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에게 셜록만큼 똑똑한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가정으로 <에놀라 홈즈>는 시작된다. 그런데 왜 하필 여동생이어야 할까? 이건 영국을 중심으로 그간 백인 남성 중심의 고전들을 성과 인종적 평등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문화적 시도의 일환이다.

 

 

당대 최고의 탐정 셜록, 그를 키운 어머니는 아직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선각자로서 참정권 운동에 나선 패미니스트 유도리아(헬레나 본햄 카터 분)였다. 일찌기 오빠들이 집을 떠나고 어머니와 남겨진 막내 여동생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 분), 어머니는 딸에게 격투기를 가르치는 등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가르쳤다. <에놀라 홈즈 1> 은 에놀라가 전적으로 의지하던 진보적인 어머니가 사라지고 그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탐정 에놀라의 서막을 연다. 

이제 <에놀라 홈즈 2>는 어머니를 찾는 과정에서 탐정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에놀라 홈즈가 본격적으로 '탐정'일에 나서게 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아직 여성에게 투표권도 허용되지 않던 빅토리아 시대 그런 시대에 여성이 탐정 사무소 문을 열었다고 '문전성시'를 이루겠나. 탐정 사무소라고 들어와 여성이 탐정이라니 질색을 하고 나가는 사람들, 에놀라를 찾아와 오빠 셜록에게 부탁 좀 해달라는 사람들, 이대로 문을 닫아야 하는가 싶은데 소녀 베시가 탐정 에볼라를 찾는다. 성냥 공장에 다니는 자기 언니를 찾아달라는 사건이었다. 

언니 세라는 베시와 함께 성냥 공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기꺼이 맡은 에놀라는 수사를 위해 성냥 공장 직공으로 들어간다. 모든 직공이 다 여성인 공장,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것같은 미성년 베시에서 부터 아줌마들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나무판자를 쪼개 여기에 인을 입혀 성냥을 만든다. 베시와 세라가 함께 살던 집을 조사하던 중 성냥 공장과 세라의 실종에 일련의 관계가 있었다는 걸 눈치 챈 에놀라는 공장 사무실에 잠입 장부 중 일부분이 뜯겨져 나갔음을 알아낸다. 장부를 뜯어낸 건 세라였을까? 

 

 

성냥 공장으로 간 에놀라 
<에볼라 홈즈 2>에서 실종된 여성은 세라 채프먼, 그녀는 1088년 매치걸스 스트라이크((Match Girls’ Strike 성냥 공장 여성 노동자 파업)를 주도한 실존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처음 에볼라가 공장에 간 날, 공장 입구에서 남자 직원이 직원들의 얼굴을 살피며 이상 증상이 있는 사람들을 돌려보낸다. '리프스'라면서. 전염병이라며 돌려보낸 이 증상은 사실, 공장 측이 원료를 아끼기 위해 독성이 강한 백린을 성냥 원료로 쓰면서 '아래턱 부분에서 괴사가 일어나며 턱이 주저앉는 인턱(phossy jaw)증상'이었다. 

애니 베전트라는 언론인이 '브라이언트 앤트 메이' 공장에서 벌어지는 여성 노동자의 인중독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폭로한다. 애니 베전트에 대해 공장은 소송 등을 벌이며 대응했지만, '우리가 무엇을 견뎌야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당신이 말한 것은 진실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1400 여 명의 브라이언트 앤트 메이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선다. 이때 이 파업을 주도한 여성이 세라 채프먼이다. 

<에볼라 홈즈 2>는 이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적 파업을 극중 주요 사건으로 만든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픽션'으로서의 재미를 더한다. 즉, 알고보니 실종된 세라 채프먼은 연인인 공장주 아들 윌리엄과 함께 공장주의 부도덕한 인 사용 사실을 폭로하려 했다는 식이다. 또한 세라는 동료 메이와 함께 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그 댄서로써의 능력을 살려 시슬리라는 여인으로 변장, 이제는 진보적인 의원이 된 에볼라의 남자 친구 듀크스베리(루이스 파트리지 분)에게 접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세라의 연인 윌리엄도, 동지였던 메이도 모두 목숨을 잃고 에놀라는 탐정으로 보다 본격적으로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헨리 카빌이 분한 셜록, <에볼라 홈즈 1>에서는 배우의 존재감에 비해 비중이 적었던 것과 달리, <에볼라 홈즈 2>에서는 에볼라의 성냥 공장 실종 사건과 셜록의 국고 분실 사건이 맞물린다. 두 사건이 만나게 되는 곳, 그곳에서 모든 일의 배후에 드디어 실종 사건의 지도로 '만나서 반가워요 홈즈'라는 기발한 인사를 남기는 '모리아티'가 등장한다. 

 

 

여성 탐정 셜록 시리즈답게 셜록에게 도전장을 내민 모리아티 역시 미라 트로이(그녀의 이름을 재조합하면 모리아티가 된다. 샤론 던컨 브르스터 분)라는 중년의 흑인 여성이다. 에놀라가 가는 곳마다 등장하던 이 흑인 여성,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흑인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그래서 존중받지 못한 흑인이자, 여성이 백인 남성 셜록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를 농락하는 가장 지능적인 악인이라는 설정은 기발함을 넘어 상징적이다. 

또한 첫 번째 시리즈에서 폭약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무력 사용을 마다치 않던 전투적 패미니스트 어머니 유도리아와 그녀의 동지 이지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에놀라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셜록은 자신의 힘으로 동생을 빼낼 수 없게 되자,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한다. 어머니와 이지스는 자신들이 만든 폭탄을 던지며 에볼라를 탈옥시킨다. 

돌아온 에놀라, 그녀는 오빠 셜록과 남자 친구 듀크스베리와 함께 모리아티의 하수인 그레인 경감 등을 무찌르지만 증거가 되는 문서가 불태워지면서 인중독 사실이 덮힐 위기에 놓이게 된다. 문서가 없으면 안될까? 가장 강력한 증거들, 에놀라와 세라는 동료들이 일하는 공장으로 달려가 여공들과 함께 거리로 나선다. 바로 영화로 온 매치걸스 파업이다. 

by meditator 2022. 11. 14. 22:14

지난 5월 개봉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새롭지 않았다.  이미  2018년 소니 픽처스가 개봉한 에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스페인 히스패닉 혼혈 소년 마일스 모랄레스를 주인공으로 '스파이더햄',  '스파이더 느와르' 등등 평행 세계의 '스파이더맨'들을 소환해 지구를 비롯한 '멀티버스'의 위기를 구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신선했던 설정, 하지만 '멀티버스' 속 히어로의 활약은 곧 <스파이더 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이르면 비록 원작의 설정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어쩐지 히어로물의 생명 연장을 위한 '멀티버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올해 아카데미상에서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라는 장황한 제목을 가진 영화가 '멀티버스'를 배경으로 한다 했을 때 기대치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여전히 서사적 콘텐츠로서 '멀티버스'의 가능성과 확장성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통해 확인했다. 그리고그것이 가능한 건 무엇보다 '모성'과 '가족'이라는 영화 자체가 가진 서사적 설득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영화의 시작은 영수증 더미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중년의 여인, 양자경, 아니 에블린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세대에게는 <예스 마담> 시리즈로, 그리고 <와호장룡>으로 익숙한 배우, 하지만 어느덧 그녀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시어머니 역할을 맡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 양자경이 이제는 미국으로 이민가 세탁소를 운영하며 찌들어 사는 여성이 되어 등장한다. 

위기의 세탁소, 위기의 에블린
하지만 왜 양자경이겠는가. 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한번 그들이 액션씬에 있어 일가견이 있음을 증명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와 <어벤져스> 시리즈의 루소 형제(앤서니& 조)이다. 그들은 미국살이 수십년에도 여전히 미국말이 서툴러 세탁소마저 압류 위기를 맞이한 에블린이란 인물을 매개로, 그녀의 평행우주 속 또 다른 에블린들을 소환하여 양자경이란 배우가 가진 무공의 연기력을 아낌없이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모처런 <예스 마담>이나 <와호장룡> 시절의 그녀를 보는 듯 예리한 그녀의 손매와 날렵한 발품새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반갑다.

또한 역시나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스위스 아미맨>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다니엘 관과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도 마이너하면서도 독특한, 하지만 결국은 따스한 감성의 코미디를 현실적인 중국인 이민 가정사를 배경으로 풀어낸다.  

