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 뜨겁다. 한 겨울의 추위도 비바람도 모여든 사람들의 열기를 식히지 못한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지만 꺼지기는 커녕, 갈수록 그 목소리는 커지고 열기는 뜨거워져만 간다. '하야'로 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하지만 과연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청와대에서 떠날 것만을 바래서 모여들었을까? 유시민 작가가 작금의 사태가 그 한 사람과 그 한 사람을 등에 업은 배후 세력의 농단만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형광등이 백 개'운운했던 방조와 부역의 결과라 정의내렸듯이, 그 한 사람과 그 배후 세력으로 대변되는, 그리고 그들에게 부역하고 방조했던 무리들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때문이라는 것이 옳바른 해석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울분과 분노의 대상이 된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일까? 이에 sbs의 2016 창사 특집 대기획이 답한다. 바로 수저 계급주의라고. 




<최후의 제국(2012)>, <최후의 권력(2013)>, <바람의 학교(2015)> 등 '창사 특집'을 통해 신선한 다큐의 실험적 시도를 거듭했던 sbs가 2016년에 들고 돌아온 것은 <수저와 사다리>3부작이다. 

권력과 제국을 탐험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교육을 실험하기 위해 제주도에 학교를 지었던 그간의 시도에 비해 개그맨 김기리를 데리로 땅을 보러다니기 시작한 그 시작은 전작에 비해 소소해 보인다. 

수저 계급주의, 걷어차진 사다리를 논하다. 
이른바 처음으로 시도된다는 리얼 땅 버라이어티 전국에서 가장 싼 땅을 사서 땅부자가 되겠다는 제작진의 초대에 응한 김기리는 산넘고 물건너 자신의 발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제일 싼 땅을 향한다. 왜 이런 우스꽝스런 무리수를 두었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초등학생 장래 희망으로 떠오른 '건물주'라는 직업(?)때문이다. 소득 상위 10%가 전체 부의 45%를 차지한 아시아에서 가장 소득이 불평등한 나라 대한민국, 95년 이래 가장 급격하게 불평등해진 나라, 그 이유 중 하나가 불평등한 '소유'로 부터 시작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대한민국이 100명의 마을이라면 그 중 72명은 손바닥만한 땅조차 없다. 땅을 가진 사람은 단 28명, 그중에서도 단 한 명에 해당하는 토지왕이 대한민국 땅의 55%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 땅은 증여와 상속을 통해 미성년을 불문하고 대물림되는 등 '세습 자본주의'를 굳힌다. 바로 이렇게 '사다리'가 걷어차진 대한민국의 현실을 리얼 땅 버라이어티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어디 소유뿐일까? 일을 해서 버는 돈보다, 돈이 돈을 버는 난라 대한민국이 그 불평등을 더한다. 그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은 '주인 의식만 있다면'을 외치는 국내 최대 치킨 프랜차이즈업체 사장님의 언더커버 보스 리얼리티이다. '닭'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사장님이 시급 백만 원을 받는 동안 아르바이트생들은 시급 7200원을 받고 있다. 그 중요한 일을 한다던 사장님이 하루 일하고 다리에 알이 배길 정도의 강도로. 그를 통해 다큐는 묻는다. 과연 7200원과 백만원의 차이를. 또한 프랜차이즈 대표 사장님이 해마다 늘어나는 사업체에 미소지을 때, imf로 회사를 짤리고 치킨 집을 개업한 또 다른 사장님은 배달인원을 둘 형편이 돼지 못해 홀로 닭튀기고 배달하느라 한겨울 동상에 화상에 상해투성이다. 과연 '주인 의식'만으로 이 다른 삶의 조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이렇게 1부에서 소유에의 불평등, 2부에서 임금 소득으로 인한 불평등을 짚어보던 다큐는 3부 <모두의 수저>를 통해  비로소 판을 벌였던 속내들 드러낸다. 정치인, 요트회사 사장, 변호사, 철거민, 싱어송라이터, 강사, 학생 등 각계 각층의 사람 8명이 모여 각자 뽑은 수저 계급에 따라 출발선이 다른 불공정 게임으로 3부가 열린다. 



불공정 게임으로 시도해본 '기본 소득' 실험 
1000만원으로 10개의 땅, 500만원으로 5개의 땅, 100만원으로 1개의 땅으로 시작된 게임, 주사위를 굴려 나온 지역을 지날 때마다 낸 땅의 주인이 거두어 들인 돈은 전반전이 끝나자, 빈익빈 부익부의 우리 사회 현실과 판박이가 된다. 1, 2부에서 다큐로 설명되었던 '불공정'한 사회가 게임을 통해 그 운용 원리가 드러나고 참여자들을 통해 적나라한 반응이 보여진다. 100만원이라는 돈으로 의욕적으로 살아보려는 흙수저들, 하지만 주사위를 던지면 던질 수록 빚이 늘어나것과 비례해 게임에의 의지도 상실해 간다. '노력'과 '주인 의식'만으로 해결될 길이 없는 구조를 불공정 게임은 단번에 설명해 내고만다. 

이어진 후반전 게임의 룰이 바뀐다. 건축비의 10%를 무조건 세금으로 걷고, 어느 정도 모여지면 그걸 골고루 나누어 주는 '기본 소득' 실험이 게임을 통해 등장한 것이다. 게임의 결과,  결국 가진 자의 것을 뺏어서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포퓰리즘' 운운하던 이준석의 반론과 달리, 게임이 끝난 후 가진 자 금수저의 재산은 줄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은수저의 재산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흙수저는 달라졌다. 저마다 주렁주렁 목에 걸었던 빚대신, 처음 받은 100만원을 유지하건, 그보다 조금 늘었건, 빚이 조금 남았건, 게임 자체를 자포자기하던 그런 분위기가 사라졌다. 누구 한 사람, 혹은 몇 명만 부자가 되는 대신, 모두가 조금씩 더 행복해 진 것이다. 

행복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다. 처음 건축비에서 10%를 거두어서 당혹스러워했던 참가자들은 세금이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늘어났지만, 그것이 게임의 룰이 되자, 자연스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금을 내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기본 소득'의 운용 원리와 그 필요성에 대해 저마다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시청자도 더불어. 

스위스에서 '기본 소득'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한다고 하자, '붐'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한동안 '기본 소득'에 대해 백가쟁명식의 토론이 벌어졌다. 그리고 냄비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sbs 창사 특집 대기획은 그 화제속으로 사라진 기본 소득을 우리 사회에 걷어차버려진 사다리를 복구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물론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2005년 종합 부동산세는 강남에 사는 35.9%에게서 평균 2%의 세금을 거두는 부의 재분배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2008년 mb 정부의 셀프 절세를 통해 부동산 정책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버렸다. 그리고 이 정부는 담배 한 갑의 세금을 강남 9억원짜리 집에 매긴 세금과 동일하게 매겼다. 

기본 소득 과연 스위스의 부결로 한 여름밤의 꿈으로 사라진 것인가? 핀란드는 내년부터 매달 70만원을 전국민에게 나누어주는 기본 소득 실험을 할 예정이다. 이미 하고 있는 곳도 있다. 석유 매장량이 풍부한 알래스카는 해마다 석유를 팔아 번 돈 중 일부를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배당금의 형식으로 나누어 주고 있다. 나미비아 역시 기본 소득 제공으로 실업률과 빈곤율을 0%로 만들었다. 인도에서는 아동들이 정상 체중을 회복했고, 진학률이 높아졌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이재명 시장의 성남시가 시행하고 있는 청년 수당과 이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노인 수당 등이 모두 기본 소득의 일환이다. 언제나 그렇듯 복지에는 꼬릿말처럼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실제 핀란드 등에서는 풍족한 실업 수당으로 인해 1,2년씩 장기 실업으로 인한 높은 실업률이 골치거리다. 맞춤형 복지냐, 기본 소득이냐의 선택과 비용의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결국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없는 사람들 배를 불리워 준다는 호혜성 시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 불공평이 그리도 문제일까? 3부에 걸친 다큐는 매회 '미친 짓'같은 시도를 보여준다. 시애틀의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 회사인 그래비티 페이먼츠의 댄 프라이스 사장은 스스로 110만 달러였던 자신의 연봉을 7만 달러로 낮추고, 직원들은 오히려 높였다. 그 결과 놀아웠다. 매출은 두 배로 늘었고, 이직율은 역대 최저가 되었으며, 만 통의 우수한 인력의 입사 지원서가 쇄도했다. 뿐만 아니라 연봉이 늘자 직원들은 너도 나도 아이를 가져 '베이비 붐'이 일어났다. 연봉만이 아니다. 디즈니의 손녀인 아비가일 디즈니는 뉴욕 상위 1%의 부호이다. 그녀는 뉴욕의 백만 장자 40여 명과 함께 자신들의 세금을 올려달라는 청원을 넣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아비가일 디즈니는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기 위한 필요 조건이라 답한다. 

