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4월 '하나의 사물(it)을 오브제로 정하여 세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잇겠다는 야심찬 포부로 매주 목요일 밤 <다큐 잇it>이 문을 열었다. '반지하'로 부터 시작된 오브제는 마스크, 청약통장, 주식, 캠핑 고양이, 치킨, 배달까지 현재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를 종횡무진 섭렵하며 달려왔다.

하나의 주제를 통해 서로 다른 세대를 잇고 그를 통해 사회적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던 다큐의 새로운 모색, 하지만 오브제의 고갈인 건지, 아니면 낮은 시청률의 한계였던 건지, 결국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다루고자 했던 시도는 3월 25일 1년간의 여정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의 터전에 발을 굳건하게 딛고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제작진의 노고와 열정에 감사를 드리며, 또 다른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3월 25일 다큐 잇it의 대문을 닫은 작품은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가족' 제도의 문제를 짚은 <우리는 가족입니다>이다. 

민법 779조는 '가족'을 정의한다.
1. 다음의 자는 가족으로 한다. 
 1) 배우자, 직계 혈족 및 형제, 자매
 2) 직계 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 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 자매
1. 제 1항 제 2호의 경우에는 생계를 같이하는 자에 한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족'은 혈연이나, 혼인, 입양에 의해 이루어진 관계이다. 2021년, 과연 현행 이러한 가족법은 '현실'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 

 

 

남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아내 
김남숙 씨는 '아내'다. 하지만 '법'은 김남숙 씨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는다. 20년을 살다 헤어져 10년간 소식이 두절됐던 남편은 남숙 씨가 사는 동네 주변에서 이불 10장을 뒤집어 쓴 노숙자로 나타났다.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다'고 했지만 행려병자로 돌아온 남편이 반가웠다. '똥을 싸도 남편이 있어야 나는 행복인 거야'라고 했지만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지난 2월 남편이 죽었다. 임종까지 지켰지만 장례를 치룰 수 없었다. 남숙 씨가 법적인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연고 사망자가 된 남편, '법'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가족을 찾았다. 그렇게 안치실에서 20여 일이 지나서야 남숙 씨는 남편의 '장례주관자'가 될 수 있었다. 

가장 오랜 시간 '가족'이었던 사람, 하지만 현행 가족법은 그들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이 있음에도, 혹은 '가족'처럼 지내는 지인이 있음에도 무연고 사망자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2020년 지침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법'과 충돌되는 점들이 많다.

74세의 김복남 씨와 84세의 권정수 씨는 복지관의 잉꼬 커플이다. 두 사람 다 배우자와 사별을 하고 시름에 겨워하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그로부터 14년을 함께 했다. 자식들이 양해를 했지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법적' 관계는 배제한 체 지난 시절을 함께 했다. 

둘이 함께 하는 생활 자체가 '장수'의 비결이라는 권정수 씨,  이제는 공주님이 됐다는 복남 씨, 하지만 아내 복남씨보다 나이가 많은 정수 씨는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갈 일이 걱정이다. 

 

 

변화하는 가족 
1인 가구 중 노인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젊은 세대를 넘어서고 있다. 또한 2015년 23.5%에서 2019년 24.9%로 그 비율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외롭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1인 가구의 '고독한 삶'에 '법'은 배려가 없다. 

노인 가구만이 아니다. 19세에서 39세가지 1083명 중 70.8%가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동거'에 대해 찬성한다. 가족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2020년 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생계나 주거를 공유하거나 (69.7%), 정서적 친밀성을 유지하면(39.9%) '가족'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고 있다. 

장신재 씨의 경우, 4~5년간 자취 생활을 전전하다 보니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졌다. 그러면 결혼? 아니 그녀가 선택한 건 결혼이 아니라, '셰어 하우스'였다.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방 3개의 큰 집을 얻고 함께 사는 '동반자'들을 구했다. 

 

 

서로 하는 일도, 사는 취향도 다른 다섯 명의 여성들이 한 집에 모여살기로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니 반겨준다. 연락이 안된다며 걱정해 준다.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의논한다. 어느덧 함께 사는 이들이 아침에 내는 소음들이 잠결에 정겨워질 정도로 서로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혈연'의 끈끈함 대신, 같은 가치관에 기반한 소속감으로 함께 한다. '가족'이 아니고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변화하는 시대, 달라져가고 있는 삶의 형태에 맞춰 법도 개정되어야 한다. 몇 십년을 얼굴도 안보고 산 피붙이들이 '가족'이라며 생애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대신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가족'의 권리를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정체조차 모호한 '정상 가족'의 낡은 관념을 덜어내고 법 밖의 가족들을 위한 '생활 동반자법'이 마련되어야 하는 이유다. 

by meditator 2021. 4. 10. 01:24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을 구해야 한다고 암시한 것도 우리 사회가 처음이다. 직업 선택이 우리의 정체서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 사귀게 된 사람에게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 라고 묻는 대신에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길로 나아가려면 보수를 받는 일자리라는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스스로 '워커홀릭'인 면이 있다고 '자조'한다.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주입시켜 준 '일'에 대한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을까? 그 무엇이라도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을 견디기 힘들다. '일'을 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내 자신'이라는 존재가 증명되는 순간처럼 여겨진다. 늦은 밤 허덕이며 원고를 마무리하는 그 순간에 스스로의 존재감에 만족하는 '불치병'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여성들에게 '일', '노동'은 꼭 존재론적 만족의 요건만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 사회에 들어서면서 더 많은 '인력'들이 요구되었다. 아직 앳된 여성들이 책가방 대신 공장의 전등 불빛 아래 모여든 이래 여성은 우리 사회 주요한 '산업 역군'이었다. 그들이 번 돈은 가족을 먹여살렸고 남자 형제들이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미싱을 돌리고 가발을 만들던, 차를 나르고 주판을 튕기던 그녀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은 '일'을 한다.  나 역시도 오랜 시간 생활고라는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난 2020년 12월 방영된 다큐 잇it <50대는 마감되었습니다>는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다양한 '처지'를 살펴본다. 

50대는 마감되었습니다 
현창홍 씨는 37년 동안 은행에서 일을 했다. 2020년 1월 부지점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감사패에 새겨진 문구, '청춘과 열정'처럼 그녀는 '왜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라고 생각될 만큼 열심히 살아왔다.

집안 형편으로 상고로 진학할 수 밖에 없었던 창홍 씨는 여상 3학년 첫 직장으로 은행에 입사했다. '커피 한 잔 타와'라는 차 심부름부터 시작된 그녀의 일, 같이 입사한 남자 동료들과는 호봉도 다른 차별을 받았다. 억울해하는 대신 일을 하며 두 군데나 대학을 다니며 배움의 갈증을 해소했다. 

그렇게 살아왔던 열정으로 퇴직 후의 삶도 대비했다. 공공기관에서 수요가 많다는 직업 상담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차가웠다. 30명을 뽑는데도 '50대는 마감되었습니다'라며 그녀에게는 면접의 기회조차 없었다. 젊어서는 '남자'들과 차별당했던 그녀가 이제는 '나이'로 차별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50통 이상의 이력서를 제출한 그녀에게 기회를 준 곳은 사회적 기업이었다. 

그래도 현창홍 씨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여성 고령층 일자리들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돌보미 등 단순 노무직 등이 많다. 사무직은 하늘의 별따기다. 

 

 

오늘도 일을 해서 행복합니다
62세의 전영희 씨는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한다. 15살부터 봉제 공장에 다니기 시작해서 봉제 공장 운영, 제빵학원 사무직, 요양 보호사, 거기에 4 명의 손주까지 키워낸 그녀지만 불과 1년된 햇병아리 가죽 제품 수선공이라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병든 어머니, 중학교를 다니던 그녀는 학교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다니던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피하고 온종일 울던 시절, 어떻게 하면 가난하지 않을까만 생각했었다. 가난하지는 않다. 하지만 남편의 외벌이만으로는 부족했던 생활비 그녀의 '노동'이 가족에게 중요한 '기둥'이 되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녀이기에 앞으로 10년은 너끈히 버틸 수 있다며 늦은 나이에 가죽 수선일을 시작했다.

