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농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 원시 인류 사피엔스는 무리의 가운데에서 살며 평생 '고독'과 싸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무리와 함께 이루어지며, 개인의 삶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 하지만 인류는 그런 '환상적'인 공동체를 시절을 두고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 비대해진 사회 속 원자화된 개인으로 홀로 '고독'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처지에 이르렀다.바로 그 '원자화된 개인'이 처한 '관계'의 문제를 kbs2의 2부작 드라마 <개인주의자 지영씨>가 전면에 내세운다. 




고독에 대처하는 두 가지 자세
드라마는 대비되는 두 남녀의 캐릭터를 시끌벅적하게 내세우며 시작한다. 한 오피스텔에 잇닿아 있는 704호와 705호 그곳엔 번호만 다를 뿐 똑같은 구조의 집과 달리,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산다. 간호사로 일하는 나지영(민효린 분), 그녀는 극단적 개인주의자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주의를 넘어 '인간, 관계 혐오주의자'같다. 심지어 살아있는 모든 것과 혹시라도 연이 닿을ㄲ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녀가 매달리는 건 정신과 의사, 매번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잠을 들 수가 없다며 좀 더 강한 수면제를 요구한다. 

그런 그녀의 옆집에는 그녀와 정반대로 찰거머리처럼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박벽수(공명 분)가 있다.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가 싶더니 그의 여친은 그가 자신을 외로움을 피하는 도구로 여긴다며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서를 갈 정도로 그에게 진절머리를 치며 떠난다. 그가 친절하게 대하는 회사 동료들, 친구들은 하지만 그런 그를 웃긴 진상 취급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 먹는 대상으로 취급해 버린다. 

잠시 사귄 애인들과의 격한 이별 의식으로 경찰서에서 조우한 두 사람, 이후 그들은 각자의 성격답게 치근덕거릴 정도로 관심을 가진 벽수씨와 그런 벽수씨를 치한보듯 멀리하는 옆집 여자로 자꾸 부딪친다. 그리고 그 부딪침은 일련의 연애 드라마 방식의 싸우다 정들고 연애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는데.

드라마는 '혼밥족'이 대세가 된 젊은이들의 연애 생태계를 그린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그 '혼밥족'이 된 젊은이들이 '마음'을 들여다 본다. 극단적으로 캐릭터화 했지만 '관계'로 부터 받을 상처가 두려워 '관계'를 거부하는 지영과 그 '관계'로 부터의 단절이 두려워 '좋아요'를 구걸하며 기꺼이 '봉'이 되는 벽수의 모습 중간 그 어디쯤에 이 시대 청춘들의 고민이 들어서 있을 듯하다. 



고독 증후군, 그 발원지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드라마가 그려내고 있는 '관계'로 고민하는 청춘들의 '발원점'이다. 이들의 양상을 달리하지만 결국은 '관계 공포증', 혹은 '고독 증후군'을 빚어낸 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여전히 떠받들고 있는 '가족'이라는 것이다. 

지영은 8살 무렵 아버지와 싸우는 엄마의 입을 통해 자신을 가지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녀가 8살 이래 집을 떠나올 때까지 매번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그 말을 되풀이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부부'로 살았지만, '가족'이란 이름 아래 그녀를 방기했고,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그녀가 스스로 집을 나올 때까지. 벽수라고 다를까. 입양아인 그는 한번의 파양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새로 입양된 집안에서 자신에게 가하는 노골적인 차별을 감내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학대에서 도망친 지영과 가족이란 울타리를 지탱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은 벽수. 그런 두 사람이 '가족'이란 제도 속에서 받은 상처는 고스란히 이제 '혼밥족'이 된 그들의 삶을 규정한다.

드라마는 말한다. 이 시대의 고독한 청춘들, 그러나 그 '고독'의 발원지는 해체되어 가고 있는 가족이라고. 청춘은 그 '가족'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지만, 거기서 받은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트라우마'로 인해 현존재의 삶조차 규정받고 있다 말한다. 우리 시대가 여전히 신봉하고 있는 가족주의가 가진 발톱을 드라마는 유리처럼 여린 청춘들의 자기 방어적 기제를 통해 드러낸다.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사회에서 가족은 우리 사회에서 개인에 대한 전면적인 '보호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보여지듯이, 그 '보호자'인 가족은 동시에 언제나 '가해자'가 될 수 있을만큼 자의적인 구조이다. 개개인의 불투명한 가족애와 의지에 맡겨진 가족이 그 속에 힘없는 존재에게 얼마나 가학적일 수 있는가를 드라마는 증언한다. 젊은이들치고 '가족'에 대한 고민 한 자락없지 않은 이 시대의 풍경의 상징적 묘사다. 

물론 드라마는 그런 두 사람의 상처를 '로맨틱하게. 사랑과 이해의 '관계'를 통해 치유해간다. 그 흔한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사랑으로.라는 상투적 슬로건처럼. 애초에 704, 705호의 옆집에 가장 양 극단의 캐릭터를 가진, 그러나 동일한 가족으로 부터 받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살게된다는 상투적 설정은 그렇게 당연히 로맨스 드라마의 정석에 맞추어 결론이 난다. 

그러나, 그런데도 어쩐지 너무도 현실적이었던 벽수와 지영의 캐릭터 덕분일까. 그들이 때론 막무가내로, 때론 조심스레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로맨스 드라마의 훈훈함 이상 마음을 덥힌다. 마치 빗속에 거리의 고양이들이 서로 몸을 마주대고 그 온기로 내리는 비를 견디듯. 그들이 어린 시절 자신들이 받은 상처를 그 유리처럼 깨뜨려버리는 대신, 로맨틱한 사랑으로 마무리하는 것에 어쩐지 안도하게 된다. 아마도 그건, 사랑만큼 그 치유에 마음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부디 '가족'으로 부터 상처받은 청춘들이 서로를 보다듬으며 치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미니 시리즈와 미니 시리즈 사이 땜방처럼 들어간 2부작 드라마, 극단적이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관계'의 이야기를 '사랑'으로 풀어낸 이야기는 때론 달달하게 때론 뭉클하게 이 시대의 청춘 서사를 짧지만 공감가게 완성해 보인다. 

by meditator 2017. 5. 10. 14:23

일상 속에 숨어있는 불평등과 편견을 허물기 위해 나선 프로 불편러들의 이야기 <까칠남녀>, 1회부터 늘 그 '불평등과 편견'을 둘러싸고 여성과 남성의 입장은 대립에 대립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제 7회, 모처럼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적 구별 없이 '프로 불편러'들의 입장이 일치했다. 바로 '자위'라는 주제로. 1회 여성의 털로 시작하여, 피임, 졸혼, 피임, 데이트 비용, 맘충 등 우리 사회 '성'과 관련된 예민한 주제를 다뤘던 <까칠 남녀>, 하지만 7회 '자위'에 대한 토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그나마 남자들의 영역에서는 하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불가피하게 수용되고 있지만, 여성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심지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영역, 그 영역을 용감하게 <까칠 남녀>가 들고 나섰다. 그리고 모처럼 남녀 이구동성으로 '내 몸의 자유'를 주장한다. 




