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출간된 고 박완서 작가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수필집 중 한 꼭지에 해당하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마라톤 대회로 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손을 모아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선두 그룹이 지나고, 마라톤 대회를 지켜보던 사람들조차 관심이 흩어질 무렵 여전한 교통 통제에 짜증이 나던 참에 푸른 색 옷의 마라토너가 등장한다. 그의 모습이 좀 우습고 불쌍하다고 느꼈던 작가, 하지만 정작 그의 얼굴에서 '정직한 고통'을 본 순간,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차도로 뛰어들어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그런 작가의 독려에 힘입어 거리의 시민들도. 


지금이라면 다를까? 처음 이 책을 접했던 70년대 후반, 이 글은 충격적이었다. 꼴찌는 말 그대로 꼴찌였던 세상 속에서 '낙오하지 않는 이'를 향한 격려의 박수라니! 그건 그저 한 편의 수필이 아니라, 성장 지상주의 대한민국을 울리는 경종이었다. 그리고 이제 5월 28일 sbs스페셜은 어쩌면 그 시절 박완서 작가처럼 이번 대선에서 꼴찌를 한 심상정을 복기한다. 



찌 심상정, 하지만 여전한 심블리
'어대문'의 선거판이었다. '촛불'의 후원을 얻은 '어대문'에 도전한 후보들은 이제 '정계 은퇴'가 운운될만큼 역부족의 선거판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선거 중반 토론 과정에서 그래도 우리 편 '어대문'에 흠집을 내는데 동조했다는 이유로 당원들을 잃는 해프닝을 겪으면서도 완주를 했다. 아쉽게도 원하던 10%를 넘기는 커녕 6.2%라는 여전히 넘기 힘든 진보 세력의 현실을 경험했다. 그런데 왜 다큐는 심상정을 주목할까?

시작은 이제는 돌아와 주방 앞에 선 서툰 주부 심상정으로 시작한다. 가사 일을 14년 째 남편에게 맡기고 바깥 사람이 된 심상정, 모처럼 돌아와 아들이 원하는 '닭볶음탕'을 하려하는데, 도무지 부엌이 낯설다. 장보러 간 마트에서는 여전히 '정치인'이다. 그런데 이 사람 낙선한 대통령 후보 맞는지? 인기가 좋다. 어른들만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돌 스타급이다. 거리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6.2%의 득표율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놈의 인기'말이다. 

바로 그 점이다.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선거 과정에서 만난 상당수의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두 사람있었다. 바로 왜 유승민 후보가 바른 정당인 것과, 또 한 사람 심상정 후보가 정의당이라는 것이다. 선거 과정 후보자들의 토론을 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여, 야의 편견없이 보자면 두 사람이 제일 잘 했다. 말이 앞뒤가 맞았고, 자신의 논리가 있었고, 객관적인 설득력을 가졌었다. 사전 선거 지지율에서 심상정 후보는 11.4%의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 선거도 '토론'과 '결과'는 별 개의 것이었다. 물론 '토론'을 못해서 망한 후보도 있다. 하지만 '토론'을 잘 해서 잘 된 후보도 없다. 

하지만 또 그게 아닐 수도 있다. 물론 정의당이 바른 정당에도 못미친 6.2%의 득표를 얻었지만 역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진보 세력 후보 중 가장 다수의 득표를 했다. 14대 대선 당시 민중후보 백기완 선생은 0.9%를,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0%를 득표했다. 그에 비하면 심상정 후보의 득표수는 무려 두 배나 는 것이다. 

득표수만이 아니다. 선거 과정에서 3억의 빛이 무색하게 선거가 끝나고 정의당에는 성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못미 심상정' 등 비록 선거에서 심상정을 지지하지는 못했지만 심상정의 완주를 지지하는 성금들이었다. 2억 8천만원이 모였다. 선거에 지면 '정계 은퇴'하라는 정치판에서 낙선 후보에게 성금이라니!



심상정에 대해 지지의 의미
그렇게 선거에서 지고도 여전한 인기를 누리는 심상정 후보에게는 별명도 많다. 심블리에서부터 2초 김고은, 심크러쉬까지. 그 별명의 면면에서도 느껴지듯이 '트렌디함'이 심상정과 함께 한다. 이런 '트렌디한 별명'에 대해 정치학자는 물론 별명의 시작은 정의당 홍보팀이었을지 모르나, 그 별명이 '대중'적이 되는 과정에는 '대중의 적극적인 호응'이 뒤따랐을 것이라 분석한다. 일찌기 국회에서부터 '적폐'의 수구 세력에게는 '걸크러쉬'하기를 마다하지 않지만, 홍보 영상을 비롯한 평소의 그 모습에서는 2초 김고은을 수긍하게 할 만큼 '심블리'한 심상정. 아마도 본인이 우기지 않아도 2초 김고은이란 별명이 '욕'이나 '어불성설'이 아닌 웃고 넘어갈 수 있게 만든 건, 심상정이 선거 기간 보인 '노력'의 결과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똑같이 대선 토론 과정에서 혁혁한 성과를 보인 두 사람이지만, 유승민과 심상정이 보인 토론의 결은 달랐다. 일찌기 유시민 작가와 100분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경제학자이자 관료 출신의 유승민 후보가 논리적인 토론가였다면, 심상정 후보는 정의당 후보로서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살아온 삶이 일치된 실천가로서의 그 모습에 더 힘이 실린다. 선거 과정 여성과 관련한 실언을 한 홍준표 후보에게 따끔하게 짚고 넘어가는 모습이나, 굳이 나설 필요없는 민주당 후보의 대북 송금 문제를 나서서 언젯적 대북 송금이냐며 그 자리에 있는 모두 후보들을 뜨끔하게 하는 장면은 홍준표 후보와는 또 다른 의미로 토론을 보는 이들을 속시원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거기에 우리 사회의 약자로서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에 대한 그녀의 일관된 입장은 그저 군소 정당으로서의 '선거 결과'를 의식하지 않는 '프로파간다'를 넘어 이번 선거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속시원한 이야기를 해준 사람으로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한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경기 고양 갑의 심상정 후보와 경남 창원 성산 노회찬 후보를 제외하고는 한 자리 수의 지지율을 넘지 못했다. 심상정이라는 개인이 보인 성과가 정의당, 혹은 진보 세력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있을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하지만 명망성의 한계를 넘어, 그 지지 속에 숨겨진 의미를 짚고자 한다. 심상정의 입을 통해, 그리고 그녀가 살아온 삶을 통해 그녀가 주장하고자 하는 '노동'이 제 목소리를 내고, 제대로 대접을 받는 사회에 대한 여전한 열망이 6.2%의 수치로 가늠할 수 없는 심상정 개인에 대한 열렬한, 그리고 여젼한 인기의 요인이라는 것이다. 현직 대통령 지지율이 80%를 상회하고, 민주당 지지율이 50%를 넘는 지금, 그럼에도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리고 '미래 지향적'으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심상정의 지지율에 담겨있는 간절한 우리 사회 약자들의 제 목소리라는 것을 뒤늦게 <sbs스페셜>이 짚는다. 





by meditator 2017. 5. 29. 14:41

마지막회를 시청한 호청자들은 허무했을 지도 모른다. 첫 회부터 내내 집요하게 추격하던 하완승의 첫 사랑 현수 살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가 싶더니 결국 밝혀진 살인범과 사주범 뒤에, 거대한 또 다른 사건의 그림자가 드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100미터로 질주를 해왔는데 도착하고 보니, 겨우 한 정류장에 도달했다는 '사인'을 받고 망연자실했을 지도 모른다.


모호한 엔딩? 아니 시즌 2를 향한 원대한 떡밥

하지만 '미드(미국 드라마)'나 '영드(영국 드라마)'을 다수 시청했던 시청자라면 이런 '엔딩'의 방식에 익숙할 듯하다. 극 초반 시작되었던 사건, 하지만 정작 눈 앞의 사건을 해결하고 보니, 그 사건은 진짜 거대한 음모의 시작에 불과했으니..... 뭐 이런 식 말이다. <셜록> 등의 시리즈에서 낯 익게 등장했던 이 서사'의 구조는 나선형으로 시리즈를 거듭하며 진범을 향해 달려가는 방식이다. <멘탈리스트>와 같은 드라마는 '레드 존'이라는 연쇄 살인범을 잡기 위해 무려 시즌6을 달려가는 식이다. 결국 <추리의 여왕>이라는 드라마가 단 한 차례 16부작 드라마라면 이런 식의 엔딩이 '허무'하다못해, 호청자에게 모욕을 준 셈이지만, 그게 아니라 시즌제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면 '큰 그림'을 향한 영리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에 선글라스까지 장착한 현수와 '그림자'의 조우라니! 이보다 더한 시즌 2의 떡밥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추리의 여왕>이 던진 모호한 엔딩, 그리고 다음 시즌을 향한 여운만으로 이 드라마의 시즌제를 기대하게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추리의 여왕>이 지난 16부작 동안 보여준 연출, 연기, 그를 통해 구현된 캐릭터들과 서사들이 16부작 한 회차로 마무리 짓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2009년 종영된 <몽크> 시리즈가 있다. 자동차 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후유증으로 강박증을 겪는 탐정 몽크(토니 샬호브 분)와 그의 전직 동료 형사들, 그리고 몽크의 비서로 채용되지만 거의 동반자적 역할을 하는 나탈리(트레일러 하워드 분) 등에 의해 '해프닝'으로 시작하여, 강력 사건 해결로 마무리되는 <몽크>는 탐정물이지만 한편의 소동극처럼 진행이 된다.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캐릭터들, 그리고 그 분위기

그리고 <추리의 여왕>을 보면 그 시절 <몽크>가 떠오른다. 요리에는 젬병이지만, 사건만 일어나면 궁금증을 참지 못해 프라이팬이 타는 줄도 모르고 뛰쳐가는 아줌마 탐정 유설옥(최강희 분)과 그녀를 아줌마라 무시하는 듯하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공간에 오면 촉이 좋아진다며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그녀를 믿어주고, 그녀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달려가는 하완승(권상우 분)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화음은 유쾌하고 따스한 콤비 플레이어다. 돌땡이라 부르지만 자신을 믿어주는 그를 의지하고, 아줌마라 부르지만 그 누구보다 그녀의 의견을 따라주는 이 언밸런스한 조합은 강박증 탐정과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살피는 비서 겸 '왓슨 뺨치는' 조력자 나탈리 못지 않은 명조합인 것이다. 아줌마와 형사, '사랑'이 개입되기 힘든 이 조합은 16부 동안 그 어떤 사랑의 주인공들보다 설레이며 시청자들을 이끌었다.