이 이상적인 행위들, 하지만 3부 불공정 게임의 참가자의 말을 주목할 만 하다. 변호사인 참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도 한때 이상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누구도 민주주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기본 소득도 마찬가지다. 성인 남녀 1000 명을 대상으로 기본 소득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찬성과 반대의 비율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 소득을 위한 세금을 더 걷는 것에 대해 반대의 인원은 59.2%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물론 거기엔 현실에서 보여지는바의 '부조리'에 대한 불신도 한 몫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2016 창사 대기획>이 벌인 불공정 게임의 의의가 짚어진다. 당위론으로서의 기본 소득이 아닌, 함께 실행해보고, 짚어보는 실험으로서의 기본 소득, 게임 전과 후 계급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달라졌다. 세금에 대한 거부감 대신 돌아오는 소득에 대한 환희가 빛났다. 당위가 실험을 통해 가능성으로 변화되는 시간, 바로 2016 창사 대기획의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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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28 17:40

11월 27일로 <2016 kbs드라마 스페셜> 10부작의 '대장정'이 마무리되었다. 2016에 유일하게 만날 수 있었던 단막극 10편, 돌아보면 격세지감이다. 


2008년 3월 종영으로 사라졌던 kbs의 단막극은 2010년 5월 <kbs드라마 스페셜>이란 이름으로, 노희경 작가의 <빨간 사탕>을 가지고 화려하게 복귀했다. 하지만 토요일 밤의 11시 황금 시간대는 다음 해 일요일 밤 11시로 밀렸고, 2014년 잠시 주중 수요일 밤 11시의 고지를 확보하는가 싶더니, 결국 일요일인지, 월요일인지 모를, 즉 단막극을 보라는 건지, 출근을 위해 일찍 자라는 건지 모를 시간대 11시 55분이 방영시간이 되었다. 고군분투 끝에 금요일까지 노오력(?)해보던 <2015드라마 스페셜>은 같은 해 10월 방영분은 토요일로, 결국 2016시즌이 되면 일요일 밤으로 복귀(?)하고 만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인정 투쟁의 시간 
인정투쟁과도 같은 시간대의 전쟁만이 아니다. 회차의 전쟁으로 보자면 지난 몇 년간의 드라마 스페셜의 역사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생존사와도 같다. 그래도 처음 <드라마 스페셜>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매주 방영이었다. 그러나 2010년 24부작, 2011년 23부작에서 2014년 27부작까지 매주라는 말이 무색하게 각종 특집 등에 밀려 스무 편 남짓을 방영하고 만다. 하지만 되돌아 보면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손현주 배우 등 배우들의 단막극 회생을 위한 출연료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드라마 스페셜>에 돌아온 것은 명목상이나마 '매주' 방영 대신 '시즌제'라는 이름의 회차 감소였다. 2015년 연작제 시도까지 합쳐서 총 15부작을 방영했던 <드라마 스페셜>은 2016년 9월에 이르러서야 단 10편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 과연 2017년에도 <드라마 스페셜>이 생존할 수 있을지? 결국 일요일 밤이란 외곽 지대에서 숙명이 된 낮은 시청률, 당연한 낮은 제작비로 다음 해엔 몇 편의 단막극이 만들어 질 수 있을지? 마치 생존의 의지를 가졌지만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 시한부 환자를 보는 안타까운 심정이 바로 <드라마 스페셜> 애청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애잔한 생존사에 비해 작품의 내용으로 들어서면 입장이 달라진다. 9월 25일 드라마 극본 가작 <빨간 선생님>으로 부터 시작하여 우수작 11월 27일 <피노키오의 코>로 마무리된 10편의 단막극들은 드라마 애호가들에게는 갖가지 장르가 구비된 풍성한 밥상이었다. 또 한 편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그 시절 선생님과 학생들간의 해프닝으로 시작된 <빨간 선생님>은 뜻밖에도 시국사범 아버지 때문에 불순분자로 몰리게 된 제자를 위해 희생하는 선생님을 통해 비극의 시대를 돌아본다. 그렇게 뜻밖의 수작으로 시작된 <드라마 스페셜>은 왕따 문제를 코믹하게 풀어낸 <전설의 셔틀>, 미혼부 문제를 휴머니틱하게 풀어낸 <한 여름밤의 꿈>, 사이보그란 첨단 과학적 소재를 통해 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진 <즐거운 나의 집>, 사랑과 용서의 문제를 다룬 <평양까지 이만원>, 발칙하고 대담한 성장 스토리 <동정없는 세상>, 한 편의 단편 소설과도 같은 <국시집 여자>, 웃음의 해학을 통해 고된 삶을 논한 <웃음 실격>, 연극과 드라마의 콜라보라는 실험적 시도가 돋보인 <아득히 먼 춤>, 그리고 15년 동안 묻혀진 진실을 통해 살펴본 가족애 <피노키오의 코>까지 중첩되지 않은 주제,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들을 선보였다. 



10가지 진수성찬의 희열 
극본 공모 우수작인 <피노키오의 코>가 뜻밖의 반전을 선보였지만 '가족'이라는 주제 의식에 머물러 있는 반면, 상투적일 수 있는 스승의 은혜를 시국에 얹어 신선한 작품이 된 <빨간 선생님>처럼 수상작의 우열과 작품의 우열은 또 다른 결과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작품으로서의 단막극의 묘미를 맛볼 수 있게 해주었다. <전설의 셔틀>이나 <동정없는 세상>이 그간 <드라마 스페셜>에서 줄곧 그려왔던 성장 서사와 궤를 함께 하고, <한 여름 밤의 꿈>이 역시나 <드라마 스페셜>만의 '따로 또 같이'의 가족애적 전통을 따른다면, 동시대 청년의 삶을 다룬 <아득히 먼 춤>이 시의적이었지만 실험적 터치로 신선했다면, <평양까지 이만원>은 청년의 삶이지만 본원적 질문에 가까웠다. 빠질 수 없는 '사랑'이란 주제를 다룬 작품이 <즐거운 나의 집>과 <국시집 여자>로 두 편이었지만 두 편 모두 '사랑'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현해 내며 '사랑' 그 이상의 영역으로 드라마를 확장시킨다. 

물론 아쉬운 점도 남는다. 10편의 드라마를 통털어 보면 장르적으로 겹치는 부분도 없고, 주제 의식 면에서도 단막극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구현했다. 하지만 1년에 단 10편이라는 제한된 편수에서 오는 다룰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덕분에 <간서치 열전(2014)>, <붉은 달(2015)>와 같은 신선한 사극을 볼 수 없어 아쉬웠고, <원혼(2014)>, <라이브 쇼크(2015)> 등의 공포물의 흔적도 아쉬웠다. 무엇보다 <가만히 있으라(2015)> 와 같은 본격 사회물이 적었던 것이 아쉽다. 다양한 진수성찬을 즐긴 거 같은데 되돌아 보니 <드라마 스페셜>만의 특색있는 찬이 빠진 거 같은 서운함이랄까?



그러나 서운함은 서운함일뿐, 늘 시청률에 애달복달하여 뻔한 이야기만 돌려막는 듯한 주중 드라마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드라마 스페셜>은 마치 상업 소설에 지친 독자가 모처럼 집어든 순수 문예 창작물의 희열을 전해준다. 아마도 2015년 11월 이후 거의 1년만에 만나는 것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과연 이 '순수한' 행복의 기쁨을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나고 싶다. 공영 방송 kbs가 수신료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그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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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28 11:29

국가에서 지원을 받던 저소득층 유급 생활자였던 조앤k롤링은 에딘버러의 카페에서 어린 딸을 달래며 첫 소설을 썼다. 그리고 1997년 세상에 나온 그 소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그이후로 2007년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 이르기까지 '판타지 월드'의 지형을 바꾸며 4억부 이상의 책 판매와 7억 230만 달러의 전 세계적으로 두번 째로 높은 수익률을 달성한 2011년까지 여덟 편의 영화를 통해 마법의 세계를 통해 전 세계인을 매료시켰다. 아이들은 성장하는 마법사 해리와 함께 커나갔고, 어른들을 위한 '점잖은 표지'로 재발간을 할 만큼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독자와 관객층을 형성했다. 하지만, 2007년 <죽음의 성물>을 통해 호그와트로 가는 벽조차 구분하지 못했던 어수룩한 소년 해리는 이제 '어머니'의 보호 마법이 필요하지 않은 어엿한'마법부의 장관'이 되어 '마법'의 세계를 이끌게 될뿐만 아니라, 행복한 가정까지 꾸리게 된다. 동시에 오랜 시간 '해리'의 세계에 발을 묶였던 저자 조앤k 롤링은 더 이상 '해리'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것임을 단언한다. 해리의 세계가 해피엔딩이었어도 그보다 더한 아쉬움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돌아온 조앤k롤링
하지만 영국 여왕보다 더한 부를 지녔어도 '글귀신'을 달랠 수는 없었던가. 2013년 로버트 갤브레이스란 가명으로 <쿠쿠스 콜링>이란 탐정 소설을 통해 다시 세상에 그녀의 글을 드러냈다. 눈밝은 영국 독자들의 추적으로 결국 조앤k롤링은 '커밍 아웃'을 했고, 이어 <실크웜>을 펴낸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아이에서 성인으로 자라는 '성장'에 촛점을 맞춘 성장 판타지라면, <쿠쿠스 콜링>과 <실크웜>은 치정과 원한이 얽힌 본격 탐정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조앤k롤링은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을 감독한 피터 예이츠 감독과 손잡고 제작 및 각본가로 <신비한 동물 사전>이란 작품을 통해 '마법'의 세계에 복귀한다. 

