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나온 젊은이들, 우선은 '취업'이 관건이다. 자소서를 100통쯤 쓰고, 자존감이 바닥을 두어 번 치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죽어라 죽어라 한다'하는 끝에 직장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취업'만 하면 다 될 것 같았는데 막상 다니다 보니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다. 예전에는 직장 생활 성실하게 꾸준하게 하면 집도 사고 결혼도 할 만 했는데, '부모 찬스'가 아니면 '내 집 마련'이 '남의 떡'이 된 시대에 젊은이들의 어깨는 자꾸만 수그러든다.
너무 '물질적인 삶'아니냐고? 하지만 평범한 사람 사는 일이란게 때되면 직장 잡고, 때되면 결혼하고 아이낳고 뭐 이런 삶의 과정을 무탈하게 밟아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더는 부모처럼 살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 그래서일까 요즘 드라마들은 이런 젊은이들의 결핍감을 주된 이야기꺼리로 삼는다.
나 먹고 살 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그 돈 3억, 엄마가 해줄께, 이혼하면 되겠지. 이혼하면 3억은 주겠지!' 난데없이 이혼을 들먹이며 사태의 종지부를 찍는 어머니(이경성 분)에 아들 창희(이민기 분)는 그만 입을 닫고 만다. 드라마의 꽤 많은 비중을 주인공들의 출퇴근에 '할애'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해방'을 갈구하지만 현실을 하루 네 다섯 시간 걸려 출퇴근을 해야 하는 처지, 파김치가 되어서 '당미역'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마을 버스를 타고 내려 터덜터덜 걸어 도착한 그곳에 염기정, 염창희 , 염미정의 집에 있다.
그래도 거기엔 '집'이 있다. 하지만 창희의 '흰자위론'처럼 노란자 서울이 아닌 그곳에 집이 있기에 늘 주인공들은 지친다. 늘 '노른자'가 되고픈 창희,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편의점 본사 직원으로 일하는 창희는 오랫동안 성실하게 관리해온 편의점 점주로 부터 한 달 500만원의 수익이 꼬박꼬박 나오는 편의점을 인수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80세, 새로운 5년 갱신 계약서를 앞두고, 점주는 재계약 대신, 성실한 창희에게 권유를 한다. 하지만 어쩐다, 창희는 돈이 없다. 창희 뿐이랴, '노다지'인 줄 알면서도 창희 주변 그 누구도 돈이 없다.
그래서 지난 번 차 사겠다고 했다가 얼굴이 벌개져서 상을 들어엎으려던 아버지 앞에 머뭇머뭇 다시 이야기를 꺼낸다. 조상 대대로 살던 이 동네, 저 밭을 팔면 가능할 텐데, 저렇게 한여름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싸구려 싱크대 만들어 제 값도 못팔며 사는 대신 꼬박꼬박 한 달 500만원은 벌텐테, 창희는 조바심에 결국 말문을 연 것이다.
'아버지 그냥 하는 얘기예요. 편하게 들으세요', 하며 아버지의 혈압이 오르지 않게 서두를 꺼낸 창희, 하지만 창희의 말이 다 끝나도 아버지는 묵묵부답, 그 끝에 돌아오는 한 마디, '나 먹고 살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니가 3억 벌어서 인수해라'이다. 역시나 낭패다 싶은 그런 창희에게 어머니가 '이혼'을 들먹이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며 마침표를 찍는다.
그래도 창희는 답답하다 하면서도 제안이라도 해볼 '언덕'이 있다. 서너 시간을 걸려서도 돌아갈 '집'이 있는 것이고 매달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직장도 있으니 그것조차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들의 '고뇌'가 또 다른 배부른 청춘가일지도. 인터넷에 서울에서 싼 방이라고 소개하는 곳은 '고시원'같은 공간에, 문 하나를 열면 화장실과 싱크대가 마주하고 있다. 그걸 투명 칸막이로 막는다. 그래야 싱크대에 뭐라도 올려놓고 샤워라도 할 수 있다나. 그래도 공용 화장실을 쓰는 고시원보다는 나은 편이라는 그곳이 보증금 500에 월 40만원이다.
창희네 해프닝은 늘 창희 옆자리에 앉아 창희의 인간성을 시험에 들게 하던 회사 동료가 아빠 찬스를 써서 편의점 쇼핑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벌써 그렇게 편의점을 차린 게 세 번 째라며. 결국 안정된 수익을 보장하는 편의점을 놓치며 늘 결핍감에 시달리던 창희의 자괴감만 더하는 셈이 됐다.
그렇게 드라마는 꼬박꼬박 서너 시간을 걸려서 출퇴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그려낸다. 열심히 사는 데 달라지는 것이 없는 삶, 과연 쉽사리 풀릴 길없는 처지에서 이들은 저마다 어떤 삶의 희망을 길어올릴까? 무엇보다 '흰자위'운운하며 스스로를 '흰자위'로 만드는 창희의 '해방'이 궁금하다.
결혼만 해라, 집도 주고 상가도 주겠다? 이렇게 삶의 조건이 삶을 만드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 그 삶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가 또 한 편 있다. 바로 kbs2의 <현재는 아름다워>이다.
여기서 시작은 할아버지 이경철 씨(박인환 분)이다. 매번 손주들 자랑이 늘어지는 동생네 집과 달리, 장성한 손주들이 세 명이나 되는데 그 누구도 결혼을 하지 않아 적적함을 느끼던 할아버지는 이 문제를 두고 아들 내외와 의논을 한다.
머리를 맞댄 세 사람은 손주 중 먼저 결혼하는 사람에게 '집'을 주겠다며 '경품'을 건다. 맏손주 윤재(오민석 분)는 치과 의사지만 주식으로 손해를 보고 집 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처지이다. 둘째 손주 이현재(윤시윤 분)는 지난 연애에서 상실감이 큰 상태에, 아직 집도 살 여유가 없어 결혼을 꿈도 꾸지 않은 상태이다. 막내 손주 이수재(서범준 분)는 공시생으로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닥터스>, <상류사회>의 하명희 작가가 쓴 <현재는 아름다워>는 대가족이 어우러지는 전형적인 kbs2의 주말 드라마식 구성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 역시 요즘 젊은이들의 '처지'를 주된 서사의 테마로 삼는다.
물론, 말이 '집도 못사고 결혼도 못하는 젊은이들'을 다룬다지만 <현재는 아름다워>와 <나의 해방일지>의 온도차는 크다. 서너 시간 걸려 출퇴근을 하고 주말이면 밭일을 해야 하는 처지와 언제든 물려줄 재산이 있는 서울사는 노른자 같은 처지의 차이일까. <현재는 아름다워>에서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결혼만 한다면 자신이 가진 상가를 주겠다고 선뜻 나선다. 그러자, 며느리인 한경애 여사(김혜옥 분)는 자신들이 '여분'으로 가진 아파트를 내놓겠다며 맞장구를 친다.
그러자 세 아들이자, 손주들은 저마다 앞장서 먼저 결혼을 하겠노라며 결혼 전선에 뛰어든다. 형제들보다 먼저 결혼하여 '집'을 확보하기 위해, 혹은 그 '집'을 팔아 자신이 하고픈 헬스장 자금을 구하기 위해. 치과 의사에 변호사, 이 잘나가는 젊은이들조차 '집' 을 주겠다는 부모와 할아버지의 '미끼'를 덥석 물며 드라마가 시작된다.
<현재는 아름다워> 속 집없는 젊은이들은 결혼만 하면 집도 생기는 '위장된 어려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상가도 있고, 아파트도 있어 결혼만 하면 주겠다는 부모 슬하의 전문직 자녀들의 어려움이란게 '있는 사람들의 응석'같으니 말이다. 주말 드라마의 전형적인 가족 관계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한 만들어진 '어려움'같은 거다. 하지만 치과 의사고, 변호사라 하더라도 '집' 앞에서는 체면 불사 나서는 그 '낚시밥'이 주말 드라마의 테마로 등장, 요즘 세태의 관심사를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역설적인 현실성이다.
우울증, 무기력, 자존감 저하 등 이 단어들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을 마음 감옥에 가두는 이유들이다. 실재하는 '감옥'도 없고, '간수'도 없고, 문도 활짝 열려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감옥' 안에 웅크리고 앉아 한 발자국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뜨겁디 뜨거운 여름, 신영복 씨는 감옥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계절이 여름이라 말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옆의 사람를 증오하게 만든다는 그 계절, <나의 해방일지>는 바로 그 나 한 사람 서있기도 힘든 계절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나 한 사람 혼자 서있기도 힘든, 그런데 한 집에서 부대껴야 하는 삼남매가 있다.
