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2016 드라마 스페셜도 그 '대미'를 향해 가고 있다. 벌써 9번 째 작품, 그 어느 때보다도 장르와 형식면에서 풍성했던 2016 드라마 스페셜, 아홉 번째 작품 <아득힌 먼춤>이야말로 드라마 스페셜이기에 가능했던, 드라마스페셜의 존재의 의의를 가장 드러낸 작품이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드라마가 시작되자마자 화면을 채운 건 마치 현대 무용처럼 난해한 몸짓으로 가득한 연극의 한 장면이다. 그 뜻모를 몸짓이 끝나고 나면, 한 예술가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신파랑, 스물 여덟살, 젊은 연극 연출가,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안그래도 순수 연극이 동토인 이 시대에 sf물인 <로봇의 죽음>이다. 당연히 무대에 올리기도 전에 단원들은 '망했다'를 대놓고 입에 올리고, 아니 그 이전에 연극을 공연하는 단원들도 결말을 이해할 수 없는, 아니 그보다 더 심했던 것은 공연을 준비하는 내내 연출이었지만 술에 취해있거나, 잠에 취해있었던 신파랑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대한 반목과 불신이 더 컸었던 연극, 그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신파랑은 유서 한 장 없이 세상을 버렸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제 죽은 젊은 예술가를 추모하는 동문 후배들과 졸업 작품 커트라인을 통과해야 하는 작가이자 후배 최현(이상희 분)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올려질 작품<로봇의 죽음>을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에 따라 첫 공연 당시 자신이 납득할 수 없었던 <로봇의 죽음> 결말을 이제 자신의 졸업 공연이란 명목으로 다시 뜯어 고치기 위해 고민하며, 부모님의 부탁을 받고 본의 아니게 파랑의 남은 유품을 정리해야 하는 현의 시선과, 파랑이 무대에 올렸던 <로봇의 죽음>이 '극중 극'으로 전개되며 드라마를 끌어간다. 

연극의 배경은 태양이 과열되기 시작한 먼 미래, 그 태양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 인류는 절멸하고 만다. 살아남은 건(?) 태양의 에너지를 자원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들, 하지만 인류를 절멸시켰던 태양의 열기도 그 생명을 다해가고, 안드로이드들 역시 인류와 마찬가지로 '멸종'의 길에 접어든다. 이에 류적 사망선고를 받은 안드로이드들 중 역사 기록소 소장, 행정과장, 테이터 팀장은 사멸한 인류를 통해 자신들의 방전에 대처하고자 한다. 이들은 금지된 구역에 남겨진 인류의 테이터베이스를 탐험하고, 거기서 만난 인류의 흔적에게 자신의 얼마남지 않은 에너지를 충전하여 절멸에 대응한 답을 얻고자 한다. 

안드로이드들이 인류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자신들과 달리 '유한성'의 삶을 살았던 인류가 그 유한성의 불안함을 어떻게 벗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태어날때부터 이미 죽음이 예견되어 있는 삶, 그럼에도 불안과 공포로만 점철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안드로이들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어주며 답을 구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그들의 절박한 질문에 인류가 남긴 지혜는 '춤을 추라'였다. 



이 황당한 연극의 결말, 연출가 파랑은 이를 고집했지만, 작가 현, 그리고 단원들, 후배들 중 그 누구도 이 결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추모 공연이자, 자신의 졸업 작품으로 다시 무대에 올리는 이 연극의 결말을 현은 당연히 자신의 이해할 수 있는 결말로 바꾸려 한다. 

누구나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리던 장례식 과정에서 너무도 담담했던, 아니 심지어 유서 한 장 남겨놓지 않고 죽음 파랑에 화가 났던 현은 누군가 먹으라고 줬던 개 염소를 키우며 살았던 파랑의 집을 찾으며 파랑과의 지난 일을 다시 반추한다. 

