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잘 차려입고 손 꼭 잡고 등산하는 중년의 남녀들이 있다면 십중팔구 '바람'이라는 속설이 있다. 이런 '어불성설'이 난무하는 만큼 이미 우리 사회에서 '바람', 혹은 '불륜'은 사실 보편적이다. 멀리 갈 꺼 뭐 있겠는가? '바람'과 '불륜'이 없다면 대부분의 아침 드라마가 소재 고갈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현상은 말 그대로 '윤리'를 벗어난 문제 이기에 언제나 '도덕적 논란'의 기준이 되곤 한다. 이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사이에서 이 소재를 이야기한다는 건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러운 줄타기와도 같다. 바로 그런 줄타기를 절묘하게 하려 애쓴 작품이 개봉했다, 바로 <스물>의 이십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루었다 평가받았던 이병헌 감독의 신작 <바람바람바람>이다. 




'동(動)'하였느냐? 
<바람바람바람>은 프롤로그와도 같은 씬으로 시작된다. 모범 택시를 모는 석근(이성민 분)의 차에 중년의 여성이 승차해 앞의 자가용을 미행할 것을 요구한다. '미행'을 거부하는 석근에게 그녀는 그 자가용에 바람을 피는 남편과 내연녀가 타고 있다며 다시 부탁을 한다. 기꺼이 그녀의 청을 들어 그 자가용을 미행한 석근의 차는 어느 호텔 앞에 이르고, 차에서 내린 중년의 여성은 호텔로 향하던 두 남녀의 사이에 끼어들어 여성의 머리채를 잡는다. 그리고 뒤늦게 차에서 내린 석근이 그런 그녀를 '잡으려면 남편을 잡지 왜 여자를 잡느냐'는 궁시렁거림과 함께 적극적으로 말리는데, 그때부터 상황이 묘해진다. 바로 내연녀의 머리채를 잡던 중년의 여성이 자신을 백허그하다시피 말리는 석근때문에 애초에 하려던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머뭇거리던 여성은 결국 잡았던 머리채를 놓고 휭 하니 돌아서서 석근의 차로 향한다. 그녀와 함께 사라진 석근의 모범 택시, 그들이 떠난 자리에 그녀의 남편과 내연녀가 망연자실 서있다. 

뜻밖에도 영화 <바람바람바람>을 보고 난 후 기억에 남는 장면은 봉수(신하균 분)와 제니(이엘 분)의 바람도, 반전의 미영(송지효 분)과 효봉(고준 분)도 아닌 이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이병헌 감독이 <바람바람바람(이하 바람)>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두 시간 여의 이야기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남편의 바람을 단죄해야 하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몸에 밀착한 석근에게 '동(動)'하는 여성의 변화야 말로 '바람'을 가장 잘 '정의'내린다. 그리고 그 '정의'에 따라 노골적인 추파에도 흔들림없었던, 바람같이 택시를 타고 이 여자, 저 여자를 자유롭게 떠도는 석근을 비웃던 봉수가 '바람'이 나며 영화 <바람>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을 장악한 남자, 남편들, 봉수와 석근의 바람은 초반 프롤로그에서처럼, 그들의 아내 미영과 석근의 아내(장영남 분)의 바람으로 바톤 터치되며 결혼의 행간을 메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에 대한 불온한 '농담'으로 채워간 이병헌 감독의 <바람>을 보다보면 2000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만교의 작품을 유하 감독이 영화화 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떠오른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제목에서 지적하듯, '결혼'이라는 이미 사회적으로 유효기간이 지난, 그럼에도 그 제도적 편의에 타협하는 젊은 세대의 아이러니함을 대학 강사인 준영과 연희의 적나라한 만남을 통해 그려간다. 그리고 그들의 편의가 자초한 딜레마를 통해, 과연 2001년, 혹은 2002년이라는 시대에 사랑을 담아낼 수 없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부실함을 질문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야한 영화로 소문났던 영화 속 결혼할 수 없는 애잔한 연인이 풀어낸 그 직설적인 담론에 친구와 함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아직 '결혼'에 대한 로망이 남았던 시절의 '이불킥'같은 추억이다. 

