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고개를 수그린 채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요양원의 치매 노인이 있다. 

그 분의 귀에 젊은 시절 그 분이 좋아했던 음악이 흐르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 늘 수그려졌던 그의 고개가 들리고, 게슴츠레하던 그의 눈이 둥그레지고, 촛점없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노인은 음악을 따라 부르고, 휠체어로 고정된 그의 몸조차, 리듬을 타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로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가 일으킨 기적이다. 

지상파의 채널이 일주일 내내 다큐로만 채워진다? 이 불가사의한 일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2004년부터 벌어지고 있다. 바로 <ebs 국제 다큐 영화제>이다. 이제 열 한 번째를 맞이한 이 영화제에는 82개국 781편의 작품이 출품되었고, 그 중 23개국 50편이 상영된다. 개막 전 '이스라엘 특별전'을 준비했던 이 영화제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무차별 팔레스타인 공격으로 인해 난항을 겪었지만, 주최측이 특별전을 철회함으로써, 순조롭게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을 보기 이해 굳이 발품을 팔 필요는 없다.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되는 이 영화제의 작품들은, 하루 평균 9시간 동안, ebs 채널을 통해 방영된다. 물론, tv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좀 더 큰 스크린으로 명작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ebs 스페이스, 상암 누리꿈 스퀘어, 상명 대학교, 서울 역사 박물관, 인디 스페이스, KU시네마 테크를 찾으면 된다. 

EIDF 2014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건과 사고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이 실의에 젖어있는 이즈음, 2014ebs국제 다큐 영화제는 올해의 주제로 '다큐, 희망을 말하다 hope lies within us'를 내걸었다. 작년의 주제가 진실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 모습을 찾아가려 했다면, 올해는 그 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힘든 세상에 한 줄기 빛을 전하고자 '희망'으로 주제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의 첫 걸음으로 선정된, 개막작은 2014년 미국 마이클 로사토 베넷의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이다.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는 사회 복지사 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을 만나고 다니는 댄은 감독에게 단 하루만 자신에게 시간을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감독은 그를 따가 라 요양원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옮기고, 그 단 하루의 요청은, 결국 3년 여의 시간을 투여한,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로 완성된다.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이다. 하루 종일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는 치매 노인, 침대에 묶인 채 식물인간처럼 천장만 바라보던 노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채 폭력적 반응을 보이던 노인, 그리고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삶을 상실해가던 노인들에게, 그들이 젊은 시절 즐겨들었던, 혹은 좋아하던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자, 기적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던 노인들의 눈빛이 밝아지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심지어 리듬을 타며 즐거워한다. 심지어, 회색으로 말라비틀어져 가던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 파릇하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길어올린다. 

하지만,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는 사실 기적의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미국 사회가, 아니, 산업 사회 이후, 문명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노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숙고이다. 
노인 빈곤율 세계 수위를 달리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노년을 평온하게 경제적 고통없이 요양원에서 보낼 수 있는 미국 노인들의 삶은, 어쩌면 그 자체로도 환타지같은 이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제적인 고통이 해소되었다고 그 나라 노년의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는 요양원 체제로 구축된 미국의 노년을 들여다 본다. 산업 사회 이후, 다수의 노인들이, 부랑자와 함께 구빈원 등에서 노년의 삶을 마감하는 것을 막기위해 만들어 진것이 바로 오늘날 미국의 요양원 체제라는 것을 전제로 하며, 결국 오늘날 미국의 요양원 체제는, 당시의 구빈원과, 현재의 병원이 결합된 '삶'이 아니라, 마치 교도소와 같은, 감금과 통제, 투약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에 등장한 다수의 노인들은, 하루 아침에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상실한 채 요양원에 수용되어 죽을 날까지 주는 약만 받아먹으며 사는 삶에 대해 좌절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그 반응은 때로는 끊임없이 자유를 찾아 탈출구를 찾거나, 분노 조절이 안된 상태가 되거나, 그도 아니면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자포자기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을 '달래기 위해' 다국적 제약 회사를 등에 업은 요양원 체제는 '우울증' 등의 향정신성 약물을 남발한다. 

여기서 사회 복지사 댄이 들고 나온 음악은, 그저 음악이 아니다. 그들이 젊은 시절 즐겨 들었더 음악이어야 한다. 그 음악을 통해, 노인들은 자신들이 버리고 온, 아니 자신들에게 버리도록 강요된 삶의 활기를 되찾는다. 그래서, <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는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노년의 문제, 사회적으로 시스템화된 복지의 잔혹사, 복지의 이름을 빌린 인간 잔혹사의 고발이다. 그저 요양원에 쳐박아둔 채 죽음을 기다리는 노년을 당신도 원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댄은 주장한다. 현재 미국 노년 복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항 정신성 약품' 비용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노인들을 치매의 고통에서 구해낼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그의 주장은, 일찌기, 요양원의 노인들에게 아이들과 동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노년의 행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저 작은 외침에 그치고 말았던 또 다른 노인 복지의 주장처럼, 쉽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편이를 위한, 혹은 이권을 통한 시스템은 강고하고, 그의 소리는 작다. 

2014 ebs 국제 다큐 영화제의 주제가 '희망'이듯,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는 고발로, 좌절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댄의 좌절이후, 작은 희망의 움직임들이 시작된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성금으로, 몇몇 요양원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기들이 전달된다. 시스템의 변화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작은 희망이, 균열 사이에서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 것이다. 


by meditator 2014. 8. 26. 12:09

매주 금, 토요일 tvn을 통해 방영되었던 <연애 말고 결혼>이 16부작으로 마무리 되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연히 두 주인공은,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첫 회부터 얽히기 시작했던 두 주인공은 16부작 내내 거짓 결혼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였으며, 거짓 결혼이 사라진 이후에는 진짜 결혼을 하기 위한 '산고'의 시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드디어, 결혼식날, 역시나 그 조차도 이 커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하객이 폭포수처럼 내리는 비를 피해 사라지고, 비를 쫄딱 맞은 두 주인공들, 우리가 그럼 그렇지 한다. 그럼 그렇지, 결혼은 역시 쉬운 게 아니다. 


<연애 말고 결혼>의 가장 큰 미덕을 들자면, 첫 회 1년간 사귄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벤트를 벌이는 주장미(한그루 분)의 솔직담백함에서도 보여지듯이, 때로는  도를 지나쳐'진상'이 되기도 하는, 여주인공 주장미의 캐릭터에서 오는 매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자신의 재판에 다짜고짜 나타나 스토커로 몰린 자신을 변호해준 공기태(연우진 분)에게 얽혀 동정과 연민에서 시작된 그와의 거짓 결혼 해프닝이 결국 사랑으로 변모되어 결혼에 이르기까지, 해프닝과 해프닝으로 이어져가는 드라마의 스토리를 이끈 상당 부분은 배우 한그루의 몸을 던진 연기에서 비롯되었다.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통해 언니의 불륜으로 인해 자신의 사랑에 고통을 받는 동생 역을 실감나게 연기했던 한그루는, <연애 말고 결혼>에서 혼신의 연기라 할 만큼 그녀의 모든 매력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극을 이끈다. 또한 그런 한그루의 연기에, 연우진 역시 어색하지 않을 만큼 호흠을 맞추며 공기태라는 안하무인 캐릭터를 연주해 낸다. 그런 두 주인공의 발군의 연기는, 그들과 함께 하는 아이돌 출신들 배우들의 정형화된 연기가 보여주는 갑갑함을 덮으며, <연애 말고 결혼>을 생동감있는 드라마로 마무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도대체 연애 드라마에 무슨 '혼신의 연기'가 필요하겠느냐는 질문이 우문이 될 만큼, <연애 말고 결혼>은 우연히 필요에 의해 부모들에게 거짓 연인 행세를 한 두 사람이 말려드는 해프닝에 상당 부분 스토리를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한 연애담을 말하려한 듯이 보였던 이 드라마는 16부작의 상당 부분을 부모님을 상대로 한 자신들의 거짓을 덮기 위한 두 사람의 어쩌지 못한 상황의 연속으로 끌어간다. 
가장 연애에 당당할 것 같은 이십대 후반의, 삼십대 초반의 두 사람,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계기가 공기태의 아파트를 유지하기 위한 거짓 연인 행세였던 만큼, 두 사람은 내내 자신들이 한 거짓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꼈음에도 그 감정조차 부인한 채 자신들에게 부여된 '미션'에 충실하고자, 혹은, 그 미션이 가진 부도덕함에 짖눌린 채 거기서 헤어나오기 위한 발버둥에 드라마는 상당한 시간을 소비한다. 문득 도대체 법적으로 당당하게 결혼을 할 수 있는 나이도 훌쩍 지나버린 저 나잇대의 젊은이들이 왜 저렇게 부모와의 관계에 연연한 걸까? 라는 의문이 들만큼.

