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린이 위인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공교롭게도 내가 맡아서 하던 인물이 이번에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돌아온 스피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당시 어린이 위인전으로는 획기적인 시리즈로 기획된 그 작업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나폴레옹', '이이' 등 고전적 위인을 대체할 새 시대의 '위인'이었다. 


당시 위인전 작업은 그의 영문판 평전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 졌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 까지, 그 중에서도 그를 세상에 알리게 된 <죠스>를 만든 과정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죠스>라는 영화가 만들어 지기 이전에도 납럅 특집 용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있었다.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뻔한 피칠겁의 섬머 스릴러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며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바로 우리가 기억하는 죠스의 첫 장면이다. <죠스>라 하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기억하는 그 존 윌리암스의 '빠밤, 빠밤~'하며 시작되는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죠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작 '죠스'가 등장하는 건 영화가 시작하고서도 65분 여가 지나서이다. 대신, 죠스의 시선으로 바닷가에서 한갓지게 유영하는 '먹이들'을 제시하고 그를 향해 돌진하는 바다 괴물의 역동성과 먹이를 향한 집요함을 한껏 드러내 보이며 관객들의 공포심을 극단적으로 몰고간다. <죠스>에 여러 사람들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아가리, jaws인 것처럼, 영화 <죠스>는 바로 그 '상어'가 주인공으로 맹활약한 영화이다. 즉 그 이전에 '무서운 대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공포'를 제공했던 방식의 새로운 해석이었던 것이다. 




스필버그의 창조적 방식 
하지만 당시 위인전 작업을 할 당시만 해도 저런 평전의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평전'이 평가한 스필버그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건, 그로 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2018년 그의 최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나고서이다. 한 화면에서 날뛰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 그리고 그 날뛰는 괴수들의 지면 아래로 차를 몰아 질주하는 주인공, 그 장면에서 왜 스티븐 스필버그가 80년대에도, 그리고 여전히 21세기에도 '명장'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가 여전히, 그리고 늘 명장인 이유는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랴, 어떻게 보여주느냐 라는데 선구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시간적 배경은 2045년 '디스토피아'이다. 발전한 과학 기술은 인간에게 가상 현실의 오아시스를 제공하지만, 그 오아시스를 벗어던진 현실은 기술의 독과점 기업과 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빈민층들뿐이다. 기술과 자본에 주도권을 넘긴 세상에 대한 스필버그 식의 담론이다. 위태로운 그들의 컨테이너 탑을 벗어날 희망은 '오아이스'에 접속하는 것뿐인 암울한 미래이다. 마치 피씨방 스크린과 핸드폰의 액정 불빛에 위로받는 이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암울한 미래를 지배하는 기술은 천재 과학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의 가상 현실 시스템. 

어느 틈에 블록버스타라 하면 이젠 dc와 마블이 아니고서는 발 붙이기 힘들어진 시대, 코믹스의 영웅이, 그들의 이합집산이 어떻게 구현되는가가 블록버스터의 성공 여부가 된 세상에서, 웬만한 '블록버스터' 환타지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바로 그 독점된 블록버스터 환타지의 세계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건, 바로 '죠스'를 통해 영화 산업에  최초 흥행 1억 달러 돌파 '블록버스터'란 장르를 처음 연 스필버그 자신이다. 

그저 흔해빠진 여름철 납량 특집용 상어 영화를 보이지 않는 추적자를 통해 자아내는 서스펜스를 통해 새로운 장르로 업그레이드 시킨 스필버그의 방식은 <미지와의 조우(1977)>의 결정판 <ET(1982)>, <인디애나 존스>시리즈 , <쥐라기 공원(1993)>, <AI(2001)>까지 언제나 대중의 '허'를 찔렀다. 상어도, 모험가도, 공룡도, 인공 지능도 스필버그가 만들어 낸 건 아니지만, 스필버그의 손을 거치면 전혀 새로운 경지의 캐릭터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그랬던 그가 코믹스의 영웅들이 득세하는 블록버스터 시장에 들고 나온 건, 뜻밖에도 '응답하라 1980년대'였다. 2045년의 빈익빈 부익부의 기술 디스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해 가상 현실 오아시스에서 사람들이 '조우'한 것이 스필버그란 이름을 세상에 가장 빛나게 했던 80년대의 복고라는 방식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어찌보면 그 '화려한 시절'을 살아온 스필버그에겐 '사필귀정'같은 선택이다 싶다. 