엄연한 존재로서의 '자위'
오나니, 수음, 마스터베이션 등 자위와 관련된 용어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거기엔 자위(自慰)의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함이라는 뜻에서 부터, 라틴어 어원 마스터 베어의 손으로 오염시키다의 마스터베이션까지 다양한 의미의 역사를 내포한다. 그렇듯 '위로'와 '오염'의 극과 극의 존재론을 가진 '자위'는 그 자체로 '성'에 있어 비장할 수 밖에 없는 주제다. 

그런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까칠 남녀>는 대부분의 인간이 하며, 실제 남성의 92%, 여성의 62%가 하고 있다는 실제로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초대된 게스트 비뇨기과 의사이자, 성교육 전문가인 황진철 박사는 건강한 성생활인 '자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집착, 혹은 각자의 처한 상황이 빚어내는 강박적 자위로 인한 조루나 지루가 문제라고 '문제'의 영역을 구획한다. 

그렇다면 교육 방송 성교육 토크쇼 <까칠 남녀>가 이 문제를 공공연하게 내세운 의도는? 교육부가 제정한 성교육 표준안에서 교육에 임한 교사는 먼저 '야동'이나 '자위'라는 단어를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보여지듯 우리의 성교육은 엄연한 인간의 성행위의 일종인 자위를 터부시 함으로써 대다수 이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청소년 등이 잘못된 정보를 접하지 못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그 현실은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는 '음란 동영상'이 성교육 교과서를 대신하고, 그로 인해 각종 커뮤니티에는 이와 관련된 황당한 정보들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전구, 오이, 참외, 컵라면 등 기상천외한 각종 도구들로 인해 응급실 등을 찾는 '위험한 해프닝'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거기에 이런 성과 관련된 무지로 인해 부모 자식간의 갈등이 빚어지고, 어쩌면 아이들은 평생을 두고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자위에 대해 가르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유네스코 보고서에 따른 5살부터 자위에 대해 알려라는 커녕 제대로된 성교육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막상 패널들조차 아들의 자위에 맞닦뜨리는 상황에 대해 당황하듯, 여전히 우리 사회 '성'을 둘러싼 세대간 인식의 간극을 메우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갈 길이 먼 여성의 성
처음 여성 해방에 관련된 서적에 접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해방을 논하기에 앞서 '여성이란 존재'를 인식하고 수용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전제였다. 하지만 그 과정으로서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를 보고 만져보고,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여성학의 입장이 벌써 몇 십년전. 하지만 2017년의 중년 여성들은 '마스터베이션'과 관련된 도구에 질색을 하며, '자위'에 대해서는 '뭘 그렇게 까지'라며 손사래를 친다. 

물론 그런 중년의 세대와 젊은 세대는 다르다. 당당하게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미처 그것을 몰랐던 것에 안타까워하는 등 자신의 욕구에 한층 솔직해졌다. 그러나 그런 젊은이들조차 말한다. 2017년에도 여성들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정숙하고 조신하기를 요구받는다고. 



여전히 '수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의 성, 그러기에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자위'는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실제 아이를 낳고 나서도 자신의 성기를 만져보거나, 들여다 본 적이 없고, 자위에 대해 모르는 여성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내 몸을 모르고, '자위'를 하지 않는 것이 왜 문제냐고. 그건 바로 내 몸을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까칠 남녀>는 입을 모은다. 그 누군가의 성욕을 수용하는 대상, 혹은 아이를 낳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아껴야 할 나 자신의 일부이자, 방식으로서 '자위'는 규정된다. 즉, 성관계와는 별도로 나의 몸을 탐구하는 기초로서의 '자위'는 그 존재론을 드러낸다.

이런 여성의 자기 인식, 자기애, 자기 욕구에 대한 인정으로서의 과정은, 나아가 부부간의 성 문제로 구체화된다. 실제 기혼 남녀의 72%, 67%가 결혼 과정에서의 '자위 경험'이 있는 현실, 하지만 남성의 8%, 반면 여성의 92%가 상대방의 '자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이 위태위태한 성적 불균형의 현실을 보여준다. 상대방의 자위에 대해 혹시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가 라는 자책은 바로 '자위'에 대한 무지로 인해 빚어지는 대표적 사례다. 

물론 방송은 조심스럽게 '자위'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라 못박는다. 개인차는 물론, 세대와 성별에 따라 차이의 간극이 큰 문제라는 것도 공감한다. 하지만,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단언처럼, 그것이 곧 '죄책감'으로 덮어 씌워진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방송을 젖혀 버리고자 애쓴다. '자유', 해방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과정으로서의 '자위'를 복권하고자 애쓴다. 

그 언급만으로도 여전히 얼굴이 벌게지는 단어, 그것이 토크쇼의 주제로 공공연하게 등장했다느 사실만으로도 <까칠 남녀>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터부'를 '자유'로, '해방'을 '자기애'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한 표현으로 저 뒷골목에 숨었던 '자위'를 끌어오고자 애쓴다. 이런 '노력'의 목적은 무엇보다 현실이다.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언급만으로도 부끄럽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않게 되는 이 '자연스럽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궤도 수정하고자 한 노력이다. 그러기에 <까칠 남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ebs답게 교육 방송으로서의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다. 
by meditator 2017. 5. 9. 04:20

이제는 과거의 인물이 된 오바마 대통령,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오바마 케어'라고 칭해지는 미국 의료 보험 체제를 개편으로 부터 상징되는 '진보적'인 업적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결국 '오바마 때문이다'라는 평가처럼,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트럼프'를 선택하도록 만든 경제적 불안감에 대해 전혀 해소하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평가도 등장한다. 임기 중 전용기를 타고 열심히 놀러다니고 농구 경기를 보러 다녔다는 '한 일이 없는 이미지'만의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 어디든지 달려갔던 기동력 뛰어난 현장가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그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은 퇴임할 당시에 이르기까지 무려 55%의 높은 지지도를 유지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의 대통령들이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했던 것과 달리, 퇴임식을 맞이하기도 전에 탄핵을 받아 감옥에 가있거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고개를 수그리고 청와대를 나서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아니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따지더라도 놀라운 지지율이다. 과연 그의 공과를 차치하고 퇴임에 이르러서까지도 여전히 높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오바마, 그 이유가 뭘까를 <sbs스페셜>이 찾아본다. 