왕복 4~5시간을 걸려 출퇴근해야 하는 처지, 드라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정, 창희, 미정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낙담'이 이해도 된다. 그런데 그것 뿐일까? 되돌아 보면 <나의 아저씨>에서도 박동훈과 그 주변의 삶은 처음엔 참 답답했다. <나의 해방일지> 속 삼남매의 삶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심지어 서울 변두리 박동훈 네가 낫다 싶을 정도이다. 존재로부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니 회사 생활도 뾰족한 것이 없고, 관계는 더욱 지지부진한 염씨 댁 삼만매의 처지가 안쓰럽다. 그런데 어언 4회차에 이를 즈음에,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들의 '존재'가 답답한 건 맞지만, 어쩌면 저들은 '존재' 이상, 스스로 만든 '마음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음 감옥에 갇힌 이들 서울이란 계란 노른자를 둘러싼 흰자 같은 동네, '흰자위'론을 들고 나온 건 아들 창희(이민기 분)이다. 그런데 창희의 이른바 '맞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의 의식에는 사람의 존재도 노른자, 흰자가 나뉘어져 있는 듯하다. 그토록 흰자위 이 변두리 동네의 존재를 탈출해서 '노른자'로 가고픈 열망에는 그래야 그 스스로 '노른자'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드디어 '창희'가 연인과 헤어진 진짜 이유가 드러났다. 늦은 저녁 전철을 타고 집에 오던 기정(이엘 분)은 창희와 헤어진 연인이 홀로 창희에 동네에 오는 전철을 탄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니, 창희는 말한다. 그 연인이 자신을 보게 되는 그 '별 수 없는 놈이라는 눈빛'때문에, 그래서 스스로 벽을 치고 헤어졌노라고.
연인과 함께 멋들어지게 자가용을 타고 데이트도 할 수 없는 놈, 회사에서 '갑'이 될 수 없는 처지, 에어컨 한번 맘대로 틀 수 없는 가정 형편, 그런 것들이 모두 창희에게는 '흰자위'같은 삶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창희는 그런 삶의 조건들에 견딜 수 없다. 대리점 관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처지를 난처하게 만든 동료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없이 풀어놓으며 창희의 결론은 승진을 해서 스스로 '노른자'와 같은 인물이 되어 그런 '흰자위'같은 것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승진'처럼 삶이 달라지면 '노른자'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창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한루프같은 경쟁 사회에 자신을 던져 그 안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된 삶만이 자신을 구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창희의 또 다른 모습일 지도.
창희가 스스로를 자존의 늪에 가두었다면 기정을 혼돈스럽게 하는 건 '권태'이다. 십 수년의 쳇바퀴같은 회사 생활, 그리고 늘 출퇴근에 시달리는 나날, 그 속에서 기정은 삶의 활로를 찾지 못해 바둥거린다. 그런데 그녀가 찾는 그 삶의 활로가 막막하다. 머리를 해보고, 성형외과를 찾아 시술을 해보고, 그리고 올 겨울 안에 그 누구라도 붙잡고 사랑을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도 막상 이혼남을 소개해줬다고 소개팅 주선자에게 거품을 무는 처지이다.
자기 자신을 가둔 감옥에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한 채 '여름'이라는 계절을, 주변 사람들을, 그리고 별 다른 변화없는 삶을 상대로 끝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창희와 기정, 그들 사이에서 서늘하게 침묵을 지키는 미정(김지원 분)이 있다. 그런데 염씨네 막내 미정과 염씨네에 일을 도우는 정체불명의 구씨(손석구 분)는 참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하다.
한 걸음 한여름 볕보다도 더 묵직하게 자신의 일만 묵묵하게 해내는 두 사람, 끝없이 술만 마셔대는 구씨와, 조용히 회사와 집을 오가는 미정, 삶을 겨우 버텨내는 짙은 우울이 두 사람 모두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일까? 미정의 눈에 구씨가 들어온다. 그리고 어느날 미정은 구씨에게 당돌하게 말한다. '나를 추앙해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그 '구문'의 문체, 미정은 설명을 보탠다. 그 거창한 '추앙'이 서로를 무조건 응원해주는 것이라고.
미정의 도발은 '구씨에게 추앙'을 요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랜 출퇴근으로 회사 그 어느 동아리에도 들지 않아 요주의 인물이 된 미정은 자꾸만 회사의 행복 센터로 불려가고 거기에서 미정처럼 각자의 이유로 요주의 인물이 된 다른 두 사람 박상민 부장과 조태훈 과장(이기우 분)을 만나게 된다. 본의 아니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세 사람, '동아리' 문제로 고민하던 중 미정이 제안한다. 우리가 스스로 동아리를 만들자고. 그렇게 해방클럽이 탄생한다.
'해방 클럽'이 뭐냐는, 뭘로 부터 '해방'을 하는 거냐는 동료의 질문에 미정은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나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여기서 미정의 웃음이 중요하다. 4회 만에 처음으로 미정은 진짜 웃음을 웃었다. 늘 무표정하게, 심지어 오빠와 언니가 싸워서 언니가 날린 슬리퍼를 맞아도 무표정하게 하지만 온 힘을 다해서 문 밖으로 슬리퍼를 던지는 것으로 겨우 자신을 드러내는 미정인데, 그런 미정이 자신감넘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뜻과 다르게 어떤 동아리에 끌려들어갈 처지에서 탄생한 해방 클럽,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어색하지만 나란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세 사람의 표정이 편안하다. 그저 늘 자신들은 세상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세 사람이 스스로 자신들만의 첫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남친을 위해 신용대출을 받고 그걸 대신 갚아야 하는 처지, 회사 동료들은 앞에서는 웃지만 뒤에서는 '쑥맥' 취급을 하고, 상사는 '빨간펜'으로 대놓고 미정을 무시하는 처지가 미정이를 꿈틀하게 만든 것이다. 미정은 벼랑 끝에서 배수진을 치듯 한 걸음 나선다. 지금까지 그녀를 가두었던 자신의 감옥 밖으로.
많은 심리서의 결론은 사실 뜻밖에도 명쾌하다. 무엇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구구한 심리 이론의 끝에 도달하는 건 '실행'에 있다.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행동'에 옮기라고 한다. 바로 그 심리서의 '답정너'에 삼남매의 막내 미정이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런 미정에 구씨가 화답했다. 미정의 모자를 , 아니 미정을 향한 도약으로.
옵니버스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우리들의 블루스>, 3회로 한수(차승원 분)와 은희(이정은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시청자들의 예상대로 한수는 어떻게든 은희에게 돈을 빌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그런 줄로 모르고 은희는 몇 십 년만에 한수와 둘이 온 목포 여행에 설레기만 한다.
아내와 별거를 한다며 은희에게 둘만의 여행을 떠나자고 하는 한수, 함께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은희의 입가에 묻은 과자를 떼어주고, 그 시절의 솜사탕을 함께 먹고, 없어진 자리에 생긴 호텔에 함께 머문다. 은희의 마음은 드라마 속 OST로 등장하는 Quando, Quando, Quando, 언제 내 사람이 될 지 말해 주세요. 제발 말해주세요, 언제일지, 언제일지, 언제일지."라는 듯 간질간질하다. 하지만 그 시간 미국을 떠난다는 아내와 딸에게, 특히 골프가 더는 재미없다는 데도 골프가 없이 니가 어떻게 사냐며 절규하듯 전화를 끊은 한수는 거울을 보며 연습한다. '은희야, 나 2억만 빌려줄래?'
은희, 첫사랑을 잃다 하지만 은희의 설레임은 오래가지 못한다. 명보를 만나 한수의 처지를 알게 된 인권과 호식이 은희에게 그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희는 친구들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하지만 사실 '별거'도 하지 않는다는 친구들의 증거 사진 앞에 황망하다. 안그래도 소개를 받으려 해도 다들 자기 돈만 본다며 한수에게 토로했던 은희, 오랜만에 찾아온 첫사랑 한수마저 그러니 마음이 찢어진다.
오늘 나랑 놀고, 이제 같이 잘 거냐고 . 아님 돈을 빌려주냐고 직진하는 은희, 그런 은희 앞에 한수는 무너진다. 한수를 쿠션으로 마구 치며 은희는 울부짖는다.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했으면 (중략) 이런 데 끌고 오지 말고, 잘 사는 마누라랑 별거네 이혼이네 말하는 순간 너는 나를 친구가 아닌 너한테 껄덕대는 푼수로 안거지'. 그렇게 은희는 친구도 잃고, 첫사랑도 잃었다.