그렇다. 마치 어르신이 후손들에게 내가 한창 잘 나가던 그때가 좋았었지 하는 후일담의 재기발랄한 버전같은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오아시스 보물 찾기에 뛰어든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분)는 그가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신화가 된 과학자의 삶을 복기한다. 전설이 되어 신봉되는 그의 삶을, 하지만 '천재'라는 신화를 걷어내면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한 평생을 보잰 괴짜 소년과도 같은 한 시대를 살아낸 이의 삶의 방식을 열쇠 찾기를 통해 반추하는 것이다.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란 천재가 자신의 삶을 후대에게 전해주듯. 



스필버그의 '응답하라 1980년대'
기존에 제시된 길을 거꾸로 가보고, 주저했던 그 순간에 다시 도전해 보고,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 처음을 '피시 통신'에 접속하던 그 시절에서 부터 시리즈의 서막을 열듯, 가장 결정적인 열쇠를 괴짜 과학자가 처음 매료되었던 게임을 통해 제시하는 그 '방식'은 그 열쇠를 찾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킹콩과, 티라노 사우르스의 캐릭터 들, 듀란듀란의 음악, 스티븐 킹의 소설과 그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한 스탠리 큐브릭의 서스펜스적 방식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시대에 여전히 던지는 명장의 교훈이 된다. 

하지만 과거를 길어 새로운 블록버스터의 길을 열어내 보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가 된다. 그 이유는 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를 통해 제시한 '콘텐츠'의 구현이 바로 우리 시대 문화적 담론으로 제시되는 '융합'과 '에디톨로지'의 방법론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그의 책 <에디톨로지>에서 '창조는 편집(에디톨로지EDITOLOGY)이다'라 주장한다. 즉, 하늘 아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신의 영역'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김정운 교수의 주장은 일찌기 에드워드 윌슨으로 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최재천 교수를 통해 대두된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통섭(CONSILIENCE)와도 맥락이 닿는다. 

각각이 한 영화, 한 문화적 콘텐츠의 원형이었던 주인공들이 해체되고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된다. 어쩐지 가상 현실 레이스 속에서 거칠게 날뛰는 킹콩이 반갑기 까지 할 정도로, 고전이 되어버린 <샤이닝>이 활개를 치는 공간은 무섭기보다, 경이롭다. <토요일 밤의 열기>와 듀란듀란의 음악들은 정겹다.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을 위무하는 과거의 콘텐츠들이라니. 마치 지난 몇 년 우리 사회를 휩쓴 <응답하라>의 열풍처럼. 

마블과 디시 코믹스가 범람하는 세상을 보며, 즉 첨단 과학의 산물과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뒤엉켜 현대 세계의 영웅으로 대두된 콘텐츠들을 보며 스필버그는 그렇다면 나도 내가 살아온, 혹은 내가 작업했던 시대들을 '에디톨로지', 혹은 '통섭'해볼까 라고 생각했을까? 이미 그 자신이 한 세대 이상의 '문화'를 창조해 온 주도자로써,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 낸, 혹은 그 자신이 활동했던 그 시대의 주인공들을 불러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란 '도발적 아이디어'를 유츄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건 그가 <죠스>를 비롯하여, <인디애나 존스>, <AI> 등을 통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문화 콘텐츠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 방식적 전통의 활용이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가 가상 현실의 RPG 게임에서 다시 한번 맹활야을 하고, 스티븐 킹과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다시금 조우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그저 '대상화'된 콘텐츠로만 등장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창고 속의 그들이 다시금 '현역'으로 돌아온 반가움이 크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노익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현역'으로 펄펄한 '또 한 명의 괴짜 소년'이다. 여전한 소년은 말한다. 기술과 독점의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구원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일 뿐이라고. 물론 그의 담론과 주장은 소박하고 낭만적일 지로 모른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낭만이 2018년의 새로운 블록버스터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걸 그냥 어르신의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by meditator 2018. 4. 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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