남의 나라 대통령 인기 높은 이유를 찾아보는 심리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같은 대통령 제를 운영하는 우리 나라의 새 대통령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무사히 퇴임하는 건 물론, 퇴임에 이르러서까지 환호를 받는 대통령, 어쩌면 우리가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가장 소박한 희망은 그것이 아닐까? 박수받으면 떠날 수 있는 대통령, 그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해낸 오바마의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2920일 동안 오바마를 지켜 본 오마바 전속 비디오 작가의 지난 5년간의 기록을 들춰본다. 

오바마를 통해 새 대통령에 바란다. 
오바마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즐기는 대통령이었다. 그에겐 2009년 취임에서 부터 퇴임까지의 시간을 따라다니며 기록한 공식 미디어 작가 차운드 하리를 비롯한 미디어 참모들이 있었다. 현대의 정치가 마치 '아이돌 탄생기'처럼 '이미지네이션'이 중요해지고, 언론에 의해 취합된 정보에 따라 대통령의 선택 여부가 판가름나는 시절에, 가장 발빠르게 그런 '트렌드'에 앞서 간 대통령으로 오바마는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공식 작가 차운드 하리는 그런 '미디어 프렌들리'라는 지점만으로 오바마를 기억하는 것에 고개를 젓는다. 역대 대통령 그 누구보다 오바마는 카메라의 온 오프의 경계가 없었던 인물이라 강조한다. 그는 그 누구보다 카메라에 많이 노출되었지만, 그 노출된 그의 모습은 '가공된 이미지'가 아니라, 카메라가 꺼진 순간에도 이어진 오바마 그 자신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렇게 진솔한 오바마란 인물은 미국 시민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오바마는 다인종 국가 미국의 전형처럼 복잡한 가계를 가진 인물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지닌 인물로써 입지전적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 오바마는 그런 자신을 규정지었던 그 모든 것을 넘어 '미국'이라는 나라를 '통합'시켜 나가는데 그 누구보다 솔선수범한 인물로 비디오는 기록한다. 

경선 과정에서 자신의 상대방이었던 힐러리를 국무 장관으로 임명했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국방 전문가 조셉 바이든을 런닝 메이트로 임기 내내 함께 했다. 무엇보다 그가 걸출했던 것은 미국이 위기를 맞이한 그 순간 순간이라 비디오는 기록한다. 우리에게도 기억으로 남는 백인의 흑인 교회 난입사건, 그 추도식에 선 오바마는 자신의 피부색 또한 흑인 임을 드러내지 않고, 'amazing grace'를 부르며 온 국가를 열광적인 통합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이 선거 기간은 물론, 취임 과정에서 위기에 몰릴 때 아와 타를 구분함으로써 자신의 편을 결집시키는 것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위기를 돌파했던 것과 달리, 미국 내 인종 갈등을 정점으로 이끌었던 그 사건의 현장에서 노예선 선장으로 자신이 과거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며 만들었던 그 노래를 부르며, 흑백 인종 갈등을 봉합하고자 노력했다. 자신의 연설회장에서 자신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반대론자의 목소리에 그는 무시하는 대신, 준비해온 자신의 연설을 접고, 비록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전향적 자세를 보인다. 

현대 정치학이 결국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건 '통합'이다. 다양한 인종, 층위가 나는 계층, 그리고 그들 각각의 요구라는 복잡하게 서로의 이해 관계가 얽힌 사회에서, 그들을 하나의 정치 체제로서 '통합'하는 것이 오늘날 정치 체제와 리더의 가장 큰 숙제인 것이다. 그리고 다큐가 주목한 성공적인 지도자로서 오바마는 바로 그것을 퇴임의 그 순간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오바마가 통합을 이루어 간 포인트는 바로 '아버지'이다. 두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바로 그 '아버지'로서의 자세로 국가의 모든 일에 접근해 들어간다. '각하'로서의 대통령이 아니다. 자신도 남들처럼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로써 국민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현장으로 달려가 함께 슬퍼하고, 기쁜 일은 함께 나눈다. 그의 초대로 백악관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 마치 우리 친근한 이웃의 초대처럼 반가운 일인 듯. 

또한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허물어 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드러낸다. 딸이 평가한 웃긴 것과 창피한 것의 중간에 있다는 '코믹'한 모습을 정치적 긴장의 요소로 적절하게 활용하며,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실수에 관대하다. 그런 소박하지만 거리낌없는 그의 모습들이 그의 퇴임 과정에서 지난 시간의 동반자의 눈물과 수많은 이들의 굿바이 영상으로 마무리된다. 

업적보다 중요한 건? 
그런 오바마를 두고 미국의 대통령 연구자는 슬픔의 사령관(commander of grief)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전시 최고 사령관(commander in chief),  하지만 오바마는 '공감'을 통해 '국민'을 통합해 나가며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어루만지며 새로운 지도자상을 이루어 냈다. 이는 지난 대통령 시절, '불통'으로 인해 내내 고통받았던 우리에게는 몹시 부러운 덕목이기도 하다. 