장황하게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저자였던 조앤 k롤링의 행보를 서술했던 이유는 바로, 16일 개봉한 <신비한 동물 사전>이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핀오프(spinoff)'이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통독한 독자들에게 <신비한 동물 사전>의 주인공 뉴트 스캐맨더는 낯이 익다. 바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법 학교 학생들의 '동물학 수업'의 교재가 '신비한 동물 사전'이요, 그 저자가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 분)이기 때문이다. 뉴트뿐만이 아니다. 이번 영화에서 선보인 '신비한 동물' 중 '에럼펀트', 즉 외관이 코뿔소를 닮은 이 동물의 코뿔이 '거래 금지 품목'인 것으로 인해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등 동물 들 역시 학생들이 배웠던 그 동물들이다. 



그렇듯 영화는 '새로움'보다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기시감으로 시작된다. 마치 '단종'된 장난감 시리즈의 부활처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익숙하게 들려오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시그널은 향수처럼 관객들을 다시 그 '마법'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익숙한, 하지만 새로운 마법의 세계
하지만 영화는 영리하다. '마법'의 세계는 '마법'의 세계이되, 장소가 달라졌다. '머글'들에 둘러싸였던 영국을 떠나, '노마지'를 피해 자신을 감춘 '미국'의 '마법 세계 MACUSA(미국 마법 의회)'가 새롭게 등장한다. '머글'이란 말이 인터넷 공간에서 익숙한 용어가 될 정도로 만들었던 <해리 포터>, 그 '인간'인 머글과 '마법사'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오되, 그걸 '미국'이라는 물리적 공간으로 변화시켜, '머글' 대신, '노마지'를 등장시키고, 미국의 노마지 사회와 '공존'대신, '언더월드'를 택한 '마법부'의 선택을 등장시켜, 인간과 마법사간의 새로운 갈등의 축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내내 '볼드모트'로 상징되는 악의 마법과 '덤블도어'로 상징되는 공존의 마법사간의 대결은 이제 '인간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마법의회 대통령과 그에 반발하는 마법 안보부 국장의 대결로 이어진다. 콜린 파렐이 분했던 퍼시발 그레이브스는 조니뎁의 그란덴왈드로 변하며 <신비한 동물 사전>의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즉 책을 읽은 독자라면 기억하겠지만 그란덴왈드는 볼드모트 등장 이전의 흑마법사 중 한 명으로 한때 덤블도어의 친구였던 사람이다. 그의 등장으로 영화는 마치 <슈퍼맨 비긴즈>처럼 <해리 포터> 이전의 '마법' 세계로 <신비한 동물 사전>을 확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지만, 그의 가방이라는 '루프'를 통한 신비한 동물의 세계에서는 동물의 수호자로 거듭나는 뉴트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처음 마법 학교에 간 학생들이 마법 모자에 따라 정해지는 각자의 소속, 그 중에서 뉴트는 후플프프였다. 후플프프는 해리가 속해있던 그리핀도르나 그의 적대적 상대였던 알포이가 속해있던 슬리데린보다는 덜 주목받았던 '개성'강한 학생들의 집합체다. 또한 성장 소설이었던 <해리 포터> 대신 <신비한 동물 사전>은 동물학자 뉴트에 마법무 오러(어둠의 마법사를 잡는 직책)인 티나 골드스턴(캐서린 워터스턴 분)을 등장시켜 '청소년물'에서 '성인물'로 극의 중심을 변화시킨다. 



무엇보다 <신비한 동물 사전>인 만큼 새롭게 열린 마법 세계만큼 관심을 잡아끄는 건 '신비한 동물'들이다. 마치 마법사들이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라면, 그 슈트가 동물들이고나 할까? 초반부터 말썽꾸러기 니플러에서 부터 머트랭, 어럼펀트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오캐미, 천둥새, 그리고 옵스큐러스까지 영화 곳곳에서 마법 세계의 느낌을 물씬물씬 풍겨낸다. 새로운 캐릭터의 집요정도 빠질 수 없다. 당연히 이들 마법의 동물들을 부리는 마법에서부터, '노마지'의 기억을 잃게하는 마법 등등 그 '세계'를 꾸려가는 '마법'의 향연이 펼쳐지는 건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신비한 동물 사전>을 통해 새롭게 펼쳐진 미국판 마법의 세계, 하지만 맥락상 이어지는 <해리 포터> 속 마법의 역사, 그리고 펼쳐지는 마법 인물의 세계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조앤k롤링을 통해서 라는 점에서 무궁무진한 <해리포터> 세계의 도래를 알린다. 마치 끝없이 이어지고 확장되어지는 마블월드처럼, 책 속에 단편적으로 등장했던 신비한 동물 사전 하나만으로도 시리즈가 되듯, 앞으로 영화화될 <퀴디치의 역사>나 <음유시인 비들 이야기>처럼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시리즈로 풀어질 수 있음을 <신비한 동물 사전>은 보여준다. 책으로 <해리 포터>는 마무리되었지만 스크린에서 그 세계는 무궁할 것이라 <신비한 동물 사전>은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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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22 18:11

드디어 2016 드라마 스페셜도 그 '대미'를 향해 가고 있다. 벌써 9번 째 작품, 그 어느 때보다도 장르와 형식면에서 풍성했던 2016 드라마 스페셜, 아홉 번째 작품 <아득힌 먼춤>이야말로 드라마 스페셜이기에 가능했던, 드라마스페셜의 존재의 의의를 가장 드러낸 작품이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드라마가 시작되자마자 화면을 채운 건 마치 현대 무용처럼 난해한 몸짓으로 가득한 연극의 한 장면이다. 그 뜻모를 몸짓이 끝나고 나면, 한 예술가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신파랑, 스물 여덟살, 젊은 연극 연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안그래도 순수 연극이 동토인 이 시대에 sf물인 <로봇의 죽음>이다. 당연히 무대에 올리기도 전에 단원들은 '망했다'를 대놓고 입에 올리고, 아니 그 이전에 연극을 공연하는 단원들도 결말을 이해할 수 없는, 아니 그보다 더 심했던 것은 공연을 준비하는 내내 연출이었지만 술에 취해있거나, 잠에 취해있었던 신파랑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대한 반목과 불신이 더 컸었던 연극, 그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신파랑은 유서 한 장 없이 세상을 버렸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제 죽은 젊은 예술가를 추모하는 동문 후배들과 졸업 작품 커트라인을 통과해야 하는 작가이자 후배 최현(이상희 분)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올려질 작품<로봇의 죽음>을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에 따라 첫 공연 당시 자신이 납득할 수 없었던 <로봇의 죽음> 결말을 이제 자신의 졸업 공연이란 명목으로 다시 뜯어 고치기 위해 고민하며, 부모님의 부탁을 받고 본의 아니게 파랑의 남은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 현의 시선과, 파랑이 무대에 올렸던 <로봇의 죽음>이 '극중 극'으로 전개되며 드라마를 끌어간다. 

연극의 배경은 태양이 과열되기 시작한 먼 미래, 그 태양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 인류는 절멸하고 만다. 살아남은 건(?) 태양의 에너지를 자원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들, 하지만 인류를 절멸시켰던 태양의 열기도 그 생명을 다해가고, 안드로이드들 역시 인류와 마찬가지로 '멸종'의 길에 접어든다. 이에 류적 사망선고를 받은 안드로이드들 중 역사 기록소 소장, 행정과장, 테이터 팀장은 사멸한 인류를 통해 자신들의 방전에 대처하고자 한다. 이들은 금지된 구역에 남겨진 인류의 테이터베이스를 탐험하고, 거기서 만난 인류의 흔적에게 자신의 얼마남지 않은 에너지를 충전하여 절멸에 대응한 답을 얻고자 한다. 

안드로이드들이 인류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자신들과 달리 '유한성'의 삶을 살았던 인류가 그 유한성의 불안함을 어떻게 벗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태어날때부터 이미 죽음이 예견되어 있는 삶, 그럼에도 불안과 공포로만 점철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안드로이들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어주며 답을 구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그들의 절박한 질문에 인류가 남긴 지혜는 '춤을 추라'였다. 



이 황당한 연극의 결말, 연출가 파랑은 이를 고집했지만, 작가 현, 그리고 단원들, 후배들 중 그 누구도 이 결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추모 공연이자, 자신의 졸업 작품으로 다시 무대에 올리는 이 연극의 결말을 현은 당연히 자신의 이해할 수 있는 결말로 바꾸려 한다. 

누구나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리던 장례식 과정에서 너무도 담담했던, 아니 심지어 유서 한 장 남겨놓지 않고 죽음 파랑에 화가 났던 현은 누군가 먹으라고 줬던 개 염소를 키우며 살았던 파랑의 집을 찾으며 파랑과의 지난 일을 다시 반추한다. 

