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정도전>이 50부작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혁명가 정도전은 사라졌고, 이씨 왕조로서 조선은 정립되었다.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에 줄 좀 그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우리가 배웠던 교과서는, 정도전의 피를 자기 칼에 묻힌 이방원을 조선의 기틀을 닦은 왕이라 정의내린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만든 조선을, 본격적으로 국가로서 기틀을 세운 사람이 바로 이방원,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정도전>이라는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그 이방원이 세운 조선의 기틀의 대부분을 정도전에게 빚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정도전의 죽음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혁명의 설계자들의 죽음과 그리 다르지 않다.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로베스 피에르와 당통은 결국 그들이 반혁명 분자를 처단하기 위해 만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에서 비유되었던 한나라의 실질적 설계자 한신 역시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원칙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일구었던 이들처럼, 정도전도, 그가 꿈꾸던 '민본'의 세상을 앞두고, 왕조의 부흥을 꿈꾸는 이방원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이 로베스 피에르와 당통의 죽음으로 훼손되지 않듯이, 한신이 사라져도 한나라의 정치 제도는 달라지지 않았듯이, 고종 시대에 가서야 복권이 된 정도전이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는, 결국 정도전의 나라였다. 그가 만든 법률, 그가 만든 정치제도, 그가 방향을 잡아놓은 숭유억불의 사상, 그가 꿈꾸었던 정전제의 이상을 지향했던 토지 제도까지, 하다못해 궁궐에서 울려퍼지던 음악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하지만, 가장 순수한 혁명을 꿈꾸던 순수한 이상들이, 현실의 정치 과정에서 가장 과격한 길을 걸어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듯, 자신의 당대에 '민본'을 완수하겠다는 욕심에 조바심을 내던 정도전은 스스로 악마가 되기를 불사하며, 비타협적인 길을 걷다 스스로 고사되어 버리고 마는 모습으로 드라마는 그려낸다. 

(사진; tv리포트)

이렇게 드라마 <정도전>은 역사 속에 숨겨졌던 이름 정도전을 현재로 끌어낸다. 그리고 그와 함께, 50부작의 드라마 내내 그가 줄기차게 부르짖던 '민본'도 함께 길어 올린다. 
또한 현대의 민주주의와도 다르지 않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도전의 행로에서, 때로는 그와 전우가 되고, 때로는 그와 척을 지며, 이합집산하는 많은 인물들도 함께 우리 사는 세상의 그 누군가처럼 등장시킨다. 
그래서 그저 외척의 권세를 등에 업은 간신배였던 역사 속 이인임은, 현실 정치의 속성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노회한 정치가로, 그런 이인임에 맞서 고려의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했던 최영은, 자신의 이상에 비타협적이었던 고지식한 무장으로 되살아 났다. 
조선의 첫 임금이 된 이성계는, 고려라는 나라의 신하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이상 사이게서 고뇌하는 권력자로, 선죽교의 피로만 기억되던 정몽주는, 망해가는 나라와, 새로운 국가 사이에서, 자신의 신념을 고수했던 고지식한 선비의 현현이 되었다. 이렇게 대표적인 인물들 외에, 하륜, 조준, 윤소종 등, 역사 책의 행간에서 스쳐지나갔던 역사적 인물들이, 생생한 캐릭터로, 우리 곁에 찾아들었다. 

그래서, 백성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도전의 이상과, 그 이상이 조선이라는 국가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갈등은 곧, 대한민국 헌법 제 1조에서 민주주의 국가임을 선언하지만, 현실의 민주주의는 언제난 난망인, 우리 현실 정치의 고뇌로 이어진다. 가장 이상적이지만 비타협적이어서 결국 스스로 절멸의 길을 걷고 마는 정도전도, 가장 유연한 정치가인 듯 하지만 결국 그가 추구한 것은, 자기 권세에 불과한 이인임도, 가장 포용력 있는 듯하지만, 시류에 눈이 어두운 정도전의 선택도, 고스란히 민주주의의 혼돈 속에 놓인 우리의 고민으로 치환된다. 그래서, 더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의 '민본'이 소중하고, 그것을 목전에 두고, 융통성없는 아집, 혹은 독선으로 권력을 왕권으로 넘긴 정도전이 아쉽다. 하지만, 그가 남긴 '조선'에서 보여지듯이, 원칙은 그리 쉽게 훼손되는 것이 아니란 교훈도 남긴다. 조선 왕조 500년의 끈질긴 왕권과 신권의 갈등이, 어쩌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500년씩이나 이어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그것의 단초는, 결국 정도전과, 그를 벤 이방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드라마 <정도전>은 위인전 속에서 교훈을 남기고, 속담이나 사자성어의 주인공으로 고사되어가던 인물들을 현실로 끌어 올리고, 그들의 행보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그들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 되어, 그저 옳다 그르다 그 어떤 잣대로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인간'다운 모습이 되어, 현실의 반면교사가 된다. 

모처럼 돌아온 kbs1의 대하사극은 왕조를 넘어선, 인물 정도전을 집중 조명하고, 그 인물을 통해, 여말 선초의 격동기의 역사를 생동감있게 전달하여, kbs1 사극을 복원하였다. 부디 이 되살려진 흐름을 잘 이어가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4. 6. 30. 05:57

새로운 나라, 조선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자,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도전이 명나라에 다녀오는 사이 왕이된 이성계는 도읍을 옮기고자 했고, 대소 신료들은 그런 이성계에게 반발한다. 그런 신료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명을 한 이성계, 그런 이성계 앞에 정도전이 돌아와 달랜다. 도읍을 옮기는 문제는 명나라에 맞서 나라힘을 키운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정도전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린 이성계, 정도전에게 묻는다. 과연 조선의 왕은 무엇이냐고. 정도전은 답한다. 왕은 이해하고, 품고, 안는 것이라고. 그런 정도전의 답에 이성계는 씁쓸해 한다. 자신이 생각하던 왕이랑 다르다고. 자신이 왕이 되면, 신하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룰 줄 알았는데, 막상 왕이 되니 할 일이 없다고. 동상이몽이다. 

여진족과 힘을 합쳐 명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정도전의 건의에 이성계는 군권을 정도전에게 쥐어준다. 마음껏 해보라고. 하지만 그렇게 군권마저 쥔 정도전에게,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이자, 차기 왕위에 마음을 둔 이방원은 탐탁지 않다. 그에게 정도전의 모습은 '전횡'으로 비취질뿐이다. 

43회를 마친 <정도전>이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의 갈등은, 조선 왕조 500년을 두고 내내 조선이란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왕권과 신권 헤게모니 싸움의 시작을 알린다. 

