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으로도 도무지 그 내용을 예측할 수 없는 3월 29일 개봉한 제페니메이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2017년 우리가 조우할 수 있는 '일본 문화'의 결정체, 혹은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이 희한한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 지기 위해서 일본 문단의 기대라 칭해지는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작가의 동명의 소설이 전제된다. 2003년 <태양의 탑>으로 15회 일본 판타지 노벨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모리미 토미히코는 2006년 영화와 동명의 소설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20회 야마고토슈고로 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나오키 상 후보에 오르는 등, 그해의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고 일본 문단의 기대주로 각광받고 있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매직 리얼리즘 환타지로부터 비롯된
<밤을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청춘 판타지물이다. 짝사랑하는 후배 여학생의 사랑을 얻기 위한 선배의 '최눈알 작전', 이른바 '최대한 그녀의 눈 앞에서 알짱거리기' 작전을 다룬 이 소설은 하지만, 풋풋한 연애물을 연상하면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선배의 낭만적 연애 감성을 자극하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않은 검은 머리 아가씨는 태평양 바다가 럼주였으면 좋겠다는 두주불사에 어른들의 세계를 맛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교토 밤거리에서 벌어지는 환타지적 모험의 주인공이 된다. 반면, 그런 그녀를 짝사랑하면서도 그녀 앞에서는 늘 '어쩌다 지나가는 길이었어'라는 말 밖에 되뇌이지 못하는 선배는 그런 그녀를 따르기 위해 '팬티 실종 사건'에서부터 그녀의 헌책 사수 작전, 감기 광풍까지 본의 아니게 환타지에 휘말리게 된다. 

교토라는 특정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밤의 문화, 그 속에서 때론 음란하게, 때론 장광설을 펼치며 문화를 유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과 거리의 책과 각종 동아리 공연 문화를 기반으로 한 환상의 서사는 새로운 환타지의 영역이다. 그곳엔 '신화'도, '영웅'도 없지만, 교토라는 곳을 기반으로 한 갖가지 문화적 행사와 모임들이 가진 '리얼리즘'이 '매직'으로 승화되며 환타지의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저 하룻밤, 하지만 영화 속 이백의 말처럼 사계절을 겪어 낸 듯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풍성한 환타지의 세계는 바로 이 '원저자' 모리미 토미히코의 문학으로 부터 시작된다. 



문화의 도시 교토가 진짜 주인공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매직'의 기반이 된 '교토'이다. 교토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자라, 아직도 교토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교토의 천재라 칭해지는 모리키 토미히코의 작품은 단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토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하 밤은 짧아 )>는 교토의 문화적 거리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 나라의 '경주'와 같은 곳 이른바 일본판 '천년 고도'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 바로 교토이다. 하지만 <밤은 짧아>에서  등장하는 교토는 유적지와 벚꽃의 풍경이 아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술을 마시기 위해 거리로 나온 검은 머리 아가씨와 선배가 활보하게 된 곳은 바로 교토의 중심지 '기온'으로 간주되는 동네이다.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 구획된 길들이 이어진 동네, 그곳의 밤은 낮보다 빛난다. 술을 위해 의기투합한 괴물이라 자칭하는 유카타를 입은 남자 히구치와 애주가 여성 하누키가 검은 머리 아가씨와 함께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는 거리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파는 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조명과 저마다의 간판을 뽐내는 명소이다. 이백의 배가 닿는, 그리고 잠시 숙취를 깨는 환기의 장소로, 그리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등장하는 가모가와 강 또한 빠질 수 없다. 

한바탕 술판을 벌여 결국 술내기로 술의 신으로 칭해지는 '이백'까지 이겨낸 검은 머리 아가씨의 밤은 아직도 한참, 그 깊어진 밤만큼이나 계절도 무르익어 한 여름의 열기를 뿜어내고, 그 열기 속의 밤 거리엔 '책 축제'의 향연이 펼쳐진다. 시모가모 신사를 향하는 참배객의 넓은 길을 간이 서가가 채우고, 그곳에 오래된 책들이 켜켜이 쌓여 고서 매니아들의 방문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책을 찾기 위해 서가를 헤매는 검은 머리 아가씨, 그 아가씨의 책을 먼저 찾아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아이로 등장한 헌 책 시장의 신에게 이끌려 책 구하기 작전에 휘말리게 된 선배의 모험담은 바로 이 코토의 '책 축제'와 오래된 책을 사랑하는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명소의 거리나, 책 축제와 같은 구체적인 장소나 무형의 유산만이 영화를 채우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환타지적 해프닝의 행간을 메우는 출연진들의 갖가지 문화적 행태들이다.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혹은 젊으면 젊은대로, '괴변'을 비롯한 갖가지의 공통적 취미를 통해 만나지는 기온 거리의 각양각색의 술집 부터, '통제'된 암흑의 시대에 게릴라처럼 번지는 대학의 문화,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용납되기 힘든 '춘화 매니아', '팬티 패티쉬' 등등의 하위 문화가 버젓이 영화의 행간을 당당하게 채워간다. 다종다양한  b급의 문화적 정서들이 교토의 밤거리, 책 축제라는 도시의 문화와 함께 어우러져 <밤은 짧아>의 주인공으로 교토를 기억되게 한다. 그저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교토라는 도시에 담뿍 빠져 여행을 하고 온 기분이 든다. 



나카무라 유스케의 일러스트를 통해 구현된 캐릭터 
교토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빚어지는 청춘들의 환타지적 모험담이 '에니메이션'이란 장르로 영화화 된건 영화를 보면 당연한 결과물이라 여겨진다. 그저 술을 마시고 싶어 밤 거리로 나선 검은 머리 아가씨가 그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혹은 괴물, 신들과 함께, 술과 책과 사랑의 모험을 겪어 가는 신비한 세계를 풀어가는데 에니메이션만큼 유효한 장르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모리미 토미히코의 원작이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영화가 되기 까지에는 일러스트레이터 나카무라 유스케라는 관문이 있다.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이 모리미 토미히코의 작품을 영화화한 건 <밤은 짧아>가 처음이 아니다. 

2010년 tv 시리즈로 소개된 <다다미 넉장 반 세계 일주>가 그 첫 시도로, <밤은 짧아>에서 등장한 대학 내 다양한 동아리들이 신입생의 고민으로 등장하며, 익숙한 캐릭터들이 선보여 졌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카무라 유스케는 모리미 토미히코 작품의 캐릭터 원안을 담당했다. <밤은 짧아>의 여주인공인 검은 머리 아가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카무라 유스케의 일러스트는 소녀와 동물이 어우러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마치 일본의 옛 그림의 정취가 배어나는 화풍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우리나라에서도 매니아 층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 인간애에서 비롯된 러브 스토리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갖은 환타지적 고난을 겪어 내는 찌질한 선배와 그런 선배의 구애 작전은 아랑곳없이 어른의 세계에 용감하게 뛰어든 검은 머리 아가씨의 성장 환타지는 이렇게 교토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원작과, 그 원작을 절묘하게 구현한 일러스트 등 갖가지 문화적 콘텐츠들의 조합으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아우성치듯 저마다의 개성으로 빛나던 문화적 콘텐츠들은 영화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결국 애초에 작가, 혹은 감독이 추구했던 청춘 서사로 절묘하게 모아진다. 

팬티를 갈아입지 않던 선배의 희한하다 못해 괴팍한 취향도, '최눈알 작전'이니 뭐니 소심했던 선배의 짝사랑도, 그리고 '어른'의 세계만을 탐닉하느라 정작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검은 머리 아가씨도, 결국은 하룻밤을 빙자한 교토 사계절의 환타지 모험을 겪어내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향한 용기를 내게 된다. 여전히 서툴고, 머뭇거리지만 더는 '알짱거리거나 기다리지만은 않는 그들의 사랑은 영화 초반 '찌질했던' 그들을 이해하게 될만큼 애틋한 러브 스토리로 마무리된다. 마치 한바탕의 난장을 겪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제 그들은 가슴 설레는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러브 스토리'를 가능하게 한건, 때론 찌질하고, 종종 변태스럽기도 하며, 심지어 위악적이기도 했던 등장 인물들의 군상을 여유롭게 '인간사'의 한 장으로 품어낸, 그래서 어쩐지 영화를 보고 나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는 <밤은 짧아>의 넉넉한 세계관이 있기에 가능했다. 
by meditator 2018. 3. 31. 05:08

올해로 제주 4.3 사건이 70주년이 되었다. 다행히도 새 정부 들어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조명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건 물론, 그 어느 때보다도 전국민적 관심을 받는 희생자 추념식이 될 예정이어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신 영령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70주년이 될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활발하게 조명을 받는 제주 4.3 사건, 그러나 이 비극의 역사는 오래도록 우리의 역사 속 행간에 드러나지지 못한 채 숨죽여 왔었다. 그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상흔도 마음대로 드러내지 못한 희생자와 그 가족들, 그들의 아픔에 대해 우리의 역사는 외면해 왔었다. 방송이라고 다를까. <알쓸신잡>을 통한 유시민 작가의 회고, 그리고 최근 70주년 기념식 사회를 맡은 이효리가 자신의 예능 <효리네 민박>에서 언급을 통해 새삼스레 '조명'받고 있지만, 재야 언론을 제외하고 예능은 물론, 다큐에서 조차 제주 4.3은 접해보기 힘든 '희귀한' 이야기였다. 

1978년 아직은 서슬이 퍼랬던 유신 시대 현기영 작가는 자신의 작품 <순이 삼촌>을 통해 4.3 사건의 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문화 영역에서의 4.3에 대한 말문을 텄다. 89년대에 들어서서 <제주 민중 항쟁>, <잠들지 않은 남도> 등의 출판 연구 분야에서의 4.3에 대한 조명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제주의 지역 신문인 '제주 일보'가 4.3에 대한 증언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 정권이 종식된 1990년대 들어 유족 들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진상 규명에 대한 움짐임이 시작되었다. 1993년 '제주 4.3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99년 제주 4.3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4.3 특별법 제정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2일 국회의원 102인의 발의로 '제주 4.3사건 특별법'이 제출되었다. 



바로 이렇게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우리 사회에서 4.3이 행간 속에서 역사로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1999년 9월 12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회로 제주 4.3 사건을 다루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된 100부작 다큐멘터리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6.25, 독재 정권 시기까지 역사의 행간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사건을 '복기'해낸 프로그램으로 실미도 사건 등을 다루며 일요일 밤 11시 30분이라는 불리한 시간대임에도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렇게 '금기의 시대'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그 첫 방송으로 제주 4.3 사건을 다룬다는 건 그만큼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4.3 사건을 다룬 첫 번째 기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선구자'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방송을 통해 4.3을 이야기하는 건 쉽지 않았다. 

