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바다바다'하고 시작되는 Un Homme et Une Femme, 1966년 개봉된 영화 <남과 여>의 메인 테마곡이 54년만에 다시 스크린 위에 울린다. 흑백의 화면이 펼쳐지고 젊은 아누크 에메와 장 루이스 트레티냥이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한가로운 파리의 거리를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누비고, 호젓한 바닷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메임 테마곡만으로도 연상되는 영화의 장면들, 하지만 그건 요양원의 노인 장-루이의 기억 속 한 장면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노인이 된 장-루이는 그가 알았던 모든 것을 잊어간다. 한때는 스포츠카를 몰았던 레이서지만 이젠 휠체어에 의지하여 하루 종일 요양원 마당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안느',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다.
아들인 자신마저도 기억을 못하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앙트완(앙트완 사이어 분)은 아버지가 유일한 기억 안느를 수소문하여 찾아간다. 1966년 <남과 여>는 죽은 전남편을 잊지 못했던 안느가 떠나고 그녀를 잊지 못했던 장-루이가 그 유명한 기차역 360도 포옹을 하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2020년 다시 돌아온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은 1966년 <남과 여>의 영화 밖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다시 찾은 옛사랑 앙트완을 만난 안느,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앙트완의 부탁에 안느는 우리가 그리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며 고민을 하다 기차역으로 달려간 로맨틱했던 영화와 달리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국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안느를 못견딘 장-루이가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나고 다니면서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안느의 입장에서는 장-루이에 대한 기억이 좋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 거리를 휘날리며 달리던 팔팔하던 레이서 장-루이가 죽음을 앞두고 기억마저 잃어간다는 처지에 안느는 연민을 느낀다. 다른 여자를 만나 자신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안느의 발걸음을 장-루이가 있는 요양원으로 향하게 만든다.
설레임을 가지고 장-루이 앞에 앉은 안느, 그런데 장-루이는 안느를 알아보지 못한다. 누구냐고 안느에게 물어본 장-루이는 그녀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느에게 자신이 과거 사랑했던 '안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루이로부터 자신을 사랑했던 이야기를 듣는 '아이러니한 상황', 2020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부터 발휘된다.
자신만을 기억한다는 옛사랑, 하지만 정작 찾아가보니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옛사랑 앞에서 이제 자신조차도 나이가 들어 걸음걸이가 편안치 않은 안느는 돌아서지 않는다. 대신 장-루이의 맞은 편에 앉아 그의 늦은 사랑 고백을 듣는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를 찾았던 그가, 그랬던 이유가 여전히 자신이 벗어나지 못했던 전 남편이었음을, 그럼에도 이제 아들조차도 기억을 못하는 죽음을 앞둔 순간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장-루이의 '고해성사'를 안느는 편안한 미소를 띠고 들어준다.
여전히 찬란한 54년만에 다시 돌아온 <남과여>의 부제는 '여전히 찬란한'이다. 왜 여전히 찬란할까? 거기엔 '여전히 찬란한' 노년이 있기 때문이다.
장-루이는 기억을 잃어간다. 사라져가는 뇌세포만큼 그에게 남은 날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그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건 '추억'이다. 1966년작 영화의 장면 장면이 그의 기억으로 되살아 난다. 자신을 찾아온 '안느'에게 요양원 탈출을 제안하는 장-루이, 잠시 후 그와 그녀는 그 예전처럼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바다를 향한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경찰에게 총을 쏘아가며, 혹은 총으로 위협하며, 그리고 깨어나면 여전히 요양원 마당이다.
요양원 마당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장-루이의 웃픈 상황, 하지만 그런 장-루이에게 '안느'만큼이나 연민의 시선이 간다. 인생의 종착역, 과연 그 시간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육신의 고통과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살아가는 나날들의 무기력으로 힘들어 한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시간이지만 장-루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하다. 심지어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여인이 앞에 앉아있지만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하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의 기억으로 충만한 노인, 장-루이, 어쩌면 기억을 잃어가고 스스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찾기'가 아닐까. 그 무엇도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추억'은 그 마저도 잃어버리는 순간까지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니까. 안도현의 시 한 구절, '당신은 누구에게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는가'가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그라드는 그 순간에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충만한 그를 지켜봐주는 옛 연인 '안느'가 있다. 눈 앞의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아봐주지 못함에도 여전히 그를 찾아가, 매번 '사랑하는 여인과 참 닮았다'라는 말에 미소로 응답하며 그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들어주는 '안느'에게선 비로소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품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너그러운 안느의 아량은 이제 안느에게 씁쓸했던 지난 날의 기억을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으로 다시 채색할 것이다.
한때 바닷가를 함께 누비던 장-루이와 안느, 하지만 이제 그 바닷가에는 그들을 만나게 해주었던 사립학교를 다니던 자녀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서있다. 어렸던 앙트완과 프랑스와즈가 중년의 사랑을 나누게 될 만큼의 시간, 그 시간이 흘러 장-루이와 안느는 조우한다. 안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뒤늦은 시간,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예전의 사랑으로 '연결'되고 오랫동안 풀렸던 인연의 끈을 다시 묶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은 얼마나 될까? 이런 '우문'에 과학은 3년이라던가 하는 '정답'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과학'의 증거마저도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에서는 무기력하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죽어가는 순간에조차 가장 '충만한 기억'인 사랑에 대해 과학으로서는 더할 답이 없을 듯하다. 그리고 그 '충만한 기억'을 가진 것만으로도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오후의 볕 아래에 앉아 '옛 사랑'의 추억을 나누는 두 '노인'들을 보며 다시 한번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넷플릭스 영화 <에놀라 홈즈>는 낸시 스프링어의 청소년 소설 <사라진 후작>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낸시 스프링어는 스테디 셀러인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이라는 질문으로 소설을 연다. 여전히 다른 버전으로 각색되어 21세기에도 회자되는 명탐정 셜록 홈즈, 그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그녀도 셜록처럼 '탐정'의 능력을 지녔을까?
셜록 홈즈의 21세기 버전 <셜록>에서 이미 여동생으로 유로스가 등장한 바 있다. 셜록만큼의 '지적 능력'을 가졌으면서, 또한 셜록보다 더 '사이코패스'적인 유로스의 등장은 그 자체로 극적 긴장감을 자아냈다. 그렇다면 원작인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한 셜록의 동생은 어떤 모습일까?
셜록의 동생, 홀로 엄마를 찾아 떠나다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 분)는 '학자며, 화학자이자,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사격의 명수, 검술사, 권투선수, 명석한 연역적 사상가'로 자신의 오빠 셜록(헨리 카빌 분)을 소개한다. 그런 오빠의 동생 에놀라는 어떨까?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산수도 잘 하'며, '새 둥지도 찾을 수 있고, 지렁이도 파낼 수 있고, 고기도 잡을 수 있고, 자전거도 탈 수'있다고 영화의 초반 자신을 소개한다.
그런데 이런 에놀라의 정체성은 에놀라가 살던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정체성에 '위배'된다. 여왕 빅토리아가 지배하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하지만 '신사'라는 남성들이 사회적 주도권을 가지고 발빠르게 세상을 '점령'하던 시절에, 여성들은 영화 속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두 오빠가 에놀라를 보고 질색을 하듯,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후견인을 자처한 큰 오빠가 에놀라를 '기숙학교'에 보내 강제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하듯 '남편의 정숙한 아내'로서 존재가 여성의 '전부'라 인식되던 시절이다.
대나무 광주리같은 걸로 엉덩이를 부풀이고 물고기 뼈로 만든 갑옷같은 보정물로 허리를 잔뜩 조인 옷을 입고, 정숙하게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배우고 바느질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그 시절의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것들, 그걸 에놀라는 하나도 배우지 않은 대신, 읽고 쓰고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누구에게서? 바로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에게서이다.
