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년간 비만 인구가 6.6%나 증가했다. 고도 비만은 물론, 초고도 비만도 3.3%나 증가했다. 어느새 다이어트는 산업이 되었다. 365일 다이어트를 한다는 사람들, 과연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라, 이 다이어트 보편의 법칙이 모두에게 통용될까? 다이어트라는 말만큼 '요요현상'이라는 용어 역시 일상이 되어간다. 무엇보다 마르고 날씬한 몸이 사회적 몸의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살이 찐다는 건 게으르거나 자기 관리를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살찐 사람들은 자책하고 우울해 한다. 11월 21일에서 23일 방영된 3부작 <다이어트 혁명 0.5%의 비밀은 통용되고 있는 다이어트 방식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통해 비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자 한다.
비만은 유전적 질환이다 117kg의 도주원 씨는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식단도 운동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배고픔과 식욕과의 싸움은 끝이 없었다.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다음 날 발목 등 관절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다. body mass index, 체질량 지수(BMI), 자신의 몸무게를 키의 제곱으로 나눈 값으로 세계 보건기구(WHO)에서는 체질량 지수 25~29까지를 과체중, 30 이상을 비만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체질량 지수 25~30 정도까지는 식단과 운동을 통해 체중의 감소가 가능하다고 보는 반면, 30이 넘으면 이른바 통상적인 다이어트로는 체중조절이 쉽지 않은 상태로 보고 있다.
0.5%, 다이어트를 해서 성공할 확률이다. 21일 방영된 <요요와의 전쟁>은 이런 속설을 검증한다. 무려 일년의 기록, 참여한 이들은 다이어트를 할 수록 살이 찌는 '요요'에 시달린다. 다이어트를 꾸준히 열심히 하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 22일 방영된 <내 몸 사용 설명서>는 극단적 마름을 추구하는 프로아나를 주목한다. 최근 우리 사회 10대에서 10대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극단적 마름이다. 찬성'을 뜻하는 Pro-와 '거식증(Anorexia)'에서 딴 Ana를 합성한 단어 프로아나, 체중 감량 성공! 이라는 자랑스러운 용어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자기 학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체중이 정말 바람직할까?
요요 현상과 프로아나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 사회의 다이어트 열풍, 그런데 캠브리지 대학 분자유전학자이자 <왜 칼로리는 계산되지 않는가>의 저자 자일스 여 교수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유전자'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즉 비만은 '유전적 질환'이라는 것이다.
다큐는 구석기 시대인들이 만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소환한다. 풍요, 다산, 생산력의 상징, 늘 먹을 것이 부족했고 그래서 극하느이 굶주림을 견뎌야 했던 인류에게 살찜은 축복이었다. 굷주림을 견뎌야 했던 인류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 가능하면 많이 먹고, 그 먹은 걸 축적시키는 비만 유전자가 발현되었다. 즉 더 많이 먹게끔하는 비만의 유전자는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든 축복의 상징이었다.
문제는 그 구석기 시대의 유전자를 가지고 풍요를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인류에게서 발생한다. 풍족한 먹거리의 시대, 하지만 비만 유전자를 가진 인류는 여전히 계속 먹고 다이어트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가 가진 비만 유전자는 얼마나 될까? 연구진에 따르면 인류에게는 천 개가 넘는 비만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한국형 비만 유전자 게놈 지도를 만들어 보니 20개 정도가 등장한다.
'비만'에 대한 시각을 제고하자 모두에게 존재하는 비만 유전자, 하지만 주요한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되는가에 따라 개개인 비만도에 차이를 낳는다. 161kg에서 무려 80kg을 감량했지만 박민석 씨는 요요에 시달렸다고 한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비만이 되기 시작해서 중학교 졸업할 때에는 초고도 비만이 된 민석 씨, 그런데 민석 씨네 집은 어머니를 비롯해 3형제가 모두 비만이다.
민석 씨의 유전자를 검사해 보니 지방을 더 많이 빠르게 축적하는 FTO 유전자와 , 지방을 좋아하고, 식욕이 폭발하는 MC4R 유전자가 나타났다. 즉 더 많이 먹고, 쉽게 찌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전자만이 문제는 아니다. 타고난 유전자와 식품 환경이 만나 비만이 형성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함께 요가 학원을 운영하는 쌍둥이 자매, 일란성 쌍둥이로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몸매를 가지고 있다. 요가 강사를 하는 동생이 날씬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언니는 비만과 전쟁 중이다. 무엇이 다를까. 단백질 위주의 식사를 한 동생과, 탄수화물 위주이 식사를 한 언니, 오랜 시간 서로의 다른 식습관이 장내 미생물, 마이크로바이옴의 차이를 낳고 이것이 비만을 초래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된다고 다큐는 말한다.
즉 내가 먹는 음식에 따라 좋은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기도 하고, 나쁜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요요현상에 시달리는 박보영 씨, 이른바 저탄고지 식사를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유전자 검사 결과, 보영 씨는 지방만 제한하는 식사가 어울린다는 처방을 받았다. 김용철 씨는 지방 분해를 위해 근력 운동이 필요했다. 박형제 씨는 2000 칼로리 이하의 식사와 유산소 운동이 권장됐다. 즉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다이어트가 아니라 각자에 맞는 방식을 찾아가야 되풀이되는 요요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 질환으로서의 비만을 접근하자는 다큐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비만을 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비만을 개인의 의지로 보는 사회적 시각, 게으르거나 자기 관리를 못해서 그렇다는 편견에 대해 시야를 터준다. 대부분 오랜 기간 비만과 반복된 다이어트와 요요 현상에 시달린 사람들은 낮아진 자존감과 우울감에 시달린다. 다큐는 '나의 잘못'이라는 족쇄를 풀어주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획일적인 다이어트 신화 역시 또 다른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내 몸을 인정하고 사랑하자 말한다. 프로아나가 젊은 층에 열풍처럼 번질 정도로 마른 몸에 대한 갈증, 날씬하고 마른 몸이 가져온 사회적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장상균 씨는 121kg의 체중을 20kg 감량하여 100kg대가 되었다. 의사는 지금 그의 상태가 좋다고 말한다. 표준 체중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내가 가장 편안한 자기 몸의 상태를 찾아가라 다큐는 권한다. 바디포지티브, 자기 몸 긍정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사이즈가 아니라, 내 자신에 맞는 몸을 찾아갈 때라는 것이다.
1931년 최영숙은 스톡홀름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06년부터 이화학당을 다니던 그녀가 9년 만에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수학자가 되어 귀국했다는 기사가 신문마다 대서 특필되었다. 조선에서 여성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졌던 그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귀국했던 시기는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50%를 육박하던 때였다.
수학자로서 교수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금의환양을 했다며 반기던 때와 달리 자리는 없었다. 5개 국어를 하던 그녀는 어학교수라도 하고자 했으나 그 조차도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수학자가 궁여지책으로 택한 일은 배추와 콩나물을 파는 일이었다. 귀국한 지 6개월, 1932년 스트레스와 생활고로 인한 영양 실조로 최영숙은 2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최고의 엘리트 최영숙에게 허용되지 않은 '직업', 하지만 1920년대 직업 여성의 수는 약 33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 수학 교수는 허용하지 않던 사회가 많은 여성들을 어떤 분야에 고용했을까? EBS다큐프라임 <여성 백년사 -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2부 직업 부인 순례>는 100년 전 여성들의 일과 삶을 살핀다.
330만 명의 직업 여성들 1920년대에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식민지 산업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무신을 만들고 옷감을 짜는 등 경공업 위주의 산업화에서 '값싼 노동력'은 필수적이었다. 1929년을 기준으로 일본 남성 노동자가 2.32 엔을 받을 때, 조선 남성 노동자들은 1엔을 받았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6.59엔에 불과했다. 당시 330만의 여성들은 '값싼 노동력'으로서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조선인이라,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중차별로 인한 낮은 임금을 받으며 산업전선에 내몰렸다고 <여성 백년사>는 말한다.
당시 여교원들은 35원에서 60원을 받았다. 여기자는 25원에서 60원, 반면 여차창의 월급은 25원에서 30원, 연초 공장 직공은 6원에서 25원을 받았다. 쌀 한 가마니가 12,3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방직 공장 고용주는 여공이 삯이 싸고, 사상이 악화될 우려가 없으며, 결혼하면 자연히 그만두어 승진의 부담이 없고, 애교가 많고 나긋나긋하다며 여성의 고용 이유를 밝힌다.
