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 차가운 바다에 꽃같은 젊은 죽음들을 목도했을 때, 그래서 차가운 겨울 거리로 촛불을 들고 나섰을 때, 세상 사람들은 다짐했을 것이다. 다시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겠다고, 그런데,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는데 여전히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지난 해 이대 목동 병원 신생아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4 명의 아이들, 잠시 세상은 떠들썩했고, 의료진 7명이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되었다. 그로부터 131일,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여전히 4년전 차가운 바다에 아이를 잃은 부모들과 같은 말을 한다. 아이들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세상은 이 아이들의 죽음에 무책임하다고. 


“제가 태어나서 죽은 사람을 처음 봤는데 그게 저희 아들이었어요.

살기 위해 들어간 병원에서 죽어서 나온 게 말이 되냐고요.”

-고 조하빈 父母


당시 거의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4명의 신생아들을 수사한 경찰은 이들의 죽음이 시트로박터 프룬디균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결론내렸다. 질병 관리본부 역학 조사팀은 지질 영양제 1개를 7개로 나누어 담는 과정에서 균에 오염이 되었고, 그 책임을 물어 지난 3월 30일 주치의와 수간호사가 구속되었다. 구속의 이유는 변질이 쉬운 지질 영양제를 나누어 주사하는 '관행'을 묵인하고, 제대로 된 감염 교육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었다. 



'분주'의 관행을 낳은 열악한 의료 현실?, 과연 그럴까? 
이대 목동 병원은 지난 2010년 국제 의료 기관 평가 인증(JCI) 병원이다. 이 국제적 인증 기준에 따라 '환아 1명당 1병씩'이라는 지침 기준까지 변화시켰다. 그런데 현실은 한 병의 주사제를 여러 환아들에게 나누어 주사하는 이른바 '분주'가 관행적으로 이루어져 왔었다. 

“선한 의도가 가중된 의료인에 대해서 나쁜 결과만 가지고 

의사들을 중범죄자, 살인자 취급을 하게 된다면 

우리 의사들은 중환자 치료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최대집 / 대한의사협회 회장 당선인



이 관행에 의거한 의료 행위를 두고 '구속'이라는 강수를 둔 검, 경에 대해 대한 의사 협회 등의 의사들은 광화문에서 집회를 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목동 병원 사태의 원인을 다르게 해석한다. 현행 건강 의료 보험 제도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 즉 낮은 의료 수가와 시스템이 목동 병원 사태와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낮은 의료 수가와 열악한 의료 시스템이 낳은 구조적인 문제에 의료진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협회의 주장이다. 또한 '분주' 과정에서 주사기나, 줄, 그 어떤 곳에서도 세균 감염의 가능성이 있기에, 주사제만을 놓고 세균 감염에 책임을 물 수 없다는 것이 의료진 측의 주장이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부담스런 미숙아를 치료하지 않겠다는 '몽니'조차 등장한다. 

과연 그럴까? 목동 신생아 사망이 과연 낮은 의료 수가로 인한 열악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낸 관행만의 문제일까? 그러나 유족들은 항변한다. 아이들의 죽음은 그저 '관행'의 결과가 아니라고. 그 진실에 4월 25일 <추적 60분>이 다가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다큐가 조사한 건 방대한 의무 기록과 공개된 적이 없는 질병 관리 본부의 역학 조사서이다.  



여전히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관행과, 그 관행에 협잡하는 사회 
그런데, 다큐가 진실을 알아가기 위한 과정은 '험난'했다. 이른바 '우리'로 똘똘 뭉쳐진 '의료계'는 다큐가 조사하는 그날의 진실에 대해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마치 '내부고발자'라도 되는 양, 제작진을 피하는 동료 의사들, 유족과 죽은 신생아들 대신, 의료진의 입장에서만 구구절절 항변하는 병원이나 피해 의사 변호인을 비롯한 관계자들. 의사들의 증언을 참조할 수 없었던 제작진이 어렵사리 얻은 도움은 '의사'가 아니라, '의사' 출신의 의료계 소송을 전담하는 변호사였다. 

비록 전직 '의사'였지만 변호사는 의료 기록과 역학 조사서를 보고 한 눈에 당시의 상황이 '관행'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짚는다. 그리고 그런 변호사의 의심에 유족들의 증언이 더해진다. 당시 신생아에게서 심박수 증가 등의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사망에 이르기 5시간 전, 유족은 아이의 이상에 대해 의료진에 문의했지만, 신생아실에서 돌아온 답은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사 출신의 변호사는 이미 당시의 신생아 상태가 '코드 블루'의 위급 상황이었으며, 그 상황에 의료진이 조금 더 신속하게 대처했더라면 어쩌면 아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예측을 내놓는다. 

“로타 바이러스가 어떻게 보면 경고였을 수도 있죠. 

 감염관리가 엄청나게 지금 문제가 있다라는 걸 보여주는 징표잖아요.

그런데 그 기회를 또 무시를 한 거예요”

-사망한 신생아 부모


그렇다면 심박수 증가 등의 이상 증상이 나타난 그 시간으로 부터 5시간 여 '신생아 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과연 아이들은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받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 다큐는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신생아실 전담 의료진은 10여 명이 넘었지만, 무단으로 자리를 이탈한 의료진이 있는 가운데, 불과 다섯 명 정도의 의사, 그것도 전공의 1년차와 3년차의 의사들이 몇 십 명의 신생아들을 돌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첫 면회시 자신들이 의료진의 말에 따라 병실을 나오지 않고, 윽박질러서라도 의료진을 닥달했더라면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당시의 상황 이전에 있었다.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건 지질 영양제의 분주라는 관행이었지만, 정작 주목해야 할 건, 미숙아들에게 지질 영양제를 주입해야 하는 그 '상황'이라고 다큐는 지적한다. 그리고 거기서 등장하는 건, 영유아 장염의 원인인 '로타 바이러스'이다. 대부분 경미한 증상에 그치지만 면역력이 떨어지는 신생아나, 미숙아들에게 치명적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로타 바이러스, 그런데 당시 신생아들 아기들 16명 중 13명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쌍둥이 중 한 명을 잃은 부모는 뒤늦게 자신의 아이가 '로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다른 병원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로타 바이러스로 인해 장염에 걸린 아이들이 설사로 인해 영양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 공급되는 것이 지질 영양제이다. 목동 이대 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을 두고, 일각에서는 '퍼펙트 사건'이라 한다고 한다. 즉, 더러운 가운, 치킨 등을 신생아실에서 시켜먹는 감염에 무지한 환경, 의료 수가를 핑계로 하나의 주사제를 나누어 공급하는 '분주'의 관행, 그리고 지질 영양제와 같은 변질되기 쉬운 주사제를 상온에 오랜 시간 방치해 두는 불철저한 의료 행위, 그리고 현장에서 이탈한 의료진과 부족한 일손으로 인한 코드 블루 상황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대처', 이 모든 것들이 아귀처럼 맞물려 4명의 신생아들에게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귀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원인을 초래한 당사자들은, 의사도, 간호사도, 병원도, 의료계도 그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법적인 건 물론, 도덕적인 책임조차 지려 하지 않는다. 이 사건만이 아니라 엑스레이 사진이 바뀌는 등 문제가 빈번했던 여전히 이대 목동 병원은 4년의 기한이 정해진 국제 의료 기관 평가 인증 병원이다. 의사는 책임 대신, 변호사를 통해 법적 책임을 피해갈 궁리만 한다. 의료계는 어떻게 우리 의사를! 이란 '특권'적 사고 방식에 사로 잡혀, 관행만을 핑계댄다. 아이들이 4 명이나 죽었지만,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단다. 심지어, 미숙아들은 잘 죽는다고, 세월호 부모들처럼 아이들 시체 장사를 한다고 '협잡'한다. 부모들은 말한다. 

“의사들이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의사들한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죠. ‘최선을 다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의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유가족들은

그 원인에 대해서 찾아갈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없다는 거예요”

-사망한 신생아 부모


최선을 다했다면, 아이들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러지는 않는다고. 오히려 '애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했을 거라고. 하지만, 여전히 특권은 기세 등등하고, 책임은 멀다. 지각있는 의료계 인사들은 안타까워한다. '관행'이라는 편의를 제쳐두고, 우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이대 목동 병원 사태의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또 다시 이와 같은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by meditator 2018. 4. 26. 16:09

우리 사회에서 '어른들의 사랑'이라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를까? 이른바 '막장'이란 단어로 축약되는 바람, 불륜, 복수 등등으로 이어지는 '치정'같은 것들이 아닐까. 그래서 '어른'들이 주요 시청층인 아침, 주말 드라마에는 이런 요소들이 들어가야 흥행이 이루어진다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이 '공식'에 충실히 따라 시청률을 견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 '속물 어른'들에 대한 '편견'을 축적시키는데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편견', 혹은 '선입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4월 24일 종영한 <키스 먼저 할까요>이다. 선정적(?)인 제목과 달리 드라마는 '어른됨'의 '사랑'을 논한다. 그리고 '어른'이라도 , 아니 '어른'이라서 '성숙'되고 더 '아름다운'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그래서일까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어른'의 '멜로'에 천착했던 드라마는 주중 1위의 독주를 안타깝게도 동시간대 1위를 타방송사에 내어주며 한 자리 수의 약소한 성취로 종영되었다. 하지만 시청률로만 다 평가할 수 없는 사랑의 '여운'은 <키스 먼저 할까요>을 이 봄, 오랜 여운이 남는 드라마로 이 드라마를 기억되게 할 것이다. 

