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들기는 커녕 나날이 그 도를 더해가고 있는 학교 폭력, 과연 그 '폭력'의 악순환을 멈출 수는 없을까?

학교 폭력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받은 학생이 미안하다고 거절한 이후, 그 학생은 비난을 받았고, 고립되었다. 그 누구도 그 학생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런 '따돌림;은 폭력으로 이어진다. '너 미쳤냐?', '요즘 안 맞았지?', 하는 상시화된 폭력은 피해자를 지옥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뻔뻔하게 말한다. '장난'이었어요 . 그리고 어른들은 말한다. '싸우면서 크는 거지', 여전히 우리 사회는 '장난'치는 친구 관계, 아이들은 다 그런 거라는 식으로 학교 폭력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장난'이 피해자를 피폐한 삶이나, 죽음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는다. 

ebs는 지난 8월 29일부터 3부에 걸쳐 <학교 폭력 공감프로젝트>를 통해 그 방향을 모색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동안 학교 일선 및 정부가 앞장 서서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한 각종 조치를 취했음에도 왜 효과가 없었는가라는 의문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그 의문의 답을 당사자인 '학생'들로 부터 구하고자 한다. 초등학생을 비롯하여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그를 통해 학교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주범'을 '기소'하고자 한다. 선생님들이 '배심원'으로 자리하고, 그곳에 학생들이 기소한 '주범'들이 드러난다. 과연 우리 시대 학생들은 '학교 폭력의 주범'들이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어른'을 기소합니다. 
'제설제 먹이고 폭행', '오물 뒤집어 씌우고 폭행', 학교 폭력과 관련된 언론의 보도 내용들이다.     학생들은 바로 이런 '언론'을 고소한다. 진정으로 학교 폭력에 대한 우려와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대신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가에 초점을 맞춘 언론은 자신들이 바로 '학교 폭력'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말한다. 언론을 비롯하여 어른들이 만든 콘텐츠는 지루하거나, 폭력적이라고. 언론의 자극적 헤드라인은 피해자를 부각시키며 학교 폭력을 선정적으로 소비할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유투브를 비롯한 sns 역시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들을 관심을 끌기 위해 앞다투어 게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폭력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언론이나, 유투브만이 아니다. 학생들은 입을 모아 교육 동영상의 유죄를 '기소'한다고 말한다. 어른들 입장에서 일방적인 폭력 예방 캠페인은 학생들 입장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식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학생들은 교육부의 캠페인이 '느린 예방 교육'이라 냉소한다. 

 

 

여전히 학생들을 본드나 하고 삥이나 뜯는 구시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캠페인, 하지만 이제 학생들에게는 '사이버 폭력'이 새로운 '폭력'으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 그러기에 일방적으로 틀어주는 학교 폭력 동영상은 시대에 뒤떨어진 '졸린 영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졸지 말라고 하기 이전에 '졸음이 오지 않는', 현실적인 대응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기소한다. 학생들에게 '입'으로 하는 말과는 다르게 막상 '상황'이 벌어지면 '책임'을 면하기 위해 '절차'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생님은 믿을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당연히 '학교'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늘 '안일'하게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한 것이 아이들 눈에 비친 '학교'의 모습이다. 당연히 그런 학교와 선생님들의 태도에 학생들은 무력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방관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선생님과 학교만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러기에 학생들은 '대한민국'을 기소한다. 자본주의, 외모 지상주의, 그리고 성취 중심의 경쟁 사회는 학생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그래서 서로를 무시하고, 왕따와 '은따'를 양산하고 학교 폭력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이,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개선되지 않는 한, 그저 일회적인 캠페인 식의 학교 폭력 예방만이 존재하는 한  학교 폭력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 입을 모아 말한다. 즉 학교 생활을 만들어 가는 총제적인 권력 구조, 그 시스템이 바로 지금 학교 폭력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기소'합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 언론, 나아가 우리 사회만의 문제뿐일까?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학교 폭력에서 결코 자신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한 여고 뮤지컬 동아리에서 '빈방 있어요'라는 게임을 한다. 술래가 된 한 사람이 둥글게 원으로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빈방 있어요?;라고 물어본다. 둘러선 학생들의 역할은 '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술래가 뒤돌아서서 '빈방 있어요?;'라고 물어보는 동안, 뒤에 선 학생들은 마치 '방'을 바꾸듯 자리를 바꾼다. 

처음에는 '게임'이니 자신있게 웃으며 '빈방 있어요?'하고 물어보던 술래, 하지만 친구들의 거절이 이어지자,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고 떨리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야 만다. 

이 게임은 바로 이른바 '은따', 은근한 따돌림을 시뮬레이션 해본 것이다. 술래가 된 친구는 말한다. 게임이라고 했는데도 세상에서 동떨어진 듯 했다고, 그 무엇도 해도 안 될 것같은 막막함이 들었다고. 반면, 둘레에 서서 '거절'을 한 친구 역시 설사 게임이라 해도 그 '룰'을 벗어나면 되는데 그걸 따르는 자신에게 '죄책감'이 느껴졌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학생들은 마치 '러시안 룰렛'처럼 형성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나서지 못하는 자신들의 '방관'을, 그리고 '나랑은 상관없어'라는 무관심을 '방관의 카르텔'이라며 '기소'한다고 말한다. 산격 중학교에서는 형사 재판의 형식으로 괴롭힘당하는 친구를 '방관'한 학생에 대한 모의 재판을 열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5 ; 4, 유죄와 무죄의 비율이다. 학생들은 비록 한 표 차이지만, '방관'이 유죄가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4표의 학생들은 말한다. 자기도 폭력을 당할 까봐 차마 나서는 게 쉽지 않다고. 그러기에 방관하는 자리에서 한 걸음 나서는 것이 '대단한 용기'라고 배심원이었던 선생님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 '방관'의 카르텔에서 몸을 숨긴 학생들을 바꾸면 학교 폭력이 만연한 현실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져본다. 



이와 같은 학교 폭력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행복지수 2위, 경쟁없는 교육을 지향하는 덴마크에서도, 국가 학력 조사 최상위국인 핀란드에서도 학교 폭력의 관행은 피해갈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학생들의 학교 폭력에 대한 고민을 공유한 이 나라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의견에 적극 공감을 표한다. 그리고 역시나 일회적인 캠페인 성 교육이 아니라 지속적인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연대감, 그리고 사회적 감정 교류의 능력을 고양 시켜야  학교 폭력의 악순환,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by meditator 2022. 9. 22. 23:18
  • go1den_goose 2022.09.23 05:27 신고 ADDR EDIT/DEL REPLY

    글 솜씨가 뛰어나시네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다음에도 놀러올게요 :)

9월 15일 방영된 <한식 연대기> 3부는 한식을 '산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개미투자자로 분한 주상욱과 그런 개미투자자를 이끄는 주식 크리에이터 슈카가 하나의 기업으로 '한식'을 투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식이다. 

 

 

한식이란? 
왜 이런 식의 '접근'을 했을까? 들어가기에 앞서 <한식 연대기>는 서울대 문정훈 교수를 비롯한 다수의 전문가들에게 묻는다. '한식이란?' 그런데 각 분야에서 트렌드로서의 한식을 이끌어내고 해석해낸 전문가들이 쑥쓰럽게 머리를 긁적인다. 딱 맞춤한 답이 떠오르질 않아서이다. 일본식 간장으로 부터 시작된, 이른바 '왜간장'이라고 불리던 샘표 간장은 한식일까? 아니, 일본 라멘이 원조인 우리의 라면은? 예전 조상님들은 드시지 않았다는 튀긴 닭은 또 어떨까? 그렇다면 '집밥'이 한식일까? 집밥보다 '햇반'이 익숙한 세대는 '한식'을 안먹는 세대일까? 

<3부 한식 주식회사> 바로 이렇게 이제는 '모호'해진 '한식'의 정의를 추적해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통 집밥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k푸드로 거듭난 '미래 성장 가치'가 좋은 우량주 '한식'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한식 주식회사'가 처음 시작된 때는 언제일까?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 샘표 간장의 cm송을 자연스레 기억해낸 주상욱은 그 자신도 의아해한다. 그처럼 그와 비슷한, 혹은 그보다 나이가 많은 연배가 자연스레 기억해 낼 샘표 간장 cm송처럼, 샘표 간장은 오랜 기간 간장의 대명사였다. 그리고 <한식 연대기>는 이 샘표 간장을 한식 주식회사의 시발점으로 본다. 

한식의 핵심 구성은 밥과 반찬으로, 반찬은 '간'이 되어있다 이 '간'의 베이스가 되는 간장, 그런데 오랜 시간, 아니 지금도 우리 민족은 '간장'을 담궈왔다. 그런데 그 간장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1년 여의 숙성 기간과 그에 걸맞는 공간이 필요했다. 해방 후 월남민들, 그리고 이어서 터진 6.25전쟁은 우리 전통의 간장을 담글 수 있는 '환경'을 앗아갔다. '불하'받은 일본 간장 공장에서 만들어진 간장, 아직 낯선 간장을 팔기 위해 주부 사원들이 집집마다 방문을 했다는데, 집집마다 다른 '장맛'이 '판매용 간장'의 일률적인 맛으로 변화되었고, 이 '간장'을 기반으로 한 달달한 불고기가 '꿀맛같은' 고기 요리로 자리잡았다. 2013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2320억 병의 양조간장이 팔렸다. 