그리고 10년하고도 훌쩍 시간이 흐른 2018년 이병헌 감독은 마치 2018년판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도 같은 <바람바람바람>을 들고 왔다. 이제 결혼에 대한 '로망' 따위 없어진 나이에 <바람>이 그려내는 바람, 혹은 불륜은 새삼스럽지 조차 않다. 이 영화를 가지고 왜 불륜을 들고 나오냐고 한다는 자체가 사실 '비현실적'인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바람'이 현실적이면 일 수록 세상은 그 바람에 대한 '불륜'으로의 재단은 엄격해졌다. 

'불륜'에 대한 부담때문이었을까? 2018년의 이병헌 감독은 유하 감독처럼 노골적이지 않다. '코믹'하게 철부지 어른들의 이야기라 내세운 영화는 설사 그들이 바람을 피지만, 2002년의 준영과 연희 처럼 결혼이란 제도를 '개떡'같이 여기지 않는다. 바람처럼 떠돌며 수많은 여자를 만나도, 제니에게 영감과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중국집을 열게 되어도, 그들에게는 '인륜지대사' 결혼이란 제도는 고정 불변의 진리값이다. 2002년에 이미 사회적 안정을 위한 안이한 타협처라 낙인찍혔던 결혼, 하지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나고, 다시 또 한번 변해가려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봉수, 미영, 석만에게는 지켜야할 그 무엇이다. 심지어 아이의 아버지를 속이더라도. 세월은 흘렀지만, 외려 결혼이란 제도는 공고해 졌다. 

그리고 영화 <바람>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결혼 8년차 각자 자신의 레고와 sns에 빠져살던 봉수와 미영이, 각자의 바람 파트너에게서 삶의 활력소를 얻었음에도, 그럼에도 그들을 결혼으로 묶어내는 결정적 그 무엇이,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궁금해 진다. 제니의 앞에서도 여전한 아내와의 추억을 애틋하게 말하는 봉수의 변치않는 연정일까? 그러기엔 8년차 그들 부부의 행간은 헐겁다. 그건 바람처럼 여자들에게 떠도는 석근으로 인해 상처받아 그녀 스스로도 탈출구를 찾았음에도 여전히 석근을 애증처럼 놓지 못했던 그녀의 아내가 놓지 못한 '인륜지대사' 혹은 '부부의 정'이었을까. 아내가 좋아하는 게 꽃인지, 가방인지조차 모르는 석근이 그리워하는 조강지처 아내가 끓여주는 보말 칼국수 같은 것일까? 집 밖에 나가면 '남의 편'이라 태연하게 말하는 경지에 이른 중년의 주부들의 '득도'함일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강고한 결혼이란 제도에 갖가지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동의한 <바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결혼'이란 제도에 의문을 남긴다. 바람으로 행간을 메워하고, 헛헛함을 달래준 결혼은 과연 무엇일까 라고. 과연 저들 철부지 중년이라 포장된 이들에게는 '바람'이 본질일까? 결혼이 본질일까?

그렇게 결혼에 대한 아이러니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은 <바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결혼이란 제도를 모호하게 한다. 문득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멀쩡한 척 사는 우리네 삶이 씁쓸해지지만 그런 게 사는 건가 싶다. 그래서 그 모호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 영화가 반갑다. 무엇을 말해서가 아니라, 이런 것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편하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 더 이런 이야기들을 영화관에서 조금 더 솔직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프롤로그의 그녀를 욕할 수만 없었던 <바람>, 그리고 철부지라 포장된 봉수, 석근, 그리고 석근의 아내, 미영, 그리고 제니의 해프닝을 타박할 수 만은 없었던 <바람>, 조금 더 솔직했으면 싶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이야기를 할 수 있어도 어딘가 싶었던 <바람>, 그저 '도덕'으로 치장하며 살다 가끔은 한숨 한번 쉬듯, 우리 삶의 그림자를 들여다 볼 여유를 준 <바람바람바람> 같은 영화가 또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8. 4. 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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