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이 늘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적당히 견딜만한 햇살, 온기, 심지어 겨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쨍쨍한 햇살 아래 그늘 아래에서 숨을 돌려봤던 이라면 쉬이 그 곳의 안식을 잊을 수는 없다. 하물며, 사랑의 그늘이라면, 더더욱. 여기 사랑의 그늘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있다. 늘 자신이 편하게 쉴 그늘을 잃어버린 남자, 그는 그늘을 잃어버린 이후에야 자신의 안식처를 잃어버렸음을 세상의 땡볕 아래서 서서히 절감한다. 심지어, 그저 자신을 편히(?) 쉬어갈 곳이라 생각했던 그 그늘이 사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자신만큼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이었음을 곱씹는다. 영화 <아주 긴 변명>은 바로 그 그늘을 잃어버린 남자의 오랜 방황이다. 




대지진 이후의 상실을 다룬 또 한 편의 영화 
일본 영화계는 2011. 3.11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나뉘어진다. 3.11 대지진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에서 부터 최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너의 이름은>과 같은 애니메이션까지 일본 사회가 겪은 '사회적 상실'에 천착한다. 2016 부산 국제 영화제를 비롯하여, 벤쿠버 영화제 등에 초청된 <아주 긴 변명> 역시 이 '상실'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부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남편(모토키 마사하루 분)이 출연한 방송을 틀어놓고 남편의 머리를 다듬어 주는 아내. 이 여유로운 일상은 곧 자기 비하를 시작으로 무례하다싶을 정도로 감정을 토해놓는 남편의 언어로 인해 파열음을 낸다. 심지어 아내가 웃으며 보던 tv까지 꺼버리는 남편. 하지만 아내는 그런 남편이 토해놓은 감정에 눈빛은 동요하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않고 남편의 머리를 매만진다. 남편에게 둘러놓은 미용용 덮개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길을 떠나는 아내. 그런 아내가 떠나자마자 서둘러 온 메시지를 확인하는 남편, 그리고 그의 집에 찾아온 여자. 아내가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겨울 산을 오를 때 남편은 아내와 함께 있던 그 짜증스럽던 남편이 아닌, 가장 로맨틱한 남성이 되어 밀애를 즐긴다. 그리고, 그 밀애의 끝에 걸려온 전화, 아내가 죽었다. 



영화는 그렇게 엇갈리는 부부의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엇물렸던 일상처럼, 남편은 사고 후 만난 조사관에게 '아내'에 대해 엇박자를 짚는다. 아내의 옷차림, 행선지는 물론, 아내가 동행했던 친구의 존재조차 '무심'했던 남편, 하지만 미디어에 알려진 유명 작가답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코스프레를 그럴 듯하게 하며 장례를 치뤄낸다. 틈틈이 자신의 상실이 얼마나 세간에 관심 대상이 되는가를 확인하며. 하지만 사고 이후 가증스러울만큼 천연덕스러웠던 남편의 삶은 아내가 없이는 세탁기 하나, 전자렌지 하나 돌리지 못하는 일상으로 돌아오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서 빨리 아내를 보내고 연하의 애인과의 정사에 맘이 도망가있던 그는 정작 돌아오지 않는 아내가 돌보지 않는 일상은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무너져가는 그에게 아내의 친구 남편(다케하라 피스톨 분)이 찾아오고 그는 덥석 그의 아이들을 돌보겠다 선심을 쓴다. 

영화는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전작 <유레루(2006)>나 <우리 의사 선생님(2009)>처럼 전혀 다른 모습의 두 남자를 대비시킨다. 틈틈이 아내가 남긴 메시지를 반복 청취하며 시도때도 없이 아내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요이치, 그와 달리 아내의 사고 이후 한번도 울 수 없었던 사치오, 그 두사람이 요이치의 아이들을 매개로 '상실'을 살아낸다. 

나의 사랑하는 플라타너스여
아름답고 무성한 잎이여 
그대를 위한 운명은 반짝인다
천둥, 번개, 태풍이라 할 지라도 
그대의 아늑한 평화를 범하지 말라
사나운 갈바람도 다가와 그대를 욕하지 말라
그립고 사랑스러운 나무 그늘도 
지난 날 이렇듯 아늑하지는 않았다.


늘 사랑하는 이를 사랑했던 건 아니다. 
영화는 결혼 20년 여전히 이기적이기만 한 남편 사치오를 통해, 상실의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당신은 어땠습니까? 가족이라는 관계, 혹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얽혀진 인간 군상, 하지만 늘 그 관계가 교과서적 전형으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교과서적이지 않는 인간 관계를 <아주 긴 변명>은 들여다 본다. 아내가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 다른 여자를 안고 있던 남자는 아내를 추모하러 간 호수에서, 자신을 남기고 죽어버린 것이 바로 형벌이라며 하늘의 아내에게 소리를 높일 정도로 차마 자신이 저지레해버린 파열된 관계를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아내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리는 요이치는 여전히 쉬이 눈물이 흐르지 않는 그에겐 또 다른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에게 '공감'의 여지를 준 건 요이치의 아들이다. 감정을 쏟아놓은 아버지, 철없는 동생 사이에서 애어른처럼 의젓한 그의 아들, 아버지에게 차마 말하지 않는 감정, 심지어 눈물을 보이는 그 아이를 보며 사치오는 자신이 둘러친 상실의 벽을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아이를 돌보는 한 줄의 글을 쓰기도 힘든 일상, 어느덧 어린 여자 아이의 지시에 따라 밥도 하고, 빨래도 개는 그 일상에 사치오는 빠져드는데, 그의 매니저는 그런 그를 두고 '도피'란다. 

요이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숨가쁘게 달려가는 사치오의 그 순간 흘러나오는 '라르고'처럼 사치오가 자신의 죄책감, 자신의 상실을 들여다보는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사치오라는 인물을 '느리게' 들여다 본다. 아내의 부재를 자신에게 벌주는 것이라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아내의 털끝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문자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그의 상실은 쉬이 자신을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 '쉬이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않는 상실은,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주 긴 변명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계와 그 관계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오랜 고찰로, 그리고 치유에 대한 반문으로 귀결된다. 



정작 아내 이야기만 나오던 요이치가 뻔뻔하리만치 천연덕스러웠던 사치오와 달리 시간이 흐르자 아내의 메시지를 지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하자, 사치오는 아내의 죽음의 그때와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요이치 가족과의 시간은 사치오에게 아내의 부재를 대신할 그늘이었으며, 비겁했던 자신을 인정할 '연옥'이었던 것이다. 자신과 같았던 요이치의 아들을 돌보며, 어린 딸아이의 엄마 노릇을 하는 그 '외면'의 시간 사치오는 천천히 아내와 자신을 돌아볼 '짬'을 낸 것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쩌면 '치유'가 아닐 지도 모른다. 오히려 다친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 상처를 말끔히 낫게 만들려는 인간 세상의 조급증에 대한 반문일 수도 있다. 사치오와 아이들과 함께 바다에 간 요이치는 말한다. 아내만 있다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어쩌면 도망이고, 어쩌면 상실의 과정일지도 모를, 그 시간이 요이치와 사치오에겐 또 다른 삶의 과정이다. 그 오랜 삶의 여정을 통해, 변명에 변명을 하며 아내의 죽음과 함께 하겠다던 사치오는 비로소 자신과 아내를 들여다 보고, 그때서야 사치오 자신으로 돌아와 작가로 선다. 하지만, 그건 비로소 자신의 머리를 자를 용기를 낸 것처럼, 진짜 이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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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21 18:43
지구 온난화'는 토를 달 것도 없이 현재 전세계가 봉착한 '위기' 중  하나다. 하지만, '위기'라는 점에 있어서 전세계인이 공감하지만, 그 '위기'에 대처를 두고 전세계를 구성하는 각 국의 입장은 엇갈리기 시작한다. 일찌기 세계는 1992년 유엔 기후 협약을 시작으로, 97년 교토 의정서를 통해 전세계적 합의를 도출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지구 온난화를 해소하는데 공감은 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각국의 이해가 앞섰던 세계가 2015년 '파리 협약'을 통해 '합의'에 이르렀다. 오바마 행정부가 일찌기 비준에 동의하고, 중국, eu 등이 합류하며 '실행'을 눈 앞에 두고 있다. 

141개국이 비준한 교코 의정서가 온실가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미, 중'의 합류 불발로 '실천력에 있어 좌초를 만난 것과 달리, 미중, eu, 인도 등의 온실 가스 배출 비중이 큰 나라들이 일찌감치 합류하고 우리나라도 2016년 11월 뒤늦게나마 합류하며 전세계적 '실행'의 날개를 달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mbc는 중국 cctv와 함께 발빠르게 기후 협약 실행을 앞두고 이와 관련한 다큐를 제작하였고, 2월 6일부터 20일까지 3부작 <AD2100 기후의 반격>이 방영되었다. 