'연민'인 줄 알았는데,
물론 <키스 먼저 할까요>의 시작도 '바람'인 듯 했다. 빌라의 아래 윗집에 사는 두 남녀, 손무한(감우성 분)과 안순진(김선아 분). 소개팅의 악연으로 시작하여, 고독사 해프닝으로 엮어진 이 남녀, 그런데 에필로그를 통해 이들의 오랜 인연, 그 사연이 풀어진다. 비행기 승무원이었던 안순진과 승객이었던 손무한은 기상 악화로 비행 난조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공감대로 만나지는 듯했다. 바람난 아내 때문에 가족과 이별을 하고 돌아오는 손무한과, 남편의 바람으로 역시나 상처를 입은 듯한 안순진은, 안순진의 자살 시도로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잊고 싶은 '인연의 실타래'로 엮이게 된 듯했다. 



하지만, 그 여느 '막장'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이들의 사연은 회를 거듭하면서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다른 각도의 이야기'에는 배유미 작가가 언제나 그래왔듯, 사회적인 해원이 가로놓여 있다. 배유미 작가는 그랬다. 2013년작 <스캔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에서도, 2015년 <애인있어요> 등에서도 결국 얽히고 섥힌 인간 관계, 남녀 관계, 그 궁극에 부도덕한 구악의 연원을 놓이게 했다. 하지만, 늘상 그랬듯이 배유미 작가는, 그 '악'을 궁극의 모순으로 자리하게 하지만, 그것에 천착하지 않는다. 그 '연원'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해결'에는 복잡한 인간사가 얽혀져, '인간'의 문제로 '치환'시켜내왔다. 

가해자와 피해자, 하지만 그들은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그 '관계'가 모호해지며, 그 '연원'의 해법을 복잡하게 하고, '인간적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마치 작가는 '인간사'가 그리 무 자르듯, 혹은 두부 썰듯 단호하게, 분명하게 설명될 수 없는 '복잡계'라고 늘 항변해 왔던 듯하다. 몇 차원의 함수보다도 복잡하고, 난해한 이 '얽힌 인연'의 '업보', 그래서 배유미 작가의 작품은 때론 '난해하고, '난감하며, 그 실타래를 풀다, 시청자들이 머리에 쥐가 날 정도의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키스 먼저 할까요> 역시 다르지 않았다. 배우자에 대한 배신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를 잃은 공감대에 대한 '연민'인 줄 알았던 사랑은, 손무한의 무조건적인 호혜, 그리고 그런 호혜를 오갈 데 없는 신세의 가장 적절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안순진의 욕망이 화답하며, 대뜸 키스 먼저 하고 동거의 수순을 밟으며 위태로운 동상이몽의 멜로로 전개되는 듯했다. 

서로를 책임지는 '어른'들의 사랑 
하지만, 그 '멜로'의 색채는 드라마의 중반부에 들어서며 색채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저 자기 처럼 불쌍하고 안됐어서 안순진을 거둔 것인 줄 알았던 손무한의 '베품'은 알고보니, 시한부라는 설정이 등장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안순진으로 하여금 생명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그녀가 빚을 져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딸 아이의 '의문사'가 있었다. 무책임했던 대기업의 분말로 된 어린이 식품, 바로 그 '돈'에 눈이 멀어 이미 외국에서는 판매가 금지된 제품의 유일한 희생자가 안순진의 딸이었으며, 그 대기업의 편에 서서, 아이들의 눈을 현혹시킨 광고를 만든 담당자가 바로 손무한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손무한의 사연이 밝혀지는 순간,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듯했던 손무한의 '사랑'은 결국 죽어가는 자의 속죄 의식으로 변모된다. 그리고 그 '속죄'의 내막을 안순진이 알게 되면서, '사랑'은 급격하게 '애증'으로 변해진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그 과정에서 지친 남편마저 외면했던 재판에 여전히 매달리는 안순진이, 바로 그 '공범'이었던 사람을 이미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 '딜레마'는 이미 그들의 '멜로'에 감정 이입했던 시청자들조차 당혹스럽게 만든다. 

따지고 보면 손무한이 무에 그리 죄될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건을 만든 당사자로 10 여년을 뻐튕기는 시간에, 겨우 아무 것도 모른 채 광고를 만들었다는 이유 만으로. 하지만, 작가는 바로 그런 손무한의 '좌절'을 통해, '도덕'의 범위를 묻는다. 그리고 기업만이 아니라, 그들의 공범자로 인해, 10 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안순진'과 같은 사람들은 지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강변한다. 

그리고 손무한의 '속죄'로 시작된 사랑은 결국 '책임'을 상징한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니가 아니라, 나 역시도 떳떳하지 않았다는 손무한의 책임 의식은, 그 개인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 그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 그 누구에게라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우리 모두가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낸 '공범'이라 작가는 손무한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결국 동시대적 책임론이다. 

하지만 '인간사' 자로 잰듯, 혹은 더하기 빼기로만 이루어 지지 않으니, '사랑'해서는 안되고, '속죄'만 해야 하는 대상을 손무한은 사랑하게 되었고, 증오해야 하는 대상에 이미 안순진은 너무 의지를 하고 말았다. 이런 얽힌 관계를 드라마는 '젖는다'로 표현한다. 10년 전 딸의 무덤에서 통곡하던 안순진, 그리고 다시 6년전 아무도 없는 동물원에서 하염없이 울다 자신의 손목을 그은 안순진, 그리고 다시 6년의 세월이 흘러서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안순진이, 포기할 수 없었던 안순진이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손무한에 젖어들어 그를 변화시켰다고. 



결국 시작은 포기할수 없었던 모성 안순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제 그만하라고, 잊으라고 하는 딸의 죽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안순진은 10여젼이 세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아, 길거리에 나앉게 생기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사랑'은 손무한을 변화시켰고, 결국 그녀의 '해원'을 풀 동지를 얻게 했다. 

<키스 먼저 할까요>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시대 '어른들의 사랑'은 '책임'이다. 어른들은 '키스'도 하고, '포옹'도 하고, '잠도 자는 어른들의 사랑을 한다. 하지만 육체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그들은 '어른'이기에 자신들의 삶을,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하는 이의 삶을 책임지고자 한다. 죽음 앞에 선 손무한이 그랬고, 애증의 고비를 넘은 안순진이 그랬다. 안순진으로 부터 비롯되어 변화한 손무한이, 인간적으로 안순진을 '사랑'의 관계로 거두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는 간접적이었더라도 그가 저지른 '사회적 범죄'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안순진도 마찬가지다. 증오해야 할 대상을 사랑해 버렸다는 자괴감에서 흔들렸던 그녀는 기꺼이 '적과의 동침'을 수용한다.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 속죄하는 손무한을 변화시켰듯, 삶의 끈을 놓아버린 그를 자기 밖에 모르는 '은둔형 도토리'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참사람'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저 시한부 앞에서 육체의 삶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더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든다.

그렇게 <키스 먼저 할까요>는 사적인 의도로 시작하여, 애증의 고비를 넘어, 용서와 화해, 그리고 책임의 용광로가 된 성숙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에 도달한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해 욕을 먹는 세상에서 에돌아 배유미 작가는 '어른됨'을 설파한다. 32부작, 시끌벅적한 사건 대신, 때론 난해하고, 곡해하기 어려웠던 두 남녀의 애증과 사랑을 그 눈빛만으로도 설득이 되는 감우성과 여전히 헌신적인 김선아라는 배우의 연기로 설득해 낸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운치있었던 연출과, 그 연출을 한껏 감성적으로 풀어낸 ost가 오랜 여운이 남는 어른들의 멜로를 완성한다. 모처럼 '어른스러운' 드라마였다.  

by meditator 2018. 4. 25. 05:36

매주 월요일, 제 자리로 돌아온 mbc스페셜은 세월호 4주기를 맞이하여 두 편의 특집을 마련하였다. 그 중 하나가 지난 월요일 방영한 끝나지 않은 세월호 학부모들의 이야기 <너를 보내고- 세월호 합창단의 노래>였다. 그리고 4월 23일,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현장의 이야기를 또 한 편 다룬다. 바로 그 바다의 목숨을 건 목격자였던 세월호 잠수사들의 이야기, <로그북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이다.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 밥을 먹어야 하는 건지 아니 먹어도 되는 건지 잠을 자도 되는 건지 모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조건 시신을, 아니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잠수사일기중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람들이 건물을 빠져나오기 위해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는 가운데 거슬러 건물을 올라가는 소방관의 모습이 담긴. 지난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 무역 센터(wtc) 건물에 비행기로 추정되는 두 대의 검은 물체가 곧장 날아와 부딪쳤다. 건물은 연달아 폭발했고, 무너져내렸다. 이 사건으로 납치된 여행기 승객과 건물에 있던 사람들 등 3500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에는 구조 활동 중에 순직한 343 명의 소방관과 23명의 경찰이 있었다. 1차 폭격이 있은 이후 발빠르게 불을 끄기 위해 1번 빌딩에 들어간, 그리고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2번 빌딩에 들어간 건물이 붕괴된다는 무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소방관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 재난 사고에서 발빠르게 움직인 '공권력'으로 인해 미국 국민들은 '국가는 위기에서 절대 국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확인했다. 

