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vn의 드라마 <나빌레라>가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에 눈을 뜨고 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주인공 심덕출(박인환 분)씨의 모습이 세대불문 삶과 행복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 만이 아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듯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삶의 기회와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이듦은 '제한',이나 '한계', 혹은 '후퇴'로 받아들여지기가 십상이다. 그러기에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를 해보겠다는 <나빌레라>의 심덕출 씨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난 2016년 개봉한 후시하라 켄시 감독의 <인생 후루츠>는 어떨까? 발레에 도전하는 심덕출 씨와는 또 다른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두 부부가 우리에게 '노년'을 살아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실패한 젊은 건축가의 선택 젊은 건축가가 있었다. 일본 주택공단의 에이스였던 쓰바타 슈이치가 그 주인공이다. 해발 0m의 마을이 태풍으로 인해 수몰되자 정부에서는 고지대에 뉴타운을 만들고자 했다. 뉴타운 건축 책임을 맡게된 슈이치는 산이었던 그곳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숲이 산으로 들어올 수 있는 도시를 계획했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밀한 아파트들로 가득채워진 뉴타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슈이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300평의 땅을 샀다. 그로부터 50여 년, 과일 50종, 채소 70종을 키우며 키우며 그곳을 '자연'으로 꾸렸다. 그리고 뉴타운 단지 뒤의 민둥산을 도토리 나무로 무성하게 가꿨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작고한 일본의 배우 키키 키린이 나레이션한 영화는 할머니의 흙 예찬론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농작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흙이 좋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지론은 아파트 단지 속 뉴타운에서 숲을 만들기 위해 지난 50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건축론에 닿는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영화에 소개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정의다. 할아버지에게 '보석상자'로서의 집은 '자연'친화적인 존재였다. 그의 꿈은 '개발'에 밀려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땅을 샀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50년 동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도, 내 생각이 이러니 세상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접어둔 채 스스로 자신이 그러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90세가 되었다.
영화 속 할아버지는 말한다. 건축가들은 집을 지어놓고 막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살지도 않을 집, 이라는 할아버지의 질타 속에 '문명'이란 이름으로 지구를 오염시킨 숱한 '개발'의 잔해들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할아버지 슈이치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스스로 어떤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가를, 어떤 공간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 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보여주었다. 그 결과물이 <인생 후르츠> 속에 등장하는 수려한 나무들로 둘러싸여있고, 일년 내내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확물들을 공급해주는 농장을 품은, 사시사철 빛이 들어오는 슈이치 부부의 집이다.
건축가 슈이치 씨가 평생 자신이 꿈꿔온 건축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자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 츠바타 히데코가 있어서이다. 월급이 4만엔이던 시절에 70만엔짜리 요트를 사겠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다던 아내 히데코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그녀의 나이 87세, 그 세대의 여성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남편'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히데코의 삶이 그저 전근대적 여성의 숙명적 삶이라고만 여겨지지 않는다. 매 끼니 밥을 먹는 남편을 위해 <인생 후루츠>가 2018년 서울 국제 음식 영화제에 초빙을 받을 정도로 죽순 덮밥에서 부터 생딸기 케잌, 푸딩에 이르기까지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건 '의무'의 경지를 넘어선다. 남편의 뜻을 따르는 거, 남편이 하고자 하는 바를 평생 따라왔다는 그녀는 그런 자신의 '의지'가 결국은 돌고돌아 좋은 일로 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시대에 '행복'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룬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살아보면 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시간보다 이루지 못해 안달하게 만드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삶이 주는 케잌은 달콤하지만, 그 케잌은 생각만큼 넉넉하게 여유롭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거나 때론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래 살수록 인생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인생은 후루츠>는 두 노부부가를 통해 현명하게 나이들어가는 삶의 방식, 아니 나이를 차치하고 지혜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남편인 슈이치는 건축가로서 자신의 뜻을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관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좌절'하여 뜻을 꺾는 대신, 그 이후 50년에 걸쳐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뜻을 가지고 자신의 집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고자 하였다. 자신과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면 도시 전체가 다시 '자연'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 히데코 역시 자신의 뜻보다는 늘 자신의 삶에 '가족'들부터 끌어들이는 남편으로 인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남편의 주도적인 삶의 방식에서 그녀는 가족에게 좋은 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일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지만 자신은 단촐한 토스트 한 조작으로 한 끼를 대신하는 '융통성'도 놓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해온 부부, 하지만 장어 덮밥을 먹고 잠든 남편 슈이치는 다음 날 눈을 뜨지 않았다. 아내는 담담하게 남편을 보내려고 한다. 대신 오래도록 남편의 영정 앞에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마련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90살이던 남편처럼 90살이 된 아내, 지난 65년 남편과 함께 했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늘 남편의 뜻을 따라 살던 아내에게 지금의 삶은 때로는 덧없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다시 의연하게 살아간다. 슈이치는 갔지만 그의 생각은 자연친화적인 병원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살아왔듯 삶은 그런 것이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 그건 영화 속에 등장한 대사처럼 '꾸준히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서 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처음 만난 건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였다. 국사 교과서 실학자를 소개하는 부분에 정약전이 물고기 백과 사전과 같은 '자산어보'를 썼다고 하였을 때 시쳇말로 좀 '없어보였다.' 동생인 정약용이 유배 기간 동안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등 정치, 경제 다방 면에 걸쳐 일가를 이루는 동안 겨우 물고기 책이라니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정약전에 대해 내 관점을 달리해주는 책을 만난 건 2006년이었다. 아이세움에서 '나의 고전 읽기' 시리즈 첫 권으로 나온 손택수의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는 한낱 물고기 책이나 쓴 정약전에 대한 내 '색안경'을 벗겨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음에도 '공도'정책이라는 무지몽매한 정책으로 오늘날 '독도' 문제의 빌미를 자초한 것처럼 '유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나라였다. 그런 세상에서 제 아무리 유배을 갔다해도 '선비'가 백성의 터전인 바다와 그 바다의 산물에 대한 책을 펴냈다는 건 정약전의 성취와는 또 다른 '실학'의 본류요, 어찌보면 '혁명적인 도전'이었다는 걸 <바다를 품은 책>은 알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십 여년이 흘러 이준익 감독을 빌어 정약전과 그의 자산어보를 다시 만났다. 무지한 해양정책을 폈던 책상물림의 나라 조선에 분노했던 그 시절로부터 십 수년이 흘러 다시 만난 정약전과 자산어보는 그 흐른 세월만큼이나 묵직하고 깊게 다가온다.
약전, 흑산으로 가다 영화의 첫 장면은 '관직'에 나선 약전이 정조 임금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관직에 나서는 대신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양 학문과 과학 기술에 천착했던 정약전이 '관직'으로 나선 결의를 유머러스하게하게 밝히는 장면에서 정조 임금은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정약전에 대한 믿음을 밝힌다. 그리고 '버티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정조 임금의 당부는 그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버린다. 서양 학문과 함께 수용한 '서학'이 정약전 형제의 목을 죈다. 약전이 스스로 배교자를 자처하며 애써 지키려 했지만 약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파워엘리트이자 학자였던 동생 약용과 약전은 조선 땅끝과 바다 건너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1790년 문과에 급제, 전적, 병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 1798년 정조의 명을 받아 책을 편찬하는 등 뜻을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정조의 죽음과 함께 1801년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희망은 꺾였고, 홀로 바다 건너 흑산도로 향하게 되었다. 날개가 꺽이다 못해 뜯겨버린 처지인 셈이다. '어려서는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이었고 커서는 사나운 말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듯했다'는 표현처럼 호방했다는 인물 약전, 설경구가 연기한 약전은 눈물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동생 약용(류승룡 분) 앞에서 의연히 흑산도로 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오늘 밤은 으르렁대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잠자는 구름 아래 어등(魚燈)이 빛을 뿜는다. 공활한 하늘이 훤히 펼쳐 있고 다닥다닥 별 떼가 반짝이는데 나뭇잎 사이로 이따금 꺼졌다가 켜지며 반공중에 까닭 없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잠 못 들고 몇 개 섬을 돌고 났는지 왁자하게 흩어지는 새벽이 됐다.
제 아무리 동생 앞에서 의연하게 길을 떠났지만 겨우 300 명 남짓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흑산도의 유배 생활이 쉬웠을까. 그의 시, 어화(漁火)가 잠못들고 섬을 서성이는 선비 정약전의 맘을 드러내준다.