후배 현을 찾아와 함께 연극을 하자던 파랑, 하지만 그는 연극을 준비하는 내내 불성실했다. 그런 파랑을 불신했던 현과 동료들. 철거 현장이었던 조연출 슬기의 집에 찾아갔다가 파랑이 철거단원으로 일한 전력이 드러나자 그 갈등은 극에 달한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다그치는 단원들에게 꼬박꼬박 쥐어준 월급이, 브로슈어와 밥값을 위해 돈을 많이 주는 일이 필요했었다고 소리친다. 그런 그에게 슬기는 철거로 고생하는 엄마에게 조만간 월급이 나올꺼라 위로했다며 울부짖고, 철거한 돈으로 받은 월급으로 철거한 집을 고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파랑의 죽음 이후 슬기의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연극 내내 선문답같은 질문을 던진 파랑에게 현은 냉담하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 답한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후 차기작을 하자고 찾아온 그에게 야멸차게 다시 한번 도장을 찍듯 답한다. 그의 옷에 낀 머리카락을 라이터불로 지져서 끊어내듯이. 

연극 속 안드로이드들은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에너지를 나누어 얻은 '춤을 추라'는 답에 당혹스러워했지만 결국 손과 손을 맞대어 춤을 추며 방전된다. 마치 그 모습은 선사 시대 인류들이 남긴 벽화를 연상케 한다. '죽음'으로 그들은 '유한함'을 넘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예술은 영생을 얻었듯이 말이다. 먼 미래의 안드로이드들을 통해 연극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서의 본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철학적 명제에 도달한다. 



하지만 파랑이 공연했던 연극과 달리, 현실의 젊은 예술인 파랑은 좌절한다. 그가 올리고 싶은 공연을 위해, 단원들의 열정 페이 대신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정당한 열정을 위해 철거반원 일까지 감내해야 했지만 동료는 물론 관객과 소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연극을 포기할 수 없었고, 돌아온 건 함께 할 수 없는 불통, 결국 그는 홀로 쓰러져 간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쓰러지는 소리를 그 누군가 들어주길 원했던 나무처럼. 

'닿을 일 없는 각자의 궤도를 도는 사람들, 온몸으로 판독 불가의 춤을 춘다. 당신에게 닿기를 원하며'

<아득히 먼춤>은 극중 극을 통해 예술의 본질과 인간을 정의내린다. 하지만, 그 정의가 2016년으로 돌아오면 '현실'이라는 거세된 태양아래 젊은 예술가는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의 순수한 예술혼은 이해받을 수 없으며, 세상은 순수를 품을 여력이 없다. 그럼에도 예술을 포기할 수 없는 예술가는 자신의 증명을 죽음으로 밖에 해낼 수 없다. 비극적 2016년판 젊은 예술가의 초상,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파랑의 삶에 끼어든 현은 동물 보호소로 갈 운명의 파랑의 개를 구해내듯, 파랑의 연극을 그의 의도대로 무대에 올린다. 아득히 멀었을 뿐, 닿을 수 없었던 건 아니다. 

예술과 존재, 그리고 그걸 풀어나가는 sf형식의 전위적 연극과, 초라한 현실, 그리고 주인없는 파랑의 공간이 상징적으로 엇물린 <아득히 먼 춤>은 드라마로서는 참 '아득'하다. 하지만, 그 '아득'함이야말로 드라마 스페셜만이 해낼 수 있는 당위이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 익숙한 이야기, 뻔한 주제를 말해야 하는 '드라마'라는 대중적 공간에서, 가장 철학과 현실에 대한 심오한 주제와 형식을 선보인 <아득히 먼 춤>은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던 그 분의 취미가 회자되는 이 시점에 대중의 눈높이에 안주하지 않는 이 실험적 도전으로서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낸다. 1.3%의 <아득히 먼 춤> 이야말로 아무도 없는 숲에서 홀로 쓰러져 가는 나무요, 닿을 길없는 궤도를 도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판독 불가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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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21 16:08

드라마계에는 공공연하게 '버리는 카드'란 말이 통용된다. 적지않은 비용이 투자된 드라마에 '버리는 카드'란 말은 애초에 어불성설이지만, 상대작이 워낙 압도적 위용을 드러낸다면, 그에 상대하는 경쟁사들은 무모하게 붙어서 처절하게 터지느니 차라리 누가 보기에도 '버리는 카드'같은 드라마를 편성하여 무안함을 덜자는 '보신'의 전략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새로이 시작되는 공중파 3사의 수목 드라마이다. 


sbs의 신작 전지현, 이민호 주연의 <푸른 바다의 전설>에 누가 감히 도전장을 내밀겠는가? 이에 kbs는 어린 금비를 여주인공으로 내세웠고, mbc는 주연이 처음인 신인들을 앞세웠다. 결과도 예상대로 였다. 푸른 바다의 전설이 첫 회부터 16.4%(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로 치고 나간 반면, 그나마 금비 역의 허정은과 아빠 역의 오지호의 뜻밖의 '캐미'가 5.9%(닐슨 코리아 전국)의 양호한 결과를 도출했다. 반면에 mbc의 신인들은 3.3%(닐슨 코리아 전국)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혹자는 차라리 조용히 망해서 사라지면 이런 드라마가 있었는 줄 몰라 주인공들에게 부담이 적을 것이라 하지만, 2회까지 마친 <역도 요정 김복주>더러 조용히 사라지라 하기엔 그 '청춘의 서사'가 아깝다. 



물론 처음부터 <역도 요정 김복주>가 볼만했던 건 아니다. 1회 시끌벅적하게 드라마를 연 것은 체육대학 학생들이다. 한얼 체대 그리고 거기에 역도부와 리체부의 알력으로 드라마는 시작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역도부라는 이유만으로 학교 행사만 있으면 의자를 날라야 하는 역도부의 수모로 시작되었다는게 더 정확할까? 그리고 그 역도부에는 '역도'라는 종목으로 연상되는 체형과는 좀 다른 체형을 가진 꺽다리 김복주(이성경 분)란 체대 2학년 학생이 있다. 김복주의 전국 체전 우승이란 영광도 잠시 역도부의 일과는 '리듬 체조' 선수들의 운동에 방해되지 않게 의자를 나르고 정리하는 '수모'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수모는 세탁실에서의 두 운동부의 알력과 힘겨루기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본의아니게 힘을 쓴 김복주의 사과와 이어진 행운의 운동복 실종 사건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김복주를 둘러싼 해프닝 한 편으로 이 드라마의 또 한 명의 주인공 수영부 정준형(남주혁 분)의 되풀이되는 스타팅 실수와 그 실수로 인해 의기소침한 준형의 일상이 엇갈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세탁실 빨래 도둑을 쫓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쫓는 사람과 쫓기는 변태로 조우하게 되는데. 

이 장황해보이는 1회, 하지만 학교에서 인정받는 운동부와 그렇지 못한 운동부의 알력과 애환은 언젠가 보았던 '운동' 드라마의 데자뷰처럼 느껴지고, 매번 경기에만 나가면 실수를 되풀이 하는 에피소드 역시 어디선가 본듯하다. 꼭 모든 이야기들이 신선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청춘 드라마의 첫 회라기엔 어쩐지 맥이 빠지는 출발인 것이다. 



2회, 청춘의 서사가 비로소 빛을 발하고 
하지만 2회로 들어선 드라마는 1회에 왜 그랬어? 라는 반문이 나올 정도로 비로소 이 드라마가 본래 내려고 했던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도무지 호감이라고는 쉽게 느껴지지 않던 빽빽거리던 <치즈 인더 트랙>의 이상한 백인하같던 이성경도 2회에 들어서니 키가 자랐지만 여전히 어릴적 뚱이었던 그 아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자의식에 쪄들어 겉멋만 들려보였던 준형도 김복주가 뚱이인 걸 알게 되면서 뚱이와 함께 학교를 다니던 그 유악한 아이의 면모를 찾아간다. 씩씩한 소녀 복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외롭고 고통스러운 하지만 이제 뚱이 복주를 만나 어린 시절의 그 청량함을 되찾아 가는 준형과 그들과 맞물려 들어가는 체대생들의 일상이 드디어 공감가게 그려지기 시작한다. 

뚱이라 부르는 준형이 그저 부담스럽기만 하던, 하지만 거침없이 스쿠터를 타고 바쁜 아버지 대신 치킨 배달을 하는 여전히 '소녀'인 복주가 우연히 자신을 '여자' 취급해주는 재이(이재윤 분)을 만나 설레이며 드라마는 청춘 드라마로서의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늘 침잠해 있던 준형이 복주를 만나며 장난꾸러기 소년이 되는 그 시점부터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렇게 복주와 준형은 이제 저마다 청춘의 입문 과정에 서서히 한 발씩을 내딛으며 드라마도 함께 빛을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청춘의 빛만 있는 건 아니다. 학교 행사를 위해 그리 의자를 날랐건만 돌아오는 건 운영비 30% 삭감으로 인해 교수와 코치의 눈물겨운 사연과, 태릉에서 돌아온 시호(경수진 분)의 불안한 연습 등은 성과 중심주의 엘리트 체육정책 아래 힘겨워하는 체육대생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전 여친, 남친이던 그들이 일상에서 웃고 떠들지만 각자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를 잔잔하게 <역도 요정 김복주>는 띠운다. 



