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억 대작, 배우 이영애의 복귀작, 이 거창한 수식어가 붙은 sbs수목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가 그 베일을 벗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첫 회 드라마를 연 것은 역사적 인물 신사임당이 아니라, 가정과 일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서지윤(이영애 분)이다.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시어머니의 말이 씨가 되듯, 이제 곧 교수 임용만을 앞둔 서지윤은 그의 지도 교수가 치적으로 내세운 안견의 금강산도에 대한 모호한 입장으로 교수의 눈 밖에 나서 하루 아침에 모든 강의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물론 인맥으로 이어진 대학에서도 발을 붙이기 힘든 처지로 몰린다. 설상가상 남편의 사업마저 부도가 나서 하루 아침에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시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거리에 나앉다시피 한 처지에 놓인다. 1회는 이런 일과 가정 모두에서 위기에 몰린 서지윤이라는 현대의 인물을 통해 역사적 인물 '신사임당'에 대한 '재고'의 여지를 풀어내고자 한다. 



신사임당을 다시 생각하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그 수많은 위인들을 제치고 아들과 함께 지폐에 까지 그 위용을 떨친 신사임당인물이다. 유교의 이상적 나라로 여겨지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뛰어난 성품과 높은 덕을 지녀 아들을 훌륭한 왕으로 키웠다는 태임을 본받겠다는 의미로 당호조차 사임당(堂)이라 지었듯이 신사임당은 유교국가 조선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오랫동안 추앙된 인물이다.  비록 허구라지만 그런 인물이 자유분방한 예술적 영혼을 가졌으며, 심지어 결혼하기도 전에 사랑하는 이를 가졌었다는 '해석'은 자칫 거부감을 불러올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상상력의 함정을 피해 가기 위해 <사임당 빛의 일기>가 선택한 것은 마치 현대에 사임당이 태어났다면 이랬을 수도 충분히 가능한 교수 자리를 앞둔 지식인 여성이자, 한 가정의 아내인 서지윤을 내세운다

하지만 실제 사임당은 아직 조선이 숭상하고자 한 유교적 가부장제가 전 사회적으로 고착화되기 전 조선 중기에 살았던 인물로 그의 아버지 대에 이어 아들이 없었던 집의 아들잡이로 오랫동안 친정살이를 할 정도의 환경에서 자란 인물이다. 또한 제 아무리 유교적 가부장제가 정착되지 않았다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회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 여성의 존재로 시, 서화에 능하여 후대 학자들의 칭송을 받을 정도의 예술가가 되었다는 것은- 제 아무리 가정적 환경이 유리하고, 호의적인 남편을 가졌다 해도, - 오늘날 우리가 누군가의 어머니, 현모양처로 추앙하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전형이 아닌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사임당 자신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신사임당도 서지윤처럼 
바로 이런 유교 사회의 틀 속에 갇힌 어머니이자,  아내를 넘어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신사임당을 해석해 내기 위해,  현대의 여성 서지윤을 불러오는 구도를 드라마는 택한다. 하지만 그런 고려는 사임당에 대한 사극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기대를 반하여 채널을 돌릴 수도 있기에 <사임당 빛의 일기>는 목요일 첫 방에 2회 연속 방영을 통해 현대로 시작하여 과거의 포문을 열며 현대의 인물 서지윤과 역사적 인물 신사임당을 잇는다.

교수가 되기 위해 기꺼이 학장의 집에 가서 가정 도우미와 같은 일을 스스럼없이 해내는 서지윤, 하지만 정작 안견의 금강산도 발표장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못한다. 하지만 또 교수직에 대한 집념은 집요해 교수 사회에서 파문을 당하고 난 뒤에도 기꺼이 학장 앞에서 무릎을 끓는다. 이는 학자 서지윤과 생활인 서지윤의 이율배반적 삶은 이후 신사임당의 고된 삶의 '복선'으로 읽혀진다. 

교수 사회의 비리를 통해 일하는 여성 서지윤을 그녀의 이상과 생활 모두에게 배반한 드라마는 그런 그녀를 '환타지'처럼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고성으로 인도하여 몇 백년이 세월을 건너 뛰어 신사임당과 조우하게 만든다. 



그렇게 오래된 일기를 통해 서지윤과 조우하게 된 어린 신사임당, 실제 그녀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당호 사임당을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사실 어쩌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인물 신사임당은 그렇게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조선 중기 안견의 그림을 보기 위해 기꺼이 담타기까지 하는 자유분방한 소녀(박혜수 분)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담타기 과정에서 만나게 된 운명적 남자 이겸(양세종 분)과의 인연을 흔한 첫 눈에 반하는 남녀 대신, 이겸은 사임당이 그린 생동감있는 그림에서, 그리고 사임당은 그런 자신의 재능과 관심을 이해하고 배려해준 은인의 관계로 절묘하게 풀어내다. 덕분에 대표적 현모양처 신사임의 감히 첫사랑이지만 재능과 관심이 이어준 '소울 메이트'처럼 사임당과 이겸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이렇게 <사임당 빛의 일기>는 연방한 1,2회 역사적 인물 사임당에 대한 신선한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과연 그 접근에 호응할지 그건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아한 이영애라는 배우의 존재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음을 1,2회의 <사임당 빛의 일기>는 증명한다. 과연 그 존재감을 넘어선 스토리와 연기력으로 생각보다 긴  30회를 완주할 수 있을지, 예단하기엔 아직은 채워야 할 빈칸이 꽤 남아 보인다. 

by meditator 2017. 1. 27. 05:11

<낭만 닥터> 후속으로 첫 선을 보인 <피고인>, 1회 14.5%, 2회 14.9%(닐슨 코리아 기준)로 순조롭게 동시간대 1위의 자리로 안착했다. 30%를 육박했던 전작의 수혜였을까? <낭만 닥터> 시청자들을 흡인할 타 채널 드라마들의 매력이 약하거나, 이질적 장르라 이동이 용의치 않은 면도 있다. <낭만 닥터>의 시청자들 중 강동주& 윤서정의 달달한 사랑 이야기에 더 집중했던 사람들은 <화랑>으로 시선을 옮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대 병원을 상대로 한 돌담 병원 팀의 통쾌한 한 판 승의 귀추에 주목했던 사람들이라면 <피고인>으로 한번쯤은 관심을 기울일 듯하다. 하지만 재미를 주지 못한다면 가차없이 리모컨을 눌러버리는 시청자들의 특성 상 전작의 의리라고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보다는 <피고인>은 장르물이지만, 그간 장르물 가운데서 인기를 끌었던 <추적자 The chaser(이하 추적자)(2012)>, <리멤버(2015)>의 계보를 이어 가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물로써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또 한 명의 전무후무한 악인, 차민호 
<별에서 온 그대>의 이재경(신성록 분), <리멤버>의 남규만(남궁민 분), 그리고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 분), <기억>의 신영진(이기우 분)를 넘어서는 사이코패스 재벌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역시 섣부른 예단은 하는 게 아니었다. 단 한 회만에 다시 전무후무한 악인이 또 한 사람 등장했다. 바로 엄기준이 연기한 <피고인>의 차민호다. 

엄기준에서 악역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kbs2의 <골든 크로스>에서 '식인 상어'라 불리는 미구계 헤지펀드 대표로 '악'의 테이프를 끊은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호연이었지만, 이제 햇수로 3년만에 다시 돌아온 그의 악역은 피를 나눈, 심지어 이름조차 민호, 선호 헷갈리는  자신과 같은 dna를 가진 쌍둥이 형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기는 커녕, 미소를 띠는 사이코패스로 단박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피고인>은 극중 주인공인 박정우(지성 분)의 서사와 거의 비슷하게 차민호의 악행을 나열하며 드라마의 동력을 당긴다. 이런 방식은 극 초반에 뺑소니 사고와 살인 사건을 등장시키며, 그 사건을 일으킨 '악'을 제시하고, 그들의 악행에 대한 분노를 드라마의 추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추적자>와 <리멤버>와 다르지 않다. 특히나, <별에서 온 그대>나, <리멈버>, 그리고 <기억> 등에서 주인공만큼이나 시선을 집중시켰던 전무후무해 보이는 악인, 거기에 재벌이라는 '공분'의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악의 축'을 확고하게 구축시킨다는 점에서 최근 인기를 끈 재벌 악인의 스토리를 재연한다. 이런 어찌보면 익숙한 재벌가 사이코패스의 서사에 있어 결국 관건이 되는 건 얼마만큼 충격적인가인데, 그 점에서 첫 회에 야구 방망이로 여성을 죽이는 것에 더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수를 권하는 쌍둥이 형을 죽인 차민호는 그 '악행'에 있어 전례에 한 수를 더한다. 

