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소매치기를 하지 말라는 창만(이희준 분)의 설득에 유나(김옥빈 분)는 무 자르듯 답한다. 더 큰 도둑놈들은 잡히지 않는 세상에, 나같은 사람이 남의 지갑 좀 훔치는 게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이 되냐고. 

당당한 유나의 소매치기 론에 창만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더는 그녀를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렇게, 더러운 세상,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것에 당당해 하던 유나가 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소매치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매치기한 할머니의 지갑을 돌려주는 바람에, 같은 업계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지청구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달라지게 했을까?

처음 감옥에서 출소를 하고, 미선의 방에 얹혀 살 때만 해도, 유나는 아픈 아버지를 만나러 감옥에 갈 돈이 없어 동동거리는 처지였다. 그런 유나의 자구책은 남의 지갑을 슬쩍하는 것이고, 그 일조차 같은 업계 사람들이 눈독들인 사람을 먼저 털어 오히려 그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기도 할 정도로' 독고다이'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달라졌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던 청소년 아이를 교정하여 스스로 소년원에 자수하게 만들고, 손을 다쳐 강도로 돌변할 뻔 했던 동료의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 주느라 노심초사한다. 후배들은 그녀를 따르고, 그녀 주변엔 사람들이 넘친다. 누구랑 같이 일도 못한다던 그녀가 말이다. 

(사진; tv리포트)

그녀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창만에게 그녀는 말한다. '니가 오지랖이 넓어서 싫다고', 그도 그럴 것이, 오직 그녀가 좋아서, 다세대 주택에 세들어 온 창만은, 그 특유의 사람 좋음으로 인해, 주인집 콜라텍에 들이닥친 조폭을 해결해 주는 바람에, 콜라텍에 취직하는가 하면, 다세대 주택에 세든 사람들의 온갖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한다.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던 개삼촌도, 야반도주를 했던 옆방의 부부도, 왕년의 조폭 할아버지도, 창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창만을 유나는 어이없어 한다. 남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는 창만을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어느 틈에 유나도 창만을 닮아간다. 

소년원에 간 동종업계 아이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원 입구를 자꾸 바라보던 유나가 결국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 누가 칼을 빼들고 들이닥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녀가, 창만이 자신의 엄마를 찾았다는 이유만으로 며칠 동안 그와 말도 섞지 않던 그녀가, 자신의 소년원 시절을 떠올리며 통곡을 한다. 처음 소년원에 갔던 그 시절,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다던 그 아이가 바로 지금의 유나이다. 그리고, 창만은 유나가 그토록 완고하게 소매치기의 삶을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어린 시절 엄마와의 이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창만의 분석이 틀리지 않은 이유를, 고아원에서 만난, 다영(신소율 분)을 통해 설명한다. 어린 시절 엄마와 헤어진 다영이, 엄마의 빈 자리를, 고아원 고아들과의 동일시에서 찾아내듯, 그런 다영과 공감하는 유나를 통해, 유나의 결핍을 이해시킨다. 감옥에 간 아버지, 이유야 어떻던 자신을 버린 엄마, 그런 외로움 속에서, 유나가 자기 자신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은 '소매치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매치기'를 통해 세상에 대해 자신을 방어해왔던 유나는 창만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달리보기 시작한다. 창만 역시 유나와 다르지 않다. 가족이 없던 그를 보살펴 주던 작은 아버지가 그를 도둑으로 몰았던 그 상황이 너무 억울해 고향을 떠나왔던 그는, 유나와 전혀 반대의 삶을 산다. 여전히 틈틈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그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으로 그의 외로움을 치유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세상에 의지가지 없는 창만이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주느라 바뻐 자신의 외로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그리고 그런 창만을 바보같다며 비웃던 유나도 어느 틈에, 그의 '이타적' 사랑에 전염된 듯, 주변을 챙긴다. 그러자, 어느 틈에 유나 주변에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그녀는 소매치기하는 거 조차 잊은 듯 살아가게 되었다. 

20만에 돌아온 '서울의 달'이라는 표제를 내걸었던 <유나의 거리> 속 서울은, 이십년 전 그때와 묘하게 닮은 듯 다르다. 여전히 달동네 같은 동네, 바글바글한 셋집에 모여 사는 건 다르지 않다. 사실 세상은, 오히려 그때보다도 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간의 격차는 심해졌고, 삶은 각박해 졌는데, 그 시절 아둥바둥 살아보겠다고 삶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다 뒤엉켜 버렸던 주인공들의 삶은 한결 온순해 졌다. 
작가의 연배가 그 세월만큼 깊어진 탓일까. 야망을 위해 자신을 던지다 스러져 버린 주인공 대신, <유나의 거리> 속 주인공들은, 서로 전염된 듯, 유하게 삶의 고비를 넘긴다. 제비에게 걸려 돈도 뜯기고, 맞기도 하던 미선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살 방도가 없다 강도를 계획하던 남수는 역시나 그 바닥 일이지만 새로운 삶의 활로를 찾는다. 쓸쓸한 왕년의 조폭 할아버지는 이제 삼각 관계에 빠질 정도로 노년의 삶에 새록새록 재미를 찾아가고, 전남편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칠복 부부 역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겨 가고 있다. 이십년 전, 이웃이란 이름으로 등을 쳐먹고 날르던 이웃들은, 오히려 각박해진 세상에 서로의 등을 빌려준다. 유나도, 창만도, 그리고 다세대 주택에 사는 모든 이들이, 가족은 없지만, 더 가족처럼 서로에게 등을 부비며 어우러져 살아간다. 

여전히 다수의 가족 드라마들이, 세상에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고 목놓아 외치는 세상에, <유나의 거리>속 세상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번듯한 가족으로 보이는 가족들도 들여다 보면 제대로 된 집구석이 없다. 조폭에 이혼 경력이 있던 한만복은 술집에 다니며 기둥 서방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지금의 아내를 구해 지금의 일가를 이뤘다. 한만복의 전처에게서 낳은 딸 다영은 마더 컴플렉스는 있지만, 그래도 말 안통하는 아버지 보다는  새엄마랑 그럭저럭 잘 지내는 딸이다. 원앙같은 부부인줄 알았던 칠복-혜숙 커플은 알고보니, 마약 중독자 혜숙 남편을 피해, 딸조차 놔두고 야반도주한 불륜 커플이다. 어디 그뿐인가, 창만이 이상적 모델인 달호-양순 부부는 전직 형사와 소매치기의 조합이다. 들여다 보면 문제 투성이의 가족이라도, 여전히 한 지붕 아래, 한 이불을 덮으며 알콩달콩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살아간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유나를 내쫓으려 하거나, 잠시 잠깐 눈앞의 이익을 위해 서로에게 칼을 빼들었다가도, 서로의 사정을 알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유나네 동네의 삶이 아마도 김운경 작가가 우리 시대 전하고픈 메시지인 듯하다. 이십년 전보다도 한층 더 서로가 뿔뿔이 흩어져, 가족 조차도 멀어져 가는 세상에, 그러지 말고, 서로가 의지하며 살아가자고, 그러면 조금은 덜 외롭고, 덜 힘들 것이라고. 산타 클로스같은 창만의 존재를 통해, 그가 뿜어내는 온기에 조금씩 따스해져 가는 다세대 주택 사람들, 그리고 유나를 통해, 이렇게도 서로 기대며 살아갈 수 있다고, 김운경 작가는 설득한다. 


by meditator 2014. 9. 3. 0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