이미 <정도전>을 통해서 보여지듯이 조선이란 나라는 정도전의 나라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나라는 정도전이란 한 사람의 나라가 아니다. '민본'을 내세웠던, 정도전과, 정도전과 뜻을 함께 했던 개혁적 신진 사대부들의 뜻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43회, 자신을 찾아온 아들에게 정도전은 '조선 경국대전'을 만들 뜻을 비춘다. 누구 한 사람 실권자의 의지가 아니라, 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정비되고, 돌아가는 나라로서의 조선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런 정도전에게, 왕은, 그저 신하들의 의해 움직이는 나라 위에 존재하는 상징적 존재일 뿐이다. 이른바, '짐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근대적 의회 민주주의의 조선판이다. 정몽주의 좋은 군주를 만나 뜻을 펴면 된다던 의지을 꺽으며, 스스로 괴물이 되면서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했던 이유이다. 군주가 누구이던 상관없이, '유학'이라는 사상적 토대에 근거한 '시스템'과 제도로 움직이는 나라, 현대의 민주주의 제도에 버금가는 선구적 시각이다. 

(사진; 뉴스엔)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그의 의지는, 함께 나라를 세운 동반자이자, 새로운 군주, 이성계에게 조차 올곧이 이해받지 못한다. 여전히 이성계도, 그리고 야심을 가진 그의 아들 이방원에게도, 조선은, 이씨, 자신들의 나라이다.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었기에, 자신들 마음대로 다스리고 싶은 욕망을 그들 이씨들은 감추지 못한다. 당연히 그런 그들에게, 정도전이 만든,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얼토당토치 않다. 나라를 만들어 놓고, 뒷짐지고 구경을 하라니!

물론, 정도전의 민본이라는 것이, 이미 고려 말, 그들의 개혁적인 토지 제도 정전법이, 신료들의 거센 저항에 밀려, 한 발 뒤로 물러선 것처럼, 시대적, 신분적  한계를 지니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한 임금의 개인적 권력이 아니라, 사상적 자각을 한 신하들의 집단 지도 체제라는 틀은 당시로서는, 아니 지금의 시각에서도 시대를 앞서나간 진보적 선구안이었다. 

그러난 그런 정도전과 그를 따르던 조선을 만든 중심 세력의 입장은, 새로운 나라 조선이 건국되자 마자, 바로 갈등의 씨앗이 된다. 자신의 나라라 생각한 왕과 그런 왕을 중심으로 왕권 중심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세력과, 그에 반하는 세력간의 500년간의 피튀기는 혈투의 시작이다. 

결국 역사적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정도전의 선구적 시도는 이방원이 도모한 왕자의 난으로 실패로 마무리지어진다. 하지만, 정도전이 만든 조선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삼정승 제도의 합의에 기초한 의정부 제도와, 상소 등을 통해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간원 등이 500년 동안 끊임없이 왕권 중심으로 가려는 조선을 흔든다.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을 비롯하여, 조선의 역사 속 걸출하게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왕들은 신하들과의 정쟁에서의 승리를 전리품으로 챙긴 경우가 많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당쟁과 사화는 그런 전쟁의 또 다른 표식일 뿐이다. 끊임없이 조선의 신하들은, 사실은 자신들의 나라인 조선을 자신들의 수중으로 되찾기 위해, 왕권을 향해 도전하고, 의정부 중심제의 국가, 사간원 등을 통해 왕을 교육하고, 통제하고, 조련하는 국가를 만들고자 애써간다. 

<정도전>에서 이미 보여지듯이, 왕자의 스승이 된 정도전은 어린 왕자에게 자신의 사상을 설파한다. 정도전이 능력있는 이방원이 아니라, 어린 왕자를 차기 대권 주자로 선택한 이유이다. 정도전의 세력에게 왕은 능력있는 지도자일 필요가 없다. 그저 신하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왕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벌써 새로운 나라만 세우면, '모든 것을 다 맡기겠다'던 이성계부터, 정도전이 만들어 놓은 왕이라는 틀에 회의를 느낀다. 그의 아들 이방원은, 분노를 넘어 적대감을 표명한다. 만들어지자 마자, 조선은 위기에 빠진다. 그런데, 그 위기는 단지 헤게모니의 싸움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 정통성의 위기이다. 조선이 조선다울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  싸움은 500년을 가고, 왕의 성격에 따라, 신하들의 성격과 포진에 따라, 조선의 정통성은 파고를 넘나든다. 


by meditator 2014. 6. 8. 13:57

5월 24일 방영된 <정도전>에서 정몽주는 임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성계가 병중에 있는 동안 정도전을 없애고, 그와 함께 그들이 추진려던 역성 혁명의 싹을 짤라버리려던 정몽주였다. 하지만, 그런 정몽주의 시도가 이성계가 정신이 돌아오자 마자, 정도전의 처형을 미루는 것으로 시작하여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려는 찰라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면서도 정몽주는 무장한 장수들과 군사들이 겹겹이 애워싸고 있는 이성계의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를 놓을 수 없다. 자신과 정도전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칼을 들이미는 정몽주에게 이성계는 눈물로 읍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이 된다고 해서 권세를 누리려 하지 않겠다고 모든 것을 정도전과 정몽주에게 맡기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애닳게 잡은 이성계의 손을 정몽주는 밀어낸다. 그리고 돌아가 정도전을 처형하겠다고 단언한다. 그런 정몽주에게 이성계는 이제 당신과 절연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정몽주에게 연연해하는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긴 이방원은 지필묵을 가지고 정도전을 찾아간다.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하지만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당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초조해 하는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며, 정몽주를 제거하면 자신들의 혁명은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라며 이방원의 청을 물린다. 

그런 아버지와, 정도전의 태도를 우유부단함으로 여긴 이방원은 결단을 내린다. 정몽주를 청해 그 유명한 '이런 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하여기를 통해 설득을 하고, 그에 정몽주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의 단심가의 화답을 받고,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선죽교 다리 위에서 죽여버린다. 영문도 모르고 감옥에서 나오던 정도전은 정몽주가 죽은 것을 알고 그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한다. 이성계도 마찬가지다. 정몽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포효한다. 어떻게든 피를 덜보고, 정당성을 놓치지 않고, 민심을 얻으며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던 정도전과 이성계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정도전 정몽주 단심가
(사진; tv데일리)

39회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의 유동근이 정몽주 역의 임호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는 모습은, 그 어떤 드라마의 애정씬 못지않게 간절했다. 역대 어느 드라마의 남녀 배우가 이렇게 간절하게 등을 돌린 연인을 향해 진심어린 애원을 했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 장면이 <정도전>을 지켜본 시청자들에게는 전혀 오글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계의 진심으로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이성계를 주군으로 모시고 역성 혁명을 도모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이성계와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이라는 뜻을 같이했던 정치적 동지였었다. 정도전과 정몽주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정치적 은인에 가깝다. 세상이 아직 이성계와 정도전을 알아보기 전부터, 정몽주는 그들을 알아봐주고, 그들의 뜻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정치적 행동을 했던 동지였다. 그런 정몽주였지만, 오랜 정치적 행보의 끝에 이제,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는 궁극의 입장에서 이성계와 정도전, 정몽주는 뜻을 달리한다. 