기후 협약의 비준를 통해 전세계는 기후와 관련된 지구 생존의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고자 하는데 합의했다. 다큐는 그 중에서도 동북 아시아가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기후 변화와 관련된 거센 파고를 맞이하고 있다는 지점에 공감하며 이런 '기후'와 관련된 실천이 '급박'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 졌다. 

생태계로부터 인간에까지 
3부작의 다큐, 그 시작을 연 것은 <생물 대이동>이다. 산업화와 맞물려 극심해진 기후 이동은 동북 아시아 생태계의 변화를 낳는다. 우리 나라의 경우 한라산 구상 나무의 고사에 촛점을 맞춘다. 

나무 한 종이 사라지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의 기온은 1.85도 상승했고, 이 기온 상승은 한대성 수종인 구상나무의 고사를 불러온 것이다. 이 구상 나무의 고사는 그와 관련된 식물군들의 동반 고사를 예언한다. 우선적으로 구상나무와 함께 자생하는 희구 식물군도 사라질 위기이며, 생태계에서 가장 근간을 이루는 식물종의 사멸은 그와 관련된 생태계 사슬의 붕괴를 의미한다. 즉 기온의 상승은 구상 나무 등 식물종의 사멸은 물론, 2010년 40일에서 2015년 25일로 꽃이 피는 간격이 달라지며, 그에 의존해 살아가는 꿀벌의 급감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생태계의 혼란으로 먹이를 구하기 힘든 야생 원숭이들이 농가로 내려와 피해를 입히는 사례가 늘어나고, 중국에서는 특정 먹이에만 의존하는 판다의 먹이가 되는 대나무 숲이 줄어들며 그 서식지가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다큐는 이렇게 한, 중, 일 세 나라의 '기후'와 관련된 상황을 하나의 주제에 맞춰 보여주며 지구 온난화가 동북 아시아에 미치는 심각한 파급력을 증명한다. 

기후의 반격, 그 두 번 째를 연 것은 생물 대이동보다 더 심각한 '생존'의 문제이다. <생존대도전>은 올림픽을 여느냐 마느냐까지 파급된 '지카 바이러스'를 옮기는 모기로 시작된다. 지난 2015년을 시작으로 브라질에서 '소두증' 아이가 출생하게 된 원인이 된 이집트 숲모기.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집트 숲모기처럼 지카 바이러스를 옮기는 흰 줄 숲모기가 서식하고 있으며, 기후 변화와 함께 이들의 활동 기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충격적 내용을 다큐는 다룬다. 

흰 줄 숲모기만이 아니다. 119를 불러야 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등검은 말벌 역시 그 원래의 서식지는 아열대였으나 2003년 부산에서 발견된 이래 기후 온난화와 함께 경기도, 강원도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는 중이다. 


기후와 관련하여 달라진 환경은 인간에게 고스란히 피해로 돌아온다. 지난 여름 서민에게 전기세 폭탄은 여름 기온 상승의 후유증이다. 늘 서늘한 기온에서 살던 티벳사람들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높아진 기온은 '입원'해야 할 질병이 됐다. 또한 해수면 상승은 제주도의 명승지 용머리 해안을 사라지게 만들고, 소래 포구를 물에 잠기게 하고, 히말라야의 빙하를 강으로 흐르게 만든다. 중국의 차도, 우리의 벼도 어쩌면 예전만큼의 수확이나 품질을 얻을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식물들이 가속화되는 온난화를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한, 중, 일 삼국, 그 변화의 시작 
이렇게 동북아의 생태계를 위협하는 지구 온난화, 이에 대해 아시아 3국은 어떻게 대처해 가고 있을까? 그 내용을 20일 방영된 3부 <도시 대변화>가 다룬다. 

우리나라의 <도시 대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배우 황석정이다. 황석정은 온실 가스 배출의 42.2%를 차지하는 전력 소비를 줄이는 실험에 도전한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여름 '3A(암페아)의 전기로 살기'를 도전한다. 3A의 전기, 그 양에 대한 감도 없이 도전한 황석정, 전자렌지에 음식을 데워도, 세탁기를 돌려도 넘어버린 3A에 삼복 더위에 에어컨도 없이, 손빨래를 하며 여름 3달을 보낸다. 하지만, 그 무더위의 결과, 황석정은 이제 전기차를 타고, 태양광 패널을 달고, 가급적 전기를 적게 쓰는 생활 습관을 갖추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한 사람을 통한 실험을 했다면, 일본의 경우 전기가 없던 100년전의 생활 양식을 현대에 맞게 실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전기없이도 조리를 하고, 생활을 영유하는 갖가지 실험적 방식을 시도하는 공동체와, 정부 주도 아래 태양광 발전을 정착시켜 오히려 남는 전기를 되돌려 하는 에너지 체제를 갖춘 마을을 찾아간다. 중국에서는 전세계적으로 앞선 기술을 자랑하는 전기 버스 공장과 전기 버스로 공공 교통 수단을 대신하고 있는 도시를 찾아 기후 협약 시대에 발빠르게 대처하고 있는 모습을 담는다. 

기후 협약 비준과 함께 1년에 걸쳐 준비된 <AD2100 기후의 반격>은 한류 스타 장나라가 프리젠터로 나선 가운데, 버츄얼 스튜디오를 활용한 첨단의 영상으로 2100년의 미래를 그려낸다. 지구 온난화와 관련된 가장 시의적인 시각에서 준비된 다큐, 하지만 다큐를 준비한 1년간의 상황에서 현실은 또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우선 그래도 이명박 정부가 녹색 성장이란 모토 아래 기후와 관련된 제반 정책을 주도하려 했던 것과 달리, 박근혜 정부 아래 우리 나라는 2017기후 변화 보고서(ccpi) 38.11점으로 온실 가스 1% 이상 배출 국가 58개국 중 55위의 평가를 받았다. 또한 기후 협약에 앞장섰던 오바마 행정부와 달리, 새로이 들어선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 변화는 사기'라며 석탄, 석유 등 전통적 에너지 자원 치중 정책으로 유턴하고자 한다. 미국의 눈치를 보고, 기후 협약도 미루다 하루 전에 허겁지겁 비준한 우리나라의 경우 다큐의 주제 의식을 과연 얼마나 국가적 시책으로 시행해 나갈지 의문이 되는 상황이다. 특히, 이 다큐를 만들 당시만 해도, 한류에 기반하여 우호적이었던 양국 관계는 사드 배치 등을 둘러싸고 급격하게 냉각되었고, 미국이 구상한 중국에 대항한 한. 미, 일 삼각 대응 체계의 일원으로 편재되어간 한국은 다큐가 보인 문화적 밀월 관계로 부터 멀어져만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시점에서 방영된 3부작 다큐는 그러기에 더더욱 정치적 상황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기후 정책의 난망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듯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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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21 10:20

우리의 문화적 자부심 중에 하나는 서양에 비해 앞선 금속 활자의 발명이다. 하지만, 당시 세계사 속 고려의 금속 활자 발명은 그리 '인정받지 않는 모양새'다. 왜 그럴까? 그건 활자의 발명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사회 문화적 변화가 어떻게 이끌어 졌는가라는 영향력에 있어서 고려 금속 활자의 파급력은 서양의 금속 활자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세 금속 활자의 발명은 이 금속 활자를 활용한 성서의 보급을 이끌고, '종교 개혁'이라는 시대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랬기에, 활자가 발명되었을 때 기득권인 귀족들은 활자의 보급을 반대했었다.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세종대왕이 발명한 '한글' 역시 기득권인 양반 계급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이런 당시 기득권 계급과 백성을 사랑한 군주 세종대왕의 갈등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상세하게 그려진 바 있다. 



감시 부재 사회 대한민국 
2월 19일 방영된 <sbs스페셜>은 중세의 활자와 조선의 '훈민정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백성들이 '무지'하기를 바랬던, 그래서 자신들이 마음껏 권력을 농단하기를 원했던 기득권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런 당시의 시대를 배우며 한껏 혀를 찬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역적>을 보며 저런 시대에 살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런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을까? 20세기 이후의 세계를 정보화 시대라 지칭한다. 정보화 시대의 권력은 바로 그 '정보'를 '소유'하거나 '독점'하고 있는 세력을 뜻한다. 그러기에 정보화 시대 '우민화 정책'은 바로 권력의 정보 독점으로 이어진다. 바로 2017년 청문회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그 '권력'의 독점적 폐해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그래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2017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아니 해방 후 현대사에서 거개의 권력은 늘 '부패'의 딱지을 떼지 못했다. 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권력이 늘 부패하는 걸까? 과연 '탄핵' 이후 새로운 권력이 들어선다면 그 권력은 '부패'로부터 자유로울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시작해야 할까? 바로 그 의문과 과제에 대해 <sbs스페셜>이 선택한 답은 '권력'에 대한 국민의 권리로서의 '감시'이다. 