여기까지가 <우리들의 블루스>의 예상 가능한 스토리였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역시 노희경 드라마인 이유는 여기부터이다. 한수와 함께 호텔에 와서 호텔 방에 누워 본 은희는 울컥한다. 몇 개의 가게와 엄청난 현금 동원력을 가진 '부자'가 될 때까지, 그동안 돈 버느라 이런 좋은 데 한번 와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눈물이 나오는 거다. 그런데 이 무슨 호사인가, 몇 십년만에 돌아온 첫사랑과 함께 이 좋은 곳에. 하지만 환타지는 금세 끝났다.
과연 이럴 때 어떻게 할까? 아마도 대부분 그 호텔 방에서 은희처럼 한 것처럼 한바탕 퍼붓고 '똥 밟았다'하면서 두번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지 않을까? 친구들에게 조식을 먹고 가겠다고 말했듯이 다음날 아침 홀로 앉아 조식을 끄적이는 은희, 생전 처음으로 온 호텔에 눈물짓던 때가 언젠가 싶게 처량맞다. 그때 호식에게 온 전화, 은희는 친구들에게 퍼붓는다. 니들이 친구냐고. 집도 절도 없다는 한수, 그런 한수에게 돈이 여유가 있으면서도 꿔주지 않은 형식이, 빌려주고 이자놀이하듯 하는 또 다른 친구, 그리고 신나서 뒷담화하는 너희들', 이라며 은희는 말한다. '돈많은 나를 챙기듯, 돈없는 한수도 챙겼어야지.'
'역지사지', 그 하룻밤 사이에 은희는 많은 생각을 한 것이다. 다 거짓말은 아니었다고 말하던 한수, 자신의 꿈이 가수라던 은희에게 농구가 꿈이라던 한수, 아이는 자신처럼 돈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랬다던 한수, 그리고 평생 돈을 벌어 남 좋은 일만 하던 은희에게 차마 그 소중한 추억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말못했다던 한수의 마지막 말, 그리고 친구들이 전한 한수의 처지, 그 모든 것을 은희는 짚어본 것이다.
제주로 돌아와 희망퇴직을 친구에게 부탁하고 떠나던 한수에게 온 문자, 은희는 한수에게 2억을 보냈다. 그 돈은 돈이 있어서 보낸 돈이 아니다. 그래도 한수를 이해하려고 애쓴 은희는 지난한 노력의 결과이다. 한수와 함께 바닷가에 간 은희는 한수에게 말했다.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이제 은희는 잘 자라주지 못한, 자신의 꿈조차 이루지 못해, 그 꿈을 자식을 통해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바둥대는 한수를 그래도 '친구'로 접어준 것이다. 호식 등의 친구들에게 은희는 말했다. 니들은 어려울 때 나한테 돈을 잘도 꾸면서, 왜 한수는 나한테 돈 빌리면 안되냐고.
사람의 참모습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드러나게 된다.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하지 못했음에도 동창회의 주역이 된 은희, 그리고 은희 주변의 사람들, 그건 그저 은희가 돈이 많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을 꼬셔 돈이라도 빌려보려던 첫사랑, 어른들 말대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은희는 돈을 빌려준다. 첫사랑은 잃어도 친구는 잃고 싶지 않은 은희의 '휴머니즘'이다.
그렇게 노희경 작가는 은희를 통해 사람살이를 이야기한다. 이십년도 더된 첫사랑, 그 첫사랑도 '집도 절도 없는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가장으로 바둥거리는 한수의 고단함을 은희는 헤아려준다. 그리고 힘들 때는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손을 벌리는 친구들의 자리에 앉혀준다. 그저 '밑진 장사'한 셈치고.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않겠다는 은희는 큰 그림이다. 우리는 어떨까? 과연 그럼에도 '사람'을 잃지 않으려 했을까? 나의 설움, 나의 아쉬움, 그리고 나의 손해에 주판알을 튕기느라 연연하다 사람도 놓치지 않았던가.
참 멋진 여자다. <우리들의 블루스> 3회를 본 소감이다. 그 멋진 여자를 이정은 배우만큼 멋지게 표현할 배우가 있을까. 참 멋진 여자 은희 씨는 일기장에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첫 사랑을 보내고, 노래를 부른다. 멋지게 나이드는 거 쉽지 않다. 딱 그녀의 노래다.
그날은 생일이었어 지나고 보니/ 나이를 먹는다는것/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세월의 멋은 흉내낼 수 없잖아/ 멋있게 늙는 건 더욱 더 어려워 (중략)그렇게 세월은 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도/ 즐겁다는 것도 모두다 욕심일 뿐/ 다만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 하는 얘기 얼음에 채워진 꿈들이/ 서서히 녹아 가고 있네 (중략)내 맘 나도 모르게/ 차가운 얼음으로 식혀야 했다
나이들수록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이 말에 대해 '과학 기술'이 답하는 시대가 되었다. 책임을 지기 위해 '보톡스'를 맞고, '지방'을 주입하는 식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게 다양한 '시술'로 젊어보일 수는 있지만, 아니 극강의 시술이 아니고서는 '나이'도 사실 어디 안간다. 무엇보다 살아온 시간은 그대로 내 얼굴의 인상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들의 블루스> 한수(차승원 분)과 은희(이정은 분)의 이야기이다.
한수와 은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 시절 한수는 드라마 속 장면처럼 순정만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그랬다. 훤칠한 키에 공부도 잘하고, 그런 한수에 비해, 은희는 한수에게 '키스'를 해도 그냥 귀여운 그런 존재감의 아이였다.
'가끔 가난이 싫어서 울컥하긴 했어도 그때 난 니들하고 놀 때는 웃기도 했어. 지금처럼 퍽퍽한 모습은 아니었어.'
은희와 함께 바다로 간 한수가 혼잣말하듯 한 이야기다. 훤칠한 미소년이던 한수는 공부도 잘해 서울대학교에 갔다. 술주정뱅이인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농사를 지어 가족을 건사하던 집안, 개천의 용이 된 그를 위해 동생들은 모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밥벌이 전선에 나섰다. 개천의 용이 되어 '승천'한 줄 알았는데 '퍽퍽한 삶'이라니.
다시 만난 한수와 은희 그런 그가 사십 대 후반이 되어 고향 제주의 은행 지점장이 되어 돌아왔다. 친구들에게는 '한수가 동창회에 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할 정도로 자기들이랑은 '급이 다른', 금의환양'한 존재이지만, 사실 그는 때려치고픈 자존심을 삼키며 돌아온 것이다. '가장'이라는 무게 때문에.
대학 시절 만난 아내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딸이 골프 선수가 되었고,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골프 신동'으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릴 줄 알았는데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 도무지 성적은 올라갈 기미를 안보이고, 그 뒷바라지에 월급쟁이인 한수의 등골이 휜다. 이제 제주까지 내려온 한수, 아내와 딸은 돈이 없어 더는 골프를 못하겠다고 배수진을 치고, 한수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아빠가 어떻게든 돈을 구해보겠다고. 하지만 퇴직금까지 이미 빼서 쓰고, 살던 집까지 판 한수에게 돈 나올 구멍이 없다. 말이 은행 지점장이지, 여기저기 빚이 연걸리듯 한 그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반면, 은희는 동창회를 주름잡지만, 사실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했다. 친구들과 함께 목포로 간 수학 여행, 그 여행으로 은희의 학창 시절이 끝났다. 밭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엄마 대신, 사남 일녀의 장녀인 은희는 '가장'이 되었다.
결혼을 앞둔 동생이 40평대 아파트 사진을 보내자,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하고 이 날이 되도록 생선 비늘 긁고, 생선 대가리 치면서 모은 그 돈이 니 돈같냐고 퍼붓는다. 졸지에 가장이 되어 고등학교 '생선' 장수를 한 아가씨 은희는 말 그대로 '자수성가'를 했다. 한수가 은행지점장으로 왔다고 하자 실적을 올리라 9000 만원을 대번에 옮겨줄 만큼의 VIP가 되었다. 생선 가게도 세 군데나 되고, 건물도 올렸다. 새벽 경매 시장에서 7000만원 어치를 산 게 많이 산 게 아니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가 되었다.
나이듦의 얼굴 한수는 그런 은희가 새삼 달리 보인다. 그저 은희가 돈이 많아서 였을까? 드라마 속 한수와 은희는 그간 주연만 맡아온 차승원과 그런 주연의 곁에서 드라마의 감초 역할을 맡아온 이정은의 존재감처럼 묘한 앙상블을 빚는다. 그런데 여전히 훤칠한 한수지만 어쩐지 그의 어깨는 자꾸만 수그러든다. 그 시절에도 한수 어깨도 닿지 않던 조그마한 은희는 여전히 한수 어깨도 안차지만 어쩐지 그 품이 제주 바다를 품어낼 듯하다.