공교롭게도 <연애 말고 결혼>의 두 주인공의 결혼관은 모두 그들 부모님의 불행한 결혼 생활에서 기인한다. 그러니, 두 주인공이 결혼에 대한 '카르마'를 풀기 위해서는 결국 드라마는 두 사람 부모님의 불행한 결혼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고, 16부에 가서야 두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거짓 원망이 사실은 사랑이었음을 알고 화해하고, 또 반대로 자신들의 위선으로 점철된 결혼을 풀고 이혼을 선택하는 결론에 이르른다. 
결국 드라마는 여전히 당당한 젊음을 구가한다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의 '카르마'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정신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여전히 의존적인 세대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젊은 세대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부모 세대의 결자해지가 필요한 것이 선결 과제가 되는 것이다. 
즉, 가장 트렌디한 연애 이야기를 다룬 2014년의 드라마에서조차, 여전히 대한민국은, '가족중심'의 공동체적 국가라는 걸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결혼을 둘러싼 두 가족의 시끌벅적한 해프닝이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닌 것이다. 단지 스타일만 다를 뿐이지, 여전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16부작의 상당 부분을 부모 세대의 카르마를 풀기 위해 진력했던 두 주인공이지만, 그 사이사이에서 드러난 젊은 사람들의 솔직한 연애 담론은, 지루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 사람들을 <연애 말고 결혼>에 붙잡아 놓은 매력 포인트이다. 
진짜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드라마 중반이 흐르도록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자신의 감정에는 그 누구보다 솔직한, 그래서 어쩌면 진짜 요즘 여자같은 주장미의 솔직한 매력에, 그런 여주인공에 부응이라도 하듯, 가장 이기적인 캐릭터로 등장하여, 가장 주변의 눈치를 보며, 그의 결정 하나하나가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결국은 주변을 배려한 것이 되어버린, 전형적인 여성 중심 로코의 남자 주인공 캐릭터였던 공기태의 호응 역시, 이 드라마를 많은 젊은 사람들의 워너비 드라마로 만들게 한 요인이다. 

거기에 백화점 직원인 여성이, 병원장 딸인 여자 친구를 가진 성형외과 의사인 남자 주인공을 만나고, 프렌치 레스토랑 사장인 전 남친을 차버리는 직업으로서의 '환타지'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부모가 술 장사를 한다던 트라우마를 그녀 자신이 레스토랑 알바였지만 사실은 능력있는 쉐프였던 또 다른 남자를 만나 신세대 주점을 개업함으로써 멋지게 해소해 버린 성공기는 드라마의 매력적인 '토핑'이다. 
사랑은 하지만 결혼에 얽매이기 싫다며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육아 환타지'에, 다시 만난 두 남녀가, 결혼에 얽매이지 말자며 연애를 하기 위해, '동거'에 가까운 생활을 보이는 '연애 환타지' 역시 이 드라마의 빠질 수 없는 재미요소이다. 

가장 트렌디한 연애가 가장 진부한 가족이라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 거렸던 16부, 어쩌면 그게 가장 현실적인 대한민국의 연애사일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14. 8. 24. 11:51

문명 사회 속에 원자화된 존재로 던져진 개인이 일상 생활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 기쁨이나, 행복, 성공보다는 오히려, 좌절, 실패, 소외, 그리고 슬픔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는 많은 작품들은 그런 개인들을 위로하고, 부축해 일으켜 다시 한번 살아가자고 토닥인다. 제목부터, <비긴 어게인> 역시, 다르지 않다. 그의 전작, <원스>처럼 <비긴 어게인> 역시 음악을 통해, 두 남녀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하지만 막상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오히려, 스토리를 능가하는 음악의 힘이 크다. 하지만, 여기서 진짜 알맹이는,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실의에 빠진 두 남녀가 힘을 얻는 그 순간, 그 지점의 환희다. 어쩌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 잠깐 스치듯 마주쳤던 무지개를 잊지 못하듯, 음악을 통해 교감하고, 열정을 확인했던, 그 순가에 매료되어, 다시 삶을 지속해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긴 어게인>의 오프닝은 스티브(제임스 코든 분)가 노래하던 술집 소파에 찌그러지듯 앉아있던 그래타(키이라 나이틀리 분)가 마지못해 스티브의 부름에 불려나가 기타를 치며 나직이 읊조리듯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같은 장면, 하지만, 객관적이었던 장면이, 그녀를 바라보던 댄(마크 러팔로 분)의 시점에서, 그리고 그래타의 시점에서 다시 되풀이 되면서, 영화는 비로소 이야기가 풀려나가고, 루저가 된, 그래타와 댄의 사연이 풀어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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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그래타와 댄의 사연은, 아득하다. 힙합 독립 레이블로 시작하여 스타 프로듀서가 된 댄은, 몇 년 동안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한 채 함께 했던 회사는 동료에게 넘기고, 집은 아내에게 넘긴 채, 뉴욕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머물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 자살까지 결심한 처지의 실패자이다. 그래타 역시 그다지 나은 상황은 아니다. 마치 원스의 남자 주인공처럼 영화 한 편을 통해 벼락 스타가 된 남자 친구 데이브(애덤 리바인 분)와 함께 뉴욕 행을 택한 그녀는, 그저 스타가 된 남자의 연인이 아니라, 사실은 그의 노래를 작곡해 주었던 음악적 동반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로 스타가 된 그의 곁에 그녀의 자리는 없다. 심지어 애정 전선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제 그녀에게는 그녀를 이루어 주었던 남자도, 음악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버틸 수 없어 뉴욕을 등지고자 한다. 그런 그래타가 마지못해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댄이 듣는다. 

