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오래 했더니.....'
선배는 답답한 듯이 말했다. 마치 메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상황에 맞춰 정해진 표현을 하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막막해하셨다. 소향기 팀장을 보니 그 선배가 떠올랐다. 

jtbc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주인공 염미정의 해방클럽에 신입회원이 들어왔다. 그간 염미정을 비롯하여 박상민 부장, 조태훈 과장 등 회사 내 조직에 적응을 못하는 것같은 이들 세 사람에게 꾸준히 회사 내 동아리 활동 참여를 독려하던 행복지원센터 소향기 팀장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이들 세 사람을 독려하던 그녀, 그랬던 그녀가 세 사람이 만든 '해방 클럽'을 한번 참관한 후 스스로 '해방 클럽'의 신입회원 신청을 하였다. 

드라마가 시작한 이래 행복지원센터 팀장으로 익숙한 소향기 씨의 표정, 그런데 그녀가 말한다. 이제 다른 표정을 지으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고. 행복지원 센터 팀장에 걸맞는 표정을 지어오던 그 표정이 이제는 상갓집에 가서 그녀를 곤란하게 할 만큼 '혼연일체'가 되었다. 

 

 

해방은 어떻게 오는가
이제는 <나의 해방일지>가 아니라, <나의 추앙일지>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등장 인물들의 '연애사'가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극 초반 우중충하게 출퇴근만 한다며 돌려섰던 시청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조용히 스쳐지나가듯 등장한 소향기 팀장의 장면은 왜 이 드라마가 여전히 '추앙일지'를 넘어 '해방일지'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그리스 연극 속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칼, 융은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며 거기에 걸맞는 '역할'을 해나가는 모습으로 정의한다. 단적으로 '~답게'이다. 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답게, 엄마는 엄마답게, 문제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사회적으로 주어진 이 '역할'에 맞춘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괴리'를 느끼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내 자신(self)'과 '페르소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말이다. 

조직 부적응자로 행복 지원센터를 들락날락했던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세 사람으로 말하자면 직장이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떨그덕거리던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남들 다하는 회사 내 동아리에 드는 것도 마다하고, 사람들이랑 편하게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던 세 사람, 떠나는 구씨가 염미정에게 이젠 '추앙', '해방', 이런 거 하지 말고 '평범'하게 살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미정은 그런 구씨를 붙잡는 대신, 서운하다는 말로 두 사람의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자신을 '평범'하다 하지만 '유모차를 끄는' 대신 아이를 업어 키우겠다는 미정,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구씨를 한 살 배기 아이처럼 업어주고 싶다는 미정은 우리 시대의 '페르소나'와는 꽤나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인다. 

어쩌면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이들 세 사람의 '해방 클럽'은 일찌기 세상이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기 버거웠던 세 사람의 '해방 선언'이었는지도. 그런데 그런 세 사람 앞에 '신인 회원'으로 등장한 소향기 씨는 그런 세 사람과 전혀 반대의 지점에 서있는 사람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너무 충실히 살다보니 그 페르소나가 자신이 되어버린 사람, 그래서 이제 그 '가면'을 벗으려 해도 벗겨지지 않는다는 사람, 남들의 '행복'을 열심히 지원하다보니, 정작 자신은 '미소 가면'이 달라붙어 버린 사람, 그 사람에게 '해방'은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을 수 있는 얼굴 근육을 가지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박상민, 조태훈, 염미정, 그리고 소향기라는 양 극점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서성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어설픈 페르소나를 원망하고, 또 때로는 어느덧 자신이 되어버린 '페르소나'로 인해  갑갑함을 느끼며 말이다. 드라마의 시작부터 주구장창 출연진들의 출퇴근 길 모습을 비추던 드라마, 그 '출퇴근'에 공들인 시간은 바로 이 드라마가 길바닥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저마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들을 최선을 다해 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몇 시간씩 출퇴근을 하며 주인공 염미정, 염기청, 염창희를 비롯하여, 그들의 아버지 염제호, 어머니 곽혜숙, 그리고 또 다른 등장인물들 모두 참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간다. 젯상 앞에서 고된 노동으로 무너진 관절로 절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디 일만 하나, 역할에 걸맞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해방'은 그렇게 애쓰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헌사'이다. 이미 당신들은 충분히 애쓰고 살아가고 있으니, 더는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고. 위로하지도, 그렇다고 조언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주겠다는 '해방 클럽'의 강령은 바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대로의 '긍정'을 뜻하는 게 아닐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저 가끔 만나 식사가 한 끼 나누던 선배가 '존경'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던 건, 선배가 직장 생활로 인한 '페르소나'가 어느덧 자신이 되어버린 모습을 고민하던 그 즈음이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이라는 정현종의 시 <방문객>처럼 말이다.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의 시간이 그 선배를 연륜이 넘치는 인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저어'하던 소극적인 염미정은 구씨를 '추앙'하고, '추앙'당하며, 그리고 '해방 클럽'을 통해 자신을 찾아간다. 미정의 해방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처럼 그냥 그대로, 생긴대로 미정이 답게 사는 것을 당당하게 가슴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연 소향기 팀장의 '해방'은 어떤 모습이 될까? 아침 방송의 김창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한다. '가면' 몇 개 안쓰고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by meditator 2022. 5. 21. 00:58

인생은 고해(苦海)다. 일찌기 붓다의 설법이다. 이제 9회차를 경과하고 있는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네 인생사 고해의 바다에 밀려오는 제 각각의 파고를 경험하게 된다. 9회 차에 들어 전면에 등장한 동석(이병헌 분)과 선아(신민아 분)를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일까? 

 

 

십대 청소년 시절 서울에서 전학온 선아와 만난 이래, 이제 마흔 줄이 될 때까지 동석은 선아와 만날 때마다 인생이 꼬였다. 그렇게 얼핏 이야기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이야기같았다. 트럭 하나를 몰고 제주 인근 섬을 돌며 장사를 하는 동석, 그런 동석이 사는 제주에 그의 인생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 선아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보란듯이 그를 농락한 채(?) 떠나고, 다시 그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잘 살 것 같던 선아가 피죽 한 그릇도 못얻어먹은 얼굴로 돌아왔다. 본인 말로는 발을 헛디뎌서라는데 해녀들이 구하지 않았으면 물고기 밥이 될 뻔했다. 그런 선아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동석의 신경을 거스른다. 죽지 않았으면 됐다고 하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선아를 찾아 온제주를 헤맨다. 

동석과 선아의 상흔 
해묵은 연인처럼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 선아에게 따지듯 그때 왜 자신을 버렸냐던 동석, 그로부터 그저 오랜 연인만이 아닌 의지가지없던 두 '어른 아이'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아버지가 죽고, 물질을 하던 누나가 죽자 어머니는 아버지의 친구네 집으로 들어갔다. 말이 두번 째 부인이지, 병석에 누운 본처의 병수발을 하는 것이었고, 두 의붓 아들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용납할 수 없었던 동석은 매일매일 두 의붓아들에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보란듯이 그 상처를 들춘다. 

그렇게 얼굴이고, 몸이고 시퍼렇게, 검붉게 멀쩡한 곳이 없는 시절을 살아가던 동석에게 기대어 온 아이가 선아였다. 서울에게 전학왔다는 중학생 아이가 집에는 안가고 매일 동석이 가는 피씨방에서 게임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을 하다 망한 선아의 아버지가 의탁한 큰아버지네, 하지만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주먹다짐을 하며 싸웠다. 그렇게 돌아갈 곳이 없는 선아를 동석은 품어줬다. 

하지만 첫사랑이자, 첫정이던 선아는 동석의 친구에게 몸을 허락했고, 그걸 안 동석이 폭주하자 동석이 보는 앞에서 깡패라며 신고를 했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제주 돌담 사이 삐져나온 잡초같은 동석이 유일하게 마음을 줬는데, 그런 동석을 선아가 짓밟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버렸냐는 동석의 질문에 선아는 동문서답처럼 말한다. 사랑하는 오빠에게 자신을 망가뜨려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냐고. 

자신이 맞은 상처를 보여줘 엄마를 고통스럽게 하려던 것처럼, 선아도 그런 식으로 아빠의 관심을 끌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아의 시도는 아빠의 사랑을 갈구하는 딸을 놔둔 채 바다로 차를 몰아버린 아빠의 이른 죽음으로 무산된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서 바다로 빠져들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한 선아는 오랜 지병, 우울증을 얻는다. 

