수 있다 생각하던 그가, 그가 배려해준 관심사병 후임에 의해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다. 악귀가 되어 떠돌지 않는 게 이상할 상황이다. 심지어 둘 다 우리 무속계에서 가장 나쁘다 싶은 '몽달귀(총각이 죽어서 된다는 귀신)'들이다. 

그들은 착했지만, 가난했던 이들 형제의 삶은 고달팠고, 결국 현실의 세상은 그들의 가난도, 착함도 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그리웠던 어머니의 상봉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억울한 이 형제들의 사연을 <신과 함께>는 역설적으로 풀어간다. 자홍의 고단했던 삶은 의인으로 죽은 그가 뜻밖에도 마주치게 된 지옥의 재판으로, 그리고 의문사로 죽어간 수홍의 억울함은 악귀가 된 그의 변신으로 풀어낸다. 하지만, 그 역설적인 과정은 오히려 어린 시절 집을 뛰쳐나온 이래 함께 해서 다하지 못한 큰 아들의 책임감을 완수하기 위해 불철주야 살아왔던 자홍의 고달픈 인생과, 그런 형의 빈자리를 고시 공부까지 하며 채워가려 했던 착한 동생 수홍의 너그러운 삶을 절묘하게 설명해 내고, 저승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원한다. 아니 관객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았다고 느끼도록 만든다. 




자본의 카스트 제도를 살아내는 사람들을 위한 위무 
결국 집을 나간 큰 아들은 주검으로 돌아왔고, 하나 남은 작은 아들마저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말도 못하는 늙은 어머니만 남았지만, 7지옥의 재판을 무사히 마치고 환생을 하게 된 자홍과, 악귀가 아닌 의인으로의 재판을 받게될 수홍으로 인해 그들의 안타까운 삶이 구원받는 듯, 그리고 어쩌면 그들만큼이나 고달프게 살아가는, 하지만 착하게 살아간다고 믿는 관객들의 삶조차 구원받는 듯 느껴지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스크린에서 펼쳐진 씻김굿 아니겠는가.

카스트 제도의 국가 인도, 층위를 이루는 계급들은 날 때 부터 정해져 있고,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물론 예전과 같은 대우는 아니지만 카스트를 통해 세습된 부가 교육과 부의 세습으로 이어져 또 다른 고착화가 사회적 계급으로 형성되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타고난 신분적 층위가 없는 우리 사회에서 '불가촉천민'이란 이유만으로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이 있는 인도인들의 삶이란 이해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이해되지 않는 카스트의 배경에는 현세의 보상을 넘어선 종교적 내세관의 무한한 세계가 있다. 그 세계가 바로 현실의 고통을 수긍하고 다음 생의 구원을 약속한다. 장황하게 남의 나라의 신분제에 대해 서두를 연 것은 <신과 함께>를 보고 나온 후 든 소감이 바로 힌두교의 장대한 종교적 세계를 기반으로 한 카스트 제도를 경험한 듯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한 개인, 가족의 가난이나 불행이 개인의 노력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또 다른 계급 사회 대한민국, 그곳에서 어린 시절 자홍의 가족들은 흡사 불가촉천민과도 다르지 않다. 그런 현실을 뼈저리게 자각한 어린 자홍은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었다. 하지만 '착한' 자홍은 차마 실행할 수 없었고, 착한 동생 수홍은 그런 형의 선택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어머니는 마음에 품었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이 한 장면은 이 가족의 다음 삶을 내내 규정한다. 그리고 정도는 다르지만 돈이 계급이 된 대한민국을 자신의 노력으로 지탱해 나가는 개인들, 가족들이 느끼는 정서는 아마도 자홍이네 가족과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착한 이들의 삶은 '착하면 손해본다'는 우리네 속언에 뿌리깊게 피해의식으로 자리잡고 있고, 자본주의가 고도화될 수록 그 의식은 깊어진다. 