70일간의 로그북, 헌신의 시간 
재난의 현장에 제일 먼저 간 '공권력', 우리는 어땠을까? 4년 전 그날 바다에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발빠르게 뛰어든 건 민간 잠수사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불성설'이다. 국가 재난의 현장에, 무기력했거나, 사건을 은폐하려는 공권력과,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썼던 민간인들, '세월호'를 통해 국민들이 던진 질문, '이게 국가냐'라는 걸 현장에서 증명해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증명'의 기록은 지난 4년의 시간 동안 희미해졌다. 그들은 '논란'의 주인공이 되어 조용히 사라졌다. 

mbc스페셜은 그 '사라진 기억'을, 하지만 끝나지 않은 '기억'의 봉인을 푼다. 잠수사들이 잠수를 하고 나서 남긴 기록, 잠수일지. 일명 로그북, 잠수했던 날짜, 장소, 시간, 입수지점, 수심, 기온, 특기 사항을 적은 이 기록들, 하지만 잠수사들은 차마 그 기록들을 공개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큐는 70여 일간 잠수사들의 로그북을 기초로 하여, 세월호 현장, 가장 처절한 목격자였던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복원한다. 

다섯 구의 시신을 인도하고 올라오니 감독관 “사람이 더 있드나” “더 확인해봐야 알겠습니다.” 수고했고 실종자 가족이 물속에 상황을 듣고 싶어 하니 가서 얘기해 줘라.” 저 편에 열 명쯤 되어 보이는 실종자 가족이 보인다.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의 충혈 된 애타는 눈빛을 보니 내 눈시울도 젖어온다.
어찌 얘기를 해야 될는지 - 잠수사의 일기 중

2014년 4월 세월호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을 듣고 전광근씨는 장비를 챙겨 참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천안함 인양에 참가했던 경험이 있던 그는 현장에서의 잠수가 용이치 않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아이들의 아버지 황병주 씨, 해병대 출신의 한재명씨, 대학때부터 취미로 다이빙을 배운 백인탁 씨등 그저 자신의 '잠수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만으로 다수의 잠수사들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현장은 '구조'라고 말하기도 무색하게 체계도, 장비도 갖추어 지지 않은 상태였다. 많은 잠수사들이 '의욕'만 가진 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다. 사고 초기 잠수를 할 수 있었던 잠수사는 10명 정도 밖에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민간 잠수사들이 중심이 되어 유족들과 함께 수색 작업이 체계를 만들며 수색에 돌입하고. 잠수라는 작업은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과정이다. 그래서 산업 현장 등에서 잠수사들은 하루 한번 잠수를 한다. 잠수를 하는 과정도 서서히 수압을 조절하며 내려갔다 조심스레 올라와 감압 탱크에 재빠르게 들어가야 하는 섬세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잠수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오늘 수습한 희생자의 얼굴과 눈동자, 차디찬 하얀 손과 발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환영으로 비추어진다. " - 2014. 04. 26 잠수사 로그북 중

하지만 세월호 현장에서는 이 '원칙'을 지킬 수가 없었다. 참혹하게 뒤엉켜 있는 희생자들,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유족들, 그 현장의 목격자가 된 잠수부들은 하루 한번이라는 원칙이 무색하게 4번까지의 잠수를 감행했고, 수색이 어려운 세월호에서 하나의 시신이라도 더 올려오기 위해 보조 장치도 포기한 채 무리한 잠수를 감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잠수부들의 열의와 헌신에 대해 세상의 평가는 냉정했다. 초기와 달리 점차 성과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현장에 대해 불만이 터져 나왔고, 잠수부들의 헌신을 '돈'으로 비아냥거리는 시선마저 등장했다. 장기화된 수색,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료 잠수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고, 7월 10일 미수습자 11명을 남겨놓은 가운데, 해경은 잠수부와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이들의 철수를 결정했다. 

여전히 그 '바다'에 잠겨있는 잠수부들 
그렇게 세월호 수색에 참가했던 민간 잠수부들은 '불명예'스럽게 세월호 현장에서 나왔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유족들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여전히 그 '바다'에 있다. 차마 부모들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세월호 현장, 그 현장에서 오로지 한 명의 시신이라도 더 가족 품으로 보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위험을 무릎쓰고 바다로 뛰어들었던 잠수부들, 하지만 그 '무리했던' 여정이 그 이후 그들에게 고스란히 고통으로 돌아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잠수사 일기 중

눈만 감으면 다시 그 바다에 있다고 했다. 차라리 눈 앞에 아이들이 보이면 괜찮다고 했다. 처음엔 아이들의 형체로, 그 다음에 '시신'의 냄새로 더듬어 수색을 했어야 했던 그 경험은, 이제 그들에게 암흑 속 막연한 공포의 기억으로 남았다. 불안 장애, 우울증, 수면 장애, 심지어 자살 충도에 시달리며, '세월호 이전의 나'를 잃어갔다. 누군가는 잠수사 일을 그만두었고, 늘상 화를 내는 등 성격이 변해 가족들을 걱정시킨다. 무리한 잠수로 신장병이 악화되어 투석을 하게 되었고, 세상의 차가운 시선에 '한국이 싫어' 외국을 전전하기도 한다. 결국 잠수사들 중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을 만난 정혜신 박사는 이들이 겪는 고통을 '죽음 각인'이라는 병명으로 답한다. 죽음이 일상화된 현장 속에 놓여졌던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그 경계 너머로 자신을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를 만나 그 말에 비로소 눈물을 터트리는 이들, 그들의 '트라우마'는 깊었다. 그리고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국가 재난 사태에 '의인'으로 참가한 이들에 대한 '국가'의 부채이다. 

9.11 테러로 순직한 소방관들은 'FNDY 343 NEVER FORGET'이란 문구로 새겨져 기억된다. 2005년부터는 소방관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이들이 올라갔던 쌍둥이 빌딩과 같은 110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는 행사를 하며 '추모'의 정신을 이어간다. 우리는 어떨까? 그날, 그 바다에서 '국가'를 대신했던 민간 잠수사들. 민주당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민간 잠수사들을 '세월호 희생자 특별법'의 대상자에 포함시킨다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하지만 한국당 의원들의 반대로 아직도 국회 계류 중이다. 세월호 4주기, 국가의 재난 현장에 발빠르게 달려왔던 잠수사는 말한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아마도 그곳에 가지 않을 거라고. 국가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놓은 이들 민간 잠수사들에게 '국가'가 답해야 할 차례라고 다큐는 말한다. 
by meditator 2018. 4. 24. 15:35

ocn의 장르물 <작은 신의 아이들>이 3.926%, 자체 최고 시청률로 종영했다.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수치 상으로만 보면 그간 ocn 장르물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첫 회 2.54%로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호조를 보인 결과물이다. 시청률의 순조로웠던 상승세는 물론, <작은 신의 아이들>이 시도했던 신선했던 과학과 무속의 콜라보는 어쩐지 이 한 시리즈로 끝내기엔 아쉽단 생각이 든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 중심에 '신',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놓여져 있다. 20년 전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한 종말론자들의 집단 자살극, 그 '원죄'의 현장으로 부터 실타래를 풀어간 드라마는 그 '집단 자살극'을 유도한, 아니 정확하게는 '집단 자살'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들의 범죄의 탈출구를 만든 '종교'를 이용한 세력에 대한 '징죄'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각도에서는 그런 '종교'의 '혹세무민'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의 '해원'의 과정이기도 하다. 



혹세무민, 그 뿌리깊은 연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까지 간청했던 선산까지 팔아먹으며 일확천금을 꿈꾸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망한 예배당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없는 교회는 그에게 '목사님'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고, 어느 틈에 그는 그 자신이 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갈 곳없는 고아들과,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세상이 외면한 처지를 거두었던 왕목사(장광 분), 그는 2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어버이'연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그의 온갖 비리를 함께 하며 성장한 백도규 회장(이효정 분)이 있었다. 20년 전에도 그들의 '왕국'은 건실했다. 하지만, 그 '왕국'의 실체를 깨닫게 된 신도들이 투서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때까지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투서'의 목적지가 잘못되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용'이 되고 싶었던 남자, 국한주(이재용 분) 검사, 세상은 그를 가난한 이들의 청원을 들어주는 의로운 사람이라 했지만, 그에게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입신양명'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천인 교회의 투서를 받은 국한주는 억울하게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신도들을 구제하는 대신, 왕목사를 찾아가 '딜'을 한다. 그리고 왕목사와 국한주, 그들의 '협잡'의 결과는 20년전 참혹한 집단 자살극이었다. 

<작은 신의 아이들> 속 왕목사, 백도규, 국한주,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었던 김단의 아빠, 김호기(안길강 분)의 모습은 특정 교파, 특정인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만들어 낸 '괴물 아버지'들의 상징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 가난한 환경을 딛고 '성공'을 하고, '부'을 추구했던 그들은,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기꺼이 자기 자신,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타인'을 제물로 삼았다. 그 결과 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있었지만, 그 성공의 역사는 희생자의 핏빛으로 얼룩져 있다. 



작은 신의 아이들, 그 묵직했던 해원 
이렇게 성공의 신화, 그러나 괴물이 된 아버지들의 세대에 의해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왕목사가 그러모아 신약 개발의 실험 마루타가 되었던 아이들, 하지만 왕목사의 한 마디 말에, 그리고 그 반대였던 백도규와 김집사의 잔혹했던 학대에 길들여 졌던 아이들, 그들 중 누군가는 공범자로 살아남아 오른팔이 되었고, 누군가는 용병처럼 희생되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겨우 도망쳐 살아남아 그 기억을 잃었다. 

그렇게 왕목사가 스스로 신인 연 했던 천인 교회의 고아들은, 이제 그 실체를 파헤치다 동생이 희생된 또 다른 희생자 천재인(강지환 분)과 동료 형사인 김단(김옥분 분)으로, 그의 적인 검사 주하민(심희섭 분)으로 조우하게 된다. 

