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다가왔다. 꼭 차례상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연휴를 맞이하는 주부의 입장에선 며칠동안 먹거리의 준비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십상이지만, 먹는 사람의 입장에선, '살'부터 걱정해야 할 만큼, 명절의 음식은 푸짐하다. 아마도 열의 아홉의 사람들이 추석하면 떠오르는 것에, 송편이니 하는 추석 먹거리가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한 해의 대표적 명절을 기억하는 것조차, 먹거리의 맛이다. 이렇게 우리네 삶은 '먹거리'와 그 '맛'에 좌우된다. 


마치 추석 특집이라도 되는 듯, 9월 1일부터  3일까지, <다큐 프라임>은 <맛이란 무엇인가>를 3부작으로 방영했다. 

그 시작은 1부 <맛의 비밀>이다. 맛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인 접근이다.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기 쉐프 박찬일이 등장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맛의 본원을 탐색해 간다. 
우리가 학교 과학 시간에 배웠듯이 혀를 통해 인간이 느끼는 맛은 맵고, 쓰고, 달고, 짜고, 신 다섯 가지의 맛이다. 다큐는, 과연 인간이 이 맛을 언제부터 느끼게 되었는지부터 시작된다. 어린 아기에게 달고 짜고 신 맛을 맛보여 주었을 때, 아기는 이미 맛을 분명하게 인지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임신 6개월차 주부에게 다양한 맛을 보여주었을 때, 뱃 속의 아기는, 엄마가 맛본 음식에 따라 다른 반응을 느낀다. 즉, 인간은 이미 탄생 이전부터, '맛'을 느낀다. 


물론 맛에 대한 반응도 다 다르다. 아기들이 단 맛에 입맛까지 다시며 좋아하는 것과 달리, 쓴 맛에는 진저리를 친다. 아기들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 쓴 약에 대해 울고불고 했던 기억을 누구나 가지듯이,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쓴 맛에 질색이다. 물론 이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가능하다. 인류에게 있어 쓴맛은, 독이 들어 있는 음식에 대한 경고이다. 신맛 역시 상한 음식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본능적 반응이 강한 어린 연령의 아이들일 수록, 쓰고 신 맛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다. 

하지만, 인류는, 그 역사를 거듭하며 맛을 발전시켜 왔다. 오늘날 쓴맛의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등극한 것을 보면, 맛의 진화는 획기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지노모도'라는, 이른바 조미료의 감칠맛은 인간이 다시마 등을 통해 개발해낸 맛이다. 우유가 발효되어 치즈가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풍미 가득한 향 역시, 감칠맛의 본산이다. 이렇게, 과학 시간에 배운 다섯 가지 맛을 넘어선 수만가지의 맛을 인간은 느낀다. 음식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 수록, 맛에 대한 표현이 풍부한 것처럼. 

하지만 정작 맛의 실체는 따로 있다. 눈과 코를 가리고 사과와 양파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이 느끼는 맛은 그 '향'에서 비롯된다. 음식을 이루는 98%의 물질은 무색, 무취, 무미이며, 그 나머지 2%만이 맛을 좌우하는데, 바로 거기에, 극소량의 '향'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향'은 바로 인간의 추억과 연관된다. 급격하게 변화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은 대부분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다. 즉, 인간의 입맛은 보수적이다. 그런데, 이 보수적인 입맛의 시작은, '향'이다. 미각을 잃은 말기암 환자에게 어린 시절 엄마가 즐겨 해주시던 시레기 볶음을 주자, 그 구수한 향에 눈물이 흐른다. 놓았던 수저를 들 힘이 생기게 한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향'으로 부터 비롯된 맛은, 어린 시절 자신의 추억과 연관이 있다. 노인이 되어서도 쉽게 식성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린 시절 길들여진 맛에 평생 노예이기가 쉽다. 집 문앞에서부터 코를 자극하는 김치찌개 냄새에 마음이 푹 놓인 기억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으리라. 

그래서, 역설적으로 추억의 맛은 위험하다. 엄마가 직장을 다니는 바람에, 인스턴트 음식과 육류 등에 익숙해진 유치원 아이의 입맛은 벌써, 변화되어 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등에 거부감을 느낀다. 바로 여기서, 교육적 관점에서 '맛'의 훈련이 필요로 된다. 

실제 슬로푸드 운동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미 뱃속에서 부터 엄마가 즐겨 하는 음식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아이들의 평생 건강을 위해,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공적으로 조미한 가공된 맛에 쉽게 중독되는 인간의 특성을 고려할 때, 어린 시절부터, 건강한 입맛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스턴트식 조리 등으로 인해 상실된 맛을 찾기 위한 노력도 경주된다. 마크로 바이오틱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재료 본연의 맛을 넘어, 흙 맛을 강조한다. 우리가 잃었던, 음식 본연의 맛을 되찾는 것이, 곧 우리의 건강을 되찾는 것이요,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3부작의 <맛이란 무엇인가>는, 맛에 대한 다수의 다큐가 그러하듯, 과학적, 인문학적 접근으로 평이하게 시작된다. 그러던 것이, 맛을 분석하다, 추억으로 넘어가며, 변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다큐의 변주는, 그저 추억을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추억을 잊지 못하듯, 우리의 아이들에게 건강한 맛의 추억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는 강고한 목소리로 마무리된다. 

실제 아이들과 함께 1주일간의 맛의 훈련에 들어간다. 처음 채소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질색을 하던 아이들은, 스스로 수확하고 만들어보며 낯선 그 음식들에 친근해져 간다. 심지어, 게임을 하다보니, 구역질까지 하던 처음의 반응이, 그저 무심히 집어 먹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슬로푸드 운동의 주창자는, 각 학교 별로, 텃밭을 만드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직접 보고, 키우고, 수확한 기쁨을 누린 것을 맛으로 연결하는 것이, 어린 시절 맛 교육의 필수 코스라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종종 함께 하는 밥상을 받은 아이들은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어른들의 먹거리에 거부감이 없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달리 먹일 것이 아니라, 어른들과 함께 하는 먹거리 문화가, 건강한 입맛의 시작이라는 것도, 추석을 앞둔 <다큐 프라임>이 강조한 평범 속의 진리이다. 결국 맛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서 시작된 <맛이란 무엇인가>는 <다큐 프라임>만이 할 수 있는 추석 특집이 되었다. 

물론 아쉬운 점은 남는다. 엄마가 바뻐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진 아이를 위해, 엄마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제대로 된 밥상을 준비한다. 엄마와 함께 하니, 알록달록 채소도 먹기 시작한다. 맛에 대한 교육적 원론은 원칙적이다. 하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서 밥상을 준비해야 하는 엄마의 사정은 안중에 없다. 맛벌이를 하느라, 늦은 밤까지 학원을 돌려야 하는 고달픈 서민들의 생활에 대한 배려 역시 없다. 유기농 채소를 사먹을 형편이 안되는 가난한 엄마의 주머니 사정은 고려치 않는다. 마치 명절 준비를 온전히 해내야 하는 주부가 빠져버린 추석 선물이 된 것이다. 


by meditator 2014. 9. 4. 11:49

어제 아침부터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린 이름이 있다. 오늘은 또 다른 이름이 검색어 1위를 달린다. 모두 같은 걸그룹의 멤버 이름이다. 어제 이름이 올라갔던 여자 아이돌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오늘 아침 또 다른 멤버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찌기 그녀들의 선배였던 아이돌 그룹의 생명을 담보로 했던 죽음의 질주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이제 막 이름을 알리던 그녀들의 생명과 육체를 다시 한번 담보로 삼았다. 어제 음원차트에는 그녀들의 노래가, 데뷔 후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걸 기뻐할 그녀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거나, 병실에 있다. 여전히 당대 젊은이들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아이돌'이지만, 그들의 삶은, 이번 사고에서 드러나듯이, 언제나 척박하다. 이름을 알기기 위해 사선을 넘는 밤길 폭주를 마다하지 않고, 겨우 얻어진 이름값은 하지만 세월 속에 무상하다. 하물며,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전직 아이돌'임에랴.