엄마는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에놀라에게 낱말 맞추기를,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을 가르쳤다. 일찌기 집을 떠난 두 오빠들, 엄마와 홀로 남은 에놀라는 엄마 유도리아를 통해 당시의 여성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적 보호자이자, 유일한 스승이었던 어머니가 에놀라가 16살 되던 생일에 사라졌다. 돌아온 오빠들은 엄마를 찾는 한편, 그들이 보기에 천방지축인 에놀라를 '기숙학교'로 보내려 한다. 하지만 에놀라는 오빠들의 그런 결정과 달리 '스스로'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에놀라의 이름 에놀라를 거꾸로 하면 'alone', '홀로' 남겨진 소녀 에놀라는 '홀로' 엄마를 찾는 여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엄마, 사라진 후작 영화는 원작의 제목처럼 <사라진 후작>, 에놀라가 기차에서 만난 소년 튜크스베리 자작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후작의 지위까지 이어받은 '소년'의 실종 사건과 에놀라의 엄마 찾기가 엇물리며 셜록 홈즈의 원작보다 더 '시대적 배경'이 생생한 한 편의 추리극으로 탄생되었다.
영화의 배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극중에서도 등장하는 참정권 운동이다. 영화에서 에놀라가 읽었다던 울스턴크래프트의 책, 1792년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의 책 <여성의 권리 옹호>를 통해 여성의 인권과 운동을 주장했고, 이 책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날 너무도 당연한 남녀를 막론한 '한 표의 행사', 하지만 참정권 운동의 역사는 그 자체 '여성 해방 운동'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된다. 1865년 런던에서 여성 참정권 위원회가 결성되었지만 1967년 제출된 선거법 수정안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이 부결은 외려 전국 각지에서 참정권 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왜 같은 '인간'임에도 여성들의 권리는 외면당했을까? 대부분 가정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납세'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여겨졌으며, 심지어 남편에게 아내의 재산을 통제할 권리마저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기에 번번히 여성들의 주장은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자신들의 권리가 거부되자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하려 했다. 영화 속 에놀라가 찾아간 창고 속에서 등장한 '다이너마이트' 등이 그런 여성들의 '간절하고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 뿐인 딸 에놀라에게 당대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모습 대신 당당하고 주체적인 교육을 시켰던 어머니 유도리아, 그런 어머니가 에놀라마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채 늦은 밤 회합을 가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 에놀라를 홀로 놔둔 채 집을 떠났다. 후에 만난 어머니는 외려 그게 사랑하는 딸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토로한다.
딸을 홀로 놔둔 채 실종이라는 극단적 설정, 하지만 이를 여성 참정권 운동이 격화되어가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놔둔 채 집을 떠나야 했던 어머니의 '결단'으로, 어머니가 '사회적 운동'의 일원이 되어 운명적인 선택을 했음을 드러내며 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런 엄마의 선택은 영화 속에서 에놀라가 '정의감'으로 개입한 후작의 실종 사건이 그 실체가 드러나며 서로 다른 길로 달렸던 열차의 궤도가 하나로 만나듯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진다. 의회에서 통과되어야 할 '참정권 법안',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작이 되어 상원에서 한 표를 행사하게 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역시나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튜크스베리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보수적'인 입장의 그 누군가, 그리고 '참정권'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야했던 엄마의 실종 사건이 '에놀라'라는 이제 막 세상에 자신을 던진 '소녀 탐정'을 통해 '하나의 사건'으로 '해결'되게 된 것이다.
처음 기차에서 해프닝처럼 조우한 에놀라와 튜크스베리, 기존 남녀의 역할을 전복적으로 '해석'한 해결사 여주인공, 연약한 남성 캐릭터의 로맨틱 코미디버전인가 싶었던 영화는, 여전히 에놀라의 전복적 캐릭터의 강점을 발산시키면서도 남주인공의 '반전' 매력을 통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여주인공이 '연애 감정'이 아니라, '정의감'으로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상황은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의 흐름에 걸맞고, 어딘선가 셜록이 튀어나올 것같은 국면에서조차, 아니 심지어 셜록보다 한 발 빠르게 '홀로' 사건을 파헤치고, 해결해 나가는 상황은 그 자체로 새로운 여성 히어로의 탄생을 알린다.
결국 에놀라는 그 도전적인 탐정 데뷔전을 통해 튜크스베리 후작 실종 사건을 해결함은 물론, 사라질 뻔한 튜크스베리가 당당하게 의회에 입성하여 한 표를 행사하게 함으로써 엄마로 하여금 사랑하는 딸마저 두고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틔어준다. 자전거도 잘 탈 수 있다 말하던 시골 소녀 에놀라는 사라진 후작 사건을 통해 이제 당당하게 '런던'에서 탐정으로 자신의 삶을 연다. 처음 드러났을 때 무관해 보이던 두 명의 실종이 결국 '참정권 운동'이라는 물결 속에서 선택한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였음을 보이며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가던 '진보적인 인물'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2018년작 다큐 <우먼 인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여배우를 비롯한 주요 여성 96명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 다큐는 '원더 우먼'이 등장하고, tv 수사 시리즈에서 여성 법의관이 등장하며, 그걸 보고 자란 여성들의 선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에놀라가 탐정 에놀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딸을 홀로 남겨두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집을 떠날 수 있었던, 아니 딸을 홀로 남겨두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탐정으로 자신의 몫을 해낼 수 있도록 주체적인 여성으로 키워낸 '유도리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엄마가 있었기에, 주체적으로 성장한 딸이 '참정권' 운동의 물꼬를 틔어주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영어덜트물로서 '에놀라 홈즈'를 보고 자란 이 시대의 영어덜트 누군가에는 '탐정'은 고전의 '셜록'이 아닌 '에놀라'로 기억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억된 탐정 에놀라는 그 미래의 선택지를 또 다르게 열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코로나 시대, 본의 아닌 언택트한 삶이 이어지는 상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 혼란'을 불러온다고 한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여러 가지 일들, 그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평소와는 다르게 이끌어 낸다. 아마도 미래의 누군가가 이 시대를 '우울의 시대'라 정의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그로 인해 행동마저 위축되는 증상, '코로나'가 사라지면 없어질까? 어쩌면 코로나 그 이전, 이미 우리의 삶으로 부터 '우울'은 배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 남편과 주변으로 부터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낙인찍힌, 그래서 정신병동으로 강제 이송될 위기에 처한 한 여성으로 부터 그 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바로 <어디갔어 버나뎃>의 버나뎃 폭스이다.
사회 부적응 주부 버나뎃 한적한 시카고의 교외 주택가, 정갈하게 손질된 단독 주택들이 이어진 이곳에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블랙베리 덩굴을 뒤집어 쓴 집 한 채가 있다. 옆 집에 사는 오드리가 정원사를 앞세우고 찾아와 이 덩굴을 쳐낼 것을 요구하는 처지에 몰린 이 집에는 버나뎃 폭스(케이트 블란쳇 분)가 그의 남편 빌리(빌리 크루덥 분), 딸 비(엠마 넬슨 분)와 함께 살고 있다.
버나뎃 폭스가 '문제 인물'로 취급당하는 건 집을 손보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마치 반사회적 인격 장애라도 가진 것처럼 이웃은 물론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그녀, 교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딸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 사회에서 그녀는 '은둔형 외톨이'이다. 그런데 그저 '은둔'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하교하는 딸을 데리러 간 버나뎃의 과격한 행동이 동네 주민의 '가해자'로 '소문'의 주인공이 되게 만든다.
'소문'을 불평할 것도 아니다. 오드리 등을 비롯하여 주변 엄마들을 '각다귀'라 부르며 '적대적'으로 대하다 못해 '각다귀' 운운하는 플랜카드까지 내건 버다뎃의 태도는 충분히 주변 사람은 물론, 남편에게 조차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온라인 비서 '만줄라'에만 의지해 극단적으로 세상과 '단절'을 적극적으로 해왔던 버나뎃, 그런 그녀의 삶에 '변화'가 들이닥쳤다.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 이 집을 떠나 기숙학교로 갈 딸이 졸업 기념으로 엄마, 아빠와 함께 남극 여행을 제안한다. 바쁜 남편이 거절하기를 원했지만 하나 밖에 없는 딸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남편이 얼버무리고, 결국 결정된 가족 남극 여행은 그 자체로 자신을 '사회'로 부터 격리시킨 버나뎃에게는 '멘붕'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가같은 블랙 베리 덩굴 지지대를 잃은 버나뎃 쪽의 언덕이 폭우에 한참 학부모 모임으로 들썩이던 오드리네 집으로 쏟아져 내렸다.