이렇게 20년전 집단 학살극의 해원을 풀어가기 위해 <작은 신의 아이들>이 차용한 캐릭터는, 대한민국 10대 미제 사건 중 3을 해결한 아이큐 167에 모든 것을 '과학적 지식'을 설명하고자 하는 '과학주의자' 천재인과, 그와 정반대의 무당의 손녀로 그녀에게 나타난 무속의 끼를 피하기 위해 천인 교회 복지원으로 갔던 김단이다. 이 정반대의 캐릭터는 드라마 초반 연쇄 살인마 한상구(김동영 분)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의혹과 불신, 불협화음을 넘어, 가족을 잃었다는 동지애로 뭉쳐,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파트너로 16부의 여정을 통해 도달했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성취한 동지애에 기반한 불협화음같으면서도 적재적소에서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는 과학과 무속의 콜라보가 1회성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마치 <엑스맨; 더 퍼스트 클래스>처럼 두 형사 천재인과 김단이 서로를 동지로써 수용하는 과정의 전사를 다룬다. 과학으로 실증되지 않는 현상을 믿지 못하는 형사 천재인이 동료로써, 그리고 무속인으로써 김단을 수용하고, 함께 하는 과정이며, 두 사람 모두가 동생을 잃고, 아버지를 잃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딛고 경찰로서의 자신의 책무와 무속적 능력을 받아들이는 자기 확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캐릭터로서의 '과학'과 '무속'의 만남을 기대하며 
16회, 빌딩의 옥상으로 상대편 대통령 후보의 위협이 되는 노조원들을 모아 20년 전과 같은 집단 투신극을 재연하려는 왕목사와 그의 열혈 광신도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천재인과 김단이 현장으로 간다. 그 과정에서 천재인은 비품 창고에 있던 재료를 끌어모아 임시방편의 폭발물을 만들고, 그 폭발물을 터트리며 빌딩 옥상으로 진입한 김단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예의 무속적 기시감으로 왕목사의 실체를 파헤치며 그의 허를 찌른다. 

엄밀하게 천재인의 캐릭터는 아주 새로운 캐릭터는 아니다. 과학을 신봉하고,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사건을 해결하려 드는 캐릭터의 장르물 주인공은 이전에도 있어왔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과학 신봉주의자와 호흡을 맞춘 상대방은 '감성'이라던가, '공감력'을 무기로 들고 왔던 것과 달리, <작은 신의 아이들>은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 김옥빈의 '접신'이라는 신선한 콘텐츠를 들고 나오며, 기존 캐릭터들과의 변별력을 확실하게 했다. 그러기에, 각자의 전사를 해결하고 비로소 자신의 능력치와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보한 이들의 캐릭터를 한 시리즈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쉽게 여겨진다. 

또한 동지인지, 연민인지, 혹은 가끔은 남여 관계인지 모를 천재인과 김단, 두 사람의 허허실실 파트너 쉽과 긴장 관계를 이룬 어린 시절 친구인지, 첫사랑인지, 생명의 은인인지 모를 검사 주아민의 묘한 모성 본능을 자아내는 캐릭터는 비록 마지막 엔딩에서 흐뭇하게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지만, 여운이 길다. 아니 남녀 관계만이 아니라, 검사로서 형사 천재인에 필적했던 그의 지략 역시 아깝다. 이들 세 사람의 삼각 관계인지, 동지인지, 애증인지 모를 모호한 긴장 관계 역시, 그 다음의 여정이 기다려진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그 제목에 걸맞게 아이들을 희생시켰던 사이비 종교 집단, 아니 종교를 명목으로 입신양명에 몰두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징죄, 그리고 사라진 이들에 대한 복원이라는 그 애초의 주제에 충실하게 마무리되었다. 하늘의 대리인으로 또 다시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나라의 패권마저 넘보던 이들은 '심판'되었다. 그리고 20년전 희생된 31명의 희생자들은 그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았다. 그들과 함께, 자신들의 트라우마에서 주인공들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트라우마'의 해원이 아닌, 그들 각자의 장기를 가진, 천재인의 과학과 김단의 무속, 맛보기가 아닌 그들의 본격적인 활약이 기대된다. 무엇보다 장르물에서 어렵사리 복원된 '무속'의 매력적 활동이 좀 더 펼쳐졌으면 한다. 

by meditator 2018. 4. 23. 15:20

이전에도 썼지만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익숙한 화법과 전혀 다른 '이방의 언어'는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그래서 종종 '난독'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론 모호하고 때론 기괴한 언어들이 도달하는 곳이 결국은 인류 보편의 감성과 주제 의식이라는 걸,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일깨워 준다.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던 추리 소설가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영광의 콩쿠르 상을 안긴 <오르부와르>를 원작으로 한다. 오르부아르au revoir은 영어의 good bye와 같은 프랑스의 또 보자는 뜻의 인삿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제목 '오르부아'에는 보다 처절한 역사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르부아'로 번역된 소설에는 là-haut가 생략되어 있다. au revoir  là-haut는 '천국에서 만나요'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1차 대전 당시 국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라는 군인이 죽기 전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문구에서 인용한 말이다. 

전쟁의 볼모가 된 병사들 
프랑스는 1차 대전 당시 명령 불복종, 자해, 탈주, 비겁 행위, 반란 등의 명목으로 2천 4백 여명의 변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 중 6백 여 명이 실제로 총살되고, 나머지는 강제 노역형을 치뤘다. 과연 사형이 선고된 2천 4백 여명의 병사들은 죄가 있었을까? 아내에게 천국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남기고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의 그 유언과 같은 문구를 100년 뒤 피에르 르메트르는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으며, 전쟁터에서 명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병사들을 '볼모'로 '희생'시킨 국가, 전쟁에 대한 회의적 반문을 한다. 

그리고 그 '반문'을 위해 영화는 1차 대전의 종전을 앞둔 113고지의 전선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장훈 감독의 2011년 영화 <고지전>과 같은 아군의 시체에 난 총상에 대한 의문스런 상황이 벌어진다. 전쟁이 이제 더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병사들은 더는 총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전쟁의 종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잃고 싶지 않은 중위 프라델(로랭 라피테 분)은 가장 나이많은 병사와 가장 어린 병사 두 사람을 척후병으로 내보내고,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의 생명은 종식된 전쟁을 아수라장의 전장으로 복귀시킨다. 

명령에 따라 총검을 들고 참호 밖으로 나와 전진해야 하는 병사들, 그리고 하늘을 뒤덮는 포탄의 세례 속에서 알베르(알베르 뒤퐁텔 분)는 말과 함께 매몰되는 처지에 빠졌고, 말 때문에 겨우 숨을 쉴 수 있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그를 동료 병사였던 에두아르(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가 끌어당겨 구한다. 하지만 동료의 생명을 구명하는 그 에두아르의 행위는 곧 그를 포탄의 저격 대상으로 만들고, 한 발의 포탄과 함께 그는 날라가 버린다. 다시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얼굴의 반을 가린 두건이 피로 흥건한 병원의 침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몰핀을 훔쳐가며 죽어가는, 아니 죽고 싶어하는 그를 간곡하게 간호하는 알베르가 있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파리로 돌아오지만 결코 그들은 전쟁 전의 그들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은행 출납원이었던 알베르에게는 다시 은행의 안정적인 일자리는 보장되지 않았고, 전 애인 마저 외면한 엘리베이터맨에서, 광고 샌드위치 맨으로 신분이 하락세를 탄다. 그래도 알베르에겐 멀쩡한 신체가 있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조잡한 가면과, 보장할 수 없는 재건 수술마저 거부한 에두아르는 알베르가 훔쳐오다시피한 몰핀에 의존하여 버텨가는 절망의 나날만이 있었다. 

세 남자의 끝나지 않는 전쟁
영화는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각자의 의미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세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과 전쟁의 상흔을 '소비'하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통찰이 있다. 전쟁을 도발하면서까지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집착했던 프라델은 '전쟁'의 상흔에 감성팔이하는 사회를 이용하여, 병사들의 이장과 매장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 그렇게 '전쟁'을 통해 '입신양명'을 꿈꾸는 프라델의 맞은 편에는 전쟁터에서 부터 그의 '반국가적, 반인권적 행위'의 목격자가 된,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처지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알베르가 있다. 그리고 '상이용사'로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하거나, 자신을 그런 처지로 만든 국가와 사회에 대해,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재물로 삼으려는 에두아르가 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을 국가를, 그리고 '전쟁'을 감성적으로 소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벌인다. 그들의 의도야 어떻든 그들은 '사기'의 주범이 되고, 하지만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런 사기극에 기꺼이 마음과 돈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을 재목이 아니라며 어릴 적부터 외면해오다, 뒤늦게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 대한 회한으로 거금의 기념비 사업 자금을 낸 에두아르의 아버지 페리쿠르도 있다. 



돈으로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보상하고,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눈먼 돈'을 활용해 자신의 발판으로 삼거나, 궁극의 가난으로 부터 도피하고, 자신을 상이군으로 만든 사회를 징죄하고 도발하고자 하는 세 남자들, 그들이 사기친 돈을 그들을 구제했을까? 사기로 원하던 돈을 받아들고 기뻐하던 알베르, 그런 알베르에게 에두아르는 자기가 돈을 조금 써도 되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네가 번 돈이니 얼마든지 쓰라는 알베르의 답, 조금 후 에두아르는 그의 기막힌 예술적 재능으로 돈다발을 갈기털이 휘날리는 멋들어진 사자 가면으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에두아르에게 돈의 효용은 거기까지였다. 파리의 가장 화려한 호텔에서 벌인 파티도, 알베르가 권유한 돈을 갖고 식민지로의 도피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무엇으로도 회복될 수 없는 트라우마 
한 판의 사기극 이후에 화려한 새의 가면을 쓴 채 공허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에두아르. 그의 심정은 결국 물질적 대가로는 회복되어질 수 없는 '사회적 트라우마'의 명징한 상징이다. 최근 4주기를 맞이한 세월호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재연되고 있는 '지겹다'는 돌림 노래에 대한 삼풍 백화점 참사 피해자의 호소문 속 심정과도 같다. 