9월 4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의 게스트들은 '노목' 형제들이다. 나이든 나무의 노목이 아니라, 너무 살이 쪄서 목이 없어져 버린 한때 잘 나가던 가수들의 집합체를 이름이다. 신해철, 윤민수, 노유민. 이름만 딱 봐도, 그 중에서 노유민이 mc들의 만만한 장난감이라는게 한 눈에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슬픈 표정 짓지 말아요~ 타이거'를 들먹이다가도 헤헤거리며 웃던 신해철이 정색을 하며, 이제 그만 하지 하면, 나머지 궁금한 점은 인터넷에 물어보는 걸로  하며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주는 예의(?)를 차리거나, 신해철, 노유민이라는 멤버 때문에, 별 재미가 없어 '타투'라도 해야하나 걱정하는 윤민수와 달리, 한 눈에 보기에도 너무나 달라진 외모로 등장한 노유민은 시종일관 mc들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전직 아이돌'인 그는, 이제 두 군데의 까페를 운영하며 그럭저럭 먹고살만하여 김구라가 솔깃할만한 부의 소유자도 아니요, 겨우 이제는 사라진 아이돌 그룹의 서브 보컬로 윤종신이 접어줄만한 음악적 역량의 소유자도 아니며, 규현이 그나마 껌뻑죽을 sm소속도 아니니, 이보다 더 만만한 게스트가 없다. 

게다가 속도 없다. 김구라를 비롯한 mc들이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며 우스개를 만들어도, 허허거리며 웃다 결국 10년 후의 니 모습이라며 결국 선배 아이돌이 일침을 날리게 했던 규현의 깐죽거림에도, 노유민은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데뷔 때부터, 해맑았던 그 어린 왕자같던 그 모습이, 비록 외모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몇 배의 부피를 둘렀지만, 그 소년의 해맑음은, 여전히 노유민의 정서로 자리잡은 듯했다. 출연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았던 그의 '집착적' 부부 관계도, 정작 당사자가 해맑은 웃음을 거두지 않으니, 김구라마저, 사람살이는 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는 거라며 포장을 해준다. 과거 사진을 들이대며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느냐며 다그쳐도, 웃음이 거둬지지 않는다. 

(사진; 뉴스엔)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언제나 그렇듯, 광야의 하이에나들같은 mc들에게 가장 만만한 먹잇감같은 노유민인데, mc들이 무슨 말을 해도 노염을 타지 않으니, 어느순간인가 부터, 그런 노유민을 신기해 하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김구라가, 모든 사람을 까페 손님대하듯 한달까. 그런 노유민에 대해, 방송 말미,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신해철이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 바로 그의 끊이지 않는 미소의 원천이 그의 '행복감'이라고. 그런 신해철의 정의에, 노유민은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그렇다고, 지금 난 행복하다고. 

방송가에서 '전직 아이돌'이란 명칭은 그리 아름다운 대명사가 아니다. 한때는 누군가의 우상이었지만, 그보다 젊고 세련된 누군가가 등장함으로써, 한켠으로 밀려난, 그래서, 당시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거나, 그게 아니라도, 그 이름값의 언저리에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궁색함을 숨기지 않고, 그 무엇이라도 하거나, 여전히 당시의 명망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거나 하기가 십상인 존재들로 기억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같은 아이돌임에도, 후배인, 지금 현존하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에 속하는 규현같은 친구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도 발끈할 뿐, 딱히 이렇다할 자구책이 없어보이는 것 역시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전직 아이돌들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노유민의 모습이 달랐던 것은, 그렇게 여전히 전직 아이돌이라는 울타리를 이제는 벗어나 버린, 진짜 '파랑새'를 찾은 것 같은 그의 모습 때문이다. 과거 꽃미남 시절의 사진을 들이대도, 흘러간 영광을 조롱해도, 이제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에게는, 그저 무른 호박에 이빨 자국만도 못한 잡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그이다보니, <라디오 스타>의 약빨이 먹히지 않을 수 밖에, <라디오 스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연예인들의 목적이란게, mc들의 먹잇감이 되어도 좋으니, 자신의 존재감 한번 떨쳐보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그런 <라디오 스타>의 논리를 보기 좋게 벗어나 버린, 노유민의 행복감은, 묘하게도, '십년 후의 니 모습'이라던 또 다른 전직 아이돌의 일침보다, 통쾌하다. 아니, 언제나 대중의 관심에 연연하며 살아가야 하는 연예인의 생리를 교묘하게 웃음의 소재로 이용해 왔던 <라디오 스타> 조차도, 결국, 그래 '넌 행복해'라며 항복하게 만들어 버린 속시원함이다. 이제 대중의 호불호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노목'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생업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의 당당함이다. 


by meditator 2014. 9. 4. 10:05

9월 2일 방영분에서, 야심차게 시도한 '야자 타임', 이효리가 김구라에게 말한다. 니가 들어와도 시청률은 그대로대?라고, 그러자, 김구라가 화색이 돌며 답한다. 그래도 전보다는 올랐다고. 그러자, 이번엔, 문소리가 던진다. 그게 너때문이라고 생각하냐고?

이전의 세 mc, 이효리, 문소리, 홍진경에게는 아쉽지만, 김구라가 함께 한 <매직 아이>는 그 이전의 <매직 아이> 보다 훨씬 나았다. '진부한 아이템' 김구라임에두 불구하고, 이전의 세 mc가 진행하던 <매직 아이>에 비해 한결 정돈된 느낌이었다. 심지어 mc는 김구라이고, 이효리, 문소리, 홍진경은 패널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매직 아이>의 김구라는, <썰전>의 김구라도, <라디오 스타>의 김구라도, <세바퀴>의 김구라와도 달랐다. 굳이 규정하자면, <썰전>과 <라디오 스타> 사이, <썰전>을 통해 그가 이철희, 강용석을 통해 얻은 세상에 대한 식견과(예능 심판자의 김구라는 아니다), <라디오 스타>에서 유지되던 여전히 독한 혀로써의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그에게는 원죄가 있는 이효리, 그보다 나이가 많은 문소리라는 문턱에 조심하는 노련함을 유지하고자 한다. 덕분에, 다른 프로에서보다, 한결 부드러우면서도, 풍부한 식견을 가진 김구라라는 캐릭터가 새롭게 드러난다. 

하지만, 정작 <매직 아이>의 문제점은 새로 합류한 김구라가 아니다. 종종 김구라로써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9회에 이르도록 조율되지 않는 세 여자 mc들사이의 불협화음이다. 
이 불협화음의 근원은, 세 사람의 친근함, 친숙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그 어느 프로그램이 mc들의 사이좋음을 전제로 하겠는가. 심지어, <썰전>처럼 때로는 드러내놓고 서로의 다른 이견의 평행선을 달리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매직아이>의 세 mc의 문제점은, 퓨전이 될 수 없는 서로 다른 나라의 요리를 먹는 느낌과도 같다. 

9월2일 방영분에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는 밝히는 문제에 다루었다. 
이에 대해 김구라는 영화평을 예로 들며, 연예계에서 상대적으로 솔직하다는 축에 드는 자신 조차도 영화를 보고 나서 좋다 나쁘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처지라고 자신의 입장을 토로한다. 그에 대해 문소리는 말한다. 왜 영화를 보고, 좋다, 혹은 더럽게 나쁘다. 양단간의 입장만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냐. 표현의 방식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김구라의 의견을 확장시킨다. 그런데, 그런 문소리의 의견에 대해, 이효리는, '드~럽게 재미없네'라고 부드럽게 말해야 한다고 받는다. 
김구라가 말한 바 표현의 어려움에 대해, 문소리는, 그걸 우리 사회가 모든 사안에 대해 호불호라는 이분법적 논리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며, 좀 다양한 의견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확장시킨다. 그런데 이걸 웃기자고 하는 것인지, 이효리는 '말 개그'로 받아친다. 이렇게 되버리면, 문소리가 한 문제제기는 사라지고, 다시, 원래 솔직하게 말하자, 말자의 이분법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문소리의 민주 노동당적에 대한 토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솔직한 토로에 대해, 김구라를 제외하고, 두 mc에게서, 우스개를 제외하고, 문소리의 의견을 확장시킬 그 어떤 리액션이 등장하지 않았다. 