위안부 합의 내용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 
그 '감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다큐가 접근한 우회로는 세 가지다. 그 첫 번 째, 2015년 12월 28일에 발표한 한일 위안부 합의이다. 양국의 외무 장관의 합의 조항에는 일본은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했다. 하지만 이후 아베 총리는 말을 바꿔 '털끝만큼도 인정할 마음이 없다'고 주장한다. 아베 만이 아니다. 국제 회의에 나선 일본 외교관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은 돈을 주었기에 소녀상을 철거하라며, 자국의 대사를 소환하는 강력한 제스처까지 취한다. 얼굴을 바꾸는 일본, 그런 안하무인의 태도에 분노하며 양국의 합의 내용을 알려달라는 시민 단체에 정부는 양 국 정부의 합의 내용을 외부에 공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식의 '비공개' 원칙을 고수한다. 


지질 역학 조사는 했지만 발표는 할 수 없다?
외교적 관례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월성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주변 마을, 마을에 사는 주민들 대다수가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거나 투병 중이다. 과연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암에 걸려 검사를 받은 주민, 주민의 몸에선 제한치 이상의 방사능이 검출됐다. 거주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아들도, 심지어 손자의 몸에서 까지, 3대에 걸쳐 모두 방사능이 검출됐다. 하지만 이에 정부는 방사능 수치가 높다고 암에 걸리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발뺌을 할 뿐이다. 심지어 월성 주변 마을 주민의 암 발생 수치를 알려 달라고 하니, 이번에도 역시 '비공개' 원칙을 주장한다. 

암 환자 수치만 비공개가 아니다. 그 수명이 다한 월성 원전의 재가동을 시도하려 했던 정부, 하지만 주변 도시인 경주의 잦은 지진 발생과 함께, 월성 주변 지질대에 대한 의심이 커져만 갔다. 이에 '역학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그 결과 또한 '비공개'다. 심지어 '역학 조사'에 참여한 학자들조차 보고서의 열람이 복사나, 카피가 안되는 제한적 열람만을 가능하게 했을 정도다. 

국회 청문회만이 아닌, 국가 전반, 사회 전반 곳곳에서 '국민의 주권'이 행사되어야 할 영역이라면 어디서든지, 국민이 맞닦뜨리는 것은 '위임한 권력'에 대한 정보 대신 '비공개'의 원칙이다. 그리고 결국 그 '비공개'의 향배가 궁극적으로 향한 곳은 '저 푸른 기와 집'.


3년 전 일이라 기록이 없다? 혹은 국가 원수 안위의 문제다?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와 관련하여, 여전히 우리 사회는 '안갯속'을 헤맨다. 당시 출동했지만 학생들을 구하지 않았던 해경 출동선의 cctv에서부터, 바로 그 시간 위임받은 국가 권력이었던 대통령의 7시간 행적까지, 도대체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당시의 일정이라 내놓은 보고서는 허술하기 짝이없고, 보고를 했다는데 통화 기록이 없다. 남겨진 것조차 '기록'되 내용이 아니라, 알음알음 누군지도 모르는 당사자의 기억을 쫓은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 마저도 이제 대통령의 '정보 보호' 요청이 있다면 향후 30년간 '자물쇠'가 잠궈질 처지이다. 

달라질 세상을 향한 전제 조건으로서 국민의 알권리 
과연 이런 권력의 비타협적 비공개는 '민주적 정부'의 관행일까? 당연히 아니다. 다큐는 외국의 예를 들어 비교한다. 스웨덴에서는 이미 학교에서 민주 사회의 기본 권리로서 정보의 공개를 배우고 실습한다. 학생이 요청한 정보 공개를 위해 교장은 지난 3년간의 이메일 기록 수백 페이지를 복사해 준다. 이유는? 물을 것도 없다. 그것은 권리이고, 의무이기 때문에. 덕분에 스웨덴에서는 공금으로 가족들에게 초콜릿을 선물한 총리 후보가 사퇴한다. 전기 요금을 내지 않은 장관도 사퇴한다. 마늘 주사를 비롯하여 정체 불명의 약품과 심지어 비아그라를 구매한 청와대의 물품 목록의 사용 내역은 여전히 '국가 안위'를 위한 '비공개'인 우리와 격세 지감이다. 우리나라에선 관련자조차도 혹시나 정보를 퍼다 나를까 열람 제한을 하는 원전 주변 지질 조사서는 캐나다로 가면 인터넷만 켜면 바로 검색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사무실에서는 그 자료가 굴러다니는 수준이라나. 

이런 '정보'에 대한 스웨덴, 캐나다와 우리의 서로 다른 관행은 이들 나라와 우리의 부패 지수의 차이로 판가름난다. 스웨덴이 전년도에 비해 한 계단 내려와 4위인 반면, 우리나라는 1년 사이에 37위에서 52위로 전락했다. 국민의 알권리 보다 '국가 보안'과, '국가 안위', 통치자의 신변이 우선되는 나라인 이상, 어쩌면 정권이 변하다 해도 쉬이 '부패'는 개선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정권의 변화와 함께, 이제 정말 다른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다큐가 전제로 삼은 것은 바로 국민으로 부터 나온 권력의 진정한 행사로서, 국민의 알권리 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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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20 05:39

유명해져서 손석희의 <jtbc 뉴스룸>에 출연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변호사가 있다. 하지만 이미 그는 꽤 유명해져서 우리는 그를 jtbc의 <말하는 대로> 등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있다. 바로 박준영 변호사이다. 우리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피해자가 10년간 복역했던 '약촌 오거리 사건'의 재심을 성공시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부터다. 재심의 과정은<그것이 알고싶다> 등에서 이미 다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이미 알려진 사건 '영화'를 통해 더 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지만 영화 <재심>은 신문 지면의 보도, 혹은 다큐를 통해 드러난 사실의 행간 속에 깊은 진실의 울림이 있음을, '재심의 성공'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고통과 부조리한 사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하나의, 억울한 가족을 위한 재판 이야기 
<재심>은 2013년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김경미 씨의 이야기를 다룬 <또 하나의 가족>을 감독했던 김태윤 감독의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제목 '또 하나의 가족'은 대기업 삼성이 자사의 이미미메이킹을 위한 '광고'의 캐치프레이즈였다. 하지만, 영화는 전국민의 가족같은 삼성이 드리운 그늘, 반도체 산업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산재에 대해 인정보다 하지 않고 있는 비감한 현실은 김경미 씨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곡진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가족>은 영화 상영 자체가 또 하나의 '투쟁'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어둠의 한 자락을 언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든 싸움이었던 김태윤 감독은 자신을 찾아온 기막힌 약촌 오거리 살인 사건의 진실을 접하고 다시 '실화'를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살인 누명을 썼다'는 억울한 진실을 '영화가 넘어서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김태윤 감독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은 <또 하나의 가족>처럼 최군 가족에게 닥친 '누명' 이상의 억울함이었다.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 최군, 하지만 최군의 감옥 생활동안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조차 잃어가는 어머니와 최군에게 근로복지 공단이 구상권을 청구했던 것이다. 살해 피해자에게 근로 복지공단이 피해자가에게 애초 청구한 금액은 4000만원이었지만 투옥된 동안 이자가 붙어 1억 4천만원으로 불어난 빛. 그리고 그런 최군의 억울한 사연에 함께 하게 된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는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김태윤 감독은 <또 하나의 가족>에서 그랬듯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국민적, 법적 권리로부터 배척된 가족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동네 다방에서 심부름이나 하며 지내는 이른바 '동네 양아치' 현우(강하늘 분)와 어머니(김해숙 분)의 억울한 가족사를 전면에 내세운다. 

엄마 손에 이끌려 남들처럼 학교를 다녀야 해서 입은 교복 옷깃을 세우고, 팔뚝의 문신을 드러내려는 현우, 하지만 그런 세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양아치스러움' 이면에 숨겨진 15살 소년의 순박함과 의리를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그런 현우의 진솔한 캐릭터는 곧 목격자였던 그를 폭력적으로 겁박했던 당시 공권력과 사법부의 비리와 무능, 혹은 협잡에 대한 분노를 상승시키는 가장 적절한 동인이 된다. 

강하늘과 정우가 그려낸 진심의 '버디 무비' 
그리고 10년 '양아치스러울려고'했지만 순박했던 소년은 이제 '독기'와 '절망'을 품은 청년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자식의 일이라면 '악다구니'밖엔 할 수 없는 앞이 안보이는 어미와 함께. 그리고 그런 현우 모자 앞에 나타난 벼랑 끝에 몰린 변호사 준영(정우 분)이 '속물스럽게' 등장한다. 