운동을 매개로 한 드라마가 어떤 것이 있나 찾아보면 <마지막 승부(1994)>에서부터 꽤 많다. 그 중 체대생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체대생은 아니었지만 태릉 선수촌에 입소한 운동 선수들의 청춘담을 그렸던 홍진아, 홍자람 자매 작가와 이윤정 피디를 청춘물의 대명사로 만들어 준 <태릉 선수촌>이 <역도 요정 김복주>와 가장 흡사한 구조를 지녔다. 그래서 <태릉 선수촌>을 그리워했던 시청자들은 체육대학이란 공간적 배경만으로 <역도 요정 김복주>가 그못지 않은 청춘과 우정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첫 회 보여준 상투적인 에피소드는 그 기대마저 무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진 그 누군가가 있어 2회를 본다면, <태릉선수촌> 못지 않은 2016년찬 청춘서사가 도래할 것이란 예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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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18 05:31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세상에 존재해 줘서 고맙다는 ost도 마무리되고, 화장실에서 만난 소녀들은 서로 니가 울었네, 왜 울었네 하며 영화 속 감상에서 벗어난 여유로운 감상을 서로 전한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모처럼 '감동'스럽게 눈물을 흘려 그런 소녀들의 농담에 함께 미소지을 수 있었는데, 되돌아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불화했던 아버지와의 때늦었지만, 그래도 더 늦지 않은 화해라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거기에 시한부 주인공의 인생 돌아보기라니 더더욱 익숙한 이야긴데, 무엇이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신선한 감독으로 가슴을 울리게 만들었을까? 하늘 아래 새롭지않은 '죽음'과 '가족', '친구', '연인'이라는 이야기를 절묘하게 버무려 낸 '가와무라 겐키'의 원작과 그 잔잔한 이야기를 블록버스터급으로 전개시킨  배가시킨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연출 덕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사물이 관계가 되는 시대
서른 살 우편 배달부 나(사토 타케루분)는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던 도중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을 잃는다. 잠시 후 병원에서 그에게 내려진 건 뇌종양 판정, 설상가상으로 그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죽음의 선고'였다. 아직 자신의 죽음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나타난 또 다른 그. 죽음의 사자이거나, 악마이거나 상관이 없다는 그는 나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씩을 없애겠다고 말한다. 

영화의 구도는 흡사 <파우스트>에서 노쇄한 늙은 학자 파우스트 앞에 나타나 '젊음'을 가지고 '딜'을 하는 악마 메피스토텔레스와 같다. '욕망'이 봉쇄된 인간, 그 앞에 나타나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겠다는 악마, 언제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약하니, <고양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속 나도 냉큼 파슬리를 없애겠다면 '그'의 딜에 응답하자, 그런 '나'의 하찮은 요구와 달리, 첫 날 하루의 생명의 댓가로 전화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은 영화, 그리고 다음 날은 시계, 그리고 드디어 고양이를 없어지려 한다. 

왜 전화로 부터 시작하여, 영화, 시계, 그리고 고양이였을까? 물론 영화 속 이들 '사물' 그리고 '동물'은 그저 '사물'이나 '동물'이 아니라 세상에서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왔던 증거들이다. 하지만 하고많은 물건 중에서 왜 저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영화 속 '나'를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우편 배달부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그가 스쳐가는 사무실 속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는 책상, 그리고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밖에 없다며 무심히 말하는 상사의 전화 통화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프리터' 족을 상징한다. 프리터족은 freearbeiter(프리 아르바이터)의 일본식 합성어로 장기 불황을 겪는 일본에서 등장한 이 일 저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사는 젊은 세대를 뜻한다. 영화 속 나는 대학을 다녔고, 영화를 좋아했던 청년이지만, 지금은 집을 나와 살며 우편배달부로 일한다. 그의 직업이 영화 속에서 특별한 의미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다. 강의실에서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걸 알아챈 눈 밝은 '나'로 인해 영화 이야기로 말문을 트게 된,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영화 속 대사로 대화를 나누는 친구 '타츠야' 역시 현실은 비디오점 직원인지, 알바인지다. 여자친구라고 다를까? 그와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며 젊은 꿈을 다졌던 그녀의 현실은 극장 윗층에 살며 영화를 걸고, 표를 판매하는 극장 직원이다. 그들은 한때 어떤 꿈을 가졌을지 몰라도, 현실은 꿈을 발현하는 것이라 보기 힘든 존재로 살아간다. 

그런 '프리터'족의 세대를 상징하는 물건이 '핸드폰', 영화로 영화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굳이 '프리터'족이라는 조건을 걸지 않아도, 현대의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물'이다. 우연히 잘못걸려온 전화로 만남을 가지게 된 그녀, 하지만 그와 그녀가 제일 편한 건 '전화 속'에서이다. 그와 그녀,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타츠야'의 매개가 된 건 '영화', 하지만 여전히 타츠야와 츠타야를 헷갈리는 나처럼, 그들의 관계는 그닥 진전이 없거나, 현실 속에서는 단절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 '단절'적이거나, '제한적' 관계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고립'적 삶을 무의식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하루를 보낸 그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건 돌아온 집에서 반기는 고양이 뿐. 한때 가축 동물의 대명사였던 개의 자리를 밀쳐내고 고양이가 가장 현대적인 애완 동물이 된 이유는, 애착이 강한 무리 동물 개와 달리, 그 고독을 함께 기꺼이 감내해줄 성향의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물'로 부터 '나의 역사', 그리고 존재를 복원하다.
이렇게 영화는 '나'라는 존재를 통해 '고립적'인 현대인의 소묘를 촘촘히 그려낸다. '사물'과 '동물'로 둘러싸인 고립적 삶, 소통이 불능이 된 가족, 단절된 사랑, 그리고 제한적 우정 등등. 그러니 당연히 시한부라는 선고를 받지 않았어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인 것이다. 가장 전통적인 국가였던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급격한 산업화, 현대화 과정에서 '원자화'되어 겪게되는 고통의 결과물로, '자살율' 1,2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툰다는 건 따지고 보면 이상한 점이 아니다. '사물'과 '동물'로만 채워진 삶에 대한 적나라한 후유증인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런 '고립된 개인'에대한 적극적 변호를 대변한다. 제한적인 관계로 고립된 개인의 삶, 심지어 내일 죽는다해도 자신이 기억될까 의심되는 삶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 정당성의 시작은 바로 나를 둘러싼 '사물'과 '동물'.

그래서 그저 '사물'이었던 전화는 되새겨 보니, 이제는 '남'이 되었던 한때 사랑했던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메신저로, 홀로 남은 시간을 때우던 한때 좋아했던 영화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우정의 표현으로, 그리고 '시계'와 '고양이'는 자신이 방기했던 '가족'을 복원시켜주는 매개체이자, 상징물로 새로이 자리매김한다. 



영화 속 매개체이자, 상징물이 보여주는 것은 '퇴행적'이다. 과거의 연인, 한때 열렬했떤 꿈, 그리고 해체된 가족,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조차 잊어버렸던 고립된 나, 하지만 그 '추억'을 영화는 '사물'을 통해 그리고 그 '사물'의 상실이란 블록버스터급 장치를 통해, 현재의 나를 채우는 존재의 일부로 복원시킨다. 현재의 내가 '원자화'된 채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하더라도,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위로를 전한다. 설사 지금 현재의 네가 의미없이 사라진다해도, '역사'로 인해 너의 존재는 충분히 가치있었다고 영화는 다독인다. 


영화의 화법은 '퇴행'적이지만, 그 퇴행은 웅크리고 틀어박히는 퇴행이 아니라, 죽음조차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퇴행이다. 결국 인간은 '의미'와 '관계'를 통해 존재를 설득당하는 바, 그것이 설사 현재가 아니라 해도, 지나온 인생의 아련한 추억의 한 토막이라 하더라도, 그 역사로 인해 인생은 충분히 살만한 것이라 <고양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은 역설적으로 말한다. '시한부'로 시작하지만 정작 영화가 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그 삶의 찬가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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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17 16:03

11월 15일 16회 <캐리어를 끄는 여자>는 국가대표 축구 경기로 늦게 방영된 jtbc 뉴스룸을 상대로 10.0%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달성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하지만 마지막 회를 제외하고는 주욱 8~9%로 주중 월화 미니 시리즈 중 2위를 유지하며 미묘한 포지션을 유지해왔다. 소위 쉽게 '망했다' 거나, '흥했다'라고 판단할 수 없는 경계선의 성과이다. 





이 성과를 좀 더 파고들어가 보자. 법정 드라마를 내세운 장르물의 관점에서 보자면 <캐리어를 끄는 여자>는 나름 '선방'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지우'라는 '스타'를 내세운 '로맨스' 드라마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 흡족한 성과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늘 지난 몇 십년간 '멜로'의 대명사로 '발음' 문제가 그녀를 따라붙었던 연기력 논란의 배우 최지우가 능력있는 사무장에서 성공한 변호사로 거듭난 전문직 드라마를 깔끔하게 이끌어내다는 지점에서 본다면 <캐리어를 끄는 여자>는 최지우라는 배우에게 있어서는 또 한번의 질적 전환을 가능케 해준 드라마가 된다. 드라마가 한 편 마무리되었다고 해서 그걸 꼭 편가르듯 가를 필요가 있겠냐 싶지마는 그래도 그 성과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볼 때 <캐리어를 끄는 여자>는 생각해 볼 많은 여지를 남긴다. 