거기에 <피고인>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를 제시한다. 바로 그 자신의 형을 죽인 차민호가 그와 달리 모범적으로 그룹의 대표 역할을 맡아왔던 형 행세를 한다는 지점이다. 바로 그의 거짓된 행세와 그런 그의 거짓을 눈치채고 파고드는 박정우와 갈등이 <피고인>의 또 하나의 흥미 유발 지점이 된다.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 박정우 
그런 재벌가의 상대가 된 주인공은 검사 박정우다. '법피아'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세상에, 박정우는 우리가 정치 사회면을 통해 만나는 그런 검사가 아니다. 로펌의 스카웃 제의를 가볍게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검사, 불의를 보면 양말 바람으로 홀로 뛰어들어서라도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검사, 바로 그런 정의로운 인물이 주인공 박정우다. 

하지만 그런 그의 꼿꼿함이 부딪힌 곳은 당연히 형을 죽이고 자신의 존재를 숨긴 차민호, 첫 눈에 차민호의 거짓말을 알아챈 그의 집요한 추적은 잠에서 깬 그가 눈을 뜬 곳이 교도소라는 극한으로 그를 몰아붙인다. 마치 뺑소니를 당한 딸의 죽음을 파헤치려던 형사가 거지꼴이 되어 쫓기듯, 영재 소년이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고 그의 절대 기억으로 로펌 변호사가 되는가 싶더니 역시나 쫓기는 신세가 된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단지 다르다면, 직계 존비속의 죽음을 쫓는 형사와 변호사에서, 이제 아내와 딸을 죽인 범인이 되어 교도소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랄까? 물론 시청자들은 첫 회만에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차민호를 보았기에, 그가 누명을 썼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 알지만 마치 크레타의 미궁처럼 그 누명을 풀 길은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 비슷한 처지임에도 다른 <피고인>의 묘미이다, 



그렇게 누명이지만 미궁같은 처지의 박정우에게는 안타깝게도 또 하나의 딜레마가 있으니 그건 바로 <리멤버>의 서진우의 발목을 잡은 기억이다. <리멤버>의 서진우가 천재적인 기억을 가지고 대번에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입지전적 능력, 하지만 그 기억이 아버지처럼 '치매'를 불러오는 불리한 조건이라면, 박정우는 그와 반대로, 어떤 이유에선지 주기적으로 기억을 잃는다. 정신과 의사는 사건 당시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는 그의 범죄 심리로 인한 것이라 하지만, 거기엔 또한 어떤 음모론이 존재치않겠는가란 의심이 <피고인>의 또 더해진 관전 포인트다.

그리고 이런 박정우에게 마치 <리멤버> 이인아(박민영 분)의 현신인 듯한 정의롭지만 열정이 넘치는 서은혜(유리 분)까지 등장하면 마치 맞춤 세트처럼 조합이 완성된다. 올가미에 갇힌 주인공, 그의 곁에서 정의롭게 그를 지키는 여주인공, 그런 그들을 돈에 기반한 권력을 가지고 옭죄어 오는 사이코패스 재벌, 이 익숙하지만 여전히 솔깃한 구도를 <피고인>은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었던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처럼 교도소라는 공간을 더해 이야기의 각을 벌려간다. 
by meditator 2017. 1. 25. 15:09

역시 김은숙이다. <태양의 후예>로 최근 미니시리즈로는 언감생심 38.8%의 기적같은 시청률과 신드롬을 만들어 내더니, 처음으로 간 tvn에서 <응답하라 1998>에 필적할 만한 성과와 신드롬을 기록했다. (16회 18.78%, 응답하라 1998 20회 18.8% 닐슨 코리아 기준) 더구나 김원석 작가의 스토리텔링을 빌렸음에도 예의 김은숙 작가 작품에 언제나 따라다니던 '부실한 서사'의 약점조차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던 작가의 말처럼 자신을 뛰어넘는 경지를 선보이며, 김은숙에 대적할 자는 김은숙 밖에 없다는 명불허전의 경지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김은숙이 경지를 이뤘고, 이응복이 그 경지를 휘황찬란하게 했으며 공유가 개연성이 되었다 해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도깨비>를 통해 김은숙이 이뤄낸 성과와 아쉬운 점을 함께 짚어보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김은숙의 현세주의 
무엇보다 <도깨비>를 통해 도달한 것은 2004년 <파리의 연인> 이래 대한민국의 '사랑' 이야기를쥐락펴락해왔던 작가 김은숙의 세계관이다. 김은숙 작가가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던 <도깨비>는우리의 전래 설화였던 '도깨비'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냄과 함께, 그간 여러 작품을 통해 피력해 왔던 작가의 세계관을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명약관화하게 정립해 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첫 회부터 몸을 관통하는 '검'을 꼿고 등장했던 비운의 도깨비(공유 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홀로 900여 년을 견뎌온 그의 오랜 숙원은 자신의 몸에 꼿힌 칼을 뽑고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깨비'에게 역시나 첫 회부터 꼿혀버린 시청자들 역시 그의 '안식'을 기원함과 동시에 그것이 곧 그와의 이별이 될 것이란 슬픈 예감으로 인한 아이러니한 감정으로 16회의 종주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집착과 별리의 감정이 여느 남성 캐릭터와 달리 '도깨비'를 곡진하게 생각토록 만드는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그토록 '검'에 집착하던, 아니 영원한 안식에 14회까지 천착하던 드라마는 13회 마지막 드디어 도깨비 신부의 손을 빌러 도깨비가 자신의 몸에 뽑힌 검을 뽑고, 산화되며 끝이 나는가 싶더니 아니었다. 회차로는 3회가 남았던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지난 주 산화되는 도깨비를 보고 통곡하다시피 토해낸 울음이 무색하게 바로 다음 회 , 물론 9년만이지만 케익의 촛불이 꺼지자 등장했다. 

아니 무색한 건 도깨비만이 아니다. 도깨비 덕분에 저승 명부에서 '기타누락'되었던 지은탁(김고은 분)도, 이루어 지지 못한 사랑과 악연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던 저승사자(이동욱 분)와 김선(유인나 분) 역시 '환생'하였다. 저승사자가 내민 찾잔을 거부했던 지은탁의 기억이 명료한 것과 김선의 기억이 없는 것의 디테일한 설정 따위는 차치하고. 이들은 모두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도깨비는 기꺼이 사랑하는 이가 늙어가고 죽어가는 그 '별리'를 감수하고 이곳의 '신'으로 남기를 결정했다. 

이렇게 김은숙이 그려낸 등장인물들의 삶은 속칭, 우리 속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란 식이다. 저곳에서의 안식 대신, 쓸쓸하고 때론 외롭고 힘들지만, 사랑하는 이와 현실적인 행복을 나눌 수 있는 현실의 삶이다. 서양의 내세관과는 정반대이다.  드라마 속 김신은 아마도 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볼 쓸쓸한 여운을 남겼지만, 설화 속 우리네 도깨비가 길 가는 사람과 씨름을 겨루었다는 친근한 캐릭터를 '사랑의 전설'로 승화시켜낸 것이다. 

지극히 현세주의적 행복관은 거기에 '주체성'이 더해지며 매력이 더해진다. 영원의 안식 대신 현실의 쓸쓸한 사랑을 택한 도깨비의 선택은, 드라마 속 신이 벌여놓은 운명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승가는 길의 찾잔일 망정 자신이 선택하고야 마는 인간의 주도성을 확인한다. 그래서 기타누락자의 삶은 스스로 결정지어 마무리되고, 저승사자도, 김선도 신이 벌여놓은 운명 속에 최선을 다해 자기 삶의 주도성을 회복한다. 마치 작가 김은숙은 말하는 것과 같다.  판을 벌여놓은 것은 신이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당신들이라고. 

그리고 그 주체성의 회복은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자신감과, 여기서 행복을 얻을 것이라는 낙관성에 기초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밤을 진압한 십자가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소망이 지극이 '현세 기복'적이란 우리네 현실적 신앙관, 즉 우리네 현실적 삶의 자세와 이어진다.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도 다 현실의 후손들이 잘 되기를 비는 지극히, 어찌보면 속물적인 세계관이다. 즉 김은숙 작가의 작품 속 인물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거침없이 ppl을 과용하지만 그래도 의식은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현실에서의 삶에 충실하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그리하여 그런 자신의 노력에 따라 신이 벌여놓은 혹은 기존의 제도라는 그물망 안에서도 각자 나름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소박한' 주체성이다. <도깨비> 속 지은탁은 김신의 부에 매혹되지만 마지만 유치원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듯, 건강한 부르조아적 시민 의식의 현신이다. 그리고 그런 김은숙 작가의 세계관은 현재 자신들을 대한민국의 '건강한 중산층'이라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현대사를 이끌어 온 자신감이자, 주체성이다. 아마도 중산층이라 믿는 그 신화가 붕괴되기까지는 지속될. 