실학자 약전, 자산어보를 쓰다 영화는 그런 복잡한 심경의 선비 정약전을 넘어, 실학자 정약용의 열의를 앞세운다. 나무로 지구의를 만들고,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바늘구멍 사진기를 만들던 실사구시(實事求是)' 학자' 정약전 앞에 흑산은 그저 유배지가 아니었다. 농부가 밭을 갈듯, 어부들의 밭이었던 바다, 그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을 제대로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건 정약전 식의 '목민심서'였던 것이다.
1816년 죽을 때까지 정약전은 섬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속 약전은 죽음의 순간까지 붓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동생 약용마저 풀려난 유배길, 홀로 남아 끝까지 그가 남기려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날 것의 바다를 정화시킨 흑백의 화면은 오롯이 약전의 성실한 삶을 드러낸 보인다. 방대함과 정밀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산어보, 비늘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껍질이 단단한 개류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잡류 등등 분류에서 부터, 붓으로 찍어 쓸 수 있는 오징어 먹물에서 부터 돗돔에 이르기까지 자산어보의 내용은 그 자체로 실학자 약전의 실천적 삶이다.
청나라의 문물과 서학을 눈밝게 수용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자, 그 뜻을 정조 치하에서 펼쳐보려했던 실천적 정치가, 하지만 그 꿈은 멸문지화로 끝맸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풍운'의 꿈을 꾸던 이들이라면 여기서 자신의 뜻을 멈추지 않았을까? 더구나 조선 시대에 육지가 아닌 섬은 이 세상이 아닌 곳과 같은 의미이다. 그곳에 홀로 떨어진 학자, 정약전은 하지만 거기서 다시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을 통해 다시금 소환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정약전은 아는 사람만 아는 조선 실학자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면서도 쓴 '자산어보'는 그가 죽은 뒤 어느 집 벽지로 붙여져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가 동생 약용이 보낸 제자에 의해 '구제'되었다. 이렇게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작업에 필생을 바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영화 <자산어보>속 바다를 향한 멈추지 않는 정약전의 열정은 그걸 자꾸 짚어보게 만든다.
거기에 <자산어보> 속 등장했던 섬소년 창대는 영화에서 약전이 흑산에서 애써 키운 '상놈'의 제자로 재현된다. '상놈의 제자'는 상징적이다. 서학쟁이라 약전을 경원시했던 창대에게 약전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었고 기꺼이 그의 스승이 되었다. 영화 <일포스티노>의 네루다와 마리오와도 같다. 약용을 찾아간 창대가 약용이 아끼는 제자와 맞서 시 대결을 벌이는 장면, 정약용의 제자조차도 감히 '상놈 주제에'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창대는 통쾌하게 약용 제자의 말문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그런 창대를 절에서 일하는 '상놈'들이 경이롭게 쳐다본다.
이 장면은 문자에 관심이 있어, 물고기에 밝아서 창대가 제자가 된 것만이 아니었음을, 진보적 지식인으로 정약전이 가졌던 양반도, 천민도 없는 조선 사회에 대한 그의 세계관이었기에 가능한 '실천'이었음을 영화는 뒤늦게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아끼던 제자 창대는 결국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약전을 떠난다. 그리고 물론 '상놈' 창대의 높은 뜻은 세상과 조우할 수 없었다. 뒤늦게 돌아온 창대가 받아든 약전의 묵은 서신, 학 대신 검은 무명천, 그저 뭇 백성으로 성실하게 살아감의 의미를 집은 약전의 말은 자기 자신에 향하는 결의가 아니었을까.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한때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지만 날개를 꺾이다못해 찢긴 약전, 그를 2021년 이준익 감독이 초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때는 386이었다가, 이제 586이 되어가는 기자의 세대,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표가 불과 20 여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어느덧 퇴색되고, 심지어 불명예의 상징이 될 지로 모를 기로에 놓여있다.
586으로 상징되는 세대는 그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원심력'의 기세로 살아왔다. 그 겨울 광화문을 밝히던 촛불 속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늘 자신을 '발산'하던 세대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자산어보> 정약전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 보기를 권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늘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고 실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오던 세대, 어쩌면 이제 세상에, 젊은 세대에 그 몫을 물려주고 물러나야 하는 시간, 그 '퇴장'의 시간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기에 정치적 무대에서 강제적으로 '퇴장' 당한 약전의 삶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불과 10여 년의 관직 생활, 뜻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바다 건너로 유폐당한 약전은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상놈' 창대를 학문적 벗삼아 <자산어보>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음으로써 약전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기억된다. 정조 연간의 관리 약전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자산어보는 오래도록 남았다.
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김훈은 정약전을 그린 소설<흑산>에서 이렇게 푼다. 흑산을 '자산'의 스토리로 다시 쓰는 삶, 흑산을 살 것인가, 자산을 살 것인가,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트라우마'란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다큐 영화 <당신의 사월>은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의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 등 총 476명을 태우고 인천 항을 떠난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침몰의 순간부터 벌어졌던 많은 일들은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한 배의 침몰을 통해 우리는 시스템, 나아가 사회, 결국 '국가'의 침몰을 확인했고 결국 그 책임을 당대의 대통령에게 물었다. 세월호의 침몰은 우리 사회 전체의 상흔이었다.
그리고 7년, 우리는 그 해 4월로 부터 어디쯤 와있을까? 타인의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도 겪는다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우리는 '치유'되고 '회복'되었을까? <당신의 사월>은 유가족이 아닌 그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드리워진 세월호의 그림자를 살펴본다.
그 해 4월, 다른 곳에서
서촌에서 커피 공방을 10년째 하고 있는 박철우 씨는 지난 촛불 집회 때 세월호 유가족들을 도와 '심야 식당'을 했었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께 밥 한끼 대접하고 싶다는 세월호 유가족의 말씀에 그럼 함께 하자며 나섰던 것이다. 평범했던 커피 가게 사장님이던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통의 전화였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동네 박사장의 전화였다. 여의도에서 농성을 하던 유가족들이 밤을 걸어 청와대로 향하니 뜨거운 물이라도 준비해달라는 전화 한 통에 그는 유가족을 맞이했다.
기사로만 접하던 세월호, 유가족을 볼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직도 추운 봄날의 새벽, 담요을 둘러쓴 채 묵묵히 걸어오는 가족들을 보며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아서는 안되겠다는 심정이 앞섰다. 차마 따뜻한 물 한 잔 마시라고 말조차 걸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박철우 씨의 4월은 첫 걸음을 뗐다. 진도의 어부였던 이억년 씨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좌초 현장으로 나갔다. 거의 5~10 미터 근처까지 갔을 때 왔다갔다 하는 '물체'를 목격했다. 미역 양식줄에 꼬여 올라온 하얀 '무언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어부의 4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조수진 씨는 옆 자리 선생님이 보여주는 컴퓨터 화면에서 세월호를 만났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기에 남의 일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구하겠지 했었다. 계속 속보가 이어지는 상황에 본의 아니게 b급 호러 무비의 관람객이 된 듯한 무기력감에 빠졌다.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인천항이 가까운 학교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 뱃고동 소리에 자꾸만 세월호가 오버랩됐다. 교실이 마치 배같았다.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권수영, 윤인아 선생님은 자신이 살아오지 못할 꺼라는 걸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 교사의 책임이 무겁게 다가왔다. 부모님 얼굴이 스쳐지나갔을 텐데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촛불 집회에서 전교조 대표로 조수진 선생님을 세우도록 만들었다.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집안 곳곳에 노란 리본을 비롯하여 세월호와 관련된 기억들을 붙여놓았다. '잊지않겠습니다'라는 취지로 아이들과 함께 추모 수업을 하고 모임을 가진다. 선생님에게 세월호는 현재형이다. 자발적으로 추모 모임을 이끌어 가는 아이들을 보며 '희망의 씨앗'을 느꼈다. 버티니 '희망'이 보였다.