 

 

영화는 제목의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각각 세 파트 이야기를 이끈다.  우선 everything을 통해 에블린이란 인물이 가진 모든 것, 하지만 그리하여 그녀가 그 나이가 되도록 가지지 못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에블린은 고국에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에드워드(키 호이 콴 분)을 따라 이역만리 미국으로 온다. 영화 속 '멀티버스'의 혼돈 속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 에블린의 기억을 통해 소환되듯, 그저 '사랑'만 믿고 온 미국에서의 생활은 낡고 먼지 투성이인 세탁소의 문을 열 때만 해도 '이 세탁기가 모두 우리꺼야'하면서 기뻐하던 부부는 이제 '이혼 신청서'를 들이밀어도 시선조차 마주치기 힘든 부부가 되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외면했던 아버지는 이제 늙고 병들어 그녀에게로 왔다. 그런 아버지에게 그녀는 번듯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 새해를 맞이하며 벌이는 파티에서 아버지를 환영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 무엇보다 그녀의 단 하나뿐인 딸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그리고 동성의 연인을 할아버지 앞에서 '아주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는 에블린에게 '절연'은 선포한다. 

언어가 능숙한 딸이 도와주기로 한 세무소 행, 당연히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런데 남편이 이상하다.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어 이혼 서류를 들이밀어야 할 만큼 소심한 남편이 그녀에게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인다.  중년이 되어도 <구니스>와 <인디애나 존스; 미궁의 사원> 속 그 미소년의 얼굴을 지닌 키 호이 콴이 분한 에드워드가 펄펄 난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한다. 멀티버스 속 에블린의 남편 에드워드라고. 그리고 이제 에블린에게 '붕괴된 멀티버스'를 구할 임무를 부여한다. 

everywhere, 당장 오늘 안에 세금영수증을 제대로 정리해 내야하는데, 멀티버스에서 온 에드워드는 에블린을 자꾸 세무소 속 청소 정리실 안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인다.

 

 

왜 에블린이어야 할까? 
왜 에블린이어야 할까? 이게 바로 이 영화적 서사의 이른바 '킥'이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나온 꿈의 세상, 하지만 에블린은 이제 파산 위기에, 번아웃 위기에 놓인 중년 여성일 뿐이다. 반면, 또 다른 멀티버스 속 에블린들은 전혀 다르다. ,<쿵푸 팬더>처럼 좋은 스승을 만나 쿵푸의 대가가 되어 있기도 하고, 에드워드를 따라가지 않는 대신 당대의 스타가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에블린을 찾아온 다른 세상의 에드워드는 말한다. 다른 멀티버스 속 에블린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는 이유가 바로 여기 에블린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해서라고. 마치 시이소 게임이라도 되는 듯이, 에블린의 불행한 삶이,  다른 에브린들의 행복이 되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에블린을 찾아온 에드워드 세상에 '조부투파카'가 웜홀 같은 걸 만들어 모든 멀티버스를 다 빨아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부투파카를 막을 사람은 바로 에블린 밖에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조부투파카는 '왜곡되어버린 딸'  조이(스테파니 수 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민 세대 가족이 가지는 세대 간 소통과 세계관의 문제를 멀티버스와 악의 신이라는 설정으로 풀어낸다. 괴물이 되어 모든 것 집어삼키려는 딸, 그런데 딸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다신 보지 말자며 떠나려는 딸에게 엄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내뱉고 만다. '너 살쪘다'고. 이보다 더 모녀 관계의 애증을 대변할 대사가 있을까? 

아버지 앞에 여전히 인정받고 싶은 딸, 그래서 아직도 그날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랑하는 이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림자'로 드리우고 있는 여성, '세탁기가 모두 우리 꺼야'라던 희망이 무색하게 가압류될 처지의 오래된 세탁소 카운터를 지키며 늙어가는 엄마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딸에게 퍼붓고 딸은 그 엄마의 열정을 감당하지 못해 '왜곡'되어 버리고 마는 질곡의 모며 관계, 결국 에블린 인생을 짖누르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멀티버스 속 '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에블린은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는 독특한, 하지만 아름다운 두 장면을 통해 어수선한 멀티버스 소동을 감동으로 이끈다. 기괴한 소시지 손가락을 지닌 멀티버스 속 세무소 직원(제이미 리 커티스 분)과 만난 에블린, 하지만 그들은 덜렁거리는 소시지가 무색하게 기꺼이 사랑을 나눈다. '이 아니면 잇몸'이듯이,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손가락이 소시지인게 무슨 문제겠냐는 영화는, 그래서 산 정상 위에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가 되어 버린 조이, 혹은 조부투파키와 에블린에게로 이끈다.

과연, 움직일 수 없는 돌멩이가 되어버린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 선택의 지렛대는 세상 무능한 남편이라는 에드워드가 세탁물 보따리에 달아놓은 장난감 눈알이다. 삶의 붕괴, 그리고 가족의 붕괴를 막는 무기는 사실 아주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것들이다. 그걸 알아보는 행운이 늘 도래하는 건 아니니 '멀티버스'가 붕괴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다행히도 용감한 엄마 에블린은 더 늦기 전에 그걸 알아보는 '미덕'을 지녔다. 알고보니 그녀는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by meditator 2022. 10. 15. 15:04

<별바라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그램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별, 스타, 그들을 '바라보는' 팬들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돌과 그 팬덤의 존재가 명실상부해지던 2014년, MBC예능으로 등장한 이 예능 프로그램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소녀, 오세연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소녀는 이 한복을 프로그램에만 입고 나온 게 아니었다. 그녀의 '오빠'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기 위해 오빠를 만나러 달려간 그 어느 곳이라도 한복을 입었단다. 10대 소녀이던 오세연에게 부끄러움을 저만치 물리치게 만들고 한복을 입힌 그 '오빠', 그는 현재 성범죄로 수감 중인 '정준영'이다. 

 

 

슈퍼 주니어, 동방신기 혹은 JYJ, 빅뱅, 그리고 슈스케는 대한민국의 가요사, 그리고 연예계에서 한 획을 그은 그룹이나 프로그램이다. 아마도 2000년대 이래 많은 이들이 이들 그룹이나, 이 프로그램 출신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걸 넘어, 이른바 '덕질'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룹 출신인 강인, 박유천, 승리, 정준영은 어떨까? 아마도 이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활동 당시 다들 그룹이나 프로그램에서 '얼굴' 격이던 이들이기에 더욱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팬들이 그들에게 '사랑'으로 달아준 날개를 이들은 스스로 꺽어 버렸다. 이들은 모두 범죄, 그 중에서도 '성'과 관련된 범죄와 연루되어 죄값을 치르고 있거나, 그로 인해 연예계 활동을 더는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나의 수많은 처음에는 오빠가 있었다. 앨범도 처음 사보고, 서울도 처음 가보고, 기차도 처음 타보고, 외박도 처음 해봤는데....... 그렇다고 법원까지 처음일 필요는 없잖아.'

 
내 덕질은 잘못된 것인가? 
정준영, 그 '오빠' 때문에 오래도록 행복하게 했던 덕질이 본의 아니게 '종료'된 오 감독, 감독은 혼란스런 감정에 빠져 헤매인다. 이제 더는 덕질을 하면 안되는데, 그런데 그 오빠가 재판을 받는 법원까지 간다. 그리고 더는 '덕질'을 할 수 없는 자신과 달리, 여전히 '오빠'를 응원하겠다는 팬들을 보게 된다. 한때 한복을 차려입고 오빠를 만나러 달려가고, 오빠의 응원(?)에 힘입어 서울에 있는 대학, 그것도 영화과에 진학한 자신이 '성덕'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어디 가서 정준영 팬이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처지가 되었다. 과연 나의 '덕질'은 잘못된 것인가? '오빠'가 범죄자가 되었는데 여전히 오빠를 믿는다는 팬들은, 아니 그 반대로 가차없이 욕을 하며 떠난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 걸까? 영화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팬덤화 현상, 그 시작은 10대 소년들의 '별바라기'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영화에서도 등장하지만 감옥에 간 전직 대통령을 여전히 '사모'해서 거리에 모여든 나이든 세대, 하지만 어디 그뿐일까, 지난 정권 내내 '정치의 팬덤화 현상'을 우려한 목소리들이 등장했고, 이른바 '확증 편향'이라고 하여 내가 믿고 좋아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넘어 '인간적 믿음'으로 이어진 집단적 움직임이 우리 사회를 휩쓸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좋아했던 스타의 몰락을 계기로 자신의 '덕질'을 냉정하게 돌아보고자 한 영화 <성덕>은 그저 한 젊은이의 반성을 넘어 시대적 현상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본의 아니게 덕질을 마감하게 된 오감독이 자신의 덕질을 돌아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덕질은 스타에 대한 한량없는 지원으로 이어진다. '그'를 사랑했던 시간만큼이나 쌓인 그의 '앨범'과 굿즈들, 그것들을 돌아보다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덧 자신이 사랑했던 그를 '옹호'하고 있는 자신에 자기 반성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또 다른 상처입은 팬들을 찾아나선다. 

오감독과 같은 팬들은 어디에나 있다. 굳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더라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도움을 청했던 조감독도 알고보니 승리의 팬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를 통한 동질의 경험을 추억하고, 애도하며, 그리고 자신들을 되돌아 본다. 