영화는 그렇게 10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고 절망을 아로새긴 현우와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부추켜 자신의 입신양명을 노리는 준영을 '버디 무비'처럼 그려간다. 이 기묘한 조합의 '버디'들은 감독의 그 어떤 상상을 뛰어넘는 진실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대한민국 그 누구라도 공감하는 공권력과 사법 제도가 만들어 낸 '탈법 사회' 대한민국이란 장애를 '스펙타클'하게 겪어내려간다. 모텔, 혹은 폐모텔을 배역으로 암약하는 공권력은 그 어떤 조폭 못지 않은 공포의 대상이며, 재심 앞에 '이익'을 위해 변절하는 동료, 심지어 진범을 잡고도 일신의 이해 관계를 위해 협잡하는 공권력과 사법부 등은 그 어떤 암흑가를 배경으로 한 버디무비보다 극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그런 현실 속에 때론 좌절하고, 의심하던 두 사람이 약촌 오거리을 배경으로 한 판 뜨려다, 순식간에 사건 재연의 동지로 '둔갑'하는 씬은 아마도 <재심> 속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지 않을까. 



제도 교육, 아니 지역 사회에서 내팽개쳐진 15살 질풍노도의 청소년에서, 감옥 생활 10년후 절망에 잠긴 청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15살 시절의 그 '순박한 진심'을 한 구석에 간직한 현우를 배우 강하늘은 우직하게 표현한다. <세시봉(2015)>의 윤형주도, <동주(2015)>도 그의 연기로 빚여낸 실존 인물들이었지만, <재심>의 현우로써의 강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배우 강하늘의 매력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15살 소년의 불량스러운 외모에 숨길 수 없는 순박함도, 이제 10년이 지난 절망에 자신을 던졌지만 어찌할 수 없는 진심도, 강하늘의 눈빛을 통해 설득력을 얻어간다. 

이런 빛을 발한 강하늘의 곁에 모처럼 반가웠던 건 정우다. 지잡대 전공과 출신의, 변호사의 목적이 '돈'이라고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설파하다, 현우와 현우 어머니의 진심에 방향을 돌려세운 준영은 <응답하라 1994> 이후 정우를 기억할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가 될 듯하다. 속물과 진심 사이, 믿음과 의혹 사이, 그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혼선'의 연기를 정우는 <응답하라 1994>츤데레 쓰레기 못지않게 매끄럽게 소화해 낸다. 

투박하지만 진솔한 청년 현우의 강하늘과 그런 현우를 얼르고, 때론 의심하며, 그리고 결국 그의 손을 놓치지 않는 속물 변호사 준영의 정우의 '호모 사케르' 식 '버디 무비', <재심>은 그 어떤 액션 '버디 무비'보다도 배우들의 연기와 합을 보는 맛을 충족시켜준다. 거기에 단 한 장면만으로도 관객들의 누선을 풀어헤치고 마는 김해숙의 '모성 연기'야 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요, 이동휘의 반전 연기 역시 신선했다. 



이런 배우들의 호연 덕분일까? 아니, 또 하나의 가족인 척하는 진정한 권력 대기업이 등장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 '권력의 농단'을 체감하는 시절 덕분일까? <또 하나의 가족>을 완성시키고도 개봉관을 잡지못해 동분서주하던 김태운 감독에게 <재심>은 박스 오피스 1위의 영광을 안긴다. (2월 15일 기준, 735,469명, 예매 33.9%) <재심>의 1위는 또한 이제는 슬슬 클리셰가 되어가는 부도덕한 권력과 재력의 콜라보레이션을 다룬 사회물, 혹은 작품성은 낮지만 대중성은 좋은 '액션'과 '유머'를 앞세우 흥행작의 딜레마에서 <변호사> 이후 모처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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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9 18:27

'씨앗은 부처님도 돌아앉는다'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다. 모 감독의 늦은 연애가 전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가 '아내가 있다'라는 이유다. 그런데 남편의 애인이 생겼다는 전언에 담담하게 '같이 살자'는 아내가 있다. 그러나 역시 '이성적 판단'은 무리였을까? 결국 아내는 이 '혼돈'의 공동체를 견뎌내지 못하고 직장도 잃고 집을 떠나야 할 처지다. 한 남자와 두 여자의 통속적 막장 스토리, 그런데 이 스토리가 사회민주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덴마크'에서라면? 지난 2일 개봉하여 근근히 상영을 이어가고 있는, <사랑의 시대>는 바로 1970년대 덴마크판 사랑과 전쟁을 다룬다. 






유산으로 남겨진 저택, 공동체가 되다
건축학과 교수 에릭(울리히 톰센 분)에게 대저택이 상속되었다. 아름다운 정경을 지닌 층층이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저택, 어릴 적 추억이 고이고이 간직된 곳이지만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에릭에겐 그저 어서 빨리 팔아버려야 할 부담일 뿐이다. 아내 안나(트리히 홀름 분)와 딸 프레야(마샤 소피 발스트룀 한센 분)과 함께 저택을 보러 간 날 팔 궁리를 하는 에릭에게 안나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여기서 '공동체'를 일구자고. 

안나의 변은 이렇다. 늘 에릭의 말만 듣고 살아야 하는 결혼 생활이 권태롭다고, 이젠 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살고 싶다고. 그녀가 떠올린 첫 번 째 사람은 이들 부부의 젊은 시절 친구인 올레(라스 란데 분), 단촐하게 비닐 봉지 두 개를 들고 이들의 집을 찾아온 올레를 시작으로 다섯 남자와 다섯 여자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집의 소유조차 야심차게 '공동'으로 등기하고자 하며 '공동체'를 이룬 이들은 식사는 물론, 여가까지 함께 즐기며 '공동'의 삶을 유쾌하게 꾸려간다. 

그러나 늘 '공동'의 삶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공동체 면접에서 부터 '집세'에 연연하던 에릭의 의도와 달리, 직장조차 알론까지 합류한 이들의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은 교수인 에릭과 유명 아나운서 안나이다. 외국인 알론을 못마땅해하며 그의 짐을 호시탐탐 태우는 올레처럼 함께 사는 삶의 불협화음은 늘 '토론'과 '거수'로 진행되는 공동체의 삶을 달군다. 

그래도 그럭저럭 서로 맞춰가며 사는 삶, 정작 위기는 그 공동체를 발의한 '에릭-안나 부부에게서 시작된다. 늘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안나, 그런 아내에게서 에릭은 소외감을 느끼고, 그런 그에게 학생인 엠마(헬렌 레인가드 뉴먼 분)이 다가온다. 엠마와의 밀회를 즐기던 에릭, 아내가 공동체 식구들과 놀러 간 날, 집으로 온 엠마를 딸 프레야에게 들키고 만다. 결국 아내에게 자신의 외도를 고백하고 집주인 에릭이 집을 나가게 되지만, 그도 잠시 거처가 마땅치않은 에릭과 엠마의 처지를 배려한 안나의 결정으로 '엠마'가 공동체 식구로 합류하기에 이른다. 



'이성'으론 감당할 수 없는 '사랑'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가족이란 울타리를 넘어 공동체로 해소하려 시도한 안나는 남편의 외도에 조차 이성적으로 대응한다. 남편의 외도를 '가정을 깨뜨리는 비도덕적 행위'로 지탄하는 대신, 순순히 감정의 진실을 직시하며 그의 다른 사랑을 수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덴마크'에서 살면 사랑하는 이의 외도도 저렇게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나? 라는 의아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남편의 진심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던 안나, 하지만 그가 부재한 결혼 생활은 조금씩 안나를 무너뜨려 간다. '대인배'적으로 엠마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정작 공동체 식구들이 그녀를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자 혼란스러워 한다. 그리고 밤마다 들려오는 엠마와 남편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는 그녀를 불면의 밤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거리에서 사인을 해줄 정도의 명성을 일궜던 그녀의 직업조차 무너뜨린다. 공동체의 식탁에서 술에 취해 어디서 넘어진 듯 흙을 묻힌 차림새로 엠마에게 남편을 다시 나누어 주기를 간청하는 듯한 꿈 이야기를 하는 안나는 이제 더 이상 '공동체'를 주도하던 당당한 그녀가 아니다. 심지어 에릭과 안나를 집에 거주하는 문제를 놓고 '니가 나가라'며 언성을 높이는 상태에 이른다. 

결국 이런 안나와 에릭의 집 쟁탈전을 둔 설전의 결론을 내린 것은 딸 프레야다. 딸은 엄마가 이 집에 머무는 것은 엄마를 망칠 뿐이라며 엄마가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결국 안나는 집을 떠난다. 아마 우리네 통속극이었다면 어떻게 딸이 그럴 수 있어?라는 공분을 일으킬 장면이지만, 프레야의 선택을 통해 감독은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결국 '건강한 개인'이라는 것을 짚는다. 