거기다 그간 버나뎃이 유일하게 의지해 왔던 온라인 비서 만줄라가 러시아를 기지로 한 국제 범죄 집단이라며 FBI가 들이닥치자 안그래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나뎃과 관련한 '사건'들을 전해들으며 우려가 깊어졌던 남편 빌리는 이제 버나뎃에게 정신과 강제 입원 같은 조치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FBI,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정신과 치료진을 앞세운 남편,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그런데 버나뎃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은 듯, 땅으로 꺼진 듯 버나뎃의 자취가 없어졌다. 버나뎃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사라진 버나뎃 드러난 사건 자체로만 보면 사회 부적응에 우울증이 심해 '자살' 우려가 있는 주부의 실종이지만, 그 속내에는 '좌절한 건축가이자, 독박 육아로 지친 주부' 버나뎃이 있다.
지금은 흉물같은 시애틀 교외의 집에 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상한 사람이지만, 한때 버나뎃은 이미 20대의 나이에 건축계의 아이콘이 되었던 천재적인 건축가였다. 그녀가 건축한 집이 곧 '이슈'가 되었던 시절, 그래서 당대 내노라하는 중견의 남성 건축가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젊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야심찼던 젊은 건축가 버나뎃의 열정은 그녀가 건축한 집이 단 몇 달 만에 '철거'되는 '사건'과 함께 주저앉아 버렸다.
남편과 함께 LA를 떠나 시애틀로 삶의 근거지를 옮겨온 버나뎃,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건축가로 새로이 시작해보려 하기도 전에 그녀의 삶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고 싶었던 버나뎃, 하지만 거듭된 몇 번의 유산, 겨우 태어난 아기는 생사조차 불투명했다. 자신의 일은 전폐하고 오로지 아이를 키우는데만 전력하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두느라 가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떤 남편과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그렇게 안팎으로 상처를 받은 버나뎃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단절'이었다. 하나 뿐인 딸 '비'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엄마였지만, 딸을 제외한 모두에게 버나뎃은 '철벽'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시간은 동시에 불면과 불안과의 싸움이었다.
버나뎃, 자신을 넘다 서점에 가면 '우울'을 주제로 한 서적들이 넘쳐난다. 안그래도 집단에서 고립된 원자화된 개인의 우울이 20세기의 대표적인 병리 현상이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사회적 경향성에 '가속 패달'을 밟았다. 우울증이라 대변되는 '불면'과 '불안'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대표적 '방어 기제'이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상실감에 빠진 한 여성의 상황으로 우리 사회 보편의 '아픔'을 길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픔에 천착하는 대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말하듯 버나뎃의 인생 역전을 통해 아픔을 승화시킨다. 우연히 식당에서 예전 동료를 만났던 버나뎃, 그 동료에게 두서없이 그리고 장황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자, 동료는 명쾌하게 '진단'을 내렸다. '버나뎃, 너는 다시 건축을 해야 해. 너같은 예술가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고통스럽지.'
그렇다면 사라진 버나뎃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저 처음에는 정신 병원 입원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버나뎃, 딸과의 약속했던 남극 여행선에 우선 몸을 싣는다. 사람과 부딪치기조차 힘든 버나뎃에게 심지어 해류에 따라 요동치는 남극행 여행선은 그 자체로 '지옥행'이었다.
하지만, 토해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다시피 했던 배의 창문을 통해 그녀의 눈에 띈 남극의 빙산, 그 순백의 세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듯 다가선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된 남극 연구원을 통해 전해들은 '남극 기지 재건축'의 소식이 오랫동안 침잠했던 건축가로서의 버나뎃을 깨운다.
오랫동안 버나뎃이 외면해 왔던 건 건축가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자신의 실패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한 발자국도 나설 자신이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속되는 유산은 그녀에게 자존감마저 앗아가 버렸다. 오로지 아이를 지킨다는 맹목적인 모성만으로 버텨왔던 버나뎃,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병적 징후조차도 외면했던 버나뎃이 남극의 빙산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직면한다.
뉴욕 타임즈 84주 연속 베스트 셀러를 차지했던 마리아 샘플의 동명의 원작은 영화와 달리 편지, 이메일, 문자 메시지, FBI서류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이 색다른 구성의 원작을 <비포 선 라이즈> 시리즈와 <보이 후드>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버나뎃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물론 건축가로서의 좌절과 모성으로서의 상처를 '사회 부적응'에 우울증 주부로, 그리고 다시 건축가로서의 열정을 되살려낸 인간 승리의 '강약'을 매력적으로 표현해 내는데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의 역할이 지배적이다.
남극 바다에서 대번에 자신의 열정을 되살렸다는 상황은 '코미디'라는 장르에도 불구하고 '우연적'이거나, '작위적'이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기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라는 지점이다. 영화는 그런 '나와의 직면'을 위해 남극이라는 장치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며 보는 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가둔 울타리를 벗어나라 독려한다.
추석이 지났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가급적이면 고향 방문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권고와 상관없이 가족들이 몇날 며칠을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 명절은 언제나 주부의 입장에서는 고달픈 시간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어디 안가고 집에만 있었는데, 명절이 지나고 나서 서로 만나 하는 인사치레에 꼭 '살'이 들어간다. 겨우 며칠 새에 살이 쪘다더라는 식이다. 왜 주부들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살이 찔까? 그 이유를 '사랑스럽게' 풀어낸 단편 영화 <내 아내가 살이 쪘다> 가 10월 2일 유투브를 통해 공개됐다.
<내 아내가 살이 쪘다>는 12분 분량의 단편 영화이다. 그리고 이 단편 영화는 우리에게는 배우 류덕환으로 더 친숙한 감독 류덕환의 연출작이다. 낯선 감독 류덕환, 하지만 이미 류덕환 감독은 2012년 <장준환을 기다리며>, 2015년 <비공식 개강 총회> 등을 연출한 바 있다.
자꾸만 먹는 엄마 영화는 체중계에 올라 늘어난 자신의 몸무게를 확인하고 비명을 지르는 아내(장영남 분)로 시작된다. 목욕탕에서 잰 몸무게와 다르다며 늘어난 몸무게를 잘못된 체중계 탓으로 돌린 아내, 그도 잠시 밥 먹자며 부엌으로 향한다.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하는 중, 아내는 칼질을 하다 연신 입으로 무언가를 넣는다. 거기서 끝일까? 찌개를 끓이던 아내는 맛을 본다며, 찌개 국물이며, 건더기를 먹어댄다. 간이 안맞아서 물을 더 부으니, 다시 또 간을 봐야 한다. 이미 찌개가 상에 올라가기 전에 엄마의 배가 찰 정도로. 거기서 끝일까?
온가족이 함께 한 외식에서 남은 등갈비를 알뜰하게 싸가지고 온 아내, 다시 덥혀서 식구들에게 권한다. 하지만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는 둥, '시간이 없다'며 식구들은 내빼기 바쁘고, 결국 그 '남은'것들은 그걸 남길 수 없는 아내의 입으로 들어간다.
어느 집안에서도 너무나 익숙한 상황, 그 상황에 류덕환 감독은 '아내의 살'에 대한 개연성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여기까지만 봐도 아내가 살이 안찌는게 이상하다. 집집마다 한 입 더 먹으라는 엄마와, 먹기 싫다는 식구들, 버리는 게 아깝다는 엄마와 그냥 버리라는 식구들의 실랑이야 너무도 익숙한 구도이니까. 심지어 영화 속 엄마는 강아지가 저지레한 초콜릿 수거까지 엄마의 입으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류덕환 감독은 주부 '살'의 개연성에 한 술을 더 보탠다. 거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족, 과자 봉지를 쥔 막내가 장난을 치다 과자를 온 바닥에 쏟아버린다. 빨래를 개던 엄마는 아연실색 장난을 친 막내를 야단치지만 결국 애정어린 포옹으로 마무리된다. 화해의 기념으로 엄마에게 과자 하나를 건네는 막내, 하지만 엄마는 '엄마 살쪄'라며 거절하자, 재치넘치게도 막내는 과자 끄트머리를 조금 잘라 엄마의 입에 넣어준다.
