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생소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기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만 해도 '페미니즘'은 매우 '생소한 분야'였었다. '여자'로 대학 생활을 하는 건 '혼돈'이었다. 여전히 '남성'과 '여성'에 대한 '분리'된 의식이 지배적이었던 그 시절,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른 존재'로 대하는 '묘한 태도'들에 나는 '혼란'을 느꼈었다. 이런 나의 갈증을 도서관에서 만난 이러저러한 서적들을 통해 '페미니즘'에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보던 '페미니즘' 관련 서적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버자이너'를 보고, 만져느끼고, 그려보는 과정이었다. 자신의 '몸'이었음에도 '상체'가 아닌 '하체'를 들여다본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행위'였다. '더럽게스리',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했을 때의 반응이었다. 자신의 몸이지만, 차마 볼 수 없는 곳, 더러운 곳이라 여겨지는 그곳,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이브 앤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바로 '버자이너'를 알고, 그 욕구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여성 존재를 바로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8월 11일 개봉한 <굿 럭 투유, 리오 그랜드>는 2022년판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아닐까 싶다. 

 

 
60대 낸시의 버킷리스트 
60대의 낸시, 그녀의 삶은 권태롭다. 2년 전 남편과 사별했고, 장성한 아들과 딸이 있지만 그 무엇도 그녀에게 '활기'를 되찾아 주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종교학'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엄격한 '윤리적 규율'을 강조하던 그녀는 자신의 삶도 그렇게 살아왔다. 늘 예측 가능하고, 정해진 원칙에 맞춰 살아오던 그녀가 60대의 어느 날 뜻밖의 도발을 '선택'한다. 바로 돈을 지불하고 '남자 리오(대릴 맥코맥 분)'를 산 것이다. 

영화는 '성적인 퍼스널 서비스'를 매개로 60대 여성의 억눌린 '자아'를 풀어내고자 한다. 동양 고전에서 '이순( 耳順)이라는 표현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편해진', 즉 더는 '욕망할 것이 없어 보이는 연배가 60대이다.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한평생 살아온 '습'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속 '낸시' 역시 마찬가지다. 십대 시절 스쳐지나가듯 자신을 갈망의 상태로 빠뜨렸던 이국의 젊은이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피력하지만, 그도 잠시 눈 앞에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서비스'를 할 준비를 한 남자가 있음에도 좀처럼 옷깃을 놓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선생님인듯 군다. 

60평생 낸시가 지켜온 '습'은 현모양처이자, 엄격한 선생님으로 자신을 버텨온 '페르소나'이다. 그녀가 애써 지켜온 것이지만,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녀의 불만은 그녀 안에 억눌린 '욕망'과 '욕구'를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지 못한 채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로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그 '역할'이 자신이 되어버린 상태, 하지만 이제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나이의 낸시는 그런 자신이 '답답하기만'하다. 

 

 

낸시로 분한 '엠마 톰슨', 그녀의 또 다른 작품 <칠드런 액트(2017)>가 오버랩 된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엠마 톰슨과 또 다른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그린다.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려 한 '애덤'과의 만난 완벽주의 판사 '핑오나'와, 자기 삶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리오'를 산 낸시는 극과 극이다. 그러나 워커홀릭인 피오나와 은퇴를 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원칙에 옭죄어 있는 낸시는 모두 자신의 '페르소나'가 곧 '자신'이 되어버린 처지이다. 아마도 이건 피오나와 낸시라는 영화 속 캐릭터들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더니'라며 자신의 감정을 피력하지 못해 답답해 하던  환갑을 앞둔 '선배님'처럼, '페르소나'에 오랜 시간 충실한 삶을 살던 이들이 어느 지점에서 모두 느끼는 갈증이 아닐까. 

 

자신을 마주하다. 
<굿 럭 투우, 리오 그랜드(이하 굿 럭 투유)>는 낸시와 리오의  네 번에 걸친 만남을 내용으로 한다. 소피 하이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엠마 톰슨'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처럼, 네 번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페르소나'로 부터 한 발자국씩 나와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가는 놀라운 변화를 엠마 톰슨은 설득해 낸다. 

올드 에이지 세대가 확장되고, '골드 에이지' 세대가 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늘어나고 있다. 다이안 키튼, 제인 폰다, 캔디스 버겐 등 쟁쟁한 과거의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2019년작 <북클럽>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매개로 노년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리고'사랑은 그냥 단어입니다. 누군가가 의미를 부여해 주기까지는요.'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찾는 것으로 그녀들의 갈증과 욕구를 '해소'한다. 

그렇다면 <굿 럭 투유>는 노년 버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일까? 결국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는 자체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영화는 '지적 탐구'라는 수식어처럼 '낸시'라는 '존재'에 보다 천착한다. 조심성넘치고, MBTI 극 J로 보여지는 그녀의 성격은 그래서 답답하지만, 동시에 신중하게 자신에 대한 탐구의 발길을 내딛는다. 

 

 

영화는, 그저 욕망에 불붙은 60대 여성이 아니라, '오르가즘'이라는 갈증을 매개로, 한 여성의 삶을 살펴본다. 자신에게 주어진 '페르소나'의 삶을 충실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무엇을 억누르며 살았는가,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밝혀나간다. 또한 억눌린 욕망을 '분출'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정체성이었던  '페르소나'가 리오와의 관계를 '성숙'하게 풀어가는 현명한 장치가 되어 그녀가 살아온 시간 또한 긍정한다. 

앞서, 자신의 '버자이너'를 마주하는 과정은, 나를 '긍정'하는 과정이다. 내 몸에 걸쳐진 '브래지어'와 '거들'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외면했던 그것을 마주하는 건 있는 그대로 나를 '수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낸시 역시 드디어 자신의 날 것 그대로의 몸을 마주한다. 60대의 육체, 그녀의 표현대로 가슴은 허리까지 내려오고, 배는 부풀었고, 늘 그녀를 위축되게 만들었던 육체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장 사랑스럽게, 그리고 자부심에 넘쳐서 바라본다. 그 늘어진 가슴과 부푼 배가 된 그 시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건 비단 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유행하고 있는 '바디 프로필', 언뜻보면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걸 위한 극강의 다이어트와 피티를 거치는 모습은, 결국 보여질만한 자신을 '가공'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와 달리 영화 속 낸시의 '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첫 발이다. 지난 60 평생 낸시가 갈망했던 건 바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낸시의 모습은 우리에게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하는가?라고. 

물론 <굿 럭 투유>는 진지한 자아를 향한 탐구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봉인'된 성매매에 대해 '공익 서비스'라는 도발을 던지는 문제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자아에 대한 갈증을 성적 서비스를 통해 풀어내려한 60대 여성과 그 여성에 대한 '심리적 서비스'마저 마다하지 않는 이상적인 '관계'를 통해 긍정했지만, 그 여성과 남성이, 남성과 여성이었다면 과연 그럼에도 여전히 호의적으로 보여질 수 있을까라는 난제를 남긴다. 






by meditator 2022. 8. 17. 20:27

 N차 관람까지 '역주행'하고 있다는 조용한 화제작 <헤어질 결심>을 뒤늦게 봤다. '화제작'답게 월요일 오후임에도 객석은 비어있지 않았다. 과연 이 영화의 어떤 점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뒤늦게 빼앗았을까?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정훈희의 보이스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송창식의 코러스가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극장 안, 그 '모호'한 여운에 좀처럼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다. 

 

 

일찌기 <올드보이>에서 <친절한 금자씨>, <박쥐>, 그리고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그 독특한 '미장센'이 주요 등장 인물처럼 자리한다. 다른 작품들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은 듯해도 여전히 그 고유한 색감과 공간의 장치, 그리고 시점들이 관객들을 해준과 서래의 현실적이지만, 몽환적인 서사로 끌어들인다. 

품위있는 형사 해준
범인이 칼을 휘두르려 하자 해준(박해일 분)은 '체인메일' 장갑을 꺼내 낀다. 그 덕분에 휘두르는 칼을 잡고 범인을 쉬이 결박한다. 그 한 장면이 형사 해준을 설명해준다. 단골 양복점에서 맞췄다는 그의 양복에는 많은 주머니가 있고 그 안에는 형사로서 그의 직업에 필요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 해준은 그런 형사이다. 늘 넥타이까지 갖춘 정갈한 옷차림, 최연소 경감이 될 정도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진다. 부산을 떠나 이포로 온 해준, 불면증이 더욱 심해지자 아내 정안(이정현 분)은 말한다. 당신 삶에 '살인'이 빠져있어서 그렇다고. 