감독의 여정은, 승리, 강인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팬들의 '지난' 팬들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말할 수 없다며 막걸리 칵테일을 만들다 난장판을 만들어 버린 또 다른 팬과의 만남, 그 '난장'은 곧 '아비를 아비라 말할 수 없는 홍길동'처럼 더는 '사랑'을 입 밖에 내놓을 수 조차 없는 그들의 모습이 된다. 

 

 
덕질, 그 애증의 시간을 돌아보다 
자신들의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노래방에 가서 절규하는 이들, 하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 부른 노래를 부른 이가 자신들의 '별'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오감독을 비롯하여, 영화 속 등장한 팬들은 대부분 그녀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이 응원했던 오빠가, 기꺼이 자신들의 응원에 힘입어 감사하다는 오빠가, 자신들이 쓴 돈으로 승승장구했던 오빠가, 자신들과 같은 젊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를 넘어 범죄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받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오빠에게 자신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기에 그들은 '변치않는 믿음'으로 더는 오빠를 '응원'하거나 '지지'할 수 없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범죄는 '오빠''가 저질렀는데, 왜 죄책감은 자신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인터뷰한 한 팬처럼 자신이 좋아했던 이들은 모두 '범죄자'가 되는 현실에, 내가 잘못된 건가 했다는 고백처럼 자신들의 믿음이 범죄의 방조가 된 것처럼 혼란스럽다. 

오감독은 '오빠'의 범죄 사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만으로 팬들한데 '몰이'를 당했던 기자를 만나 뒤늦게 사과한다. 그리고 기자는 직업적 사명감으로 했던 일임에도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트라우마를 말한다. 사랑해서 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 덕질이 낳은 우리 사회의 왜곡된 결과들을 감독은 가감없이 드러낸다. 

 

 

오빠를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의 늪에서 헤매이게 되는 시간, 하지만 그건 여전히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시간의 잔재들일 지도 모른다. 비벌리 엔젤의 <자존감없는 사랑에 대하여>는 이런 모습에 대해 자기 중심을 잃은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사랑에 맹목적으로 빠져든 많은 여성들이 사랑하는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 채 자아 상실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자아 상실'과 '혼란'에서 멈추지 않는다. 덕질의 연대기처럼 사람을 잘못보고 덕질한 어머니의 회고담을 인터뷰한 감독, 하지만 어머니는 의연하다. 외려 당당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덕질의 대상을 질타한다. 그리고, 이제야 말한다. 그래도 고마웠다고. 덕질한 딸이. 바쁜 어머니 때문에 홀로 집을 지켜야 했던 딸이 헤드셋줄이 목에 칭칭 감기도록 듣던 오빠의 음악 때문에 그 외로운 시간들을 견뎌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안쓰러웠던 마음을 전한다. 

자신은 '덕질'에 힘을 얻어 공부도 해서 이제 영화를 만드는데 이르렀다고 말하는 감독, 많은 이들을 만나고, 자신의 덕질을 돌아본 감독은 비로소 그 '오빠'와의 사랑에서 자신을 분리해 낸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시간을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어 안는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사랑? 덕질을 향한 긍정적인 태도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연예인을 좋아하던, 혹은 그냥 누군가를 좋아하던 본의 아니게 그 '사랑'으로 부터 '배제'된 이들은 혼돈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 대상과 자신을 늘 동일시하던 이들은 더구나 그 '대상'이 부도덕한 인물이거나, 잘못된 모습을 보였을 때,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마저 느낀다. 영화는 '덕질'이라는 이제는 사회적 현상을 통해 한 개인의 자기 성찰을 솔직하게 담아낸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터부시되어 버린 존재를 사랑했던 자기 고백이 용기있다. 하지만 그런 용기와 성찰이 있기에 오세연은 정준영바라기라는 과거의 족쇄에서 스스로 떨쳐나갈 수 있다. <성덕>은 그런 용감한 기록이다. 


by meditator 2022. 10. 4. 19:00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생소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기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만 해도 '페미니즘'은 매우 '생소한 분야'였었다. '여자'로 대학 생활을 하는 건 '혼돈'이었다. 여전히 '남성'과 '여성'에 대한 '분리'된 의식이 지배적이었던 그 시절,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른 존재'로 대하는 '묘한 태도'들에 나는 '혼란'을 느꼈었다. 이런 나의 갈증을 도서관에서 만난 이러저러한 서적들을 통해 '페미니즘'에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보던 '페미니즘' 관련 서적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버자이너'를 보고, 만져느끼고, 그려보는 과정이었다. 자신의 '몸'이었음에도 '상체'가 아닌 '하체'를 들여다본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행위'였다. '더럽게스리',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했을 때의 반응이었다. 자신의 몸이지만, 차마 볼 수 없는 곳, 더러운 곳이라 여겨지는 그곳,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이브 앤슬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바로 '버자이너'를 알고, 그 욕구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여성 존재를 바로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8월 11일 개봉한 <굿 럭 투유, 리오 그랜드>는 2022년판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아닐까 싶다. 

 

 
60대 낸시의 버킷리스트 
60대의 낸시, 그녀의 삶은 권태롭다. 2년 전 남편과 사별했고, 장성한 아들과 딸이 있지만 그 무엇도 그녀에게 '활기'를 되찾아 주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종교학'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엄격한 '윤리적 규율'을 강조하던 그녀는 자신의 삶도 그렇게 살아왔다. 늘 예측 가능하고, 정해진 원칙에 맞춰 살아오던 그녀가 60대의 어느 날 뜻밖의 도발을 '선택'한다. 바로 돈을 지불하고 '남자 리오(대릴 맥코맥 분)'를 산 것이다. 

영화는 '성적인 퍼스널 서비스'를 매개로 60대 여성의 억눌린 '자아'를 풀어내고자 한다. 동양 고전에서 '이순( 耳順)이라는 표현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편해진', 즉 더는 '욕망할 것이 없어 보이는 연배가 60대이다.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한평생 살아온 '습'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속 '낸시' 역시 마찬가지다. 십대 시절 스쳐지나가듯 자신을 갈망의 상태로 빠뜨렸던 이국의 젊은이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피력하지만, 그도 잠시 눈 앞에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서비스'를 할 준비를 한 남자가 있음에도 좀처럼 옷깃을 놓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선생님인듯 군다. 

60평생 낸시가 지켜온 '습'은 현모양처이자, 엄격한 선생님으로 자신을 버텨온 '페르소나'이다. 그녀가 애써 지켜온 것이지만,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녀의 불만은 그녀 안에 억눌린 '욕망'과 '욕구'를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지 못한 채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로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그 '역할'이 자신이 되어버린 상태, 하지만 이제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 나이의 낸시는 그런 자신이 '답답하기만'하다. 

 

 

낸시로 분한 '엠마 톰슨', 그녀의 또 다른 작품 <칠드런 액트(2017)>가 오버랩 된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엠마 톰슨과 또 다른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그린다.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려 한 '애덤'과의 만난 완벽주의 판사 '핑오나'와, 자기 삶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리오'를 산 낸시는 극과 극이다. 그러나 워커홀릭인 피오나와 은퇴를 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원칙에 옭죄어 있는 낸시는 모두 자신의 '페르소나'가 곧 '자신'이 되어버린 처지이다. 아마도 이건 피오나와 낸시라는 영화 속 캐릭터들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했더니'라며 자신의 감정을 피력하지 못해 답답해 하던  환갑을 앞둔 '선배님'처럼, '페르소나'에 오랜 시간 충실한 삶을 살던 이들이 어느 지점에서 모두 느끼는 갈증이 아닐까. 

 

자신을 마주하다. 
<굿 럭 투우, 리오 그랜드(이하 굿 럭 투유)>는 낸시와 리오의  네 번에 걸친 만남을 내용으로 한다. 소피 하이드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엠마 톰슨'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처럼, 네 번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페르소나'로 부터 한 발자국씩 나와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가는 놀라운 변화를 엠마 톰슨은 설득해 낸다. 

올드 에이지 세대가 확장되고, '골드 에이지' 세대가 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늘어나고 있다. 다이안 키튼, 제인 폰다, 캔디스 버겐 등 쟁쟁한 과거의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2019년작 <북클럽>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매개로 노년의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리고'사랑은 그냥 단어입니다. 누군가가 의미를 부여해 주기까지는요.'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사랑'을 찾는 것으로 그녀들의 갈증과 욕구를 '해소'한다. 

그렇다면 <굿 럭 투유>는 노년 버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일까? 결국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는 자체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영화는 '지적 탐구'라는 수식어처럼 '낸시'라는 '존재'에 보다 천착한다. 조심성넘치고, MBTI 극 J로 보여지는 그녀의 성격은 그래서 답답하지만, 동시에 신중하게 자신에 대한 탐구의 발길을 내딛는다. 