비극의 역사 속 숨겨진 진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운 이들은 12개 경찰 지서와 우익 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15명이 사살되었다.'

이것이 1999년까지 세간에 알려진 4.3사건이었다. 다큐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검증부터 들어가기 시작한다. 4.3 사건이 일어나기 전 친일 경찰이었던 조병옥의 비호를 받은 서북 청년단의 무차별적 테러가 이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짚는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의 발포 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이는 제주도민의 민심을 악화시켰고, 이는 총팡업에서 95%가 넘는 참여율로 이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 미군정은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서북 청년단을 파견하여 무차별적 테러, 구금, 고문으로 이어진 체포 작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경찰이 사람 때려죽이는 게 보통'이었던 당시의 상황은 도민의 감정을 격화시켰고 이를 절대 지지 세력으로 믿은 체포 작전으로 위기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봉기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고 결론내린다. 또한  당시 미군정이 주장하듯 이 '무장 봉기'가 남로당 중앙당의 계획적인 봉기였다는 사실에 다큐는 이의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당시 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잘 알고 있는 중앙당이 그런 무모한 지시를 내릴 리 없다는 것이다.
 
'사상' 보다는 매 맞지 않기 위해 가입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진압 작전에 대응한 불가피한 무장 봉기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장 봉기의 실상 조차도 당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실상이라는게 5~60명 정도의 작은 부대 단위, 당 자체는 커녕 계통의 조직체가 없었을 것으로 간주되는, 그들 대부분이 죽창이 주요 무기였으며, 소총은 겨우 한 두 자루가 있을 정도, 공격을 해서 겨우 한 사람 정도를 사살할 정도의 전투 능력을 가진 이들의 무장 봉기란 실상 그리 '가공할만한' 정도가 아니었다고 다큐는 밝힌다. 

다큐는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차적 무장 해지, 주모자들의 신변 보장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의 4.28 평화 협상을 무력화시켜 버린 5.1 오라리 방화 사건을 주목한다. 무장 폭도에 의한 방화로 회담을 결렬시켰던 이 사건, 하지만 생존해 있는 오라리 주민들은 당시 폭도의 만행을 증언했던 주민들이 오라리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대동청년단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 힘을 실은 건 이미 불이 꺼져 가는 상황인데도 경찰이 와서 주민들을 쏴죽였다는 사실이다. 미 군정의 딘 소장이 제주를 극비로 방문한 이후, 귀순 작전을 펼치며 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 장군이 해임되고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 된다. 

대리전의 리허설로써의 4.3
다큐가 줄기차게 질문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민족적 비극의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는가이다. 그리고 다큐가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바로 미국. 후에 공개된 미군정 보고서는 당시 경찰이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미군정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미국은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이다. 왜? 그건 바로 제주 도민의 70%가 좌익, 혹은 그 동조자라는 미국의 냉전주의적 시각에서 부터 비롯된다. 

5.10 선거를 앞둔 미 군정은 자신들이 주도한 단독 선거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남한 내 반공 정권에 대한 조바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 내에서 번지고 있는 반정부적 움직임에 미 군정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씨를 말려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사전에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의 미군정 문건은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군 정찰기가 제주도 상공을 수시로 정찰했으며, 함대가 제주도를 봉쇄하고 있었으며, 통신 부대의 촬영은 지극히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편집'시켰다고 다큐는 밝힌다. 

특히 5.10 총선 과정에서 전국의 200여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치뤄졌는데, 제주도에서는 소요 사태로 인해 3대의 선거구 중 2개가 투표 미달로 대표적인 단독 선거 거부 지역이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토벌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주민들을 해안선 5km 밖으로 소개하고 제주도를 횡단하여 병력을 배치한 후, 한라산을 기점으로 해안까지 빗질하든 소탕해 가는 과정에서, 농사일 등으로 떠나지 못한 주민들은 즉결 처형되었고, 이미 산으로 피신한 청년들 대신, 가족을 죽이는 '대살'이 횡행했던 토벌, 사망 군인에 대한 보복으로 소개된 주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 전쟁이 터진 후에는 예비 검속이란 명분으로 또 사살, 암매장, 제주 도민 중 3만 여명이 목숨을 잃는 '집단 학살극'이 벌어졌다고 다큐는 증언한다. 



미군정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이후 자신들은 직접적 책임은 없다고 발뺌을 하지만 이후 밝혀진 보고서에서는 49년 6월 30일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과 경찰이 미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는 비밀 협약이 밝혀진다. 또한 보고서는 공산주의와의 냉전 과정에서 '한국군을 훈련시키는 목적이 미군을 대신해 피를 흘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리전'의 한국 전쟁, 그리고 그 대리전의 '리허설'로써, 본보기로써 '좌익, 혹은 그 '동조자'에 대한 무차별 초토화 작전을 방조한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을 다큐는 강조한다. 

그렇다고 이승만 정부는 이런 책임에서 피해갈 수 있을까? 일제 하 경찰들을 그대로 이어받는 한편, 서북 청년단을 경찰로 흡수시킨 이승만 정부는 단독 선거, 이후 단독 정부 수립으로 불안정했던 정권을 지켜내기 위해, '공산주의를 심하게 탄압하면 할 수록 미국의 지원을 받기 용이하다는' 정권 이해의 차원에서 이런 '민족적 비극'에 앞장 서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발각되지 않기 위해 동굴로 피신했지만,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은 참혹한 시련, 발각되지 않기 위해 우는 아기의 입을 막다 죽이고, 만삭의 산모가 배를 드러낸 채 총살 당하고, 두 아들은 사살, 나머지 세 아들은 실종, 그 과정에서 죽어간 3만 여명의 주민들.  제주 도민 전체의 한으로 남겨진 역사, 그 누구라도,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이든, 혹은 공산주의자라도 그렇게 인간이 정당한 법질서의 영역 밖에서 '집단적으로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어서는 안된다는 참혹한 교훈을 1999년 제주 4.3 특별법이 첫 삽을 뜨던 그해, 첫 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으로서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 




by meditator 2018. 3. 29. 04:41

'즐거운 나의 집'이 행복한 가정의 '로망'이던 시절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이른바 '세계 명작 50권' 한 질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세계의 명작 중에 추려낸 겨우 50권의 작품 중에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작품이 무려 두세 권 들어 있기가 십상이었다. 바로 <소공녀> <소공자> <비밀의 화원> 등이다. 이제는 중년, 혹은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제목의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과 서사는 달라도 주제는 일관된 편이다. 어려움에 빠진 소년, 혹은 소녀가 주변의 학대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심성과 의지를 굳히지 않고 지내다 결국은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소년 세드릭이 완고한 영국 귀족 할아버지와 홀로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과 파산으로 하루아침에 다락방으로 쫓겨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들이다. 

소년과 소녀는 위기를 겪으며 '집' 혹은 즐거운 나의 집으로 상징되는 '행복한 가정'을 잃는다. <소공녀>의 새라는 비록 아버지뿐이었지만 인도에서 성공한 아버지 덕택에 기숙 학교에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실종으로 새라는 모든 것을 잃고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다. 기숙 학교 공주에서 기숙 학교 '하녀'가 된 새라. 하지만 생전 겪어보지 못한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힘든 시절을 '상상놀이'를 하며 견뎌낸다.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하룻밤 판타지에서 현실로 변하는데, 그 '해피엔딩'에는 꼭 '그녀들이 놓친 어려움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따른다.

 영화 <소공녀>의 포스터

영화 <소공녀>의 포스터ⓒ 광화문 시네마


'힘든 환경을 이겨내는 밝고 따뜻했던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는 시절의 변화와 함께, 신데렐라, 백설공주와 함께 세계 명작의 대열에서 사라져갔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돈을 번 아버지 덕택에 잠시 공주 대접을 받던 새라에게 닥친 우연한 해피엔딩은 더 이상 과거처럼 찬사를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공녀'라는 시대착오적인 제목부터 거부감의 대상이 되었다. 더 이상 우연한 행운을 얻은 '소공녀'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세상의 사람들은 '공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8년 또 다른 소공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돈 잘 버는 아버지 덕택에 공주 대접을 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새라가 기숙학교에서 방을 잃고 다락방으로 쫓겨나듯, 또 다른 소공녀는 알량한 월세방마저 잃고서 여전히 꿈을 꾼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미소(이솜 분)'라는 인물이 있다.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 정도의 나이. 자칭 자신의 직업이 '가사 도우미'라 하는 <소공녀>의 여주인공 이름이 미소이다. 그녀는 건물 외벽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도달하는 방 한 칸에 산다. 집주인이 세를 놓은 곳에 다시 세입자가 세를 놓은 방이다. 방 안에서도 온기 하나 없어 껴입은 옷을 벗고 벗다, 너무 추워 애인과의 섹스를 다음 해 봄으로 미뤄야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애인 한솔(안재홍 분)은 기업의 기숙사에 살며 대학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빠듯한 삶을 산다. 

미소는 '가족'의 그림자 하나 없이, 쉴 사이 없이 지낸다. 그녀의 머리색을 침범하는 '새치'를 막아내기 위한 한약을 꼬박 챙겨 먹는다. 그리고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갑에 드는 돈을 벌기 위해 가사 도우미를 한다. 남들은 '가사 도우미?'하며 어색하게 억양을 올리며 물어보지만, 적어도 그 일을 하는 순간 그녀는 전문 전동기구까지 동원하며 청소하고, 집주인이 원하는 갖가지 반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프로다.