온통 음악으로 휘감은 듯한 <비긴 어게인>에서, 그런 충만한 음악 속에서도 더더욱 빛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지점의 음악이 그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술 기운을 빌어 지하철에 뛰어들겠다고 마음 먹은 댄은 술의 힘을 빌리기 위해 들린 술집에서 그래타의 노래를 듣는다. 그녀의 노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대화 속에서 독백하듯 읊조리는 그녀의 노래 소리에, 오래도록 그를 떠났던 영감이 다시 찾아온다. 오로지 기타 반주에 의존해부르는 그녀의 노래에, 저절로 피아노 건반이 반주를 넣고, 베이스와, 바이올린, 드럼이 등장한다. 완성되지 않은 곳이라며 채 마치치도 않고 자리를 뜬 그래타와 달리, 댄의 귀를 울린 그녀의 음악은 그토록 그가 찾아헤매던 바로 그 '곡'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댄이 진흙 속에 숨은 진주라며 그래타를 자신의 동료에게 데리고 가지만, 데모 테이프조차 없는 그녀를 알아줄리 만무하다. 하지만, 기적처럼 영감을 길어올린 댄은 포기하지 않는다. 데모 테이프 대신, 뉴욕을 배경으로 날 것 그대로의 그래타의 작품을 만들기로 한다. 대가를 음반이 나온 후 주기로 약속하고 함께 하기로 한, 그래타의 오랜 동료 스티브를 비롯하여, 고전 음악을 연주하던 예일대생 오누이, 발레 반주를 하던 건반 연주자, 오랜 친지를 통해 소개받은 드럼과 베이스 연주자, 그리고, 거리에서 음반 녹음을 방해하던 아이들까지 합류해,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뉴욕의 거리를 배경으로 한 곡의 음악이 탄생한다. 조용히 해주는 댓가로 몇 달러를 흥정하던 아이들도, 아니 그저 비발비가 아니라면 그것으로 족하다던 음대생들도,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던 뉴욕 할렘가의 주민들도, 그리고, 노래를 하는 그래타도, 그런 그들을 지휘해 나가는 댄도, 이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기약도 잊은 채 잠시 잠깐 음악에 어우러져 흥에 겨웠던 그 순간, 그것이 바로 <비긴 어게인>이 빛나는 지점이요, 그래타와 댄을 좌절에서 길어올린 순간이다. <원스>에서, 우연히 들른 피아노 판매상 안에서 그(글렌 한사드 분)와 그녀(마르게타 이글로바)가 목소리를 모아 노래를 부르며 소통하는 그 지점이 겹쳐보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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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그런 순간들은 반짝반작 빛이 난다. 그 어떤 시도를 해도 늘 어긋나기만 했던 아버지 댄과 딸 바이롤렛(헤일리 스테인 펠드 분)가 그녀의 기타 연주를 통해 화해하는 장면도, 그저 연인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교감을 이루었던 그래타와 데이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씌여졌던 데이브의 생일씬과 데이브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던 씬까지, <비긴 어게인>은 인간사의 교감을 음악을 통해 빛나게 해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삶의 계기라 밝힌다. 

마치 '썸'이라도 탄 듯이, <원스>에서도 그렇듯이, <비긴 어게인>에서도 두 남녀 주인공은, 사랑인 듯 사랑이 아닌듯 그런 관계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로써 족하다. 왜? 뉴욕 거리를 함께 거닐며 음악을 맘껏 들으며 교감했던, 함께 연주하며 음악을 나누었던 그들은, 서로가 함께 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았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비긴 어게인>은 그렇게 다시 삶을 살게 된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다시 서로를 통해 삶을 살아가게 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by meditator 2014. 8. 23. 17:47

8월 19일자 한겨레 신문의 기사다. '도시와 농촌의 비만율 차이는 여성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2008년 0.1% 차이였던 도농간 여성 비만율 격차가 해마다 벌어져 2012년 10.7% 포인트까지 커졌다.' (중략)'도시보다는 농촌에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고 연령대가 높은 여성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비만율은 소득이 적을수록, 나이가 많을 수록 높은 게 일반적이다.'
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비만율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렇게 지역에 따라, 나이에 따라 비만율의 차이가 드러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이데올로기가 내재화되고 있음을 수치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기사 중, '농촌에 사는 여성은 도시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가 자유로워 자기 관리 욕구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표현이 있다. 즉, 우리 사회 여성의 날씬한 몸은, 경쟁 사회에서 생존의 지표가 되었고, 그런 스트레스로 인해 여성들은 끊임없이 자기 몸을 '날씬하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기사는 통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해 낸다. 그리고 그런 날씬한 몸이 우리 사회의 경쟁 사회에서 성공의 지표가 되는 듯이, 그 반대로, 날씬하지 않은 몸을 가지고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경쟁 사회의 표준화에서 벗어난, 패배주의적 현현이요, 따라서 지탄받아도 변명할 가치가 없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여성의 몸이 경쟁력이 된 이데올로기가 내재화된 현상은 tv 속에서 자주 조우할 수 있다. tv 속에서 가장 빈번하게 만날 수 있는 상대적으로 '뚱뚱한' 몸을 가진 여성들은 개그우먼들의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 여성들은 tv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 질까?
8월 9일 <인간의 조건>에서 개그우먼 김영희는 새로 게스트로 들어온 박은지와 갈등을 일으켰고, 그 결과 거의 며칠간 <인간의 조건> 게시판이 '폭발'할 정도의 악평에 시달렸다. 물론 8월 9일의 <인간의 조건> 내용은, 마치 김영희가 박은지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그것을 가감없이 드러낸 것으로 상황이 편집되었고, 설상가상 그런 내용에 대해 시청자들의 불만이 '하차'를 논할 정도로 폭주하자, 그에 대해 김영희가 자신의 sns에 '반사' 등의 내용을 올림으로써 더 강화시켜가는 과정상의 문제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만약 새로 들어온 게스트가 박은지가 아니라 김영희였다면, 그래서, 김영희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서 몸매가 다 드러내보이며 요가 동작을 선보였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게스트로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김영희에 대해 박은지가 불쾌감을 드러내 보였다면?
아마도 여론은 십중팔구 그 반대의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어디 그런(?) 몸을 노골적으로 들이미냐에서 부터, 그런 김영희를 못마땅해 하는 박은지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러지 않았을까? 실제 <인간의 조건> 프로그램 내용 중에도 나온다. 이제는 친구가 된 김신영과 박은지이지만, 워낙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박은지의 독특한 캐릭터로 인해 두 사람이 친구 사이가 되기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실제 그 다음 회에 이르기까지 박은지의 행동 하나하나는 <인간의 조건> 여성 게스트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무엇인가를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독불장군' 캐릭터인 경우가 많았다. 단지, 그런 박은지에 대해 다른 멤버 들이 '저 사람 뭐지?'하며 황당한 리액션을 하는데 멈춘 반면, 그런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김영희는 대중의 포화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간 <인간의 조건> 여성편을 하는 동안, 마치 엄마처럼, 늘 앞장서서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고 멤버들을 챙겨왔던 그녀의 공은 하루 아침에 온데 간데 없이, 그간 그녀가 해왔던 격한 태도들만이 부각된 채 김영희는 <인간의 조건>에서 퇴출될 몹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김영희가 조금만 더 이쁘고 날씬했더라도, 반대로 박은지가 조금 더 뚱뚱하고, 이쁘지 않았더라도 상황이 똑같이 전개되었을까?

이런 일련의 해프닝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의식이 어쩌면, 이제 우리 사회에서 뚱뚱하고, 이쁘지 않은 여성들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공감대가 아닐까?
<개그 콘서트>의 한 코너 '선배선배'에서도 이런 의식들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학교 신입생 이수지는 한 눈에 보기에도 그리 날씬하지 않은 통통한 몸매에 귀염성은 있지만, 이쁘다고 말할 수 없는 미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요즘의 평균적인 평가(?)와 달리, 그녀는 자신이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매력적인 여성이라 자부하고 있다. 그리고 '선배선배' 코너의 기본적인 웃음기는 바로 이런 그녀의 아이러니한 자아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통통한 그녀가 자신을 한껏 자부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웃긴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주변 사람들, 선배인 정명훈이나, 류근지가 그녀를 '벌레보듯' 피하는 상황이 당연한 듯이 전개된다. 정명훈이나 류근지는 코너가 진행되는 도중 그녀를 한번도 제대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와 눈이 마주칠라 하면 허겁지겁 도망치기까지 한다. 그녀가 그의 말 한 마디에 삐져서, '선배! 마이너스 100점'하면, '다행이다'로 대꾸하고. 그런 선배의 반응에 눈치가 없는, 수지가, 이 코너의 백미를 이룬다. 거기에 덧붙여, 수지와 비슷한 덩치를 지닌 조수연이, 애인이 있고, 애인과 함께, 요즘 연인들이 하듯, 오그라드는 행동을 벌이는 것이, 또한 '착각' 혹은, '어불성설'의 서사로 전개시킨다.
이 코너의 전제로 깔린 것은, 날씬하지도 않은 주제에, 통통하거나, 성형을 거치지 않아, 자연스러운 외모를 가진 그녀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의 여성들이라면, 한껏 다리가 드러난 옷을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며, 자신이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그 코너를 보며 웃음을 참아내지 못하는 우리들은, 그런 전제에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선배, 선배' 코너의 신입생 이수지의 당당함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또 다른 퉁퉁한 개그우면 이국주의 '당당함'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매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김보성의 '의리'를 코스프레하며, 대놓고 '식탐송'을 불러대는 이국주를 즐긴다.그런 '당당한' 이국주가 인기를 끄는 것은, 실제로 날씬함에도 불구하고,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경제적 몸매를 내재화한 피로감의 표출이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대놓고, 선을 넘어 당당하게 즐기는 듯한 이국주에 대한 '선망'의 표현이다. '선배, 선배' 코너의 이수지를 보며 비웃는 그런 내재화된 몸매관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억눌려진 스트레스의 발현이랄까. 사실은 그들도 피곤한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칼로리를 염두에 두고, 참다참다 못해 폭식을 하게 되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살아가는 삶이, 날씬한 몸매가, 자기 관리의 상징이 되는 이 '도시'의 삶을 견디는 피로의 발산이, 이국주에 대한 호응으로 나타난다.