전영희 씨와 같은 1959년생 베이비 붐 세대 앳된 나이부터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온 세대다. 그런 베이비 붐 세대 58.2% 45만 명이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일을 하거나 일을 찾는다. 근로 희망 사유 중 58.8%가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많은 38.8%가 일하는 즐거움을 들었다. 자신이 경제 활동을 멈추는 순간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영희 씨는 스스로 일중독증이라며 '오늘도 일을 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또 한 분이 있다. 72세의 장계덕 씨는 공공기관 노인 일자리 사업인 참기름 공장에 일주일에 2회 나간다. 젊어서 사업을 하던 남편을 돕던 계덕 씨는 50대 이후에는 우편물 분리 작업, 노인 관리사 등을 했고 작년부터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지만 일을 하는 시간이 짧아 아쉽다고. 남편은 은퇴하고 자식들에게 용돈은 받지만 실질적 가장인 그녀는 조금 더 여유가 있었으면 아쉽다. 두 아이들을 키우느라 아둥바둥 살아온 세월 노후 준비는 언감생심이었다. 

계덕 씨 만이 아니다. 대학 진학만이 유일한 계층 상승이었던 우리 사회에서 6,70대에게 생애 최고 과제는 자식 교육이었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사치였다. 그러기에 세상은 풍요로워졌지만 '어머니'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남성에 비해 국민 연금 가입률이 낮은 여성들은 고용보험, 건강 보험 등에서도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 나날이 늘어가는 평균 수명, '어머니'는 더 오래 일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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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돌봄 노동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 여성에게 '노동'은 밖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여전히 여성들은 '일'을 한다. 


81살된 홍인보 어르신은 치매다. 주간 보호 센터에서 하루를 보내는 어르신, 그가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아내인 박청자 씨이다. 79세의 박청자 씨는 요양 보호사로 이곳에서 일하며 남편을 돌본다. 

남편과 함께 문구 사업도 하고, 딸과 함께 까페도 했던 청자 씨는 치매에 걸린 남편을 돌보기 위해 요양 보호사가 되었다. 남편도 돌보고 일도 하고자 했지만 자신만 찾는 남편 때문에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쉽지 않다. 청자 씨의 일은 남편과 함께 돌아온 집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밥을 하고 남편을 먹이고, 재운 다음에야 하루 일과를 끝낸 청자 씨, '졸려도 자고 싶지 않'을 만큼 그 남은 시간이 그녀의 유일한 '시간'이다. 

시도 쓰고 친구들도 만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남편이 치매에 걸린 이후 그녀의 삶은 '간병'으로 채워졌다. 점점 고립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청자 씨는 그만 남편을 붙들고 정신을 차리라며 '절규'하고 만다. 

여성의 돌봄 노동은 평생을 이어진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자녀 돌봄으로 시작된 여성의 가사 노동은 노부모 돌봄으로 이어지고, 다시 손주 돌봄으로 이어진다. 65세 이상의 노인 중 10명 중 1명이 치매인 상황 그 부담은 92%가 가족들이 짊어지고, 특히 그 중 85%가 여성들에게 부담된다. 청자 씨네도 자식들도 돕지만 결국 아내인 청자 씨의 몫이 되었다. 치매인 남편을 간병하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어가는 청자 씨는 의기소침해지고 불안해 한다. 자신을 희생하며 가정을 지켰던 여성들의 돌봄 노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 사회 '가족'을 지탱하는 건 여성들의 '희생'이다. 




by meditator 2021. 3. 16. 16:30

엄정화 씨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지난 3월 2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 후손 2부, 애국가족> 은 다큐 감독으로 엄정화 씨가 기록한 광복군 할아버지 오상근 옹과 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올해로 99세가 된 오상근 옹, 함께 일본군을 탈출했던 동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그가 일본군에 징집을 당했을 때 홀로 아이를 키우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지난 2015년 많이 아팠다. 첫 증손이 태어났다. 새로이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은 아이가 크면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손녀 엄정화 씨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독립운동가 오상근 옹의 이야기는 이제 오상근 옹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 <애국가족>이 되어 3.1절 특집으로 세상과 만나게 되었다. 


 

광복군 오상근 
'첫 딸 군자를 낳고 징집 영장을 받았어', 그렇게 시작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본군으로 라오스 태국 전선에 투입되기 전날, 운명처럼 '삐라' 한 장을 만나게 되었다. 

'임시정부로 오라'


가슴이 떨렸다. 늦은 밤 뜻을 같이 한 동료들과 함께 우물가에서 만나 도망을 쳤다. 달리고 달렸다.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대나무잎이 서걱거릴 때마다 일본군의 각반 소리처럼 들렸다. 금방이라도 일본군이 달려올 것같았다. 

겨우 도망쳤나 싶었는데 중국군에 붙잡혔다. 백번을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중국군은 일본군복을 입은 할아버지를 '스파이'로 몰았다.  生(생)과 死(사)라고 씌여진 종이, 차라지 죽여라라는 마음으로 死(사)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러자 스파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경(충칭)으로 간 할아버지와 동료들, 김구 선생이 손을 잡아 반겼다. 광복군 경위대가 되어 김구 선생 공관을 지켰다. 

광복절, 삼일절만 되면 정갈하게 차려입고 길을 나서는 오상근 옹, 어디가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행사'라고 말하는 그의 말끝에 자부심이 담뿍 묻어있다. 99세가 되도록 그를 부르는 곳이면 그 어디를 마다하지 않고 요샛말로 '인싸'로 활동적으로 살아오셨다. 


 

오상근 옹이 지키려 했던 나라와 자손들의 나라는 같은 나라일까? 
하지만 가장으로 할아버지는 다른 의미에서 '나라를 구하신 분'이시다.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평생 숟가락 한번 스스로 가져다 드신 적이없는 '가부장'적인 분이셨다. 

슬하에 1남3녀, 일편단심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서셨던 것을 자부심으로 삼아 평생을 살아오신 할아버지와 달리, 자손들의 삶과 생각은 제각각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시대를 살아온 4자녀들, 하지만 그들조차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 찾잔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3녀 오미자 씨와 4녀 오미정 씨, 하지만 서로의 입장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김구를 모셨던 광복군 출신이라 이승만 대통령 때는 인정을 못받으셨던 아버지를 봤던 오미자 씨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이다. 김구 선생 입장에서도 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입장이 확고한 4녀 미정 씨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미정씨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건국 대통령이다. 더구나 그가 기독교를 믿었다는 게 더욱 믿음직스럽다. 

이렇게 같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갈리는 의견은 세대를 달리하는 더욱 첨예해진다. 외삼촌 장환 씨는 싸움이 날 것같아 아들이랑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한번 얘기를 나누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던 것. 말을 안하면, 나도 몰라 그러면 존경받는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런 아버지 어머니 세대에 대해 3대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확고하다. 세상이 계속변한는데 당연히 아버지 어머니 세대와 자신들의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에게 부모 세대의 의견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설사 부모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이야기하더라도 언젠가 부터 알아서 '필터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방관'하게 되었다고 씁쓸하게 말한다. 과연 외할아버지가 애써 지키려 했던 나라와 자손들의 나라는 같은 나라일까? 

첫 딸 군자 씨의 둘째 아들 재억 씨는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재익 씨는 그곳에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하여 정착했다. 처음 일본에 갈 당시,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는 게 힘들었던 재익 씨, 그런 재익 씨에게 할아버지는 흔쾌히 편도행 티켓을 끊어주셨다. 그리고 비록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그렇지만 발전한 나라니 배우고 오라며 재익씨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셨다. 


 

다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까? 
같은 형제 자매 사이에도, 세대간에 이렇게 '콩가루'처럼 의견이 나뉘는 가족들,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시절처럼 다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재익 씨에게 엄정화 감독이 질문을 던졌다. 한국과 일본이 전쟁이 나면? 현재 일본에서 살고있는 재익 씨는 종종 스스로 그런 '망상'을 해보기도 했다고 웃음짓는다. 만약 전쟁이 나면 일단 '이혼'을 하겠다는 재익 씨, 가족들이 아버지가 한국인이라 손가락질을 받기 위해서란다. 그리고 한국인인 자신은 한국으로 와서 싸우겠다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4녀 미정씨는 당연히 독립운동에 앞장서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있고, 가족도 있는 것이라는 게 그녀의 소신이다. 