결국 안나는 실패한 것일까? 남편 한 사람을 두고 아내와 정인이 한 집에 머무는 양상을 보면, 예전 우리 조상들의 첩을 거드린 가족 형태가 떠올려진다. 그 시절 부처님도 돌아앉을 씨앗을 '인고하며' 대가족을 일구며 어머니들은 살아왔고, 그 '인고'의 세월을 '한'이라 지칭되며, 희생하는 어머니상, 가족의 대들보 어머니 상의 한 부분을 구성했다. 그런 면에서 안나는 '집'을 잃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견디며 '한'이라는 특별한 용어를 탄생시킨 우리의 '어머니들'과 안나는 다르다. 

안나는 분명 그녀가 가진 것들 남편과 공동체와 직업, 그리고 집마저 잃었지만, 어쩐지 가방을 들고 나서는 그녀가 홀가분해 보인다. 그녀를 보내고, 그리고 마치 그녀를 따라나서듯 사랑하는 이를 따라나선 딸 프레야를 보내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 에릭이 집에 남아있지만 진짜 실패자처럼 보인다. '사랑'의 시대는 갔지만, 그렇다고 안나의 삶이 끝난 건 아니다. 안나는 얼마전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던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진짜 자신을 찾아나설 용기를 낸 첫 걸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의 시대>가 주는 감동은 바로 그 단촐하게 떠나는 안나로부터 시작된다. 

공동체와 개인의 딜레마 
<사랑의 시대>는 7살부터 19세까지 공동체 생활을 했던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경험에 기초한다. 수상이 나서서 덴마크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며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명을 할 정도로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이 강한 덴마크, 2차 대전이 종전 된 후 집권하여 1982년까지 집권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아래 남녀간 성평등과 사회 경제적 복지 국가를 이루어 내던 그 시기의 정점에 있는 70년대의 덴마크 사회를 떼어놓고서는 이 영화를 말할 수 없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사회주의자, 직업이 없는 외국인,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까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공동체는 에릭-안나가 이룬 대저택의 공동체를 넘어 마치 70년대의 덴마크 사회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런 그들이 에릭과 안나의 경제적 기반 위에 공동으로 살아가며 때론 에릭이 '내집이야' 다 나가라는 위기를 견뎌내며 과정은 '자본주의' 체제 위에 선 사회민주적 실험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감독이 생각하는 위기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에릭과 안나의 갈등처럼, 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론적 갈등이다. 무직이었던 외국인 알론이 식기세척기를 사들일 정도로 공동체의 틀은 견고해지지만 정작 위기는 그 공동체를 일구는 사람 개개인의 자존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감독은 말하는 듯하다. 권태로운 결혼 생활의 위기를 친구같은 이들과의 공동체로 해결하려 했던 안나가 정작 남편의 외도라는 문제에서 무너지듯, 그리고 자신의 집인데 공동체의 결정에 따라 자신이 쫓겨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에릭이 '다 나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듯, 결국 파국은 '욕망'과 '자존'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하다. 

공동체 2부작이라 칭해지듯, <더 헌트(2012)>에 이어 공동체와 개인의 갈등을 다룬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은 <더 헌트>에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로 부터 배제되는 주인공으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비감하여 인간의 편협한 도덕성을 회의하게 만들었던 <더 헌트>와 달리, <사랑의 시대>는 '그 또한 지나가리니'처럼 '시대'라는 연속성으로 인해 보다 여운을 남긴다. 딸이 자라는 걸 보고 싶었던 에릭은 결국 딸조차 나간 집에서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9살을 넘기지 못한 꼬마의 장례식에서 함께 하듯이 그들이 일궜던 공동체는 여전하다. 아마도 언젠가 자신을 일으켜세운 안나가 또 다른 사랑하는 이와 다시 공동체의 면접을 볼 날이 올 지도 모를 희망까지 갖게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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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6 18:45

<하숙집딸들> 첫 방송, 시청률 공약을 거는 시간, 장기 하숙생 컨셉으로 합류한 박수홍이 10%를 들자, '러시아에서 온 새엄마' 이미숙이 말린다. 첫 술에 너무 과한 시청률 공약을 내걸었다 안되면 의기소침해진다는 게 이유였다. 대신 이미숙이 내건 수치는 5%. 첫 회 <하숙집 딸들> 시청률은 5.4%, 이미숙이 걱정한 의기소침의 벽을 넘어, 첫 번째 시청률 공약을 기쁘게 지킬 일만 남았다. 2월 10일 첫 선을 보인 <언니들의 슬램 덩크 시즌2> 역시 5%를 넘기며 무사히 안착했다. 


예능으로 온 주연급 여배우들 
물론 <언니들의 슬램 덩크 시즌2> 멤버 전원이 여배우들은 아니지만, 시즌1의 화제성을 이끈 인물이 라미란이었듯, 시즌2역시 기존 멤버 김숙, 홍진경 외에 한채영과 강예원을 합류시키며 관심을 주목시켰다. 강예원은 이미 <우리 결혼했어요> 등을 통해 예능에 첫 발을 딛었으며, 오히려 예능보다도 <백희가 돌아왔다> 등 출연한 작품 속 개성강한 캐릭터로 인해 각인이 된 배우다. 그에 반해 '예능'에서의 한채영은 예외라 할만큼 신선한 인물이다. 이렇게 전혀 뜻밖의 여배우들을 등장시킨 건 <하숙집 딸들>이 한 수 위다. <내게 남은 48시간>을 통해 예능 신고식을 치룬 이미숙을 필두로, 박시연, 이다해, 장신영, 윤소이 등 스타급 여배우들이 리얼버라이어티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 등장만으로도 신선했던 면면에 더해, 밤새 잠을 못이뤘다는 우려가 무색하게 예능에 첫 발을 디딘 그녀들의 활약은 존재만큼 신선했다. 예능에 나온 만큼 아낌없이 자신을 드러내겠다며 매니저보고 나가있으라고 하는 한채영부터, 자신의 컨셉을 여러 남자를 거드려, 아버지가 다른 딸들을 거느린 여장부 스타일로 자신의 컨셉을 잡은 이미숙에, 자신의 소개에 부끄러운 듯, 하지만 솔직담백하게 이혼 중이라는 사실을 꺼리낌없이 드러낸 박시연, 꽃게춤을 마다하지 않는 장신영, 거침없이 내복 패션쇼를 선보인 윤소이까지, 웬만한 예능 새내기의 포부를 뛰어넘는다. 늘 화면에서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맡던 그녀들이 꺼리낌없는 언변에서 부터, 몸개그, 결벽증 등의 성격까지 보여주는 그 솔직함이 우선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물론 여배우들의 예능 출연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2007년 종영한 <여걸 식스>를 통해 이소연, 정선경, 전혜빈 등이 당당하게 한 몫을 해낸바 있다. 그리고 이젠 mc로 더 익숙한 김원희 역시 배우 출신이다. 하지만 한동안 뜸하거나 출연을 해도 화제성을 충분히 이끌어 내지 못했던 여배우들의 예능 출연에 새로운 물꼬를 튼 건 역시나 예능의 트렌드를 주도한 나영석 피디였다. <삼시 세끼>에 이은 <꽃보다 할배> 시리즈를 성공시킨 나영석은 <꽃보다 누나> 등을 통해 고인이 되신 김자옥 배우를 비롯하여 윤여정, 김희애, 이미연, 최지우 등의 여배우들을 예능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물론 '화장실'과 관련한 웃픈 에피소드 등도 있었지만, 예능에 나오는 것이 곧 '망가짐'으로 통했던 트렌드를 '예능'을 통해 이미지를 확산내지는 상승시킬 수도 있다는 새로운 선례를 만든 것이다.

거기엔 '걸크러쉬(girl crush; 카리스마있고 자신감있는 여성 연예인에 대한 호감 트렌드)'라는 여성주도적 시류는 여배우들의 예능적 캐릭터의 한계를 또 한번 넓힌다. 덕분에 라미란은 자신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센언니'의 캐릭터를 한껏 부풀려 여걸 식스 걸그룹 편에서 걸출한 활약을 선보였다. 마찬가지로 라미란못지않은 '기'를 드러내보이고 있는 이미숙 역시 당당하게 <하숙집딸들>의 가장으로 등장하여 '러시아에서 온 결혼 여러 번 한 엄마' 가장의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설득한다. 