또한 늘어나는 '직업 여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직업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대했다. '여성의 그림자는 나날이 늘어가' 라는 식으로 여성들의 직업적 참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순종적이지 않고 사치스럽고 반항적이라며 신여성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가정'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부추겼다.
그런 환경에서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1929년 광주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성추행 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경성의 여학생들도 시위를 벌여 항의하고자 하였다. 경성의 13개 여학교 학생들이 모였던 곳은 다름아닌 경성여자 상업학교에 다니던 송계월의 집이었다. 이 사건으로 수감된 송계월은 다행이 집행유예로 나오게 되었다.
이후 조지아 백화점에서 근무하던 송계월은 <신여성> 지의 유일한 여성 기자로 특채되었다. 그녀가 쓴 첫 번째 기사는 <내가 신여성이기에>, 남자의 기생충이 아니라 스스로 경제적 독립의 토대를 쌓아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최초', 혹은 '유일한'이라는 수식어를 지녔던 당시 여성들처럼 그녀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여성운동을 계급 해방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사회주의 패미니스트였던 그녀는 옥살이 하며 얻은 폐결핵과, 아이를 낳으러 갔다는 둥 '사회의 비열한 공격'으로 인한 상심으로 인해 고향으로 떠나게 된다. 나는 꼭 사라야겠다. 엇전 일인지 죽을 마음은 조금도 업다. 할 일은 만치, 나는 젊지' 라며 삶에 의지를 불태웠던 송계월, 결국 23살 약관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직업 전선에 나선 모든 여성들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여자가 운전을 하면 호기심에라도 타볼 거야'라는 택시 운전을 시작했던 이정옥은 집을 담보로 잡아 크라이슬러 자동차 2대를 사서 직접 '운수 회사' CEO로 한 달에 600원에서 1000 원을 버는 성공을 거두었다. 요즘으로 치면 '플렉스'의 대상이었던 당시 택시, 당연히 많은 남성 승객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이정옥은 그걸 참아내며 직업부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알렸다.
또한 아직 '미용'이라는 인식이 흔하지 않던 시절, 그리고 대부분 미용실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시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엽주 미용실'을 당시 조선인이 운영하는 화신 백화점에 연 오엽주의 성공도 프로그램은 주목한다. '여성이여, 튼튼하고 건강하라'는 표어를 내건 엽주 미용실은 당대 최고 배우가 찾는 '핫 플레이스'가 되어갔다.
열악한 사회적 인식과 근무 환경에도 여성들은 직업을 찾기 위해 나섰다. 20명의 여점원을 모집하는데 180명이 모여들었고, 벼스 여차장 30명 모집에 126명이 모였다.
그렇다면 100년이 지난 오늘은 어떨까? 기자가 된 송계월은 데파트 걸(백화점 직원)로 일할 당시보다는 훨씬 나은 월급을 받았지만, <신여성>이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잡지사에 그녀는 유일한 여성 기자였다. 프로그램은 OECD 유리천장지수(Glass Ceiling Index ;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별이나 인종 등의 이유로 조직에서 일정한 서열 이상 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 최하위인 한국의 현실을 말한다. 여성의 91.5%가 스스로 차별받는다고 말하는 삶, 지난 10년 동안, 아니 지난 100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ebs는 11월 7일부터 9일까지 <여성 백년사-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3부작을 방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제목을 비튼 듯한 여성 백년사 3부작의 제목,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이를 통해 다큐는 백년 전 그때 남성 중심 사회 속에 첫 발을 내딛은 여성들의 '잔혹사'를 다루며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에는 고달픈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려 한다.
프로그램은 최근 방송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와 같은 토크멘터리 형식을 차용한다. 방송인 안현모, 김현숙, 이승국을 오늘의 패널로 등장시켜, 역사학자 심용환과 함께, 그때와 오늘의 이야기를 견주어 보고자 한다.
의문의 방에 들어간 김현숙, 안현모, 이승국 세 사람, 그들에게 갑자기 질문이 던져진다. 남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라. 순간 당황했지만, 무사히 세 사람의 독립운동가를 답할 수 있었다. 다음 질문, 여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라. 세 사람 모두, '유관순 열사' 이상 답을 이어가지 못한다. 세 사람의 무지를 탓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들같지 않을까? 그렇다면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는 어떨까? 역시나 우리는 근대 소설의 기틀을 마련한 '이광수'는 알아도, 이광수가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칭찬을 아끼지 않은 그 당대의 여성 소설가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시간의 문을 열고 들어간 김현숙, 안현모, 이승국 세 사람, 192,30년대의 경성 역 플랫폼을 재현한 듯한 장소에서 이들을 역사학자 심용환이 맞이한다. 그리고, 이들을 찾아온 한 사람, 그 시대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복장의 여성은 이제 부산으로 가서 조선을 떠나려는 김명순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만나려는 김명순은 누구일까?
탄실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기를, 누구든지 퍽 빈곤한 집안에 태어났을 지라도 공부만 잘하고 점잖기만 하면 좋을 줄 알았다 - 김명순, <탄실이와 주영이>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 김명순 1915년 매일신보에 19살 동경 유학 중인 여학생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동경 유학을 가는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던 시절, 그 중에서도 10명도 안되는 여학생들은 당연히 주목의 대상이었다. 실종된 여학생이 바로 김명순이었다. 평양 갑부의 서녀였던 김명순은 일찌기 동경 유학을 떠났다. 재학 중 소개로 만난 해방 후 초대 육참총장이 된 당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며칠 후 학교로 돌아온 김명순, 그녀는 피해자였지만 학교와 사회, 그리고 동료 학우들은 그녀를 '남자를 유혹한 헤픈 여자' 취급을 했다. '여자가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라는 식이었다. 결국 학교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김명순을 그런 처분에 대해 굴복하지 않는다. 귀국을 해서 다시 숙명여고에 졸업한 김명순은 1917년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에 단편 소설 <의심의 소녀>를 응모해 2등으로 당선, 등단을 하게 된다. 이제 막 근대적 소설이 등장하던 시절, '교훈적 주제에서 벗어난 <무정>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이광수의 극찬을 받으며 김명순은 최초의 여성 소설가가 된 것이다.
이후 김명순은 '쥐같은 남자에게 짐승같은 팔 힘으로......', '창부같은 계집이라...... 일본 남자와 연애한 줄.....', 자신의 성폭행 경험을 낱낱이 고발한 <탄실이와 주영이>를 1924년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하지만, 주변 문인들은 일찌기 자유 연애를 하며 살던 신여성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그녀의 작품이 아닌 사생활을 들어 '협잡'에 가까운 비평을 일삼았다.
당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비평가였던 김기진은 1924년 신성에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을 싣는다. '착한 처녀인지 보증할 수 없다'라던가, '거친 생활을 한 타락한 여자'라며 그녀의 작품에 대해 '분냄새 나는 시'라고 폄하했다.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노음니다. - 김명순, <생명의 과실> 머리말 중
이에 대해 김명순은 <김기진 공고문을 무시함>이라는 글을 당시 신여성에 투고했지만, 잡지 광고에서 등장한 김명순의 글은 정작 발간된 잡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1925년 시 24편, 소설 2편, 수필 4편이 실린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발표했다. 또한 5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공채를 거쳐 매일신보에 입사, 이각경, 최은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 번째로 여성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문인들의 비판을 넘어선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조차, '은파리'라는 필명으로 '남편을 다섯이나 갈았다'던가 식의 가십성 기사를 써, 김명순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할 정도였다.
조선아, 이 다음에 나갓튼 사람이 나드래도/ 할 수만 잇는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 김명순, 시 <유언> 중에서
결국 김명순은 더는 조선에서 그녀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생활고와 정신병에 시달리다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방정환, 김기진,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조차 '신여성'이자 능력있는 문인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파렴치한 협잡을 마다하지 않던 시절, 그 시절에 대해 <여성 백년사>는 당시의 한 광고를 들어 말하고자 한다. 전차에 다리를 드러내고 앉은 여성들, 그녀들의 다리에는 '피아노 한 채만 사주면, 문화 주택만 사주면 일흔 살이라도 괜찮아요.' '돈도 없고, 신경질은 많고, 집세 낼 돈도 없어요', 바로 이 광고가 그 시대가 '신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신여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했던 김명순은 결국 조선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고 프로그램은 말한다. 토크멘터리의 형식으로 '미래를 알 수 없다면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살았던 과거의 인물에게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취지에서 기획된 <여성 백년사>, 과연 선각자였던 김명순의 삶을 제대로 조명했을까?