특히나 그간 우리의 드라마들에서 '복수'의 역동성을 끌고가는 캐릭터나, 성공담의 주인공으로서의 여성 캐릭터의 존재 외에 남성에의해 그 존재감이 증명되지 않는 '캐릭터'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아쉬웠던 상황에서 아줌마 탐정 유설옥의 존재는 그저 16부로 퉁치기엔 너무도 아까운 캐릭터다.


 

 


그렇게 캐릭터 자체로도 시즌제를 바라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기대가 되는 건 모처럼 자신들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최강희와 권상우이다. 어느덧 중견 연기자가 된 두 사람, 하지만 그간 성실하게 활동해 온 것과 달리, 한때 스타였던 두 사람의 존재감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경우가 오래 되었다. 전작 <화려한 유혹(2015)>의 신은수 역은 연기 변신이었지만 끝까지 몸에 맞지 않은 옷이었고, <메디컬 탑팀(2013)>의 권상우는 그의 단점을 더 부각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던 두 사람에게 찾아온 유설옥과 하완승, 그 두 캐릭터는 모두 그간 최강희가 해오던 그 통통튀는 귀여움과 권상우의 허허실실한 자연스러움을 연장시킨 캐릭터다. 그런데 그 잘 하는 캐릭터를 다시 하는 두 사람에게는 이전에 보지 못한 '안정감'과 배가된 자연스러움이 보강된다. 그간 아마도 각자가 아니라, 권상우와 최강희가 '합체'된 시너지 효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건 주인공들만이 아니다. 빈번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늘 아쉬웠던 이원근의 매력이 모처럼 빛을 발한 것도 '홍소장'의 캐릭터였고, 신현빈 역시 같은 케이스다. 하완승 + 우경감의 조합의 활약이 아쉬울 정도로 박병은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다. 특히 배방서에서 밀려난 완승 등이 배방 2동의 마트와 도시락 가게를 거점으로 수사를 펼쳐나가며 동네 주민들과 '협업'하여 범인을 잡는 수사 방식은 발군이었다. 그렇듯 파출소 직원 한명, 동네 주민 한 명, 한 명 등장했던 인물군 모두가 '기억되는 캐릭터'로 남긴 <추리의 여왕>은 그래서 마지막회 배방 2동을 부감하는 장면에서 오랫동안 정든 곳을 떠나는 아쉬움이 느껴지듯 그런 '인간미'를 살려낸다. 그저 주인공만이 독주하고, 그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으로 작동하던 미니 시리즈와 달리, 마치 주말 가족드라마처럼 등장한 그 누구라도 '존재감'을 드러냈던 배방 2동 '어벤져스' 수사 팀의 활약이 계속 보고 싶은 것이다.


 

 


캐릭터만이 아니다, <추리의 여왕>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때론 이게 드라마야 영화야 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인상깊었던 연출들이다. 한참 꽃이 피는 배방 2동을 배경으로 그 꽃 속에서 설왕설래하는 두 주인공을 비롯하여, 그들은 물론 주변 인물들이 출몰하는 곳은 그곳이 갯펄이든, 시체가 던져진 개울이든 그 어느 곳이든 '예술'적 성취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사건을 수사하고 추리를 하는 '어두운 설정'에도 불구하고, 배방 2동과 도시락집, 설옥이네 집 등의 '동네의 아기자기함과 따스한 정서'가 조합되어, <추리의 여왕>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셜록> 등의 명드를 떠올리면 주인공 못지 않게 그 드라마의 그 분위기가 기억되듯, <추리의 여왕>에는 바로 그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라 할 만한 정서가 정립되었다.


물론 많은 장점만이 있는 건 아니다. 요즘처럼 빠른 사건 전개가 아니면 채널이 바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캐릭터, 배경과 분위기까지 챙겨가며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추리의 여왕>의 가장 큰 단점은 수사물이라기에 늘어지는 진행 속도였다. 물론 호청자들은 그 조차도 <추리의 여왕>만의 매력이라고 하지만, 그 '느린' 속도는 8% 내외의 시청률이라는 결과로 시즌제의 발목을 잡고 만다. 물론 <추리의 여왕>의 낮은 시청률을 꼭 전개 방식의 문제라 볼 수는 없다. '연애' 이야기 아닌 아줌마 탐정이라는 생소한 캐릭터의 활약상은 중장년층이 채널 주도층이 대다수인 현실에서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약점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웰메이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추리의 여왕>, 시청률은 비록 낮았지만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는(?) 새 시대의 공영 방송 덕택에 다음 시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by meditator 2017. 5. 26. 16:40

20세기 최고의 서스펜스 스릴러가 칭해지는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이 <석조 저택 살인 사건>으로 돌아왔다. 고전적 스릴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영화는 1950년대 뉴욕 대신 1945년 경성을 배경으로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어내려가듯 '고전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진행된다. <시카고 타자>가 과거로 돌아가 일제 시대 그 암흑을 '환락'으로 밝히는 경성의 유흥가를 그 시대 젊은이들의 피난처로 그려내듯 <석조저택 살인 사건>은 원작 1950년대 뉴욕의 불야성을 일본은 패망하고 새로운 시대의 흥청거림에 불을 밝히는 경성의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두 젊은이의 뜻하지 않은 만남과 사랑으로 연다. 


 

 


순애보의 씨실 위로, 법정 공방전의 날실이
돈이 없어 택시 운전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는 하연(임화영 분)을 자신의 특기인 마술로 구해준 가난한 마술사 이석진(고수 분)은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그녀와 방을 나누어 쓰는 사이가 되다 결국 방을 함께 쓰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풍운의 꿈을 안고 떠난 부산 공연에서 아내는 그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호텔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경성 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선남선녀의 순애보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석진과 임화영의 비극적 순애보가 씨실이라면 그 러브 스토리 사이를 '날실'처럼  노회한 변호사 윤영환(문성근 분)과 서릿발같은 검사 송태석(박성웅 분)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법정 공방전이 채워간다. 원작의 서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은 빌, s 밸린저의 <이와 손톱>처럼 러브 스토리와 법정 서사를 한 장, 한 장 엇물리며 '범인'에 대한 긴장감을 높여가는 방식을 그대로 채택한다. 


 한 편의 추리 소설같다는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안타깝게도 '찬사'가 아니다. 아직 가해자가 드러나지 않은 법정, 증거를 가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벌어지는 법정 공방전과 최승만의 순애보는 서로 엇갈리며, 비극적 순애보의 여정을 달군다. 하지만 그건 소설의 경우다. 소설은 '시각'을 통해 수용되지만, 그 시각을 메우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문자라는 '기호'이고 그 '기호'는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통해 '독해'되어, 뇌에서 '이미지화'한다. 그러기에 범인을 드러내지 않은 재판과 그 행간의 순애보는 범인을 추리하고, 그의 만행을, 그리고 최후의 복수의 방식에 대해 한껏 '뇌'를 달군다.

반면,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를 전제로하여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들은 의아하다. 도대체 최승만의 아내가 죽음에 이르는 저 비극적 순애보와 이 법정의 살인 사건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기에.  '석조 저택'이 '추리'하라 내놓은 여정에 대해 마치 양 손 모두를 뒤로 감춘 채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패를 가지고 희롱하는 게임의 술래가 된 양 당황스럽다. 한 시간 여의 과정은  '불친절'이나, '장황함' 혹은 '답답함'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느낌처럼. 그러기에 과연 원작의 서사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각색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베스트 셀러가 곧 좋은 영화를 보장해 주는 건 역시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한 시간여, 아내를 잃은 이석진은 자신을 아는 그 모든 이를 죽였다는 위조 지폐범을 잡기 위해, 이빨을 뽑고, 얼굴에 칼집을 내며 자신을 지운 채 '최승만'이 되어 경성의 택시 운전사로 전전한다. 경성에서는 드문 외국어를 하는 그를 찾기 위해 택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깔개의 떡밥을 던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빗속에서 드디어 최승만은 그, 남도진을 만난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 법정에 드디어 살해 혐의를 받은 이가 등장한다. 남도진이다.  


 


한 편의 추리 소설 같다서 아쉬움 
안타깝게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지 도통 알 수 없던 영화는 그 빗속에 등장하는 남도진, 그리고 법정에 등장하는 남도진으로 단번에 명확해 진다. 이 '명확함'은 그리고 그 한 시간 여의 사랑꾼을 고군분투했던 고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도진으로 분한 '김주혁'의 존재함에 상당히 의지한다.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모두 목숨을 거두었다는 위폐범이자,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성 밤 거리의 부호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그러기에 이런 '개연성'이 되는 '존재감'의 배우를 굳이 한 시간 여 장황한 설명을 해가며 아낄 필요가 있었을까란 물음이 던져진다. 머리로 추리하여 만들어 가는 캐릭터와, 배우의 존재감이 주는 '갭'에 대한 제작진의 '판단 미스'의 지점이다. <비밀은 없다(2015)>, <나의 절친 악당들(2015)>, <공조(2016)>을 통해 '악역'의 카리스마가 한껏 고양된 김주혁을 '캐스팅'해놓고, 사전 정지 작업에 시간을 끌어버린 영화는 이후 남도진의 악행을 '비바체'로 풀어낸다. 영화 초반 '복선'처럼 등장한  '보이는 것을 숨기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이석진의 마술 방식을 활용한 '복수'에 대한 감탄은 찰라다. 