과자를 먹어본 사람은 아마도 알 터이다. 그 손톱만한 조각이 입에 들어와 녹는 순간의 달콤함이 주는 유혹을,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간 엄마는 '이거 맛있는데 더 주지'라며 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입에 넣는다.
엄마의 살은 사랑이다 류덕환 감독이 <내 아내가 살이 쪘다>를 통해 '정의'내린 엄마의 '살'은 '사랑'이다. 식구들을 위해 애써 음식을 준비하고,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입에 넣는 것들이 결국 엄마의 살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추석과 같은 명절을 지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몸무게의 뒷자리가 달라지는 '비밀'이다.
엄마는 연신 살이 찐다고 되놰이지만 음식으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되지 않는다. 늘 엄마의 주변을 둘러싼 음식들,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류덕환 감독은 '주부의 살'에 대해 애정어린 고찰을 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을까? 감독이 선택한 해답 역시 '사랑'이다. 영화는 줄곧 남편(김태훈 분)의 시선으로 엄마를 지켜본다. 그간 많은 드라마에서 '서늘한 캐릭터'를 연기해 온 아빠 김태훈, 하지만 <내 아내가 살이 쪘다> 속 아빠는 다르다. 살이 쪘다며 혼비백산하는 아내에게 그대론데 라고 하는 남편, 그리고 음식을 하다 집어먹고, 남긴 음식을 아깝다며 먹고, 심지어 개가 저지레한 음식까지 먹는 아내를 줄곧 애정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남편은 결심한다. '안되겠다! 나도 노력해야겠다'
남편의 노력은 무엇이었을까? 찌개를 끓이다 간을 보려는 아내 대신 남편이 뛰어가 간을 본다. 엄마가 차려놓은 음식을 안먹고 내빼는 아이들을 불러모아, 너네가 안먹으면 엄마가 먹게 된다며 먹인다. 아들이 엄마 입에 넣어주는 과자를 대신 먹기 위해 아빠는 슬라이딩을 한다. 그 결과? '아빠가 살이쪘다'
영화는 우리네 생활 속 '주부의 살'이라는 사소한 사건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그냥 '살'에 대한 보고서가 될 뻔한 영화는 아빠가 살이 쪘다라는 반전 아닌 반전을 통해, '주부'라는 짐에 대한 '혜안'을 제시한다. 영화는 엄마가 살이 찔 음식을 나눠먹는 아빠이지만, 결국 그 속에 담긴 건, 주부라는 역할을 나누어 짊어짐이다.
아무리 주부의 역할을 덜어낸다 해도 각자 저마다의 생활이 뚜렷해져가는 상황 속에서 그 역할의 나눔이라는게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아내가 살이 쪘다> 속 아내를 대신해서 기꺼이 살이 찔 각오가 될 남편의 자세라면 주부의 짐도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나누어지는 '살'이 아니라, '짐'이다.
지난 2018년 개봉한 <강변 호텔>에서 외딴 호텔에 머물던 늙은 시인은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홍상수의 페르소나인 듯한 노시인, 평그의 영화 속 남자들처럼 평생을 여자 주변을 맴돌며 찌질하게 사랑을 향해 추파를 던지던 그는 결국 그렇게 살다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자신의 본능적 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남성들의 세계에 마침표를 찍은 듯했다. 줄기차게 '그' 들의 이야기에 천착해 왔던 홍상수 감독이기에 '죽음'으로 종착역에 도달한 듯한 그의 세계에서 과연 더는 할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1막의 끝일 뿐이었다. 배우 김민희와 함께 한 이후 <밤의 해변에서 혼자>, <클레어의 카메라>, <풀잎들>을 통해 그간 홍상수 감독이 천착해 왔던 남자들의 세계에서 '객체'였던 여성들이 조금씩 홍상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도망친 여자>는 그 프레임의 시선이, 주체가 변화되었음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 영화의 2막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민희, 5년 만에 외출하다 영화는 번역가인 남편과 함께 산 지 5년 만에 홀로 첫 외출을 감행한 김민희의 여정을 따른다.
처음 그녀가 찾은 곳은 '언니', 서영화의 집이다. 서울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사는 영화는 텃밭까지 갖춘 전원의 빌라 단지이다. 서로 반가운 덕담을 나눈 두 사람은 민희가 사온 막걸리를 나누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눈다.
<도망친 여자>에서 보여진 홍상수 감독의 새로운 특징은 '대화'이다. 물론 이전의 영화에서도 홍감독에게 있어 '대화'는 주요한 영화적 장치였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엇물리는 듯한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가는 계기로 작용하곤 했다. 그처럼 홍상수 감독에게 있어 '말'은 그저 '말'이 아니라 '관계'의 리트머스 시험지같은 것이었다. 드러난 '언어' 이면의 미묘한 '관계'를 알 수 있는.
하지만 이제 <사라진 여자>에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영상 미학으로서 영화의 또 다른 '도전'이 된다. 민희와의 대화를 통해 '영화'의 삶이 드러난다. 한때 연극을 하던 남자와 결혼 생활을 했던 영화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도심에서 멀찍히 이곳에 터전을 잡은 영화는 또 다른 여성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엄마가 도망친 젊은 여성에게 '따뜻한 품'을 내준다. 영상으로 보여지는 대신, 관객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영화의 삶을 추측한다. 마치 읽어주는 책처럼, 영화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등장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민희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홀로 사는 선미의 집이다. 역시나 인사치레를 넘긴 두 사람의 대화는 선미의 삶으로 향한다. 오랫동안 필라테스 강사를 통해 돈을 제법 모은 선미는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살고 싶은 곳에서 만나고 싶은 만나며 살고 싶다는 선미, 그래서 편의성은 떨어지지만 바라보이는 경치가 좋고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 모이는 이곳에 터전을 잡았단다.
여정의 끝은 한 복합 문화 공간, 홀로 차를 만시던 민희 앞에 뜻밖에 예전에 알던 새벽이 등장한다. 어딘가 껄끄러워하는 민희와 달리, 민희와의 해후를 반기는 새벽, 그러면서 오래 전 새벽의 남편으로 인해 어긋났던 관계에 대해 뒤늦은 사과를 전한다. 그리고 그 사과를 받아들인 민희에게 사과를 깍아주며 한때는 민희를 아프게 하며 '쟁취'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결혼 생활을 토로한다.
우리 시대 여성의 삶과 결혼 영화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연배는 다르지만 여성들의 모습을 주마등처럼 비춰준다. 그리고 거기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물음이 내포되어 있다. 중년의 영화는 아마도 그 또래 여성이라면 기대되어질 남편과 아이와의 삶 대신, 동반자적인 또 다른 여성과의 평안한 삶에 만족한다. 아이를 키우지는 않지만, 이웃의 여성에게 '모성'적인 위로를 건넨다. 홀로 사는 선미 역시 경제적인 면에서나, 관계적인 면에서 충분히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려 한다. 영화나 선미의 모습은 이제 더는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결혼'은 필요 충분 조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반면 민희를 아프게 하면서 까지 결혼을 했던 새벽의 경우에는 남편은 이제 tv에도 자주 출연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그렇게 유명해진 남편이 외려 마땅찮다. 유명세에 걸맞게 이곳 저곳에서 동어 반복적인 말을 되풀이하는 남편의 속물적인 모습에 실망하는 중이다. 말은 많지만 관계는 충실치 않는 결혼 생활이 어쩐지 불편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민희는 어떨까? 영화는 어쩌면 이들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의 제목인 '사라진 여자'라는 퍼즐을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민희는 그녀의 말처럼 5년만에 외출을 한 것일까? 그 힌트는 세 사람을 만나가며 조금씩 달라지는 결혼에 대한 뉘앙스의 차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난 5년 동안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민희,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렇게 항상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한 주체는 민희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며 남편의 입을 빌어 전하던 민희는, 선미를 만나고, 그리고 결혼 생활의 권태를 토로하는 새벽과의 만남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늘 항상 함께 하는 남편과의 삶이 '사랑'만은 아닐 수 있음을 살포시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여성들의 삶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과 달리,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프레임의 주변에서 서성이다 사라진다. 영화의 집을 찾아와 영화네가 밥을 주는 길고양이를 대번에 도둑 고양이라 지칭하며, 자신의 아내가 고양이를 무서워한다며 따지고 드는 안하무인의 이웃 남자, 선미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책임을 떠맡기려는 시인, 그리고 우연히 민희와 만나, 민희가 마치 자신을 찾아온 듯 오해를 하며 감정의 부스러기를 흘리는 새벽의 남편 등은 이전의 홍상수 영화 속 그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예의 그 남자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영화 속 여성들에게 '어이없음'만을 선사한다. 마치 이런 남자들과 저 여성들이 어떻게 한 하늘을 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냐며 반문을 하듯이. 독불장군같은 영화의 남편이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한다는 민희의 남편도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맥락에서 전해진다.