홍진경은 한 술 더 뜬다. 방송가에서 나름 똑부러진다고 평가받는 홍진경은, 2일 방송분에서 회식 자리의 의견을 내는 경우를 두고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은, 내가 돈 내고, 먹고 싶은 걸 시킨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오히려 게스트들의 원성을 들었다. 홍진경 개인으로는 개성이 강하지만, 그녀의 개성은, 2일 방송분에서도 보여지듯이, 게스트들 조차 그건 아니지 할 만큼, 외람된 입장(?)인 경우가 있는데, 문제는, 홍진경 자신이, 그런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전혀 무지하건, 심지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방송을 보다보면, 문소리는 종종, 틀에 박히지 않은 다양한 문제 제기를 하지만, 그것들이, 이효리나, 홍진경에게 제대로 이해나 되나 싶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나마 김구라가 등장하면서 부터, 이야기의 물꼬가 터져서, 문소리의 생각이 조금 더 펼쳐지게 되는 경우가 생긴 것이지, 그 이전에는, 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로 흐르고, 결국, 이효리나 홍진경의 들은 적 있는 자기 경험으로 흘러들어가 또 그 이야기냐는 논란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2일 방송분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효리와 김구라 사이에는 원죄가 있다지만, 함께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 새삼스레 그걸 다시 끌고 들어오는 이효리는 토크쇼를 과거로 회귀시키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불행한 과거는 사실이지만, 그걸 다시 끄집어 내서, 토크의 주제로 삼는 것은, 신선한 시도를 지향하는 <매직 아이>에 어울리는 방식은 아닌 것이다. 아니 가끔은 그녀가 이야기할 꺼리가 없어, 과거 경험을 끄집어 내나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효리의 삶은 결혼과 함께 달라졌다지만, 그녀가 프로그램을 이끄는 방식은, 여전히 과거 예능 프로그램을 하던 방식이다. 이효리가 방송에서 반짝 빛나는 순간은, 2일 방송분처럼 대놓고 욕을 하거나, 광희의 무지를 콕 찝어 알아맞추는 감각적인 지점이다. 하지만, 토크의 흐름을 끌어가거나, 확장시키는 지점에서 여전히 이효리는 어려움에 처해있다. 안타깝게도 이효리의 건강한 삶과, 토크쇼를 이끄는 진행자로써의 능력은 별개라는 걸 회를 거듭할 수록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순 있지만,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홍진경은, 그녀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펼쳐놓던 자부심 넘치는 홍진경's 월드의 옹벽 안에 여전히 있다. 홍진경의 이야기는 그저 여전히 어느 똑부러지는 사람의 목소리일 뿐이다. 문소리의 생각은 트여있지만, 역시나 그걸 다른 두 사람과 조율해갈 능력도 의지도  없다. 

(사진; tv리포트)

김구라가 와도, 이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세계를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저 그의 생각과 사안에 따라, 제휴, 협력, 혹은 반목을 할뿐이다. 당연히 세 mc가 게스트들과의 토크를 이끌어 가지는 못한다. 사안에 따라 산만하게 반응할 뿐. 그러다 보니,토크쇼가, 게스트들과의 자유로운 토론이 아니라, 김구라 vs 다수의 패널 토크쇼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아쉬운 건, 김구라 역시 각자 한 자부심 하는 세 mc를 다잡으며 자신이 휘어잡고 가기엔 힘이 부치던가, 휘어잡을 의지가 없어 보이니, 여전히 <매직 아이>는 어수선하다. 이효리는 이효리대로, 종종 상대방을 당황시키는 예의 솔직함을 무기로, 자신의 경험을 펼쳐놓고, 문소리는 사안에 따라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홍진경은 뜬금없이, 이래야 하는 게 아니냐며, 토크를 붕 띄운다. 김구라는 나름 식견을 펼치며 토론의 맥을 잡아보려 하지만, 늘 토크는 한 치쯤 공중에 떠있다. <매직 아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은 건강하지만, 토크는 진부함과, 뻔함의 갈피를 벗어나, 신천지를 향해 가다 늘 좌초한다. 장작을 던지며 불을 때본들, 젖은 아궁이에서 매캐한 연기만 피어오늘 뿐이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것으로만 보면, <비정상회담>이나, <매직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매직아이>가 여전히 궤도에 오르려다, 힘에 부쳐 미끄러져 내려가는 느낌을 주는 건, <비정상 회담>이 선보이는 치열한 토크의 질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치열할 수 없는 근원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이질적인, 혹은, 그런 주제를 담보해낼 능력이 부족하건, 펼쳐도 호응을 얻을 수 없는 세 mc로 부터 기인한다. 기센 캐릭터만으로 솔직한 토크쇼가 구성될 수 없다는 걸 여전히 <매직 아이>는 증명한다. 


by meditator 2014. 9. 3. 07:48

더 이상 소매치기를 하지 말라는 창만(이희준 분)의 설득에 유나(김옥빈 분)는 무 자르듯 답한다. 더 큰 도둑놈들은 잡히지 않는 세상에, 나같은 사람이 남의 지갑 좀 훔치는 게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이 되냐고. 

당당한 유나의 소매치기 론에 창만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더는 그녀를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렇게, 더러운 세상,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것에 당당해 하던 유나가 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소매치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매치기한 할머니의 지갑을 돌려주는 바람에, 같은 업계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지청구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달라지게 했을까?

처음 감옥에서 출소를 하고, 미선의 방에 얹혀 살 때만 해도, 유나는 아픈 아버지를 만나러 감옥에 갈 돈이 없어 동동거리는 처지였다. 그런 유나의 자구책은 남의 지갑을 슬쩍하는 것이고, 그 일조차 같은 업계 사람들이 눈독들인 사람을 먼저 털어 오히려 그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기도 할 정도로' 독고다이'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달라졌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던 청소년 아이를 교정하여 스스로 소년원에 자수하게 만들고, 손을 다쳐 강도로 돌변할 뻔 했던 동료의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 주느라 노심초사한다. 후배들은 그녀를 따르고, 그녀 주변엔 사람들이 넘친다. 누구랑 같이 일도 못한다던 그녀가 말이다. 

(사진; tv리포트)

그녀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창만에게 그녀는 말한다. '니가 오지랖이 넓어서 싫다고', 그도 그럴 것이, 오직 그녀가 좋아서, 다세대 주택에 세들어 온 창만은, 그 특유의 사람 좋음으로 인해, 주인집 콜라텍에 들이닥친 조폭을 해결해 주는 바람에, 콜라텍에 취직하는가 하면, 다세대 주택에 세든 사람들의 온갖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한다.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던 개삼촌도, 야반도주를 했던 옆방의 부부도, 왕년의 조폭 할아버지도, 창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창만을 유나는 어이없어 한다. 남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는 창만을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어느 틈에 유나도 창만을 닮아간다. 

소년원에 간 동종업계 아이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원 입구를 자꾸 바라보던 유나가 결국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 누가 칼을 빼들고 들이닥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녀가, 창만이 자신의 엄마를 찾았다는 이유만으로 며칠 동안 그와 말도 섞지 않던 그녀가, 자신의 소년원 시절을 떠올리며 통곡을 한다. 처음 소년원에 갔던 그 시절,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다던 그 아이가 바로 지금의 유나이다. 그리고, 창만은 유나가 그토록 완고하게 소매치기의 삶을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어린 시절 엄마와의 이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창만의 분석이 틀리지 않은 이유를, 고아원에서 만난, 다영(신소율 분)을 통해 설명한다. 어린 시절 엄마와 헤어진 다영이, 엄마의 빈 자리를, 고아원 고아들과의 동일시에서 찾아내듯, 그런 다영과 공감하는 유나를 통해, 유나의 결핍을 이해시킨다. 감옥에 간 아버지, 이유야 어떻던 자신을 버린 엄마, 그런 외로움 속에서, 유나가 자기 자신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은 '소매치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매치기'를 통해 세상에 대해 자신을 방어해왔던 유나는 창만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달리보기 시작한다. 창만 역시 유나와 다르지 않다. 가족이 없던 그를 보살펴 주던 작은 아버지가 그를 도둑으로 몰았던 그 상황이 너무 억울해 고향을 떠나왔던 그는, 유나와 전혀 반대의 삶을 산다. 여전히 틈틈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그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으로 그의 외로움을 치유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세상에 의지가지 없는 창만이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주느라 바뻐 자신의 외로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그리고 그런 창만을 바보같다며 비웃던 유나도 어느 틈에, 그의 '이타적' 사랑에 전염된 듯, 주변을 챙긴다. 그러자, 어느 틈에 유나 주변에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그녀는 소매치기하는 거 조차 잊은 듯 살아가게 되었다. 