희생양이 아닌, 주체적 인간상의 조명이 아쉽다 최근 인기를 끄는 토크멘터리 형식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프로그램들에서 우선 눈에 띄는 건, 패널로 등장한 이들의 '감정적인 접근'이다. 당연히 일본 유학 중 성폭행을 당하고, 동료 학생들, 그리고 동료 문인들에게 왕따를 넘어서 발을 못붙일 정도의 수모를 당한 김명순의 삶을 굳이 오늘을 살아가는 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안타까움과 분노가 앞서게 된다. 그런데, 그게 김명순에 대한 제대로 된 조명일까? 외려, 희생양, 사회적 피해자라는 부정적이고 제작진이 말하고 싶은 편의적인 면만이 부각된 것은 아닐까?
실제 김명순은 여전히 가문과 집안에 따라 결혼이 정해지던 당시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유 연애'를 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주장했던 여성이다. 근대 소설의 시발점이 된 이광수의 작품들이 '자유 연애'를 주장한 이유 역시, 근대적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과 의지의 문제를 이를 통해 풀어보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주체적인 선택은 당시 사회에서 아직 쉬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런 그녀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에 대해 조금 더 차분하게 접근하는 지점도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그녀의 자부심처럼 세 번의 일본 유학을 하고, 진명과 이화 등 당시 신여성들이 다녔던 학교를 섭렵했던 그녀는 애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할 만큼, 뛰어난 외국어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 소설에 있어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광수가 찬탄할 정도로 뛰어난 문인이었다. 여성 백년사의 첫 테이프를 끊은 여성이라면, 아직 근대적 의식이 채 자리잡지 못한 조선 사회에서 희생된 여성으로서만이 아니라, 근대 소설가로서 그녀의 작품의 가치를 조금 더 조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여성 백년사가 한 면만이 부각된 것같아 아쉽다. 언젠가 교과서에 김명순이 실린다면, 그녀의 뛰어난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김명순을 제대로 자리매김해야 하지 않을까.
ebs다큐 프라임은 10월 10일부터 3부작으로 <게임에 진심인 편>을 방송한다. 그 중 1부, <내 장례식에 틀어줘>는 제목 그대로 한 노인의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성당에서 진행된 경건한 장례식, 고인을 추모하며 그가 남긴 영상을 튼다. 그런데 눈물을 훔치던 경건한 분위기가 무색하게 고인이 열렬하게(?)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보여진다. 살아생전 고인이 가장 즐겨했던, 혹은 행복한 순간, 결국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행복한 모습에 함께 웃음을 짓는다.
게임이란?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은 50여년동안 일보에 대해 글을 써온 미국 출신 평론가의 글 모음집이다. 일본에 대해 분석한 그의 글들 중 특히 주목을 끄는 건 일본 사람들이 즐겨하는 '파친코'에 대한 분석이다. 온통 시끄럽고 번쩍거리는 기계에 진심으로 매달려 파친코를 즐기는 사람들, 그는 그런 사람들의 '몰아'의 경지를 흡사 종교적 몰입이나 명상의 순간에 견준다. '제한적이고 동원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안전과 확실성에 대한 보장이 없던 자아가 이제 소외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면서 자아로부터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성가시고 불만에 찬 자아는 잠시 파친코 기계에 매달린 소외의 시간을 통해 정화된다는 것이다. 이 심오한 '오락'에 대한 분석, 하지만 그 '심오한 분석'은 이제 ebs 다큐프라임의 <게임의 진심인 편>으로 이어진다.
다큐는 게임을 '뉴노멀'이라 단정짓는다. 한국인 10명 중 7명이 게임을 한다고 한다. 10대의 93%야 그렇다 치고, 40대의 80.4%가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아이템 구매율은 50대가 20대를 넘어섰단다. 허긴, 지하철에서 핸드폰에 열중하는 어르신들을 보면 거의 반 정도의 비율이 '고스톱' 게임 삼매경이다. 한때는 지인은 핸드폰 게임에 빠져 눈이 나빠졌다고 토로하기 했다. 그저 아이들이나 하는 거라 치부했던 게임인데 '뉴노멀'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어느새 우리 일상 속 일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큐는 그런 현실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게임에 대해 무지하다고 질타한다. 중독이나 시간 낭비, 현실 도피이거나, 산업이나 신생 스포츠 장르로 치부하며 게임에 대해 제대로 알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부, <내 장례식에서 틀어줘>는 대표적인 게임케스터 전용준 씨가 '게임의 신'으로 등장, 8년차 게임 개발자이면서도 '겜알못(게임을 알지 못하는 자)'인 서태훈을 게임 속으로 끌어들인다. 1994년 최초의 mmorpg 게임 '바람의 나라'로 부터 시작하여 프린세스 메이커, 리그 오브 레전드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했던 게임 속 캐릭터가 되도록 만들어 '퀘스트(온라인 게임에서 이용자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해결해가며 '게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가간다.
사람들이 게임을 가장 많이 하는 시간은?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 8시부터 10시 즈음이란다. 사람들이 즐겨하는 10개 게임의 시간을 더하면 인류가 지구에서 산 시간의 7배나 된단다. 즉 이제 게임은 '취미'를 넘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기에 다큐는 게임을 이해하는 건 곧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러기 위해 다큐가 제시한 게임의 기본 철학을 위해 요한 호이징하가 소환된다. 게임에 진심인 인간, 그 근저에는 호모 루덴스, 즉 놀이를 즐기는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놀이가 아니다.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의 개발자 송재경은 게임에는 '숨겨진 원리'가 있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축구가 굳이 잘 쓸 수 있는 손이 아닌 발재간만으로 경기를 운영하듯, 게임은 현실에는 없는, 그런데 활동을 제한하는 '장애물'같은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이 장애물을 감수한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임에도 그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고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바로 이런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을 즐기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다큐는 짚는다.
게임의 역사만큼 그 시간동안 명멸한 게임들이 많다. 스타크래프트가 열리는 곳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이 즐기는 게임으로 남았다. 게임의 생로병사, 그걸 '관장'하는 건, 결국 '플레이어', 프린세스메이커의 개발저 아카이 타카미는 그걸 '캐치볼'이라 정의한다. 플레이어의 능동적 개입, 개발자와 플레이어의 상호작용 과정(interaction), 더 나아가, 개발자가 만들어 놓은 플레이 룰 아래서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게임을 펼쳐가는 과정은 결국 플레이어에 의해 게임이 실질적으로 창조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게임 세계 내에 나를 '위치'시키고 그곳에서 플레이를 하고 보상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돌아오는 '피드백', 그런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 그리고 마치 다른 존재가 된 듯 몰입의 과정에서 느끼는 '희열'로 게임을 설명할 수 있다고 다큐는 말한다.
그런데 하고많은 것들 중에 왜 사람들은 게임을 하며 재미를 느끼는 것일까? '재미 이론'을 주장하는 미국의 게임 개발자 라프 코스터는 인간의 두뇌는 새로운 패턴 학습을 즐긴다고 말한다. 점프를 하고 공간을 뛰어넘고 목적지에 도달해내는 과정에서 기쁨과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꾸 죽어도 또 살아날 수 있는 , 게임이라는 특별한 공감 안에서 사람들은 '난이도'와 '숙련도'를 뛰어넘으며 노련하게 적을 사냥하고, 적을 무찌르며 기쁨을 느낀다. 또한 이제 이 과정은 '개인'만의 만족을 넘어 집단적인 상호작용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성취감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킨다.
그러기에 다큐는 정의한다. 게임이란 가장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그러기에 사람들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도, 애써 더 재미있게 게임을 하기 위해 기꺼이 게임 속 '난관'에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변했다. 사람들은 현실보다 더욱 인간적인 활동, 게임'을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본능을 맘껏 발산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뮬레이션'된다. 안전하게 '인간 사회'를 경험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설사 실패를 한다해도, 몇 번이나 죽어도, 다시 몇 번이나 살아날 수 있듯이 '안전한 실패'를 누린다. 가장 인간적인, 하지만 무한 반복될 수있는 삶의 시뮬레이션, 굳이 이걸 마다할 이들이 있을까.
줄어들기는 커녕 나날이 그 도를 더해가고 있는 학교 폭력, 과연 그 '폭력'의 악순환을 멈출 수는 없을까?