여전히 '결혼'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의 대표적인 '행복' 장치로 인정받는 세상, 하지만 영화는 그 장치의 안과 바깥에서 살아가는 등장 인물들을 통해 그 '제도'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그 '제도'를 통해 행복을 담보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연배의 여성들의 삶을 통해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도 각자 다양한 삶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영화를 통한 홍상수 감독의 목소리가 현재 자신이 선택한 관계에 대한 해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감독의 의도를 넘어 동시대 여성들의 진솔한 삶에 다가선다. 아마도 베를린 영화제가 그에게 감독상을 수상한 이유일 것이다.
어머니가 요양 병동으로 가셨다. 몇 번에 걸친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신 과정, 평생을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오셨던 삶의 여정에서 이제 스스로 당신의 몸을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셨다. 코로나로 인해 문병도 안되는 상황, 모처럼 통화를 하며 어떻게 하루를 보내시냐는 질문에, 매일 죽음을 기다리며 보내신다고 답하신다. 어머니만이 아니다. 어머니 연배의 많은 어르신들이 병마와 싸우며 죽음을 기다리며 보낸다. 나이가 들고, 그리고 병이 찾아오고,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기다리는 일 밖에 없을까? 그런 안타까운 상황에 이견을 제기하는 영화가 있다. 어느덧 일흔 중반이 된 다이언 키튼의 노익장이 돋보이는 <치어리딩 클럽>이다.
영화는 마사(다이언 키튼 분)가 자신의 물건들을 거리에 내놓고 파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른바 '유품 정리 세일', 물건을 사가는 사람은 어떻게 죽은 사람의 유품이냐며 호기심을 표하고, 마사는 담담하게 암으로 죽었다고 답한다. 그렇게 몇 십년 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집과 물건들을 정리한 마사는 암 치료 예약 전화도 취소한 채 '선 스프링스'라는 은퇴자들의 마을로 간다. 홀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려 한 것이다.
조용히 죽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웬걸 마을 이름처럼 화사한 유니폼을 입은 선스프링스의 노인들은 마사를 격하게 반긴다. 친절하게 마을 이곳저곳을 소개시켜주는 한편, 의무적으로 동아리에 들 것을 권고한다. 겨우 탈출하여 집으로 왔더니 옆집에 사는 셰릴(재키 위버 분)은 시끌벅적한 해프닝으로 마사의 일상을 깨운다.
그러나 사교적인 활동을 강권하는 마을의 규정, 그리고 친절하다못해 번거롭게까지 만드는 셰릴을 멀리하고 마사는 칩거한다. 장례 절차에 대한 비디오를 보고, 약을 먹고, 그리고 토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무기력하게 지내던 중, 도무지 두문불출하는 마사가 혹시나 욕탕에서 미끄러져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동정을 살피러 온 셰릴과 부딪친다.
이를 계기로 셰릴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마사, 대부분의 짐을 정리했음에도 선스프링스까지 들고 온 치어리더복, 거기에는 치어리딩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포기했던 젊은 날의 꿈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고심하던 마사는 셰릴을 찾아가 자신이 못이룬 젊은 날의 꿈 치어리딩을 이곳 선스프링스에서 실현해 보겠다며 도움을 청한다.
마을 운영진을 찾아간 마사와 셰릴, 마음에 드는 동아리가 없으니 스스로 치어리딩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동아리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8명의 인원이 되어야 하는 상황, 이를 위해 마사와 셰릴은 '치어리딩 오디션'을 마련한다.
오디션장에 온 할머니들, 오랫동안 요가를 해온 할머니를 제외하고 몸은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오디션 장에 온 그녀들은 비록 몸은 '움찔 움찔' 수준이지만 마음만은 어느 치어리더 못지않다. 그리고 <치어리딩 클럽>에서 주목해야 할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이 마음은 청춘인 할머니들의 제 각각 오디션 장면이다. <어른들의 그림책>에서 작가는 누워계신 할머니의 기저귀를 갈아드리며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표현을 썼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오디션 장면 속 할머니들의 모습은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여전히 마음은 하늘을 날 듯하지만 몸은 오십견으로 팔도 올라가지 않는 노년이 되어갈 것임을 뭉클하게 보여준다.
'어디 치어리딩같은 걸 하냐'며 반대하는 남편의 급사(?)까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작된 여덟 할머니들의 '치어리딩' 동아리, 그들을 가장 열정적으로 이끄는 건 바로 죽기 위해 선스프링스로 온 마사이다. 연습에 앞서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시시콜콜한 증상을 열거하는 것과 달리 마사는 끝내 자신의 병을 숨기며 음식마저 제대로 먹지 못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면서도 열정적으로 치어리딩 동아리를 이끈다.
치어리딩 성공담 그 이상 <치어리딩 클럽>의 이야기는 스포츠 성장 영화의 전형을 따른다. 다같이 목표를 향해 '으쌰 으쌰'하지만 이런 이들의 단합을 마땅치않게 여기는 그 누군가에 의해 '연습'은 용의치 않고, 그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시도한 도전은 멤버의 부상과 함께 노인네들의 해프닝으로 온라인 상에서까지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난항'을 뚫고 다시 한번 멤버들은 힘을 합쳐 결국 많은 이들의 박수 갈채를 받기에 이른다는 공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치어리딩 클럽>이 다른 질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주인공이 바로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죽음에의 여정에서 노인의 삶은 개별적이고 원자화되기 십상이다. <치어리딩 클럽> 속 노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선스프링스에 왔고 홀로 죽음을 감당하려 했다. 사교적인 셰릴도 알고보면 자식대신 손자를 키우며 그 손자의 알바비까지 털어 집세를 감당해야 하는 처지로 남의 장례식에 가서 끼니를 해결하는 등 궁색한 삶을 살고 있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남편이 죽은 후 아들이 경제 관리를 하는 바람에 단 돈 100달러에 대한 결정권이 없는 노년도 있다. 그렇게 죽음이든 돈이든 노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저마다의 짐으로 허덕이던 이들이 '치어리딩'을 통해 '우리'가 되어간다.
함께 운동을 하고, 함께 해결해 나가며, 고립적이었던 삶을 넘어 '우정'을 키워나간다. 모두에게 끝내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쓰러져 버린 마사, 그녀 역시 목전에 둔 죽음에 대해 홀로 감당해 왔던 두려움을 셰릴과 나눈다.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치어리딩 클럽에서 빠지겠다는 마사에게 셰릴은 말한다. 두려움, 죽음, 그까짓 거 개나 줘 버리라고. 죽음을 향한 여정은 홀로 감당해야 할 짐이지만, 그 짐을 진 등을 토닥여 주는 우정으로 마사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낸다.
만약 마사가 젊은 날에 못이룬 꿈 치어리딩에 대한 도전을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마사는 자신의 집에서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고 홀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마사 뿐인가. 그녀와 함께 반짝이를 흔들던 일곱 노인들의 삶은 어땠을까? 죽음 앞에서 '고독'과 절망을 떨쳐버린 마사의 선택이 마사 자신의 마지막 길은 물론, 그녀와 함께 한 일곱 노인들의 노년을 빛나게 했다.
늙고 죽어가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떻게 늙고 죽어갈 것인가는 결국 '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메시지를 <치어리딩 클럽>은 명확히 한다. 죽어가는 과정조차도 여전히 삶의 한 과정임을, 아직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영화는 묻는다.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당신은 어떻게 죽어가겠냐고.