그녀들의 속사정 
물론 이러한 여배우들의 예능 진출이 꼭 신선한 예능 트렌드에 대한 부응이라는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채영, 이다해, 박시연, 장신영, 윤소이 등 모두 한때는 공중파 드라마의 주연을 맡던 '스타'들이었다. 하지만 결혼 등의 일신상의 변화와 더불어 서른 중반을 오가는 그녀들의 연령대는 어느덧 배우로서의 그녀들의 입지를 위태롭게 한다. '비비인형'이라 불리웠던 한채영이지만, 그녀의 최근작은 2013년 <예쁜 남자>였다. 이다해 역시 2014년 <호텔킹>이 최신작이듯, 나이와 함께 그녀들의 '드라마' 속 입지는 자꾸만 축소되거나 밀려나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미숙 역시 <질투의 화신> 속 말 그대로 '걸크러쉬'한 계성숙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그런 역할이 쉬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예능에 출연한 이서진, 하석진, 심형탁 등이 '예능'을 통해 이미지를 개선하거나 쇄신하며 그런 예능적 성과를 작품으로 이어가며 배우들의 예능 출연에 청신호가 켜졌다. 또한 라미란 등이 예능과 연기의 두 마리 토끼를 너끈히 잡으며 '소모전'이 아닌 예능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트렌드의 수혜자가 모두가 될 수는 없다. 이서진, 에릭 등은 '나영석'이란 걸출한 연출자란 배후가 확실했다. 하석진이나 심형탁은 그 자신들이 가진 뜻밖의 예능적 재미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변화시킨 케이스다. 라미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전후'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결국 '능력있는 배후'가 있거나, '개인의 특출한 혹은 예외적 능력'이란 전제 조건이 있어야 예능도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첫 선을 보인 <하숙집 딸들>은 우려되는 지점을 남긴다. 드라마를 통해 '공주'같던 모습을 보였던 그녀들의 뜻밖의 소탈하고 털털한, 심지어는 결벽증있는 예외적인 모습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만, 과연 그런 '신선함'이 <하숙집딸들>이라는 프로그램의 지속성으로까지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실제 첫 방송에서부터 방송을 이끌어가는 건 이수근과 박수홍이었고, 여배우들은 그런 그들의 진행에 따라 출연한 게스트와 같은 느낌이 강했다. 과연 그런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뚫고 매회 게스트를 맞이하며 게임을 열정적으로 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예능적 캐릭터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는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언니들의 슬램덩크 시즌1>에서도 걸그룹을 하기 전까지는 전천후 라미란조차 그 존재감이 쉬이 드러나지 않았듯이, 여배우들의 예능 적응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하숙집딸들>은 2014년 sbs에서 시도했던 그룹홈 방식의 리얼 예능 <룸메이트>의 다른 버전같다. <룸메이트> 역시 예능에 첫 선을 보인 배종옥, 이동욱 등 신선한 얼굴들로 화제를 끌었지만, 결국 게스트에 의존하는 자체 동력의 고갈로 프로그램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과연 이런 딜레마를 <하숙집딸들>이 극복할 수 있을지, 웃음 제공, 박수 부대를 넘어선 진정한 '걸크러쉬'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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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5 17:38

'감옥'은 폐쇄적 공간이다. 그러기에 그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해낸 일찌기 스티브 맥퀸의 <대탈주(1963)>에서부터, <쇼생크 탈출(1994)>까지 탈출의 감동을 다룬 영화들이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감옥'을 배경으로 시즌 5까지 이어간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도 있으니까. 그러기에 상고를 포기하고 '탈출'을 기획하기 시작한 박정우(지성 분)의 결심으로 이제 <피고인>은 본격적으로 '프리즌'을 '브레이크'하고, 바깥 세상에서 통쾌한 복수극을 벌여나가나 했다. 그런데 웬걸, 16부작의 딱 반을 넘긴 8회, 바깥 세상에서 박정우를 옭죄이던 차민호(엄기준 분)가 그의 두 발로 감옥행을 택한다. 



목숨을 담보로 한 아버지의 순애보 
여전히 박정우의 '수난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살인 혐의는 재심 공판에서 친구 강준혁(오창석 분)이 튼 '자백' 동영상으로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결국 '상고'마저 포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제 사형수 낙인과도 같은 붉은 3866번호가 박힌 푸른 죄수복을 받은 처지의 박정우지만, 시청자들은 드라마 초반 그를 바라보며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덜어졌다. 

무엇보다 기억도 잃고,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던 박정우가, 조금씩 기억을 찾아가며 비록 이젠 재심마저 포기한 사형수의 처지지만, 그러기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형이 왜 죽어요'라는 의문의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진 성규(김민석 분), 다시 찾아온 그를 보고 박정우는 자신의 딸 하연이가 생존해 있으며 그가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자백 동영상과 관련된 기억이 하나 둘씩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비록 아내는 죽었지만 딸 하연을 살리기 위해 피치못하게 자백을 해야만 했던 사실을 이젠 박정우가 깨닫게 되며, 그는 여전히 감옥에 갇힌 처지이지만 '주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주인공이 '탈옥'마저 감행하려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시청자'들을 흡인한다. 즉 박정우의 상고 포기는 그를 지켜보는 '적'들에게 '포기'라는 항복 선언을 통해 그에 대한 안심을 주려는 '페이크'인 동시에, 그 과정을 통해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자 하는 일타이피의 '작전'이다. 비록 아내는 지키지 못했지만 딸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곡진한 아버지의 순애보다. 


살인자의 일타이피 순애보 
그렇게 이제 '박정우'버전 '프리즌 브레이크'가 시작되나 했는데 박재범 작가는 보기좋게 '시청자'의 뒤통수를 치며 8회를 마무리한다. 그간 노심초사하며 죽은 형 코스프레를 하며 차명그룹 장남 행세를 하던 차민호. 하지만 그가 전혀 몰랐던 형의 여자 제니퍼 리(오연아 분)가 등장하자, 결국 예의 '사이코패스'적 행태를 되풀이하고야 만다. 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도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던 형의 애인을 흔한 '매수' 대신, 영원히 입을 다물게 만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순간 그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살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살인 과정이 중계된 핸드폰을 듣고 있던 형의 아내이자 자신의 첫사랑 나연희(엄현경 분)였다. 

살인자의 순애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충격으로 술에 취해 음주 운전을 하다 사람에게 친 아내를 대신하여 자신이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물론 운전대를 잡고, 경찰서 취조실에 들어설 때까지 차민호가 감옥으로 들어갈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수사를 강준혁이 맡은 것처럼 그는 무사히 '법망'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취조실에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그는 '법꾸라지' 대신, 자신의 발로 감옥행을 택한다. 8회 드디어 드러났듯 박정우의 아내를 죽였듯, 그리고 오연아를 죽였듯, 이제 '도발'을 포기한 박정우를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기 위해 감옥행을 택한 사이코패스 재벌이라니! 신선하다. 


8회에 이르기까지 <피고인>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무기력한 박정우 vs. 그런 박정우를 손아귀에 틀어쥔 차민호에 의해 조종된 조력자들간의 일종의 대리전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박정우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온 차민호 vs. 사건의 전말을 자각한 박정우의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감옥 속 조우는 차선호의 죽음을 둘러싸고 차선호인척 하는 차민호를 쫓는 검사 박정우의 추격전에서, 감옥에 갇힌 박정우와 차민호 조력자의 대리전을 지나, 본 게임의 시작을 알린다. 탈옥의 기회가 되는 이감까지 1주일, 그런 박정우를 죽이려 드는 차민호와의 숨막히는 대결에서 박정우는 목숨을 보전해야 탈옥의 기회가 주어지는 이중의 딜레마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정신이 제법 돌아온 박정우라니 기대해 봄직하다. 덕분에 지난 8회 동안 '사이다' 한 잔을 마다하고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은 애청자들에겐 서광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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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5 05:54

기대가 컸다. 그도 그럴 밖에 2월 5일 방영된 sbs스페셜<대통령의 탄생>은 미디어에 조작된 이미지가 지금까지 한국 현대 정치사의 비극을 양산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고 냉정하게 진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정치인의 민낯을 낱낱이 끄집어 낼 '끝장 토론'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에 대한 sbs 자사의 해결책으로 <대선 주자 국민 면접>을 들고 나왔기에 '준비된 정견' 그 이상의 대선 후보를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 될까라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연초 jtbc를 통해 방영되었던 유승민, 이재명 두 대선 후보가 참석했던 100분 토론에서 느꼈던 생생한 감흥과 전원책 패널로 인해 아쉬웠던 진솔한 모습에 대한 기대도 덧붙여졌다. 