학교 폭력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받은 학생이 미안하다고 거절한 이후, 그 학생은 비난을 받았고, 고립되었다. 그 누구도 그 학생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런 '따돌림;은 폭력으로 이어진다. '너 미쳤냐?', '요즘 안 맞았지?', 하는 상시화된 폭력은 피해자를 지옥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뻔뻔하게 말한다. '장난'이었어요 . 그리고 어른들은 말한다. '싸우면서 크는 거지', 여전히 우리 사회는 '장난'치는 친구 관계, 아이들은 다 그런 거라는 식으로 학교 폭력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장난'이 피해자를 피폐한 삶이나, 죽음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는다.
ebs는 지난 8월 29일부터 3부에 걸쳐 <학교 폭력 공감프로젝트>를 통해 그 방향을 모색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동안 학교 일선 및 정부가 앞장 서서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한 각종 조치를 취했음에도 왜 효과가 없었는가라는 의문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그 의문의 답을 당사자인 '학생'들로 부터 구하고자 한다. 초등학생을 비롯하여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그를 통해 학교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주범'을 '기소'하고자 한다. 선생님들이 '배심원'으로 자리하고, 그곳에 학생들이 기소한 '주범'들이 드러난다. 과연 우리 시대 학생들은 '학교 폭력의 주범'들이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어른'을 기소합니다. '제설제 먹이고 폭행', '오물 뒤집어 씌우고 폭행', 학교 폭력과 관련된 언론의 보도 내용들이다. 학생들은 바로 이런 '언론'을 고소한다. 진정으로 학교 폭력에 대한 우려와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대신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가에 초점을 맞춘 언론은 자신들이 바로 '학교 폭력'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말한다. 언론을 비롯하여 어른들이 만든 콘텐츠는 지루하거나, 폭력적이라고. 언론의 자극적 헤드라인은 피해자를 부각시키며 학교 폭력을 선정적으로 소비할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유투브를 비롯한 sns 역시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들을 관심을 끌기 위해 앞다투어 게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폭력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언론이나, 유투브만이 아니다. 학생들은 입을 모아 교육 동영상의 유죄를 '기소'한다고 말한다. 어른들 입장에서 일방적인 폭력 예방 캠페인은 학생들 입장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식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학생들은 교육부의 캠페인이 '느린 예방 교육'이라 냉소한다.
여전히 학생들을 본드나 하고 삥이나 뜯는 구시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캠페인, 하지만 이제 학생들에게는 '사이버 폭력'이 새로운 '폭력'으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 그러기에 일방적으로 틀어주는 학교 폭력 동영상은 시대에 뒤떨어진 '졸린 영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졸지 말라고 하기 이전에 '졸음이 오지 않는', 현실적인 대응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기소한다. 학생들에게 '입'으로 하는 말과는 다르게 막상 '상황'이 벌어지면 '책임'을 면하기 위해 '절차'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생님은 믿을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당연히 '학교'도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늘 '안일'하게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한 것이 아이들 눈에 비친 '학교'의 모습이다. 당연히 그런 학교와 선생님들의 태도에 학생들은 무력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방관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선생님과 학교만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러기에 학생들은 '대한민국'을 기소한다. 자본주의, 외모 지상주의, 그리고 성취 중심의 경쟁 사회는 학생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그래서 서로를 무시하고, 왕따와 '은따'를 양산하고 학교 폭력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이,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개선되지 않는 한, 그저 일회적인 캠페인 식의 학교 폭력 예방만이 존재하는 한 학교 폭력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 입을 모아 말한다. 즉 학교 생활을 만들어 가는 총제적인 권력 구조, 그 시스템이 바로 지금 학교 폭력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기소'합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 언론, 나아가 우리 사회만의 문제뿐일까?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학교 폭력에서 결코 자신들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한 여고 뮤지컬 동아리에서 '빈방 있어요'라는 게임을 한다. 술래가 된 한 사람이 둥글게 원으로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빈방 있어요?;라고 물어본다. 둘러선 학생들의 역할은 '거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술래가 뒤돌아서서 '빈방 있어요?;'라고 물어보는 동안, 뒤에 선 학생들은 마치 '방'을 바꾸듯 자리를 바꾼다.
처음에는 '게임'이니 자신있게 웃으며 '빈방 있어요?'하고 물어보던 술래, 하지만 친구들의 거절이 이어지자, 점차 목소리가 작아지고 떨리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야 만다.
이 게임은 바로 이른바 '은따', 은근한 따돌림을 시뮬레이션 해본 것이다. 술래가 된 친구는 말한다. 게임이라고 했는데도 세상에서 동떨어진 듯 했다고, 그 무엇도 해도 안 될 것같은 막막함이 들었다고. 반면, 둘레에 서서 '거절'을 한 친구 역시 설사 게임이라 해도 그 '룰'을 벗어나면 되는데 그걸 따르는 자신에게 '죄책감'이 느껴졌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학생들은 마치 '러시안 룰렛'처럼 형성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나서지 못하는 자신들의 '방관'을, 그리고 '나랑은 상관없어'라는 무관심을 '방관의 카르텔'이라며 '기소'한다고 말한다. 산격 중학교에서는 형사 재판의 형식으로 괴롭힘당하는 친구를 '방관'한 학생에 대한 모의 재판을 열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5 ; 4, 유죄와 무죄의 비율이다. 학생들은 비록 한 표 차이지만, '방관'이 유죄가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4표의 학생들은 말한다. 자기도 폭력을 당할 까봐 차마 나서는 게 쉽지 않다고. 그러기에 방관하는 자리에서 한 걸음 나서는 것이 '대단한 용기'라고 배심원이었던 선생님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 '방관'의 카르텔에서 몸을 숨긴 학생들을 바꾸면 학교 폭력이 만연한 현실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가져본다.
이와 같은 학교 폭력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행복지수 2위, 경쟁없는 교육을 지향하는 덴마크에서도, 국가 학력 조사 최상위국인 핀란드에서도 학교 폭력의 관행은 피해갈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학생들의 학교 폭력에 대한 고민을 공유한 이 나라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의견에 적극 공감을 표한다. 그리고 역시나 일회적인 캠페인 성 교육이 아니라 지속적인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연대감, 그리고 사회적 감정 교류의 능력을 고양 시켜야 학교 폭력의 악순환,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9월 15일 방영된 <한식 연대기> 3부는 한식을 '산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개미투자자로 분한 주상욱과 그런 개미투자자를 이끄는 주식 크리에이터 슈카가 하나의 기업으로 '한식'을 투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식이다.
한식이란? 왜 이런 식의 '접근'을 했을까? 들어가기에 앞서 <한식 연대기>는 서울대 문정훈 교수를 비롯한 다수의 전문가들에게 묻는다. '한식이란?' 그런데 각 분야에서 트렌드로서의 한식을 이끌어내고 해석해낸 전문가들이 쑥쓰럽게 머리를 긁적인다. 딱 맞춤한 답이 떠오르질 않아서이다. 일본식 간장으로 부터 시작된, 이른바 '왜간장'이라고 불리던 샘표 간장은 한식일까? 아니, 일본 라멘이 원조인 우리의 라면은? 예전 조상님들은 드시지 않았다는 튀긴 닭은 또 어떨까? 그렇다면 '집밥'이 한식일까? 집밥보다 '햇반'이 익숙한 세대는 '한식'을 안먹는 세대일까?
<3부 한식 주식회사> 바로 이렇게 이제는 '모호'해진 '한식'의 정의를 추적해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통 집밥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k푸드로 거듭난 '미래 성장 가치'가 좋은 우량주 '한식'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한식 주식회사'가 처음 시작된 때는 언제일까?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 샘표 간장의 cm송을 자연스레 기억해낸 주상욱은 그 자신도 의아해한다. 그처럼 그와 비슷한, 혹은 그보다 나이가 많은 연배가 자연스레 기억해 낼 샘표 간장 cm송처럼, 샘표 간장은 오랜 기간 간장의 대명사였다. 그리고 <한식 연대기>는 이 샘표 간장을 한식 주식회사의 시발점으로 본다.