역사의, 전설의 사유화
무엇보다 <도깨비>란 드라마를 김은숙 작가의 작품 중 수미일관의 완성도를 가진, 주제 의식이 돋보인 작품으로 만든 것은 '도깨비' 설화의 현대적 해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간 일본 오니 설화의 오염으로 인해 머리에 뿔 두 개가 달린 괴물같은 형상의 도깨비 그 이전에 서민들의 삶에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기복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풍요의 신으로써의 원형말이다. 

드라마는 그것을 위해 빗자루나 밥그릇 등의 변신이었던 도깨비를 무속 신앙에서 등장했던 장수신의 형태로 불러온다. 마치 백성들의 편에 서서 왜구와 오랑캐를 무찔런던 최영 장군이 무속의 신이 되듯, 고려 시대 오랑캐를 물리치던 김신을 21세기의 도깨비로 변신시킨다. 그는 여전히 메밀밭을 사랑하고, 부를 지니고 있으며 비등의 천재지변을 주재하지만, 조울증처럼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변화를 가지며, 인간적인 면모를 지난 현대적 신으로 돌아왔다. 거기에 장수로써 다수의 사람들을 죽이며 피를 묻혔던 전과가 그의 검으로 '징죄'되는 과정과 영생으로 그는 신으로써의 권능과 불운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마치 신이 되지 못해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헤라클레스처럼. 

그런데 현대로 온 도깨비 설화가 만난 건, 예의 김은숙 특유의 로코다. <태양의 후예>에서도 그랬듯이 좀 더 전통적인 운명적 사랑은 서브 캐릭터의 서사로 양보하고, 그보다 트렌디한 서사를 주인공에서 부여하며 양수겹장으로 두둑하게 마련된 때론 운명적이지만, 때론 가장 현대적인 사랑 이야기는 고등학생과 아저씨의 만남조차 마비시켜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미성년과의 원조 교제 식 설정보다 애초에 마련된 역사로서의 서사이다. 그 옛날 이야기 속 빗자루나 요강 대신 김신은 백성들의 염원을 해결해주는 장수요, 왕의 신하였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는 적을 싸우던 전장이 아니라, 자신을 역적으로 몬 왕의 앞이었다.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동생을 왕비로 가진 왕의 앞에서 무기를 버린 채 신하로써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물론 드라마는 그의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왕의 아내로 만들어 왕과 신하인 그를 한 여자의 지아비이자, 오라비로써의 애증과 사랑의 관계로 치환한다. 또한 왕과 신하의 군신 관계를 인간대 인간의 시기와 용기로 치환한다. 즉 엄밀하게 김신과 왕여의 관계는 '사회적 제도적' 관계이지만, 그것은 왕비라는 존재가 개입하면서 개인적 감정적 관계로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작 <도깨비>를 관통하는 것은 무기력한, 하지만 비겁한 왕이었던 왕여와, 그의 신하로써 기꺼이 죽음을 택했던 김신의 '역사적' 권력의 악연이지만, 정작 도깨비 신부가 등장하며 그 서사가 비껴가며 김신과 왕여의 관계는 그들이 한 집에 살면서 인간적 관계를 통해 이미 관계의 진실이 드러나기도 전에 누그러지며, 뭉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김신와 왕여라는 역사적 제도적 문제는 김신과 왕여 각자에게 신이 부여한 '업보'로 작동한다. 그래서 그들 각자는 과거의 업을 이승에서 해소하기에 이른다. 이런 방식은 저마다의 업보를 업고, 풀고가는 불교식의 윤회론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들의 역사적 사회적 관계를 '사적, 개인적인 관계'로 풀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마도 <도깨비>를 다 보고 나서 허탈한 것은 오랫동안 쓸쓸한 삶을 이어나갈 김신에 대한 아련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벌여놓은 역사적 사회적 구도가, 결국 김신과 저승사자, 김선이라는 관계적 차원으로 축소화되는 데서 오는 허무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이런 <도깨비>를 감탄만 할 일인지. 뭔가 그럴듯하고, 아련하지만 어딘가 한편에서 껄쩍지근한, 그것이 <도깨비>를 보고 난 후의 글쓴이의 어정쩡한 감정이다. 


by meditator 2017. 1. 22. 14:12

외람되지만 딴 나라 단막극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2017년 무려 3년만에 <셜록 시즌4>가 찾아왔다. 시즌 3가 2014년이니, 햇수로만 치면 무려 3년만이다. 하지만 마치 어제 본 듯 셜록 애청자들은 열광했고, 그 짧은 3회 방영 동안 매 회의 내용을 놓고 탄성과 한숨이 오갔다. 심지어 이번 셜록 시즌이 마지막이란 '루머'에 시작도 전에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딸랑 3부작, 그것도 매 년도 아니고, 해를 건너건너 뛰고 가물에 콩나듯 하는 이 드라마를 놓고, 전 세계 셜록 드라마 팬들은 일희일비한다. 


이런 <셜록>의 예를 놓고 보면 드라마의 회차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아니 외려 3부작이란 그 감질나는 회차가, 밑천이 그다지 두둑하지 않은 이 드라마의 가치를 더 높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른다 '영드', 영국 드라마에서 4부작은 그리 낯선 장르가 아니다. <제인 에어(2006)>를 비롯하여, 제인 오스틴 <엠마(2009)> 등의 유명한 원작 소설 등이 4부작 드라마로 재탄생 되었으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05)>의 원작 소설인 <핑거 스미스> 역시 3부작 드라마로 방영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단막극'의 부흥을 고심해 온 kbs2 <드라마 스페셜>이 연작 시리즈에 이어 4부작 드라마를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행보다. 지난 해 김용수 감독의 <베이비 시터(2016,3)>가 비록 시청률면에서는 아쉬웠지만 독보적인 미쟝센으로 화제를 모았고, 이어 <백희가 돌아왔다(2016, 6)>는 4부작임에도 심지어 동시간대 타 방송사의 대하 사극을 가뿐히 누르고 시청률 10.4%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4부작 드라마의 가능성을 열어제쳤다. 

지분을 확보해가는 4부작 드라마 
이에 고무된 kbs2s는 수목 드라마 <오 마이 금비> 후속으로 다시 4부작 드라마 <맨 몸의 소방관>을 편성했다. 물론 <맨몸의 소방관>의 편성은 현재 압도적인 1위를 수성하고 있는 전지현, 이민호 스타들의 <푸른 바다의 전설>의 종영까지 시간을 벌어 다음 수목 드라마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기획인 바가 크다. 물론 그런 늘 '꿩대신 닭'인 처지는 아쉽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전작 <오 마이 금비>에 그리 낮지 않은, 그리고 동시간대 mbc의 <미씽 나인>과 드리 차이나지 않는 4회, 5.2% (닐슨 코리아)로 <맨몸의 소방관>은 제 몫을 해냈다. 

1월 12일 첫 선을 보인 <맨 몸의 소방관>은 <베이비 시터>의 실험성보다는 <백희가 돌아왔다>의 대중성은 택했다. 사고뭉치 소방관 강철수(이준혁 분)의 개성적인 캐릭터와, 그와 맞부딪치게 되는 과거의 사연을 가진 한진아(정인선 분)의 '스릴러'와 '로코'를 버무린 <맨 몸의 소방관>은 과거에 한 발을 담그되, 그것에 잠기지 않고, 두 개성있는 주인공들의 해프닝의 연속으로 '사랑' 이야기에 방점을 찍으며 진행시킨다. 

과거의 악연을 가진 주인공들, 그리고 현재에선 부유하지만 외로운 공주같은 여주인공과, 가진 것없지만 정의로운 남자 주인공의 얽혀지는 관계는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구성이다. 하지만 그 가진 것 없는 남자에게 고등학생 시절 비행 청소년이었지만 이제 개과천선한 울뚝불뚝 성질의 정의로운 소방관이란 캐릭터가 입혀지며 <맨 몸의 소방관>은 신선해진다. 특히나 실제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부딪치게 되는 억울한 사례들이 주인공 강철수의 캐릭터와 맞물려 돌아가며 드라마는 그 활기를 더한다. 