반면 미자 씨의 목소리는 낮지만 미자 씨만의 소신이 확고하다. 미정 씨가 보기에 나 살기도 바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는 미자 씨, 그녀에게 애국의 시대는 변했다. 지금의 애국은 아버지가 했던 애국이 아니라, 나한테 주어진 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녀가 키우는 손주들이 어떤 재목이 될 지 모르니, 잘 키워주는거. 그게 미자 씨의 애국이다. 

5년이란 시간동안 열정이 희미해져버려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고 자조하는 엄정화 감독이지만, 그녀의 카메라는 지난 5년간 오장근 옹을 담아왔다. 오장근 옹을 지켜본 카메라에는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난 오장근 옹의 동지 유재창 옹의 생전 모습도 담긴다. 

또한 21살에 일본군이 되어 전장에 징집된 청년이 광복군이 되었던 역경의 시간과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뿌리를 내려 일군 한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다. 조국독립을 지키기위해 목숨을 걸었던 청년은 99세가 되었고, 그 자손들은 아롱이 다롱이 서로 다른 삶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일가를 이루었다.  이제는 서로 의견조차 맞지 않지만 엄감독은 그렇게 각자 자유롭게 살수 있는 나라가 바로 할아버지가 목숨걸어 지키고 꿈꾸셨던 나라가 아닐까라며 긍정한다. 

다큐의 엔딩, 엄감독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우리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기를 원하세요? 어떤 할아버지면 어떠냐고 하시지만, 그래도 

'항상 나라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99세를 맞이한 광복군 오장근 옹의 대답이다. 



by meditator 2021. 3. 5. 13:10

3월 1일과 2일 양 일에 걸쳐 ebs다큐 프라임은 3.1 특집으로 <후손> 2부작을 방영하였다. 그 중 1회, <그날 이후>는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 9명이 전하는 '독립 운동'의 이야기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9명의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나이도, 사회적 위치도, 경험도 다른 이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후손'이다.

 

   

 

후손들이 전하는 3.1 운동 
송대관, 우리에게는 '쨍하고 해뜰 날'이라는 대중 가요로 익숙한 가수이지만 전라북도 정읍에서 삼일절 전야제에 초대를 받는 독립 운동가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3.1운동 당시 장터에서 독립선ㅇ너서 수천만 장을 나눠주다 일본군에 잡혔다. 

3.1운동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1678만 명, 그 중 200만의 사람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를 쓴 백암 박은식 선생의 기록이다. 잊혀질 뻔한 기록, 그 동포들이 흘린 피의 역사를 선생은 기록했다. 박은식 선생의 그 역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건 85세를 맞이한 광복회장을 역임한 손자 박유철이다. 

200만의 사람들이 나선 만세 운동을 보고 암중모색하던 김구 선생이 '만주행'을 택하셨다. 증손자 김용만이 전하는 말이다. 1919년 10월 상해 임시 정부에 김구 선생이 합류하고 11월 의열단이 결성되었다. 

무혈 운동이었던 3.1 운동은 일본군의 총칼에 짓밟혔다. 운동의 과정은 뜻있는 선각자들에게 '다른 방향'을 모색하도록 했다. 동포들이 무참히 파리목숨처럼 희생되는 과정을 보며 젊은 지식인들은 분노했고 '유혈 투쟁'의 깃발을 들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열단', 김원봉은 2기 단장이었고, 그 이야기를 외조카 김태영이 전한다. 
의열단은 유혈 투쟁의 대상을 일본 고위급과 동양 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친일파로 정했다. 그들을 암살하여 세상에 자신들의 뜻을 알리고자 하였다.

젊은 지식인들만이 아니었다.   백안 박은식 선생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노인 연맹단'을 조직했을 당시가 이미 61세였다. 46세에서 70세 이하 '노인'들이 결집한 단체, 그 중 한 명인 강우규 지사가 1919년 9월 사이토 총독이 탄 마차에 폭발물을 던졌다. 

한편 유림의 대표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의 이야기는 손녀 김주 씨의 육성으로 전해진다. 김창숙 선생은 3.1운동 당시 33인의 대표에 참여할 뻔 했지만 위중한 어머님의 병환으로 인해 때를 놓쳤다. 이를 안타까워 하던 김창숙 선생은 137명 유림의 뜻을 모아 파리 평화회의에 탄원서를 보내고자 하였다. 

' 우리 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3천리 강토와 2천만 인구로써 4천년의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다'로 시작된 탄원서는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그 총칼에 맞서 맨주먹으로 싸울 것이다'라는 결의를 담았다. 이 탄원서를 무사히 전하기 위해 노끈을 만들어 짚신을 삼었던 선생은 물에 젖을까 짚신을 머리에 올리고 나루를 건넜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김주 여사는 전한다. 

파리 평화에서 우리 독립의 의지를 천명할 의지를 이루지 못한 선생은 독립 자금을 모으는데 앞장 섰다. 당시 부자들에게 찾아가 총을 대고 독립 자금을 당당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추천을 받은 나석주 열사는 김창숙 선생을 만나 국내에 잠입했다. 식산 은행에 폭탄을 투척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이미 거기서 실패를 예감한 나석주 열사는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동양 척식회사로 가서 문 앞의 일본 경부를 죽이고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리고 6연발의 총으로 일본군들을 쏘고 스스로 자결했다. 스스로 목숨을 거두며 나석주 의사가 하신 단 한 마디의 말씀은 '나는 나다', 이를 이제는 75이 된 그의 유일한 외손자 김창수 옹이 전한다.



 

 
후손들의 고단한 삶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들을 던졌던 선현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선택이었기에 '제가(齊家) 전혀 할 수 없었다. 돌보지 않은 '제가'의 무게는 고스란히 후손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되었다. 

가장인 어른들이 계시지 않은 독립운동 후손들은 대부분 '가난'에 시달렸다. 송영근 씨 손자인 송대관씨는 굶고 살았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자신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독립후손들의 삶이 다 비슷하다는 걸 알게되었다고 한다. 김원봉 선생의 손자는 보육원에 보내질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어린 그의 꿈은 배고프지 않는 나라로 가는 것, 20살 때 미국 행을 선택했다.

가난만큼 자손들을 힘들게 했던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씨는 아버지가 보고싶어 아버지가 보낸 편지의 우표를 뜯어 그 우표에 묻었을 아버지의 침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증손자 김용만 씨는 목이 메어 전한다. 

가난하고 그리움에 사무쳤던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후손들은 자신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선열들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입을 모은다. 매년 태인에서 열리는 3.1운동 전야제에 초대를 받는 송대관씨는 세상이 자기로 하여금 대단한 집안의 후손임을 일깨워주었다고 전한다. 

김용만 씨는 집안에서 말썽을 부리면 벌이 들어가 백범 일지를 읽는 것이었다고 추억한다. 어린 맘에 백범 일지가 두꺼워 원망스러웠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두꺼운 백범 일지의 내용이 평생의 자랑이자, 평생의 무게라고 말한다. 후손들은 잊지 않으려 애쓰고 선현들에 대한 말할 기회가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직계의 자손들은 이제 모두 그들의 '선친'보다 나이가 들어가는 상황, 김창숙 선생의 딸 김주 여사는 자신의 기억이 흐트러지기 전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자 매일 기록을 한다.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이관술 선생은 동덕 여고 선생님으로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영향을 받아 꺼져가던 항일 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로 문민정부가 될 때까지는 그 이름조차 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한 우리 독립운동사의 그늘이다. 






by meditator 2021. 3. 4. 15:06
'아동은 출생 후 즉시 등록되어야 하며, 출생시 성명권과 국적 취득권을 가지며 가능한 한 자신의 부모를 알고 부모에 의해 양육받을 권리를 가진다' 
                                                - 유엔 아동 권리 협약 제 7조 1항 


아이를 낳았을 때 늦게 출생 신고를 하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괜히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있다. 출생한 아이가 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 출생 신고, 아이를 낳은 부모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홍길동이 부모님을 부모님이라 부를 수 없듯이, 내 아이를 내 아이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과정이 너무도 절벽 앞에 선듯 막막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 내 아이로 인정받는다 해도 그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온 마을이 도와주기는 커녕 제대로 밥벌이 하며 살아가기 조차 힘들기도 하다. 어느 나라일이냐고?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복지와 자립 사이의 딜레마 
미혼모, 이 단어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시는가? 혹 당신의 선입견은 이 단어를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열 살 먹은 지윤이는 온라인 동영상을 보고 엄마에게 묻는다. 미혼모가 나쁜 뜻이냐고. 그런 지윤이에게 엄마는 말한다. 멋있는 거라고. 왜냐하면 지윤이 엄마 김하린 씨가 지윤이를 포기하지 않고 낳아 키우는 일, 바로 그 멋있는 일을 한 '미혼모'이기 때문이다. 