그런 현실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현세에서 손해보지 않고 살아가려 하지만 결국은 착해서 이도저도 아니라는 피해의식이 지배적인 이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무'하는 건 결국 현실이 아닌 세계다. 마치 인도 카스트 제도 하의 불가촉천민이 다음 생을 기원하며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현실적 고통의 극한을 겪은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들의 '구원'을 '환생'이라는 또 다른 현세를 선물하는 방식으로 세속적으로 풀어낸 <신과 함께>는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씻김굿'의 형식이다. 

by meditator 2018. 1. 3. 12:38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어 갈수록 연례 행사로 치루게 되는 '건강 검진'이 두렵다. 시간을 내서 심지어 이제는 제때 나오지도 않는 대변까지 챙기고, 나이가 들 수록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을 다스려 치뤄야 하는 그 과정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기실 그 보다 더 두려운 건 이제 덜컥 어떤 병적인 결과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오래된 육신을 가진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새로이 들였던 가전제품들 중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새로운 신제품이 나와서, 오래 써서 고장이 나서, 하물며 기계들도 그런데, 사람의 몸이야, 그러니 여기저기 잔고장은 점점 당연한 것이 되고, 생명이 오고가는 결과도 무람없이 들이밀어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어렵사리 2017년의 끝자락에서야 겨우겨우 만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가 상영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돼지 않아 내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화를 다보고 나와 화장실에 가니 덕지덕지 휴지가 얼굴에 들러붙어 있을 정도로 눈물은 흐르고 또 흘렀다. 객관적 척도와 상관없이, 적어도 나에겐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뒤늦게 찾아온 2017년에 최고의 영화 였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아버지 모금산, 영화를 만들다
금산 시내, 말이 시내지 흑백의 질감이 아니더라도 그 을씨년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골 도시라는 이 언밸러스한 조합의 거리에 미스터 모의 '마을 이발소'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심심한 상호명 '마을 이발소' 못지 않게 더 심심한 삶을 살아가는 '뻥튀기 애호가' 모금산 이발사가 있다.
낙이라고는 뻥튀기 먹는 거 말고는 없어보이는 아직도 연탄 난로를 때는 이발소를 지키며, 아내와 아들이 떠난 빈집에서 버티며 수영과 수영이 끝난 후의 맥주 한 잔으로 일과를 마무리하는 이 나이든 남자의 일상은 '색깔이 사라진 흑백' 그 자체다. 변수래봐야 같이 수영하는 아가씨와의 맥주 한 잔이지만, 그 조차도 그녀의 일방적 수다, 그 심심함이야 어디 가지 않는다. 

그런데, 임대형 감독이 모금산 역에 기주봉 배우를 선택한 '몸에 배어있는 체념과 달관의 태도'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루틴'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흑백의 색채감때문이었을까? 밤이면 잠이 안와 베개를 주먹으로 치다 깃털을 난무케 해버리는 불면의 일상, 그러나 그는 다음날 아침이면 똑같이 천변을 거닐어 마을 이발소를 열고, 무한 반복의 삶에 누선이 터지고 만다. 무덤이 즐비했던 산을 깍아내고 본데없이 세워진 아파트, 그 아파트에 입주할 때만해도, 아내가 생존하고, 그 아내가 잘생긴 남편과, 그 남편만큼 잘생겼다며 그걸 비디오에 담으려 할때만 해도 윤기나고 색감이 흘러넘쳤을 그의 삶은 이제 아들 방 책상에 쌓인 먼지처럼 되었고, 그 먼지가 쌓인 시간만큼 그와 그의 가족을 벌어먹여 살려주었던 마을 이발소도 낡았다. 그리고 그만큼 모금산도 나이가 들고. 기주봉 배우와 묵묵한 그가 채워넣는 일상이 보여준 '시간의 무게'가 묵직히 다가오며, 겨울을 버티는 나무처럼, 나이들어가며 견뎌내는 삶에 그만 마음이 열리고 마는 것이다. 희한하게 영화는 보여주지 않은 그가 견뎌온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도록 만든다. 