후배 현을 찾아와 함께 연극을 하자던 파랑, 하지만 그는 연극을 준비하는 내내 불성실했다. 그런 파랑을 불신했던 현과 동료들. 철거 현장이었던 조연출 슬기의 집에 찾아갔다가 파랑이 철거단원으로 일한 전력이 드러나자 그 갈등은 극에 달한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다그치는 단원들에게 꼬박꼬박 쥐어준 월급이, 브로슈어와 밥값을 위해 돈을 많이 주는 일이 필요했었다고 소리친다. 그런 그에게 슬기는 철거로 고생하는 엄마에게 조만간 월급이 나올꺼라 위로했다며 울부짖고, 철거한 돈으로 받은 월급으로 철거한 집을 고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파랑의 죽음 이후 슬기의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연극 내내 선문답같은 질문을 던진 파랑에게 현은 냉담하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 답한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후 차기작을 하자고 찾아온 그에게 야멸차게 다시 한번 도장을 찍듯 답한다. 그의 옷에 낀 머리카락을 라이터불로 지져서 끊어내듯이. 

연극 속 안드로이드들은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에너지를 나누어 얻은 '춤을 추라'는 답에 당혹스러워했지만 결국 손과 손을 맞대어 춤을 추며 방전된다. 마치 그 모습은 선사 시대 인류들이 남긴 벽화를 연상케 한다. '죽음'으로 그들은 '유한함'을 넘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예술은 영생을 얻었듯이 말이다. 먼 미래의 안드로이드들을 통해 연극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서의 본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철학적 명제에 도달한다. 



하지만 파랑이 공연했던 연극과 달리, 현실의 젊은 예술인 파랑은 좌절한다. 그가 올리고 싶은 공연을 위해, 단원들의 열정 페이 대신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정당한 열정을 위해 철거반원 일까지 감내해야 했지만 동료는 물론 관객과 소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연극을 포기할 수 없었고, 돌아온 건 함께 할 수 없는 불통, 결국 그는 홀로 쓰러져 간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쓰러지는 소리를 그 누군가 들어주길 원했던 나무처럼. 

'닿을 일 없는 각자의 궤도를 도는 사람들, 온몸으로 판독 불가의 춤을 춘다. 당신에게 닿기를 원하며'

<아득히 먼춤>은 극중 극을 통해 예술의 본질과 인간을 정의내린다. 하지만, 그 정의가 2016년으로 돌아오면 '현실'이라는 거세된 태양아래 젊은 예술가는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의 순수한 예술혼은 이해받을 수 없으며, 세상은 순수를 품을 여력이 없다. 그럼에도 예술을 포기할 수 없는 예술가는 자신의 증명을 죽음으로 밖에 해낼 수 없다. 비극적 2016년판 젊은 예술가의 초상,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파랑의 삶에 끼어든 현은 동물 보호소로 갈 운명의 파랑의 개를 구해내듯, 파랑의 연극을 그의 의도대로 무대에 올린다. 아득히 멀었을 뿐, 닿을 수 없었던 건 아니다. 

예술과 존재, 그리고 그걸 풀어나가는 sf형식의 전위적 연극과, 초라한 현실, 그리고 주인없는 파랑의 공간이 상징적으로 엇물린 <아득히 먼 춤>은 드라마로서는 참 '아득'하다. 하지만, 그 '아득'함이야말로 드라마 스페셜만이 해낼 수 있는 당위이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 익숙한 이야기, 뻔한 주제를 말해야 하는 '드라마'라는 대중적 공간에서, 가장 철학과 현실에 대한 심오한 주제와 형식을 선보인 <아득히 먼 춤>은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던 그 분의 취미가 회자되는 이 시점에 대중의 눈높이에 안주하지 않는 이 실험적 도전으로서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낸다. 1.3%의 <아득히 먼 춤> 이야말로 아무도 없는 숲에서 홀로 쓰러져 가는 나무요, 닿을 길없는 궤도를 도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판독 불가의 춤이다. 
by meditator 2016. 11. 21. 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