인권운동가이던 정주연 씨는 진도 앞바다로 달려갔었다. 그저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주연 씨의 4월은 시작되었다. 그저 곁에서 유가족들의 슬픔을 온전히 들어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곁에서 지켜 본 유가족의 무게는 무거웠고 슬픔은 깊었다.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을 피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꺼내어 보이며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다시 예전 으로 돌아가는 엄마들, 하지만 관광객이라도 오면 고개를 숙였다. 사회가 짊어지우는 피해자다움, 유가족다움이 가족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유가족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고통에 시달리는 잠수사들, 하지만 마치 delete 버튼을 누르듯 그들을 지워버린듯하는 사회와 국가, 여전히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는데 '지겹다'고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악몽을 꾸어가면서도 화가인 정수진 씨 남편은 잠수사들의 모습을 남기려고 애쓴다. 정주연 씨네 방식의 '잊지않겠습니다'이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당시 고 3이었던 이옥영 씨는 '수능'이라는 현실에 가급적 세월호와 관련된 기사를 접하지 않으려 했었다. 수능을 마치고 세월호 기억 교실 대신 만들어진 기억저장소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이옥영 씨의 미래는 달라졌다. 시간과 함께 세상에서 '유실'되어가는 세월호의 흔적들을 보며 '기록관리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진도 앞바다를 바라보던 돔마저 철거되었지만 어부 이억년 씨의 집 안에는 여전히 돔이 한 채 남아있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 진도 앞 바다에 온 세월호 부모님들을 이억년 씨는 그곳에서 머무르게 한다. 영화 내내 카메라로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던 문지성 학생의 아버님 문종택 씨는 딸이 있는 그 바다가 가장 편하다고 하신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자신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억년 씨와 모처럼 웃음을 나눈다.
영화는 세월호로 인해 삶의 시간이 변화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영화가 끝나고 '도움을 주신 분들'의 마지막에 '그리고 당신'이라는 자막처럼, 또 다른 우리들일 수도 있다. 세월호가 좌초되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은 아이들이 더 이상 세상 밖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때 우리는 모두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를 그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게 만들었다. <당신의 사월> 속 사람들은 아직도 저마다의 사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 노란 리본은 현재형이다. 우리의 노란 리본은 어디쯤 있을까.
시간이 흘렀다. <트라우마>의 주디스 허먼은 '회복에는 기억과 애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충분히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의 홍보 문구를 보면 핀란드의 '뭉크'라는 표현이 있다. 아마도 이름조차 생소한 북유럽의 여성 화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나마 우리 나라 사람들들에게 익숙한 북유럽의 화가 '뭉크'를 소환해야 했던 듯 싶다. 심지어 뭉크는 노르웨이 사람인데 말이다.
이렇듯 헬렌 쉐르벡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화가이다. 그런데 그 생소한 화가는 그녀의 생일을 '미술의 날'로 정할 만큼 핀란드인들이 사랑하는 화가이다. 뿐만 아니라 2019년 영국에서 개최된 개인전에 대해 '너무 늦었다'라는 아쉬움의 평가처럼 그녀의 전시회가 열린 곳마다 평단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낯선 이방의 예술가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여성 화가가 아니라, 그냥 '화가' 하지만 낯선 예술가를 알게 된다는 '기회'를 넘어 영화는 20세기 초 여전히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힘들었던 여성 화가의 강인한 예술적 의지와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헬렌 쉐르벡은 1862년에 태어났다. 4살 때 계단에서 넘어졌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야 했다. 일찌기 헬렌은 화가로서 재능이 두각을 나타냈다. 11살 때 장학금을 받고 핀란드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17세에 미술협회상을 받으며 화단에 주목을 받았다. 1880년 후원을 받아 프랑스로 건너간 헬렌은 다양한 미술적 사조를 경험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만의 화풍을 모색해간다.
하지만 일찌기 미술적 재능이 빛을 발했지만 여성으로서 그녀가 '화가'로 인정받는 길은 험란했다. 전쟁 등 당시의 사회상을 화폭에 담은 그녀에게 '세상 사람'들은 '여성답지 않다'라고 비판했다. 그런 세상의 시선에 대해 헬렌은 자신은 '여성 화가'가 아니라 '화가'라고 답한다.
그녀의 발목을 거는 건 '세상'만이 아니었다. 가부장적 분위기가 강했던 당시 핀란드 사회에서 헬렌은 오빠보다 괜찮으면 안되는 딸이었다. 밥상머리의 고기도 오빠한테 양보하고, 자신의 작품을 판 돈도 오빠 몫이었다. 아직 여성의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은 사회에서 그녀는 고집스러운 딸일 뿐이었다. 하지만 헬렌은 그럼에도 자신의 권리와 몫에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 사이에서도, 사회에서도 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던 그녀 앞에 그녀를 이해해주고 심지어 칭송하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영화는 헬렌이 건강 등의 문제로 헬싱키를 떠나 어머니와 함께 히빈까에 머물던 1915년에서 부터 1923년까지를 다룬다.
장학금을 받고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후원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지만 50대에 이를 때까지도 헬렌은 화가로서 자신의 개인전조차 열지 못했다. 그런데 산림청 공무원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에이나르가 그녀의 전시회를 적극 추진한다. 50대의 나이에야 비로소 개최된 첫 전시회, 히빈까에 칩거하며 자기 자신과 싸우며 그림에 천착했던 여성 예술가는 비로소 세상 밖으로 한 걸음을 뗐다.
연하이지만 자신의 그림을 알아봐주었던 사람, 그 에이나르를 향해 헬렌의 마음이 조금씩 열려간다. 늘 그렇듯 '사랑'의 비극은 그래서 잉태된다. 그녀의 그림을 좋아하다 못해 그녀를 칭송하는 에이나르, 그녀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기뻐하고 그녀와 함께 자신의 별장으로 여행도 떠나지만 결국 그는 50대의 헬렌이 아닌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성을 자신의 약혼자로 택한다.
소유권을 주장하는 오빠, 그런 오빠의 역성을 드는 어머니에게 대항하여 자신의 작품료를 당당하게 '고수'했던 헬렌, 그렇게 어렵게 '획득'한 돈으로 에이나르를 견문을 넓히는 명목으로 여행까지 보내준 헬렌이었던 만큼 에이나르의 선택은 그녀를 무너뜨리고 만다.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만큼.
쓰러진 이젤, 짙이겨진 그림, 부러지고 으깨진 도구들, 처참한 화실 속 풍경처럼 헬렌도 무너져버린다. 뒤늦은 나이였지만 자신을 인정해준 한 사람을 향해 어렵게 열었던 마음만큼, 그녀의 상실은 깊고 컸다. 영화는 그런 헬렌의 상흔을 처참하게 짖이겨진 그녀의 그림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사랑도, 차별도 그림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이 가진 미덕은 고통스러운 예술가의 영혼을 그려내는데 멈추지 않는다.
오랫동안 서로를 경원시해왔던 어머니와 헬렌, 헬렌과 입장 차이를 보이던 어머니는 아들 집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결국 다시 헬렌에게 돌아온 어머니, 하지만 병은 어머니를 삼키고, 자리에 누운 어머니와 헬렌은 늦은 '화해' 아닌 화해'를 한다.
그렇게 해묵었던 앙금을 풀어낸 헬렌은 자신의 화실로 와 그림을 그린다. 오빠가 와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라 하지만 대신 헬렌은 그림을 그린다. 바로 '나의 어머니'라는 그녀의 그림이다.
그렇게 영화는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중단'없는 화가로서의 헬렌을 그려낸다. 칩거한 시골에서 그릴 대상이 아쉬웠던 헬렌은 자신을 그린다.
'조건이 있어요.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영화 속 대사처럼,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해 낸다. 몇 시간 째 앉아만 있었다는 에이나르의 볼멘 불평도 그녀의 예술적 의지 앞에서 무력하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로, 실연하면 실연의 마음으로 그녀는 그린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제목 ' 내 영혼의 자화상'이라는 표현은 헬렌이 그림 그리는 행위를 가장 적절하게 대변한다.
우리들에게 여성 예술가는 어떤 모습으로 그간 다가왔을까. 때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살아갔던 시대의 희생자로, 그녀가 헌신했던 사랑의 피해자로 그려왔던 작품이 꽤 있었다.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그런 면에서 '화법'을 달리한다. 그녀는 사회적 차별을 받고, 가정적으로 편견에 시달리고, 사랑에 실연을 하지만 자신의 '그림'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예술가가 말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작품이다.