 

 

집밥, 그 패러다임의 변화 
집밥 한 상이 '한식 주식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한식 연대기>는 그 변곡점을 '포장 기술의 혁신'에서 찾는다. 그리고 '음식'을 '포장'해서 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끈 주역은 다름아닌 '두부'이다. 

나이가 좀 있는 연배들은 기억할 것이다. 저녁 무렵 딸랑딸랑 울리던 두부 파는 아저씨의 종을, 그처럼 두부는 '판두부'로 거기서 한 모씩 떼어서 팔던 음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두부를 만드는 데 쓰이는 '간수'에 공업용 석회가 들어간다는 두부 파동을 거치며 시중 두부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갔다. 또한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국민총소득 증가와 함께 먹거리에 대한 가치 기준이 높아져 가던 시기였다고 한다. 바로 이때, 깨끗한 물로 포장한 두부가 등장했다. 또한 이른바 '콜드체인 시스템'으로 콩나물과 두부가 냉장 유통으로 통해 대중의 '위생 욕구'에 호응했다. 이러한 냉장 유통을 통해 위생 관리 '콜드 체인 시스템'은 전문가들이 식품계의 반도체가 평가할 정도로 '한식'의 앞선 기술을 선도한다. 이제는  2021년 기준  하루  50만 모 5400억 규모의 시장이 되었다.ㅣ

반찬의 베이스가 되는 간장, 그리고 포장 기술의 혁신, 그렇다면 다음 '한식'의 변화를 이끌 주역은 무엇일까? 바로 '밥'이다. 1996년 방부제 없는 즉석밥 '햇반'이 등장했다. 햇반을 만든 CJ는 소비자들의 생활 패턴이 변화되고 있으며 특히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는 삶의 변화에 주목, 즉석밥을 착안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여전히 밥은 밥솥에 해먹어야지 하던 시절, 밥은 모성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과감한 투자를 했지만 엄청난 손해가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는 급속하게 변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바빠졌다. 6880억 시장, 100배나 성장했다. 매년 40억 개의 햇반이 생산된다. 

가정 간편식으로 '밥'이 나왔다면, 그 다음은? '국'이 그 뒤를 따른다. 물론 국은 즉석밥처럼 처음부터 맛있지는 않았다. 예전만 해도 국은 건조된 덩어리에 분말 엑기스를 넣어 끓여야 했다. 하지만 이제 간편식으로 사먹는 국은 집에서 끓인 음식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 진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탕'이 바로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고깃국', 그 중에서도 육개장이다. 육개장을 비롯하여 품목만 해도 38952개의 가정 간편식, 밥, 국, 찌개, 구이, 튀김, 전 등등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린 한식 상차림, 그걸 이제는  '가정 간편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엄청난 시장이다.

 

 
삶의 질과 함께 한 음식 문화 
밥도 나오고, 탕도 나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소울 푸드'를 물어보면, 밥도 아니고, 탕도 아니고, '라면'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1961년 첫 등장한 한국인의 소울 푸드, 처음 사람들은 그 이름만 보고 옷감이라 착각하기도 했단다. 물론 개발을 한 건 '일본'이다. 하지만, 일본식 라멘을 우리의 국밥 문화에 맞게 변화시켜 나갔다. 특히 '소고기 국밥'을 좋아하는 우리 식문화에 착안한 1970년에 판매를 시작한 '소고기 라면'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여전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년에 70개에서 80 개 정도, 연간 생산량 39억 개의 라면으로 속도 풀고 마음도 푼다. 

많이 먹는 걸로 치자면 '치킨을 빼놓아서는 섭섭하다. 체인점과 개인 업주를 합쳐 전 세계 맥도날드 점포를 앞선다는 우리나라의 치킨집, 그런데 '치킨이나 '라면'을 즐겨먹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제된 기름의 안정적인 공급이 이루어져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원래 '한식'에는 튀긴 음식이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튀기는 기름을 위한 산업도 불모지였다. 하지만, 정치적 격변기를 겪고 자리잡은 정부는 국민들의 안정적인 식품 공급을 위해 콩기름 공장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에 힘입어 대형 식용유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콩 100톤으로 식용유를 만들면 생산량은 17톤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두박이라는 단백질 부산물이 나오고, 이는 돼지들의 단백질 사료로 쓰인다. 즉 식용유의 대량 생산은 뜻밖에도, 혹은 정책적으로 축산업의 부흥을 유도했고 '돼지 고기'의 대중화를 이끈다. 

해방 후 양조 간장의 등장으로 부터 시작된 '한식 주식회사', <한식 연대기>는 우리 민족의 삶의 질과 음식이 궤적을 맞추어 발전해 온 과정을 조망한다. 70년대의 쌀부족이 제분 산업 발전을 낳았고, 80년대의 국가적 발전이 식품 산업의 생산을 선도했다. 90년대 나아진 삶의 질은 식품 산업의 고급화를 선도했고, 2000년대 이후 가족 형태의 변화는 간편식 시장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더는 집에서 곰국을 끓이지 않는 시대, 제품으로서의 한식의 발전이라는 기반 위에서 이른바 'K푸드'의 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by meditator 2022. 9. 16. 18:27
  • go1den_goose 2022.09.19 05:06 신고 ADDR EDIT/DEL REPLY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블로그 주제가 신기하네요 :)

1927년 경성방송국으로 시작해서 1947년 국영 서울 방송국으로 출범한 kbs의 아카이빙(특정 기간 동안 필요한 기록을 파일로 저장 매체에 보관해 두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 현대사의 기록이다. 추석을 맞이하여 kbs는 이 아카이빙을 기반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룩한 눈부신 한강의 기적, 88올림픽의 성공, IMF 위기 극복 등 KBS의 풍부한 아카이브를 발판으로 격동의 근현대 120년 역사 안에서 한식이 정치, 경제, 사회와 어떤 상관관계로 변화 발전하는지 밀도 있게 짚'어보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4부작 <한식 연대기>이다.

 

 

그 중 9월 10일 방영된 1부는 '정치의 맛'이다. 올 5월 종영된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으로 분했던 주상욱 배우가 프리젠터로 등장한 1부에는 한국한 중앙연구원의 주영하 교수의 설명에 기대어 우리 현대 정치사와 '한식'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또한 정치와 한식의 실례를 증명하기 위해 홍준표, 박지원, 심상정 세 사람의 정치인이 각각 자신이 즐기는 '한식'을 통해 정치 속 한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치가 만든 한식 
정치와 한식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1890년 조선 시대의 밥상 위에는 이른바 '고봉밥'이 올려있다. 고봉 가득 흰 쌀밥에 고깃국을 푸짐한 한 끼 식사의 표본으로 삼았던 조상들답게 사진 속 남자는 왜소하지만 그가 먹을 밥상의 밥은  무려 640g, '거인'의 밥그릇처럼 엄청나다.

그렇게 '밥'을 즐기던 우리 조상들, 그런데 이 '고봉밥'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 바로 '정치'이다. 1973년의 표준 식단제는 지금 우리가 식당에서 만나는 고봉밥의 1/3 정도 밖에 안되는 공기밥을 표준으로 정했다. 심지어 돌솥밥도 안됐다. 이제는 우리 삶에 너무도 당연하게 스며든 '한식'의 요소요소들에 얼마나 많은 정치가 영향력을 끼쳤는지, <한식 연대기 - 1부 정치의 맛>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 그는 취임 선서에서 '국민을 굶기지 않고 정부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던 시대는 홍준표 시장조차 '가난ㄴ이 참 고통스러웠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보릿고개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1963년 우리 국민 소득이 100달러, 가난하고 굶주리던 시대였다.

 

 

박정희 정부는 1956년부터 우리나라에 공급된 미 잉여 농산물 원조, 원조받은 밀가루가 있으니 쌀을 적게 먹는다면 항시적인 쌀부족에서 탈출할 수 있겠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70년대의 혼분식 장려운동이다. 지금 우리가 즐겨먹는 설렁탕에 든 '국수', 그게 바로 '혼분식'의 결과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먹었다던 오래된 곰탕집은 혼분식 시대의 물결을 넘어서고자 '만두'를 빚어 팔았고, 하루 몇 천개 씩 만두를 만들던 기억 때문에 84세의 주인 김희영 씨는 이제는 만두를 먹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짜장면도 올랐어', 우리는 물가가 오르면 그 기준을 짜장면에서 찾는다. 짜장면이 그 기준이 된 것도 바로 '혼분식 장려 운동'때이다. 70년대 60원쯤 하던 짜장면, 하지만 전국 각 짜장면 가게마다 정해진 값은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서민 식단'의 지표로 짜장면 가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짜장면을 비롯하여, 서민들이 즐겨먹는 짬뽕, 탕수육 등 가격을 정부가 정했다. 값싼 짜장면 가격 통제로 인해 전국에 짜장면 가게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현재 전국에 2300여 점포, 하루 600만 그릇을 먹는 여전히 우리 국민이 사랑하는 '서민 식단'의 대표 주자로 여전히 짜장면은 자리매김한다. 어디 짜장면 뿐일까, 칼국수, 수제비, 그리고 떡볶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 우리가 즐겨먹는 '밀가루 음식'들이 '서민 음식'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시시절이다. 