그러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과연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반문하게 된다.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이라는 명확한 '스릴러' 장르의 이름표를 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독은 이 영화를 다보고 난 후 관객들의 잔상에 오래오래 기억되는 건,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관없이,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던져 '이석진 식의 사랑'이었을까? 그렇다면 애초에 제목부터 다시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와 손톱>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제치고,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제시되었을 때 관객은 '그 살인 사건' 자체에, 그리고 그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기대를 가지고 극장을 찾는다. 하지만 영화 <석조 저택 살인 사건>은 원작의 '손가락'을 둘러싼 불꽃튀는,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모호한 법정 공방으로 자신들은 알지만 '관객들은 모르는 이야기로 시간을 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뜻밖의 반전과 함께 영화는 이걸 몰랐지 라며 의기양양하겠지만, 관객은 그 의기양양함에 탄복하기엔 너무 지루한 여정을 달려왔고, 고대했던 남도진의 활약은 단편적이었다. 

물론 이런 안이한 '각색', 그로 인해 불친절한 전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경성 기담>의 그 분위기를 그리워했던 사람이라면 1945년 경성을 재현해낸 이 영화에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악인으로 등장한 그 존재만으로도 발군이었던 김주혁을 비롯하여, 문성근의 노회한 친일 변호사의 연기 역시 여운이 길다. 



 





by meditator 2017. 5. 25. 04:47

예지력이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맞춘 드라마도 없다 싶었다. 새 대통령이 뽑히고, 감히 불감청(不敢請)'이었던 시대에선 상상만의 고소원(固所願))들이 새 시대를 실감케 한다. 그리고 그런 '새' 시대에 발맞춰 드라마 <귓속말>에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같던 법률 카르텔의 아성 태백이 무너지고, 그 대표 최일환(김갑수 분)은 살인 혐의로 무기를 판결 받았다. 그의 비호를 받던 법조계 인사들은 이제 전직 검찰총장이 무색하게 교도소에 넘쳐난다. 돈봉투로 좌천당하는 우리의 법조계 인사들보다 한 술 더 뜬다. 그 놀라운 신세계, 하지만 <귓속말>을 애청한 사람이라면 안다. 그 신세계가 도래하기 까지 17부의 길고 긴 공방전이 펼쳐졌었음을, 이른바 '퉁수극'이라 할 만큼 매회 엎치락 뒤치락 승기가 뒤집혔었음을, 심지어 다잡은 강정일(권율 분), 최수연(박세영 분)은 마지막 회까지 미꾸라지처럼 자신들이 가진 모든 법적 지식을 짜내 법망을 피하려 했음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죄값을 받았다. 거기엔 이동준이란 판사가 자기를 던져 새 시대를 맞이할 마중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중물이 된 이동준 - 그의 고행기

<추적자 the chaser(2012)>, <황금의 제국(2013)>, <펀치(2014)>의 복수 3부작을 통해 우리 사회 이권 카르텔을 속속들이 파헤쳤던 박경수 작가. 복수의 대장정을 끝낸 그가 새롭게 들고 돌아온 <귓속말>은 이게 박경수 작가 작품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정극'처럼 포문을 열었다. 공정하다는 평판이 자자한 젊은 판사 이동준(이상윤 분), 하지만 너무 곧으면 부러진다 했던가. 대법원장 사위의 재판에서조차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대법원장을 비롯한 그간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았던 법조계 인사들로 인해 궁지에 몰린다. 그것마저도 자신의 강직함으로 돌파하려던 그, 하지만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요양원조차 어려워지자 결국 태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단 한 번 눈을 질끈 감으면 비록 판사는 아니지만 법조인으로서 계속 살아나갈 수 있을리라 믿었던 그의 판단은, 그의 오판으로 인해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 신영주의 도발적 도전을 받는다.


늘 착한 역만 맡던 이상윤의 캐릭터가 무색하게 드라마가 시작하자마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양심을 판 이동준, 하지만 그가 판 양심의 댓가는 가혹했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태백의 사위가 되었지만, 자신의 눈 앞에서 연인인 강정일과의 스킨쉽을 마다하지 않는 아내 최수연,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범법자로 만들고 로펌 태백의 사위까지 된 그의 비서가 되어 나타나 사사건건 그의 목을 죄여오는 신영주. 그의 하루하루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최수연과, 난처한 입장의 그를 한번 더 다그쳐대는 신영주 사이에서 안전판없는 줄타기와도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양심을 판 건 단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한 그지만, 태백이라는 우리 나라 최대의 로펌의 일원이 되었다는 건, 그 한번이 영원으로 변하는 신호탄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한다. 바로 그 기로에서 고뇌하는 강직했던 판사는, 태백이라는 법률 카르텔의 일원으로 일신상의 안락과 영화를 누리는 대신, 신영주와 '적과의 동침'을 택한다.



하지만 그가 선택했다고 해서, 그의 삶이 바로 개과천선의 삶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호시탐탐 그의 목숨까지 노리는 강정일과 최수연,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배후에서 그를 너끈히 가지고 놀려는 최일환, 그리고 여전히 그를 미더워하지 않는 신영주 사이에서 그는 널뛰기를 하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언제나 박경수 작가의 작품이 그래왔듯이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을 과오에 빠뜨린 우리 사회 기득권 체제에 도전하는 주인공의 행로는 고달프다 못해 롤러코스터가 따로없다. 이기는 듯 싶으면 그를 주저앉히고, 또 승기를 잡았는가 싶으면 궁지에 몰리고, 이동준을 분한 이상윤의 눈망울은 그래서 17부작이 행로 동안, 늘 뜻하지 않게 자신을 덥치는 위협과 위험에 휘둥그레지고, 경악했다. 여느 드라마라면 장군 멍군 치고, 마지막 한 판 승으로 '카타르시스'를 담뿍 주며 명쾌한 승리의 세레모니를 안기는 것과 달리, 박경수 작가는 17부작 내내, 심지어 한 회에서 몇 번씩 판세를 뒤집으로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간다.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은 그래서 더 고통받고, 그런 그의 고통과 몸부림은 결국 우리 사회 '적폐'의 일소가 그만큼 '간단'치 않음을 반증한다.


결국 스스로 태백의 주인이 되어 태백을 붕괴시키려 했지만 그 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이동준은 자신을 정의의 마중물로 바친다. 스스로 불법 자금의 유입 서류에 사인을 하고, 비자금을 든 가방을 들고 나선다. 그리고 바로 그 자신의 법복을 벗게 만들었던 그 '함정'을 자신의 죄로 고백한다. 그렇게 이동준 자신을 마중물로 내던지고 나서야 최일환이 잡혀간 다음에도 여전히 견고한 '이권 카르텔'이었더 태백은 균열되기 시작한다. 어린 학생들의 죽음, 그리고 일흔이 넘은 농부의 죽음이 앞서고서야, 그리고 광장을 메운 촛불이 밝혀지고서야 구태의 정권이 무너지듯, 새 시대는 그렇게 느리게 그리고 완강한 저항을 넘어 힘들게 다가선다. 그러기에 이동준 판사의 지난한 고행기는 마치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맞이한 이 시대를 고스란히 상징하는 듯 반갑고 갸륵하다.


엇갈린 사랑

또 하나 <귓속말>의 특징은 그간 박경수 작가의 작품들이 '성공담' 혹은 '수사물', 그리고 정치물의 여정을 보인 것과 달리, 태백이라는 로펌을 배경으로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신선한 구도를 보인다.


자신의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 이동준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자 자신을 던진 신영주. 왜 하필 이동준이었을까? 판결은 이동준이 내렸지만 그 뒤에 태백이, 그리고 그의 하수인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었음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강직한 판사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자신이 정보를 제공했던 그 '배신'의 아픔이 신영주를 이동준의 비서라는 무리수를 두어가며 그를 옭죄었다.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이동준에 매달렸던 신영주, 그녀의 무리수는 결국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이 커플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던 것은 아직 두 사람이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며 그래고 한 배를 타려고 했던 시절, '수사 지시는 내가 한다'며 앞장서는 신영주의 모습으로 상징되듯, 그리고 마지막 재판 과정에서 신영주 당신이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는 이동준의 소회처럼, 이동준보다 더 강건하게 자신의 신념을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의지적 인간 신영주와 그런 그녀를 믿고 의지한 이동준의 '동지적 사랑'이 <귓속말>의 주제를 담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런 동지적 사랑만 있는 건 아니다. 이동준과 신영주가 원수에서 연인이 되어가던 그 시간, 아빠보다도 더 믿는 오빠에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내보이며 앙숙이 된 강정일과 최수연의 사랑도 있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함께 지냈던 두 사람, 최수연에게 강정일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동준을 제거해 버리며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막상 위기가 닥치자, 자신의 이해 관계를 위해 최수연을 버린 강정일의 배신으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 '금'은 의심과 통수를 넘어, 결국 정략적으로 함께 살아야 하는 그 사실 그게 너무도 끔찍해서 자신이 가진 비밀의 포문을 열어 놓은 최수연과, 그런 최수연을 감옥에 보내기 위해 비자금 계좌로 딜을 하는 강정일의 치킨 게임으로 마무리된다. 아버지의 유산을 거스르지 못한 채 자신의 기득권에 발목이 묶인 이들의 사랑은 자신들은 아니라 했지만 결국 '정략 연애'의 다른 버전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귓속말>은 그 이전 박경수 작가의 작품과 달리, 이 시대의 두 연인을 전면에 내세운다. 원수에서 결국 신념을 공유하고 동지이자, 연인이 된 이동준-신영주 커플과, 간쓸개도 다 빼어줄 것 같더니, 결국 자신의 부도덕한 가계를 위해 사랑하는 이를 기꺼이 제물로 바치고 스스로도 파멸해 버리는 강정일-최수연 커플의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 그렇게 '사랑과 전쟁'의 태백 편을 <귓속말>은 17부의 여정동안 치열하게 다룬다. 그 이전 작품보다 보다 젊은 세대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서로 다른 사랑 방정식을 통해, 이 시대의 정의와 그 정의를 실현해 가는 고민에 천착했던 <귓속말>, 그 길고도 지루한 공방의 끝은 이동준이 변호사 자격마저 상실한 결과를 낳지만, 그의 표정은 드라마를 시작한 이래 가장 홀가분하고 밝았다. 그렇게 드라마는 젊은이들에게 '정의'의 시대를 만드는 방식, 그리고 정의의 시대를 지켜가는, 그리고 정의로운 사랑에 대해 묻고 답했다. 