하지만 무심히 버텨내는 것도 쉽지 않다. 마을 보건소의 의사가 모금산에게 큰 병원에 가볼 것을 청한다. 위암이 추측되는 상황, 과연 불면의 밤을 보내며 일상을 근근히 버텨가는 듯한 모금산의 선택은? 뜻밖에도 그가 선택한 방식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영화 감독지망생이지만, 뜻한 바에 길이 막혀 방황하고 있는 모금산이 평가하기에 덜 떨어진 아들 스데반(오정환 분)과 그의 '똑부러진 이쁜이 여친' 예원(고원희 분)을 금산으로 불러내린다. 스데반의 방에 쌓인 먼지만큼이나 격조했던 이들 부자의 관계, 그 시간과 비례하여 멀어진 간격의 틈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영화가 툭 던져지고, 장발 아들이 이발사인 아버지의 이발을 거부하듯, 감독 아들은 아버지의 영화를 거부하고 본다. 그러나, 소품부터 준비를 시작하며 영화를 밀고 들어오는 아버지, 거기에 '어떻게 저런 덜 떨어진 아들에 이쁜이 여친이 생겼는지 모르겠다던 ' 예원이 반응을 보이며 아버지의 영화가 시작된다. 

그저 아버지, 마을 이발소를 지키던 노땅인 아버지와의 영화를 만들며,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모금산의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트롯이나 들을 것같은 마을 이발사 모금산,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준비한 영화 속 캐릭터는 '챨리 채플린'을 떠올린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좋아했던 챨리 채플린과, 아버지가 좋아했다던 스티브 맥퀸을 비롯한 그 시절의 배우들이 소환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맞선을 본 다방과 그곳의 계란 동동 쌍화차가 세대를 건너 스데반과 예원의 가운데 놓여지고, 마지못해 시작된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 연인의 시간 여행 '로드 무비'가 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마주친 뜻밖의 출생의 비밀. 

위트넘치는, 그러나 어른스런 아버지의 영화, 그리고 아버지의 삶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요소는 다 등장한다. 시한부 판정에, 출생의 비극까지. 그런데 이 극적 요소들이 모금산 씨와 만나면서, '어른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유효한 소재가 된다. 무료한 삶을 버텨온 모금산 아버지는 시한부 일지도 모를 자신의 삶에 들이닥친 뜻밖의 사건에, 영화 제작을 결심한다. 그런데 그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는, 이제 영화 감독을 포기하려는 아들에게, '영화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야지'라는 아버지의 설득이다. 또한 영화 속 그가 선택한 캐릭터는 그가 아닌 이제는 자신의 곁에 없지만, 남의 자식 딸린 자신을 기꺼이 잘 생겼다며 거둬준 고마운 아내가 좋아했던 챨리 채플린이다. 뒤늦게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랄까? 

아버지의 병을 알고 당황하던 아들에게, 혹은 비록 짠 음식일망정 그를 돌봐주려 했던 그의 동생 내외 등, 여전히 그의 '친지'들에게 그는 자신에게 닥친 병을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를 통해 위로한다. 심지어 그 영화를 통해 뒤늦게 어쩌면 자신이 없을 세상에 아들 녀석에게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혈육을 찾아주는 포석까지 깔아놓는다. 



스물도 안된 철부지 시절 아들 스데반을 낳고, 한때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꿈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도시를 전전하던 파란만장한 젊음을 보낸 모금산은 이발 기술을 배우고 선으로 만난아내와 구석에서 이발소를 하며 '어른'으로의 삶을 살아냈다. 그리고 그가 살아왔던 혹은 버텨왔던 어른의 삶처럼, 이제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병조차, 기꺼이 어른스럽게 마무리하고자 한다. 