하지만 일을 하는 순간만 프로일 뿐,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도시의 '아마추어'처럼 보인다. 아니, 애초에 이 도시가 강요하는 편제된 삶에 자신을 맞출 의도가 없다. 담배값이 오르면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싼 값의 담배를 구한다. 위스키 값이 오르고 방세가 오르자, 그녀의 선택은 위스키 한 잔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방을 포기한다. 그리고 방을 포기한 그녀는 과거 한 때 자신의 방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던 밴드의 멤버를 찾아다니며 잠시 의탁을 구하는 여정을 떠난다.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갑을 위해 방을 포기하고 짐 싸들고 거리에 나선 미소. 영화는 미소의 여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집'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 사회에서 '집'은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다. 집이 있고, 거기에 머무는 기본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청춘'의 시대의 퍽퍽함을 삼포 세대니 하는 세대 용어로 항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 <소공녀>는 집을 가질 수 없는 청춘의 시대에 질문의 깊이를 보탠다. 누군가에게는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위스키 한 잔, 그리고 백해무익하다는 담배, 그 의미를 말이다. 미소가 찾아간 옛 밴드 멤버들은 그녀에게 당연하다는 듯 "아직도 담배를 안끊었니?"라거나 "넌 아직 철이 안들었구나"라고 말한다. 그녀의 사치스럽고 쓸 데 없어 보이는 '취존(취향존중)'을 통해, 영화는 '과연 우리에게 집은 왜 필요한가'를 묻는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광화문 시네마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광화문 시네마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을 위해 집을 포기하다니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을 두텁게 하기 위해 영화는 집이 있는 옛 동료들을 비교한다. 한때는 미소처럼 위스키 한 잔과 담배를 즐기고, 음악이 좋고 함께하는 게 좋아서 어울렸던 동료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이 사회에 '철든 어른'들이 되어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잘 나가는 직장인이 되어 사는 친구는 쉴 사이 없이 몰아치는 업무의 피로를 담배 한 대 대신 포도당 링거로 대신한다. 결혼을 위해 20년 동안 매달 100만 원의 월세 아닌 월세로 아파트를 마련한 후배는 이제 사랑하는 이 없이 '장기 이자'만을 짊어진 채 외려 미소의 위로를 받는다. 일찌감치 결혼했던 또 다른 동료는 집은 있지만, 미소를 하루 재워주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층층시하'의 처지다. 그리고 동료가 선택한 집에는 한때 작곡을 잘 했던 그녀의 음악을 위한 자리는 없다. 

방이 스무 개도 넘어 미소에게 거뜬히 방 하나 쯤은 내어줬던 선배 언니의 담장 높은 집에는 그녀가 두 손 모아 시중 들어야 할 남편의 그늘이 짙다. 보컬이었던 선배의 집에서는 식구들이 '즐거운 나의 집'을 합창하지만, 노래가 끝난 그곳엔 '미소'를 감금하려는 강박과 허울뿐이다. 과연 그들이 안주하는 집은 미소의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보다 가치 있는 걸까?

영화는 예전 멤버들의 집을 일주한 여행을 통해 '집'이라는 경제적 가치로 매겨지는 삶의 가치를 묻는다. 집이 당연하게 필요하다는 사회, 그런데 그 '집'은 무엇을 위한 집인가? 그래서 당신은 집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는가? 어른이 되어 집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포기한 것들이 진정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영화는 기꺼이 세상에 편재되어 살아가기 위해 애닳아 하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우문'을 던진다. 이는 최근 트렌드가 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이다.

하지만 그 우문에 현답은 없다. 미소는 그저 위스키와 담배와 함께, 애인이 옆에만 있어주면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 한솔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헌혈 센터에서 피를 뽑아야 하는 신세다. 한솔은 가난한 연인의 삶을 견디는 대신, 웹툰 작가로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한솔은 돈을 벌어 두 사람의 '스위트 홈'을 구하기 위해 세 배의 월급을 주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난다. 그렇게 유보된 꿈, 혹은 포기된 꿈 대신 '집을 갈구하는 세상에서 이제 미소는 새치가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먹던 한약 값마저 구하기 힘들다. 

미소는 흰 머리를 날리며 거리에 남는다. 어둠이 드리운 도시, 그 강변 둔치에 오도카니 불 켜진 미소의 텐트, 미소의 소확행은 그 '불법 점유물' 텐트처럼 불온하고 아득하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소공녀>지만,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이다. 동화 속 집을 잃은 소녀의 이야기인 듯 시작된 영화는 '미소 서식지'라는 신조어를 통해 반문을 한다.

정혜윤은 그의 책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마이크로헤비타트(미소 서식지)'에 대해 말한다. "비가 오면 잠시 피해갈 처마 같은 곳, 지렁이 수준의 숨어있을 만한 곳, 새 수준, 고양이 수준... 인간 한 명에게도 이 도시에서 잠시 쉬어갈 곳이 필요하답니다"라고. 미소한 미소가 서식할 만한 공간에 대한 질문. 더 이상 앞 세대처럼 집으로 재테크를 할 여력이 없는 세대에게 집은 최소한의 서식할 '여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한 서식지'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 <소공녀>는 이솜이라는 배우에 기대어 풀어놓고자 한다. <족구왕>의 기획자였던 전고운 감독의 '여성 버전 족구왕'이랄까.

by meditator 2018. 3. 26. 19:01

<미생>의 김원석 감독과 <또 오해영>의 박해영 작가의 만남으로 화제가 되었던 <나의 아저씨>, 하지만 드라마를 열기도 전에 남자 주인공이 '아저씨'인 이선균과, 여자 주인공이 젊은 세대 아이유라는 점에서 <도깨비>에 이어 또 한번 아저씨-젊은 여자 커플의 등장이 아니나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설상가상 첫 회 여주인공 이지안(아이유 분)에게 사채를 받으러 온 이광일(장기용 분)의 무차별 폭행에 이어, 그런 이광일의 폭행에 대응한 이지안의 '너 나 좋아하지?'란 대응이 '왜곡된 성의식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논란을 불지피며 일부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2회를 마친 <나의 아저씨>는 이런 세간의 '아저씨'와 젊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 오히려 반문을 하는 듯하다. 극중 이지안은 나꿔챈 뇌물 5000만원을 다시 휴지통을 통해 돌려놓음으로써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박동훈(이선균 분)을 구해준다. 물론 애초에 이지안은 그 돈을 챙겨 자신의 사채 빛을 갚으려 했지만, 결국 다시 돌려놓는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박동훈의 은인이 된 셈이다. 그런 이지안의 처사에 대해 영문을 몰라하는 박동훈, 그에 대해 그의 형 박상훈(박호산 분)과 동생 박기훈(송새벽 분)은 쉽게 이지안이 박동훈을 좋아해서라 단정한다. '얼래리 꼴래리'라며 놀리는 것까지 덧붙여. 



고정 관념을 뒤짚은 아저씨와 나 
바로 이 지점, 우리 사회가 '아저씨'와 이지안 또래의 젊은 여자에 대해 '상정'할 수 있는 관계다. 이지안이 돈봉투를 가져갔다는 의심을 가진 박동훈이 지안을 따라 지하철을 타고 그녀에게 내릴 것을 종용하다 옆 좌석의 승객에게 내밀려 지하철에 패대기쳐지는 장면 역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 잇닿을 수 없는 세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불편한 성적 관계'가 아니고서는 서로 관계할 수 없는 이 두 세대, 그저 두 세대의 남녀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이 많은 아저씨'와 '젊은 여자'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불평이 새어져 나오는 현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이 두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간극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2회를 마친 드라마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쉽게 생각했던 '아저씨'와 '젊은 여자'가 아닌 것이다. <도깨비>처럼 흔히 이 관계를 다룬 드라마에서 등장하던 '키다리 아저씨'따윈 없다. 키다리는 커녕, 회사 내 권력 투쟁에서 그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뇌물 봉투를 배달받아, 장기판의 '졸'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일개 '사원' 박동훈이 있다. 생긴거 부터 억울하게 생겼다는 그는, 정말 억울하게도 그 순간, 딸의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동생과 함께 빼돌리던 형, 그 형에게 집값을 융자 받아 분식집이라도 내주자는 어머니의 간청을 떠올려, 평소답지 않게 주저했다. 그 '한순간의 주저'함이 그 봉투를 이지안에게 빼앗기는 빌미가 되었고, 회사내 권력 투쟁의 '말'로 한껏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거기엔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하느라 그를 밀어내고 싶은 대표의 사심까지 보태졌으니, '키다리 아저씨'는 커녕, 목구멍이 포도청 신세다. 기껏 그가 선심을 써서 산 '연시'조차 이지안에게 건네지지 못한 채.

반면, 우리가 흔히 고정관념으로 생각해 왔던, 그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이지안은 '밟혀도 밟혀지지 않는 억새'와도 같다. 아마도 이광필의 폭력적 장면을 과하게 설정한 건, 그 상황에서도 포기는 커녕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이지안의 그 억새같은 내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했던 이광필'과의 장면만이 아니라도 '생존' 그 자체인 이지안의 삶은 1,2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겨울 박동훈의 눈을 시리게 한 양말도 신지않은 발은 아랑곳없이, 그녀는 회사에서 한 움큼 가져온 커피를 몇 개씩 타서 마시며 도시를 버텨낸다. 요양원에서 밀린 입원비 대신 기꺼이 할머니를 침대 채 끌고 나오는 객기도, 주방 설겆이를 하며 비닐 봉지에 싸온 음식물로 연명하는 끼니의 궁상스러움도, 그녀의 일상이다. 그렇게 설명된 그녀의 일상에서 박동훈이 받은 뇌물 봉투 정도 슬쩍 해서 자신의 빛을 갚는 것 쯤이야 그녀에겐 그 일상의 연장처럼 여겨질 만큼. 그녀는 이 도시에서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릴라'같은 존재다. 그런 그녀 앞에 박동훈은 새장 속의 새와도 같이 보잘 것없다. 



도시 게릴라 이지안과 새장 속의 새 박동훈 
이지안은 5000만원으로 빚을 갚는 '편한' 길 대신 봉투를 돌려주며 외려 박동훈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었다. 박동훈이 사는 밥 한 끼 따위, 5000 만원에 댈 것도 아니다. 그를 그저 장기판의 말로만 써먹는 이 사회에서, 이지안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구원자'다. 물론, 대표와의 딜에 대한 결과는 미지수지만. 바로 이 전복된 '아저씨'와 '나'의 관계가 <나의 아저씨>가 도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담론'이다. 어설픈 아저씨와 '나'에 대한 로망은 사절이다. 그리고 흔히 생각하는 '키다리 아저씨'는 없다. 나이만 먹었지, 장기판의 말로 회사에서, 가정에서 굴려지는 박동훈은 그저 나이만 먹었지, 세상사 내공으로 보면 이지안의 뒤꿈치 정도이다. 