지난 2010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획기적인 영화 한 편을 들고 등장했다. 올해 8월 재개봉한 <인셉션>이다. 누군가의 꿈에 잠입하여 꿈꾸는 자의 무의식에 정보를 심고, 그를 통해 현실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가는 '팽이'로 상징되는 '토템'과, 꿈의 상황을 상징하는 엿가락처럼 휜 도시의 영상으로 기억된다. 프로이트를 통해 현실 세계에 문을 두드린 '무의식'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 의해 영화적 상상력의 신선한 영역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이렇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과학적 성과'를 영화적 서사의 주요한 장치로 활용하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셉션>에 이어 2014년 170분이라는 긴 런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우주 과학'의 붐을 일으킨 <인터스텔라>에서 우주 비행사 쿠퍼는 환경 오염으로 인해 멸망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하여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답을 구한다.
그리고 이제 2020년 과연 이번에는 어떤 '과학적 성취'를 들고 올 것인가 하는 기대에 걸맞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과연 내가 본 것이 무엇인가 하며 관객들을 '아노미' 상태로 빠뜨릴 정도로 '엔트로피'를 비롯하여, 평행 우주 등등 최신 과학 이론들이 진수성찬을 이룬다.
하지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과한 이론적 나열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당부는 명쾌하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과연 무엇을 느끼라는 것일까? 여기서 뜬금없지만 오랫동안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는 영국 SF시리즈 <닥터 후>가 떠오른다. 닥터 후는 이제는 사라진 미지의 별에서 온 외계인이다.
겉보기에 전화박스로 보이는 우주선을 타고 외계와 지구,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 드라마에서는 <테넷>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한 과학적 이론들이 등장한다. 평행 우주 정도는 당연할 정도로. 하지만 그런 SF적 장치를 관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살던 외계의 멸망을 지켜본 닥터 후가 지구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에 개입하며 지구의 불행을 막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먼저다' 마찬가지로 <테넷> 역시 전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건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종횡무진 활약기다. 첫 장면 무려 4300 명의 엑스트라가 등장했다는 엄청난 규모의 오페라 극장에서 주인공은 CIA 일원으로 잠입하여 암살당할 뻔한 요인을 구출하고, 214라고 칭해지는 '무기(?)'를 빼돌리는 작전에 투입된다.
오페라 극장을 꽉 채운 관객들이 최면 가스에 모두가 잠이 든 상태에서 곳곳에 시한폭탄이 놓여진 상황, 이미 자신들의 임무가 완수되었기에 굳이 그 상황에 개입할 필요가 없음에도 주인공은 홀로 남아 사람들을 구하고자 분투한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결국 적에게 체포된 상황에서 동료들과 작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죽기를 각오하면 산다던가. 당연히 죽을 줄 알았던 주인공은 '의문의 단체'에 구출되어 미래에서 온 미지의 적으로부터 3차 대전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이런 주인공의 '휴머니즘'이 <테넷>을 이끌어 가는 근간이다. 눈이 휙휙 돌아가는 액션과 그보다 더 현란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인버전'의 장치들 사이를 오가며 작전을 수행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전'의 결정적 순간에 '사람'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오페라의 관객들이요, 아들을 지키려는 여주인공인가가 다를 뿐이다.
그렇게 '사람'을 중심에 둔 주인공의 활약, 거기에 또 하나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은 '자기 주체성'이다. 영화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되풀이 하여 말한다. 내가 상황을 주도하겠다고. 어쩌면 <테넷>에서 가장 결정적 '스포'가 될 대사는 '인버전'도 '엔트로피'도, '프리패스'도, '알고리즘'도 아니라, 바로 매번 주인공이 말한 '상황을 주도하겠다'는 말이다. 그의 '주도성'은 결과적으로 영화 <테넷>을 가능토록 만든 '동인'이다. 그 동인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지구를 멸망에 이른 '적'들에 대항하여 지구를 지켜낸다. 바로 이런 주인공의 사명감이야말로 '교리'라는 의미를 지닌 '테넷'으로 이어진다. 작전이 아니라 사명감, 모험이 아니라 인류애가 결국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느껴달라는 '요점'이 아니었을까.
바로 그런 주인공의 휴머니즘적 주체성의 맞은 편에 지구 멸망의 키를 움켜 쥔 케네스 브래너가 분한 사토르가 있다. 사토르 마방진 첫 줄의 단어, 사토르는 러시아로부터 버려진 땅에서 플루토늄을 채취하며 살아남아 불법 무기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한 인물이지만, 그런 자신의 부를 지구 멸망의 군불로 삼는다. 자신이 없으면 세상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는 세상의 운명을 그 자신의 '맥박'에 맡긴다.
자신이 없어도 인류는 세상은 존재해야 한다는, 환경 오염 등 많은 오류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주인공과 내가 없으면 다 소용없다는 사토르, 두 가치관은 사토르를 매개로 하여 지구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미래의 적'이 한 도발을 통해 '현재'에서 충돌한다. 사토르 마방진의 대각선 글자인 '테넷(TENET)'은 글자에서 보여지듯 앞과 뒤가 같다. 그리고 이는 '시간'을 매개로 마주한 과거와 현재이다.
'인버전'된 시간 속에서 그런데 여기서 조우하게 된 과거와 현재는 이전에 우리가 알던 시간 여행의 의미와 다르다. 시간 여행이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뛰어넘거나 역행하는 과정이라면, '인버전'이라는 장치를 통한 <테넷> 속 시간의 흐름은 거꾸로 주행하는 자동차, 쥐는 것이 아니라 놓아야 손으로 튀어 오는 총알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르되 그것이 현재에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를 통해 미래의 세력은 '현재'에 개입하게 되고, 그로 인해 <테넷> 속 지구의 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할아버지의 역설'이다.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가서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그 할아버지의 손자는 미래에 '존재'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할아버지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손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테넷>은 거기에 평행 우주론을 등장시키며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그 '역설'에 변수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변수'가 결국 오페라 극장 이후 오슬로, 에스토니아, 그리고 최후의 결전지가 되는 러시아 사토르의 폐허가 된 고향 마을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는 '인버전'된 인물과 현재 인물들의 교차된 행보을 통해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3차원의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원인과 결과, 하지만 영화는 <인셉션>처럼, 하지만 다른 '과학적' 성취에 기반하여 그런 '사고'의 패턴에 이의를 제기하며 미래와 현재를 연결한다. '일어날 일'의 시작은 현재일까? 미래일까? 뒤엉킨 '시간'의 세계에서 주인공은 그럼에도 주도적으로 '삶의 선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고 그런 '선의'의 끝에서 <테넷>을 만나게 된다.