우리가 어릴 적 배운 역사 이야기 속에서 정몽주는 그저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고려의 충신일 뿐이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그런 모습이 드러났다. 정적들을 제거하고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온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라는 건의를 한 반면, 같은 글자에서 시작한 정몽주는 전혀 다른 충성 충(忠)자를 새겨 고려라는 테두리를 이성계에게 각인시켰다. 물론 드라마에서 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토지 제도를 둘러싼 유학들의 대립에서, 대지주 출신의 이색 등이 토지 제도 개혁을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주 계급 출신의 정몽주 역시 그런 자신의 출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강직한 유학자였던 그가 유학자로서의 역성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옳고 그르고는 고려의 멸망이, 그리고 조선의 건국으로 증명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성계의 표현대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을 리가 없을 진대, 대들보가 썩어버린 고려를 붙들고 있었던 그의 신념은 우매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결과일 뿐이다. 당대를 살아갔던 인물로서 정몽주의 신념과 행보는 드라마<정도전>을 통해 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설득력을 가진다. 자신이 몸담았떤 시대를 쉽게 지워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정몽주를 통해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충신으로서, 혹은 계급적, 사상적 한계를 넘지 못한 사람으로서 정몽주를 드라마 <정도전>은 그 어떤 한 측면에서 규정짖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간 한 명의 생생한 캐릭터로서 부각시킨다. 강직한 유학자였지만, 고려라는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그 역시 정도전이 그랬듯, 스스로 정치적 모든 수단을 도모하여야만 했던 인물, 그러나 무력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에게 자신들이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했던 인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절친이었던 정도전과, 정치적 동지였던 이성계의 간청을 밀어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시대를 넘어설 수 없었던 보수주의자 정몽주를 드라마 <정도전>은 살려낸다. 그래서 그저 선죽교의 지워지지 않는 붉은 피로만 기억되었던 고리타분한 역사 속 위인은 고려말 격동기를 자신의 목숨을 다해 신념을 지켜내려 했던 인물로 되살아 났다. 간신 이인임을 권문 세족의 대표이자 정치적 실권자로서의 노회한 이인임으로 살려낸 데 이은, <정도전>의 또 하나의 성과이다. 


by meditator 2014. 5. 25. 02:31

낚시밥으로 사용하는 지렁이를 한 움큼 움켜쥐고 입에 털어 넣으며 생명을 구걸하던 이인임이 4월 28일 31회 드디어 유배에 처하던 도중 생을 마감한다. 다음 회, 이성계와 길고 지리한 싸움 끝에 땅끝으로 유배를 당했던 최영도 명나라 사신의 안전을 위해 처형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제 일전일주제로 이성계파의 혁명적 전제 개혁을 무마시킨 이색의 저항은 다음 회 그의 수족에 대한 제거 작업을 시작으로 조만간 끝을 맺을 예정이다. 그리고 이인임, 최영, 이색의 몰락과 함께 고려도 무너져 갈 것이다.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개국 과정을 다룬 <정도전>은 그간 사극에서 간신 혹은 역적 이인임, 명장 최영, 고고한 학자로만 그려졌던 이색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 캐릭터로 재조명해냄으로써 사극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정도전 이인임 박영규
(사진; tv데일리)

그 중 이인임은 역사 속에서 왕의 장인으로서 혹은 역적의 주모자로 단편적으로 제시되었던 인물이다. 그저 그런 흔하디 흔한 역사속에서 만났던 간신이었던 이인임을 박영규라는 배우의 열연을 통해, 고려 말 권문 세족의 대표자로 새롭게 제시한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일인자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아비를 제거하고, 그 아들의 양아버지가 되는, 어떤 권모술수도 마다하지 않는 노회한 정치가로써의 이인임은 아마도 <정도전>이라는 드라마가 그려낸 고려 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자처하던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권력의 경구들은, 때론 보는 시청자들조차 매료시킬만큼 정치판의 본질을 관통한다. 그의 활약 덕분에, 드라마 <정도전>은, 그리고 조선의 건국은 단순한 논리의 혁명을 넘어, 보다 복잡한 정치적 세계의 혼돈으로 입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인임의 예언처럼, 고려를 지탱해 왔던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 세족의 몰락은, 무장 최영의 기대와 달리, 고려의 종말을 앞당긴다. 
이인임을 제거하고 야심차게 고려의 실권자로 등극했지만, 정치적 안목도, 변혁에의 청사진도 없었던 그저 결국 소박한 무장에 불과했던 최영의 치세는, 또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함께 단명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최영의 몰락은 일찌기 무신 정권 이후 후기 고려를 지탱했던 무신 세력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역적 이인임을 노회한 정치가로 그려내듯이, 역사 속 의인이었던 최영 또한 순수한 애국심은 있었으되, 그 애국심의 한계가 고려 왕조의 틀 속에 갇힌 협소한 시야의 인물로 그려내는데 고심한다. 한 인물의 열정과 노력이, 그 시야가 한정적일 때 가져오는 역사적 불행을 최영이라는 무장을 통해 철저히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요, 제 아무리 한 개인적으로는 양심적 인물이라도, 백성의 삶을 걱정하지만, 정치적 야심에 있어서는 현실을 보살필 수 없었던 고려의 무장이라는 현실적 존재를 뛰어넘지 못한 역사적 존재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그려내 보인다.

부패한 권문 세족을 제거했지만, 그보다 앞선 많은 무신 정권들이 그러했듯이, 결국 왕이라는 언덕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순수한 하지만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그의 열정은 자신은 한 점 부끄럼이 없으니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거라는 형장의 애처로운 외침으로 끝을 맺고 만다. 