살아생전 그린 1천여 점의 작품, 그 성실을 넘어선 작품 수가 말하듯 헬렌은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존재', 자체인 작품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무너지고 쓰러지는 우리의 인생처럼 헬렌의 삶에도 많은 시련이 다가온다. 때로는 이젤을 쓰러뜨리고, 그림을 짓이겨도 헬렌은 결국 다시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다. <헬렌; 내 영혼의 자화상>은 사랑보다도, 편견보다도 강했던 한 여성 화가의 예술적 의지를 121분의 런닝 타임을 통해 구현한다.
같이 사는 사람이 주말 농장을 경영한 적이 있다. 농장을 만들고 제일 먼저 심은 몇몇 식물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미나리'였다. 구덩이에 물을 가두어 미나리꽝(미나리를 심은 논)을 만들었다. 그렇게 심은 미나리는 날이 쓸쓸해질 때까지 끊이지 않고 공급된 우리집 먹거리였다.
왜 하필 물만 주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미나리'였을까? 윤여정 배우가 분한 순자는 하고많은 '식물' 중에 미나리를 가져갔을까? 115분의 런닝 타임이 끝날 무렵,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많은 토종 식물들이 있지만 '물'과의 전쟁을 벌이는 아칸소 농장에서 그저 물가에 던져놓기만 해도 쑥쑥 자라 '일가'를 이루는 미나리만큼 '제이콥(스티븐 연 분)'네 가족의 '이상향'이 될 식물이 있을까 싶었다.
영화는 정이삭 감독의 어린 분신같은 데이빗(앨런 김 분)의 시선에서 진행이 된다. '제이콥'네 이야기라지만 정작 여리여리하지만 강인하게 아칸소에 뿌리를 내리는 미나리처럼 여겨지는 건 모니카, 순자, 앤의 여성 3대이다. 아칸소 개울에 던져진 미나리 씨앗처럼 본의 아니게 아칸소까지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하지만 굳건하게 버티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강인하지만 고달픈 여성사를 목도하게 된다.
모니카, 엄마의 자리 꼬까옷같은 한복을 입고 '사랑해 당신을'을 얼굴 붉히며 부르던 시절의 모니카는 순자의 말대로 '사랑'만으로 죽고 못살 것같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칸소까지 남편을 따라 온 모니카에게는 그 시절이 꿈결같다.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했던 남편이 다시 '새로운 꿈'을 찾아 터전을 옮긴 '아칸소 농장', 거기에 모니카가 꿈꾸는 삶은 없었다. 아니 이제 모니카에게는 삶을 꿈꾸는 게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병아리 똥구멍만 보며 평생을 살 수 없다며 남편은 황무지같은 아칸소 농장을 사들였다.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벌어들인 돈의 상당부분은 예측건대 '제이콥의 가족'을 위한 지원으로 씌여진 듯하다.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두 아이들, 심지어 작은 아이는 심장에 이상이 있어 늘 모니카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아이들을 번듯하게 교육시킬 수 있는 환경, 건강이 불안한 작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본적'인 모니카의 소망은 아이들에게 뭐라도 해내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남편의 '꿈' 앞에 무색해진다.
<미나리>는 종종 모니카의 얼굴을, 모니카의 시선을 클로즈업한다. 아칸소의 농장을 바라보며 '황망'해하던 그녀의 눈빛은 바퀴가 달린 트레일러 집으로, 무리수로 농장 일을 벌이는 남편으로 이어진다. 마치 모니카 자신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칸소에 던져진 '미나리 씨앗'과도 같다.
남편의 말처럼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미지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어 보자는 서로의 '의기투합'이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남편은 아이들 앞에 번듯한 아버지가 되겠다며 꿈을 찾아왔는데 정작 모니카는 그 남편이 들여다보기 싫다는 병아리 똥구멍을 보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밑빠진 독에 물붙기같은 일을 벌이는 남편을 믿을 수 없어 자신이 '가족'을 책임지겠다고 한다. 그걸 위해서 이제 기꺼이 아칸소를 떠날 결심까지 한다. 병아리 똥구멍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어 보인다.
물론 영화는 극적으로 '해체' 직전의 가족을 더 극적인 화재 사건을 통해 '봉합'한다. 위기의 순간 가족은 다시 하나가 되지만, 아마도 그 이후로도 모니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순자, 할머니의 자리 정작 제이콥이 10년을 벌어 자신의 친가 가족들을 도왔지만 사고무친 아칸소에 와서 제이콥의 가족들이 손을 내민 건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였다. 모니카가 외동딸이라지만 순자는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한국에서 살아왔었다. 그 여성이 자신을 도와달라는 딸의 한 마디에 이역만리 아칸소로 온다.
자신의 궁색한 모습을 보인다는 딸의 계면쩍은 한 마디에 순자는 쿨하게 바퀴 달린 집이 신기하다며 대꾸한다. 한국 냄새가 난다면서 자신을 밀어내는 손주 침대 옆 자리에서 궁색하게 잠을 청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딸이 직장을 나간 사이 '집'을 버텨낸다.
<미나리>는 철없는 손자 데이빗과 할머니 순자의 해프닝으로 채워간다. 그 속에 다 늙어서도 엄마의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순자'의 속내는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를 골탕먹이려 오줌을 먹이는 손주의 지독한 장난도 괜찮다는 쿨한 할머니가 있을 뿐이다.
정작 '순자'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은 그 무엇도 괜찮다던 그녀가 본의아닌 방화범이 되어버린 후이다. 집으로 달려가는 가족들과 반대의 방향으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는 순자의 표정이야말로 그녀가 아칸소까지 왔던 '이유'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고스톱이나 가르쳐주고 레슬링이나 탐닉하는 실없는 할머니의 속내가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무엇이었건 순자는 그 먼곳까지 와서라도 딸을 보살펴주고 싶었던 '엄마'였던 것이다. 자신의 몸 하나도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딸네 집에 보탬이 되고 싶었던 '엄마' 덕분에 또 다른 엄마 모니카는 버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 모니카를 버티게 해준 또 한 사람으로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딸인 앤이다. 할머니가 오기 전, 미국에서의 삶에서 할머니가 허투루인 영역에서, 그리고 그 마저도 노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모니카의 빈 자리를 이제 겨우 10살이나 됐을까 싶은 딸 앤이 채운다. 한참 또래 아이들과 뛰어놀 시절의 아이는 든든한 누이가 되어 병약한 동생을 지켜낸다.
영화는 제이콥 가족의 아칸소 정착기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불모지에 터전을 잡으려는 무모한 제이콥과 병약한 데이빗이라는 두 남자의 불안한 삶의 빈틈을 메꿔주는 세 여성의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순자가 가져온 미나리 씨앗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칸소'에 던져진다. 그들의 삶은 주체적인 대신, 주어진다. 아니 그들은 '가족'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는 '주체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체적'인 선택은 과정에 대한 그들의 선택적 여지를 '상실'케 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강인하게 버텨내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제이콥과 데이빗의 '생존'을 위한 '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들의 자기 희생적 기반 위에서 '가족'은 자란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두보 시의 문구이다. 70을 사는 게 드물다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 70이야 예전 '환갑' 정도의 '범사'가 되었다. 타이완의 '린' 여사(진숙방 분)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이 그녀의 고희연, 하지만 식당을 운영 중인 그녀는 막내 딸에게 식당을 일임했다지만 여전히 아침 일찍 수산 시장에 들러 오늘 쓸 재료들을 구입하는 등 분주하다.
2017년 만든 동명의 단편영화를 2020년 장편으로 만든 <고독의 맛>은 조셉 수 감독의 데뷔작이다. 2020년 대만 최고의 흥행작이자, 대만 대표적 영화제인 금마장 영화제에서 주인공 린 여사를 연기한 진숙방 배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고희연 날 죽은 남편 고희를 맞이한 린 여사, 고달펐던 그녀의 인생의 고비를 모두 잘 넘기고 오늘 고희연에서 모두의 축하만 받으면 될 일이다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맘대로 되는가, 하필 그녀의 고희연인 그날 남편이 죽었다.
속된 말로 참 안받쳐준다고 해야 할까? 평생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던 '존재'이더니 죽는 날까지 하필 그녀의 '고희'연이다 싶다.
첫 째 딸 완칭에게 린 여사는 말끝마다 '아빠를 닮았다'고 한다. 결혼을 했지만 이혼 서류를 내던진 채 무용가로써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그녀가 린 여사에게는 그대로 남편의 모습이다.