이제는 사라진 '통일벼', 병충해에 강하고 생산량이 일반벼보다 2배 반이나 높은 통일벼가 1972년 보급되기 시작하며 1976년 드디어 쌀 자급화에 성공하게 되며 '한식의 역사의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시대는 또 다른 군부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하며 들어선 전두환 정권, 이른바 3S(sex, sports, screen)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울분을 달래려 했다. 또한 1980년 컬러 방송의 시작으로 '시각적 자극'을 주는 '요리'가 tv프로그램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81년 여의도 에서 '국풍 81'이란 이름의 대규모 문화 예술 축제를 개최하여 시선을 돌리고자 했다. 100만 명이 다녀간 이 축제를 통해 지역 음식이던 전주 비빔밥을 비롯하여 충무 김밥, 춘천 막국수, 순창 고추장 등이 전국적인 '메뉴'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경제 호황을 발판으로 한 금기된 욕망이 마음껏 분출되는 한편에서 언론 자유는 탄압되었고 노동 운동은 암흑기를 거치고 있었다. 1964년 국가 산업 단지로 등장한 구로 공단에서는 70년대 후반 이미 11만영의 노동자들이 '때우기' 식의 짜디짠 간의 '짠밥'을 먹으며 우리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들과 학생운동의 성장은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끌었다. 더는 먹고 살고 보자의 슬로건만으로는 국민들을 '탄압'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성장'과 함께 '분배'가 새로운 시대적 담론으로 등장했다. 

또한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경제적 안정은 밥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1985년 향토 음식이던 수원 왕갈비가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다. 왕갈비를 비롯하여, 삼겹살, 돼지 갈비, LA 갈비 등 밥상의 육식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70년 불과 5kg이던 연간 육식 소비량은 2000년 30kg을 넘어 이제 52kg으로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고기'를 즐기게 되는 식습관의 변화를 선도하는 ** 가든들이 등장했다. 삭막한 아파트들이 즐비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식당에서나마 여유를 즐기며 고기를 뜯고 싶어했다.  고기를 자르는 '가위'가 흉측하다던 외국인들, 하지만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한식 요리의 '가위'는 자연스러워질 정도로 우리 한식의 위상은 국가적, 문화적 위상과 함께 올라갔다. 

정치인, 정치인의 음식들 
다큐는 이렇게 정치와 함께 변화를 겪은 '한식'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정치인들의 '음식'을 살핀다. 정치철만 되면 표를 얻고 싶은 정치인들은 시장으로 달려간다. 민심의 바로미터가 시장이기에 서민 음식을 잘 먹는 모습으로 자신들의 얼마나 서민을 위하는 정치를 잘 할 것인가를 증명한다. 이른바 '서민 코스프레', '정치국밥'이란 용어가 등장할 정도다. 그런가 하면 그들의 '음식'을 통해 그들의 정치를 살펴볼만한 정치인들도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YS 김영상 대통령과 DJ 김대중 대통령이다.

1993년 문민정부를 이끈 김영삼 대통령은 이른바 서민 음식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칼국수'를 즐겨 먹는다. 소탈한 한끼 식사의 상징 칼국수는 YS가 이끌고자 한 개혁 정치의 코드로 등장한다. 또한 우리밀 살리기 운동의 시절 대통령이 '솔선수범' 우리밀 칼국수를 먹음으로써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이념을 표상화'시켜냈다. 

그런가 하면 극심한 지역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대통령이 된 DJ는 홍어를 즐겨 먹으며 호남의 맛을 세상에 알렸다. 김대중 대통령 덕에 인기를 얻은 홍어는 전라도 만으로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남미, 칠레, 아르헨티나 홍어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가능한 배경에는 1993년 우르과이 라운드를 기점으로 한 쌀 시장 개방에서 부터 시작된 다양한 식자재 시장의 개방이 있다. 

정치인이 즐겨먹는 음식만이 아니다. 국빈 만찬 등 국가적인 '한식'의 밥상은 '독도 새우'라던가, '미국산 소고기' 등에서 보여지듯이 다양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통로가 된다. 서로 다른 정치적 색을 가진 정치인들을 모아놓고 먹는 '비빔밥'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즐겨먹게 된 '갈비'류, 식당에서 만나는 '스테인레스 밥그릇', 그리고 무심코선택한 짜장면을 비롯한 칼국수, 수제비 등의 밀가루 음식들, <한식 연대기- 1부 정치의 맛>은 그런 익숙한 한식들이 외람되게도 우리 현대사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백성은 먹을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기에 위정자는 백성의 음식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사기'의 구절을 내세운 아카이빙 다큐, 과연 우리가 지나온 현대사는 저 사기의 문구를 '실현'한 시절이었을까? '아카이빙'에 대한 회고와 감상을 넘어, 우리 현대사에 대한 다양한 소회를 불러일으키는 시간이었다. 




by meditator 2022. 9. 12. 19:37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이하 이창동)>이 EIDF2022 '클로즈업 아이콘' 편으로 방영되었다. '한 시대의 혹은 사회의 아이콘이 된 거장들을 마치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듯 들여다보며,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주목하는' 클로즈업 아이콘, 알랭 마자르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최신작 <버닝>에서 시작하여 <시>, <밀양>, <오아시스>, <박하 사탕>, <초록 물고기>까지 그의 작품을 공간과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또한 거기서 더 나아가 영화 감독 이전 문학을 하던 이창동과 문학을 하기도 이전 어린 이창동의 시간을 주유하며 우리가 아는 이창동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최근 자신의 작품들을 리마스터링 하고 있다는 이창동 감독, 그와 함께 그의 지난 작품들을 복기하니 말 그대로 감회가 새롭다. 윤정희 배우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로 등장하는 2010년 작 <시>, 사춘기에 접어 든 손자와 함께 고단한 삶을 버텨가는 할머니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시창작 교실 선생님은 '일상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시라 정의하시고, 하지만 할머니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으려 애쓸수록 할머니의 손에 잡히는 건 '부조리한 삶'이다. 손주의 부도덕한 행위와 마주하게 된 할머니, 결국 할머니는 자신의 온몸을 던져 '시'를 완성한다. 

시를 쓰려다 '현실'의 암흑을 발견하고 자신을 던져 '진정성'을 구하려 했던  할머니의 모습에 문득 세월호 이후 분노하며 거리에 섰던  평범한 이웃들이 떠올랐다. 그렇듯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우리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화두를 담아낸다. 시를 쓰는 할머니를 통해 감독은 고통스럽고 부도덕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물었다.  2010년에 감독이 우리 사회에 던진 던진 질문에 2017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화답했다.  영화 <시>뿐만이 아니다. <초록 물고기>에서 <버닝>까지 그대로 우리의 지나온 시간이자, 삶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건 그런 시대 정신의 대변인으로써의 그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현대사의 대변인 이창동 
기자가 처음 이창동 감독을, 아니 이창동이란 사람을 알게 된 건 '문학 전집'을 통해서이다. 70년대 대표 작가들을 모아놓은 전집에서 이제는 기억조차 아련한 소설가 이창동의 작품을 만났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내내 감독이었지만 그의 영화는 '소설'처럼 읽힌다.  감독 이창동의 작품은 '문학작품'처럼 분명한 '플롯'과 '전개'를 가지고 관객에게 '열독'을 권한다. <밀양> 속 하늘도, 햇빛도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장 속 지문처럼 읽혔다. 하루끼와 윌리엄 포크너의 만남같다는 <버닝>속 종수와 M을 감독의 설명이 그래서 대번에 이해되기도 한다. 

다큐는 이창동 감독과 함께 관객들을  작품의 배경이 된 그곳으로 다시 여행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다리 아래서 무심하게 놀고, 그 다리 아래 강물을 따라 내려오는 여학생의 시신, 느닷없이 보여진 범죄라는 감독의 설명을 배경으로 다시 한번 소환된 <시>속 소도시, <버닝> 속 답답하던 그 후암동 빌라, 빽빽하기도 하고, 비밀스럽기도 한 밀양이라는 특별한 하지만,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있는 세속적인 지방 소도시, 코끼리가 등장하는 환타지의 공간이 된 오래된 임대 아파트, 그때만 해도 참 시골스러웠던 <초록 물고기>의 배경 일산과 '암흑가'의 정의가 된 영등포 까지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답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감독 이창동의 시간이지만, 그의 작품과 함께 시대를 읽고 고뇌했던 관객의 시간이기도 하다.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그 철교 위의 '영호',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1980년대를 '시인'했다. <초록물고기>를 통해 '자본주의화'되어온 사회의 그림자를 체감했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을 빌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밀양>이라는 작품 주제가 된 '용서'는 시내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일본 제국주의, 6.25 전쟁, 군사 독재의 고통을 겪어낸 우리 현대사, 그 고통을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화두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이 처럼 작품 속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던져진 개인을 통해 우리 현대사가 짊어진 숙제를 직시한다. 