은희는 그 시절 첫사랑이던 한수가, 이제 은행 지점장이 되어 돌아온 모습에 말한다. '잘 나이들어 주어서 고맙다'고. 첫사랑의 '환타지'를 품고 사는 자신의 추억을 깨뜨리지 않은 채 여전히 잘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그런데 그 말을 듣는 한수의 표정은 세상 처량맞다. 그렇기도 한 게 '가장'이라는 무게에 휘청거리느라 이제 은희에게 본심인지, '사기'인지 모를 접근을 하고 있는 처지이니 말이다.
오랜만에 <우리들의 블루스>로 돌아온 노희경 작가는 '옵니버스식'의 드라마 속 한 축인 한수와 은희 커플을 그렇게 등장시킨다. 누구도 가난했던 그 시절을 지내며 서로가 살아온 궤적이 달리한 두 사람을 사십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다시 마주서게 만든다.
드라마는 두 사람의 가난해도 꽃같은 청춘 시절과 현재을 오가며, 중년 두 사람을 비춘다. '잘 나이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한 건 은희이지만, 그 말을 들은 한수가 더욱 처량맞아 보이듯, 시청자들 눈에는 외려 그 말을 한 은희가 참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저 나이들면 '돈'이 '장땡'이라고, 은희가 벌어들인 돈과, 그녀의 건물 때문일까? 무엇이 두 사람의 삶을 달리 만들었을까?
그리 가능성있어 보이지 않는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수, 포기하겠다는 딸에게 여전히 '아빠'만 믿으라는 말을 연발하는 한수를 보며 그의 지나온 삶은 어디에 '자신을 매어두고 살았는가'를 헤아려 보게 된다. 그를 짖누르는 '가장'의 무게는 정말 아내와 딸이 짊어지게 만든 것일까? 한수에게 체념하듯 말하지만 이번 생은 그저 생선 대가지 자르고 비늘 긁으며 타인을 위해 '보시'해야 하는 삶인가 보다는 은희의 말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코로나 시대를 견딘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그리고 그 이전부터도 오래도록 우리의 '쉼터'였던 제주 바다를 배경으로 돌아온 노희경 작가가 흔한 주말 드라마의 중년 커플처럼 한수와 은희를 내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책임질 나이란 말은 자신의 삶이 그대로 자신이 되어가는 나이란 말이 아닐까. 자신의 삶이 자신으로 드러나는 중년의 두 사람을 통해 내 얼굴에 드러난 나의 삶을 돌아보라는 질문이 아닐지.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또 어떤 삶의 궤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울릴지 <우리들의 블루스>가 기대된다.
삼포도 아니고 '산포'다. 노른자 위 서울을 둘러싼 흰자 같은 경기도, 그 중에서도 전철을 타고, 다시 또 마을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는 곳에 사는 삼남매가 있다. 염제호 씨댁 기정(이엘 분), 창희(이민기 분), 미정(김지원 분)이다.
경기도에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 역시 경기도민으로 서울 웬만한 곳에서 약속을 잡으면 넉넉하게 2시간을 잡고 움직인다. 한 시간 정도면 괜찮은 거리다. 이런 이야기를 서울 시민인 친구들이 들으면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30분이 넘으면 멀다고 생각하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내게도 마을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매일 출퇴근을 하는 삼남매가 애잔하다. 웬만하면 '독립'한다고 할 만도 하건만 꿋꿋이 셋은 택시를 타고서라도 집으로 간다.
집에 갈 택시 잡을 궁리를 하다 여자 친구에게 '촌스럽다'는 타박을 당하고 헤어지게 된 창희는 어렵사리 아버지 앞에서 자동차를 사겠다는 말을 꺼낸다. 몇 년 전에도 차를 사서 그 할부를 못갚는 바람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처지, 전기차라서 비용이 거의 안든다느니, 집에 오는 택시비가 더 든다느니, 이리저리 구색을 맞춰보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아버지의 손 앞에 불가항력이다.
흰자위같은 동네 4년 만에 돌아온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에서는 서울 변두리 동네를 배경으로 삼형제의 이야기를 풀어내더니, 이제는 그 보다 조금 더 떨어진 경기도 한 동네로 시선을 옮긴다. 우러러 볼 만한 경력도, 부러워 할 만한 능력도 없이 그저 순리대로 살던 아저씨들은 이제 2030 세대의 '갑남을녀'들이 '프레임'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저씨들이든 2030세대이든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기정, 창희, 미정 역시 부대끼는 지하철에서 만나는 평범할 대로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모처럼 찾아온 동네 친구에게 창희는 말한다. 내가 서울에서 살았으면 너랑 친구 안했을 거라고. 그 말인즉, 서울에서 살았으면 친구는 '선택'의 대상이 되지만, 이 작은 마을에서 '친구'는 가족처럼 날 때부터 그냥 주어지는 거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그런 면에서 동네 운동장에서 술을 먹는 건지, 축구를 하는 건지 모르겠던 <나의 아저씨>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사람 냄새나는 곳, 하지만 그래서 '촌스러운' 곳, 그곳이 이들의 '터전'이자, '아킬레스 건'이다. 그렇게 박해영 작가는 <나의 아저씨>에 이어 또 다시 '장소'를 전면에 내세우며 '삶의 풍경'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의 사연에 앞서 그들이 처한 공간의 정서 속에 물씬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계란 흰자같은 경기도민의 한계에 대해 구구절절 하소연을 하는 창의 곁에서 미정이 반문한다. 서울에서 살았으면 달랐을까? 그럼, 서울에서 살면 달랐지라고 강하게 답하는 창희에게 미정은 말을 잇지 않는다. 그리고 혼잣말을 더한다. 서울에서 살아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사는 것도 흰자위 노는 날에도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가 머리를 볶고 들어와 맘에 안든다고 감았다, 그걸 다시 드라이로 풀어내느라 난리를 치는 큰 딸, 그 딸을 보고 엄마는 속터져하며 말한다. 지랄도 팔자라고. 지 성질머리가 지 팔자를 들볶는다고. 하지만 새벽부터 해질 녁까지 싸구려 싱크대에 밭일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아버지 염씨 앞에 오며 가며 시간을 다 보내느라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창희의 말처럼 지랄 맞아 보이지만 술 마시다가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는 삼남매의 고분고분한 일상은 머리라도 볶아야 숨통이 트일 것처럼 보인다.
미정이 생각은 안하냐는 엄마의 지청구 앞에 기정은 미정이는 젊잖아?란다. 젊다고 다를까? 카드 회사 계약직 직원인 미정은 어디서나 그림자같다. 오빠가 전기차를 사겠다고 아버지 앞에 야심차게 들이대다 맞을 뻔하는 해프닝을 벌이는 옆에서도 미정이는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는다. 회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 역시도 출퇴근 시간에 쫓겨 그 흔한 회식 한번 못하고, 그 덕일까 '이쁘지만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간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게 미정과 같은 이들을 회사의 '행복 지원센터'가 부른다. 볼링 동호회라도 들라는데, 함께 불려간 박상님 부장은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냥 이런 사람들도 있는 건데 그냥 이렇게 살게 놔두면 안되는 거냐고. 하지만 그냥 그런 걸까?
팀장에게 넘긴 보고서가 빨간펜 선생님이 매긴 답안지처럼 빨간 줄이 정신없이 그어진 날, 그런 자신을 두고 팀원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회식 자리로 떠나가는 것을 보며 미정은 답답한 마음에 '가상의 당신'을 찾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선뜻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힘든 미정만의 '해방'이다. 가상의 그가 과연 미정을 해방으로 인도할까?
그런데 염씨네 삼남매만 답답한 게 아니다. 전기차라도 사겠다고 그래야 뽀뽀라도 하지 않겠냐고 궁여지책으로 말을 건네보는 창희의 처지도 이해가 되지만 그런 창희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려는 아버지 염제호의 삶도 녹녹치 않아 보인다. 흰자위같은 동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흰자위같은 삶은 세대 불문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공감은 멀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렇게 사는 게 참 답답해 보이는 젊은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옴짝달싹하기 힘들게 옭죄어 오는 삶, 일도, 연애도, 아니 사는 것이 통털어 무엇 하나 그리 뽀족하게 '씨원'하게 풀리는 것이 없는 기정, 창희, 미정 삼남매를 통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로 젊은 세대에서부터 중년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위로와 힐링을 주었던 박해영 작가, 과연 이 답답한 삼남매의 '해방 일지'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비빌 언덕이 되어줄수 있을까?
