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살며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구두닦이, 껌팔이, 아이스크림 장사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16살이 되던 1964년 평화시장 피복 제조업체에 시다가 되었다. 14시간 노동에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한 일당 50원, 햇빛보다 백열등이 익숙하던 십대의 청년은 자기 동생 또래 여공이 먼지가 가득한 공간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열악한 현실에 분노했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를 외쳤다.
한 사람의 삶을 이끄는 건 무엇일까? 그의 사회적 존재? 그가 만나게 된 사람? 평화시장 시다가 된 노동자 청년 전태일은 자신과 자신보다 어린 여공들의 삶을 목도하고 현실에 자신을 던졌다. 그의 무기가 된 건 ‘근로 기준법’이었다. 하지만 영화 <마틴 에덴> 속 선박 노동자 마틴에게는 다른 삶의 ‘기회’가 온다.
노동자 마틴 사랑을 만나다
배에서 일하는 노동자 마틴(루카 마리넬리 분), 그는 일을 하는 틈틈이 책을 놓지 않는 청년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부두에서 부랑배에게 구타를 당하던 엘레나(제시카 크레시 분)의 동생을 구해주며 상류층인 엘레나의 집에 초대된다. 피아노를 우아하게 연주하며, 불어를 안다는 마틴의 엉성한 발음을 수정해 주고, 그가 관심을 보인 보들레르의 시집을 주는 엘레나에게 마틴은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마틴 에덴>은 실제 노동자 출신이었던 작가 잭 런던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주먹 패거리의 두목이자 일자무식이었던 뱃사람 마틴이 상류층 여인 루스를 만나 그녀의 인도 아래 문학과 학문의 세계로 인도되어 작가가 되고자 한다는 이야기는 스웨덴 노동자 모르덴 에딘을 모델로 했지만 잭 런던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0대 시절부터 통조림 공장 노동자를 시작으로 여러 하층의 직업을 전전했던 잭 런던은 그가 살아왔던 삶의 모순적 모습을 <마틴 에덴>에 담아냈다.
영화 <마틴 에덴>에서 마틴에게 엘레나를 사랑하는 ‘방식’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틴은 닥치는 대로 읽었고 쓰기 시작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마틴은 그녀의 우아한 불어, 그녀가 치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 그리고 그녀가 풍기는 지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녀처럼 ‘지적’인 인물이 되면 그녀와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가 헌책방에서 찾은 책들을 닥치고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특히, 그가 헌책방에서 찾은 스펜서의 책, 거기에 담겨있는 ‘사회 진화론’이 부두 노동자로, 주물 공장 노동자로 전전하며 살아온 마틴의 의식을 각성시키며 그로 하여금 노동자로서의 의식이 첨예한 글을 쓰도록 만든다.
사랑을 위해 ‘지적인 인물’이 되고 싶었지만, 그 ‘지식’이 그로 하여금 계급적 각성을 일깨우게 된 처지, 그래서 마틴은 자신이 깨닫게 된 것을 그의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글’이 세상에 발탁되면 그 ‘돈’으로 엘레나와 사랑을 이루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의 글은 엘레나를 그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엘레나와 루스 사이
그런 그에게 엘레나가 바라는 ‘지적인’ 영역은 달랐다. 마틴에게 보들레르의 시집을 빌려주며 그의 지적 각성에 문을 열어 주었지만 그저 평범한 상류층 여성이었던 엘레나는 마틴이 아버지의 지인처럼 ‘회계사’가 되어 자신을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길 원했다. 그래서 마틴이 자신의 생각에 확고해지면 질수록 엘레나는 마틴과의 사이에서 벽을 느끼게 되어간다.
엘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와의 계급적 장벽에 한계를 느끼던 마틴, 그런 와중에 엘레나의 집에서 시인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루스 브리센덴(카를로 세키 분)와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피에트로 마르셀로 감독이 원작의 배경이었던 뉴욕 대신 배경으로 삼은 이십세기 중반 이탈리아 사회 운동, 노동 운동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엘레나 집에서 그에게 조롱과 냉소를 퍼붓는 이들에게 보들레르처럼 경멸과 냉소를 당당하게 퍼부을 수 있는 마틴, 하지만 오랫동안 헌책방에서 찾은 책을 통해 홀로 자신의 생각을 굳혀온 마틴은 스펜서 등을 통해 사회적 모순에 첨예한 의식은 지녔지만, 동시에 그에게 개안을 하게 해준 ‘사상’의 한계 역시 고스란히 받아들여 ‘개인주의’라는 한계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주장하며 외려 그들의 ‘조합 운동’을 논박할 정도로.
상류층의 여성 엘레나와 사회주의자 시인 루스, 두 사람은 책을 좋아하던 청년 마틴에게 세상을 향한 두 방향의 길을 열어 주었다. 마틴은 기꺼이 자신은 엘레나를 사랑하니 엘레나가 열어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틴이 선택한 길은 엘레나가 서있는 ‘부르조아’적인 삶도 아니고, 그렇다고 루스가 그에게 펼쳐보인 계급적 각성을 실천으로 옮긴 노동자의 길도 아니었다. 자의식으로 그는 저들에게 복종하는 이들을 ‘개’라 일갈하는 투쟁적인 정신을 가졌지만, 그 정신은 그의 글 속에서만 분기탱천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랑이 아닌 ‘속물적 계급’의 얼굴을 드러내 보인 엘레나를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루스가 열어 보인 계급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던 마틴, 그런데 운명은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의 수단으로 여겼던 글이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시점에 그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사랑했던 이들이 열어 준 두 길 사이에서 이미 마음의 방향을 잃은 마틴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세상의 찬사에 더는 환호할 수 없다.
애초에 그가 글을 써 ‘명성’과 ‘부’를 얻으려는 이유가 ‘사랑’이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다시 그에게 찾아왔지만 마틴은 안다. 처음 책을 좋아하던 청년에게 보들레르를 건네던, 그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던 그 ‘지적’인 여인은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던 청년은 유명 시인이 되었지만 자신 앞에 펼쳐졌던 두 갈래 길 사이에 자신의 길을 만들 의지도, 열의도 잃는다. 아니 세상에는 애초에 마틴이 가고자 했던 길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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