 

 

선아의 우울증은 동석의 맞은 상처와도 같다. 의붓아들에게 매일매일 맞고, 그걸 엉마에게 보여주듯이, 하지만 그런 마음의 아픔을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선아는 자신의 안에 그 상흔을 차곡차곡 쌓아 자신을 갉아먹어간다. 그리고 그 상흔이 이제 선아의 가정을 무너뜨렸고, 아이마저 잃을 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동석이라고 다를까, 선아가 그렇게 떠나고 의붓아버지네 집을 털어 다시는 제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난 동석, 하지만 뭍에서도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제주로 돌아온 동석,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도 않고 트럭 하나를 몰며 제주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김훈 작가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인생은 고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종교적 교리에 의하면 인간사 희노애락의 욕망에서 '해탈'하면 되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런가, 그런 '고해'의 삶, 그런데 김훈 작가는 그저 인생이 그런 거라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인간의 삶은 다 저마다의 욕망과 욕구를 가지고 맞물린다. 내 맘이 네 맘같지 않은 그런 모든 일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고해'의 풀을 만든다. 그저 인간사가 다 저마다의 이해 관계에 얽혀 이루어지는 것임을 '수용'한다면 될 일이라고 김훈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이 저마다 이루어져 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동석과 선아는 여전히 그 '어린 시절의 상흔'에 사로잡혀 있다. 에이 설마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느냐는 선아의 농반 질문에 동석은 말끝을 얼버무린다. 동석은 늘 자신의 인생이 선아 때문에 꼬였다고 말한다. 마흔 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동석의 인생은 선아 때문에, 엄마 때문에 라는 그 '트라우마'로 부터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동석의 떠돌이 삶이 드러내는 외상, 그리고 선아의 의지가지 없는 우울증의 내상은 모두 여전히 그들이 어른이 되었음에도 '어른 아이'의 그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들이 겪은 '상실의 시간'은 과거가 되었고, 그들은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동석도 선아도 그 상실을 겪은 그 시절에 멈춰있다.

그런 '어른 아이'인 상태인데도 선아는 자신이 '엄마'로서의 주장을 펼친다. '아이만 있다면, 자기 삶에 유일한 의미인 아이만 있다면',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며 예전 아빠와 함께 살던 곳을 꾸미고 있다. 

그런 선아에게 동석은 말을 건넨다. 재판에서 져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없게 되더라도 너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어쩌면 동석은 인정하고 싶지만 그의 내면은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했던 어머니의 삶을. 그래서 동석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동석에게 선아의 등장은 해묵은 인연의 결자해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석이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내면의 아이를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않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서로에 대한 '감정'을 놓지 않은 두 사람, 그 '온기'는 아직도 두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고해'의 파고를 넘어서는 힘이 되지 않을까. 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헤집고 보면 다들 내 안에 '아이'를 놓지 못하고 있다. 노희경 작가는 동석과 선아를 빌어 말하고 있다. 그제 그만 그 아이를 놓아주라고.그 시절의 엄마도, 아빠도 그저 각자 자신의 삶을 버겁게 짊어지고 살아갔던 한 사람들일 뿐이었다고. 타인들의 삶으로 인한 고해의 바다에서 그만 허우적거리고 넘어서라고.  진정한 어른됨의 삶을 살아가라고. 



by meditator 2022. 5. 8. 16:23

36살, 안대성(이광수 분)은 이번에도 또 떨어졌다. 처음에는 야심차게 5급 정도는 했다. 하지만 연이은 낙방에 눈을 낮췄다. 9급 정도야, 그러다 보니 어느새 36살이 됐다. 오랜 연인 도아희(설현 분)가 그를 데리고 집에 간 날,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자기 소개를 듣고 글러브를 꼈다. 다시 그를 만나면 부녀의 연을 끊겠다고 했다.

고시원 벽에 그가 붙인 시험 공지 게시물이 뜯어도 뜯어도 끝이 없다. 이제 또 시험을 볼 의지도, 여력도 없다. 짐을 싸서 터줏대감같은 고시원을 떠난 대성이 돌아간 곳은 대성마트이다. 그런데 '대성마트'의 '대성'이 길거리에 나뒹군다. 대성상회 시절부터 지금의 대성마트까지 그곳을 이끌던 대성의 어머니, 한명숙 여사가 비로소 마트 경영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마트 이름을 아들 이름 대성에서 자신의 이름 '명숙'의 이니셜 'ms'로 바꾼 한명숙 여사, 끝없는 공시 터널에서 빠져나온 아들에게 '독립'을 요구한다. 

 

 살인자의 쇼핑목록 ⓒ TVN

 

만년공시생 마트 캐셔가 되다 
고시원에서 공시 준비를 해도 늘 돌아갈 집이 있었던 대성은 졸지에 마트 건물 옥상에 창고로 쓰던 옥탑방으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늘 자기 집처럼 드나들던 마트의 캐셔 자리 수습이 됐다. 그런데 마트가 자기를 대접안해준다고 마트가 떠나가라 유세를 떠는 부녀회장에게 그녀가 지난 시간동안 사간 스타킹 갯수와 금액까지 안내하며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든다. 공시생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그의 '달란트'는 '마트'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인자의 쇼핑목록>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tvn 수목 드라마는 이렇게 만년 공시생 안대성과 그의 집이자 일터가 된 'MS마트'를 이렇게 소개한다. 알고보니 어머니가 '대성상회'를 하던 시절부터 카운터를 지키던 '캐셔 경력 30년, 우리 엄마 슈퍼는 내가 지킨다'던 청년도 세상의 흐름에 따라 만년 공시생이 되고말았다. 자칭 타칭 '비공식 슈퍼두뇌'이지만 그 슈퍼 두뇌가 자신의 능력을 살피지 못해 방황하는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슈퍼집 아들'이란 이유로 그를 좋아했던 연인이 소개팅 자리에 나갈 처지가 되었다. 

사실 능력은 있지만 현실은 '루저'인 주인공, 낯설지 않다. 현실에서는 파리날리는 만화방 주인이지만 사건에 있어서는 '천재적 능력'을 가진 <탐정; 리턴즈>의 강대만?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을 각색하고 감독한 이언희 감독이 <살인자의 쇼핑목록>의 연출을 맡았다. 거기에 장르물 매니아들을 열광케 했던 독특한 구성의 스릴러 <원티드>, <오늘의 탐정>를 쓴 한지완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이언희 감독, 한지완 작가가 선택한 공간은 '슈퍼'이다. '상회'이던 시절부터, 재개발을 앞둔 현재까지 동네의 중심, 하지만 어느덧 '쓱싹배송, 새벽배송' 등에 밀려 그 자신이 '재개발'되게 생긴 오랜 동네의 터줏대감, 그만큼 그곳에 온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동네의 모든 것들이 오가는 곳, 한때는 대성상회였던 지금의 MS마트가 '현장'이다. 

 

 살인자의 쇼핑목록 ⓒ tvn

 

마트 캐셔의 숨겨진 능력 
당연히 스릴러 장르이니만큼 '사건'이 등장한다. 다른 친구들이 다 학원을 갈 때 홀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마트 단골손님 아홉살 세빈이가 가져온 주인을 잃은 슬리퍼 한 짝, 그 주인이던 여성이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런데 그 여성의 사체를 발견한 사람이 다름아닌 안대성이다. 현장에 온 경찰에게 직업과 우울증 병력에 이르는 그녀의 사소한 프로필까지 줄줄이 꿰는 안대성, 연인이자 경찰인 도아희가 없었다면 딱 용의자이다. 

일찌기 대성상회이던 시절, 5만원 권을 가지고 초코파이 한 개를 사러 온 위폐범을 그가 가지고 온 위폐 번호로 들통나게 만든 어린 시절의 안대성, 통통했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지만 여전히 그의 '슈퍼 두뇌급' 능력이 마트를 찾은 모든 이들을 슈퍼컴퓨터처럼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대성의 능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찌기 중학교 시절 선생님조차 혀를 내두르던 '오지랖'이라던 그 관찰력과 추리력이 발동한다. 시신의 목에 조른 흔적, 그리고 세빈이가 슬리퍼 한 짝을 찾은 성당 구석에 감겨진 스타킹, 그리고 혼자 사는 여성들의 집에 출몰했던 배달 봉투 안의 스타킹 등을 조합하여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직접 마트에서 파는 모든 스타킹을 가져다가 목을 조를만한 '탄성'의 능력치조차 직접 실험하면서. 

