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vn의 드라마 <나빌레라>가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에 눈을 뜨고 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주인공 심덕출(박인환 분)씨의 모습이 세대불문 삶과 행복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더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 만이 아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듯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삶의 기회와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이듦은 '제한',이나 '한계', 혹은 '후퇴'로 받아들여지기가 십상이다. 그러기에 70이 넘은 나이에 발레를 해보겠다는 <나빌레라>의 심덕출 씨의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난 2016년 개봉한 후시하라 켄시 감독의 <인생 후루츠>는 어떨까? 발레에 도전하는 심덕출 씨와는 또 다른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두 부부가 우리에게 '노년'을 살아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실패한 젊은 건축가의 선택
젊은 건축가가 있었다. 일본 주택공단의 에이스였던 쓰바타 슈이치가 그 주인공이다.  해발 0m의 마을이 태풍으로 인해 수몰되자 정부에서는 고지대에 뉴타운을 만들고자 했다. 뉴타운 건축 책임을 맡게된 슈이치는 산이었던 그곳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숲이 산으로 들어올 수 있는 도시를 계획했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밀한 아파트들로 가득채워진 뉴타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슈이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300평의 땅을 샀다. 그로부터 50여 년, 과일 50종, 채소 70종을 키우며 키우며 그곳을 '자연'으로 꾸렸다. 그리고 뉴타운 단지 뒤의 민둥산을 도토리 나무로 무성하게 가꿨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작고한 일본의 배우 키키 키린이 나레이션한 영화는 할머니의 흙 예찬론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농작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흙이 좋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지론은 아파트 단지 속 뉴타운에서 숲을 만들기 위해 지난 50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건축론에 닿는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영화에 소개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정의다. 할아버지에게 '보석상자'로서의 집은 '자연'친화적인 존재였다. 그의 꿈은 '개발'에 밀려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땅을 샀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천천히', 50년 동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도, 내 생각이 이러니 세상이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접어둔 채 스스로 자신이 그러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90세가 되었다. 

영화 속 할아버지는 말한다. 건축가들은 집을 지어놓고 막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살지도 않을 집, 이라는 할아버지의 질타 속에 '문명'이란 이름으로 지구를 오염시킨 숱한 '개발'의 잔해들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할아버지 슈이치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스스로 어떤 집을 짓고 살아야 하는 가를, 어떤 공간에서 삶을 누려야 하는 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보여주었다. 그 결과물이 <인생 후르츠> 속에 등장하는 수려한 나무들로 둘러싸여있고, 일년 내내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확물들을 공급해주는 농장을 품은, 사시사철 빛이 들어오는 슈이치 부부의 집이다. 

건축가 슈이치 씨가 평생 자신이 꿈꿔온 건축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자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 츠바타 히데코가 있어서이다. 월급이 4만엔이던 시절에 70만엔짜리 요트를 사겠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다던 아내 히데코이다. 영화가 시작할 때 그녀의 나이 87세, 그 세대의 여성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남편'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히데코의 삶이 그저 전근대적 여성의 숙명적 삶이라고만 여겨지지 않는다. 매 끼니 밥을 먹는 남편을 위해 <인생 후루츠>가 2018년 서울 국제 음식 영화제에 초빙을 받을 정도로 죽순 덮밥에서 부터 생딸기 케잌, 푸딩에 이르기까지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건 '의무'의 경지를 넘어선다. 남편의 뜻을 따르는 거, 남편이 하고자 하는 바를 평생 따라왔다는 그녀는 그런 자신의 '의지'가 결국은 돌고돌아 좋은 일로 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 시대에 '행복'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룬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살아보면 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시간보다 이루지 못해 안달하게 만드는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을. 삶이 주는 케잌은 달콤하지만, 그 케잌은 생각만큼 넉넉하게 여유롭게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거나 때론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오래 살수록 인생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인생은 후루츠>는 두 노부부가를 통해 현명하게 나이들어가는 삶의 방식, 아니 나이를 차치하고 지혜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남편인 슈이치는 건축가로서 자신의 뜻을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관철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좌절'하여 뜻을 꺾는 대신, 그 이후 50년에 걸쳐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뜻을 가지고 자신의 집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고자 하였다. 자신과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면 도시 전체가 다시 '자연'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 히데코 역시 자신의 뜻보다는 늘 자신의 삶에 '가족'들부터 끌어들이는 남편으로 인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남편의 주도적인 삶의 방식에서 그녀는 가족에게 좋은 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일로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지만 자신은 단촐한 토스트 한 조작으로 한 끼를 대신하는 '융통성'도 놓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해온 부부, 하지만 장어 덮밥을 먹고 잠든 남편 슈이치는 다음 날 눈을 뜨지 않았다. 아내는 담담하게 남편을 보내려고 한다. 대신 오래도록 남편의 영정 앞에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마련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90살이던 남편처럼 90살이 된 아내, 지난 65년 남편과 함께 했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늘 남편의 뜻을 따라 살던 아내에게 지금의 삶은 때로는 덧없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다시 의연하게 살아간다. 슈이치는 갔지만 그의 생각은 자연친화적인 병원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살아왔듯 삶은 그런 것이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 그건 영화 속에 등장한 대사처럼 '꾸준히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서 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by meditator 2021. 4. 8. 2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