 

 

영화는, 그저 욕망에 불붙은 60대 여성이 아니라, '오르가즘'이라는 갈증을 매개로, 한 여성의 삶을 살펴본다. 자신에게 주어진 '페르소나'의 삶을 충실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무엇을 억누르며 살았는가,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밝혀나간다. 또한 억눌린 욕망을 '분출'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정체성이었던  '페르소나'가 리오와의 관계를 '성숙'하게 풀어가는 현명한 장치가 되어 그녀가 살아온 시간 또한 긍정한다. 

앞서, 자신의 '버자이너'를 마주하는 과정은, 나를 '긍정'하는 과정이다. 내 몸에 걸쳐진 '브래지어'와 '거들'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외면했던 그것을 마주하는 건 있는 그대로 나를 '수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낸시 역시 드디어 자신의 날 것 그대로의 몸을 마주한다. 60대의 육체, 그녀의 표현대로 가슴은 허리까지 내려오고, 배는 부풀었고, 늘 그녀를 위축되게 만들었던 육체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장 사랑스럽게, 그리고 자부심에 넘쳐서 바라본다. 그 늘어진 가슴과 부푼 배가 된 그 시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건 비단 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유행하고 있는 '바디 프로필', 언뜻보면 '자신을 사랑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걸 위한 극강의 다이어트와 피티를 거치는 모습은, 결국 보여질만한 자신을 '가공'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와 달리 영화 속 낸시의 '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첫 발이다. 지난 60 평생 낸시가 갈망했던 건 바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낸시의 모습은 우리에게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하는가?라고. 

물론 <굿 럭 투유>는 진지한 자아를 향한 탐구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봉인'된 성매매에 대해 '공익 서비스'라는 도발을 던지는 문제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자아에 대한 갈증을 성적 서비스를 통해 풀어내려한 60대 여성과 그 여성에 대한 '심리적 서비스'마저 마다하지 않는 이상적인 '관계'를 통해 긍정했지만, 그 여성과 남성이, 남성과 여성이었다면 과연 그럼에도 여전히 호의적으로 보여질 수 있을까라는 난제를 남긴다. 






by meditator 2022. 8. 17. 20:27

 N차 관람까지 '역주행'하고 있다는 조용한 화제작 <헤어질 결심>을 뒤늦게 봤다. '화제작'답게 월요일 오후임에도 객석은 비어있지 않았다. 과연 이 영화의 어떤 점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뒤늦게 빼앗았을까?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정훈희의 보이스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송창식의 코러스가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극장 안, 그 '모호'한 여운에 좀처럼 자리를 뜨기가 어려웠다. 

 

 

일찌기 <올드보이>에서 <친절한 금자씨>, <박쥐>, 그리고 <아가씨>에 이르기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그 독특한 '미장센'이 주요 등장 인물처럼 자리한다. 다른 작품들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은 듯해도 여전히 그 고유한 색감과 공간의 장치, 그리고 시점들이 관객들을 해준과 서래의 현실적이지만, 몽환적인 서사로 끌어들인다. 

품위있는 형사 해준
범인이 칼을 휘두르려 하자 해준(박해일 분)은 '체인메일' 장갑을 꺼내 낀다. 그 덕분에 휘두르는 칼을 잡고 범인을 쉬이 결박한다. 그 한 장면이 형사 해준을 설명해준다. 단골 양복점에서 맞췄다는 그의 양복에는 많은 주머니가 있고 그 안에는 형사로서 그의 직업에 필요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 해준은 그런 형사이다. 늘 넥타이까지 갖춘 정갈한 옷차림, 최연소 경감이 될 정도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진다. 부산을 떠나 이포로 온 해준, 불면증이 더욱 심해지자 아내 정안(이정현 분)은 말한다. 당신 삶에 '살인'이 빠져있어서 그렇다고. 

그런 해준이 유력한 용의자 서래(탕웨이 분)를 처음 마주한다. 한국말이 서투르다며 '마침내 죽었습니다'라는 여자,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해준은 '초밥'을 시켜준다. 후배 형사는 범인이라 단정짓는데, 해준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래의 혐의를 벗어주려 애쓴다. 미해결 사건을 벽에 '저장'해 놓을 정도인 그의 이력으로는 석연치 않은 처신이다. 결국 그는 '붕괴'된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바다에 버려서 아무도 못찾게 해요,'라며 서래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넨다. 

 

 



'날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은 시작됐죠.'


그리고 아내가 있는 이포로 온 해준, 그런데 그의 앞에 서래가 나타난다. 심지어 그녀의 두번 째 남편이 다시 죽음을 맞는다. 첫 번째는 '자살'이고, 이번에는 '타살'이라며 다르다는 그녀, 하지만 해준은 이번에는 그녀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감금'한다. 

사랑했다는데 해준은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반문한다. 그 표정은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같다. 그리고 '우리 일이요? 무슨 일이요?'라며 언성을 높인다. 그가 일찌거니 서래를 감금한 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자신이 또 '붕괴'될까봐? 서래의 말처럼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다시 또 서래에게 핸드폰을 건네고야 마는 해준, 그게 그만의 사랑인가? 그런 와중에 떠나는 아내 옆의 남자를 보고 손을 불끈 쥔다. 그가 사랑한 건 서래보다 자기 자신인가. 품위있는 형사로 해준의 삶이 '사랑'보다 강력했던 건 아닐까? 문득 홍상수 영화 속 주인공들이 떠오른다.

매번 끝내려 하고 도망치려 하던 그 사랑은 결국 쓸려가 버리고 만다. 어쩌면 오늘도 그는 자신의 '불면'을 고뇌하는 대신 일광욕을 하고 족욕을 하며 호흡 기계를 끼고 많은 주머니가 달린 양복을 입고 잠복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죽어가는 범인도 하는 이런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말이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피의자가 되고 싶었던 서래 
<헤어질 결심>을 보고 기자의 시선을 끌었던 건  사랑보다 자신의 자부심에 더 애착이 컸던 해준보다 그의 초밥 한 덩어리에 결국 자신을 던져버리고 마는 서래, 그녀의 삶이다. 

제작진은 '탕웨이'를 캐스팅하고 싶어서 여주인공을 '중국인'으로 설정했다고 하는데, 극중 서래를 보며 2001년작 <파이란>이 오버랩되었다. 영화는 <헤어질 결심>처럼 극중 남자 주인공 강재(최민식 분)에게 촛점이 맞추어 진행된다. '모두가 친절하지만 그 중에서도 강재씨가 제일 친절합니다'라던 그의 아내 파이란, 하지만 파이란은 삼류 건달 강재가 편의적으로 맺은 인연이다. 그런데 파이란은 그런 강재를 진짜 남편처럼 여기며 아무도 친절하지 않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다 결국 목숨을 잃는다. 

파이란과 서래, 그녀들은 모두 불법 체류자들이다. 그리고 불법체류자인 그녀들을 구해준 건 '남편'들이다. 강재는 그녀와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줬고,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유승목 분)는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었다. 기도수가 오랜 시간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생과 사를 오가던 서래만을 돌려보내지 않자, 그녀는 그를 기꺼이 남편으로 받들었다. 그녀의 몸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기고 구타를 하는 기도수를 그녀는 8년을 참아냈다. 돌아갈 곳이 없는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그래서 고소공포증을 무릎쓰고 '마침내' 겨우 그녀의 삶에 빛이 들까말까 할 때 그녀의 앞에 해준이 등장한다. 

해준의 등장, 그게 왜 문제가 됐을까? 그녀는 오래도록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함을 지니고 다닌다. 가족의 산이라 하는 호미산에 이를 때까지. 이 '가족'적 장치는 그녀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건 '할아버지가 독립군이었다'는 핏줄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녀가 천착한 '관계'에 대한 정체성이다. 

8년을 학대당하며 간병인으로 살아가던 그녀, 그런 그녀가 남편을 죽인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 경찰서 취조실에 들었다.. 그런데 맞은 편의 형사가 그녀를 친절하게 대한다. 초밥도 시켜주고, 매일 밤 자신을 지켜보던 형사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녀에게 중국식이라며 볶음밥도 해준다. 그녀의 줄담배도 참아준다. 마치 '모두가 친절한 데 가장 친절한 사람은 강재 씨입니다' 같은 경우인 거다. 

안타깝게도 미스터리한, 남편을 죽였을 지도 모른 '팜므 파탈'같은 서래의 불행은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그녀가 선택한 '사랑'들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유력한 증거인 핸드폰을 던져주듯 가버린 해준, 그런 해준의 '언어'를 서래는 '사랑'이라 읽는다. 하지만 해준은 형사이고 결혼한 사람이다. 그런 그와 '헤어질 결심'으로 서래는 또 다른 남편을 구한다. 

하지만 두번 째 남편은 해준처럼 그녀를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다.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는 없다. '내가 나쁩니까?', 결국 해준을 찾아나선 그녀, 하지만 그런 그녀의 선택이 해준의 자부심을 위태롭게 만들고, 그를 구하려 기꺼이 자신을 던진 그녀에게 해준은 핸드폰만 또 건넨다. 이제 그녀는 다시 한번 '헤어질 결심'을 한다, 영원히. 서래의 두번 째 남편, 임호신(박용우 분)은 투자자, 아니 투기꾼이다. 그의 아내가 된 서래, 피의자가 되서라도 해준을 만나고 싶다는, 그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열망'은 임호신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맹목적 투자 전략은 임호신과 다르지 않은 엔딩을 맞이한다. 