20만에 돌아온 '서울의 달'이라는 표제를 내걸었던 <유나의 거리> 속 서울은, 이십년 전 그때와 묘하게 닮은 듯 다르다. 여전히 달동네 같은 동네, 바글바글한 셋집에 모여 사는 건 다르지 않다. 사실 세상은, 오히려 그때보다도 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간의 격차는 심해졌고, 삶은 각박해 졌는데, 그 시절 아둥바둥 살아보겠다고 삶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다 뒤엉켜 버렸던 주인공들의 삶은 한결 온순해 졌다. 
작가의 연배가 그 세월만큼 깊어진 탓일까. 야망을 위해 자신을 던지다 스러져 버린 주인공 대신, <유나의 거리> 속 주인공들은, 서로 전염된 듯, 유하게 삶의 고비를 넘긴다. 제비에게 걸려 돈도 뜯기고, 맞기도 하던 미선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살 방도가 없다 강도를 계획하던 남수는 역시나 그 바닥 일이지만 새로운 삶의 활로를 찾는다. 쓸쓸한 왕년의 조폭 할아버지는 이제 삼각 관계에 빠질 정도로 노년의 삶에 새록새록 재미를 찾아가고, 전남편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칠복 부부 역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겨 가고 있다. 이십년 전, 이웃이란 이름으로 등을 쳐먹고 날르던 이웃들은, 오히려 각박해진 세상에 서로의 등을 빌려준다. 유나도, 창만도, 그리고 다세대 주택에 사는 모든 이들이, 가족은 없지만, 더 가족처럼 서로에게 등을 부비며 어우러져 살아간다. 

여전히 다수의 가족 드라마들이, 세상에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고 목놓아 외치는 세상에, <유나의 거리>속 세상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번듯한 가족으로 보이는 가족들도 들여다 보면 제대로 된 집구석이 없다. 조폭에 이혼 경력이 있던 한만복은 술집에 다니며 기둥 서방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지금의 아내를 구해 지금의 일가를 이뤘다. 한만복의 전처에게서 낳은 딸 다영은 마더 컴플렉스는 있지만, 그래도 말 안통하는 아버지 보다는  새엄마랑 그럭저럭 잘 지내는 딸이다. 원앙같은 부부인줄 알았던 칠복-혜숙 커플은 알고보니, 마약 중독자 혜숙 남편을 피해, 딸조차 놔두고 야반도주한 불륜 커플이다. 어디 그뿐인가, 창만이 이상적 모델인 달호-양순 부부는 전직 형사와 소매치기의 조합이다. 들여다 보면 문제 투성이의 가족이라도, 여전히 한 지붕 아래, 한 이불을 덮으며 알콩달콩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살아간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유나를 내쫓으려 하거나, 잠시 잠깐 눈앞의 이익을 위해 서로에게 칼을 빼들었다가도, 서로의 사정을 알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유나네 동네의 삶이 아마도 김운경 작가가 우리 시대 전하고픈 메시지인 듯하다. 이십년 전보다도 한층 더 서로가 뿔뿔이 흩어져, 가족 조차도 멀어져 가는 세상에, 그러지 말고, 서로가 의지하며 살아가자고, 그러면 조금은 덜 외롭고, 덜 힘들 것이라고. 산타 클로스같은 창만의 존재를 통해, 그가 뿜어내는 온기에 조금씩 따스해져 가는 다세대 주택 사람들, 그리고 유나를 통해, 이렇게도 서로 기대며 살아갈 수 있다고, 김운경 작가는 설득한다. 


by meditator 2014. 9. 3. 06:44

소설 <삼총사>는 아직 절대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않은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뒤마의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루이 13세는, 실권은 쥐고 있는 리슐리외 추기경과 대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소설 속 3총사와 달타냥은, 왕에 충성을 바치는 총사대원으로 리슐리외와 그의 근위대원들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왕을 흔들기 위해,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와 앙숙이던 영국과의 갈등을 부추겼으며, 결국 영국군이 프랑스로 침입해 오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이 지점,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프랑스와, 그런 프랑스를 위협하는 영국이라는 외적의 위기가, 드라마 <삼총사>에서 명청 교체기의 풍전등화와 같은 17세기의 조선으로 절묘하게 되살아 난다. 
8월 31일 방영된 <삼총사>에서 소현 세자(이진욱 분)는 말한다. 자신은 세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왕이 되는 바람에 자기 역시 세자가 되어 버린 사람이라고. 그렇다. 소현 세자의 아버지 인조(김명수 분)는, 신하들의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옹립되었다. 드라마에서 김자점은 이미 그런 인조를 왕이 될 깜냥이 아니라고 규정내린다. 왕이 될 깜냥이기 이전에, 인조는, 그 자신이 왕이었던 광해군을 밀어내고 신하들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에, 평생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산 인물이다. (후에 그의 이런 불안감은 아들 소현 세자에 대한 질시와 의심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은 그의 통치 능력으로 증명되지 못한 채 그의 치세에 두번의 호란을 겪게 된다. 그렇게 아직 절대왕권을 지니지 못한 루이 13세의 허약함은, 신하들에 옹립되어 그 위치가 불안한 인조로 대응된다. 


드라마 속 <삼총사>는 정묘 호란이 이후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다. 1627년 아직 청이라는 국호를 내세우지 않은 후금은 조선을 침공한다. 아직 임진왜란의 상처에서 채 극복하지 못한 조선은 후금의 침략에 당황했고, 역시나 임진왜란 때처럼 각지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그나마 황해도 까지 내려온 후금에 대항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당시 후금은 이제 막 중국 대륙에서 그 세력을 키워가던 중으로, 중원의 명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친명 사대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조선을 본보기삼아 치려했던 것이었기에, 조선과 후금 사이에 쉽게 화의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왜에 의한 상흔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오랑캐가 낮잡아 보던 후금에 의해 국토를 다시 한번 유린당한 상처는 조선에 깊게 드리워졌다. 드라마<삼총사>에서 매일 밤, 후금의 장수 용골대에 의해 시달리는 인조의 심약한 정서는 그런 조선의 트라우마를 반영한다. 하지만 정묘호란 이후, 여전히 왕권을 강화하지 못한 채 신하들의 눈치만 살피는 인조와 달리, 후금은 명을 밀어내고 중국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고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가 아닌, 중국 대륙의 패자로서 군신 관계를 요구한다. 그리고, 드라마 속 김자점 등 시류에 민감한 무리들은, 벌써 그런 청의 강력한 세력을 감지하고, 청과 은밀하게 손을 잡을 것을 시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치 소설 속 리슐리외 추기경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전쟁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세자를 다치게 한 적을 뒤쫓다 사신으로 온 용골대 무리에게 쫓기게 된 박달향에게 최명길은 말한다. 하필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무과에 급제한 박달향이 맞닦뜨린 조선이, 조만간 전쟁을 다시 한번 치르게 될 지도 모를 풍전등화의 상황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최명길의 안타까운 정의에 대해, 이제 막 벼슬길에 들어선 박달향이 어떤 입장인가, 혹은 어떤 생각인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처음부터 세자 무리에 휩쓸려 불의를 제압했던 그 활약처럼, 소설 속 달타냥처럼 그저 의협심이 강한 인물 정도로 그려질 뿐이다. 아니, 아직 그를 휘말아 감싼 정치적 격변에 어리둥절해 있을 뿐이라고나 할까.