완칭처럼 남편도 새우 튀김 장사를 하는 그녀에게 찾아와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타이완에서는 더는 살 수 없다며. 병원을 하는 잘 사는 집안의 딸인 그녀와 결혼한 남편은 경찰 일도 그만두고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잘 돼지 않았다. 아내인 린은 노점에서 새우 튀김을 만들어 팔며 남편의 사업 자금을 댔고 아이들을 키웠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그녀의 '정성'은 아랑곳없이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결국 이혼 서류를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랬던 남편이 이제 린 여사가 고희가 되어서야 린 여사가 사는 타이완으로 와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물론 남편에게는 오랫동안 함께 한 여자 메이린이 있지만 남편이 남긴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았기에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린 여사가 '부인'이다.
린 여사 연배의 우리 주변 어르신들은 어떤가?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지나온 인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홧병(火病)이 국제적인 학술지에 공식적인 '심리'적 증후군으로 인정되었듯이 우리 어머니 세대에게는 살아오며 가슴에 맺힌 '사연'들이 너무도 많다. 고생에 고생을 하며 살아오신 인생, <고독의 맛>에 린 여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분들의 특징이 고생을 하신 만큼, 그 고생을 하게 만든 '대상'에 대한 원망 역시 깊다. 린 여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혼 서류를 던지다시피 딴 여자와 자신을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이 깊다. 그러기에 아버지를 닮은 듯 '부박'한 인생을 하는 듯 보이는 맏딸도 한심하다. 자신 몰래 아버지와 연락을 해오는 듯한 막내 딸 역시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세 딸을 여보란듯이 잘 키워내고, 식당도 번창시킨 린 여사이지만 그녀 미간의 주름만큼 그녀에게 현실은 어쩐지 마땅찮은 것들 투성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그녀가 사는 곳에 와서 죽었다. 살아서도 도움이 안되는 인간이 죽어서 까지 말썽이다.
결국 장례식의 절차는 공식적인 아내인 린 여사의 '주도'? '고집'?아래 진행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남편의 의향과 달리, 장례식장을 잡아서 치루려는 린 여사의 장례 일정은 여의치 않다.
영화는 린 여사의 고희연 날에서 부터 남편의 장례식까지의 며칠 동안 벌어진 해프닝을 다룬다. 몇 십 년 전에 바람이 나서 떠나버린 남편, 그런 남편 대신 가장으로 살아온 아내, 하지만 그녀는 고희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혼장을 제출하지 않았다. 바람난 남편을 찾아 아이 둘을 데리고 식칼을 들고 여관방을 두르렸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못마땅해 하면서도 자기 고집대로 장례 일정을 치루려고 한다. 이른바 '조강지처'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여전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아내'로서의 당당함이 정작 그녀가 키운 아이들과 부딪친다. 아빠가 떠날 당시 유치원생이던 막내 딸 자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듯 오랫동안 아버지와 연락을 해왔던 처지이다. 아버지가 함께 살던 '메이린'을 아줌마라고 부르며 따른다. 린 여사가 그녀가 믿는 '도교' 방식대로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데 대해 아버지가 '불교'를 믿었다며 반발한다.
늘 아빠를 닮았다며 그 '바람'같은 성정을 못마땅해 하는 딸은 장례식장을 지키지 않고 떠돈다. 그녀를 닮아 야무지게 공부를 해내 의사가 된 둘째 딸은 자기 자식 걱정이 더 앞선다. 남편 없이도 의연하게 자식들 키우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그 '자부'심이 정작 남편의 장례 앞에서 '무력'해진다.
가족, 그 동상이몽 속 '고독' <고독의 맛> 속 린 여사의 모습은 우리네 전통적인 어머니의 모습이다. 의지할 바 못되는 남편, 그럼에도 '가정'을 자신의 힘으로 버티고 견뎌온 '어머니', 하지만 그 '어머니'의 자부심이 정작 남편의 죽음 앞에서 '의문'이 제기되어진다.
영화 속 린 여사는 딸 들 앞에서 말한다. 평생을 너희를 키워왔는데 정작 너희는 죽은 아버지의 편이구나. 그들을 애써 키워온 어머니보다, 딸들이 마치 그녀들을 돌보지도 않았던 아버지와 더 '애착'을 가지는 것 같아 서운한 것이다.
그런데 린여사의 서운함은 누군가의 편의 문제가 아니다. 죽은 아버지 앞에서 세 딸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암이 재발한 큰 딸, 고생하는 어머니 앞에서 힘들다는 말 한 마디 못한 채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되었지만 만족하지 못한 채 딸의 유학에 매달리는 둘째 딸, 어머니의 식당을 물려받았다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영향력이 큰 식당에서 자리잡지 못한채, 아버지와, 그리고 아버지의 여인이 메이린과 감정적 유대를 느끼는 막내 딸은 각자 자기 앞의 삶이 버겁다. 장례식을 매개로 벌어지는 린 여사와 딸들의 갈등은 동상이몽의 가족, 그 자체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저 마다 삶의 과제에 몰두해 있는.
영화의 제목 '고독의 맛'은 고희연에서 린 여사가 부르려고 했던 노래 제목이다. 고희를 멋들어지게 맞이한 '축하연'의 노래로 선택되었지만 정작 린 여사는 그 노래를 본래의 가사로 부르지 않는다. 동시에 노래 제목인 '고독의 맛'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저마다 봉착한 삶의 과제로 인한 '인생의 쓴맛'을 의미하기도 한다. 124분의 런닝 타임 동안 영화는 70의 어머니에서 부터 세 딸들 저마다가 느끼는 '고독'이 페이소스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마도 이 영화가 대만에서 흥행을 한 이유는 70대의 어머니에서부터 젊은 딸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각 세대가 겪은, 혹은 겪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린 여사의 서운함은 딸들에게 향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남편'과 해결하지 못한, 아니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녀가 70 평생 해결하지 못한 삶의 숙제로 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녀 딸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빌어 서로에게 섭섭해하고 서운해 하지만, 그건 결국 각자 삶의 '과제'로 부터 비롯된 딜레마이다. '가족'은 공동체이지만 그 공동체는 개개인의 삶으로 채워진다. 영화는 가족 영화이지만 영화의 서사는 올곧이 '가족' 속 개인이 마주한 삶의 화두에 천착한다. 가족이지만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본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러기에 '고독의 맛'이다.
'가족'을 매개로 서로에게 빚어지던 갈등은 저마다 개인이 마주한 삶의 '과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려 할 때 실마리가 제공된다. 뒤늦게 찾아온 남편의 장례식에서 딸들에게 섭섭해하던 어머니는 오래도록 붙잡고 있던 허울뿐인 '조강지처'의 자리를 내려놓고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어머니가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녀를 서운하게 만들었던 가족을 딜레마로 묶였던 끈이 풀어진다. '고독의 맛'이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을 쓴 시인 로널드 홀은 자신의 불멸성이 장례식이 끝나고 6분 후면 소멸될 것이라며 위트넘치는 '예언'을 한다. 평생 '죽음'이 화두였다던 노시인은 여든이 넘도록 쓴 글을 통해 비록 그가 이젠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글을 통해 여전히 우리가 그를 기억하게 만들며 자신의 '예언'을 무산시켰다.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 인간은 안타깝게도 그 '유한'의 숙명과 싸우는 '운명'으로 자신과 싸워왔다. 영겁의 삶을 기원하며 무덤을 장식했고, 영적인 종교를 통해 영원과 소통할 수 있도록 기원했다. 영원을 소망할 수록 눈 앞에 다가서는 건 그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시한부의 삶이다. 그 시간이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에 대해 <더 디그>가 한 마디를 전한다.
발굴을 통해 만나게 된 이디스와 배질 2차 대전을 앞둔 1939년 영국의 서픽, 그곳에 이디스 프레티(캐리 멀리건 분)가 그의 아들 로버트(아치 반스 분)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온나라가 어수선한 상황, 그런데 이디스는 생뚱맞게도 자신의 사유지에 있는 둔덕을 '발굴'하기로 결심한다.
그 둔덕은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디스 부부가 사두었던 땅이다. 하지만 그런 고고학적 관심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치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이디스는 더 늦기 전에 '발굴'을 서두른다. 그리고 그 '발굴'을 위해 배질을 고용한다.