생생하고 신선한 캐릭터, 예측가능한 이야기 
하지만 <맨 몸의 소방관>의 미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주목할 것은 '공주'대접이나 받을 것같던 수십 억 재산의 상속녀 한진아를 '역동적'인 캐릭터로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어릴 적 저택에 도난 사건이 있었을 때도 어린 나이에도 악착같이 도둑을 쫓아 가던 그 '악발이' 정신은 당시 사고의 후유증으로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는 현재에서도 집요하게 사건을 추적하는 모습으로 이어지며 극의 동인이 된다. 그녀의 주문으로 그녀 앞에 반 누드 모델로 본의 아니게 등장한 강철수, 악연이 인연으로 이어지게 되는 서사는 대부분 '로코'들이 멋진 남성에 의해 '구조'되는 '공주'의 캐릭터로 소모하는 경우가 많은 한진아를 주도적 캐릭터로 승격시킨다.

덕분에 한진아는 그 작은 덩치로 위기의 강철수를 구하며 늘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던 강철수조차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 감동을 느끼게 하며, 사건의 구비구비마다, 퍼즐의 주도적 해결자로 나선다. 물론 마지막은 강철수의 죽을 힘을 다한 괴력이 그녀를 구하지만, 그건 이후 권정남(조희봉 분)에로 이어지는 강철수의 '소방관'의 사명감에 방점을 찍힌 바가 크다. 오히려 그 앞 장면,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강철수가 등장하기에 앞서 스스로 정신을 추켜세워 자신의 천식 약을 구하는 장면이라던가, 강철수와 권정남의 격투신에서 권정남의 머리끄댕이를 잡는 등 약진하는 모습인 인상적이었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4부작이란 짧은 시간 속에 사랑도 하고, 사건도 해결하려다 보니 정작 극의 모티브가 된 저택 화재 사건에 대한 해결이나, 고모인 한송자(서정연 분)와 오성진(박훈 분)의 음모는 둘러리가 된 느낌이다. 형사이지만 돈 앞에 살인 사건까지 불사하는 폭력남편 권정남과 방화범의 욕망을 거침없이 내보였던 금고털이범 오성진의 의리있는 면모 등이 4부작의 여정 속에 휘발된 부분이 아쉽다. 아마도 접근성이 떨어지는 스릴러 대신, 호응이 쉬운 '사랑 이야기'에의 강조를 택한 전략일 것이다. 그래도 4부작이라면 좀 더 신선하고 실험적인 도전을 기대해보고 싶은 건 공중파 드라마에선 무리일까? 


by meditator 2017. 1. 20. 14:36

지난 연말 27일 새로이 시작된 채널 a의 <외부자들>, 첫 회부터 내리 종편 주중 예능 1위의 기염을 토하더니, 드디어 4회만에 시청률 4%의 고지를 넘겼다. (닐슨 코리아 기준 4.395 %) 


하지만 시청률 호감도와 상관없이 이미 인기 프로그램이 된 선행 프로그램 <썰전>과 내용이나 발언의 선명성 등 여러모로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러나 이제 4회를 맞이한 <외부자들>의 냉정한 평가에 앞서 그 의의를 먼저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종편, 그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외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기에 앞서, 뜬금없지만 다시 종편 개국의 시점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이른바 '조중동' 언론이 '방송'이라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했을 때, 그 편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가 '올바른' 것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당시 채널 a의 영화 프로그램 <무비 홀릭>에 참여했던 평론가 허지웅의 경우, 그 대표적 사례로 '부역'이라며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비타협적 전선의 벽을 깨뜨린 것은 뜻밖에도 지금의 <jtbc뉴스룸>을 이끌고 있는 손석희였다. 2013년 5월 손석희는 jtbc 보도 부문 담당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jtbc 뉴스룸>의 앵커로 활약을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 2월 시작한 <썰전>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일했던 이철희 현 국회의원이 보수의 논객 강용석과 함께 등장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한 이철희에 뒤를 이어 2016년 1월 유시민이 합류했다. 

'종편의 참여가 부역이라 의심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사건이 난 그 날 부터, 현재 탄핵에 이르기까지 손석희 앵커는 <jtbc 뉴스룸>을 정론의 중심에 세웠다. 그 누구도 이젠 <jtbc 뉴스룸>의 10%를 넘보는 시청률을 '종편'의 딱지로 폄하하지 않는다. 양수겹장이라고나 할까? <jtbc 뉴스룸> 발빠르게 '사실'을 보도하면, <썰전>의 유시민은 날카로운 분석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제대로 밝히고 뚫어 주었다. 그 누구도 오늘날의 '탄핵' 정국에 <jtbc 뉴스룸>과 <썰전>이 가진 '참 언론' 의 몫에 박한 평가를 내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손석희가 jtbc를 향하고, 이철희가 합류했던 2013년은 어떤 해였을까? 바로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패배감과 좌절감이 만연했던 시절이었다. 제 아무리 부정 선거라 했어도 진 건 진거인 선거에서 그 패배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한 건 바로 방송을 통해 확장된 '조중동'의 영향력이었다. 음식점에만 가면 틀어져 있던 tv조선, 택시만 타면 하루 종일 흘러나오는 각종 종편의 정치 분석 프로그램들, 안그래도 나이든 사람들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다는 '정치'는 선거의 계절을 틈타 밀착하여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그런 종편의 파상적인 '왜곡된 공세'에 이른바 공중파조차 빼앗긴 '민주 세력'의 진지전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바로 손석희, 이철희, 그리고 유시민의 종편 행은 그런 반성의 결과물로 보아야 한다. 유시민이 누구였는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말 잘하는 사람, 논리로는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얄밉게 가차없이 상대방을 논리로 죽여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젠 <썰전>의 머리숱많은 아저씨로 아이들에게 조차 인기있는 대중의 스타가 되었다. 누군가는 정치인 유시민의 짧은 인생을 안타까워 하지만 구구히 자신을 작가로 불러달다는 한때 정치인 현 작가 유시민의 영향력은 그가 전투적인 정치인 시절의 그 몇배, 몇 십배이다. 



그런 유시민이 '팟캐스트'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2014년 7월 정의당 운영하는 팟 캐스트에 진중권, 유시민, 노회찬이 모여 정치, 시사 이슈를 토론하는  '정치 카페'를 열었다. 지난 이명박 대통령 당시 'bbk 실소유주 헌정 방송'을 모토로 김어준, 정봉주, 주진우, 김용민이 모여 시작한 <나는 꼼수다>이후 활성화된 팟캐스트의 형태였다. 당시 <팟캐스트>가 이후 그 일원이었던 김용민이 국회의원 후보가  될 정도로 당시 정국에 사회적 영향력이 컸듯이 이후 팟캐스트라는 방송 형태는 '정치적 이슈'를 전달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다. 당연히 진중권, 유시민, 노회찬의 <노유진의 정치 까페> 역시 출연자들의 박학한 사회, 정치, 역사적 지식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화제가 된들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팟 캐스트라는 방송 형태의 특징답게, 능동적 독자들만의 프로그램으로 귀결된 것이었다. 화제는 되었지만, 좀처럼 <나는 꼼수다>가 처음 발휘했던 충격파를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노유진의 정치 까페>의 출연자들은 팟 캐스트를 넘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일찌기 키보드 워리어였던 진중권 교수가 jtbc의 <속사정 쌀롱>을 비롯한 각종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을 시도했고, 노회찬 전의원 역시 <대학 토론 배틀>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대박'은 유시민 작가였다. 가장 늦게 tv에 등장한 그는, 이전의 가장 얄미운 논객을 넘어서, 목소리 큰 전원책조차 품어안는 가장 유연한 진보의 모습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매주 그가 분석한 정국은 매일의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과 함께 각종 포털에 회자된다. 덕분에, 최순실 사태에 이은 탄핵 정국에 대중은 '제대로 된' 정보와 분석을 얻을 유효하고도 확실한 창구를 확보했다. 

외부자들의 약진, 고무적으로 보아야 
바로 이런 관점에서 <외부자들>도 보아야 할 것이다. <외부자들>인기의 포인트라 할 정봉주 의원, 그는 국회의원 시절 <나는 꼼수다>에 참여하는 등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 덕에 '독방'까지 다녀오며 궃은 정치판을 경험했다. 그러던 그가 <외부자들>에 참여하여 <나는 꼼수다> 시절에 못지않는, 개그맨 저리가라 할 입담을 풀어낸다. 그런 그의 한 방있는 입담을 진중권이 논리적으로 풀어준다. 그런 그들과 함께 한때는 '보수'의 논객이었거나, '보수'의 일환이었지만, 이제는 끈 떨어진 신세가 된 그러나 여전히 그 날카로운 분석과 노련한 경험이 돋보이는 18대 국회의원이었던 안형환과 역시나 18대 국회의원이자, 박근혜 대통령 비서까지 지낸 전여옥의 합류도 볼만하다. 이 네 명의 조합이 일단 개그 프로그램 못지않게 재밌다. 그 재미에 곁들여, 기존 채널 a 식의 보수 일변도의 정치 분석을 넘어서고 있다는 지점이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이 지난 4회간의 성과이다. 