이런 역설적인 세대의 만남,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을'이다. 제 아무리 '생존'을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도 죽일 것'같은 이지안도, 생긴거 부터 억울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박동훈도, 나이가 많건, 적건, 혹은 세상 경험이 많건, 적건, 그들은 이 사회로부터 '억울'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연대'는 기껏해야 '불륜'의 눈길이나 받는 공감 제로의 관계들이다. <나의 아저씨>는 바로 이 공감 제로 관계의 공감과 연대를 위해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첫 발은 어설픈 '아저씨스런 호혜'가 아니라, '나'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물론 아직 알 수 없다. 나가 아저씨를 이용해 먹을 건지, 동지가 될 건지, 의지가 될 건지. 그러나 중요한 건 무한 경쟁, 이전 투구의 사회의 '게릴라'같은 이지안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왜 굳이 아저씨와 나냐고 발길을 걸면 할 말이 없다. 각자 도생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공감과 화해를 해보자는 손길에 한번쯤은 손을 잡고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 '연대'의 시작이 '나'라는 지점에서 우리는 긍정적으로 이 '아저씨'와 '나'의 향후를 지켜볼 만 하지 싶다. 
by meditator 2018. 3. 23. 12:54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 미스 마플, 그리고 코난, 김전일, 몽크까지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들이 가는 곳에서는 '언제나 살인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살인을 몰고다니는'이라는 수식어가 이들 앞에 붙기도 할까. 이제 거기에 한 사람을 더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추리의 여왕2>의 유설옥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가 배방동에 살 땐 배방동에서 자꾸만 사건이 터지더니, 이제 경찰 고시 준비를 위해 노량진으로 근거지를 옮긴 그곳에서 '살인 사건'이 터져 공부를 해야 하는 그녀의 발길을 잡는다. 심지어 한 술 더 떠서, 이번에는 기필코 붙으리라, 단호한 결심을 하고 떠난 기숙 학원에서까지 사람이 죽어 나가니, '살인'을 부르는 내공에 있어서는 저 앞서의 탐정들에 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만 늦어도 학생들이 빼곡이 들어찬 강의실에서 '인강'보다도 못한 자리에서 강의를 들어야 하는 노량진, 뒤늦게 이곳에 합류한 유설옥(최강희 분)은 골목에서 웅성이는 경찰들, 그곳에 둘러쳐진 가이드 라인을 보고도 두 눈을 질끈 감고 그곳을 지나쳤다. 하지만, '범죄'가 어디 유설옥을 가만 두겠는가. 겨우겨우 한 자리 차지해서 공부 좀 해보겠다고 하던 강의실까지 하완승(권상우 분)가 나타나고야 만다. 사랑의 밀땅을 하는 그 분위기로 유설옥은 '지나친 관심'이라 주의를 돌려보지만, 저돌적으로 돌진한 하완승은 가장 앞자리에 앉은 윤미주를 체포한다. 팔꿈치와 신발에 확연하게 묻은 피, 도대체 피할 수 없는 이 증거 앞에서 당장 경찰 고시를 앞둔 윤미주는 '살인할 시간'도 없다며 절규하지만 그녀의 해명에 대한 답은 유치장일 뿐이다. 



첫 회, 하완승과 유설옥의 결혼 사기 사건 잠입에 이어, 하완승이 옮겨 간 서동서에서 벌어진 방화 사건으로 두 번째 시즌의 개막을 선포한 <추리의 여왕2>는 아직까지 시즌의 장점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가정 주부 유설옥의 동네 탐정 버전은 아직 겉돌았고, 서동서의 등장인물들은 우후죽순 불협화음을 냈다. 그런 가운데 '아파트 벽돌 투척 사건'의 변주와도 같았던 '아파트 화염병 투척 사건'은 사건 초반만 해도 마치 '어린 사이코패스'의 등장인가 싶게 의미심장하더니, 급 '반성, 화해, 교훈' 모두의 사건 해결로, 사건의 심각성을 희석시켜 버려 아쉬움을 남겼다. 

범죄와 공간의 절묘한 조합, 노량진 살인 사건 
그렇게 서주를 끝낸 <추리의 여왕2>, 하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난게 아니라는 듯 유설옥이 노량진에 고시생으로 등장하며, 시리즈 본연의 맛을 살려내기 시작한다. 우경감도, 유설옥의 동네 주민도 없지만, 노량진이라는 동네의 '블루스'한 정서를 고스란히 사건에 투영시켜 내면서 그곳에서 탐정 유설옥의 활약에 방점을 두며, 비로소 추리의 여왕다운 서사를 보여준다. 

노량진, 새벽 3시에 일어나야 강의실 제일 앞자리를 앉을 수 있는 곳, 윤미주는 그곳에서 언제나 제일 앞자리를 놓치지 않던 학생이다. 그날은 다른 날 보다 조금 더 늦어 빠른 길로 '인강' 강의를 귀에 꽂은 채 서둘러 달렸던 골목, 그녀는 그 골목에서 '멘톨'향을 강하게 발산하던 한 남자와 부딪칠 뻔한 기억은 있지만, 자신의 발을 붙잡던 노인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그녀에게 이곳은 오로지 시험합격만을 위해 편재된 공간이다. 오로지 시험에 맞춰 그 흔한 연예인 사진 한 장없이 배열된 그녀의 독서실 책상처럼, 하늘 한번, 주변 한번 둘러볼 여유의 필요조차 없는, 그래서 '살인할 시간조차'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렇게 드라마는 시즌 1의 장기인 '수사' 이전에, 공간의 정서를 한껏 부풀어 올린다. 컵밥을 들고 걸어가면서 먹는 학생들, 누군가의 체포가 또 다른 누군가의 앞자리 득템으로 이어지는 무한 경쟁, 그리고 그곳에 웅크리며 살아가는 갖가지 인물군들. 용의자 윤미주가 진범이 아닐 꺼라고 확신한 유설옥이 하완승의 수사에 참여하면서, '노량진'이라는 공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수사 선상에 등장한다. 이미 '몰카범'으로 유설옥 콤비에게 찍혔던 공시생인척 노량진을 배회하는 박기범(동하 분), 윤미주에게 남달랐던 살해당한 노인의 고시원 총무 고시환, 그리고 공시생들을 상대로 돈을 모아 빌딩을 세운 노인의 유학생 손자 이인호. 그렇게 노량진이란 공간 속의 인간 군상들이 사건의 용의선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결국 사건은, 공시생을 겁박하며 돈을 갈취하다시피 살아온 노인으로 인해 오랫동안 공들였던 기회를 놓친 공시생과 마약으로 인해 협박을 받았던 손자가 모의한 사건으로 결론이 남으로써 '노량진 블루스'다운 완결을 낸다. 

노량진이란 우리 사회의 무한 경쟁을 상징하는 한 공간에서 '경쟁'으로 인해 살인을 외면했던 사람이 용의자가 되고, 결국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악의 수단을 선택한 사람이 범인이 되는, 그리고 그 '경쟁'을 부추기며 기생해 왔던 이가 희생자가 되는,  결국 이 '경쟁의 공간' 자체가 살인을 품어내고 있다는 우의적 결론에 이른다. 거기에 덧붙여, 에필로그처럼 혐의가 풀린 윤미주가 비로소 하늘을 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손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자신이 경찰이 될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이 질문은 곧, 수단이 목적을 삼켜버린 노량진이란 공간에 던지는 드라마의 교훈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량진 살인 사건을 통해 비로소 추리의 여왕 본연의 틀을 완성시킨 <추리의 여왕2>는 유설옥이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경찰 고시를 위해 기숙학원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것으로, 시즌을 변주해 나가고자 한다. 그와 함께, '김과정'이란 의문의 인물이 부상함과 함께, 그저 동네 제과점 사장인 줄 알았던 정희연(이다희 분)의 의미심장한 활약, 그리고 비로소 하완승의 팀장으로 등장한 우경감(박병은 분)과 함께 시즌 2의 체제가 본격적으로 갖춰진다. 



슬로우 스타터, 늦은 김에 시즌 3까지?
7회에서 갖춰진 체제라니, 슬로우 스타터라도 이렇게 게으를 수가 없다 싶다. 하지만 늦은 체제와 함께 시즌2에는 여전히 남겨진 숙제가 있다. 우경감의 등장과 함께, 하완승-우경감- 유설옥의 수사 라인이 갖춰진 것과 함께 그들의 개성강한 조력자로 황재민 팀장(김민상)이 강력하게 부상했지만, 아직도 서동서의 신장구 서장을 비롯하여, 조인호 과장, 계성호 팀장, 공한민 경장, 신나라 순경까지 감초라 하기엔 씬스틸을 할만한 조역들의 비중이 높다. 시즌 3까지 노린 야심찬 포석이라기엔 시즌2을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할 눈 앞의 산이 아직 높은 상황에서, 이 '다수'의 출연진들에게 제 몫을 배정하며 유설옥-하완승 콤비의 수사극을 제대로 그려내는 것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부디 이 화려한 출연진들을 제대로 살려내, 공중파 미니 시리즈 최초 시즌 3까지 순항하는 <추리의 여왕>이 되기를 건투를 빌어본다. 
by meditator 2018. 3. 22. 16:04

결혼을 하면, 사랑하는 이와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사는 기쁨도 잠시, 피말리는 전쟁이 시작되기가 십상이다. 보통 그걸 '신혼 초의 주도권 싸움'이라고 속되게 칭하기도 한다. 사랑해서 함께 사는데, 웬 주도권? 이라지만, 벌써 두 사람이 모인, 이 '단체'는 사회적 단위가 되어, 그 내부의 '권력'이 형성되고, 당연하게도 그 '서열'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평등'하다는 오늘날의 부부 관계는 더더욱 그 '서열'의 문제에 있어 정해진 위계가 없기에 '혈투'가 불가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남존여비'라 알고 있는 조선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분야와 책임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 외려 오늘날 '평등 사회'에서 불지펴지는 '혈투'의 가능성이 사전에 '조정'되어 있다고 한다. 여성이 '안사람'으로 가정의 경제나 가정사의 주체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동반자'적 위치에서 '바깥 일'을 하는 남편과 동반자적 위치에서, 심지어 남편의 부재시에 집안 사의 결정권조차 가지는 '종부'라는 막강한 권한까지 지녔던 것이 우리네 '여성'의 위치라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사랑'이란 자체가 논외의 문제이지만, 근대 이후 사회에서 '사랑'은 남녀 관계의 주된 변수로 작동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여성에게 있어, 때론 남성에게 있어 '신분 상승'의 유효한 도구이기도 했다. '사랑'이란 이름의 '신분 상승'의 도구를 타고, 하루 아침에 '뮤즈'가 된 여성의 '치명적인 투쟁기', 바로 <팬텀 스레드>이다. 