배질은 전문적인 고고학자가 아니다. 농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오랫동안 서픽에서 살아온 그는 서픽의 땅을 잘 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을 다지기 위해 다양한 방면의 지식을 홀로 연마해 온 사람이다. 이디스 부부가 사놓은 서픽의 둔덕을 발굴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적절한 사람, 눈밝은 이디스는 그런 배질을 알아보고 기꺼이 그를 고용한다.
배질은 전쟁을 앞둔 시기에 발굴이라는 주변의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디스 부인의 둔덕이 그간 영국의 고고학이 미처 알아내지 못한 앵글로 색슨의 기원을 밝혀줄 소중한 유산이라는 믿음을 피력한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밝히기 위해 변덕스런 영국의 날씨에 맞서 발굴을 주도해 나간다.
영화는 둔덕이 자리잡은 드넓은 영국의 서정적 풍광을 배경으로 이디스 부인의 마지막 소망과 그런 소망에 공명한 배질의 신념을 풀어낸다. 기약할 수 없는 '발굴'이라는 과제 앞에 맹목적으로 두 사람은 교감한다.
이디스와 배질의 교감은 신분은 서로 다르지만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를 '과제'에 대한 '공명'이다. 그 지역 의사는 소화가 안돼서라고 하지만 나날이 심해지는 가슴 통증은 결국 이디스에게 '시한부'의 삶을 선고한다. 그리고 지역향토학자로서 그 누구보다 서픽의 땅에 대해 잘 알지만 지역 박물관, 그리고 대영 박물관의 전문가들 앞에서는 무력하게 발굴의 권한을 빼앗길 수 밖에 없는 배질에게 있어 이디스 부인의 둔덕은 그가 추구해온 '발굴'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이다.
영화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던 이지스와 배질이라는 두 사람이 '발굴'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통해 교감하고 공명해가는 과정을 구구절절한 설명대신 랄프 파인즈의 폭넓은 연기와 그녀가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였음을 상기하기 힘들 정도의 캐리 멀리건의 깊이있는 연기의 앙상블로 여운있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잇는 건 그간 이디스 부인 말고는 정붙일 곳없던 사차원의 정신 세계를 가진 이디스 부인의 아들 로버트이다. 우주를 향한 부푼 꿈을 가진 로버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배질이었기에 로버트는 그에게 마음을 열고, 이제 로버트를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할 처지의 이디스 부인은 그런 배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전쟁 통에 쓸데없는 짓이라던 배질의 '발굴'은 대영박물관의 교수진을 발벗고 뛰쳐오게 만드는 성과를 낸다. 너른 풀밭 위에 솟아있던 둔덕 속에 감춰져 있던 거대한 배의 유적, 그가 장담한 대로 당시 영국에서는 흔했던 바이킹의 유물인 줄 알았던 '발굴'이 영국인의 조상인 앵글로 색슨족의 유장품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배질의 주장이 '사실'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발굴에서 배질이 배제되는 결과를 낳는다. 일개 '발굴'자인 배질은 전문적인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그저 일꾼에 불과한 처지가 되어 버린다. 자신이 '팽'당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배질은 발굴지를 떠나버리려 하지만, 그의 아내, 그리고 그를 찾아온 로버트, 이디스 부인을 통해 배질은 '명예' 대신 자신이 진짜 원하던 목적을 위해 '발굴 '현장의 일꾼으로 남기로 결심한다.
발굴의 '참의미' 배질의 주장처럼 앵글로 색슨의 활동 시기를 6세기까지 끌어올릴 유적은 '배'다. 아니 정확하게는 배의 흔적이 남은 흙의 자국이다. 나무로 만들어졌던 배, 바다에서 부터 둔덕까지 끌어올려져 앵글로 색슨 족의 무덤이 되었던 배는 이제 사라진 채 부장품만을 품은 채 흙에 그 '흔적'만을 남겼다. 발굴을 통해 부장품은 수확되고 배는, 아니 배의 흔적은 다시 흙으로 덮여져 둔덕으로 돌아간다.
배질의 열정, 그리고 그런 열정을 눈밝게 지지해준 이디스 부인의 신뢰, 그리고 유적을 둘러싼 여러 집단의 이해 관계들이 엇물리던 한바탕의 '이벤트'는 결국 흙으로 덮어져 사라진다. 영화의 초중반부 갈등의 '촛점'이 되던 유적이 영화의 후반부 다시 흙으로 덮여지는 과정은 '허무'하기 까지 하다. 마치 유한의 삶을 극복하려 애써보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사처럼.
그렇다면 '인생무상'이 결론일까? 박물관 관계자들이 돌아가고 다시 흙을 덮기 전, 배질은 로버트의 청에 따라 그곳에 이디스를 초청한다. 이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앵글로 색슨의 배는 그곳에 이디스 모자를 싣고 우주를 향한 로버트의 꿈을 담아 마지막 항해를 한다. 그 마지막 항해에서 아들 로버트를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엄마 이디스의 안타까움을 로버트는 우주를 향해하는 배를 통해 영원한 교감으로 안심시킨다. 지금 자신의 곁을 엄마가 떠나도 그 엄마는 우주을 향한 꿈을 꾸는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할 것임을 약속한다.
이디스의 청에 따라 발굴 현장에 남은 배질은 후에 이디스와 함께 발굴 현장의 부장품 전시에 이름을 남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인 것이다. 실화로서 <더 디그>의 보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영화로서 <더 디그>가 남기는 그 무엇은 흙으로 돌아가기 전 이디스와 로버트, 그리고 배질의 항해, 그 순간이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병구완하느라 남편의 청혼을 뒤늦게 받아들인 이디스는 결혼을 했지만 남편과 오래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아직 어린 로버트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점이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저 철부진 줄만 알았던 로버트는, 배질의 도움으로 그런 이디스의 마음을 유적인 배의 마지막 항해를 통해 다독인다. 어쩌면 이디스가 집요하게 배질을 독려하며 유적의 발굴에 애썼던 이유는 바로 그 '마지막 항해'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디스와 배질이 결국 대영박물관에 그들의 이름을 남긴 건 다행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성취한 건 박물관에 새겨진 그 이름이 아니라, 결국 흙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지만 뚜렷한 족적을 남긴 앵글로 색슨의 유적처럼 아들에게 영원한 빛으로 남겨질 엄마,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실현해낸 발굴자로서의 실천이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에서 로널드 홀은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친지들과 슬픔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죽은 후 버려질 자신의 집에 남겨진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의 어찌보면 하잘 것없는 '물건'들의 처지를 걱정한다. 유적은 결국 먼저 살고간 이들이 남긴 '흔적'이다. 부장품으로 다시 돌아온 앵글로 색슨의 유적이 담겼던 언덕은 이제 아들 로버트에게는 오래도록 엄마와의 마지막 항해의, 그리고 배질에게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발굴의 '유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기에 발굴 현장에서 피어난 페기와 로리의 로맨스 역시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전쟁터에 나간 로리와의 또 하나의 '유적'으로 기억될 일이다. 실화는 그렇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관계와 사랑, 그리고 삶으로 복원된다.
지난 2월 5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개봉한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는 강인한 어머니 장선장을 필두로 하여, 대뜸 삼촌이 되어버린 타이거 박, 언니라는 말이 싫지 않은 업동이, 그리고 '아버지' 태호(송중기 분)까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았지만 그 어떤 가족보다도 끈끈한, 모호하지만 확고한 가족 관계를 보여준다.
조성희 감독에게 있어 '아버지'는 불온하고 불완전한 세계이다. 마치 우리가 발을 딛고 현실처럼. 그 세계는 자크 라캉의 '상상계'와도 같다.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처럼, 세상의 일부분이 될 수록 자기 자신을 '소외'시킬 수 밖에 없는 '지양'되어야 할 과정이다.
지양되어야 할 아버지의 세상 <승리호>에서 아버지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선 태호와 설리반의 관계가 '부자' 관계의 양상을 띤다. 태호를 입양한 설리반, 하지만 그는 입양한 태호를 어린 나이에서부터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살상 무기'의 선봉에 세운다. <늑대 소년>이 순이의 세계에 맞서 늑대 소년을 만들고 버린 남성중심의 세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듯이, 그러한 늑대 소년의 세계관은 <승리호>에서 설리반의 세계로 이어진다.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분)은 환경 오염에 물든 지구의 '메시아'를 자처한다. 깨끗한 공기와 여유로운 생활이 보장된 지구와 달 사이의 우주 궤도에 만들어진 낙원을 통해 지구인들이 자신을 구세주라 여기도록 만든다. 하지만, 설리반이 만든 '아버지'의 세상은 화성 이주 계획이 '도로시'와 '지구'의 희생이 필요하듯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152세의 외모를 지탱하기 위한 또 다른 생명이 필요하듯이.
