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셰익스피어이래 새로운 서사가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것이 거실을 차지한 자그마한 네모난 화면이건, 암흑의 공간 아래 다중을 모아놓은 넓직한 화면이든, 날이면 날마다 사람들의 맘을 재미난 이야기로 ‘좌지우지’해야 할 대중문화 사업에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면 비틀고 뒤집고, 하다못해 저 먼 우주에서부터 심해까지 뒤져가며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절대 숙명이자 숙원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언제부터인가, 한 시대를 올곧이 다룬 시대극도, 정형화된 특정 분야를 다룬 장르물도 자신의 분야만을 고집하기는 더는 힘들어 진 형편이다. 그런 와중에, 2012년 대한민국 텔레비전 드라마계에서는 마치 서로 ‘통’하였다는 듯이 앞다퉈, ‘시대를 거슬러’ 사랑을 논하고, 역사를 논한 작품들이 우후죽순 등장하였다. sbs의 <옥탑방 왕세자>을 시작으로, tvn의 <인현왕후의 남자>, mbc의 <닥터 진>, sbsㅇ의 <신의>까지 네 작품이 ‘타임슬립’을 소재로 하여 기존 드라마의 형식적 틀을 깨고, 신선한 시도로 시청자들을 찾아들었다.
1. ‘시간’이라는 딜레마, 혹은 아이템
원론적으로 시간의 변이에 대한 상상력의 출발은 언제나 ‘아인슈타인’을 걸고넘어질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은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을 통해, 빛 등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물질들이 상대적이며, 가상의 조건에서 빛의 속도는 시간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이상적인 이론을 펼쳐졌고, 지금 여기에서, 그때 거기를 넘볼 수 있는, ‘노력’하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는 인간적 ‘로망’이 잉태되었고, ‘타임머신’, ‘평행우주론’ 등의 수많은 상상력의 산물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와 ‘그때 그곳’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문화에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흘러가는 그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는 시간은 엄밀히 따지자면, 현대 물리학의 정의처럼, 시간과 공간의 조합, 즉, 시공간의 연합체로서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다. 즉, 지금 이 장소에서 우리가 존재하듯이, 그때 그 장소에서 존재하였다라는 ‘역사적’ 공간감을 전제로 한다. 그러기에 타임슬립, ‘시간을 건너뛴다’라는 것은, 결국 지금 이곳에서, 그때 그곳까지 공간의 확장을 의미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고, 의사가 환자를 고치는 뻔한 서사라 할지라도, 그것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곳과, 그때 그곳이 함께 배경으로 제공되어, 결국 공간의 확장을 통해 이야기가 풍부해 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역사극이나, 현대물이라는 제한된 장르를 뛰어넘어 이를 결합한 새로운 ‘퓨전’이라는 형식의 ‘싱싱함’을 전제로 하고 들어간다. 마치 게임의 ‘아이템’을 새로 하나 장착하듯이.
<옥탑방 왕세자>의 초반,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조선의 왕세자(박유천 분) 일행이 서울 한복판에 떨어져 겪게 되는 에피소드들, 한글 등 이 시대의 문물을 제대로 모르고, 이젠 고궁이 되어버린 곳 앞에서 ‘문을 열라’고 외치며, 다짜고짜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을 ‘내오너라’는 해프닝은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것들을 새삼 ‘낯설게’ 함으로써 시간을 건너뛰었다는 설정 자체를 풍부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반면, <닥터 진>과 <신의>에서는 반대로 현대의 인물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이미 역사를 알고 있는 자가 역사적 상황을 조우했을 때의 재미 역시 또 다른 흥밋거리를 제공한다. 자신(진혁; 송승헌 분)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알고 봤더니, 흥선 대원군(이하응 분)이었다던가, 그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 죽어간다고 안고 찾아왔는데, 그 아이가 바로 후에 고종 임금이 된다던가, 시청자들은 자신들 역시 상식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등장인물을 통해 조우함으로써 당혹감과 더불어, ‘패’을 하나 쥔 듯한 의기양양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 ‘시간을 건너뛴다’는 것은 하나의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의 존재의 이동이 되는 것으로 이미 한 장소에서 형성된 기억(역사)향한 도전이 되는 것일 수도, 이미 완료된 존재의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일 수도 있다. 즉 이 경우, 시간은 시간을 건너 뛴 존재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데 딜레마로 작용한다.