남들에게는 위로라지만, 평소에는 말 한 마디 없이 동네 중학생 녀석의 인사조차 무심히 지나치고,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간 수영장 동료 아가씨의 수다에 무반응과 달리, 매일 매일 꼼꼼하게 해학넘치게 채워간 그의 일기와 같은 '위트넘치는 그만의 결론'이다. 또한 매일 홀로 수영장을 찾은 외로운 아가씨를 향해 뿜어낸 그의 물분수처럼, '치기넘치는 어른스런 배려'이다. 

젊은이들에게 모금산의 삶은 참 쓸데없어 보일 지도 모른다. 아니 젊은이가 아니라도 연배가 상관없이, 모금산의 삶은 무료하고 적막하다. 하지만, 그 무료함과 적막함은 어쩌면 그가 일기장에도 숨겨놓은 치열했던 그의 삶의 부산물이다. 이제 그 부산물조차 여의치 않는 상황, 과연 늙그막에 찾아온 병의 의미는? 자신의 병을 '시한 폭탄'이란 '위트'로 넘기듯, '어른' 모금산에게 병은 어쩌면 그 심심한 일상과 다를 바 없을 지도 모르겠다. 죽지 못해 살거나, 살지 못해 죽거나처럼. 그냥 그건 책임감있는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의연하고 거뜬한 삶에 대한 자세라니!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거창하게 아버지 모금산이 살아온 삶을 칭송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낡은 이발소가 기능하듯, 그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제는 초라해지고 사라져가는 아버지 세대의 삶을 흑백의 화면을 통해 설득한다. 기주봉이 연기한 덤덤한 일상을 통해 그의 외로움과, 그가 견뎌온 시간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운 영화, 그리고 비록 종종 방황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책임지려하는 스데반과 예원을 통해 아들의 세대를 긍정하는 영화, 굳이 거창한 화두와 관계에 대한 담론이 없이도,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의 삶을 포용하고,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이야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덤덤하게 하지만 묵직하게 보여준다. 
by meditator 2018. 1. 2. 16:41

오래 전에, 멀리 떨어진 은하 파파러웨이에서 벌어진 선과 악의 세력의 끝나지 않는 싸움, 스타워즈. 1977년 시리즈가 시작된 이래 하나의 시리즈 영화를 넘어 문화적 코드이자 전설이 되었다. 애초에 조지 루카스 감독에 의해 9부작을 기획되었다던 이 시리즈는 199년부터 다시 시작된 프리퀼 시리즈 세 편을 통해 전설의 시작을 훑어본 후, 2015년 <깨어난 포스>로 다스베이더의 죽음 후 30년 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을 주체적으로 수행해내던, 그러나, 그 악을 응징하기 위해 검을 (광선검을) 들었던 루크에게 충격적인 'I'm your father'출생의 비극을 알려주었던 실질적인 시리즈의 주체였던 다스베이더의 죽음은 결국 스타워즈였던 전설의 주체적 동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30년후, 악의 주체는 사라진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 세력을 강화해 '퍼스트 오더'가 은하계를 장악하고 다스베이더에 필적할만한 카일로 렌(아담 드라이버 분)이 등장했으며, 마지막 제다이였던 루크는 사라졌다. 악이 횡행하고 전설이 사라진 세상, 그 악의 시대에 저항의 불씨는 루크의 쌍둥이 여동생인 레이아 공주와 그녀를 따르는 레지스탕스 저항군으로 부터 지펴지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저항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마지막 제다이였던 루크를 찾기에 고심하고, 이 루크를 찾는 여정에서 반가운 한 솔로의 복귀와 함께 레이(데이지 리들리 분), 핀(존 보예가 분), 포(오스카 아이삭 분) 등 새로운 전설의 후계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설의 지양; 살부(殺父)의 신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요점을 몇 줄의 말로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운명으로 정해진 '포스'를 지닌 정의의 기사 '제다이'와 그 맞은 편에 악의 세력 시스가 있다. 이들은 은하계를 두고 끝이 없는 선과 악의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그 전쟁의 가운데에는 포스를 지닌 가문, 가족의 비극사가 자리잡고 있다. 정의의 제다이가 되어 악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루크, 그런데 바로 그 루크가 제거하려 했던 악의 주구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는 비극적 혈연사야 말로, '선과 악'의 미묘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으로 <스타워즈>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그리고 제다이의 영웅적 활약상과 이 비극적 가족사는 <스타워즈> 전설의 요체가 된다. 그리고 이제 30년 후 새로이 시작된 시리즈는 바로 이 '전설'의 지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흔히 '지양'이라고 하면 없앤다, 하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지양(止陽)은 헤겔의 변증법에서 '아우프헤벤(aufheben)'을 뜻하며, 여기에는 '폐지한다, 유지한다, 고양된다'의 의미가 담겨있다. 즉, 하나의 테제가 안티테제가 되는 과정에서, 테제 그 자체가 사라져서도 안되며, 그 성질이 유지되면서도, 동시에 다른 것과 만나 자신을 극복하고, 보다 높은 단계로 고양되어지는 나선형의 발전 과정이다. 