나이듦은 많은 것을 내려놓게 한다. '성'도 그 중에 하나이다. 지난 2002년 박진표 감독은 일흔이 넘은 노인들의 '사랑', 그 중에서도 '성'을 포함한 사랑을 <죽어도 좋아>를 통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유수한 영화제에서 초청을 받고 화제작이 되었지만 그로부터 십수년이 흐른 2020년 과연 70줄의 노인들에게 '성'적 정체성이, 그로부터 비롯된 존재의 증명이 '의미'있다고 하는데 공감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8월 20일 개봉한 <69세>는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69세에 성폭행을 당하면 효정(예수정 분) 씨는 69세의 여성이다. 간병인 생활을 하다 만나게 된 동인(기주봉 분) 씨와 현재 함께 지내며 퇴직 후 그가 연 헌책방에서 일을 돕고 있다. 오십견이 오도록 홀로 일하며 지내다 늙으막에 비로소 마음이 맞는 배우자를 맞이하여 하루하루가 행복해야 할 시절, 하지만 효정 씨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무릎이 아파 찾은 병원, 휴일이라 간호조무사 밖에 없는 상황에서 효정 씨는 성폭행을 당했다. 고심을 하던 효정 씨는 그 사실을 동인 씨에게 알리고 함께 경찰서를 찾았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통을 드러내어 '신고'하기까지도 힘들었던 시간,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효정 씨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신고를 받은 경찰들, 그 가해자가 이제 겨우 29살의 젊은 조무사라는 사실을 알고 드러낸 첫 번 째 반응은 '아니 왜' 라는 어이없는 웃음이었다. 효정 씨가 당한 '성폭행'이 아니라, 그녀의 나이 69세가 그녀가 당한 '사건'에 장막을 친다. 당연하게도 젊은 조무사는 '합의된 관계'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결국 효정 씨가 스스로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치매'가 올 수도 있는 나이 69세로 인해 그녀가 한 진술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된다. 그건 경찰만이 아니다. 그녀와 함께 이제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동인 씨 역시 그녀를 믿어주겠다고 했지만 한편에서 '과연?'하는 의혹이 샘솟는다. 이렇게 주변에서 조차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진술을 한 효정 씨조차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진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가 했던 이야기들에 그녀 스스로조차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69세의 딜레마 영화는 효정 씨가 부딪친 딜레마를 예수정 씨의 연기를 기반으로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그 딜레마의 첫 번 째는 69세,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조차 사회적으로 공감해 주지 않는 나이에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사회적 인정'의 딜레마이다. 하지만 성폭행은 일반적으로 힘이 강한 남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에게 가하는 '성'을 수단으로 한 '폭행'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에 있어 연령을 불문한다. 실제 지방을 돌며 홀로 사는 노인을 성폭행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사건, 쪽방촌에 사는 90대 할머니를 성폭행한 40대 노숙인 사건 등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 노인들에 대한 성폭행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영화 속 효정 씨처럼 오십견으로 스스로 저항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 성폭행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피해자가 정신적 충격, 붕괴, 나아가 자살에 이를 수 있을 만큼 대중적으로 '살인'만큼 지탄받는 범죄이다, 하지만 69세의 여성은 영화 속 심리 치료사의 말처럼 설사 동영상이 있다 하더라도 성폭행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거기에 69세라는 '노인'의 딜레마가 더해진다. 그 누구도 효정 씨의 말을 믿기 전에 '혹시?'라는 의심을 한다. 그녀가 가진 기억이 정말 '치매'가 아니고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에 대해 의혹을 가진다. 그녀와 함께 지내는 동거인조차. 당연히 그녀의 기억보다 젊은 가해자의 말이 신빙성있게 다뤄진다.
간병인 일을 하기 위해 오래도록 수영을 한 효정 씨에게 '나이답지 않게 날씬하다'던가, 곱게 옷을 차려입고 다니니 역시나 '나이답지 않게 옷을 잘 입으신다'던가 하는 말은 우리 사회가 69세, 아니 노인 전반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69세다움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묻는다. '치매끼'가 있어야 하는 건가? '성폭행'이 넌센스'인 나이인건가?
결국 69세라는 존재론적 한계로 말미암아 그녀의 진술들에 대해 법적인 판단조차 의구심을 가지고 자꾸 가해자에 대한 '구속'이 기각되자, 자신감을 잃은 효정 씨는 사라진다. 법적인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그 와중에 고발문을 만들어 자신을 도우려 했던, 어렵사리 함께 하려 했던 동인 씨의 곁에서 조차 자취를 감춘다. 이는 '성폭행'을 다루는 법적인 과정 그 자체가 나이를 불문하고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한 자기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69세 노인의 성폭행 사건을 다룬 <69세>는 노인 인권에 대한 영화이다.
물론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크렸던 효정 씨 스스로 자기 진술의 진정성을 찾아 가는 과정을 통해 늪에 빠졌던 자기 존재를 스스로 길어낸다. 그녀의 손으로 또박또박 쓴 글씨로 만들어진 고발문이 하늘을 나는 순간, 효정 씨의 존재도 더불어 빛을 얻는다. 그늘에 숨어 잊혀지는 대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발자국으로 세상 밖으로 나선다. 영화는 효정 씨의 주체적인 자기 증명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현실의 효정 씨들이 과연 영화 속 효정 씨처럼 스스로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
그 누구도 그녀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부터 '실소'를 금치 못했을 때, 그녀가 한 진술이 혹시나 '치매'로 인한 '착각'일 지도 모른다며 의구심을 가질 때, 그 높은 벽과도 같은 여성 노인에 대한 '편견'을 넘어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할 방법이 있을까? 개인의 처절한 의지가 아니라, 미성년이든, 노인이든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의사에 반한 성적 가해를 당했을 때 기꺼이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와 사회적인 인식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욕창은 스스로 운신이 쉽지 않은 환자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고정된 상태에 있을 때 살이 무르기 시작하여 급기야 썩어들어가게 되는 질병이다. 7월 2일 개봉하는 영화 <욕창>은 70대 퇴직 공무원 강창식(김종구 분)의 아내 나길순(전국향 분)이 뇌출혈로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해 욕창이 생기며 벌어지는 난감한 상황을 다룬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고자 하는 건 그저 '보이는 상처'만이 아니다.
외려 영화 속 '욕창'은 상징적이다. 영화 속에서 '오래도록 고정된 상태'에 놓인 건 그저 나길순의 움직일 수 없는 몸만이 아니다. 70 평생을 '가부장'으로 군림해 온 아버지, 여전히 지금도 아버지의 200만원이 넘는 연금과 그의 집이라는 경제적 영향력 아래 놓인 가족들의 부조리한 모습을 어머니 나길순의 욕창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욕창으로 드러난 가족 낡았지만 오래된 성곽과 같은 김종구 씨의 집, 그곳에 김종구 씨와 뇌출혈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내 나길순 씨가 산다. 아니, 그들 부부와 함께 나길순 씨를 '전담 간병'하는 재중동포 유수옥(강애심 분)씨가 산다.
간병인이라지만 이젠 집안 살림까지 책임지는 강애심 씨, 그녀가 마련한 밥상에 세 사람의 식사할 저녁이 준비되면 김종구 씨는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든다. 일반적으로 가족이 함께 하는 밥상의 모습은 어떨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식구를 기다리고 모든 식구가 앉으면 그때 비로소 함께 수저를 들지 않을까? 하지만 김종구 씨는 강애심 씨가 뒤늦게 아내를 데리고 와서 밥을 먹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단편적인 식사의 한 장면이야말로 이 집안에서 김종구 씨가 누리는 권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아내인 나길순 씨의 식사와 집안 일 모두를 책임지는 강애심 씨, 그녀의 바지런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투병을 해온 나길순 씨의 몸에 '욕창'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리저리 강애심 씨가 환자의 위치를 자주 바꿔도 보고 약도 발라보지만 상처는 쉬이 낫지 않는다.
그러자 김종구 씨는 딸인 지수(김도영 분)에게 연락을 한다. 그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는 딸에게 연락을 한다. 아버지의 성에 차지 않아 매사에 반목하는 큰 아들, 멀리 떨어져 립서비스만 능한 둘째 아들과 달리, 딸은 자신의 형편과 처지와 상관없이 집으로 달려가 '해결사'가 되곤 한다.
점점 심해져 가는 어머니의 욕창, 방문 간호사가 오고 강애심의 노력으로 잣아드는가 싶은 욕창에 변주를 일으키는 건 간병인 강애심이다. 어느덧 '안주인'의 자리가 익숙해져가는 강애심의 '위치', 어머니를 위해 사온 과일도, 어머니의 옷장 속 머플러도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레 강애심의 것들이 되어가는 상황이지만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나길순 씨도, 그걸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딸인 지수도 전담 간병인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렇다할 토를 달기 어렵다.
강애심이 미묘하게 경계를 오가는 상황에서 기름을 불어넣은 건 하지만 결국 강창식의 욕망이다. 어느덧 누워있는 아내를 제쳐두고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강창식은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의 불안정성으로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하는 그녀에 대해 '무리한 결정'을 도모한다. 하지만 이는 숨겨져 있던 가족의 깊은 갈등을 건드리며 파국의 끈을 당긴다.
피해자 여성들 영화의 시작은 어머니 나길순의 오랜 투병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어머니로 인해 재중동포 전담 간병인이 함께 살고, 그런 상황을 딸인 지수가 뒷치닥거리를 하는 상황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욕창이 깊어지고, 거기에 아버지의 욕망이 드러나며 보여지는 이 모순적인 관계는 그 정점에 아픈 어머니가 아니라 가부장으로서의 자신의 불편이나 불리함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거기에 더 나아가 자신의 욕망마저 편승하고자 하는 집요하고도 파렴치한 가부장의 권세가 있다.