하지만 능력자는 대성만이 아니다. 일찌기 대성상회 시절 셔터문을 내린 상황에서 자신의 목을 조르던 위폐범을 쌀봉지로 가격해 제압한 왕년의 배구 선수 한명숙 여사에, 동네 소식은 모르는 것이 없는 마트 알바에 화장품 외판원 투잡을 뛰는 마트의 '공산' 코너 담당 아줌마, 대성은 들지도 못하는 물건을 거뜬히 들어내는 마트 '알바' 등등 소소한 일상의 한 축을 구성하는 인물들이 스릴러 장르의 주요 인물로 저마다 한 몫을 한다. 

'범인은 마트에 있다', 대성상회 시절 위폐범이 이제 할아버지 분장을 하고 대성의 주위를 맴돌고, 홀로 살며 우울증에 시달리던 여성에 이어, 누군가 자신을 스토킹한다며 마트에 와서 울며 호소를 하던 여성이 그녀의 집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 피해자들, 혹은 가해자들의 흔적이 마트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우리가 '버려주세요'라는 말로 남기고 온 영수증 안에 마트를 다녀온 모든 이들의 신상명세가 드러나 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소비한 모든 품목이 그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 기발한 '현대 사회'의 '인증서' 마트를 중심으로 <살인자의 쇼핑 목록>은 시작된다. 

신선한 구성, 그리고 그 신선한 플롯 속에 움직이는 생동감넘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이웃들의 스릴러, 이 흥미진진한  <살인자의 쇼핑목록>이 선전하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22. 5. 5. 22:39

영화 <부산행>, <염력>, <반도>에 이어 최근 <방법 재차의>, 그리고 드라마 <방법>, <지옥>, <돼지의 왕>에 이르기까지 연상호 감독이 각본을 집필하거나, 연출한 작품들이다. 이젠 '연상호월드', 혹은 '연니버스'라는 고유명사가 등장할 정도로 초월적 세계관과 그로 인해 혼돈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상호 감독의 작품은 하나의 고유한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4월 29일 티빙을 통해 공개된 <괴이>는 그러한 연상호 감독 고유의 세계관에 기반한 또 하나의 시리즈이다. 연상호 감독이 각본에 참여하고 장건재 감독이 연출한 <괴이>는 이른바 '연니버스'의 전형성을 그대로 드러냄과 동시에, 연상호월드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귀불, 봉인이 풀리다
'발견하지 말았어야 했다.'라고 <괴이>의 포스터는 말한다. 천보산의 절터에 오래전 묻힌 불상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거기에 '관광 산업'이라는 세속의 욕망이 곁들여 진다. 진양 군수 권종수(박호산 분)는 이를 파내서 사람들이 이 불상을 보러 진양군에 올 '관광산업'의 꺼리로 삼고자 한다.

하지만 스님들은 이에 반대한다. '귀불', 말이 불상이지 오래전 악귀가 들린 이 불상은 티벳어로 씌여진 가리개로 '봉인'이 되어 묻힌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 '봉인'이 풀리는 순간 세상에 재앙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런 스님들의 반대가 '관광 산업'의 열망을 가라앉힐 수 없다. 

예정대로 진행된 출토작업, 귀불의 눈을 가렸던 가리개를 치우자 그 눈을 마주친 인부로 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오래전 자신과 어머니를 학대했던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 자신을 구타한다고 생각한 순박한 청년이었던 인부는 결국 아버지로 오인하여 술집 주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어깨뼈가 튕겨져 나올 정도로 용을 쓰며 폭주한다. 

게다가 귀불이 출토되자 진양군에는 검은비가 내리고 그 비로 인해 농작물의 피해를 본 사람들이 군청에 모인다. 그리고 그들이 보게 된 귀불, 사람들은 저마다의 지옥 속으로 빠져들어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처절한 폭력의 레이스를 벌인다. 

그것이 좀비였든, 혹은 지옥의 사자였든, 그리고 귀불이었든 연상호 월드에서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지옥과 같은 상황'은 시작된다. 사람들은 그 자신이 '지옥'의 불쏘시개가 된다. 가장 평범한 갑남을녀가 귀불의 젯밥이 되어 서로를 해친다. 

 

 

차별성인가 한계인가 
그리고 이런 초자연적, 혹은 초현실적인 '현실의 지옥도'를 '배양'하는 건 부조리한 인간의 권력이거나, 그 권력에 편승한 인간들이다. 부산행에서 김의성이 분한 '용식'은 귀불을 파내 관광 산업의 재미를 보려는 박호산이 분한 권종수가 되어 돌아온다. 그들은 자신의 사적 욕망을 공적인 권위에 의존하여 풀어내고 그로 인해 '초현실적인 파멸'의 방아쇠를 당긴다. 군수라는 자릿값으로 큰소리를 펑펑치다가, 자신의 수하조차 필요에 의해서 기꺼이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비겁한 상사, 하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한참 어린 청년 앞에서 기꺼이 비굴함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나약하고 비겁한, 그래서 비열한 모습이 '권력'이나 '권위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몬다. 

<괴이>에서 이전 연상호 월드의 작품들과 차별성을 들자면 보다 강력해진 폭력성이다. 주인공보다 더 도드라진 캐릭터 곽용주(곽동연 분)에 의해 대표되는 무자비한 폭력이다. 이제 막 출소한 용주, 하지만 외려 그의 폭력성은 더욱 증폭되었을 뿐이다. 자신과 갈등을 일으켰던 한도경(남다름 분)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 그의 폭력성은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도' 안에서 외려 쾌재를 부른다.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검은비를 맞은 사람들, 혹은 귀불의 눈을 본 사람들을 앞장서 죽이기 시작한다. 사람을 죽이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지지부진했던 그의 삶에 있어 유일한 즐거움인양, 결국 그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음에 이를때까지 폭력의 질주는 그치지 않는다. 

곽용주로 대표되는 가학적 폭력에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린다. 그리고 어느새 만인대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우월한 수컷인 양 구는 곽용주가 내세운 힘의 논리 앞에 따라간다. 피가 튀기도록 때리고, 찌르고.....  무작정 나타나 사람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지옥> 속 죽음의 사자들처럼,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진양군에 지옥을 선사한 귀불의 등장이 주는 공포를 설득할 것은 보다 잔인한 설정 밖에 없다는 듯이 귀불의 등장 이후, 특히 진양 군청에 모인 사람들의 집단적 히스테리는 누가 더 잔인하게 '피의 카니발'을 벌이는가하는 '질주'이다. 

 

 

가족만이 구원이다? 
그렇게 개연성과 상관없는 초현실적인 공포, 그리고 거기에 제물이 된 사람들이 벌이는 폭력과 피의 향연, 그런 가운데 역시나 <부산행> 이래로 드라마의 중심은 '가족애'이다. <월간 괴담>의 정기훈(구교환 분)과 이수진(신현빈 분)은 티벳어를 능수능란하게 해석해 낼 수 있는 고고학과 문양 해석의 전문가들이다. 또한 이들 부부는 얼마전 잃은 어린 딸로 인해 서로에 대한 짙은 감정적 앙금이 남아있다. <괴이>는 초현실적인 현상으로 인한 사람들이 벌이는 피의 카니발이라는 한 축에 곁들여, 정기훈 이수진 부부의 트라우마를 귀불에 대한 제압 과정을 통해 해소해 나간다. 
거기에 또 한 축은 파출소 소장이자 한도경의 엄마인 한석희(김지영 분)의 모성애이다.


정기훈과 한석희는 아내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진양군청을 향한다. 부산행>의 장점이자 단점이 '신파'였듯이, 결국은 <지옥>의 감동을 끌어낸 것이 박정민 원진아 부부의 자식을 향한 살신성인이었듯이, <괴이> 역시 정기훈과 한석희 등의 '가족애'를 통해 드라마를 끌어간다. 

부부였든 아는 사람이었든 부하 직원이었든 상관없이 귀불로 인해 정신줄을 놓고 칼부림을 하거나, 혹은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거나, 위험에 내맡기는 상황에서 정기훈과 한석희의 몸을 던진 가족애는 당연히 흑과 백처럼 대비를 만들어 낸다. 고고학자거나, 파출소장이라는 그들의 '직분'은 '가족애' 앞에서 유명무실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넘치는 사람들의 폭력적 신들림이 밑도 끝도 없는 과한 폭력성으로 인해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듯 정기훈과 한석희의 가족애는 상투적이다. 또한 곽용주와 한도경의 우정인지, 사랑인지 미묘한 감정선은 뜬금없다. <괴이>는 연니버스 체인점의 메뉴얼을 다 갖추었지만 어쩐지 소스는 과하고, 재료는 설익은 듯 느껴진다. 