그 아버지의 세계에 '입양'된 태호는 작전 과정에서 발견한 순이를 '입양'한다. 설리반이 태호를 입양하여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과 달리, 태호는 순이의 '아버지'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태호는 설리반과 또 다른 면에서 '조건부적'이다. 순이로 인해 더는 '살상'을 할 수 없게 된 태호는 그의 사회적 지위를 지탱해 주었던 UTS기동대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아버지'로서의 삶도 방기한다.
어쩌면 때늦은 '순이'를 향한 그의 맹목적 애정은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자, 반성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앞에 나타난 또 다른 '순이', 도로시를 끝까지 거부하려 한다. 심지어 살아있는 도로시를, 꽃님이를 '딜'하여 죽은 순이에게 가닿으려 한다. 그의 철지난 부성은 맹목적이지만 실체가 없다. 결국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아버지로서의 허상'을 놓는 순간 태호는 진짜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태호에게 순이가 도로시, 아니 꽃님이로 보호해야 할 대상이 '바톤 터치' 되듯이, 꽃님이에게 '아버지'는 친아버지로부터 <승리호>로 바톤터치 된다. 친 아버지는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그의 과학적 도전으로 인해 꽃님이를 위험에 빠지게 만들고, 스스로를 '지양'시킨다. '과학 문명'을 등에 업은 '아버지'의 숙명이다.
태호가 보다 직접적으로 '아버지'라는 존재로 자리매김된 것과 달리, <승리호>에는 '삼촌'도 있다. '업동이'가 배우 유해진의 모션 캡춰 연기에 기반했음에도 '언니'라는 호칭과 함께 '이모'와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한 반면, 기관사 타이거 박(진선규 분)은 도로시의 '삼촌'으로 자처한다.
'삼촌'으로 타이거 박은 <승리호>의 가족 중 가장 '순수'하다. 살상 로봇일 지도 모를 도로시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보호자를 처음 자처한 사람도 타이거 박이다. 그리고 UTS 기동대의 공격으로 위협에 빠진 승리호를, 도로시를 자신을 던져 구한다.
이렇게 <승리호> 속 아버지들은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자신을 '지양'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그 '지양'의 과정은 왜곡된 아버지 설리반의 세상에 대한 '극복'이다. 태호가 집착했던, 하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순이'를 놓아야 꽃님이를 받아들일 수 있듯이, 타이거 박이 자신을 던져 꽃님이를 구하려 하듯이, 아버지는 이전의 자신을 지우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아버지가 되어갈 수 있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에게 주어진 '숙제'처럼.
2020년 한국 영화의 기대작이었던 <승리호>가 2월 5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개봉되었다. 전세계 넷플릭스 1위라는 흥행 호조와 함께 한국적 상상력, 기술력이 보여주는 한계로 인해 엇갈린 평가가 오가는 중이다.
영화는 근사한 코스튬의 헐리우드 초인들의 '지구 지킴이 자격증' 대신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살아야 하는 노동의 일꾼들, 즉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 대표로 지구를 구하는 멋진 순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를 위해서 엄청 빠른 속도로 우주를 날아다니는 우주 쓰레기로 가득찬 광활한 우주와 비행선으로 그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우주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이 우주 노동자들의 활약을 위한 지리적 기반으로 이분화된 세계를 등장시킨다. 환경 오염으로 방독면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황폐화된 지구와, 그런 지구에서 벗어나 위성 궤도에 우주 개발 기업 UTS에 의해 형성된, 지구인 중 5%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이다. 그리고 UTS의 수장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분)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오염된 지구를 떠나 화성에 새로운 기지를 개척하고자 한다.
영화를 보면 제작진이 내세운 '신선한 상상력과 기술력'이라는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그간 보았던 다수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기반한 영화와, 지구 지킴이들의 활약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내세운 기술력은 음향에서부터 CG에 이르기까지 이미 세력된 기술력의 영화에 눈이 높아진 관객들을 만족시키기에 꽤나 미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호>가 가진 미덕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환경 오염이 화두가 된 21세기에 숨조차 쉴 수 없는 지구와, 지구 쓰레기들이 질주하는 우주, 그곳을 종회무진 누비는 쓰레기 노동자 히어로라는 발상은 그 자체로 신선하며 통쾌하다.
또 하나의 가족 하지만 무엇보다 어설픈 기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승리호>라는 영화를 지탱시켜 나가고 있는 건 <늑대 소년> 이래 조성희 감독이 추구하고 있는 온기 넘치는 가족적 세계관이다.
가족적 세계관이라고 하지만, 감독이 지향하고 있는 가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혈연적 가족'이 아니다. 외려, 감독은 그러한 기존의 질서에 기반한 '가족'을 지양하고자 한다.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는 건 <늑대 소년>도 그렇고, <승리호>도 그렇고 문명화된 사회가 만들어 낸 '이종의 생물체'이다. 늑대 소년은 살인 병기를 만들어 내려는 생물학적 실험의 실패작이다. <승리호>에서 늑대 소년의 역할을 하는 건 대량 살상 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이다. 물론 늑대 소년이 살상무기만이 아니듯, '도로시'에 대한 사연은 영화 초반과 다르게 풀려나간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늑대 소년과 도로시는 모두 '인간의 과학 문명이 만들어 낸 '의도와 다른 결과물'이다.
그 의도와 다른 결과물이 '평범한 사람들'의 동네에 '뚝'하고 떨어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건강이 안좋아 시골로 요양온 순이네 집에 나타난 늑대 소년처럼, 돈되는 쓰레기라면 물불을 안가리고 덤비지만 결과는 늘 빚쟁이인 승리호에 도로시가 나타난 것이다.
경계도 해보고, 밀어내 보지만 결국 '평범한 사람들'은 인간적 온기로 이 '괴생물체'를 감싼다. <승리호>에서 도로시의 정체는 미디어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기에 쉽게 드러난다. 하지만 대량 살상 무기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한 도로시에게 승리호의 기관사 타이거 박(진선규 분), 로봇 업동이(류해진 분), 장선장(김태리 분), 그리고 태호(송중기 분)는 마음을 열게 된다.
도로시가 스며들게 된 승리호, 그들은 서로의 돈 한 푼에 육박전을 벌이는 등 사사건건 부대끼는 처지이지만 한때는 또 다른 살상 무기였던 로봇을 '업동이'로 할 만큼 가족적이다.
원형으로서의 모성, 장선장 승리호 가족의 형태는 우리가 아는 '가족'과 다르다. 그 중심에 가장 나이가 어린 장선장이 있다. 유일한 여성, 하지만 그녀는 승리호 리더쉽의 근원이자, 결정판이다. 설리반이 구축한 마치 오늘날의 신자본주의 세계와 같은 소수의 가진 자들이 누리는 UTS의 세계와 다수의 가지지 못한 자들의 노동에 기반한 세계를 뒷받침하는 부도덕한 과학 기술의 실체에 저항했던 그룹의 소속원이었던 그녀는 승리호의 리더로서 세 선원을 이끈다.
<늑대 소년> 속 모성적 존재 순이는 이제 장선장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아니 어쩌면 조성희 감독은 장선장을 통해 모성을, 가족을 질문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모성은 '핵가족'의 정착과 함께 가족 내에서 정서적 안전기지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모계적 영향력이 강했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사임당이 혼인을 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친정인 강릉에 머물러 친정 가족들과 지냈던 것처럼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도 모계 혈통의 가족 관계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성리학이 정착되고, 이후 자본주의적 사회 제도로 이어지면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위상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도 드러난 한 면에 대한 해석일 지도 모른다.