정도전
(사진; 텐아시아)

그렇게, 고려를 지탱해 왔던 권문 세족과 무신 세력이 축출되었지만 여전히 고려를 지탱하던 마지막 희미한  등불이 남아있었다. 바로 이색을 중심으로 한 신진 사대부 세력,.
고려 말에 과거 제도를 통해 정치 내에 개혁 세력으로 등장했던 이들은, 어느 새 그 자신들이 권문 세족과 같은 대농장의 주인은 아니지만, 지주로 안정된 자리를 잡으면서, 정도전 등이 제시한 사전 혁파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신진 사대부 세력 내의 정치적 대립은, 결국 그 근간에서는 잃을 것이 많은 땅을 가진 지주와, 그렇지 않은 혹은 그것을 지양하고자 하는 혁명적 세력의 대립으로 귀결된다. 
역사적으로 학자로 이름을 떨친, 조선 건국 이후 새로운 나라에 봉사하지 않았던 고려의 충신으로 칭송받았던 이른바 이색학파 등 재야 학자들의 본질을 드라마<정도전>은 낱낱이 폭로한다. 또한 어느새 중앙 정치의 기득권 세력이 되어 개혁의 반대 입장에 서게 된 신진 사대부들의 행태는, 또한 조선 건국 이후 조선의 한계를 규정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드라마 <정도전> 속 정치는 경제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땅의 경계가 하도 넓어 산과 강을 경계로 땅을 나눌 수 밖에 없었던 세력이 정치의 실권자가 되어 고려를 농단했고, 그런 현실을 거들떠 보지 않은 정치적 열의는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저 조금이라도 좀 더 가진 자가 된 사람들 앞에 학문적 원칙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폭로한다. 이인임, 최영, 그리고 이제 이색이 축출로 이어지는 조선 건국의 과정은, 고려라는 나라의 정치 경제적 모순의 해결 과정이기도 하다. 단순한 정치적 쿠데타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을 지양하고, 나라의 근간을 뒤짚어 엎는 혁명으로서의 조선을 그려내는 고심의 과정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4. 4. 28. 09:06

4월 12일 <정도전>은 이성계(유동근 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서인석 분)에 이은, 우왕(박진우 분) 축출까지 거침없이 달려오던 반군 세력이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차기 왕 옹립을 둘러싸고 입장을 달리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은, 이성계 일파가 밀었던 왕족이 아닌, 왕가의 사람들과 조민수 (김민수 분)장군 일파, 그리고 왕통을 중시한 이색(박지일 분) 등의 신진 사대부들이 민 우왕의 왕자 왕창, 창왕의 등극이다. 

드러나는 사건은 귀양을 가 있음에도 여전히 중앙 정계 복귀를 노리고 있는 이인임과 손을 잡은 조민수 세력이 정통성을 중시하는 신진 사대부 유림 세력과 손을 잡아, 새롭게 대두된 실세 이성계를 정치적으로 패배시킨 사건이다. 하지만, 정치적 세력의 이합집산 외에, 이 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보다 결정적이다.

극중 정도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고려를 부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런 이유를 꿈꾼 가장 본질적 이유는, 바로 지금의 고려가 어떻게 해도, 기존 권문 세족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12일 방영된 방송분 중, 정도전은 함께 할 인물로 염두에 둔 조준(전현 분)의 집은 찾는 장면이 방영된다.
조준 집 벽에는 고려의 지도가 걸려있고, 그 곳곳에 서로 다른 색으로 표기된 팻말이 붙어있었다. 그 지도의 표식에 대한 정도전의 집요한 추궁 끝에, 조준은 그 지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색이 바로 권문 세족의 땅이라는 것을 밝힌다. 경계를 세우는 것조차 무색하여, 산과 강으로 경계를 세우게 되었다는 고려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어버린 고려의 현실을 밝힌다. 
그런 조준에게 정도전은 자신의 꿈에 함께 동참할 것을 권유하며,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 적은 종이를 건넨다. 즉, 정도전이 꿈꾸는 나라란 바로, 지주도 없고, 소작도 없고, 제 땅을 일구는 자작농의 나라라는 것을 의미하는 네 단어이다.

(사진; tv리포트)

즉, 정도전의 개혁이란, 단지 정치적 실권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지금의 권문세족들을 개혁하고, 그들이 점횡한 토지를 빼앗아 백성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고려에서는 더 이상 그런 그의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보았기에 고려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야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세우고자 한 이성계는 여전히 고려라는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이성계와 보조를 맞추고자 과도기적 과정으로 선택한 것이 자신들의 입장에 서줄 수 있는 왕의 등극과 함께 권문 세족에대한 개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2일 방송에서도 보여졌듯이, 고려라는 틀을 어찌되었든 유지해 보고자 했던 이성계와 정도전의 마지막 시도는 결국 조민수라는 권문 세족과 유림 세력의 합종연횡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조민수와 이인임의 결탁 과정에서도 보여지듯이, 고려에서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권문 세족의 발호이다. 광대한 농장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고, 그것이 몇몇 정치적 인물의 거세만으론 정도전과 이성계가 지향하는 개혁에 이르기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결과가 되었다. 

또한 정치적 혈통을 운운하며 기존 정치 세력과 합류하는 이색 등의 유림 세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진 사대부라고 불리워지는 유림 세력 내에서도 기득권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원칙적인 유교적 입장을 견지하는 듯 하면서도, 왕통이라는 명분에 매달리는 이색 등의 입장은, 결국, 고려라는 틀 속에서 자기 세력의 부흥을 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세력으로 신진 사대부가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색 일파와 그와 입장을 달리하는 정도전, 그리고 거기에 합류한 윤소종, 조준 등에서도 보여지듯이, 신진 사대부라며 고려 말에 대두되었던 유림 세력이, 고려말 조선 건국 과정에서 서로 갈라질 수 밖에 없는 과정을 또한 12일의 방송분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2일의 <정도전>은 위화되 회군 이후의 또 한 번의 분수령이 된다. 당장의 정치적 사건으로 이성계는 실패하지만, 결국 권문 세족과 신진 사대부 세력의 연합에 의한 이성계의 정치적 실각은, 결국 이성계로 하여금 역성 혁명을 앞당기게 만드는, 혹은 역성 혁명을 결심하게 만드는 도화선이 되도록 한 사건이다.

의식있는 드라마가 반영하는 현실은 극명하다.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정치적 이합집산의 그 배후에는 결국 당대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태도가 존재하며, 각각의 경제적 이해에 따라 결국 패가 갈리고 입장을 달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땅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땅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2014년에조차 가장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정도전에게 있어, 고려는 거둬 던져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허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고려라는 나라를 통해 쬐금의 이해 관계라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거기에 집착하거나, 거기에 연연한다. 바로 그런 기본적 이해관계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된다는 것을, 드라마<정도전>은 보여주고 있다. 이성계의 앞에서 충성 충자를 쓴 정몽주의 한계가 또한 그것이다. 