그런 가운데 더욱 아쉬운 것은 여성 캐릭터들이다. 김주령은 <오징어 게임>보다 더욱 소모적인 캐릭터로 사라진다. 신현빈의 출연으로 관심을 모은 이수진은 아이를 잃은 상실감으로 내내 전전긍긍한다. 문양 해석학자로서의 역할은 '장식적'이다. 파출소장 한석희는 제 아무리 파출소장이라 하더라도 부하 경찰에게 '야야' 거리는 호칭이나 '반말'로 일관하는 태도는 한석희라는 캐릭터의 미덕을 상실케 한다.



by meditator 2022. 5. 5. 22:25

5월이다. 부모님도 계시고, 자식들도 있는 연배의 사람들이 5월에는 외식은 꿈도 못꾸겠다는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들을 한단다. 어버이날도 있고, 어린이 날도 있는 5월, 그래서일까? <우리들의 블루스> 호식과 인권의 이야기가 쓰리게 다가온다. 

호식(최영준 분)과 인권(박지환 분)의 딸 영주(노윤서 분)와 아들 현(배현성 분)이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지역 균형 선발로 서울대 의대 갈 날만 바라고 공부에 매진해 왔던 영주는 임신임을 알고나서 자신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거라는 이유로 아이를 지우려 했다. 하지만 임신 주수가 이미 6개월을 넘어 중절조차 쉽지 않은 상태, 산부인과에서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결국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당하게 아이를 가지고서도 학교를 다니게 해달라고, 지역균형 선발로 대학에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던 영주,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고서라도 아이 아빠 노릇을 하겠다던 현도 막상 아버지들 앞에서는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아버지가 그냥 아버지들인가. 

아버지로 살다; 인권과 호식
한때는 주먹으로 날리던 현의 아버지 인권은 시장에서 순대국밥을 만다. 말끝마다 아직은 이새끼 저새끼 하지만, 아직은 '내 꺼'라며 현을 애지중지한다. 그의 불만이라면 그저 현이 호식의 딸내미 영주에게 늘 전교 1등을 내주고, 전교부회장인 거다. 그래도 자기보다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아들내미가 그의 '자랑'이다.

호식이라고 다를까, 은희가 가난해서 버렸다던 호식이, 그런 호식이가 시장에서 얼음을 나른다. 그런 와중에서 생선까지 굽고, 제철 과일까지 챙겨 딸내미 영주의 아침상을 마련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구멍난 양말에 늘어진 티쪼가리다. 둘 다 아내가 떠나고, 그저 아들내미, 딸내미만 보고 여기까지 왔다. 말끝마다 호식이는 영주가 대학만 가면 저 바다에 배 띄워 낚시나 하며 살겠단다. 

그렇게 아이들 대학보낼 날만 바라며 정신없이 달려온 두 사람 앞에, 아이들이 사랑한다며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 심지어 현은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겠다고 둘이 살 집만 마련해 달란다. 청천벽력이다. 두 아버지는 자신들답게 반응한다. 인권은 차마 현을 때리지 못하고 집안을 다 때려부순다. 호식은 자신의 따귀를 때리며 하염없이 운다. 

 

 

처음 현이 영주의 이야기를 했을 때 인권은 늘 자기 아들 앞에 한 자리를 차지하던 영주라는 걸림돌이 사라진 걸 안심했다. 호식은 영주의 이야기를 듣자 믿을 수 없다며 함께 병원에 가서 확인하자 했고, 그 다음엔 아이를 지우자고 한다. 

영주와 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두 사람의 다음날, 일을 하는 인권과 호식, 두 사람에게 지나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동네에서 피붙이처럼 친했던 두 사람, 그래서 호식을 겁박하면 인권이 무릎을 끓던 시절, 이 담에 아이들이 크면 사돈을 맺자며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내가 떠나고 밥통에 밥알도 말라버린 채 영주가 배가 고프다고 한 날, 호식은 그래서 가장 친한 인권을 찾아 돈을 구했다. 하지만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번에도 그렇게 호식은 인권으로부터 돈을 가져갔고, 그 돈은 도박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인권의 태도가 달랐다. 인권은 영주에게 다가가 '돈주세요'하라고 하고, 그런 영주에게 돈을 주었다. 그리고 호식에게 말했다. 딸 앵벌이 시켜 돈얻으니 좋냐고. 그 말 한 마디가 호식을 변하게 했다. 아내가 떠나도 끊지 못하던 도박을 인권의 그 한 마디가, 딸의 손에 얹힌 돈다발이 호식을 변하게 했다. 대신 인권과 호식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부모라는 자리 
피붙이같던 인연을 끊고 자식키우는 목표 하나로 달려온 두 사람이다. 이제 아이들이 번듯한 대학만 가면, 고지가 저긴데, 그 고지 앞에서 두 아이들이 다른 선택을 했다. 

첫 회부터 만나기만 하면 아웅다웅하던 인권과 호식, 두 아버지들의 둘도 없는 자식 현과 영주의 러브스토리, 그 애틋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통해 노희경 작가는 역설적으로 '부모'를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장 헌신적인 아버지들을 통해 '이타적'이기만 할 것같은 '부모' 자리의 '이기적인 내면'을 들여다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삶이란 없이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달려온 듯한 인권과 호식, 심지어 두 사람은 아버지이지만, 엄마가 없는 아이들에게 두 사람은 완전체로서의 부모다. 아이들의 대학 입학을 위해 가속을 붙여 달려온 자기 희생적인 삶, 그 삶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작가는 묻는다. 당신이 원했던 부모의 자리는 어떤 것이었냐고. 당신은 당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냐고, 아니면 당신의 아이가 이룬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냐고. 

아내도 못끊게 했던 도박을 끊게 만들고, 잘 나가던 주먹질을 접게 만들었던 맹목적인 부모의 자리, 하지만 그 '맹목성'은 동시에 잘 나가는 자식이라는 '보상'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라고 드라마는 묻는다. 그래서 영주의 임신 소식에 인권은 자기 아들이 1등을 하게 됐다며 좋아했고, 호식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딸의 앞길을 막는 아이를 지우자고 단호하게 결정한다. 물론 거기에는 아내가 떠나버린 상실감과 홀로 아이를 키우며 감내했던 시간이 준 트라우마가 있다. 

어느 부모가 전교 1, 2등을 다투던 내 아이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아이를 낳고, 학교를 그만두고 가장 노릇을 하겠다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물론,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인권과 호식이기에 결국은 현과 영주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부모 노릇을 통해 작가는 묻는다. '내 새끼'만을 향했던 그 마음의 향배를. 

또한 그 '맹목성'이 놓치고 있던 내 삶의 자리는 어떤 것이었냐고 묻는다. 가끔 인권의 순대국밤 노점에는 한때 그와 함께 '주먹' 좀 쓰던  친구들이 온다. 그리고 인권을 신기해하는지, 비웃는지 묘한 뉘앙스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인권도 현에게 늘 말한다. '돼지 냄새' 맡아가며 너를 키운다고. 늘 어디 동호회 무료 티셔츠 나부랭이나 입으며 얼음을 나르는 호식의 마음이라고 다를까. 서로를 향한 적대적인 감정 안에는 어쩌면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듯한 자기 삶에 대한 서러움이 묻혀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새끼 좋은 대학 갈 날만을 향해 달려왔던 삶, 과연 그건 내 새끼의 좋은 대학 입학만으로 '보상'받아야 할 삶일까? 주먹질을 하던 인권이, 도박판을 전전하던 호식이 아이들로 인해 '보상'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미래의 꽃길 대신 현재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아이를 선택한 현과 영주의  행복말이다. 우리는 늘 먼 훗날의 여유와, 행복을 그리지만, 사실 어쩌면 고단한 지금 여기의 삶이 현생을 사는 나의 '황금기'일 지도 모른다. 



by meditator 2022. 5. 1. 23:51

사회에 나온 젊은이들, 우선은 '취업'이 관건이다. 자소서를 100통쯤 쓰고, 자존감이 바닥을 두어 번 치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죽어라 죽어라 한다'하는 끝에 직장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취업'만 하면 다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다니다 보니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다. 예전에는 직장 생활 성실하게 꾸준하게 하면 집도 사고 결혼도 할 만 했는데, '부모 찬스'가 아니면 '내 집 마련'이 '남의 떡'이 된 시대에 젊은이들의 어깨는 자꾸만 수그러든다. 