그리고 결국 그런 '구조'에서 여성들은 피해자가 되고 만다. 욕창으로 점점 더 살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어머니는 좀 더 나은 '케어'를 받을 수 있는 '조건' 대신 아버지의 편의를 위해 집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딸인 지수는 언제나 1분 대기조처럼 달려오곤 한다. 그녀 자신이 정신적 안정을 얻을 수 없는 가정에서 말조차 못하는 어머니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 그리고 그 손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손으로 어머니가 잡아주는 장면은 모녀의 '난감한' 처지를 비감하게 드러내 보인다. 반면 아들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핑계로 이 '책임'에서 자신들을 방기한다.
강애심이라고 다를까. 아픈 남편, 무능한 아들을 대신하여 손주를 키우기 위해 이곳까지 온 그녀는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헐거워보이는 '사기'의 그물에 취약하고, 강창식 씨의 욕망 앞에 역부족이다. 딸기 한 알의 시큼한 맛이, 나길순 씨 옷장의 오래된 머플러 한 자락으로 달래지기엔 기구한 운명이다.
부모님 세대가 노인이 되어가면서 불가피하게 맞이하게 되는 <욕창>의 상황들, 하지만 그 상황의 전개는 각 가정이 저마다 '역사'로서 지녀왔던 모순적 가족 관계를 답습한다. 겉으로 보기엔 아픈 환자의 문제이지만 결국 그 속에서 곪아들어가고 있는 건 해묵은 가족의 지체된 역사다.
드레이크 도레무스는 대표적인 로맨스 영화 감독이다. 하지만, 그의 로맨스 영화는 특별하다. 데이트 앱을 통해 만나게 된 두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뉴니스 (2017)>, 감정이 통제되는 미래 사회에서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이퀼스 (2018)>, 그리고 로봇이 사랑하게 된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조(2018)>까지 당대와 미래 사회의 화두를 영화의 소재로 고스란히 방영한다.
그런 그의 전작 들에 비하면 실연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엔딩스 비기닝스>는 우리 시대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주인공을 다루는 듯하다. 거기에 그녀 앞에 나타난 '지적'이거나, '섹시한' 남자 주인공들에 이르면 이 영화가 '로맨스'의 대리 만족적 요소에 충실한 '장르'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드레이크 도레무스 감독의 영화를 그 소재적 측면을 넘어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기대를 가지게 될 것이다. 두 연인들이 음악적 공감에서 출발한 '불륜'이건(우리가 사랑한 시간), 혹은 현대의 즉석 만남과도 같은 데이트 앱을 통해 만났건(뉴니스), 혹은 감정마저 제어되어야 할 대상이 된 미래 사회에서 '감정 보균자'가 되었건 '로맨스'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지만, 결국 그 끝에서 만나게 되는 건 '사랑의 주체자'에 대한 '자존감'과 '존재론'인 것이다.
실연을 하고 술과 남자를 끊었는데 불과 1주일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크리스마스에 집에 가면 왜 함께 오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던 가족같은 남자 친구와 이별을 했다. 뿐만 아니라 직장도 그만 뒀다. 오갈 곳이 없어 언니네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다프네(쉐일린 우들리 분)의 처지다.
이곳 저곳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여의치 않다. 그래서일까. 다프네는 6개월간 남자와 술을 끊겠다며 주변에 선언한다. 하지만 '의지'는 늘 '유혹'에 취약하다. 파티와 만남에서 '음주'의 기회는 늘 주어지고, 남자들 역시 그녀 맘대로 되지 않는다. 술 대신 탄산수나 맹물을 마시며 심드렁하게 견디던 언니의 집 파티에서 그녀에게 두 남자가 다가온다.
한 사람은 현직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인 잭(제이미 도넌 분) 언니네 파티에 이어진 만남에서 다프네는 그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눴다. 또 한 사람은 그와 정반대로 '육체적인 끌림'으로 다프네를 유혹한 끈 프랭크(세바스찬 스텐 분)이다.
술과 남자를 끊겠다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다프네는 두 사람과의 '인연'을 마다하지 못한다. 더구나 자신으로 인해 언니네 부부가 싸우게 된 것을 알게 되고 집을 나와 지내게 되면서 잭과는 거의 함께 지내다시피하고, 그런 가운데 도발적으로 접근하는 프랭크와의 '육체적 관계' 역시 어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우유부단한 관계는 결국 다프네에게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안긴다.
다시 술도 마시고, 남자도 만나게 되었다는 다프네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조금 홀로 지내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런 선생님의 권유에 다프네를 고개를 젓는다. 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지만 순간순간 그와의 추억이 다프네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그런 만큼 다프네는 외로웠다. 더구나 취업도 안돼고, 언니네 집은 눈치가 보이고, 오랜만에 돌아간 집에서 어머니와의 관계는 여전히 앙금을 지닌 채 그녀를 괴롭혔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다가온 서로 다른 매력의 두 사람이 그녀에게는 '위로'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말 그 '사랑'이 위로가 되었을까? 결국 두 남자와 만나게 벌어진 사태로 인해 혼란스러워할 때 선생님은 다프네에게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서 자신의 '상실'을 위로 받으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사랑으로 인해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되는 것일까? 영화에서 드러나 보이는 것은 '실연', 그리고 새로운 만남, '삼각 관계'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잠재되어 있던 것은 다프네의 상실된 '자존감'이다. 흔히 사랑으로 인해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되는 것이라 말해지지만, <엔딩스 비기닝스>는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부추겨 세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다프네의 실연에는 그저 오랜 연인의 이별 그 이상의 '상흔'이 있다. 그녀가 집요하게 '금주'를 실천하고 했던 이유가 바로 과도한 음주로 인해 직장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그녀로 하여금 오랜 연인과의 이별을 초래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억하고 싶지 않던 그 날의 기억, 그리고 전 남친과의 따스했던 추억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리되지 않은 '아픔'을 또 다른 '연애'를 통해 '치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 그녀에게는 그녀와 언니가 '이부 자매'라는 어머니의 오랜 남성 편력이 '트라우마'로 자리잡고 있다. 자신도 어머니처럼 그렇게 남자에 의지해서 살고자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도 또 비슷한 상황에 자신을 떠밀어 버린 것이다.
원치않는 상황에 맞닦뜨린 다프네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을 들여다 본다. 상실된 자아를 '사랑'을 핑계로 위로 받으려 했음을 시인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아픔으로 현실에 자신이 벌인 일들을 핑계대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미 그녀는 어머니가 보살펴줘야 했던 그 어린 시절의 다프네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책임져야 할 '성인'이 되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달달한 삼각 관계의 로맨스를 기대하고 간 관객들이라면 아쉽겠지만, 평범한 듯 하면서도 결국은 스스로가 자신의 행복을 여는 '키맨'이라는 주제에 이르는 과정을 '로맨스적 해프닝'을 통해 설득하려 하는 <엔딩스 비기닝스>는 꽤나 설득적이다.
심리학자 김영아 교수의 <내 마음을 여는 그림책>에서 자존감을 스스로 존중하는 마음이자,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 정의내린다. '자존감'이란 말이 유행처럼 중요시여겨지는 시대이다.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고, 자신을 손해보지 않아야 한다고 선언처럼 울려퍼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자존감이란 아무리 보잘 것없어도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존감은 내가 잘 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과도하게 술을 마셔서 벌어졌던 전 직장에서의 일을 담담하게 '고발'하고, 전 남친에게 이별의 선물을 전하며 비로소 다프네는 자신의 무너진 자존감을 일으켜 세운다.
같은 책에서 '어른다움'이란 괜찮은 나와 부족한 나를 모두 나로 인정하고 통합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엄마'가 되어가며 비로소 행복한 미소를 활짝 짓는 다프네는 더 이상 어린 시절을 핑계대지 않고, 자신의 결점조차 품어아는 '어른됨'을 상징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자신의 부족한 면조차 기꺼이 자신으로 껴안을 때 비로소 한 사람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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