(사진; 뉴스엔)

하지만 정도전만이 아니다. 또 한 사람의 지도자의 운명이 걸린 <쓰리데이즈>에서 이동휘 대통령과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재벌 김도진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울 한 복판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것조차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 조국이 없는 무한 이익주의의 경제적 동물과의 전쟁을 이동휘는 선포하였다. 
<골든 크로스>도 마찬가지다. 강주완이라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의 가정을 뒤흔든 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 상위 1%의 집단의 경제적 이해 관계를 향항 무한 이기주의이다. 
몇 백년전의 과거가 되었든,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을 다룬 드라마건, 한 개별 가족의 복수극이건, 드라마들은 말한다. 본질은 내 삶의 밥줄을 쥐고 흔드는 경제적 문제라고, 그리고 그 본질을 뒤덮고, 나와는 상관없는 저들간의 노름처럼 보이는 정치가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것은 단순한 경제 환원주의나 경제 결정론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보다는 우리을 무관심으로 끌고가는 정치의 본질이 무엇이라는 걸, 그래서 저들의 리그려니 하지 말고, 정신 똑똑히 차려야 한다는 각성을 촉구하는 입장에 가깝다. 바로 이것이 최근 드라마들이 줄기차게 부르짖고 있는 담론의 본질이다. 이성계가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를 통해, 백성에게 땅을 골고루 나눠주려 했던, 정도전의 혁명이 실현되느냐가 본질이다. 그래서 드라마의 제목이 <정도전>이다. 


by meditator 2014. 4. 13. 11:34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란 학생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내는 확신'이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학생 토니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한다. 그것이 어느 것이 되든 결국 역사란 그것을 해석하는 후자들의 몫이라는 의미에서 두 정의는 공통점을 가진다.  


매주 토, 일요일 9시 40분에 방영되는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정도전이 그리는 새로운 국가에 대한 이상의 출발점을 부패한 고려 사회로 짚었다.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 의지를 펴보지 못한 신진사대부 정도전은, 궤도를 틀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대업을 꿈꾸고, 그것을 함께 할 사람으로 이성계를 고른다. 하지만, 그런 정도전의 대업에의 권유에 대해 이성계는 냉정하다. 자신이 고려를 무너뜨릴만한 힘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은 욕심 이상의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그래서 드라마 <정도전>은 당신에게 대업은 하늘이 내린 일이라고 강변하는 정도전과 그에 대해 부정하지만, 결국 회군을 하고, 최영을 제거하고, 왕을 패하며 고려의 멸망에 한 발 한 발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이성계의 고뇌를 담는다. 그의 고뇌가 깊을 수록, 그가 세우는 국가가, 그저 그 자신과 정도전 등 소수의 집단에 의한 쿠데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드라마는 설득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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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성계가 어땠는지, 정도전이 어땠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조선을 건국한 승자들인 그들이 남긴 기록을 가지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부정확한 확신일 수도, 그들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하며 조선의 건국이란 사건이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즉, e.h.카가 말하듯, 역사는 과거와 그 과거를 해석하는 자들의 대화라고 했을 때, 방점은 과거를 해석하는 자들에게 찍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에 와서 다시 해석되는 이성계의 촛점은 무엇일까?

배우 유동근씨가 이성계가 아닌, 그의 아들 이방원 역을 맡았던, 그 당시 화제가 되었던 <용의 눈물>의 경우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자의 난을 거쳐 가는 과정에서 보여진 '왕권 확립'의 과정을 다룬다. 즉 정통성도 있지만, 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지도자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 촛점을 맞추었다. 왕자의 난을 거쳐 아버지를 배신하고 왕이 되는 이방원과, 그에 의해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양녕대군의 모습이 화제를 되었던 이 작품에서 지도자는 한 나라를 카리스마있게 이끌어 가는 강력한 리더쉽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정도전>에서 이성계는 어떤가? 그는 계속 고뇌한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정말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닌가? 혹시 그저 자신의 욕심이 아닌가? 회군이 정말 고려를 위한 일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하며 최영과 맞서는 과정이 정말 옳은 길인가? 정도전은 그에게 대업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이성계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할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협잡과 거짓을 밥먹듯이 했던 이인임과 권력의 자리에 앉자 강직했던 무장의 모습을 잃은 채 명예와 명분에 빠져버린 최영과 더욱 대비된다. 드라마 <정도전>은  무장이지만,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못지 않게 고민하는 인간형인 이성계를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모습을 말한다. 

<정도전>의 이성계에 못지 않게 또 한 사람의 고뇌하는 대통령이 있다. 바로 <쓰리데이즈>의 이동휘 대통령이다. 그는 양진리 사건의 주동자로 특검에 기소되었지만, 사실 그는 양진리 사건이 그렇게 집단 학살극이 될 줄 몰랐던 재벌과 다국적 기업의 개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쉽게 내뱉듯이,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라고 발뺌하면 될 것을, 그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미 대통령인데도, 자신이 불가피하게 그 일원이 되었던 지난 역사적 과오를 밝히고자, 책임지고자 나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법을 수호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원칙을 지키고자 애쓴다.

이동휘가 그를 만류하는 비서실장에게 '그게 옳은 일이잖아요' 라고 반문하듯, <쓰리데이즈>의 이동휘 대통령과, <정도전>의 이성계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권력의 유지가 아니라,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원칙적인 길을 가고자 하는 담백한 목표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담백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이동휘 대통령은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고, 대통령 자신은 탄핵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성계는 피하고자 하지만, 그가 존경했던 최영도, 그가 받들겠다고 했던 왕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원칙을 위해 이동휘는, 대통령으로서의 법과 수호를 지키는 대신에 다시 김도진과 팔콘의 개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되고, 이성계는 역모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정통 사극을 표방한 <정도전>은 당연히 고려말 조선 건국을 다룬 역사 정치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고, 이미 조선이라는 승리의 결과물이 분명한 사건이기에, 그 승자에 감정 이입하며 이성계의 원칙이 승리하는 과정을 흔쾌히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쓰리데이즈>는 불편해 한다. 정작 자신이 몸담고 사는 세상의 정치 이야기는 껄쩍지근하다고 한다. 자신이 백기들고 사는 현실을 소환해내는 드라마가 불편하다고 한다. 역사는 즐길 수 있지만, 현실은 삶의 무게감으로 다가오니, 힘들다고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현실의 정치는 버겁다고 한다.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도, 그리고 불편한 현실이라도, <정도전>과 <쓰리데이즈>를 통해 그려지는 고뇌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바로 이 시대 우리들이 가슴 속에 품고 그리워하는 그것들이다. 21세기 드라마의 햄릿형 지도자들은, 바로 자신의 권력 유지나, 이권이 아니라, 굼민을 위한 지도자가 가는 길을 고민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 속 소망이다. 결국 그것이 몇 백년전의 과거의 사건이듯, 혹은 현실이든, 결국 모든 역사적 결정의 끝에는 지도자의 선택이 있다. 양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뇌하는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을 수록, 드라마는 푸르게 빛난다. 
그래서, 그저 몇 프로의 시청률로 퉁칠 수 없다. 그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지켜봐주고, 함께 그 고민을 나눠주길 바랄 뿐이다. 