비벌리 엔젤의 책 <자존감없는 사랑에 대하여>는 서래와 같은 선택을 '낭만 애착'이라 말한다. 남성들보다 더 여성들은 성장 과정에서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애착을 지니도록 교육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전근대적 가족 관계에서 자란 여성들은 공동체적 관계, 그 중에서도 특히 남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낭만 애착'에 천착하기가 쉽다.

학대에 시달리던 서래, 그녀는 범죄자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고 폭력 남편으로 부터 도망쳤지만 '낭만 애착'으로 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지는 못했다. 스스로 서는 대신 그녀는 다시 사랑을 구하고 거기에 자신을 던진다. 하지만 어느 남자도 자신보다 그녀를 더 사랑해주지는 않았다.

해준의 친절에 스르르 자신을 무너뜨린 서래, 해준을 잊기 위해 또 다른 남자를 선택한 그녀, 그녀의 자기 파괴적인 사랑이 결국 그녀를 파국으로 이끈다. <파이란>에서 무려 20여년이 지났지만 <헤어질 결심>은 조선족 동포라는 '대상'을 통해 관계중심적인 여성의 한계를 말하고자 한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의심이 든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닷가에서 목이 터져라 서래를 부르는 해준, 그가 목놓아 부르는 그 자리는 방금 전 그녀가 섰던 그 곳이다. 영화는 조선족 서래의 순애보, 그 여운을 정훈희의 안개로 이어갔지만 물이 스며드는 모래 구덩이에서 그녀가 '아이 차가워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으면 하는 외람된 희망을 놓을 수는 없었다. 사랑, 그깟 게 뭐라고.



by meditator 2022. 7. 26. 17:05

스테디 셀러 인기 프로그램 중에 <자연인>이 있다.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산골짜기,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사연'과 '야생의 삶'이 꾸준한 인기를 얻는다. 그런데 찾아간 mc에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세상'에 소속되어 사는 삶이 여의치않았음을 '토로'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자연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성'들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홀로 야생의 삶을 살아내는 게 여의치 않은 탓이 크리라. 그 여의치 않은 야생의 삶에 자신을 던진 한 여성이 있다. 우리에게는 <원더우먼> 시리즈에서 안티오페로 낯이 익은 '로빈 라이트'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랜드>이다. 

 

 랜드 ⓒ 넷플릭스

 

자연인이 된 여성
<자연인> 프로그램은 '자연인'이라지만 예능 프로그램답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 삶의 조건이 구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찾아간 mc에게 대접한다며 삼겹살 구워주고 닭 삶아주는 식이다. 그런데 <랜드>의 주인공 이디(로빈 라이트 분)는 차원이 다르다. 랜트카를 빌려 짐을 싣고 나무만이 무성한 언덕 위 집에 도착한 그녀, 이 집을 소개해준 이에게 차마저 가져가라 한다. 핸드폰은 이미 오다가 쓰레기 통에 버렸다. 말이 집이지, 오래전 한 노인이 살다 생을 마감하고, 폐가다시피 한 지 오랜 집이다. 유리창은 깨지고, 집안에는 멀쩡한 게 없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 속에 어울려 있지만, 그래서 더 외롭고 힘든 경우다. 어떤 때 그럴까? 영화 초반 이디의 사연에 대한 정보는 충분치 않다. 그녀의 친구로 짐작되는 여성이 이디에게 삶을 놓지 말라하고, 그런 친구의 '조언'조차 이디는 모욕적으로 받아들인다. '삶'이 모욕이 되는 순간,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을 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지는 순간, 그렇게 이디는 세상에, 사람들과 함께 머물 수 없어 홀로 도망치듯 깊은 산 속 오두막을 찾아왔다. 그녀가 내던진 그 모든 것이 그녀의 '고통'을 대변한다. 사람이 싫다는 그녀의 저항이 그녀의 상실을 설명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차도, 핸드폰도 없이, 깡통 통조림만 잔뜩 싣고 오두막으로 숨어들 듯이 찾아든 그녀, 영화의 제목처럼 '랜드'에 문외한인 그녀는 '삶'을 버리는 심정으로 '랜드'에 자신을 던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랜드'의 그녀는 '고통'스러워 할 여유가 많지 않다. 오래 전 와봤다지만 낯선 그 '지역'에서 그녀는 '생존'하기 위해 매일매일 '전투'를 벌인다. 그래도 추워지기 전에는 할 줄 아는 낚시도 했다. 텃밭도 만들어 보려 했지만, 야생 동물들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참치 통조림을 그냥 따서 끼니를 때우던 그녀, 하지만 아직은 '사냥'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날, 멀직이 떨어진 화장실에 있는 틈을 타서 열린 집 안으로 곰이 들이닥쳤다. 화장실에서 벌벌 떨던 그녀가 곰이 떠난 뒤 돌아간 집에는 남아난 것이 없었다. 바닥 구석에 굴러다니는 비스킷 조각을 입으로 밀어넣지만 닥쳐오는 추위와, 그보다 더한 '허기'가 그녀를 잠식한다. 그녀가 원했던 건 '죽음'이었을까? 

 

 랜드 ⓒ 넷플릭스

 

'상실'의 연대 
굶어 죽는 건지, 얼어죽는 건지, 생사의 기로에 놓인 그녀의 집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한참 뒤 정신이 든 그녀의 집에는 불이 피워져 있고, 그녀는 따뜻한 이불 안에 뉘어져 있다. 그리고 간호사가 그녀에게 약을 건넨다. 

죽어가던 그녀를 구한 건 미겔(데미안 비쉬어 분), 사냥을 다니던 그가 그녀의 집에 연기가 더는 오르지 않는 걸 보고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녀에게 도움을 준 대가로 건네던 돈을 거절한 그는 대신, 이 야생의 삶에 무지한 그녀에게 살아갈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 사냥을 하는 법, 올무를 만드는 법,  그리고 사냥한 동물을 먹을 수 있게 처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 완강하게 세상을 거부한 채 오두막에 웅크리고만 있는 그녀에게 '두레박'같은 손길을 전한다. 

그녀에게 애견마저 넘겨준 그, 그런 그가 이상하리만치 오랫동안 소식이 끊기자, 드디어 그녀는 처음으로 길을 나선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데 100달러를 걸었다고 웃는 미겔,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한때 술에 취해 운전을 했고, 그러다 아내와 딸을 잃은 그는, 이다에게 외려 고맙다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이다는 비로소 그런 그에게 말한다. 자신의 남편과 아이가 극장에 침입한 괴한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미겔은 용납할 수 없었던 자신을 이다를 도움으로써 구한다. 그리고 이다는 그의 도움을 통해 비로소 '자연인'으로의 삶에 천착한다. 그들의 '상실'이 그들 서로를 구한 것이다. 

 

 랜드 ⓒ 넷플릭스

 

'산 사람은 살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살아낼 힘이 생기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이다는 세상을, 사람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왔던 곳, 아이가 좋아하던 곳으로 떠난다. 자꾸 삶을 독려하며 재촉하는 세상을 등지고. 

그녀를 살려낸 미겔이 그녀에게 묻는다. '어떤 삶을 살고 싶으냐고?', 그런 미겔의 질문에 이다는 말한다. 그저 이 곳의 삶에 하루하루 익숙해져 가는 것일뿐이라고. 아이를 낳고 우울증에 걸린 산모가, 그녀를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는 게 재미있어? 난 사는 게 힘든데, 그러자 슬퍼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다정하게 말했단다. 얘야, 사는 건 재밌어서 사는 게 아니란다. 그냥 그저 사는 거란다 라고. 그저 살아가는 시간이 때로는 그 어떤 위로보다 '치유'가 된다. 

이다는 말한다. 도망치거나 피해서 이 곳에 온 게 아니라고. 스스로 선택해서 온 거라고. 산속 오두막을 선택한 그녀는 그곳에서 결국 살아낸다. 처음 도끼질조차 낯설었던 그녀가 이젠 총으로 거뜬히 사냥을 하고, 그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토막낸다. 더는 미겔이 도와주지 않아도 이제 그녀는 오두막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간다. 정신과 의사의 상담도, 오랜 친구의 다정한 우정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지만, '자연'에서의 시간이 그녀를 회복시켰다. 그녀가 자신을 던져 살아낸 '시간'이 그녀에게 삶을 돌려주었다. 




by meditator 2022. 7. 11. 16:29

'오은영 쌤' 덕분에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대중적으로 익숙한 학문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족'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내면 아이'라는 용어가 종종 등장하곤 한다. 부모 자식간의 갈등, 이전까지는 그 '문제'의 촛점이 '아이'에 맞춰져 있다면, 최근에 들어서는 그 갈등의 근원으로 부모, 그 중에서도 특히 부모가 어린 시절 가진 '트라우마'를 조명한다. 드러난 문제 속에 숨겨진 또 다른 '가족'의 문제이다. 