나는 이런 종류의 불행과 맞바꿀만한 보상금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나 역시 당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 돈이 그 후의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을 피하고 그 돈을 안 받을 수 있다면, 아니 내가 받은 보상금의 열배를 주고라도 그 일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열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당신들은 모른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런 사건 사고가,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틀어놓는지. 사고 이후로 나는 세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눈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본 후로 나는 세상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고 언제나 죽음은 생의 불안을 잠재울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그깟 돈이 삶의 이유가 되어 줄 수 있을까.-산만언니, 딴지 일보 

어린 소녀의 공감어린 위로도, 알베르의 우정도, 사기를 통해 획득한 일확천금도, 그리고 그 사기의 목적이었던 사회와 국가,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조소와 복수도 에두아르의 삶을 회복하지는 못한다. 원작과 달리, 하지만 원작자인 피에르 르메트르가 감탄할 만큼 외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는 그의 남은 생을 재촉하는 것으로 영화는 전쟁의 트라우마의 강렬함을 극대화시킨다. 알베르의 오랜 숙원이었던 죽어간 전우에 대한 숙제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던 '흙의 매몰'이 대신해 준다. 그리고 뒤늦게 완수한 그의 임무가 식민지에서의 그의 체포에 대한 면죄부가 된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를 불러온 에두아르의 재능은 아름답고, 절묘하고, 때론 기괴하기 까지 한 그의 가면으로 빛난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재능과 삶을 빼앗아 간 프랑스 사회에 대한 대국민 사기극의 수단이 된다. 아름답고 처연한 가면극과 미술적 재능을 군불 삼아 피어난 사기극의 여정이 향하는 건, 결국 '전쟁'에 대한 질문이다. '전쟁'이, 전쟁과 같은 사회적 트라우마를 낳는 사건들이 인간을, 사회를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한, 그럼에도 여전히 그에 대해 무신경한 사회에 대한 냉소이다. 1920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전쟁 후 그 전쟁을 잊어버리고자 요동쳤던 프랑스 사회를 관통한 갖가지 사기극이 도달하는 건, 1차 대전으로 상징된 사회적 참사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왜곡된 세 남자의 생애가 벌인 때론 우스꽝스럽고, 슬프며, 기괴했던 여정이 도달하는 건 가장 원론적인 '인간 사회'의 문제이자, 도덕적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8. 4. 21. 19:19

어쩌면 오늘 당신이 들른 가게에서 따로 돈을 받지 않고 물건을 비닐 봉투에 넣어주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을 지도 모른다. 공짜로 챙긴 비닐 봉투라고. 지난 2013년에 편의점에서 비닐 봉투를 놓고 실랑이하다 아르바이트 생을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비닐' 인심이 후하다. 마트에서 비닐 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비닐 포장 유료가 시행됐지만, 그게 얼마나 눈가리고 아웅인지는 아일랜드의 20배, 핀란드의 100배에 달하는 1년에 211억장의 비닐 봉투를 쓰는 우리 나라의 현실에 그대로 드러난다. 2015년 기준 연간 일인당 420개의 비닐을 사용하는 나라, 하지만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비닐의 여정에 대해 우리는 무지했다. 


지난 해 7월 중국이 갑작스레 폐비닐과 종이 쓰레기 수입 중단을 발표하고, 그 여파로 비닐 수거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 파장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저 분리수거라도 제대로 해서 버리면 내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무한정 버렸던 비닐, 그 비닐의 여정을 다룬 한 편의 다큐가 있다. 그 다큐가 다룬 비닐의 여정은 나비의 날개짓처럼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고, 버려왔던 비닐의 국가간 커넥션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살은 결국 중국 정부로 하여금 세계의 폐비닐과 종이 쓰레기 수입 금지라는 거대한 토네이도를 몰고왔다. 



플라스틱 비닐의 여정, 그 종착지 중국
우리나라에서 <플라스틱 차이나>로 번역된 왕구량 감독의 다큐 원제는 <소료 왕국(塑料王國)>이다. 여기서 소료는 중국어로 플라스틱을 뜻한다. 우리가 물건을 사고 쉽게 포장재로 사용하고 있는 비닐은 그 원료가 플라스틱이다. 석유로 부터 만들어지는 플라스틱은 가공 여부에 따라 여러가지로 만들어 진다. 그 중 비닐로 만들어 지는 건 열에 강한 고분자 화합물인 폴리에틸렌이다. 폴리 에틸렌은 땅에 매립해도 잘 썩지 않고, 소각할 경우 인체에 해로운 성분인 다이옥신이 발생한다. 재활용율도 26%에 불과하며, 처리 비용도 많이 든다. 

영화는 컨테이너가 적재된 배의 항해로 부터 시작된다. 여러 나라 들간의 수입과 수출, 그 물류의 상징인 컨테이너, 그 중 하나가 항구에서 내려져 중국 산둥성의 작은 마을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건, 거대한 산, 페플라스틱, 비닐로 이루어진 첩첩의 산이다. 그리고 그곳에 컨네이너 안에 들어있던 폐비닐이 산 하나를 더한다. 

중국은 세계 폐플라스틱 비닐의 56%를 수입하는 쓰레기 수입 국가였다. 2016년에만 중국은 730만톤(31억 달러)의 쓰레기를 수입했다. 영국의 폐지 55%, 플라스틱 25%, 미국의 전체 쓰레기 중 78%는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이런 중국의 폐기물 수입이 지난 30년간 중국의 '고도 성장'을 뒷받침해왔다. 중국은 이런 고체 폐기물을 수입하여 부족한 자원으로 활용했다. 미국에서 수입된 캔은 의류와 기계 제작용 금속이 되었고, 폐지는 포장재로 재활용되었다. 



영화는 바로 이런 쓰레기 수입 국가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지켜본다. 수입된 쓰레기가 도착한 산둥성의 쓰레기 산, 그곳은 쓰촨성에서 농사를 짓던 열 한 살 소녀 '이제'네의 집이다. 이제네 아버지는 그 쓰레기 수입 업자의 일용직 노동자로 하루 일당 7500원을 받으며 이제네 가족을 책임진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고용된 건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도, 엄마도, 그리고 이제 갓 열 살 남짓한 이제도, 이제의 동생도 모두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맨 손으로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관절염으로 힘든 농사일을 견디기 힘든 아버지가 선택한 쓰레기 재활용 업장의 일은, 아버지에겐 그저 농사일보다 조금 덜 몸이 고된 일로 여겨질 뿐이다. 병원 폐기물에서 부터, 온갖 오물이 범벅이 된 플라스틱 비닐 쓰레기 더미는 이제네 가족의 터전이다. 그곳에서 이제네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겨우 일당 7500원에, 때마다 술을 먹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하느라 아이들 학교조차 보낼 혀편이 안되는 이제네 아이들은 보물창고 같은 쓰레기 더미에서 놀 거리를 찾고, 때론 배울 거리마저 찾으며 살아간다. 마치 농부가 자연에서 그 삶을 일궈내듯, 이제네 가족은 쓰레기 더미에서 가족의 삶을 일궈낸다. 그리고 그건 갑과 을의 처지라지만, 이제네 아빠를 고용한 사장 역시 마찬가지다. 

플라스틱 비닐의 터전에서 삶을 일구어 가는 사람들
보통의 사람들처럼 쓰레기 더미를 삶의 터전으로 알고,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미래를 기약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 이들은 그들의 터전인 그 플라스틱 비닐 산이 가진 '함정'에 무지하다. '갑'인 사장은 해가 갈수록 시름시름 앓지만, 혹시라도 가장인 자신이 아파서 가족을 돌보지 못할까봐 병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제네 아버지의 고민은 하잘 것없는 월급으로 아이들 학교는 커녕, 고향조차 갈 수 없는 가난한 처지이지, 그들이 먹고 자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태울 때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버리고, 물고기가 배를 드러내고 죽어가는 폐비닐더미가 아니다. 

영화는 담담하게 비닐 더미가 밭이 되고, 논이 되기라도 하듯, 그곳에서 삶을 일구어 가는 이제네와 수입업자인 사장네 가족의 일상을 들여다 본다.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돈을 만들고, 그 돈으로 가족의 안녕과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라는 소박한 소망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그 폐비닐 자체가 자신들의 삶을 보장하는 '환금성 작물'일 뿐, 그곳이 자신들의, 자기 자식들의 삶을, 미래를 갉아먹을 늪과 같은 대상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바로 그런 모습이 지난 30년간 환경에 무지했던 중국, 그리고 그 무지한 국민들을 이용하여 쓰레기 산업으로 성장을 이룩해 온 중국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런 왕구량 감독의 주제 의식은 영화의 개봉과 함께 중국 사회를 강타했고, 그 결과 중국은 2017년 세계 무역 기구에 '고체 폐기물 수입 금지 조치'를 시행하겠다고 통보했다. 



