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에이드리언이란 학생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내는 확신'이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학생 토니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한다. 그것이 어느 것이 되든 결국 역사란 그것을 해석하는 후자들의 몫이라는 의미에서 두 정의는 공통점을 가진다.  


매주 토, 일요일 9시 40분에 방영되는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정도전이 그리는 새로운 국가에 대한 이상의 출발점을 부패한 고려 사회로 짚었다.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 의지를 펴보지 못한 신진사대부 정도전은, 궤도를 틀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대업을 꿈꾸고, 그것을 함께 할 사람으로 이성계를 고른다. 하지만, 그런 정도전의 대업에의 권유에 대해 이성계는 냉정하다. 자신이 고려를 무너뜨릴만한 힘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은 욕심 이상의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못을 박는다. 그래서 드라마 <정도전>은 당신에게 대업은 하늘이 내린 일이라고 강변하는 정도전과 그에 대해 부정하지만, 결국 회군을 하고, 최영을 제거하고, 왕을 패하며 고려의 멸망에 한 발 한 발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이성계의 고뇌를 담는다. 그의 고뇌가 깊을 수록, 그가 세우는 국가가, 그저 그 자신과 정도전 등 소수의 집단에 의한 쿠데타가 아니라, 말 그대로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드라마는 설득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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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성계가 어땠는지, 정도전이 어땠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조선을 건국한 승자들인 그들이 남긴 기록을 가지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부정확한 확신일 수도, 그들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하며 조선의 건국이란 사건이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즉, e.h.카가 말하듯, 역사는 과거와 그 과거를 해석하는 자들의 대화라고 했을 때, 방점은 과거를 해석하는 자들에게 찍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에 와서 다시 해석되는 이성계의 촛점은 무엇일까?

배우 유동근씨가 이성계가 아닌, 그의 아들 이방원 역을 맡았던, 그 당시 화제가 되었던 <용의 눈물>의 경우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자의 난을 거쳐 가는 과정에서 보여진 '왕권 확립'의 과정을 다룬다. 즉 정통성도 있지만, 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지도자가 만들어 지는 과정에 촛점을 맞추었다. 왕자의 난을 거쳐 아버지를 배신하고 왕이 되는 이방원과, 그에 의해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양녕대군의 모습이 화제를 되었던 이 작품에서 지도자는 한 나라를 카리스마있게 이끌어 가는 강력한 리더쉽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정도전>에서 이성계는 어떤가? 그는 계속 고뇌한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정말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닌가? 혹시 그저 자신의 욕심이 아닌가? 회군이 정말 고려를 위한 일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하며 최영과 맞서는 과정이 정말 옳은 길인가? 정도전은 그에게 대업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하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이성계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할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협잡과 거짓을 밥먹듯이 했던 이인임과 권력의 자리에 앉자 강직했던 무장의 모습을 잃은 채 명예와 명분에 빠져버린 최영과 더욱 대비된다. 드라마 <정도전>은  무장이지만, 마치 셰익스피어의 햄릿못지 않게 고민하는 인간형인 이성계를 통해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모습을 말한다. 

<정도전>의 이성계에 못지 않게 또 한 사람의 고뇌하는 대통령이 있다. 바로 <쓰리데이즈>의 이동휘 대통령이다. 그는 양진리 사건의 주동자로 특검에 기소되었지만, 사실 그는 양진리 사건이 그렇게 집단 학살극이 될 줄 몰랐던 재벌과 다국적 기업의 개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쉽게 내뱉듯이,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라고 발뺌하면 될 것을, 그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미 대통령인데도, 자신이 불가피하게 그 일원이 되었던 지난 역사적 과오를 밝히고자, 책임지고자 나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법을 수호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원칙을 지키고자 애쓴다.

이동휘가 그를 만류하는 비서실장에게 '그게 옳은 일이잖아요' 라고 반문하듯, <쓰리데이즈>의 이동휘 대통령과, <정도전>의 이성계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권력의 유지가 아니라,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원칙적인 길을 가고자 하는 담백한 목표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담백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이동휘 대통령은 그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고, 대통령 자신은 탄핵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성계는 피하고자 하지만, 그가 존경했던 최영도, 그가 받들겠다고 했던 왕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아이러니하게 자신의 원칙을 위해 이동휘는, 대통령으로서의 법과 수호를 지키는 대신에 다시 김도진과 팔콘의 개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되고, 이성계는 역모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정통 사극을 표방한 <정도전>은 당연히 고려말 조선 건국을 다룬 역사 정치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고, 이미 조선이라는 승리의 결과물이 분명한 사건이기에, 그 승자에 감정 이입하며 이성계의 원칙이 승리하는 과정을 흔쾌히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쓰리데이즈>는 불편해 한다. 정작 자신이 몸담고 사는 세상의 정치 이야기는 껄쩍지근하다고 한다. 자신이 백기들고 사는 현실을 소환해내는 드라마가 불편하다고 한다. 역사는 즐길 수 있지만, 현실은 삶의 무게감으로 다가오니, 힘들다고 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현실의 정치는 버겁다고 한다.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도, 그리고 불편한 현실이라도, <정도전>과 <쓰리데이즈>를 통해 그려지는 고뇌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바로 이 시대 우리들이 가슴 속에 품고 그리워하는 그것들이다. 21세기 드라마의 햄릿형 지도자들은, 바로 자신의 권력 유지나, 이권이 아니라, 굼민을 위한 지도자가 가는 길을 고민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마음 속 소망이다. 결국 그것이 몇 백년전의 과거의 사건이듯, 혹은 현실이든, 결국 모든 역사적 결정의 끝에는 지도자의 선택이 있다. 양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뇌하는 지도자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을 수록, 드라마는 푸르게 빛난다. 
그래서, 그저 몇 프로의 시청률로 퉁칠 수 없다. 그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지켜봐주고, 함께 그 고민을 나눠주길 바랄 뿐이다. 


by meditator 2014. 4. 7. 16:22