오바마 비디오는 오바마가 퇴임 한 후 5년이 지난 2021년에 공개될 예정이다. 작가의 허락을 받아 취합한 한 시간 여의 영상에는 카메라가 켜지던 꺼지던 진지하게, 혹은 때론 가볍게 자신을 내보이기에 서슴없었던 한 대통령의 모습이 담겨있다. 물론 '미디어 프렌들리'한 그의 입장처럼, 그런 비디오 속 모습은 오바마라는 정체 세력이 지향했던 바 '이미지네이션'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네이션'을 넘어, 지금 새 대통령을 맞이하는 우리가 '고소원'인 것은 바로 '이미지'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세대, 그보다 더 극과 극의 입장으로 치달아 가는 이 대선 정국 속의 국가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기꺼이 솔선수범하는, 그래서 박수 받으며 청와대를 떠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대통령이다. 다큐에서 보여지듯이 그의 업무 실적으로 보면 오바마는 잘 한 것만큼, 잘하지 못한 것도 많은 대통령이다. 그 누군가의 평가처럼 그로 인해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통령이었던 한에서 많은 국민들이 그를 통해 위로받고, 그를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의 일원으로 자신을 정의내릴 수 있도록 만든 그 '리더쉽'이라고 다큐는 말하고 있다. 부디 새 대통령도 그 누구들의 대통령이 아닌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 되길~
by meditator 2017. 5. 8. 15:04

이제 대선 레이스도 종반, 9일이 지나면 많은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릴 것이다. 자신이 '지지' 했던 사람이 당선되어 어깨 춤을 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뻔히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낭패감에 털썩 주저앉아 '술을 푸는' 사람도. 그런 격렬한 '희노애락'의 결과물이 이제 시한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다. 탄핵이 선고되는 그 날부터 장미꽃이 미처 피기도 전에 마무리 되는 대선, 그 짧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저마다 '자신의 선택'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시간은 누군가에겐 그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 시대의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서부터, 내 세대의 대변자라서, 혹은 다른 사람이 되면 안되니까, 그리고 때로는 생뚱맞게도 너무도 인간적이라, 심지어는 잘 생기거나, 귀여워서 라는 혹시나 그 대상이 '연예인'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지난 한 달 여의 대선 기간은 '저마다의 이유'로 그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시간이기도 하였다. 


막상 그런 열렬한 지지를 '사랑'이라고 하니 무색한가? 하지만 그 뜨거운 마음을 '사랑'이 아니면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 텐가. 그 마음이 사랑인 이유를 이제 한 영화를 들어 설득해 보고자 한다. 이제는 추억의 영화로 사라져가는 <지니어스>이다. 



무조건의 지지, 그게 사랑이 아니면?
주드 로, 콜린 퍼스, 니콜 키드먼이라는 '스타 군단'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작품, 하지만 영화 속 그들이 분한 등장 인물은 오늘날 이 배우들의 면면보다 더 문화사적으로 존재감이 높은 인물일 수도 있다. 바로 1930년대 미국의 소설계를 주름잡던 어네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를 탄생시킨 편집자 맥스 퍼킨스와, 그가 당대의 기린아로 탄생시킨 토마스 울프가 그 주인공이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시가 폭락한 '검은 목요일', 그로부터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경제적 위기로 부터 시작된 암울한 기운이 도시를 덮고 있는 뉴욕, 사람들은 일자리르 구하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고, 그 한 편에 연신 담배를 피워물며 저 멀리 한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당시 뉴욕의 유명 출판사 스크라이너브스, 거기엔 '유명' 작가들을 눈밝게 알아보고 그들의 작품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요리해낸 편집자 맥스 퍼킨스가 있다. 어느 때처럼 사무실에서도 중절모를 벗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그에게 한 묶음의 낡은 원고가 전달된다. 다른 출판사를 전전한 모양새가 한 눈에도 보이는 나달나달한 원고 뭉치, 슬며시 그 원고의 한 장을 열어온 맥스는 곧 그 글에 빠져 출퇴근 기차를 지나, 시끌벅적한 집안 식구들을 피해 옷장 속에 숨어서 까지 그 글을 놓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그 건물을 째려보는 것조차 견디지 못한 작가가 그의 사무실을 찾아오자 '계약'을 제안한다. 바로 이 장면이 역사적인 맥스 퍼킨스와 토마스 울프와의 만남이다. 

아마도 영화가 극적으로 그려서 그렇지,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스콧 피츠제럴드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굳이 그 30년대 실업자 대열의 일원이었던 토마스 울프와 이제는 대가가 된 맥스 퍼킨스와의 '인연'을 끄집어 낸다. 그리고 그 '인연'을 매개하는 건 토마스 울프라는 '천재'에 매료된 편집자이기 이전에 '인간'인 맥스이다. 



당시 토마스 울프는 고향을 떠나와 도시에서 전전하다 부유한 여인 엘린이라는 독지가의 덕으로 근근히 글을 써나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맥스가 한 눈에 반하듯 '시적이면서도 유려한 그의 문장'으로 점철된 그의 글은 그 '장황한' 양으로 인해 이곳저곳에서 퇴짜를 맞는 형편.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맥스는 계약은 하되, 대신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보기 편하게 '편집'하자는 제의를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둘의 인연으로 그의 첫 작품 <천사여 고향을 보라>가 탄생한다. 

영화는 토마스 울프가 그의 첫 작품으로 맥스와 인연을 맺고, 800여 페이지가 넘는 두 번 째 작품 <시간과 강에 관하여(1936)>를 출간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광폭 행보를 씨줄로 삼는다. 그리고 그 '기인' 토마스 울프의 곁에서 때론 그의 재능에 반하고, 필력에 매료되고, 하지만 그런 그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타협'하고, 결국은 그와 '불의'하지만, 그를 끝까지 아꼈던 맥스라는 인물의 행보를 날실로 삼아 이야기를 끌어간다. 

사랑이 끝나면?
영화 속 토마스와 맥스는 대비되는 인간형이다. '쓰면서 살았고, 살면서 썼다'는 그의 문구처럼, 영화 내내 끊임없이 써대고, 그래서 심지어 맥스가 찾아가 그만 쓰라고 할 때까지 고치라고 하면 거기에 더해 써대는 토마스, 그리고 그 써대는 만큼 떠벌이며 자신을 드러내고 확인받고 싶어했던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보다 자신이 소중했던 토마스란 인물과, 늘 남의 글에 뒤에서 그 글이 찬사를 받는 순간에 조차, 자신이 혹시 그 글의 소중한 부분의 '사형 집행인'이 아니었을까 '저어'하며 가장 사무적으로 규칙적으로 일 중독으로 살아가는 맥스란 인간형의 대비이다. 마치 성격 유형 검사의 가장 대비되는 두 인간형이 함께 하는 여정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두 대비되는 인간형의 만남을 눈밝은 편집자 맥스가 알아본 천재, 이전에 맥스라는 천재 글쟁이에 매료된 인간 맥스라는 관점에서 풀어간다. '베스트 셀러'를 알아보는 재바른 사업자가 아니라, 토마스의 글을 편 순간 그의 글을 눈에서 떼지 못하게 '매료된' 인간 맥스를 내세운 것이다. 영화 속 토마스는 말이 앞서고, 글은 연신 써대지만 그 재능을 확신할 매력은 모호하다. 하지만 맥스는 그 모호함 속에서 맥스라는 천재를 믿고, 그가 자신과 다른 삶의 행보를 보이는 것에 끌려 들어간다.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살았던 그가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 홀로 남아 토마스와 함께 한 시간, 그와 함께 한 재즈 바에서 조심스레 추임새를 넣은 그 발동작은 사실 그 어떤 강렬한 표현보다 맥스의 변화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토마스의 후견인인 엘린의 경고, 토마스의 예측불가능한 행보, 주변의 경고, 하지만 계약이 파기되는 그 순간까지 맥스는 토마스를 믿는다. 그리고 이건 눈밝은 편집자의 천재 작가에 대한 믿음 그 이상의 '사랑'이란 말로 밖엔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사랑은 이른바 요즘 붙이기 좋아하는 '브로맨스'가 아니다. 그런 '로맨스'라기 보다는, 그저 '사람'이 사람'에게,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끌림이자, 매료이다. 그래서 2년 여의 기간,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토마스를 설득하여 그 '천재'의 두번 째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믿음'을 이끈다. 