by meditator 2017. 5. 24. 05:29

<까칠 남녀>는 지난 15일 '여자도 군대 가라'에 이어, 23일 '군인도 사랑받고 싶다'를 통해 '군대'를 '까칠한 젠더 토크쇼'의 전면에 내세웠다. 최근 일부 사이트를 중심으로 '성평등'이 아니라, 패미니즘적 편견을 양산한다며 <까칠 남녀>'폐지' 서명 운동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2회에 걸쳐 진행된  우리 사회 남녀 사이에 가장 민감하게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군대'에 대한 토론은 <까칠 남녀>의 존재론적 의문에 대한 가장 적확한 답이었을 듯하다.


 

 


평등을 논하려면 여자도 군대가라?

군대 장비가 즐비하게 늘어놓아져 있는 x의 방에 들어선 남자들, 그들은 자연스레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고, 장비를 갖추며 '군인'이었던 시절로 돌아간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남자라면 이 '과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 제 아무리 특권층이라도 '군대'와 관련된 문제가 불거지면 대통령 후보조차 '낙마'를 하는 사회, 질병을 사유로 석연치 않게 매번 군입대가 연기되는 연예인의 군대 가는 문제가 가장 예민한 사안이 된 사회, 그리고 한 연예인의 흡연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부당한 군입대 등급의 문제가 조만간 그의 군복무가 끝날 상황인데도 여전히 '왈가왈부'의 대상이 되는 사회, 그렇게 제반 사안에서 '군대'는 우리 사회에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그래서 역설적으로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는 문제라는 걸 매번 증명해 내고 있다.


사회가 발전하고 '성'과 관련하여 '평등'의 담론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게 되면서 가장 큰 딜레마로 등장한 것이 바로 '남자들만의 군입대'이다. 방송 중 방송인 서유리가 평등해지면 군대 갈 수 있다는 말이 화제가 되었고, 결국 2부작의 주제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을 우스개식으로 시작한 토크쇼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군대'에 대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민감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성들도 가야하는 군대, 과연 현실은 어떨까? 송영선 의원이 '국방 전문가'임에도 군복무를 안해봐서 라는 이유만으로 발언 자체가 무시되는 현실, 그리고 막상 여성들이 그래, 여성들도 군대갈 수 있다고 하지만, 거리에 나가 입장을 물어보면 과반수의 여성, 심지어 남성들은 그 보다 작은 비율이 여성의 군입대를 찬성하는 남성들만의 '의무'이자, '특권, '전유물', 그리고 명예이자 상흔으로 자리잡은 군대, 과연 정말 여성들도 군대를 가는 현실이 가능할까?


방송 중 사례로 등장한 여성들이 군대를 가는 외국의 사례는 놀랍다. 노르웨이의 마리 에릭센 쇠레이어 국방 장관은 여성이다. 심지어 그녀는 여성들의 군입대를 의무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녀만이 아니다. 그녀에 앞선 노르웨이의 역대 국방장관들은 상당수가 여자다. 우리로는 격세지감이다. 노르웨이만인가. 네덜란드도 군인들을 사열하는 여성 장관의 모습이 등장한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외국의 사례.


 

 


이런 장면에 대해 부러움을 나타내는 여성 패널과 달리, 정영진 등의 패널은 남북한의 대치로 '전쟁'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우리와 상황이 다르다며 고개를 젓는다. 이렇듯 '군대'와 관련한 사안은 매 사안마다, 입장을 위해 등장하는 젊은이들부터, 패널들까지 끝날 줄 모르는 선로처럼 입장이 갈린다.


그나마 서민 교수가 다를까? 하지만 여성 신문에 칼럼을 기재하는 서민 교수, 자신의 칼럼을 예로 들어 남자들은 군대 한번 다녀온 걸 평생 울궈먹는다며 비판하자, 이에 이날의 게스트 방송인 최욱은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애 낳은 걸 평생 울궈먹는다며 바로 대응하듯, 그리고 그가 남성들이 방산 비리에 취약해서 여성들이 국방 장관 등 중책을 맡아야 한다는 발언에 역차별이라는 반발이 일듯, 그의 입장은 객관적 평등의 시각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편향의 흔적을 감추지 못한다.


여자를 보내기엔 너무 험란한 군 생활?

'평등하다면 군대에 갈 수 있다', 라거나, 남자들이 군대를 간다면 여자들은 '임신'을 하지 않나라는 여성들의 입장에 남성들은 답답해 한다. 그의 두드러진 남성적 입장으로 발언마다 '악플 주의보'를 받는 정영진은 '남성들에게 군대는 끝나지 않는 상흔'이라며 여성들이 군대를 너무 모른다며 고개를 젓는다. 요즘 군대가 좋아져서 공부도 할 수 있지 않은가란 여성 패널의 입장에 단호하게 '군대는 아카데미가 아니다'란 반론이 따른다.


군대 사이트에 등장한 여성 걸그룹의 사진 등에 여성 패널들이 성차별을 들며 반발하자, 과연 성적 에너지가 가장 왕성한 20대 초반의 남성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한 '군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맞선다. 그런 당당한 성적 이해에 대한 요구에 여성 패널은 꼭 그 왕성한 에너지를 '성적'으로만 집중하는 군사 문화 역시 문제가 아니냐며 반문한다.


도저히 만날 길 없는 담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우리 사회 일반,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성들을 비롯한 상당수가 '군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군대가 좋아져도, 물론 여전히 군 내부 폭력 사태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그 닫혀진 공간 속에서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상황이 비일비재 하는 현실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에게 군대란 그어떤 보상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시간'이다. 하루 종일 훈련에 시달린 그들에게 일과 후의 공부는 어불성설이고, 예능에서 극한이라 내보이는 훈련 정도는 거뜬히 참아넘길 수 있는 내무반의 관계와 군기가 도망갈 길 없는 미로이다. 더구나 그런 고통을 드러내는 것조차 '군인 정신'에 위배된다며 '색출 대상자'가 되는 곳에서 2년을 마친 젊은이들에게 사회는 '군바리'란 우스운 별칭 외에 인심쓰듯 공무원 가산점제 따위로 보상을 낚는다.


 

 


그렇게 2회의 토크 쇼를 통해 드러난 것은 우리 사회가 군대에 대해 여전히 아직도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의 '시간'을 볼모로 삼으며, 그 '볼모'의 시간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 보상에 있어 역시나 박하다 못해 눈 가리고 아웅 식이라는 사실이다. 공무원 가산점이라는 알고보면 소수를 위한 낚시밥조차 갸륵할 만큼, 그래서 휴가 나온 군인들에게 잘 대해주기라도 하라는 자조적 첨언이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군대와 군인의 정확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다시 여성들도 군대를 가야한다는 문제로 돌아와, 그렇다면 여성들은 성평등을 위해 군대에 가야할까? 하지만 여성들의 군 입대 문제를 들고 나서기 전에 남성들도 평등한 대우를 받는 군대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2회의 토크쇼는 드러낸다. 군대 2년만 있다 나오면 남성주의적 문화가 내재화될 수 밖에 없는 강제적 문화, 하지만 그 조차도 이젠 조롱거리가 되는 현실, 섹시한 여성 걸그룹만이 위로가 되는 폐쇄적 공간, 군대 내 여성은 물론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비일비재한 실정, 이런 여전히 '인간적이지 않은' 군대 내의 문화와 습속에 대한 제고와 개선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 <까칠 남녀> 2회의 가장 큰 성과이다.


남성과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여성도 군대를 가야한다는 가장 당돌한 질문으로 시작된 <까칠 남녀> 군대 문제, 하지만 그 날선 질문 혹은 요구의 여정에서 드러난 것은 우리 사회 젊은이들이 한참 젊음의 꿈을 펼쳐야 할 그 시기에 군대로 인해 얼마나 큰 상실을 겪게 되는가를 반증한 시간이었다. 군대라는 남성주의적 특권을 나누기 싫어서라는 이의 제기보다,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여성들에게는 겪고 싶지 않게 하기 위해 여성이 군대 가는 걸 반대한다는 '토로'가 실감났던 시간, '선택'과 때로는 영원한 짐이지만 그래도 행복일 수 있는 임신과는 비교조차 되기 힘든 그 죄없는 '영어( 囹圄 )의 시간에 대해 우리 사회가 좀 더 관심을 갖고 개선해 나가야 하는 것이 질문의 전제라는 것을 <까칠남녀>는 밝힌다.