거울이 깨지고, 건물이 우그러진다. 세상의 위 아래가 바뀐다. 마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같다. 그런데 노은비라는 인물의 기억 속이다. 주마등 위기 관리팀의 주련(김희선 분)과 최준웅(로운 분)이 뛰어든 곳이다. 주마등 위기 관리팀은 왜 노은비의 기억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바로 그녀의 우울지수가 극에 달해 '자살' 위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과연 위기 관리팀은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까?
mbc의 금토 드라마 <내일>은 흥미로운 설정의 드라마이다. 때로는 야쿠르트 아줌마처럼, 때로는 기세 등등한 여왕의 모습으로 시시때때로 그 모습이 바뀌는 옥황(김혜숙 분)은 저승 독점 기업 주마등의 회장이다. 그녀가 이끄는 '주마등'은 '저승사자' 들이 죽은 자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곳이다.
자살자를 구하는 저승사자들 그런데 옥황이 이번에 새로운 부서를 하나 만들었다. 이른바 '위기 관리팀', 그런데 이 위기 관리팀에 대한 기존 저승 사자들의 눈길이 곱지 않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저승으로 데려오면 될 것을 굳이 스스로 죽으려는 자들을 '저승사자'들이 나서서 구해주기 때문이다. 옥황이 '위기 관리팀'을 만든 취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이 너무 많아 '지옥'이 붐비고, 직원들의 업무가 과중하기 때문이라는데, 과연 그뿐일까?
자살자의 죽음을 막지 못해 위기에 봉착한 '위기 관리팀', 주마등의 앱에 붉은 색 경고음이 울린다. 자살 위기에 놓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은 방송 작가로 일하는 노은비, 그녀에게로 팀장 구련과 '코마' 상태로 반인반혼의 존재 최준웅이 달려간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우울이 극에 달한 노은비, 위기 관리팀은 그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인셉션>처럼 그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위기 관리팀이 찾아간 그녀의 기억 속, 그곳엔 학폭 피해자 노은비가 있었다.
노은비는 앞 자리 친구와 함께 재미난 일을 이야기 하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웃었다는 이유만으로 김혜원과 그 친구들은 노은비를 학교 건물 뒤로 불러내 마구 때린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부터 김혜원이 볼펜을 똑딱거릴 때마다 웃으라고. 김혜원 무리에게 마구 맞고 발로 채인 노은비에게 김혜원이 볼펜을 똑딱이고, 노은비는 결국 억지로 일그러진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들, 특히 김혜원은 볼펜을 똑딱여 노은비를 반 아이들 앞에서 이상한 아이를 만들고, 수시로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우유를 붓고, 사물함에 오물을 채우고, 반 아이들에게서 왕따를 만들었으며 가장 친한 친구마저 그녀를 외면하도록 만든다.
그래도 그 고통스러운 시절을 노은비는 견뎠다. 그래서 이제 어엿한 방송작가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만드는 방송에 김혜원이 게스트로 등장한 것이다. 학폭 피해에 대한 웹툰을 그린 작가로, 노은비는 그런 김혜원을 인터뷰해서 방송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였다.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노은비에게 피디는 겨우 예전 일로 그러냐고 '프로 정신'을 운운했고, 다시 나타난 김혜원은 다시 볼펜을 똑딱이며 노은비를 몰아부친다.
또 다시 나락으로 빠져든 노은비, 학창 시절처럼 아무도 그녀의 편이 되주지 않는 현실에 결국 건물 옥상 난간에 올라선다. '과거'가 아니라 무한루프처럼 되돌아 온 '학폭'의 트라우마, 위기 관리팀은 그런 노은비를 어떻게 죽음에서 구해낼까?
죽음이 해답이라면, 죽어! 그런데 난간에 기대선 노은비에게 구련은 외려 뛰어내리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죽는다고 해결될 것은 없다며. 노은비는 죽으면 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 않겠냐고 울며 답하고. 구련은 말한다. 죽으면 자신의 죽음을 마음아파하는 이들의 마음을 짊어진 채 끝없는 후회의 길을 걸어야 하는 '지옥'이 기다릴 뿐이라고.
'견뎌야 해', '이겨내야 해', 구련이 던진 말들, 그런데 그건 노은비가 바로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울며 했던 말들이다. 자신이 견뎌왔던 시간을 되돌이킨 노은비,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발을 헛디뎌 건물에서 떨어져 버리고 마는데, 그런 노은비를 '저승사자' 구련이 가뿐히 안아 구한다.
그런데 아직도 '위기 관리팀' 속 노은비의 붉은 신호음은 꺼지지 않는다. 그때 특별출연 정준하와 나타난 최준웅, 노은비가 힘들때마다 꺼내본 <무한도전>의 정과장의 모습으로 나타난 정준하는 예의 정과장이 되어 노은비를 웃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노은비를 최준웅은 안고 위로한다. 괜찮다고.
구련이 노은비로 하여금 현실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면, 최준웅은 상처입은 노은비를 품어 주었다. 드라마는 죽음의 위기에 빠진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다시 생각케 만드는 장면이다.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의 늪에서 한 걸음 빠져나온 노은비가 세상에서 만난 뉴스, 그건 여전히 그녀 앞에서 가해자였던 김혜원의 가증스런 가면이 벗겨지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노은비는 용기를 낸다.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언할 수 있다고. 아마도 그 빌딩 옥상에서 죽음을 선택했다면 노은비는 그런 뉴스도 볼 수 없었고, 스스로 피해자의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구련의 말처럼 지옥의 길고 긴 후회의 길을 걷고 또 걷기만 했을 것이다.
자살자 구원의 환타지로써 <내일>은 끝까지 그 몫을 다한다. 김혜원 앞에 나타난 구련은 김혜원을 과거의 기억 속으로 보낸다. 이젠 김혜원이 그 시절 김혜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이다. 배를 차이고, 우유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살려달라 애원하는 김혜원, 구련은 말한다. 겨우 한번을 당하고. 살려달라 하냐고. 너는 기억못한다는데 노은비는 내내 고통받으며 살아왔다고. 그리고 들려오는 김혜원의 실체에 대한 뉴스, 허물어지는 김혜원에게 죽지 말라고, 지금보다 더 끔찍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구련은 자리를 뜬다.
이처럼 <내일>은 자살 위기에 몰린 학폭 피해자를 죽음에서 구하는 에피소드로 '주마등 위기 관리팀'의 활약을 연다. 1, 2회 걸쳐 주마등처럼 스쳐간 노은비의 기억, 그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왜 노은비를 자살로 부터 구해내야 하는지 공감한다.
<인셉션> 식의 과거 탐험을 혼란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옥황상제를 필두로 주마등 주식회사라는 신선한 컨셉으로 등장한 저승사자의 자살자 구출 프로젝트는 신선하다. 구련이라는 사연깊은 캐릭터의 단호한 조처, 그리고 그런 그녀와는 반대로 우선 자신을 던져 피해자를 구하고 보려는 최준웅의 따뜻한 인도주의가 맞물리며 '위기 관리팀'의 매력이 더해진다. 거기에 가해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 환타지로서의 통쾌함을 더한다.
<나빌레라> 7회, 심덕출(박인환 분) 씨가 '알츠하이머'였음이 드러났다. 기승주가 데려간 발레단에서 잠시 공연을 선보이며 자신감을 되찾은 덕출 씨, 덕분에 아내와의 약속에 늦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덕출 씨가 흘리고 간 수첩, 앞에는 채록의 매니저로, 뒤에는 초보 발레리나로 덕출 씨는 모든 걸 기록하려 애썼다. '할아버지는~'하며 채록이 집어든 수첩, 제일 앞 장에는 심덕출 씨의 사진과 연락처, 그리고 '나는 알츠하이머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74살, 친구의 죽음을 통해 더 나이들기 전에 자신의 꿈을 향해 '날아보고 싶다'던 노옹의 소원은 7회를 통해 국면을 달리한다. 그저 더 나이들기 전이 아니라,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고, 그리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닫고 나선 길이었던 것이다. 그간 왜 그렇게 덕출 씨가 조급해 했는지, 비지땀을 흘리며 홀로 연습을 했는지 보다 명확해 진다. 나이가 들어서 시간이 없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알츠하이머'라 시간이 없는 건 다른 것이니까.
'엔드 게임' 엔드게임, <나는 나답게 나이들기로 했다>의 저자 이현수 씨의 말처럼 어벤져스 시리즈의 부제가 아니다. '첫 늙음'을 감지한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각자의 게임이다.