오뜨꾸뛰르의 뮤즈가 된 여급 
이번 오스카 상 수상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처칠과 귀족 계급 출신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디자이너의 대결로 화제가 되었다. 무려 2018년에, 아직도 '계급'이라니, 하지만 2015년 노동자 계급 출신의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가 더욱 더 심해지는 노동 계급 차별 현상에 대해 밝히고 있듯이, '민주주의'의 시조 국가 영국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계급 차별'의 벽이 높다. <팬텀 스레드>의 시작은 2018년이 되서도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바로 이런 영국 사회에 대한 기본적 이해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2차 대전도 마무리된 시절, 하지만 여전히 '계급'의 체제가 공고히 유지되는 영국 런던에서 '상류층'을 상대로 맞춤옷을 제작해오는 우드콕 가문이 있다. 내노라하는 명망가의 자제는 물론, 아직도 왕실을 유지하는 유럽의 각국의 공주들이 예복을 맞추기 위해 '친히' 방문하는 이곳에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와 이 '샵'을 관장하는 그의 '늙은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 분)이 그 주인공들이다. 

어머니에 이어 대를 이어 '우드콕' 의상실을 운영하는 레이놀즈에게  '여자'란그의 '창작력'의 땔감이 되어 타오르다, 때가 되면 '드레스' 하나 던져주며 누나가 '처리'해 주는 소모품이다. 누나 시릴과 동생 레이놀즈의 전 생애는 온전히 어머니에 이어,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 내는 '드레스'에 집중되어 있고,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그의 일상은 그 '옷'을 '만들어 내는' 것에 맞추어 편재되어 있다. 
  
온통 '창작'에 경주된 이런 긴장된 일상은 '예술가' 레이놀즈를 종종 지치게 만들고 그런 꽉 짜인 일상에서의 일탈을 레이놀즈는 한껏 속력을 높인 차를 타고 달려가는 고향 집의 여정에 놓는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는 '누나'가 처리한 이전의 뮤즈 대신 새롭게 그의 눈에 든 '알마'를 만난다. 그렇게 알마는 시골 한 식당 여급에서 하루 아침에 레이놀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상류층의 시선을 끄는 그의 뮤즈가 되었다. 

'신데렐라'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하지만 그 '환희'가 깨어나는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레이놀즈와 함께 할 수 없는 공간, 온통 '드레스 만들기'를 위해 짜여진 일상에서 알마에게 허용된 건, '뮤즈'라는 보기 좋은 '꽃'과 같은 자리였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녀의 존재를 대놓고 무시하는 레이놀즈와 시릴의 대우는 그 '꽃'의 당연한 그림자로 따랐다. 그리고 결국 그녀에게 닥친 건, '드레스' 한벌로 사라진 그녀들처럼, '치워'라는 말고 함께 처분된 레이놀즈의 변덕스런 '사랑'이었다.

바로 그 '변덕스런 사랑'의 소모품이 될 알마,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달랐다. 그 이전의 뮤즈들이 기꺼이 소모품으로 사라져준 반면, 알마는 '뮤즈'에서 하루 아침에 '일개 직원'으로의 강등된 수모를 기꺼이 감수하며 레이놀즈의 곁을 지킨다. 하지만 그저 '지킨다'는 수동적 태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레이놀즈가 자신의 '귀족적'인 드레스가 그를 그 자리에 있도록 만들어준 졸부 후원자에 의해 '수모'를 당하는 현장에서 기꺼이 그의 드레스를 구하는 '동지애'를 보이는가 하면, 도발적이고도 치명적인 수단을 통해 '레이놀즈'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레이놀즈가 알마의 그늘 앞에 무릎끓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
남성'권력 속에 '실존'하는 여성들
영화는 '소모품'인 뮤즈의 도발적 사랑의 권력 투쟁을 그려낸다. 그런데 그 '투쟁'의 대상이 누군인가가 '관건'이 된다. 언뜻보기에는 보이는 권력은 '레이놀즈'라는 당대 최고의 오뜨꾸뒤르 디자이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마'가 싸우는 대상은 '레이놀즈'라는 남성의 세계를 견고하게 '옹성'하고 있는 과거의 유령과 현재의 혈연이라는 또 다른 여성들이다. 영화의 절정에서 '알마'가 발견한 드레스 속 '팬첨 스레드'처럼 레이놀즈는 공고한 현실의 권력이지만, 죽은 '어머니'의 영혼에 억압받으며 현실적으로는 시릴에 의존하는 비주체적 존재이다. 오뜨꾸띠르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날리지만 결국 여전히 죽은 어머니의 그늘에서 자신이 저주받았다 절규하며 누이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자존감  떨어지는 의존적 존재이다. 

영화는 레이놀즈의 사랑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발하는 알마를 통해, 바로 이 '현존의 실체없는 권력'으로서의 남성과 그 이면에 실재하는 '여성의 욕망'들의 엇갈린 관계를 조망한다. 아니 알마로 인해 도발되는 레이놀즈 주변만이 아니다. 알마의 시선에 잡힌 레이놀즈의 오뜨꾸띄르를 구성하는 여성의 실존들을 영화는 차분하게 담는다. 

레이놀즈라는 당대 최고의 오뜨꾸띠르 디자이너를 통해 상징되는 의상실, 하지만 그 레이놀즈가 알마의 지독한 사랑에 의해 쓰러졌을 때 그 의상실의 실체가 드러난다. 레이놀즈가 부재한 상황에서도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해가는 시릴과 전문적인 직원들의 손놀림. 결국 '남성'이라는 드러난 권력 이면에 실재하는 여성들', 또한 그의 의상실이 1950년대라는 '현대'에도 존재 가능하도록 만드는, 즉 레이놀즈를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존립하게 만드는 계급을 막론한 여성들의 '옷'에 대한 갈망 등,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며 실존하는 여성들' 이야말로 이 영화의 본질이다. 

영화는 50년대 융성했던 오뜨꾸띠르 의상실의 영고성쇄를 함께 한다. 지지않을 꽃과 같았던 우드콕도 '기성복'의 융성과 함께 그 기세가 접어들고, 어머니와 누나의 그늘에서 기세 등등했던 레이놀즈도 알마의 지치지 않는 도발에 이제 그녀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니 세상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 저주받은 디자이너 우드콕을 원하지 않았다. 반면, '알마'가 원하는 건, 그 '권력'을 가진 남성 레이놀즈가 아니라, 그의 뮤즈인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하는 '남자'였고, 그녀는 기꺼이 그를 품는다. 결국 또 다른 영혼, '알마'(스페인 어로 알마는 '영혼'이라는 뜻)에게로 '귀의'하며 디자이너 레이놀즈의 생애는 마무리될 것이다. 마치 요람에서 무덤에서 처럼 레이놀즈는 여성의 영혼에서 또 다른 여성의 영혼의 품에서 일생을 보낸다. 세상은 '남성'으로 대변되지만, 그 '남성'이 살아가게 만든 건 '여성'이라며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단언한다. 마치 우리가 '남성'의 시대로 생각했던 조선 시대가, 동반자 '여성'에 의해 공고해진 '가족'이라는 제도로 뒷받침된 사회였듯이 말이다. 아니 언제나 세상은 '남성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을 지도. 


by meditator 2018. 3. 20. 19:24

근 10년 동안 한 자리 수에 정체되어 있는 최저임금제가 2017년 16.4% 인상, 7530원이 되었다. 그런데, 지난 대선 기간에 최저 임금 10000 원을 외치던 정치인들은 이 새롭게 인상된 최저임금제를 놓고 딴지를 건다. 정치인들의 딴지 만이 아니다. 실제 최저 임금은 올랐는데, 오히려 현실은 핍박하다. 경비원들을 비롯하여 최저임금제의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한편에선, 그 '최저임금제'에 압박을 당하는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렇다고 7530원의 최저임금제가 먹고 살만한 금액인가 하면 여전히 최저임금에 기대어 사는 삶은 궁핍하다. 도대체 올라도 '문제'인 최저 임급제 무엇이 문제일까?




16.9%나 오른 최저임금, 살만 합니까?
최저 임금제에 대해 말을 건 건 중식이 밴드의 보컬 중식이이다. 중식이 밴드가 그의 직업이지만, 먹고 살기 위해 그는 스무 살 시절부터 온갖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스무 살 시절 pc방 아르바이트로 해서 벌은 돈이 2000 원이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하루 12시간이 넘게 일을 했다. 늘 아르바이트로 해서 번 돈은 커피 한 잔보다, 한 끼 밥 보다 쌌다. 지금은 다를까?

최저 임금제 가이드라인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2018년 기준 300여 만명이 넘는다. 주로 비정규직, 정규직 노동자들, 청년과 노년층의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된다. 

최저 임금제란 노사가 결정한 임금의 최저 수준을 말한다. 법적으로 정한 최저 임금을 사용주에게 강제함으로써 노동자의 저임금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다. 지난 1953년 근로 기준법이 만들어 지면서 헌법 32조 1항에 최저 임금제가 명시되었으나 당시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해 1988년에서야 시행할 수 있게 된 제도이다. 이렇게 말 그대로 최저 임금제는 임금의 최저 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 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 있어야 하는 제도이다. 최저 임금을 올리면 노동자의 생활이 안정되고, 노동자들의 향상된 삶이 소비로 연결되어 내수 경기 활성화와 경제적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최저 임금제도의 취지이다. 

바로 이 '원칙'에 지금에 '많이' 올랐다는 7530원의 최저 임금이 유효한 것일까? 현장에서 마주친 7530원의 가치는 여전히 '생활'하기엔 많이 아쉬운 금액이다. 5년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김승연씨, 하루 8시간씩 꼬박 일하면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이 140만원이다. 대한민국에서 140만원이란 돈은 스물 세살 그녀가 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금액이다. 꿈인 여행을 위해 저금을 하고 나면 하다못해 동창생의 모임조차 눈물을 흘리며 포기해야 하는 돈, 그녀에게 유일한 사치는 편의점 4개 만원하는 맥주이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 드는 돈이 내가 버는 돈보다 여전히 많다고. 그 '많이 올랐다는 최저 임금'은 여전히 살아가기엔 택도 없는 돈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여의치 않다. 음악을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햄버거집에서 배달 알바를 하는 윤성환 씨, 최저 임금제가 오르면 삶이 그래도 좀 넉넉해 질까 했는데, 일하는 햄버거 사장님은 형편이 어렵다며 그의 배달 시간을 줄였다. 최저임금은 올랐는데 정작 그의 밥줄은 쪼그라 들었다. 

그래도 쪼그라 들면 다행이다. 공장을 다니며 세 아이를 키우던 순주씨는 하루 아침에 일하던 부서에서 쫓겨났다. 최저 임금이 인상되면 한 20여 만원 여윳돈이 생기리라 기대하며 마음이 부풀었던 그녀의 밥그릇은 하루 아침에 걷어 차였다. 아파트 경비원들을 비롯하여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법으로 보장된 최저 임금의 인상이 외려 그들에게는 '사형 선고'로 돌아왔다. 