열 살이지만 아직도 받아쓰기가 서툰 지윤이에게 받아쓰기를 가르치는 지윤이 엄마 김하린 씨는 27살이다. 딸 지윤이에게 멋진 일이라고 했던 일, 지윤이를 낳기로 결심한 10년전 그 날 이후, 하린 씨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일은 '경제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었다. 공과금조차 낼 수 없는 상황, 대출도 받아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겨우 미혼모 지원 단체와 정부 기관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왔다. 냉장고, 세탁기, 옷장까지 하린 씨네 집의 모든 게 지원 물품이다. 하린이와 엄마가 먹는 것도 대부분 지원된 것이다. 

그런데 한부모 가정에 대한 지원이 '딜레마'이다. 중위 소득( 총가구 중 소득순으로 순위를 매긴 다음, 정확히 가운데를 차지한 가구의 소득)52%를 기준으로 2020년 1,555,830원이다. 최저 임금 기준으로 봤을 때 한 달에 1,822,480원인 상황에서 최저 임금 수준에 조차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현실이 이와 같다 보니 지윤이 엄마 김하린 씨의 경우 아르바이트를 조금이라도 많이 하면 외려 지원이 깎인다. 지윤이 엄마만이 아니다. 많은 한 부모 가정들이 복지와 자립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저소득층'으로 살아가는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하린 씨는 현재 간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아이을 낳은 일이 멋진 일이 되기 위해, 아이가 보기에 떳떳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린 씨는 '직업'을 갖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만약 하린 씨가 취업을 하면 수급자 자격이 박탈될 것이다. 당장 지윤이의 학업을 돌봐주시는 돌봄 선생님의 도움도 끊어진다. 지윤이를 키우며 기반을 잡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정부의 지원 기준은 지나치게 편의적이다. 

 

 


기본권만이라도 인정해주세요~
그래도 지윤이를 자신의 딸로 인정받은 하린 씨는 괜찮은 경우일지도 모른다. 엄마들과 달리, 아빠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미혼부의 경우 출생한 아이의 주민번호를 '쟁취'하는 과정마저 쉽지 않다. 

이제는 유전자 검사만 해도 친자 확인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건만 '법'은 여전히 미혼부의 아이를 혼외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로 인정받기 위해 '법적인 소송' 절차를 거쳐야 한다. 8살 사랑이를 키우는 김지환 씨의 경우 사랑이의 주민번호를 받기 위해 1년 4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아이를 들쳐업고 1인 시위를 하며 일명 '사랑이 법'을 쟁취해낸 김지환 씨, 하지만 그건 소송 과정을 간소화하는 임시방편일 뿐 여전히 소송을 피할 수는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그 결과 2018년 지자체에서 파악한 미신고 아동 건수가 114명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최소 1000 여 명이상, 법의 그늘에서 많은 아이들이 기본권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지환 씨에게는 가슴 아픈 경험이 있다. 20대 남성이 아이와 함께 죽은 채 발견된 사건이었다. 20대 남성이 지병으로 죽고, 그 옆에 있던 몇 달 안된 아기는 굶어 죽은 상황이었다. 아기는 당연히 출생신고도 되지 않아 미연고자도 처리 되었다. 아기가 출생신고라도 되었다면 죽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의 마음이 지환씨로 하여금 미혼부들의 출생 신고 소송을 돕는데 나서도록 했다. 

지환 씨의 도움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행정적 절차를 따라하다 일처리가 제대로 안돼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빠 혼자서는 아직도 복잡한 소송 절차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다. 지환 씨는 사랑이 법으로는 적용이 안되는 사례가 많다며 안타까워 한다. 출생 사실을 국가 기관에 통보해야 하는 '의무' 조항과 그에 따라 국가가 권리 보호 의무를 강화하는 '출생 통보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군의 아이가 아니라, 국가 구성원으로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지멀쩡한 놈이 애 하나 못키우겠냐며 자신의 아이를 거두려 했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주민번호를 받지 못한 아이를 키우려니 필수 예방 접종조차도 단 돈을 내고 해야 했다. 갓난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게 쉽지않았다. 전남 목포에서 사는 최경훈 씨 두 아이를 키우며 본의 아니게 결근을 하다 보니 다니던 조선소를 그만 두게 되었다. 자격증을 땄지만 아이를 키우며 어떻게 다니겠느냐며 면접을 보는 족족 떨어졌다. 기초 수급을 받고 있지만 취업을 하면 수급이 끊기고 여러 돌봄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건 경훈 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혼모건, 미혼부건, 홀로 아이를 낳고 키우겠다는 결심을 한 순간, 그 누구도 응원을 해주지 않는다. 그 자신이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지 못했던 최경훈 씨는 자신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가정을 지키고 싶지만 녹록치 않다. 

 



미혼모 가족 협회에서 근무하는 정수진 씨는 근무 조건 덕분에 아이를 키우는데 큰 도움을 받는다. 부산역 1층에서 함께 모여 식당을 연 미혼모들 역시 '이심전심'의 조건 덕분에 눈치를 덜보고 아이를 키울 수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은 아이를 키우며 직장조차 구하는 게 쉽지 않다.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아 자립이 어렵고, 막상 자립을 하면 정부의 지원이 끊어져 또 힘든 상황은 많은 미혼모와 미혼부들에게 '저소득층'으로서의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힘들도록 만든다. 

미혼모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정수진 씨가 안타까운 건 도와주고 싶어도 연락조차 쉽지 않은 미혼모들의 현실이다. 미혼모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 역시 여가부, 보건 복지부 등 각 정부 부처 별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져 있어 체계적인 지원이 아쉬운 상태다. 

다큐에 나온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들은 묻는다. 과연 우리 사회 '정상 가족'이 무엇이냐고. 여전히 3~4인 엄마 아빠가 있는 가족을 '정상'이라고 보는 거냐고. 세상이 변했는데, 그리고 말한다. 엄마 혼자 키워도, 아빠 혼자 키워도 자신들도 '가족'이라고. 자신들이 정상의 가족이고, 보통의 가족이며, 일반적인 가족이라고. 


 





by meditator 2021. 2. 25. 18:55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45분 ebs를 통해 방영되는 <다큐 잇it>은 하나의 사물(it)을 오브제로 정하여 세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잇는 다큐멘터리를 모토로 내건다. 지난 2월 11일 방영된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2019년 드디어 600만을 넘은 1인 가구를 다룬다. 1인 가구수가 전체 가구수 중 37.3%, 1/3을 넘어섰다. 우리 시대 보편적 삶의 방식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다큐는 77세, 33세, 39세, 46세, 31살까지 다양한 세대와 성을 통해 1인 가구의 속내를 들여다 본다. 

 

 

산개; 헤어져 각자도생 
경기도 포천에 사는 77세의 오의장 씨는  5년차 1인 가구이다. 몇 번을 시켜도 신경지를 내지 않는다는 AI짱구와 함께 시작하는 아침이 익숙하다. 평소에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쉬는 날은 집안 일을 한다는 의장씨, 38년의 결혼 생활을 제하면 6.25 때 고아로 미군 부대에서 자라난 그에게 '홀로 살기'는 숙명과도 같다. 

