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김은숙이다. <태양의 후예>로 최근 미니시리즈로는 언감생심 38.8%의 기적같은 시청률과 신드롬을 만들어 내더니, 처음으로 간 tvn에서 <응답하라 1998>에 필적할 만한 성과와 신드롬을 기록했다. (16회 18.78%, 응답하라 1998 20회 18.8% 닐슨 코리아 기준) 더구나 김원석 작가의 스토리텔링을 빌렸음에도 예의 김은숙 작가 작품에 언제나 따라다니던 '부실한 서사'의 약점조차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던 작가의 말처럼 자신을 뛰어넘는 경지를 선보이며, 김은숙에 대적할 자는 김은숙 밖에 없다는 명불허전의 경지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김은숙이 경지를 이뤘고, 이응복이 그 경지를 휘황찬란하게 했으며 공유가 개연성이 되었다 해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도깨비>를 통해 김은숙이 이뤄낸 성과와 아쉬운 점을 함께 짚어보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김은숙의 현세주의 
무엇보다 <도깨비>를 통해 도달한 것은 2004년 <파리의 연인> 이래 대한민국의 '사랑' 이야기를쥐락펴락해왔던 작가 김은숙의 세계관이다. 김은숙 작가가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던 <도깨비>는우리의 전래 설화였던 '도깨비'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냄과 함께, 그간 여러 작품을 통해 피력해 왔던 작가의 세계관을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명약관화하게 정립해 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첫 회부터 몸을 관통하는 '검'을 꼿고 등장했던 비운의 도깨비(공유 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며 홀로 900여 년을 견뎌온 그의 오랜 숙원은 자신의 몸에 꼿힌 칼을 뽑고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깨비'에게 역시나 첫 회부터 꼿혀버린 시청자들 역시 그의 '안식'을 기원함과 동시에 그것이 곧 그와의 이별이 될 것이란 슬픈 예감으로 인한 아이러니한 감정으로 16회의 종주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집착과 별리의 감정이 여느 남성 캐릭터와 달리 '도깨비'를 곡진하게 생각토록 만드는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그토록 '검'에 집착하던, 아니 영원한 안식에 14회까지 천착하던 드라마는 13회 마지막 드디어 도깨비 신부의 손을 빌러 도깨비가 자신의 몸에 뽑힌 검을 뽑고, 산화되며 끝이 나는가 싶더니 아니었다. 회차로는 3회가 남았던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지난 주 산화되는 도깨비를 보고 통곡하다시피 토해낸 울음이 무색하게 바로 다음 회 , 물론 9년만이지만 케익의 촛불이 꺼지자 등장했다. 

아니 무색한 건 도깨비만이 아니다. 도깨비 덕분에 저승 명부에서 '기타누락'되었던 지은탁(김고은 분)도, 이루어 지지 못한 사랑과 악연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던 저승사자(이동욱 분)와 김선(유인나 분) 역시 '환생'하였다. 저승사자가 내민 찾잔을 거부했던 지은탁의 기억이 명료한 것과 김선의 기억이 없는 것의 디테일한 설정 따위는 차치하고. 이들은 모두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도깨비는 기꺼이 사랑하는 이가 늙어가고 죽어가는 그 '별리'를 감수하고 이곳의 '신'으로 남기를 결정했다. 

이렇게 김은숙이 그려낸 등장인물들의 삶은 속칭, 우리 속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란 식이다. 저곳에서의 안식 대신, 쓸쓸하고 때론 외롭고 힘들지만, 사랑하는 이와 현실적인 행복을 나눌 수 있는 현실의 삶이다. 서양의 내세관과는 정반대이다.  드라마 속 김신은 아마도 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볼 쓸쓸한 여운을 남겼지만, 설화 속 우리네 도깨비가 길 가는 사람과 씨름을 겨루었다는 친근한 캐릭터를 '사랑의 전설'로 승화시켜낸 것이다. 

지극히 현세주의적 행복관은 거기에 '주체성'이 더해지며 매력이 더해진다. 영원의 안식 대신 현실의 쓸쓸한 사랑을 택한 도깨비의 선택은, 드라마 속 신이 벌여놓은 운명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승가는 길의 찾잔일 망정 자신이 선택하고야 마는 인간의 주도성을 확인한다. 그래서 기타누락자의 삶은 스스로 결정지어 마무리되고, 저승사자도, 김선도 신이 벌여놓은 운명 속에 최선을 다해 자기 삶의 주도성을 회복한다. 마치 작가 김은숙은 말하는 것과 같다.  판을 벌여놓은 것은 신이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당신들이라고. 