여성과 남성의 성평등에 대한 도발적 질문으로 시작하여, '남성 인권', 그리고 보편적 인간 인권의 문제로 귀결된 군문제, 그건 군 가산점으로 퉁칠 수 없는 '시간의 굴레'라는 걸 <까칠 남녀>는 증명했다. 그리고 이는 그저 이 프로그램이 평등이란 주제를 내걸고, 페미니즘적 담론을 유포하는 불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전문적인 입장을 가지고 공격하는 여성 패널들과 달리, 노골적으로 여성편이라며 또 다른 편견을 드러내는 남성 패널과, 경험주의적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는 또 다른 남성 패널의 한계는 여전히 노정 중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 이토록 진솔하게 '군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최소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노력하고자 하는 그 시선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남성에게도 열려있다는 것을 <까칠 남녀> 군대 편이 증명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의 지속 이유는 충분하다.

by meditator 2017. 5. 23. 13:37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한글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대한민국, 당연히 우리의 문맹률이 0%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OECD 가입국 문서 해독 능력 비교에서 꼴찌를 차지했다. 전 국민의 75% 이상이 새로운 정보나 기술을 배울 수 없을 정도로 일상 문서 해독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 결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014, 3, 7 국민 일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글을 읽을 수는 있을 정도인데, 65세 이상 노인 연령 층으로 가면 상태는 더 심각해 진다. 65세 노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면 문맹률은 절반에 가깝고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어르신들이 30%에나 달한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 어르신들의 '봉건적 사고'의 잔재는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기회조차 놓친 '어르신들 문맹'의 소산일 지도 모를 일이다. 




시집 세 편의 어엿한 시인, 칠곡군 할머니들
그래서 다수의 지방 자치 단체는 고령화 시대 이런 심각한 어르신들의 문맹률로 인한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노인 복지 회관, 마을 회관, 경로당을 중심으로 한글 인문학 수업을 늘려가고 있다. 그런 인문학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글'을 배우는 것을 넘어, 그것이 '작품'으로 빛을 발한 기적의 사례가 있다. 바로 경북 칠곡군 할머니들이다. 

대구와 구미 사이의, 유명 농산물도, 유명 관광지도 없는 이곳, 주변 사람들이 아니면 그 지명조차 낯선 이곳 22개 마을의 할머니들은 2013년부터 '문해 교육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를 통해 할머니들은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볼 수 있게 되었고, 꾸깃꾸깃한 그 옛날 자신에게 보내온 연애 편지에서부터, 자식들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할머니들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여전히 '한글'이 어렵다는 할머니들, 그러나 할머니들은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을 넘어 '작품'을 창작해 냈다. 사투리로, 맞춤법이 틀린 한글, 하지만 그 속에 인생이 담긴 '詩'가 바로 그것이다. 

시가 뭐고?      소화자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 시간이라 일도 놓고 헛둥지둥 나왔는데 시를 쓰라하네/ 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2015년 그런 할머니들의 작품이 <시가 뭐고?>로 출간되었다. 출판 기념회도 했고, 북콘서트도 했다. 그 여세를 몰아 1년 뒤 119명 할머니들의 <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가 연이어 발표되었고, 81명 할머니들의 87편의 시가 <작대기가 꼬꼬장 꼬꼬장해>가 지난 3월 23일 세 번 째로 출간되었다. 바로 이런 이제는 어엿한 세번 째 시집을 가진 시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SBS스페셜이 다룬다. 

다큐의 시작은 '詩에 대한 질문이다. 광화문 거리에 만들어진 간이 천막, 들른 사람들은 자기 앞에 펼쳐진 백지에 시를 쓰라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시, 그건 너무 어렵단다. 화면이 바뀌고, 한낮의 볕이 바른 양지, 칠곡군 할머니들이 앉아계시고, 시를 묻자, 할머니들 입에서 흥타령처럼 시가 흘러나온다. 쉽게 쓰여진, 아니 불려진 시?



여전히 한글 맞춤법이 너무 어렵다시는 할머니들, 그런데 시는 참 술술 잘도 나온다. 타고난 시인이셨나? 하지만 할머니들이 쓴 시를 보면 느껴진다. 그들의 지난 80년 삶이 그대로 시가 되어 흘러나왔음을. 자신을 표현할 길 없던 그 몇 십년의 세월이 뒤늦게 한글을 배워 물꼬가 터지고, 그 인생인 '시'라는 매개를 얻어 응축되어 표현된다. 

영감 / 칠곡시인 조덕자 할머니
젊은 때는 집에 있는 것보다 주막에 있는 시간이 드 만낫다
호호백발 할배 대니 갈 곳이 없어 집박계 모르네 이재사 할마이가 제일 좋다 하네


철이 들기도 전에 결혼을 하고 어려운 살림살이 허리 한번 못 펴보고 산 세월, 이제 남편이 있어도 바람처럼 돌아다닐 여력도 없이 병든 동반자, 자식들 다 여의고 이제사 여유가 생긴 할머니들은 '신이 나서', 늦게 분 '시'바람에 밥수저만 놓으면 마을 회관으로 달려가신다


인생, 시가 되다,
할머니들이 쓰는 시,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詩>이다. 경기도 인근의 작은 도시에 사는 미자 할머니, 그 나이에도 여전히 중학생인 손자를 부양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못할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녀지만, 화사한 색감의 옷과 머리의 꽃장식처럼 소녀 감성을 잃지 않았다. 그런 미자 할머니가 '시' 강좌를 듣고, 시를 쓰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다시 들여다 보게 되며, 영화는 미자 할머니가 만난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 목도한 아름답지 않은 현실의 이야기를 담는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의 시이야기란 이창동 감독의 술회처럼, 영화 속 미자 할머니는 결국 자신의 몸으로 시대를 울리는 시가 되는 슬픈 마무리를 한다. 

작약꽃 / 칠곡시인 이쇠건 할머니
자야자야 네 나이가 몇 살이냐 올해도 여전히 연분홍 작약이 아름답게 피였네
나는 나는 시집온 지 육십 오년 되었구나 
그래서 내 나이는 팔십육세란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옃다네

하지만 그렇게 시대를, 자신이 결국 눈감아버릴 수 없는 삶을 '시'를 통해 극적으로 표현했던 영화와 달리, 할매 詩트콤 속 할머니들의 삶은 마치 온갖 세월의 풍파를 겪고 의연해진 거목과도 같다. 잦은 바람 따윈 거뜬히 품어 버리는. 젊어 주막을 들락거리는 남편도, 농삿일보다 바깥일에 더 정신 팔렸던 남정네도,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자식도, 삶은 고난했지만, 그 고난한 삶을 결코 한 시도 허투루 살지 않은, 온 몸으로 생을 짊어온 낙천성과 여유로움, 그리고 인생에 대해 그 어떤 철학자도 따라갈 수 없는 해탈이 이 칠곡 할머니들의 시엔 담겨있다. 그런 할머니들의 시처럼, 다큐 역시 詩트콤이라며 그런 늙었지만 여유로운 노년의 삶을 밝게 그려내려 애쓴다. 

동네 청년이랑 몰래 동구밖 나무 아래서 연애를 하던 갈래머리 소녀는 이제 자식들 거둬먹이려 농삿일을 하며 한 평생을 보내느라 나무 막대기처럼 굵직해진 손으로, 그럼에도 여전히 놓치지 않은 사랑을 노래한다. 먼저 보낸 자식의 무덤 앞에서 허물어지는 엄마는 하지만 여전히 건사해야 할 식구들은 물론 외지인에게 조차 밥 한끼를 걱정하며 미소를 보낸다. 어쩌면 할머니들이 이룬 기적은 '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되돌아 보면 한 줄의 시로 마치기엔 '고생'보따리였던 인생, 하지만 여전히 할머니들은 그 '신산스러운' 삶의 무게 대신, 또박또박 시랑 씨름하는 열정으로 오늘을 채워간다. 할머니들의 삶은 과거형이 아니라, 네 번 째 시집을 기대하기에 충분할 현재, 혹은 미래형이다. 
by meditator 2017. 5. 22. 16:10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그려 어쩔 수 없이 <시그널>과 시작도 전부터 비교를 당했던 <터널>, 이제 16부작이 마무리 된 후 그 누구도 <터널>을 두고 <시그널>을 떠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이 과연 입봉 작가와 입봉 피디의 작품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안정적'인 정서와 구도로 단 한 회도 허투루 보낸 회가 없을 정도로 한 회, 한 회 완성도높은 이야기로 16부작을 완주한 <터널>, 박광호가 터널로 떠날 때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던 것은 남겨진 강력 1팀과 딸 신재이(이유영 분)만이 아니었다. 




<시그널>과 비슷했다고, 아니 오히려 비슷한 건 <수사반장>
비슷한 소재, 거기에 유사한 설정을 들고 그럼에도 <시그널>을 전혀 떠올리지 않도록 만든 <터널>은 그 자체로 스릴러물의 새로운 구획 확장이다. <시그널>은 비슷한 시기 방영된 <응답하라 88>의 수사 버전처럼 그 당시의 시대를 전면에 내세우며, 80년대에서 2017년이 되어도 전혀 '발전'하지 않은 '적폐' 사회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변화되지 않은, 심지어 고착화되어 기득권으로 공고해진 '적폐'는 '김은희 작가'의 전매 특허이자, 박근혜 정권 아래서 그것을 실감했던 사람들의 '이성'을 깨우고 분노케 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과거의 이재한(조진웅 분) 형사와 현재의 그의 집요함을 계승한 현재의 박해영(이재훈 분)과 차수현(김혜수 분)의 동지애로 그가 못다한 사건의 완결로 마무리된다.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쫓던 연쇄 살인범을 쫓아 터널을 통해 이제 '교신' 대신 직접 2017년으로 넘어온 박광호. 여전히 그가 살던 80년대는 '연쇄 살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던 '주먹구구식' 수사 방식을 고집했던 '전근대적' 사회였지만, 살인범을 쫓는 그의 집념을 '시간'을 초월할 만큼 열정적이다. <시그널>이 이재한이란 캐릭터를 통해 연쇄 살인과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시대에 주목했다면, <터널>은 똑같이 집요한 형사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를 통해 80년대의 <수사반장>을 불러들인다. 





