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면, 사랑하는 이와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사는 기쁨도 잠시, 피말리는 전쟁이 시작되기가 십상이다. 보통 그걸 '신혼 초의 주도권 싸움'이라고 속되게 칭하기도 한다. 사랑해서 함께 사는데, 웬 주도권? 이라지만, 벌써 두 사람이 모인, 이 '단체'는 사회적 단위가 되어, 그 내부의 '권력'이 형성되고, 당연하게도 그 '서열'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평등'하다는 오늘날의 부부 관계는 더더욱 그 '서열'의 문제에 있어 정해진 위계가 없기에 '혈투'가 불가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남존여비'라 알고 있는 조선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분야와 책임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 외려 오늘날 '평등 사회'에서 불지펴지는 '혈투'의 가능성이 사전에 '조정'되어 있다고 한다. 여성이 '안사람'으로 가정의 경제나 가정사의 주체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동반자'적 위치에서 '바깥 일'을 하는 남편과 동반자적 위치에서, 심지어 남편의 부재시에 집안 사의 결정권조차 가지는 '종부'라는 막강한 권한까지 지녔던 것이 우리네 '여성'의 위치라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사랑'이란 자체가 논외의 문제이지만, 근대 이후 사회에서 '사랑'은 남녀 관계의 주된 변수로 작동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여성에게 있어, 때론 남성에게 있어 '신분 상승'의 유효한 도구이기도 했다. '사랑'이란 이름의 '신분 상승'의 도구를 타고, 하루 아침에 '뮤즈'가 된 여성의 '치명적인 투쟁기', 바로 <팬텀 스레드>이다. 





오뜨꾸뛰르의 뮤즈가 된 여급 
이번 오스카 상 수상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처칠과 귀족 계급 출신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디자이너의 대결로 화제가 되었다. 무려 2018년에, 아직도 '계급'이라니, 하지만 2015년 노동자 계급 출신의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가 더욱 더 심해지는 노동 계급 차별 현상에 대해 밝히고 있듯이, '민주주의'의 시조 국가 영국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계급 차별'의 벽이 높다. <팬텀 스레드>의 시작은 2018년이 되서도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바로 이런 영국 사회에 대한 기본적 이해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2차 대전도 마무리된 시절, 하지만 여전히 '계급'의 체제가 공고히 유지되는 영국 런던에서 '상류층'을 상대로 맞춤옷을 제작해오는 우드콕 가문이 있다. 내노라하는 명망가의 자제는 물론, 아직도 왕실을 유지하는 유럽의 각국의 공주들이 예복을 맞추기 위해 '친히' 방문하는 이곳에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와 이 '샵'을 관장하는 그의 '늙은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 분)이 그 주인공들이다. 

어머니에 이어 대를 이어 '우드콕' 의상실을 운영하는 레이놀즈에게  '여자'란그의 '창작력'의 땔감이 되어 타오르다, 때가 되면 '드레스' 하나 던져주며 누나가 '처리'해 주는 소모품이다. 누나 시릴과 동생 레이놀즈의 전 생애는 온전히 어머니에 이어,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 내는 '드레스'에 집중되어 있고,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그의 일상은 그 '옷'을 '만들어 내는' 것에 맞추어 편재되어 있다. 
  
온통 '창작'에 경주된 이런 긴장된 일상은 '예술가' 레이놀즈를 종종 지치게 만들고 그런 꽉 짜인 일상에서의 일탈을 레이놀즈는 한껏 속력을 높인 차를 타고 달려가는 고향 집의 여정에 놓는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는 '누나'가 처리한 이전의 뮤즈 대신 새롭게 그의 눈에 든 '알마'를 만난다. 그렇게 알마는 시골 한 식당 여급에서 하루 아침에 레이놀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상류층의 시선을 끄는 그의 뮤즈가 되었다. 

'신데렐라'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하지만 그 '환희'가 깨어나는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레이놀즈와 함께 할 수 없는 공간, 온통 '드레스 만들기'를 위해 짜여진 일상에서 알마에게 허용된 건, '뮤즈'라는 보기 좋은 '꽃'과 같은 자리였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녀의 존재를 대놓고 무시하는 레이놀즈와 시릴의 대우는 그 '꽃'의 당연한 그림자로 따랐다. 그리고 결국 그녀에게 닥친 건, '드레스' 한벌로 사라진 그녀들처럼, '치워'라는 말고 함께 처분된 레이놀즈의 변덕스런 '사랑'이었다.