그런 해준이 유력한 용의자 서래(탕웨이 분)를 처음 마주한다. 한국말이 서투르다며 '마침내 죽었습니다'라는 여자,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해준은 '초밥'을 시켜준다. 후배 형사는 범인이라 단정짓는데, 해준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래의 혐의를 벗어주려 애쓴다. 미해결 사건을 벽에 '저장'해 놓을 정도인 그의 이력으로는 석연치 않은 처신이다. 결국 그는 '붕괴'된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바다에 버려서 아무도 못찾게 해요,'라며 서래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넨다. 

 

 



'날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은 시작됐죠.'


그리고 아내가 있는 이포로 온 해준, 그런데 그의 앞에 서래가 나타난다. 심지어 그녀의 두번 째 남편이 다시 죽음을 맞는다. 첫 번째는 '자살'이고, 이번에는 '타살'이라며 다르다는 그녀, 하지만 해준은 이번에는 그녀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감금'한다. 

사랑했다는데 해준은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반문한다. 그 표정은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같다. 그리고 '우리 일이요? 무슨 일이요?'라며 언성을 높인다. 그가 일찌거니 서래를 감금한 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자신이 또 '붕괴'될까봐? 서래의 말처럼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다시 또 서래에게 핸드폰을 건네고야 마는 해준, 그게 그만의 사랑인가? 그런 와중에 떠나는 아내 옆의 남자를 보고 손을 불끈 쥔다. 그가 사랑한 건 서래보다 자기 자신인가. 품위있는 형사로 해준의 삶이 '사랑'보다 강력했던 건 아닐까? 문득 홍상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떠오른다.

매번 끝내려 하고 도망치려 하던 그 사랑은 결국 쓸려가 버리고 만다. 어쩌면 오늘도 그는 자신의 '불면'을 고뇌하는 대신 일광욕을 하고 족욕을 하며 호흡 기계를 끼고 많은 주머니가 달린 양복을 입고 잠복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죽어가는 범인도 하는 이런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말이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피의자가 되고 싶었던 서래 
<헤어질 결심>을 보고 기자의 시선을 끌었던 건  사랑보다 자신의 자부심에 더 애착이 컸던 해준보다 그의 초밥 한 덩어리에 결국 자신을 던져버리고 마는 서래, 그녀의 삶이다. 

제작진은 '탕웨이'를 캐스팅하고 싶어서 여주인공을 '중국인'으로 설정했다고 하는데, 극중 서래를 보며 2001년작 <파이란>이 오버랩되었다. 영화는 <헤어질 결심>처럼 극중 남자 주인공 강재(최민식 분)에게 촛점이 맞추어 진행된다. '모두가 친절하지만 그 중에서도 강재씨가 제일 친절합니다'라던 그의 아내 파이란, 하지만 파이란은 삼류 건달 강재가 편의적으로 맺은 인연이다. 그런데 파이란은 그런 강재를 진짜 남편처럼 여기며 아무도 친절하지 않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다 결국 목숨을 잃는다. 

파이란과 서래, 그녀들은 모두 불법 체류자들이다. 그리고 불법체류자인 그녀들을 구해준 건 '남편'들이다. 강재는 그녀와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줬고,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유승목 분)는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었다. 기도수가 오랜 시간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생과 사를 오가던 서래만을 돌려보내지 않자, 그녀는 그를 기꺼이 남편으로 받들었다. 그녀의 몸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기고 구타를 하는 기도수를 그녀는 8년을 참아냈다. 돌아갈 곳이 없는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그래서 고소공포증을 무릎쓰고 '마침내' 겨우 그녀의 삶에 빛이 들까말까 할 때 그녀의 앞에 해준이 등장한다. 

해준의 등장, 그게 왜 문제가 됐을까? 그녀는 오래도록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함을 지니고 다닌다. 가족의 산이라 하는 호미산에 이를 때까지. 이 '가족'적 장치는 그녀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건 '할아버지가 독립군이었다'는 핏줄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녀가 천착한 '관계'에 대한 정체성이다. 

8년을 학대당하며 간병인으로 살아가던 그녀, 그런 그녀가 남편을 죽인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 경찰서 취조실에 들었다.. 그런데 맞은 편의 형사가 그녀를 친절하게 대한다. 초밥도 시켜주고, 매일 밤 자신을 지켜보던 형사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녀에게 중국식이라며 볶음밥도 해준다. 그녀의 줄담배도 참아준다. 마치 '모두가 친절한 데 가장 친절한 사람은 강재 씨입니다' 같은 경우인 거다. 

안타깝게도 미스터리한, 남편을 죽였을 지도 모른 '팜므 파탈'같은 서래의 불행은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그녀가 선택한 '사랑'들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유력한 증거인 핸드폰을 던져주듯 가버린 해준, 그런 해준의 '언어'를 서래는 '사랑'이라 읽는다. 하지만 해준은 형사이고 결혼한 사람이다. 그런 그와 '헤어질 결심'으로 서래는 또 다른 남편을 구한다. 

하지만 두번 째 남편은 해준처럼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다.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는 없다. '내가 나쁩니까?', 결국 해준을 찾아나선 그녀,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선택이 해준의 자부심을 위태롭게 만들고, 그를 구하려 기꺼이 자신을 던진 그녀에게 해준은 핸드폰만 또 건넨다. 이제 그녀는 다시 한번 '헤어질 결심'을 한다, 영원히. 서래의 두번 째 남편, 임호신(박용우 분)은 투자자, 아니 투기꾼이다. 그의 아내가 된 서래, 피의자가 되서라도 해준을 만나고 싶다는, 그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열망'은 임호신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맹목적 투자 전략은 임호신과 다르지 않은 엔딩을 맞이한다. 

비벌리 엔젤의 책 <자존감없는 사랑에 대하여>는 서래와 같은 선택을 '낭만 애착'이라 말한다. 남성들보다 더 여성들은 성장 과정에서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애착을 지니도록 교육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전근대적 가족 관계에서 자란 여성들은 공동체적 관계, 그 중에서도 특히 남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낭만 애착'에 천착하기가 쉽다.

학대에 시달리던 서래, 그녀는 범죄자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고 폭력 남편으로 부터 도망쳤지만 '낭만 애착'으로 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했다. 스스로 서는 대신 그녀는 다시 사랑을 구하고 거기에 자신을 던진다. 하지만 어느 남자도 자신보다 그녀를 더 사랑해주지는 않았다.

해준의 친절에 스르르 자신을 무너뜨린 서래, 해준을 잊기 위해 또 다른 남자를 선택한 그녀, 그녀의 자기 파괴적인 사랑이 결국 그녀를 파국으로 이끈다. <파이란>에서 무려 20여년이 지났지만 <헤어질 결심>은 조선족 동포라는 '대상'을 통해 관계중심적인 여성의 한계를 말하고자 한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의심이 든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목이 터져라 서래를 부르는 해준, 그가 목놓아 부르는 그 자리는 방금 전 그녀가 섰던 그 곳이다. 영화는 조선족 서래의 순애보, 그 여운을 정훈희의 안개로 이어갔지만 물이 스며드는 모래 구덩이에서 그녀가 '아이 차가워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으면 하는 외람된 희망을 놓을 수는 없었다. 사랑, 그깟 게 뭐라고.



by meditator 2022. 7. 26. 17:05

스테디 셀러 인기 프로그램 중에 <자연인>이 있다.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산골짜기,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사연'과 '야생의 삶'이 꾸준한 인기를 얻는다. 그런데 찾아간 mc에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세상'에 소속되어 사는 삶이 여의치않았음을 '토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자연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성'들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홀로 야생의 삶을 살아내는 게 여의치 않은 탓이 크리라. 그 여의치 않은 야생의 삶에 자신을 던진 한 여성이 있다. 우리에게는 <원더우먼> 시리즈에서 안티오페로 낯이 익은 '로빈 라이트'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랜드>이다. 