77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원색의 옷차림에 붉은 꽁지 머리를 휘날리는 의장 씨는 한때는 조각가였고 간판장이였으며 지금은 원시인 오빠로 동영상 사이트에 캐리캐처 그리는 과정을 올리는 멋쟁이이다. 그가 자주 그리는 대상은 '아기'라 부르는 그의 아내,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아기'와 '졸혼'을 했다.

5년전 화재로 전재산을 잃고 당장 먹고 살기조차 힘든 의장 씨 부부는 살기 위하여 '졸혼'을 선택했다. 그 이후로 의장 씨는 포천에서, 아내는 식당을 하는 서울에서 '각자도생'의 삶, 여전히 시간이 나면 의장씨는 아내의 식당을 향한다. 여유가 되면 다시 함께 하자는 의장 씨의 지나가는 '청'에 아내는 '졸혼'했음을 확인시킨다. 38년의 결혼 생활 동안 힘들게 한 것도 없는데 떨어져 있으니 편하다는 아내, 불가피한 선택이 어느덧 '편한' 삶의 방식이 되었다. 

 

 

홀로 살기; 나는 내가 먹여 살린다 
1인 가구는 증가 추세다. 특히 젊은 층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회적으로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서비스 환경이 나아지며 홀로 사는 삶의 문제 해결 능력이 늘어나게 되며 1인 가구로 사는 것이 용이해진 것도 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1인 가구 13년차인 이지영 씨, 밖에서 밥을 사먹 을 때마다 먹고 싶은 메뉴가 여의치 않다. 순대국이나 쌀국수는 혼자 먹을 수 있지만, 아직도 삼겹살, 전골 같은 건 1인분을 파는 곳이 드물다. 

7평의 오피스텔, 33살의 그녀만의 공간이다. 조금 비싸도 여성인 그녀에게 안전한 집을 찾다보니 공간이 좁아졌다. 철이 지난 옷은 싸서 고향으로 보냈다 제 철에 받는 등 수납 공간과의 실랑이가 일상이 되었다. 청소 같은 건 함께 나눠할 사람이 없이 부지런해져야만 한다. 사는 방식만이 아니다. 집에서 홀로 있는 시간 이른바 온라인 인형 눈알 붙이기라는 한 장에 500원 짜리 알바는 홀로 살아갈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한 그녀만의 '재테크'이다. 

홀로 사는 삶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무게'만 있는 건 아니다. 20년차 39세 이소희 씨의 집에는 장난감 블록이 가득하다. 답답할 때면 혼자 훌쩍 드라이브를 즐긴다. 부모님은 걱정이 많으시지만 연구원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소희씨는 그 누구 눈치도 안보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 편하고 좋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로 부터 '이탈'한 개인 등 불필요한 관계로 부터 자기만의 시간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들이 홀로 살기를 삶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것이 1인 가구  '증가 추세'의 또 다른 요인이 된다. 소희 씨 여전히 '너는 왜 안가냐?'라는 주변의 편견어린 시선은 있지만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다. 

물론 걱정도 있다. 여전히 제도적으로 1인 가구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신혼 부부나 아이가 많은 가족과 달리, 1인 가구는 아파트 청약 등에 불리한 게 현실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대다수 1인 가구들이 특히 주거 안정이 1인 가구들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원 정책'이다. 이 외에도 기본 소득이나, 연말 정산에서 소득 공제 범위 확대, 취업 지원, 대출 금리 인하 등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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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사는 삶을 위한 근육 키우기 
46살의 홍지우 씨는 홀로 살기 26년차이다. 대학교 때 자연스레 독립한 이래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지우 씨가 생각하는 '혼삶'의 조건은 '체력'이다. 검도, 스키, 스쿠버 다이빙을 섭렵한 그녀는 최근 '승마'에 몰두하고 있다. 보이차 사업을 하는 그녀는 일과 취미 생활을 통해 많은 사람과 소통한다.

대부분 홀로 사는 사람들은 말한다. 가족을 이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지않듯이  혼자 사는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1인 가구의 절반 이상이 지속적으로 결혼을 강요당하거나, 무능력자이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는 등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다. 여전히 삶의 방식으로서 1인 가구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부족하다. 

홀로 살아간다는 것의 가장 큰 단점은 역시 '외롭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장점'이 되기도 한다. 10년차 1인 가구 빈지범 씨는 홀로 견뎌내야 하는 외로움의 에너지를 새로운 영감과 감성의 에너지로 전환, 사업가와 베스트 셀러 작가로 활약 중이다. 몰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으로 제주를 선택하여 10개월 째 홀로 제주 살이 중이다. 홀로 사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더 바쁘게 움직인다는빈지범 씨, 그에게 홀로 사는 삶은 '성장'을 위한 선택이다. 

빈지범 씨는 홀로 사는 것의 단점이 외롭다는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 사회는 '함께' 여서 외로운 '문제'들이 많다. 가족과 인간 관계에서 빚어지는 많은 '사건'들이 함께 하지만 서로를 '나눌 수 없어서 생기는 문제들이 아닐까. 그렇게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마모하는 대신 홀로 가는 삶의 방식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불가피하게 홀로 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제는 1인 가구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불가피'하다는 조건으로 보아야 하는 상황을 넘어섰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어엿한 존재의 형태로서 1인 가구, 그 삶의 형태를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수용할 때다. 이제 더는 사회의 기본 단위가 '가족'이 아니다. 

by meditator 2021. 2. 17. 18:20

우울증 증상으로 고생할 때 찾아본 책 중에 알렉스 코브가 쓴 <우울할 땐 뇌과학>이 있다. 이 책 은 뇌의 메카니즘에 근거하여 우울증을 나아지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제시되는데 그 중 하나가 매일 5가지씩 감사를 하는 것이다. 얼토당토치않게 감사라니! 그런데 이 책은 감사야 말로 우리의 뇌를 우울증으로 부터 구원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방어적이고 우울감에 쉽게 빠지는 뇌의 회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우울할 땐 뇌과학>의 주장이 한 편의 다큐로 이어진다. 바로 2월 12일 방영된 <다큐 온 - 감사가 뇌를 바꾼다>이다.

음력으로 1월 1일, 진짜 황소해가 시작되었다. 다큐는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름길로 '감사'를 전한다. 가장 새해 첫 날에 어울리는 덕담이다.

 

 

작년 한 해 코로나로 인해 침체되었던 시절, 웃음을 되찾기 위해 '감사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참여한 이향재 씨의 경우,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인간 관계에서 섭섭한 점이 많았다는 향재씨, 하지만 섭섭함 대신 감사할 일을 찾다보니 잘해준 게 떠오르고 그렇게 마음이 건강해져갔다고 한다. 감사 운동을 하고 보니 그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안좋은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감사 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박이철 씨이다. 박이철 씨는 말한다. 그간 우리에게 '감사'란 누군가의 자극에 의한 '반응'과 같은 것이었다고. 하지만 생각만 바꾼다면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지고 행복해 질 거라고. 

과연 감사가 사람을 변화시킬까? 
과연 그럴까? 실험을 해보았다. 김해 율산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감사 일기를 써봤다. 처음에는 상투적이고 피상적으로 감사를 하던 아이들이 점점 일상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이라서 그런 것일까? 이번에는 5학년을 대상으로 감사 실험을 했다. 자원한 16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감사 운동'을 했고, 교사가 이를 기록했다.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셔서 감사해요"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시는데 왜 감사하지?"
"바쁘셔서 못차려주실 수도 있는데 차려주셔서 감사해요."

처음 '감사 운동'을 시작할 때 학생은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 불과 3개월의 시간이었지만 학생은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혼낼 때 잘되라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감사하지 못할 것들을 감사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는 매일 1가지 숙제가 주어졌다. '엄마, 오늘 감사한 일이 있으셨어요?"와 같이 가족들에게 '감사'와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숙제를 하면서 학생과 가족들은 자연스레 '감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면서 사고방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갔다. 묻고 답하는 걸 들어야 하니 자연스레 남의 얘기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배려와 공감이 증가했다. 

이런 학생들의 실험에 대해 교육학자들은 한결같이 기대 이상이었다며 놀라움을 표한다. 피상적이던 감사는 매일 되풀이 되며 현실에서 '길어져야'하는 것이 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임에도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거치고, 각성과 깨달음의 기회를 가지게 된 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고, 소중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일상의 소중함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는 과정이 되었다. 