너무 '물질적인 삶'아니냐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 사는 일이란게 때되면 직장 잡고, 때되면 결혼하고 아이낳고 뭐 이런 삶의 과정을 무탈하게 밟아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더는 부모처럼 살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 그래서일까 요즘 드라마들은 이런 젊은이들의 결핍감을 주된 이야기꺼리로 삼는다. 

 

 

나 먹고 살 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그 돈 3억, 엄마가 해줄께, 이혼하면 되겠지. 이혼하면 3억은 주겠지!'
난데없이 이혼을 들먹이며 사태의 종지부를 찍는 어머니(이경성 분)에 아들 창희(이민기 분)는 그만 입을 닫고 만다. 
드라마의 꽤 많은 비중을 주인공들의 출퇴근에 '할애'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해방'을 갈구하지만 현실을 하루 네 다섯 시간 걸려 출퇴근을 해야 하는 처지, 파김치가 되어서 '당미역'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마을 버스를 타고 내려 터덜터덜 걸어 도착한 그곳에 염기정, 염창희 , 염미정의 집에 있다. 

그래도 거기엔 '집'이 있다. 하지만 창희의 '흰자위론'처럼 노란자 서울이 아닌 그곳에 집이 있기에 늘 주인공들은 지친다. 늘 '노른자'가 되고픈 창희,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편의점 본사 직원으로 일하는 창희는 오랫동안 성실하게 관리해온 편의점 점주로 부터 한 달 500만원의 수익이 꼬박꼬박 나오는 편의점을 인수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80세, 새로운 5년 갱신 계약서를 앞두고, 점주는 재계약 대신, 성실한 창희에게 권유를 한다. 하지만 어쩐다, 창희는 돈이 없다. 창희 뿐이랴, '노다지'인 줄 알면서도 창희 주변 그 누구도 돈이 없다. 

그래서 지난 번 차 사겠다고 했다가 얼굴이 벌개져서 상을 들어엎으려던 아버지 앞에 머뭇머뭇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조상 대대로 살던 이 동네, 저 밭을 팔면 가능할 텐데, 저렇게 한여름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싸구려 싱크대 만들어 제 값도 못팔며 사는 대신 꼬박꼬박 한 달 500만원은 벌텐테, 창희는 조바심에 결국 말문을 연 것이다. 

'아버지 그냥 하는 얘기예요. 편하게 들으세요', 하며 아버지의 혈압이 오르지 않게 서두를 꺼낸 창희, 하지만 창희의 말이 다 끝나도 아버지는 묵묵부답, 그 끝에 돌아오는 한 마디, '나 먹고 살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니가 3억 벌어서 인수해라'이다. 역시나 낭패다 싶은 그런 창희에게 어머니가 '이혼'을 들먹이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며 마침표를 찍는다. 

그래도 창희는 답답하다 하면서도 제안이라도 해볼 '언덕'이 있다. 서너 시간을 걸려서도 돌아갈 '집'이 있는 것이고 매달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직장도 있으니 그것조차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들의 '고뇌'가 또 다른 배부른 청춘가일지도. 인터넷에 서울에서 싼 방이라고 소개하는 곳은 '고시원'같은 공간에, 문 하나를 열면 화장실과 싱크대가 마주하고 있다. 그걸 투명 칸막이로 막는다. 그래야 싱크대에 뭐라도 올려놓고 샤워라도 할 수 있다나. 그래도 공용 화장실을 쓰는 고시원보다는 나은 편이라는 그곳이 보증금 500에 월 40만원이다. 

창희네 해프닝은 늘 창희 옆자리에 앉아 창희의 인간성을 시험에 들게 하던 회사 동료가 아빠 찬스를 써서 편의점 쇼핑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벌써 그렇게 편의점을 차린 게 세 번 째라며. 결국 안정된 수익을 보장하는 편의점을 놓치며 늘 결핍감에 시달리던 창희의 자괴감만 더하는 셈이 됐다. 

그렇게 드라마는 꼬박꼬박 서너 시간을 걸려서 출퇴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그려낸다. 열심히 사는 데 달라지는 것이 없는 삶, 과연 쉽사리 풀릴 길없는 처지에서 이들은 저마다 어떤 삶의 희망을 길어올릴까? 무엇보다 '흰자위'운운하며 스스로를 '흰자위'로 만드는 창희의 '해방'이 궁금하다. 

 

 

결혼만 해라, 집도 주고 상가도 주겠다? 
이렇게 삶의 조건이 삶을 만드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 그 삶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가 또 한 편 있다. 바로 kbs2의 <현재는 아름다워>이다. 

여기서 시작은 할아버지 이경철 씨(박인환 분)이다. 매번 손주들 자랑이 늘어지는 동생네 집과 달리, 장성한 손주들이 세 명이나 되는데 그 누구도 결혼을 하지 않아 적적함을 느끼던 할아버지는 이 문제를 두고 아들 내외와 의논을 한다. 

머리를 맞댄 세 사람은 손주 중 먼저 결혼하는 사람에게 '집'을 주겠다며 '경품'을 건다. 맏손주 윤재(오민석 분)는 치과 의사지만 주식으로 손해를 보고 집 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처지이다. 둘째 손주 이현재(윤시윤 분)는 지난 연애에서 상실감이 큰 상태에, 아직 집도 살 여유가 없어 결혼을 꿈도 꾸지 않은 상태이다. 막내 손주 이수재(서범준 분)는 공시생으로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닥터스>, <상류사회>의 하명희 작가가 쓴 <현재는 아름다워>는 대가족이 어우러지는 전형적인 kbs2의 주말 드라마식 구성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 역시 요즘 젊은이들의 '처지'를 주된 서사의 테마로 삼는다. 

물론, 말이 '집도 못사고 결혼도 못하는 젊은이들'을 다룬다지만 <현재는 아름다워>와 <나의 해방일지>의 온도차는 크다. 서너 시간 걸려 출퇴근을 하고 주말이면 밭일을 해야 하는 처지와 언제든 물려줄 재산이 있는 서울사는 노른자 같은 처지의 차이일까.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결혼만 한다면 자신이 가진 상가를 주겠다고 선뜻 나선다. 그러자, 며느리인 한경애 여사(김혜옥 분)는 자신들이 '여분'으로 가진 아파트를 내놓겠다며 맞장구를 친다. 

그러자 세 아들이자, 손주들은 저마다 앞장서 먼저 결혼을 하겠노라며 결혼 전선에 뛰어든다. 형제들보다 먼저 결혼하여 '집'을 확보하기 위해, 혹은 그 '집'을 팔아 자신이 하고픈 헬스장 자금을 구하기 위해. 치과 의사에 변호사, 이 잘나가는 젊은이들조차 '집' 을 주겠다는 부모와 할아버지의 '미끼'를 덥석 물며 드라마가 시작된다. 

<현재는 아름다워> 속 집없는 젊은이들은 결혼만 하면 집도 생기는 '위장된 어려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상가도 있고, 아파트도 있어 결혼만 하면 주겠다는 부모 슬하의 전문직 자녀들의 어려움이란게 '있는 사람들의 응석'같으니 말이다. 주말 드라마의 전형적인 가족 관계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만들어진 '어려움'같은 거다. 하지만 치과 의사고, 변호사라 하더라도 '집' 앞에서는 체면 불사 나서는 그 '낚시밥'이 주말 드라마의 테마로 등장, 요즘 세태의 관심사를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역설적인 현실성이다. 

by meditator 2022. 4. 25. 20:03

우울증, 무기력, 자존감 저하 등 이 단어들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을 마음 감옥에 가두는 이유들이다. 실재하는 '감옥'도 없고, '간수'도 없고, 문도 활짝 열려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감옥' 안에 웅크리고 앉아 한 발자국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뜨겁디 뜨거운 여름, 신영복 씨는 감옥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계절이 여름이라 말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옆의 사람를 증오하게 만든다는 그 계절, <나의 해방일지>는 바로 그 나 한 사람 서있기도 힘든 계절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 한 사람 혼자 서있기도 힘든, 그런데 한 집에서 부대껴야 하는  삼남매가 있다. 