by meditator 2014. 4. 7. 16:22

고등학교 시절, 조선 건국의 개략적 설명에 '사대주의'란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당시 줄긋기를 즐겨하시던 역사 선생님은 사대주의에 줄을 그으라 하시며, 그냥 사대주의가 아니라, 실리적 사대주의라 부연 설명을 덧붙이셨다. 하지만 역사 인식의 폭이 단순하던 그 시절, 사대주의면 사대주의지, 실리적 사대주의라는 단어가 가진 이율배반성에 대해 고등학생들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몇 십년이 흘러, <정도전>은 그 시절에 밑줄 그어진 사대주의의 속내를 공들여 설명해준다.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의 과정을 그려내는 대하드라마 <정도전>은 이제 드디어 이성계의 회군이라는 사건에 이르렀다. 드라마는 '회군'이라는 군사적 사건을 그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위한 야심의 일환이 아니라, 여말의 혼란기에 명분과 실리라는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세력간의 팽팽한 정치적 입장 차이로 설명해 내고자 한다. 

귀족 우두머리이자, 실질적인 고려의 실권자였던 이인임을 부정부패의 주구로 척결해낸 최영과 이성계의 연합 세력은 새로이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명나라에 대한 입장으로 의견을 달리한다. 

(사진; tv리포트)

철령 이북의 고려 지역을 넘보는 명나라에 대해 최영은 명분을 우선시한다. 이제 막 입지를 확보해 가는 명나라를 얕잡아 본 최영은 무장답게, 고려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요동 지역 정벌을 주창하며, 고려를 황제국으로 격상시킬 것을 선포한다. 그런 그의 결정은, 모처럼 이인임 등의 세력을 척결하고 고려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고 만다. 노회한 무장의 마지막 욕심이 자신은 물론, 한 나라의 운명을 달리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해 이성계와 유림 세력은 입장을 달리한다. 이제 막 중원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명나라와의 싸움은 국력이 고갈된 고려에 있어서 곧 그 나라의 운명을 종식시킬 수도 있는 위기로 바라본 것이다. 최영의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군량미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요동 정벌은 무모한 시도라 본 것이다. 물론 명을 정신적 어버이로 가진 유림 세력의 한계를 짚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쇠잔해 가는 고려의 절박한 상황을 더 부각시키며, 그것을 고민하는 젊은 신진 사대부의 고뇌와, 백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이성계를 부각시킨다. 

이러한 최영과 이성계, 유림의 대립은, 언제나 강대국들 사이에서 국가적 위기를 겪어 온 한반도의 역사에선 시사적이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배제한 채 명분에만 몰두하여 결국 병자호란을 일으킨 인조 시대의 무능한 외교 정책을 떠올려 보면, 시대를 달리하여 건국 시기의 조선과 그후 몇 백년이 흘러 오히려 여말 최영과도 같은 그 후손의 무모한 선택의 다른 길이 더욱 선명하게 대비된다.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명분은 그 저간의 사정이 배제된 그 문구로 보면 훌륭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인임 등의 핍박으로 왕실 곳간조차 채우기 힘들 정도가 된 고려 말의 그 명분은 허세에 불과하다. 그것은 21세기에도 강경 일변도의 외교 정책으로, 스스로 입지를 축소해 가는 현재의 정세를 비추어 보아도 교훈은 여전하다. 

드라마 속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역성 혁명은 그의 대의라 강권한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인임이 끝내 그를 믿지 못했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하는 고려의 신하로 그려진다. 정도전에게 자신에게 욕망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며 토로했던 이성계에게 대의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단언했던 정도전의 정의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역사는 위화도로 간 이성계의 발목을 자연 재해와 역병으로 발목을 잡는 것처럼 그려낸다. 

역사를 온갖 우연적 요소의 집합체로 설명해 낸 슈테판 츠바이크의 주장처럼, 하늘이 뚫린 것처럼 쉬지 않고 내리는 비, 그로 인한 군졸들의 탈영과 역질, 그리고 군량미 부족은 이성계에게 천명을 설득한다. 그리하여,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 그저 누군가의 욕망과 야심으로 인한 획책이 아니라, 불가피한 그 시대적 결론인 것으로써 그려내고자 드라마는 고심한다. 수많은 우연의 사건 들속에서 결국은 그 실체를 드러내고야 마는  필연적인 역사이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 누군가의 야심이나 야망의 집합체가 아니라, 불가피한 역사적 결론이었음을 설명해 내기에 고심한다. 


by meditator 2014. 3. 31. 02:59

조선 왕조의 건국을, 그 기틀을 구축한 삼봉 정도전의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는 kbs1의 대하 드라마 <정도전>이 조선 건국의 인큐베이팅에 들어섰다.