이제는 아르바이트 대신 밥집 사장님이 된 중식이 밴드의 중식이도 예상했었다. 최저 임금제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빈곤층으로 내몰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예측은 '을과 을의 전쟁'이 된 최저 임금제가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현실에서 '알바'나 '최저 임금제'의  가장 많이 고용하고 있는 건 바로 소상공인, 영세 기업들이다. 다. 16.9%의 인상분을 고스란히 부담해야하는 게 바로 이 계층의 경제력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을'이다. 편의점에서 만난 알바생은 오히려 자신의 편의점 점주를 불쌍하게 여길 정도이다. 주말도 없이 쉬지 않고 일해야 알바생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가지고 가는 점주, 프랜차이즈 가맹점 본사와 이익을 나누어야 하는 그들은 또 다른 '을'이다. 햄버거 배달을 하는 윤성환 씨의 배달 시간을 줄여야 하는 햄버거 집 사장님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이들을 압박하는 건 조금이라도 이윤이 남는다 싶으면 바로 세를 올려버리는 집주인들. 건물 임대료, 카드 수수료, 본사 로열티까지 고스란히 떠앉고 있는 소상공인들, 그들에게 부담지워진 최저임금제는 또 다른 모순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외국의 사례로 본 '해법'들
결국 '을과 을의 전쟁'이 되어 버린 현실의 최저 임금제,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다큐의 시선은 외국으로 향한다. 오랜 전통의 소상공인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웃 일본, 그곳에서 만난 세입 점주들, 그들의 권리는 법적으로 보호되고 있다. 장사가 잘 된다는 이유만으로 세를 함부로 올릴 수 없는 '법적 제도'가 또 다른 '을'인 소상공인을 보호함으로써, 우리가 닥친 이 '모순'의 해법, 그 실마리의 열쇠를 던진다. 

하지만 일본 역시 '최저 임금'만으로 해결되지 못한 '생활'의 문제를 안고 있다. 대부분 최저 임금제의 부담을 안게 되는 층은 젊은 층이나 노년층들. 특히나 평생 정규직으로 살다, 나이들어 더 이상 정규직의 일을 수행할 수 없어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전직하는 노년층에게 있어, '최저 임금제'는 '생활'의 방패가 될 수 없다는 게 이웃 일본의 고민이다. 

결국 최저의 가이드 라인만으로 '보장'될 수 없는 삶의 문제, 그 해법을 다큐는 '생활 임금제'에서 찾는다. 노사 간의 합의에 의존하여 임금제를 꾸려오던 독일은 지난 2015년에서야 1시간에 1만 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며 1만 1000원에 해당하는 최저임금제를 도입했다. 뒤늦게서야 독일의 최저 임금제는 '제도'의 문제만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영국은 한 발 더 나아가 '생활임금제'를 도입했다. 즉, 최소한의 임금이 아니라, 살기에 적정한 임금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러쉬' 매장,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직원들은 이제 더 이상 '생활'을 꾸리기 위해 또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할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의 일만으로 '생활'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성동구는 이미 지난 2017년 <생활임금 심의위원회의>를 통해 201년 생활임금을 시급 9011원, 월급 158만 4400원으로 결정한 바 있다. 이는 전년 대비 13.1% 인상된 금액으로 현재의 최저임금보다 시급 1531원 높은 금액이다. 즉, 현재 대한민국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지 않고 하루 8시간 일해서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이 바로 이 정도라는 것이다. 특히 <미래 일자리 주식회사>까지 만들어 가며 앞장선 이 제도는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쉬운 노년층에게 단비와도 같은 혜택이 된다. 

이는 결국 현재의 '최저 임금'이 아직도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아직 '생활'하기엔 한참 부족한 금액이라는 반증이고, 누군가의 노력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도 현실 가능한 '임금제'라는 걸 반증한다. 또한 '성동구'라는 주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을'들간의 파이 싸움이 되어가는 '최저 임금제'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갈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 것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최저 임금제가 올라서 문제가 아니라, 그 최저 임금의 인상분의 고통이 '을들간의 전쟁'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제도적 개선에 경주해야 할 과제, 바로 그 지점을 mbc 스페셜은 분명하게 짚는다.  
by meditator 2018. 3. 16. 17:22

여자는 국장되면 안되란 법있어?'

<미스티> 고혜란(김남주 분)의 이 대사는 최근 드라마 속에서 변화하는 여성상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말이다. 오랫동안 맡았던 앵커 자리를 나이가 들었으니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는 동료의 말에 고혜란은 당당하게 말한다. '그만둬도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 둬!', 이 말은 '뉴스의 꽃'으로 존재했던 여성의 지위에 대한 당당한 반격이다. 극 초반 케빈 리(고준 분)를 사이에 두고, 앵커 자리를 다툼했던 고혜란과 진기주는 이제 극 중반을 넘어서며 유리 천장을 뚫기 위한 '연대'에 나선다. '여자 주제에' 장기 앵커로 집권했던 고혜란 마땅치않게 여기는 보도국 남성들을 제치고, 진기주는 기꺼이 고혜란을 위해 나선다. 그녀의 성공이 곧 후배 진기주가 가는 길을 닦아주는 것이기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허튼 속설'에 <미스티>는 반격을 가한다. 그녀들은 힘을 합쳐 남성들의 사회가 그녀들을 향해 파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이렇게 드라마 속 여성이,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이 변한다. <황금빛 내 인생>의 긴 여정은 곧 88만원 세대였던 서지안(의 '자아 실현'의 과정이기도 하다. 남들처럼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 정규직에 목을 매던 서지안은 엄마의 딸 바꿔치기로 '해성가'를 경험한(?) 이후 삶의 궤도를 수정했다.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컸던 그녀는 옛친구 혁의 목공방에서 알바를 하며 진정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는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기 위해, 어려운 가정 형편때문에 포기했던 미대 진학의 꿈을 '목공'을 통해 풀어나가고 자신의 힘으로 '핀란드 연수'까지 실행시킨다. 그 과정에서 재벌 집안의 반대로 있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겠다 내 꿈에 만족하며 살겠다 결심한 서지안에게는 '사랑'마저 자신을 흔들어 놓는 '방해 요소'일 뿐이다. 50회 그토록 자신이 원하고, 아버지가 죽어가면서까지 바랬던 '핀란드 연수'의 꿈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최도경(박시후 분)이 잠시 뒤로 미룰 것을 종용하자, 불같이 화를 낸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사랑을 이기적이라 질타하며. 

이렇게 '사랑'보다 기꺼이 자신의 일을 택하고, 그 여정이 곧 주요 서사가 되는 최근 드라마의 경향들은 우리 사회 여성들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토록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들인데, 정작 드라마의 진행 과정에서 그녀들은 현대판 '백마탄 왕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물론, 현대로 온 왕자들은 그녀들에게 '신데렐라 구두'을 신겨, 왕궁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외려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왕궁(황금빛 내 인생 최도경의 해성가, 미스티 강태욱의 명망있는 법조가문)을 걷어찬다. 



<황금빛 내 인생> '호구'라 쓰고, '순정'이라 칭해진 최도경의 외사랑
<황금빛 내 인생>에서 동생으로 돌아온 서지안의 적응을 위해 애를 쓰던 최도경은 그녀가 친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후 '분노'도 잠시 해성가의 거짓 딸로 애쓰는 서지안을 돕던 중 사랑에 빠지고 만다. 최도경의 서지안에 대한 사랑은 '해성가'의 부속품으로 어릴 때부터 '정비'되어온 인간 최도경을 처음으로 알아봐 주었다는 그 '눈밝음'으로 부터 비롯된다.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라는 그 흔한 연애 드라마의 공식은 재벌가의 최도경을 변화시킨다. 

<황금빛 내 인생>이 여주인공 서지안의 입장에서는 '자아 실현기' 였다면, 남자 주인공인 최도경에게는 한결같은 '서지안 바라기'의 여정이었다. 서지안이 최도경이 없이도 '목공은 나의 인생'으로 홀로 서려 애쓴 반면, 최도경은 재벌이었을 때나, 재벌가를 나와 갖은 알바로 고생을 할때나, 심지어 심장 발작을 일으킨 할아버지 때문에 다시 재벌가로 돌아갔을 때도 서지안 때문이었다. 동생일 때는 재벌가가 낯선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동생이 아니면 그 사실로 인해 고통받는 동생이 안쓰러워, 그리조 밀어내건, 함께 하건 그는 늘 서지안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인정받고, 그런 서지안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 했다. 

그렇다고 그런 최도경의 '일편단심'에 보상이 따른 건 아니다. 여주인공은 늘 그를 밀어냈고, 심지어 그를 자신의 앞에서, '치워달라'고 외면했고, 그의 선의를 곡해해 '닦아세우기'가 여러 번, 그래도 그는 서지안 앞에서는 늘 약자가 되어, 그녀를 위해 달려갔고, 품을 내어주었다. 심지어, 그와 헤어져 핀란드로 떠난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지금까지의 사랑이 '이기적이었다' 다시 반성하며, 평생을 기다릴 수 있다며, 핀란드로 달려간다. 

하지만 <황금빛 내 인생>에서 최도경이 줄곧 서지안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면, 정작 서지안에게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건 아버지다. 서지안은 딸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그녀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할 만큼, 아버지를 제일 닮은 편애의 대상이다. 이 드라마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큰 아들은 물론 작은 아들도 아닌, 큰 딸 서지안에게 계승된다. 경제적으로 보험금도 제일 많이 나누어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줄곧 큰 딸 서지안을, 딸 서지안은 아버지를 가장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어머니'는 낳아준 사람이지만, 서지안에게 부모란 곧 아버지인 듯, 아버지가 수모를 받을 때마다 그녀는 이성을 잃고, 흔들리며, 사랑조차 거부해 버린다. 



<미스티> 범죄조차 믿고 품어줄 수 있는 넉넉한 강태욱
제 아무리 한대 칠 기세로 닦아세워도 그래도 서지안과 최도경의 사이를 가로 막는 건, 사회적 위치가 달라도 두 집안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법'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갸륵한 사랑이 있다. 바로 고혜란의 남편 강태욱(지진희 분)이다. 