(사진; BNT뉴스)

오히려, 드라마 <삼총사>에서, 극을 이끌어 가고 있는 주된 캐릭터는 소현 세자이다. 그의 말처럼 애초에 세자로 태어나지 않아, 궁밖이 더 편한 그는 그의 익위사들과 함께 밤이슬을 맞으며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소현 세자와 그의 익위사 두 인물 들 역시, 이제는 강대해진 청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김자점등의 권신들의 전횡에 대해 왕권을 지키고자 하는 의로운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이제 3회를 맞이한 드라마 <삼총사>는 소설 속 17세기의 불안정한 왕권으로 인해 내분과 외환이 분분했던 프랑스 정가를 절묘하게, 허약한 왕권, 외침의 위협이 극대화 되어가는 17세기의 혼란기 조선으로 등치시킨다. 하지만, 등치의 절묘함을 넘어선, 극적 긴장감이 회를 거듭할 수록 배가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주 1회 방영의 모험을 하며,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극을 지향코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 1회의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한 회 분량의 내용이 흡족치 못하다. 만약 내일 또 방영되는  주2회라 해도, 조금은 처지는 템포의 극 진행을 보여주고 있다. 미령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와, 용골대와 얽힌 사연은 궁금하지만, 이미 2회에서 그에 대한 궁금증을 충분히 시청자들에게 뿌려놓은 상황에서, 3회는, 다시 한 주를 기다려야 하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회차였다. 제작진은 3부작에 이르는 시리즈라는 방대한 기획 하에 매주 방영을 하겠지만, 시청자의 조바심은 과연, 그걸 감내할 수 있을지, 갸웃해진다. 

아마도 그것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진정한 주인공인 소현세자임에도, 삼총사라는 고전의 틀을 빌려와서, 박달향이라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설정됨으로 인한, 자중지난같아 보인다. 더구나, 많은 제작비를 고려한 듯한, 박달향의 급제례 같은 건, 주 2회 방영시에나 용인되는 애교가 아닐까 싶다. 주1회의 애청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소설 <삼총사>의 형식적 캐릭터 배분은 조금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를 있을 듯하다. 이미, 시대적 배경의 절묘함만으로도, 드라마 <삼총사>의 터전은 풍성하다. 


by meditator 2014. 9. 1. 06:56

청춘(靑春), 수필가 민태원 선생은 그의 작품 <청춘 예찬>을 통해 말한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고, 청춘의 피는 끓고, 그 피는 거선의 기관과 같은 힘을 가지고, 인류는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역사를 꾸려왔다고. 

하지만, 막상 그 청춘이란 이름이 붙여진 세대들이, 청춘이란 말을 만끽한 적이 있을까? 오히려, 그 뜨거운 피에 짖눌려 허덕이기 십상이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청춘이란 말은, 그 시절을 지나쳐 회고하는 자에게,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단어이기가 십상이다. 
그렇게, 이제는 청춘이라는 말을 회고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더 어울릴, 흰 수염이 희끗희끗하게나는 나이의 윤상, 유희열, 이적이 <꽃보다 청춘>의 주인공이라고 했을 때, 고개가 갸웃해졌다. 그들이 흘러간 한때 '청춘의 상징'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마흔을 훌쩍 넘긴 그들이, 꽃보다 청춘이라고?

하지만 , 9부작을 마친 <꽃보다 청춘>을 보고 난 후, 이제는 기꺼이 그들에게 '청춘'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싶다. 그들은, 여전히 청춘이다. 여전히 꿈을 꾸고, 젊어 꾸었던 꿈을 되찾고, 그리고 다시 꿈꾸기를 마다하지 않으니까. 
처음 마추픽추로 여행을 떠난다 할 때, 유희열은 말한다. 젊어 한 때, 자신의 꿈이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다 보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말을 잇는다. 그런 것이 자신의 꿈이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아왔었다고. 그리고, 김치찌개를 먹다 얼떨결에 끌려온 페루행을 통해, 자신이 그런 꿈을 꾸었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다고. 
마추픽추를 꿈꾸었던 젊은 시절의 꿈을 상기한 것만이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제는 자기 자신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슬금슬금 실감하게 되면서, 자신감이 조금씩 떨어져 가던 시기, 오랜 벗들과 함께 힘들게 마친 여정을 뒤로 하고, 유희열은 이 경험을 지렛대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안개에 휩싸였던 마추픽추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자, 유희열은 눈물을 흘린다.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 건, 바로 시간이었다. 처음 윤상과 이적을 만나던 그 시간으로부터, 이제는 음악보다는 중년의 가장인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익숙해진 지금까지의 시간이 안타까워 흘리는 눈물이었다. 하지만, 유희열의 눈물을, 그저 가는 시간이 아쉬운 회한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 아까웠다는 건, 곧 그 시간이 그만큼 소중했었다는 확인의 눈물이었다. 나이들어가는 자, 그 누구라도 가는 세월을 안타까워 하지만, 그 안타까움의 실체를 가늠하지 못하기가 십상인 반면, 마추픽추 정상에 오른, 유희열은, 자신이 벗들과 함께 살아왔던 그 시간의 소중함을 만끽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바로 그러기에, 여전히 유희열은 '청춘'이다. 그와 그의 벗들의 청춘은, '물방아같은 심장의 고동'이 느껴지는 그 청춘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삶의 긍정성을 믿고, 벗들과 다시 한번 살아보리라는 의지를 가진 한에서 다르지 않다. 술을 끊고, 이제는 약도 끊어보겠다 말하는 윤상의 다짐도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100세 시대에, 딱 반에 못미치는 중년을 '청년'이라 규정한, 나영석 피디를 비롯한 제작진의 혜안은 거의 우리 시대의 새로운 '청춘'에 대한 정의이다. 

(사진; 데일리안)

할배들의 노년의 여행은 애틋했고, 누나들의 여행이 숨겨진 비경같았다면, 이번 <꽃보다 청춘>의 20년지기 친구들의 우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겨웠다. 스무 살 무렵 까마득한 선배와 후배로 연을 텄던 친구들은, 이제 이십 여년이 흘러, 스물 다섯 살 선배가 어려웠던 후배의 말 한 마디에 나스카를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타기를 마다하지 않는 관계로 역전되었다. 그때도 애같고, 지금도 여전히 애같다지만, 여행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도 든든했던 막내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다. 90년대의 대명사였던 이들, 그리고 윤종신이 표현하듯, 여전히 우리 문화의 '섬'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그들은, <꽃보다 청춘>을 통해, 마치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보듯, 친근하게 다가왔다. '감성 변태'라던 유희열은, 그 어느 프로에서보다 진심어린 카리스마가 돋보였으며, 그의 학력과, 아름다운 노래를 넘어선, 이적의 넉넉함도 빛이 났다. 

그렇다면 여행 내내 '민폐'였던 윤상은 어땠을까? 아마도 윤상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이적과 유희열이 그만큼 빛났을까? 반문해 보아야 한다. 한때 하늘같던 선배였던 그가, 후배들과 함께 나이들어 가며, 나이를 들먹이는 '꼰대'가 되지 않고, 그들 앞에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할 줄 알고, 기꺼이 도움을 받을 줄 알고, 그들과의 여행을 통해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는 그 모습이, 사실은 <꽃보다 청춘>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의 윤상 또래의 남자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들여다 본다면, 여정 속의 윤상이 더 빛날 것이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저녁마도 술잔을 기울이고, 자신의 약함을 큰소리로 숨기는 우리 사회 중년의 익숙한 중년 남자들의 모습들 속에서, 윤상의 나약함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소탈한 형인 윤상이기에, 그는, 동생들과의 여행을 통해, 낼 모레 오십이 나이에도,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꽃보다 청춘>이 남긴 치유는, 리더 유희열이나, 능력있는 참모 이적이 아니라, 민폐였던 윤상을 통해 얻어진다. 삶에서 무기력했던 그가, 어렵게 동생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하고자 용기를 내고,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술을 끊고, 이제 술 대신 의존했던 약조차 끊으려는 용기를 내는 모습은, 자신의 나약함을 남자라는 이름으로 숨긴 채 고통받는 우리 사회 남자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시간이다. 아직은 '청춘'이니, 어렵더라도 다시 시작해 보자고, 윤상이 말은 건넨다. 

그렇게 어렵게 여행을 시작하여, 이제는 좋은 아빠로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윤상도, 함께 해왔던 시간이 아름다원 그 시간이 아쉬운 유희열도, 덤덤한 듯 하면서도 끝내 눈물을 숨길 수 없었던 마흔의 나이에 흰 수염이 나기 시작한 이적도, 여전히 그들이 다시 함께 살아갈 의지를 가진 한에서, '청춘'이다. 인류의 역사를 바꿀 청춘의 이상은, 사실 그리 거창하지 않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서든, 꿈꾸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 모두 청춘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그들을 보며, 가슴 뜨뜻한 용기를 얻는다면, 그 역시 '청춘'의 전염이다. 


by meditator 2014. 8. 30. 07:19

이솝 우화 중 멋부리다 된통 당한 까마귀 이야기가 있다. 