바로 그 '변덕스런 사랑'의 소모품이 될 알마,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달랐다. 그 이전의 뮤즈들이 기꺼이 소모품으로 사라져준 반면, 알마는 '뮤즈'에서 하루 아침에 '일개 직원'으로의 강등된 수모를 기꺼이 감수하며 레이놀즈의 곁을 지킨다. 하지만 그저 '지킨다'는 수동적 태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레이놀즈가 자신의 '귀족적'인 드레스가 그를 그 자리에 있도록 만들어준 졸부 후원자에 의해 '수모'를 당하는 현장에서 기꺼이 그의 드레스를 구하는 '동지애'를 보이는가 하면, 도발적이고도 치명적인 수단을 통해 '레이놀즈'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레이놀즈가 알마의 그늘 앞에 무릎끓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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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권력 속에 '실존'하는 여성들
영화는 '소모품'인 뮤즈의 도발적 사랑의 권력 투쟁을 그려낸다. 그런데 그 '투쟁'의 대상이 누군인가가 '관건'이 된다. 언뜻보기에는 보이는 권력은 '레이놀즈'라는 당대 최고의 오뜨꾸뒤르 디자이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마'가 싸우는 대상은 '레이놀즈'라는 남성의 세계를 견고하게 '옹성'하고 있는 과거의 유령과 현재의 혈연이라는 또 다른 여성들이다. 영화의 절정에서 '알마'가 발견한 드레스 속 '팬첨 스레드'처럼 레이놀즈는 공고한 현실의 권력이지만, 죽은 '어머니'의 영혼에 억압받으며 현실적으로는 시릴에 의존하는 비주체적 존재이다. 오뜨꾸띠르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날리지만 결국 여전히 죽은 어머니의 그늘에서 자신이 저주받았다 절규하며 누이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자존감  떨어지는 의존적 존재이다. 

영화는 레이놀즈의 사랑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발하는 알마를 통해, 바로 이 '현존의 실체없는 권력'으로서의 남성과 그 이면에 실재하는 '여성의 욕망'들의 엇갈린 관계를 조망한다. 아니 알마로 인해 도발되는 레이놀즈 주변만이 아니다. 알마의 시선에 잡힌 레이놀즈의 오뜨꾸띄르를 구성하는 여성의 실존들을 영화는 차분하게 담는다. 

레이놀즈라는 당대 최고의 오뜨꾸띠르 디자이너를 통해 상징되는 의상실, 하지만 그 레이놀즈가 알마의 지독한 사랑에 의해 쓰러졌을 때 그 의상실의 실체가 드러난다. 레이놀즈가 부재한 상황에서도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해가는 시릴과 전문적인 직원들의 손놀림. 결국 '남성'이라는 드러난 권력 이면에 실재하는 여성들', 또한 그의 의상실이 1950년대라는 '현대'에도 존재 가능하도록 만드는, 즉 레이놀즈를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존립하게 만드는 계급을 막론한 여성들의 '옷'에 대한 갈망 등,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며 실존하는 여성들' 이야말로 이 영화의 본질이다. 

영화는 50년대 융성했던 오뜨꾸띠르 의상실의 영고성쇄를 함께 한다. 지지않을 꽃과 같았던 우드콕도 '기성복'의 융성과 함께 그 기세가 접어들고, 어머니와 누나의 그늘에서 기세 등등했던 레이놀즈도 알마의 지치지 않는 도발에 이제 그녀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니 세상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 저주받은 디자이너 우드콕을 원하지 않았다. 반면, '알마'가 원하는 건, 그 '권력'을 가진 남성 레이놀즈가 아니라, 그의 뮤즈인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하는 '남자'였고, 그녀는 기꺼이 그를 품는다. 결국 또 다른 영혼, '알마'(스페인 어로 알마는 '영혼'이라는 뜻)에게로 '귀의'하며 디자이너 레이놀즈의 생애는 마무리될 것이다. 마치 요람에서 무덤에서 처럼 레이놀즈는 여성의 영혼에서 또 다른 여성의 영혼의 품에서 일생을 보낸다. 세상은 '남성'으로 대변되지만, 그 '남성'이 살아가게 만든 건 '여성'이라며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단언한다. 마치 우리가 '남성'의 시대로 생각했던 조선 시대가, 동반자 '여성'에 의해 공고해진 '가족'이라는 제도로 뒷받침된 사회였듯이 말이다. 아니 언제나 세상은 '남성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을 지도. 


by meditator 2018. 3. 2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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