한식의 핵심 구성은 밥과 반찬으로, 반찬은 '간'이 되어있다 이 '간'의 베이스가 되는 간장, 그런데 오랜 시간, 아니 지금도 우리 민족은 '간장'을 담궈왔다. 그런데 그 간장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1년 여의 숙성 기간과 그에 걸맞는 공간이 필요했다. 해방 후 월남민들, 그리고 이어서 터진 6.25전쟁은 우리 전통의 간장을 담글 수 있는 '환경'을 앗아갔다. '불하'받은 일본 간장 공장에서 만들어진 간장, 아직 낯선 간장을 팔기 위해 주부 사원들이 집집마다 방문을 했다는데, 집집마다 다른 '장맛'이 '판매용 간장'의 일률적인 맛으로 변화되었고, 이 '간장'을 기반으로 한 달달한 불고기가 '꿀맛같은' 고기 요리로 자리잡았다. 2013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2320억 병의 양조간장이 팔렸다.
집밥, 그 패러다임의 변화 집밥 한 상이 '한식 주식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한식 연대기>는 그 변곡점을 '포장 기술의 혁신'에서 찾는다. 그리고 '음식'을 '포장'해서 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끈 주역은 다름아닌 '두부'이다.
나이가 좀 있는 연배들은 기억할 것이다. 저녁 무렵 딸랑딸랑 울리던 두부 파는 아저씨의 종을, 그처럼 두부는 '판두부'로 거기서 한 모씩 떼어서 팔던 음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두부를 만드는 데 쓰이는 '간수'에 공업용 석회가 들어간다는 두부 파동을 거치며 시중 두부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갔다. 또한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국민총소득 증가와 함께 먹거리에 대한 가치 기준이 높아져 가던 시기였다고 한다. 바로 이때, 깨끗한 물로 포장한 두부가 등장했다. 또한 이른바 '콜드체인 시스템'으로 콩나물과 두부가 냉장 유통으로 통해 대중의 '위생 욕구'에 호응했다. 이러한 냉장 유통을 통해 위생 관리 '콜드 체인 시스템'은 전문가들이 식품계의 반도체가 평가할 정도로 '한식'의 앞선 기술을 선도한다. 이제는 2021년 기준 하루 50만 모 5400억 규모의 시장이 되었다.ㅣ
반찬의 베이스가 되는 간장, 그리고 포장 기술의 혁신, 그렇다면 다음 '한식'의 변화를 이끌 주역은 무엇일까? 바로 '밥'이다. 1996년 방부제 없는 즉석밥 '햇반'이 등장했다. 햇반을 만든 CJ는 소비자들의 생활 패턴이 변화되고 있으며 특히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는 삶의 변화에 주목, 즉석밥을 착안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여전히 밥은 밥솥에 해먹어야지 하던 시절, 밥은 모성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과감한 투자를 했지만 엄청난 손해가 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는 급속하게 변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바빠졌다. 6880억 시장, 100배나 성장했다. 매년 40억 개의 햇반이 생산된다.
가정 간편식으로 '밥'이 나왔다면, 그 다음은? '국'이 그 뒤를 따른다. 물론 국은 즉석밥처럼 처음부터 맛있지는 않았다. 예전만 해도 국은 건조된 덩어리에 분말 엑기스를 넣어 끓여야 했다. 하지만 이제 간편식으로 사먹는 국은 집에서 끓인 음식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 진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탕'이 바로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고깃국', 그 중에서도 육개장이다. 육개장을 비롯하여 품목만 해도 38952개의 가정 간편식, 밥, 국, 찌개, 구이, 튀김, 전 등등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린 한식 상차림, 그걸 이제는 '가정 간편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엄청난 시장이다.
삶의 질과 함께 한 음식 문화 밥도 나오고, 탕도 나오고, 하지만 사람들에게 '소울 푸드'를 물어보면, 밥도 아니고, 탕도 아니고, '라면'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1961년 첫 등장한 한국인의 소울 푸드, 처음 사람들은 그 이름만 보고 옷감이라 착각하기도 했단다. 물론 개발을 한 건 '일본'이다. 하지만, 일본식 라멘을 우리의 국밥 문화에 맞게 변화시켜 나갔다. 특히 '소고기 국밥'을 좋아하는 우리 식문화에 착안한 1970년에 판매를 시작한 '소고기 라면'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여전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년에 70개에서 80 개 정도, 연간 생산량 39억 개의 라면으로 속도 풀고 마음도 푼다.
많이 먹는 걸로 치자면 '치킨을 빼놓아서는 섭섭하다. 체인점과 개인 업주를 합쳐 전 세계 맥도날드 점포를 앞선다는 우리나라의 치킨집, 그런데 '치킨이나 '라면'을 즐겨먹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제된 기름의 안정적인 공급이 이루어져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원래 '한식'에는 튀긴 음식이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튀기는 기름을 위한 산업도 불모지였다. 하지만, 정치적 격변기를 겪고 자리잡은 정부는 국민들의 안정적인 식품 공급을 위해 콩기름 공장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에 힘입어 대형 식용유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콩 100톤으로 식용유를 만들면 생산량은 17톤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두박이라는 단백질 부산물이 나오고, 이는 돼지들의 단백질 사료로 쓰인다. 즉 식용유의 대량 생산은 뜻밖에도, 혹은 정책적으로 축산업의 부흥을 유도했고 '돼지 고기'의 대중화를 이끈다.
해방 후 양조 간장의 등장으로 부터 시작된 '한식 주식회사', <한식 연대기>는 우리 민족의 삶의 질과 음식이 궤적을 맞추어 발전해 온 과정을 조망한다. 70년대의 쌀부족이 제분 산업 발전을 낳았고, 80년대의 국가적 발전이 식품 산업의 생산을 선도했다. 90년대 나아진 삶의 질은 식품 산업의 고급화를 선도했고, 2000년대 이후 가족 형태의 변화는 간편식 시장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더는 집에서 곰국을 끓이지 않는 시대, 제품으로서의 한식의 발전이라는 기반 위에서 이른바 'K푸드'의 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1927년 경성방송국으로 시작해서 1947년 국영 서울 방송국으로 출범한 kbs의 아카이빙(특정 기간 동안 필요한 기록을 파일로 저장 매체에 보관해 두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 현대사의 기록이다. 추석을 맞이하여 kbs는 이 아카이빙을 기반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룩한 눈부신 한강의 기적, 88올림픽의 성공, IMF 위기 극복 등 KBS의 풍부한 아카이브를 발판으로 격동의 근현대 120년 역사 안에서 한식이 정치, 경제, 사회와 어떤 상관관계로 변화 발전하는지 밀도 있게 짚'어보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4부작 <한식 연대기>이다.
그 중 9월 10일 방영된 1부는 '정치의 맛'이다. 올 5월 종영된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으로 분했던 주상욱 배우가 프리젠터로 등장한 1부에는 한국한 중앙연구원의 주영하 교수의 설명에 기대어 우리 현대 정치사와 '한식'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또한 정치와 한식의 실례를 증명하기 위해 홍준표, 박지원, 심상정 세 사람의 정치인이 각각 자신이 즐기는 '한식'을 통해 정치 속 한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치가 만든 한식 정치와 한식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1890년 조선 시대의 밥상 위에는 이른바 '고봉밥'이 올려있다. 고봉 가득 흰 쌀밥에 고깃국을 푸짐한 한 끼 식사의 표본으로 삼았던 조상들답게 사진 속 남자는 왜소하지만 그가 먹을 밥상의 밥은 무려 640g, '거인'의 밥그릇처럼 엄청나다.
그렇게 '밥'을 즐기던 우리 조상들, 그런데 이 '고봉밥'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 바로 '정치'이다. 1973년의 표준 식단제는 지금 우리가 식당에서 만나는 고봉밥의 1/3 정도 밖에 안되는 공기밥을 표준으로 정했다. 심지어 돌솥밥도 안됐다. 이제는 우리 삶에 너무도 당연하게 스며든 '한식'의 요소요소들에 얼마나 많은 정치가 영향력을 끼쳤는지, <한식 연대기 - 1부 정치의 맛>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군사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 그는 취임 선서에서 '국민을 굶기지 않고 정부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던 시대는 홍준표 시장조차 '가난ㄴ이 참 고통스러웠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보릿고개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1963년 우리 국민 소득이 100달러, 가난하고 굶주리던 시대였다.