선방한 스릴러 
올 한 해 여러 편의 장르 드라마가 선을 보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모두 저조한 시청률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최고 시청률 7.6%(16회), <원티드>가 역시나 최고 시청률 7.8%(2회), 그리고 <뷰티플 마인드>로 가면 최고 시청률이 4.7%(3회)였다. 심지어 요즘 대세라는 박보검, 서인국이 주연으로 나온 <너를 기억해>도 최고 시청률이 5.3%(14회)였으니 누가 나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심각한 드라마 기피증'으로 인해 아니 진지하게 주제에 천착하면 천착할 수록 드라마의 시청률은 반비례하는 암울한 성과를 올 한 해도 넘지 못했다. 이 상황이라면 공중파에서 주제에 천착한 장르물의 시도는 더더욱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법정 드라마'에 '스릴러'를 가미한 <캐리어를 끄는 여자>의 평균 8~9%대의 시청률, 그리고 마지막 회에서 두 자리를 찍은 성과는 굉장히 흡족한 결과물이다. 결국 <시그널>이 공중파로 오면 '사랑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우스개를 '법정 로맨스'라는 장르물로 나름 넘어선 <캐리어를 끄는 여자>가 증명해 버린 셈이 된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는 능력있는 사무장이었던 차금주(최지우 분)가 의도치않게 노숙 소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백마탄 왕자, 아니 찌라시 언론사주 k팩트의 함복거(주진모 분)가 등장하며 이야기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이하 로코)의 양식을 띠기 시작한다. 거기에 순정어린 연하남 변호사 마석우(이준 분)까지 합류하면서 삼각 관계의 구도는 완벽해진다. 



하지만 드라마는 전직 검사였던 함복거가 사표를 던지게 했던, 그리고 차금주의 모든 것을 빼앗은 노숙 소녀 살인 사건과 그 배후의 '오성'이라는 로펌, 그리고 재벌가, 그리고 그들의 부도덕한 성스캔들을 '법정'을 배경으로 풀어내며 '법정'과 '사랑'이라는 양 날의 검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 벼려진 두 날을 자유자재로 휘두르기 위해 배후의 사건은 다분히 '음모'적이고, 매우 구조적이지만, 그 다루는 방식에서는 찌라시 언론사 사주가 남자 주인공이고, 짝퉁 빽에 연연하는 속물 사무장이 여주인공이듯, 적당히 '통속적'이고, 적절히 코믹하게 강온 전략을 쓴다. 

결국 '법정'과 재벌가의 부도덕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정의'를 다룬 장르물이라는 지점에서 적당히 진지하고, 적당히 달달한 <캐리어를 끄는 여자>의 새로운 '법정 로맨스'방식은 시청률 면에서 그 이전 장르 드라마들과 달리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아쉽다. 노숙 소녀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여 결국 재벌가의 부도덕한 성스캔들, 나아가  스폰서 의혹의 상징 '미식회'라는 드라마를 끌고 갔던 굵직한 줄기가 속시원하게 풀어졌는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볼 때 물론 15,6 회 마지막까지 법정에서 공방을 벌이며 주제에 천착하려 했지만 어쩐지 아쉽다. 한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건의 주범과 배후와 미식회의 핀트가 어긋나며, 시청자들이 '분노'의 촛점이 애매모호해졌고, 물론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쓴 소년은 재심으로 굴레를 벗어났지만 과연 무엇이 해결되었는지 어리둥절한 채 드라마는 마무리되었다. 과연 그 악의 주체가 오성이라는 재벌이었는지, 그 재벌가를 장악한 며느리의 위악이었는지, 그게 아니면 재벌의 개라는 오성 로펌이었는지, 정작 드라마는 '개'들만 이리저리 몰다 끝난 건 아닌지 고개가 꺄우뚱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잔뜩 심각하게 벌여놓고 마치 실밥 풀리듯 쉬운 마무리에 결국은 '로코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쉬움의 원인이 드라마 중반부에 들어서서 작가가 천착한 '로맨스'가 오히려 이들 장르물의 사건 전개에 발목을 잡는 결과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건 '공중파'라는 한계 때문이었을까? 사실 그렇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권음미 작가는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갑동이>에서도 이와 같은 갈짓자 행보로 인해 드라마의 완성도에서 아쉬움을 남긴 바 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은 연쇄살인, 그 와중에 등장한 모방범, 그리고 이제서야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 가장 가까이에서 암약했던 진범, 하지만 드라마는 애초에 드라마가 천착했던 연쇄 살인의 본질에 다가가는 대신, 카피캣이었던 류태오(이준 분)과 갑동이로 인해 아버지를 잃은 형사 하무영(윤상현 분)과 오마리아(김민정 분), 마지울(김지원 분)간의 지리한 애증으로 시간을 허비하며 궤도를 이탈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한참 차금주에 의한 '오성' 로펌에 대한 수사로 속도를 붙여할 드라마는 뜬금없이 함복거와 마석우 사이의 애정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해 버린다. 물론 애초에 <갑동이>와 다르게 '법정 로맨스'라는 취지를 내세운 <캐리어를 끄는 여자>가 '로맨스'에 천착한다는 게 어패는 없지만 최소한 드라마가 이끌어 가는 본래의 궤도에서는 이탈하지 말아야 하는데, 권음미 작가는 <갑동이>에 이어 또 한번, 드라마를 전혀 다른 드라마로 만들어 버리며 호청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린다. 덕분에 <갑동이>에서 양철곤(성동일 분) 형사의 활약이 아쉬웠든, 초반에 흥미진진했던 이동수(장현성 분)나, 강 프로(박병은 분)의 캐릭터가 서사의 횡보와 함께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그와 그녀보다, 오히려 신선했던 그녀들의 이야기  
그 뻔한 첫 눈에 반한다는 식의 함복거와의 오글거리는 사랑도 그렇고, 다짜고짜 순정파인 연하남 변호사의 저돌적 애정도 그러려니 하면서 보긴 했지만, 오히려 <캐리어를 끄는 여자>에서 신선했던 것은 '여성'들이다. 

최지우라는 배우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준 사랑스러운 속물 사무장 혹은 변호사 차금주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고, 그녀와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다 동료가 된 구지현(진경 분), 그리고 16회까지 애증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배다른 동생 박혜주(전혜빈 분)의 캐릭터도 신선했다. 거기에 재벌가의 며느리에서 재벌가의 비자금을 장악하고 안주인이 된 조예령(윤지민 분)도 매력적이었다. 차라리 어설픈 '로맨스' 대신 이들 여성들의 '육박전'으로 드라마를 치열하게 전개했다면 더 신선하고 멋진 드라마가 되지 않았을까? 

마석우가 가장 멋있던 장면은 안타깝게도 16회 마지막 그가 검사가 되어 차금주와 법정에서 팽팽하게 대립했을 때였다. 차금주가 멋졌던 것도 함복거처럼 법정에서 능력자로 그 능력을 십준 발휘할 때였다. 물론 장르물로써의 고심을, 그래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지만, 좀 더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위해, 권음미 작가가 잘 하는 것에 좀 더 천착한 차기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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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16 16:55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이 개봉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열 여덟 번째 작품이고, 올 한 해 뜻하지 않는 스캔들로 주목을 받은 상태이기에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이 궁금즘을 불러 일으킨다. 더구나 당사자 두 사람을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밀어부쳤던 언론과 여론의 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던 홍감독이기에 더더욱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고할까? 그리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어쩌면 그런 일련의 사태에 대한 홍상수 감독다운 '답'이라 해도 그리 '어불성설'이 아닌 영화가 된다. 영화를 통해 감독은 말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그런 내가 지금 이렇게 사랑을 하고 있다고. 