그리고 그 주체성의 회복은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자신감과, 여기서 행복을 얻을 것이라는 낙관성에 기초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밤을 진압한 십자가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소망이 지극이 '현세 기복'적이란 우리네 현실적 신앙관, 즉 우리네 현실적 삶의 자세와 이어진다.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도 다 현실의 후손들이 잘 되기를 비는 지극히, 어찌보면 속물적인 세계관이다. 즉 김은숙 작가의 작품 속 인물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거침없이 ppl을 과용하지만 그래도 의식은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현실에서의 삶에 충실하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그리하여 그런 자신의 노력에 따라 신이 벌여놓은 혹은 기존의 제도라는 그물망 안에서도 각자 나름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소박한' 주체성이다. <도깨비> 속 지은탁은 김신의 부에 매혹되지만 마지만 유치원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듯, 건강한 부르조아적 시민 의식의 현신이다. 그리고 그런 김은숙 작가의 세계관은 현재 자신들을 대한민국의 '건강한 중산층'이라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현대사를 이끌어 온 자신감이자, 주체성이다. 아마도 중산층이라 믿는 그 신화가 붕괴되기까지는 지속될. 



역사의, 전설의 사유화
무엇보다 <도깨비>란 드라마를 김은숙 작가의 작품 중 수미일관의 완성도를 가진, 주제 의식이 돋보인 작품으로 만든 것은 '도깨비' 설화의 현대적 해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간 일본 오니 설화의 오염으로 인해 머리에 뿔 두 개가 달린 괴물같은 형상의 도깨비 그 이전에 서민들의 삶에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기복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풍요의 신으로써의 원형말이다. 

드라마는 그것을 위해 빗자루나 밥그릇 등의 변신이었던 도깨비를 무속 신앙에서 등장했던 장수신의 형태로 불러온다. 마치 백성들의 편에 서서 왜구와 오랑캐를 무찔런던 최영 장군이 무속의 신이 되듯, 고려 시대 오랑캐를 물리치던 김신을 21세기의 도깨비로 변신시킨다. 그는 여전히 메밀밭을 사랑하고, 부를 지니고 있으며 비등의 천재지변을 주재하지만, 조울증처럼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변화를 가지며, 인간적인 면모를 지난 현대적 신으로 돌아왔다. 거기에 장수로써 다수의 사람들을 죽이며 피를 묻혔던 전과가 그의 검으로 '징죄'되는 과정과 영생으로 그는 신으로써의 권능과 불운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마치 신이 되지 못해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헤라클레스처럼. 

그런데 현대로 온 도깨비 설화가 만난 건, 예의 김은숙 특유의 로코다. <태양의 후예>에서도 그랬듯이 좀 더 전통적인 운명적 사랑은 서브 캐릭터의 서사로 양보하고, 그보다 트렌디한 서사를 주인공에서 부여하며 양수겹장으로 두둑하게 마련된 때론 운명적이지만, 때론 가장 현대적인 사랑 이야기는 고등학생과 아저씨의 만남조차 마비시켜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미성년과의 원조 교제 식 설정보다 애초에 마련된 역사로서의 서사이다. 그 옛날 이야기 속 빗자루나 요강 대신 김신은 백성들의 염원을 해결해주는 장수요, 왕의 신하였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는 적을 싸우던 전장이 아니라, 자신을 역적으로 몬 왕의 앞이었다.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동생을 왕비로 가진 왕의 앞에서 무기를 버린 채 신하로써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물론 드라마는 그의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왕의 아내로 만들어 왕과 신하인 그를 한 여자의 지아비이자, 오라비로써의 애증과 사랑의 관계로 치환한다. 또한 왕과 신하의 군신 관계를 인간대 인간의 시기와 용기로 치환한다. 즉 엄밀하게 김신과 왕여의 관계는 '사회적 제도적' 관계이지만, 그것은 왕비라는 존재가 개입하면서 개인적 감정적 관계로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작 <도깨비>를 관통하는 것은 무기력한, 하지만 비겁한 왕이었던 왕여와, 그의 신하로써 기꺼이 죽음을 택했던 김신의 '역사적' 권력의 악연이지만, 정작 도깨비 신부가 등장하며 그 서사가 비껴가며 김신과 왕여의 관계는 그들이 한 집에 살면서 인간적 관계를 통해 이미 관계의 진실이 드러나기도 전에 누그러지며, 뭉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김신와 왕여라는 역사적 제도적 문제는 김신과 왕여 각자에게 신이 부여한 '업보'로 작동한다. 그래서 그들 각자는 과거의 업을 이승에서 해소하기에 이른다. 이런 방식은 저마다의 업보를 업고, 풀고가는 불교식의 윤회론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들의 역사적 사회적 관계를 '사적, 개인적인 관계'로 풀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마도 <도깨비>를 다 보고 나서 허탈한 것은 오랫동안 쓸쓸한 삶을 이어나갈 김신에 대한 아련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벌여놓은 역사적 사회적 구도가, 결국 김신과 저승사자, 김선이라는 관계적 차원으로 축소화되는 데서 오는 허무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이런 <도깨비>를 감탄만 할 일인지. 뭔가 그럴듯하고, 아련하지만 어딘가 한편에서 껄쩍지근한, 그것이 <도깨비>를 보고 난 후의 글쓴이의 어정쩡한 감정이다. 


by meditator 2017. 1. 22. 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