여전히 관성적인 우리의 플라스틱 비닐 과소비에 대한 경각심을
시간과 장소를 바꿀 뿐, 쉬이 사라지지 않는 플라스틱 비닐, 그 쓰레기를 용광로처럼 집어 삼키던 중국이 더는 그 역할을 하지 않겠다 선언하자, 그건 곧 세계의 문제가 되었다. 쓰레기를 외주했던 서구 및 우리나라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이런 중국의 조처에 영국은 25개년 계획을 통해 쓰레기 감소 계획을 세우고, 유럽 연합은 2018년까지 비닐 봉투의 80%를 감소하고자 한다. 즉, 자원 구조에 대한 근본적 제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이 세계 최대의 쓰레기 수입 국가였다는 충격적 오명도 잠시, 그 쓰레기 대란은 고스란히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중국이 '소화'해 주지 않는 쓰레기는 각 지자체에서 소화 불량이 되어, 비닐 수거 거부로 나타났다. 난항 끝에 다시 재개된 비닐 분리 수거, 그저 가져가지 않던 비닐을 다시 가져갔으니 이젠 한숨을 쉴 뿐이다. 마트에서 비닐봉투를 주지 않는다지만, 코너마다 즐비하게 마련되어 있는 비닐 포장재 롤은 여전하다. 

<플라스틱 차이나>에 대한 감상은 쓰레기로 고도 성장을 이룬 중국의 이면에 대한 혀를 차는 것이서는 안된다. 여전히 우리가 '과소비'하고 있는 플라스틱 비닐 사용에 대한 경각심의 계기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원 재활용에 대한 구조적 고민을 해야 하는 근본적 질문이 되어야 한다.
by meditator 2018. 4. 20. 05:21

군부 독재 시절, 하루 아침에 금쪽같은 아이들을 차디찬 감옥으로 빼앗긴 부모들은 아이들을 대신하여 거리에 섰었다. 1974년 민청학년 사건을 계기로 모인 부모들은 1986년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을 계리로 '민가협'을 결성하고 우리 사회 양심수 문제에 앞장서 왔다. 그렇게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민주화에 앞장선 자식들을 둔 부모들을 아이들과 함께 그 대열에 서게 만든 역사였다. 그런데, 세월은 흐르고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는데, 이제 또 부모들은 거리로 나선다. 심지어 차가운 거리에서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는 이 부모들의 아이들은 돌아올 수 없다. 다큐를 연 건, 징하게도 추웠던 지난 겨울, 안산에서 고공 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을 방문하여 응원의 노래를 부르는 416합창단으로 부터 시작된다. 2014년 4월 16일, 그로부터 4년 아이들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부모들은 그 '참척'의 고통을 '연대'로 승화시킨다. 대한민국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지만, 여전히 그 '역사'는 자식들을 제물로 삼았고, 부모들은 '세상의 정의'를 묻기 위해 여전히 거리로 나선다. 2018년에도. 




4년이나 지났다. 혹자는 그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배도 어렵사리 땅 위로 올라왔고. 2014년 그 날 이래, 늘 '세월호'를 따라다니는 건, 이제 그만하면 됐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 <mbc스페셜>은 당사자 부모들을 만나러 간다.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아무도 외롭지 않게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아무도 외롭지 않게 
일 년이 가도 십 년이 가도 
아니 더 많은 세월 흘러도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우리 가슴에 새겨놓을게    -<잊지않을게> 중에서 

그 날의 부모들,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다 
안산의 성당 한 켠에 마련된 컨테이너 박스, 모처럼 그곳에 모인 부모들 사이에 활기가 넘친다. 세상은 이제 그만 보내주라는 시간, 세월호 학부모들과 시민 단원들이 입을 모아 만든 416 합창단에 새로운 학부모 단원 두 분이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서로 앞집뒷집 하며 소개를 하며 쑥쓰러운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단원들, 

엄마는 말한다. 숨을 쉬기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이라고. 그 날 이후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엄마는 도저히 맞물려 들어갈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함께 웃을 수도, 그렇다고 다른 표정을 지으면 티를 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집 밖으로 한 걸음 나오기가 무서운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이곳은 '숨통'이다. 벌써 4년, 세상은 이제 그만 놓아주라는데 엄마는 한 달에 두번 들르는 강원도 산골 산사에서 아이의 사진을 부등켜 안고 한번만 너를 안아봤으면 좋겠다고 울음을 토해 놓는다. 아이를 생각해서 시를 지어준 시인이 눈이 오면 아이가 오는 것이라 했다고, 아빠는 노래를 부르다 말고 눈이 오는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아이를 맞는다. 옴팍 쇠어버린 흰 머리로 매일 오후 4시 19분이면 자신이 하는 세월호 방송을 통해 묵념의 시간을 놓치지 않는 아버지도 있다. 세상은 무뎌가지만, 부모들은 여전히 그 날, 그 바다에 있다. 

처음부터 노래를 부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세월호 500일 각지에서 보내주신 성원에 조금이나도 답을 해볼까 시작했던 노래다. 합창단이라고 해서 정식의 합창단과 같은 형식과 절차를 밟지 않는다. 함께 노래를 부르지만 가창력이나, 파트에 어울리는 톤이 합창단의 요건이 아니다. 그저 함께 마음을 모을 수 있다면, 이곳에서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그뿐이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 뭉친 부모들은 이제 어디라도 간다. 고공 농성의 현장에도, 쌍용 자동차 현장에도, 그리고 각종 세월호와 관련된 집회에. 노란 파카를 입은 부모들은 그 어디라도, 어떤 영하의 혹한이라도  두렵지 않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 다> 중에서 


아버지는 안산의 합동 분향소에 딱 한번 갔었다. 그곳에 있는 304명의 아이들의 이름을 다 불러주었었다. 그리곤 다짐했다. 그 날의 진실을 밝히고 다시 너희들을 만나러 오겠다고. 하지만 그로부터 4년, 세상은 이제 그만 놓아주라는 시간, 엄마는 말한다. 밝혀진 건 없다고. 심지어 새 정부가 들어서니, 정부가 알아서 할테니 라며 부모들이 나서는 걸 저어하는 사람들조차 생겼다고. 정부의 처분만을 바라는 '희망 고문'의 시간, 하지만 부모들은 말한다. 세월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루어진 건 없다고. 이제서야 그날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무엇을 했는지가 드러나는 시간, 지치고 힘들지만 포기할 수 없는 부모들의 심정은 그들이 4주기 추모곡으로 선정한 <너를 보내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구름낀 하늘은 왠지
네가 살고 있는 나라일 것 같아서
창문들마저도 닫지 못하고
하루종일 서성이며 있었지
삶의 작은 문턱조차 쉽사리
넘지 못했던 너에게 나는
무슨말이 하고 파서 였을까
먼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 내게 시간은 그만
놓아주라는데
난 왜 너 닮은 목소리마저
가슴에 품고도 같이가자 하지 못했나

다큐가 보여주는 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숨을 쉬는 부모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전히 아이들만 떠올리면 눈물이 차오는 부모들, 그 모습에서 여전히 우리 사회가 배를 바다 위로 올렸지만, 세월호와 관련하여 그 날의 진실은 물론, 피해 관련자들에 대한 어떤 치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려 피해자인 사람들이 스스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뭉쳐 거리로 나서고, 스스로 함께 다독이며 추스리는 상황, 그건 여전히 우리가 사회적 재난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되돌아 보면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을 다큐는 절감하게 한다. 벌써 4년이라지만. 4년 아니라, 40년이 걸려도 아버지가 다시 아이들의 이름을 당당히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부모님들의 노래가 더 이상 눈물로 적셔지지 않을 때까지, 세월호의 진실 규명은 멈춰져서는 안된다는 지긋한 목소리, 4월 16일 mbc스페셜이다. 


by meditator 2018. 4. 17. 15:09

4월 15일 <sbs스페셜>은 '먹튀 논란'에 시달리는 이소연에 대한 다큐를 방영했다. 이미 2008년 이래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던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과 관련된 논란을 비로소 다룬 것이다. 하지만 다큐를 보면 안다. '비로소'가 아니라, '이제야'라는 것을. 이소연이란 개인이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 결국 한국 사회에서 '먹튀'로 '논란의 대상'이 된것은 바로 우리 사회, 아니 우리의 정권들이 해왔던 전시 행정의 또 하나의 실패 사례이자, 그 오욕을 고스란히 한 개인에게 전가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 복기를 논란의 당사자 이소연으로 부터 시작한다. 




먹튀가 된 우주인 
논란이 시작된 건 2014년부터였다. 이소연이 그녀를 우주로 보낸 주무부처였던 한국 항공 우주 연구원(항우연)을 퇴사하면서 먹튀 논란이 시작되었다. 언론들은 이 사안을 '먹튀'라는 선정적 단어를 넣어 기사화하였고, 온갖 그와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구설수를 기사로 옮겼다. 마치 우리가 최근에도 흔히 보듯 연예인의 가십 기사처럼 말이다. 그 기사들의 논조가 이구동성으로 읊는 건 바로 이소연이 260억을 들인 국가적 이벤트의 주인공으로 그 혜택을 고스란히 받은 후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미국으로 날라버렸다는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이 논란을 해명하기 위해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소연을 찾아가 그녀의 일상을 지켜본다. 현재 '백수'로 자신을 소개한 그녀, 논란의 가지가 되었던 남편은 그녀가 한국 최초의 우주인인 줄도 몰랐다는, 심지어 영주권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방인 이소연을 통해,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260억짜리 이벤트성 항공 우주 사업이다. 

2006년 항공 우주 사업을 시작한다는 뉴스는 센세이션했다. 당연히 36206명이라는 많은 호응이 뒤따랐다. 최종 후보로 선출된 고산씨가 석연치 않은 과정으로 탈락하고 함께 선출된 이소연씨가 대신 그 책임을 맡았고, 2008년 4월 10일 간의 우주 체험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귀환은 곧, 그녀를 우주로 보낸 사업이 '우주 관광'이며 '혈세 낭비'가 아니었느냐는 국민적 논란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이소연은 2018년에야 답한다. 그녀는 항우연이 만들어 낸 우주인 배출 사업의 상품이었다고. 2008년에 시작된 논란에 대해 2018년에야 답할 수 있는 이 상황은 무엇일까? 그 답엔 바뀐 정권, 그리고 정권에 따라 요동치는 우리의 과학 기술 사업이 있다. 우주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교신까지 했던 이소연, 현실은 주무 부서가 과학 기술부에서 교육과학 기술부로 바뀌는 정권의 변화, 그래서 우주 정거장에서 새 부서의 이름으로 패치를 바꾸어야 했던 웃픈 상황이었다. 