'선배선배' 코너의 이수지에 대한 웃음기가, 이국주에 대한 호응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몸매에 대한 대중들의 분열된 인식이 투영되어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가기는 피곤하지만, 그래서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마음껏 욕망하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자뻑은 '개그'일뿐, 진지한 인정은 아니다. 이국주는 웃기지만, 이국주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있는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들은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전 명화 속 그녀들은, '비만'에 가까운 몸매를 자랑하며, 풍요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지극히 경제적인 여성들의 몸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꼬집의 살집조차 죄책감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퉁퉁한 몸매는 죄의식이 되어야 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 그래서 자신과 다른 몸매로 살아가는 여성들을 한껏 웃음의 소도구로 삼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나, 그 경제적인 몸매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떼어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푸근한 삶의 여유나, 넉넉한 타인에 대한 아량이 아닐까?

by meditator 2014. 8. 21. 19:16

남자와 입만 맞춰도 땀을 뻘뻘 흘리던 지해수가 드디어 장재열과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의 시작일 뿐이다. 
연달아 '사랑해'를 남발하는 장재열에게 지해수는 사랑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아직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정'으로서의 사랑을 중시하는 여성의 입장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해수의 생각처럼, 그들의 사랑은 이제 비로소 터널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터널 입구부터 두 사람의 사랑은 덜컥 거린다. 

요즘 범람하고 있는 연애 드라마들은 <마녀사냥>처럼 사랑을 가르쳐 주기에 골몰한다. 남자가 보냈던 이 신호들, 여자가 보였던 그 눈물, 남자가 내뱉었던 그 말들, 여자가 매몰차게 했던 그 행동들의 이면에 숨겨진 '사랑의 코드'를 충실하게 해석해 준다.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사랑'의 또 다른 단어들이라고. 그런 연애 드라마들처럼,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사랑을 시작한 지해수와 장재열도 서로가 보이는 다른 신호로 인해 어렵사리 몸을 나눈 사랑을 한 이후에도 혼란스러워 한다. 하지만, 정신병리학을 다루게다 야심차게 선포한 <괜찮아 사랑이야>의 두 남녀는 조금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연애 말고 결혼(tvn)>에서, 서로의 부모님으로 인해 혹독한 통과 의례를 겪은 주장미는 공기태에게, 그저 편하게 '연애'만 하자고 한다. 하지만, '쿨하게' 연애만 하자고 했던 이 커플, 정작 연애를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말수가 점점 줄어든다. 한여름과 함께 동업을 하는 주장미의 가게를 드나들며 공기태는 두 사람이 보이는 친숙한 관계에 불안해 하지만 그걸 드러낼 수 없었고, 공기태가 그의 오랜 친구이자, 같은 직종의 동료인 강세아와 자신의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걸 주장미는 함께 하고 싶지만 물과 기름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애를 하면 할수록 거리감을 느끼고, 결국 '쿨한' 연애의 방식을 때려치고, 있는 그대로의 주장미와, 공기태로 돌아간다. 

바로 그런, 요즘 사람들이 지향하는, '쿨한' 연애 방식에 대해 <괜찮아 사랑이야>는 도발적으로, '위선'이라 치부한다. 지해수와 헤어친 채 돌아온 집에 오랫동안 지해수와 사귀었던 방송국 피디가 조동민을 찾아왔다는 핑계로 들이닥친다. 장재열은 불쾌하지만 딱 부러지게 이유를 대는 그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집으로 돌아온 지해수는 반갑게 장재열의 방을 찾아들지만, 장재열은 그런 그녀에게 글을 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냉담하다. 

괜찮아 사랑이야 9회, 괜찮아 사랑이야 10회 예고
(사진; tv데일리)

쿨한 연애의 방식이라면, 글을 쓰는 그의 사정, 한때 연애를 했지만 이젠 다른 사람의 손님으로 집을 찾아드는 전 애인에 대해 의연하게 넘겨야 한다. 하지만, <괜찮아 사랑이야>는 그게 무슨 풀 뜯어 먹는 소리냐고 반문한다. 좀 잘 대해주라며, 헤어졌다고 원수가 되지는 말라는 조동민에게 오히려 지해수는 포악하게 반문한다. 그래서, 당신은 전처에게 친구 운운하며 감정 밀땅을 해서, 전처가 감정 정리를 하지 못하게 하냐고. 오히려 자신이 보인 냉담한 태도가, 헤어지자고 말하는 자신에게 매달리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전애인에게 어쩌면 가장 '친절한' 태도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지해수는 당당하게 장재열에게 말한다. 자신의 전애인이 집에서 얼쩡거리는데, 그 쿨한 척 하는 태도는 무엇이냐고. 

<괜찮아 사랑이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현대인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며 노력하는 그런 표피적인 노력들이, 사실은 그들에게 더 상처를 만들고, 관계를 멀리하며, 서로의 이해를 멀리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해수가 자신이 가진 강박 장애로 인해, 누군가와 키스를 하는 것조차 두려워 하듯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것이 두려워, 혹은 이제는 끝인 관계를 놓치는 것이 두려워,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로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드라마는 반문한다. 

그래서, 조동민의 전처였던 이영진(진경 분)은 여전히 친구처럼 그녀를 대하는 조동민(성동일 분)에게 날벼락처럼 아직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의 고백이 채 그녀의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그렇게 친숙하던 조동민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그녀 곁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이영진은 알게 된다. 사실은 그녀가 미련을 두고 있었던 건, 조동민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조동민에게 저질렀던 과오, 거짓이었음을.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지해수와 나누면서, 지해수가 가졌던 강박의 근원도 드러난다. 누군가오 스킨 쉽을 할때마다 그녀를 괴롭히던 외간 남자와 입을 맞추던 엄마의 모습, 하지만, 그런 그녀의 괴로움은, 장재열과 진심으로 함께 나누었던 그 시간을 통해, 의지할 곳 없던 엄마에 대한 이해로 변모되기 시작한다. 

