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시대 군주에 대한 거짓말은 '역모'로 취급되어 '대역죄'로 다스려졌다고 역사학자 전우용은 증언한다. 그렇다면 나라의 주인이 군주에서 국민으로 바뀐 민주주의 사회, 국민에 대한 '거짓'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기군망상죄', 즉 대역죄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 70년, 안타깝게도 그 역사는 권력이 국민들을 기만한 역사였다. 우리의 권력들은 끊임없이 '거짓'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해 왔다.

그런데 왜 지금 '거짓'에 주목해야 하는 걸까? 4월 1일 <sbs스페셜- 권력과 거짓말(부제; 피노키오의 나라)>는 새로운 권력의 시대, 그럼에도 여전히 쉬이 '처단'되기 힘든 권력의 거짓말을 짚고 넘어감으로써 현재 진행중인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세월호의 진실, 그 빙산의 일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명 조끼를 학생들이 입었다던데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며 뒤늦게 나타나 늘어놓았던 그 '거짓말'의 진실말이다. '저는 정상적으로 보고 받고 체크하고 있었다'던 그 4년 전의 거짓말, 국민들은 묻고 또 물었었다. 수백 명의 국민들이 사지에 내몰린 그 시각,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하지만 대통령은 손바닥으로 하늘를 가리듯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았었다. 대통령뿐이랴, 그의 조력자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의 퍼레이드를 벌었다. 그리고 그 날의 진실은 4년이 지난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한다. '침실에 있었다고......'

진실의 기회, 그러나 거짓의 향연이 된 국회 청문회
왜 4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는 진실의 장막을 겨우 벗겨내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다큐는 말한다. 기회는 있었다고. 바로 국회 청문회다. 국회 청문회는 국민의 앞에 진실을 말해야 하는 기회이다. 국회에 선 증인은 선서한다. '양심에 따라 숨김이나 보탬이 없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그리고 이것을 어겼을 때는 위증의 죄를 지겠다'고. 그러나 심지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처럼 이 '선서'부터 거부하는 증인이 등장한다.

국민 앞에 선 당시 사건의 관계자들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모릅니다', 기억이 없습니다'를 되풀이 했다. 김장수 장관도, 김기춘 비서실장도, 우병우 민정수석도, 조윤선 장관도, 조여옥 대위도, 이영선 비서도, 이임순 교수도. 누구라 가릴 것 없이. 국민을 바보 등신으로 아느냐 국회의원들이 일갈하고 분노해도,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피가 거꾸로 솟아도.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심지어 우병우는 46일이나 잠적했다, 국민들이 현상금을 걸자, 마지못해 참석했다. 그러고는 '별 신경을 안썼단다'며 '아는 게 없다'고 했다.





국민 앞에 선 그들, 하지만 그들은 60일간의 진실 게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안전과 형량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거짓말은 '통'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심에서 위증에 대해 유죄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우병우 전 민정 수석은 위증죄가 공소 자체가 기각되었다. 이임순 순천향대 교수 역시 우병우와 마찬가지다. 이영선 비서 역시 집행 유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지만, 정작 그들이 한 거짓의 대가는 치뤄지지 않았다.

국회 증감법은 '선서한 증인 또는 감정인이 허위의 진술이나 감정에 대해 위증을 한 때에는 1년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을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저들은 '법' 앞에서 거짓의 대가를 치루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피해갔을까?

'사실에 반하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는 기억이 없다'는 식의 모르쇠 전략, 애초에 상황을 애매하게 증언하거나, 무능함을 자인하는 진술 방식은, 그 자체로 그들의 '위증죄'를 어렵게 한다고 법 관련 전문가들은 안타까워 한다. 우병우 민정 수석이 청와대의 검찰 수사 압력에 대해 증거를 들이대자 마지 못해 인정을 하면서도 의례적이란 관례를 통해 피해가는 식이다.