<외부자들>에선 <썰전>을 의식한 날선 입담이 오고간다. 그 과정에서 전여옥 전의원은 과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폄하를 사과하며, 그분이 돌아가신 후 그분의 회고록을 읽으며 그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토로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너무도 진솔하고 솔직하신 분이었다 뒤늦은 소감을 밝힌다. 아마도 전여옥 의원이 입에 올렸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험담을 기억하는 누군가는 이런 전여옥 의원의 뒤늦은 사과에 더 분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편의 채널 a에서 자칭 보수 패널인 전여옥의 입에서 뒤늦게 나마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탄핵'정국에서 종편조차도 '형광등 백개의 아우라'를 쓰레기통에 쳐넣고 앞서서 청와대를 흠집내기에 앞장서야 하는 '눈치 보기' 상황에서 그 조차도 호랑이의 여우 가면 뒤집어 쓰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폄하하기에 앞서 '전원책조차 구워삶는 유시민스타일'로 여유롭게 품어내며 이번 선거에서 '종편의 '반비어천가'가 울려퍼질 기회를 봉쇄해 가야할 것이다. 종편이 쳐놓은 '프레임'에 걸려 쓴 맛을 봤던 그 기억들을 적극적으로 개선해 가야 하는 것이다. 느네들의 종편이 아니라, 우리들의 종편을 위해. 그런 면에서 <외부자들>의 약진을 기대해본다. 
by meditator 2017. 1. 18. 15:25

sbs는 지난 해 신년 특집으로 <엄마의 전쟁 3부작>을 내보낸 데 이어 2017년 신년 특집으로 <아빠의 전쟁 3부작>을 마련했다. 전개 방식은 유사하다. 이상한 나라의 나쁜 엄마들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엄마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보고 대안을 모색해보던 그 방식을 <아빠의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차용한다. 1부에서 문제 아빠들의 사례를 모아보고, 2부에서 그 해법을 마련하고, 3부에서 대안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구성이다. 


지난 해 <엄마의 전쟁>에서도 다큐의 사례 중 등장한 이른바 '나쁜 엄마'의 사례를 놓고 인터넷 게시판은 갑론을박으로 뜨거워졌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특히나 2부에서 등장한 이벤트성 아빠와의 저녁 식사 해법이 방영되자, 방송인 조영구 씨네의 방영분을 놓고, '차라리 혼자 사는게 낫다'는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가족'의 일부이기도 어색한 아빠, 차라리 혼자 사는게 편하다는 아빠, 그럼에도 부득불 가장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아빠, 이 시대의 아빠, sbs스페셜이 지켜본 아빠가 도대체 어땠길래?

아름다운 야경을 가진 나라, 대한민국,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요인이 야근을 하느라 건물마다 밝혀진 불빛이라면? 다큐의 시작은 OECD 36개국 중 두번 째로 긴 노동시간, 일과 삶의 균형 지수 끝에서 3번째인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들, 아빠의 삶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평균 하루 6분, 저녁이 사라진 시대, 아빠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는 아빠
다큐가 들여다 본 아빠, 그 첫 번 째,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한다는 국제 중학교에 입학한 딸, 하지만 그 딸은 핸드폰에서 아빠의 번호를 지워버렸다. 아빠와 눈이 마주치기는 커녕 벌레보듯 피한다. 딸은 지난 5월의 사건을 원망스레 말하지만 아빠의 기억엔 그 날이 없다. 다른 아빠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방송인 조영구씨도 바쁜 스케줄에 가정을 돌볼 새가 없다. 어느새 아들과 엄마만의 라이프 사이클과 아빠 조영구씨의 라이프 사이클은 엇물린 지 오래다. 

젊은 아빠라고 나을까? 어린 아들을 둔 인천 공항 직원 부부, 삼교대 근무인 이들 부부의 만남은 아이 돌보기 육아 근무 교대식이다. 혹여 늦을까 아기띠를 둘러매고 공항에서 종종거리다 겨우 시간에 맞춰 아이를 근무가 끝난 상대에게 맡기고 다시 종종거리며 가는 일상, 연가와 휴가, 근무 그 모두는 아이 육아를 위한 돌려막기이다. 밤을 새고 돌아온 아빠는 밀린 잠 대신 아이를 돌봐야 한다. 

1부에서 보여진 이 시대의 아빠들, 좀 젊어서 아이를 함께 키운다 싶으면 그 육아에 치이거나, 그도 아니면 아이를 볼 시간도 없이 직장 업무에 쫓기거나, 아이가 철 들기 시작하면 아이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제대로 아빠 노릇을 하지 못하거나, 할 시간이 없다. 

2부에서 한 달간 아빠와의 저녁 식사라는 이벤트를 통해 풀어보려 하지만 쉽게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관계를 악화시키기조차 할 정도로 쉬이 해소되지 않은 가족 문제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아빠들은 바쁘다. 2부에서 한 직장의 두 직장인을 실험 삼아 정시 퇴근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음 날 더 일찍 출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대한민국 직장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3부 스웨덴의 아빠들과의 비교 사례에서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하루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6분이라는 사실에 믿기 힘들어 하는 모습에 대비되듯, 대한민국 아빠들은 '일'에 대한 강박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다. 

돈을 벌어야 하기에 자신이 좋다는 아이를 밀어냈던 아빠. 당연히 그 상처의 댓가는 철든 아이의 외면이나, 냉랭한 대응이다. 아빠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항변하지만,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아이의 트라우마는 좀처럼 해소되기 힘들다. 

하지만 과연 열심히 일했다는 것만이 유일한 호소가 될까? 아빠를 벌레보듯 피하는 딸, 그리고 아빠의 말끝마다 톡톡 쏘아대는 딸의 버릇없음을 따지고 들어가니, 거기엔 '가장'이란 이름의 '독재자'가 등장한다. 하루 종일 돈을 버느라 힘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돌아와 '감정을 고스란히 배설'했던 기억은 이제 아이들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아니 아빠들도 억울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아빠들이 보고 자라온 아빠들이 그랬으니깐. 아빠들의 아버지들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면 집안에서 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 그렇게 하면 되려니 했지만, 이제 아빠들은 밖에나가 돈을 버는 것도, 가정에서 아빠로 대접받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는 시대에 힘들어 한다.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건 아빠가 아니다.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다큐가 선택한 건 뜻밖에도 외국행이다. 복지 천국이라는 스웨덴으로 젊은 아빠 윤상현이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라떼 파파들, 육아 휴직 중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유모차를 끌고 여유를 즐기는 아빠, 라떼 파파를 만난 윤상현은 묻는다. 당신들은 어떻게 그리 살 수 있냐고.

뜻밖에도 돌아온 대답은 그저 부러운 외국 사례가 아니다. 스웨덴도 아이를 돌보며 행복한 여유를 즐기는 라떼 파파가 등장한 것이 불과 20여년 내외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거리에서 만난 라떼 파파의 아버지들은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 일벌레 아빠들의 악순환을 깬 것은 아빠들이 아니라, 정부와 제도였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분명 아빠들의 육아 휴직이 존재한다. 하지만 육아 휴직의 급여는 40%, 그 정도를 가지고는 아이를 돌보며 생활하는 건 불가능하다. 더구나, 아빠 외벌이 가정이라면 더더욱.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육아 휴직을 했을 경우 당하는 불이익이다. 대부분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육아 휴직 이후 직장 내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심하면 권고 사직을 당하는 현실에서 가정을 책임지는 아빠의 육아 휴직이라니! 

스웨덴은 국가가 나서서 이런 부조리한 제도를 척결했다. 육아 휴직 수당의 부족분을 국가가 충당하여, 아빠들은 육아 휴직 기간에도 경제적 곤란함을 겪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육아 휴직을 했다고 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그것이 지켜진다. 거기에 육아를 하는 부모를 위한 오픈 어린이집에서 극장까지 다양한 문화적 배려가 마련된다. 이런 제도적 뒷받침 위에 비로소 아이의 성장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아빠들의 선택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런 아빠들의 다른 삶이 아빠만 생각하면 술, 담배, TV 대신 하트 뿅뿅이 난무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내는 것이다. 

여성들이 가장 살기 좋다는 스웨덴보다 한 술 더 뜨는 건 가장 적은 노동 시간을 자랑하는 독일이다. 최고의 컨디션에서 최상의 노동이 나온다는 생각을 가진 독일의 회사는 아픈 직원이 출근하면 오히려 힐난을 듣는 분위기다. 불경기를 맞이하면 직원을 자르는 대신, 노동 시간을 줄여 모두가 조금씩 그 부담을 나눠지고 가는 것이 관례가 되고, 제도가 된 나라. 그곳의 아빠들은 장기간 노동 대신, 너무 긴 휴가 계획이 고민이다. 