드라마가 진행되며, 전처와 재혼한 남편이 한데 어우러지고, 첫사랑과, 첫키스를 함께 나누던 사이가 한 집에서 어우러지던 '막장'의 인간 관계는 분명해지고, 교통 정리가 되어간다. 사랑이란 명목으로 하지만 그 안에 자기 연민이 더 강했던 관계들은, 그 자기 연민의 속내를 들여다 보게 되고, 그리하여, 관계는 때로 깊어지거나, 다른 형태로 전이된다. 이영진과 조동민은 이제 진짜 친구가 되어갈 듯하고, 박수광(이광수 분)은 오소녀(이성경 분)에 대한 자신의 미련을 접어두고자 한다. 지해수와 장재열은 가식 따위는 던져 버리고 인간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간다. 여자와 남자, 암컷과 수컷의 경계심, 혹은 적당한 밀땅, 어장 관리 따위는 던져버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에 대한 관계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선다. <괜찮아 사랑이야>가 여전히 다른 연애 드라마와 차별성을 유지하는 지점은, 바로, 연애가 그저 남녀의 연애사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 혹은 그런 연애사에 조차 드리워진 각자의 인생사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회를 거듭할 수록, 남녀간의 사랑보다, 남녀를 초월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괜찮아, 사람이야, 사람이니까, 이해해. 라고. 

그런데 묘하게도, 노희경 작가가, <괜찮아 사랑이야>를 통해 야심차게 인간사의 또 다른 이면인 정신병리학적 세계를 다루고 있고, 그 해결 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음에도, 그 해결 방식은, 그녀가, 이전 드라마들을 통해 줄기차게 천착해 왔던, 가식따위는 던져버리는, 날 것 그대로의 인간과 인간의 만남의 궤적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화려한 시절>의 질펀한 욕이 난무하던 그 뒷골목의 정서와, <바보같은 사랑>의 서로의 상처를 보듬던 그 어리석은 사랑이, <괜찮아 사랑이야>의 가장 세련되게 치장한 그들의 사는 모습과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일까. 정신병리학적 해석을 곁들건 아니건,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진정성'에서는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일까?


by meditator 2014. 8. 21. 19:14

6월 11일부터 시작하여,8월 20일 10부작으로 종영된 <도시의 법칙>, 평균 시청률 2.9%(닐슨 코리아 기준)로 세간의 관심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아마도, 조금 더 높은 시청률을 얻었다면 야심차게 또 다른 도시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을 '뉴욕' 시즌, 하지만 2%대의 시청률은 감히 또 다른 도시로의 도전을 쉽게 허용하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똑같은 '법칙'임에도 정글의 법칙이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12% 정도의 안정적 인기를 확보하고 있는데 반해, 동일한 제작진이 만든 도시의 법칙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말해야 뻔한 이야기이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도시'와 '정글'의 차이일 거이다. 정글이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조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 것'으로서의 감흥을 자아내게 하는 반면, <도시의 법칙>이 추구했던 리얼리티는 일관되게 심심했다. 생면부지의 이방의 도시, 뉴욕은 충분히 생각만으로는  정글 못지 않은 '어드벤처'를 제시할 거 같은데, 정작, 뉴욕팸이 살아냈던 도시는, 어드벤처인 척하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감상을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도시의 법칙>은 <정글의 법칙>처럼 연예인들을 집단적으로 '팸'을 이루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생존하는 모습을 다루었다. 브루클린 허름한 뒷골목, 공장으로 쓰였을 법한 공간에 한 무리의 연예인을 던져놓고 지갑을 뺏은 채 살아보라고 할 때만 해도, 제법 날 것의 생존기가 씌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후의 생존기는, 물론 당사자 연예인들의 한국에서의 익숙했던 생활을 벗어나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는 것이 힘들었겠지만, 그 힘듬이, 시청자들에게 공감의 정서로 이어지기엔 무리가 있었다. 


20일 방송에서만 해도 그렇다. 패션지 화보 촬영장에 일을 얻으려 간 김성수, 이천희, 백진희 세 사람, 어렵게 일을 얻는가 싶더니, 바로 모델을 뽑는데 간여를 하는 특혜를 얻는다. 게다가 다음 날은 패션지 에디터로써 촬영에 씌일 옷을 고르며 전문 에디터와 충돌하기 까지 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 저런 일도 하는구나? 아니다. 백진희가 20일의 촬영 과정에서 보인 행동은, 마치 회사 ceo의 자식이 하루 회사에 나와 회사원 코스프레를 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요즘 패션 화보를 찍는데 요즘 패션 트렌드에 대한 관심은 커녕, 오로지 내가 노란색을 좋아하는데, 나는 무늬가 있는 걸 싫어하는데, 나는 힐을 좋아하지 않는데 라는 식으로 접근하다, 전문적으로 그 일을 하는 패션 에디터와 마찰까지 일으키는 백진희를, 과연 누가 뉴욕에서 '생존기'를 쓰는 사람으로 보아줄까? 

안타깝게도 각자 개개인으로 보면 익숙하지 않은 일상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내어 일을 하는 과정이 고생스럽고 힘들었을지는 몰라도, 실제 그들이 하는 일이 보여지는 과정에서는, 백진희의 패션지 촬영처럼 어설프고, 생존기가 아니라, '생존 코스프레'처럼만 보였던 것이다. 다양한 뉴욕의 생활을 보여준다는 이유만으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일을 해보였지만, 주만간산식으로 스쳐지나가는 그 일들에 '생존의 진정성'이 쉽게 전달되지 않았다. 정글에서는 하루 종일 숲을 헤치며 겨우 먹을거리를 찾아내야 한 끼를 때우는 것이 설사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도 그럴 듯해 보였는데, 미국 최고의 드라마 제작 스튜디오에 가서 다짜고짜 일자리를 얻고, 급조한 듯이 보인 그 일 자리라는게 출연자들을 위해 간식을 준비해 준다는 식이라던가, 스프레이 몇 번 뿌리고 몹시도 고생스러운 일을 한 양, 서로 자화자찬을 벌이는 모습에서, 정글에서 느꼈던 날 것의 생존기는 멀어질 뿐이다. 

당사자들이야, 멀고 먼 타향에 떨어져 매니저들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생활이 고달프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겠지만, 그런 안락함과 익숙함을 벗어났다는 당사자들의 감회와 달리, 시청자들에게 까지 그들의 고군분투가 날 것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던 점이 <도시의 법칙>이 외면받은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웃프게도, 그들의 고군분투기보다도, 마지막 회 잠깐 방문했던 이소은이 전한 뉴욕 생활기가 훨씬 더 뭉클했다. 어렵게 공부했던 시카고에서의 생활, 함께 어울리는 문화가 없어서 외로웠던 뉴욕 정착기가, 단지 이소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데도 훨씬 더 날 것 같으니, 그간의 고생담이 무색해질 수 밖에 없다. 차라리, 어설프게 연예인들을 데려다 뉴욕에서 사는 척을 할 게 아니라, 진짜 유학생들의 생존기나, 취업기였다면 어땠을까? 


물론, <정글의 법칙>에 숨겨진 수식어, 김병만이라는 존재가 <도시의 법칙>에 존재하지 않은 탓도 클 것이다. 제작진은 출연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며, 그들의 캐릭터를 만들어 가려고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시청자들에게 각인된 캐릭터로 등극하지 못했다. 이는 역으로, 그간 <정글의 법칙>의 인기를 이어갔던 요인이, 어쩌면 <정글의 법칙> 제작진이 아니라, 일찌기 <개그 콘서트> 달인 코너를 통해 김병만 개인이 성취한 진정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낸 것일 수도 있다. 즉, <도시의 법칙>에 출연했던 개개인들은 각자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병만이 가졌던 진정성을 넘을 캐릭터를 획득해 내지 못했다. 허당 천희를 넘어선, 능력자 천희도, 그에 반해 여전히 허당인 존박도, 4차원 정경호도, 야무진 백진희도, <도시의 법칙>안에서는 있었지만, 프로그램을 넘어 세간의 관심을 끌어내지 못했다. 