여기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한 여성이 있다. 어른이 된 그녀는 여전히 그런 어린 시절의 아픔을 자신의 '내면'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그런 자신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좋은 부모가 되기로 했다. 심지어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기관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딜레마가 있다. 그 '아이'가 그녀가 낳은 아이가 아니다. <가족의 색깔> 속 아키라(아리무라 카스미 분)의 선택이다. 

 

 

25살, 엄마를 선택했다
아키라는 25살이다. 한참 '창창'할 나이, 그런데 '결혼'을 선택했다. 마트에서 장을 보던 그녀에게 마지막 남았던 당근을 나누어 주고, 카레에는 '고구마'를 넣으면 맛있다며 고구마도 나누어 주던 '따뜻한 남자' 슈헤이, 가슴 통증이 와서 병원에 급히 입원했지만 놀라서 찾아간 아내 아키라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웃겨주려 애쓰던 남자, 영화는 그렇게 아키라의 남편을 그린다. 스물 다섯 살의 젊은 여성이 이미 다 큰 아이가 있는 남자 슈헤이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은 그녀가 원하던 안락한 가정 대신 '시련'을 주었다. 어느날 가슴이 아프다며 입원한 남편, 놀라 달려온 아내를 웃으며 달래주었지만 다음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이 남긴 건 동업 사기로 인한 빚, 그래서 그들이 살던 도쿄의 아파트가 날라갔다. 그리고 초등학생인 아들이 남았다. 

과연 아키라는 어떤 선택을 할까? 도쿄의 아파트를 처분한 아키라는 슌야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 가고시마를 향한다. 아들의 죽음도 몰랐던 시아버지 세츠오(쿠니무라 준 분)에게 남편의 유해를 전한 아키라는 당분간 자신들이 시아버지 댁에 머물수 있게 해달라 청한다. 그리고 철도 기관사인 시아버지 덕에 기차 덕후였던 남편을 꼭 빼닮아 아버지 못지 않게 기차를 좋아하던 아들을 위해 '기관사'에 도전하고자 한다. 

겨우 25살이지만 아키라는 의연하게 이제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슌야의 부모 노릇을 감당하려 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자동차 면허조차 없는 아키라가 '기관사'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의지'만 가지고 되는 일일까?

자신을 놀리는 친구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바람에 보호자로 호출된 아키라, 아키라는 의연하게 제가 슌야의 '부모'입니다를 외치지만 영화 속 슌야는 아키라를 늘 '아키라짱'이라 부른다. 부모의 날, 아키라에게 학교에 오지말라고 당부한 슌야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이미 세상에 없는 아버지가 여전히 그의 곁에 있는 것처럼 쓴 글을 발표한다. 그런 슌야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고 하는 아키라, 하지만 슌야의 입에서, 아버지 대신 아키라가 없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만 듣고 만다. 

 

 

슌야의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선택한 기관사의 길도 여의치 않다. 이제는 사양 길에 접어들었지만 지역민들의 열의에 힘입어 미니 열차로 운행하는 가고시마 열차, 순조롭게 기관사가 되나 싶었지만 기찻길로 뛰어든 사슴을 치고, 그 죽은 사슴을 바라보는 어린 사슴을 보고 나서는 아키라는 좀처럼 예전처럼 그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진다. 

죽은 남편의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낳지 않은 남편의 아들, 그리고 젊은 엄마라는 이질적인 '가족 구성원'이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가족의 색깔>, 그 서사의 줄기를 이루는 건 '가족'됨을 지향하는 한 여성의 '의지'이다. 영화는 슌야가 낳자마자 슌야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슌야의 아빠가 아이를 기르기가 힘들 것을 염려한 시아버지는 슌야의 외할머니가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결정에 동의한다. 형편으로 보면 그게 나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슌야의 아버지 슈헤이는 그런 '어른'들의 결정을 거슬러 홀로 아이를 키워냈다. 

형편과 편의, 그걸로 보자면 아키라의 결정도 무모해 보인다. 영화는 시아버지의 시점에서 과거 아들과 이제 아들조차 없는 며느리의 결정을 '오버랩'하며 '가족'을 묻는다. 하지만, '가족'을 이루는 건 생각보다 여의치 않다. 자신을 끝내 '아키라짱이라 부르는 슌야, 정작 '아들'을 위한다는 그 일을 자신이 해낼 수 있을까?

불안정한 상태로 인해 '휴직까지 당할 처지에 놓인 아키라, 그런데 자신을 응원해 줄줄 알았던 시아버지가 말한다. '자신이 결정할 문제'라고. 스스로 기관사가 될 수 없다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두 여성
영화는 선택에 기로에 놓인 두 젊은 여성을 등장시킨다. 처음부터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던 아키라와 슌야의 담임 선생님, 노천 변에서 토하고 있던 선생님에게 119를 부르려 하던 아키라는 그녀가 가정이 있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축복'받지 못한 아이니 지우겠다고 결심했던 선생님은 미혼모라는 '존재'를 차치하고 생명의 잉태 그 자체를 '축하한다'고 전한다. 

선생님은 학부모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를 스스로 낳아 기를 것을 결심한다. 반면 아키라의 결심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을 응원해 줄 것 같은 시아버지의 냉정한 한 마디, 그리고 보호자가 되기로 했지만 자신을 '부모'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슌야, '위해서'라는 명목의 그녀의 결심이 그 근간에서 부터 흔들린다.

아빠로 부터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했던 선생님이 그 답을 자신에게서 찾은 것처럼, 아키라에게 필요했던 시간 역시 '누구'가 아닌, 자기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스스로 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돌아온 아키라에게 슌야는 말한다. '아키라는 아키라 짱'이라고. 슈헤이나, 죽은 엄마를 대신한 자리가 아니라, 25살 아키라의 자리인 곳,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직업으로 기관사, 비로소 아키라는 부모로써도, 직업인으로서도  '견습' 딱지를 떼었다. 

전형적인 일본 가족 영화의 정서가 물씬 품어나는 <가족의 색깔>, 하지만 잔잔한 듯한 분위기 안에서 던져진 질문들은 심상치 않다. 가족이라는 영향력 안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던져진 '과제', 전형적인 '가족주의'인 듯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도발적인 답을 준 영화이다. 


by meditator 2022. 6. 27. 23:58

Are you happy?
당신의 답은 어떤가? 이 질문에 즉답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아마도 <닥터 스트레인지>의 스티븐처럼 잠시 텀을 두고 답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 짧은 텀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나는 행복한가?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행복이 뭐지?

 

 

6년 만에 단독 시리즈로 돌아온 두 번째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이 단순하면서도 추상적인 명제를 던지며 시작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지만 사랑하는 연인이 그의 곁을 공식적으로 떠나는 날, 그래도 스티븐(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연인 크리스틴(레이첼 맥아담스 분)의 질문에 행복하다 답한다. 이 정도면 행복하다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크리스틴 앞에서 스티븐은 예의 자존심을 앞세우는 걸까? 그도 아니면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하기 두려운걸까?

하지만 행복하다는 스티븐과 달리, 행복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리고, 그 사랑하는 이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들과 함께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한 사람, 완다(엘리자베스 올슨 분)이다. 그런데 그녀가 사랑하는 비전, 비브라늄과 마인드 스톤이 결합된 완벽한 인공체는 타노스의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완다는 그와의 사랑을 '환타지'를 통해 구현한다. 바로 ott 시리즈로 방영된 <완다비전>이다. 하지만, 완다가 꿈꾸던 가정은 '환타지'답게 허구였음을 드러내고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그 파멸 끝에 완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마녀 '스칼렛 위치'로 확인한다.

한 시리즈 내내 몰입했던 자신이 만든 허구의 '해피홈'에 대한 열망을 완다, 스칼렛 위치는 이제 '멀티버스'를 통해 실현하려 한다. 다중우주의 그 어느 곳 여전히 '존재(?)하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온 '멀티버스 이동'이 가능한 아메리카 차베즈(소시 고메즈 분)를,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는 스칼렛 위치가 된 완다의 욕망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반대한다. 그런 닥터에게 완다는 반문한다. '당신은 규칙을 어기고 영웅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하고 적이 된다?' 그건 공평하지 않다고.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 스파이더맨의 청으로 멀티버스의 대혼돈이 문을 열어제친 건 이미 닥터 스트레인지였다. 닥터는 경우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행복을 향한 완다의 흑화된 열망을 막을 수는 없다. 