또한 다큐를 통해, 감독이기 이전 개인 이창동의 역사를 더듬어 간다.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화제가 되었지만, 이미 2002년 감독은 <오아시스>를 통해 '도전이자 실험'을 시도했다.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1급 뇌성마비 장애인인 여주인공, 영하 20도에 반팔을 입고 갓 출소한 종수라는 한 눈에 보기에도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남주인공을 만나 '소통'하고 '사랑'한다는 설정은 '화제'를 넘어 사회적 쟁의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담론을 넘어 다큐는 우리가 몰랐던 뇌성마비 누나를 둔, 그래서 그 누나를 지키려 애썼던 가난하고 말수적은 소년을 찾아낸다. 그의 고향 대구, 그리고 다니던 초등학교를 주유하며 장애인이었지만 똑똑하고 용감했던 한공주의 '의연함'의 근원을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그건 이창동의 개인사이지만, 그와 같은 또래의 가난하고 의지할 곳없이 그래서 잡초처럼 세상과 싸우며 시대를 헤쳐온 이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명장'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현대사의 '산증인'이자, '증언자'로서 이창동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또한 다큐는 그의 작품을 빛냈던 배우들을 소환한다. 어떤 여배우가 이 캐릭터를 맡을 수 있을까 '숙제'였다던 <오아시스>의 한공주, 하지만 문소리를 감독이 기대했던 이상의 한공주의 모습을 보여줘서 감탄했다는 감독의 후일담에 문소리의 소회가 얹힌다. 아이를 잃고, 신에 의탁하고 다시 신과 싸우는 버거운 임무에 도전하는 <밀양> 역의 시내를 맡은 전도연에게는 배우 스스로 느끼며 발현할 수 있도록 애썼다는 '설득'의 디렉션을 제시한다. 

이렇듯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작품 자체로도 뛰어나기도 하지만, <초록 물고기>의 한석규, <박하 사탕>의 설경구처럼 캐릭터로 우리에게 각인된 스타의 등용문이기도 하다. 다큐는 그런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 캐릭터로 기억된 배우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는 귀중한 시간이 된다. 

다큐 <이창동>은 그래서 묘한 경험이 된다. 감독의 작품이 곧 '내가 살아온 시간',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복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초록 물고기>로부터 <버닝>까지, 새삼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보게 된다.  

by meditator 2022. 8. 30. 14:53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필수적'인 교육 과정처럼 여겨진다. 그 '코스'에서 여성이나 남성의 차별은 거의 없다. 외려 '대학'이 인생 최대의 관문처럼 여겨져서 문제가 될 정도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은 어떨까? 모두에게는 아니겠지만 나름 선망하는 '트렌디'한 직업군이 아닐까? 만약에 결혼한 아내가 대학에 가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면 어떨까? 부부가 모두 직업을 가지는 것이 더는 이상하지 않을 뿐더러, 당연해지는 세상이다. 그런데 동시대에 살면서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해야 하는 여성의 삶은 어떨까? 자피르 나자피 감독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이다. 

 

 ⓒ EBS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픈 주부
미나 살레히는 지금 일생일대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이란 고원 지대에서 농장과 가축을 기르며 제법 넉넉한 형편인 골 모하마드와 결혼하여 아장아장 걷는 아들을 둔 주부이다. 

그녀는 작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 등록금까지 냈음에도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친척이 하던 미용실에서 일하던 그녀는 처음엔 영화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만난 감독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들어왔다. 그 일을 배웠다. 어려서 부터 화장하는 걸 좋아하던 그녀의 적성에 딱 맞았다. 돈도 좀 벌었다. 본격적으로 그 일을 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청혼했다. 양을 팔아 화장품을 사주겠다던 남편, 대학에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 

영화는 미나 살레히와 골 모하마드가 사는 이란 고원 지대를 배경으로 대학에 가기 위한 한 여인의 고군분투기를 담는다. 결혼 전에는 대학에 가라고 했던 남편은 이제 '이혼'을 하고 가라고 말한다. 아이의 양육권도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처지이다. 세상에 대학에 가고 싶다는데 이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울 수가 없다. 부족의 전통이란다. 

 

 ⓒ EBS

 

아들이나 잘 키워 
남편과 시댁은 그 이유로 큰 집을 든다. 형님이 공부한다고 대학을 가고 아주버님은 중독자가 되었다고 한다. '엄청 건방져졌어'라는 게 그 형님에 대한 집안의 평이다. '차 한 잔 가져와'로 시작한 남편의 말은 '여자는 아무데나 갈 수 없다'며 우유도 짜고, 카펫도 뜨고, 빨래도 하고, 애나 키우라고 말한다. 여전히 미나는 손빨래를 한다. 심지어 미나가 양떼를 잘 돌보지 못해 10마리나 도망갔다며 그 금액을 들먹인다. 

미나는 분노한다.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다. 분명 대학에 보내주겠다며 청혼을 하고서는 이제 와서 안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다그치지만 남편은 '전통'을 들먹인다. 외려 하루 종일 대학이랑 화장 생각만 한다며 우리 어머닌 가정부가 아니라고 따진다. 그렇다고 꺽일 미나가 아니다. ' 하지만 아직은 겨우 소심하게 양말을 벗어 빨라는 남편에게 스스로 좀 빨라고 하는 식이다.

내가 정작 어머니 밑에서 가정부 일을 하고 있잖아요.


혹시나 싶어 시어머니께 하소연을 해보지만 씨알도 안먹힌다. 연신 양털로 실을 뽑아내고 카펫을 짜며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신다. 아내가 됐으니 대학은 안된다는 것이다. 화장은 무슨 화장이냐며, 구리 그릇에 물을 채워 거울 처럼 썼다며 옛날 일을 들먹인다. 

아내를 구스르기 위해 대학과 화장만 포기하면 옷이든 차든, 심지어 자신의 인생도 주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남편, 의사나 선생님도 아니고 화장을 배우러 대학에 가고 싶다는 게 말이 되냐는 식이다. 그러면 '새 아내'를 구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 EBS

 

대학에 가면 새 아내를 들이겠다는 남편, 미나는 친한 친구를 찾는다. '니가 할래?', 니가 가라 하와이도 아니고, 대학에 가는 자기 대신 남편의 새 아내가 되어 달란다. 하지만 미나의 속내는 복잡하다.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골라주고 싶은 것이다. 결국 그녀가 대학에 간다는 건, 남편과 시어머니의 확고한 태도로 볼때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그녀는 그럼에도 대학에 가고 싶다. 그런데 아이가 걸린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자구지책이 아이를 잘 키워줄 여자를 스스로 고르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결혼 전 남편에게는 집안 끼리 정한 약혼자가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를 선택했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이전의 정혼자와 그녀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러기에 자신이 떠나고 홀로 남은 아이를 혹시나 그녀가 구박을 할까봐 걱정스럽다. 그러니 직접 얌전하고 고부고분한 그래서 자신의 아이도 잘 키워줄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친구가 소개해준 그녀의 친척을 직접 가서 만나기 까지 한다. 

남편의 새 아내는 우리 아이를 잘 돌봐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직접 고를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또 그녀가 고른 여자가 아이를 못낳을 거 같다고 싫단다. 자신은 농장도 있고, 양떼 등 물려받을 유산이 많으니 아들을 더 낳아야 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대를 이를 자식이 필요하단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양떼를 몰던 이들은 한 술 더 뜬다. 아내가 둘이라는 남자, 넷 이라는 남자, 심지어 본처와 후처가 자매보다 낫단다. 

끝나지 않는 평행선, 미나와 남편은 어떻게든 상황을 풀어보려 결혼 서약을 했던 우물에도 가보고, 미나는 남편의 맘을 돌리기 위해 양떼를 몰러 함께 길을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이 좋았던 게 아니냐며 미나를 의심하기까지하는 남편은 급기야 제작진이 나서 말려야 할 정도로 분노를 폭발하고야 만다. 웃지못할 남편의 새 아내 찾기 프로젝트는 미나가 언덕으로 향하는 길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녀가 원하는 대학을 가게 될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까?