스타워즈는 '포스'를 지닌 '제다이'의 이야기이다. 그 중심에는 마지막 제다이였던 루크가 있다. 하지만, 이미 하나의 완결된 시리즈를 지난 루크는 전설의 제다이가 되었지만, 그것은 시리즈의 상징인 동시에, 시리즈를 이어가는데 가장 큰 부담이 된다. 30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그 '영광'의 후광, 그 후광을 <스타워즈>는 제다이 마스터로서 루크가 키워낸 또 다른 비극적 가족사 '카일로 렌'을 통해 '제다이 전설'의 종말을 설득하고자 한다. 



결국 어둠의 하수인이 된 아버지 다스베이더를 '지양'하는 서사가 된 1977년으로 부터 시작된 시리즈, 그리고 당당하게 라스트 제다이로 전설의 자리에 서게 된 루크, 하지만 그가 쌍둥이 여동생을 설득하여 키워낸 자신과 같은 '포스'를 지닌 조카 '카일로 렌', 그러나 루크는 그에게서 발하는 '어둠의 포스'를 두려워하며 결국 그를 '시스'의 손에 넘겨주고 만다. 

30년 후 강력한 '포스'를 지닌 두 인물, 샤일로 렌과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에 필적했던 레이의 캐릭터는 흡사 <해리 포터> 속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뇌하는 소년 해리와도 같다. 즉 아직 선과 악으로 자신의 편을 정했지만, 그 어느 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계에 선 성장기의 인물, 그러나 루크는 렌에 잠재되어 있는 악의 포스에 '예단'을 하여 렌을 제거하려 했고, 이는 렌의 트라우마이자, 그를 악의 편에 서도록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만다. 하지만 루크를 찾아가 수련을 받고자 했던 레이 역시 그것이 시스의 조작된 의도였을 망정 렌과 교감을 나눌 만큼 모호한 경계의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살부'의 의식을 치른다. 렌은 이미 앞선 <깨어난 포스>에서 자신의 악을 증명하기 위해 친부 한솔로를 죽인 바 있으며, 이제 그 반대로 <라스트 제다이>에선 그의 정체성의 근간이었던 사스의 주구 스노크를 스스로 제거한다. 
반면,  루크를 찾아가 가르침을 간청하는 레이. 하지만, 이미 렌의 경험을 통해 제다이로서의 훈련의 의미, 아니 더 나아가 '제다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된 루크는 그런 레이의 요청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의 용기에 마음을 돌린 루크는 그녀에게 세 가지 가르침을 주는데, 그 가르침의 끝에는 렌과의 교감 속에서 혼란을 겪던 레이가 스스로 선한 포스를 가진 자신의 길을 선택하듯,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 몇 남지 않은 레지스탕스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루크 스스로 렌이 지휘하는 '퍼스트 오더' 군과의 전투에서 산화하며 '젊은 포스'들의 거름이 된다. 