시커먼 자신의 털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했던 까마귀는 다른 아름다운 새들의 털을 하나씩 모아 자신을 치장하고 자신도 빛깔이 아름다운 새인양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몸에 꽂은 깃털이 자신의 털인 줄 알던 다른 새들이 그의 몸에서 자신의 깃털을 찾아내고, 결국 까마귀는 초라한 검은 깃털의 자신의 몰골로 돌아와 몹시 창피를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진화동물학으로 가면 좀 달라진다. 새들의 경우, 무리 중 몸이 아프거나, 털 빛깔이 좋지 않은 동료가 있으면, 그로 인해 자신들이 적들에게 노출될까 하는 두려움에, 동료들이 앞장 서서 아픈 새를 쪼아,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는 잔인한 습성이 있다고 한다. 
인간 사회를 빗대어 설명한 이솝 우화 속 까마귀가 인간의 허세를 상징하고 있는 건 당연하지만, 과연 실제 아픈 동료를 앞장서서 쪼아대는 새들의 습성은 인간과 다를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착해빠져서'라던가, '착하기만 하면 손해본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리고, 어느 틈에,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불이익을 당했을 때, 자연스레 반문하곤 한다. 내가 너무 착했나? 라고. 아니, 나만 너무 착했나? 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들'은 '착하면 손해보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바로 그 '착한 사람들'의 상처를 <괜찮아 사랑이야>는 논한다. 

(사진; 스포츠 월드)

1회, 형 장재범(양익준 분)이 파티를 벌이던 수영장으로 찾아와 다짜고짜 장재열(조인성 분)을 찌를 때, 그걸 보고 울부짖던 소년 한강우(디오 분)의 정체가 12회에 이르러서야 분명해 졌다. 장재범이 줄곧 동생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던 그 사건의 실체가, 코난같은 정신과 의사 조동민의 조사로 밝혀졌다. 결국, 의붓 아버지를 죽인 건, 형도, 동생도 아니었고, 죽지 않고 정신을 차린 남편을 두려워했던 어머니였던 것이라는 걸. 그리고, 형의 등에 업혀가던 동생은, 어머니가 불을 지르던 장면을 목격했고, 해리성 기억상실로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형을 범인으로 지목하였으며, 하지만, 그렇게 형을 감옥으로 보냈다는 죄책감에서 결코 놓여날 수 없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열 여섯의 나이에 이미 '방어기제'라는 단어를 알 정도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조숙한 소년은, 하지만, 의붓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그리고 그 사건의 충격으로 진실을 망각한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그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서 썩어야 했던 형에게 한없이 미안함을 느끼는 마음 약한 동생이었다. 그런 그의 '착한' 마음은, 그의 냉철한 이성을 넘어, 그에게, 자신과 같은 한강우를 보살펴 주는 환상을 통해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 즉, 그의 정신적 '방어기제'는 그에게 정신증을 선사한 것이다. 

그가 지해수를 사랑하면 할 수록, 즉, 그가 행복을 느끼면 느낄 수록, 한상우가 그에게 나타나는 빈도수가 늘어나는 것은, 그의 무의식이, 그가 행복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결코 침대에서 잘 수 없듯이, 무의식의 장재열은, 자신의 행복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의식의 그는 여전히 죄책감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열 여섯의 나이에 불가항력적인 가족 범죄를 목격한 소년에게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그런 소년의 안타까움은 훗날 어른이 된 소년에게 나타난 한강우를 보살피는 것으로, 자신의 안타까움을 역설적으로 표명한다. 대신 그는 어머니의 죄를 형게게 넘기고, 형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넘기는 것으로 그 '일'을 해결하려 하지만, 여전히 '착한' 그에게 그것은 성에 차지 않는다. 
투렛 증후군의 박수광(이광수 분)도 마찬가지다. 그가 일하는 까페를 찾아온 아버지, 그를 여전히 가치없는 존재로 여기는 아버지에게, 수광은 말한다. 어릴 적 자신이 투렛 증후군을 보였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보듬어 주었더라면, 자신의 병이 이토록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투렛 증후군을 보이는 그를 소녀(이성경 분)가 안아주자, 조동민 말처럼 오래된 감기같은 그의 증상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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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스타 뉴스)

결국 12회에 이른 <괜찮아 사랑이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제 만연하고 있는 각종 정신증의 증상이, 상당수가, 그들이 '착해서', 어찌하지 못해, 드러나는 '방어기제'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착해서 당하고, 착해서 아프다 말하지 못하던 그들이, 보이는, 최후의 자기 표현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가, '착하면 안된다'라고 몇 십년 동안, 다짐하고, 윽박지르던 것들이, 오늘에 이르러 사회적 증후군처런, 정신병증의 범람으로 귀결되게 되었다는 것을, 12회에 이른 드라마는 말한다. 그리고 '오래된 감기'같은 수광의 투렛 증후군이,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소녀의 입맞춤으로 완화되듯이,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장재열은 왜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하느냐는 지해수의 질문에 답한다. 자신의 어릴 적 상처를 알고, 그에 더해, 여전히 자신에게 짐과 같은 어머니와 형의 상황을 알고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지해수같은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없어서 라고. 한강우의 잦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장재열은, 이해받고 싶고, 자신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받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는 말한다. 상처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들여다 보고 이해하자고. 착해서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착해도 이해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게 아니냐고, 나즉히 읊조린다. 


by meditator 2014. 8. 29. 06:22

'진짜가 나타났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 어울리는 한 마디라면, 이게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연예인들의 뉴욕 체험기를 장황하게 다루었지만 세간의 관심을 얻지 못했던 수요일 밤 11시 예능의 자리에, 진짜 일반인들의 삶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달콤한 나의 도시>, 2006년 발행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정이현씨의 소설의 제목을 고스란히 옮겨왔다. 제목만이 아니다. 도시에 사는 미혼 여성의 일과 사랑을 다루었던 소설의 내용이 고스란히 예능의 한 장르가 되어 등장한 것 역시 다르지 않다. 소설에서도 그랬다. 달콤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던, 순도 100%의 다크 초콜릿처럼 쌉싸름하기 이를데 없던 도시 여성의 삶처럼, 첫 방송을 선보인, 예능 <달콤한 나의 도시> 역시 달콤하기 보다는 역시나 쌉싸름하다. 도시에서의 그녀들의 삶은 녹록치 않다. 


방송이 시작되자 마자, 매우 매운 것을 먹고 씩씩거리거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후배를 야단치거나, 남자 친구에게 벌컥 화를 내는 모습으로 네 명의 출연진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루 고객 200명을 거느리는 이제는 중진급에 속하는 미용사 최송이, 스포츠 아나운서의 꿈은 접었지만, 여전히 인터넷에서 미모를 뽐내며 영어 강의를 하는 최정인,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레지던츠 4년차의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임현성, 항공대 출신 최초, 로스툴 출신 최초 라는 최초의 직함을 두 개나 단 3년차 변호사 오수진,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만한 아름다운 미모에, 내로라 하는 직업을 가진 그녀들, 하지만, 프로그램은 그런 그녀들의 화려한 외면에 숨겨진 고충을 토로하며 새로운 프로그램의 성격을 드러낸다. 잘 나가는 미용사이지만, 여전히 고객의 관리와 성과가 그녀를 짖누르는 최송이,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변호사이지만, 다짜고짜 자신과의 연락을 두절한 전 남친과의 아픈 사연을 가진 오수진, 그리고 600일이나 사귄 남친이 있지만, 그에게선 결혼하자는 말을 들을 수 없어 답답한 최정인까지 다짜고짜 화를 내고, 매운 걸로 풀어야 하는 그녀들의 속사정은 복잡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터넷 강의라는 특수한 환경이,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미모의 최정인에게, '돼지'라던가, '살찌는 dna'라는 수모를 겪게 만들고,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을 강요한다. 3년차의 변호사인 오수진은 선배와 폭탄주를 곁들인 회식을 하고도 자기 뺨을 치며 사무실로 들어와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하루 열 다섯 시간의 고된 업무에 시달리게 한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로 만나,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 임현성의 커플은, 연인이라기엔, 차라리 오래된 부부처럼 친근해도 너무 친근하다. 하지만, 친근한 건, 친근한 거고,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는, 뭐 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아마도 <달콤한 나의 도시>가 가진 가장 최고의 장점은, 바로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의 도시를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가장 '진짜'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일 것이다. 연예인들이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며 어디가서 살아보고, 어떤 직업을 체험하는 '가짜' 리얼리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리얼리티'로서의 대한민국 여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일과 사랑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진; nsp 통신)