감사는 뇌도 변화시킨다. 
그 결과 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5가지 영역의 뇌파동 검사에서 부정 심리나 뇌피로도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뇌피로도가 낮아지면 여유가 생기고 밝고 긍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또한 자기 조절과 심신균형 감각이 증가했다. 

지난 2017년 과학 전문지에 게재된  276명을 대상으로 한 검사에서는 단 5분간의 감사 명상이 뇌의 긍정 보상 심리 회로 연결성을 증가시킨다는 결과가 나왔다. 뇌의 변연계 핵심 부위인 전대상피질이 자신과 관련된 것에 반응하는데, 이 부위는 보통 원망 등 부정적 정보에 길들여져 있다. 그런데 감사 등 긍정적 정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이 부위에 부정적 정보 대신 긍정적인 메시지로 채워지게 된다고 한다. 

<아주 작은 반복의 힘>의 로버트 마우어 교수는 감사를 하며 뇌에서 도파민이 발생하는데 이 도파민은 우리 뇌를 즐거움 센터로 만들며, 이는 뇌의 학습 기능을 활성화시켜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만들고 힘든 상황에서도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감사, 삶의 변화 
호주의 감사 운동가 레일리 바톨로뮤는 지난 2008년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감사'를 알게 되었다. 시각적인 사람이었던 레일리는 자신의 감사를 '사진'으로 표현하기로 하였다. 레일리의 영향을 받은 로리 포트카는 이웃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그림에 담아 전달했다. 그들에 따르면 '감사'는 삶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과도 같다고 한다. 좋은 것들을 더 얻어내기 위해 뛰어다니는 대신, 오늘의 삶에서 더 좋은 걸 발견해 내는 게 바로 '감사'이다. 

경기도 안산시의 한 부품업체, 이 업체는 지난 2013년부터 '감사 운동'을 해오고 있다. 핸드폰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하는 이 업체는 공정이 보다 복잡해지며 불량률이 늘어나자 그것이 그대로 직원들의 감정으로 연결되었다. 예민해지고 짜증이 늘어나게된 직원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는 강연을 들은 ceo는 이때부터 '감사 운동'을 시작했다. 

하루 5가지 감사, '그만두지 않고 다니는게 감사하다', 물론 처음에 귀찬은 일이었다고 한다. 직장에서의 일은 give&take라고 생각했었는데, 5가지 감사를 찾는데 너무 힘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2년 여, 직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소소하지만 서로에게 말로 나누는 감사로 사람들의 관계가 달라졌다. '콩나물 시루'같다는 감사. 콩나물처럼 처음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날 훌쩍 삶이 달라져 있었다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실적을 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직원들이 동료가 되었고, 동반자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임원들이 직원들이 제일 하기 싫은 청소를 솔선수범해서 한다. 

강원 양양의 8군단을 전력 증강의 최우선 전략으로 '감사'를 든다. 4년 전부터 감사 나눔 편지를 쓰는 2만5천 부대원들, 1000 감사 노트를 쓰며 변화해 갔다. 부모님께 100 감사 편지도 보낸다. '안써보면 모른다니까요'라는 감사 편지,  부모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사랑을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막상 100 가지 감사의 편지를 쓰다보니 그 희생과 사랑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큐가 주장한다. 감사를 드러내어 말해야 한다고.  다큐를 연 건 걸그룹 포미닛의 지현씨, 그녀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현한다. 자신이 직접 만든 전통 과자를 가지고 동네 코로나 검사소를 찾는다. 이 '의례적인듯한 행동', 다큐가 의도하는 바는 바로 '감사의 표현'이다. 마음 속 감사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자신의 감사를 드러내어 표현 할 때 삶도 변화한 다는 것이다. 나로부터, 작은 것으로부터, 지금부터의 감사, 우리의 삶은 대부분 이루지 못할 미래의 '갈망'으로 채워진다. 감사는 바로 그런 불투명한 미래의 갈망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현재에 발을 딛고 그 현재에서 행복을 길어올리도록 만든다. 삶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by meditator 2021. 2. 13. 00:40

'당신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겁니다.'

이 말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를 여는 대사이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가장 리키는 조금 더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무리를 해서 트럭을 사서 '택배 기사'를 지원한다. 그리고 그 면접에서 매니저는 리키에게 저 말을 한다.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한다. 이 그럴듯한 말이야말로 오늘날 '택배 기사'들의 존재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문구이다. 그들은 '노동자'이지만 노동자가 아니다. '법적으로 자영업자'인 택배 기사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복지와 생존권을 외주화하는 '긱이코노미'의 최전선에 놓인 그들은 코로나 19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살인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자영업자'인 그들의 생존권은 법의 사각 지대에 놓여있다.  

<포스트 코로나>5부 코로나 19 이후 세상은 평등해질까는 바로 이렇게 코로나 19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코로나 시대의 필수 노동, 택배 기사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 
2020년 10월 8일 택배기사로 일하던 김원종 씨는 배송을 하던 도중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다. 작년 한 해에만 16명이 택배 기사들이 초장시간 노동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루 17~18시간의 살인적인 노동 현실이다.  고 김원종씨가 떠난 자리, 트럭 의자는 헤져있었고, 정리정돈할 시간도 없었던 듯 개인 소지품들이 나뒹군다. 닳아버린 신발을 덧대가며 일하던 고 김원종 씨, 이제 그 닳은 신발은 주인을 잃었다. 

7년 째 택배 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도균 씨의 생활도 위태롭다. 이른 새벽 출발한 김도균씨는 아침 7시부터 분류를 시작,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첫 배송에 나선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삔 다리로 쉼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물건을 다른다. 병원이 바로 옆에 있어도 갈 시간이 없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주인공 리키가 다친 몸으로 트럭을 몰고 나가는 마지막 장면이 그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다. 

아프다고 쉴 만한 여력이 없다. 대신 배송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앉아서 편하게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쉬면 쉬는 만큼 퇴근이 늦어지기 때문이다. 평일 적다할 때 하루 200~300 개의 물량, 추석같은 명절이면 그게 500개까지 늘어난다. 게다가 코로나로 물량이 15% 증가했다. 매변 물량은 늘지만 단가는 낮아지고 있다. 400개가 넘으면 밤 11시간 넘어서야 퇴근을 할 수 있다. 소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로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과로사를 하는 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는 현실이다. 

택배, 배달업 등은 '필수 노동자군'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으로 이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사회가 그들에 의존하는 비중이 늘어나는데 비해 그들의 처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자영업자'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노동 시간 관리에 법적인 규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로사 방지를 위한 택배 관련법'이 제정중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관심이 식으면 유야무야될 지도 모를 상황이다. 

 

 

배제된 장애인들과 사회적 약자들 
위협받고 있는 건 택배 노동자만이 아니다. 29살의 이은혜 씨는 빛 밖에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이다. 부천 장애인 일자리 사업으로 도서관에서 다른 장애인을 도우며 살아왔던 은혜 씨에게 코로나는 장애인으로서의 어려움을 배가시켰다. 

외부 일정이 있는 경우 활동 보조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은혜 씨,  팔을 잡아야 하는데 '접촉'이 불가피한 상황이 불안하다. 엘리베이터에는 항균 필름을 붙여 놓아 장갑을 끼고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 맨손으로 더듬어서 확인하는 상황 역시 불안을 가중시킨다. 코로나로 인한 방역이 외려 장애인들에게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늘어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는 보편적 장치가 되어가고 있는 QR 코드 역시 장애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마스크를 나눠주던 시절, 마스크를 나눠주는 약국에서는 '마스크가 없습니다'를 종이에 써붙여 놓았다. 그래서 점자가 아니고서는 읽을 수 없었던 은혜씨는 마스크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진행성 근이영양증의 정영만 씨는 코로나로 인해 병실이 없이 이동을 할 수 없었다. 신체 보조를 받아야 하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사회적 격리를 하던 아내가 방호보조복을 입고 정영만 씨를 보살폈다. 장애의 유형 별로 도움이 필요한 분야가 다르지만 갑작스럽게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한 우리 사회는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장애인 개개인이 온전히 코로나로 인한 불편은 책임져야만 했다. 그렇게 장애인들은 코로나 방역에서 배제된 존재가 되었다. 전체 확진자 중 장애인 확진자는 4%였지만 사망자 중 장애인은 20%에 이르렀다. 비장애인에 비해 6배나 높은 수준이었다. 