 

 랜드 ⓒ 넷플릭스

 

자연인이 된 여성
<자연인> 프로그램은 '자연인'이라지만 예능 프로그램답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 삶의 조건이 구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찾아간 mc에게 대접한다며 삼겹살 구워주고 닭 삶아주는 식이다. 그런데 <랜드>의 주인공 이디(로빈 라이트 분)는 차원이 다르다. 랜트카를 빌려 짐을 싣고 나무만이 무성한 언덕 위 집에 도착한 그녀, 이 집을 소개해준 이에게 차마저 가져가라 한다. 핸드폰은 이미 오다가 쓰레기 통에 버렸다. 말이 집이지, 오래전 한 노인이 살다 생을 마감하고, 폐가다시피 한 지 오랜 집이다. 유리창은 깨지고, 집안에는 멀쩡한 게 없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 속에 어울려 있지만, 그래서 더 외롭고 힘든 경우다. 어떤 때 그럴까? 영화 초반 이디의 사연에 대한 정보는 충분치 않다. 그녀의 친구로 짐작되는 여성이 이디에게 삶을 놓지 말라하고, 그런 친구의 '조언'조차 이디는 모욕적으로 받아들인다. '삶'이 모욕이 되는 순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을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지는 순간, 그렇게 이디는 세상에, 사람들과 함께 머물 수 없어 홀로 도망치듯 깊은 산 속 오두막을 찾아왔다. 그녀가 내던진 그 모든 것이 그녀의 '고통'을 대변한다. 사람이 싫다는 그녀의 저항이 그녀의 상실을 설명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차도, 핸드폰도 없이, 깡통 통조림만 잔뜩 싣고 오두막으로 숨어들 듯이 찾아든 그녀, 영화의 제목처럼 '랜드'에 문외한인 그녀는 '삶'을 버리는 심정으로 '랜드'에 자신을 던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랜드'의 그녀는 '고통'스러워 할 여유가 많지 않다. 오래 전 와봤다지만 낯선 그 '지역'에서 그녀는 '생존'하기 위해 매일매일 '전투'를 벌인다. 그래도 추워지기 전에는 할 줄 아는 낚시도 했다. 텃밭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야생 동물들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참치 통조림을 그냥 따서 끼니를 때우던 그녀, 하지만 아직은 '사냥'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날, 멀직이 떨어진 화장실에 있는 틈을 타서 열린 집 안으로 곰이 들이닥쳤다. 화장실에서 벌벌 떨던 그녀가 곰이 떠난 뒤 돌아간 집에는 남아난 것이 없었다. 바닥 구석에 굴러다니는 비스킷 조각을 입으로 밀어넣지만 닥쳐오는 추위와, 그보다 더한 '허기'가 그녀를 잠식한다. 그녀가 원했던 건 '죽음'이었을까? 

 

 랜드 ⓒ 넷플릭스

 

'상실'의 연대 
굶어 죽는 건지, 얼어죽는 건지, 생사의 기로에 놓인 그녀의 집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한참 뒤 정신이 든 그녀의 집에는 불이 피워져 있고, 그녀는 따뜻한 이불 안에 뉘어져 있다. 그리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약을 건넨다. 

죽어가던 그녀를 구한 건 미겔(데미안 비쉬어 분), 사냥을 다니던 그가 그녀의 집에 연기가 더는 오르지 않는 걸 보고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녀에게 도움을 준 대가로 건네던 돈을 거절한 그는 대신, 이 야생의 삶에 무지한 그녀에게 살아갈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 사냥을 하는 법, 올무를 만드는 법,  그리고 사냥한 동물을 먹을 수 있게 처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 완강하게 세상을 거부한 채 오두막에 웅크리고만 있는 그녀에게 '두레박'같은 손길을 전한다. 

그녀에게 애견마저 넘겨준 그, 그런 그가 이상하리만치 오랫동안 소식이 끊기자, 드디어 그녀는 처음으로 길을 나선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데 100달러를 걸었다고 웃는 미겔,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한때 술에 취해 운전을 했고, 그러다 아내와 딸을 잃은 그는, 이다에게 외려 고맙다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이다는 비로소 그런 그에게 말한다. 자신의 남편과 아이가 극장에 침입한 괴한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미겔은 용납할 수 없었던 자신을 이다를 도움으로써 구한다. 그리고 이다는 그의 도움을 통해 비로소 '자연인'으로의 삶에 천착한다. 그들의 '상실'이 그들 서로를 구한 것이다. 

 

 랜드 ⓒ 넷플릭스

 

'산 사람은 살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살아낼 힘이 생기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이다는 세상을, 사람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왔던 곳, 아이가 좋아하던 곳으로 떠난다. 자꾸 삶을 독려하며 재촉하는 세상을 등지고. 

그녀를 살려낸 미겔이 그녀에게 묻는다.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고?', 그런 미겔의 질문에 이다는 말한다. 그저 이 곳의 삶에 하루하루 익숙해져 가는 것일뿐이라고. 아이를 낳고 우울증에 걸린 산모가, 그녀를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는 게 재미있어? 난 사는 게 힘든데, 그러자 슬퍼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다정하게 말했단다. 얘야, 사는 건 재밌어서 사는 게 아니란다. 그냥 그저 사는 거란다 라고. 그저 살아가는 시간이 때로는 그 어떤 위로보다 '치유'가 된다. 

이다는 말한다. 도망치거나 피해서 이 곳에 온 게 아니라고. 스스로 선택해서 온 거라고. 산속 오두막을 선택한 그녀는 그곳에서 결국 살아낸다. 처음 도끼질조차 낯설었던 그녀가 이젠 총으로 거뜬히 사냥을 하고, 그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토막낸다. 더는 미겔이 도와주지 않아도 이제 그녀는 오두막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간다. 정신과 의사의 상담도, 오랜 친구의 다정한 우정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지만, '자연'에서의 시간이 그녀를 회복시켰다. 그녀가 자신을 던져 살아낸 '시간'이 그녀에게 삶을 돌려주었다. 




by meditator 2022. 7. 11. 16:29

'오은영 쌤' 덕분에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대중적으로 익숙한 학문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족'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내면 아이'라는 용어가 종종 등장하곤 한다. 부모 자식간의 갈등, 이전까지는 그 '문제'의 촛점이 '아이'에 맞춰져 있다면, 최근에 들어서는 그 갈등의 근원으로 부모, 그 중에서도 특히 부모가 어린 시절 가진 '트라우마'를 조명한다. 드러난 문제 속에 숨겨진 또 다른 '가족'의 문제이다. 

여기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한 여성이 있다. 어른이 된 그녀는 여전히 그런 어린 시절의 아픔을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런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좋은 부모가 되기로 했다. 심지어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기관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딜레마가 있다. 그 '아이'가 그녀가 낳은 아이가 아니다. <가족의 색깔> 속 아키라(아리무라 카스미 분)의 선택이다. 

 

 

25살, 엄마를 선택했다
아키라는 25살이다. 한참 '창창'할 나이, 그런데 '결혼'을 선택했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그녀에게 마지막 남았던 당근을 나누어 주고, 카레에는 '고구마'를 넣으면 맛있다며 고구마도 나누어 주던 '따뜻한 남자' 슈헤이, 가슴 통증이 와서 병원에 급히 입원했지만 놀라서 찾아간 아내 아키라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웃겨주려 애쓰던 남자, 영화는 그렇게 아키라의 남편을 그린다. 스물 다섯 살의 젊은 여성이 이미 다 큰 아이가 있는 남자 슈헤이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은 그녀가 원하던 안락한 가정 대신 '시련'을 주었다. 어느날 가슴이 아프다며 입원한 남편, 놀라 달려온 아내를 웃으며 달래주었지만 다음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이 남긴 건 동업 사기로 인한 빚, 그래서 그들이 살던 도쿄의 아파트가 날라갔다. 그리고 초등학생인 아들이 남았다. 

과연 아키라는 어떤 선택을 할까? 도쿄의 아파트를 처분한 아키라는 슌야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 가고시마를 향한다. 아들의 죽음도 몰랐던 시아버지 세츠오(쿠니무라 준 분)에게 남편의 유해를 전한 아키라는 당분간 자신들이 시아버지 댁에 머물수 있게 해달라 청한다. 그리고 철도 기관사인 시아버지 덕에 기차 덕후였던 남편을 꼭 빼닮아 아버지 못지 않게 기차를 좋아하던 아들을 위해 '기관사'에 도전하고자 한다. 

겨우 25살이지만 아키라는 의연하게 이제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슌야의 부모 노릇을 감당하려 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자동차 면허조차 없는 아키라가 '기관사'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의지'만 가지고 되는 일일까?