귀양을 내려가 만나게 되었던 백성 아니 도자기를 빚어야 살아갈 수 있는 부곡민 천복과 양지를 만나 막연했던 정치적 풍운아에서 고려의 실상, 그리고 나라의 중심이 누구여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된 정도전은, 이 두 사람의 죽음을 겪으며, 더 이상 고려라는 나라로는 그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결론과 함께, 정치의 중심에서 벗어나 유랑 생활을 거듭하던 그의 방랑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드라마 <정도전>은 정도전과, 천민 양지, 천복의 만남과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정도전을 상세히 그려냄으로써, 정치인 정도전의 목적이 일종의 '민본주의'임을 분명히 하고자 애쓴다. 중앙 정치가의 전횡으로 먹고 살기 힘든 그들의 생활, 외구의 침탈에도 보호막이 되어줄 수 없는 정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외구의 앞잡이가 되거나, 그게 아니라도, 결국은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힘없는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기 위한 정부여야 한다는 신념을 드라마는 삼봉을 통해 피력하고 또 피력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백성 중심 사상은 당연히 그 누가 왕권을 잡던 상관없이 그들을 제대로 따뜻하게 보살피기만 하면 된다는 역성 혁명의 사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고려라는 왕조 국가를 거쳐,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 낸 정도전의 진실된 면모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 고려 말 사회적 갈등의 가장 큰 부분이자, 고려 왕권을 허약하게 만들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이 바로, 세금을 낼 백성들을 모조리 흡수해버린  일부 권문 세가의 농장과 사병이었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것을 지양한 새로운 체제라는 것이, 불가피하게 세금을 낼 수 있는 소농들이 중심이 된 이상적인 정도전이 구상한 토지 제도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 역시  조선 왕조 개국 후 불과 몇 명의 왕을 거치지도 못하고, 왕가와 또 다른 신흥 권문 세가들의 이해 관계에 의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할 운명을 지닌 이상적(?)인 제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민본주의적 지향을 가졌음에도 정작 백성이 어쩔 수 없이 자기 삶의 기반을 잃거나 포기하고  권문 세가의 그늘이 된  '노비'에 대해서는 무신경한 한계를 드러내며 시대적 한계를 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석의 여지와 상관없이 드라마 <정도전>의 지향은 분명하다. 한 나라의 존립 근거는 그 나라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드라마의 시각,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정도전의 시각에 따라, 드라마 속 인물들은 혁명과 개혁의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 원대한 기획을 마친 정도전은 자신과 함께 할 인물로 고려를 넘어뜨릴 만한 무력을 가진 그 누군가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레이더망에 잡힌 인물이 바로 최영이다. 주변에서 만나는 백성들에게 번번히 물어볼 때마다 답으로 돌아온 최영을 만나 새로운 국가를 도모하고자 했던 정도전은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발길을 돌린다. 먹고 살기 위해 법을 어긴 백성에게 무리한 벌을 내리는 최영을 보고, 그가 백성을 생각하기에 앞서, 그 뿌리에서부터 고려라는 왕조 국가의 사람이라는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다음 발길이 향한 곳은 최영만큼 전국민적 인지도(?)에 있어서는 떨어지지만 그 못지 않은 잠재적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성계이다.


(사진; 미디어펜)

정도전이 선택한 이성계는 미묘한 경계인으로 그려진다. 조선이라는 500년의 완고한 유교적 왕조 국가를 이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인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국경이 분명하지 않은, 싸움 한번에 고려인이 되기도 혹은 오랑캐가 되기도 하는 경계에 자신의 존립 근거를 가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이 되려 애쓰지만, 그래서 고려 조정의 견제 대상이 되는 위태로운 운명의 인물로 그려낸다. 또한 고려를 뒤엎을 만한 무력을 가졌음에도, 고려를 뒤엎은 후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 능력이 없어 안타까운 무장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안타까움의 근간을 드라마는 전쟁터를 누비며 짐승처럼 살아온 그가 가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멈추고자 하는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게 만들고 싶은 덕장의 이미지로 설명해 낸다. 그렇게 하여, 백성을 생각하는 정도전과, 살생을 더 이상 피하고 싶은 이성계의 접점을 드라마는 그들이 만나기도 전에 이미 완성해 낸다. 

그리고 이제 드라마는 두 사람이 만나 혁명을 논하고, 그리고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그런 과정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갈 것이다. 새로운 나라라는 불온한 담론 앞에서 인연도, 우정도, 보은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결국 기로에 서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과거를 논하지만, 결국 그 생각의 끝이 닿는 곳은, 현재이다. 2014년의 국영방송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국가가 되지 않는다면 혁명조차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는 가장 불온한 서사이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2014년의 대한민국이 던진 질문이다.  


by meditator 2014. 2. 23. 10:14

 18일 방영된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5회분은 전국시청률 13%를 기록했다(닐슨). 종전 기록보다 1.4% 상승한 수치로 자체 최고 시청률이다.

이날 방영된 내용은 원과 다시 손을 잡으려는 이인임, 그의 설득에 넘어간 최영, 그리고 그에 반대해 명과 손을 잡아 원을 저지하려는 정도전과 사대부 세력, 그런 정도전을 제거하려는 이인임, 그런 이인임보다 강경하게 정도전을 처형시키려는 최영에 맞서 정도전의 목숨을 구하려는 정몽주 등의 고군분투가 그려졌다. 덕분에 참형에 처할 뻔하던 정도전은 목숨을 구하고 대신 삭탈관직과 유배령으로 개경을 떠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소신 무능해 간신배를 몰아내지 못했나이다. 이 죄 달게 받겠나이다.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

이는 유배를 떠나야 하는 정도전의 입에서 나온 대사이다. 대사로만 보면 정도전은 천하의 충신이다. 그리고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정도전 말고는 도무지 고려에 제대로 된 신하라고는 없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의 충신 정몽주가 하는 일이라고는 늘 전전긍긍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사건을 만드는 정도전의 뒷수습을 하느라 쩔쩔 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가 정도전을 구명하지 못해 미안해한다. 아니 뭐 일찍이 미쳐 돌아가던 공민왕이 그의 말 한 마디에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사진; 뉴스엔)


이제 시작한 지 5회에 불과한 시간에 드라마에서 정도전의 목숨이 벌써 몇 번이나 경각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드라마에서 권문세족으로 나오는 이인임에게 호령을 하며 대드는 건 예사요, 고려 최고의 명장 최영을 찾아가 독대를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죽은 공민왕 앞에서도 눈 하나 끔쩍 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을 보면, 정도전은 열사요, 의사다. 덕분에, 역사 속에서 간신으로 낙인 찍힌 이인임이야 그렇다 치고, 최영에, 정몽주까지, 모두 가 올바른 정도전 앞에, 어딘가 모자르고 부실한 인물로 보일 뿐이다.


특히, 18일 최영이 정도전의 참형을 주장하는 부분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 바로 전 회에 이인임을 만나 그의 계략에 넘어갔다 해도, 정도전이 직접 찾아가 자신이 생각한 것은 친명이 아니라고 설득을 했음에도, 이인임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처형을 주장할 정도의 개연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그의 심중은 그려지지 않는다.


5회에 등장한 고려의 정국 상황은 중국 대륙의 격동기를 겪고 있다. 그 상황에서, 이인임, 최영 등의 권문 세족은 아직은 지지 않는 태양 원과의 관계를 잘 이끌어 가려고 하는 것이요,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 세력은 새롭게 등장하는 명에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고려의 임금 앞에 충(忠)자를 붙일 정도로 치욕스러웠던 원의 지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후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배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 정신을 짚어 보건대, 결코 정도전 세력의 친명 사대주의도 만만치 않다. 조선의 광해군처럼 실리주의 외교 정책을 펼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말의 세력은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한 나라를 선택하고 있는 양상일 뿐이다.



