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광복70주년이 다가온다. 

우리에게 광복은 어떤 의미일까? <sbs스페셜>은 광복의 기쁨 대신에, 광복 70주년이 분단 70년이 된 우리의 현실에 주목한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이념에 따라 남과 북이 나뉘어 어언 70년이 흐른 지금 그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남과 북의 마음도 멀어져만 가는 그 현실을, 남과 북의 청년들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그 현실을 짚어보기 위해 우선 우리에게 생소한 북한의 삶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북한 중산층의 가정집', 2006년 탈북한 새터민 정은심씨, 아버지가 음악 대학 학장이었다던 그녀의 기억에 따라 복원된 집, 그 집을 본 남한의 청년들은 놀란다. 늘 미디어를 통해 굶어 죽을 수준의 북한에 익숙한 남한 청년들은, 북한에도 남한의 아파트와 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 이렇게 '한 민족'이면서도 서로에 대해 사실은 '무지'한 남북한의 청년들이 광복 70주년 '대기획'으로 한 자리에 모인다. 



남북 청년 통일 실험; 자본주의에서 함께 살아남기 
남북 청년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몇 단계에 걸쳐 실시된다. 그 첫 번째, 탈북 청년들의 남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190년대 중후반 식량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북한 내 배급 체계가 붕괴되고, 주민들은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 북한식 시장인 '장마당'에 나와 자급자족을 하기 시작하였다는데, 바로 그 북한식 자본주의인 '장마당'을 경함한 장마당 세대가 첫 번째 실험의 주체들이다. 장마당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모자를 팔았다던 승설향,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 거래로 큰 돈을 만지기도 했다던 군 보위부 출신 장범철은 장사밑천 100만으로 이틀간 자유로이 남한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제작진이 돈을 건네 주기도 전에 미리 물품을 예약해 놓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던 이들은 정작 그 물건을 하나도 제대로 팔지 못한다. 생각과 달리, 그들이 내놓은 북한 사탕과 순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게다가 큰 돈을 벌어봤다던 장범철은 거리에서 호객 행위 한번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등, 남한식의 '장사'에 어설픈 티가 역력하다. 승설향은 눈물까지 보이고, 결국 물건은 그들이 아는 북한 새터민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두번 째 실험은 남과 북의 청년이 함께 이틀간의 장사 여정. 하지만 그 여정은 첫날 함께 식사를 하는 순간 부터 삐그덕 거린다.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장사 물품 마련, 장사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맞는 것이 없는 두 청년, 게다가 북한 장마당에서 땔감을 팔아봤다던 청년은 역시나 장범철처럼 거리에 나서 자신을 드러내고 무언가를 파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배달을 나선 길은 헤매기 일쑤, 고객의 한 마디에 물건에 대한 자신감은 뚝 떨어져 팔지 말자는 이야기까지 해버린다. 

그렇게 삐그덕거리는 그들을 위한 해법은 시간,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날, 남한 청년을 따라 주먹밥을 팔러 나온 북한 청년은, 그저 주먹밥을 파는 것을 넘어 출근길 시민들에게 '화이팅'을 외치며 밝은 기운을 전해주는 모습에 자신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북한 청년에게 남한 청년은 '북한'이라는 이질감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의 그 어설픔을 느끼며공감한다. 

드디어 마지막 실험, 따로, 혹은 함께 장사를 하던 남과 북의 여섯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북한의 장마당'과 같은 까페를 연다. 남과 북의 청년이 번갈아 가며 리더가 되어 꾸려가는 까페, 손님은 오지 않고, 서로의 낯선 리더쉽에 남과 북의 청년 사이엔 불만만이 쌓여간다. 



통일을 논하기엔 너무 먼 남과 북의 거리 
탈북 청년들과 함께 남한 청년들이 남한에서 남한 식의 '장사'를 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실험, 그 실험은 이미 실험 자체에서 '남한',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장마당'을 경험하고, 북한에서도 노동당보다도 '돈'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탈북 새터민들의 입장은, 어쩌면 이미 우리가 깨닫고 있지 못하는 북한내 변화의 단면을 보고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한식 자본주의라는 한계적 상황이건, 그 한계적 상황에 기꺼이 적응하려고 내려온 새터민들이라는 제한적 조건임에도, <어서오시라요>가 보여준 상황은 분단 70년이 가져온 남과 북의 거리를 깨닫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남과 북의 청년이 함께 한다는 종이 간판을 내세운 남한 청년에게 북한 청년은 거부감을 보인다. 자신이 내려와 겪은 짧은 시간 동안 남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북한의 물건을 가지고 나선 거리에서 시민들은 냉랭하기 이를데 없다. 아니 그리고 그건 '북한'이라서라기 보다는, '내 이익'과 관련되지 않는 그 무엇에도 '무관심'한 남한의 분위기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터이다. 

그렇게 지극히 자기 중심적 '자본주의'가 팽배한 남한 사회에서 이벤트처럼 만난 남과 북의 청년들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리더를 뽑는 방식에서, 리더에게 기대하는 것에서, 그리고 함께 무언가를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그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서로의 샅샅이 다른 문화적 차이이다. 안그렇다 하면서도 상당히 서구적 '민주주의' 문화가 익숙한 남한과, 남한에 내려왔음에도 북한식의 상명하복에 익숙한 북한 청년들이 정작 곤란을 느끼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부터이다. 

당연히 '통일'은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한 민족'인데 하는 북한 청년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오히려 지금처럼 압도적인 인구와, 그보다 더 압도적인 자본을 가진 남한과의 '통일'은 그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내어줄 뿐 북한의 희생이라는 목소리가 우세를 점한다.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그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남의 집 이야기를 듣는 듯 멀거니 바라보는 남한 청년들의 아득한 눈빛이요, 남과 북의 만남이라는 '호객' 행위에 '일별하지도 않은 채' 각자의 길을 가기 바쁜 남한의 거리 사람들이다. 

<통일 실험 어서오시라요>는 다큐임에도 오히려 리얼리티 프로그램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 하지만, 아름다운 북한 미녀의 소비도 아니고, 가난한 북한 주민에 대한 위로 프로그램도 아닌, 남한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북한 청년들의 적응기를 기반으로 한 다큐는 불가피하게 현실의 절박감을 내보인다. 그런 반면, 청년 실업에 시달리는 남한 청년의 현실은 거기선 드러나지 않는다. 월수 2500만원의 청년 실업가 수준의 청년과 국내 유수 대학, 대학원을 다니는 우리 사회에서 유리한 위치의 청년들은 애초에 남한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새터민 북한 청년들과 그 마음 가짐이 다를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여유로운(?)  남한의 자본주의 속 여전히 낯설은 북한 청년들, 이미 전제된 아량의 제한선이다. 
by meditator 2015. 8. 10. 1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