자신을 놀리는 친구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바람에 보호자로 호출된 아키라, 아키라는 의연하게 제가 슌야의 '부모'입니다를 외치지만 영화 속 슌야는 아키라를 늘 '아키라짱'이라 부른다. 부모의 날, 아키라에게 학교에 오지말라고 당부한 슌야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이미 세상에 없는 아버지가 여전히 그의 곁에 있는 것처럼 쓴 글을 발표한다. 그런 슌야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고 하는 아키라, 하지만 슌야의 입에서, 아버지 대신 아키라가 없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만 듣고 만다. 

 

 

슌야의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선택한 기관사의 길도 여의치 않다. 이제는 사양 길에 접어들었지만 지역민들의 열의에 힘입어 미니 열차로 운행하는 가고시마 열차, 순조롭게 기관사가 되나 싶었지만 기찻길로 뛰어든 사슴을 치고, 그 죽은 사슴을 바라보는 어린 사슴을 보고 나서는 아키라는 좀처럼 예전처럼 그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진다. 

죽은 남편의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낳지 않은 남편의 아들, 그리고 젊은 엄마라는 이질적인 '가족 구성원'이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가족의 색깔>, 그 서사의 줄기를 이루는 건 '가족'됨을 지향하는 한 여성의 '의지'이다. 영화는 슌야가 낳자마자 슌야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슌야의 아빠가 아이를 기르기가 힘들 것을 염려한 시아버지는 슌야의 외할머니가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결정에 동의한다. 형편으로 보면 그게 나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슌야의 아버지 슈헤이는 그런 '어른'들의 결정을 거슬러 홀로 아이를 키워냈다. 

형편과 편의, 그걸로 보자면 아키라의 결정도 무모해 보인다. 영화는 시아버지의 시점에서 과거 아들과 이제 아들조차 없는 며느리의 결정을 '오버랩'하며 '가족'을 묻는다. 하지만, '가족'을 이루는 건 생각보다 여의치 않다. 자신을 끝내 '아키라짱이라 부르는 슌야, 정작 '아들'을 위한다는 그 일을 자신이 해낼 수 있을까?

불안정한 상태로 인해 '휴직까지 당할 처지에 놓인 아키라, 그런데 자신을 응원해 줄줄 알았던 시아버지가 말한다. '자신이 결정할 문제'라고. 스스로 기관사가 될 수 없다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두 여성
영화는 선택에 기로에 놓인 두 젊은 여성을 등장시킨다. 처음부터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던 아키라와 슌야의 담임 선생님, 노천 변에서 토하고 있던 선생님에게 119를 부르려 하던 아키라는 그녀가 가정이 있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축복'받지 못한 아이니 지우겠다고 결심했던 선생님은 미혼모라는 '존재'를 차치하고 생명의 잉태 그 자체를 '축하한다'고 전한다. 

선생님은 학부모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를 스스로 낳아 기를 것을 결심한다. 반면 아키라의 결심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을 응원해 줄 것 같은 시아버지의 냉정한 한 마디, 그리고 보호자가 되기로 했지만 자신을 '부모'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슌야, '위해서'라는 명목의 그녀의 결심이 그 근간에서 부터 흔들린다.

아빠로 부터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했던 선생님이 그 답을 자신에게서 찾은 것처럼, 아키라에게 필요했던 시간 역시 '누구'가 아닌, 자기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스스로 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돌아온 아키라에게 슌야는 말한다. '아키라는 아키라 짱'이라고. 슈헤이나, 죽은 엄마를 대신한 자리가 아니라, 25살 아키라의 자리인 곳,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직업으로 기관사, 비로소 아키라는 부모로써도, 직업인으로서도  '견습' 딱지를 떼었다. 

전형적인 일본 가족 영화의 정서가 물씬 품어나는 <가족의 색깔>, 하지만 잔잔한 듯한 분위기 안에서 던져진 질문들은 심상치 않다. 가족이라는 영향력 안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던져진 '과제', 전형적인 '가족주의'인 듯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도발적인 답을 준 영화이다. 


by meditator 2022. 6. 27. 23:58

Are you happy?
당신의 답은 어떤가? 이 질문에 즉답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아마도 <닥터 스트레인지>의 스티븐처럼 잠시 텀을 두고 답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짧은 텀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나는 행복한가?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행복이 뭐지?

 

 

6년 만에 단독 시리즈로 돌아온 두 번째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이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명제를 던지며 시작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지만 사랑하는 연인이 그의 곁을 공식적으로 떠나는 날, 그래도 스티븐(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연인 크리스틴(레이첼 맥아담스 분)의 질문에 행복하다 답한다. 이 정도면 행복하다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크리스틴 앞에서 스티븐은 예의 자존심을 앞세우는 걸까? 그도 아니면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하기 두려운걸까?

하지만 행복하다는 스티븐과 달리, 행복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리고, 그 사랑하는 이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들과 함께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한 사람, 완다(엘리자베스 올슨 분)이다. 그런데 그녀가 사랑하는 비전, 비브라늄과 마인드 스톤이 결합된 완벽한 인공체는 타노스의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완다는 그와의 사랑을 '환타지'를 통해 구현한다. 바로 ott 시리즈로 방영된 <완다비전>이다. 하지만, 완다가 꿈꾸던 가정은 '환타지'답게 허구였음을 드러내고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그 파멸 끝에 완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마녀 '스칼렛 위치'로 확인한다.

한 시리즈 내내 몰입했던 자신이 만든 허구의 '해피홈'에 대한 열망을 완다, 스칼렛 위치는 이제 '멀티버스'를 통해 실현하려 한다. 다중우주의 그 어느 곳 여전히 '존재(?)하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온 '멀티버스 이동'이 가능한 아메리카 차베즈(소시 고메즈 분)를,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는 스칼렛 위치가 된 완다의 욕망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반대한다. 그런 닥터에게 완다는 반문한다. '당신은 규칙을 어기고 영웅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하고 적이 된다?' 그건 공평하지 않다고.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 스파이더맨의 청으로 멀티버스의 대혼돈이 문을 열어제친 건 이미 닥터 스트레인지였다. 닥터는 경우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행복을 향한 완다의 흑화된 열망을 막을 수는 없다. 

'모성'을 앞세운 완다의 맹목적인 '행복론'에 닥터 스트레인지의 '정의'가 마주선다. 그런데, 그 '정의'도 고민이 된다.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등장한 닥터 스트레인지 꿈 속에서 등장한 또 다른 멀티버스 속 '디펜더 스트레인지'는 '정의'의 이름으로 멀티버스의 여행자 아메리카 차베즈를 소멸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 838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정의'의 이름으로 금단의 영역인 '다크 홀드'에 손을 대고, 그것으로 타노스를 막으려 했다. 그로 인해 서로 다른 두 우주가 충돌하는 '인커전'을 초래햇다. 그래서 지구 838의 비밀결사 조직인 '일루미나티'는 닥터를 처형하고, 허울좋은 동상만을 남겼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멀티버스'의 균형을 파괴하는 스칼렛 위치, 그런 스칼렛 위치를 막기 위해 멀티버스의 여행자를 제거하려는 다른 차원의 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멀티버스의 대혼란을 일으킨 또 다른 차원의 닥터 스트레인지, 그런 저마다 다른 행복과 정의라는 혼돈의 '멀티버스'는 달리는 기차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두고 '정의'의 방식을 모색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 '멀티버스'의 대혼란은 여전히 정의의 방식과 실천에 있어, 그래고 개인의 자유와 그 실현 방식에 있어 '혼돈'을 겪고 있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은유'로 다가온다. 

 

 

아는 사람만 알게 되는 멀티버스의 세계관 
<닥터 스트레인지; 대 혼돈의 멀티버스>는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는 영화라 보여진다. 이미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마블의 멀티버스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스칼렛 위치의 습격으로 카마르 타지가 처참하게 파괴되고 완다, 스칼렛 위치를 막기 위한 '비샨티의 서'를 구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와 난데없이 닥터의 세계에 등장한 멀티버스 여행자 아메리카 차베즈는 '멀티버스'의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흑백으로, 때로는 에니메이션과 같은 다중 우주의 파장을 거쳐 도착한 지구-838, 이 숫자는 다중 우주가 최소한 838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원을 달리한 그곳 지구에는 또 다른 스트레인지들이 있다. 이미 그의 연기력만으로 캐릭터를 특화시키는데 발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분한 여러 차원의 스트레인지들. 그들은 스트레인지 특유의 일관된 자존감을 넘어 자만심에 가까운 캐릭터적 특징과 각 차원별 다채로운 프리즘의 색채를 곁들여 다중우주론을 설득한다. 