이는, 서양 고전 신화에서 아버지를 지양하고, 영웅으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의 얼개를 그대로 번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비와 적이 되어 싸우며 악에 물든 아비  다스베이더를 극복하고 전설이 된 제다이 루크는, <라스트 제다이>를 통해 스스로 새로운 세대에게 길을 터주며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제다이 루크의 전설 시리즈는 이제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스타워즈'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제다이의 지양
루크가 좌절한 것처럼, 루크에 의해 제다이로 선택받은 자였던 렌은 그 스스로 '시스'의 지도자 스노크를 제거하지만, 제거한 이후의 선택은 그 스스로 '퍼스트 오더'의 리더가 되는 것이었다. 선택받은 '제다이'로 훈련받은 자의 일그러진 선택, 레아 공주와 한솔로의 아들, 루크의 조카이자, 선택받은 제다이였던 렌의 실패는, 앞서 다스베이더가 연상되며, 루크의 '선택받은 기사', 제다이에 대한 회의론으로 귀결된다. 아니, 부제 '라스트 제다이'처럼, 루크로 마무리된, 제다이의 역사가 '지양'된다. 루크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시켜 새로운 시대를 연다. 

대신 누구의 딸인지도 모르는, 아니 알 필요조차 없는, 선택받지 않은 자쿠 행성 출신의 레이, 훈련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렌에 필적할만한 '포스'를 드러내었던, 선과 악의 경계에서 스스로 굳건하게 선의 자리에 선 , 훈련되지 않은, 보잘 것없는 출신의, 여성이 악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는 <스타워즈>의 설정은 그녀와 함께 하는 레지스탕스의 흑인 핀, 그리고 이번 시리즈에 그의 조력자로 등장한 동양인 켈리 마리 트랜과 함께 또 다른 전설의 '탄생'을 알린다.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라스트 제다이' 루크의 '산화'와 함께 이제 더는 의지할 '전설'도 없이, 지원군조차 없는 초라한 일행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퍼스트 오더에 굴하지 않는 '선의 행군'을 떠나며 새로운 전설의 시작을 알린다. 



---
전설을 지양하고 새로운 시리즈를 준비해야 하는 이 야심찬 시도는 그 덕분에 때로는 <해리 포터>인 듯, 혹은 때로는 <반지의 제왕>인 듯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와, 절대 악, 그 혼돈 속에서 궁극적 여정을 떠나는 일군의 동행들을 구축해 가며 '장황한 새 시대'의 서사를 연다. 덕분에 그 풍성하다 못해 구구절절한 새 시대의 도입부는, 한편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을 기대했던 화려한 액션 어드밴쳐의 구성에서는 어쩐지 아쉬움을 남긴다. 다음 시리즈를 위함이라지만 새로운 파트너 쉽을 선보인 핀과 로즈가 어렵사리 적진에 침투하고 싸움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잡히는 그 순간에는 실소가 나오고 만다. 아직 완전체가 되지 못한 주인공들은 매번 스스로의 싸움을 주도해내지 못한다. 성장의 서사는 간곡했지만, 마치 2차 대전의 우주 버전과도 같은 전투의 장면들은 전설로 탄생할 주인공들의 본격적인 활약이 될 다음 시리즈에 대한 기대로 접어두며 아쉬움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7. 12. 29. 04:59

이제 딱 중반을 지난 tvn의 수목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 생활>에 대해 일각에서 볼멘 소리가 나온다. 어떻게 된게 감옥에 다 억울한 사람만 있는 거냐고? 우리 사회에서 감옥이란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막상 감독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김제혁의 주변 인물들 중 상당수가 억울하다. 늘 해맑은 웃음을 짓던 목공반의 신재하는 보험이 들지 않은 사주의 차를 몰다 교통사고를 내고, 합의금이 없어 감옥에 온 처지이며, 말끝마다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고박사는 지방대 출신으로 회사의 비리를 짊어지고 대신 형을 사는 중이고, 악마 유대위는 알고보니 더 악마같은 내무반 병장의 상습적 구타로 인한 군대 내 폭력 사건의 희생양이었다. 회를 거듭하며 감빵 생활 동료들의 사연이 풀어질 수록, 감빵에 오지 않아도 될 사람들의 수도 늘어난다. 과연, 감빵의 미화일까? 