박정희 정부는 1956년부터 우리나라에 공급된 미 잉여 농산물 원조, 원조받은 밀가루가 있으니 쌀을 적게 먹는다면 항시적인 쌀부족에서 탈출할 수 있겠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70년대의 혼분식 장려운동이다. 지금 우리가 즐겨먹는 설렁탕에 든 '국수', 그게 바로 '혼분식'의 결과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먹었다던 오래된 곰탕집은 혼분식 시대의 물결을 넘어서고자 '만두'를 빚어 팔았고, 하루 몇 천개 씩 만두를 만들던 기억 때문에 84세의 주인 김희영 씨는 이제는 만두를 먹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짜장면도 올랐어', 우리는 물가가 오르면 그 기준을 짜장면에서 찾는다. 짜장면이 그 기준이 된 것도 바로 '혼분식 장려 운동'때이다. 70년대 60원쯤 하던 짜장면, 하지만 전국 각 짜장면 가게마다 정해진 값은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서민 식단'의 지표로 짜장면 가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짜장면을 비롯하여, 서민들이 즐겨먹는 짬뽕, 탕수육 등 가격을 정부가 정했다. 값싼 짜장면 가격 통제로 인해 전국에 짜장면 가게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현재 전국에 2300여 점포, 하루 600만 그릇을 먹는 여전히 우리 국민이 사랑하는 '서민 식단'의 대표 주자로 여전히 짜장면은 자리매김한다. 어디 짜장면 뿐일까, 칼국수, 수제비, 그리고 떡볶이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 우리가 즐겨먹는 '밀가루 음식'들이 '서민 음식'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시시절이다.
이제는 사라진 '통일벼', 병충해에 강하고 생산량이 일반벼보다 2배 반이나 높은 통일벼가 1972년 보급되기 시작하며 1976년 드디어 쌀 자급화에 성공하게 되며 '한식의 역사의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시대는 또 다른 군부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하며 들어선 전두환 정권, 이른바 3S(sex, sports, screen)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울분을 달래려 했다. 또한 1980년 컬러 방송의 시작으로 '시각적 자극'을 주는 '요리'가 tv프로그램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981년 여의도 에서 '국풍 81'이란 이름의 대규모 문화 예술 축제를 개최하여 시선을 돌리고자 했다. 100만 명이 다녀간 이 축제를 통해 지역 음식이던 전주 비빔밥을 비롯하여 충무 김밥, 춘천 막국수, 순창 고추장 등이 전국적인 '메뉴'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경제 호황을 발판으로 한 금기된 욕망이 마음껏 분출되는 한편에서 언론 자유는 탄압되었고 노동 운동은 암흑기를 거치고 있었다. 1964년 국가 산업 단지로 등장한 구로 공단에서는 70년대 후반 이미 11만영의 노동자들이 '때우기' 식의 짜디짠 간의 '짠밥'을 먹으며 우리 산업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들과 학생운동의 성장은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끌었다. 더는 먹고 살고 보자의 슬로건만으로는 국민들을 '탄압'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성장'과 함께 '분배'가 새로운 시대적 담론으로 등장했다.
또한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경제적 안정은 밥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1985년 향토 음식이던 수원 왕갈비가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다. 왕갈비를 비롯하여, 삼겹살, 돼지 갈비, LA 갈비 등 밥상의 육식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970년 불과 5kg이던 연간 육식 소비량은 2000년 30kg을 넘어 이제 52kg으로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고기'를 즐기게 되는 식습관의 변화를 선도하는 ** 가든들이 등장했다. 삭막한 아파트들이 즐비한 도시에서 사람들은 식당에서나마 여유를 즐기며 고기를 뜯고 싶어했다. 고기를 자르는 '가위'가 흉측하다던 외국인들, 하지만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한식 요리의 '가위'는 자연스러워질 정도로 우리 한식의 위상은 국가적, 문화적 위상과 함께 올라갔다.
정치인, 정치인의 음식들 다큐는 이렇게 정치와 함께 변화를 겪은 '한식'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정치인들의 '음식'을 살핀다. 정치철만 되면 표를 얻고 싶은 정치인들은 시장으로 달려간다. 민심의 바로미터가 시장이기에 서민 음식을 잘 먹는 모습으로 자신들의 얼마나 서민을 위하는 정치를 잘 할 것인가를 증명한다. 이른바 '서민 코스프레', '정치국밥'이란 용어가 등장할 정도다. 그런가 하면 그들의 '음식'을 통해 그들의 정치를 살펴볼만한 정치인들도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YS 김영상 대통령과 DJ 김대중 대통령이다.
1993년 문민정부를 이끈 김영삼 대통령은 이른바 서민 음식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칼국수'를 즐겨 먹는다. 소탈한 한끼 식사의 상징 칼국수는 YS가 이끌고자 한 개혁 정치의 코드로 등장한다. 또한 우리밀 살리기 운동의 시절 대통령이 '솔선수범' 우리밀 칼국수를 먹음으로써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이념을 표상화'시켜냈다.
그런가 하면 극심한 지역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대통령이 된 DJ는 홍어를 즐겨 먹으며 호남의 맛을 세상에 알렸다. 김대중 대통령 덕에 인기를 얻은 홍어는 전라도 만으로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남미, 칠레, 아르헨티나 홍어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가능한 배경에는 1993년 우르과이 라운드를 기점으로 한 쌀 시장 개방에서 부터 시작된 다양한 식자재 시장의 개방이 있다.
정치인이 즐겨먹는 음식만이 아니다. 국빈 만찬 등 국가적인 '한식'의 밥상은 '독도 새우'라던가, '미국산 소고기' 등에서 보여지듯이 다양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통로가 된다. 서로 다른 정치적 색을 가진 정치인들을 모아놓고 먹는 '비빔밥'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즐겨먹게 된 '갈비'류, 식당에서 만나는 '스테인레스 밥그릇', 그리고 무심코선택한 짜장면을 비롯한 칼국수, 수제비 등의 밀가루 음식들, <한식 연대기- 1부 정치의 맛>은 그런 익숙한 한식들이 외람되게도 우리 현대사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백성은 먹을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기에 위정자는 백성의 음식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사기'의 구절을 내세운 아카이빙 다큐, 과연 우리가 지나온 현대사는 저 사기의 문구를 '실현'한 시절이었을까? '아카이빙'에 대한 회고와 감상을 넘어, 우리 현대사에 대한 다양한 소회를 불러일으키는 시간이었다.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이하 이창동)>이 EIDF2022 '클로즈업 아이콘' 편으로 방영되었다. '한 시대의 혹은 사회의 아이콘이 된 거장들을 마치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듯 들여다보며,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주목하는' 클로즈업 아이콘, 알랭 마자르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최신작 <버닝>에서 시작하여 <시>, <밀양>, <오아시스>, <박하 사탕>, <초록 물고기>까지 그의 작품을 공간과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또한 거기서 더 나아가 영화 감독 이전 문학을 하던 이창동과 문학을 하기도 이전 어린 이창동의 시간을 주유하며 우리가 아는 이창동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최근 자신의 작품들을 리마스터링 하고 있다는 이창동 감독, 그와 함께 그의 지난 작품들을 복기하니 말 그대로 감회가 새롭다. 윤정희 배우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로 등장하는 2010년 작 <시>, 사춘기에 접어 든 손자와 함께 고단한 삶을 버텨가는 할머니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시창작 교실 선생님은 '일상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시라 정의하시고, 하지만 할머니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으려 애쓸수록 할머니의 손에 잡히는 건 '부조리한 삶'이다. 손주의 부도덕한 행위와 마주하게 된 할머니, 결국 할머니는 자신의 온몸을 던져 '시'를 완성한다.
시를 쓰려다 '현실'의 암흑을 발견하고 자신을 던져 '진정성'을 구하려 했던 할머니의 모습에 문득 세월호 이후 분노하며 거리에 섰던 평범한 이웃들이 떠올랐다. 그렇듯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우리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화두를 담아낸다. 시를 쓰는 할머니를 통해 감독은 고통스럽고 부도덕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물었다. 2010년에 감독이 우리 사회에 던진 던진 질문에 2017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화답했다. 영화 <시>뿐만이 아니다. <초록 물고기>에서 <버닝>까지 그대로 우리의 지나온 시간이자, 삶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가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건 그런 시대 정신의 대변인으로써의 그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현대사의 대변인 이창동 기자가 처음 이창동 감독을, 아니 이창동이란 사람을 알게 된 건 '문학 전집'을 통해서이다. 70년대 대표 작가들을 모아놓은 전집에서 이제는 기억조차 아련한 소설가 이창동의 작품을 만났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내내 감독이었지만 그의 영화는 '소설'처럼 읽힌다. 감독 이창동의 작품은 '문학작품'처럼 분명한 '플롯'과 '전개'를 가지고 관객에게 '열독'을 권한다. <밀양> 속 하늘도, 햇빛도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장 속 지문처럼 읽혔다. 하루끼와 윌리엄 포크너의 만남같다는 <버닝>속 종수와 M을 감독의 설명이 그래서 대번에 이해되기도 한다.