감독 홍상수를 안다면
홍상수 감독과 관련된 기사가 연일 언론에 도배되고, 기사화되어서는 안될 개인의 카톡 내용까지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며, 홍상수 감독에 대한 '도덕적 지탄'이 일상화될 때, 사람들은 그가 '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만을 그를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그간 홍상수 감독이 그의 작품을 통해 해왔던, 혹은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안다면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는 사람들이 안다는 '감독'이지만, 정작 홍상수 감독이 누군지는 다들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남자들은 그가 문성근이건, 정재영이건, 유준상이건, 김태우건, 유지태건, 이선균이건 이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의 김주혁이건, 권해효건, 그저 '수컷'이다. 여자, 그것도 이쁜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연애하고, 한번 자보고 싶어하는데 눈이 벌개져있는 본능적 인물들이다. 그들이 '교수'이건, '작가'이건, '영화감독'이건, '학생'이건, 그 직위가 상관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 '직위'로 인해 그들의 '수컷' 본능은 교묘하게 노골적이고, 그래서 결국 더 '찌질하고 치졸해'지기 십상이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90년대의 그의 영화는 '지식인'의 허위 의식을 까발리는 '문제적 영화'가 되었고,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 줄기차게 동일한 남성적 캐릭터로 변주되어 온 그의 영화에서 이젠 감독 스스로가 영화 속 주인공도 해보지 못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에 이르렀다. 현실의 스캔들과 영화 속 캐릭터의 동질성이 감독 홍상수를 '변명'해 주는 그 어떤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지난 20여년간 홍상수 감독이 '사회가 '도덕'이란 잣대로 줄을 대기가 무색하게 줄기차게 별거 아닌 '인간'에 대해 진솔해 왔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나, 그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렇듯 10일 개봉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 등장하는 세 남자 김영수(김주혁 분), 박재영(권해효 분), 이상원(유준상 분)은 한 여성 소민정(이유영 분)에게 매달린다. 그들의 직업이 화가이거나, 영화 감독이거나, 그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진 게 중요하진 않다. 아니 중요할 수도 있다. 마치 다른 화려한 새의 깃털로 자신의 검은 색을 치장하는 까마귀처럼 두 남자는 자신들이 획득한 사회적 지위를 내세우며 자신을 한껏 멋지게 부풀리기에 고심한다. 아마도 영수도 민정을 처음 만났을때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목적은 결국 이쁜 여자 민정의 호감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 목적에서 동질성을 가진 남자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민정을 만난 시간차로 인해, 서로의 입장이 엇갈린다. 먼저 민정을 만난 영수는 '술'과 관련하여 조심성이 없는 민정으로 인해 민정과 갈등을 일으키고, 끝내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민정을 영화 내내 찾아다니는 처지에 이른다. 그런 영수가 애닳아 민정을 찾아다니는 동안, 다른 두 남자들은 '민정'이 아닌 민정(?)과 다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기회를 얻는다. 

'민정'과 '민정'인데 민정이 아니라며, 그럼에도 다시 천연덕스럽게 세 남자를 만나, 여태 아기같거나, 늑대같은 남자만 만나 진정한 사랑에 이르지 못했다며 은근슬쩍 니가 내 진짜 남자가 되어주겠니 라며 청하는 듯한 민정에게 세 남자는 볼모가 된다. 아니 전후가 바뀌었다. 그들은 그녀가 자신이 전에 만났던 '민정'이 아니라는 데도 기어이 결국, 기꺼이 그녀와 함께 술자리를 가지려듯, 사실 그들에게 그녀는 '민정'이건, '민정'이 아니건 중요치가 않다. 중요한 건 이쁜 젊은 여자라는 것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민정'이 '민정이 아닌 코스프레를 한다고 뭐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민정'이 아니라면서 세 남자와 만나대는 민정인듯한 여자와, 그런 민정이 아니라는 '민정인듯한 여자와 다시 한번 기꺼이 '진정한 사랑'을 이루겠다며 '술'을 마시는 그들이 누가 더 나쁜가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어느덧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게 무슨 의민가 싶다. 남자들은 하냥 그래왔고, 여자가 '민정'이건, '민정'이 아니건, 그녀가 그 순간만큼, '사랑'을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진실'일지도 모르는데.

영화 속에서 '민정'과 사귀던 영수는 그를 찾아온 중행(김의성 분)을 통해 자신과 술을 조심하겠다는 민정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술 자리에서 외간(?) 남자와 싸움까지 벌였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야 만다. 하지만 그 '화'는 이별을 자초하고 만다. 하지만 이별을 견딜 수 없는 영수는 민정을 찾아다니는 한편, 그런 그를 한심하게 보는 동네 친구들에게 민정을, 아니 민정과의 사랑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멀쩡한 눈으로(?) 보면 민정은 이해하기 힘든 여자다. 영수란 사귀는 걸 온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여전히 동네 주점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고, 이제 영수랑 사귀지 않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영수랑 가던 동네 술집을 찾아 일관성있게 남자와 술을 마신다. 심지어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민정'이 아니란다. 관객조차도 결국 그녀가 제 정신이 아닌 건지, 또 다른 민정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게. 마치 그녀는 지금의 지나가는 찰라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시간의 연속성과 유한함을 그녀 스스로 실천하는 구도자처럼, 신념에 차 자신이 '민정'임을 부인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강력한 부인 속에 '민정'으로 그녀가 벌였던 행태들도 동시에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아니 어쩌면 그 과정을 통해 민정으로 추정되는 그녀가 줄기차게 말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의 절실한 사랑이다.  

영수의 친구들, 그리고 영수처럼 우리는 '과거'의 어떤 행적,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러했다는 소문, 사실 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그리고 '훈수'를 둔다. 너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거기에 휘돌렸던 영수는 민정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리고 민정이 아니라는 여자를 만나고서야 안다. 그저 지금 이렇게 함께 하면 되는 거라고. 현재의 '사랑'에 만족한다. 그 '뻔한 동네'가 영화판이든, 그 헷갈리는 여자가 지금의 그녀인든, 아니든 중요한 건, 감독이 말하는 바 지금 여기 사랑하는 그 진실이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그간 줄곧 '실패담'을 논했던 홍상수 영화와는 달리, 성공한 사랑의 이야기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서 주춤거리거나 물러섰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완성에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가 로맨틱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 숭고하고,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시작은 찌질하고, 본능적이며, 헷짓거리같은 짓이다. 그리고 지금 '사랑'의 순간에조차 그 '영원성'을 논하기에 무색한 '관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 영수와 민정은 사랑을 한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간통법'이 사라진 세상에서 '훈수'와 '사회적 지탄'을 착각하는 사람들이 무색하게. 홍상수 감독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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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13 19:40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7개 도시, 8개의 cgv아트하우스에서 열린 '프렌치 시네마 투어 S.T.DUPONT2016', 엄선된 10편의 영화 중 마지막 작품은 2015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 초정되었고, 2016년 상반기 개봉했던 <마지막 레슨>이다. 이 프렌치 시네마 주간 동안 있을 '시네마 톡'을 위해 내한한 파스칼 포자두 감독과 여주인공 마를렌으로 열연한 마르뜨 빌라론가 배우를 만났다. 특히 여주인공 마를렌 역의 마르뜨 빌라론가 배우는 84세의 고령이시고, 이 60년차의 노배우이지만 이 작품을 위해 한국까지 오시는 등 노익장을 보여주셨다. 




1. '존엄사'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마지막 레슨>을 만드신 계기는?
-이 영화는 2003년 출간된 노엘 사틀레의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 한 것이다. 가까운 분이 돌아가시면 남은 사람들은 생전에 조금 더 많은 것을 나눌 것을 하고 후회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까지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취지에서 '마지막 레슨'이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2. 2011년 <크루즈>에 이어 계속 작품의 주인공이 노인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속 유럽은 물론 계속 '젊은이'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그들 자체만으로도 무궁한 이야기를 가진 노인, 한 권의 책과 같은 '노인'에 주목하고 싶었다. 

3. 여주인공 마들렌의 존엄사를 어떤 시각에서 다루고 싶으셨는지?
-실존 인물인 마들렌은 일찌기 젊어서부터 임신 중절, 피임할 권리 등 강력한 투쟁의 대열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일반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결단력있는 삶을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가 최후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한 '선택권', 죽음의 순간까지 의지를 가진 여성을 그려내고 싶었다. 



4. 영화 속에서 그런 어머니의 결정에 대해 아들과 딸은 서로 다른 결정을 한다. 심지어 죽는 수간까지 아들은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다.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다. 존엄사의 결정에 대한 반응에 여러가지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옳고 나쁘고가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가 보이는 반응에 대해 공감해 주기를 원했다. 

5. 굳이 아들이 반대를 하고, 딸이 어머니와 유대를 가진 인물로 설정한 이유가 있는지?
-남자니까(웃음), 몇몇 아들들은 이해할 지 모르겠지만,' 목욕씬'에서 보여지듯 딸과 어머니가 함께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듯, 그런 유대는 어머니와 딸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아들이 그렇게 아픈 어머니와 함께 목욕을 하려 해도 어머니가 불편했을 것이다. 딸에게 벗은 어머니의 몸은 다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저 몸에서 나왔고, 나도 그렇게 늙어갈 테니. 바로 그런 동질성이 유대의 기본이 된다.

6. 그래도 자식인데 어머니의 죽음은 '딜레마'일 듯하다. 
-민감한 문제입니다. 프랑스에서 존엄사는 불법입니다. 만약 합법이 될 예정이라면 영화 속 마들렌도 결정을 미루었겠지요. 얼마전 프랑스에서 두 명의 노인이 호텔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대신 검사에게 존엄사 법적 허용에 대한 편지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자식들은 영화 속 마들렌의 자식들만큼 힘들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들렌처럼 몇일 날 죽을거야 라고 해서 자식 또한 그 선택의 회오리에 휘말리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7. 영화에서는 거울 속에 비춰진 노추의 모습, 그리고 스스로 운전을 하고 나오다 차량들에 휩싸여 오도가도 못하는 장면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는 노년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그립니다. 
-원작에서 이 내용은 딸과 어머니의 대화로 그려집니다. 그저 어머니가 이젠 늙어서 운전을 못하겠다. 차를 팔자라는 식이지요, 하지만 영화적 장면으로 필요하다 생각했븐디ㅏ.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자유로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차를 판다는 건, 경제적 행위 이상, 자유가 사라지는 장면을 상징합니다. 