 

왕복 4~5시간을 걸려 출퇴근해야 하는 처지,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정, 창희, 미정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낙담'이 이해도 된다. 그런데 그것 뿐일까? 되돌아 보면 <나의 아저씨>에서도 박동훈과 그 주변의 삶은 처음엔 참 답답했다. <나의 해방일지> 속 삼남매의 삶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심지어 서울 변두리 박동훈 네가 낫다 싶을 정도이다. 존재로부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니 회사 생활도 뾰족한 것이 없고, 관계는 더욱 지지부진한 염씨 댁 삼만매의 처지가 안쓰럽다. 그런데 어언 4회차에 이를 즈음에,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의 '존재'가 답답한 건 맞지만, 어쩌면 저들은 '존재' 이상, 스스로 만든 '마음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음 감옥에 갇힌 이들 
서울이란 계란 노른자를 둘러싼 흰자 같은 동네, '흰자위'론을 들고 나온 건 아들 창희(이민기 분)이다. 그런데 창희의 이른바 '맞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의 의식에는 사람의 존재도 노른자, 흰자가 나뉘어져 있는 듯하다. 그토록 흰자위 이 변두리 동네의 존재를 탈출해서 '노른자'로 가고픈 열망에는 그래야 그 스스로 '노른자'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드디어 '창희'가 연인과 헤어진 진짜 이유가 드러났다. 늦은 저녁 전철을 타고 집에 오던 기정(이엘 분)은 창희와 헤어진 연인이 홀로 창희에 동네에 오는 전철을 탄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니, 창희는 말한다. 그 연인이 자신을 보게 되는 그 '별 수 없는 놈이라는 눈빛'때문에, 그래서 스스로 벽을 치고 헤어졌노라고. 

연인과 함께 멋들어지게 자가용을 타고 데이트도 할 수 없는 놈, 회사에서 '갑'이 될 수 없는 처지, 에어컨 한번 맘대로 틀 수 없는 가정 형편, 그런 것들이 모두 창희에게는 '흰자위'같은 삶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창희는 그런 삶의 조건들에 견딜 수 없다. 대리점 관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처지를 난처하게 만든 동료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없이 풀어놓으며 창희의 결론은 승진을 해서 스스로 '노른자'와 같은 인물이 되어 그런 '흰자위'같은 것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승진'처럼 삶이 달라지면 '노른자'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창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한루프같은 경쟁 사회에 자신을 던져 그 안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된 삶만이 자신을 구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창희의 또 다른 모습일 지도.

창희가 스스로를 자존의 늪에 가두었다면 기정을 혼돈스럽게 하는 건 '권태'이다. 십 수년의 쳇바퀴같은 회사 생활, 그리고 늘 출퇴근에 시달리는 나날, 그 속에서 기정은 삶의 활로를 찾지 못해 바둥거린다. 그런데 그녀가 찾는 그 삶의 활로가 막막하다. 머리를 해보고, 성형외과를 찾아 시술을 해보고, 그리고 올 겨울 안에 그 누구라도 붙잡고 사랑을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도 막상 이혼남을 소개해줬다고 소개팅 주선자에게 거품을 무는 처지이다. 


 

자기 자신을 가둔 감옥에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한 채 '여름'이라는 계절을, 주변 사람들을, 그리고 별 다른 변화없는 삶을 상대로 끝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창희와 기정, 그들 사이에서 서늘하게 침묵을 지키는 미정(김지원 분)이 있다. 그런데 염씨네 막내 미정과 염씨네에 일을 도우는 정체불명의 구씨(손석구 분)는 참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하다. 

한 걸음
한여름 볕보다도 더 묵직하게 자신의 일만 묵묵하게 해내는 두 사람, 끝없이 술만 마셔대는 구씨와, 조용히 회사와 집을 오가는 미정, 삶을 겨우 버텨내는 짙은 우울이 두 사람 모두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일까? 미정의 눈에 구씨가 들어온다. 그리고 어느날 미정은 구씨에게 당돌하게 말한다. '나를 추앙해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그 '구문'의 문체, 미정은 설명을 보탠다. 그 거창한 '추앙'이 서로를 무조건 응원해주는 것이라고. 

미정의 도발은 '구씨에게 추앙'을 요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랜 출퇴근으로 회사 그 어느 동아리에도 들지 않아 요주의 인물이 된 미정은 자꾸만 회사의 행복 센터로 불려가고 거기에서 미정처럼 각자의 이유로 요주의 인물이 된 다른 두 사람 박상민 부장과 조태훈 과장(이기우 분)을 만나게 된다. 본의 아니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세 사람, '동아리' 문제로 고민하던 중 미정이 제안한다. 우리가 스스로 동아리를 만들자고. 그렇게 해방클럽이 탄생한다. 

'해방 클럽'이 뭐냐는, 뭘로 부터 '해방'을 하는 거냐는 동료의 질문에 미정은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나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여기서 미정의 웃음이 중요하다. 4회 만에 처음으로 미정은 진짜 웃음을 웃었다. 늘 무표정하게, 심지어 오빠와 언니가 싸워서 언니가 날린 슬리퍼를 맞아도 무표정하게 하지만 온 힘을 다해서 문 밖으로 슬리퍼를 던지는 것으로 겨우 자신을 드러내는 미정인데, 그런 미정이 자신감넘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뜻과 다르게 어떤 동아리에 끌려들어갈 처지에서 탄생한 해방 클럽,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어색하지만 나란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세 사람의 표정이 편안하다. 그저 늘 자신들은 세상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세 사람이 스스로 자신들만의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남친을 위해 신용대출을 받고 그걸 대신 갚아야 하는 처지, 회사 동료들은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쑥맥' 취급을 하고, 상사는 '빨간펜'으로 대놓고 미정을 무시하는 처지가 미정이를 꿈틀하게 만든 것이다. 미정은 벼랑 끝에서 배수진을 치듯 한 걸음 나선다. 지금까지 그녀를 가두었던 자신의 감옥 밖으로. 

많은 심리서의 결론은 사실 뜻밖에도 명쾌하다. 무엇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구구한 심리 이론의 끝에 도달하는 건 '실행'에 있다.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행동'에 옮기라고 한다. 바로 그 심리서의 '답정너'에 삼남매의 막내 미정이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런 미정에 구씨가 화답했다. 미정의 모자를 , 아니 미정을 향한 도약으로. 





by meditator 2022. 4. 23. 00:48

옵니버스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우리들의 블루스>, 3회로 한수(차승원 분)와 은희(이정은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시청자들의 예상대로 한수는 어떻게든 은희에게 돈을 빌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그런 줄로 모르고 은희는 몇 십 년만에 한수와 둘이 온 목포 여행에 설레기만 한다. 

아내와 별거를 한다며 은희에게 둘만의 여행을 떠나자고 하는 한수, 함께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은희의 입가에 묻은 과자를 떼어주고, 그 시절의 솜사탕을 함께 먹고, 없어진 자리에 생긴 호텔에 함께 머문다. 은희의 마음은 드라마 속 OST로 등장하는 Quando, Quando, Quando, 언제 내 사람이 될 지 말해 주세요. 제발 말해주세요, 언제일지, 언제일지, 언제일지."라는 듯 간질간질하다. 하지만 그 시간 미국을 떠난다는 아내와 딸에게, 특히 골프가 더는 재미없다는 데도 골프가 없이 니가 어떻게 사냐며 절규하듯 전화를 끊은 한수는 거울을 보며 연습한다. '은희야, 나 2억만 빌려줄래?'

 

 

은희, 첫사랑을 잃다
하지만 은희의 설레임은 오래가지 못한다. 명보를 만나 한수의 처지를 알게 된 인권과 호식이 은희에게 그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희는 친구들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하지만 사실 '별거'도 하지 않는다는 친구들의 증거 사진 앞에 황망하다. 안그래도 소개를 받으려 해도 다들 자기 돈만 본다며 한수에게 토로했던 은희, 오랜만에 찾아온 첫사랑 한수마저 그러니 마음이 찢어진다. 


오늘 나랑 놀고, 이제 같이 잘 거냐고 . 아님 돈을 빌려주냐고 직진하는 은희, 그런 은희 앞에 한수는 무너진다. 한수를 쿠션으로 마구 치며 은희는 울부짖는다.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했으면 (중략) 이런 데 끌고 오지 말고, 잘 사는 마누라랑 별거네 이혼이네 말하는 순간 너는 나를 친구가 아닌 너한테 껄덕대는 푼수로 안거지'. 그렇게 은희는 친구도 잃고, 첫사랑도 잃었다. 

