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 숨어있는 불평등과 편견을 허물기 위해 나선 프로 불편러들의 이야기 <까칠남녀>, 1회부터 늘 그 '불평등과 편견'을 둘러싸고 여성과 남성의 입장은 대립에 대립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제 7회, 모처럼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적 구별 없이 '프로 불편러'들의 입장이 일치했다. 바로 '자위'라는 주제로. 1회 여성의 털로 시작하여, 피임, 졸혼, 피임, 데이트 비용, 맘충 등 우리 사회 '성'과 관련된 예민한 주제를 다뤘던 <까칠 남녀>, 하지만 7회 '자위'에 대한 토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그나마 남자들의 영역에서는 하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불가피하게 수용되고 있지만, 여성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심지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영역, 그 영역을 용감하게 <까칠 남녀>가 들고 나섰다. 그리고 모처럼 남녀 이구동성으로 '내 몸의 자유'를 주장한다. 




엄연한 존재로서의 '자위'
오나니, 수음, 마스터베이션 등 자위와 관련된 용어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거기엔 자위(自慰)의 자기 마음을 스스로 위로함이라는 뜻에서 부터, 라틴어 어원 마스터 베어의 손으로 오염시키다의 마스터베이션까지 다양한 의미의 역사를 내포한다. 그렇듯 '위로'와 '오염'의 극과 극의 존재론을 가진 '자위'는 그 자체로 '성'에 있어 비장할 수 밖에 없는 주제다. 

그런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까칠 남녀>는 대부분의 인간이 하며, 실제 남성의 92%, 여성의 62%가 하고 있다는 실제로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초대된 게스트 비뇨기과 의사이자, 성교육 전문가인 황진철 박사는 건강한 성생활인 '자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집착, 혹은 각자의 처한 상황이 빚어내는 강박적 자위로 인한 조루나 지루가 문제라고 '문제'의 영역을 구획한다. 

그렇다면 교육 방송 성교육 토크쇼 <까칠 남녀>가 이 문제를 공공연하게 내세운 의도는? 교육부가 제정한 성교육 표준안에서 교육에 임한 교사는 먼저 '야동'이나 '자위'라는 단어를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못박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보여지듯 우리의 성교육은 엄연한 인간의 성행위의 일종인 자위를 터부시 함으로써 대다수 이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한 청소년 등이 잘못된 정보를 접하지 못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그 현실은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는 '음란 동영상'이 성교육 교과서를 대신하고, 그로 인해 각종 커뮤니티에는 이와 관련된 황당한 정보들이 넘쳐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전구, 오이, 참외, 컵라면 등 기상천외한 각종 도구들로 인해 응급실 등을 찾는 '위험한 해프닝'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거기에 이런 성과 관련된 무지로 인해 부모 자식간의 갈등이 빚어지고, 어쩌면 아이들은 평생을 두고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자위에 대해 가르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유네스코 보고서에 따른 5살부터 자위에 대해 알려라는 커녕 제대로된 성교육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막상 패널들조차 아들의 자위에 맞닦뜨리는 상황에 대해 당황하듯, 여전히 우리 사회 '성'을 둘러싼 세대간 인식의 간극을 메우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갈 길이 먼 여성의 성
처음 여성 해방에 관련된 서적에 접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해방을 논하기에 앞서 '여성이란 존재'를 인식하고 수용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전제였다. 하지만 그 과정으로서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를 보고 만져보고,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다는 사실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여성학의 입장이 벌써 몇 십년전. 하지만 2017년의 중년 여성들은 '마스터베이션'과 관련된 도구에 질색을 하며, '자위'에 대해서는 '뭘 그렇게 까지'라며 손사래를 친다. 

물론 그런 중년의 세대와 젊은 세대는 다르다. 당당하게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미처 그것을 몰랐던 것에 안타까워하는 등 자신의 욕구에 한층 솔직해졌다. 그러나 그런 젊은이들조차 말한다. 2017년에도 여성들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정숙하고 조신하기를 요구받는다고. 



여전히 '수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성의 성, 그러기에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자위'는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실제 아이를 낳고 나서도 자신의 성기를 만져보거나, 들여다 본 적이 없고, 자위에 대해 모르는 여성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내 몸을 모르고, '자위'를 하지 않는 것이 왜 문제냐고. 그건 바로 내 몸을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까칠 남녀>는 입을 모은다. 그 누군가의 성욕을 수용하는 대상, 혹은 아이를 낳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아껴야 할 나 자신의 일부이자, 방식으로서 '자위'는 규정된다. 즉, 성관계와는 별도로 나의 몸을 탐구하는 기초로서의 '자위'는 그 존재론을 드러낸다.

이런 여성의 자기 인식, 자기애, 자기 욕구에 대한 인정으로서의 과정은, 나아가 부부간의 성 문제로 구체화된다. 실제 기혼 남녀의 72%, 67%가 결혼 과정에서의 '자위 경험'이 있는 현실, 하지만 남성의 8%, 반면 여성의 92%가 상대방의 '자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이 위태위태한 성적 불균형의 현실을 보여준다. 상대방의 자위에 대해 혹시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가 라는 자책은 바로 '자위'에 대한 무지로 인해 빚어지는 대표적 사례다. 

물론 방송은 조심스럽게 '자위'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라 못박는다. 개인차는 물론, 세대와 성별에 따라 차이의 간극이 큰 문제라는 것도 공감한다. 하지만,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단언처럼, 그것이 곧 '죄책감'으로 덮어 씌워진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방송을 젖혀 버리고자 애쓴다. '자유', 해방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과정으로서의 '자위'를 복권하고자 애쓴다. 

그 언급만으로도 여전히 얼굴이 벌게지는 단어, 그것이 토크쇼의 주제로 공공연하게 등장했다느 사실만으로도 <까칠 남녀>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 '터부'를 '자유'로, '해방'을 '자기애'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한 표현으로 저 뒷골목에 숨었던 '자위'를 끌어오고자 애쓴다. 이런 '노력'의 목적은 무엇보다 현실이다.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언급만으로도 부끄럽고,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않게 되는 이 '자연스럽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궤도 수정하고자 한 노력이다. 그러기에 <까칠 남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ebs답게 교육 방송으로서의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다. 
by meditator 2017. 5. 9.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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