아마도 이런 무작정의 끌림, 눈밝은 알아봄을 우리 시대, 이 계절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나기에, 나라서, 나였으니까 하면서. 영화 속 맥스의 그 무한정의 매료에는 안타깝게도 해피 엔딩이 없다. 그가 토마스를 아껴서 했던 편집 작업이, 외려 토마스에겐 상처가 되고, 결국 그는 맥스의 곁을 떠나고, 결국 오래 세상에서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집 앞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토해내며 토마스와 불화했던 그 순간을 접고, 맥스는 영화가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모자를 벗는다. 토마스의 부고를 듣고. 

아마도 며칠 후면 희비가 엇갈릴 이 한 바탕의 '매료된 시간', 그 시간의 끝에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하는 그 누군가, '원망'을 하기보다, 맥스처럼 모자를 벗어 품위있게 애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인간적인 무례함으로 마무리 된 두 사람의 관계, 심지어 자신을 탓하며 다른 편집자를 찾은 토마스를 원망할 만도 할 것이었다. 하지만 맥스는 그런 서운함 대신 한 시대를 대변할 '천재'의 사라짐을 더 안타까워했다. 그것이야말로 지나간 자신의 사랑에 대한 가장 정중한 조의가 아닐까. 지레 장미꽃보다 더 열정적이었던 대선이라는 사랑의 여정, 그 휴유증을 염려하며 뒤늦은 리뷰를 남겨본다. 
by meditator 2017. 5. 7. 19:51

그는 형사였고, 변호사였고, 그리고 임금님이 되었다. 하지만, 시대를 달리하고 다른 직군에, 때론 가해자였다가, 피해자이고, 정의의 사도로 변화무쌍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그는 이선균이다. 이렇게 정의하면 될까? 


드라마에서 그는 스스로 돋보이기 보다, 다른 배우를 돋보이게 해주는 남자 배우라 칭해졌다. <커피 프린스(2007)>에서 그러했고, <골든 타임(2012)>에서도 그의 그런 캐릭터는 어울렸다. 그러던 그가 자신을 두드러지게 어필하기 시작한 건 <파스타(2010)>부터 였다. 귀가 시끄러울 정도로 언성을 높이며 닥달하며, 짜증스럽지만 이른바 '츤데레'의 전형이라 여겨졌던 속정깊은 쉐프 최현욱은 누군가를 돋보이게만 하던 그를 전면에 내세웠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라 불리던 시절, 그래서 마흔 줄이 되도록 대학생으로 등장하며 여러 여배우들과 '사랑'을 나누던 시절에도, <화차(2012)>에서도,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에서도 그 보다는 같이 출연한 여배우들이 더 회자되었었다. 그러던 그가 사랑꾼 대신 남자 파트너를 선택한 <끝까지 간다(2014)>를 통해 '이선균'을 각인시켰고, 2015년 백상 예술 대상 남자 최우수 연기상을 거머쥐었다. 물론, 그 <끝까지 간다> 역시 최우수상 트로피는 두 개 였고, 함께 출연했던 조진웅과 그 기쁨을 나누어야만 했지만,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을 지나서야 등장하는 조진웅과 달리 영화를 내내  끌어갔던 이선균이란 존재감에 대한 '세상의 인정'이 덜해진 건 아니었다.  



이선균, 전면에 나서다 
그런 자신감과 인정은 2014년 <성난 변호사>에 이어, 얼마전 <임금님의 사건 수첩>의 개봉으로 이어졌다. 드라마 속 그가 2016년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를 통해 익숙한 사랑꾼 이선균의 유부남 버전으로 등장했다면, 형사 이선균의 좌충우돌 어드밴처물이었던 <끝까지 간다>의 캐릭터는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으로 이어진다.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현대와 조선, 그리고 변호사와 임금님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 배경을 가졌지만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하다. 두 작품의 중심엔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있다. 이선균은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그의 캐릭터, 예를 들어 조선시대 예종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등장했지만, 그는 우리가 사극에서 보았던 그 예의 임금님이 하는 말투와 태도를 배제한다. 그의 말투는 그가 현대극에서 썼던 그 말투 그대로이며, 그의 걸음거리, 심지어 왕이라는 존재임에도 늘 상투 바람으로 어전 회의마저 임하는 그의 캐릭터는 이미 '고증'이라는 범주를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알고보면 예종이 왕이 된지 얼마 안되어 불과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역사절 사실을 들먹이는 것자체가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작 <성난 변호사>처럼,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마치 <007> 시리즈처럼 이선균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에 놓고, 그에 맞춰 기획된 이선균표 어드벤처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 방식은 김영민 표 <조선 명탐정> 시리즈와  이제 유해진이라는 캐릭터를 앞세웠던 몇몇 영화를 통해 영화계의 한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조선 명탐정> 시리즈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광산'을 매개로 한 세도가의 이권이 국익을 좀 먹는다는 조선판 '적폐' 는 마치 클리셰처럼 <임금님의 사건 수첩>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성난 변호사>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기는 것이 승소'라 여겼던 승소 확률 100%의 변호성이 역시나 적폐 세력인 거대 로펌의 마수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위기에 빠졌다 살아나며 통쾌한(?) 반전 활약을 선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적폐'가 주는 비감함은 <내부자들> 등의 사회 고발성 영화의 그것과 다르게 그저 오락 영화의 트렌드로서 기능하는 바가 더 크다. 