'기억, 운동, 감각, 언어, 신체 등에서 예전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오류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엔드 게임에 들어선 것이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이 시간으로 재단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들어'선 이 게임의 시간에 그 누군들 억울하지 않으랴. 더구나 그 '엔드 게임'의 엔딩은 공평하지 않다.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도, 가진 재산이 많다는 것도, 엔딩은 불공평해서 공평하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공원 벤치에 앉은 덕출 씨 눈 앞에 주마등 처럼 살아온 시간이 스쳐지나간다. 그의 마음은 발돋움을 하여 처음 발레 공연을 보고 혼자 거리에서 다리를 쭉쭉 뻗던 그 어린 시절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치매'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74살 덕출 씨가 울먹인다. '아버지, 어머니, 나 어떻게 해요.'
엔드 게임의 노년기는 불가항력일까? <나는 나답게 나이들기로 했다>는 이에 대해 '태도'를 말한다. ''못먹어도 고'의 상황에 놓인 자신을 충분히 자각하고, 아쉬워하고 나면 오히려 용감해지고 단단해진다고 한다. 선택의 폭이 좋아지면 훨씬 더 집중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치열하게 밀도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치열하고, 밀도있게 야심차게 발레를 시작하는 노년의 심덕출 씨를 보며 막연하게 그 '꿈'의 앞길이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말 그대로 '엔드 게임'의 여정에서 심덕출 씨의 꿈에 무슨 그리 밝은 미래가 있겠는가. 거기다 조금씩 무언가를 잊는 모습을 보여주는 덕출 씨의 일상을 통해 <나빌레라>가 결국 '치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구나 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7회 마지막 수첩에 적힌 '나는 알츠하이머입니다'를 통해 <나빌레라>는 지금까지 '치매'를 다뤄왔던 다른 드라마와 다른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츠하이머라는 걸 알게 된 덕출 씨는 공원에 앉아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에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쩌면 암보다도 더 무서운 진단인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덕출 씨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발레를 시작한 것이다. 충분히 자신에게 닥친 병에 안타까워 하던 덕출 씨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남은 생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집중'의 결과물이 '발레'였다. 알츠하이머에 걸렸지만 밀도있는 삶을 향한 여정이다.
동네 아줌마가 '춤바람'이라고 하는 발레를 74살의 노인이 선택하는게 어디 쉬웠을까. 당장 7회에서 '주책'이라는 말에 덕출 씨가 움츠러든다. 채록이는 연습만 해도 빛이 나는데, 덕출 씨는 연습복을 입은 모습부터가 스스로 '무안'하다. 나이듦은 '추레'하다. 스스로를 위축시킨다. 그저 '존재'자체만으로 빛나는 젊음과 다르게 무엇하나 '뽀대'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덕출 씨는 포기하지 않는다. 운전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차도 손녀에게 선사한 덕출 씨다. 그래도 식전 댓바람부터 연습실로 나선다. 선생님 채록이가 없어도 온종일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한다.
여담이지만 이 글을 쓰는 기자도 매일 요가와 필라테스를 배운다. 그런데 일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뻣뻣하다. 연식이 유연성을 향한 훈련을 앞지른다. 한 달된 젊은 처자들이 쭉쭉 몸을 뻗는다. 구부러지지 않는 허리로 끙끙거리는 처지다. 그런 처지여서 그런가, 다리 한번 들면서 부들거리시는 덕출 씨에 공감 만배이다. 다리 하나, 팔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제 아무리 해도 구부러지지 않는 허리와, 천근만근인 다리, 하지만 덕출 씨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저 나이가 들어서 꿈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아서이다.
이모부님이 덕출씨와 같은 병마에 시달리신다. 최고의 학부를 나오고, 최고의 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던 분이다. 뭐든 배우고자 하면 스스로 독학을 해서 뚝딱 해치우시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 속절없이 변해가신다. 제 아무리 배움이 많아도, 한 일이 많아도 '나이듦'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그 속수무책의 시간, 덕출 씨는 그냥 앉아서 자신의 병에 당하는 대신, 평생의 '로망'에 자신을 던진다. 엔드 게임의 시간을 맞이하는 덕출 씨의 태도이다. 엔드 게임의 시간은 우리에게 공평하지만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 되는가는 결국 우리에게 달렸다고 드라마는 전한다.
거기에 더해 나이듦의 미덕도 놓치지 않는다. 나이가 드는 건 모든 게 다 나빠진다는 것이다. 신체적 기능도, 정신적 기능도 약화된다. 하지만 딱 하나 좋아지는게 있다고 한다. 바로 '지혜'이다. 다리를 다쳐 다가올 콩쿨에 나갈 수 없어 좌절하는 채록, 기승주도, 은교수도 달래보지만 불투명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채록의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 그때 덕출의 조언이 채록의 불안을 다독인다. 다음이 있다는 말, 그 평범한 말에 실린 덕출의 삶이 주는 '지혜'가 채록에게 한 발 물러설 용기를 준 것이다.
<나빌레라>가 빛나는 건, 노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어서이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서 '퇴적층'이 되어가는 노년층을 지나온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갈 '꿈'을 꾸는 사람들로 그린다. 알츠하이머라는 최종 진단 앞에서도 말이다.
나이듦은 본의 아니게 ktx에서 무궁화호로 갈아타는 상황과도 같은 것이다. 심지어 그 갈아탄 열차의 종착지가 아주 다르다.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닌 노년의 열차, 하지만 그 여행길을 어떻게 가는가는 탄 사람에 달렸다고 <나빌레라>는 말한다.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과감하게 보낼 수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기자 역시 지난 1,2년 사이 열차를 갈아탄 듯하다. 그래서일까, 덕출 씨 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무모하게 용감해졌다. 나에게 찾아온 '인연'을 받아들였고, 그저 '하고 싶어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래서일까, 발레를 향한 덕출 씨의 눈빛에 공감 백배이다. 그건 '사랑'이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이다.
가파르게 늘어나는 노년층, 사회적 시스템은 나이듦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저 시스템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이 아니다. 각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여정의 삶에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빌레라>는 그저 치매 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이듦의 시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나에게 처음 '미드'라는 신세계에 눈을 뜨게 해 준 드라마는 sbs를 통해 방영된 <ER>이었다. 199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NBC를 통해 방영되었던 <ER(Emergency Room )>은 시카고 카운티 종합병원 응급실을 배경의 의학드라마이다.
'의사'라고 하면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특별한 사람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ER>속 의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고달픈 직장인들이었고, 월급을 넘어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자신의 직업적 이상을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내 눈길을 끌었던 건 '부'의 국가 미국에서 의료 보험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로 인해 의사들이 '도덕적'인 고뇌에 빠지는 모습이었다. 전국민 의료 보험제도가 당연한 사회에 사는 사람에게 비춰진 '부'의 이율배반적인 민낯이었다.
<ER>로부터 20년, 미국은 달라졌을까? 내가 <ER>을 시청한 것이 2000년대 초반, 그로부터 어언 20여년 미국의 의료 현실은 달라졌을까?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뉴암스테르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뉴욕 한 복판에 있는 공립 병원 <뉴암스테르담>, 그런데 왜 뉴암스테르담일까? 영국의 점령 이후 새로운 요오크라는 명칭의 '뉴욕'이라고 불리기 전에 네덜란드가 점령하여 네덜란드의 수도 이름을 따서 새로운 암스테르담이라 불렸다던 뉴욕, 즉 오래된 뉴욕의 지명이 병원의 이름인 것처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병원인 벨에뷰 병원의 병원장이었던 에릭 만하이머(Eric Manheimer) 박사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하여 드라마는 만들어졌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ER>로 부터 20여년 미국 사회는 나아지지 않았다. 공공병원은 있지만 그곳에서 '공공 의료'는 쉽지 않다. 여전히 의료 보험은 가난한 자들에게 그림의 떡이다. 항생제만 있어도, 기본적인 인슐린만 있어도 해결될 '병고'가 다리를 절단하고 응급실에 실려오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학교의 기간제 교사가 가장 기본적인 당뇨병 치료제를 구하지 못해 쓰러지고, 의료 체계에서 방치된 환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교통사고를 내서 보험 혜택을 받는 불법을 자행하기도 한다. 여전히 <뉴암스테르담>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들의 제일 첫 마디가 '보험이 없는대요'이다. 20년 전에도 보험이 없어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던 환자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의료의 치외법권 지대에 놓여있다. <뉴암스테르담>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미국의 현실이다. 왜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이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발생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에피소드들이 드라마의 시즌1,2를 채운다.
그렇게 돈이 있어야 치료도 받고 목숨도 보장받을 수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그것도 미국의 심장이라는 뉴욕 한 복판에 오래된 공립병원이 있다. 하지만 말이 공립병원이지 이른바 '합리적인 경영'을 앞세운 뉴암스테르담은 '영리' 추구를 우선으로 하는 병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데도 여전히 공립 병원으로서 어려움을 겪던 와중에 새로운 의료 팀장으로 맥스 굿윈(라이언 이골드 분)이 부임한다.