마지막 회, <도시의 법칙>은 출연자들 각자가 카메라를 가지고 자신들이 그간 지내왔던 도시를 다시 한번 걸으며 뉴욕이라는 생면부지의 도시임에도, 그곳을 살아가며 서로가 관계를 맺고 어울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도시의 법칙'을 도출해 낸다.  결국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생면부지의 그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어울려 살아간다. 빵집에서 부터 시작하여, 마트, 미장원, 드라마 촬영장까지, 그리고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공원, 마라톤 경주 코스까지, 10회에 걸친 분주했던 뉴욕 관찰기, 생존기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생담을 통해 다가온 뉴욕 생활기는 안타깝게도 이소은의 몇 마디 뉴욕 거주기보다도, 어설펐다. 


by meditator 2014. 8. 21. 11:01

8월 18일 kbs2의 월화 드라마가 새로 시작되었다. <연애의 발견>

제목에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이 드라마는 헤어진 연인과, 지금 한참 만난고 있는 연인 사이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을 빌어 샅샅이 검토해보는, 진짜 말 그대로 '연애'를 조사하고 발견하는 드라마이다. 덕분에, 이 드라마를 보는 누군가는, 연애를 '톺아보는' 이 드라마의 어느 지점에선가 무릎을 치게 된다. 맞아, 내 연애도 그랬어, 맞아, 저런 감정이었어! 라며, 그런데, 마치 납량 특집극에서 나온 귀신처럼 물어 보고 싶다. 정말, 저 연애가 니 연애처럼 보이니? 라고. 

이 드라마에서 화근이 되는 핵심 인물은 한여름(정유미 분)이라는 여주인공이다. 현재 성형외과 의사인 남하진(성준 분)을 사귀고 있는 그녀는 남친이 선을 본다는 말을 듣고 다짜고짜 그 자리에 찾아갔다가, 오래 전 헤어진 전 남친 강태하(에릭 분)를 만나게 된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그녀, 하지만, 그런 그녀와 달리, 전 남친은 그녀에게 미련이 남은 듯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다시 잘해 보면 안되겠냐고 말한다. 우연히 술을 마시고 전 남친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그녀, 이 피치못할 해프닝으로 지금 사귀고 있는 남친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졸지에, 이중 생활을 하는 어장관리녀가 되어가는데........


한때 사귀었지만 이제는 보는 것도 싫다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화'를 낸다. 반면, 그녀가 그토록 매달렸음에도 잔인하게 끊어버렸던 '그'는 사업적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그녀에게 다시 접근하고자 한다. 마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두 사람이 지내 온 연애의 역사는, 그 장마다, 서로가 사랑했지만, 얼마나 달랐는가, 그래서 서로가 교감하기보다, 사랑하기에 외로웠는가를, 그리고 지금도 상반된 태도를 보이지만, 그들의 연애가 진짜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니 당연히, 세상에 연애 한번 정도라도 해본 사람이면, 그들의 궁상스런 혹은, 달콤했던 연애사의 어느 지점에선가 자신의 연애를 비춰 볼 여지가 생긴다. 

그런데, 착각하지 마시라. 돈이 없어 결혼하기 싫은 척 한다는 찌질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이 평범한 연애담이 정말 내 얘기 같다고. 등록금 융자금 고지서가 메시지로 날라오고, 꼬박꼬박 방세를 받는 엄마의 독촉 메시지도 거기에 얹어지고, 친구와 함께 연 공방의 밀린 웰세가 독촉되어 마치 평범한 여느 사람같은 그녀는, 사실 친구와 함께, 카페 못지 않은 풍광을 가진 멋진 공방의 주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못지 않게 폼나는 이층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는 싱글라이프를 즐긴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은 또 어떻고? 그녀의 현재 애인은 우연히 소개팅 자리에서 만나 첫 만남에서 키스를 나눈 로맨틱한 남자라는 설정을 가진 성형외과의사이고, 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전 애인, 하지만 '그 남자랑 헤어지고 나에게 올래?'하는 그 남자는 건설사 대표이다. 심지어 이 건설사 대표는 돈 문제로 고민(?)하는 그녀에게 자기 회사에서 건설 중인 건물의 와인바 인테리어를 맞기며 접근해 온다. 현실에서 한 사람도 만나기 힘들 것 같은 스펙의 남자가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그런데 제 아무리 강남 한 복판에 가면 한 건물에 수두룩 성형외과라지만,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주인공 중 두 명이나 '성형외과' 의사인 건, 우연치고는 좀 노골적인 우연같지 않나? 아니, 성형외과 의사만이 아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연애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직업들을 통계 내어 보자면,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이건(장혁 분), <마이 시크릿 호텔>의 조성겸(남궁 민 분), <연애의 발견>의 강태하가 다 ceo들이다. 집안 사업을 물려 받았건, 능력으로 거머쥐었건 그들은 한 회사를 좌지우지하는 능력자들이며, 현재는 그 능력을 회사 사업보다는 '연애'에 집중하고 있다. 심지어 사업마저도 '연애'를 위해 활용하면서. ceo만 있는게 아니다. <연애의 발견>의 또 다른 남자 주인공도, <연애 말고 결혼>의 주인공도 하필이면 의사 중에 돈을 제일 잘 번다는, 성형외과 의사이다. 이분들 역시 드라마 상에서 본업보다, '연애'에 치중하고 계신다. 심지어 <연애 말고 결혼>의 공기태(연우진 분)는 연애를 하느라 자신의 본업인 성형외과도 날려먹을 판이다. 아니, 이들 못지 않게 멋들어져 보이는 직업 건축가도 있고(<마이 시크릿 호텔>의 구해영(진이한 분)), 디자이너도 있다(<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다니엘(최진혁 분)). 찌질한 남주인공이라면, <잉여공주>의 백수 이현명(온주완 분) 정도이다. 마치 훈남 남자 연예인을 총망라한 듯한 이 멋지 배우들이, 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 스펙 중 되기도 힘들고, 되기만 하면 돈을 마구 번다는, 직종들이다. 우연치고는 너무 노골적인 우연이 아닌가. 

그리고, 법률 사무소 임시직이거나, 등록금 융자 빛에 시달리는 여주인공, 혹은 심지어 결혼 경력이 있는 여자들에게 목을 맨다. 그리고 그들과 당당하게 밀땅을 하며, 나의 사랑을 찾아가는게, 요즘 '범람하고 있는' 연애 드라마의 '주제'들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드라마계는 상반기와 중반기가 같은 나라가 맞는가 싶게 달라도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중파에서는 <개과천선>의 조기 종영을 끝으로, 그리고 케이블에서는 <갑동이>의 종영과 함께, 그 어느 곳에서도 진지한 사회적 의식을 가진 드라마가 사라졌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입을 모아, 연애를 하자, 연애가 중요해, '로맨스가 필요해'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다. 
 sbs의 월화 드라마 <유혹>, 수목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kbs2의 월화 드라마<연애의 발견>, mbc의 수목 드라마<운명처럼 널 사랑해>, 그리고 tvn의 <마이 시크릿 호텔>에, <연애 말고 결혼>, <잉여 공주>까지, 죽도록 연애만 한다. 솔직히 <야경꾼 일지>도 귀신잡는 척하면서 연애하는 드라마 아닌가. 
<쓰리데이즈>가 가졌던 국가관에 대한 진지한 문제 의식이나, <빅맨>, <개과천선>, <골든 크로스>가 가졌던 날카로운 사회 해부와, 비판적 의식은, 마치 일장춘몽인양 드라마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대신, 시시콜콜 연애사를 해부하며, 연애를 할 때라고, 너의 연애를 되돌아 보고, 드라마 속 연애를 검증하며, 남녀 관계에 집중하라고 설득한다. 세월호로 인해 방송이 정지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어떻게 이렇게 흔적도 없이, 우리 사회를 진지하게 논하는 드라마들이 사라지고 없어진 건지, 어떻게 한결같이, '연애'가 지상 최대의 과제인 양 그럴 수 있을까?