형수나 미나 모두 '대학''을 선망하고 전문 직업인을 소망하듯이 여타 이슬람권 국가에 비해 그래도 이란은 여성 고등교육 진학률과 취업률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9세가 되면 외출할 때 반드시 히잡(머리싸개)을 착용해야 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복장 규정처럼 여성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이해 부족으로 대외활동 비중이 높은 직종에 여성이 종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낮다.  다큐에서 남편이 당당하게 대를 이을 자식이 필요하기에 새 아내를 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던가, 서너 명의 아내를 두는 걸 자연스레 이야기하듯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 여전히 일부 농촌지역에서 '명예살인'이 존재한다는 보고도 있는 게 현실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가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찾아나선 주부 미나의 쉽지 않은 여정을 통해 다큐는 이란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by meditator 2022. 8. 28. 14:33

1989년 중국 베이징 시 중심부에 자리한 천안문 광장, 이곳에서 학생들은 '민주화의 여신상'을 앞세우며 5월부터 '단식 투쟁' 등을 벌여왔다. '학생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대화를 시작하라'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범법행위로 규정하며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최류탄과 실탄을 발포하며 강제 진압하였다. 1989년 6월 4일에 벌어진 천안문 (텐안먼) 사태이다. 정치적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텐안먼 사태'를 당시 16살의 꿈많은 소녀였던 론자 유 감독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왜 당시 젊은이들은 광장으로 몰려갔을까? 도대체 어떤 시대의 분위기가 그들을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차도록 만들었을까? 

 

 

1986년 상해 출신의 소군(여명 분)과 이요(장만옥 분)는 꿈을 이루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그 후로 10년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 한 두 연인의 러브 스토리 <첨밀밀>에는 '당신을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라는 로맨틱한 대사의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이 흐른다. 등려군의 노래가 전대륙에 인기를 끌던 시절이 중국 대륙의 1980년대 중반이었다.  빈곤과 암흑, 그리고 단절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롭게 들어선 정부는 경제 개혁을 앞세웠다. 적극적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도입과 함께, 문화 역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발빠르게 흡수되었다. 다큐는 텐안먼 사태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문화적 흐름을 주도했던 젊은 예술가들을 주목한다. 

젊은이들의 열정과 저항 
우선 그 첫 번째 인물은 자신의 붉은 사원증을 치켜든 조각 등 '반항과 유머'로 시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조각가 왕커핑이다. 그는 당시를 회고한다. '혁명가'만 울려퍼지던 시절에 '등려군'의 노래는 빛과도 같았다고. 그 빛을 따라 모인 젊은이들은 카세트를 틀고, 거기서 흘려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댄스 금지, 파티 금지', 당연히 경찰이 출동, 카세트를 뺏고, 안 뺏기려는 해프닝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문화적 갈증에 목말라 했지만 토양은 척박했다. 이렇다할 갤러리조차 없었다. 그나마 1년에 한 번 정도 가능한 전시는 여러 차례 검열을 받아야 가능했다. 결국 뜻이 맞는 몇몇이 모여 작품을 공유하는 정도였다. 왕커핑과 친구들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 고무되어 '도전적인 결정'을 내렸다. 중국 미술관 주변 울타리에 자신들의 작품을 '무단'으로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함께 할 그룹의 명칭도 정했다. 작고 멀리 있지만 자기만의 빛을 내는 '스타', 이들은 1979년 9월 27일부터 전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시 셋째 날 경찰이 막아섰다. 압수된 작품은 찾을 길이 없었다. 10월 1일 '정치 민주, 예술 자유', 팻말을 든 젊은이들로 인산인해가 되었다. 결국 중국 전시관에 '스타'의 전시가 허용되었다. 이번에는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 대신 자유로움을 추구했고, '예술'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아 표현 수단으로 삼았다.

유일한 여성 작가였던 리솽도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의 예술을 정부는 '정신 오염'이라 여겼다. 모든 개인주의적 표현은 '단속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인 애인을 둔 리솽은 이른바 '풍기 문란'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스타'를 '반사회적 조직'으로 만들려는 고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친구들을 떠올린 리솽은 '아는 바 없습니다'며 그 시간을 견뎠다. 남친과 헤어지라는 종용을 거부하고 온전히 3년 형을 살았다. 

학교에서는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방과 후에는 코카콜라를 마셨다 .
           - 론자 유


'애국'대신, '나'와 '예술'의 자유
카세트를 틀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청춘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록'이 등장했다. 이제는 중국 록의 대부라 칭해지는 '추이젠(최건)'이 그 대표적인 가수이다. '나는 내 꿈과 자유를 그대와 나누고 싶다.'는 그는 '애국주의 '대신, '나'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이런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흐름에 발맞추어 '아방가르드'한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이제는 '티벳 유랑족'이 된 원프린의 '만리장성 대축제'가 그것이다. 직업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첫 세대였던 그는 직장이나, 호구제, 월급 등에 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일을 벌였다. 1988년 한 다큐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권위주의 체제의 상징이라 여겨지던 만리장성에서  '우드스톡이 따로없네'란 평을 얻은 이벤트를 벌였다. 

행위 예술이든 공연이든 그 누구라도 와서 마음껏 즐기라는 초대장에 젊은 예술가들이 응했다. 만리장성에 하얀 천을 드리우는 전위 예술, 롹 공연 등 그동안 억눌렸던 자유와 표현 의지가 한껏 분출되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고 발전을 해갈수록 젊은인들은 생각의 자유를 갈망했고, 변화가 도래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전국적인 전시회 시도에 '강제 취소'로 대응한 중국 정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 가운데 텐안먼 사태의 전초전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젊은이들의 열기를 마냥 억누를 수 없었던 정부는 1989년 '예술 작품으로 정부에 반기를 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중국 현대 예술전을 중국 예술관에서 허용했다. 이에 186명의 전위 예술가들이 '유턴 금지'라는 상징을 내세우며 퍼포먼스를 벌였고 그 중에는 샤오루가 있었다. 

졸업생 중에 유일한 설치 미술가였던 차오루는 연결되지 않은 전화 한 통으로 절망한 두 남녀를 '전화 부스'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쉬웠다. 샤오루의 작품이 중국 현대 미술전에 전시되었고 설 전 날 전시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시 작품에 두 발의 총을 쏘는 도발적 퍼포먼스를 벌였다. 경찰차가 도착하고 전시회는 폐쇄되었다. 

 

 

'샤오루가 쏜 2발의 총성이 혁명의 시작이었다', 아방가르드 기획자 원프린은 정의한다. 2달 뒤 1989년 봄 중앙 미술학원 학생들은 거대한 '민주 여신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여신상을 앞세우고 학생들은 텐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조사라 씨는 <재외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의 문화 정체성과 디아스포라 이미지>에서 '중국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 작가들은 1950년대 태어났으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겪었으며 1980년대 중국의 문호개방 정책과 맞물려 ‘85 신조운동’과 1989년 차이나/아방가르드 전 등 중국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 흐름 에 참여한 이력을 지녔다.'고 말한다. 왕커핑과 리솽 등도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 1990년대 부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중국 현대 예술은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론자 유 감독은 <그날이 오면>을 통해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소환한다. 








 

 

by meditator 2022. 8. 26. 17:41

우리가 마주친 현실이 녹록치 않을 지라도/ 불안과 좌절이 우리를 짖누를 지라도/ 이 역시 우리 삶의 일부라는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차곡차곡 담아냈습니다


제 19회 EBS 국제 다큐영화제,  EIDF 2022가 시작되었다. Pitch your dream, 다큐의 푸른 꿈을 찾아서 라는 슬로건으로 막을 연 영화제는 올해도 ebs 방송과 에무 시네마 등 전세계 유일의 온, 오프라인 페스티벌을 열었다. 

 

 

EIDF2022는 총 24개국 63개의 작품이 페스티벌 초이스, 컨템포러리 다큐 파노라마, 커넥티드, 클로즈업 아이콘, 단편 화첩 등 10개의 섹션을 통해 출품되었다. 8월 22일 <사라지는 유목민>을 시작으로 EBS에서는 낮과 밤 시간을 통해 방영되고, 상영관에서 직접 다양한 다큐 작품과 만날 수 있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 EBS가 마련한 'D - BOX''다운로드'를 통해 언제든 자유로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지난 2년간 팬데믹의 영향으로 EIDF는 관객에게 제한된 방식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기지개를 켜고, 그간 말하기 조심스러웠던 꿈과 낭만을 다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위와 같은 취지로 시작된 영화제, 올해 개막작으로 상영된 작품은 8년 여의 제작 기간이 소요된 진화칭 감독의 <다크 레드 포레스트 Dark Red Forest>이다. 


 

티벳 고원의 비구니들 
다큐가 시작되면 카메라의 시선은 2017년 겨울 4000 M 높이의 티벳 고원으로 향한다. 이곳에 자리한 야칭스 수도원, 그곳에는 만 명이상의 비구니들이 정진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보이는 것은 겨울 벌판을 가득 메운 겨우 한 사람이 앉을 수 있을까 싶은 나무판자로 지어진 작은 임시 거처들이다. 바람이나 피할 수 있을까 싶은 이 작은 박스에서 야칭스 수도원 비구니들은 가장 추운 겨울의 100일 동안 '동안거'를 한다. 눈이 와 쌓일 정도가 돼도 이들의 '동안거'를 멈출 수는 없다. 추운 건 집뿐이 아니다. 야칭스 수도원 마당에서 진행되는 불경 공부 시간, 비닐 한 장만이 추위를 막는다. 