혹시나했지만, 역시나 
하지만, 2월 12일 방영된 sbs의 <대선 주자 국민 면접>은 안타깝게도 '혹시나'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역시나'로 마무리되었다. 정치부 기자가 배석한 대담 형식을 취한 kbs와, 김호기 연세대 교수와 홍성걸 국민대 교수 등 전문가가 패널로 등장하여 심층적인 질문을 던진 mbc에 비해서도 한참 못미친 내용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대선 주자 국민 면접>에는 mc인 박선영 아나운서 외에 '국민'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패널이 함께 했다. 철학자 강신주, 소설가 김진명, 평론가 허지웅, 미학자 진중권, 전 정치인 전여옥 등이다. 이미 <외부자들>을 통해 정치 패널로 활동하는 진중권, 전여옥을 제외하면, '정치'의 현장에 있는 활약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소설가, 평론가, 그리고 철학자 등이 대부분인 패널들은 '정치'적 전문가라기 보다는 '문화적' 인물들이라는 것이 정확하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김진명 소설가에, 전 여당 정치인이었던 전여옥을 합류하여, 나름 진보와 보수의 색채를 맞추려고 한 시도는 보였지만, 그런 정치적 색채와 별개로, 과연 이들이 '국민'을 대표할 인물인가에서 부터, 대선주자를 검증할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가까지, 패널 선정에서부터 <대선 주자 국민 면접>은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전국민을 대표할 대통령을 꼭 '교수' 등의 전문가가 나서서 '검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방송이나 작품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킨 전제에서 부터, <대선 주자 국민 면접>은 이미 상당히 '예능적' 요소를 품고 시작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형식적 정파성을 넘어, 세대별, 직업별, 성향별 대표성을 위해 최소한의 모색이라도 보였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패널 설정의 첫 단추부터 한계를 드러냈다. 



물론 '예능적 요소'가 다분한 '인기 문화인'들이나, 정치 프로그램의 인기 패널들이라 해도, 프로그램의 내용이 그런 패널의 한계를 넘어선다면 <대선 주자 국민 면접>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선 주자 국민 면접>의 첫 번째 문재인 후보 편을 보면, ,<대통령의 탄생>을 통해 '이미지네이션'의 한계를 설파했던 방송의 그 잘못된 행태를 바로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란 우려가 든다. 

형식적 질문, 준비된 답안 
물론 방송은 이력서부터 시작하여, 심층 면접까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대선 주자 문재인의 면면을 접근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 문재인의 면접을 통해 시청자들이 과연 문 후보에 대해 새로운 면면을 알게 된 것이 있을까? 안타깝게도 '생각할 시간을 좀 드릴까요?'라는 질문 자체가 무색하게, 아나운서 박은영을 빗대어 일하는 여성의 육아 문제에 대한 대답마저도 문재인 후보의 입을 통해 등장한 답들은 하나같이 가즈런히 준비되어온 모범 답안처럼 들렸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질문은 있되, 답에 대한 반격이나, 설전은 없었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탄생>에서 짚은 선관위 주최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질의 응답조차, 정해진 답을 앵무새처럼 달달 외어 말하고야 마는 시스템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대선 주자 국민 면접>은 달랐을까? 도대체 다섯 명의 패널이 왜 필요한지조차 궁금해 지는 출연한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기껏해야 한 두가지의 형식적 질문을 하는 식의 질문 방식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편집'의 예술이 거쳐간 프로그램에는 사람좋은 웃음을 띠며, 이미 문재인 후보가 늘 해왔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며, 가끔 농담이나 곁듯이는 시간을 '냉정한 면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보는 '보수층'에게 '특전사' 경험의 되풀이가 설득력을 가질까? 차라리 전원책의 '자주국방' 어깃장이 아쉬울 정도였다. 



물론 그 조차도 가능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에 비해, 이제 우리는 '탄핵' 중이라는 정치적 공백에 기대어 각 방송사마다 유력 대선 주자에 대한 풍성한 '검증'의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편집'의 미덕을 살려, 질문에 대한 답만 있고, 날카로운 재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방식의 '검증'이라면,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진 정견 발표회랑 무슨 차이가 있을까? 편집에 의해, 방송사 측의 재량에 따라, 충분히 또 다른 '이미지네이션'이 가능한 '편집' 방송을 과연 '국민'이란 수식어까지 쓰기엔 너무 과대 포장이 아니었나란 생각이 든다. 그저 대선 시즌 <힐링 캠프> 특별편이라 했으면 더 어울렸을 <대선 주자 국민 면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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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3 05:03

어느날 갑자기 전 세계 하늘에 12개의 우주 비행체, 쉘이 나타났다. 혼비백산한 지구인들, 18시간마다 열리는 쉘의 문을 통해 그들과 '접선'한 지구인들은 그들이 온 이유를 알아내려 한다. 하지만 도무지 그들이 보내온 외계의 '신호'를 해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언어학자'인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 분)가 차출되는데.


2월 2일 개봉한 <컨택트>는 마치 영화 속 외계인들의 정체를 가려주는 뿌연 안개와도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외계의 실체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조차 뿌연 안개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다. 하지만 그 모호한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저 멀리서 두 곳의 등대가 반짝인다. 



첫 번째; '언어' 소통의 도구?
<컨텍트> 속 '셀'을 타고 온 외계인들은 마치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그 어떤 것'(everything else)와도 같다.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그들이 지구에 온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소통'하려 하지만, 지구와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그들과 늘 '불통'의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지구 위의 인간들이 '언어'라는 도구로 '소통'을 체계화했기에, 당연히 지구인들은 자신이 했던, 아니 자신들이 '약속'했던 바의 방식으로 다시 '외계인'들과 소통에 이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인간들 사이의 '약속'이라 했다. 하지만 그 스스로 훗날 그 '약속' 조차도 규명되지 않는 행간을 지녔다 '회의'하고야 만다. 그 '인간'의 약속된 언어, 12개의 셀의 등장한 지구 곳곳의 나라는 그들이 이뤄낸 문명의 성과로, 미디어와 과학 문명의 도움을 받아, 외계인의 도래, 그 이유를 해석하고자 한다. 

<컨택트>의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클리셰가 된 외계인들은 어떤가. 비행접시라 하는 그 외계의 물체를 타고 인간 세상의 상공에 느닷없이 등장하여,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마구 쏘아대며 '침공'하는 식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비행접시가 모로 선 모양부터, '왜곡'된 형상으로 혼돈을 준 셀은 셀의 입구를 18시간마다 기꺼이 개방하며 '소통'을 도모한다. 

하지만 '침공'하지 않는 외계인들에 대해 지구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외계의 셀이 나타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세상으로 '아노미'에 빠졌고, '폭동'과 '파괴'가 범람하며, 그 통제되지 않는 위기가 오히려 '외계인'에 대한 무력적 대응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정말 '언어'가 소통이 될까? 루이스를 찾아온 군 관계자가 언어학자인 그녀가 도움을 준 미군의 작전은 '소통'대신, 전멸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외계인과의 '소통'을 소란스럽게 다루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건 '언어'가 소통이 되지만, 불통인 인간의 관계이다. 외계인이 그 어떤 '침공'의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이미 '알량한' 인간 사회는 통제 불능이요, '소통'을 도모하기 보다는 '무기'를 앞세운(물론 그 '무기'를 앞세운 측이 군인이 지배하는 중국이요, 러시아, 쿠바이라는 빛바랜 반공주의적 선입견이 아쉽지만, 심지어 여주인공이 전해준 아내의 유언 한 마디에 결정이 뒤집히는 일인 독재 사회의 설정이라니!) 진압 작전은 '외계'라는 '이방'을 빗댄 현실 인간 세상의 아이러니한 상징이다. 마치 우리 안에 던져진 이물질에 대해 철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물원의 원숭이들처럼,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편협하고, 배타적인 존재인가를 <컨택트>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명한다. 그러기에 영화 <컨택트>은 외계와의 조우를 통한 '인간'의 투영이다. 

두 번째; 우리가 혹은 내가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어쩌면 이 문제를 위해서 먼저 '양자 물리학과 평행 우주론' 등의 물리학 이론을 접하며 머리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외계인이 주인공인 영국 드라마 <닥터 후>를 보면 차원이 겹쳐지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는데 현재의 세상에서 과거의 세상으로 이동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3차원의 세계를 살아온 우리에게 시간은 일련의 서열이지만, 그것이 양자 물리학 세계로 들어가면 차원이 확장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겹쳐지면, 마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과거'가 있듯이 그렇게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열린 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면 안갯 속의 등대가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루이스와 딸의 일련의 시간적 인연이 풀어내진다. 그를 통해 관객들은 그녀에게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으며,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딸과의 인연이 그리 길지 않았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 아빠는? 그 스멀스멀 솟은 의심인지, 질문인지에 대한 답은 영화 마지막에 설명된다. 