우리가 사는 단일한 시간, 단일한 공간을 우주로 확장시킨 '어벤져스'까지는 이미 <스타워즈>이래 익숙한 환타지적 공간이기에 수월했다. 이미 전작의 시리즈로 익숙한 배우들의 스파이더맨이 알고보니 멀티버스 속 다른 차원 속 스파이더맨으로 등장하는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까지도 그러려니 했는데, 지구 838 정도에 이르면 보는 이에 따라 '멀티버스'에 대한 피로감이 충분히 느껴질만한 설정이다. 

무엇보다 <완다비전>, <왓이프>, <로키> 시리즈까지 마블의 다른 시리즈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수라고 하듯이, 이즈음 마블 시리즈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 전체 세계관과 각 시리즈에 대한 사전 인지가 필수가 되고 보니, 마블 세계관의 충실한 독자가 아니고서는 닥터 스트레인지 속 다채로운 설정들이 난해하거나 부담스럽기 까지 할 수 있을 듯 싶다.

일찌기 영국 미니시리즈 <닥터 후>이래 멀티버스를 영접한 기자에게 애니메이션<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속 멀티버스는 '신선'한 설정이었지만,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즈음에 이르르니 시리즈를 이어가기위한 '설정'의 피로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채로운 멀티버스의 설정과 그 세계를 오가며 혼란을 발생시키고, 그 혼란의 막으려고 애쓰는 완다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결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론적인 질문이다.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모성'을 통해 들춰낸 '행복'에 대한 질문, 무한질주하는 행복론에 또 다른 맹목적인 '정의'가 제동을 건다. 하지만, 과연 세계 평화를 넘어 '멀티버스'의 평화를 위해 한 생명의 희생은 정당한가라고 다시 영화는 질문을 건넨다. 어쩌면 답은 쉬이 얻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계속되는 다중 우주의 충돌이 빚어내는 인커젼처럼,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할 숙제일 듯하다. 아니 한바탕 멀티버스의 회오리가 휩쓸고 간 후 'are you happy?'의 우문에 지금 여기서 나의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웡의 현답이 '답정너'일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22. 5. 12. 22:09

학교와 락음악이라 하면 이제는 고전이 된 <스쿨 오브 락>이 떠오른다. 우연히 음악 교사가 된 로커 듀이 핀(잭 블랙 분), 자신이 혹한 그룹에서 쫓겨나 학교 대리 교사인 친구 집에 얹혀사는 신세이지만, 고답적인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던 아이들과 '락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함께 성장하는 영화이다. 학교로 간 락이라는 설정만으로도 신선했던 영화, 이제 또 한 편의 락 영화가 학교로 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락을 하는 선생님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락을 선택한 아이들 케빈과 헌터, 그리고 에밀리의 이야기다. 

왕따, 부적응자, 그리고 감정 조절 장애 학생의 선택 
헌터(에드리언 그린스미스 분)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아버지는 매냥 헌터가 비아냥대듯이 여성들의 가슴에 '식염수 주머니'를 넣는 성형외과 의사이다. 어릴 적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 후  떠나고 그 엄마 얼굴이 가족 사진에서 잘려 나간 이후 늘 일과 연애로 바쁜 아버지, 헌터는 자신의 외로움에 대한 구원을 '락'에서 찾았다. 지하의 그의 방 곳곳을 메운 메탈리카 등 메탈 락 밴드의 사진들(실제 메탈리카 멤버들이 결정적인 장면에 까메오로 등장한다), 긴 머리, 가죽바지, 그에게 메탈은 '구원'이자, 삶의 열쇠이다. 하지만 그 거친 복장에도 불구하고, 학교 주먹 좀 쓰는 애들한테 맥없이 나자빠지고 마는 헌터의 모습처럼 그 '구원의 열쇠'는 어쩐지 '찌질'한 헌터의 어색한 포장지같다. 

또 한 명 <그것>의 제이든 마텔이 분한 케빈은 헌터의 유일한 친구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계기가 헌터처럼 케빈이 친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걸 헌터가 구해줘서이다. 체육 수업을 받는 대신에 고적대를 택했듯이 케빈은 학교 생활의 주변을 조용히 맴돈다. 그런데 고적대 작은 북이나 겨우 치는 케빈에게 락에 심취한 헌터가 드러머의 길을 종용한다. 헌터가 만든 '고문 기계'라는 곡, 하지만 그걸 치기 위한 장비도, 능력도 케빈에게는 없다. 

그런 케빈의 눈에 들어온 한 소녀가 있다. 같은 고적대에서 클라리넷을 불던 에밀리(아이시스 헤이스워스 분)다. 감정 조절 장애가 있는 에밀리는 약을 끊는 바람에 혼자 다른 음악을 하듯 부는 클라리넷을 지적하는 선생님께 욕을 하며 대들고 만다. 근데 그런 에밀리가 어쩐지 케빈은 맘에 든다. 더구나 에밀리가 첼로를 연주하는 것을 본 케빈은 그녀가 헌터와 함께 하는 메탈 밴드의 '베이스' 파트를 맡았으면 좋겠다. 


 

요즘은 '청소년 영화'라고 해도 '청소년 관람 불가'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메탈 로드>도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막상 영화는 '순한 맛'이다. 상대 밴드의 드러머의 상습 약물 복용, 폭력, 베드씬 등 적나라한 내용들이 들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머리를 밀고 검고 하얀 색으로 칠을 해도 무시무시하게 '메탈릭'해 보이기 보다 어쩐지 애잔하고 심지어 귀여워 보이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그런 장치들이 세 주인공들의 우정과 애정의 삼각 관계 속에서 적당하게 양념처럼 뿌려진다. 

아마도 <메탈 로드>의 가장 큰 미덕은 왕따이거나, 부적응자, 그리고 감정 조절 장애를 겪는 청소년들이 '메탈'이란 음악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 애쓰는 지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카드는 허용해도, 아들을 위해 시간과 맘을 허락해 주지 않는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카드로 '메탈' 장비를 사서 학교의 '배틀 오브 밴드'에 출전하고자 한다. 사실 '메탈 밴드'를 표방하지만 헌터의 겉멋과 어설픈 케빈의 연주가 버무려진 상황이었을 뿐인데, 그래도 두 사람은 열심히 준비해 간다. 무엇보다 겨우 작은 북 리듬 정도를 연주하던 케빈이 헌터가 준 음악을 들으며 메탈릭한 연주자로 거듭나는 부분이 흥미롭다.

청소년 영화답게 이들의 밴드 출전은 험란하다. 물론 그 험란함은 충분히 해피엔딩을 예상할 정도의 험란함이다. 둘도 없는 친구 헌터와 케빈은 케빈의 여자 친구가 된 에밀리와의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는다. 게다가 늘 카드만 쥐어줄 뿐 무관심했던 아빠는 헌터의 폭주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처방을 내린다. 물론 '영어'의 몸이 된 헌터를 케빈이 구하며 두 사람은 결국 애초에 목적한 대로 '베틀 오브 밴드' 경연에 나서게 된다. 


 

어설프기만 했던 두 찌질한 소년이 '메탈' 정신을 표방하며 좌충우돌한 끝에 선 경연장, 거기에 에밀리가 합류한다. 예의 '메탈' 정신을 늘 운운하던 헌터의 연주와, 앳된 미소년에서 제법 거친 드러머가 된 케빈의 성장도 볼만 하지만, 소심과 폭주를 오가며 자신없어 하던 에밀리가 케빈의 응원에 힘입어 약대신, 메탈릭한 첼로 연주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한껏 뿜어내는 장면은 통쾌하다. 청소년의 불안정한 감정을 그저 '약'으로만 다스리려는 오늘날의 세상에 한 방을 먹이는 듯한 설정은 주목할 만한 장면으로 남는다. 

'순한 맛'이라고 했던 것처럼 <메탈 로드>는 예측 가능한 설정과 스토리의 영화이다. 마치 예전에 주말마다 하던 디즈니랜드 아동물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마음이 따뜻해 지는 이유는 그저 잡풀처럼 밟힐 것 같은 아이들이 그 누구의 도움없이 밟혀도 다시 일어서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고, 우정과 사랑을 일궈가며 영화의 제목처럼 자기 삶의 'Lords'가 되어가는 과정은 '순한 맛'이지만 보는 이를 미소짓게 만든다. 게다가 <스쿨 오브 락>의 한 주인공이 음악이었던 것처럼 클래식에서 부터 메탈에 이르기까지 음악들은 빠질 수 없는 듣고 볼 거리이다. 


by meditator 2022. 4. 17. 13:12

우리 '액션' 영화의 오래된 갈증이 무엇이었을까? 나현 감독의 <야차>를 보면 그 답이 나온다. 4월 8일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이 영화는 사천왕을 모시는 8명의 신 중 하나인 '야차'를 제목으로 내세운다.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귀신'이지만 '부처님을 수호'하게 되는 야차가 가지는 양면성을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강인(설경구 분)와 '블랙팀'을 통해 한껏 구현해 낸다.