성리학적 사회 구조가 정착된 조선에서도 여성은 '안채'의 주인으로 집안 일에 대한 전권을 행사해왔었다. 사실 오늘날 '가부장적'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 사회의 가족들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엄마'의 권력이 이 꽤나 지배적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 역사적 '모성'의 위상을 되새겨본다면 <승리호> 속 장선장은 '패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캐릭터라 보여지기도 하지만, 그간 이면의 실세였던 '모성'을 전면에 내세운 캐릭터라 보는 게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늘 가정에서 가장 위기의 순간에 가장 의연하게 그 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우리의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우리 현대 문학의 거장이 된 이문열, 황석영, 이청준, 박완서 등의 작품 속 어머니들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식들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 그 이상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듯이 <승리호>의 장선장은 모성적 감성 대신 총을 든다. 설리반에 맞서 끝내 지키고 있던 치아의 폭탄처럼 그녀는 도로시와 자신의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다. 그리고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쓰레기 하치 위성 1호의 다른 동료들을 독려하여 '설리반'의 UTS에 맞선다.
<늑대소년>의 순이가 연약한 듯 의연했다면, <승리호>의 장선장은 말 그대로 '가장'이다. 한때 갱단 두목이었던 타이거 박도, 한때 살상무기였던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도, 최고의 킬러였던 조종사 태호도 장선장의 권위 아래 깃든다. 심지어 그녀에 매료된 피에르조차 기꺼이 그녀의 리더쉽에 '리스펙'한다. 가장으로서의 장선장의 리더쉽은 조성희 감독이 그토록 넘고 싶은 헐리웃 지구 지킴이들 중 발군의 여성 캐릭터 캡틴 마블을 넘어선다. 당대 두 최고 남녀 배우 송중기와 김태리가 출연했음에도 '남녀'로서의 캐미 대신 가장과 식구라는 대안적 가족 관계로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은 <승리호>, 그래서 싱거웠을 지 모르지만, 그래서 어디선가 본듯한 다른 설정들과 달리 신선했다.
'웬만하면 보지 말자.' 명절 덕담이랄까? 그래도 명절인데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지 하던 것이 웬만하면 보지 말자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부모님이 먼저 내려오지 말라고 하신단다. '아는 동생'은 벌써 햇수로만 2년 째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고 한다. 직계 가족이 이 정도니 그래도 명절 때나 되어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한 다리 건너 사촌, 친척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본의 아니게 '이산 가족'을 만들어 버린 '코로나 팬데믹', 안그래도 적조해져가는 가족 관계의 '소원함'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이렇게 만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가는 시절에도 서로가 가족으로서 '동질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지난 2월 4일 개봉한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를 본다면 지금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묶어주는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함께 할 수 없어도 '가족', 혹은 '고향'을 떠올리면 동시에 떠올려지는 건 '음식'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외려 어릴 때는 참 먹기 싫었던 음식이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이 글을 쓰는 기자가 어릴 적만 해도 고기를 넣은 미역국은 생일날이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렇지 않고 평상시 미역국은 그저 국간장을 푼 물에 미역 건더기를 넣은 멀건 국이었다. 그래서 고기를 넣은 미역국과 구분해서 '소미역국'이라 불렸었다. 어렸을 때는 그 물같은 국이 참 싫었는데 이제는 가끔 그립다. 그런 식이다. 멸치 다싯물에 밀가루만 뚝뚝 떼어넣은 수제비라던가. 쇠젓가락에 끼워 밥 한 공기를 비워야 했던 땅 속에서 꺼낸 겨울철 알타리 무 김치라던가 지나간 시절은 그렇게 그 시절에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들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식구(食口)'는 말 그대로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게 '밥상'을 함께 받던 '식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이상 한 집에 살지도, 밥상을 함께 받지도 않는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코로나는 명절 때만이라도 '식구'가 되었던 연례 행사마저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식구'가 더는 '식구'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이제 더는 '밥상'을 함께 하지 못해도 함께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여전히 '식구'라고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말한다.
사라와 함께 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더는 '밥상'을 함께 할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는 '이별'로 말문을 연다. 바로 영화 제목 속 그 '사라'와의 이별이다. 영국 런던의 노팅힐 거리 그곳을 향해 사라의 자전거는 질주한다. 친구 이사벨라(셸리 콘 분)와 함께 그 거리의 한 상점에서 두 사람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디저트 베이커리 까페'를 열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라는 꿈에 그리던 자신의 가게에 도착하지 못한다. 주인을 잃은 가게, 사라가 셰프였기에 이사벨라는 혼자서 가게를 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채 집세만 날리던 가게를 더는 유지할 수 없었던 이사벨라는 다른 주인을 알아보려고 한다. 그때 엄마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해 자신이 다니던 무용학교조차 포기해버린 딸 클라리사(새넌 타벳 분)가 나선다. 하지만 다시 가게를 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자금, 클라리사는 오랫동안 엄마랑 '의절'하다시피 했던 외할머니 미미(셀리아 임리 분)를 찾는다. 한때는 공중곡예사로 전세계 공연을 다니던 미미, 자신을 플라잉 요가로 이끄는 손녀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수표책을 연다. 그리고 사라, 이사벨라와 함께 요리 학교를 다녔던 매튜(루퍼트 펜리 존스 분)가 합류한다.
그렇게 '사라'는 세상에 없지만 사라를 사랑하던 이들이 사라를 기억하며 한 자리에 모였다. 사라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사라를 대신하여, 사라가 하고 싶던 곳에서, 사라를 사랑하던 이들이 시작한다. 그래서 가게 이름이 '러브 사라'이다. 저마다 사라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 미미에게 '러브 사라'는 각별한 의미다. 죽기 전 딸이 찾아와 디저트 베이커리 까페를 연다며 도움을 청했었다. 하지만 그때 사라의 엄마 미미는 거절했었다. 자신을 찾아온 클라리사에게 대뜸 '돈 때문이냐?'고 선을 그은 것처럼 사라에게도 그랬었다.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는 엄마 미미에게 사라는 돈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 서운함을 토로했었다.
그리고 엄마와 딸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코로나라던가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서로에 대한 서운함으로 두 사람은 멀어졌다. 그리고 뒤늦게 엄마인 미미가 딸 사라에게 엽서를 썼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라며, 하지만 그 엽서는 딸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딸이 자신의 가게에 도착하지 못한 그 날 쓴 엽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 미미는 보내지 못한 엽서 대신, 그때 들어주지 못한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녀의 수표 책은 얇아져 가지만 대신 딸이 그리던 까페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영업'은 별개였나 보다. 가까운 거리에 이미 까페가 여러 개인 거리에 새로 문을 연 까페는 첫 날부터 파리를 날렸다. 매튜의 매혹적인 디저트들만으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했다. 새로 개업했다며 인심쓰듯 나누어준 마카롱을 낯설어했다. 답답한 마음에 거리를 나선 할머니 미미의 눈에 노팅힐 거리를 지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민자들이 많은 영국, 그 중에서도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인 거리, 그곳에 자리잡은 '러브 사라', 이 까페가 잘 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일까?
고향이 된 까페 할머니 미미가 딸 사라가 가장 좋아하던 책,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떠올렸다. '새로운 것을 원하거든 여행을 하라',는 책 속의 명대사처럼 사라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그런 사라처럼 '러브 사라'는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상징과도 같은 열기구를 까페 앞에 단다. 그리고 80일 간의 세계 여행 대신, 세계 각국의 디저트를 만들어 낸다.
딸기 프레지에는 몰라도 , '크링글'을 기억하는 라트비아 출신의 택배 기사를 위한 '크링글'처럼 이민온 사람들이 원하는 고향의 디저트를 만들어 주기로 한다. 까페에 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고향 디저트를 만들어 준다면 꼭 다시 들러 그것을 먹겠다고 하고 그렇게 한다. 호주식 케이크, '레밍턴', 리스본에서 온 모자를 위한 '카넬스네일. 터키의 바클라바, 아랍의 전통 케이크 바스부사, 이스라엘의 오렌지 세몰리나 케이크 , 그리고 일본에서 온 여성이 부탁한 말차 밀 크레이크까지 까페의 디저트에 세계가 모였다. 까페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고향'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이렇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방식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고향을 기억하는 '디저트'로 잇는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시절에 이 영화는 함께 할 수 없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전해준다. 지금 여기서 함께 나눌 수는 없지만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함께 할 수 없다고 해서 함께 나누었던 시간,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우리가 그 시간과 마음을 어떻게 소중하게 이어가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다. 다가올 명절, 같은 곳에서 한데 어울려 밥상을 받을 수는 없지만 각자의 공간에서 이 영화 한 편을 통해 서로의 소중함을 더욱 진하게 나눌 수 있다면, 함께 나누었던 음식을 서로를 떠올리며 먹는다면 함께 할 수 없어도 함께 하는 따뜻한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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