4월 8일에서 19일까지 러시아 소유즈-TMA12호를 타고 우주에 있던 이소연은 꿈에도 후속 사업이 없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를 맞이한 건 후속 사업따윈 없는 단기 이벤트성 사업으로서의 그녀의 우주 여행이었다. 그리고 바뀐 정권, 변화된 시류는 전국민적 호응에 힘입어 뽑힌 그녀에게 260억 세금으로 호화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 아니냐는 비ㄴㅏㄴ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교육 과학 기술부에 이러저러한 제안을 했지만 변화된 시류는 그런 그녀의 제안에 차갑게 반응했다. 그럼에도 이미 러시아의 기술력에 의존하여 제한된 조건에서 한 우주 여행이었음에도 나사가 '실패'라고 규정했던 위험했던 불시착 과정으로 힘들었던 몸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자신이 했던 실험 결과를 분석하기 위한, 우주 과학을 위한 예산을 따기 위해 이리저리 동분서주했다고 이소연은 밝힌다. 당시 악화된 여론을 개선시키기 위한 항우연의 다양한 홍보성 자리와 함께. 

2년간의 복무 기간을 마친 이소연은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미국에서 MBA를 공부했다. 전공과 상관없는 분야를 공부하는 그녀는 또 한번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자신이 했던 우주 실험, 우주 사업에 대한 예산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녀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심정은 다시 바뀐 정권에서 실종된 '우주 사업' 속에서 전혀 해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18년에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정권이 바뀌고, 이소연은 이제야 말문을 연다. 고국에서 계속되는 논란에 대해, 그녀는 말한다. 차라리 화재까지 났던 사고였던 그 도착 과정에서 자신이 죽어버렸다면 명예로운 우주인으로 오래 기억되지 않았을까라며 눈물짓는다. 

전문가는 말한다. 분명 이소연이 참가한 사업은 당시 국민들이 불만을 표했던 260억짜리 이벤트 성 우주 여행이 맞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 당사자인 이소연이 그 비싼 이벤트의 대가를 치루는 것은 부당하다 덧붙인다. 이소연의 러시아 우주 사업 참가의 방식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었다. 일본도 우리처럼 '이벤트 성'으로 우주 사업을 시작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인 만큼 전국민적 합의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시선을 끌어모으는 이벤트 성 사업은 비난받을 만한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런 '이벤트 성' 사업으로 시작하여 일본이 우주 정거장을 개설하고 그곳에 자국의 우주인을 보내기까지의 지속적인 우주 사업을 하는 동안, 우리는 정권의 입맛대로 우주 사업을 '실종'시키고, 그 당사자였던 우주인의 경험조차도 수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과연 이소연은 먹튀일까? 그녀는 2년간의 항우연 복무 기간을 마치고, 실망하는 마음으로 고국을 떠났지만, 최초의 우주인으로서의 사명감을 잊은 적 없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이 실종된 실종된 한국의 우주 사업에 대해 실망했던 것처럼, 이소연 그녀 역시 '책임'으로 복무한 그 시간에 대한 '치유'가 필요한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공인'이라 낙인 찍힌 사람들에게 '아량'이 없다. 다큐는 그 '아량'없는 세상에 이소연을 설득하기 위해 애쓴다.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권과, 그들이 벌인 '냄비'같은 정책의 문제라 본질을 짚고자 한다. 

아량이 없는 고국에 여전한 책임감으로 답하고자 노력했던 이소연. 한국에서는 단 한 명의 우주인이었지만, 넓은 세상으로 나오니 500여 명의 우주인 중에 한 명이 된 그녀는, 이제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다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국가의 시책이 아닌, 기업이 우주 여행을 하는 시대, 기꺼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백수 이소연은 분주하다. 그리고 어쩌면 최초의 우주인, 그녀의 활용법은 이제 비로소 시작일 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18. 4. 16. 16:13

<수요 미식회>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획기적이었다. '음식'이 질펀하게 한 상 차려지지 않은 '먹방'이라니. 먹방, 인터넷의 bj 들이 시청자들을 상대로 음식을 먹는 걸 보여주며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이토록 무궁무진하게 발전해 나갈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bj들의 먹방은 곧 케이블을 비롯한, 공중파 프로그램 먹방의 홍수로 이어졌다. 오로지 '먹는 것'에 집중했던 먹방 프로그램의 홍수 가운데에서 <수요 미식회>의 등장은 신선했다. 물론 '먹방'은 등장한다.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프로그램의 대상이 된 음식점에 자신들의 돈을 내고 사먹고, 그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수요 미식회>의 본질은 시각적 자극이 배제되거나, 극도로 제한된 먹망의 승화에 있다. 극중 출연한 홍신애의 기꺼이 자신의 몸을 사례로 든 고기 부위에 대한 상상에서 부터, 마치 한 편의 하이쿠와도 같은 이현우의 은유 가득한 맛의 평가, 황교익의 풍성한 평론의 잔치까지, 말로 풍성해진 식탁을 한 상 차려받는 느낌이 보여주는 먹방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기를 끌었다. 



지난 3월 7일 새로이 선보인 히스토리 채널의 <말술클럽>과 3월 31일부터 ebs를 통해 방송되고 있는 파일럿 프로그램 <상상식탁>은 바로 이런 <수요 미식회>의 맥락을 계승하여 특화, 발전시킨 프로그램들이다. 

방송을 시작한 지 3년 말로 풍성하게 차려진 <수요 미식회>가 3년 여를 거치며 그 말의 깊이가 옅어졌다. 여전히 게스트들의 맛집 순례는 맛깔스럽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출연진들의 멘트에서는 그들의 내공보다는 작가들의 고군분투가 더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뜻밖에도 <알쓸신잡>에 등장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내공 깊은 '탐식'의 경륜과 지식들은 <수요 미식회>에서 한 발에서 더 나아간 '인문학'과 '먹방'의 콜라보, 그 가능성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전통주만큼이나 풍성한 인문학 술 이야기
<말술 클럽>은 말 그대로 '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술'하면 빠질 수 없는 애주가들에서 부터 '술칼럼니스트'들까지 한데 모여 술에 관한 질펀한 한 상 차림이다. 그런데 여기에 '히스토리'채널의 특색이 가미된다. 그저 술이 아니라, '전통주'이다. 2000 여개에 달한다는 우리나라의 전통주, 한번 맛을 보면 '세상에 이런 맛이!'라고 하지만, 정작 '광고'도, '홍보'도 없으면, 대통령 만찬주로 등장이나 해야 저런 술이 있어? 라며 검색어 순위에 오르는 '전통의 명가'들을 탐미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술'을 매개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전통'이라는 색채가 더해지며 '한국'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로 전개된다.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일본식의 주조 방법이 아니라면 마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듯, '청주'라는 본래의 갈래를 상실한 채 '약주', 혹은 '맑은 술'이란 애매모호한 장르로 둔갑한 우리의 청주, 그 연원에서 부터, 막걸리로 시작하여 주막과 돈이 무거웠던 시절, 서울 근교의 주막에서 돈을 맡기고 받은 영수증 하나로 매 주막에서의 지불은 물론, 마지막 지방 주막에서 돈을 거슬러 받을 수 있는 '주막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전통주라는 주제 하나로 뻗어져나가는, 심지어 수능 국어 영역의 '국선생전'의 묘미까지 이어지는 '한국사 탐험'의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물론 거기에 뜯고 맛보는 전통주의 미식 연찬회는 기본이다. 

주당 장진 감독, 박건형에, 주류계의 알파고라는 호칭에 딱 맞는 '전통주' 전문가 명욱의 해박함과, 이미 그의 <메이드 인 공장> 등을 통해 사물에 대한 재기발랄한 혹은 애정어린 천착을 선보인바 있던 김중혁 작가의 박학함 등이 어우러져 애정어린 '전통주 탐험기'가 완성된다. 



음식으로 부터 비롯된 비교사 탐험 
<말술 클럽>이 '전통주'를 매개로 한 계통적 한국사의 탐험이라면, ebs에서 선보인 <상상식탁>은 횡적인 비교사의 프로그램이다. 이제 2회를 방영한 이 프로그램이 선택한 주제는 사랑, 정치, 전쟁 등 개념정 명제들이다. 