'수행의 목적은 여러분 의식의 강에 존재하는 증오와 탐욕을 멸하는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바로 마음으로 부터 얻어질 수 있습니다. 전생에 지은 '업보'는 우리 삶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


만 명의 비구니들이 모인 시간 앳된 어린 승려가 똑부러지게 불법을 읊는다. 티벳에서는 비구니가 되는 걸 숭고하게 생각한다. 이곳의 승려들은 대부분 이처럼 앳된 어린 시절에 이곳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다. 

 

 

하지만 스승님을 맞이한 등이 굽은 노년의 비구니는 겸허하게 말한다. '제가 너무 더뎌 걱정입니다. 탐욕과 증오, 무지가 어디서 왔는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도요.'  한참 멋을 낼 나이의 젊은 비구니는 '반짝이는 불빛에 제 영혼이 빠져나갈 듯했습니다. 겨우 기도로 다시 제 영혼을 붙잡았습니다'라고 참회한다. 기도와 명상만이 아니다. 매년 6개월 동안 불경을 공부하고 시험을 치루고, 앞치마처럼 두른 포대가 구멍이 날 정도로 '오체투지'를 하는 강행군의 생활이 이어진다. 하지만 수행의 길은 멀다. 

파르라니 깍은 머리에 파랑, 노랑의 띠를 두른 비구니들이 말간 하늘 아래 나풀나풀 춤을 춘다. 그렇게 춤사위가 잦아든 광장에 나신의 육체가 놓여있다. '육탈'을 한 수행자들이다. '업보'의 고뇌에서 벗어난 이들, 그들의 육체를 기다리고 있는 건 티벳의 독수리들이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독수리 무리가 육체만 남은 수행자들을 덮칠 때, 그  한 켠에서 삶의 그림자를 짊어진 생존의 수행자들이 '독경'을 한다. 그저 '업보'가 잠시 머물던 곳, 육체는 그렇게 자신의 '업'을 다한다. 죽음의 순간은 이들에게 '업'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영광의 순간'이다. 

 

 

그렇게 극한의 수행으로 이어진 비구니들의 삶, 하지만 종교적 경건함과는 별개로 그들의 문화적 환경은 낙후되어 있다. 그들의 건강은 소변에 뜬 부유물의 모양과 빛깔로 점쳐진다. 처방은 티벳의 전통약이거나 불에 달군 쇠막대로 '지압'을 해주는 식이다. 길흉화복의 행방은 '점'에 달렸다. 죽은 자의 안식을 묻자, 예전에 불곰 한 마리를 죽여 산신에게 노여움을 탔을 것이라는 답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였을까, 이 지역에 들어온 사회주의 정부는 더는 이런 비구니의 존재를 허용치 않는다. 2017년, 그리고 2018년 겨율울 지나 이어진 다큐, 그런 가운데 중국 정부는 다음 해 여름까지 비구니들이 야칭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링거를 맞으면서도 수행을 마다하지 않던 비구니들, 그럼에도 '스승님'은 그들에게 수행에 진심을 다하라 말씀하신다. 눈과 정신과 마음을 다해서, 코 위에 개미가 지나간다해도 한 눈 팔지 말고, 단, 정부 관계자가 중단을 요철할 때를 제외하고라고. 그 말씀의 정부가 이들에게 수행의 중단을 요구했다. 

수행의 진심을 묻던 비구니들이 이제 스승님께 호소한다. '떠나온 지 오래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모릅니다.' 이런 이들을 스승님은 안타까워하신다. 속세의 경험이 없는 이들이 자칫 세찬 강에 뿌려진 양의 배설물처럼 될까봐.

2019년 여름 거의 모든 비구니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동안거동안 그들이 머물던 판잣집은 해체하니 한 사람이 짊어질 분량의 짐일 뿐이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진화칭 감독이 찾아간 고원, '동안거'의 그 움막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여전히 그 짙은 붉은 수도복을 입고 머리를 민 비구니들이 소를 몰고,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반야, 초월적 지혜'가 무엇이죠? 스승님이 물었다. '그게.......' 젊은 비구니는 답을 하지 못했다. 불성을 지닌 존재는 무엇인가요? 다시 스승님이 물었다. '자신입니다', '그 자신은 어떤 겁니까?' '자아와 자신은 같나요?', 비구니는 복잡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시험을 못봤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그녀였었다. 그렇게 수행의 즉답을 하지도 못하고, 불경 시험도 못치던 그녀가, 여전히 붉은 수도복을 입고 그곳에 있었다. 

'삶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석가모니도 병을 앓고, 노화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제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고원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매에게 잡아먹힐까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만물을 연민의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세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요.'


평생 이곳에서만 살아왔던 그녀가 이곳을 떠나라 하자 죽음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승님은 말렸다. 정부의 명령을 따르라 했다. 야칭스를 떠난 그녀, 동안거의 움막이 이제 집이 되었다. 그녀는 말한다. 평생 짙은 붉은 색 법복을 입은 채 수행자로서의 삶을 다할 거라고. 오랜 수행에도 닿을 수 없었던 마음의 진심을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 여전히 '다크 레드 포레스트'가 있는 이유이다. 




by meditator 2022. 8. 23. 22:50
  • 차트의신 2022.08.23 22:52 신고 ADDR EDIT/DEL REPLY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공감 누르고갑니다!!
    화요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부부가 '이혼'을 하는 경우, 가사 노동에 종사한 아내의 '역할'에 대해 당당하게 '법적'인 지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가사 노동'에 대해 과연 우리 사회는 진정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을까? 이 질문은 외람되게도 '독립 운동'의 그늘에서 헌신적으로 뒷바라지의 역할을 자처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론으로 이어진다. 

 

 

광복절 77주년이다. 각 방송국마다 77주년을 기려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 가운데 kbs1을 통해 방영된 <광복절 특집 다큐 아내의 이름>이 눈에 띈다. 현재 '독립 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선열들은 2만 여명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 중 '여성'들은 얼마나 될까? 2%도 안되는 채 200여 명이 안된다고 한다.

이런 안타까운 결과는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활동'하기가 어려웠던 시대적 환경이 무엇보다 컸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독립'에의 '의지'가 없었을까?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 2만 여 명에 이르는 독립 운동 선열들이 활동하는 그 '그늘'에서 늘 '여성'들은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회영, 신채호, 이상령은 알아도, 박자혜, 이은숙, 김우락이란 이름은 생소하다. 그간 여성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발굴해온 kbs가 광복절을 맞이하여 네 분의 여성 독립 운동가들, 그분들의 '이름'을 되찾아 주고자 한다. 

 

 

3.1운동에 앞장섰던 간호사, 신채호를 뒷바라지 
1895년에 양주에서 태어난 박자혜 여사는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었다. 몇몇 궁녀들과 함께 의술을 배울 기회를 얻은 여사는 이례적으로 일본인이 대부분이던 조선총독부 의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고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인한 사상자를 목도한 박자혜 여사는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일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독립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결심에 따라 간호사들의 조직 '간우회'를 결성하는데 앞장서고 유인물 배포하는 한편, 만세 행렬에 적극 참여한다. 결국 '과격하고 언변이 능하며 총독부 의원, 간호사 등을 대상으로 독립 만세를 고창한' 혐의로 체포되고 만다. 풀려난 박자혜 여사는 베이징으로 망명했고 이곳에서 한 독립운동가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나이 24세, 그녀의 남편은 39세의 신채호였다. 

하지만, 생활고는 이 부부를 떼어놓는다. 둘째 아이를 가진 박자혜는 고국으로 돌아와 조산원을 열었지만 신채호의 아내라는 이유로 '냉방에서 주린 창자를 쥐고 두 아이가 울고 있'는 가난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 열사의 길잡이 노릇을 기꺼이 해냈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갇히게 된 남편의 옥바라지를 8년 동안 감내했다. 하지만 결국 36년 신채호 선생이 돌아가시고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고 애통해하던 박자혜 여사는 뒤를 이어 44년 가난과 독립운동으로 얻은 지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다. 1990년에서야 정부는 '건국훈장 유족장'을 그녀에게 '추서했다. 

