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중국 베이징 시 중심부에 자리한 천안문 광장, 이곳에서 학생들은 '민주화의 여신상'을 앞세우며 5월부터 '단식 투쟁' 등을 벌여왔다. '학생 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대화를 시작하라'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범법행위로 규정하며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최류탄과 실탄을 발포하며 강제 진압하였다. 1989년 6월 4일에 벌어진 천안문 (텐안먼) 사태이다. 정치적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텐안먼 사태'를 당시 16살의 꿈많은 소녀였던 론자 유 감독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왜 당시 젊은이들은 광장으로 몰려갔을까? 도대체 어떤 시대의 분위기가 그들을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차도록 만들었을까? 

 

 

1986년 상해 출신의 소군(여명 분)과 이요(장만옥 분)는 꿈을 이루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다. 그 후로 10년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 한 두 연인의 러브 스토리 <첨밀밀>에는 '당신을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라는 로맨틱한 대사의 등려군의 노래 '월량대표아적심'이 흐른다. 등려군의 노래가 전대륙에 인기를 끌던 시절이 중국 대륙의 1980년대 중반이었다.  빈곤과 암흑, 그리고 단절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롭게 들어선 정부는 경제 개혁을 앞세웠다. 적극적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도입과 함께, 문화 역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발빠르게 흡수되었다. 다큐는 텐안먼 사태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문화적 흐름을 주도했던 젊은 예술가들을 주목한다. 

젊은이들의 열정과 저항 
우선 그 첫 번째 인물은 자신의 붉은 사원증을 치켜든 조각 등 '반항과 유머'로 시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조각가 왕커핑이다. 그는 당시를 회고한다. '혁명가'만 울려퍼지던 시절에 '등려군'의 노래는 빛과도 같았다고. 그 빛을 따라 모인 젊은이들은 카세트를 틀고, 거기서 흘려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댄스 금지, 파티 금지', 당연히 경찰이 출동, 카세트를 뺏고, 안 뺏기려는 해프닝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문화적 갈증에 목말라 했지만 토양은 척박했다. 이렇다할 갤러리조차 없었다. 그나마 1년에 한 번 정도 가능한 전시는 여러 차례 검열을 받아야 가능했다. 결국 뜻이 맞는 몇몇이 모여 작품을 공유하는 정도였다. 왕커핑과 친구들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 고무되어 '도전적인 결정'을 내렸다. 중국 미술관 주변 울타리에 자신들의 작품을 '무단'으로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함께 할 그룹의 명칭도 정했다. 작고 멀리 있지만 자기만의 빛을 내는 '스타', 이들은 1979년 9월 27일부터 전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시 셋째 날 경찰이 막아섰다. 압수된 작품은 찾을 길이 없었다. 10월 1일 '정치 민주, 예술 자유', 팻말을 든 젊은이들로 인산인해가 되었다. 결국 중국 전시관에 '스타'의 전시가 허용되었다. 이번에는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 대신 자유로움을 추구했고, '예술'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아 표현 수단으로 삼았다.

유일한 여성 작가였던 리솽도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의 예술을 정부는 '정신 오염'이라 여겼다. 모든 개인주의적 표현은 '단속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인 애인을 둔 리솽은 이른바 '풍기 문란'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스타'를 '반사회적 조직'으로 만들려는 고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친구들을 떠올린 리솽은 '아는 바 없습니다'며 그 시간을 견뎠다. 남친과 헤어지라는 종용을 거부하고 온전히 3년 형을 살았다. 

학교에서는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방과 후에는 코카콜라를 마셨다 .
           - 론자 유


'애국'대신, '나'와 '예술'의 자유
카세트를 틀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청춘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록'이 등장했다. 이제는 중국 록의 대부라 칭해지는 '추이젠(최건)'이 그 대표적인 가수이다. '나는 내 꿈과 자유를 그대와 나누고 싶다.'는 그는 '애국주의 '대신, '나'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이런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흐름에 발맞추어 '아방가르드'한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이제는 '티벳 유랑족'이 된 원프린의 '만리장성 대축제'가 그것이다. 직업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첫 세대였던 그는 직장이나, 호구제, 월급 등에 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일을 벌였다. 1988년 한 다큐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권위주의 체제의 상징이라 여겨지던 만리장성에서  '우드스톡이 따로없네'란 평을 얻은 이벤트를 벌였다. 

행위 예술이든 공연이든 그 누구라도 와서 마음껏 즐기라는 초대장에 젊은 예술가들이 응했다. 만리장성에 하얀 천을 드리우는 전위 예술, 롹 공연 등 그동안 억눌렸던 자유와 표현 의지가 한껏 분출되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고 발전을 해갈수록 젊은인들은 생각의 자유를 갈망했고, 변화가 도래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들의 전국적인 전시회 시도에 '강제 취소'로 대응한 중국 정부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 가운데 텐안먼 사태의 전초전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젊은이들의 열기를 마냥 억누를 수 없었던 정부는 1989년 '예술 작품으로 정부에 반기를 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중국 현대 예술전을 중국 예술관에서 허용했다. 이에 186명의 전위 예술가들이 '유턴 금지'라는 상징을 내세우며 퍼포먼스를 벌였고 그 중에는 샤오루가 있었다. 

졸업생 중에 유일한 설치 미술가였던 차오루는 연결되지 않은 전화 한 통으로 절망한 두 남녀를 '전화 부스'에 갇힌 듯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쉬웠다. 샤오루의 작품이 중국 현대 미술전에 전시되었고 설 전 날 전시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시 작품에 두 발의 총을 쏘는 도발적 퍼포먼스를 벌였다. 경찰차가 도착하고 전시회는 폐쇄되었다. 

 

 

'샤오루가 쏜 2발의 총성이 혁명의 시작이었다', 아방가르드 기획자 원프린은 정의한다. 2달 뒤 1989년 봄 중앙 미술학원 학생들은 거대한 '민주 여신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여신상을 앞세우고 학생들은 텐안먼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조사라 씨는 <재외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의 문화 정체성과 디아스포라 이미지>에서 '중국 현대미술을 이끌고 있는 대부분 작가들은 1950년대 태어났으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겪었으며 1980년대 중국의 문호개방 정책과 맞물려 ‘85 신조운동’과 1989년 차이나/아방가르드 전 등 중국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 흐름 에 참여한 이력을 지녔다.'고 말한다. 왕커핑과 리솽 등도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 1990년대 부터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중국 현대 예술은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잉태된 것이다. 론자 유 감독은 <그날이 오면>을 통해 저항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중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소환한다. 








 

 

by meditator 2022. 8. 26.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