정치의 편에서 정상 만찬에 등장하여 화제가 된 '독도 새우'로 부터 2차 대전을 앞두고 방문한 영국의 조지 6세에게 대접했다는 미국의 길거리 음식 '핫도그', 비빔밥, 초콜릿 칩 쿠키가 정치, 그 중심에서 세계를 변화시킨 음식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연다. 전쟁의 편을 연 건 육포이다. '전쟁'하면 싸우는 것만 생각하지만, 정작 '전쟁'에서 관건이 되는 건  '병사들이 먹고 싸울 수 있는 식량', 바로 그 '식량 배급' 문제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한 몽골의 육포는 곧 그들의 세계 정복을 가능케 한 신의 한수라고 <상상 식탁>은 정의 내린다. 또한 전쟁이라는 과정 속에 또 하나의 변수가 된 전쟁의 식량으로서 영국의 '피시엔 칩스'를 조명한다. 1,2차 대전 자국이 전쟁터가 된 영국 국민들이 '배급 물품'에서 제외된 '생선'과 '감자'로 '기아'를 버텨냈다는 것으로 '음식'은 곧 역사의 산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미 <외부자들>을 통해 전문적 영역 mc로서 김구라의 대안으로 등장한 남희석이 '인문학'의 mc로서 도전장을 내밀며, 자칫 황교익으로 '과점'화될 우려가 제기된 음식의 평론계에서 새로인 등장한 유지상 음식 전문 기자, 건축이 직업이지만 음식 비평이 그의 특기가 된 이용재 비평가가 합류하여 음식 평론의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거기에 팟 게스트<지대넓얇>의 이독실이 공대생 특유의 장기를 살려 데워먹는 전투 식량을 실험해본다 하는 식으로 인문학의 활기를 불어 넣는다. 또한 사랑을 주제로 한 편에 박상희 심리 카운슬러, 정치 편에 전여욱 전 의원, 전쟁 편에 군사전문가 양욱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출연하여, 인문학적 전문성을 더한다. 

물론 과연 이 프로그램들이 전통주의 홍보를 넘어, 혹은 이미 한편에서는 상식이 되어가는 인문학적 지식의 '편집'을 넘어서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의 여지가 남는다. 하지만, '먹방'이라는 가장 익숙한 주제를 '인문학'이라는 트렌트, 혹은 갈증, 발전의 영역으로 가지를 뻗어나가 시도하고자 하는 건 반가운 일이다. 전통주래 봤자라거나, 음식의 역사라 봐야 하면서 발견하게되는 '인간들의 삶'은 먹고사니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디 이러한 시도들이 활발하게, 다각도로 진행되어, tv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하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8. 4. 15. 17:04

어쩌면 그들도 한때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여유롭게 직장 생활을 하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앞에서 방긋 속없이 웃음을 띠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저 그 '존재' 만으로 '누나'와 '누나'가 아닌 여성들에게 '기쁨'이 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월은 흘러 그들의 몸에 흐르는 남성 호르몬 테르토스테르몬은 존재를 '오욕'으로 물들게 하는 상징이 되었다. 한때는 '산업 역군'으로 대접받고, '아버지'라 인정받던 시대는 흘러, 이제 '숨만 쉬어도' '위협적인' 존재로 '치부'되는 시대에 머물게 되었다. '주역'이 '민폐'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주역인지도, 민폐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아저씨
그런데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된 시절에 그런 부담을 무릎쓰고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드라마들이 있다. 바로 제목부터 아저씨인 tvn의 <나의 아저씨>와 sbs의 <키스 먼저 할까요>다.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이선균 분)과 <키스할까요>의 손무한(감우성 분), 그들은 외모부터 '남성적 매력'과는 담을 쌓았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에, 심지어 코밑 수염조차 흰 가닥이 잡히는 그런 추레한 외양이다. 외양만 그런가, 번듯한 대기업에 잘 나가던 카피라이터에, 최고 실력의 건축사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스스로는 광고를 만들지 않은 채 아날로그한 소품에 집착한 잔소리꾼에, 한직인 구조기술사로 조직의 그늘을 자처하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키스할까요>의 손무한은 췌장암 말기에 살아갈 날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늙수그레한 박동훈과 손무한, 남성이라기 보다는, 아저씨란 중성적 단어가 더 어울리는 이 연배의 남자들은 공히 그 세대 남자들의 표상과도 같다. 한때는 공부 좀 한다 하여 대학을 잘 갔을 터이고, 그래서 남들 보란듯한 '기업'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꽃이 붉어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던가, 한때는 대학에 입학했다고 빵빠레를 울리던 그 시절도, 혹은 연인의 가슴을 설레하던 그 훈훈했더 매력의 시기도, 그리고 열렬한 사회인으로서의 열정도 이젠 그들에겐 역사가 되고, 그들은 '징역'을 살듯 현실을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견뎌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들이 '보신'의 차원으로 자신을 남겨두었던 '조직'이 이제 그들의 목덜미를 잡는다. 대학 후배가 대표 이사 자리에 오르고, 설계팀에서 밀려 그런 후배의 승승장구를 보며 잘 나가는 변호사인 아내는 대놓고 무사안일(?) 한 박동훈에 대해 환멸을 표시하지만, 그래도 박동훈은 그저 '별일 없이 산다'했다. 하지만 그가 '내력'의 증거로 삼아 달리기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뽑은 이지안(아이유 분)과 돈봉투로 인해 얽히고 전혀 엮이고 싶지 않은 사내 정치의 중심으로, 그리고 아내의 불륜에 휘말려 들어가며 그의 삶은 본의 아니게 격전지가 되고 만다. 

트렌디의 상징으로 귀걸이를 하며, 지구 위의 우주인이라며 스스로 자부심이 우주를 향해 치솟을 때까지만 해도, 활자화 된 그 책이 책상 서랍 안에 자물쇠를 잠가 숨겨놓아야 할 오욕의 상징일 줄 몰랐다. 하지만 6년 전 비행기에서 만난 한 여성, 아니 10년이란 세월을 직조하며 얽혀든 안순진(김선아 분)와의 '악연'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온전히 부정하도록 만든다. 

박동훈과 손무한, 두 사람은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성공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나오고, 잘 나가는 직장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는 중산층 남자들의 그러그러한 삶의 모습들이다. 그런데, <나의 아저씨>와 <키스 먼저 할까요> 두 드라마는 우리 시대 성공적인 아저씨의 삶, 그 성공이라 썼지만 신기루처럼 날아가버린 '산업 사회의 성공담'을 해체해 버린다. 

조직의 일원으로,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자신의 맡은 바 책무를 다하면 자신의 성공은 물론,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도 번듯하게 살아낼 수 있었을 것 같던 삶, 그러나 '조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듯, 별일 없이 살고 싶었던 박동훈을 변방으로, 변방으로 밀어버린다. 심지어, 사내 정치의 젯밥으로 써버리고, 불륜을 핑계로 희생양을 만들고자 한다. 그의 버팀목이 될 아내도, 부하 직원들도 막상 벼랑 끝에 선 그에겐 등을 돌린다. 

카피라이터로서 그의 성공담의 사례가 된 광고는 그가 저지른 사회적 부도덕의 상징이 되었고, 그 부도덕한 상흔은 그의 몸조차 좀먹어 들어갔다. 광고주는 그에게 협잡의 손길을 내밀었고,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광고쟁이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도피라고는 스스로 직접 광고의 피를 묻히지 않는 소극적 저항정도. 



아저씨를 통해 던진 산업사회 대한민국에 대한 질문, 그리고 회자정리 
결국 이들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고도 성장의 논리로 달려온 한국 사회에 대한 질문이 된다. 조직의 일원으로 그 논리를 내재화하여 버텨온 이들이, 성공의 정점에 이를 나이에, 스스로 반문하고, 회의하며, 조직에서 버림받거나, 조직으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는 이 과정은, 결국 '조직'맨으로 살아왔던 우리 시대 '아저씨'들의 '업보'다. 또한 무너진 중산층의 현실에 대한 조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와 <키스 먼저 할까요>는 그저 아저씨들의 한풀이에 머물지 않는다. 드라마는 그들의 '회자정리'에 주목한다. 그 시작은 중반부를 돌아선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의 손무한이 앞선다. 그저 중년의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던 손무한과 안순진의 사랑 이야기는, 기꺼이 그 '업'을 품에 안은 손무한의 순애보로 전개된다. 손무한은 말한다. 6년전 만났던 안순진의 눈물이, 매번 만날 때마다 울고 있던 그녀가 손무한을 적셔서, 나비의 날개짓처럼 손무한을 변화시켰다고.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카피라이터 손무한은 그의 전재산을 결혼이란 과정을 통해 대기업과의 재판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잃은 안순진에게 의탁하고, 그녀의 재판에 유일한 증인으로 서고자 하는 것으로 자신의 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상무에게 잘못전달된 돈봉투를 보고, 어머니가 말한 형의 사업 자금때문에 잠시 흔들렸던 대가로 혹독한 회사 내 검증을 치웠던 박동훈은, 여전히 아내와의 불륜으로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은 도준영(김영민 분)의 도발에 응전한다. 비록 그 시작은 비겁한 통화 목록 조회에서 부터이지만, 그는 더 이상 '변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응전은 이제 시작이다. 

그렇게 손무한과 박동훈이라는 아저씨의 회자정리가 된 드라마가 새삼스럽게 우리 사회 아저씨에 대한 미화라 불편할 건 없을 듯하다. 그들은 주역이었지만, 그들 또한 '희생양'이었으니, 그러기에 이지안과 박동훈이 동지가 되고, 손무한과 피해자 안순진은 손을 잡을 수 있다. 아저씨는 불편하지만, 그들 역시 이 사회의 무기수로서 그들의 존재는 갸륵하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는 희생양이었지만 조력자였던 그들의 '책임'에 대해, '도덕'에 대해 천착하고 있으니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볼만하겠다. 부정할 수 없는 한 시대의 표상의 회자정리에 시간을 허락해 줄만도 하지 않은가. 

외려 안타까운 건, 아저씨란 이름으로 복기되는 중산층이란 한정성이다. 이제 우리 드라마에서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바보같은 사랑>의 전상우를, <유나의 거리> 속 창만이 깃들어 살던 다세대 주택의 아저씨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나의 아저씨> 속 이제는 한량이 되어버린 놈팽이 아저씨들도 알고보니 한때는 대학 나와 번듯한 직장에서 한 자리씩 했다던 그 알량한 설정의 계급적 한계야 말로 어쩌면 정말 안타까워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by meditator 2018. 4. 1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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