물론 여전히 그것이 정말 진짜냐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다큐'의 연출성 여부가 논란이 되는 세상에, 예능으로서 일반인 리얼리티의 연출성의 한계 역시, 한 때 수요일 시간대의 영광을 누렸던 <짝>처럼, <달콤한 나의 도시>가 가진 태생적 위험 요소이다. <짝>이 일반인 리얼리티의 요리 여부에 따라 영광과 몰락을 누린 것처럼, <달콤한 나의 도시> 역시 연출의 관점과 욕심에 따라, 진솔한 젊은이들의 속내를 다룬 프로그램을 기억되거나, 연예인처럼 가쉽에 시달리는 일반인의 흥망성쇠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첫 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반인의 기준보다는, 연예인에 더 어울릴 듯한, 예전 <짝>으로 치자면 모든 남성들이 그녀 앞에 줄을 설 것같은 미모의 여성들이 동시대의 여성 표준처럼 등장한 그것 자체가 문제 발생의 소지가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창 리모컨을 쥔 여성들의 입맛에 따라,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리얼리티 예능이, 이제 여자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해보겠다는 취지 자체는 반길만 하다. 첫 회에서 보여지듯, 그저 그녀들의 일상임에도 골라먹는 재미가 있듯이, 다종다양한 동시대 여성들의 고민을 담는다. 로맨틱 코미디의 어느 한 장면에선가 만나본 듯한 이야기들임에도, 그들이 일반인인 한에서, <달콤한 나의 도시>가 풀어낸 이야기는 진솔하고 신선해 보인다. 그녀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4. 8. 28. 06:07

2011년 3월 중동 민주화 바람을 타고 시작된 시리아의 민주화 시위도 처음엔 소규모의 평화적 움직임이었다. 학생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구호를 벽에 써놓았을 뿐인데,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고, 이에 시민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국민들의 평화적 시위에 정부는 군을 동원했고, 4월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이루어 졌다. 탱크가 주민들이 사는 지역에 진입하여 발포했고 5월 중순 이후 사망자는 1000명을 넘겨 버렸다. 결국 공분한 시민들과, 군의 폭력적 진압에 반기를 든 군인들이 탈영하면서 비폭력적 저항은, 전국민적 폭력적 저항, 내전으로 변화되었다. 시위의 발원지 데라를 비롯한, 홈즈, 다카스커스, 베니야스, 하마 등이 반정부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2014 EIDF 영화제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희망'을 찾아보기 힘든, 시리아에서, '희망'을 향해 몸부림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바로 탈랄 덜키 감독의 <홈즈는 불타고 있다>와 조 피스카델라 감독의 <시카고 걸>이 바로 그것이다. 

두 영화 모두 시리아 반정부 운동에 참가한 젊은이들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지리적 간극은 크다. 조 피스카델라 감독의 <시카고 걸>은 시카고에 사는 시리아 출신의 대학생 알라의 시선에 담긴 시리아 내전을 다룬다. 


19살의 알라는, 비민주적인 시리아가 싫어 미국으로 이민온 시리아 인 가정의 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살고 있어도 자신이 시리아인이라는 정체성을 저버러지 않은 그녀는 만리타국 미국에서나마 시리아 민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자 한다. 그녀가 택한 방법은, 가장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인, 핸드폰과 컴퓨터이다. 이들 기기를 이용하여, 시리아에서 반정부 활동을 벌이고 있는 활동가들의 소식을 전하고, 그들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또한 자신을 리트윗하는 전세계의 이웃들에게 시리아의 현 상황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런 알라에게는 그녀의 소중한 이웃들이 있다. 그녀 또래의 젊은이들로, 시리아에서, 혹은 그녀처럼 시리아에 살지 않지만, 시리아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젊은이들이다. 일면식도 없는 그들이, 지금 현재 그녀의 가장 친한 이웃들이고, 언젠가 그들과 함께 시리아를 방문하는 것이 그녀의 버킷리스트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시리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턱이 부서져 형체조차 보존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언을 따라, 민주주의 도정에는 참여하지만 총을 들지 않은 채, 시리아의 현실을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려 했던 친구는 그 사실을 전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저격의 대상이 되어 숨을 거둔다. 또한 그처럼 미디어 운동에 참여했던 시리아의 친구는, 자신이 전하는 소식의 의미를 회의한 채, 결국 무기를 든다. 알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sns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시리아의 소식을 전한다는 사명감은, 시리아 내전이 깊어질수록 회의를 낳는다. 사람들이 안다는 것과, 시리아 내전의 승패는 정비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라 역시 회의한다. 친구들이 목숨을 걸고 찍은, 자신이 올린 유투브의 동영상이 과연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가. 다큐의 마지막 알라도 그의 아버지와 함께 시리아 행을 택한다. 아직 무기를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sns로 소식을 전하는 소극적 참여에서 조금 더 나아가 조국 시리아의 반정부군이 필요로 하는 각종 약품 등을 전하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시리아로 향한다. 그것이 그녀가 택한 다음의 선택이다. 

7,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젊은이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크지 않았듯이,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에서도 역시 젊은이들의 선택에는 여지가 없다. 촉망받던 국가대표 골기퍼 바셋은 시위대에 참여하고, 그의 인지도는 곧 그를 시위대의 선두에 세운다. 그는 시위대를 이끌며 그만의 열정과 노래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런 그를 미디어 활동가인 오사마가 담는다. 2014년 선댄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홈즈는 불타고 있다>이다.

하지만 시리아의 상황은 젊은 바셋을 그저 시위대의 선봉으로만 놓아두지 않는다. 정부군은 무차별 발포를 하고, 그 과정에서 그의 친구들과 친지들이 끊임없이 숨을 거둔다. 그들이 사는 홈즈는 저항의 근거지가 되어, 정부군으로부터 급습당하고, 반정부시위대는 점점 고립된다. 결국 노래를 통해 시위를 선동하던 바셋은 총을 든다. 시카고 걸에서 카메라를 들었던 알라의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탱크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공습을 하는 정부군에, 그들의 평화 시위는 너무 무력하다. 정부군과의 대치, 정부군은 홈즈의 시민들을 소개시키고, 반정부군을 고립시켜 진압하려 하지만, 바셋을 포함한 반정부군들은 정부군의 폭격으로 허물어진 집과 집 사이의 벽들 사이로 도망다니며 게릴라식의 저항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결국 홈즈는 고립되고, 고립된 홈즈의 지원을 위해 외곽으로 나갔던 바셋은, 쉬이 홈즈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정부군의 고립보다도 힘든 건, 바깥 사람들의 패배감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했던 벗들을 모두 잃은 바셋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심지어 그를 쫓으며 그의 활동을 기록하던 오사마조차, 정부군에 잡혀 행방이 묘연하다. 다큐의 마지막, 바셋은 그의 선택을 따른 탈출 군인들과 함께 홈즈를 향한다. 기약할 수 없는 길이다. 한때 그가 장난스레 흥겹게 불러제꼈던 '순례자가 될게요`~'라는 노래가 마치 그의 미리 불러진 장송곡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ID: 시카고걸

한때는 미래가 기대가 되는 축구 유망주, 하지만, 폭격을 맞아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게 된 바셋, 그런 그에게 친구는 대신 코치가 되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셋은 고개를 젓는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대장장이나 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으면 그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소망은 힘이 없다. 그에게 그런 소망이 이루어질 미래보다, 그의 곁에서 수시로 죽어가는 친구들의 죽임이 더 현실이다. 그에겐 더 이상 버틸 힘은 없고, 사람들은 패배를 실감하지만, 바셋은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멈출 수 없다. 마지막 다시 홈즈로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노래를 부르던 그지만, 혼자 남겨진 그는 종종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는 지치지 않고 다시 싸우기 위해 일어난다. 미국에서 중산층 가정의 번듯한 대학생으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알라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sns를 통해서나마였지만, 그의 친구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혹은, 미래가 촉망받언 엘리트 청년이 결국 무기를 들었다. 알라의 선택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미래는 기약할 길 없다. 대신, 그들은 끝나지 않는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의 희망을 싹티운다. 이것이, '희망'을 주제로 한 EIDF에 이 작품들이 초대받은 이유이다. 


by meditator 2014. 8. 27. 15:33

8월 13일 개봉한 <해무>가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장벽을 뚫고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1000만 관객의 기록을 수립하고도 여전히 파죽지세의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명량>과 전체 관람가의 <해적>의 흥행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작품성만을 믿고 연령제한가를 감수한 고진감래의 성취다. 