1989년 무려 880부작으로 종영했던 <수사반장>의 상징적 인물은 콜롬보 반장처럼 낡은 바바리 코트를 걸쳐입은 박반장의 최불암이었다. 우리가 배우 최불암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그 이미지 그대로 우리의 아버지처럼 그는 '사건'의 아버지 역할을 기꺼이 자임한다. 법을 어기며 잘못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때론 호통치지만, 죄를 미워하지 사람을 미워하지 말란 그 뻔한 경구처럼 가난 등의 이유로 범죄의 길에 빠진 범죄자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씁쓰레하게 사건을 마무리하고 등돌리는 박반장의 모습에서는 오늘날 스릴러의 냉혹한 수사의 흔적을 쉬이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 아버지같은 박반장의 그늘 아래 수사원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남형사(남성훈 분)가 그나마 샤프했을까 한 덩치하지만 노총각의 순정을 숨기지 못하는 조형사(조경환 분)도 홀아비의 애환을 고스란히 드러내던 김형사(김상순 분)도 '인간미'하며 뒤처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건을 추적하는데 있어서는 둘째가라며 서러운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기억되는 지점은 그 결국 숨길 수 없는 '휴머니즘'이었다.

그리고 이제 <터널>은 시간을 거슬러 자신보다도 나이 많은 딸과 해후한 아재 형사 박광호를 현대로 불러들이며 그 시절 <수사반장>의 향수를 고스란히 불러낸다. 연쇄 살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 당연히 사건이 나면 주변의 수상한 범죄자들을 불러 '족치는' 것이 유일한 수사 방식이던 시절, 연달아 죽어가는 부녀자들, 그리고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 '선재 아버지'와 같은 남겨진 사람들을 보며 자책하던 광호는 시간을 거슬러 현재로 온다. 핸드폰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 '과거'의 인물은 달라진 시대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가 자신이 살던 시절에 했던 그 열렬한 수사에의 열정으로 어느 덧 강력 1팀의 막내이자, 에이스 형사로 떠억하니 자리잡는다. 

강력 1팀의 막내가 된 80년대의 아재 형사 
바로 그가 '막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그 시절 막내였던 하지만 이제는 자신보다 훨씬 늙어버린 강력 1팀장을 비롯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김선재(윤현민 분)와 곽수사관(김병철 분), 송수사관(강기영 분)을 자신만의 열정으로 감복시킨다. 그의 열정이란 바로 '형사란~'이란 서두로 시작하여, 끝까지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을 포기하지 말라는 '열정'이 담뿍 담긴 '직업 의식'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그를 시간을 거슬러 그가 잡지 못한 사건의 희생자 아들이자, 이제는 스스로 어머니의 살인범을 잡겠다고 나선 김선재와 해후하게 만든다. 어머니를 잃은 줄도 모르던 겨우 걸음마를 떼던 아이는 그 어머니를 잃은 상처를 '범죄 수사' 밖에는 안중에 없는 '인간미' 제로의 수사관이 되었고, 그런 그의 파트너로 박광호가 등장하며, '피해자'와 '수사관'의 사연넘치는 관계가 성립된다. 



그렇게 <터널>은 자신이 미처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시절에 어머니를 잃은 선재와 범인을 쫓아 시간을 거스른 박광호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범죄의 상흔과 그 '치유'를 주제로 삼는다. 거기에 시간을 거스른 광호로 인해 삶이 왜곡된 딸 신재이까지 엮이며 광호의 극한 수사는 좀 더 기구해진다. 자신이 알지도 못했던 딸과 자신이 잡지 못한 피해자의 아들과 함께 수사를 진행하는 박광호, 하지만 그는 '2017'년이란 시간적 딜레마를 한번 잡고자 하는 범인을 끝까지 추적하여 피해자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아재 형사의 열정으로 극복한다. 

물론 <터널>은 요즘 빈번하게 등장하는 여느 스릴러물처럼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들이 범인으로 등장한다. 정호영(허성태 분)도, 목진우(김민상 분), 두 사이코패스들의 시대를 넘나드는 범행이 16부작의 줄기이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연쇄 살인마의 만행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스릴러의 특성 상 그들의 범죄 방식에 천착하다, 때로는 그들에게 매달리고 마는 '스릴러'의 패착을 <터널>은 넘어선다. 그들이 사이코패스든, 소시오패스든, 그리고 어머니 때문이건, 타고났건, 혹은 자신의 범죄를 '신'의 용서로 거창하게 포장하건 결국 그들은 '살인범죄자'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들의 죄로 드라마를 치장하는 대신, 그들을 잡기 위해 애쓰고 상처받는 '피해자'자들과 열정의 수사관을 전면에 내세우며 최근의 스릴러와 차별성을 가진다. 

마지막 회 목진우를 잡아넣고 나서 그 연쇄 살인범의 후일담 대신 드라마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찾아 소식을 전하고, 좀 더 빨리 범인을 잡지 못했음을 사죄한다. 그 옛날 <수사반장>처럼 '인간미' 넘치는 마무리로 끝을 맺는 방식은 어쩌면 2017년에 가장 '진부한' 휴머니즘이지만, 그래서 새롭다. 물론, 왜 박광호가 시간을 거슬르게 되었는가에서 부터 따지고 들자면 군데군데 빈구멍들은 있다. 하지만 마지막 회 모든 사건을 해결한 박광호가 터널에 간절하게 귀로의 소망을 전하고 그에 터널이 반응하듯,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 그의 범인을 향한 열렬한 수사 의지 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드문드문 보이는 구멍조차도 메우고도 남을 만큼, 각각의 캐릭터가 보여준 설득력과 그 설득력을 더 설득시키는 전개와 연출이 <터널>을 오래도록 따스하게 기억에 남도록 할 것이다. '바람처럼 왔다가~'하는 85년 조용필의 <킬리만자로 표범>아련한 노랫 가락과 함께. 
by meditator 2017. 5. 22. 05:00

mbc 스페셜은 해마다 5월이면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휴먼 다큐 사랑>이라는 특집 시리즈를 방영해 왔다. 2006년 시한부 삶을 사는 영란씨와 그녀의 1분 대기조였던 남편 창원씨의 순애보로 시작된 시리즈, 2007년 <엄지 공주, 엄마가 되고 싶어요> 2009년 <풀빵 엄마>, 2011년 <진실이 엄마> 등을 통해 2016년까지 45편의 다큐가 '가족'의 의미를 되새겼다. 


2006년에서 이제 2016년, 그리고 올해 2017년 해마다 같은 이름으로 돌아온 <휴먼 다큐 사랑>이지만 해를 거듭하며 이 다큐를 통해 조명하고자 하는 '가족'의 의미는 우리 사회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며 다른 감동과, 다른 질문을 던진다. 두 편에 걸쳐 방영되었던 <진실이 엄마>를 통해 고 최진실 씨의 환희와 준희는 아이에서 사춘기 청소년으로 자라났고, <너는 내 운명>의 1분 대기조였던 창원씨는 이제 홀로 아내를 그리며 살아간다. 2009년에는 로봇 다리 세진이를 통해 '장애우'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2014년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삼혜원에서 생활하는 듬직이를 통해 '사랑'과 '가족'의 또 다른 의미를 짚었다. 2015년에는 의료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 신해철씨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2015년의 사랑의 의미를 묻고, 역시나 같은 해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 선수의 일상을 통해 더 큰 가족으로서의 국가의 의미에 대해 물음표를 남긴다. 2016년에는 초고령 사회에 접어든 우리 사회 가족의 그늘을 <러브 미 텐더>를 통해, 탈북자의 문제를 <내딸 미향이> 등으로 '가족'에 대한 질문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간다. 그 해의 <휴먼 다큐 사랑>을 보면 그 시대 우리 사회 '가족'의 정의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되듯, 지난 10여년간 <휴먼 다큐 사랑>은 우리 사회 가족의 바로 미터로 자리 매김해 왔다.



고아 수출국의 민낯, 신성혁이 된 아담 크랩서 
그렇다면 이제 2017년에 찾아온 <휴먼 다큐 사랑>에서 보여진 이 시대의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첫 테이프를 끊은 건, 바로 <나의 이름은 신성혁>이다. 5월 8일, 15일 2부에 걸쳐 방영된 이 다큐는 '고아 수출국' 대한민국의 민낯을 밝힌다. 

고아 수출국, 몇 십년전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단어, 하지만 우리나라는 1956년부터 무려 1998년까지 38년간 해외 입양 1위의 국가였다. 심지어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고아 수출국'이었다. 그 중에서도 주로 '미국'으로의 고아 수출이 대부분이었다. 80년에서부터 98년까지의 미국 이민 자료를 보면 미국의 전체 고아 입양 대상자 중 한국은 36.8%, 즉 미국 고아 입양자 세 명 중 한 명이 한국인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으로 간 아이들은 다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 되었을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가족의 달 첫 번째 휴먼 다큐 사랑이 밝힌다. 