과연 외계의 등장과 함께 혼돈스러운 인간 세상과, 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동시에 진행되는 루이스의 병적인 혼돈, 고통은 영화 말미에서야, 영화 초반 보여준 스포의 진실을 드러낸다. 과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루이스는 언어학자로서 18시간마다 셀로 들어간다. 혹시라도 있을 지도 모를 외계와의 조우를 우려한 '인간 세상' 방식의 멸균 상태로, 갖가지 보호복으로 중무장한 그녀, 하지만 외계인과의 만남 과정에서 그녀는 '소통'은 그저 '언어'를 학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고 보호복을 벗어제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와 외계인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소통'은 무엇이었을까? 훗날 중국의 장군이 그녀를 보러왔다고 했던 그 리셉션에 걸린 외계의 언어, 그것이었을까? 지구인들은 그녀가 해독한 외계의 언어에서 '무기를 주러 왔다'는 말에 당장 '전투 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무기'의 다른 의미가 '선물'임을 재해석한다. '무기'로도, '선물'로도 해석된 마치 산타 할아버지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던 외계의 방문, 그 방문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건 '루이스'고 그건 바로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러기에 그건 '선물'이자, '무기'가 되는 것, 하지만, 그녀는 고통스러운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외계와의 소통에 자신을 기꺼이 열었듯, 그 외계가 준 '운명'의 선물에 역시나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을 연다. 



하지만 루이스 개인이 받은 '선물'과 앞서 인간 세상의 한계를 보여준 '소통'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결국 그 모든 것이 가르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인식이라는 풀 안에서 규정지어놓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열린 마음이다. 혹시나 언젠가 영화 속 외계인들처럼, 그들이 정말 선물을 들고 소통하기를 바라고 왔을 때, 아니 먼 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세계 안의 이방인들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을 둘러싼, 심지어 당연한 흐름인 시간에 대해조차, 예단과 편견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소통'과 '사랑'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깜빡깜빡 안갯속 등대불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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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10 00:12

'닭장 속에는 고양이, 야옹야옹' 그것으로 족했다. 박정우(지성 분)가 기억을 헤집어 어렵사리 찾아낸 메모리칩에도 불구하고 강준혁(오창석 분)이 내놓은 박정우의 자백 동영상으로 '사형' 판결을 뒤엎을 수 없었던 <피고인>. 6회를 달려오며 되풀이되는 박정우의 수난사는 이번 회차에도 어김없이 피해갈 수 없었다. 결국 그 동영상으로 자신이 아내를 죽였음을 받아들인 박정우. 그가 숨겨온 검은 비닐 봉지로 교도소 방 철장에 올가미를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목을 넣으려 발돋움을 할 때, 들려온 성규(김민석 분)의 나즈막한 목소리. '형이 왜 죽어요? 형이 한 것도 아닌데, 내가 한 건데' 그리고 이어진 정우만이 아는 고양이를 사달라고 조르던 딸 하연이의 노래. 죽음으로 몰린 정우에게 비친 서광이요, 도돌이표같은 정우의 수난사에 지친 시청자에게 주어진 1주일의 일용할 양식이었다. 




토네이도처럼 확장되어 가는 사건, 그리고 드러나는 진실
첫 회 거대 로펌의 회유에도 의연했던 그래서 재벌가를 향해 저돌적으로 '수사'를 지휘했던 검사로서의 활약이 무색하게, 사형 확정 판결을 기다리는 박정우의 수난은 끝이 없다. 제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 주장해 보아도, 마치 '리셋'되는 '루프'처럼 하은의 생일 날로 되돌아 가버리고 마는 그의 기억은 '설상가상'으로 '검사' 박정우에게 또 다른 '함정'이다. 스스로도 자신을 확신할 수 조차 없는 지워진 기억, 그를 옭죄어 오는 악재의 연속. <피고인>은 재심을 앞둔 기억상실증 검사 박정우의 수난사로 방영 시간의 많은 부분을 채워간다. 

이른바 호청자들 사이에서 '고구마'로 지칭되는 이런 주인공의 수난사, 그러면 채널이 돌아갈만도 하건만, 1회 14.5%를 시작으로 5회 18.6%(닐슨 코리아)까지 꾸준한 상승세다. 김상중의 명연기와 탄탄한 스토리로 탄력을 받기 시작한 2위 <역적>과의 격차도 생각보다 크다. (5회 10.5% 닐슨 코리아) 과연 '사이다'도 없이 꾸역꾸역 '고구마'만 먹는데도 호청자들의 증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피고인> 방영 시간의 대부분은 박정우의 수난사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저 수난만은 아니다. 1회였다면 아내를 죽인 혐의에 주기적 기억 상실을 겪는 박정우와 그런 그와 대립각을 보이는 형까지 죽인 사이코패스 재벌 차민호(엄기준 분)에 대한 소개, 2회는 그런 수난사에 이어 마지막 10분 캐리어를 차에 실은 범인의 얼굴, 즉 박정우를 드러내며 시청자를 그에 대한 의심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 

분명 정의로운 검사였는데, 캐리어를 싣고 마스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낸 살인 사건의 용의자, 보는 사람조차도 그에 대한 의심을 무럭무럭 키워가는 과정에, 4회의 마지막 장면에서 또 다른 용의자로 강준혁을 등장시킨다. 박정우와 함께 그의 아내 윤지수(손여은 분)를 짝사랑했던 강준혁, 이제까지 우군인 듯했던 그의 등장으로 여전한 박정우의 수난사에 대한 각도가 달라진다. 이렇듯 드라마는 박정우의 수난사를 줄기로 도돌이표를 그리는 듯 하지만, 그 도돌이표는 새로운 용의자를 등장시키며 점차 확장되어 가며 사건의 본질을 향해 간다. 마치 토네이도처럼. 이제 조금씩 커져가는 사건의 동심원은 6회 드디어 성규가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르며, 두텁게 드리웠던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이렇게 드라마는 '고구마'인 듯 하지만, 느린 듯하지만, 차곡차곡 그날의 진실을 향해 간다. 물론, 그 날의 진실 저편에 차민호라는 살인마가 존재함은 '노골적인 스포'다. 하지만 그의 위력은 압도적이고, 그에 반해 박정우는 너무도 미약하다. 심지어, 초반 가장 친한 벗이던 강준혁이 알고보니 그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 인물이었고, 이제 6회 마지막 그에게 가장 친절했던 감방 동기가 자신이 진범이라 하듯, 그가 진실에 다가가려 하면 할 수록 박정우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그의 조력자들은 차민호에 의해 죽어간다. 이 아득한 상황 속에서도 '진실'의 빛은 그럼에도 <피고인>을 다시 봐야할 가장 큰 '유인'이 된다. 

'가족'으로 얽히고 설킨 인간 군상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일반적인 장르물과 달리, <피고인>은 이젠 sbs 장르물이라고도 명명할만한 '특징'을 명확하게 드러내며 시청자들을 흡인한다. 바로 '가족'이란 '주제이다. 

<피고인>은 강직한 검사 박정우와 사이코패스 재벌 차민호의 대립 구도를 가져가지만, 그 구도를 재벌가의 비리 척결이란 일반적 구조 대신, 정의의 역할을 맡은 박정우를 '살인범'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는 극단적 장치를 등장시킨다. 생소한 장치지만 이미 우리나라에서 한때 인기를 끌었던 <프리즌 브레이크>를 통해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장치는 신선한 서사로 시청자를 솔깃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솔깃한 장치'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바로 '아내를 죽이고 아이를 유기했다는' 극단의 범죄이다. 다른 것도 아닌 가장 정의로웠던 검사가 가장 파렴치한으로 둔갑한 이 사정은 '가족'이란 문제에 예민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더할 나위없는 요소이다. 하지만 '가족'의 관련은 박정우만이 아니다. 

형을 죽인 차민호,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족 내에서 그의 처지는 분명 그가 나쁜 놈임에도 '측은지심'까지 끌어오르게 만들 정도로 안쓰럽다. 이렇게 '가족'은 <피고인>의 곳곳에서 '사연'을 피어오르게 만든다. 자신의 딸을 죽였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매달 박정우에게 10만원을 차입금으로 넣는 장모와, 조카를 찾아 교도관도 마다하지 않는 윤태수(강성민 분)의 애증의 관계도 '가족'이다. 강준혁의 모호했던 하지만 알고보니 '배신'인 처신의 이면에 드러난 또 다른 애증의 가족 관계나, 몰래 찾아보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지닌 국선 변호사 서은혜의 가족도 빠져서는 섭섭한 '혈연'의 늪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재벌가의 도덕적 아노미라는 씨실에, '가족'으로 얽히고 설킨 범죄 사건을 날실로 엵어가며 신선하면서도 친근한 장르물을 만들어 간다. 박정우의 사랑과 부정이, 차민호와 강준혁의 애증이, 그리고 서은혜의 트라우마가 <피고인>의 숨겨진 흡인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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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7.02.08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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