오히려 최영을 설득하려고 하던 이인임이 중국 대륙이 어느 한 나라에 의해 통일이 된다면 고려는 망할 것이라는 균형론이 그의 정치적 선택과 관련없이 설득력이 있다. 명에 사대를 하는 게 치욕적이라면서도, 원 사신을 대접하는 일을 맡긴 업무가 맘에 들지 않는다 하여 제껴버리는 정도전의 선택은 사상의 조국 명을 향한 해바라기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선택과 결정들이, 그저 옳고 그름이 입장으로만, 조선을 건국할 위인 정도전의 행보를 빛내기 위한 장치들로만 그려진다. 이미 망한 국가이지만, 그 시절 고려 말의 치열했던 정국 상황은 그저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할 불쏘시개일 뿐이다.


드라마는 그런 변화되는 강국의 상황 속에서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세력을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이인임은 나쁜 놈, 그리고, 최영은 거기에 넘어간 한심한 놈, 거기에 반대한 정도전은 좋은 놈이라는 식의 초등학교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논리를 재현한다. 마치 일제시대가 끝나고, 미군이 들어오자, 미군은 무조건 우리 편이라던 논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실제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되는 역사의 상당 부분은 조선이 건국 되고, 정도전 등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고려사’의 내용이다. 심지어 그가 만든 고려사가 사실과 너무 다르다고 태조, 세종 등 조선의 임금들이 개정을 요할 정도였다고 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도전 혹은 이후 조선의 입장에서 그려진 고려사를 드라마는 반성없이 고스란히 복기하고 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는 고려말 세력의 각축전을 단순히 옳고 그름의 이데올로기로써만 그려내고 있으니 역사를 반추함은 없고, 항상 옳았던 위인 정도전만이 남게 된다. 

by meditator 2014. 1. 19. 12:00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한 장면, 국왕인 정조와 척을 지어야 하느냐고 묻는 아들 이선준(박유천 분)에게, 좌상을 맡고 있는 아버지(김갑수 분)는 일갈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라고, 거기에 덧붙인 그의 설명은, 왜란 당시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려는 임금과 달리,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 사대부라는 명목이었지만, 기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실권은 사대부의 손에 달려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배경이 조선이 건국된 지 어언 300여년이 흐른 1700년대, 그 드라마에서 국왕으로 나온 정조는 무려 조선의 22대 임금이었다. 비록 드라마라지만, 300년이 흐른 조선의 좌상 입에서 당당하게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는 정언을 드러내게 하는 그 기초를 세운 자가 바로 KBS 대하 사극의 주인공 정도전이다. 300년이 뭔가, 조선 왕조 500여년을 걸쳐, 숱한 사화와 정쟁으로 얼룩진 피비린내 나는 대전을 치루게 만드는, 결국 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왕권과 신권이 자신의 헤메모니를 성취하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정도전인 것이다. 



하지만 그 갈등의 원인을 입안한, 하지만  혈연에 의거한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국왕이 아니라, 철저히 유교적 실력에 기초한 사대부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데올로기적 이상적 국가, 국왕조차도 날마다 신하들에게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명령 하나의 정당성을 두고 신하들과 쟁론을 벌여 정치적 이상 국가를 지향한, 어찌 보면 조선 건국의 진정한 어머니인 정도전은 그간 조선 건국을 다룬 드라마에서는 들러리의 역할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미욱한 신하이거나, 불운한 역적의 모습으로 그려졌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정통 사극'이 그려낸 주인공은, 왕좌의 자리를 차지한 왕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제 아무리 화려한 세트에 웅장한 스케일로 그려낸들, 이제와 되돌아 보니 궁색하고, 시대에 뒤처진 왕조의 영화를 논하는 대신에, 오랜만에 돌아온 KBS 대하 사극은 그 주인공을 조선을 입안한 정도전으로 눈길을 돌린다.

덕분에,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일원으로 정치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정도전의 생애를 그려내기 위해, 고려의 군주 공민왕은 단 두 회만에 신하의 칼에 도륙되고 만다. 국사 시간에 개혁 군주라 이름 붙여졌던, 그리고 노국 공주 죽음 이후 그의 개혁은 흐지부지 되었다던 그 역사의 행간을, 하지만 그보다는 대중들에게는 영화 <쌍화점>의 그 파렴치한 군주의 모델로 상상되던 공민왕의 모습을, 자신을 목숨을 걸고 국왕에게 진실을 고하던 고려의 충신 정도전이 자신의 꿈을 조선의 건국으로 틀게되는 과정의 인큐베이팅 과정으로 적나라하게 다루었다.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대쪽같을 수록, 그의 의지가 무너져 내릴 때, 그의 궤도 수정은 자연스레 시청자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덕분에 그간 이성계의 건국이라는 왕조 중심의, 어찌보면 절름발이 조선의 건국이 이제야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사진; 세계 일보)

제작 발표회에서 정도전 역을 맡은 배우 조재현의 당당한 발언처럼, 모처럼 만나는 정통 사극 <정도전>은 굳이 역사를 뒤틀거나 왜곡하지 않아도, 정사에 실린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드라마적 재미를 줄 수 있으면 증명한다. 역시 KBS1의 사극이구나 라는 전통이 느껴지는 스케일에, 그의 죽음이 역사적 인물이라서이기보다, 그의 연기가 안타까운 마음이 더 들게 만드는 공민왕(김명수 분)을 비롯, 시트콤에서 그 헐랭한 인물을 연기한 사람이 맞는가 싶은 이인임 역의 박영규 등 중진 배우들의 정통 사극다운 연기가 모처럼 그래, 이게 사극이야 라는 찬탄을 불러오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통 사극에서 처음 선보인 조재현의 연기는 정통 사극의 그것과 약간 불협화음같은 걸 느끼게 하는 게, 오히려 그 나름 고려 말 정치의 이방인 정도전이라는 캐릭터에 색다른 생명력을 불러 넣는다. 또한 드라마 끝 무렵 이어붙인 짤막한 역사 다큐 분량은, 일본의 NHK 사극의 형식을 고스란히 빌려온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사실성에 보탬이 되며, 정통 사극의 분위기를 살린다. 비슷한 시기에 정도전를 다룬 사극을 준비했던 MBC가 지레 주춤할 만 하다 싶다. 부디 이 분위기를 쭈욱 유지해 모처럼 되살아난 KBS1사극의 전통을 잘 이어가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4. 1. 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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