4년 전 홍콩의 뒷골목, 차에 다가가 무언가를 건네는 인물, 그런데 갑자기 지프 한 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그 차를 들이받는다. 한바퀴를 돌아 나뒹구는 차, 보통 액션 장면에서의 호흡보다 한 번 더 나아가며 이 영화의 정체성을 각인한다. 그리고 들이받는 지프에서 유유히 등장하는 지강인, 거래를 하려했던 인물은 동료들을 배신한 지강인과 한 팀이었던 인물이다. 그에게 총을 들이댄 지강인은 배후를 묻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잠시 뒤 하늘을 울리는 총소리, 배신자에게는 '자비'없는 처단만이! 이렇게 '야차같은' 장르의 이름표를 내보이며 영화는 시작된다. 

 

 

선양을 배경으로 한 무한액션 
'한국' 사회는 총기 소지가 불법이다. 물론 그럼에도 요즘 장르물을 중심으로 '총기'의 등장이 빈번해지고는 있다. 하지만 총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구구한 장치들이 필요하다. 액션 장르에서 황야의 결투처럼 총기를 들고 끝장을 보는 서사에 대한 갈증, 그 갈증을 풀어내기 위해 <야차>는  '선양'이라는 지역적 장치를 선택했다. 

선양, 한때 만주족의 수도였던 도시, 하지만 이제 중국에서 가장 큰 공업 도시가 된 이곳을 영화는 동북아 각 나라 스파이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도시로 설정한다.  번성한 도시답게 밤에 더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 하지만 조금만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잘해줄게'를 연발하며 데려가 신장, 간, 쓸개 등을 해체해 버리는 '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한 도시이다. 또한 마약 등의 사건에 현장범은 그곳에서 '사살'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대낮에 북한로동당에서 외화벌이를 총괄하던 문병욱이란 인물을 두고 북한 스파이들과 검은 복면을 한 사람들이 총격전을 벌인다.

그런데 여기에 지강인을 팀장으로 한 국정원도 연루되어 있다. 애초에 블랙 팀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한 문병욱, 하지만 그 사건으로 문병욱의 행방은 오리무중, 지강인은 그를 되찾기 위해 D7라 불리는 일본인 스파이 오자와(이케우치 히로유키 분)의 아지트를 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렇게 문병욱이라는 인물 찾기라는 사건을 씨줄로 선양을 배경으로 스파이들의 살벌한 쟁투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걸 통해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의를 묻다 
정의에 대한 질문, 그 시작은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강직한 검사 한동훈이 등장한다. 가진 자들의 부도덕과 불공정은 더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만든다는 신념을 가진 한동훈 검사는 재벌 총수를 구속시키려 하지만 절차 상의 문제로 인해 스스로 물러선다. 수사관들이 무단으로 총수의 사무실에 들어갔다는 그 이유만으로 다된 밥에 스스로 코를 빠뜨리는 고지식함, 이렇게 영화는 한동훈이 내세운 원칙적인 정의의 한계를 먼저 내보인다. 

한동훈은 좌천되고 다시 돌아가 수사를 마무리하고 싶은 그의 열망이 스스로 선양이라는 도시로를 택하게 만든다. 그저 선양 국정원 팀의 불투명한 보고를 감찰하면 된다는 명목이었는데 도착한 그를 맞이한 건 블랙 팀의 총격전이다. 

영화는 날 것의 액션씬에 더해, 지강인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의와 한동훈의 원칙적 정의를 대비시키며 서사적 흥미를 자아낸다.  적에 대해 가차없는 작전, 거기에 더해 배신자에 대해서도 추호의 용서도 없으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의문의 여성에게 고문을 마다하지 않는 방식이 사사건건 한동훈으로 하여금 반발하게 만든다. 거기에 더해 첫 장면, 지강인이 같은 팀원이었던 인물을 '처단'하게 만들었던 '두더지'라는 암약하는 이중 스파이의 존재가 그 갈등의 고뇌를 깊게 만든다.

물과 불처럼 결코 섞일 수 없을 것같은 지강인과 한동훈, 그리고 블랙팀을 위기에 빠뜨리게 되는 한동훈에 대해 반발하는 블랙팀원들과의 신념과 인간적인 갈등을 영화는 주된 관전 포인트로 삼는다. <오징어 게임>에서 멀쩡한 대기업 직원에서 결국 자신의 승리를 위해 '협잡꾼'이 되어버린 상우였던 박해수가 이번에는 그 반대로 고지식하고 원칙적이어서 스스로 위기에 빠지게 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고지식해서 종종 웃픈 상황을 자아내는, 하지만 그래서 지강인이란 인물과 '버디(BUDDY)'가 되어가는 캐릭터를 맡아 극중 주된 재미를 이끌어 낸다.

 

 

<야차>는 어떤 면에서는 '정의를 이루어 내는 모든 방법이 정의로워야 한다'며 절차적 정의에 천착했던 , 순수했던 인물 한동훈이 '선양'이라는 공간에서 '정의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한다;며 불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는 블랙팀의 작전을 통해 스스로 '정의'에 대해 물으며 변화해 가는 '성장 서사'이기도 하다.  그 성장의 결과물은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통쾌하게 선사된다. 

물론,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동훈의 맞은 편에 배신을 하는 이는 가차없이 처단해 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지만, 결국 그 밑바당에 팀원들이 목숨을 내어줄 정도의 '의리'를 장착한 지강인이란 중심이 우뚝 서있어야 한다. 설경구란 배우가 오래도록 우리 영화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기점으로 다른 질감과 색채를 가진 배우로 새롭게 다가왔다. <야차>에서 설경구는 <불한당>이래 그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질감의 연기, 그 연장선상에서 '니 껍데기를 벗겨줄게'란 대사에 전혀 이물감을 느끼지 않도록 만드는  '야차'같은 캐릭터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낸다. 

제작진이 해보고 싶었다는 총성이 마구 울리며, 거침없이 상대방의 머리를 겨누는 선양이라는 스파이들이 번성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한 액션, 거기에 '정의'의 방식을 둘러싼 주연들의 갈등과 화해라는 서사적 재미를 통해 <야차>는 흥미로운 장르물이 된다. 물론, 눈밝은 관객이라면 예측 가능한 악역들, 굳이 <야차>만이 아니라 액션 장르의 절정에서 드러나는 보여주기 식 선악의 대결 등이 입맛을 다시게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도시에서 한동훈을 소환하는 지강인의 호출에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by meditator 2022. 4. 9. 14:10

최근 tvn의 드라마 <나빌레라>가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에 눈을 뜨고 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주인공 심덕출(박인환 분)씨의 모습이 세대불문 삶과 행복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 만이 아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듯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삶의 기회와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이듦은 '제한',이나 '한계', 혹은 '후퇴'로 받아들여지기가 십상이다. 그러기에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를 해보겠다는 <나빌레라>의 심덕출 씨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난 2016년 개봉한 후시하라 켄시 감독의 <인생 후루츠>는 어떨까? 발레에 도전하는 심덕출 씨와는 또 다른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두 부부가 우리에게 '노년'을 살아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실패한 젊은 건축가의 선택
젊은 건축가가 있었다. 일본 주택공단의 에이스였던 쓰바타 슈이치가 그 주인공이다.  해발 0m의 마을이 태풍으로 인해 수몰되자 정부에서는 고지대에 뉴타운을 만들고자 했다. 뉴타운 건축 책임을 맡게된 슈이치는 산이었던 그곳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숲이 산으로 들어올 수 있는 도시를 계획했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밀한 아파트들로 가득채워진 뉴타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슈이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300평의 땅을 샀다. 그로부터 50여 년, 과일 50종, 채소 70종을 키우며 키우며 그곳을 '자연'으로 꾸렸다. 그리고 뉴타운 단지 뒤의 민둥산을 도토리 나무로 무성하게 가꿨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작고한 일본의 배우 키키 키린이 나레이션한 영화는 할머니의 흙 예찬론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농작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흙이 좋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지론은 아파트 단지 속 뉴타운에서 숲을 만들기 위해 지난 50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건축론에 닿는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영화에 소개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정의다. 할아버지에게 '보석상자'로서의 집은 '자연'친화적인 존재였다. 그의 꿈은 '개발'에 밀려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땅을 샀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50년 동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도, 내 생각이 이러니 세상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접어둔 채 스스로 자신이 그러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90세가 되었다. 