그것도 사실은 현실에서는 길에서 조차 마주치기 힘들 것같은 상위 1%의 남자들이, 평범한 여자들에게 목을 매며, 너도, 나도 사랑한다고 달겨드는 그런 한결 같은 내용으로 말이다. 이 정도면, 평범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마취시키고자 하는 불순한 목적을 가진,  '연애 드라마' 음모론이 나올 만도 하지 않은가?


by meditator 2014. 8. 20. 12:10

세월호 사건이 있은 후 뉴스와 다큐를 제외한 모든 방송 프로그램들이 정지되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방송을 시작할 수 밖에 없을 때, 일각에서는, 과연, 세월호와 같은 사건을 겪은 우리 사회에 '방송'은 어떤 모색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등장하기 했었다. 하지만, '논의'는 논의일뿐, '고민'은 고민일뿐, 다시 방송은 시작되었고, 예전처럼 흘러가 버렸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 수록, 이제 사람들은 '세월호'가 지겹다고 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tvn에서 작은 모임을 다룬 방송이 살짝 스쳐갔었다. '세속에 찌든 현대인들의 속내를 살피고 행복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는 토크쇼'라는 취지를 내세우고, 목사님, 스님, 신부님, 이른바 3님들이 모여 3번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던 <종교인들의 세상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5월 29일부터, 6월 12일까지, 비록 3부작이지만, 세월호 사건 이후 방송이, 나아가야 할 바를 나름 모색해 보았던 좋은 방송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여름 특집으로 <종교인들의 세상 이야기>가 여전히 털털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왔다. 

<종교인들의 세상 이야기>의 3님들은, 갈릴리 교회 목사이자 한나라당 윤리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인명진 목사, 광명 교구 주임신부이자, 수원교구 사회 복음화 국장인 홍창진 신부, 마음 치유 협회 이사이자, 동국대학교 정각원 교법사인 마가스님이다. 주님도 좋지만, 주(酒)님도 마다하지 않는다며 신부님이 맞어 싶을 정도로 '내 안에 개있다'는 파격적인 언급을 마다하지 않는 신부님에, 40년 종교 생활에 반무당이 다되었다며 노회함을 마다치 않는 인명진 목사, 신(神)이 필요하다 하자, 대뜸 신고 있는 신을 높이 쳐드는 마가 스님의 파격까지, 그 어떤 엔터테이너 못지 않은 입담과, 입담을 넘어선 촌철살인, 그리고 전혀 다른 종교인과 한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그 어떤 말의 끄트머리에도 서로 얼굴을 붉힐 일 없이 호탕하게 웃어제칠 수 있는 아량까지 장착한 세분 '님'들의 토크쇼는, 그분들 못지 않은 솔직함의 고성국씨와, 케이블 mc로 첫 선을 보인 서현진 아나운서의 진솔함이 어우러져, 충만한 재미를 낳는다. 

지난 번 세번의 시리즈가 기본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행복과 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었다면, 여름방학 특집으로 다시 돌아온 <종교인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는 '인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근본적인 질문,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이 세 분의 종교인들에게 던져진다. 이에 대해, 홍창진 신부님은 '내 안에 개 있다'는 놀라운 고백을 통해, 인간에게는 동물성도, 신성도 함께 드리워져 있다고 말한다. 또한, 마가 스님도 성악설도, 성선설도 아니라, 빌 공자 (空)를 써서 성공설이라며, 비어있는 안을 어떻게 채우는가에 따라 인간은 나뻐질 수도, 좋아질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티브이데일리 포토

거기서 이야기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종교를 업으로 하는 세 분 모두, 그들이 따르는 예수와 부처 모두가, 인간적 고뇌에 시달렸던 분임을 입을 모아 이야기 하고, 인간다움은, 원래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고뇌'와, '결단'의 과정임을 결론내린다. 지금도 세계의 어느 하늘 아래에서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학살'이 자행되는 이 순간에, 한 테이블에 모여앉아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다름에 대해 넉넉하게 용인하고, 그 다름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결국 인간으로서 자기 반성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임을 이해하는 그 시간으로서, <종교인들의 세상 이야기>는 의미가 있다. 

물론 그런 파격적인 소통과, 공감을 넘어, 결국 좋은 인성을 키우기 위한 '속수유책'이 좋은 교육, 자기 반성, 자기 결단이라는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결론으로 귀결된 것은, 아쉽다면 아쉬운 결말이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 보면, 세분 님들의 말씀처럼, 어쩌면,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죽음의 속도로 경쟁을 불사하는 세상에 대한 '속수무책'을 접고, '나부터' 달라지자는 '선언'은 지극히 평범하고  뻔하지만, 결국 불가피한 결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종교인들의 세상 이야기>가 정작 좋은 점은,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결국은 자기 결단이 필요한 '나부터'의 결론도 결론이지만,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계층, 종교, 성별, 연령에 따른 '차이'의 골이 깊어져가는 시점에, 다시 한번, 전혀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이, '이해'와 '공감'의 시간을 마련했다는 그 자체에 있다. 다른 것도, 다시 한번 살펴보면, 공통점과, 이해할 지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숭앙하는 예수와, 부처의 삶에 다름아니니까.

그리고 획기적인 소통에서 시작하여, 뻔한 듯한 결론이더라도, 저녁 프로그램의 일부를, 시청률이 잘 나오는 '막장' 드라마나, 맛집 탐방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에 할애해준, tvn의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월호 이후, 고민의 결과와 성취라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말 그대로 방송이 할 수 있는 '속수유책'이다. 


by meditator 2014. 8. 19. 16:25

삼총사는 루이 13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뒤마의 소설이다. 1844년에 씌여진 이 소설은, 원작이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계속 재연됨은 물론, 원안을 기초로 한 다양한 버전의 '삼총사'가 만들어져 왔다. 여러 아이돌들이 달타냥이 되어, 지금도 어디선가 막을 올리고 있는 '삼총사' 뮤지컬이 바로 그것이며, 폴w 앤더슨 감독의 '삼총사'는 3d 버전으로 화려하게 재탄생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삼총사'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타락한 권력에 저항하는 의협심 강한 네 젊은이의 좌충우돌 열혈 투쟁기가 아마도 가장 핵심적인 이유일 것이다. 또한 삼총사와 달타냥 네 명이 선보이는 다양한 캐릭터의 향연 역시, 유명세의 한 이유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그 '고전' 삼총사가, 2014년 텔레비젼을 통해 등장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선하고도, 인조 대왕 시절이다. 


조선에는 몇몇 유명세를 치루는 임금님이 계시다. 27분의 임금님 중 일찌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시작으로 하여, 한글을 만드신 세종 대왕이 한때 인기를 끄는가 싶더니, 최근 들어서 가장 대세를 이루는 건 아마도, 드라마, 영화를 섭렵하고 계신 '정조' 임금님이실 것이다. 이성계나, 세종 대왕이, 순기능의 권력의 상징이라면, 정조 임금님은, 그런 분들과 달리, 아버지를 뒤주에 여의시고, 할아버님 치하에서 숨죽여 살다, 왕이 되어, 할아버지의 치세와는 다른 길을 걸은 '개혁 군주'라는데, 하지만, 마치 3일 천하인 것처럼, 별로 길지 않은 치세로 인해, 더더욱 드라마틱한 운명의 인물로 종종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인물들은 임금님만 계신 것은 아니다. 왕이 되었으나, 그의 앞서가는 '사대'라는 틀을 벗어난 정치적 식견, 하지만, 그런 정치적 식견에도 불구하고, 근시안적인 권력 전횡으로 말미암아, 한때 왕이었던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도 게시고,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아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정조의 아버지 사도 세자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런 분들에 비해, 소현세자는, 비록 역사적으로는 병사라고 기록되지만, 이젠 그보다는 아버지에 의한 독살이라는 야설이 더 신빙성이 높아지는(이덕일, 조선왕 독살 사건), 결국 사도세자 못지 않은 불운의 세자였지만, 상대적으로 대중적 관심에서 벗어나있던 인물이었다. 바로 이 소현세자가, 화제를 모았던 <나인>의 제작진이 다시 뭉쳐 만든, tvn의 새 역사극, <삼총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드라마틱했던 그의 삶에 비해, 늦은 등장이라 할 만하다. 