물론 비율로 따지고 보면 전체 제소자 중 억울한 사람들의 비율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의 사연이 풀어지며 그들의 억울함이 도드라져 '미화'냐라는 볼멘 소리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악마 유대위의 사건도, 고박사의 사건도 실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초로 하여 재구성된 사연들로 결국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건 '법'이라는 그물의 성김이요, 인간이 주재하는 재판의 '자의성'이다. 심지어, 8회, 신재하의 가석방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듯, 10분의 시간만 투자하면 한 사람의 재소자에게 사회의 빛을 줄 수 있는 사안이 얼마든지 업무상 편의에 의해 지연되거나 파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사회의 조직의 명암'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공교롭게도 '미화'가 아니냐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이 교도소 내 재소자의 현실을 '인간적'으로 다루고 있는 상황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이 개봉했다. '인간'이 만든 법, 그리고 그 '법'을 운용하는 인간들, 그리고 성긴 그 그물 속에서,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할 듯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 속 주인공은 '세번 째 살인'의 주인공이 되고만다. 

보이는 것 - 자의적 심판의 도구; 법 
영화를 여는 건 살인을 저지른 미스미(야쿠쇼 쇼지 분)가 아니다. 그를 변호하기 위해, 아니 그에게 내려질 살인죄라는 형량을 감하기 위해 동원된 성취 지향적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이다. 죄의 여부가 아니라 '승소'를 위해 싸우는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사건을 어떻게든 사형을 면하게 하기 위해 다시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미스미가 탄 택시 블랙 박스를 조사하며 그간 계획된 범죄였던 사건의 판도를 변화시키려 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통장에 입금된 돈으로 '청부 살해'의 형태로 범죄를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즈언조차 헷갈리는 미스미는 순순히 응하고, 검사는 그렇게 승소를 향해 달려가는 시게모리에게 죄인이 자신의 죄를 마주할 기회조차 놓치게 만든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비난을 뒤로하고 사건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조사를 해가던 중, 그의 눈에 피해자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 분)가 들어온다. 다리를 절룩이며 그 절룩이는 다리의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전해지는 소녀, 그런데 뜻밖에도 그 소녀가 빈번하게 미스미의 집을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애초 목적한 바를 따르다 본의 아니게 미스미란 인물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지켜보며 마음 속에 의문을 키워가게 된다. 

그리고 재판을 앞두고 찾아온 사키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비밀을 재판정에서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런 사키에의 증언은 그녀에겐 치명적이지만 시게모리가 의도했던 바 미스미에겐 사형을 면하게 되는 가장 유리한 방법인 만큼 당연히 시게모리 팀은 그 증언을 채택하고자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스미의 반전, 기소된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자신의 죄를 시인했던 그가 입장을 바꾼 것이다. 황급하게 찾아온 시게모리에게 '자신을 믿느냐'며 강렬한, 혹은 간곡한 입장을 전하는 미스미, 그의 의사에 따라 시게모리 역시 지금까지 진행된 미스미의 살해를 뒤엎고자 하는데......



배심원 참여 재판으로 진행된 재판 과정, 미스미의 번복에 대해 재판부는 당황한다. 함께 모인 판사, 검사부, 그리고 변호사들. 원칙대로라면 재판을 엎고 다시 처음부터 진행해야 하지만, 그 원칙에 대해 판사가 재판의 편의성을 내세워 제동을 건다. 그리고 오가는 서로의 눈빛, 그 순간 그들은 법의 판결을 내리는 사람도, 심판을 하는 사람도, 변호를 하는 사람도 아닌, 재판이라는 과정의 공범자들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재판은 돌발적인 미스미의 반론을 무시한 채, 예상대로의 결론에 도달한다. 