영화 속 할아버지는 말한다. 건축가들은 집을 지어놓고 막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살지도 않을 집, 이라는 할아버지의 질타 속에 '문명'이란 이름으로 지구를 오염시킨 숱한 '개발'의 잔해들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할아버지 슈이치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스스로 어떤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가를, 어떤 공간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 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보여주었다. 그 결과물이 <인생 후르츠> 속에 등장하는 수려한 나무들로 둘러싸여있고, 일년 내내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확물들을 공급해주는 농장을 품은, 사시사철 빛이 들어오는 슈이치 부부의 집이다. 

건축가 슈이치 씨가 평생 자신이 꿈꿔온 건축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자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 츠바타 히데코가 있어서이다. 월급이 4만엔이던 시절에 70만엔짜리 요트를 사겠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다던 아내 히데코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그녀의 나이 87세, 그 세대의 여성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남편'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히데코의 삶이 그저 전근대적 여성의 숙명적 삶이라고만 여겨지지 않는다. 매 끼니 밥을 먹는 남편을 위해 <인생 후루츠>가 2018년 서울 국제 음식 영화제에 초빙을 받을 정도로 죽순 덮밥에서 부터 생딸기 케잌, 푸딩에 이르기까지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건 '의무'의 경지를 넘어선다. 남편의 뜻을 따르는 거, 남편이 하고자 하는 바를 평생 따라왔다는 그녀는 그런 자신의 '의지'가 결국은 돌고돌아 좋은 일로 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시대에 '행복'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룬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살아보면 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시간보다 이루지 못해 안달하게 만드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삶이 주는 케잌은 달콤하지만, 그 케잌은 생각만큼 넉넉하게 여유롭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거나 때론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래 살수록 인생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인생은 후루츠>는 두 노부부가를 통해 현명하게 나이들어가는 삶의 방식, 아니 나이를 차치하고 지혜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남편인 슈이치는 건축가로서 자신의 뜻을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관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좌절'하여 뜻을 꺾는 대신, 그 이후 50년에 걸쳐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뜻을 가지고 자신의 집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고자 하였다. 자신과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면 도시 전체가 다시 '자연'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 히데코 역시 자신의 뜻보다는 늘 자신의 삶에 '가족'들부터 끌어들이는 남편으로 인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남편의 주도적인 삶의 방식에서 그녀는 가족에게 좋은 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일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지만 자신은 단촐한 토스트 한 조작으로 한 끼를 대신하는 '융통성'도 놓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해온 부부, 하지만 장어 덮밥을 먹고 잠든 남편 슈이치는 다음 날 눈을 뜨지 않았다. 아내는 담담하게 남편을 보내려고 한다. 대신 오래도록 남편의 영정 앞에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마련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90살이던 남편처럼 90살이 된 아내, 지난 65년 남편과 함께 했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늘 남편의 뜻을 따라 살던 아내에게 지금의 삶은 때로는 덧없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다시 의연하게 살아간다. 슈이치는 갔지만 그의 생각은 자연친화적인 병원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살아왔듯 삶은 그런 것이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 그건 영화 속에 등장한 대사처럼 '꾸준히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서 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by meditator 2021. 4. 8. 23:56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처음 만난 건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였다. 국사 교과서 실학자를 소개하는 부분에 정약전이 물고기 백과 사전과 같은 '자산어보'를 썼다고 하였을 때 시쳇말로 좀 '없어보였다.' 동생인 정약용이 유배 기간 동안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등 정치, 경제 다방 면에 걸쳐 일가를 이루는 동안 겨우 물고기 책이라니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정약전에 대해 내 관점을 달리해주는 책을 만난 건 2006년이었다. 아이세움에서 '나의 고전 읽기' 시리즈 첫 권으로 나온 손택수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한낱 물고기 책이나 쓴 정약전에 대한 내 '색안경'을 벗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음에도 '공도'정책이라는 무지몽매한 정책으로 오늘날 '독도' 문제의 빌미를 자초한 것처럼 '유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나라였다. 그런 세상에서 제 아무리 유배을 갔다해도 '선비'가 백성의 터전인 바다와 그 바다의 산물에 대한 책을 펴냈다는 건 정약전의 성취와는 또 다른 '실학'의 본류요,  어찌보면 '혁명적인 도전'이었다는 걸 <바다를 품은 책>은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십 여년이 흘러 이준익 감독을 빌어 정약전과 그의 자산어보를 다시 만났다. 무지한 해양정책을 폈던 책상물림의 나라 조선에 분노했던 그 시절로부터 십 수년이 흘러 다시 만난 정약전과 자산어보는 그 흐른 세월만큼이나 묵직하고 깊게 다가온다. 

 

 

약전, 흑산으로 가다 
영화의 첫 장면은 '관직'에 나선 약전이 정조 임금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관직에 나서는 대신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양 학문과 과학 기술에 천착했던 정약전이 '관직'으로 나선 결의를 유머러스하게하게 밝히는 장면에서 정조 임금은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정약전에 대한 믿음을 밝힌다. 그리고 '버티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정조 임금의 당부는 그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버린다. 서양 학문과 함께 수용한 '서학'이 정약전 형제의 목을 죈다. 약전이 스스로 배교자를 자처하며 애써 지키려 했지만 약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파워엘리트이자 학자였던 동생 약용과 약전은 조선 땅끝과 바다 건너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1790년 문과에 급제, 전적,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1798년 정조의 명을 받아 책을 편찬하는 등 뜻을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정조의 죽음과 함께 1801년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희망은 꺾였고, 홀로 바다 건너 흑산도로 향하게 되었다. 날개가 꺽이다 못해 뜯겨버린 처지인 셈이다. '어려서는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이었고 커서는 사나운 말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듯했다'는 표현처럼 호방했다는 인물 약전, 설경구가 연기한 약전은 눈물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동생 약용(류승룡 분) 앞에서 의연히 흑산도로 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늘 밤은 으르렁대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잠자는 구름 아래 어등(魚燈)이 빛을 뿜는다.
공활한 하늘이 훤히 펼쳐 있고
다닥다닥 별 떼가 반짝이는데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꺼졌다가 켜지며
반공중에 까닭 없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잠 못 들고 몇 개 섬을 돌고 났는지
왁자하게 흩어지는 새벽이 됐다.


제 아무리 동생 앞에서 의연하게 길을 떠났지만 겨우 300 명 남짓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흑산도의 유배 생활이 쉬웠을까. 그의 시, 어화(漁火)가 잠못들고 섬을 서성이는 선비 정약전의 맘을 드러내준다. 

 

 

실학자 약전, 자산어보를 쓰다
영화는 그런 복잡한 심경의 선비 정약전을 넘어, 실학자 정약용의 열의를 앞세운다. 나무로 지구의를 만들고,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바늘구멍 사진기를 만들던  실사구시(實事求是)' 학자' 정약전 앞에 흑산은 그저 유배지가 아니었다. 농부가 밭을 갈듯, 어부들의 밭이었던 바다, 그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을 제대로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건 정약전 식의 '목민심서'였던 것이다. 

1816년 죽을 때까지 정약전은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속 약전은 죽음의 순간까지 붓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동생 약용마저 풀려난 유배길, 홀로 남아 끝까지 그가 남기려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날 것의 바다를 정화시킨 흑백의 화면은 오롯이 약전의 성실한 삶을 드러낸 보인다. 방대함과 정밀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산어보, 비늘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껍질이 단단한 개류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잡류 등등 분류에서 부터, 붓으로 찍어 쓸 수 있는 오징어 먹물에서 부터 돗돔에 이르기까지 자산어보의 내용은 그 자체로 실학자 약전의 실천적 삶이다. 