그런 지점에서 이들 두 영화는 '이선균'에 대한 호감을 전제로 두고 '관람'을 요청한다. 그의 사극 예법에 어긋나는 말투, 그가 이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예의 껄렁껄렁한 태도, 시니컬한 말투에 대한 호감을 전제로 그런 변호사와 임금님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의 궤적은 다르다. 이미 갓 100만을 넘은 채 종영했던 <성난 변호사>와 달리, 이제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2>, <보스 베이비>, 심지어 <보안관>에 이어 4위로 내려 앉았지만, 동시 개봉했던 <특별 시민>을 가볍게 누르며 잠시 박스 오피스 1위조차 넘봤던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그보다는 나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마치 전작를 벤치마킹하듯,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성난 변호사> 개봉 이후 질타에 시달렸던 여배우의 존재감이나 기대에 못미쳤던 사무장 파트너의 활약을 보강이라도 하듯, 신예 안재홍의 맛깔나는 사관 연기와 이선균의 조선 시대 임금님의 연기의 조화를 이루었고, 김희원의 폭넓은 악역 연기를 더했다. 분량은 적었지만 정해인의 비밀 무사도 신선했다. 무엇보다, <성난 변호사>가 미흡했던 서사의 어설픔을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극복하려 애쓴 듯하다. 결국은 뻔하지만, 그래도 헛웃음이 나오지는 않은 적당한 액션 어드벤처물로서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이제 갓 100만을 넘긴 채 순위가 밀려나고 있는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이선균'을 전면에 내세우면 끝까지 갔던 <끝까지 간다>의 영광에는 못미칠 것이 예상된다. 이 상황이면 '이선균'이라는 장르의 미래 역시 불확실하지 않을까?

이선균이란 장르의 불확실한 미래
그렇다면 과연 이선균이라는 장르는 뭘까? 유해진이 그 특유의 해학과 넉살로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고, 김명민이 웃기는 장면에서조차 힘이 실려있는 연기로 승부를 본다면, 오히려 이선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연기하되, 연기하지 않는 편안함이랄까? 그가 영화 내내 짜증을 내고, 말도 안되는 어깃장의 '어명'을 내려도 어쩐지 밉지 않은 그 뜻밖의 친화력이다. 이는 다른 말로 '인간적'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그는 영화 내에서 형사가 되었든, 변호사가 되었든, 혹은 심지어 임금이 되어도 그저 '우리 같은 속좁고 불평불만많은 평범한 인간'으로 수용된다. 우스개로 이선균은 당하면 당할 수록 매력적이라고 하듯, <끝까지 간다>에서 끝까지 몰렸던 고건수의 캐릭터가 가장 그를 돋보이게 했다. 그렇듯 <임금님의 사건 수첩>에서도 임금임에도 때론 신입사관 이서(안재홍 분)에게 툭 하고 밀려가는 그 인간적인 여지에 관객들은 '연민'의 정으로 호응한다. 



하지만 그 친화력은 동시에 '긴장감없음'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임금님의 사건 수첩> 마지막 클라이막스, 조선 제일 검으로서 예종의 비장한 등장은 어쩐지 그럴 것이었으면서도 그 긴장이 풀어진다. 그런 면에서 <끝까지 간다>는 그런 이선균의 편안하지만 어쩐지 긴장감없음을 조진웅이라는 센 캐릭터로 맞붙이며 영화의 힘을 밀어 붙인다. 바로 이 지점이다. 어쩌면 그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끝까지 간다>와 이후 두 영화들이 보인 결정적 차이점이. <임금님의 사건 수첩>은 전작이었던 <성난 변호사>의 단점을 맛깔나는 신예 안재홍으로 보완했지만, 조진웅이 끌어올렸던 역동성에서 힘이 부친다. 

그러나 배우만을 탓할 것도 아니다. <끝까지 간다>가 그해 백상 예술 대상 감독상과 부산 영평상 각본상을 수상했듯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완성도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난 변호사>와 <임금님의 사건 수첩>과 <끝까지 간다>의 간극은 크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이선균이란 장르의 미래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캐릭터를 '사용'하는 영화 산업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갈 듯하다. 김명민, 유해진이란 배우들이 그 걸출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앞세운 작품들이 '오락적' 성격과 별개로 작품성에서 미흡했던 전례에 대한 아쉬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대중적인 배우를 앞세운다면 그럭저럭 만들어도 대충 관객이 들거라는 그 '안이함'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선균이라느 장르의 미래는 이런 오락적 영화에 대한 좀 더 진지하고 내용성있는 고민에 대한 숙제로 남겨져야 할 듯하다. 

by meditator 2017. 5. 5. 16:10

대선을 맞이하여 ebs다큐 프라임이 준비한 카드는 <대통령은 누구인가> - '미스터 프레지던트, 대통령의 탄생', '위 더 피플, 국민의 탄생' 2부작이다. 대통령 제도가 탄생한 나라, 미국에서 초대 대통령의 탄생 과정과 이제 45번 째 대통령을 뽑는 대선 과정을 통해 과연 대통령이란 제도의 의미를 돌아본다. 말 그대로 옛것을 읽혀 그것을 미루어 새 것을 아는 '대통령 제도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하지만 그저 '고전 강독'이 아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된 국가로, 그리고 나쁜 대통령은 있었지만 나쁜 제도는 아닌 대통령 중심제를 45번을 수행해 온 과정은, 이제 '대통령 중심제', 그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썩이는 대선 과정에서 한번쯤은 복기해 볼 만한 문제이다. 무엇보다, 누구를 뽑느냐 이전에 과연 대통령을 뽑는다는 그 '행위' 자체로서의 정치적 의미, 그 본질을 짚어보는 과정으로서 <대통령은 누구인가>는 유의미하다. 




1부 대통령은 미 독립 투쟁의 산물이다
5월 1일 방영된 <대통령은 누구인가> 1부 미스터 프레지던트, 대통령의 탄생은 지난한 미국 독립투쟁사의 과정을 나열한다. 