<닥터 진>과 <신의>에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 간 주인공들은 모두 의사이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자신이 이미 체득하고 있는 의학적 지식과 과거의 의학 사이에 ‘갭’을 가진다. 대표적으로 그들이 만들어 내는 ‘항생제’가 그것이다. <닥터 진>에서 진혁(송승헌 분)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 ‘항생제’를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지만, 그가 살려놓은 사람이 결국은 다시 자신의 운명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던가, 그의 의술에 따라 역사가 뒤바뀔 운명에 처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신의>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의 의술을 알고 역시 ‘항생제’를 만들어 내려했던 유은수(김희선 분)가 졸지에 ‘신의’가 되어 그로 인해 생명의 위협에 봉착하게 된다.
현대로 왔을 때는 이러한 딜레마는 등장인물의 인식의 딜레마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옥탑방 왕세자>에서 왕세자(박유천 분)는 자신이 현대로 날아 온 이유가 빈궁 살인 사건 때문이라 믿고, 현대에서 빈궁을 다시 만나 그녀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왕세자의 문제 해결 방식은, 그가 과거에서 겪은 문제가 왜곡되었던 것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인해, 오히려 현재의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여자 주인공(박하; 한지민 분)을 위기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타임슬립’을 소재로 했을 때, 가장 결정적인 딜레마는, ‘건너뛰기’는 했으되, 시간을 건너 뛴 공간에서 과거에 간 현대인이든, 현대로 넘어 온 과거인이든, 또 하나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옥탑방 왕세자>의 왕세자 일행은 현대로 떨어진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박하(한지민 분)’네 옥탑방을 고수하지만, 정작 박하와 사랑이 이루어졌을 때 왕세자 일행도, 왕세자도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로 돌아가야만 했다. <닥터 진>의 진혁 의원도 홍영래의 수술 과정에서 현대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신의>의 유은수에게도 다시 돌아가야 할 날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 <인현왕후의 남자>처럼, 이 딜레마를 극복할 ‘부적’이라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거나, <신의>의 유은수처럼 중복 ‘타임슬립’을 행하기도 하지만 현재와 과거라는 시간적 장애를 없앨 완벽한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이렇게 ‘타임슬립’이라는 드라마적 장치는 때로는 딜레마가 되어 주인공의 행로의 장애가 되고, 때로는 마치 게임에서 주어진 아이템처럼 주인공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어, 구태의연한 서사를 확장하고 풍부하게 한다. 그렇다면 2012년의 네 드라마는 전가의 보도와도 같은 ‘타임슬립’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충분히 충족해 냈을까?
2. 시간을 달리는 사랑
아마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수 사이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보다 더 치명적인 사랑이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두 남녀의 사랑이 아닐까? 그러기에, <옥탑방 왕세자>를 비롯해 <인현왕후의 남자>, <닥터 진>, <신의>까지 모두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을 그려내는데 있어서는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닥터 진>의 경우, 일본 드라마 <jin-仁특>이 에도 막부 시대로 넘어간 의사의 인술을 그려내는데 치중한 반면, 한국의 <닥터 진>은 원작에 없는 여주인공의 약혼자 ‘김경탁’이란 인물을 만들어 결국 구한말 격동기에 휩쓸린 현대의 의사보다는 세 주인공의 삼각관계를 풀어내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신의>도 마찬가지다. 80년대 사회를 상징적으로 그려냈던 모래시계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당찬 포부와 달리,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킹메이커도, 진정한 개혁을 이룬 왕이란 담론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채 최영-유은수 커플의 사랑만이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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