거기에 국회 청문회 자체가 한시적 특위라는 태생적 존재론의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우병우의 경우, 그가 협박을 한 사실이 윤대진 광주 지검 검사의 진술로 밝혀졌지만 이미 그때는 청문회가 끝난 이후였다. 청문회에서의 위증에 대한 고발은 재적 위원 1/3 이상 연서를 해야 가능한데, 이미 끝난 국회 청문회는 '위증죄 고발'의 효력이 없어진다. 즉 한시적 기구로서의 청문회는 시간이 지나버리면 고발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높은 형략을 내세운 국회 청문회 위증죄, 그러나 현실은 '엄포'만 논 것이 되어 버린다. 출석에서 부터, 선서, 증명할 수 있는 죄명, 그리고 시한까지, 국회 청문회를 통한 위증죄의 처벌은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거짓의 역사, 70년- 우리가 용서한 거짓말 
그런데 우리 국민에게 정치인들의 거짓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아니 우리의 지난 70년 정치사는 곧 국민을 대표하는 리더들의 '거짓의 역사'였다 . 한강 다리가 끊기지 않았다며 북진을 하고 있다던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민을 눈 앞에 두고 다리를 끊어버리고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빼버렸다. 그리곤 자신의 거짓을 덮기 위해, 다리가 끊겨 도망치지 못한 피난민들을 '부역자'로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다. 박정희의 거짓말은 그의 정권 연장의 슬로건이 되었다. 민정 이양을 하겠다더니, 총선을 하겠다더니, 더는 집권을 하지 않겠다더니, 다시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더니, 총탄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그는 거짓말을 되풀이 했다. 광주학살의 주모자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나 노태우라고 다를까.




그리고 이들의 거짓말은 안타깝게도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연장하도록 허용한, 우리가 용서한 거짓말이 되었다. 즉 지난 70년, 우리의 현대사는 바로 우리가 용서한 정치인들의 거짓말의 역사였다. 바로 이 지점을 다큐는 짚는다. 왜, 우리는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관대한 거일까?

전 정치인 전여옥 씨는 그 '용서'의 관습을 우리의 고속 성장에서 찾는다. 즉 과정과 수단이 잘못되어도, 목표를 달성하면 용서가 되었던 고속 성장의 시대, 정치인들의 거짓말 쯤이야 눈 질끈 감고 용서해 주었던 국민들의 전반적 정서가 오늘날 두 대통령의 감독 행을 결과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인간 개인으론 하루에 10번, 많게는 200회 까지 거짓말을 한다. 이렇게 보면 거짓말은 '인간의 속성'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다큐는 주장한다. 그저 인간의 거짓말과 정치인의 거짓말은 다르다고.





거짓을 용서하는 관행에서 부터 
미국의 경우, 클린턴 전 대통령이 탄핵을 받은 이유는 그의 성스캔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회 에서 위증을 한, 그 거짓말이 그를 대통령직의 위기로 몰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국회, 즉 국민 앞에서의 거짓말을 국가 전복, 반란에 준거한 죄로 여긴다. 반면 일반인들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용적이다. 그러나, 부패 범죄, 직권 남용과 관련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용' 대시 '기소'로 다스린다. 특히 '살림의 여왕'이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마사 스튜어트의 사례에서 보여지듯 조사 과정에서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면 기존 형량에 4년을 더하는 등 단호한 처벌이 행해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다. 모르쇠로 일관했던 이영선 비서관에 대해 1심에서 위증을 인정했던 법원은 2심에서 집행 유예를 선고했다. 그의 거짓말을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충성심'으로, 즉 '상사의 지시에 의한 불가피한 이유'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법조인 생활을 오래했기'에, '국가 성장에 이바지했기에' 라는 식으로 그들의 거짓말에 '면죄부'를 준다. 이에 '노회찬 의원'은 반발한다. '오랫동안 노동을 해왔기에 법적으로 처벌을 완화해 준 적이 있냐? '고

다큐는 우리 현대사 비극의 시작을 '그들의 거짓말'로 부터라 본다. 부정 부패가 반복된 역사, 그 베이스가 되는 건 바로 권력자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거짓말'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곧,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그러해 왔던 시스템과 문화에 대한 질문이 된다. 과연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사회와 격리시켰던 적이 있는가? 심지어 유죄를 받아도 정치적 탄압이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장하는 사회, 거짓말과 한 배를 탄 권력, 처벌받지 않는 권력, 이제 우리가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면, 바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권력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관행에 대한 분명한 '징죄'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라 방향을 제시한다. 어쩌면 당연한, 하지만 누구나 그러려니 했던 그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 바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그 '기초'와 시스템에 대한 제언이다.

by meditator 2018. 4. 2. 15:4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