청나라의 문물과 서학을 눈밝게 수용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자, 그 뜻을 정조 치하에서 펼쳐보려했던 실천적 정치가, 하지만 그 꿈은 멸문지화로 끝맸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풍운'의 꿈을 꾸던 이들이라면 여기서 자신의 뜻을 멈추지 않았을까? 더구나 조선 시대에 육지가 아닌 섬은 이 세상이 아닌 곳과 같은 의미이다. 그곳에 홀로 떨어진 학자, 정약전은 하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을 통해 다시금 소환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정약전은 아는 사람만 아는 조선 실학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면서도 쓴 '자산어보'는 그가 죽은 뒤 어느 집 벽지로 붙여져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가 동생 약용이 보낸 제자에 의해 '구제'되었다. 이렇게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작업에 필생을 바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영화 <자산어보>속 바다를 향한 멈추지 않는 정약전의 열정은 그걸 자꾸 짚어보게 만든다. 

거기에 <자산어보> 속 등장했던 섬소년 창대는 영화에서 약전이 흑산에서 애써 키운 '상놈'의 제자로 재현된다. '상놈의 제자'는 상징적이다. 서학쟁이라 약전을 경원시했던 창대에게 약전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었고 기꺼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영화 <일포스티노>의 네루다와 마리오와도 같다. 약용을 찾아간 창대가 약용이 아끼는 제자와 맞서 시 대결을 벌이는 장면, 정약용의 제자조차도 감히 '상놈 주제에'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창대는 통쾌하게 약용 제자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런 창대를 절에서 일하는 '상놈'들이 경이롭게 쳐다본다. 

이 장면은 문자에 관심이 있어,  물고기에 밝아서 창대가 제자가 된 것만이 아니었음을, 진보적 지식인으로 정약전이 가졌던 양반도, 천민도 없는 조선 사회에 대한 그의 세계관이었기에 가능한 '실천'이었음을 영화는 뒤늦게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던 제자 창대는 결국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약전을 떠난다. 그리고 물론 '상놈' 창대의 높은 뜻은 세상과 조우할 수 없었다. 뒤늦게 돌아온 창대가 받아든 약전의 묵은 서신, 학 대신 검은 무명천, 그저 뭇 백성으로 성실하게 살아감의 의미를 집은 약전의 말은 자기 자신에 향하는 결의가 아니었을까.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한때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지만 날개를 꺾이다못해 찢긴 약전, 그를 2021년 이준익 감독이 초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때는 386이었다가, 이제 586이 되어가는 기자의 세대,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표가 불과 20 여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어느덧 퇴색되고, 심지어 불명예의 상징이 될 지로 모를 기로에 놓여있다. 

586으로 상징되는 세대는 그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원심력'의 기세로 살아왔다. 그 겨울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 속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늘 자신을 '발산'하던 세대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 정약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보기를 권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늘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고 실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오던 세대, 어쩌면 이제 세상에, 젊은 세대에 그 몫을 물려주고 물러나야 하는 시간, 그 '퇴장'의 시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기에 정치적 무대에서 강제적으로 '퇴장' 당한 약전의 삶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불과 10여 년의 관직 생활, 뜻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바다 건너로 유폐당한 약전은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상놈' 창대를 학문적 벗삼아 <자산어보>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음으로써 약전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기억된다. 정조 연간의 관리 약전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자산어보는 오래도록 남았다. 

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김훈은 정약전을 그린 소설<흑산>에서 이렇게 푼다. 흑산을 '자산'의 스토리로 다시 쓰는 삶,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by meditator 2021. 4. 5. 23:06

 

'트라우마'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다큐 영화 <당신의 사월>은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의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등 총 476명을 태우고 인천 항을 떠난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침몰의 순간부터 벌어졌던 많은 일들은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 배의 침몰을 통해 우리는 시스템, 나아가 사회, 결국 '국가'의 침몰을 확인했고 결국 그 책임을 당대의 대통령에게 물었다. 세월호의 침몰은 우리 사회 전체의 상흔이었다.

그리고 7년, 우리는 그 해 4월로 부터 어디쯤 와있을까? 타인의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도 겪는다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되었을까? <당신의 사월>은 유가족이 아닌 그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드리워진 세월호의 그림자를 살펴본다.   

 



그 해 4월, 다른 곳에서 

서촌에서 커피 공방을 10년째 하고 있는 박철우 씨는 지난 촛불 집회 때 세월호 유가족들을 도와 '심야 식당'을 했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께 밥 한끼 대접하고 싶다는 세월호 유가족의 말씀에 그럼 함께 하자며 나섰던 것이다. 평범했던 커피 가게 사장님이던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통의 전화였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동네 박사장의 전화였다. 여의도에서 농성을 하던 유가족들이 밤을 걸어 청와대로 향하니 뜨거운 물이라도 준비해달라는 전화 한 통에 그는 유가족을 맞이했다.

기사로만 접하던 세월호, 유가족을 볼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직도 추운 봄날의 새벽, 담요을 둘러쓴 채 묵묵히 걸어오는 가족들을 보며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아서는 안되겠다는 심정이 앞섰다. 차마 따뜻한 물 한 잔 마시라고 말조차 걸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박철우 씨의 4월은 첫 걸음을 뗐다.    진도의 어부였던 이억년 씨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좌초 현장으로 나갔다. 거의 5~10 미터 근처까지 갔을 때 왔다갔다 하는 '물체'를 목격했다. 미역 양식줄에 꼬여 올라온 하얀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부의 4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조수진 씨는 옆 자리 선생님이 보여주는 컴퓨터 화면에서 세월호를 만났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기에 남의 일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구하겠지 했었다. 계속 속보가 이어지는 상황에 본의 아니게 b급 호러 무비의 관람객이 된 듯한 무기력감에 빠졌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인천항이 가까운 학교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 뱃고동 소리에 자꾸만 세월호가 오버랩됐다. 교실이 마치 배같았다.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권수영, 윤인아 선생님은 자신이 살아오지 못할 꺼라는 걸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교사의 책임이 무겁게 다가왔다. 부모님 얼굴이 스쳐지나갔을 텐데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촛불 집회에서 전교조 대표로 조수진 선생님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집안 곳곳에 노란 리본을 비롯하여 세월호와 관련된 기억들을 붙여놓았다.  '잊지않겠습니다'라는 취지로 아이들과 함께 추모 수업을 하고 모임을 가진다. 선생님에게 세월호는 현재형이다. 자발적으로 추모 모임을 이끌어 가는 아이들을 보며 '희망의 씨앗'을 느꼈다. 버티니 '희망'이 보였다.

인권운동가이던 정주연 씨는 진도 앞바다로 달려갔었다. 그저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주연 씨의 4월은 시작되었다. 그저 곁에서 유가족들의 슬픔을 온전히 들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곁에서 지켜 본 유가족의 무게는 무거웠고 슬픔은 깊었다.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을 피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꺼내어 보이며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다시 예전 으로 돌아가는 엄마들, 하지만 관광객이라도 오면 고개를 숙였다. 사회가 짊어지우는 피해자다움, 유가족다움이 가족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유가족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는 잠수사들, 하지만 마치 delete 버튼을 누르듯 그들을 지워버린듯하는 사회와 국가, 여전히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는데 '지겹다'고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악몽을 꾸어가면서도 화가인 정수진 씨 남편은 잠수사들의 모습을 남기려고 애쓴다. 정주연 씨네 방식의 '잊지않겠습니다'이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당시 고 3이었던 이옥영 씨는 '수능'이라는 현실에 가급적 세월호와 관련된 기사를 접하지 않으려 했었다. 수능을 마치고 세월호 기억 교실 대신 만들어진 기억저장소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이옥영 씨의 미래는 달라졌다.  시간과 함께 세상에서 '유실'되어가는 세월호의 흔적들을 보며 '기록관리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진도 앞바다를 바라보던 돔마저 철거되었지만 어부 이억년 씨의 집 안에는 여전히 돔이 한 채 남아있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 진도 앞 바다에 온 세월호 부모님들을 이억년 씨는 그곳에서 머무르게 한다. 영화 내내 카메라로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던 문지성 학생의 아버님 문종택 씨는 딸이 있는 그 바다가 가장 편하다고 하신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자신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억년  씨와 모처럼 웃음을 나눈다.  

영화는 세월호로 인해 삶의 시간이 변화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영화가 끝나고  '도움을 주신 분들'의 마지막에 '그리고 당신'이라는 자막처럼, 또 다른 우리들일 수도 있다. 세월호가 좌초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더 이상 세상 밖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우리는 모두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를 그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게 만들었다.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은 아직도 저마다의 사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노란 리본은 현재형이다. 우리의 노란 리본은 어디쯤 있을까.

시간이 흘렀다. <트라우마>의 주디스 허먼은 '회복에는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by meditator 2021. 4. 5. 1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