당시는 오늘날과 다르게 미 대륙과 유럽 사이의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아프리카 난민들이 지중해를 건너듯 목숨을 건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 생사를 오고간 여정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낙원'이 아니라 극심한 추위, 심지어 죽은 동료의 시체를 먹는 풍습이 생길 정도의 굶주림, 그리고 터줏대감인 인디언의 무자비한 공격 등이었다. 그런 역경을 뚫고 차츰 미 대륙에 자리를 잡아가던 이주민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을 영국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악화시킨건 본국이었다. 18세기 무모한 식민지 전쟁으로 인한 국부의 피폐함을 식민지, 그 중에서 급격하게 경제적 안정을 일구어 가는 미 대륙으로 부터 '징수'하고자 한 본국 정부는 가장 일상적인 '사탕', '종이' 등에 '관세'를 부여했고, 이런 본국과 식민지 미 대륙의 갈등은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학살과 무장 투쟁으로 국면을 전환하며 '독립'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사실'들이 아니다. 그 행간을 채운 '사람'들이다. 즉 본국의 무자비한 관세에 대하여 '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투쟁했던 버지니아의 패트릭 헨리를 비롯하여, '대표없이 관세없다'며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 전쟁을 이끈 새뮤얼 애덤스, 샘 콕 등의 보스턴 자유의 아들들 등의 중단없는 저항이었다. 이들 저항의 과정이 '독립 전쟁'이요, 그 '결실'이 바로 독립이자, 그 결과물이 대통령이란 미국의 새로운 제도인 것이다. 



1776년 낭독된 독립 선언서, 하지만 그로부터 미국의 헌법이 만들어지기까지는 11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미국은 새로운 정치 체제와 관련된 치열한 논쟁을 치뤘다. 무엇보다 영국의 국왕제와는 다른 새로운 제도를 원했다. 거기에 시민들 투쟁의 결과물인 만큼, 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담겨있는  제도라야 했다. 그래서 그 결과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프레지던트' 대통령이다. 

당시 프레지던트라 불리는 사람들은 지역단체, 위원회, 대학 총장 등으로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무엇보다 국왕처럼 'too much power'를 저지하고자 처음 3명의 대통령까지 염두에 두었다니, 우리의 대통령제와 격세지감이다. 대신 한 명의 대통령을 두는 대신 의회와 법원의 삼권 분립 제도를 철저하게 하여, 권력의 집중을 막았다. 오늘날,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이 덜 불안해하는 이유는 바로, 제 아무리 트럼프가 막무가내식으로 나간다하여도 상원과 하원으로 분리된 의회와 법원, 그리고 각 주로 분리된 연방 정부라는 '분립'된 국가 권력이 그의 독주를 막아낼 것이란 제도적 안정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그의 의료 보험 제도를 통과시키기 위해 지난한 의회 설득 과정처럼 말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은 '미스터 프레지던트'다. 우리의 '각하'가 아니다. 대통령이 되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독점 권력'이 아니다. 그렇게 세계 최초로 이전의 왕정제와는 다른 권력 체제를 탄생시킨 미국, 그 첫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뽑았고, 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재선 이후 스스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 내며, 새로운 군주가 아닌 '국민의 동의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 대통령 제도를 완성시켰다. 



2부 we the pepple 국민이 국가를 만든다
2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2016년 1차 tv 토론부터 시작한 미국의 대선 레이스다. 45대 대통령 선거 절대적 표수로 보면 힐러리가 트럼프를 이겼다. 하지만 복잡오묘한 미국 대선의 승자는 트럼프였다. 도대체 왜 다수의 득표를 하고도 힐러리는 트럼프에게 승복할까? 이기고도 지는 선거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2부에서 바라본 미국의 대선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tv 토론을 시작으로 벌어진 국민들의 자발적 선거 참여의 과정이다. 우리나라 대선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당원'들이라고 한다. 그나마 나이든 사람들은 좀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정의당'이 아니고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하물며 한 자리를 약속받지 않은 자발적 자원봉사자는 언감생심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선 과정은 자신을 지지하는 자원봉사자들의 한바탕 축제와도 같다. 그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의 슬로건을 스스로 만들어 걸고, 자원 유세에 나선다. 집집마다 찾아다니기도 한다. 유세 과정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참여한다. 미국의 공공 정치 참여 비율은 28%이다. 겨우 28%라고? 아니다. 이 비율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편이다. 

거리에서 만난 노년의 자원 봉사자가 초등학생 어린이들과 논쟁을 벌인다. 우리 식의 훈계와 대꾸가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어른'은 경청한다.  고깝기는 커녕 '어른'은 그렇게 정치에 관심을 가져주는 아이들이 '고맙단'다. 선거 과정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쉽다. 어른들은 아이와 함께 풋볼 시합에 가듯 선거 과정을 함께 한다. 아이들도 당당하게 말한다.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권리가 있다고. 



도대체 이런 어린 시절부터의 당당한 참여는 어디로 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미국의 선거는 '즐기는' 과정이다. 선거 후 '정치 보복'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생결단의 과정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후보가 당선되지 않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비난도 한다. 하지만 그 조차도 과정의 일부니다. 오히려 미국에서 선거는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는 투표가 유일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정치적 행위라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미국에서 선거는 투표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고 지역 공동체에 참여하는 식으로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 과정의 한 매듭에 불과하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당당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교육에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은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배운다. 국민의 권리와 투표에 대해 토론한다. 우리 식으로 외워 시험보는 것이 아니다. 교사는 말한다. 너희는 학생이지만 국민이기도 하다고 선생님은 강조한다. 스스로 학생 헌법을 '제정'해 보기도 한다. 교실은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현장이다. 

이런 교육이 특정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저소득층 지역을 중심으로 각 학교마다 이루어진다. 왜? 국민의 권리는 참여로부터 시작되고, 어떤 권리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빼앗길 것이기에 더 나은 시민으로 깨어있기 위해 당연한 권리라는 의식이 미국 사회 전반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변화의 과정이자, 결과물이 대통령 선거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나라의 미래와 방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실천'한다. 시민들의 평등한 권리로서의 국가, 하지만 그것에 전제가 되는 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교육받고 그에 대해 제대로 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민이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국민의 자조적 수준에 대한 비감어린 한국에서의 이 경구가 미국으로 가면 풀뿌리 민주주의 교육의 경구로 변화된다. 평등한 시민들의 권리로서의 대통령, 과연 5월 9일 우리가 뽑으려고 하는 대통령도 '그런' 사람일까? 


by meditator 2017. 5. 3. 15:15

헌법 재판소의 판결이 엊그제인가 싶더니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1주일여 앞두고 있다. 장미꽃이 만발하기도 전에 우리는 새 대통령을 맞이할 듯하다. 이제 대선 종반주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를 선택할 지 이미 결정했을 듯하다. 인기투표처럼 일주일에도 몇 번씩 후보자간의 지지율이 등락하고,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지만, 정치학자들은 생각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단언하기도 한다. 혹시나 아직 당신의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 혹은 마음을 결정했다손 치더라도, <sbs스페셜- 권력의 탄생>을 보며, 과연 이제 당신이 선택하는 그 대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짚어보는 건 어떨까?