8.또한 침대에서 실수하는 모습, 병원에 찾아온 딸에게 기저귀를 찬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모습도 존엄사를 설득하는 결정적 장면이었습니다. 
-결정적 장면이죠. 엄마가 기저귀를 찬 모습을 보고 딸은 우리 엄만 저런 사람이 아닌데 라며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엔 아들의 입장이었다가, 그 장면에서 딸과 같은 생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종의 '시각적 쇼크'를 노린 연출이었습니다. 



9. 영화 끝부분 딸이 엄마를 업어주는 유대의 상징적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 속 플래시 백 장면에서 소변을 보는 딸을 엄마가 안아서 잡아줍니다. 그런데 이제 딸이 엄마를 업죠. 이를 통해 이것이 인생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마치 사이클처럼요. 그리고 딸과 엄마는 빛이 드는 언덕으로 가지요, 조산사로서 삶을 다루는 일을 했던 엄마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다가오는 것들>은 프랑스에서도 관객과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를 본 후 관객의 대다수가 영화 속 어머니 마들렌의 결정을 '이해한다'고 했으며, '너무 좋은 영화'라 극찬했다고 한다, 파스칼 포자두 감독은 이전에 주로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 프랑스 영화 관객들이 선입관을 가진 반면, 부산 국제 영화제를 비롯 해외 유수 영화제의 초청 등 해외 관객들은 그런 선입관없이 이 작품을 감상해줘서 3년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인 이 영화에 대해 자긍심도 느끼고 힘도 얻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청소년기 가족을 다룬 작품을 할 예정인데, 설사 다시 코미디 영화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마지막 레슨>과 같은 심오한 주제를 다룬 바 있어 좀 더 감동적인 내용을 그려낼 것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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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13 02:26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흔히들 '철이 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철이 든다해도 삶을 모두 '조련'할 수는 없는 법, 흔히 '사랑'을 '교통사고'에 비유하듯이 자신의 마음에 휘몰아쳐 들어온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은 제 아무리 어른이라도 불가항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른이기를 포기해야 할까? 아니 어쩌면 거기서부터 진짜 어른이 되는 시험대가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이기에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해 책임지려 하는 것' 그게 바로 어른이다. '어른'과 '아이'가 구분되기 힘든 세상에, 아니 오히려 '어른'이라서 더 제멋대로 하는 것이 용인되는 세상에서, 11월 10일 종영한 <공항 가는 길>은 '어른'으로서 사랑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즉히, 하지만 꿋꿋하게 전했다.

공항 가는 길ⓒ kbs2
어른도 사랑 앞에는 어쩔 수 없다. 
서도우(이상윤 분)와 최수아(김하늘 분)는 그렇게 만났다. 애니 아빠와 효은이 엄마로, 각자 가정을 가지고,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로,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고뇌 속에서 두 사람은 접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로 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서도우'가 아이를 잃음으로 인해, 그리고 최수아는 그런 서도우를 보고, 아이를 되찾음으로 인해, '유대'가 깊어졌다. 자식을 잃었지만, 그 아픔을 아내와 나눌 수 없는 아빠, 그리고 아이의 행보를 둘러싸고 남편과 소통불능인 아내, 두 사람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서로에게서 대번에 '영혼의 단짝'임을 느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가정'이란 곳은 매번 두 사람과 파열음을 낸다. 그렇게 소외된 가정과 달리, 눈빛만으로도 이해가 되고 마음이 전해지는 두 사람은 결국 '삼무' 사이도 무색하게 '사랑'의 선을 넘어 버린다. 책임감있는 존재로 살아왔던 세월이 무색하게.

흔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젠 '범사'가 된 불륜, 하지만 그래서 더 '터부'시 되는 불륜을 그려내는 tv는 말 그대로 '미친 년, 미친 놈'식이다. '눈이 뒤집혀' '가정'따위는 '내팽개쳐두고', '뺑소니'를 쳐버리는 몰상시한 인간들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묘사 방식은 그 예전에 머리에 빨간 뿔이 난 식으로 반공 포스터를 그리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감정'을 가진 인간을 '제도' 속으로 꾸깃꾸깃 밀어넣는 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냐고, 이혼율 1위의 국가, 이즈음에는 그저 '바람'이란 관점을 넘어, '어른들의 감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공항 가는 길>은 바로 그 지점을 살핀다.

그 누구보다 가정적이며, 아이를 생각했던 두 남녀가, 뜻하지 않은 아이의 죽음을 통해, 각자 자신이 관행적으로 지켜왔던 '가정'으로부터 튕겨져 나온다. 그리고 그 튕겨져 나온 황량한 들판에서 만난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이성, 역시나 그들도 여전히 피가 흐르는 인간이기에, '사랑'하고 만다. 만나지 말자, 만지지도 말자, 바라지도 말자, 라고 애를 쓰지만 그게 '남녀 상열지사'에서 무기력한 공약이란 걸, <공항 가는 길>은 내숭으로 덮지 않는다.

공항 가는 길ⓒ kbs2
오히려 다짐하면 다짐할 수록 다가서고, 의지하고, 결국은 하룻밤까지 보내게 된 두 사람, 하지만 그 교통사고 같은 사랑 이후에, <공항 가는 길>이 멋졌던 것은 두 사람이 자신들이 저지른 일, 자신들이 가진 감정에 대해 '솔직'하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에 대해 두 사람은 비겁하게 둘러대지 않는다. 흔히 한국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길고 장황한 부정기 대신, 두 사람은 솔직하게 감정을 인정한다. 이런 두 사람의 감정은 자신의 아이조차 부득불 부정하려 애썼던 도우의 아내 김혜원(장희진 분)과 끝까지 아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박진석(신성록 분)의 감정적 도피와 대별된다.

불륜을 책임지다?
또한 그 감정을 핑계대지도 않는다. 아내 때문에, 남편 때문에 라고. 오히려 그럴 수록 자신이 속한 가정과 '사랑'을 불리하려 애쓴 두 사람, 하지만 두 사람의 '눈맞음'의 시작이 애니 아빠, 효은 엄마였듯이, 이미 두 사람의 가정은 이제 두 사람에게 더 이상 '안온한 즐거운 나의 집'이 아니다. '흔들렸던 가정'으로부터 '사랑'이 왔는지, '사랑'으로 인해 '흔들린 가정'이 더 흔들리게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핑계댈 만도 하지만, 두 사람은 냉정하리 만치 서로의 사랑과 자신의 가정 문제를 분리하려 애쓴다.

그렇게 각자 자신의 속한 삶에서 각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던 두 사람, 하지만 그 해결의 귀결지 제주에서 다시 해후하고, 이젠 '운명'이 되어버린 사랑을 직감한다. 여기서 '제주'는 그저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휴양지가 아니다. 서도우란 사람이, 그리고 최수아란 사람의 인생 여정의 자연스런 귀착지이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생각하는 취향의 공통분모랄까. 희희낙락 사랑의 도피처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먼 두 사람, 서도우가 어머니를 보내고, 아내까지 보내고 최수아의 곁으로 가려하지만, 이번에는 최수아에게 시간이 필요하고, 결국 마지막 회 겨우 한 10분을 남기고서야 두 사람은 비로소 다시 공항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혹자는 결국 '불륜' 남녀가 다시 만나기 위한 요식 행위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요식 행위'라 치부하는 그걸 다른 말로 돌려 말하면 '인간으로서의 예의'가 아니었을까? '감정'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저질러놓은 관계들에 대해서도 무책임하려 하지 않는, 이 아이러니해 보이는 책임 의식이, 그래도 교통사고같은 유부남, 유부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책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최선을 다한 두 사람의 '책임 의식'으로 인해 가정은 무너졌지만, 두 사람이 맺은 관계가 주저앉지는 않았다. 여전히 수아의 딸 효은은 엄마처럼 살겠다 하고, 이제서야 도우의 아내도 자신이 머물 곳을 찾았다.

공항 가는 길ⓒ kbs2
그 예전, 그리고 여전히 아직도 결혼식장에서 주례 선생님이 말씀하시듯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살아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과연 '자신'을 지워가면서, 아이를 위해 희생하면서 살아내야 하는 '결혼'이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이란 전제 속에서 <공항 가는 길>은 새로운 사랑에 눈뜬 두 남녀가 겪어야 할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나간다. 감정과 감정 이후의 관계, 그리고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 그리고 그것에 대해 책임과,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 등등, 그걸 16부작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드라마는 차분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그래서 '불륜'이라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뜨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가장 사변적인, '감정'을 핑계대지 않는  그래서 '환타지'가 된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 '사랑'이 '소유'가 아니고, '사랑'이 '배려'라는 스산한 가을을 데워줄 화두를 띄우며.

*어른들의 사랑을 그려낸 <공항 가는 길>을 더 분위기 있게 만든 건 또 다른 주인공 같았던 배경이다. 공항, 서울, 그리고 제주, 그 흔한 공간이 이리도 아름다운 곳이었던가 라는 감탄이 아놀 정도로, 마치 갑남을녀 중 서도우와 최수아가 서로 영혼의 눈을 뜨듯 그렇게 우리가 몸담고 사는 공간이 새로운 이름으로 다가온다. 보너스처럼. 어른들의 사랑만큼, 어른스런(?) 공간이 감사하다. 

덧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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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6.11.11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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