다큐는 이창동 감독과 함께 관객들을 작품의 배경이 된 그곳으로 다시 여행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다리 아래서 무심하게 놀고, 그 다리 아래 강물을 따라 내려오는 여학생의 시신, 느닷없이 보여진 범죄라는 감독의 설명을 배경으로 다시 한번 소환된 <시>속 소도시, <버닝> 속 답답하던 그 후암동 빌라, 빽빽하기도 하고, 비밀스럽기도 한 밀양이라는 특별한 하지만,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있는 세속적인 지방 소도시, 코끼리가 등장하는 환타지의 공간이 된 오래된 임대 아파트, 그때만 해도 참 시골스러웠던 <초록 물고기>의 배경 일산과 '암흑가'의 정의가 된 영등포 까지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답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감독 이창동의 시간이지만, 그의 작품과 함께 시대를 읽고 고뇌했던 관객의 시간이기도 하다.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그 철교 위의 '영호',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1980년대를 '시인'했다. <초록물고기>를 통해 '자본주의화'되어온 사회의 그림자를 체감했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을 빌어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밀양>이라는 작품 주제가 된 '용서'는 시내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일본 제국주의, 6.25 전쟁, 군사 독재의 고통을 겪어낸 우리 현대사, 그 고통을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화두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이 처럼 작품 속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던져진 개인을 통해 우리 현대사가 짊어진 숙제를 직시한다.
또한 다큐를 통해, 감독이기 이전 개인 이창동의 역사를 더듬어 간다. 최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화제가 되었지만, 이미 2002년 감독은 <오아시스>를 통해 '도전이자 실험'을 시도했다.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1급 뇌성마비 장애인인 여주인공, 영하 20도에 반팔을 입고 갓 출소한 종수라는 한 눈에 보기에도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남주인공을 만나 '소통'하고 '사랑'한다는 설정은 '화제'를 넘어 사회적 쟁의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담론을 넘어 다큐는 우리가 몰랐던 뇌성마비 누나를 둔, 그래서 그 누나를 지키려 애썼던 가난하고 말수적은 소년을 찾아낸다. 그의 고향 대구, 그리고 다니던 초등학교를 주유하며 장애인이었지만 똑똑하고 용감했던 한공주의 '의연함'의 근원을 헤아리게 된다. 그리고 그건 이창동의 개인사이지만, 그와 같은 또래의 가난하고 의지할 곳없이 그래서 잡초처럼 세상과 싸우며 시대를 헤쳐온 이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명장'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현대사의 '산증인'이자, '증언자'로서 이창동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또한 다큐는 그의 작품을 빛냈던 배우들을 소환한다. 어떤 여배우가 이 캐릭터를 맡을 수 있을까 '숙제'였다던 <오아시스>의 한공주, 하지만 문소리를 감독이 기대했던 이상의 한공주의 모습을 보여줘서 감탄했다는 감독의 후일담에 문소리의 소회가 얹힌다. 아이를 잃고, 신에 의탁하고 다시 신과 싸우는 버거운 임무에 도전하는 <밀양> 역의 시내를 맡은 전도연에게는 배우 스스로 느끼며 발현할 수 있도록 애썼다는 '설득'의 디렉션을 제시한다.
이렇듯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작품 자체로도 뛰어나기도 하지만, <초록 물고기>의 한석규, <박하 사탕>의 설경구처럼 캐릭터로 우리에게 각인된 스타의 등용문이기도 하다. 다큐는 그런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 캐릭터로 기억된 배우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는 귀중한 시간이 된다.
다큐 <이창동>은 그래서 묘한 경험이 된다. 감독의 작품이 곧 '내가 살아온 시간',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복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초록 물고기>로부터 <버닝>까지, 새삼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필수적'인 교육 과정처럼 여겨진다. 그 '코스'에서 여성이나 남성의 차별은 거의 없다. 외려 '대학'이 인생 최대의 관문처럼 여겨져서 문제가 될 정도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은 어떨까? 모두에게는 아니겠지만 나름 선망하는 '트렌디'한 직업군이 아닐까? 만약에 결혼한 아내가 대학에 가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면 어떨까? 부부가 모두 직업을 가지는 것이 더는 이상하지 않을 뿐더러, 당연해지는 세상이다. 그런데 동시대에 살면서 '대학'에 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해야 하는 여성의 삶은 어떨까? 자피르 나자피 감독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이다.
▲ⓒ EBS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픈 주부 미나 살레히는 지금 일생일대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이란 고원 지대에서 농장과 가축을 기르며 제법 넉넉한 형편인 골 모하마드와 결혼하여 아장아장 걷는 아들을 둔 주부이다.
그녀는 작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 등록금까지 냈음에도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 집안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친척이 하던 미용실에서 일하던 그녀는 처음엔 영화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만난 감독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들어왔다. 그 일을 배웠다. 어려서 부터 화장하는 걸 좋아하던 그녀의 적성에 딱 맞았다. 돈도 좀 벌었다. 본격적으로 그 일을 하고 싶었는데 남편이 청혼했다. 양을 팔아 화장품을 사주겠다던 남편, 대학에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
영화는 미나 살레히와 골 모하마드가 사는 이란 고원 지대를 배경으로 대학에 가기 위한 한 여인의 고군분투기를 담는다. 결혼 전에는 대학에 가라고 했던 남편은 이제 '이혼'을 하고 가라고 말한다. 아이의 양육권도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처지이다. 세상에 대학에 가고 싶다는데 이혼도 해야 하고, 아이도 키울 수가 없다. 부족의 전통이란다.
▲ⓒ EBS
아들이나 잘 키워 남편과 시댁은 그 이유로 큰 집을 든다. 형님이 공부한다고 대학을 가고 아주버님은 중독자가 되었다고 한다. '엄청 건방져졌어'라는 게 그 형님에 대한 집안의 평이다. '차 한 잔 가져와'로 시작한 남편의 말은 '여자는 아무데나 갈 수 없다'며 우유도 짜고, 카펫도 뜨고, 빨래도 하고, 애나 키우라고 말한다. 여전히 미나는 손빨래를 한다. 심지어 미나가 양떼를 잘 돌보지 못해 10마리나 도망갔다며 그 금액을 들먹인다.
미나는 분노한다.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다. 분명 대학에 보내주겠다며 청혼을 하고서는 이제 와서 안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다그치지만 남편은 '전통'을 들먹인다. 외려 하루 종일 대학이랑 화장 생각만 한다며 우리 어머닌 가정부가 아니라고 따진다. 그렇다고 꺽일 미나가 아니다. ' 하지만 아직은 겨우 소심하게 양말을 벗어 빨라는 남편에게 스스로 좀 빨라고 하는 식이다.
내가 정작 어머니 밑에서 가정부 일을 하고 있잖아요.
혹시나 싶어 시어머니께 하소연을 해보지만 씨알도 안먹힌다. 연신 양털로 실을 뽑아내고 카펫을 짜며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신다. 아내가 됐으니 대학은 안된다는 것이다. 화장은 무슨 화장이냐며, 구리 그릇에 물을 채워 거울 처럼 썼다며 옛날 일을 들먹인다.
아내를 구스르기 위해 대학과 화장만 포기하면 옷이든 차든, 심지어 자신의 인생도 주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남편, 의사나 선생님도 아니고 화장을 배우러 대학에 가고 싶다는 게 말이 되냐는 식이다. 그러면 '새 아내'를 구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 EBS
대학에 가면 새 아내를 들이겠다는 남편, 미나는 친한 친구를 찾는다. '니가 할래?', 니가 가라 하와이도 아니고, 대학에 가는 자기 대신 남편의 새 아내가 되어 달란다. 하지만 미나의 속내는 복잡하다.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골라주고 싶은 것이다. 결국 그녀가 대학에 간다는 건, 남편과 시어머니의 확고한 태도로 볼때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그녀는 그럼에도 대학에 가고 싶다. 그런데 아이가 걸린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자구지책이 아이를 잘 키워줄 여자를 스스로 고르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결혼 전 남편에게는 집안 끼리 정한 약혼자가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를 선택했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이전의 정혼자와 그녀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러기에 자신이 떠나고 홀로 남은 아이를 혹시나 그녀가 구박을 할까봐 걱정스럽다. 그러니 직접 얌전하고 고부고분한 그래서 자신의 아이도 잘 키워줄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고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친구가 소개해준 그녀의 친척을 직접 가서 만나기 까지 한다.