 

 

삯바느질로 모은 돈도 독립운동 자금으로 
서울 명동의 금싸라기 땅은 원래 이회영 집안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회영 일가의 6형제는 '병합'이 되자 그해 12월 망명길에 오른다. 1908년 19살의 나이로 22살의 나이차가 나는 이회영 선생과 혼인을 한 이은숙 여사 역시 한겨울 압록강을 건너 40여일만에 중국 지린성 류허현에 이르렀다. 이회영 선생 등이 이곳에 한일 자치기구 '경학사'를 만들고, 무장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은숙 여사와 동료 여성들은 이들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말이 뒷바라지이지 당시 '독립 기지'의 가장 큰 고충은 '넉넉치 못한 재정'이었다. '죽울 쑤었을 대는 상을 가지고 나가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화끈히 달아올랐다'던 이은숙 여사는 서로 군정서 대원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고 먹였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 이후 베이징으로 옮긴 이은숙 여사네 집은 10 명에서 40여 명가지 독립 운동가들의 집결처가 되었다. 그들을 먹히고 입히느라 결국 어린 두 딸을 빈민 구제원에 맡겨야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1925년 임신한 몸으로 홀로 귀국하게 되었지만 삯바느질로 모은 돈마저 '하늘같이 섬기던' 남편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부쳤다. 이은숙 여사가 당시의 삶을 회고한 <서간도 시종기>는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19명이 서훈을 받은 이회영 일가, 여사는 1979년 90세에 이르러서야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었다.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겠어요!'
이은숙 여사들처럼 드러난 '공적'인 독립운동의 이면에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여성들의 '물심양면' 뒷바라지 안살림이 있었다. 그렇다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은 여성들은 누구였을까? 그 중에 장정화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189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장정화 여사는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불과 11살의 나이로 혼인을 한다. 그런데 1919년 갑자기 시아버지와 남편이 사라진다. 장정화 여사는 신문 기사를 보고서야 그분들이 '망명'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무 살으리 겁없던 장정화 여사는 남편을 찾아 베이징으로 향한다. 

'이 길은 모진 풍파로부터 도피도 아니며, 안주도 아니다. 또 다른 비바람을, 이번에는 스스로 맞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


장정화 여사는 당시의 심정을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소상히 밝힌다. 베이징으로 건너간 여사는 이동녕, 엄항섭 선생 등과 한 집에 살며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하지만 당장 독립 운동가들의 '호구지책'이 심각해지가 여사는 프랑스 조례 밖을 나올 수 없는 남성 독립운동가들 대신 스스로 고국과 중국을 6차례에 걸쳐 오가며 독립자금 등을 조달했다. 임시정부와 함께 중국 내륙을 거쳐 충칭에 이르른 여사는 1040년 한국 여성동맹, 43년 대한 애국부인회 등을 재건했고 광복 이후 귀국했다. 남편 김의한이 6.25 때 납북당하고, 여사는 1982년에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

50대 후반에도 거침없는 '독립'의 행보
임정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 역시 낙동강이 보이는 경북 안동의 유지였다. 99칸 대저택을 처분하여 '망명'한 선생, 19살에 혼인하여 어느덧 50대 후반에 이른 아내 김후락 여사도 함께였다. 여사는 1911년 베이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해도교가사>로 남겼고 이 역시 주요한 독립운동사료이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된 이상룡 선생, 김후락 여사는 안살림을 맡는 한편, 부인회를 조직 결의를 다지는 등 독립 운동의 내조에 힘썼다. 김후락 여사는 2019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 또한 김여사의 며느리 이중숙 여사, 손주 며느리 허은 여사 3대 모두 독립 유공자가 된 '유공자 3대'의 집안이다. 

빨라야 197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게 된 여성들, 그녀들이 없었다면 과연 그 혹독한 독립운동의 생활고를 버텨냈을까? 남자들이 '일경'의 감시로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 기꺼이 압록강을 건너 고국의 독립자금을 나르던 여성들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임시정부'가 가능했을까?

다큐는 이에 주목한다. 전문가들은 여성들의 뒷바라지를 여전히 '평범한 여성'들의 일로 보는 시각이 이 분들의 독립 유공자 '추서'가 늦게 된 이유라고 짚는다. 또한 여전히 부족한 여성운동사에 대한 연구도 아쉬움을 더한다. 누구의 아내, 혹은 '안살림'을 맡은 '여성'이 아니라, 그분들의 '이름' 그대로 불리워질 때, 비로소 우리 독립운동사가 '온전한 역사'가 될 것이라고 다큐는 '방점'을 찍는다. 




by meditator 2022. 8. 16. 00:02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격리가 풀리자 각종 업종들이 기지개를 켠다. 이제 다시 한번 코로나 이전의 활황을 누려볼까? 그런데 웬걸, 일할 사람이 없다. 일할 사람이 없어 기계를 놀리고, 영업 시간을 줄이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도대체 일을 해야 할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최근 MZ 세대의 새로운 직업관과 구인난을 겪는 산업 현장의 현실에 대해 7월 25일 자  <시사 기획 창>이 분석한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건 특정 '업종'의 문제가 아니다. 커다란 창으로 바깥 풍경이 보이는 안락해 보이는 사무실, 그런데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다. 온라인 광고를 제작하는 디지털 마케팅 업체, 업무 시간에 음악을 들어도 좋다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여전히 몇 십 명의 인원을 충원하기가 난망이다. 경기도 김포의 치과에서는 기숙사를 구해준다고 해도 단 한 건의 문의조차 없다. 시급 12만원을 주겠다는 햄버거 가게 역시 지원은 커녕 다니던 직원 절반이 그만둬 사장은 울상이다. 유흥의 메카 강남이라고 다르지 않다. 손님을 벨을 연신 누르지만 서빙할 직원이 없다. 사장은 한쪽에서 지난 번 그만 둔 직원의 동정을 묻고 있다. 

 

 

답답한 조직보다 차라리 배달이 낫다 
강남 유흥가에서 사장이 찾던 직원은 지금 배달 일을 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플랫폼 사업'이 활성화되고, 그 중에서도 '배달 앱'등이 활성화되면서 다수의 MZ세대들이 이른바 '국민 부업' '배달업'에 뛰어들었다. 탄탄한 회사의 물류 담당 직원이었던 전성배 씨는 회사를 그만둔다 했을 때 주변에서 미쳤다며 말렸다. 잠시 '알바'삼아 하려고 했지만 업무 지시도 없는 훨씬 '심플'한 업무 내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만큼 일을 할 수 있는 이 일에 현재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MZ 세대, 1980년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Z세대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15세에서 40세까지 1700만 명 정도로 국내 인구 분포 상 34% 정도를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이들의 '퇴사'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을까?  회사로 보면 대리, 과장 급의 사람들인 이들은 우리 사회의 실무 인력을 담당하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30~60%가 2년 미만의 퇴직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들의 직업적 변동성은 우리 사회 전반의 심각한 구인구직난으로 이어진다. MZ 세대에게 언제쯤 퇴사를 결심했냐고 물었다. 평균 10개울 즈음이라는 답이 나온다. 언제든 퇴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그렇다는 답이 49.5%로 과반에 달한다. 매우 그렇다도 22%에 달했다. MZ세대에게 퇴사는 '자유'이자, '해방'이요, '새로운 시작'이다. 불안이나 백수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3%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가치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퇴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대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대퇴사시대(the Great Regression) 라는 말이 유행한다. SNS를 중심으로 회자되는 '퇴사 영상'이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유행이다. 

 

 

달라진 세대, 뒤처진 조직과 사회 
그런데 이런 젊은 세대들의 변화된 태도에 대해 사회적 인식은 엇갈린다. 회사 측 입장에서는 주 52시간 제도로 인해 젊은 세대들이 평생 아파트조차 못사는 처지가 되었다고 제도적 한계를 지적한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런 분석에 고개를 젓는다. 외려 쉬는 날에도 특근을 해야 하는 근무 환경에 화가 났다고 말한다. 회사는 자녀들 학자금에 장례부조를 자랑하지만, 결혼도 할까말까한 젊은 세대에서 미래 자녀의 학자금은 공염불처럼 들린다. 존중과 존대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존댓말로 자신의 휴대폰 액정 닦이를 사오라고 하는 식의 시스템에 젊은 세대는 반발한다. 

19살에 엔지니어로 입사한 허태준 씨는 '퇴사'를 했다. 잔업을 하고 돌아오면 8시, 그저 씻고 자기만 하며 살아가는 일상이었다고 한다. 잔업이 없는 수요일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자신의 현실에 환멸을 느껴가던 즈음, 지하철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이 연이었다. 자신과 다르지 않는 일을 하던 젊은이들이라 여겨졌다. 허태준 씨의 생각처럼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제조업은 오래 일하면 '몸이 상한다'고 하는 현실이다. 또한 달라졌다고 하지만 근무 조건이나 환경에서 인정이나, 보람, 성취를 MZ세대가 느끼기 힘든 게 현실이다. 

MZ세대는 일자리 선택 기준에 있어 그 이전 세대와 달라지고 있다. 물론 여전히 선택 기준에 소득 기준이 1위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비율도 달라진다. 그보다 개인의 발전 가능성이라던가, 업무량, 출퇴근 거리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나를 발전시킬 수 있고, 내가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하는 게 이제 MZ 세대 직업적 선택에는 중요한 화두다. 