아버지가 대법관인 법조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나 대를 이어 검사로 활약했던 강태욱, 기자였던 아내를 사랑하여,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녀를 기꺼이 품었던 그는 앵커 자리를 꿰어차기 위해 아이를 지운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빈 리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아내를 보며 '널 포기할 자신이 없다'며 기꺼이 그녀의 편에 선다. 케빈 리 아내가 시시때때로 고혜란과의 사이를 벌려놓기 위해 갖은 '정보'를 흘려도 강태욱은 고뇌할 지언정 흔들리지 않는다. '법'의 편에 서야 할 그가 케빈 리와 아내의 블랙 박스 정보를 지우고, 유일하게 그녀의 편에 선 '변호사'라는 백마를 타고 법정에 나선다. 

하지만 고혜란에게 왕자님은 강태욱 한 사람만이 아니다. 세상의 남자들이 그녀가 자기 밥그릇을 빼았는다고 질시할 때, 아니 그 이전 세상 남자들의 밥그릇을 걷어 찰 수 있기 그 전에, 그녀가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무모한 도박을 벌였을 때, 그 위기에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가며 그녀를 세상으로 나서게 해주었던 하명우(임태경 분)도 있다. 이제 강태욱이 세상 앞에 나선 고혜란의 옆에 서있다면, 하명우는 그녀의 그늘이 되어 여전히 그녀를 지킨다. 이 두 '백마 탄 왕자'와 '흑기사'야 말로 고혜란을 완성시켜주는 존재들이다. 


'환타지'가 남긴 성평등의 과제 
'사랑한다면서 널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가둬놓고, 내가 정해놓은 정답만 너한테 강요하면서 널 힘들게 했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랑 때문에 내 자신이 견딜 수 없게 초라해 질 때가 있습니다. 난 그게 사랑때문이라고 그래서 괴로운 거다 라고 생각했다......내가 괴로운 건 사랑 때문이 아니었구나. 남자의 못난 자존심 때문이었구나.'

강태욱의 이 대사들이야 말로, <황금빛 내 인생>의 최도경과, <미스티> 강태욱, 그리고 그와 비슷한 드라마 속 2018년 버전 백마 탄 왕자들에 대한 정의이다. 동화 속 왕자들이 재투성이 아가씨를 구해 자신의 왕궁으로 데려 가는 대신, 2018년의 왕자들은 기꺼이 그녀들이 사는 재투성이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원하는 '신발'을 그녀가 얻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도대체 왜? 라고 반문한다면, 그들은 그게 그들이 원하는 사랑이라 답한다. 기꺼이 그녀의 범죄조차 믿어줄 수 있는, 만리타국에서의 그녀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놓고 그녀에게 가는 걸, 그 '이타성'을 그들은 사랑이라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마치 산업사회의 사랑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남자'를 응원하는 여성의 사랑을 갸륵하게 여겼다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황금빛 내 인생>과 <미스티> 속 남자들의 멋진 사랑은 바로 그런 '전근대적 사랑'의 '현대적 '미러링'인 것이다. '미러링'은 말 그대로 마주보기이다. 과거에 남자들을 향한 여성의 사랑이 그러했듯, 이제 그 남녀의 위치가 역전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드라마 속 남성들은 그저 '사랑의 역학 관계'에서의 미러링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고전적 왕자의 역할을 고스란히 떠맡는 '이중 부하'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미스티> 속 고혜란에게 강태욱이 그리고 과거의 하명우가 없다면 어땠을까? 해성가에 들어가면서 부터, 가짜 딸의 위기를 겪어내던 서지안에게 최도경이, 그리고 친구 혁이, 그리고 아버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심지어 극이 절정에 이를 수록, 진취적 여성보다 그런 그녀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남성들의 희생적 사랑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역설적으로 이런 '환타지적 설정'은 우리 사회의 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여전히 그저 전도된 '역학 관계'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혹은 심지어 남녀의 평등한 사랑에 대한 '담론'에 있어 지체 되어 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남자들에 의해 보호받고, 지원받음으로 그녀의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삶'이 완성되는 여성들, 어떤 의미에서 그녀들은 또 다른 종류의 '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여성이, 그리고 남성이 함께 동등하게 사랑하고 살아가는 삶은 과제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8. 3. 14. 16:49

<작은 신의 아이들>은 지난 해 방영되었던 <구해줘>의 속편처럼 시작되었다. 사이비 종교 집단에 의해 자행된 집단 학살극, 그리고 그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부녀. 세월은 흘러 김단(김옥빈 분)은 경찰이 되었지만, 그녀를 규정하는 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환각'과도 같은 예지력.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찾아온 '비이성적인 감각'으로 혼돈스러워 하는 그녀에 대비되어 등장하는 오로지 '팩트'만을 신봉하는 천재 형사 천재인(강지환 분). 하지만 감각과 이성의 대비인 이 남녀 두 형사의 대비는 일찌기 <엑스파일>이래 미스터리 스릴러 범죄 수사극에서 익숙한 구도였다. 또한 그들이 함께 마주한 사건은 이젠 정말 장르물에서 '클리셰'에 가까운 연쇄 살인마. 


그렇게 <작은 신의 아이들>은 익숙한 갖가지 장르물의 설정을 뒤섞어 놓은 듯한 모양새로 시작되었다. 거기에 새로이 맞이한 캐릭터가 몸에 맞지 않은 듯한 배우들의 조금은 들뜬 듯한 연기는 그런 진부한 익숙함을 포장해줄 여지가 적었다. 그래서일까? 좀처럼 2%대의 시청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4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답보 상태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1회 2.540%, 4회 2.861% 닐슨 코리아 수도권 유료 플랫폼 가구 기준)



하지만 이런 초반의 뻔한 설정과 아직 무르익지 않은 연기만을 가지고 <작은 신의 아이들>을 예단하는 건 이르다. 3,4회 극 초반을 이끌던 '아폴로'의 죽음과 함께, 그 뻔하던 연쇄 살인이 걷어지면서 오히려 <작은 신의 아이들>이란 드라마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한산했던 토일 밤 10시, 11시대의 시청률 쟁탈전이 <효리네 민박>, <미운 우리새끼> 등 예능의 선전과 함께, <미스티>의 화제몰이 등으로 공중파, 케이블, 종편을 막라하고 한층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여전히 장르물로서의 <작은 신의 아이들>이 갈 길은 험해보이지만, 4회에 들어서 비로소 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작은 신의 아이들>의 관전 포인트에는 '방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아폴로, 뽀빠이, 그리고 별
무속의 영향력 아래 놓인 말단 경찰 김단과 천재 형사 천재인이 함께 맞이한 한상구의 연쇄 살인 사건은 '무속'과 '과학'의 대비점을 강조했음에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두 파트너의 불협화음을 보여준 장르물의 익숙한 구도였다. 하지만, 한상구의 첫 번째 연쇄 살인 이후 시간이 흐르고, 이제 형사와 노숙자의 처지로 역전되어 조우한 김단과 천재인가 만나게 된 백아현 실종 사건, 그리고 그 끝에서 다시 마주한 한상구, 그리고 그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두 사람 앞에 그저 연쇄 살인범이 아니라, '아폴로'란 정체 불명의 인물을 불러들인다. 

김단을 '별'이라 부르던 한상구, 그는 죽어가며 자신을 '아폴로'라 불러 달라고 했고, 마치 김춘수의 시 '꽃'처럼 김단이 그를 아폴로라 불러주자, 연쇄 살인범 한상구는 간 곳이 없이, 피흘리며 죽어가는 어린 '아폴로'가 나타난다. 그리고 피해자였던 백아현이 비록 납치는 되었지만, 그곳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또 다른 피해자를 칼로 찔렀던 '범죄', 그리고 그 범죄가 바로 '아폴로'였던 한상구의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그저 또 한번의 흔한 '사이비 종교'를 소재로 한 것같았던 <작은 신의 아이들>은 그  '사이비'의 폐해 속에 희생된 '아이들'을 불러오며 비로소 살을 붙여가기 시작한다.

또한  한상구가 죽어가며 되뇌였던 '뽀빠이'에 대한 의문과 함께, 수사를 위해 방문했던 그 엄숙했던 교회에서 터지던 비웃음에서 부터, 한상구의 화장 현장에까지 슬픔인지 연민인지 모를 표정으로 김단과 때론 어긋나게, 때론 공감하며 조우하게 되는 주하민 검사(심희섭 분)가 모호한 존재로 천재인과 김단의 맞은 편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작은 신의 아이들>이란 드라마의 구도가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한다. 아폴로와 뽀빠이와 그리고 사라진 별이란 아이들이 도대체 과거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어떤 일을 겪었으며, 그 일이 오늘의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해지도록 만든다. 



천재인과 김단
이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믿지 않으려 하는 천재인 형사와 그런 그의 앞에서 자신에게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무속의 기운'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김단의 대비는 극 초반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지난 한상구의 사건으로 어긋나고, 이제 역전된 형사와 노숙자의 관계로 마주하면서 비로소 둘의 사연도 한 걸음 깊어져 간다.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간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천재인의 '언더 커버' 노숙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강지환의 진가를 비로소 드러내고, 그런 그와 함께 자신의 사명감, 혹은 연민으로 사건 속으로 한 발씩 내딛는 김단 역 김옥빈의 감성 연기는 극 초반의 불협화음을 잊게 만든다. 