결국 스웨덴과 독일의 사례를 통해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전쟁의 책임이 '아빠'들 개인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와 제도가 달라져야 아빠들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강변한다. 야근과 특근을 해야만 수당으로 적정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선 아빠 노릇은 용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정시 퇴근에 적정 임금이 된다면? 다큐는 회의적으로 답한다. 아마도 아빠들은 정시 퇴근 후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설지도 모른다고. 아이 한 명을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 갖가지 과외 활동비까지 3억을 훨씬 웃도는 돈이 필요한 대한민국에서 정시 퇴근이 법적으로 정해진다면 아마도 아빠들은 또 돈을 벌러 거리로 나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2016 <엄마의 전쟁>이 가족 간의 관계 해소를 위한 노력에 방점을 두었다면, 2017 <아빠의 전쟁>은 그 방점이 사회와 제도에 찍힌 만큼, 그 해소는 난망이다. 이미 IMF 등을 겪으며 경제적 공포가 내재화된 우리 사회의 아빠들, 그 아빠들은 가족들의 원망을 들으면서도 '돈'에 대한 강박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사회는 그런 아빠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경쟁과 불안을 고도화시키고 있다. 거기에 변화되는 가족 관계, 고착화된 가부장 의식이 가정을 위기로 내몬다. 쉬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아빠의 전쟁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2017년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by meditator 2017. 1. 16. 13:36

장르물의 전통을 정착시켰지만 늘 시청률면에서는 아쉬웠던 케이블 OCN의 드라마. 시간대를 토일요일로 바꾼 첫 작품 <384사기동대>가 참신한 주제, 매력적인 조합으로 1%의 늪에서 헤매던 OCN의 드라마를 구제했다. (16회 4.559% 닐슨 코리아) 당연하게도 그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상황, 해를 넘기며 암중모색을 하던 OCN의 새해 첫 드라마가 1월 14일 첫 선을 보였다. <보이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소리로 범인을 찾는, 바로 112 신고 센터 직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수사 드라마이다. 




<피리부는 사나이>에 이는 신선한 범죄 수사극
무엇보다 <보이스>란 드라마의 탄생과 관련하여 첫 번째 코드로 등장해야 할 것은 주연을 맡은 장혁이나, 이하나가 아니라, 연출자 김홍선이다. 그의 전작은 바로 2016년 TVN을 통해 방영된 <피리부는 사나이>, 일촉즉발의 범죄 현장에서 대화와 소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위기 협상팀과 시대가 낳은 괴물 '피리부는 사나이'와의 대결을 다루었다. <보이스>가 다루고 있는 동일한 위기의 범죄 상황을 다루되, 거기서 <피리부는 사나이>가 범죄자와 전면에 맞서는 협상팀을 다루었다면, <보이스>는 그 신고 과정의 주체가 되는 112 신고 센터를 전면에 세웠다는 점에서 이란성 쌍생아와도 같은 작품들이다. 무엇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그간 범죄 드라마 등에서 다루어 지지 않았던 직업군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소재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기업 협상 과정에서 베테랑이 된 주성찬(신하균 분)과 새내기 협상관 여명하(조윤희 분)의 사제 구도, 혹은 협업 과정과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절대 악과의 대결 구도로 극이 진행되었다. 첫 회를 연 <보이스> 역시 관계는 다르지만, 112 신고센터의 긴급 신고 전문가 강권주(이하나 분)와 지구대 경사 무진혁(장혁 분)의 남여 협업 구조로 전개될 예정으로 보인다. 첫 회 강권주와 무진혁은 무진혁 아내의 죽음을 통해 '악연'아닌 '악연'을 맺게 되고, 이 사건으로 전문가로 거듭난 강권주와, 폐인이 된 무진혁이 112 신고 센터 골든타임팀을 통해 얽히게 되며 <보이스> 수사팀의 구도가 형성된다. 과거의 악연이, 이제 현재의 협업 구도의 전제가 된다는 점에서 <피리부는 사나이>와 <보이스>는 동일한 구성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직업군과 배경이라는 점에서 <보이스>는 또 하나의 신선한 범죄 수사물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스파이 브릿리(2015)> 등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협상 전문가를 드라마로 구현했던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더 콜(2013)>을 통해 911 구조 요원만으로도 손에 땀이 차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구조 센터가 <보이스>를 통해 재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첫 회 역시나 김홍선이라는 기대에 걸맞게 드라마는 흡사 <시그널>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듯 잔인한 살인마와 쫓기는 여성, 그리고 그 가운데서 헛발질하고 마는 센터 직원이라는 '범죄'의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재연해 낸다. 그리고 3년 후 마치 3년 전의 그 사건처럼 재연되는 걸려온 신고 전화와, 그 신고 전화를 받고 골든 타임 10분 안에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든 강권주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범죄 현장으로 달려나간 무진혁을 통해 <보이스>라는 드라마의 가능성은 충분하게 제시하고도 남아보인다. 

첫 회, 우려되는 것은 
단지 첫 회를 통해 우려되는 것은 뜻밖에도 배우들이다. 흥미진진한 소재와 구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피리부는 사나이>의 발목은 잡은 것은 뜻밖에도 배우들이었다. 자타공인 연기 잘하는 배우 신하균이었지만, 그의 잘 하는 연기가 보는 시청자들에겐 너무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뻔함'과 또 다른 여자 주인공의 어설픈 감정 연기의 언밸런스가 보는 이의 집중도를 흐트러 뜨렸다. 마찬가지로 장혁은 역시나 배우 신하균처럼 자타공인 연기 잘 하는 배우이지만, 이제 그의 연기가 여전히 <추노>를 보는 듯한 기시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는데 문제가 있다. 역시나 첫 회 <보이스>에서도 잠시 생활형 인간으로 돌아온 듯 했지만 예의 연기 스타일을 재연한다. 그런 장혁의 너무도 익숙한 연기와 함께, 목소리가 중요한 이하나의 어딘가 답답한 목소리 연기가 보는 이들의 집중도를 흐트러 트린다. 

물론 <피리부는 사나이>와 <38사기동대>의 시청률 희비는 극 구성 자체의 어두움과 밝음이라는 대비되는 분위기 자체도 일조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연들조차도 뜨게 만들었던 <38사기동대>의 절묘한 캐스팅과 호연은 분명 벤치마킹해야 할 지점이다. 부디 이번 기회가 대길이가 아닌 장혁의, 늘 아쉬웠던 이하나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7. 1. 15. 15:15

2010년 밀입국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얼어붙은 땅>으로 63회 칸 영화제 시네마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바다, 최연소 칸 영화제 진출의 영예를 안고, 이어 2014년 <거인>으로 36회 청룡영화제, 35회 한국 영화평론가 협의회 신인 감독상을 받았던 김태용 감독이 2017년 새해 첫 영화로 <여교사>를 들고 왔다. 


김하늘이라는 당대 최고 여배우를 타이틀롤로 내세운 <여교사>는 하지만 김태용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라는, 그리고 배우 김하늘의 모처럼 영화 출연이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107,685명(영진위 추산)의 미진한 흥행 성적과 작품성에 있어서도 물음표를 남기며 사라져가는 중이다. 



욕망과 윤리의 경계, 그 연장선
김태용 감독의 신작 <여교사>는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전작들과 동일한 주제의 연장 선상에 놓인 작품이다.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밀입국 소년들'(얼어붙은 땅)에서 '이삭의 집 영재'(거인)으로 그리고 이제 다시 계약직 교사 효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속일 것같았던 이들은 결국 끝내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조차도 동일하다. 

비굴할 정도로 이삭의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부까지 되겠다며 착한 아이인 양 했던 영재는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데리고 온 동생으로 인해 자신이 썼던 생존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만다. 효주도 다르지 않다. 계약직 교사로 임신 포기 각서까지 썼던 효주이지만, 자신의 자리라 생각했던 과학 정교사 자리를 치고 들어온 이사장 딸에 대한 감정을 결국은 숨겨내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이 다를까? <거인>이 김태용 감독에게 올해의 신인 감독이라는 상찬을 안긴 것과 달리 똑같은 주제를 다룬 <여교사>에 대한 평이 엇갈리는 것은.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라 해야 할까? <여교사>를 보는 내내 어쩌면 애초의 시나리오는 어쩌면 화면상에 옮겨진 평범하고 둔탁해진 이야기보다 훨씬 더 섬세한 '감정'과 '욕망'의 부딪침이었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배려(?)' 혹은 이른바 궁예(?)는 보는 이의 생각일 뿐, 어쨋든 감독은 화면에 펼쳐놓은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계약직 여교사로서의 효주(김하늘 분)가 겪어야 하는 부당한 갖가지 대우를 나열하며 영화는 여주인공의 곤란한 처지를 사회적으로 풀어낸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랫동안 동거해 왔던 남자 친구와의 관계도 아슬아슬하다. 그렇게 사회적, 개인적 위기로 <여교사>는 주인공 효주를 벼랑 끝으로 밀고 간다. 