'모성'을 앞세운 완다의 맹목적인 '행복론'에 닥터 스트레인지의 '정의'가 마주선다. 그런데, 그 '정의'도 고민이 된다.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등장한 닥터 스트레인지 꿈 속에서 등장한 또 다른 멀티버스 속 '디펜더 스트레인지'는 '정의'의 이름으로 멀티버스의 여행자 아메리카 차베즈를 소멸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 838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정의'의 이름으로 금단의 영역인 '다크 홀드'에 손을 대고, 그것으로 타노스를 막으려 했다. 그로 인해 서로 다른 두 우주가 충돌하는 '인커전'을 초래햇다. 그래서 지구 838의 비밀결사 조직인 '일루미나티'는 닥터를 처형하고, 허울좋은 동상만을 남겼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멀티버스'의 균형을 파괴하는 스칼렛 위치, 그런 스칼렛 위치를 막기 위해 멀티버스의 여행자를 제거하려는 다른 차원의 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멀티버스의 대혼란을 일으킨 또 다른 차원의 닥터 스트레인지, 그런 저마다 다른 행복과 정의라는 혼돈의 '멀티버스'는 달리는 기차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두고 '정의'의 방식을 모색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 '멀티버스'의 대혼란은 여전히 정의의 방식과 실천에 있어, 그래고 개인의 자유와 그 실현 방식에 있어 '혼돈'을 겪고 있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은유'로 다가온다. 

 

 

아는 사람만 알게 되는 멀티버스의 세계관 
<닥터 스트레인지; 대 혼돈의 멀티버스>는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는 영화라 보여진다. 이미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마블의 멀티버스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스칼렛 위치의 습격으로 카마르 타지가 처참하게 파괴되고 완다, 스칼렛 위치를 막기 위한 '비샨티의 서'를 구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와 난데없이 닥터의 세계에 등장한 멀티버스 여행자 아메리카 차베즈는 '멀티버스'의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흑백으로, 때로는 에니메이션과 같은 다중 우주의 파장을 거쳐 도착한 지구-838, 이 숫자는 다중 우주가 최소한 838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원을 달리한 그곳 지구에는 또 다른 스트레인지들이 있다. 이미 그의 연기력만으로 캐릭터를 특화시키는데 발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분한 여러 차원의 스트레인지들. 그들은 스트레인지 특유의 일관된 자존감을 넘어 자만심에 가까운 캐릭터적 특징과 각 차원별 다채로운 프리즘의 색채를 곁들여 다중우주론을 설득한다. 

우리가 사는 단일한 시간, 단일한 공간을 우주로 확장시킨 '어벤져스'까지는 이미 <스타워즈>이래 익숙한 환타지적 공간이기에 수월했다. 이미 전작의 시리즈로 익숙한 배우들의 스파이더맨이 알고보니 멀티버스 속 다른 차원 속 스파이더맨으로 등장하는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까지도 그러려니 했는데, 지구 838 정도에 이르면 보는 이에 따라 '멀티버스'에 대한 피로감이 충분히 느껴질만한 설정이다. 

무엇보다 <완다비전>, <왓이프>, <로키> 시리즈까지 마블의 다른 시리즈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수라고 하듯이, 이즈음 마블 시리즈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 전체 세계관과 각 시리즈에 대한 사전 인지가 필수가 되고 보니, 마블 세계관의 충실한 독자가 아니고서는 닥터 스트레인지 속 다채로운 설정들이 난해하거나 부담스럽기 까지 할 수 있을 듯 싶다.

일찌기 영국 미니시리즈 <닥터 후>이래 멀티버스를 영접한 기자에게 애니메이션<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속 멀티버스는 '신선'한 설정이었지만,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즈음에 이르르니 시리즈를 이어가기위한 '설정'의 피로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채로운 멀티버스의 설정과 그 세계를 오가며 혼란을 발생시키고, 그 혼란의 막으려고 애쓰는 완다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대결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론적인 질문이다.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모성'을 통해 들춰낸 '행복'에 대한 질문, 무한질주하는 행복론에 또 다른 맹목적인 '정의'가 제동을 건다. 하지만, 과연 세계 평화를 넘어 '멀티버스'의 평화를 위해 한 생명의 희생은 정당한가라고 다시 영화는 질문을 건넨다. 어쩌면 답은 쉬이 얻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계속되는 다중 우주의 충돌이 빚어내는 인커젼처럼,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할 숙제일 듯하다. 아니 한바탕 멀티버스의 회오리가 휩쓸고 간 후 'are you happy?'의 우문에 지금 여기서 나의 할 일을 할 뿐이라는 웡의 현답이 '답정너'일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22. 5. 12. 22:09

학교와 락음악이라 하면 이제는 고전이 된 <스쿨 오브 락>이 떠오른다. 우연히 음악 교사가 된 로커 듀이 핀(잭 블랙 분), 자신이 혹한 그룹에서 쫓겨나 학교 대리 교사인 친구 집에 얹혀사는 신세이지만, 고답적인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던 아이들과 '락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함께 성장하는 영화이다. 학교로 간 락이라는 설정만으로도 신선했던 영화, 이제 또 한 편의 락 영화가 학교로 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락을 하는 선생님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락을 선택한 아이들 케빈과 헌터, 그리고 에밀리의 이야기다. 

왕따, 부적응자, 그리고 감정 조절 장애 학생의 선택 
헌터(에드리언 그린스미스 분)는 아버지와 둘이 산다. 아버지는 매냥 헌터가 비아냥대듯이 여성들의 가슴에 '식염수 주머니'를 넣는 성형외과 의사이다. 어릴 적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 후  떠나고 그 엄마 얼굴이 가족 사진에서 잘려 나간 이후 늘 일과 연애로 바쁜 아버지, 헌터는 자신의 외로움에 대한 구원을 '락'에서 찾았다. 지하의 그의 방 곳곳을 메운 메탈리카 등 메탈 락 밴드의 사진들(실제 메탈리카 멤버들이 결정적인 장면에 까메오로 등장한다), 긴 머리, 가죽바지, 그에게 메탈은 '구원'이자, 삶의 열쇠이다. 하지만 그 거친 복장에도 불구하고, 학교 주먹 좀 쓰는 애들한테 맥없이 나자빠지고 마는 헌터의 모습처럼 그 '구원의 열쇠'는 어쩐지 '찌질'한 헌터의 어색한 포장지같다. 

또 한 명 <그것>의 제이든 마텔이 분한 케빈은 헌터의 유일한 친구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계기가 헌터처럼 케빈이 친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걸 헌터가 구해줘서이다. 체육 수업을 받는 대신에 고적대를 택했듯이 케빈은 학교 생활의 주변을 조용히 맴돈다. 그런데 고적대 작은 북이나 겨우 치는 케빈에게 락에 심취한 헌터가 드러머의 길을 종용한다. 헌터가 만든 '고문 기계'라는 곡, 하지만 그걸 치기 위한 장비도, 능력도 케빈에게는 없다. 

그런 케빈의 눈에 들어온 한 소녀가 있다. 같은 고적대에서 클라리넷을 불던 에밀리(아이시스 헤이스워스 분)다. 감정 조절 장애가 있는 에밀리는 약을 끊는 바람에 혼자 다른 음악을 하듯 부는 클라리넷을 지적하는 선생님께 욕을 하며 대들고 만다. 근데 그런 에밀리가 어쩐지 케빈은 맘에 든다. 더구나 에밀리가 첼로를 연주하는 것을 본 케빈은 그녀가 헌터와 함께 하는 메탈 밴드의 '베이스' 파트를 맡았으면 좋겠다. 


 

요즘은 '청소년 영화'라고 해도 '청소년 관람 불가'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메탈 로드>도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막상 영화는 '순한 맛'이다. 상대 밴드의 드러머의 상습 약물 복용, 폭력, 베드씬 등 적나라한 내용들이 들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머리를 밀고 검고 하얀 색으로 칠을 해도 무시무시하게 '메탈릭'해 보이기 보다 어쩐지 애잔하고 심지어 귀여워 보이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그런 장치들이 세 주인공들의 우정과 애정의 삼각 관계 속에서 적당하게 양념처럼 뿌려진다. 

아마도 <메탈 로드>의 가장 큰 미덕은 왕따이거나, 부적응자, 그리고 감정 조절 장애를 겪는 청소년들이 '메탈'이란 음악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 애쓰는 지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카드는 허용해도, 아들을 위해 시간과 맘을 허락해 주지 않는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카드로 '메탈' 장비를 사서 학교의 '배틀 오브 밴드'에 출전하고자 한다. 사실 '메탈 밴드'를 표방하지만 헌터의 겉멋과 어설픈 케빈의 연주가 버무려진 상황이었을 뿐인데, 그래도 두 사람은 열심히 준비해 간다. 무엇보다 겨우 작은 북 리듬 정도를 연주하던 케빈이 헌터가 준 음악을 들으며 메탈릭한 연주자로 거듭나는 부분이 흥미롭다.