그의 이름은 신성혁,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국말로 하는 것이 어눌하다. 오히려 40년동안 써온 아담 크랩서란 이름이 입에 익다. 당연히 그의 첫 번째 언어는 영어다. 그러나 1부에서 만난 그는 이민국의 재판 과정에 있다. 심지어 결국 그 재판에서 져서 수용소에서 건강을 잃어가며 하루 하루 한국으로의 송환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십년 전 그의 어머니는 침을 잘못맞아 못쓰는 다리를 끌고 집을 나간 남편 대신 두 아이를 먹여 살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기만 하면 굶지 않고 잘 살 수 있다는 꿈의 나라 미국으로 두 아이를 생이별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아이들의 미국 생활은 지하실에서 숟가락이나 벨트로 맞는 학대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그 학대조차도 파양으로 인해, 정부 보조금을 받고 아이들을 못박는 기계로 쏘며 13명의 아이들을 더 심하게 학대한 새 부모로의 이전이었다. 결국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그 집을 찾아올 때까지.

하지만 학대의 끝은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이 아니었다. 그래도 부모라고 호의적으로 증언을 했던 그를 양부모는 거리로 내쫓았다. 16살 어린 나이에 쓰레기통에서 남이 버린 버거를 줏어 먹으며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입양 당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성경책등을 가지러 몰래 양부모의 집에 들어갔다 신고되는 바람에 25개월의 교도소 생활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 '범죄'는 그를 '추방'할 유효한 조건이 되었다. 

왜 미국에서 십여년을 넘게 살았는데 그는 미국인이 될 수 없었을까? 그건 바로 '고아 수출'에만 연연한 채, 그들의 권리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우리 정부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는 '고아'만 수출했지, 그들이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 권한에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 미국으로 온 한국의 고아들은 18살이전에 양부모가 시민권을 취득시켜 줘야만 미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처럼 18살이 되기 전에 쫓겨난 아이들, 혹은 설사 18살이 되더라도 양부모가 동의하지 않는 아이들, 심지어 교도소라도 다녀오기라도 했다면 영원히 미국 시민이 될 수 없다. 



아들의 귀향, 뒤늦은 어머니의 모성 
냉정한 재판, 그리고 한국으로의 송환을 인정하기 전에는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수용소 생활, 결국 아담은 신성혁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조차 어려운 미국인, 당연히 한국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는 그는 졸지에 한국인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에겐 다리가 불편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2부는 그 어머니와 이젠 신성혁이 된 아담의 40년만의 모자 상봉을 그려낸다. 40년만에 돌아올 아들을 위해 며칠 동안 음식 준비를 하던 어머니는 그만 아들을 보자 눈물을 터트리다 못해 정신줄을 놓아 버린다. 아들이 왔다는 것 외엔 잠시 기억을 잃을 정도로. 대화는 안통하지만 지난 40년간 늘 학대를 당하던 아들은 어머니의 눈물만으로 오랜 외로움이 풀려간다. 그러나 다리를 못쓰는 어머니, 마찬가지로 몸이 성치 않은 새 아버지에게 자신을 의탁할 수는 없는 아들은 서울로 올라와 귀환 입양아들을 위한 시설로 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역시 그에게는 좀처럼 쉽게 '정착'을 허용치 않는다. 주민등록증은 주어졌지만 오물이 나오는 지하 방과 쉽게 늘지 않는 한국어, 그리고 그 보다 더 어려운 밥벌이가 그를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여긴 그를 한없이 외롭게만 했던 미국이 아니다. 이제 그의 생일날 바리바리 음식을 싸들고 그를 찾아오는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휴먼 다큐 사랑>은 고아 수출국의 오명을 자신의 40년 생애에 고스란히 새긴 신성혁 씨와 그 어머니의 뒤늦은 모성을 2017년의 가족, 그 자화상으로 그려낸다. 
by meditator 2017. 5. 16. 02:44

이번 예능의 트렌드는 100만원인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두 편의 예능이 돈 100만원을 들고 나왔다. 지난 4월 24일 야심차게 선보인 ebs의 예능 <엄마를 찾지마>에 이어, 5월 11일 첫 선을 보인 올리브 tv의 <어느날 갑자기 100만원>이 그 주인공이다. 두 프로그램은 모두 출연자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00만원을 주고 그것을 마음껏 쓰도록 하는 '호혜'를 베푼다. 단지 그 대상이 다를 뿐이다. <엄마를 찾지마>가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엄마에게 100만원을 준다면, <어느날 갑자기 100만원>에서 100만원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은 '연예인'이다.


 

엄마의 가치를 증명하는 100만원의 시간
매주 월요일 밤 10시 45분, 한 분, 혹은 한 가족의 엄마들이 돈 100만원을 들고 '튄다'. 늘 그 자리에서 있어왔던 그 '엄마'가 제작진이 전해준 100만원을 들고 '무단 가출'을 감행하는 것이다. 가족들, 혹은 넓게 보아 가족같은 이들은 '황망함'도 잠시, 엄마의 빈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엄마의 뒤를 쫓는 추격전을 감행하고, 자신을 뒤쫓아오는 가족들과의 술래잡기를 하며 엄마는 그간 못누려본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누리며 자신을 돌아본다. 

그 시작은 자기 가족은 물론, 남편이 거느린 운동부원들의 매 끼니 식사까지 책임지는 '대가족'을 거느린 엄마였다. 엄마가 돈 100만원을 들고 사라지자, 엄마 찾기 작전은 감독님의 지휘 아래 운동부원 전체의 '레이스'가 된다. 2회의 엄마라고 다르지 않다. 산넘고, 진짜 물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강원도 화천군 동천 2리 비수구미에서 민박집을 하고 있는  김영순씨(68) 고부다. 새벽 6시 밭일을 시작으로 손님 맞으랴, 집안 일하랴, 거기에 밭일까지 하며 하루를 꼬박 일로 보내는 이 고부, 17살에 시집와 43년째 이곳을 지키는 시어머니와, 한때는 도시 여자였지만 서울 가본지가 20년이 된 그녀의 며느리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들이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안팎으로 바쁜 동안 벌통 마니아 시아버지와 동네 이장 남편은 늘 그런 살림살이의 아웃사이더다. 3회라고 다를까. 우리에게는 가수 박지헌이지만, 5남매 다둥이 아빠 박지헌의 아내 역시 이른바 '독박 육아'의 주인공으로 젖먹이를 떼어놓은 채 가출을 감행한다. 

돈 100만원을 들고 '엄마'들이 하루 정도의 시간 동안 한 가출이라고는 참 '알량'하다. '여자들이란~'이란 수식어가 나올 정도로 머리 하고, 옷 한벌 사입고, 지인들을 만나 수다떨고,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가고, 좀 다르다면 패러글라이딩 정도다. 그렇게 기껏 하루에 돈 100만원을 만끽한 엄마들은 때론 가족들의 추격에 뒤를 밟혀, 그게 아니라도 제 발로 '귀가'를 하고만다. 

그렇다면 이 굴러들어온 100만원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출연자의 면면에서 보여지듯이 '극한 직업'으로서의 '엄마'에게 주어진 강제 휴식인 면이 강하다. 그들의 극한 직업으로서의 존재감, 그 빈 자리에서 드러나는 '충격의 현장감'과 '해프닝'이 아직 3회지만 매회 놀라움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었다는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엄마'의 자리는 '독박'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엄마를 찾지마>는 증명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은 겨우 하루 돈 100만원의 여유와 휴식만으로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만끽할 만큼 '참 착하다'는 것이다. 예능의 공식답게 '가출'의 마무리는 함께 사는 남자들의 '반성'과 엄마들의 흐뭇한 '만족'으로 귀결된다. 가출이 꿈이었던 듯 되풀이 될 일상과 함께. 



100만원의 행복 
반면 올리브 tv의 <어느날 갑자기 100만원>을 보면 2003년부터 mbc를 통해 방영했던 <행복 주식회사>의 '만원의 행복'이 떠올려진다. 음원 차트를 줄세우는 악동 뮤지션에게, 숱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는 옥택연에게, 잘 나가는 걸그룹 하니에게 돈 100만원이 무에 그리 큰 돈이겠는가. 하지만 '예능'의 출연자들답게 그들은 그 돈 100만원에 '기특한' 의미를 부여하며, '예능'적 재미를 톡톡히 뽑아낸다. 

그 시절 <만원의 행복>이 연예인들에게 알뜰한 생활을 요구하는 건강한 삶을 추구했던 경제 관념을 앞세운 프로그램이었다면, 이제 새로이 그들에게 100만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는 <어느날 갑자기 100만원>은 여러 연예인들의 처지에 걸맞게 100만원의 가치를 '돈'의 금액이 아닌, '여유'와 '힐링'이라는 이 시대에 걸맞는 의미로 푼다. 