보이지 않는 것- 인간은 사회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미스미는 30년을 감옥에서 살다나온 사람이다. 자신을 찾아온 시게모리에게 그는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사람이라 말한다. 공교롭게도 30년전 미스미에게 은혜로운 판결을 내려 사형을 면하게 했던 시게모리의 아버지는 이제와 자신의 판결을 후회한다. 그때 차라리 사형을 내렸다면 오늘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시게모리의 아버지가 사형에서 미스미를 구해주었던 30년전 사건 때도 미스미는 두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지 않은 채 자신의 죄를 수긍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난 때문에 고생만 하다 가셨다는 미스미, 그는 그가 살던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던 조폭 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사키에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사키에를 어린 시절부터 괴롭혀 왔던(?) 그래서 그녀의 절룩이는 다리의 원인을 제공했던 그녀의 부친을 살해했거나, 살해의 죄를 뒤짚어 썼다. 오히려, 현재의 그가 보인 '보이지 않는 행보'를 통해, 그의 30년전 살인까지 의심되기 시작한다. 그 없이 홀로 자라 여급이 된 딸에게는 죽어 마땅한 아버지이지만, 정작 딸이라 판사에게 엽서까지 보낸 사키에를 딸로 여긴 듯한 미스미, 자신이 키운 카나리아를 죽이거나 풀어주는 그 미묘한 경게에서, 관객은 시게모리처럼 의심과 믿음의 경계에서 혼돈을 느낀다. 

아마도 우리 영화라면 어땠을까? 끝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달라는 시게모리에게 화사한 역광과 함께 입을 다물어 버리는 미스미 대신, 그의 곡진한 사연과 함께, 헌신적 대리 부성애를 풀어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주목한 건, 미스미의 사연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나오면 더 모호해지는 미스미의 진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처럼, 애초 어쩌면 30년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한 사람의 진실 따위는 아랑곳없이, 아니 애초에 '진실이 해명되는 곳이 아닌' 법정, 그리고 그 법정으로 상징되는 인간 사회를 드러낸다. 



그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유달리 다른 일본 감독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호응이 좋았던 감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려낸 풍경화같은 배경과, 그 속의 따스한 인간애를 그렸던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등의 작품들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를 보다 거시적으로 확장하자, 그의 작품이 말하는 바가 비판적으로 변했다

마치 그의 전작들과 <세번 째 살인>의 간격은, 신영복 선생이 <더불어 숲>에서 말한 후지산과 키 작은 풀이란 뜻의 아사쿠사(淺草)로 대비된 일본 사회가 연상된다. 즉, 키작은 풀들이 사는 나라, 작은 주택과 낡은 가구들을 아끼며 검소하고 겸손한 삶의 방식을 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상징하는 후지산은 정작 풀 한 포기 거둘 수 없는 쉬이 그 모습을 허락치 않는 군림하는 거대한 설산이라는 것이다. 즉, 조직화된 거대한 체계 속에서 숨죽여 온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단지 일본이라는 사회가 아니라 근대화라는 과정 속에 숨겨진 이 사회와 인간의 아이러니를 일찌기 신영복 선생은 짚으셨다. 

미스미와 사키에 사이의 숨겨진 사연은 어쩌면 그의 전작 속 훈훈한 인간애의 그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이 되고, '법'이라는 사회적 제도 속에 편입되는 순간, '인간'은 상실되고, 인간적 구원은 요원해지며 심지어 법과 그 법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살인'의 공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영화는 증언한다. 영화는 '구원'과 '심판'을 논하지만, 그건 종교적인 언어가 아니라, 인간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과정으로서 '구원'과 '심판'을 묻고 회의한다. 


by meditator 2017. 12. 15. 1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