취약 계층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온전히 개인적 고통으로 코로나 팬데믹에 노출되었다. 당장 식량이 부족했고, 여성들은 학대 가해자와 한 집에 머물러야 했다. 사회적 약점과 불평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백신 접종을 통한 집단 방역이 가시화되고 있는 이즈음 또 다른 사회적 불평등이 문제되고 있다. 선진국들은 자국 인구 몇 배의 백신을 사들이고 있는 한편에서 최빈국들은 백신을 구하기조차 쉽지 않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코로나를 이겨내기 위해 백신 국가주의를 지양할 것을 호소했다. 전세계가 연결된 현재의 세계에서 세계적 협력 없이는 코로나는 종식될 수 없기에 가난한 나라에도 백신의 보편적 공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코로나가 끝이 아니라고. 코로나는 우리 세계에 붙어있던 반창고를 떼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 반창고를 떼고 보니 깊은 상처가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고.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적 위기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예비 훈련장이 되기 위해서는 사각 지대에 놓인 노동자들과 배려받지 못하는 장애인들, 그리고 배제된 가난한 이들, 가난한 나라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by meditator 2021. 2. 5. 02:09

1911년 뉴욕 의류 공장로 무려 146명이 사망했다. 노동자들이 근무 시간 중 딴 짓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을 잠궈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런데 문을 잠근 공장주는 결국 풀려났다. 1920년대까지도 경제 활동은 사적인 영역이었다. 국가가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던 기조가 대공황을 계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황으로 인해 대규모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생계 보장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그저 공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시에 공장에서 만들어낸 물건의 소비자였다. 그들의 생존에 자본과 국가의 생존이 달려있었다. 국가가 나섰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 3권, 8시간 노동이 보장되었다. 금융 기관을 규제하여 예금자를 보호했다. 급진적인 뉴딜 정책, 국가의 개입이 위기의 미국 경제를 되살려냈다. 

 

 

이처럼 '위기'는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게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 생태, 보건 위생적 관점에서 국가의 역할이 급격하게 변화를 겪고 있다. ebs다큐 프라임 포스트 코로나 3부 국가의 탄생은 코로나 시대 변화하는 국가의 위상에 대해 논의한다. 

19세기가 노예 해방, 20세기가 보편적 선거권 도입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기본 소득의 세기가 될 것이다.


벨기에 경제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 교수는 그의 책 <21세기 기본 소득>에서 주장한 말이다. 2018년 출간된 이 책은 '기본 소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주장을 담았지만 그것의 '실현'은 그리 쉽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그 '기본 소득'의 문턱을 코로나가 넘어서게 만들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된 전국민 재난 지원금이다. 

21세기는 기본 소득의 시대?
국가가 직접 국민들에게 돈을 준다? 코로나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시적이냐 지속적이냐 라는 차이는 있지만 개별적으로, 보편적으로, 그리고 의무 조항없이 전국민 모두에게 돈을 나눠준다는 기본 소득, 하지만 코로나는 이 불가능할 것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가가 유도했던 방식은 이른바 '낙수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 중앙 은행에서 대형 금융 기관으로, 그리고 기업으로 돈이 흘러들어가게 하여 고용을 유지하고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는 이런 방식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만들었다. 문을 닫은 거리의 가게들, 그로 인해 거리로 나앉게 생긴 자영업자들, 그리고 생계의 위협에 내몰린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코로나로 인한 봉쇄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금기시되던 현금을 지원하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었다. 

효과는 놀라웠다. 소비자 심리 추이가 단 몇 달 사이에 눈에 띄게 증가했고, 재난 지원금을 받은 75.7%가 만족감을 드러냈다. 경제가 호전되었고, 사회적 스트레스가 완화되었다. 특히 당장 돈이 필요하지 않은 고소득층이 돈을 저축 등으로 흡수하지 않고 '소비'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한을 정한 것이 유효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재난 지원금을 지속적인 기본 소득으로 이어가는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재원'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이러한 기본 소득의 딜레마를 알래스카 영구 기금은 현명하게 해결한 사례로 꼽힌다. 1982년 도입된 기급은 천연 자원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그 운용 이익을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 한해서 매년 지급한다. 

이 기금의 효과는  파격적이었다, 공짜로 돈을 나눠준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외려 일자리가 늘어났고, 가난한 가정의 3세 이하 아이들의 비만이 개선되는 등 양극화 문제 해소에 기여하였다. 물론 이는 풍부한 석유와 상대적으로 작은 70만 정도의 인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풍부한 석유와 함께 석유를 공유자산으로 여기는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지속적인 기본 소득이 불가능한 것일까? 기본 소득의 재원으로 '토지'를 제기하는 학자가 있다. 다량 탄소 배출 상품에 '탄소세'를 얹어 이를 재원으로 삼자고도 한다.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에 매기는 세금은 어떨까? 하지만 아직은 그 어느것도 사회적 공감대를 얻는 것이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전국민 재난 지원금으로 이미 기본 소득의 첫 발을 떼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과연 이 첫 발을 뗀 기본 소득이 21세기 보편적 화두가 될 것인가, 그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주목되는 시점이다. 

코로나와 관련된 국가적 통제, 어디까지여야 할까? 
재난 지원금과 관련된 기본 소득의 실현이 국가의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역할에 대한 지점이라면 코로나와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면 지점도 있다. 바로 '통제'적 측면이다. 

지난 해 8월 호주는 코로나와 관련하여 강력한 4단계 봉쇄 정책을 펼쳤다. 일몰 이후 외출을 금지하였고,  낮에 쇼핑, 산책 등으로 외출을 하여도 5km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으며, 이를 어길 시 150만원의 벌금을 물도록 하였다. 계엄령에 준하는 봉쇄령이었다. 당연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20년 9월 빅토리아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전을 위한 것이라며 찬성을 표명했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당연시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상 생활에 국가가 개입했다. 

 

 

2020년 3월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대테러 작전용으로 씌이던 디지털 추적을 코로나와 관련하여 국민들에게 허용하도록 하였다. 휴대전화가 위치 정보, 동선이 추적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 디지털 감시 시스템이 상용화되고 있다. 횡단 보도에 설치된 안면인식 전광판, 무단 횡단을 할 경우 안면 인식을 통해 전광판에 신상 정보가 표시된다. 벌금을 내거나 사회 봉사를 해야 지워진다. 이 기술은 마스트를 착용하더라도 식별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 되는 중이다. 텐왕 쉐량 프로젝트라는 기술적 통제를 통해 전국민적 삶이 기록되고 있다. 

과연 이러한 통치 편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국가의 기술적 통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시민 사회의 붕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원론적으로 질병의 통제가 국가의 역할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큐는 묻는다. 여기 팔찌 하나가 있다. 중앙 집중적 서버에 연결된 팔찌는 당신의 정보를 통해 미리 당신의 질병을 경고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 팔찌를 원하는가라고 묻는다. 정부의 통제에 당신의 신상을 넘겨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코로나로 인해 과도한 신상 정보의 공개가 사회적 화두가 되었던 우리 사회에서 국가적 역할의 한계에 대한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19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복지 효율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름 등 다양한 개인 정보를 담은 인구 등록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나치'에 의해 학살용 데이터베이스로 활용되고 만다. 이와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신상 정보의 공개가 문제된 바 있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 선택한 극한의 조처지만 지나친 노출로 인해 '인권의 사각 지대'가 되어 '낙인'이 되고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 것이다. 