남편의 새 아내는 우리 아이를 잘 돌봐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직접 고를 거예요.
그런데 남편은 또 그녀가 고른 여자가 아이를 못낳을 거 같다고 싫단다. 자신은 농장도 있고, 양떼 등 물려받을 유산이 많으니 아들을 더 낳아야 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대를 이를 자식이 필요하단다. 그런데 남편과 함께 양떼를 몰던 이들은 한 술 더 뜬다. 아내가 둘이라는 남자, 넷 이라는 남자, 심지어 본처와 후처가 자매보다 낫단다.
끝나지 않는 평행선, 미나와 남편은 어떻게든 상황을 풀어보려 결혼 서약을 했던 우물에도 가보고, 미나는 남편의 맘을 돌리기 위해 양떼를 몰러 함께 길을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이 좋았던 게 아니냐며 미나를 의심하기까지하는 남편은 급기야 제작진이 나서 말려야 할 정도로 분노를 폭발하고야 만다. 웃지못할 남편의 새 아내 찾기 프로젝트는 미나가 언덕으로 향하는 길을 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녀가 원하는 대학을 가게 될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까?
형수나 미나 모두 '대학''을 선망하고 전문 직업인을 소망하듯이 여타 이슬람권 국가에 비해 그래도 이란은 여성 고등교육 진학률과 취업률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9세가 되면 외출할 때 반드시 히잡(머리싸개)을 착용해야 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복장 규정처럼 여성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이해 부족으로 대외활동 비중이 높은 직종에 여성이 종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낮다. 다큐에서 남편이 당당하게 대를 이을 자식이 필요하기에 새 아내를 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던가, 서너 명의 아내를 두는 걸 자연스레 이야기하듯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 여전히 일부 농촌지역에서 '명예살인'이 존재한다는 보고도 있는 게 현실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가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남편의 새 아내를 직접 찾아나선 주부 미나의 쉽지 않은 여정을 통해 다큐는 이란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1989년 중국 베이징 시 중심부에 자리한 천안문 광장, 이곳에서 학생들은 '민주화의 여신상'을 앞세우며 5월부터 '단식 투쟁' 등을 벌여왔다. '학생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대화를 시작하라'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범법행위로 규정하며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최류탄과 실탄을 발포하며 강제 진압하였다. 1989년 6월 4일에 벌어진 천안문 (텐안먼) 사태이다. 정치적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텐안먼 사태'를 당시 16살의 꿈많은 소녀였던 론자 유 감독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왜 당시 젊은이들은 광장으로 몰려갔을까? 도대체 어떤 시대의 분위기가 그들을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차도록 만들었을까?
1986년 상해 출신의 소군(여명 분)과 이요(장만옥 분)는 꿈을 이루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그 후로 10년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 한 두 연인의 러브 스토리 <첨밀밀>에는 '당신을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라는 로맨틱한 대사의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이 흐른다. 등려군의 노래가 전대륙에 인기를 끌던 시절이 중국 대륙의 1980년대 중반이었다. 빈곤과 암흑, 그리고 단절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롭게 들어선 정부는 경제 개혁을 앞세웠다. 적극적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도입과 함께, 문화 역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발빠르게 흡수되었다. 다큐는 텐안먼 사태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문화적 흐름을 주도했던 젊은 예술가들을 주목한다.
젊은이들의 열정과 저항 우선 그 첫 번째 인물은 자신의 붉은 사원증을 치켜든 조각 등 '반항과 유머'로 시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조각가 왕커핑이다. 그는 당시를 회고한다. '혁명가'만 울려퍼지던 시절에 '등려군'의 노래는 빛과도 같았다고. 그 빛을 따라 모인 젊은이들은 카세트를 틀고, 거기서 흘려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댄스 금지, 파티 금지', 당연히 경찰이 출동, 카세트를 뺏고, 안 뺏기려는 해프닝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문화적 갈증에 목말라 했지만 토양은 척박했다. 이렇다할 갤러리조차 없었다. 그나마 1년에 한 번 정도 가능한 전시는 여러 차례 검열을 받아야 가능했다. 결국 뜻이 맞는 몇몇이 모여 작품을 공유하는 정도였다. 왕커핑과 친구들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 고무되어 '도전적인 결정'을 내렸다. 중국 미술관 주변 울타리에 자신들의 작품을 '무단'으로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함께 할 그룹의 명칭도 정했다. 작고 멀리 있지만 자기만의 빛을 내는 '스타', 이들은 1979년 9월 27일부터 전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시 셋째 날 경찰이 막아섰다. 압수된 작품은 찾을 길이 없었다. 10월 1일 '정치 민주, 예술 자유', 팻말을 든 젊은이들로 인산인해가 되었다. 결국 중국 전시관에 '스타'의 전시가 허용되었다. 이번에는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 대신 자유로움을 추구했고, '예술'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아 표현 수단으로 삼았다.
유일한 여성 작가였던 리솽도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의 예술을 정부는 '정신 오염'이라 여겼다. 모든 개인주의적 표현은 '단속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인 애인을 둔 리솽은 이른바 '풍기 문란'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스타'를 '반사회적 조직'으로 만들려는 고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친구들을 떠올린 리솽은 '아는 바 없습니다'며 그 시간을 견뎠다. 남친과 헤어지라는 종용을 거부하고 온전히 3년 형을 살았다.
학교에서는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방과 후에는 코카콜라를 마셨다 . - 론자 유
'애국'대신, '나'와 '예술'의 자유 카세트를 틀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청춘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록'이 등장했다. 이제는 중국 록의 대부라 칭해지는 '추이젠(최건)'이 그 대표적인 가수이다. '나는 내 꿈과 자유를 그대와 나누고 싶다.'는 그는 '애국주의 '대신, '나'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이런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흐름에 발맞추어 '아방가르드'한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이제는 '티벳 유랑족'이 된 원프린의 '만리장성 대축제'가 그것이다. 직업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첫 세대였던 그는 직장이나, 호구제, 월급 등에 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일을 벌였다. 1988년 한 다큐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권위주의 체제의 상징이라 여겨지던 만리장성에서 '우드스톡이 따로없네'란 평을 얻은 이벤트를 벌였다.
행위 예술이든 공연이든 그 누구라도 와서 마음껏 즐기라는 초대장에 젊은 예술가들이 응했다. 만리장성에 하얀 천을 드리우는 전위 예술, 롹 공연 등 그동안 억눌렸던 자유와 표현 의지가 한껏 분출되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고 발전을 해갈수록 젊은인들은 생각의 자유를 갈망했고, 변화가 도래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전국적인 전시회 시도에 '강제 취소'로 대응한 중국 정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 가운데 텐안먼 사태의 전초전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젊은이들의 열기를 마냥 억누를 수 없었던 정부는 1989년 '예술 작품으로 정부에 반기를 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중국 현대 예술전을 중국 예술관에서 허용했다. 이에 186명의 전위 예술가들이 '유턴 금지'라는 상징을 내세우며 퍼포먼스를 벌였고 그 중에는 샤오루가 있었다.
졸업생 중에 유일한 설치 미술가였던 차오루는 연결되지 않은 전화 한 통으로 절망한 두 남녀를 '전화 부스'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쉬웠다. 샤오루의 작품이 중국 현대 미술전에 전시되었고 설 전 날 전시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시 작품에 두 발의 총을 쏘는 도발적 퍼포먼스를 벌였다. 경찰차가 도착하고 전시회는 폐쇄되었다.
'샤오루가 쏜 2발의 총성이 혁명의 시작이었다', 아방가르드 기획자 원프린은 정의한다. 2달 뒤 1989년 봄 중앙 미술학원 학생들은 거대한 '민주 여신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여신상을 앞세우고 학생들은 텐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조사라 씨는 <재외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의 문화 정체성과 디아스포라 이미지>에서 '중국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 작가들은 1950년대 태어났으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겪었으며 1980년대 중국의 문호개방 정책과 맞물려 ‘85 신조운동’과 1989년 차이나/아방가르드 전 등 중국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 흐름 에 참여한 이력을 지녔다.'고 말한다. 왕커핑과 리솽 등도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 1990년대 부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중국 현대 예술은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론자 유 감독은 <그날이 오면>을 통해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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