다큐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퇴사'를 한 젊은이들과 인터뷰를 한다. 타이어 회사에서 사보를 만들던 김유경 씨는 '시키는 거나 하라'는 상사의 지시에 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안정적인 은행을 다녔지만 군대보다 더 보수적인 분위기, 서로 뒷담화를 하는 조직 내 문화에 강이삭 씨 역시 사표를 내던졌다. 홍석남 씨의 경우 대기업에 다녔지만 여기에 계속 다니면 10년 , 20년 뒤 자기 발전이 없겠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천지은 씨의 경우 우스개로 '모든 걸 다해서' MD라는 직책을 맡았었다. 말 그대로 모든 제조 과정에 간여하지만, 정작 결정권이 없는 현실에 좌절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생을 덜해봐서 그래', 어른들은 말한다. 창업을 한 강이삭 씨는 인정한다. 하지만 회사가 원하는 루틴대로 살아가는 대신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삶이 주는 스트레스를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한다.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 삶, 자신이 이루어 갈 수 있는 그 '무한대'의 가능성에 자신을 내맡기겠다는 것이다. 

달라진 사고 방식의 MZ 세대, 이들의 달라진 직업관의 결과가 바로 코로나 이후 '구인난'이라고 다큐는 분석한다. 2003년 '벼랑 끝에 선 청년들'이라는 다큐에서만 해도 젊은이들은 회사 고를 때가 아니라며 사원이라는 이름 아래 정착하고 싶다고 눈물을 흘렸었다. 격세지감, 이제 젊은이들은 '퇴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월급'이라는 마약에 취해 주저앉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안맞겠다 생각하면 한 달도 못참'는다는 세대, 이들을 우리 사회 제도 속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이 추구하는 사고 방식에 맞춰 조직과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다큐는 결론내린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거북이 걸음이다. 구직 급여는 자발적 퇴사나 한 달 15일만 일을 해도 제공되지 않는다. 고용자 입장에서는 채용지원금보다 고용유지를 위한 실질적 혜택이 있어야 한다고 아쉬움을 피력한다. 회사원에만 한정된 대출 제도처럼 달라진 세대에 뒤처진 사회 제도이다. 






by meditator 2022. 8. 1. 16:17

지난 2018년 서울에 경증치매인들이 함께 했던 <주문을 잊은 음식점>이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었다. '깜빡 깜빡'하는 경증 치매인들, 비록 주문을 종종 잊고, 자신이 지금 무얼 해야 하는 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려도 스텝과 식당에 온 손님들의 배려와 도움으로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거뜬히 해냈다. '치매'가 사회적 사망 선고가 되는 세상, 그런 굳어진 세상의 인식에 프로그래은 윤활유 역할을 했다. 

 

 

제주도의 주문을 잊은 식당 
그로부터 다시 4년이 흘렀다. 주문을 잊었던 음식점은 다시 한번 그 날개를 펼쳤다. 이번에는 바다 건너 제주로 갔다. 하루 3시간, 단 3일,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시 한번 치매인들과 정상인들의 '이인삼각' 경주가 시작되었다. 

시즌 2를 맞이한 <주문을 잊은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게 된 경증 치매인들은 네 사람이다. 83세의 맏형 장한수 씨는 2015년에 치매 판정을 받은 치매 경력이 제일 오래된 분이다. 기분이 좋으면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추지만 불안하면 자꾸 아내와 딸을 찾는다. 늘 베레모와 선글라스를 빼놓지 않는 최덕철 씨는 2020년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았다. 매일 보는 홍석천 씨를 처음 본 사람처럼 반가이 포옹을 하는 그는 한때는 카이스트 연구원이었다. 

매번 자신을 '백옥같이 곱다'는 의미에서 옥자라고 소개하는 백옥자 씨는 깜빡깜빡 멤버 중 유일한 홍일점이기도 하지만 '반가운 사람들만 있네'라며 언제나 웃는 낯을 놓치지 않는 멤버 중 가장 화사하고 따뜻한 존재이다. 무엇보다 손님 한 명 기억하기 라는 미션을 손에 써왔어도 다음 날이면 그 조차도 잊어버리지만 계산기가 필요없을 정도로 송은이도 버벅이는 손님들 밥값에는 '귀재'이다.  

처음 멤버로 등장했을 때 다른 멤버들이 모두 '촬영하는 분'이야 하고 의아해 했던 김승만 씨는 이제 겨우 60의 '조발성 알츠하이머' 치매인이다. 예전에는 목회 활동을 했지만 이제는 1번 테이블 찾기가 제일 어려운 처지다. 그래도 백옥자 씨 못지 않게 언제나 미소 띤 얼굴로, 주변 인물들에게 '엄지 척'을 놓치지 않는 선량한 아저씨다. 

 

 

날마다 새로운 일상
출근 첫 날 숙소에서 자고 일어난 백옥자 씨가 '여기가 어디지?'하고 낯설어 한다. 그래도 주변 환경을 찬찬히 살피던 옥자 씨는 조금 뒤 '제주도'임을 알아챈다. 그래도 첫 날 두리번거리던 옥자 씨는 나은 편이었을까? 셋째날 함께 출근하던 깜빡깜빡 남자 3인방은 당당하게 주문을 잊은 음식점 옆의 까페로 들어선다. 들어선 다음에도 여기가 맞다는 세 사람, 과연 단 3일이라도 그들의 '서빙'이 순탄할까? 

첫 날 화사한 분홍빛 앞치마를 장착한 네 사람, 옷 색깔에 대한 민망함도 저리 밀쳐두고 자신이 해야 할 새로운 일에 두려움이 앞서는 모습이다. 테이블 번호도 외우고, 해야 할 일도 숙지하고, 불안해서일까, 자꾸 아내와 딸을 찾던 한수 씨는 옆에서 옥자 씨가 괜찮다며 달래는 말에도 목소리가 높아지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개업한 식당, 다행히 손님들이 한 팀, 두 팀 찾아들기 시작했다. 이제 막 결혼식을 올렸다는 신혼 부부가 식당으로 입장한다. 

경증이지만 치매인들을 주문서에 손님들이 체크만 하면 되는 시스템, 그런데 주문서가 때론 주방에 도착하지를 않기도 한다. 음식이 나오면 차례로 손님께 가져다 주는 과정, 식당 안팍으로 겨우 일곱 테이블인데도 한바퀴를 빙 돌거나, 식당 안의 1번을 놔두고 밖에 나가서 두리번 거리기가 십상이다. 3일째 되었어도 여전히 주문서를 가져다 주는 것을 잊어버리고, 새로 등장한 '동파육'을 비싸니 싼 거 먹으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손님 테이블에서 자신의 지나온 이력을 줄줄이 늘어놓기도 하는 등 '서빙'의 본분을 잊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잘 하려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4인방의 노력은 겨우 3일만에 능숙하게 자신의 동선을 자신에 맞게 '조직'해 낼 정도로 무람없이 자신들의 미션을 마무리했다. 

물론 이런 해프닝에 대비해 작업 치료사를 비롯한 스텝들이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지만, 손님들이 들이닥친 시간에 빚어지는 상황에 모두 대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주문을 잊은 식당이 가능했던 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그러려니'하는 '배려' 덕분이었다. 수저를 안갖다줘도, '그림의 떡이네'하고 마주보고 웃는 부부처럼 손님들은 '깜빡 4인방'이 빚어내는 '실수 아닌 실수'들에 관대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런 '배려로 어우러진 장면이야말로 <주문을 잊은 음식점>을 통해 시청자들이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치매였다는 외국인 아내는 백옥자 씨의 손을 꼭 잡고 건강하시라 한다. 어디 외국인뿐인가. 자신이 직접 만든 마카롱과 팔찌를 드리며 '응원'하는 모습들이 여전히 우리가 함께 어루러져서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해 내고 있다. 

우리나라 노인 인구 중 10%가 치매를 앓고 있다. 김승만 씨 처럼 조발성 알츠하이머까지 약 88만 명이 치매를 겪고 있다. 프로그램이 끝나가자 깜빡 4인방은 모두 내일도 출근하고 싶다고 한다.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지만, 경증 치매인들이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회적 인간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는 시간은 의미가 깊다. 조금만 세상이 배려한다면 아직은 세상 속에 그들의 자리가 있음을, 우리가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프로그램은 말한다.

특히 지난 주문을 잊은 음식점에 출연했던 분의 등장은 감격스럽다. 시즌 1에 출연한 이래 뜨개질을 하는 등 꾸준한 활동으로 치매의 진전이 가속화되지 않은 모습은 뽀족한 치료제가 없는 현실에 등불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김승만씨를 찾아온 아내는 편안하게 다른 사람과 대화도 하고 장난도 치는 남편이 다른 사람같다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지내던 덕철은 '내 평생 잊지못할 추억'이라고 기쁨을 숨기지 않는다. 겨우 3일이었지만 늘 사회와 분리된 채 자신의 병마와 싸우던 이들에게 '주문을 잊은 음식점'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소중하고 뜻깊은 시간이다. 비록 그들이 이 시간조차 잊어버린다 할 지라도. 




by meditator 2022. 7. 31. 1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