청소년 영화답게 이들의 밴드 출전은 험란하다. 물론 그 험란함은 충분히 해피엔딩을 예상할 정도의 험란함이다. 둘도 없는 친구 헌터와 케빈은 케빈의 여자 친구가 된 에밀리와의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는다. 게다가 늘 카드만 쥐어줄 뿐 무관심했던 아빠는 헌터의 폭주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처방을 내린다. 물론 '영어'의 몸이 된 헌터를 케빈이 구하며 두 사람은 결국 애초에 목적한 대로 '베틀 오브 밴드' 경연에 나서게 된다. 


 

어설프기만 했던 두 찌질한 소년이 '메탈' 정신을 표방하며 좌충우돌한 끝에 선 경연장, 거기에 에밀리가 합류한다. 예의 '메탈' 정신을 늘 운운하던 헌터의 연주와, 앳된 미소년에서 제법 거친 드러머가 된 케빈의 성장도 볼만 하지만, 소심과 폭주를 오가며 자신없어 하던 에밀리가 케빈의 응원에 힘입어 약대신, 메탈릭한 첼로 연주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한껏 뿜어내는 장면은 통쾌하다. 청소년의 불안정한 감정을 그저 '약'으로만 다스리려는 오늘날의 세상에 한 방을 먹이는 듯한 설정은 주목할 만한 장면으로 남는다. 

'순한 맛'이라고 했던 것처럼 <메탈 로드>는 예측 가능한 설정과 스토리의 영화이다. 마치 예전에 주말마다 하던 디즈니랜드 아동물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며 마음이 따뜻해 지는 이유는 그저 잡풀처럼 밟힐 것 같은 아이들이 그 누구의 도움없이 밟혀도 다시 일어서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고, 우정과 사랑을 일궈가며 영화의 제목처럼 자기 삶의 'Lords'가 되어가는 과정은 '순한 맛'이지만 보는 이를 미소짓게 만든다. 게다가 <스쿨 오브 락>의 한 주인공이 음악이었던 것처럼 클래식에서 부터 메탈에 이르기까지 음악들은 빠질 수 없는 듣고 볼 거리이다. 


by meditator 2022. 4. 17. 13:12

우리 '액션' 영화의 오래된 갈증이 무엇이었을까? 나현 감독의 <야차>를 보면 그 답이 나온다. 4월 8일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이 영화는 사천왕을 모시는 8명의 신 중 하나인 '야차'를 제목으로 내세운다.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귀신'이지만 '부처님을 수호'하게 되는 야차가 가지는 양면성을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강인(설경구 분)와 '블랙팀'을 통해 한껏 구현해 낸다.

4년 전 홍콩의 뒷골목, 차에 다가가 무언가를 건네는 인물, 그런데 갑자기 지프 한 대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그 차를 들이받는다. 한바퀴를 돌아 나뒹구는 차, 보통 액션 장면에서의 호흡보다 한 번 더 나아가며 이 영화의 정체성을 각인한다. 그리고 들이받는 지프에서 유유히 등장하는 지강인, 거래를 하려했던 인물은 동료들을 배신한 지강인과 한 팀이었던 인물이다. 그에게 총을 들이댄 지강인은 배후를 묻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잠시 뒤 하늘을 울리는 총소리, 배신자에게는 '자비'없는 처단만이! 이렇게 '야차같은' 장르의 이름표를 내보이며 영화는 시작된다. 

 

 

선양을 배경으로 한 무한액션 
'한국' 사회는 총기 소지가 불법이다. 물론 그럼에도 요즘 장르물을 중심으로 '총기'의 등장이 빈번해지고는 있다. 하지만 총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구구한 장치들이 필요하다. 액션 장르에서 황야의 결투처럼 총기를 들고 끝장을 보는 서사에 대한 갈증, 그 갈증을 풀어내기 위해 <야차>는  '선양'이라는 지역적 장치를 선택했다. 

선양, 한때 만주족의 수도였던 도시, 하지만 이제 중국에서 가장 큰 공업 도시가 된 이곳을 영화는 동북아 각 나라 스파이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도시로 설정한다.  번성한 도시답게 밤에 더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 하지만 조금만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잘해줄게'를 연발하며 데려가 신장, 간, 쓸개 등을 해체해 버리는 '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한 도시이다. 또한 마약 등의 사건에 현장범은 그곳에서 '사살'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대낮에 북한로동당에서 외화벌이를 총괄하던 문병욱이란 인물을 두고 북한 스파이들과 검은 복면을 한 사람들이 총격전을 벌인다.

그런데 여기에 지강인을 팀장으로 한 국정원도 연루되어 있다. 애초에 블랙 팀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한 문병욱, 하지만 그 사건으로 문병욱의 행방은 오리무중, 지강인은 그를 되찾기 위해 D7라 불리는 일본인 스파이 오자와(이케우치 히로유키 분)의 아지트를 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렇게 문병욱이라는 인물 찾기라는 사건을 씨줄로 선양을 배경으로 스파이들의 살벌한 쟁투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걸 통해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의를 묻다 
정의에 대한 질문, 그 시작은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강직한 검사 한동훈이 등장한다. 가진 자들의 부도덕과 불공정은 더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만든다는 신념을 가진 한동훈 검사는 재벌 총수를 구속시키려 하지만 절차 상의 문제로 인해 스스로 물러선다. 수사관들이 무단으로 총수의 사무실에 들어갔다는 그 이유만으로 다된 밥에 스스로 코를 빠뜨리는 고지식함, 이렇게 영화는 한동훈이 내세운 원칙적인 정의의 한계를 먼저 내보인다. 

한동훈은 좌천되고 다시 돌아가 수사를 마무리하고 싶은 그의 열망이 스스로 선양이라는 도시로를 택하게 만든다. 그저 선양 국정원 팀의 불투명한 보고를 감찰하면 된다는 명목이었는데 도착한 그를 맞이한 건 블랙 팀의 총격전이다. 

영화는 날 것의 액션씬에 더해, 지강인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의와 한동훈의 원칙적 정의를 대비시키며 서사적 흥미를 자아낸다.  적에 대해 가차없는 작전, 거기에 더해 배신자에 대해서도 추호의 용서도 없으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의문의 여성에게 고문을 마다하지 않는 방식이 사사건건 한동훈으로 하여금 반발하게 만든다. 거기에 더해 첫 장면, 지강인이 같은 팀원이었던 인물을 '처단'하게 만들었던 '두더지'라는 암약하는 이중 스파이의 존재가 그 갈등의 고뇌를 깊게 만든다.

물과 불처럼 결코 섞일 수 없을 것같은 지강인과 한동훈, 그리고 블랙팀을 위기에 빠뜨리게 되는 한동훈에 대해 반발하는 블랙팀원들과의 신념과 인간적인 갈등을 영화는 주된 관전 포인트로 삼는다. <오징어 게임>에서 멀쩡한 대기업 직원에서 결국 자신의 승리를 위해 '협잡꾼'이 되어버린 상우였던 박해수가 이번에는 그 반대로 고지식하고 원칙적이어서 스스로 위기에 빠지게 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고지식해서 종종 웃픈 상황을 자아내는, 하지만 그래서 지강인이란 인물과 '버디(BUDDY)'가 되어가는 캐릭터를 맡아 극중 주된 재미를 이끌어 낸다.

 

 

<야차>는 어떤 면에서는 '정의를 이루어 내는 모든 방법이 정의로워야 한다'며 절차적 정의에 천착했던 , 순수했던 인물 한동훈이 '선양'이라는 공간에서 '정의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한다;며 불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는 블랙팀의 작전을 통해 스스로 '정의'에 대해 물으며 변화해 가는 '성장 서사'이기도 하다.  그 성장의 결과물은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통쾌하게 선사된다. 

물론,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동훈의 맞은 편에 배신을 하는 이는 가차없이 처단해 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지만, 결국 그 밑바당에 팀원들이 목숨을 내어줄 정도의 '의리'를 장착한 지강인이란 중심이 우뚝 서있어야 한다. 설경구란 배우가 오래도록 우리 영화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기점으로 다른 질감과 색채를 가진 배우로 새롭게 다가왔다. <야차>에서 설경구는 <불한당>이래 그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질감의 연기, 그 연장선상에서 '니 껍데기를 벗겨줄게'란 대사에 전혀 이물감을 느끼지 않도록 만드는  '야차'같은 캐릭터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낸다. 

제작진이 해보고 싶었다는 총성이 마구 울리며, 거침없이 상대방의 머리를 겨누는 선양이라는 스파이들이 번성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한 액션, 거기에 '정의'의 방식을 둘러싼 주연들의 갈등과 화해라는 서사적 재미를 통해 <야차>는 흥미로운 장르물이 된다. 물론, 눈밝은 관객이라면 예측 가능한 악역들, 굳이 <야차>만이 아니라 액션 장르의 절정에서 드러나는 보여주기 식 선악의 대결 등이 입맛을 다시게 하지만, 그래도 또 다른 도시에서 한동훈을 소환하는 지강인의 호출에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by meditator 2022. 4. 9. 1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