삼총사
(사진; tv데일리)

첫 선을 보인 <삼총사>에서도 중국인 첩자를 통해 해외 동향을 전해듣는 소현 세자가 등장하듯이, 소현 세자는 당시 조선에서는 드물게, 세계사적 식견이 깨인 인물이었다. 무능한 아버지 인조 대왕을 대신하여 전장에 나섰으며, 전쟁 후 볼모로 잡혀가 청에서 생활하면서,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을 넘어서는 정치적 안목을 키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선경지명 덕분에, 왕의 자리에 올라보지도 못한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인물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사대주의와, 척신 중심의 정치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몇 번의 기회 중 하나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바로 이런 소현세자의 드라마틱한 삶을 리슐리외 추기경의 전횡에 맞선 의협심 강한 청년들의 이야기 <삼총사>를 빌려와, 드라마로 재탄생시켰다. 

드라마 <삼총사>의 첫 회는, 소설 <삼총사>의 첫 회를 보존한다. 시골뜨기 달타냥이 파리로 올라와 왕실 근위대가 되고자 하나, 돈을 잃고, 뜻하지 않게 삼총사와 마주치게 되는 이야기가, 강원도 고성에서 무과를 보기 위해 올라온 박달냥의 스토리로 둔갑한다. 그 역시 거리에서 돈을 잃고, 겨우 남은 돈으로 찾아든 주막에서, 급제 예상자들을 대상으로 한 야습에 의협심으로 맞서다 '삼총사'를 조우한다. 시골뜨기 달타냥과 한때 흠모했던 여인이 세자빈이 된 것도 모른채 그녀를 얻기 위해 무과를 보러 올라온 박달냥은 묘하게도 다른 듯 같다. 또한, 왕실 근위대 삼총사와, 세자와 그의 익위사 허승포와 안민서 역시 다르지 않다. 더구나, 첫 회 부터 넉살좋은 포르토스를 원작 못지 않게 해석해 낸 양동근의 연기는 그 잠깐의 장면에서도 역시 양동근이라는 감탄을 불러온다. <나인>에 이어 다시 한번 합류한 이진욱의 세자 포스도 만만치 않고. 박달냥의 정용화나, 안민서의 정해인도 이물감이 없다. 

비극적 인물 소현세자를 다루지만, 유쾌상쾌 통쾌했던 원작 삼총사처럼,  첫 회를 통해 본, <삼총사>는 미래의'비극'은 우선 제쳐두고, 멋진 사내들의 조우와 활약에 우선 방점을 둔 드라마가 될 듯하다. 그리고  수작으로 평판이 자자했던 <나인>이 모작의 그늘로 인해 그 명성에 흠집이 생긴 것과 달리, 아예 이번에 제작진은 <삼총사>를 대놓고 불러온다. 그리고 순조로운 첫 회, <삼총사>를 통해, 사라진 인물, 그저 왕이 되기에 실패한 채 아비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만 불운의 소현 세자가 멋들어진 역사적 인물로 거듭날 것 같은 기대가 든다. 


by meditator 2014. 8. 18. 07:55

최근 베스트 셀러 목록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 책 중 하나는, 바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일본 편 시리즈 들이다. 그리고 sbs스페셜은 3부작으로 바로 이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을 화면으로 옮긴다.


물론 4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한 시간 여의 다큐로 옮겼다고 해서, 온전히 그 책을 다 알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글로 읽어 막연했던 것은, tv 화면에서 등장한 생생한 영상을 통해, 분명해 지고, 또 화면을 통해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지나가버려 아쉬웠던 것은, 책으로 찾아 읽으면 되니, 화면으로 들어온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일본편과, 책은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다. 


하지만, 책이 아닌, sbs스페셜만의 장점은 또 있다. 책에서도 유홍준 교수와 함께 여행을 함께 해주신 많은 동료 분들이 계시지만, tv로 찾아든 일본 유산 답사기에는 유홍준 교수의 이제는 우리 나라의 각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이 되신 오랜 지기 세 분이 함께 함으로써, 다방면의 즐거움을 준 답사 여행이 되었다. 바로 역사학자이신 안병욱 교수와, 화가 임옥상씨, 그리고 건축가 승효상씨가 그분들이다. 화가 임옥상씨는 답사지의 곳곳에서, 수묵 담채의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크로키를 선보인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의 일본은, 그의 스케치북에선, 그저 점점이 흩어지는 꽃잎을 지닌 나무로 새롭게 되살아 난다. 유홍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일본 여행지의 버스 안이 아닌 좀 더 '출세'(?)를 했을 거라며 대학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친구  안병욱 교수의 소개 덕분에, 시청자들은, 이제는 '답사' 그 행위 자체가 의미가 되는 '무형 문화재'라 칭해도 무리가 없는 유홍준표 답사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길 수 있다. 건축가 승효상은 그저 화려한 일본 정원에 눈을 빼앗긴 우리에게, 건축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승효상이 평가한 3국의 정원은, 중국의 정원이 위계 질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일본의 정원이 오로지 '관람'을 위한 것이라면, 그들에 비해 초라해 보였던 우리의 정원은, 바로 그 안에서 놀이와, 제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그리고 그런 것들이 치뤄지고 나면, 싹 비워지는, '공간', 그 자체로서의 '사유'의 의미가 담긴 '최고'의 정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각 분야의 대가들이 된 유홍준 교수의 지기들 덕분에 답사가 풍부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교토'에서, '아스카', '나라'로 이어지는 여정은 어떤 젊은 사람보다도 재바르게 움직이며, 젊은이들조차 헉헉 대며 걸음을 서두르게 만드는 볼 것 많고, 들을 것 넘치는 유홍준 표의 '오감' 답사이다. 

3부작의 첫 번째 여정인, '교토, 아스카, 나라로 이어지는 여정은 바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신라'의 도래인의 신사가 남아있는 교코, 100여명의 백제 도래인들이 '아야씨'가 되어 고대 국가 일본의 토대를 만들어 준 아스카, 고대 국가 일본의 자부심을 내세운 동대사의 기술적 성취의 바탕이 된 멸망 이후 도래한 백제인 들. 보를 쌓아 습지를 농사가 가능한 땅으로 만드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 화려한 불상과, 지진에도 흔들림이 없는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 땅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유홍준 교수는 첫 회, '도래인'을 정의하면서, 과연, 일본 땅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의 흔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정립하고자 한다. 즉, 특히나 최근 들어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양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과연 그곳으로 건너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떤 자세와 시각으로 바라보는가가, 양국의 관계 정립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유홍준 교수에 따르면,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은,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의 부침에 따라, 정치적 실권을 잃고 집단적으로 건너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에서 실각한, 하지만 일정 정도 한반도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문화를 영유했던 도래인들은, 당시 일본에 비해 문화적 우위를 점했고, 바로 그 문화적 선진 세력으로, 일본에 쉽게 자리잡고, 문물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유홍준 교수는 '도래인'에 대해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고 짚고 넘어가고 있다. 즉, 그들은 도래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문화를 가져간 것은 맞지만, 그곳에서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은 한국의 문화가 아니라, 일본의 문화로, 우리는 '도래인'들의 문화적 성취를 해외 이민 개척사의 첫 번째 성공 사례 정도로 '양보'하여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헤게모니'와 '패권주의'적 시각을 거세하고, '도래인'을 담백하게 바라보아야, 한일 양국의 문화적 교류는 본래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양국의 관계도 호전될 수 있다는 것이 유홍준 교수의 시각이며, 그런 교수의 시각은, 앙금이 가라앉지 않은 한일 양국의 관계를 바라보는데, 현명한 선구안으로 시청자들에게 제시된다. 


by meditator 2014. 8. 18. 0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