그렇게 위기의 상황에서 도화선으로 등장한 것은 이사장 딸 혜영(유인영 분),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다짜고짜 처음 찾아온 효주에게 술 김에 입을 맞춘 재하(이원근 분)다. 그 이후의 상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예측가능하다. 단지 그 폭발력과 방식의 차이일 뿐. 



사회적 존재의 파열을 욕망을 통해 펼쳐내는 것은 <B사감과 러브레터> 이래 이젠 고전이 된 방식이다. 초반의 계약직 여교사의 부당한 존재를 잔뜩 나열하며 주인공의 사회적 존재를 부각하던 영화는 혜영과 재하의 등장 이후 그 문제 의식을 갑자기 지극히 사적으로 끌어내린다. 분명 효주의 존재론적 문제는 사회적이지만, 혜영과 재하의 등장 이후 효주 자신의 문제 의식과 그 분출은 혜영과 재하라는 삼각 관계에 갖혀 지극히 사적이고, 그래서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이어진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지만, 그 사회적 존재가 살아가는 공간은 지극히 사적이며, 거기서 분출되는 감정들은 개인적이다. 하지만, <여교사>에서는 마치 사회적 존재가 이후 개인적 폭발의 물적 토대라기보다는 도구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임신 포기 각서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도장을 찍는 계약직 교사가 과연 이사장 딸에게 그리도 도발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이건 <거인>의 영재와 범태의 관계가 아니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었다 할지라도 이사장 딸인데 과연 그렇게 용감할 수 있는 계약직 여교사가 현실에 가능할까? 

혜영의 응석같은 친절에 대항한 효주의 냉담 혹은 무시는 그래서 효주의 절박함을 드러내기 보다, 그조차도 효주란 사회적 존재의 비현실성을 강화시킨다. <거인>의 영재는 아니라도, 효주같은 강심장의 계약직 교사가 가능할까? 아니 효주의 냉랭함은 <여교사>라는 영화를 따라가는데 내내 그녀의 감정을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 처음엔 그것이 의도된 감독의 새로운 캐릭터인가 싶다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리 뻣뻣한 그 캐릭터에 배우의 해석 부재인가 하며 의문 부호를 남긴다. 

현실에서 생존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여자,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희생이 강요된 여자, 그 여자가 삶의 위기에서 붙잡은 뜻밖의 열정, 하지만 그것조차도 부도수표라는 그 '클리셰'와 같은 이야기를 설득해 내기에 <여교사>는 내내 무덤덤하고, 그래서 클라이막스만 도발적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내내 냉담했던 그녀라면 마지막까지 '사랑'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철저히 혜영과 재하를 가지고 놀 만큼 일관되게 '냉혈한'이었음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교사>는 치명적인 척 하지만 상투적이고, 편의적이었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성 영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한계
바로 그 지점이다. 왜? 저토록 사회적, 개인적으로 절망에 빠진 효주가 마지막 건 희망이 '사랑'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만약에 이 영화의 주인공이 여선생인 효주가 아니라, 남자인 선생이었다면 똑같이 사랑으로 스스로 자멸하는 설정으로 가져갔을까? 왜 여교사는, 시작은 어떤 의도에서였건 그 남자 아이의 바람같은 '사랑'이라는 한 마디에 낚여서 스스로를 파멸에 빠지는 존재로 그려져야 할까? 

영화는 효주의 사적 복수로 마감하지만, 그 자해에 가까운 복수극은 마치 온 기숙사생들이 다 듣는 가운데 애절하게 러브레터를 낭송하는 B 사감의 애절한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분명 영화는 효주라는 계약직 여교사가 처한 사회적 문제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으로 사회적 의식을 고양시키며 시작하지만, 그 끝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복수로 마감한다. 물론 이것이 고립된 사회적 존재 거개가 맞게될 파국의 양상일 경우가 많다. 하지만 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여성은 하고많은 해결책 중에 하필 '사랑'에 발에 걸려 자멸하고 마는가에 대해 아쉬움을 남긴다. 



그토록 냉정했던 효주라면, 혜영에게 조차 앙칼질 수 있었던 효주라면, 재하라는 존재, 사랑에 걸려 넘어지는 대신 좀 더 냉정한 복수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효주란 사회적 존재를 지극히 사적이고 감정적인 존재로 치환해 버린 영화는, 마찬가지로 남성 영화에서 여성을 성적 존재로 소모하듯 재하란 대상을 성적 존재로 소모해 버린다. 결국 재하의 속내가 드러나지만 그건 그의 대사를 통해서지, 효주와의 만남 과정에서 재하는 그저 효주의 사랑바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효주의 감정선이 불친절하듯, 재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불친절한 것이다. 과연 이것이 마지막 폭주를 위한 감정의 숨김인지, 아니면, 애초에 의도된 구도로 끌고나가기 위한 편의적 장치였는지, 의문에 의문만이 꼬리를 잇는다. 

사실 <여교사>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6년에서 2017년까지 여배우들이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들은 모조리 부진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두고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부진이라 말할 수 있을 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부진이라기 보다는, 여성을 내세운 영화들의 주제 의식의 문제가 아닌지. 즉 대부분 박스 오피스에서 높은 순위의 영화들이 사회 구조적 문제와 환타지적이나마 그 해결에 주제를 천착하고 있는 가운데, 대부분의 여배우들을 타이틀롤로 삼은 영화들은 오히려 그 반대로 사회적 문제의 개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점에 대해서는 한번쯤 짚어봐야 할 것이다. 이런 영화도 있어야 하겠지만, 굳이 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이런 문제 의식에 천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편견의 여지가 잠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지점말이다. 
by meditator 2017. 1. 14. 16:36

이제 단 2회만을 남긴 sbs의 월화드라마 <낭만 닥터>가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 중이다.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19회 26.7%(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에 도달하며 과연 이 드라마가 30% 고지를 깨뜨릴 것인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인기있는 장르인 의학 드라마에 역시나 빠질 수 없는 강동주(유연석 분)과 윤서정(서현진 분)의 병원에서 연애하기까지 흥미로운 요소를 다 갖춘 <낭만 닥터>, 하지만 그런 흥미로운 요소를 넘어서 격동의 2016년을 넘어 2017년, 역사적 전환기에 놓인 대한민국에서 <낭만 닥터>의 인기는 그저 재밌는 병원 이야기를 넘어 시사적인 지점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그 모호했던 '낭만'의 실체가 드러나며, 그 '낭만'을 차근차근 실현해가는 '낭만닥터' 부용주를 통해 그려내는 '제대로 된 어른'의 모습이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의 시대에 더욱 상징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미담' 주인공만으론 부족한 어른되기 
첫 회부터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던 김사부의 비밀이 극이 종반을 향해 달려가며 비로소 서서히 드러났다. 거대 병원의 인기 스타였던 닥터 부용주, 그리고 그의 이름값을 보고 달려오는 환자들, 그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거대 병원, 그리고 당시 부원장이었던 도윤환(최진호 분)은 대리 수술이라는 편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런 과정에서 부용주를 '김사부'라 부르며 따르던 장현주가 죽고 부용주는 그 비리의 전모를 밝히려 했지만 그 비리를 밝히면 스텝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거라는 도원장의 협박에 부용주는 스스로 모든 것을 짊어진 채 병원을 떠났다. 

지금까지의 드라마는 이 정도의 부용주, 아니 지금의 김사부의 책임 의식만을 그려내면, '어른'으로서의 몫을 다한 것이라 칭송한다. 거기에 김사부가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병원을 깽판쳤던 강동주가 병원에 입힌 피해와 법적 판결까지 보호해 줬다면 '미담'도 이런 미담이 없다. 하지만 강은경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낭만 닥터>가 기존 강은경 작가의 작품, 그리고 기존 의학 드라마, 아니 드라마에서 한 발 더 진일보한 작품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2017년 새해에도 여전히 나날이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는 이 드라마의 이유이기도 하다. 

19회,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온 신회장(주현 분) 덕분에 폐쇄 위기에 놓인 돌담 병원을 구한 김사부. 그 과정에서 그가 그리고 있던 야심차고 비밀스러웠던 계획이 드러난다. 바로 그가 끌어모았던 응급의학, 외과 스텝들과 함께 외상전문 센터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김사부는 말한다. 신회장의 돈으로 만들어진 카지노, 그리고 그 환각의 터널 속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사건 사고로 인해 돌담 병원의 중환자실은 병상이 비기는 커녕 모자라는 병상을 놓고 우격다짐을 하는 실정이다. 돈이 만들어낸 부상자들,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그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외상 전문 센터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부담을 안고 신회장의 치료를 맡았던 김사부였던 것이다. 