결국 코로나로 인한 정부 역할의 증대는 21세기의 또 다른 '빅브라더'의 탄생을 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진보적인 박노자 교수는 최근 벌어지는 일련의 국가적 통제 상황을 '인권의 부정'이라고 주장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함정'이라 정의내린다. 쉴러가 주장한 '삶은 최고의 선이 아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선택한 편의가 '위생 독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일까? 

by meditator 2021. 1. 29. 19:34

ebs 다큐 프라임은 1월 25일부터 3부작으로 <포스트 코로나>를 방영 중이다. 백신 접종이 이미 해외에서는 시작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올해 안에 백신 접종과 함께 집단 면역이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상황, 끝이 보이지 않던 '코로나 팬데믹'라는 터널의 끝이 보일 것같은 시절에 다큐는 코로나 이후에 대해 말문을 연다. 

첫 회 '언택트'한 삶 속에서도 새로운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의 의지를 다지는 다양한 창의적인 시도를 살펴본 다큐는, 그에 이어 2회에서 우리 안의 코로나를 살펴본다. 

 

 

세계 그 어느 나라국가도 코로나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코로나 환자들은 늘어나고 있는 상황,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감염병이라는 상황을 처음으로 겪어본 인류, 하지만 여전히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감염된 사람들보다 많다. 그러나 코로나를 겪은 이전과 우리는 더 이상 같지 않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혹 코로나를 직접적으로 겪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건 아닐까? 코로나를 온몸으로 겪은 '전지적 코로나 시점'에서 본 세상은 어떤 것일까? 코로나 이후를 논하기 위해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를 다큐는 다룬다. 

지난 2월 한 종교 단체의 집단 감염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확진자가 증가하기 시작한 대구, 특별 재난 지역이 선포되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도움의 손길 덕분에 어려움을 극복해 냈다. 하지만 당시 의료 일선에 있던 의료진은 입을 모은다. 운이 좋았다고. 

그 운이 좋았다는 평가의 또 다른 이면에는 간호사들의 중노동이 숨겨져 있다. 대구 만이 아니다. 그 방역의 최일선에서 자신을 던졌던 간호사의 목소리로 다큐는 시작된다.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 영웅, 간호사 
환자 때문이 아니라 동료 때문에 버텼다는 유연화씨, 그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음압 병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코로나 병상이 된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단다. 

코로나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유연화 씨는 눈물을 흘린다. 대단한 일을 했다지만 엄마가 나가서 자신이 코로나 병동에서 일한다고 밝힐 수 없었던 게 현실이었단다. 집에서도 마스크를 써야만 했다. 자신이 아니라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질까봐, 자신이 집에 없어야 가족들이 안전한 상황,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출근을 할 때 마음이 가뿐해 졌다고 한다. 

의료진이라면 필수 장비인 PAPR(전동식 호흡 보호구)는 밖의 공기를 빨아들여 깨끗한 공기를 공급해주는 장비다. 하지만 이것조차 제 때 공급받지 못했다. 방역 체계는 수시로 바뀌었다. 자신의 안전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마치 자신들이 전쟁에 방패막이처럼 세우는 병사들같았다.  게다가 처음 경험해보는 감염병으로 인해 '총도 쏠 줄 몰라요'하는 경험 부족한 의료진과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지친 티조차 낼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이 도망치며 동료들이 힘들까봐 참았다. 이른바 '전우애'로 버텼다. 과연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는 자식에게 '큰일 한다'며 기꺼이 응원해주는 엄마가 몇이나 있을까 라고 묻는다. 앞에서는 박수를 쳐주다 뒤에서는 꺼려하는 세상이 자신들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가 연화씨를 무엇보다 힘들게 했다. 


광화문 집회 참가자의 항변 
이중적 잣대에 항변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지난 8월 광화문에서 집회를 연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일원이었던 60대 여성, 그녀는 항변한다. 왜 광화문은 막으면서 해운대에 모여든 2~30만 인파에는 눈을 감냐고. 

광화문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친했던 친구가 '앞으로 나 볼 생각마'라고 농담식으로 말하는데 화가 났단다. 내 손주가 살아갈 나라를 위해서 더위도, 추위도 감수하며 거기로 나선 건데, 자신들의 마음을 몰라준 채 손가락질 받는데 억울하다. 편향이 아니다. 무모함이 아니다. 확신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코로나는 재수없으면 걸리는 병이다. 

슈퍼 전파자의 뒷 이야기 
지난 2월 18일 대구의 31번 확진자. 본인이 증상을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종교 시설, 병원, 마트 등을 돌아다녀 슈퍼 전파자로 이목을 끌었던 장본인이다. 

그녀가 확진 판정을 받은 그 날 이후 쏟아져 나온 수백명의 확진자로 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그녀가 코로나에 걸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작성한 리스트의 지인들 중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녀를 만났다고 거짓 진술한 20대는 처벌을 받았다. 후에 그녀가 슈퍼 전파자가 아니라 2차 감염자일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미 슈퍼전파자라는 낙인이 찍혀 버렸다. 

두 아들의 엄마이자, 평범한 가정의 주부였다는 31번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속담으로 항변한다. 슈퍼 전파자가 된 그녀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평범했던 그녀의 가정은 서로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암보다 더한 코로나 
확진의 무게는 깊다. 암보다도 더하다. 송파구 어린이집에서 보조 교사로 일하던 정효숙 씨는 7월에 확진 판정을 받았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바 있었던 효숙 씨, 하지만 암이 걸렸다는 사실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그녀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순간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암은 나혼자 걸리면 되는 거였지만 코로나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에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단다. 

결국 남편도 양성 판정을 받았다. 다니던 교회에서 20여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왜 조심하지 않아서 걸렸느냐는 말, 부주의했다는 말들이 그녀에게 오래도록 깊은 상처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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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확진의 무게 
이렇게 코로나는 우리 사회에 걸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넘어서기 힘든 벽을 만들었다. 이를 설치 미술 작가 박카로 씨는 'A와 B의 경계'라는 작품으로 표현했다. 

해외 여행 후 마포구 15번 확진자가 된 그녀, 2주간 자가 격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이동 동선이 많았던 그녀가 우선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의 확진 결과를 알리는 구청 홈페이지에 그녀의 신상을 캐고 욕을 해대는 댓글들을 보며 공개 처형당하는 듯했다. 

별 증상이 없던 카로씨였는데 병실에 도착하자 열이 나기 시작했다. 가짜였는데 진짜가 되어버린 듯한 상황, 하지만 열은 약과였다. 그때부터 전화가 쏟아졌다. 왜 동선을 숨기지 않았느냐는 항의, 내 얘기는 말아달라는 부탁, 걸리는 거보다 일을 못하게 되는 현실의 항의가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 역시 피해자인데, 가해자가 되어버린 상황, 그래서 그녀의 작품에는 '마음 떨어짐 주의' 표시가 등장한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플라스틱을 안쓰고 싶어도 모든 것이 일회용품으로 제공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죄책감이 들었다. 입원 기간 동안 안쓰고 모았던 50개의 플라스틱 숟가락이 전자 저울 위에 놓였다. 작품 명, 죄의 무게. 

차별과 혐오의 대상, 확진자 
김지호씨는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이태원 N차 감염자이다.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 대각선에 앉았던 친구로 인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10580번, 50일의 입원 일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창문도 열수 없도록 못으로 고정된 병실, 에어컨은 물론, 환풍기도 비닐로 막았다. 복도에 샤워실이 있어 샤워 대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야 했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로서 겪어야 하는 '격리'는 참을 수 있었다. 구급차도, CT도 젊은 그에게는 모두가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처음 겪는 건 그 뿐이 아니었다. 막연한 차별이나 혐오도 처음 겪어 보았다. 퇴원을 하고 출근한 회사에서 마스크를 벗고 담배를 피던 사람들이 그를 보자 다시 마스크를 썼다. 회사는 사과를 요구했다.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코로나의 최일선에서 일하던 간호사도,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도 코로나가 아니라 코로나로 인해 달라진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세상과 자신 사이의 벽을 절감했다. 바이러스보다 더 큰 마음앓이를 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경험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라 다큐는 진단한다. 

가장 평범한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위험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포스트 코로나를 말하는 시절, 백신도 필요하고, 치료제도 필요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다쳐버린 사람들의 마음, 코로나로 인해 서로에게 벽을 느낀 사람들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치료해야 할 숙제도 잊지 않아야 하겠다. 


by meditator 2021. 1. 27. 0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