부임하자마자 새 의료팀장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돈이 되는 수술에만 골몰하던 의료진들을 '해임'하는 것이었다. 대신 병원장과 이사장이 대놓고 '그건 사회주의야'라며 난색을 표명하는 실질적인 조치들을 과감하게 실천해 나간다.
공공의료의 본령, 뉴암스테르담 공공병원은 말 그대로 '공공의 의료'를 목적으로 하여 만들어진 병원이다. 하지만 병원의 경영이라는 목적이 내세워지며 공공 의료는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다. 사회주의라며 병원 운영진의 항의를 받은 맥스 굿윈의 시도는 사실 '심플'하다. 공공의료기관으로서 뉴암스테르담의 본령을 되찾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거기를 지나던 맥스 굿윈의 눈에 상처를 치료받지 못해 곧 썩어들어 갈 것같은 다리로 인해 고통받는 노숙자 여인이 눈에 띈다. 맥스는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지 병원으로 데려오려고 한다. 치료비가 없다는, 보험이 없다는 그녀에게 말한다. 뉴암스테르담은 공립병원이라고. 치료비를, 보험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공립병원이지만 사람들은 보험이 없이는 치료받을 수 없는 미국 의료 체계에 길이 들어 공립병원인 뉴암스테르담조차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맥스 굿윈은 뉴암스테르담 카드를 만들어 뉴욕 곳곳에 돌린다. 그러자 이사회장은 반대를 한다. 뉴욕 시민들이 뉴암스테르담이 공립 병원인 걸 알면 병원이 망한다며.
맥스 굿윗이 극중 에피소드를 통해 벌이는 일들은 사실 공립 병원으로서 '상식' 차원의 일이다. 아픈 사람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주는 그 '상식'이 그런데 이상주의가 되고, 사회주의가 되며, 병원을 망하게 할 지도 모를 일이 되는게 오늘날 미국의 현실이 되었다.
물론 맥스 굿윈의 '상식'이 도발적이긴 하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당뇨 치료제인 인슐린을 구할 수 없는 상황, 맥스는 그 원인을 인슐린을 비싸게 공급하는 거대 제약 회사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제약 회사와의 담판을 치루고자 하는 맥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자 맥스는 병원 내 실험실에서 인슐린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물론 반대에 봉착한다. 이번에는 인슐린을 상대적으로 싸게 파는 캐나다에서 인슐린을 공급받고자 한다. 그 시도도 인슐린 구입 트럭이 국경을 넘지 못해 실패한다. 그러자 방송을 통해 인슐린조차 구하지 못하는 환자의 현실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맥스의 시도는 성공했을까? 거대 제약 회사의 인슐린 가격을 내리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럼 실패일까? 인슐린을 공급받지 못해 쓰러졌던 기간제 교사에게는 무료로 평생 인슐린이 공급되었다. 겨우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맥스는 자신의 환자를 우선 살렸다. '인간의 얼굴을 한 맥스의 공공의료는 이런 식으로 한 발자국씩 앞으로 간다.
그의 무모하고 맹목적인 시도는 늘 병원을 파산으로 이끈다고 위협받는다. 비효율적이라 비판받는다. 하지만 그럴까? 병원의 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개선하고자 하는 앙케이트에 냉소적인 직원들의 상황을 살피던 그는 오랜 출퇴근 시간으로 피로에 쩔어사는 직원들을 위해 '통근 버스'를 마련한다. 통근 버스를 시행함으로써 업무 효율성을 올리는 방식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오래된 관행적 업무로 인해 실제 업무를 하지 않으면서 월급을 받는 비효율적인 직원들을 재배치한다. '휴머니즘'이 비효율적이거나 무능하지 않다는 반례를 만든 것이다.
에릭 만하이머 박사의 원작을 기반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암스테르담>에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는 21세기의 미국에서 저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이상주의적'인 사례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몽상적'이라 할만한 에피소드들이다. 그래서 <뉴암스테르담>은 신선하다. 여전히 21세기에도 '인간의 선의와 의지'가 보다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려낼 수 있는 '시도'가 될 수 있다는 서사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적'이다. 사이코패스와 좀비, 보다 강력하고 잔인한 범죄들이 드라마적 요소가 되어가는 시대에 여전히 인간의 선한 얼굴에 대한 믿음과 그걸 통해 공동체적 삶을 실천해 나가는 모습이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조차 상실되어가는 낯선 휴머니즘을 오랜만에 '재회'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든다.
3월 22일 새로이 시작한 <조선구마사>가 역사 왜곡 논란에 부딪쳤다. 좀비를 연상시키는 '생시'로 인해 왕자마저 위 협을 받는 상황, 태종 이방원(감우성 분)은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한다. 로마 교황청의 특사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하게 된 요한 신부 의주에서 그를 맞아 대접하는 장면에서 '월병' 등의 중국 음식이 상에 그득 쌓여 있었다. 왜 로마 교황청에서 온 신부를 대접하는데 '중국' 음식이어야 하는가?
하지만 <조선 구마사>의 본질적 문제는 그런 한 장면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조선 구마사>의 문제는 이미 박계옥 작가의 전작 <철인 황후>에서부터 제기되었던 바 있다. 하지만 단지 시청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성황리에 드라마는 끝을 맺었다. 그리고 시작된 <조선 구마사>, 드라마 속 장면이 보이는 국적 불명의 상황으로 인해 다시 문제가 불거졌다. <조선구마사> 공식 페이지에는 작가 박계옥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러나 박계옥 작가가 <철인 황후>에 이어, <조선 구마사>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세계관은 드라마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은 연상시키는 '좀비'들의 역습으로 시작된 드라마 <조선 구마사>, 하지만 <킹덤>과 <조선 구마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역사'이다. 조선인듯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가지만 <킹덤>은 '조선'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왜란 이후 조선 어느메쯤이라고 연상은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환타지적' 공간이다.
<킹덤> 역시 왕실을 '능멸'하는 설정이 등장한다. 왕은 좀비가 되고 왕가의 혈통은 '아무개'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걸 보고 '역사 왜곡'이라고 하지 않는다. 조선인 듯하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진 가상의 봉권적 권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누군가가 되는 순간 서사의 뉘앙스는 달라진다.
대놓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냉소하는 드라마 <조선 구마사>는 대놓고 태종 이방원이 통치하던 조선 초를 배경으로 한다. 10년전 생시와의 싸움을 끝으로 평화를 되찾은 조선, 하지만 다시 '생시'가 등장한다. 그 생시를 없애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사절단으로 찾아온 요한 신부, 그에게 훗날 세종이 될 충녕(장동윤 분)은 생시 출몰의 원인을 묻는다. 그러자 뜻밖에도 태종과 태상왕 태조 이성계에게 그 이유를 물으라는 대답이 나온다.
태종에게 밉보인 세자 양녕(박성훈 분) 역시 원명왕후(서영희 분)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원명왕후는 '네가 왕위를 물려받으면 알게 될 것'이라며 답을 피한다. 두 상황을 통해 눈밝은 시청자라면 10년 만에 다시 조선에 등장한 '생시'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벌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즉,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은 마치 영생을 위해 악마와 거래를 한 파우스트처럼 손을 빌어서는 안될 세력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생시'로 인한 작금의 사태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된다. 이러한 극의 톤은 극중 요한 신부를 대접하는 과정에서 선조 '목종'도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자조적인 대답을 하는 충녕을 통해 '용비어천가'의 정당성을 냉소한다.
조선 왕실에 대한 박계옥 작가의 비판적이다 못해 조소하는 듯한 시선은 이미 <철인 황후>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중국 드라마 리메이크 작이라는 태생적 한계라는 점을 감안해도 현재의 남자가 과거의 황후의 몸에 빙의되어 왕과 로멘스를 벌이는 기본적인 스토리가 가지는 불온함은 <철인 황후>에서도 역시 왕실을 희화화하는 여러 설정과 함께 시청자들의 역사적 우려를 자아냈다. 하지만 '재밌'으면 된다는 시청자들의 화답으로 <철인 황후>는 무사히 막을 내렸고, 결국 <조선구마사>의 사태를 불러왔다.
늘 아버지 태상왕에 대한 심적인 부담을 안고 있던 이방원은 10년 전 의주에서 그 '트라우마'로 인해 애꿏은 백성들을 '집단 살상'한다. 태종이 조선 건국 과정에서, 그리고 왕자의 난 등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지만 그것과 첫 장면에서 보여진 백성들의 집단 살상 장면을 전혀 다른 차원의 '살상'이다. 드라마는 이렇게 묘하게 역사적 사실이 가진 뉘앙스를 변조한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인한 정변과 무차별 학살은 엄밀하게 다른 문제인 것이다.