그리고 비로소 호흡이 제대로 맞아가는 두 사람이 동생이 파헤치던 사건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찾아간 섬, 왁자지껄한 섬 인심 너머로 풍기는 그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때론 코믹하게, 때론 진지하게 조화를 이루며 사건의 중심으로 한 발 성큼 내딛어 가는 과정의 이후가 주목된다. 또한 아직은 맛보기였던 '과학'과 '무속'의 콜라보도 본격적으로 펼쳐질 듯하니, 그 지점 역시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된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사이비 종교 집단을 다루지만, '종교'에, 혹은 '믿음'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를 도구로 하여, 그 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권력'을 형성해 왔는지, 그 권력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구화시켜 희생해 왔는지를 갖가지 사건을 통해 풀어나가고자 한다. 그저 연쇄 살인범이었던 한상구가 알고보니 어린 시절 그 '사이비 집단' 속에서 '농락'당한 트라우마의 희생자였듯이, 이제 천재인과 김단이 찾아간 섬에서 그들이 찾아내는 진실은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 쓰고, '권력'이라 읽어야 할 어둠의 실체, 그 허울을 한꺼풀 또 다시 벗겨낼 것이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그걸 풀어가는 소재의 면에서, <작은 신의 아이들>은 마치 '잘 차려진 코스 요리'와도 같다. 그러기에 전채 요리 하나가 어설프다 하여, 이 풍성한 식탁을 외면하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by meditator 2018. 3. 12. 14:47

스릴러'는 영화나 드라마의 대표적 '장르'다. 가장 '인기있지'는 않지만 '꾸준'한 스테디 셀러인 이 '장르'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배상준 교수는 그의 책 <장르 영화>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드러나게 하는 절묘한 장치로 설명해 낸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자본주의 사회가 기반한 생산 관계에서 비롯된 각종 사회 관계들, 그 '모순'을 터트려내는 가장 유효적절한 방식이 바로 '스릴러'라는 것이다. 우리가 맞부닥쳐 사는 삶의 곪아터진 부분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내고 꼬집어 주는 그 '시금석'으로서의 '스릴러'


그래서 대부분의 스릴러 장르들은 드러난 사건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관계'들이 있고,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이 '숨겨진 관계'들이 '폭로'되고, '징죄'되면서, '장르'의 카타르시스가 최고치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등식이 있다. 바로 '사건'과 '폭로', 그리고 '징죄'로 이어지는 스릴러의 일관성이다. 대부분의 '스릴러' 영화들에는 사건 이면의 '관계'들이 '폭로'되어야 하기 때문에, '반전'이 중요한 극적 장치로 작용한다. 그러기에 이 '반전'의 정도와 '일관성'이 곧 '스릴러'의 질을 결정짓는 척도로 여겨질 정도다. 



'호러'적 공간이 품어낸 '스릴러의 정석' 
지난 3월 7일 개봉한 <사라진 밤>은 스릴러의 공식을 성실하게 따른다. 한밤중에 국과수에서 사라진 아내 윤설희(김희애 분)의 시체가 드러난 사건이라면,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 이면에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이 풀려가면서 드러난 사건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게 되어진다. 그리고 그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 '반전'이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는 것도 충실하게 '스릴러'의 정석을 따른다. 

영화는 tv 속에 등장하는 심수봉의 노래마저 음산하게 울려퍼지는 국과수의 으스스한 공기를 배경으로 미스터리 호러처럼 시작된다. 뜻하지 않은 정전, 그리고 수상쩍은 인기척을 따라든 경비의 앞에 펼쳐진 '시체' 실종의 현장, 그리고 그의 눈앞에 착시처럼 나타난 사라진 '죽은 여인'. 

이렇게 공포스럽게 시작된 영화의 뒤를 잇는 건, 조사를 위해 국과수에 나타난 우중식(김상경 분)을 비롯한 형사들과, 그들에 의해 호출된 남편 박진한(김강우 분)의 숨막히는 공방전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공방전의 승패를 일찌감치 친절하게 관객들에게 설명한다. 즉, 우중식과 김강우의 '공방전'을 통해 김강우의 숨겨진 비밀을 폭로해가는 '스릴러'의 묘미의 각을 관객들에게 이미 알려진 김강우의 범죄를 통해, 쫓기는 범인과 그 범죄가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풀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신분상승을 꾀한 한 남자, 박진한이 빠지고 만 범죄와 사랑의 딜레마이다. 

거기에서 관건이 되는 건 뜻밖에 평소와 다른 행태를 보인 우중식의 행보다. 한때는 철두철미한 잘 나가던 경찰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폐인'이 되다시피하여 술에 절어 '업무 태만'이 트레이드 마크가 된 우중식, 그런 그가 어쩐 일인지 다른 때와 다르게 박진한에게 '집착'하다시피 시체 실종 사건에 매달린다. 반장의 추궁도, 그 윗선의 압박도 물리치며. 그저 이 사건이 흘리는 힌트와 박진한이 동원하는 권력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도 되는 듯 우중식은 사건에, 아니 사건보다 오히려 피해자일 수 있는 박진한에 집착한다.  

이렇게 영화는 애초에 이 영화가 홍보했던 '사라진 시체'보다, 저돌적인 우중식과 그런 우중식에 의해 하나씩 까발려지는 박진한의 알리바이로 스릴러의 묘미를 더해간다. 그리고 그런 묘미를 극대화시켜주는 건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나도 하등 이상해 보이지 않는 '호러적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국과수'라는 공간이다. 아니, <사라진 밤>의 초반을 담당하는 건, 어쩌면 박진한도, 우중식도 아니고, 바로 시체가 사라지고 그 시체가 살아나서 돌아다녀도 하등 이상해 보이지 않을 '공간적 장치'이다. 그저 박진한이 홀로 남겨지기만 해도 어디선가 죽은 윤설희(김희애 분)가 문을 열고 나타날 것 같은 공간의 공포.

그 '공간'이 주는 긴장감을 극대화하면서 평소와 다르게 집착하는 우중식에 의해 박진한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지고, 그 비밀의 실체를 영화는 일찌감치 드러내 보이면서, 이제 관객은 박진한의 거짓말이 어떻게 '폭로'되는가, 그 귀추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터 박진한이 가장 집착했던 그의 내연녀 혜진(한지안 분)의 또 한 번의 실종과 함께 박진한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며 우중식이 집착에 가깝게 추궁했던 그의 '범죄'는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반전'은 그 이후부터이다. 지금껏 박진한을 추궁하는 '제 3자'의 입장에 서있던 우중식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영화는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한국적 스릴러의 안타까운 '사연풀이
<사라진 밤>은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 스릴러의 명작으로 회자되는 2014년작 오리올 파올로 감독의 스페인 영화 <더 바디>의 리메이크 작이다. 서사는 원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사라진 아내의 시체, 그리고 그 시체의 실종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점점 드러나는 남편의 '음모', 그걸 집요하게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반전'을 통해 풀려지는 '관계의 이면'. 얼마전 호평을 받은 <인비저블 게스트>처럼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영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그의 숨겨진 이면이 드러나고, 사건의 실체 자체가 전혀 다른 각도로 그리하여 결국은 '피해자'가 피해자가 아닌 것으로, 조력자여야 할 인물이 사건의 또 다른 주체로 부각되어지는, 캐릭터의 변주로 사건을 설명해 내는 방식의 영화이다.  한 개인이 저지르는 부도덕한 범죄가 마치 '토네이도' 처럼 범죄에 또 다른 범죄를 부르는 스페인의 스릴러는 우리의 상황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은 친숙할 수 있는 소재의 이야기다. 

한국으로 온 이 스페인 영화는 원작의 설정와 플롯에 변주를 주며 '한국적 스릴러'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호세 코로나도가 분한 형사 하이메 페냐의 속을 알길 없는 캐릭터는 김상경의 '허허실실'한 캐릭터로 재해석된다. 또한 이 영화의 키를 쥔 '혜진'의 캐릭터에 있어서도 변주를 가한다. 또한 원작의 서사에 '방점'을 달리 찍어 서사의 변화를 꾀한다. 

그런데 스릴러로서의 <사라진 밤>이란 영화에서 '관건'이 되는 건, 바로 그 제목에서부터 제시된 '사라진 아내의 시체'이다. 바로 그 지점을 풀어내고, 그 풀어내는 과정 속에 숨겨진 이면의 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스릴러'로서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런데, 바로 이 애초에 관객에게 제시된 질문을 풀어가는 지점에 있어서 '한국적 스릴러'들은 자꾸만 방향을 흔든다. 특히 <사라진 밤>은 충실하게 스릴러의 정석을 따랐음에도 가장 '카타르시스'를 줘야 할 부분 이후 영화가 어쩐지 힘을 잃고 만다. 

영화 속에 숨겨진 '반전'의 퍼즐을 풀어내고, 그것에 전율하고, 그리고 영화가 제시하는 주제 의식에 이르러야 할 주체는 '관객'이다. 그런데 <사라진 밤>이나, 얼마 전 개봉한 또 한편의 한국적 스릴러 <기억의 밤>에서 제작진은 그걸 '인내'하지 못한다. 마치 관객이 혹시나 자신들이 숨겨놓은 퍼즐을 이해하지 못할까 하는 노파심에 섣부르게 가지고 있는 패를 드러내고, 그 패에 대한 부연 설명을 충실하게 '사연'을 풀어가며 구구절절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은 안타깝게도 애초에 '차가운 장르'로써의 '스릴러'의 묘미를 반감시킨다. 굳이 나서서 감정을 주입시키지 않아도, 스릴러는 '사건' 뒤에 숨겨진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율'을 느낄 수 있는데, 조바심을 치며 모든 것을 구구절절 설명해 준다. 

가장 감동적이어야 할 '절정'에서 장르의 힘을 잃고마는 이런 '자가당착', 그 이유는 안타깝게도 '한국식 스릴러'의 맹점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깝다. 국과수라는 '미스터리한 공간', 거기서 펼쳐지는 우장식과 박진한의 공방전, 거기서 결판이 났어야 할 영화는 숨겨진 '퍼즐'이 아니라 '사연'을 통해 '전율' 따위 없는 자명한 결론으로 관객을 이끈다. 결국 '사라진 시체'에서 출발한 '스릴러'는 제작진이 마지막 퍼즐까지 알아서 맞추어 주며 박진한의 숨겨진 범죄의 잔혹사를 통해 꽉 닫힌 결말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애초에 던진 퍼즐은 신선했지만, 여운은 없다. 스릴러라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장르로 시작하여 절정에서 영화는 언제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복받치는 슬픈 사연으로 마무리된다. 

거기에 더해 아쉬운 건 원작을 달리 해석하기 위해 변주시킨 주인공의 캐릭터들이 복선으로 파고들어 가기 위한 관객들의 퍼즐 고리를 방해한다. <사라진 밤>의 우장식 캐릭터는 마치 '이건 몰랐지'하며 관객에게 '반전'으로 다가오지만, 그래서 생뚱맞다. 반면, 어쩌면 주체가 되었어야 할 사라진 아내의 윤설희(김희애 분)나, 남편 박진한에 대해서는 불친절하다. 김희애라는 배우의 출연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던 영화에서 정작 윤설희는 소모적이다. 왜 그녀가 박진한에 대한 모든 것을 덮어줄 만큼 집착을 했는지, 사랑을 했는지, 영화는 스쳐지나가 버리며, 영화의 동력 한 가지를 놓치고 만다. 마찬가지로 윤설희를 선택할 만큼 '계산적'이었던 박진한의 뜻밖의 사랑도 일관성을 놓친다. 영화가 결국 말하고자 한 것이 우장식의 계산된 복수였는지, 박진한의 부도덕이었는지, 풋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거기에 숨겨진 우장식의 순애보였는지, 그래서 오히려 모호해진다. 


by meditator 2018. 3. 1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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