이미 <원나잇 푸드 트립>을 통해 서로 누가 더 많이 먹느냐라는 조건 외에 무조건적인 호혜로서의 먹방 여행으로 '먹방'의 가능성을 열어간 올리브 tv 답게 먹방 여행의 다른 버전처럼 100만원을 다 '소비'하는 것 외에 어떤 조건도 없이 '여유로움'을 제공한다. 그에 따라 새 앨범을 내느라 지난 1년간 여유를 즐겨보지 못했던 악동 뮤지션의 찬혁은 동생을 위한 필리핀 세부 몰래 여행을 기획하고, 신동은 100만원짜리 뮤직 비디오를 기획한다. 신혼의 박준형에겐 아빠의 여유를, 옥택연에 의해서는 100만원의 가치를 뛰어넘는 미국 횡단 여행이 등장했다. 이렇듯 <어느날 갑작 100만원>은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면면에 따라 이 시대 '소비'의 새로운 가치와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엄마를 찾지마>와 <어느날 갑자기 100만원>은 돈 100만원이라는 금액을 넘어선 '삶의 돌파구'와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보면서 그 100만원이 자꾸 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느날 갑자기 100만원>의 첫 회 mc 김구라의 소회처럼 그 자리에는 우리 나라 굴지의 이른바 3대 기획사 sm, yg, jyp의 연예인들이 다 모여들었다. 그 100만원이 없어도 될 그들이 그 예전 연예인들이 돈 만원을 가지고 '행복'을 제공하듯, 2017년 새로운 돈의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바로 그러던 날 광화문에서 알바 노조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조들은 새 대통령이 2020년까지 약속했던 시급 만원의 시급한 실행을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2020년까지 여전히 '사람다운 삶'을 포기하란 말입니까! 2017년 알바 시급은 6470원이다. 하루 8시간 한달은 쉬지 않고 일해도 160만원 정도를 손에 쥐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돈 100만원은 무겁고도 헐하다. 그런데 그 무겁고도 헐한 돈의 반도 넘는 금액이 오가는 예능을 보면서 야릇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격무에 시달리는 엄마들이라면 '보상'의 의미라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 돈이 없어도 될 연예인들이 돈 100만원을 가지고 이리저리 '노니는' 모습은 마치 한 끼를 편의점에서 때우며 흥청망청 '먹방'을 보는 기분과 흡사하다. 물론 이 프로그램들이 굳이 100만원을 내세워서 그렇지 예능 프로그램 한 회의 제작비가 어마무시하다는 건 굳이 깨놓고 말하지 않아도 안다. 철거된 <윤식당>을 하룻밤 사이에 복원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겠는가. 예능에서 집도 지어준다는 세상에, 어쩌먼 발걸기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쩐지 그들이 연예인이 아니라, 취업에 지친 수험생이나, 알바에 지친 청년들, 거리의 노숙자였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뜬금없이 든다. 그들이라면 저 100만워이 진짜 '여유'가 될텐데. 노파심이라도 어쩔 수 없다. 한 사회에서 이리도 돈 100만원의 가치가 다르다. 
by meditator 2017. 5. 12. 17:47

<에어리언;커버넌트>에 이어 2위를 수성하고 있는 <보안관>은 무난히 100만 고지를 넘으며 순항하고 있는 중이다. (5월 3일 영진위 기준 1,176,647명) 그런데 예의 '사나이 픽쳐스'의 작품답게 '사나이'들의 '거친' 이야기를 펼쳐보이고 있는 이 영화의 제목은 조금은 생뚱맞게도 그 서부 영화에서 등장했던 '보안관'이다. 고개를 갸웃해 보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보안관'이란 제목만큼 이 영화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수긍이 가고야 만다. 그렇듯 영화< 보안관>은 부산 기장을 배경으로 서부 영화의 보안관처럼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왕년의 형사 대호(이성민 분)의 활약상을 그린다.  




2017년 부산 기장 버전의 서부 영화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주윤발이 이쑤시개를 씹어 먹으며 등장하는 홍콩 느와르 영화가 시선을 잡고, 그 영화의 장면, 장면과 대사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는 대호란 '아재'가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 속 영웅과 달리, 용감하게 동료 형사와 함께 마약 사범을 잡으러 쳐들어간 모텔에서 그만 그는 마약 사범을 눈앞에서 놓치는 건 물론, 동료 형사조차 잃고, 결국 형사직에서 물러나고야 만다. 그로부터 3년 그는 형사라는 법적 신분 대신 기장 마을 '수호자'로 동네를 누빈다. 그런 그의 앞에 바로 그 3년전 마약 현장에 있었지만 초범이라는 이유로 대호가 도와줬던 종진(조진웅 분)이 마을에 비치 타운을 세우겠다며 화려하게 입성한다. 

영화는 서부 영화의 공식를 그대로 답습힌다. 마을에서 신망을 받던 보안관, 하지만 마을에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악의 무리 앞에 그는 무기력하다. 그러나 '보안관'이라는 직업 의식에 철저한 그는 모두의 외면을 받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자신을 내던져 악을 소탕한다. 클린트이스트우드, 존 웨인 등등 정의로운 보안관이 등장했던 그 예전 서부 영화들 모두 큰 범주에서 이 '공식'을 벗어나지 않았고, 제목부터 <보안관>인 이 영화 역시 그 공식을 따라간다. 그러기에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대호가 등장한 그 순간부터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는 대부분의 관객이 눈치를 챈다. 

하지만 그 뻔한 구성의 <보안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 흔한 우리나라 아재들의 정서를 '비틀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자타공인 기장 마을 보안관처럼 살아가는 대호의 정서와 그를 둘러싼 이들의 분위기는 이른바 '우리가 남이가'이다. 정수기 사업을 하는 강곤이 음주 운전으로 면허가 정지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동네 이웃들에게 들었을 때 대호의 반응은 그래 내가 그 정도는 해결해 주지가 아니라,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에게 먼저 말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오지랖, 나아가 사명감처럼, 그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를 기반으로 동네 모든 대소사의 중심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그를 형, 아우 하며 떠받드는 종화(김종수 분), 선철(조우진 분), 춘모(배정남 분) 역시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를 기반하여 그에게 의지한다.

그런 그들의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끈끈해 보이는 '로컬 공동체' 앞에 기장 마을의 발전을 내세운 종진이라는 사업가가 등장한다. 처음에 '우리'가 아니라는 이유를 그의 등장을 배척하고 시샘하던 사람들, 하지만 종진이 자신 역시 기장 출신이라며 조기 축구 등의 로컬 커뮤니티를 포석으로 그의 풍부한 재력을 앞세워 다가서자 그 끈끈했던 관계가 하나둘씩 무기력해진다. 정수기와, 소파 등 그들의 먹고사니즘은 결국 대호 대신 종진을 마을의 대표로 뽑기에 이르른다. 



'우리가 남이가'보다 강한 '목구멍이 포도청'
'목구멍이 포도청' 앞에 '우리가 남이가'가 손바닥 뒤짚혀지듯 하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먹고사니즘을 앞세운 로컬 공동체의 변질, 혹은 붕괴에 대응한 대호의 캐릭터다. 그는 전형적인 '아재'로 등장하지만, 그 '아재'는 그의 동료들과 달리, 이미 3년 전에 그만둔 '한번 형사면 영원한 형사'라는 직업 의식으로 종진을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의 제목이 <보안관>인 이유이며, 그 지점에서 '사나이'들을 다룬 한국 영화에서 신선한 자신만의 포지션을 확보한다. 

그 옛날 전성기 서부 영화의 보안관들이 마을을 지키는 과정에서 때로는 자신의 가족과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리면서도 자신의 직업적 사명감을 놓치지 않듯이, 대호는 이제는 거물 사업가가 되어 나타난 종진을 '한번 마약쟁이는 영원한 마약쟁이'라는 형사의 시선으로 대한다. 하지마 그런 대호의 의심은 지역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아재의 '시기'와 '질투'로 오해를 받다 못해 배척받기에 이른다. 처남 덕만(김성균 분)이 그를 돕지만 희순이 없었다면 그 역시 얼굴을 바꾼 동네 아재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란 예측하기는 힘들지 않다. 

영화는 이른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지역색이 끈끈하다는 지역의 사투리를 앞세운 지역 공동체를 배경으로 삼으며, 그 강한 지역 연고주의의 허상을 서사의 주요 동원으로 삼는다. 부를 앞세운 종진은 대호가 그랬듯이, 대호를 벤치마킹하며 동네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간다. 대호에게 형, 동생하며 격의없이 굴던 사람들은 이제 오히려 그런 종진을 의심하는 대호를 알고보면 '남'이라며 밀어내며 그 자리에 종진을 앉힌다. 이런 정황은 결국 그들이 지난 시간 대호에게 격의없이 호형호제한 이유 역시 종진과 다르지 않다는 역설적 이해를 하도록 만든다. 그토록 끈끈한 지역 공동체의 얄팍한 바닥을 영화는 절묘하게 극적 갈등의 요소로 활용한다. 

그런 억울하다 못해 결국 짐까지 싸야하는 상황에서 대호는 '프로패셔널한 직업 의식'을 놓지 못한다. 물론 그의 그 '프로패셔널함'에는 종진과 얽힌 동료의 죽음이라던가, 자신의 직업을 잃게 된 '구원'이 원인이 되지만, 영화는 예의 한국 영화들이 그런 '원한'에의 집착에 호소한 것과 달리, 집요한 마약반 형사로서의 본능적 직업 의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하여 '우리가 남이가'를 등에 업은 지역 사업가와 이제 언제나 서부 영화에서 그래왔듯 '외톨이가 되어버린 보안관' 대호의 사생결단이 영화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덕분에 영화는 사나이인 척하지만, 아재인 등장인물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들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그 끈끈한 지역 정서를 뒤집으며 한 마을 사람들 전부가 마약 사범이 될뻔한 사건으로 판을 키운다. 얄팍한 인간 군상은 결정적 장면에서 '마을 공동체'의 힘을 증명해 낸다. 그리고 그 얄팍한 '우리가 남이가'는 본래의 궤도를 회복한다. 하지만 영화 속 엔딩에서 그들이 다시 얼싸안으며 '우리가 남이 아님'을 확인하지만, 이미 서로는 안다. 그들을 감싸주었던 그 공동체라는 것이 그간 얼마나 자의적이었으며, 자기 필요에 의한 것이었던가를. 하지만, '사람사는게 다 그렇지'하며 '눈가리고 아웅'하듯 다시 ' 속물'을 접어둔 채 호형호제'의 관계로 돌아간다. 그렇게 여전히 '지체되어 있는' 우리 사회의 지역 정서의 속살을 보여준다. 여전히 전근대적인 척하지만, 결국 그들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그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정의는 '프로패셔널리즘'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며 새 시대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이 영화가 어떤 결말에 이르를 지 예상 가능했던 <보안관>, 하지만 박스 오피스 2위의 저력은 바로 그 뻔한 이야기를 아무려 간 건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보안관' 대호의 활동담이다. 그리고 그걸 채워간 건, 그들의 면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어쩐지 속편이 궁굼해지는 대호및 동네 아재들의 생생한 캐릭터이다. 
by meditator 2017. 5. 1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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