물론 21세기에 과거 봉건 시대의 왕조에 대해 '퓨전'의 관점에서 사실을 비트는 것이 큰 문제가 있겠냐 싶을 수도 있다. 영국 국영방송인 bbc에서 방영하는 <닥터 후>를 보면 영국 왕실이 외계인의 후손이라는 설정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와 20여부작의 역사극과는 그 영향력이 다르다. 특히 동북 공정으로 중국이 자국의 역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왜곡'도 마다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틀기를 넘어선 '퓨전으로서의 역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 <조선구마사>는 고민을 남긴다.
19금의 자극적 설정만으로는 어설픈 서사 그런데 조선 건국 과정에서 '생시'를 불러올 만큼 불미스러운 정당성을 가진 태종조 조선에서 다시금 '생시'로 인해 벌어지는 사태의 양상이 어설프다. 19금이라는 자극적 설정 기준을 내세워 목을 자르고, 배를 가르는 등 자극적인 장면을 통해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 끌고자 한다.
첫 회 8.9%에서 단 한 회만에 6.9%로 떨어진 시청률에 대해 제작진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논란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드라마가 자극적이기만 하고 어수선하다.
'생시'에 대한 원죄를 가진 이방원과 그의 두 아들 양녕과 충녕 사이에 벌어진 왕위 승계의 갈등을 '구마'라는 특이한 설정을 통해 풀어보려고 하는데 1회에 이어 2회에 드라마가 벌여놓은 구도가 산만하다. 태종과 양녕, 그리고 충녕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유기적 연결 없이 나열된다. 요한 신부, 그를 대접한 중국 풍의 식탁, 그리고 어설픈 국무당의 굿판 등 국적 불명의 설정들이 사극으로서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냉소적으로 조롱하면서도 정작 그를 '퓨전'으로 이끌어 가는 방식 또한 어설프다. '구마'라며 뜬금없이 십자가를 든 신부가 등장한다. '구마'라는 설정을 만들어 놓았지만 상상력이 빈곤하다 보니 결국 <손 the guest>신부님을 초빙한 것인가. 조선 왕조가 끌어들인 생시를 위한 구마 의식이 십자가요 성수라는 상황에 실소가 나온다. 하다못해 <손 the guest>의 전통 무속이라도 참조하기라도 했으면 나을 것을 궁궐 한 가운데서 벌어진 국무당 무화(정혜성 분)의 굿판 역시 정체불명이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엑소시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니 결국 시청자의 시선을 잡을 수 있는 방식이 '생시'들의 난립과 목을 자르고 피를 흘리며 싸우는 19금의 설정 밖에 없다. ost는 웅장하지만 그 웅장함을 버텨나갈 서사가 빈약하다. <육룡이 나르샤>, <녹두꽃>의 신경수 피디가 맞는가 싶다. 드라마는 한껏 봉건적 권위를 조롱하지만 정작 그 이후에 풀어가는 서사는 자극적 장면 외에 시청자들을 흡인하기에 부족하다.
<나빌레라>의 주인공 덕출(박인환 분)이 편의점 배달원으로 일하는 후배에게 툭 던진 말이다. 이 보다 노년을 잘 설명한 말이 있을까?
심덕출 씨는 한국 전쟁 때 태어났다. 쌀가게 점원이었던 아버지는 덕출이 몸쓰는 일 대신신 펜쓰는 일을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덕출은 77년 집배원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평생을 우편 배달원으로 살다 퇴직했다. 최해남(나문희 분)과 결혼하여 세 아이를 낳고 가장으로 성실하게 살았다. 아이들도 다 크고 은퇴도 했다. 이제 일흔, 하루가 너무 길다.
하루가 긴 덕출은 가끔 요양원을 찾았다. 친구 교석이 있기 때문이다. 처자식도 들여다 보지 않는 교석을 덕출은 찾아간다. 그런데 이제 그 마저도 갈 수 없게 되었다. 평생 배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배 전진호를 완성하지 못했다던 친구는 어느 날 밤 자신의 방 창문 앞에 펼쳐진 바다에 종이배 '전진호'와 함께 떠났기 때문이다.
'늙으면 이별도 익숙해지니까' 친구를 보냈다. 하지만 마지막 만났을 때 친구가 했던 말이 덕출의 가슴에 남는다. '덕출아, 너는 가슴에 품은 게 있냐? 지금이다. 아직 안늦었어. 다리에 힘있고 정신 말짱할 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저는요, 한번도 해보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습니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그를 끌어당긴 음악 소리, 그곳에서 다시 덕출의 가슴이 뛰었다. 발레를 하는 채록(송강 분)을 보며 자신도 다시 한번 훨훨 날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발레를 하기로 했다. 나이 일흔, 너무 늦었을 지 몰라도, 이제라도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다.
일흔, 꿈이 시작되었습니다 3월 22일 첫 선을 보인 tvn의 월화 드라마 <나빌레라>는 이미 다음 웹툰을 통해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Hun 글, 지민 그림으로 2016년부터 연재된 웹툰 <나빌레라>는 '발레'라는 생소한 소재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하고자 하는 70대 노인과 방황하는 20대 청년을 조우케 한다. <나쁜 녀석들>, <청일전자 미쓰리> 의 한동화 피디와 <터널>의 이은미 작가가 의기투합했고 덕출 역으로 박인환 배우와 그의 아내 해남에 나문희 배우가 합류했다. 이미 두 분의 출연만으로도 <나빌레라>의 정서적 온도가 전달된다.
드라마는 일흔의 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덕출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하루가 너무 길다.'는 덕출의 대사는 나이든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애써 바쁘게 지내고 있지만 나 역시도 아침에 눈을 뜨면 시작도 하지 않은 오늘 하루가 무거운 경우가 많다. 힘들다 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던 시절에서 '방출'된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막막함이 아닐까 싶다.
'저는요. 한번도 해보고 싶은 걸 해본 적이 없습니다'.'까지는 아니라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시간은 삶의 방점이 늘 자기 자신보다는 '가족'에게,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찍혀져 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나면 그 '가족'에 찍혀졌던 방점이 방황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직장'에 다니며 '가장'으로 살아왔던 아버지의 자리는 '정년'과 함께 삶의 또 다른 국면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가게 된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던 그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여의치 않은 시절, 그게 바로 나이듦의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물론 <나빌레라> 속 덕출의 아내 해남처럼 여전히 다 큰 자식들을 자신의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정말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그저 품안의 자식이라 여기고 싶은 경우가 많다. 아직 풀어내지지 않았지만 덕출의 도전만큼 자식과 남편까지 끌어안고 사는 해남의 행보도 그래서 궁금하다.
우리는 살아가며 온전히 '나'로 서기를 갈망하지만 막상 온전히 '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다가오면 두렵다. 왜냐하면 '나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빌레라>의 덕출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나이 70에 후배가 하는 패스트푸드점 배달 일이라도 하고자 한다.
그런 덕출에게 죽어가던 교석이 메시지를 던졌고, 발레를 하는 채록이 영감을 깨운다. 홀로 발레를 보러다니고 은퇴한 발레리노 승주의 팬이라 할만큼 발레를 좋아했던 덕출이 관객의 자리를 박차고 '무대'에 서고자 한다.
왜 발레였을까? 70대의 발레는 덕출의 말대로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우리 사회는 늘 '승산있는 싸움', '성공', '쟁취'가 화두가 되는 사회다. 덕출이 하겠다고 나선 '발레'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런 사회의 '링'에서 내려온 노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덕출의 세대는 평생 자신이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언감생심'이었던 세대일 것이다. 어디 덕출뿐이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려왔던 많은 사람들 역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한 켠으로 밀어두며 살아가지 않을까.
그런데 자식을 다 키우고, 정년을 하고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으로 서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다가온다. 남은 노년의 시간, 심지어 의학의 발달로 살아온 시간만큼은 아니지만 몇 십년이나 남은 시간을, 오로지 '나'만이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고. 늙은 사람들이 보내는 나머지 시간이 아닌 주체적으로 늙음을 살아가기 위한 질문을 드라마는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 <나빌레라>는 길고 긴 시간을 '나'로써 살아가야 하는 노년에 대한 유의미한 숙제를 안긴다. 과연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 질문에 발레를 보는 덕출처럼 당신의 가슴이 설레이고 뛰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희망적이지 않을까? 그 희망의 과정을 12부작 <나빌레라>가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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