여기까지가 <우리들의 블루스>의 예상 가능한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역시 노희경 드라마인 이유는 여기부터이다. 한수와 함께 호텔에 와서 호텔 방에 누워 본 은희는 울컥한다. 몇 개의 가게와 엄청난 현금 동원력을 가진 '부자'가 될 때까지, 그동안 돈 버느라 이런 좋은 데 한번 와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나오는 거다. 그런데 이 무슨 호사인가, 몇 십년만에 돌아온 첫사랑과 함께 이 좋은 곳에. 하지만 환타지는 금세 끝났다. 

과연 이럴 때 어떻게 할까? 아마도 대부분 그 호텔 방에서 은희처럼 한 것처럼 한바탕 퍼붓고 '똥 밟았다'하면서 두번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지 않을까? 친구들에게 조식을 먹고 가겠다고 말했듯이 다음날 아침 홀로 앉아 조식을 끄적이는 은희, 생전 처음으로 온 호텔에 눈물짓던 때가 언젠가 싶게 처량맞다. 그때 호식에게 온 전화, 은희는 친구들에게 퍼붓는다. 니들이 친구냐고. 집도 절도 없다는 한수, 그런 한수에게 돈이 여유가 있으면서도 꿔주지 않은 형식이, 빌려주고 이자놀이하듯 하는 또 다른 친구, 그리고 신나서 뒷담화하는 너희들', 이라며 은희는 말한다. '돈많은 나를 챙기듯, 돈없는 한수도 챙겼어야지.' 

'역지사지', 그 하룻밤 사이에 은희는 많은 생각을 한 것이다. 다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말하던 한수, 자신의 꿈이 가수라던 은희에게 농구가 꿈이라던 한수, 아이는 자신처럼 돈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랬다던 한수, 그리고 평생 돈을 벌어 남 좋은 일만 하던 은희에게 차마 그 소중한 추억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말못했다던 한수의 마지막 말, 그리고 친구들이 전한 한수의 처지, 그 모든 것을 은희는 짚어본 것이다. 

제주로 돌아와 희망퇴직을 친구에게 부탁하고 떠나던 한수에게 온 문자, 은희는 한수에게 2억을 보냈다. 그 돈은 돈이 있어서 보낸 돈이 아니다. 그래도 한수를 이해하려고 애쓴 은희는 지난한 노력의 결과이다. 한수와 함께 바닷가에 간 은희는 한수에게 말했다.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이제 은희는 잘 자라주지 못한, 자신의 꿈조차 이루지 못해, 그 꿈을 자식을 통해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바둥대는 한수를 그래도 '친구'로 접어준 것이다. 호식 등의 친구들에게 은희는 말했다. 니들은 어려울 때 나한테 돈을 잘도 꾸면서, 왜 한수는 나한테 돈 빌리면 안되냐고. 

사람의 참모습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드러나게 된다.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동창회의 주역이 된 은희, 그리고 은희 주변의 사람들, 그건 그저 은희가 돈이 많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꼬셔 돈이라도 빌려보려던 첫사랑, 어른들 말대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은희는 돈을 빌려준다. 첫사랑은 잃어도 친구는 잃고 싶지 않은 은희의 '휴머니즘'이다. 

 

 

그렇게 노희경 작가는 은희를 통해 사람살이를 이야기한다. 이십년도 더된 첫사랑, 그 첫사랑도 '집도 절도 없는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가장으로 바둥거리는 한수의 고단함을 은희는 헤아려준다. 그리고 힘들 때는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손을 벌리는 친구들의 자리에 앉혀준다. 그저 '밑진 장사'한 셈치고.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않겠다는 은희는 큰 그림이다. 우리는 어떨까? 과연 그럼에도 '사람'을 잃지 않으려 했을까? 나의 설움, 나의 아쉬움, 그리고 나의 손해에 주판알을 튕기느라 연연하다 사람도 놓치지 않았던가. 

참 멋진 여자다. <우리들의 블루스> 3회를 본 소감이다. 그 멋진 여자를 이정은 배우만큼 멋지게 표현할 배우가 있을까. 참 멋진 여자 은희 씨는 일기장에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첫 사랑을 보내고, 노래를 부른다. 멋지게 나이드는 거 쉽지 않다. 딱 그녀의 노래다. 

그날은 생일이었어 지나고 보니/ 나이를 먹는다는것/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세월의 멋은 흉내낼 수 없잖아/ 멋있게 늙는 건 더욱 더 어려워
(중략)그렇게 세월은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도/ 즐겁다는 것도
모두다 욕심일 뿐/ 다만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 하는 얘기
얼음에 채워진 꿈들이/ 서서히 녹아 가고 있네
(중략)내 맘 나도 모르게/ 차가운 얼음으로 식혀야 했다
 



by meditator 2022. 4. 17. 19:03

나이들수록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이 말에 대해 '과학 기술'이 답하는 시대가 되었다. 책임을 지기 위해 '보톡스'를 맞고, '지방'을 주입하는 식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게 다양한 '시술'로 젊어보일 수는 있지만, 아니 극강의 시술이 아니고서는 '나이'도 사실 어디 안간다. 무엇보다 살아온 시간은 그대로 내 얼굴의 인상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들의 블루스> 한수(차승원 분)과 은희(이정은 분)의 이야기이다. 

한수와 은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 시절 한수는 드라마 속 장면처럼 순정만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그랬다. 훤칠한 키에 공부도 잘하고, 그런 한수에 비해, 은희는 한수에게 '키스'를 해도 그냥 귀여운 그런 존재감의 아이였다. 

'가끔 가난이 싫어서 울컥하긴 했어도 그때 난 니들하고 놀 때는 웃기도 했어. 지금처럼 퍽퍽한 모습은 아니었어.'


은희와 함께 바다로 간 한수가 혼잣말하듯 한 이야기다. 훤칠한 미소년이던 한수는 공부도 잘해 서울대학교에 갔다. 술주정뱅이인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농사를 지어 가족을 건사하던 집안, 개천의 용이 된 그를 위해 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밥벌이 전선에 나섰다. 개천의 용이 되어 '승천'한 줄 알았는데 '퍽퍽한 삶'이라니. 

 

 

다시 만난 한수와 은희 
그런 그가 사십 대 후반이 되어 고향 제주의 은행 지점장이 되어 돌아왔다. 친구들에게는 '한수가 동창회에 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할 정도로 자기들이랑은 '급이 다른', 금의환양'한 존재이지만, 사실 그는 때려치고픈 자존심을 삼키며 돌아온 것이다. '가장'이라는 무게 때문에. 

대학 시절 만난 아내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딸이 골프 선수가 되었고,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골프 신동'으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릴 줄 알았는데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도무지 성적은 올라갈 기미를 안보이고, 그 뒷바라지에 월급쟁이인 한수의 등골이 휜다. 이제 제주까지 내려온 한수, 아내와 딸은 돈이 없어 더는 골프를 못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한수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아빠가 어떻게든 돈을 구해보겠다고. 하지만 퇴직금까지 이미 빼서 쓰고, 살던 집까지 판 한수에게 돈 나올 구멍이 없다. 말이 은행 지점장이지, 여기저기 빚이 연걸리듯 한 그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반면,  은희는 동창회를 주름잡지만, 사실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했다. 친구들과 함께 목포로 간 수학 여행, 그 여행으로 은희의 학창 시절이 끝났다. 밭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엄마 대신, 사남 일녀의 장녀인 은희는 '가장'이 되었다. 

결혼을 앞둔 동생이 40평대 아파트 사진을 보내자,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하고 이 날이 되도록 생선 비늘 긁고, 생선 대가리 치면서 모은 그 돈이 니 돈같냐고 퍼붓는다. 졸지에 가장이 되어 고등학교  '생선' 장수를 한 아가씨 은희는 말 그대로 '자수성가'를 했다. 한수가 은행지점장으로 왔다고 하자 실적을 올리라 9000 만원을 대번에 옮겨줄 만큼의 VIP가 되었다. 생선 가게도 세 군데나 되고, 건물도 올렸다. 새벽 경매 시장에서 7000만원 어치를 산 게 많이 산 게 아니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가 되었다. 

 

 

나이듦의 얼굴 
한수는 그런 은희가 새삼 달리 보인다. 그저 은희가 돈이 많아서 였을까? 드라마 속 한수와 은희는 그간 주연만 맡아온 차승원과 그런 주연의 곁에서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맡아온 이정은의 존재감처럼 묘한 앙상블을 빚는다. 그런데 여전히 훤칠한 한수지만 어쩐지 그의 어깨는 자꾸만 수그러든다. 그 시절에도 한수 어깨도 닿지 않던 조그마한 은희는 여전히 한수 어깨도 안차지만 어쩐지 그 품이 제주 바다를 품어낼 듯하다. 