이 시대 진짜 어른이 되려면 
그렇게 굴러온 돌같은 외과, 응급의학과 젊은 의사들과 함께 응급 환자 전문의 외상 센터 건립에만 매진하던 김사부가 떨쳐 일어선다. 이제는 법적 소추 기간도 지났지만 지난 시절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당시 스텝들의 안위가 걱정돼서 홀로 물러서면 된다고 생각했던 김사부, 하지만 그가 물러섬으로써 당시 부원장이었던 도윤환은 이제 거대 병원의 원장이 되어 당시의 그 시스템을 확장시켰다. 그저 나 하나만 입 닫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김사부, 그리고 당시 스텝이었던 간호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비겁'으로, 돌담병원 원장 말대로, 분명 나쁜 사람인데, 여전히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고, 심지어 그로 인해 여전히 그 피해가 되풀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미담'을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 '어른'의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눈감고, 외면했던 진실은 결국 시간이 흘러도 다시 똑같은 부조리를 낳으며 사람들을 고통에 빠지도록 만든다는 교훈을 강조하며, 진짜 어른이라면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강변한다. 그래서 19회 마지막 김사부는 돌담의 '군단'을 이끌고 거대 병원을 향한다.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당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그로 인해 늘 한 자락 '과거'라는 그림자로 어두움이 드리워졌던 김사부는 이제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김사부의 나아감은 이 드라마를 보는 부용주로 살아왔던 어른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당신들의 비겁과 부역에 이 나라가 이렇게 된 게 아니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서달라고. 
by meditator 2017. 1. 11. 13:10

거리의 시민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노후를 어떻게 보내고 싶냐고? 대부분 지금 먹고 사느라 할 수 없었던 취미 생활을 즐기는 여유로운 노후를 떠올린다. 과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직 노후를 맞이하지 않은 사람들의 천진난만했던 답을 뒤로하고 이어진 다큐, 그 어떤 지옥의 묵시록보다 처연하다. 그런데 그게 바로 2017년 노령인구 14% 고령사회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새해를 맞이한 mbc스페셜은 특별히 새해맞이 특집이라 이름을 내걸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주 <나 혼자 산다>에 이어, 이번 주 <노후, 생각해 보셨나요?>는 1인 가구 520만 시대, 노령인구 14%의 대한민국을 가감없이 진단해 보려는 시도들이다. 거리에선 촛불을 들고 희망을 소망하지만 그 희망이 닿아야 할 지면의 구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랄까? 마치 다큐판, 아니 리얼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다큐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갑남을녀로 성실하게 살아왔던 대한민국 노년의 처연한 삶을 그려낸다.  



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 블레이크 일하다 쓰러져 심장 이상을 진단받은 후 요양 급여를 받으려 하지만 신자유주의 하 영국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그는 자신의 자존을 주장하지만 그 자존이 증명되기엔 그의 병은 너무 깊었다. 아니 영국의 복지는 성실하게 살아온 노년을 보상하기엔 너무 편협하달까? 그래도 명목 상이나마 영국의 복지는 그 통과 의례를 지난다면 요양 급여를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시작은 49, 회사에서 명퇴를 하며 사회로 튕겨져 나온 중년의 끝자락에서 시작된다. 그래도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나이, 그 다음은 50대, 60대, 70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전히 먹고 살아야 하는 '먹고사니즘'은 물론 때론 '부양의 의무'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평균 은퇴 연령 53세, 그러나 늘어만 가고 있는 기대 수명은 82.2세 은퇴 후 생존하는 기간이 30여년 가까이 된다. 1인 최소 노후 생활비 99만원 부부를 기준으로 하면 160만원, 적정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225만원, 그렇게 따지면 노년에 최소한 필요자금은 5억5천만원, 적정한 필요 자금은 8억 1천만 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웬만하지 않고서는 일을 해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노년이다. 이렇게 '돈'이 드는 노년 우리의 부모님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돈이 드는 노년, 하지만 돈이 없는 가난한 노인들
다큐는 몇몇 노인들의 하루를 쫓는다. 움직이는 않는 손으로 쇼핑백을 접어가며 돈을 버는 70대, 처음부터 그가 이런 생활을 한 건 아니었다. 노년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버젓이 집칸이나 지닌 중산층이었다. 아이들도 내로라하는 대학까지 보냈다. 그러나 자식 중 한 명에게 닥친 루게릭 병, 자식의 병마는 그가 노후 자금으로 마련한 집칸을 들어먹었다. 이제 그는 노숙자 쉼터에서 살며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쇼핑백을 붙이며 자식까지 뒷바라지하는 처지다. 

공공근로로 학교 화장실 청소를 하는 노년의 여성 사례라고 다르지 않다. 사립대학을 나와 논현동에서 풍족하게 살던 전업주부, 하지만 삼십대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뜨자 그녀는 가장이 되었다. 동네 주부들을 상대로 밍크 코트를 팔고, 오십이 넘어 보험모집인을 하며 그래도 돈을 좀 만졌다던 그녀, 하지만 그 돈을 자신의 노후 자금 대신 자식들 교육비에 투자했다. 이제 자식은 커서 떠나가고, 그녀에게 남은 건 그런 곳이 있냐고 했던 비닐 하우스 단지, 공공근로의 일자리다. 

번듯한 대학이라면 고려대학을 나온 정대윤 할아버지를 따를 사람이 있을까? 대학을 나와 두 달만 벌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엘리트로 살던 할아버지, 80년대 국제 그룹 해체로 평생 직장이던 그곳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후에 집을 지어 파는 사업을 하며 돈을 모을 필요도 없이 풍족하게 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불어닥친 IMF, 두 번의 경제 위기는 그에게서 노년의 여유로움 따위를 앗아가 버렸다. 이제 월세 17만원의 임대 아파트에서 기초 생활 보장 40만원, 노령 연금 20만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 1인 최소 노후 생활비에는 한참 모자르다. 

다큐가 보여준 노년의 사례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평범하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성실하게 살아왔던 이들, 자신의 축적보다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애를 썼던 그들, 하지만 이제 노년의 그들은 '빈곤하다. 노인 빈곤율 48.4%, 0ecd 최고인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 노인들의 단골 직업 아파트 경비원, 한 달에 150만원 남짓을 벌 수 있는 아파트 경비원을 하는 인구가 23만 2천 명에 이른다. 그게 아니라면 택시 기사? 70대 김영철 어르신은 말한다. 그 나이대 할 수 있는게 경비원 아니면 택시 기사 밖에 없다고. 지하철을 이용해서 택배 기사로 일하는 70대 어르신이 두 시간을 걸려 배달하고 받은 돈은 2만원 남짓, 그 조차도 택배 업체와 나누어야 하는. 하지만 어르신에겐 80대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아쉬운 처지일 뿐. 십년을 내다보고 벌어놓은 과일 도시락 노점 점포는 하루 수입이 2만원이 안될 정도로, 노년의 벌이는 위태롭다. 



그래도 새해 소망난에 공공 근로 재계약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건강하면 다행이다. 65세 노인 인구 중 만성 질환자가 89.2%, 노인 1인당 만성 질환 평균 2.6개, 노인과 약봉지는 대한민국에선 너무 익숙한 구도이다. 그래도 정신이라도 멀쩡하면 아직은 견딜만하다. 치매라도 온다면? 하지만 노년과 치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7.1%이던 60대 치매 환자가 70대가 되면 21%로 늘어나고 80대 중반을 넘어서면 거의 1/3 수준을 넘는다. 더구나 치매로 인한 가정 파탄은 물론 입원비 등 경제적 부담도 가장 크다. 하지만 우리 노년의 치매와 병은 온전히 그 개인과 가족의 부담분이다. 

다큐는 덤덤하게 때론 처연하게 노년의 일상을 그려낸다, 그 흔한 다큐의 데코레이팅같은 외국의 사례조차 없다. 2017년 새해, 해가 바뀌었지만 하루하루 늙어가고, 그렇지만 가난하고, 할 일조차 줄어들고, 이젠 몸조차 아픈, 그러나 한 때 건설입국의 견인차였고, 새마을 운동의 동력이었으며, 홈 스윗 홈의 주역이었던 대한민국 근대사의 주인공들은 이제 병들고 가난에 시달리며 노년을 맞이한다. 그들에겐 다니엘 블레이크가 벽에 자기 이름을 쓰며 항변할 패기조차 사치이다. 

by meditator 2017. 1. 1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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