이런 <해무>의 성과는 같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던 <신의 한 수>나 <아저씨>에 비해서도 빨리 달성됐고, 자체 배급망을 가진 CJ와 롯데를 상대로 한 투자배급사 NEW의 고군분투의 결과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청소년 관람 불가의 영화로 이 정도 기록이라면 무난하게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을 거라 예상되지만, 극장 체인을 가지지 않은 뉴의 <해무>는 다른 영화들의 상영관 과점을 넘지 못하고, 상영관이 축소되는 처지에 있다. 보고 싶어도 마음 놓고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19금 스릴러 최고의 흥행작 <추적자>보다 2일 빠르게 100만 관객을 돌파했음에도 이 상태라면 200만 고지는 물론, 손익분기점은 언감생심이 될 수도 있다.

<해무>에서 선장 역할을 맡은 배우 김윤석이 이 영화를 두고 '용감한 선택'이라고 표현한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심의 과정에서 15세 관람가 버전까지 마련했던 영화는 원래 작품이 하고자 했던 바를 포기하지 않고자 '19금'을 감수했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만난 사람들 중에는 <해무>가 보여준 선상 잔혹사를 이겨내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그런 와중에서도 피어나는 선원 동식과 조선족 홍매(한예리 분) 두 남녀의 적나라한 사랑에 대한 호불호도 갈린다. 초반에 막내 선원 동식(박유천 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배에 도끼를 댔던 사람들이 해무가 드리워진 전진호 안에서 아비규환의 대립을 보이는 것에 대한 급격한 온도차에 대해서도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리얼리티'로서의 이야기를 넘어서, '묵직하게 은유의 그물을 치고 은밀하게 생각의 미끼를 던진다'는 영화 평론가 심영섭의 평처럼,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전진호와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으로서 전진호 선원들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 <해무>는 달리보인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과 함께 배를 탄 호랑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순간, 영화가 무궁무진한 철학적 담론의 바다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해무>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영화의 묘미에 빠질 수 있다. 우선은 이 영화의 제작자가 봉준호 감독임을 전제로, 그가 <설국열차>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적 계급 관계를 열차의 나뉜 칸을 통해 설명해 냈듯이, <해무>는 '바다로 간 <설국열차>'라고 해석하는 관객들이 있다. 선장 철주는 기성세대를 대변하고 그들의 질서를 옹호하는 지배 계급을 상징하며, 기관장이나 그의 결정에 호응하는 선원들은 기성 질서에 순응하는 사람들로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밀항을 하기 위해 올라탄 조선족들의 해석 또한 다른 묘미를 가진다는 점이다. 그 중 밀항의 와중에서도 책을 들여다보는 조선족 선생은 지식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선장이 난폭하게 밀항자들을 몰아붙일 때 가장 앞장서서 조선족들을 독려하여 어창으로 내려가는 그의 모습은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상징되어진다는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진호를 '바다로 간 설국열차'로 해석하면, 동식의 사랑은 그저 사랑이 아니다. 돈과 권력에 순응하는 기성세대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젊은 세대의 열정이요, 순수함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전진호를 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장 철주를 향해 질주하는 동식은 또 한 사람의 꼬리칸 승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뭍으로 걸어 나온 동식과 홍매는 <설국열차> 마지막 장면 하얀 설원 위에 던져진 요나(고아성 분)의 '막막함'과 다르지 않다.


DIARY


이런 사회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본 <해무>를 보다 폭넓게 신화적 영역으로 확장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신화 속 젊은이들이 아비 세대를 극복하기 위해 아비를 죽이는 '살부'의 형식적 과정을 건너듯이, 동식이의 사랑은 바로 그런 아비 세대를 극복하기 위한 서사적 형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배에 여신이 상징물로 담기고 여성의 이름을 붙이듯이, 신화적 상징으로 배는 여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아비 세대는 자신들의 여성인 전진호에 또 다른 여성 홍매 등이 타는 것을 불온한 징조로 여긴다. 그리고 당연히 젊은 세대는 아비 세대의 여성이 아닌 젊은 여성에게 매료되어 아비의 세계를 파괴한다. 

하지만 이는 파괴가 아닌, 탄생이다. 동식은 홍매의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이불 등을 들고 오면서 손에 사과 한 알을 함께 들고 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덴동산의 그 선악과를 상징하는 듯한 사과를 말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나누어 먹은 순간, 더 이상 그들에게 에덴동산이 낙원이 아니듯이, 사랑을 하게 된 동식과 홍매에게 아비 세대의 불온한 공간 전진호는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전진호를 파괴하고 아비들을 죽이지만,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 동식이도 그 대가가 마냥 행복하지 않다. 낙원을 떠난 아담과 이브가 삶의 고난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듯, 동식과 홍매가 만난 건 현실이다. 결국 살부의 죄과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의 눈을 찌른 채 길을 떠난 오이디푸스와, 홍매를 구하지만 그녀를 잃은 채 일용직 근로자가 되어 중국인 거리를 전전하는 동식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STILLCUT


동식과 홍매의 도발적 사랑은 마치 <금지된 장난>의 소년과 소녀와도 같다. 부모를 잃은 채 전쟁고아가 된 폴레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종교적 금기를 어긴 소년의 행동은 홍매의 말 한 마디에 몰매를 맞는 조선족 밀항자를 몸으로 막아주는 동식의 맹목성으로 이어진다. 

완호 아제(문성근 분)의 죽음 이후 그들이 벌인 눈물의 정사는 사랑보다는 생존을 향한 절망 속의 몸부림에 가깝다.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잊고자 금지된 장난을 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금지된 장난>의 어리고 나약한 폴레트와 미셸이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함께 할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듯이, 세상 속으로 나온 동식과 홍매는 무기력하게 진짜 세상에 휩쓸려 간다. 


묘하게도 <해무>는 첫 번째 관람할 때는 영화의 자극적 상황에 눈을 빼앗긴다면, 그런 상황을 한번 거르고 본 두 번째 이후의 관람에서는 영화 속 인물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바로 선장 철주의 마지막이다. 배를 살리기 위해 돛을 들어 올리던 그는 그 돛을 매놓은 밧줄에 발이 감긴다.



STILLCUT


아마도 <해무>를 본 다수의 관객들은 철주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상징으로서 공감했을 것이다. 철주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는 각각의 캐릭터로서의 인간 군상이다. 누군가는 집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돈을 위해, 혹은 누군가는 양심을 위해,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습성, 혹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대다수의 그 핵심을 <해무>는 콕 찌른다. 

진짜 <해무>가 불편하다면, 그건 전진호 안에서 벌어진 조선족 몰살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잔혹하리만치 사실적으로 그려낸 인간 군상들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섬에 표류된 25명의 소년들이 보여준 적나라한 인간 본성 <파리 대왕>의 해상판 버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진실을 직시하기가 불편한 것을 겉으로 드러난 잔인한 묘사로 면피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들이 내놓은 이러한 여러 해석 중 어느 것이 맞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영화 <해무>의 진짜 묘미다. 지금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고민,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회,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삶에 따라, <해무>는 안개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래서 볼 때마다 다르다는 평도 눈에 띈다. 

물론 극장에 가서 꼭 심각한 영화를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올 한 해 너무나 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우리 사회의 속살을 지켜 본 우리들, 몇 번의 웃음으로 쉽게 잊거나, 맹목적인 지도자에 대한 향수로 그 모든 것들을 지워내는 대신, <해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의 미끼'를 던져보는 건 어떨지. 다시 한번 <해무>를 강추한다. 


(이 글은 디시 인사이드, 기타 드라마 갤러리, 하필시크미랑동 님의 <리뷰> 내가 본 해무는 IMF와 두 남자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였다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by meditator 2014. 8. 26. 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