지난 2월 sbs 스페셜은 '권력'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대통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며, 보여지는 '이미지'에 휩쓸려 당신의 선택을 '실수'하지 말아달라 당부한 편이었다. 그에 이어 이제 대선을 앞두고 다시 프로그램은 '권력'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이제는 제 아무리 독방에서 떵떵거려도 법이 심판을 앞둔 지난 권력, 그 권력을 다시 들춰보는 건 철 지난 유행가같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철지난 유행가를 다시 곰곰히 들여다 보는 것이야 말로, 새 권력의 선택에 가장 유효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그 지난 권력의 '인사', 그것이 이번 '권력' 편의 주제다. 

왜 사람일까?
최진 대통령 리더쉽 위원장은 지금 유력한 대선 주자의 인사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사 그가 '악마'라 하더라도 인사만 잘하면 '천사'로 보일 수도 있다며. 

우리가 대통령중심제를 취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불행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매번 되풀이되는 권력의 불운, 권한이자 함정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유시민 작가는 그 권력의 핵심이 바로 '인사권'이라 단언한다. 

왜 인사권일까? 대통령이 되면 행사할 수 있는 인사의 권한이 줄잡아 6000 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즉 권력의 시작이 바로 '인사', 인재의 등용으로 막이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이런 수많은 인사의 권한을 준비하지 않고 권력을 맞이한다. 또한 선거 기간 중에 대통령이 되도록 도와준 사람들에게 '사농공상'을 해주고 싶고, 해주어야 할 조건이기도 하다. 더구나 동양권에서는 '사농공상'으로서의 관직은 곧 '조상의 은덕'처럼 여겨지니, 더더욱 그 '인재의 등용'에 힘이 실린다. 

그러기에 손쉽게, 그리고 허겁지겁 믿을만한 인맥의 인사, 즉 이른바 '코드 인사'로 권력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믿을 만한, 운명을 함께 한 '이너 서클'에 눈이 돌아가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믿을 만한 이너 서클의 사농공상으로 권력을 시작한 것이 바로 박근혜 정권의 첫 번째 코드 인사 '윤창중'이었다. 1호 대변인으로 박근혜의 상대방 세력을 향해 막말을 퍼붓던 언론의 인사가 첫 번째 인사라 됨으로써, 박근혜 정권은 '화합' 대신, '코드'의 색깔을 드러내며 정권의 방향을 분명히 했다. 

또한 이어서 윤창중에 의해 발표된 '밀봉 인사'는 '수첩 인사', 깜깜 인사'로 이어지고, 이는 정권이 형성되기도 전에 내정된 인물의 7명이 낙방하는 '인사 참사'로 결론을 맺는다. 하지만, '참사'에 대한 반성은 커녕,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격 사유가 있는 17명 중 끝내 6명의 인사를 강행하고, 결국 윤창중 대변인의 성추행 파문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박근혜 정권은 경제 민주화를 외치던 김종인을 내친 대신 유신 정권의 출신의 성장론자 현오석을 부총리로 앉힌데 이어, 진박 감별사 최경환, 호위 무사 윤상현, 박근혜의 신데렐라라 칭해지던 조윤선 장관을 거듭 들이며 '충성'을 인사의 제 1 명제로 내걸었다. 

하지만 이런 드러난 인사보다 심각한 것은 이른바 '소도(蘇塗)'라 칭해지던 정윤회를 비롯한 문고리 삼인방, 그리고 결국 최순실로 이어진 뽑히지 않은 '권력의 핵심'들이다. 결국 '이너 서클'에 의존한 코드 인사와 불통 인사는 '나쁜 권력'의 전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권력은 언제나 나빠질 수 있다
프로그램은 일찌기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이른바 '팽' 당한 경험이 있는 조응천, 김병준 등의 전직 '이너 서클' 인사와 문희상, 유시민 등 오랜 정치적 경험을 가진 정치인들의 경험과 의견에 기초하여, '권력'의 인사를 서술해 간다. 

결국, '인사'로 시작하여, '인사'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권력', 권력이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적 '폭력'이다. 하지만 그 '권력의 정의에서 찍혀져야 하는 방점이 '국민'에서 '폭력'으로 바뀌는 순간, '법과 원칙' 대신 자신의 '권력'이 우선되는 순간 국민의 의사는 무시되고 , 탄핵 재판소의 판결이 기다린다. 출연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권력은 칼이라고. 하지만 권력이라는 칼에는 손잡이가 없다고. 잘못잡으면 손을 베기도 하고, 상대방을 찌른다고 했는데 어느새 내 몸 속에 칼이 박혀 있기도 하다고 . 그래서 '군주민수(君舟民水),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배를 뒤집기도 한다. 그러니 권력자는 늘 국민을 두려워하고 살펴야 한다는 순자의 경구로 '인사'에 대한 다큐는 마무리된다. 



대선 투표를 일주일 여를 앞둔 시점에, 새삼 지난 권력의 '인사'를 '역지사지'해보겠다는 취지의 다큐, 어쩌면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지난 정권의 '권력' 행사에 대한 이야기는 과열된 대선 레이스의 정점에서, '원칙'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되었다. 

최근 정치학자 박상훈씨는 시민을 위한 정치 이야기란 부제를 달고 <정치가 우리를 구제할 수 있을까>란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리의 사회적 삶을 '진화'하는 방편으로서의 '정치'를 역설한다. '누가 더 '진정성'이 있는가를 가지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권력을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준비와 '이상'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가 새로운 권력 선택의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가 하면 다 해낼 겁니다' 란 말에 대한 맹목적 믿음으로 '탄핵으로 이어진 엄청난 역사적 후퇴를 경험했던 시간, 과연 지금 이 대선 가도의 정점에 선 우리는 ''인지 상정'이 아닌, 미래를 향한 권력을 담당할 '눈밝은 이'를 향한 바램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부디 장미꽃 향기 속에 탄생한 정권의 미래는 불운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를. 

by meditator 2017. 5. 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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