은희는 그 시절 첫사랑이던 한수가, 이제 은행 지점장이 되어 돌아온 모습에 말한다. '잘 나이들어 주어서 고맙다'고. 첫사랑의 '환타지'를 품고 사는 자신의 추억을 깨뜨리지 않은 채 여전히 잘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그런데 그 말을 듣는 한수의 표정은 세상 처량맞다. 그렇기도 한 게 '가장'이라는 무게에 휘청거리느라 이제 은희에게 본심인지, '사기'인지 모를 접근을 하고 있는 처지이니 말이다. 

오랜만에 <우리들의 블루스>로 돌아온 노희경 작가는 '옵니버스식'의 드라마 속 한 축인 한수와 은희 커플을 그렇게 등장시킨다. 누구도 가난했던 그 시절을 지내며 서로가 살아온 궤적이 달리한 두 사람을 사십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다시 마주서게 만든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가난해도 꽃같은 청춘 시절과 현재을 오가며, 중년 두 사람을 비춘다. '잘 나이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한 건 은희이지만, 그 말을 들은 한수가 더욱 처량맞아 보이듯, 시청자들 눈에는 외려 그 말을 한 은희가 참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저 나이들면 '돈'이 '장땡'이라고, 은희가 벌어들인 돈과, 그녀의 건물 때문일까? 무엇이 두 사람의 삶을 달리 만들었을까? 

그리 가능성있어 보이지 않는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수, 포기하겠다는 딸에게 여전히 '아빠'만 믿으라는 말을 연발하는 한수를 보며 그의 지나온 삶은 어디에 '자신을 매어두고 살았는가'를 헤아려 보게 된다. 그를 짖누르는 '가장'의 무게는 정말 아내와 딸이 짊어지게 만든 것일까? 한수에게 체념하듯 말하지만 이번 생은 그저 생선 대가지 자르고 비늘 긁으며 타인을 위해 '보시'해야 하는 삶인가 보다는 은희의 말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를 견딘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그리고 그 이전부터도 오래도록 우리의 '쉼터'였던 제주 바다를 배경으로 돌아온 노희경 작가가 흔한 주말 드라마의 중년 커플처럼 한수와 은희를 내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책임질 나이란 말은 자신의 삶이 그대로 자신이 되어가는 나이란 말이 아닐까. 자신의 삶이 자신으로 드러나는 중년의 두 사람을 통해 내 얼굴에 드러난 나의 삶을 돌아보라는 질문이 아닐지.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또 어떤 삶의 궤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울릴지 <우리들의 블루스>가 기대된다. 

by meditator 2022. 4. 14. 21:45

삼포도 아니고 '산포'다. 노른자 위 서울을 둘러싼 흰자 같은 경기도, 그 중에서도 전철을 타고, 다시 또 마을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는 곳에 사는 삼남매가 있다. 염제호 씨댁 기정(이엘 분), 창희(이민기 분), 미정(김지원 분)이다. 

경기도에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 역시 경기도민으로 서울 웬만한 곳에서 약속을 잡으면 넉넉하게 2시간을 잡고 움직인다.  한 시간 정도면 괜찮은 거리다. 이런 이야기를 서울 시민인 친구들이 들으면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30분이 넘으면 멀다고 생각하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내게도 마을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매일 출퇴근을 하는 삼남매가 애잔하다. 웬만하면 '독립'한다고 할 만도 하건만 꿋꿋이 셋은 택시를 타고서라도 집으로 간다. 

집에 갈 택시 잡을 궁리를 하다 여자 친구에게 '촌스럽다'는 타박을 당하고 헤어지게 된 창희는 어렵사리 아버지 앞에서 자동차를 사겠다는 말을 꺼낸다. 몇 년 전에도 차를 사서 그 할부를 못갚는 바람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처지, 전기차라서 비용이 거의 안든다느니, 집에 오는 택시비가 더 든다느니, 이리저리 구색을 맞춰보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아버지의 손 앞에 불가항력이다. 

 

 

흰자위같은 동네
4년 만에 돌아온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에서는 서울 변두리 동네를 배경으로 삼형제의 이야기를 풀어내더니, 이제는 그 보다 조금 더 떨어진 경기도 한 동네로 시선을 옮긴다. 우러러 볼 만한 경력도, 부러워 할 만한 능력도 없이 그저 순리대로 살던 아저씨들은 이제 2030 세대의 '갑남을녀'들이 '프레임'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저씨들이든 2030세대이든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기정, 창희, 미정 역시 부대끼는 지하철에서 만나는 평범할 대로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모처럼 찾아온 동네 친구에게 창희는 말한다. 내가 서울에서 살았으면 너랑 친구 안했을 거라고. 그 말인즉, 서울에서 살았으면 친구는 '선택'의 대상이 되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 '친구'는 가족처럼 날 때부터 그냥 주어지는 거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런 면에서 동네 운동장에서 술을 먹는 건지, 축구를 하는 건지 모르겠던 <나의 아저씨>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사람 냄새나는 곳, 하지만 그래서 '촌스러운' 곳, 그곳이 이들의 '터전'이자, '아킬레스 건'이다. 그렇게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에 이어 또 다시 '장소'를 전면에 내세우며 '삶의 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의 사연에 앞서 그들이 처한 공간의 정서 속에 물씬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계란 흰자같은 경기도민의 한계에 대해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는 창의 곁에서 미정이 반문한다. 서울에서 살았으면 달랐을까? 그럼, 서울에서 살면 달랐지라고 강하게 답하는 창희에게 미정은 말을 잇지 않는다. 그리고 혼잣말을 더한다. 서울에서 살아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사는 것도 흰자위
노는 날에도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가 머리를 볶고 들어와 맘에 안든다고 감았다, 그걸 다시 드라이로 풀어내느라 난리를 치는 큰 딸, 그 딸을 보고 엄마는 속터져하며 말한다. 지랄도 팔자라고. 지 성질머리가 지 팔자를 들볶는다고. 하지만 새벽부터 해질 녁까지 싸구려 싱크대에 밭일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아버지 염씨 앞에 오며 가며 시간을 다 보내느라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창희의 말처럼 지랄 맞아 보이지만 술 마시다가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는 삼남매의 고분고분한 일상은 머리라도 볶아야 숨통이 트일 것처럼 보인다.

미정이 생각은 안하냐는 엄마의 지청구 앞에 기정은 미정이는 젊잖아?란다. 젊다고 다를까? 카드 회사 계약직 직원인 미정은 어디서나 그림자같다. 오빠가 전기차를 사겠다고 아버지 앞에 야심차게 들이대다 맞을 뻔하는 해프닝을 벌이는 옆에서도 미정이는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는다. 회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 역시도 출퇴근 시간에 쫓겨 그 흔한 회식 한번 못하고, 그 덕일까 '이쁘지만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간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게 미정과 같은 이들을 회사의 '행복 지원센터'가 부른다. 볼링 동호회라도 들라는데, 함께 불려간 박상님 부장은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냥 이런 사람들도 있는 건데 그냥 이렇게 살게 놔두면 안되는 거냐고. 하지만 그냥 그런 걸까? 

팀장에게 넘긴 보고서가 빨간펜 선생님이 매긴 답안지처럼 빨간 줄이 정신없이 그어진 날, 그런 자신을 두고 팀원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회식 자리로 떠나가는 것을 보며 미정은 답답한 마음에 '가상의 당신'을 찾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선뜻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힘든 미정만의 '해방'이다. 가상의 그가 과연 미정을 해방으로 인도할까?

그런데 염씨네 삼남매만 답답한 게 아니다. 전기차라도 사겠다고 그래야 뽀뽀라도 하지 않겠냐고 궁여지책으로 말을 건네보는 창희의 처지도 이해가 되지만 그런 창희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려는 아버지 염제호의 삶도 녹녹치 않아 보인다. 흰자위같은 동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흰자위같은 삶은 세대 불문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공감은 멀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사는 게 참 답답해 보이는 젊은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옴짝달싹하기 힘들게 옭죄어 오는 삶, 일도, 연애도, 아니 사는 것이 통털어 무엇 하나 그리 뽀족하게 '씨원'하게 풀리는 것이 없는 기정, 창희, 미정 삼남매를 통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로 젊은 세대에서부터 중년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위로와 힐링을 주었던 박해영 작가, 과연 이 답답한 삼남매의 '해방 일지'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비빌 언덕이 되어줄수 있을까?


by meditator 2022. 4. 10.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